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따뜻함을 느끼다
방자명이 정신없이 방문을 나왔을 무렵, 고청량은 손님 한 명을 배웅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몇 개의 가문 이름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방자명은 그의 옆에 앉아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어느 집으로 정했어?”
“한 집 골라주지 않을래요? 괜한 원한을 만들까 두렵네요.”
이번 시험에서 평민 자제들 중에서는 겨우 4명만이 대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그의 양도권은 비교적 경쟁이 치열할 터였다.
고청운은 이번 부검사관이 평민 출신이라 자신과 같은 평민 출신 수재가 넷씩이나 당선된 거라고, 평소 같으면 고작 2명 정도만 이름을 올렸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냥 이 집으로 해. 이 집이 그나마 좀 대범한 편이라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제압할 수 있을 거야.”
방자명이 명단을 보다가 그 중 한 성씨를 가리켰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곤 고청량을 시켜 다음 날 상대방에게 결과를 알리도록 했다.
“어젯밤엔 어딜 갔었어요? 한밤중이나 되어서 돌아오던데.”
고청운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방자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종이를 잘 회수하고, 아직 대답을 못 듣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는데,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헐……’
고청운은 소문을 떠올리며 참지 못하고 캐물었다.
“청루는 아니겠지요?”
매번 합격자 발표 이후에, 신생 거인 당선자들은 모두 청루에서 공짜로 먹고 마실 수가 있었는데, 이는 하룻밤 지내는 것을 포함했다.
방자명의 입가엔 가벼운 웃음만이 걸려 있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나. 고청운은 이마를 짚었다. 처남과 매형이 같이 청루에 가는 그림 마냥 왜 이렇게 불편한가? 설령 요 몇 년 동안 지식인들의 이른바 '풍류'를 많이 봐왔지만, 고청운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는 아직 어리니, 다음번에 급제하게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방자명은 쥘부채를 퍼덕거리며 변명했다.
“난 그런 곳에 남아 밤을 지새운 게 아니야. 나랑 장수원 둘 다 안 그랬어. 그냥 술만 좀 마신 거라고.”
고청운은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줄곧 청렴했던 방자명조차도 원래 이런 욕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이미 18살이 되었고, 이곳이 고대인만큼 응당 이제는 자기 처가 있어야 하는 나이지 않는가. 다만 지금 그가 아직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관원은 풍류를 즐기는 장소에 출입할 수 없다고 조정에서 정하지 않았던가요.”
고청운은 아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이미 관료가 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거지, 우리는 아직 정식 관리가 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런 일을 금지할 방도가 있겠어? 우리가 간 곳은 심지어 청루가 아니고 그냥 ‘찻집’이었다니까. 표면상으로도 해당되지 않으니, 이 얘긴 그만하자.”
방자명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고청운은 그들에게 매우 큰 세대 차이를 느꼈다.
방자명이 녹명연에 참석하러 갔을 때, 고청운은 이미 입학 자격을 양도하여 총 300냥의 은자를 손에 거머쥐었다. 남은 수속은 그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되고, 수속에서 발생하는 비용 역시 더 이상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은 300냥이라, 경성까지 가서 회시에 참가할 만한 충분한 돈이었다. 손에 돈이 들어오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경성까지 가서 시험을 한 번 치르는 데 적게는 은 100냥 이상이 들어갔는데, 이것은 육지로 가는 비용이라 매우 고생스럽기 그지없고 두 달여 가량의 시간이 부차적으로 더 소요되어야만 경성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만약 물길을 통해 간다면 한 번 시험에 은자 2~300냥이 들어가며, 그래도 비교적 몸이 편할 것이고 들이는 시간도 좀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거인이 되었다고 해도 모두 회시를 보러 갈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돈이 좀 모여야 한 번이라도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 그래서 아예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관직 자리가 나서 그제야 그 자리에 곧장 파견가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그의 수중에 돈이 많이 들어와, 고청운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 * *
방자명이 볼일을 다 본 후, 두 사람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배에 타고 임산현에 가까워질수록 고청운은 점점 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가 이번 시험에서 급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전에 가족들이 그에게 보내던 기대에 찬 눈빛이 떠오르자, 적잖은 압박으로 다가와 견디기 힘들어졌다. 어찌 되었건 고청운은 결국 경성까지 가서 시험을 보고 낙방한 뒤 고향에 돌아가기를 꺼리는 다른 응시생들이 이해가 되었다. 고청운은 안 그래도 주머니가 얇고 돈이 없었는데, 경성에는 일거리도 찾기가 비교적 쉽고 기회도 많을 것 같아 돌아가기 싫어졌다.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고향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린 탓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에휴, 내가 호전적이지 못하고 학업에 열의가 없던 탓이지.’
고청량은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화물 목록을 보고 있었는데, 목록을 다 보고나서 말했다.
“불합격이면 그냥 불합격인거지. 어차피 지금 넌 이렇게 젊잖냐. 3년 뒤에는 반드시 합격할 거야.”
그는 자신의 사촌동생에 대해 아주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시험만 해도 간발의 차이지만 합격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럼 3년 후에는 또 어떻게 될까!
고청운이 눈을 흘겼다.
“3년 후에는, 또 시험 유형이 바뀌겠죠. 어디 그게 그렇게 쉽게 합격이 되겠어요?”
“어차피 내가 현시를 치르는 것보다는 쉬울 거야.”
고청량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장수원도 방자명도 합격했잖아. 대단한 녀석들은 이미 다 합격했다고. 3년 후라면 네가 1등이 될 거야! 해원에 등극하기만 하면……”
고청량은 무한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헤헤, 그럼 난 거인의 사촌형이 되는 것이다!’
“무슨 헛소리예요?”
고청운은 그의 머리를 밀어젖히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3년 동안 더 걸출한 수재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 있어요? 매번 같은 사람들끼리만 시험 치는 것도 아니고.”
고청량은 그저 생각만 하고 말을 뱉지는 않았다.
고청운이 걱정하는 일은 사실 하나가 더 있었다. 그가 거인이 되지 못한 지금, 방인소가 그를 제자로 받아줄까? 아내를 맞이하는 일 같은 것 따위는 오히려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장가야 꼭 가야만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그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현성 부두에 도착하여 방자명과 헤어진 후, 고청량은 마을 사람들에게 챙겨온 화물을 메고 고청운의 자택까지 옮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물건을 다 옮기고는, 물건을 팔아줄 가게를 찾아 가버렸다.
자신의 집에 도착한 고청운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우물이 있는 쪽에 낙엽이 약간 있는 것을 빼면 자기 방의 책상이 모두 아주 깨끗한 것을 발견하였다. 틀림없이 자신이 집에 없는 동안 식구들이 와서 청소를 해준 것이었다.
그는 계화나무 아래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방금까지도 자신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설마 그들은 아직도 자신이 낙방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예전 관례대로 생각해 봤을 때, 집에 합격 소식을 알리는 보희가 파견되지 않았을 텐데, 이는 자신이 낙방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 부모님이야 모르고 계실지언정 큰할아버지만은 반드시 낙방 사실을 알고 계실 텐데.’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자신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몰랐었는데, 차라리 이렇게 된 상황이 나쁘지 않다 싶었다.
이 일이 발생한 지 겨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고, 마침 고청운은 방인소가 언제 기복될 지 의아해하고 있던 바로 그때, 소식이 전해져 왔다. 황제가 승하하시고, 그의 태자가 황위에 즉위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고청량이 자신을 찾아온 사람에게 물건을 보여 되팔고 있을 때는 아직 날이 어두워지진 않았을 즈음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낮이 길고 밤이 짧은 편의 절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그들이 현성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밤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고청량으로부터 43냥이라는 은자를 건네받은 고청운은 감탄하며 말했다.
“둘째 형, 정말 대단해요! 손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몇 냥씩이나 되는 은자가 들어오다니! 집에서 농작물 키우는 것보다도 수입이 훨씬 낫네요.”
고청량은 헤헤하고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네 덕을 본거지 뭐. 이번 여정 내내 먹고 입고 자는 모든 비용은 일절 네가 돈을 내고 있는데, 아직 내게 들어간 여비를 계산해 주지 못했어. 이번에 물건을 옮길 때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덕에 품삯이 덜 들어 겨우 비용을 좀 남겼네.”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며 산속을 통과하였는데, 도강 부두가 나타났다. 근처 몇 개의 마을들은 모두 이 길을 지나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길을 다니는 사람이 늘어나자 길은 점차 넓어지기 시작해, 길에 가로로 자라나 길을 막는 나무들도 없어져 길이 아주 좋아졌는데, 그 덕에 젊고 체력 좋은 두사람은 반시간도 못 돼 임계촌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돌아와서야 날이 막 어두워졌고, 마을에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마침 저녁밥을 먹을 즈음에 딱 맞춰 도착했다.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 마을 주민들과 평소처럼 인사를 나눴다.
고청운은 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때로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기껏해야 한낱 화젯거리일 뿐일 때가 있는 법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옆에서 몰래 그의 표정을 살피던 고청량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때? 한숨 돌렸지? 모두들 너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아. 남들이 아무리 뭐라 한들, 너는 우리 마을 유일한 수재야. 다른 사람들이 어찌 감히 네 미움을 살 짓을 하겠니? 네가 3년 후에 시험에 급제할지 또 누가 알아? 다들 그렇게 생각들이 얕지 않아.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고청운은 그를 한 번 흘겨보았다.
“우리 수재님, 돌아오셨습니까?”
맞은편에서 걸어온 이씨 셋째 숙부는 그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고청운은 급히 몇 걸음 더 다가가며 대답했다
“네, 밭에서 지금 돌아오시는 길이세요?”
고청운은 그가 메고 있는 호미와 그의 발에 묻은 진흙을 보았다.
“맞네, 밭의 잡풀들을 미리 매어 놓지 않으면 묘목보다 더 높이 자라버리지.”
그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우리 수재님, 이번 시험 합격하지 못한 일이걸랑 신경 쓰지 마시게. 아직 젊지 않은가. 자네에게는 기회가 앞으로 또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는가? 좋은 일들도 많은 만큼 또 삶이 모두 다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지. 삐걱거릴 때도 있는 것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게.”
고청운은 채 막을 틈도 없이 들어온 위로에 마음 한편이 치유되며 따뜻함을 느꼈다. 그는 황망히 대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셋째 숙부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고청운이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주는 모습을 보니 매우 기뻐하며, 수염을 만지며 재촉했다.
“빨리 집으로 들어가시게들. 자네 할머님께서 며칠째 네 얘기만 하고 계셔.”
이에 고청운은 화답하며 고청량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