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경성 (2)
하인들이 보들 방석을 내려놓자, 고청운 내외는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앉았다. 연 씨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붉은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너희들 정말 무사히 왔구나. 너희들의 편지를 받은 후부터 이 늙은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단다. 한동안 경성에서는 동남쪽 연해안 쪽에 왜구가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희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그쪽의 배를 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십여 일 전에 너희들이 아직 오고 있는 길이라는 서신을 받았단다. 그 서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걱정하다 어찌 되는 줄만 알았다.”
“저희가 잘못해서 할머님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고청운은 다소 난처해졌다. 오기 전에 편지를 써서 관청 역참을 통해 보냈다. 그러는 편이 그들이 배를 타는 가는 것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후 항주, 소주 등지를 여행하면서는 편지를 보낼 생각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한 통 부치는 데만 은자가 몇 냥씩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를 계속 기다려 그들이 경성에 거의 다 왔을 때쯤에나, 다시 한 통을 부쳐 대략적인 도착하는 시간을 알렸다.
“제가 작년에 왔을 때는 모두 배를 타고 해안을 통해서 다녔는데, 그때는 왜구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왕 씨는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몇 사람이 또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고청운은 비로소 방인소가 아직도 관아에서 숙직을 마치고 퇴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아마도 업무가 비교적 바빠서 그랬을 터였다. 관원은 보통 신시(*오후 4시)에는 모두 퇴근을 했다.
방자명은 미래의 장인어른 집에 찾아가 알랑거리고 있을 터였다. 그의 미래의 아내는 내년이 되어야 겨우 17살이 되기 때문에, 그는 아직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년 그가 회시를 치르고 나서야 혼담이 마저 진행 될 것 같았다.
고청운이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 보니, 내년에는 방자명은 22살이 되는데, 나이가 꽉 찬 이 젊은이는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게 누가 그더러 하상(夏尚)이 늘그막에 겨우 얻은 적녀에게 장가들라고 시켰던가?
하 대인은 향시에 부시험관으로 처음 부임하게 된 분으로, 스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번에 새 황제가 즉위 하고 나서, 그는 정5품의 이부낭중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권세가 대단한 직위인데, 듣자하니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했다.
방인소와 하상이 절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면, 이 혼사는 아직 방자명에게 돌아가지도 못했을 터였다.
고청운 내외 둘 다 객지에서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모습을 보고, 연 씨는 그들을 더 붙잡아 놓기가 어려워, 서둘러 서쪽 사랑채로 가서 먼저 씻게 하고, 저녁에 다시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방자명외의 사람들도 모두 초대할 참이었다.
소도의 안내로 고청운과 간미는 서쪽 사랑채에 도착했다. 첫 번째 정원이 있는 곳은 객실, 거실, 문간, 마구간이 있어서 곁방과 쪽방에는 하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두 번째 정원이야말로 방씨 가문 주인 내외의 주요 활동 장소였다. 정방에는 방인소와 연 씨가 사용을 하고 있었고, 좌우의 사랑채는 남겨두어 손아래 사람들에게 내어주었다.
모두 같은 정원에 머물러 있었는데, 정원에는 많은 화초와 나무를 심어두었고, 안쪽의 나무는 이미 매우 크게 자라서, 각자의 사생활을 가릴 만큼 충분히 커다랬다. 방간 거리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한 장식들을 보면서 간미는 여기저기를 살피다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 여기에서 자랐는데, 건너편 동쪽 사랑채가 이전에 외종조부께서 기거하시던 곳이에요. 나중에는 고향 본가로 다시 들어가셨는데, 우리 아버지도 우산현(乌山县)에 마침 비어있던 교유직을 수임하러 가시느라 우리도 바로 이사를 나갔었지요. 지금 또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지금 맞은편에는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소.”
고청운이 말했다. 방자명 내외는 이곳에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외종조부께서 얼마 전에 이사 나가시고, 외종숙부는 장가갈 때 다른 곳에 신방을 새로 매수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간미도 구체적인 상황을 몰라서 대충 추측해 보며 말했다.
고청운은 그때 가서 방자명에게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은 짐을 잘 푸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들이 살게 될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본채인 정방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한 동(棟)이 세 칸으로 이뤄진 구조였다(*외부로의 출입구는 중앙의 칸에만 있고, 양 곁의 칸인 뒷방에서는 중앙의 칸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는 구조의 집). 정중앙 하나는 거실, 양 옆은 침실이었는데, 두 명만 사용할 곳이기에 연 씨는 그들이 오기 전에 이미 정리를 해두었을 터였다. 남쪽의 침실 하나는 서재로 꾸며져 있었으나, 책꽂이는 텅 비어 있었다.
“미아, 먼저 짐을 푸시오. 나도 책 정리를 할 테니,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후에 다시 얘기합시다.”
고청운은 그 텅 빈 책장을 보자 자신의 책들이 생각났다. 이번에 그는 경성에 오느라 집에 있는 모든 서적을 다 챙겨 가지고 왔다. 사실 얼마 되지 않고 딱 35권뿐이었는데, 이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천천히 모아 온 것이었다. 그렇다, 대다수가 손으로 직접 베껴서 쓴 필사본들이었다.
물론 그가 쓴 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신, 또 상자에 습기가 있을까봐 걱정하는 거죠?”
간미는 그의 다급해진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책 상자는 장목나무로 만들었잖아요. 벌레도 예방할 수 있는데다가, 안에는 직접 방수포까지 두르셨으니 틀림없이 방습도 잘 되어있을 거예요. 먼저 몸을 씻으러 가세요. 영향을 시켜 서적을 정리해두라고 할게요.”
고청운은 민망해서 웃었다. 아마 학자로서의 고질병 같은 것 일 터였다. 전생의 그는 책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았었는데, 여기서는 책 한 권 한 권이 큰돈을 치르거나 심혈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필사해 완성해낸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이 몇십 권의 책은 팔자면 모두 100냥 이상은 할 테니, 물론 잘 다뤄야 했다.
또한 내년의 회시는 모두 이 책들에 의지해야만 했다.
“내가 직접 하리다.”
고청운은 훅훅 한숨을 쉬며 서둘러 거절했다.
간미는 그의 성질을 알면서도 그저 말만 꺼내 본 것이라,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욕을 마친 후, 고청운은 정원에 나가 방택의 배치를 대략 둘러보았는데, 남북, 동서쪽으로 방이 있는 곳 구석에는 곁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청운이 대략 한 번 훑어보니 곳간과 주방으로 쓰던 곳이었고, 서남쪽 구석에는 측간이 있었다.
* * *
저녁 무렵, 방인소가 돌아오고 방인례의 일가족 세 명이 모두 도착했을 때, 방택 전체가 다시 한번 시끌벅적해졌다. 모두 식후에 담소를 나누었는데,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청운과 방자명은 특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었기에 두 사람 모두 매우 흥분하였다.
“하, 은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네가 합격할 줄 알고 있었지만, 역시…… 그것도 해원이라니.”
방자명은 자신의 백부와 아버지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자, 청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서 시샘이 묻어났다.
“흥, 제가 방 형과 같이 시험을 치렀다고 해도 방 형이 해원이 되었을까 모르겠네요.”
고청운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꿈도 크군.”
또한 방자명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키만 조금 더 컸을 뿐 몸매는 예전과 같이 매우 표준적인 체형이었고 여전히 미소년의 얼굴이 남아 있어, 외모가 오히려 더 뛰어나진 것 같이 보였다.
“조 사형의 일은 아쉽게 되었어요.”
고청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양방 진사와 일반 진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아닌가.”
방자명은 여전히 조문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올 8월 하 형이 거인에 합격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할 수 있다면 내년에도 경성에 와야 하고, 그때는 다시 만날 수 있겠어.”
고청운도 이 대목에서 기대감을 드러냈다.
방자명은 도중에 겪었던 일에 대해 묻기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유람하며 거닐었던 것을 듣더니 부러워했다.
“당초 내가 이곳에 올 땐 시험 일정에 맞추느라, 시간이 없어서 아버지도 계속 재촉하시는 바람에 중간에 머물다 올 수가 없었어.”
고청운은 당연히 그 다음 날 밤 벌어졌던 육탄전에 대해서는 말을 삼갔다.
방인례가 이쪽을 한 번 쳐다보자 고청운이 웃었다.
“시험 보러 온 것이니 당연히 시간을 맞추기 바빴겠지요. 우리는 일정과 상관없이 올라온 것이라 시간이 충분했을 뿐이에요.”
속으로는 내년 시험은 합격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방금 방자명에게 물어보았는데, 지난번 회시에 응시한 거인과 감생의 수는 거의 7천 명에 달했는데, 결국에는 500명만 뽑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고 했다.
내년에도 수천 명 이상이 응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통상 200~300명 정도만 뽑는 게 관례였다. 고청운은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여겼는데, 어쨌든 과거제도가 만들어진 지 2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적된 거인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이삼십 년 후가 되면 그 때는 거인이 더 많아 질 테니 합격률은 100분의 1정도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개국 전기에 태어난 것이 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환영회를 마친 방자명은 고청운이 이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이사를 왔다. 두 사람은 늘 함께 논제를 다루고 매일 함께 방인소가 준비한 내용을 공부했다.
게다가 고청운이 이곳에 온 다음 날, 방인소는 바로 그의 공부 상태와 기초 지식을 시험했는데, 다행히 배나 객잔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잊지 않아 망신을 당하진 않았다. 하마터면 스승님께 손바닥을 맞을 뻔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고청운이 외손녀를 데려온 후, 그는 방인소가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졌다고 생각되었다. 여전히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8월의 어느 날, 고청운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집으로 돌아왔다.
간미는 안방에서 그를 위해 옷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후, 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고, 경성에서 유행하는 의복을 따라야 했다. 그는 남자니까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지만, 간미의 경우는 장신구까지 다시 새로 맞춰야 했다. 어쨌든 그들은 가끔씩 방인소와 연회에 함께 갈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친구도 몇 명 사귈 수 있었다.
“이것을 왜 직접하고 있소. 눈에 좋지 않은데. 여종에게 시키면 되지 않소?”
고청운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아직도 늦더위가 가시지 않아 집안인데도 덥소.”
고청운이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덥지 않은 걸요. 직접 만들어 드리는 것이 좋아요.”
간미는 흡족한 듯 웃었다. 부군이 안쪽으로 입고 있는 옷은 모두 그녀가 만든 옷이었다. 겉옷이나 외투는 가끔씩만 만들고 보통은 모두 여종들에게 맡겼다.
“오늘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외할아버지께서 오늘 욕을 안 하셨나 봐요?”
간미는 호기심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듣고 고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어찌 나를 욕할 수 있단 말이오? 요즘 내 책론에 크게 발전이 있었는데, 스승님께서 내가 쓴 내용은 빈 곳이 적고 요점이 있다고 하시며, 내게 어떻게 이런 발전이 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셨다오.”
고청운은 당연히 자신의 비법을 털어놓았다. 상경길에서 보낸 두 달간의 시간은 결코 헛되게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일정한 독서 시간을 제외하고는 배 위에서 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상인들은 그가 거인임을 알아보고는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지에 도착해 객잔에 머물 때는 이야기 나누고 현지 사정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경로가 더 많았다.
이론과 실제 상황이 결합돼 세상 물정을 더 잘 알게 됐으니 민생 등을 다룬 책론은 웬만해서는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이제 내년 시험에서 이쪽 문항의 문제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고청운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간미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더 기뻤던 건,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는 것이오.”
고청운은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간미가 기뻐하며 재빨리 받아들고 봉투를 열어 보니 안에 서신은 두 통이 들어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 중 하나는 틀림없이 자기 부모님께서 쓰신 것일 테다.
간미가 다 읽고 난 후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고청운 자신도 기뻤다. 결국 고향집은 지금 모두 잘 돌아가고 있고 별다른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둘째 누이 고하는 딸을 낳았고, 시댁에서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첫째 누이는 또 회임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