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103)화 (103/504)

103화. 약혼 (2)

고청운은 스승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 마저 공부 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비록 본가에서 좀 멀어지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직접 경성에서 회시를 치르게 되었을 때는 크게 유리할 터였다. 어차피 스승님과 사모님 곁에는 하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고청운과 간미가 따라가서 효를 다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 걸렸다.

당연히 이 모든 걱정들의 전제 조건은 자신이 올해 8월에 있을 시험에 붙고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인소가 그 모습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어깨를 툭툭 치고, 다른쪽에 있던 간미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곧 출산할 터이니, 네가 집에서 네 어미를 잘 돌봐드려야 한다.”

다른 가족들이 같이 있어줬기에, 아직 혼례를 치르기 전인 예비부부가 한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제가 잘 기억해둘게요.”

간미의 목소리가 가볍게 울리고 긴 속눈썹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방인소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소년소녀를 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보기에도 제법 잘 어울려 흡족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버님, 안심하세요. 집에는 제가 있잖아요.”

간지원도 바삐 말을 거들었다. 

방인소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가 곁에 있어주니 노부는 당연히 안심이 된다. 다만 네 녀석들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손 놓고 놀더니, 이제 또 아이를 볼 준비를 해야 하는 구나. 이참에 마음 편히 먹고 잘 지내야 한다.”

방 씨는 회임 8개월이라 걷기가 불편해서 이번 송별회에는 나오지 못하게 했다.

간지원은 일순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떨구고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다.

고청운은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다만 옆의 소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다. 물론 간미가 그를 직접 쳐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간미는 전혀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고청운은 그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사람들이 지켜보자, 고청운은 잠시 숨을 죽였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는 마음이 시킨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약혼녀를 만나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어떻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표현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는 일전에는 정말 어떠한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처음으로 간미에게 호감을 느꼈을 뿐, 이러한 호감이란 감정은 아주 얕아서, 상대방에게 구구절절한 시를 지어 보내고 탄복하게 만드는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고청운은 속으로 매우 고민스러웠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간미는 한 평생을 같이 할 아내였다. 허나 그에 걸맞은 감정을 더 키우려면 혼례 이후까지 기다려 봐야 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청운은 간미를 힐끗 보았다.

간미의 귀는 더욱 붉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청운은 말없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경(*간경의 애칭)아, 공부 열심히 하여 어서 수재에 붙거라.”

방인소는 마지막으로 간경에게 말했다.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 아경이 반드시 해보이겠습니다.”

간경은 작은 얼굴에 진지함을 담아 예를 올렸다. 

방인소가 일일이 당부의 말을 전하고 나자 드디어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갑판 위에서 방인소와 연 씨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였다. 회백색의 하늘 아래 유난히 쓸쓸해 보였고, 연 씨가 손수건으로 눈을 닦는 동작도 어렴풋이 보였다.

고청운은 마침내 그동안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자주 방인소를 귀찮게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방인소는 입으로는 늘 고청운이 너무 자주 와서 귀찮게 한다고 말은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질문에 하나하나 잘 대답해 주고 또 자주 밥을 먹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막 부두를 떠나 강에 물결을 일렁이게 하자, 고청운과 일행들은 한동안 배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동안 멀어지는 배를 가만히 쳐다 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고청운은 간씨 집안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야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아, 남은 몇 달 동안 스승님이 간지원으로 바뀌었구나.’

* * *

두 집은 길 2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매일 미래의 장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는데, 일전에 방인소덕에 새로이 배우게 된 것이 적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완전히 흡수해내지 못한 것이 많았다.

자신의 상경 일자가 대략적으로 정해졌을 때 즈음, 방인소는 큰 힘을 들여 경의와 책론을 가르쳤고, 고청운도 연달아 몇 권의 책을 뜯어보고, 이 지식들을 흡수했다. 다만 느낌에 아직 이해도가 견고하지 않다는 생각에, 간혹 문제가 생기면 간지원에게 가르침을 간간히 청하면서 주로 집에서 조용히 복습을 하기 시작했다. 

고청운은 작은 정원에 혼자 살았기 때문에 식사하는 것이 편하지 않아서, 가끔 숙모에게 가서 식사를 해결했지만, 자주 그러자니 식당이 있는 부둣가가 시내에서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 밥 한 끼 먹자고 그렇게 멀리 가야 하는 것이 못내 시간이 아까웠다. 자신이 직접 식사를 준비하자니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그는 지금 한창 성장기였기에 돌아서면 금방 배가 고팠다. 매일 네 끼 식사를 해도 모자랄 정도였는데, 방씨 집안에 가서 예전처럼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는 음식점에 가서 정해진 시간에 주문한 음식을 자신의 집으로 밥을 가져다 달라고 하여 며칠을 식사해 보았으나, 도무지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대하와 소진씨는 도움 요청을 듣자마자 흥분하여, 두말하지 않고 바로 현성으로 이사 와서 그를 돌봐주기 시작했다. 소진씨는 하루 종일 그를 위해 빨래하고, 밥하고, 뜰 청소하고, 아들을 지켜보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노진씨도 원래는 함께 오려고 했는데, 고청운이 고령의 나이인 할머니가 일을 하시는 게 싫어서, 완곡하게 여러 번 오시는 것을 거절하고 달콤한 말로 오시지 못하게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소진씨는 현성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간혹 시간이 날 때면 간미의 집에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마침 방 씨는 회임하여 함께 이야기 나눠 줄 사람이 없었는데, 소진씨가 현성으로 온 것을 알고, 시기를 봐서 몇 번이고 집으로 초대를 했다. 특히 고청운도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그런 그를 이렇게 건강하게 키워낸 모습에 방 씨는 소진씨의 육아 경험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해 조언을 구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고청운은 두 어머님들 사이에 공감대가 있을 줄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 * *

그가 조용히 공부에 몰입해 있던 어느 날, 고백산이 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다.

“큰할아버지, 저보고 저 아이를 들이라고요?”

고청운은 놀라서 고개를 숙여 눈앞에 있는 아이를 뜯어보았다. 누더기가 다 된 삼베옷을 입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누랬으며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12살은 무슨, 10살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몸집이었다. 

고백산은 한숨을 쉬며 작게 말했다.  

“삼원(三元)아, 고개를 들어라.”

아이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두 눈에 애원, 희망, 절망을 가득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할 줄 아는 일이 많아요. 많이 먹지도 않아요. 숙부, 남아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말 잘 들을 게요.” 

고청운은 속으로 크게 놀라 물었다. 

“큰할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이 아이는 삼원이가 아닙니까? 제 기억으로는 이 아이는 어렸을 때 몸집이 꽤 있고 활달했었는데, 왜 지금 이런 모습이 된 거예요? “

4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 고청운은 마을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지 않고, 만나도 인사만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그의 성격 때문인지 다른 아이들은 어느 순간 그를 만나면 도망갔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어린아이들은 감히 그를 ‘병든 놈’이라고도 불러댔다. 허나 그가 10살 때 동생에 합격한 후 마을 아이들은 거의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도 역시 아는 아이들이 더 줄어갔다.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던 것이다. 

고청운은 지금 그 아이를 어떻게 뜯어보아도 고삼원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다면,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고청운은 그 아이를 기억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네가 마을을 떠난 지 오래 되어 잘 모를게다. 삼원이의 어머니가 6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삼원이의 아비가 여인을 하나 맞았는데, 그 여인은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고백산은 더 이상 말 하지 않았다. 

고청운의 마음은 이미 확실해졌다.

“같은 고씨 일가 사람이긴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 아니라 이 아이의 집안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단다. 매년 제사를 지낼 때도 제대로 눈여겨 본 적도 없고, 고작 몇 번 지나다니면서 본 게 다였지. 그때는 그냥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단다. 새 옷을 입고 있었거든. 그 여자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이번에 삼원이가 도망 나와 나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게다.”

“제가 동생을, 동생을 돌보고 있는데 동생이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절 팔아버리겠다고 해서 무서워서 족장님을 찾아갔어요.”

고삼원이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을 마쳤다. 

“너, 아주 멍청하진 않구나. 사람을 제대로 잘 찾아갔어.”

고청운은 고삼원을 한 번 바라봤는데, 고청운의 마음은 이미 이 아이를 돌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동족 간의 정이라는 것인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라도 돕고 싶어졌다. 

“삼원이는 성품이 착실하니, 네 옆에서 심부름이라도 좀 거들게 하는 건 어떻겠느냐. 품삯은 안 주더라도 밥만 배불리 먹여주면 된다. 16살이 되면 스스로 앞길을 챙길 수 있을 것이야.”

고백산이 데려온 아이가 꼴통 같은 녀석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고청운이 고씨 일가의 염원이라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다른 수재들처럼 서동을 곁에 두고 시중들게 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일을 결정한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수재는 다 서동이 있다는데, 우리 집에만 없을 수 있나?’

게다가 ‘삼원’이라는 이름도 너무 잘 지은 이름이었다. 고삼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고백산은 단번에 고청운이 있는 이곳이 생각났다. (*연중삼원(连中三元/향시, 회시, 전시에서 모두 1등을 한 사람), 연중소삼원(连中小三元/원시, 부시, 현시에서 모두 1등을 한 사람) 모두 ‘삼원’이 들어감)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항렬로도 고청운이 고삼원보다 한 항렬 위여서 심부름을 시키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곁을 따라가면 분명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고삼원이 조금 더 크면 그가 원하는 만큼 돈을 주거나, 혹은 살아나갈 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소개 해 줄 수도 있었다. 이런 일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진씨는 집에 돌아와 이 일을 알게 되고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요 녀석 성정이 아주 좋아. 내가 이 아이 엄마랑 친분이 좀 있었단다. 우선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수 있게 해 주자꾸나.” 

당사자가 밝히지 않은 남의 집안일이라면 상관하지도 않고 상관할 수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먼저 도움을 청하니 당연히 도와 줄 수가 있었다. 

고삼원의 집에서도 분명 다른 의견은 없을 터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