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방자명의 분노
“마님, 사위 나리, 아가씨.”
방 집사는 다른 사람을 문밖에 남겨두고 혼자 들어와 절을 한 후,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며 난색을 표했다.
연 씨는 노련한 사람인지라, 그 모습을 보고 속사정을 이미 알았기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상황이 어떠하느냐.”
“마님께 아룁니다. 쇤네가 사위님의 이름을 명단에서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혹시나 제가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니, 벌을 받겠습니다.”
방 집사는 말을 마치고는 손을 떨군 채 제자리에서 묵묵부답으로 서 있었다.
연 씨의 얼굴빛이 즉시 바뀌며 돌아서서 고청운과 간미를 바라보았다.
고청운은 마음속으로 이미 예감을 하고 있던 터에도, 지금 다시 확실한 소식을 듣자 숨이 막히고 상실감이 격하게 가슴에 차오르기에, 숨을 깊이 들여 마시고서는 집사에게 말했다.
“아아, 집사님께서 저 때문에 조심스럽게 말씀을 주셨군요. 아마도 제가 낙방을 해서 이름을 못 보신 게지요.”
이렇게 말을 하는 얼굴에 큰 상심이 서려 있었다.
고청운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장모님, 미아, 이번에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제 학업이 부족한 탓입니다.”
간미는 분주히 머리를 가로저으며 개의치 않음을 내비치고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직 젊지 않느냐. 네 스승님도 이 노인네도 말했었지.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더 노력만 유지한다면 다음 기회가 그만큼 더 커질 게다.”
연 씨는 고청운의 안색이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는 것을 보자,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고청운은 그제야 태연한 척 빙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집사님, 제 지인인 조 사형과 장 형은 합격했나요?”
방 집사가 답했다.
“조 공자님의 성함을 찾지 못하였고, 장 사위님의 성함은 찾았습니다만, 2등급 55등으로 합격하셨습니다.”
고청운은 웃으며 고개를 돌려 간미에게 말했다.
“장 형은 과연 남다르시오. 반드시 합격할 줄 알았지. 그는 저번 시험에 참가하지 않는 동안 더 내공을 쌓았을 터. 이번에 반드시 붙을 것 같았소.”
하지만 속으로는 아쉬운 면도 있었다. 장수원이 이번에는 회원으로 합격한 것이 아니라서 6차례 연속 장원이라는 타이틀을 석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장수원이 이번 회시에서 회원만 석권하고 전시 시험에서 크게 떨어지거나 하지만 않았다면, 황제가 그를 장원으로 세워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희망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회시는 역시 회시라고, 도처에 재능이 뛰어난 인재가 널린 탓이었다.
하긴, 이렇게 인재가 넘치는 회시에서 1등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어야 했었을까! 그들이 사는 월양군 내에만 해도 이렇게 많은 거인들이 두 번씩은 시험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장수원처럼 시험에 합격할 수가 있었다.
이후 고청운은 다시 송인에 대해 물었고, 그가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지난번 연회에서 그와 진왕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로, 고청운은 더 이상 그와 주동적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와도 책을 읽어야 한다는 핑계로 거절하며, 천천히 두 사람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하긴, 두 사람은 그냥 평범한 시험 합격 동기였을 뿐 본디 그리 두터운 친분도 아니었다.
고청운이 간미의 출산 예정일을 셈하여 보니, 5월 중이라고 짐작되었다. 그에 고청운이 간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미아, 우리 정원에서 좀 걸읍시다.”
간미는 어리둥절했지만, 얼른 웃으며 동의했다.
연 씨는 손을 흔들어 그들을 내보냈다. 젊은 부부가 함께 나가는 뒷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서 동그란 얼굴에 주름이 펴지자, 이를 본 방씨 가문 식솔 모두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마음 한 구석에 맺혔던 울분마저 풀려버렸다.
함께 정원을 거닐며 마당에서 새싹을 쏟아내는 푸르른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마음이 누그러진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간미가 이제 더 이상 합격 결과에 얽매이지 않아 보이자, 고청운은 서재로 돌아갔다.
그의 공부는 지금 또 다른 경지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마침 지금이 바로 분발해야 적기이기도 하였다.
* * *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필기를 하고 있을 때, 방자명이 바로 뛰어 들어왔다.
“청운아, 나 지금 너무 짜증나. 화가 나 죽을 지경이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고청운 앞에 있는 이화목 책상을 한 손으로 내리 치자, 그의 책상 위의 붓걸이가 가볍게 떨렸다.
그가 분노에 휩싸여 말했다.
“내가 어떻게 3등급 안에도 못 들었을 수가 있지!”
고청운은 느릿느릿 책상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성적은 오늘 이른 아침에 진작 발표되었는데 이제야 화가 나십니까?”
이 어찌된 반사 신경인가, 시험에서 처음 떨어져 본 것도 아니고.
“난 그런 게 아니고…….”
방자명이 책상 앞쪽에서 몇 번을 맴돌다가 말하였다.
“사실 나는 이번 합격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했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 소식을 접하시고는 지금 다시 자리에 누우셨지. 의원을 불러 처방을 받아 약을 드시고 계셔.”
고청운은 깜짝 놀라 물었다.
“심각하세요? 내일 아침 병문안을 갈게요.”
방자명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올 필요 없어. 지금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셔.”
그 말에 고청운이 은근히 눈썹을 찡그렸다. 방인례는 이제 겨우 3번의 시험을 보았을 뿐이었다. 40대 초반인 그는 진사로 보면 아직 매우 젊은 편이었고 기회도 아직 몇 번이나 남아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무너질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올해는 평년과 비길 데 없이 경쟁도 치열했기에 낙방은 불 보듯 뻔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낙방했잖은가.
“방 형의 분노는 낙방한 것 때문만이 아닌 것 같은데요?”
고청운은 일어나서 영향이 그에게 차를 따라주는 것을 보고 자신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해서 천천히 마셨다.
“역시 너는 못 속이겠구나.”
방자명은 의자에 앉아 옷자락을 걷은 후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비록 나는 시험에서 떨어져서 실망은 했지만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어. 결국 몇 문제는 제대로 못 푼 게 맞으니까.”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율법 문제로, 효자를 두둔할 것인지 아니면 판결을 내릴 것인지 했던 그 문제인데, 시험장에서 나와 사람들이 토론을 할 때 쌍방이 각자 자기의 의견이 극렬히 갈렸고, 고청운과 방자명의 선택도 완전히 상반되었었다.
사실이 증명하듯이 현재 풀린 답안으로는, 고청운의 선택이 옳은 답안이었지만 그런 것은 소용없었다. 어쨌든 고청운도 낙방을 했으니 말이다.
“그럼 뭐 때문에 화가 난 거죠?”
고청운은 매우 궁금해졌다. 방자명은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 평소에 얼굴에 희로애락이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예외였다.
방자명이 부채를 펼쳐 겉에 새겨진 생동감 넘치는 빼어난 글씨에 눈을 고정한 채 침묵을 지키며 대답하지 않았다.
고청운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관두지 뭐.’
방금 한 시간여 동안을 앉아 있었던 그는 곧바로 일어나서 왔다 갔다 하며 기지개를 켜고, 정원의 푸른 나무를 바라보았다.
“……장수원은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전시를 치르겠지. 이번 합격자 명단에서도 2등급에 속해 있던데. 그 등급의 성적이면 한림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합격하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 한림원의 관명으로, 진사 가운데서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임명함)가 될 수도 있고, 그의 스승인 양 대인이 감사원 정4품 우첨도어사 직에 계시니, 그는 반드시 합격할 거야.”
방자명은 한숨을 쉬었다. 표정이 차분해지자 준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의 풍모가 되살아났다.
“그건 잘된 일이죠, 둘은 사돈 관계인데. 그가 잘되면 형한테도 좋은 거잖아요.”
고청운은 답답했다. 장수원이 잘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나쁜 점도 딱히 없을 것이었다.
“넌 이해 못해.”
방자명은 눈을 들어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계속 부채에 눈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가 경성에 남아 있으면, 북산현에 있는 내 누이는 어떡해? 누이는 몇 년 동안 단 한 명의 딸 밖에 가지지 못했는걸.”
고청운은 이 말을 듣고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누님은 여러 해 동안 북산현에 머물며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보살펴왔는데, 장수원은 그 기간 동안 대부분 경성에 남아 양 대인을 따라 공부를 계속하거나 시험을 치렀던 것이다.
듣자하니 북산현에 돌아가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장수원이 경성에 남는다면 시할머니가 또 어떻게든 핑곗거리를 찾아 방 누님이 상경하여 같이 지내는 것을 저지할 것이었다.
방 누님이 집안일을 일사불란하게 잘 처리하는 사람이면 어떠한가? 설령 그녀가 장씨 문중에서 사람들 앞에서 어질면서 대범한 사람인들 또 어떠한가? 그녀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이 ‘효(孝)’자 하나만 있으면,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그가 고향에 남겨 두고 온 노인을 돌보는 일을 당연이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비록 그 집안 내부사정까지는 잘 몰랐지만, 이것만 봐도 그녀에게 이미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집 시할머님도 너무 몰인정하신 게 아닙니까? 어린 부부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구실을 잡아가며 가로막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직 아이도 몇 명 보지 못했는데.”
고청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 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됐는데도 아들을 못 낳았다는 핑계로 장 형에게 첩을 들이라 하더니, 아무리 시할머님이 결정권자라고는 해도 너무 마음대로 하시는 것 같네요.”
방자명은 묵인했다.
“우리 어머니는 후회막심하고 계셔. 방씨 가문의 노마님 언니 되시는 분 손녀가 방씨 가문에 의탁해 살다가 장수원과는 함께 죽마고우처럼 자랐다는데, 그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 어머니는 절대 이 혼사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야!”
방자명이 촤락, 하는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부채를 접으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
“오늘 내가 장수원이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축하를 해 주러 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상것이 여주인 행세를 하면서 나를 맞이하는 게 아니겠어? 내가 격노해서 찻잔을 깨트렸는데, 그 여인은 감히 나를 헐뜯기까지 하더라!”
방자명은 이 말을 할 때에는 이미 얼굴에 노기가 가득 차올라 부채를 다시 펼쳐 휙휙 부쳐댔다.
“나도, 아버지도 낙방하지 않았느냐며 떠보는데, 이런 버릇없는 여인을 보았나!”
고청운은 이 말들 듣고는 눈썹이 다 씰룩댔다. 그는 요 근래 상경한 이래 장수원을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장수원은 미식과 화려한 복장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재능이 넘쳐 사람들과 폭 넒은 교류를 하고, 풍류를 즐기며, 사람들에게 친절해 경성의 거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고청운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장수원에게는 첩실이 하나 있는데, 용모가 매우 아리따운 그의 먼 사촌 여동생으로, 산적에게 가족이 몰살당한 후 방씨 가문에 몸을 의탁했다가 결국 장수원의 첩실이 되어 함께 상경해서 그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장수원이 경성에서 살고 있는 집에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그 첩실은 보지 못했었다.
“그럼 장 형은 그때 그 꼴을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고청운이 노해서 말했다.
“아니.”
방자명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조금 가신 채 말했다.
“그가 그 여인에게 훈계를 하긴 했지. 그래도 내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네.”
고청운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장수원이 겉으로 첩실을 두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너무 혐오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이다.
방자명도 고청운에게 이 일로 무슨 일을 도모하고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그와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더니 냉정을 되찾고는 점심도 거른 채 곧장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