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제안 (1)
고청운은 여가 시간에 방씨 가문의 대저택에 들렀다. 사전에 정확한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방자명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고청운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먼저 방자명이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문방을 따라 저택에 들어갔고, 이문(二门) 근처에서 주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명 사형, 어떤 시집이길래 특별히 초대까지 했나요?”
고청운은 예를 갖추고 인사를 나눈 후 얼른 물었다.
방자명도 화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얼굴 본 지 꽤 되지 않았니? 이번에 좋은 책을 얻어서 너를 얼른 불렀지. 그리고 이번에 우리 아버지가 새로 산 그림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한번 보여주고 싶었어.”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며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왕 씨와 방인례에게 인사를 올리려고 했는데, 방인례는 집에 없고 왕 씨만 있는 걸 알았다.
먼저 인사를 올린 후 한참 동안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방자명이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하하, 더 까매졌네? 이제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 백부님처럼 새까매지겠어. 참고로 백모님은 백부님께서 탄 걸 매우 싫어해.”
고청운은 난처한 듯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구릿빛 피부라서 매우 건강해 보이는데, 새까맣게 탄 것처럼 보이나요?"
“어쨌든 전보다 탔고, 나보다 까만 건 사실이니까.”
방자명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청운은 그를 째려보며 백옥 같은 피부를 부러워했다.
“어머니는 여전하시네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나이를 드신 것 같지 않고 여전히 고우세요.”
고청운은 화제를 돌렸다. 최근 몇 년 간 그는 매번 부성에서 연지 등을 사갔다. 특히 겨울에는 가족 중에서 여인들이 쓸 손과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을 사갔는데, 미미한 효과가 있을 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나마 고하와 고용은 아마 나이가 어려서 효과가 크게 돋보이는 것 같았다.
“그 말은 방금 우리 어머니께 직접 했어야지. 매우 기뻐하셨을 텐데. 아, 키가 더 큰 것 같네!”
방자명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죠. 어찌 어머니께 그런 말을 하겠어요. 헤헤, 키가 조금 크긴 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자명 사형보다는 조금 작죠. 별 차이는 없지만요.”
방자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 청색 옷을 입은 어린 여자 하인이 앞에 와서 예를 갖췄다.
“둘째 도련님, 아가씨께서 부르셨습니다.”
방자명은 그 말을 듣고 고청운에게 말했다.
“얼른 갔다가 올 테니 먼저 책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책방에서 그리 멀지 않았는데, 이미 여러 번 와봤던 터라 길을 잘 알고 있어서 하인의 도움 없이 혼자서 갈 수 있었다.
가짜 산을 지나다가 고청운은 만개한 복숭아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앗!”
소녀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고청운은 그 자리에 서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파.”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고청운은 소리를 따라갔다. 대나무 몇 그루를 지나서 가짜 산을 뺑 돌아가니 가짜 산 옆 바닥에 분홍색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양쪽으로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였다. 백옥 같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청운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손은 복사뼈가 있는 자리를 만지고 있었다. 꽃이 수놓인 신발이 치맛자락에 가려지지 않아 드러났고, 옆에는 만개한 복숭아꽃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아마 발이 삔 것이리라.
“누구십니까?”
고청운은 가까이 가지 않았으나,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물었다. 그는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 작은 화원은 인적이 드문 곳 같았다. 이미 여러 번 방씨 가문의 대저택에 왔지만, 이 여인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아환(*丫鬟: 갈래 머리로 땋는 것)을 하고 있었는데 옷은 분홍색이었다. 방씨 가문의 여자 하인들은 전부 청색 옷을 입었다.
“공자님, 도와주셔요. 발이 삐었는데 너무 아프네요.”
소녀는 불쌍한 목소리로 청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따라 흐르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해보였다.
고청운은 몸서리를 쳤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요.”
그는 이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 한 마디를 툭 던지고 다른 말없이 바로 뒤돌았다. 작은 화원을 나가서 방자명의 책방까지 가니 마침 지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말을 걸었다.
“지기야, 가짜 산 쪽에 다친 여인분이 계시는 걸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았다. 그쪽에 사람이 없어서 도움을 청하러 왔으니 사람을 데리고 얼른 한 번 가보거라.”
지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그 와중에 고청운이 옆에 있는 어린 머슴을 부르는 것이 보였다.
“소사(小四)야. 얼른 가서 집사에게 이 일을 고하거라.”
그 어린 머슴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청운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
고청운은 누군가가 이 일을 전해들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
* * *
책방에 들어가니 배나무 탁자 위에 새로 찍은 책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이 책이 방자명이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 책일 터였다. 그림이 놓인 자리는 알 수가 없었다.
시집을 들어 넘기며 대략 읽어 보았다. 고청운은 어쩔 수 없이 시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어휘가 사용되었고 합리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소박하면서 자연스러웠고, 감정이 내밀하면서도 발산적인 것이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언제 이토록 좋은 시 한 수를 써보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자명이 책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우리 큰누이가 인편으로 보내준 거야. 경성에서 발행한 지 얼마 안 된 시집이지.”
방자명은 득의양양하게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알아요, 알아요. 막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집을 살 수 있다니.”
고청운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봤자 작년 새로 진사에 급제한 이들이 문회에서 읊었던 시가 아니던가? 출판을 하면 응당한 보수가 있고, 전국 각지의 거인과 수재들이 한 번씩은 사서 자신의 실력과 비교를 해보았다. 이는 마치 역대 과거에 출제된 시험문제를 사서 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고청운이 그렇게 말하니 방자명은 약간 멋쩍은 듯 부채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큰매형은 경성 부근의 현성에서 교유를 맡고 있어. 경성하고 가까운 곳에 있어서 여러 소식을 재빠르게 접할 수 있지. 내 책 대부분은 매형이 사서 인편으로 보내준 것들이야.”
큰매형? 아마 방인소의 사위인 간지원(简志远)을 말하는 거겠지. 그는 공명이 있는 거인이었다. 나이는 서른 몇 살로 방인례와 비슷한 또래였다. 듣기로는 간지원은 어렸을 적 기근을 피해 도망을 왔을 때 부모를 잃었는데, 그때는 아직 천하가 어지럽지 않아서 방인소가 데려와서 길렀다가 자신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했다.
고청운은 방인소가 너무 대단한 것 같았다. 간지원의 미래를 고려하여 데릴사위가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심성의껏 그를 가르쳐서 부모가 없는 고아를 조정의 거인으로 양성한 후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간지원의 인생은 상당히 독려적이었다.
“사이가 매우 좋나봐요.”
고청운이 감탄하며 말했다.
“나는 어릴 적 경성에서 컸어. 당시 우리는 백부님 곁에 있었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과거를 응시하러 본적지로 돌아올 때 따라서 온 거야. 우리 사촌 누이는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낳았는데, 우리 또래라서 어렸을 때 같이 컸어.”
방자명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넘기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의 추억 때문인지 유독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시 시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그림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청운은 그저 이 수묵화가 예쁘고 잘 그려졌다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서 방자명이 그림 찬양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고청운은 방씨 대저택에서 점심까지 먹은 후 그제야 자리를 떴다.
* * *
며칠 후, 고청운은 방인소를 따라 밭에 가서 무자위를 보고 돌아왔다.
우물가에서 나막신의 진흙을 씻고 있을 때 하인이 와서 방인소가 자신을 찾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고청운은 답답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방금 전에 말씀하실 것이지, 왜 후원까지 오라고 하시는 거지? 그는 우선 두말하지 않고 먼저 손을 깨끗이 닦고 복장을 정돈한 후 하인을 따라 후원에 갔다.
사실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고청운은 한 번도 후원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후원에는 방부인 연 씨가 있어서 출입하기 적합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주인네가 초대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방씨 노저택은 꽤나 넓은 크기를 자랑했고, 원락(*院落: 울안에 따로 막아 놓은 정원이나 부속 건물)도 적지 않았지만 문 몇 개는 큰 동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걸어가는 동안 공들인 게 보이는 무성하게 자라있는 꽃과 나무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여러 떨기의 만개한 동백꽃은 조용한 원자에 활력을 더해주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화청(*花厅: 화원 등에 설치된 비교적 크고 전망이 좋으며, 밝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에 도착하여 하인의 안내를 받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금세 여종이 차를 올려주었다. 향기로운 차향이 폴폴 올라왔지만, 무슨 일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생각하느라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다.
방인소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인 준비가 된 것인가? 이것이 고청운이 가장 원하는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피가 얼굴로 솟는 것 같았다.
‘침착하자, 침착해. 만약 그렇다고 해도 차분해야 한다. 방 대인이 어디서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침착해야 한다. 반대로, 만약 방 대인이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일지도 몰라. 앞으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렇게 생각을 하자 호흡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나막신 소리가 들렸다. 이미 이 소리에 익숙해진 고청운은 누가 오는 건지 알았고,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청운, 그렇게 예를 갖출 필요 없다. 오늘은 그저 이야기를 나눌까 하고 부른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아내이니, 할머니라 부르면 된다.”
방인소는 고청운이 예를 바짝 갖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동안 고청운은 그와 이미 꽤 친해졌기 때문에,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의 부인 연 씨를 만났기 때문에 급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의인(宜人)께 인사를 드립니다.”
연 씨는 정5품 의인의 봉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수재인 그는 당연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어야 했다.
수재의 특권은 현관(县官)을 알현할 때도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는데, 7품 이상의 봉호를 받은 이 앞에서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려야 했다. 고대에서 계급은 매우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었고, 아랫사람들에게 이는 자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규칙을 따르는 일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