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정말 매력적인 사람
서로 잘 통했던 두 사람은 사례의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대화를 통해 고청운은 육택이 진작부터 자신을 찾아오려고 하였지만, 그동안은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는 걸 알았다. 또 그가 마침 회시를 보려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청운은 육택이 전임 후작이었던 정용후가 사망하고 나서 작위를 물려받는 일로 바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회시 참가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배려해 준 사실도 감동적이었다.
육택이 조금이나마 포상을 내려 준 것만으로도 고청운은 이미 좋았으나, 실은 그날 밤 밖이 어두웠기에 육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여겨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노릇이었다.
고청운은 육택이 겉으로는 냉랭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청운은 육택이 차 몇 잔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그가 곧 떠나려 한다고 생각하여 식사를 권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하게 뒤에 이어진 그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네? 아드님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요?”
고청운은 이 제안이 불가사의하다고 여겨졌다. 그의 집처럼 권세가 집안에서는 좋은 선생님을 찾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통의 대부호들도 젊은 거인을 불러다 자제를 가르치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도 나이가 좀 많은 선생님들이 학문적 가르침을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특히 이제 막 글자를 깨치기 시작한 터라면 더욱 그러했다.
육택의 초청에 대해 고청운은 자신이 학문이 뛰어나서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문이 그렇게 뛰어났으면 진작 진사에 합격했겠지.’
“음, 보아(宝儿)는 이제 겨우 5살로 어리고, 겁이 많소. 원래는 문중에서 아이를 가르칠 계획이었으나, 이 녀석이 문중 서당에 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꼬마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엉엉 울었다오.”
육택은 아들 생각에 얼굴이 부드러워졌다가도 곧 노여워하며 말했다.
“본 장군의 아들씩이나 되는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겁약할 수가 있는지. 원래 나이 많은 사람을 찾아서 집에서 먼저 공부하게 하려고 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진부함이 또 걱정이 되던 참에 그대가 생각났소. 그대는 거인이니, 그대의 학식은 이미 유아를 가르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오. 그대는 용기뿐 아니라 문무를 겸비했으니, 이 일을 수락함이 어떠하오?”
그는 말을 하면서도 기대에 차서 고청운을 바라보았다.
‘내가 문무를 겸비해?’
고청운은 육택의 얼굴의 흉악한 칼자국을 한 번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청운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살았다. 그에게 있어 아주 큰 인물로부터 자신을 '문무를 겸비한'이라는 말로 칭찬을 듣게 되다니. 비록 명실상부하지도 않고 자신 스스로도 문무겸비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기분만은 매우 좋다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육택이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에게 아이의 교육을 맡아달라는 청을 하다니?’
고청운은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동의를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 물론 육택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들,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만약 실권을 가진 후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좋은 일로서 많은 부분에서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비록 지금 그가 아직 무슨 문제를 겪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육택이 관계를 맺는다면 앞으로 무슨 마찰 같은 것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비록 육택의 성격에 대해서 비록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접해 보았을 뿐이었지만, 육택의 사람됨이 비교적 믿을 만한 것 같았다.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지 않은가?
“대인, 소생은 아주 잘해 보겠습니다. 저를 높이 사주신 건데, 제가 부탁드려도 모자랄 상황이지 않습니까. 다만, 소생의 아내가 곧 만삭이 되니 출산을 기다렸다가 진행을 해도 될까요? 짐작에 한 달 정도 걸릴 텐데 혹 아드님께서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청운은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물었다.
그 말에 육택은 꼿꼿했던 등줄기가 살짝 풀어졌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하니 바쁜 일을 먼저 보시오. 후에 우리 집 입구에 이름만 말해도 집에 들어오실 수 있게 해두겠소.”
그는 생각하더니 또 말했다.
“그리고 어느 면전에서든지 구속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오.”
그 말에 고청운의 입가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던 고청운은 육택이 할 말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다 말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청운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결국 예전부터 궁금했던 일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대인, 그럼 염치불구하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소생은 개인적으로 대인께 탄복하고 있었습니다. 소생은 본디 월양군 사람인데, 어떻게 한 달 만에 그 남만성 사람들을 무찌르실 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곳은 도주하기가 용이하고 또 추격도 어려운 깊은 산속 밀림이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 장병이 그곳 지형에 어떻게 적응할 수가 있었습니까?”
육택은 질문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고청운은 대뜸 말을 이었다.
“만약에 기밀이라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생이 너무 경솔했습니다.”
육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먼저 사전 방비를 하고 포위한 후에 전력으로 무찌르면 될 일이오.”
고청운은 ‘오.’ 하는 소리를 냈고, 그를 바라보며 그가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육택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얼굴은 무표정했다.
‘헐, 이렇게 짧은 한마디로 대답 끝이야? 더 자세히 말해줄 생각은 없는 건가?’
하지만 그가 방인소와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니, 고청운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대화하기에 절대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그 후에도 고청운은 육택에게 몇 가지 다른 화젯거리를 건넸지만, 역시 두 사람은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해서 대화가 자주 끊겼다. 고청운이 대화의 연장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결국 육택이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고청운은 그에게 조금 더 머물러 식사 한 끼라도 더 하고 가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반찬은 모두 채식 위주고 아무런 고기 요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육택이 아직도 부모의 삼년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택은 해가 저무는 것을 지켜보면서 막 그러겠다고 대답하려고 하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문밖에서 한 사내가 들어와 육택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고청운은 육택의 안색이 돌변하는 것을 보았다.
“급한 일이 생겨 식사는 하지 않고 가겠소. 다음에 초청드리겠소.”
“대인, 급한 일이 먼저지요. 어서 용무를 보러 가십시오.”
고청운도 급히 말하고 바로 옆에 서 있는 고삼원을 향해 눈짓을 하였다.
* * *
이후 고청운은 육택을 배웅하러 나섰는데, 문 앞에 다다르자 방인소도 서재에서 나와 두 사람이 함께 육택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육택이 마차 한 대에 몸을 싣고 멀리 사라져간 뒤에야 그 둘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방금 육 장군이 나갈 때 주변에서 이를 본 사람이 있을 텐데, 괜찮을까요?”
고청운이 집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방인소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문제될 것이 있느냐?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더냐? 자, 이제 네 얘기를 할 시간이구나. 육 후작 나리는 언제 알게 된 게냐? 왜 갑자기 감사의 선물을 전한다고 이렇게 찾아온 게야?”
고청운은 주변을 살피고, 서재로 돌아와 먼저 사죄드리며 그날 밤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의 말을 들은 방인소는 가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고청운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아니, 네 녀석이 이런 일도 할 줄 알다니? 정말 노부의 예상 밖이구나.”
고청운은 멋쩍게 웃더니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저도 제가 그렇게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히도 그 사람들이 배에서 멀어져 있었기에 망정이죠. 안 그랬으면 저는 여태 잠을 못 잘 정도로 힘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은 악몽에 시달렸지요.”
물론 그런 일을 행하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은 옷차림의 3명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심리적인 죄책감도 조금 덜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런 모험을 벌여서는 안 된다. 잘 알고 있겠지만 좋은 일이라도 행하기 전에 혹시 괜히 폐를 끼치지는 않는지 잘 챙겨봐야 한다.”
방인소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간곡히 조언해 주었다.
“특히 낯선 곳에서는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고청운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입으로 ‘예’하고 답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귀찮지만 않다면, 또 상대가 이상하지만 않다면, 고청운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돕는 편이었다. 그래서 배 위에서 만난 한 승객이 병이 났을 때도 고청운은 집에서 챙겨온 약을 직접 건넸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이 일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는 후에 그 승객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소흥 지역에 도착한 후, 어느 날 그들이 유람을 하던 중 그 승객이 먼저 알아보고는 억지로 그들을 끌고 주점에 가서 대접하더니, 현지에서 직접 데리고 다녀주며 여행까지 시켜 주었었다.
확실히 현지인이 직접 안내해 주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그들은 아주 즐겁게 유람할 수가 있었다.
어떤 때는 남을 돕는 일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물론 몇몇 배은망덕한 부류의 사람들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스승님, 미아가 아이를 낳고 나면, 저는 정용후부의 자제분의 공부를 가르치러 다녀오겠습니다.”
고청운은 급히 스승님의 허락을 구했다.
“네가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 이 노부한테까지 물어보는 것이냐?”
방인소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
“가거라. 일이 있는 게 좋지. 매일 집에서 책만 읽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만 괜스레 멍해져서 공부를 해도 머리로 들어오지가 않을 게다. 노부 동생도 그랬었지…….”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달은 방인소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할 텐데, 네 녀석 이 노부한테 평생 돌봐달라고 할 것은 아니겠지? 부끄럽지 않게 하거라. 나중에 노부가 더 늙으면 네가 더 기댈 수도 없을 게야.”
“멀리 있으면 향기롭고 가까이 있으면 악취가 난다더니, 스승님께서도 인간관계에서 너무 가까운 사이에는 더 문제가 많아진다고, 제가 귀찮아지신 게로군요. 흥흥, 미아에게 스승님께서 저를 내버리셨다고 말해 주러 가야겠습니다!”
고청운은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띠며, 스승님의 뒤쪽으로 다가가 손으로 힘주어 방인소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댄 방인소가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래, 지금 집에서 맨날 봤더니 이제는 귀찮아지는구나. 내쫒지 않고 있는 걸 감사히 여기거라.”
“이건 조금 기분 나빴습니다.”
고청운은 선생님과 입씨름을 하느라 육택이 선물을 주고 간 것을 뒤늦게 알렸다.
“아, 육 장군께서 선물을 주고 가셨습니다. 개국 공신 후작들은 돈이 엄청 많다면서요? 전쟁할 때 은을 꽤 많이 뺏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육 장군은 어떻게 은으로 저를 회유하실 생각을 안 하셨을까요? 제가 은자의 구린내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지도 모르시고 말입니다.”
“이 녀석이.”
방인소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오른쪽 어깨를 가리키며 ‘이쪽, 이쪽을 해다오.’ 하고 지시했다.
고청운은 또 그를 순순히 따랐다.
육택이 찾아온 연유를 자세히 알고 나니 마음이 놓였던 방인소는 이내 심장이 두근두근해졌다.
“잠깐만, 육 후작 나리가 네게 뭘 보내주셨다고 했지? 책 두 상자? 창고에서 찾아냈다고 했었지?”
“예, 아직 열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고청운도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가자꾸나, 가서 봐야겠다.”
방인소가 먼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