164화. 짙은 아쉬움
시간이 부지불식간에 흘러 다시 춘절이 지나 봄이 되자, 다들 무거운 솜옷을 벗어 버리고 얇은 옷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고청운은 이때 이미 22살이었고, 소석은 만 두 돌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꼬맹이는 발육 상태가 아주 좋아, 온종일 후원을 마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등 기운이 매우 충만했다. 목소리가 커서 자주 시끄럽게 굴기도 하였다.
꼬맹이가 자주 몰래 건너와 소란을 피우는 통에, 후원의 오른쪽에 위치한 사랑채의 서재에서 지낼 수 없게 되자, 고청운은 어쩔 수 없이 앞쪽 정원에 위치한 서재로 이사를 하였다.
이날은 이미 4월 중순 즈음으로 기온이 점차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고청운은 육택의 혼례 피로연에 초대되었다. 후처와 올리는 혼례였지만 매우 성대해서 후부의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축하객이 끊이지 않아 매우 시끌벅적했다.
새색시는 바로 담자례의 누이, 담 씨였다.
육택이 부모상을 마치자, 황제는 곧바로 그의 관직을 올려 주었고, 그는 3품 정원(定遠)장군에서 정3품인 소용(昭勇)장군이 되었다. 고청운이 생각을 해 보니, 이 직책은 변경의 수장 및 지방 군정 당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으로, 현대로 따지자면 어느 군구 사령관과 맞먹는 위치였다. 물론 같은 소용장군이라 할지라도 실권이 있는지 없는지는 살펴봐야 하는 문제였다.
아직 30살도 채 되지 않아 벌써 이런 지위에 도달하다니, 어쩐지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러 오는 이유가 있었다. 문인과 무관의 승진 속도는 비교가 되지 않았는데, 무관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승진 속도가 빨랐다.
이제 육택은 의심의 여지없이 실권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례를 마치고 다른 월성(越省)으로 넘어가야 했는데, 바로 고청운의 고향인 월양군에 부임하러 가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이 소식을 들은 고청운은 평소 육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늘 아들과 함께 부임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내비쳐 왔기에, 이제 곧 육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으니, 큰 이변이 있지 않는 한 상황이 바뀔 수 있는 여지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육택에게 경사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고청운의 마음에는 여전히 짙은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이날 고청운은 다시 담자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는 몸이 더 말라 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고청운은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소같이 인사를 나누면서도, 담자례가 여전히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것을 포착했다.
고청운은 상대방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다.
담자례가 사석에서 실언을 한 후, 그의 언행이 담 시랑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담 시랑은 그의 종숙으로서 직접 그를 불러들여 감금하고는, 대외적으로는 시서를 읽으며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알렸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고청운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담자례는 감성지수가 낮다고 하나, 담씨 가문 사람들이 다 그럴 리는 없었던 것이다. 비록 고청운의 신분은 변변치 않은 그저 작은 거인일 뿐이었지만, 담씨 세가 일족의 입장에서는 적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적을 만들지 않길 원했을 테고, 만약 적이 되더라도 꾹 참고 있거나 아니면 기회를 노려 적이 다시는 기세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적의 뿌리를 끊으려고 했을 것이었다.
게다가 고청운과 담자례의 불화는 그저 소년들 간에 주정 섞인 말실수로 치부될 수도 있어,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을 만한 일이었다.
이 일이 일어나고 난 후, 담 시랑은 방인소와 에둘러 몇 마디를 나눴는데, 담씨 가문 측에서는 일전에 고청운과 정식으로 대면한 적이 있으니, 그에게 대면을 기념하는 선물을 하나 보내는 것으로 이 일이 마무리가 된 것으로 하기로 하였다.
모든 과정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담씨 측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에게 이 '피해'를 보상해 주었고, 그 누구도 잘못이라고 언급할 수 없게 되었다.
고청운은 이와 같이 상황이 돌아가자 애당초 담자례의 막말을 듣고 불쾌했던 감정이 지금은 달래졌다. 어찌 되었건 그는 담씨 가문이 공정하게 처신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로 권문세가의 일 처리와 수완에 대해 감탄한 고청운은 배운 점이 하나 더 는 것 같았다.
그가 방인소와 이 일을 언급하였을 때, 방인소는 되레 비웃으며 말했다.
“일약 승승장구한다는 가문의 수완이란 다 그렇지. 담씨 일가는 대가족인데, 이런 작은 수완조차 없을 수가 있겠느냐?”
“스승님, 저는 그냥 제 신분이 담씨 가문보다 낮아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쪽 집안에는 진사가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담 시랑 말고도 한 명은 외지 지부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다고 하죠. 그들의 저에 대한 태도가 너무 좋아서 전 외려 과분한 처사에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경성에는 관리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어떤 권세가들은 7품의 현령조차도 무시하였다. 그들처럼 아직 벼슬에 나가지도 못한 거인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기에, 고청운은 이 점만은 감탄스러웠다.
“스님 체면은 세워 주지 않더라도 부처님 체면은 세워 준다고, 중요한 사람의 체면은 세워 주는 법이다. 너는 세자의 글 선생이 아니더냐, 이런 연줄 때문에 많은 수작들이 너를 피해 간 게야.”
방인소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바보 같은 제자라고 해도 받을 수 있는 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나 구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정용후인 육택이라 구명지은(*救命之恩: 목숨을 구해준 은혜)을 받지 않았던가.
육택이 쓰러지지 않는 한, 또 고청운이 스스로 죽지 않는 한, 그는 앞으로 비교적 윤택하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육택은 무장이라 문인들의 일에 간섭할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문관으로서 겪는 문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가 버티고 있으니, 남들은 고청운에게 수작을 부리기 전에 한 번씩은 이를 고려해 행동을 옮길 것이었다.
옛날 자신이 경성에 입경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때와 비교하면 고청운의 운은 방인소 자신보다 좋아도 훨씬 좋았다.
고청운은 방인소의 이런 말을 듣고 상황을 돌아보다가 문득 크게 깨달았는데, 어쩐지 육택이 그에게 직접 큰돈으로 보상하지 않고 오히려 육훤의 글 선생이 되게 한 데에는 이런 계산과 배려가 있었던 것 같았다.
순간 고청운은 육택에게 강렬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물론 투석과 활쏘기를 십수 년간 꾸준히 연습해 온 예전의 자신에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결과,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끝까지 견뎌 구하고자 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문득 온 집안을 온통 들쑤셔 놓는 소석을 생각하고, 아이가 조금 더 클 때까지 기다렸다가 활쏘기를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이 전통을 후대에도 전해 앞으로 우리 집 가문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배우도록 해야겠다.’
* * *
고청운은 육훤에게 계속하여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이 6월 말에 끝나기에, 곧 이들은 헤어짐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육훤을 데리고 방자명이 있는 서당에 가서, 육훤이 소꿉친구들을 만나 축국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시원하게 한 판 뛰고 난 육훤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7살이 된 그는 처음 만났던 5살에 비해서 많이 자랐고, 피부도 이제 검지는 않다고 하나 그래도 예전만큼 희고 보드랍지는 않게 되었다. 게다가 덩치도 매우 커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몸도 건강해졌는데, 아직 붉은 얼굴에는 젖살이 아직 안 빠져서 보기에는 그저 여전히 귀여운 꼬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태만 보면 육훤은 이미 어엿한 소년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2년 전의 아이 같던 모습에서 지금은 너무 빨리 성숙해진 것이었다.
특히 육택이 결혼을 결심했을 때 육훤은 고청운의 앞에서 남몰래 몇 번 울었는데, 아버지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안 걸 보니 훌쩍 자란 것 같았다.
고청운은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성장 속도란 조금만 방심해도 이렇게 훌쩍 자라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육택의 재혼에 관해서는 그들의 힘이 미약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또 이를 막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
이때, 육훤은 천으로 땀을 닦으며 고청운과 운동장 중앙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문 등 친구들은 모두 먼 곳에 서 있어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이랑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요.”
육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큰 눈이 그렁그렁한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중에 스승님을 볼 수 없잖아요.”
고청운은 그의 정수리를 매만지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키는 자신의 허벅지 즈음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이미 허리 중간까지 자라 있어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 것 같다고 느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어린애처럼 굴기는. 너는 지금 월성(越省)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그곳은 나의 고향이란다. 만일 내년에 내가 시험에 합격한다면, 틀림없이 고향에 돌아가 조상님께 제사를 지낼 것인데, 그때는 우리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또 부임지는 3년마다 한 번씩 돌아가는 것이라, 대인께서 3년 후에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실 수도 있지 않니. 한평생 우리가 살날은 많고, 너는 아직 어리니 나중에 반드시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청운은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럼 스승님, 내년엔 꼭 진사 시험에 합격하세요.”
육훤은 고청운의 새끼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내가 너한테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니?”
고청운은 그의 뒷목에 있는 땀을 대신 닦아주며 낮게 말했다.
“나중에 월성에 도착해서도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께 효도하고, 어머니를 존경해야 해. 나중에는 동생들도 생길 테니, 동생들에게도 잘 대해 줘야 한다. 형제애가 있어야 하는 법이야. 또한, 아버지에 대한 의지나 형제간의 질투 정도는 적당히 나타낼 수 있어도, 아버지를 독차지하려는 마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 특히 아버지의 앞에서는 아니 된다. 기억하렴, 우는 아기에게는 젖을 물려 주는 법이지만, 너는 아이가 아니지 않느냐.”
‘에라, 내가 너무 관여하는 건가.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겠네.’
고청운은 자기가 옳고 그름을 잘못 가르쳐 주는 건 않을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훤에게 할 말을 하였는데, 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헛된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담 씨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나중에 얘기해도 늦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의 마음을 모르니 할 수 없었다.
2년간 육훤과 만나오는 동안, 그들 사이는 매우 좋았다. 육훤과는 거의 매일 만났는데 어떻게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육훤은 끝내 눈물을 끝내 뚝뚝 흘렸다. 고청운의 품에 머리를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승님, 제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 그에게 어머니가 있었다면, 증조할머니와 숙부 내외들이 계모가 자신을 해치고 그녀가 낳은 동생이 육훤의 작위를 빼앗아 버린다고, 아버지도 이제 자신은 좋아하지 않고 동생만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숙부 내외가 한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견디기 힘들어서 울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랬다. 만약 육훤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더라면 육훤은 지금의 모습이 되진 않았을 것이었다. 육훤의 외숙부 집안은 좌천되어 이미 몰락해서, 지금 고향인 산동으로 돌아갔기에 거의 의지할 곳이 못 되고, 오히려 외가가 육훤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담 씨에게는 부모가 없다고는 해도 일족이 강대했고 동생도 아직 강건했으며 그녀 또한 사람됨이 있었다.
“그래, 최선을 다하마.”
고청운은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