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사제 (2)
방인소는 장시간 책상에서 일을 하니 오십견이나 경추통증의 증세가 좀 있을 터였다. 이전에 그가 늘상 자신의 등을 만지고 두드리는 것을 눈여겨보았다가, 그의 호감을 사기위해 큰매형의 아버지인 하 의원을 찾아가 어떻게 혈도를 마사지하는지 배워 온 적이 있었다.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 터였다. 방인소가 줄곧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가르친 이유 중 하나가 이 혈도 마사지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놈, 단박에 말솜씨가 늘어서 나타났구나.”
방인소는 자신의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은 채 잠시 마사지를 만끽했다.
고청운은 무심코 책상 위의 종이를 보게 되었는데, 뭔가 눈에 익은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던 고청운은 놀라 외쳤다.
“스승님, 제자의 향시 답안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이것은 노부가 사람을 청해 네 녀석의 답안지를 베껴오게 시킨 것이다.”
방인소는 그더러 앞에 서라고 지시하곤 시험지를 훑어보며 말했다.
“노부는 이미 자명이에게 들었다. 너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의 호실을 배정받은 상태에서도 이런 답안지를 완성했다지. 아주 잘해냈다. 노부에게는 예전에 재능이 넘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재주가 이 노부보다도 훨씬 뛰어났었지. 그 친구도 네 녀석처럼 악명 높은 악취를 풍기는 호실 근방에서 회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너만큼 잘 참지를 못해서 사흘 동안 훈제만 당하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시험장을 뛰쳐나가 그 길로 큰 병을 얻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그 후 그는 회시를 위험한 것으로 여겨 몇 년이나 더 지나서야 다시 시험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시험에서 바로 급제했지. 노부보다 2회차나 뒤에 시험에 급제한 것이야. 하지만 관운으로만 따지면 노부보다는 더 좋았다.”
청운은 방인소가 “재능이 넘쳤다”고 칭찬한 친구 분의 학식이 정말 뛰어날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방인소의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답안을 베껴서 돌아오게 했다? 그래도 되는 일인가? 성적이야 이미 발표가 난 것이니 그래도 되나보다 싶기도 했다.
“부탁을 한 사람은 너희들 시험에 부시험관으로 참관한 하상이다. 수리라는 대책 논제에서 네 답안을 보자마자 나와 연관이 있는 학생인 것을 눈치 챘다고 하더군. 너를 합격 시키려고는 하였으나, 경 대인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경 대인이 네 문학적 재능이 부족하여 불합격 시키려 하였으나, 다행히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 다른 사람이 말을 거들어 네 녀석을 보궐 합격자로 올렸고 위로를 할 겸 1등에 이름을 올려 준 게다.”
방인소는 고청운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이야기를 계속했다.
“경 대인은 황후 가문의 사람이자 주임 시험관이다. 그가 낸 의견에 이정도 체면은 챙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방인소는 손을 들어 답안지를 가리켰다.
“이번 시험에서 경의 문제를 제법 잘 풀어냈더구나. 문제의 의도를 잘 파악했다. 다른 산술이나 법률, 잡문 같은 건 이 노부가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너는 아주 잘 했어. 기본적으로 다 맞는 답안이었다.”
고청운은 속으로 기뻐하면서 자신이 방인소를 따라 공부하면서 확실히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들이 이번 시험을 통해 빛을 많이 발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시부는 참…….”
그가 잠시 읊조렸다.
“그 중 한 편은 특히나 출중했다.”
고청운은 더욱 기뻤다.
방인소는 그를 노려보며 다른 종이를 들춰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시 두 편의 단어 선택이 아주 형편없어, 과거 시험 평균에서 중등 이하의 수준이었다.”
고청운의 기뻤던 감정은 일순간 사라지며 표정도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노부가 너의 답안을 모두 첨삭해 보았으니, 이따가 가져가 자세히 살펴보아라.”
방인소가 분부했다.
‘과연 아직은 어리구나, 기쁘고 슬픈 게 족족 얼굴로 드러나는 것이.’
고청운은 바삐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표했다.
그 후 방인소는 곧바로 자신이 가르쳤던 학문 내용을 시험 보게 했다.
고청운은 이상했다. 선생님은 오랜 기간 동안 책을 외우게 시킨 후,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나서야 해설을 해주곤 하였다.
이해가 되진 않았으나, 그는 다시 생각할 시간이 없어 순순히 문제에 대답을 해 나갔다.
반나절이 지나자, 고청운은 이미 입이고 혀가 다 말라버렸으나 감히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엄숙한 표정의 방인소만을 쳐다봤다. 심각한 얼굴의 방인소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청운아, 이 노부를 스승으로 삼고 싶으냐?”
갑작스러운 한마디였다.
고청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고개를 들어 방인소를 쳐다봤다. 그가 웃음 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조건 반사하듯, 그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는데 행동이 이보다 더 신속할 수가 없었다.
“스승님! 당연히! 제자는 원해 마지않습니다.”
고청운은 고개를 들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녀석아, 노부 말이 아직 다 끝나기도 전에 꿇어앉다니.”
방인소는 그의 붉은빛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직 소소한 문제들이 포진해 있긴 하지만, 심적으로는 이 제자가 퍽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성실하지 않은가.
고청운은 이때 바보같이 헤헤거리며 실없이 굴었다. 예상치 못한 기쁨이 들이닥쳐 제대로 된 반응을 해 보이기도 전에 너무 기뻐서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그럼 정식 속수지례(*拜师礼: 정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는 의식)는 언제 거행할까요?”
고청운이 서두르며 물었다. 어서 확정을 지어 무르지 못하게 해야 했다.
“노부가 날을 다 봐왔다. 3일 후가 길일이니, 자명이의 급제를 축하하는 그날에 노부가 너를 데리고 내 몇몇 가까운 벗들을 소개시켜 주마.”
방인소가 고청운을 부축해 일으켰다.
고청운은 고개를 연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식으로 절을 하고 사제간의 연을 맺으려면, 그의 부모님을 모시고 여럿을 청해 증인으로 삼아, 그 앞에서 절을 하는 언약식을 진행해야 했다.
“그럼…….”
고청운은 기뻐하다 말고 문득 방인소 외손녀 일이 생각이 났지만, 말을 조금 더듬을 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가 않았다.
방인소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이 연을 맺고 말고의 문제는, 노부가 너를 제자로 거두는 것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게야.”
고청운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쁜 내색은 차마 표출할 수 없어 속으로만 기뻐했다.
방인소는 마저 그의 답안지를 품평해 주었기에, 고청운은 큰 덕을 보았다.
방인소의 평가 덕분에 자신의 문제 풀이에 대한 기교가 한층 더 강화되었음을 느꼈다.
이번에 낙방할지는 몰랐으나, 방인소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 자신에게 정말 큰 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가뜩이나 진사도 얼마 없어, 지도해 줄 만한 스승을 찾는 것 자체가 큰 요행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더욱이 자신이랑 기본적인 관념이 서로 상충하지도 않는 인물인, 방인소씩이나 되는 사람과 사제의 연을 맺을 수 있다니. 방인소는 믿음직하기까지 하지 않던가. 정말 운수 대통한 일이었다.
‘결심했어. 앞으로는 방자명에게 무조건 더 잘 해줘야지. 그는 정말 내 행운의 아이콘이야.’
두 사제의 대화가 막 끝나자마자 문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방인소의 동의를 얻어 들어온 사람은 방인소의 종복인 상산(常山)이었다.
“나리, 부인 마님과 고모할머님께서 도산사에서 돌아오셔서 이제 막 식사를 하시려는 참입니다.”
상산은 경례를 하고 나서 말을 전했다.
방인소와 고청운이 서재의 모래시계를 보았는데, 이미 오시(午時)가 되어 있었다. 사제 둘이 기쁨에 젖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담소를 나눴던 것이다.
대청 안에는 고청운이 처음 보는 스승님의 여식 방 씨와 외손녀 간미(简薇)가 자리하고 있었다. 방 씨의 연령은 30대 남짓으로 보였고, 생김새는 방인소를 꽤 닮은 탓에 스승님의 사모님인 연 씨 만큼 용모가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꽤 빼어난 용모라고 말할 수 있었다. 기질은 매우 좋아보였는데, 말하는 것이 시원시원하여, 직설적인 성미일 것으로 보였다.
간미의 구체적인 연령은 모르겠으나, 고청운과 비슷해보였다.
방인소가 소개를 하고 있을 때, 고청운은 그저 감히 한 번 총총 쳐다보며, 얼굴이 청초하고 피부가 희고 보드랍지만, 기질은 매우 고상해 보이는 아가씨를 눈에 담았다.
모두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남녀로 탁자에 나누어 앉아 식사를 했는데 두 탁자 중간은 병풍으로 가로 막아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간미는 자리를 피했으나, 고청운은 마저 자리를 피하지 못한 고 스승님의 사모님과 방 씨를 모시고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아마도 방인소가 자신을 제자로 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들 계셨을 것이기 때문에, 연 씨와 방 씨의 태도는 매우 좋았다. 고청운이 느끼기에 그들과의 대화는 유쾌한 편이었고 두 사람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대화하는 내내 모두들 계속 싱글벙글했으니 말이다.
그녀들의 주요 관심사는 고청운의 가정사, 방자명과의 재미있었던 일, 또는 학업에 관한 것이었다. 세 사람은 각지의 서로 다른 풍토와 인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대화 말미에 이르러서는 방 씨가 경성에서 돌아와 거쳤던 여러 지방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해주었다.
고청운은 그녀들의 의중을 잘 알았기에 무릇 가정 형편이나 가풍에 관한 언급이 있으면 최대한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인소가 그를 구해주러 왔는데, 고청운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며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집에 돌아온 후, 고씨 집안 가족들이 자신이 방인소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들 몹시 기뻐하며, 두말 할 것 없이 바로 속수지례를 치룰 채비를 하였다.
고백산 역시 매우 흥분해 준비 작업을 지휘했다.
사흘 뒤 두 가족이 증인이 되어 지켜보는 가운데, 고청운은 방인소에게 사제지간의 예를 올려 정식으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또다시 찾아온 사흘 뒤, 고청운은 방자명의 급제를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번에는 임산현 전체가 누구나 자기 스승님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 * *
황제의 승하 소식은 고청운에게는 너무 급작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선황제는 비교적 장수했던 인물로, 고청운이 이 세계에서 태어난 이후로는 계속 한 황제가 60몇 세까지 황제를 지내다 승하한 것이라 거의 제일 장수했던 황제라고도 칭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나라를 새로 건립한 개국 황제로서, 선황제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 역시 다분히 감격스러운 것으로, 필경 선황제는 난세를 평정하고 최근에는 꽤 순탄하게 통치하지 않았던가. 그간 백성들의 수입은 늘어났고 그만큼 늘어난 세금도 황궁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랬기 때문에 황제의 승하의 영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규정에 따라 모든 백성들의 집 문 앞에 흰 헝겊 조각을 묶어놓고, 100일간 경사를 치룰 수 없었다.
관리들에게는 황제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쓰는 문장들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은 고청운과는 모두 무관한 일들이었다.
그런 무관한 일들을 제외하고, 고청운이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스승님께서 예전에 뭘 알고 계신 것이 있어서 고의로 복직하지 않으셨던 것인지, 그리고 언제 정식으로 복직을 하실지? 하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문제들을 스승님께 직접 여쭈어 볼 수는 없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또 한 가지 사건은, 바로 새로운 황제의 즉위였는데, 이로 인해 내년에 은식(*恩式: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과거)이 개최될 지도 몰랐다. 그 덕에 향시가 한 번 더 열리는 것이 아닌가?
황제의 서거로 고씨 집안에도 영향을 받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고하의 혼인 일정이 미뤄진 것이었다. 가을 추수기가 끝나면 올리려던 혼례식은 내년 1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상 기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므로, 감히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거나 술잔을 나눌 수도 없었다. 그냥 말 잘 듣고 꼼짝 없이 집에 앉아서 책이나 읽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