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다음 행보를 정하다
오후가 되었을 땐 간미와 하 씨는 바구니를 들고 채소를 따러 장원 밖을 나섰다.
시간이 늦어 성문이 닫히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모두들 아쉬웠지만 그래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기 전 그들은 배 한 상자를 비롯해 호두, 밤나무 등을 상자에 가득 수확하여 담았다.
‘경성에 오래 머물다가 산과 들에 나가니 기분이 새롭구나.’
고청운은 전생에서 겪었던 도시인의 생활처럼 주말 농가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보니, 기분 전환과 정서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을 느꼈다.
* * *
중양절이 지나고 평소와 같은 생활이 찾아오자, 마치 몇 송이의 물보라가 일다가 한 줄기 잔잔한 강이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청운이 담자례의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이미 겨울이 찾아와 기온이 꽤 내려가 있었다. 그는 몇 겹의 홑옷만을 입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회시에서 겪었던 동일한 상황에 적응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올해 2월부터 이런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다.
이는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고청운은 그래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만약 추운 환경에 적응이 가능해져서 문제를 푸는데 지장을 받지 않게 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시험 때 방자명은 회시의 마지막 날 몸이 아팠는데, 정신이 모호하여 문제를 감으로만 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아마 그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저번 회시에서 그가 낙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일전의 시험에서 아주 기량을 잘 드러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저번처럼 추위에 적응 못하고 남쪽 기후에만 익숙해진 상태로는 시험장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이런 교훈을 얻고서도 준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방자명의 놀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하, 드디어 담자례가 널 왜 고깝게 여겼는지 알았어.”
이날 신이 나서 고청운을 찾아온 방자명이 두서없이 먼저 이 한마디를 던졌다.
그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고청운은 마침 책을 들고 뒤쪽 정원에서 앞쪽 정원의 서재까지 걸어 나가려던 참이었다. 고청운은 그에게 질문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고삼원이 차를 내어주기를 기다려 방자명은 스스로 차 한 잔을 우려낸 다음에야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담자례가 사적인 모임에서 아마도 술을 많이 마셨던 모양인데, 그때 나온 말이, 자네가 백부님께 빌붙어 살면서 조그만 농가의 자식 주제에 지금은 해원을 거머쥔 해원랑이라는 공명을 얻은 것도 모자라, 은사의 외손녀까지 아내로 맞아들인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했다더군.
심지어 자네 같은 사람이랑은 함께 어울릴 가치가 없다는 말까지 했다는데, 그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우리에게 그 말을 전해 줄지는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야?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다 자기 친구라고 착각을 한 모양이지. 흥,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지도 모르고.”
“알고 보니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게로군요.”
고청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어쩐지 진 형이 어제 편지로 어쩌다가 담자례와 척을 졌는지 묻더라고요.”
그가 아는 사람 중의 일부는 방자명의 지인들과 겹쳤다. 그러니 남이 그에게 말했다면 또 그중 누군가도 자신에게 말을 전할 것이었다.
그중에서는 진심으로 물어보는 것도 있겠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즐겨 호의적이지 않게 괜히 말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더 상관 안 해도 돼. 이런 문제아들은 앞으로 적게 사귀면 될 일이야.”
방자명이 차향을 맡으며 말했다.
“그는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족들에게 의지해서 살면서 어린 시절에는 공부에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하더군. 학자의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공부에 소질이 있느냐인데 말이야.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친족들 사이에서 3년을 고생스럽게 공부하면서 뜻밖에도 단번에 현시와 부시, 원시를 거쳐 수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해.
이 시험 결과가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한 듯, 그는 이로 인해 문중의 관심을 끌었고, 소주의 유학자들이 직접 그를 제자로 입문시켜 정성껏 가르쳤다는군. 결국 수재에 막 합격한 그가 비로소 유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살던 중 때마침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고 해.”
고청운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이 사실을 다 알고는 있었지만, 방자명만큼 명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누이는 이런 과거로 인해 꽃다운 날을 힘겹게 지냈나 보더라.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전에 혼사가 오간 적도 있긴 해. 그때 담 낭자한테 혼사가 오가던 사람이 있었는데, 담자례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라 안타깝게도 담 낭자는 효를 다하느라 혼사에 신경 쓰지 못했고, 결국 혼사가 오가던 사람은 혼사를 거두고 다른 장가를 갔다더군.
담 낭자는 담자례를 챙겨 주기 위해 혼례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소주에서 평소 덕행으로 유명세를 탔지. 이번에 후부와 혼인을 맺는다고 해서 모두들 놀랐을 거야.”
방자명이 감칠맛이 나게 설명했다.
고청운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 그런데 담자례는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내가 여러 해 동안 처가와 아내에게 얹혀산 것처럼 말하다니.’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당연히 분노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마냥 얹혀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일은 정말 해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스스로 화본 집필을 통해 돈을 벌어왔다고 떠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상대할 필요 없어. 우리 매형에 비하면 한참 멀었지.”
방자명은 고청운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괴로워하는 줄 알고 위로했다.
“그런 말 신경 쓰지 말아. 너와 지내다 보면 너의 됨됨이를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야. 네가 정말 그런 마음이 있는 놈이었다 하더라도, 백부님께서 잘도 네 요령을 간파하지 못하셨겠니?”
왠지 모르겠지만 고청운은 권모술수에 있어서만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방자명의 관점에서 볼 때, 고청운은 가장 많이 스승님을 뵈러 가며 약간 조심스럽게 기회를 보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방인소를 감동시킨 것이었다. 그간 방인소는 여러 해 동안 벼슬을 해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봐 왔는데, 고청운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앞에서 본성을 숨겨올 수 있었겠는가?
고청운이 미아와 혼인을 하고 난 뒤에도 방인소의 재산을 나중에 누구에게 나누어 줄지에 대해서까지, 그들 두 집은 서로 염려하는 바가 없었다.
고청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전 견디기 힘든 게 아니고, 그냥 분노한 겁니다. 저는 이미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관계를 관두고, 앞으로 멀리하는 게 답이지요. 참, 여기 문제 좀 봐 줘요. 천문 문제인데, 다음 시험에서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어요. 최근 흠천감(*钦天监: 명청 시대의 천문대)은 내년 1월에 개기일식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서 모두 이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고 거론하고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너…….”
방자명은 놀라서 고개를 숙이고 백지에 그려진 동글동글한 해서체를 보았는데, 그 위에는 ‘고대에서 점을 치는데 사용한 천문학은 <황제>, <무함>, 감, 석 <별점>에 사용되었는데, 어찌하여 <예문지>에 나오지 않았겠는가? <영대비원>, <개원점경>을 통해서 일면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등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방자명이 문제를 보고 있을 때, 고청운은 서재 창가 가까이로 걸어갔다. 여기에는 벼루를 씻는 세면대를 만들어 둔 것 말고도 대야를 하나 더 설치해 두었는데, 그 속에서 금빛 잉어 다섯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떤 품종인지는 모르겠으나, 물밑에는 푸른 수초가 몇 무더기 어우러져 물고기가 즐겁게 노닐고 있었다.
고청운은 피로해진 두 눈을 쉴 겸 조용히 물속을 바라보았다.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과 오해가 자신의 전신을 투지로 가득 채우자, 그는 이제 후부에 가는 일 외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기로 다음 행보를 정했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이었다.
“청운아, 이리 와. 우리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
고청운이 비단잉어에게 먹이를 주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방자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하고 한마디 대답한 고청운은 번뇌는 잠시 잊고 주의를 토론으로 돌려 정신을 집중했다.
* * *
저녁때, 고청운은 간미에게 문헌네 집안의 일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아직 임 씨와 연락하고 있소?”
간미는 마침 화장대 거울 앞에 회양목 빗을 들고 머리를 빗고 있었는데, 질문을 듣자 하니 좀 이상한 느낌이 있어 고개를 돌려 한창 족욕 중이던 고청운을 한 번 보았다.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임 언니가 경성에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같은 현 출신이니 연락이야 물론 할 수 있지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고청운은 더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조 사형이 정말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었다면, 무엇 때문에 임 씨와 우리 집과의 왕래를 제지하지 않았을까?’
고청운은 간미의 현명함을 알기에 그간 사정을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순간 표정이 굳어진 간미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부군, 안심하세요. 제가 기회를 봐서 자세한 속사정을 좀 알아볼게요.”
그녀는 조문헌이 첩을 들이기로 한 일에 대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는 본디 부군과 오랜 친구이니 가능하다면 연락이 원활하게 이어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조문헌은 재능이나 학식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나중에 다들 진사에 합격하면 서로가 도울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정말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냥 관계를 끝내면 그만이었지만 말이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간미가 질문에 답을 해 주었는데, 임 씨 쪽은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조문헌은 아마 그녀에게 그들 사이의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제가 보기에는 임 언니도 자신의 부군이 이전과 비교해서 뭐가 달라졌는지 딱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간미는 조문헌 혼자 그러는 것 같다며 답답해하며 말했다.
“유일한 변화라고는 최근 들어 임 언니가 제게 불평을 늘어놓으러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간간히 마음 상하는 일에 대해 말을 꺼내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임 언니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은 그 사람이 언니에게 꽤 잘해 주고 있다는 것 같았어요.”
‘조 사형이 임 씨에게 갑자기 잘해 주고 있다고?’
고청운은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관두자, 더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내 일부터 잘 정리하고 말을 해야지.’
고청운은 일단 깊이 따져 볼 생각은 접기로 결정했다. 마음만 있다면 두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그랬던 이유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 고청운은 다른 사람들의 초청이나 모임을 거의 다 거절하고, 매일 오전 후부의 육훤에게 공부을 가르칠 때를 빼고는 집에만 틀어박혀 공부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