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85)화 (85/504)

85화. 제안 (2)

“일어나렴. 예를 갖출 필요 없다.”

연 씨가 채 말리기도 전에 고청운이 성심을 다해 이미 무릎을 꿇은 것을 보고 얼른 일으켜 세우는 시늉을 했다. 

옆에 있는 여종이 재빨리 포단(*蒲团: 부들 방석)을 가져갔다. 

고청운이 다시 앉은 후, 앞에 앉아 있는 두 분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연 씨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마흔을 갓 넘긴 것 같았고, 회백색 천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꽂은 은비녀 외에는 몸에 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았는데, 손목에는 단향목 염주를 차고 있었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보름달 같이 환하고 고왔다. 분을 바르지 않았고 눈가에는 또렷한 주름이 보였는데 눈에는 유난히 총기가 가득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머리는 여전히 새까만 색이었다. 그녀가 젊었을 적 얼마나 빼어난 미인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가 더욱 친절하고 온화해 보였다. 

“의인이라고 하지 말거라. 내 외손과 나이가 같으니, 연 할머니라고 부르시면 된단다.”

연 씨가 웃으며 말했다. 

고청운은 그녀가 분명 웃으며 말하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큰 압박을 느끼며 그녀 말대로 “연 할머니”라고 불렀다. 

연 씨의 얼굴에 더 큰 웃음이 번졌다. 

그 후, 세 사람은 같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방인소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가끔 한 두 마디만 할 뿐, 대부분 연 씨와 고청운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온화한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조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가 사람에게 신뢰를 주어 귀를 기울여 듣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알고 있는 게 많아서 고청운과 시문과 경의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고, 가끔씩 가족 이야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고청운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 집안 가족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이 점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이야기를 다 한 후였다. 하지만 고청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안일 중 외간 사람에게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는 아예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때 방인소가 입을 열었다.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고? 논에서?”

고청운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닭을 돌보고 땅을 쓸고 밥을 짓고 아이를 돌보는 일은 했지만 농사일은 반나절만 하고 더 이상 하지 못했습니다. 벼가 까끌까끌한 것이 아파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여기에서는 어떻게 일을 계속 했느냐?"

“학생이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서 스스로가 계속할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망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고청운은 이참에 자신의 목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럼 지금 쌀이 한 근에 몇 문인지, 달걀이 개당 얼마인지 알고 있느냐?”

“쌀겨를 완전히 벗겨내지 않은 쌀은 한 근에 5문이고, 완전히 제한 쌀은 한 근에 7문입니다. 달걀은 보통 개당 1문이지만 가격은 매번 닭 급성 전염병이 발생하면 현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요. 학생이 기억하기에 가장 비쌌던 때는 개당 3문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록 방인소가 왜 자신에게 이토록 간단한 질문들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럼 할머니, 외할머니, 누이들에게 무슨 선물들을 했었지?”

고청운은 방인소의 엄숙한 모습을 보며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바로 답했다. 

“연지와 같은 화장품과 머리 장식을 선물했습니다.”

심장이 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의도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부인, 어떤가?”

방인소는 고청운의 대답을 듣고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돌려 연 씨를 보았는데, 그의 답에 만족스러운지 불만족스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연 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 방인소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실 네가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건 아니지. 시 짓기에도 별 다른 영감이 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중요시 여기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니, 잠시 언급하지 않겠다. 너처럼 공부 계획을 잘 세우고 자제력이 강한 학생도 몇몇 보았고, 10살짜리 수재도 본 적이 있어서 딱히 놀라울 건 없다. 허나 본래 제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동안의 언행을 보고 너를 놓치면 매우 아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는 잠시 멈추고 차를 한 입 마셨다. 

고청운의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그는 그저 방인소의 동작을 살피다가 찻잔이 비워진 것을 보고 급히 차를 따랐다. 

방인소는 전혀 미동도 없이 찻잔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별로 개의치 않다. 그런데 수리 농경과 산학 쪽에 관심이 있고 또 직접 행동하기도 하는 점을 드높이 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쪽이 이 분야이기도 하고. 다시 묻겠다. 지금도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으냐?”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매우 원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서 이 일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을 더 할 틈도 없이 방인소는 말을 계속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겐 여식이 하나뿐이다. 그리고 간지원에게 시집을 보냈지. 만약 그 아이들이 아들을 둘 낳았다면, 하나는 데리고 와서 성을 방씨로 지었을텐데, 지금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지. 외손녀는 너와 또래인데, 만약 나를 스승으로 모시면 외손녀 사위로 들이고 싶구나. 만약 괜찮다면, 앞으로 아들을 둘 이상 낳았을 때 하나는 방씨로 짓는 건 어떻느냐? 물론 아들이 하나뿐이면 내가 한 말은 그냥 잊으면 된다.”

이 말을 할 때 본래 그저 웃으며 있던 연 씨도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고청운은 그가 쏟아내는 말을 듣고 순간 정신이 없었다. 

“난 항상 듣기 어려운 말들을 먼저 하곤 한단다. 만약 원한다면 제자로 받아들여 성심성의껏 지도를 하마.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미움을 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내게 묻거라.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해 줄 테니.”

고청운은 모든 일들을 이해한 후 얼른 입을 열었다. 

“대인, 그저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대인의 족인도 가문을 잇는 일에 동의를 하나요?”

방인소는 정6품의 경성 벼슬이었고, 그의 가문이 전체 가족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부유했다. 다른 족인들이 가문을 잇는 일에 반대하지 않을까? 

아마 고대에 오래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고청운은 가장 먼저 방씨 가문 족인의 반응을 아내를 얻는 문제보다 우선순위에 두었다. 

“하하,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이미 족장과 논의한 문제니까.”

방인소가 웃으며 답했다. 

“대인, 학생은 사내이고 대인의 외손녀를 아내로 맞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지금 천하에서 사내는 무엇을 해도 손해 볼 게 없으니, 학생은 혼인에 동의하지만, 대인의 외손녀는 이 혼사에 동의하나요? 그녀도 원하나요?”

고청운이 급히 물었다. 만약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 아니던가. 

방인소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군, 이 일을 너무 성급하게 진행하는 것 같네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시죠. 청운의 인품을 매우 높게 사는 바입니다.”

옆에 있던 연 씨가 입을 열었다. 

방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스승으로 모시는 일은 나중에 이야기 하고, 앞으로 나를 따라서 공부를 하다가 내년 향시를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우리도 이 일로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다. 네가 말한 것처럼 당사자 둘이 마음에 들어야 하는 일이지. 안 그럼 어찌 한 쌍이 되겠느냐.” 

고청운은 그저 멋쩍어하며 코를 만졌다. 

이야기를 나눈 후, 방인소는 그가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오늘 스승으로 모시지 못한 것에 실망스런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조건이 혼인인 것을 떠올리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명목상 제자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제자와 다름없기 때문에 손해는 보는 건 그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연 씨가 준 견면례(*见面礼: 첫 대면 선물)를 자세히 보았다. 품질이 매우 좋은 벼루였는데 그는 비슷한 것을 방자명의 책방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은자 십 몇 냥짜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벼루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시금 방인소가 한 말을 떠올리니, 머리가 아파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저 스승 한 분을 모시려고 했던 것뿐인데 갑자기 아내라니? 정말 혼인을 하게 되는 건가?’

만약 혼인을 하게 된다면, 방인소의 외손녀는 그가 지금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의 아내였다. 하지만 현재 집안상황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의 집안은 방씨 가문에 어울리지 않았다. 

상대는 거인의 딸인데다가 관직에 있는 외할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고청운의 집안은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학문을 하는 농가 집안이라고 일컬을 수조차 없었다. 비록 지금 경제상황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방씨 집과 비교하면 여전히 크게 차이가 났다. 

이 세상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남이 이유 없이 자신에게 잘 해줄 리도 만무했다. 그는 자신이 서로 앞다투어 제자로 삼고 싶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외손이 아닌 외손녀가 낳은 아이에게 대를 잇게 하려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고청운은 현성으로 돌아온 후 가게로 가서 가족들과 논의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 * *

노진씨와 고이하는 여전히 가게일로 바빴다. 이미 오후 시간이었지만 손님 몇몇이 남아 있었다. 이제 부둣가는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여서 오후가 되어도 장사가 되었다. 오후면 정리를 하고 집에 돌아갔던 전과는 사뭇 달랐다. 

고청운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한 후, 소매를 걷고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객상(客商)차림을 하고 있는 옆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고청운이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후원으로 가는 것을 보고, 그제야 노진씨에게 물었다. 

“외손인가 봐요? 딱 봐도 인재인 듯한데, 효심도 깊네요. 지금 어디서 공부하고 있나요?”

노진씨는 그 말을 듣고 두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그리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제 큰손자 녀석이에요. 현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농가 집안이다 보니 일도 좀 시켜야죠. 버릇없이 키우면 안 되니까요.”

“저 분이 그 소문이 자자한 수재공이군요. 정말 가정교육이 훌륭합니다.”

그는 순간 깨달은 듯 부러움의 기색을 내비췄다. 

노진씨는 속으론 뿌듯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현학에 수재들이야 많지요. 아직 가야할 길이 먼 걸요.”

그저 손자를 칭찬하는 말이면 그녀를 덩실덩실 춤추게 했다. 

물론 후원에 있는 고청운은 이런 대화가 오고 간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옆 가게 주인의 딸이 가져온 주전부리를 부드럽게 거절하고서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매번 그가 가게에 들를 때마다 옆 가게의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가게를 세를 주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옷가게에서 주전부리를 나눠준다고? 만약 이게 무슨 의도인지 모른다면 이번 생을 헛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 역시 누군가의 사모를 받는 날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고청운은 앞으로 가게에 발걸음을 덜 하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집에서 이야기하면 되니까. 

게다가 현학에서 지내는 건 점점 더 불편해졌다. 요 2년 사이 수재가 몇 명 늘어나더니 점점 더 시끌벅적해지면서 문회도 자주 열렸다. 

고청운은 지금 주머니에 돈이 있을 때 현성에 집을 살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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