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성적 (1)
“이 답안은 운이 좋으면 3등급 급제 안에는 들 것이고, 운이 나쁘면 바로 낙방일 것 같구나.”
방인소가 또 고청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너는 아직 젊으니, 이 노부는 사실 네가 이번에 당선되지 않았으면 한다. 3등급으로 시험에 합격을 한다 한들 전시의 성적과 결과는 다시 만회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앞으로 평생 3등급으로 급제를 하고 얻은 동진사라는 이름으로 지내면, 결국 진사 중에도 한직이나 맡게 될 것이다.”
고청운은 말없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합격을 하지 않기를 기도라도 해야 할까 싶었다.
“물론 이 노부가 틀릴지도 모르지. 노부는 매번 회시에 관심을 갖고 살아오긴 하였다만, 잘못 판단했던 적도 있으니 말이다. 만약 네가 2등급 안으로 급제하게 되면 대단히 기쁜 일이 되겠구나.”
방인소는 하하 웃으며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시험은 끝났으니 너무 많은 생각에 휩싸이진 말거라. 이미 시험지는 제출했고, 결과는 사람 힘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게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야.”
“네, 스승님. 그리 하겠습니다.”
고청운이 웃으며 마저 대답했다.
“지금은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걸요. 이번에 합격하지 못한다고 한들, 3년 뒤에 다시 시험을 봐도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과거제도가 시작된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과거를 준비해 왔는지 아느냐, 너는 지금 단 한 번 시험을 쳤을 뿐이란다. 3년만 더 내력을 쌓고 다음 번 기회에 필히 합격하면, 더 상위 등급으로 급제할 수 있는 장점도 있는 게다.”
방인소는 제자가 멀리까지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이자 기뻤다.
필경 과거 시험이란 것은 사람을 꽤나 괴롭히는 일인데, 시험을 준비하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를 느끼기 쉽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면, 우울한 정서가 반영되어 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분명히 건강했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시험 후 바로 병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 그는 시험 준비가 길어지면서 이런 일을 장기간 겪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 준비하면 오래 준비할수록 몸이 약해지면서 곧잘 ‘나약한 서생’으로 불리는 경지까지 도달하고는 하였는데, 정말 안타까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 제자에 대해 정말 높이 사는 것은, 고청운은 어떤 일에 부닥치더라도 마음에 크게 두지 않고 넓고 열린 마음으로 일을 극복한다는 것이었다. 설령 일이 잘 안 풀릴지라도 가치가 없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애써 끝까지 매달리는 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또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방인소가 자리를 떴다. 그 후 고청운은 창문을 닫고 실내를 왔다 갔다 하더니, 문밖으로 끊임없이 내리는 보슬비를 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청운은 그가 고향 마을에서 나와 막 길을 떠나려 할 때, 날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도 노약자를 포함한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배웅해 주던 것이 기억났다. 철부지였던 어린 아이들 말고는 하나같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 시선이 그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는 정말로 이번 시험에서 진사에 합격하고 싶었지만, 만약 결과가 여의치 않으면…….
‘그만, 아직 난 젊잖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이미 방인소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는 동진사가 될 바에야 일반 진사에 합격하고 싶었다. 동진사가 아닌 진사에 합격해야 시작점이 다른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동진사는 관례에 따라 경성에 머물지 못하고 관리의 생활을 마감하고 관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지방을 떠도는 수밖에 없었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보다는 당연히 경성에서 관직을 수임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야 인맥도 쌓을 수 있고, 어떻게 관리를 할 수 있는가를 배워가면서 현 왕조의 관직 제도와 정치 풍토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그는 이젠 동진사에 합격하지 않기를 바랐다.
문득 스스로 고르고 자시고 할 입장이 안 된다는 사실에 고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멋대로 생각해 본 것일 뿐 성적이 어떻든 어차피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또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 번 하였으나, 그래도 오늘은 뒤통수 쪽이 덜 아픈 것이 병세도 천천히 좋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 * *
오시(*午时: 11~13시)가 되자, 고삼원이 돌아왔다.
“조 공자님이 숙부보다 병세가 더 위중하시네요. 제가 도착해서 먼발치에서 한 번 보았는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주무시고 계셨어요. 조 공자님 어머님 말씀으로는, 조 공자님의 병이 하마터면 폐병으로 번질 뻔했다며 지금 위중한 상태라고 하시더라고요.”
고삼원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 공자님은 제 2장의 시험을 치르고 나서 병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약을 먹어가면서까지 억지로 다시 시험장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결국 시험장에서 나오자마자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치료를 제때 받았다고 해요. 제가 가서 보니 가족 분들 모두 초췌해진 정도가 말도 못했어요.”
고청운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시험장에서 나오고 나서 몸이 조금 회복된 후, 그는 몇몇의 친한 친구들과 연락하며 근황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번에 조 사형이 병이 났다기에 연락하기가 힘들 것 같아, 고청운은 고삼원에게 다른 사람을 대신해 가서 보고 와 달라고 부탁을 하였었는데 이 정도로 심각했을 줄이야.
듣자 하니 이번 회시에서는 시험이 시작하고 며칠 뒤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회시에 참가한 많은 거인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데다 감기가 든 일반 양민들도 많아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경성 내 시호(*柴胡: 해열제로 쓰이는 약초), 대청엽(*大青叶: 마람, 청백 등 해열과 해독제로 쓰이는 잎) 등 감기를 다스리는데 쓰이는 약재들이 일시에 품절되고 있었다.
조문헌이 병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치러 간 것이라는 말을 들은 고청운은 한 번 치르는데 며칠씩 걸리는 과거 시험을 그런 몸 상태로 참가한 그가 너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고청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돌아가서 네 숙모님께 말하고, 그녀더러 약재 몇 가지를 보내드리라고 해 주겠니?”
고삼원은 ‘네.’ 하고 대답하고는, 고청운에게 약을 먹었느냐 확인해 보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고청운에게 각 친구들의 정보가 넘어왔다. 방씨 부자는 자신과 같이 병상에 누워 약을 먹고 있는 처지이며, 조금 호전이 된 상태라 얼마 더 기다리지 않아 곧바로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하겸죽의 경우 치료 시기가 적절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미 거의 회복되었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그다지 밝은 전망이 없어 이미 마음이 떠난지라 조만간 있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되, 남은 친구들의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월양군에서 경성으로 오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 거기에 금전까지……. 고청운은 얼마나 비용이 들어갔는지 계산해 보았는데, 과거 시험 보러 한차례 경성행을 하면 한 집안 거덜 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듯했다. 매 3년마다 수백 냥씩 들어가는 은자에 아득히 먼 여정까지 더하면, 이 모든 조건은 사람 건강에 매우 큰 손해를 입힐 만한 구조였다.
하겸죽처럼 이렇게 젊은 나이에도 병이 나는데, 더욱이 중, 노년이 되어 시험을 치르러 오는 거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시험 일정보다 반년을 앞당겨 상경했는데, 이는 바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부군, 오늘은 좀 어떠세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간미의 부드러운 외침소리가 고청운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정신을 차린 고청운은 이 모든 생각을 더 발전시키지 않고 간미와 다시 대화하기 시작했다.
* * *
3월 21일이면 마침 고청운의 20살 생일이었다. 일반적인 젊은이들은 생일을 특별히 챙기지 않았지만, 20살의 생일만은 정식으로 성년이 되는 나이기 때문에, 이 연령에서만큼은 생일을 챙겼다.
고대의 사람들은 20세가 되면 머리를 틀어 올렸는데, <예기(礼记), 관의(冠义)>(*예기: 12경 중 하나), (*관의: 예기에 나오는 관복 의례편)에서도 아래와 같이 관례에 대한 의미가 언급될 정도였다.
여기서는 관례를 행하는 사람은 사회에 정식으로 발을 내딛는 성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덕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다만 당송(唐宋)때부터 관례에 대한 기풍이 날로 문란해지면서 지금의 하 왕조에서는 황실에서나 여전히 관례를 거행하고, 민간에서는 보편적으로 관례를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사내는 20살 생일을 맞으면 그의 이름에 자를 지어 주는 것으로 대부분 행사를 마무리했는데, 이 또한 사자(*士子: 관직에 있거나 혹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자)들에게나 그런 대우를 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날이 되면 식구끼리 앉아서 식사도 함께 하였는데, 고청운 외 세 사람이 모두 병중이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담백한 것만 먹어야 하였다.
이날 남녀가 따로 모여 이야기를 나눴지만, 모두들 의식적으로 회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인소가 그에게 ‘신지(慎之)’라는 자를 하사해주며 말했다.
“노부는 네가 평소에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신중히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폐하에 대해서만은 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신지’라고 자를 지어 주기로 하였다. 앞으로 관리가 되면 신중을 기해 말이 씨가 되어 화근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는 바이니라.”
이 말은 그가 둘만 남았을 때 해 준 말인데, 고청운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눈꺼풀이 까라지고 묵묵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되려 방인소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예리함에 찬탄해 마지않았는데, 고청운처럼 시공을 타임 슬립해서 넘어온 사람들에게는 당시 시대의 사람들처럼 황제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겉으로만 공손한 척할 뿐이었던 것이다. 방인소와 지내면서 고청운의 그런 면모가 그에게 간파 당했던 듯했다.
어울려 지내는 다른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꽤 지난 후에서야 고청운이 대답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는데, 아마 평소에는 확실히 이쪽 방면의 성향을 드러냈었기에 방인소 앞에서 변명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 * *
20살의 생일은 이렇게 덤덤하게 지나갔고, 고청운은 마음을 편히 먹고 마저 요양에 돌입했다. 옛말에 병은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이 갑자기 오고 실을 뽑는 것과 같이 서서히 물러간다더니, 병이 유난히 더디게 나았다.
고청운은 고삼원이 간미의 분부를 받아 책마저 한 권도 더 전해 주지 않을 정도로 다른 일에 더 신경 쓰지 못하게 하자, 백방으로 생떼를 쓴 결과 그나마 퉁소라도 불며 자신의 연주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간미와 서로 마주하고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둘은 서신으로 교류를 이어갔다는 것인데, 이는 고청운으로 하여금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였다. 종이에 써서 전하는 것은 입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도 곧잘 편하게 써 내려갈 수 있었다.
편지가 오가면서 두 사람은 사이가 더 좋아졌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곤 하였고,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고삼원만 고생이 많았다.
무려 보름씩이나 몸조리를 했더니, 고청운의 몸은 마침내 회복되었다. 고청운은 당초 자신이 방자명보다 더 느리게 병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방자명은 아직 외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장정의 소식통은 정말이지 신통방통했다. 고청운이 이제 막 거리로 나서 한 바퀴 돌고 왔을 뿐인데, 그 다음 날 사장정의 서신이 도착했던 것이다. 그는 고청운에게 송죽서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전했다.
고청운은 자신이 병이 났을 때 그가 보내준 약재를 생각해서라도 약속 장소에 가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