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두통
밤이 되자, 황언성이 대추술 한 병을 들고 와서 마실 거냐고 물었다.
고청운은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흔들었으나, 황언성의 기대에 찬 모양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가 가져온 대추술은 투명한 금색을 띠었는데, 술병을 열자 대추향이 진동을 했다. 고청운은 냄새만 맡고도 자기가 사온 술보다 대추술이 더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흔쾌히 마셨다.
인삼과 대추는 체력을 보충해 준다고 했던가, 일반적으로 향시에 응하는 사람은 조건만 맞으면 다 준비해 오는 편이었다.
다만 두 사람 모두 감히 거나하게 마실 생각은 못했다. 과실주라고는 해도 내일 시험에 영향이 갈까 봐 그랬다.
저녁에는 악취가 진동을 하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고청운은 병사들에 의해 코를 쥐고 자신의 호실로 돌아갔다.
4일 째 아침,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책론과 시부 문항의 시험 이었다. 책론 항목은 단 두 문제만 출제 되었고, 첫 번째 시험 때보다도 양이 적어보였다. 하지만 책론 문항에서 기술해야 하는 답안의 수준은 높은 편이었다.
그 중 한 문제는 크게 현 왕조의 병술학적 우세점을 논하는 것이었는데, 이 전의 왕조와 비교해서 답을 해야 했다. 고청운은 다행히 이번 왕조에서의 군사제도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고, 옛 역사서도 섭렵했던 적이 있어 이전 왕조들의 병사제도를 기억하고 있기에, 기억을 더듬어 대조해 볼 수 있었다.
과거 시험의 한 과목인 수재(秀才)와 비교해 보자면, 향시는 더 시사에 치우친 문제를 내는 경향이 있었다. 어떨 때는 현재 당면한 논점 문제가 더 많았다.
그리고 한 문제는 수리(水利)분야였는데, 이쪽 문제는 그가 잘 하는 분야였다. 방인소도 고청운과 비슷한 문제를 논한 적이 있었고, 필경 미래 자신의 본업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고청운은 스스로 답을 나쁘게 쓰진 않았다고 자평하고 있었다.
다만 원고지에 답을 적어내고 수정을 할 때, 자신의 문체가 그닥 수려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경전중의 어구나 고사를 인용함에 있어 실책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적 경지의 한계 탓임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이 드디어 끝났다. 고청운은 스스로 또 이 고비를 견뎌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3일의 시험도 종국에는 그가 이겨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번에 복도 어귀에서 장수원을 마주쳤을 때는, 서로가 피차 머리와 얼굴에 온통 먼지투성이라 그다지 아름다운 몰골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그 누구인들 제대로 씻지 못하는 이런 환경에서는 아름다운 몰골을 유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보통 때라면 모두 이 한여름에 매일 같이 몸을 씻었을 텐데, 지금은 며칠을 못 씻었더니 모두들 쉬어 비틀어져서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꾀죄죄해지는 것 같았다.
‘향시가 사람을 잡는구나.’
속옷만 입고, 바짓가랑이를 한쪽만 걷어붙인 장수원은 고청운이 화로에 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청운이 네가 제일 정신을 잘 붙잡고 있군요. 음식을 챙겨먹을 생각을 다하고.”
장수원은 말하면서 등 뒤에 꽂아 놓았던 쥘부채를 다시 꺼내,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막 답안지를 내고 모두들 쿨쿨 자고 있었다. 배고픈 것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고청운은 그의 눈처럼 희던 속옷이 누렇게 변해버린 것을 보고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장 형도 정신은 잘 차리고 있네요. 맞다, 장 형도 좀 같이 먹을래요?”
그는 여린 생각의 소유자였다. 만약에 이번 시험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그는 올해 아직 16살로, 다음에 다시 시험을 보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그는 이미 수재였고, 일전에 원시를 치렀을 때처럼 긴박하진 않았다.
이번 시험에서 떨어진다 한들 죽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몸 건강을 챙기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했다. 살아 있어야 미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되었건 그는 지금 매 끼니를 시간 맞춰 잘 챙겨 먹었고, 점심시간에도 때 맞춰 휴식을 취하며 첫날처럼 점심 휴식을 거르거나 하지 않았다.
장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주저앉아 말했다.
“그럼 낯짝 두껍지만 한 그릇만 빌붙을게요. 인삼탕을 먹었는데, 인삼탕이 아니면 못 견디겠어요.”
고청운도 이 말에 공감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뱉었다. 둘 다 먼 곳의 화롯불을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속내는 꺼내 놓지 않았다.
밖에는 이미 광풍이 세차게 불어치고 있었다. 밖이 어둑해 지기 시작했는데, 보아하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고청운은 자신의 호실에 붙어 있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곳에는 이미 벌레가 떼거지로 몰려있었는데, 다행히 먹을 음식은 모두 기름종이로 꽁꽁 싸매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건강에 무슨 이상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2, 3일 동안은 호실 내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고 건량만을 먹었다. 오직 시험지를 제출하는 날 점심때와 저녁때만 요리를 했다. 오경계에는 물만 끓고 있었고 차를 우리고 나니 좀 견딜 만했다.
두 사람은 죽 그릇을 다 비웠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어두워져 곧 비가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장수원은 자신의 호실에 쉬러 돌아갔고, 고청운도 물건을 정리해 재빨리 돌아갔는데, 지붕에서 비가 샐까 두려웠던 것이다.
호실에 돌아온 고청운은 재빨리 기름종이를 꺼내서 시험 바구니와 침대를 덮었다. 이때 이미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고청운은 방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본 후, 자신의 호실에 정말 비가 새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젠장! 정말로 물이 새다니!’
그가 서둘러 우산을 폈다.
바닥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걷어 침대 안쪽에 몰아두니, 고청운은 눕고 싶어도 누울 수가 없었다. 물건들 때문에 누울 공간이 마땅치 않았고 우산도 들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제일 운이 나쁜 경우는 아니었다. 그의 맞은편 호실은 비가 한 곳만 새는 것이 아니었다. 건너편 형씨의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고청운은 그저 한 번 웃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호실 내에 웅크리고 우산을 펴들고 있었다. 극소수만이 초를 켜고 있었는데, 그나마 복도의 등이 밝은 편이라 모두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 황언성의 운은 아주 좋았다. 그의 방에는 비가 새지 않아 그는 아주 달콤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시험지를 제출한 이후 지금까지 빗소리마저 그를 잠에서 깨울 수 없었다.
그날 저녁때는 조금 추웠다. 고청운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누워서 잠들었다. 그러나 잠이 들기 전에 빗물에 바닥이 젖어 그는 뿌려둔 웅황분 효과가 사라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재빨리 한 번 더 뿌려놓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니 비가 더 이상 내리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한숨 돌렸다. 지금 같아서는 쪄죽으면 쪄죽었지 비가 내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세 번째 시험은 잡문, 법률, 경의 그리고 시부 시험이었다.
잡문은 관청에서 위아래로 오가는 공문으로써, 그를 난처하게 할 만한 문제들이 아니었다. 법률은 제공된 판례에 따라 판결문을 쓰면 되는 것이니 이 또한 답을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잡문과 법률 과목에서의 배점이 높지 않아서였는데, 관건은 역시나 경의와 시부 문제였다.
오경 중의 <경의>에서 출제된 두 문제는, 하나는 어렵고 하나는 쉬웠는데, 관행적인 문제가 하나, 장탑(长搭) 형식에 맞추어 답변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문제 분석이야 그렇다 쳐도 제일 마지막에 있는 시부 문항은 무려 3구절의 시를 엮어 답변해야 하는 문제였다. 하필 마스크 써도 가려지지 않는 하늘까지 치솟는 냄새를 맡으며 문제를 풀어야 하니 짜증이 머리 꼭대기에 부딪쳐 목전의 시험지를 찢어 갈기고 싶을 뿐이었다.
‘진정, 진정하자.’
고청운은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졌다. 특히나 옆 호실의 형씨가 악취와의 싸움에서 져서 폭발해 병사의 손에 이끌려 나올 때, 그는 자신을 더 잘 위로할 수가 있었다. 그래, 최소한 자신은 버틸 만하다며.
고청운은 자신의 수양이 아직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리 화가 났을까? 다만 한 구절 한 구절 문제의 출제의도에 맞춰서 답만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는 두통이 오는 것을 느꼈다.
일어서서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가 이웃 호실의 한 응시생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사병들에 의해 들려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 복도 골목 어귀에서 한 번 마주쳤던 몸집이 살짝 통통한 편의 수재였는데, 그때는 건장한 체격이라고 기억했는데, 막상 지금은 얼굴에 핏기 하나 없고 눈 밑에 검은 자국이 매우 심하게 내려앉아있었다. 심지어 살도 꽤 빠져보였다.
시험장 안에서 병이 난 것은 상당히 재수 없는 일에 속하긴 했다. 왜냐하면 비록 쓰러져 있어도 시험장 건물의 봉쇄를 해제하고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시험장에 남아 있어야 했다. 병이 나서 시험을 중도 포기한 응시생들이 가게 되는 독립적인 공간이 있기는 하다. 이곳은 의원까지 대기하고 있어 진료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파도 시험이 다 종료되어야 다른 응시생들과 함께 이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고청운은 이 규정을 처음 알았을 때 봉건사회란 정말이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사회풍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수험생의 병이 아주 심한 경우엔 어쩔 것인가? 시험장에 있는 의사가 반드시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치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약을 보유하고 있긴 한 건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큰일에도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사람 목숨이 정말 부질없기도 했다.
하지만 예년에 불이 나 타죽은 사람, 뱀에게 물려 죽었다는 시험 응시생을 생각해 보면 또 한편으로는 이 사회의 규율이 본디 이렇게 생겨먹은 것인가 싶기도 했다. 지금의 황제가 유일한 만인지상이라 그들 입맛에 맞는 상황만 골라냈을 뿐이 아닌가, 부귀공명을 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한단 말인가.
생각이 너무 멀리까지 왔다. 고청운은 몇 사람이 멀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며 다른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강제로 마음을 다잡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떻게 논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쉬운 문제 먼저, 어려운 것은 나중에!’
잡문과 법률은 오전에 다 마칠 수 있었다. 베껴 쓰기까지 마친 후, 뜨거운 물로 찐빵을 익혀먹었더니 배가 꽤 불렀다. 그러자 식곤증에 머릿속이 약간 흐리멍덩해져 잠시 누워 잠을 자기로 했다.
이 날 점심때는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자게 되었다. 그 덕분에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는데, 얼굴을 씻고 정신이 들었을 때를 노려 경의 문제를 해치워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서오경이란 책을 제대로 외우려면 글자 수야 40만자가 좀 넘을 뿐이지만 그 외에도 원문의 몇 배 분량의 주석과 함께 읽어야 했다. 시험을 위해 읽어야만 하는 율법서, 산수학, 잡문 사례, 역사서, 문학서적부터, 과거 여러 해 출제가 반복되었던 향시의 단골문제들과 과거 향시 문제와 새로 나온 시들까지 합쳐 계산해 보면, 기억해야 할 내용이 아주 광범위 했다.
그래서 지금 장탑 형식에 맞춰 논해야 하는 경의 문제는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부터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어떻게 풀어나갈지 비로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뒤로 갈수록 그의 사고 속도는 더 느려지고, 머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며, 며칠 전만큼 빠르게 머리가 돌지 못했다. 겨우 두 문제를 풀다가 이미 저녁시간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시부의 세 번째 문제만을 남겨놓고 고청운은 아예 시험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직 하루가 더 남아 있지 않은가. 급할 것 없으니 좀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