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성적 (2)
송죽서재의 2층.
“내 필명은 경성에서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데, 정말 이 비싼 값에 내 책을 사겠다는 겐가?”
고청운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집필한 화본에 대한 자신감은 충분히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당신을 구해준 일에 대해 감사해하고 있는 것은 알겠네만, 설령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물에 들어갔을 것이야. 모두가 당신이 물속에서 목숨을 잃도록 그냥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당신이 우리 집에 준 선물은 이미 그때의 도움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아.”
고청운은 이 근래에 대략적인 사장정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는데, 그가 올해로 18살이며, 영평가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것이었다.
하 왕조 개국 초기, 황제가 서로 다른 성씨의 공신들에게 분봉(*分封: 황제가 토지를 하사하여 줌)해 줄 때 그들의 작위를 공(公), 후(侯), 백(伯)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정해주고 자(子), 남(男)의 작위는 내리지 않았다.
작위에 봉해지면 일명 철권자(*铁券者: 철권을 하사받은 사람 / 철권이란 공신에게 내렸던 증거물로 이는 기와 모양의 쇠붙이인데, 겉에는 이력 사항을 새기고 안에는 면죄, 감봉 등의 횟수를 새김)가 되는데, 이 작위는 세습이 가능했고, 세습을 하지 않으면 작위는 소실되었다.
세습을 하게 되면 황제가 신하에게 그것을 윤허하는 문서를 만들어 하사해 주는데 작위를 강등할지를 심사했고, 작위 세습 시 강등이 이루어지면 ‘후’라는 작위에 봉해졌던 것이 ‘백’으로 봉해지기도 하였다.
개국 당시의 하 왕조에서는 모두 8공 12후 16백을 내렸었는데, 그 중에는 세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었고, 3대가 흘러 강등되거나 또는 한 세대에서만 작위를 유지하고 이후 작위를 잃은 자도 있었다.
이후 20여 년이 지나고, 몇 개의 가문에서는 죄를 짓거나 하는 이유 등으로 인해 작위에서 제외되거나 강등된 사건이 일어났는데, 지금은 총 6공 9후 10백만이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을 경악케 하였다.
영평백은 개국 공신 집안으로, 전 왕조에서는 작은 지주(地主)로 글을 거의 몰랐다고 하며, 우악스럽지만 타고난 괴력과 용맹함,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승승장구했다고 하였다.
개국 초기에는 백의 작위에 임명되었다가 3대가 지나 작위가 강등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극처(*克妻: 사주팔자에서 처를 극하여 못 버티게 하는 성질의 기운)라는 이력이었다.
영평백의 최초의 배우자는 전쟁 중에 죽었고 아들을 하나만 남겼다고 하였다. 그 아들이 바로 지금의 영평백 세자였다. 개국 후, 영평백은 학자 가문의 아가씨를 사모하게 되어, 구(欧)씨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했다. 구씨 집안은 전 왕조에서도 유명한 학자의 집안이었는데, 문중에서는 거의 매 대에서 진사를 배출하여 조정이나 지역 내에서도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하지만 본 왕조에 이르러서는 운이 쇠하여 집안이 예전 같지 못했기에, 영평백의 구혼에 응했던 것이다.
사장정의 어머니와 영평백은 13살 차이가 났는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장정은 아주 빨리 태어났고 석 달 후 사장정의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영평백은 다시 장가를 들었으나, 세 번째 부인은 아들을 낳은 뒤 난산으로 출혈이 심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영평백이 극처의 기운이 있다는, ‘극처지명’이라는 별명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세만 있으면 부인을 못 얻을 걱정이나 하겠는가. 다시 일 년이 지난 후, 영평백은 세 번째 부인의 서매(*庶妹: 정실이 아닌 첩에게서 태어난 누이)를 또다시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번에는 처도 잘 살아 있고 심지어 아들도 하나 낳았는데, 올해 막 10살이 되었으나 흉성 때문에 아들을 잃었다고 하였다.
그랬다, 사장정이 바로 그 흉성이었다. 한 스님이 말하기를 흉성은 부모와 형제를 모두 힘들게 한다고 하였다며, 그 집안의 셋째 아들을 떠나보낸 가족들은 흉성인 사장정을 멀리 떨어진 시골 고향으로 보냈다가 그가 1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불러들였다.
고청운은 참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영평백이 극처의 상이라고 하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가 어떻게 극부, 극모, 극형제라 하는 흉성이 된 것인지 말이다.
‘어쩐지 사장정이 그런 희한한 몰골로 지내고 있더라니! 쯧쯧.’
집안싸움이라는 것은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여론을 장악하기 마련이었다.
사장정이 경성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평백의 집안일은 경성 사람들의 식후나 차를 마시며 둘러앉아 노닥거리는 시간에 소비되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사장정은 망신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기에, 영평백 집안 나리 부부를 아주 여러 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고청운은 그 소식을 접하고는 문득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이때 사장정은 고청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복사꽃 같은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약을 보낸 것은 딱 그 값어치를 한 것일 뿐이네. 제 작은 목숨에 가치를 매길 수 없지. 어찌 그런 변변치 못한 선물로 생명을 구해 준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시시한 선물은 내가 아닌 우리 백부(伯府)에서 보내드린 것이니, 내가 준 것으로 칠 수 없다네. 나는 그 선물에는 관여하지 않겠네.
혹 이 일에 동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동의할 걸세.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없지만, 언젠가 난 은인을 도와 책을 무료로 출간해 주고 싶다네.”
‘무료 출판이라니?’
고청운은 은근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출판이라는 것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일인데, 그는 어떻게 그저 호의로 베푼 일에 대해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큰돈을 들인다는 것인가.
고청운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한참을 대화를 나눴음에도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한 채 그의 의견을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고청운의 책의 매출액을 기준으로, 사람을 찾아 필사를 하는 등 출간 준비에 들어간 사장정의 자본금을 제외하고 남은 이윤을 4:6으로 나누기로 약조했다. 고청운이 4, 사장정이 6이었다. 출간과 판매에 있어 고청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모든 것을 사장정이 다 처리하기로 하였기에, 너무 많은 몫을 받기가 좀 거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책의 값어치로 돈을 번 것과 같은 셈인데, 고청운조차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경성의 시장에 대해 그는 아는 바가 없어 많이 생소했고, 자신의 화본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 수 있을지 여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하나는 경성에는 월양군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확정한 후에 비로소 두 사람은 잡담을 할 흥이 생겨났다.
고청운은 사장정이 공신 귀족집안의 자제이면서도 딱히 허세를 부리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아마 그는 허세를 부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성격이 솔직하고 직선적이라 무슨 말이든 거리낌 없이 했던지라, 사람들은 그가 기쁜지, 화가 났는지 짐작할 필요도 없이 아주 쉽게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대화하며 알게 된 그의 관점 또한 매우 독특했다.
두 사람은 매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고청운이 이별을 고할 때에도 여전히 대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이, 경성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또 생겼구나 싶었다.
돌아가는 길에, 고청운은 새로 문을 연 장신구 점포를 지나다가 잠시 생각해 보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정교하고 신기해 보이는 장신구 두 점을 샀다. 장신구를 고르는 그의 안목이 아주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구입한 장신구들은 연 씨나 간미 모두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다.
화본에 관련된 일을 모두 끝낸 후, 회시 합격자 명단 발표를 기다리는 나날들이 고청운에게는 꽤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이에 그는 일정한 시간을 정해 화본을 집필하는 것 말고, 다른 시간은 모두 열심히 책을 탐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방인소의 장서를 읽는 것은 물론 송죽서재에서도 책을 찾아 읽었다.
이번 회시를 통해, 그는 자신의 독서량이 여전히 모자라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역사 방면이 더욱 그랬는데, 역사적 인물들의 사건 연혁이나 어느 왕조에 시대적 배경을 두고 있는지 기억이 불분명했던 것이다.
아마 이번 시험은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보상심리 기전이 작용해 이번 시험에는 이런 독서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물론 고청운은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독서는 점차적으로 심화시켜가야 하는 것이 순리라, 밥 한술에 배부를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회임 중인 간미를 더 이상 홀대할 수 없었던 그가 그녀와 매일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대할 때는 스스로 더욱 좋은 기분을 갖고 대화에 임하도록 노력했더니, 천천히 그의 초조했던 마음이 정말로 평온해졌고 시험 결과를 차분히 인정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 * *
4월 15일은 회시 시험 합격자 발표일이었다.
이날 이른 아침, 방인소는 평소대로 관서에 업무를 보러 출근했고, 간미는 아주 일찍부터 일어나서 고청운을 깨웠다.
“이미 순위는 정해져 있고, 명단에 내 이름은 없을 것이오. 우리가 아무리 일찍 일어난들 소용없소.”
고청운은 하품을 하며 생각해 보니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긴 하였다.
“그냥 제가 좀 설레서 그래요.”
간미는 가슴 쪽에 손을 가져간 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사실은 제가 잠을 잘 못 잤어요, 아이가 누르고 있어서요. 저는 잠시 측간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혜향과 영향을 불러들였다.
고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이불을 개고, 옷을 입고, 머리를 묶고, 은관을 썼다.
그 후 그는 마당에서 주먹 몇 번을 내지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회랑 쪽을 몇 바퀴 돌았고, 땀이 나자 동작을 멈췄다.
이때는 연 씨마저 일찍이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방 집사에게 건장한 체격의 머슴 둘을 데리고 나가 합격자 명단을 보고 오도록 시켰다. 그녀보다 더 일찌감치 일어났던 고삼원은 한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을 따라 나섰다.
고청운은 비록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마음은 이미 순응하고 있었다.
안방에서 기다리는 동안 연 씨와 간미는 막힘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고청운은 자신이 집필한 여행기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역사책을 읽으며 자신이 다녔던 곳에 대해 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내용을 다시 한번 고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사장정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원고를 넘길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모험기>라는 제목의 화본 100권의 필사를 마치고 책을 팔면서 필사를 계속했으나 아직까지는 매출액이 턱없이 적었고, 시장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도 아직 없었다.
허나 고청운은 급하지는 않았다. 밥 한술에 배부른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그리고 한 가지 그에게 매우 기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뜻밖에도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게 느껴져서 자신의 공부가 트인 걸까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사서오경을 단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용도로만 읽었다면, 요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정독해 보며 어떤 책은 아주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관념들은 후세에 전해졌어도 여전히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독서에 흥미가 부쩍 늘어, 이전에는 책을 읽을 때 가장 얕은 층의 내용을 읽기만 했을 뿐 죽어라 외우던 내용들에 대해서, 지금은 읽은 내용 안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게 또 큰 재미를 느끼게 하였다.
그때, 집사와 고삼원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고청운은 그들의 얼굴빛에서 자신이 시험에 낙방했음을 짐작했다. 그는 이 일에 큰 상심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이 들며 평정심이 일었으나, 간미가 너무 흥분해 몸을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간미는 자신의 입으로 거듭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의 성적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