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회임 (2)
고청운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손가락으로 글씨가 가지런한 원고지를 매만지다, 잠시 글씨체를 감상하며 생각에 젖었다.
‘안 돼, 가격이 너무 낮아. 천천히 하자.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 우선은 원고를 비축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럼 좀 더 작은 다른 서점에 가서, 화본을 쓴 문인들 중 어느 것이 좋은지, 어느 집이 제때 고료를 지급하는지 알아봐 주겠니.”
고청운은 고삼원이 분개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이어 말했다.
“괜찮다. 경성에서 내 필명은 그냥 일반 서민과 다를 바 없어서, 지명도가 하나도 없지 않니. 서점에서 가격을 깎아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야.”
하씨네 서점에서는 그러지 않기는 했었다. 자기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체를 앎에도 줄곧 대범하게 거래했었다.
고삼원은 원기왕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삼원아, 너 그동안 계속 밖으로 나가고 있지. 조심해야 한다. 만약 나쁜 것을 배우게 되면 바로 임계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야.”
고청운은 샅샅이 그를 떠보았다. 그가 입은 옷의 색깔은 방택의 하인들이 입은 옷과는 다른 색이었는데, 혜향과 영향이 만들어준 것으로 몸에 아주 잘 맞았다.
요 몇 년 동안 그의 곁에서 따라다니며 귀동냥을 한 고삼원은 겨우 14세지만 아주 건실해 보였다. 피부가 검지만 미목이 수려하고, 문자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알기로는 방씨 가문의 여종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지금 그를 보내서 책방 일을 알아보게 하면 수중에 돈도 좀 있겠다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두려웠다.
고삼원은 그런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안심하세요. 저는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고청운은 사실 고삼원이 무슨 나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긴 했는데, 그는 늘 헛소리를 좀 할 뿐이지, 밖에서 무슨 여자를 찾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 * *
어느 날, 옆집 관리의 연회장에 뜻밖에도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나타나, 연회장의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관리의 자식이라며 소개시켜주었는데, 그 사건으로 하여금 경성은 한동안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들의 지역에는 모두 관리이거나 배경이 있는 부자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모두들 떳떳하게 사정을 물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인들이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뛰어다니며 귀동냥을 했었다.
그 여자는 노래를 잘 부르고 용모가 아름다워서, 문간과 몇몇 사내아이들이 묘사할 때 약간 애매한 농담을 하고 다녔는데, 마침 지나가던 고청운은 고삼원의 실실 웃던 모습도 생각이 났다.
이 일의 결과는 고청운도 알고 있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그 관리를 괴롭히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아이가 용모는 관료의 얼굴과 빼다 박았고, 증거까지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 정3품의 이부우시랑은 어사로부터 ‘덕성에 문제가 있어 조정의 율법에 저촉 된다’는 이유로 상소가 올려 지게 되었고, 설령 보증해주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그 사람도 정3품 관직에서 호남의 어느 현령으로 좌천되어 급이 급강하했다.
그 관료가 이사 나가는 날, 그 집안 식구들은 울며불며 경성을 떠나 호남으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방인소는 또 이 예를 들어 그에게 한 번 설명해주었는데, 그 어사들이 얼마나 광기 어린지, 만약 너의 약점을 잡기라도 하면 죽기 살기로 너를 반드시 쓰러뜨리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성과는 어디에서부터 나오겠는가?
비록 정치적 싸움 때문이라지만, 그 관료는 사실 새 황제와 경 태후가 벌인 싸움판에서의 장기말 같은 존재였다. 물론 좌천된 사유는 그 관원이 개인적으로 도덕을 지키지 않아 허점을 찔린 데 있었다. 도덕적으로 통제된 사회에서 관료의 도덕적 이미지의 중요성은 관원의 승진과 강등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된 것이었다.
이런 고대에서는 3품 이상의 고위 관료라고 한들, 내일 아침에 당장 어느 외진 곳의 하급 관리로 좌천 될 수도, 심지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될 수도 있는 것 이었다.
고청운은 최근 송나라의 역사서를 읽고 있는데 소식(苏轼), 범중엄(范仲淹) 등의 예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후세에서는 기본적으로 직급이 올라가기만 하면 잘 떨어지지는 않았다. 만약 잘못을 저지르거나 큰 범죄에 연루된 것만 아니라면 최대한 관리직에서 비관리직으로 옮겨지는 것 정도이고, 월급은 한 푼도 적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터였다.
* * *
어느 날 고청운과 방자명은 동향 사람들에게 식사 초대를 받았다. 송인이 연회를 베푸는 것이었다. 모두들 같은 해 시험에 합격한 동기들이자 고향 사람들이었다. 월양군 사람들이니 거절하기 어려워 춘절이 가까워 졌음에도 한 번은 나가야 했다.
이곳에서 고청운은 장수원과 조문헌을 만났다.
조문헌과 이미 경성에서는 몇 차례 만났는데, 이번에 만난 것도 의외가 아니었다.
“사형, 국자감 시험은 합격하셨습니까?”
고청운이 그의 옆에 앉아 낮은 소리로 물었다.
조문헌은 고개를 끄덕이곤 물론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사형, 요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고청운은 그의 웃는 모습을 보고 꽤나 궁금했다. 그는 내년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조문헌이 이렇게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문헌은 턱을 만지며 생각한 뒤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께서 첩실을 하나 내줬다.”
고청운이 놀라서 재빨리 암산해 보았는데, 조문헌은 4년 전쯤 결혼을 했었다. 더 정확히 계산을 해 보면 혼례한 지 3년하고도 한두 달쯤 지난 것이었다. 아내 임 씨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 같아 3년 만에 첩을 들인 걸까.
조문헌의 지금 표정을 보니 매우 기쁜 모양이지만, 그는 아내의 혼수를 써서 상경한 뒤 그 덕택에 이 몇 년 동안 경성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 몇 년을 더 못 기다려 준다는 말인가?
석상에서 송인은 귀도 밝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조 현제. 좋은 일이군요. 한잔 드시지요.”
조문헌은 상황을 보더니 술잔을 들고 고개를 쳐들고 마셨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축하를 하는데, 고청운만 멍하니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어울리지 못했으나 얼굴에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는 오늘 밤 이 이야기를 간미에게 전해주면 불만을 성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조문헌과 절친한 사이였으니, 두 식구의 여인들 사이에도 종종 왕래가 있었다.
석상에서 모두가 웃고 떠들었는데, 곧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거리에서 시작된 떠들썩한 연말 분위기로 인해 모두들 더욱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모두가 술을 권하는 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고청운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송인이 왜 자꾸 나한테 말을 거는 거지? 그것도 진왕에 대한 좋은 말만 한가득 하면서?’
고청운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 방인소에 의해 관청에 대한 상식과 암묵적인 규칙들을 매서울 정도로 주입받았다. 초보자가 겨우 중급자 정도로 발전해 가고 있던 덕분에 아무리 모호하게 말하더라도, 송인의 암시를 대충 알아들었다.
나와서 밥 한 끼 먹는 것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고청운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계속해서 바보인 척 시치미를 떼고 어물쩍 넘길 수밖에 없다.
그는 송인의 중점 목표는 아니었는지, 송인은 이내 목표를 방자명과 장수원으로 옮겼다.
겉으로는 방인소와 장수원의 스승인 양씨 어른 모두 중도파였다. 하지만 아마도 방인소는 황제 측에 기울어진 성향일 것이다. 양씨 어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고청운도 선황제께서 지금의 황제가 황태후와 진왕을 죽일까 봐 걱정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지금의 좌승상은 경 태후의 집안사람이었다. 관계는 좀 멀지만 같은 성씨인데, 좌승상은 여야에서 모두 평판이 좋아 개국 이래 많은 공을 세웠고 황제의 명만 받든다고도 소문이 나 있었다. 성씨가 동일한 경씨라는 점은 아무래도 태후에게는 의지가 될 터였다.
고청운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중간에 포화는 쏟아질 터였다. 그는 그저 친한 친구들이 포화의 소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거인의 신분이 아닌가. 그는 원래 이런 조정들의 투쟁이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지금 여기서 이렇게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진왕이라는 사람은 처한 형세가 좋지 않은 것 아닌가? 그들 같은 거인들조차 가만두지 않다니! 고청운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과음한 체하고 엎드려 버렸다. 그러고는 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이것은 그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는데, 자는 척만 하려다 정말 잠드는 것은 사실이긴 했다. 좌중은 모두 그의 이런 습관을 알고 있어서, 그와 술을 마시려 들지 않았다. 몇 잔만 마시면 잠이 들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연회가 파할 무렵 방자명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뒤 고삼원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주점을 나와 마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고청운과 방자명은 오늘밤 목도한 송인의 수상쩍은 행적을 방인소에게 고하였다.
그는 차갑게 흥하고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그와 접촉만 줄이면 될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겨우 산동 아래 지부 소속인데, 이건 그를 앞잡이로 삼은 게로구나.”
고청운은 알 듯 말 듯 했다. 관리들 사이의 관계는 정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고, 옳고 그름과 진짜와 가짜는 정말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자기가 그 벼슬에 오를만한 자질이 뒤쳐지는 것은 아닌지? 고청운은 이 문제가 너무 대답하기 어렵고 또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세수를 마치고 그는 고삼원에게 자신의 몸에서 아직 술 냄새가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지 않는다고 확인 받고서야 안방에 가서 연 씨와 간미를 보러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저녁 때 간미의 배가 살짝 불룩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배에 대고 <시경>을 한 번 낭독해주었다. 아무튼 그는 돌아가면서 그가 배운 책을 한 번씩 읽어주며, 아기가 태어난 후 자신의 목소리에 최대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였다.
만약 태어난 아이가 똑똑한 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다면 그들 같은 집에서는 학자가 되는 것이 결국 제일이었다.
“부군, 아들이 좋아요? 아니면 딸을 원해요?
간미는 다시 매일 밤 하는 정기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딸, 나는 딸아이를 갖고 싶소. 일단 꽃이 피어야 열매가 맺히지.”
고청운은 눈을 감고도 답변이 틀리지 않았다.
간미는 이제야 그를 놓아주고 다른 화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 * *
보름 후, 또 1년의 섣달 그믐날, 섣달그믐에 먹는 전통 식사를 마치고 밤을 지킬 때, 고청운은 이미 잠든 간미의 얼굴을 보다말고 멀리 남쪽에 있는 가족들이 다시 생각났다. 특히 그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그들이 자기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간미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매우 기뻐할 것이다. 올해 제사를 지낼 때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틀림없이 조상님의 가호를 구하고 있을 것이었다.
두 차례의 향시 시험을 치르는 동안,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조상님께 향을 피워 올렸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그는 울지도 기뻐하지도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