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부학 (3)
고청운은 축국장에 풀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고 여겼다. 보아하니 모두 신체를 단련하는데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공을 차는 규칙이 어떨지 모르겠네.’
그는 축국장 옆에 가로수가 두 줄로 심어져 있는 것도 보았다. 그 중에 하나는 녹나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무는 이미 4~5미터 높이였는데, 푸르게 우거진 모습을 보고 앞으로 이곳에서 산책을 하거나 달리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방자명 역시 축국장을 보고서는 눈을 반짝이며 매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앞으로 시간이 날 때 축국을 하러 오자. 재밌겠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요. 저는 할 줄 모르니까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줘야 해요.”
“걱정 마. 나는 축국의 고수인 걸. 제대로 가르쳐 줄게.”
방자명이 가슴팍을 치면서 매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축국은 당송대와 이전 조대에서 매우 인기가 많았는데, 송나라 사람들은 축국을 하면 반드시 성공하고, 소화가 잘 되고 몸이 건강해져서 잠도 잘 온다며 이건 신선법과 같으니 밖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그러니까 너도 꼭 축국을 할 줄 알아야 해.”
고청운은 그저 기대하는 내색만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공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비교적 산책이나 달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안 좋아해도 배워야 했다.
‘그래도 규칙 정도는 알아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동창들과 화제 거리가 없을 거야.’
축국장 옆에가 바로 활을 쏘는 장소였는데, 표적 몇 개만 제자리에 있을 뿐 활과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어디에 치워둔 모양이었다.
표적을 보면서 고청운은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비록 돌을 던지는 것과는 다르지만, 공차는 것보다는 좀 더 수월하게 배울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은 한 바퀴 돌고나서 부학의 환경에 모두 크게 만족했다.
부학을 돌고난 후, 방 집사는 얼른 자리를 떠야했다. 관계없는 사람은 부학 내에서 묵을 수가 없었다.
* * *
이로써 그들의 부학에서의 생활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고청운과 고청명은 부학에서 돈 쓸 일이 별로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수재들과 교류를 하다가 매우 답답해졌다. 그들이 계산했던 비용 외에 접대를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모임에 나가서 항상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가끔은 다 같이 돈을 모아서 내기도 했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 사줘야 하기도 했다.
밥을 먹는 일도 보통 밖에 있는 수준 있는 밥집이나 술집에 갔기 때문에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수재들은 경제적 조건이 되면 매년 구정 때마다 자신의 훈도와 교수에게 선물을 했다. 그들이 시험을 볼 때 잘 봐달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공정하게 대해달라는 바람이 담긴 것이었다.
세시(岁试)는 매년 부, 현의 수재들이 치러야 하는 시험으로, 시험 성적에 따라 대우 수준이 정해졌다. 늠선생, 증광생, 부학생이 모두 이 시험으로 판가름이 났다.
과시(科试)는 향시를 보려면 그 전에 응시해야 하는 시험으로, 시험 성적이 되어야 3년에 한 번 돌아오는 향시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낙방한 자는 두 번의 재응시 기회가 있었다.
고청운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도 선물을 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어느 정도 야심이 있는 수재들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부학이나 현학에 걸어놓고 시간에 맞춰 왔다. 비록 관부의 제약이 있었지만 오지 않으면 향시에 참가할 자격조차도 없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매우 이상했다. 고청운은 본래 선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시와 과시는 모두 학정이 출제를 하여 교수와 훈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일상생활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학정에게는 선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수와 훈도에게 선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현대의 어느 지역에서 줄을 서서 선생님께 선물을 하는 것과 같은 거겠지?’
한 달 동안의 적응기간을 가진 고청운은 그래도 부학이 더 좋다고 여겼다. 이곳에는 교수만 4명이었는데 대부분 50에서 60세 정도의 연령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시험에 응시하지 않아 가르치는데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고, 가르치는 경험 역시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볼 수 있었다.
현학에서는 교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기껏해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다.
그리고 부학은 현학보다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매일 아침 훈도에게 가서 출석확인을 해야 했다. 그리고 오전 내내 강의를 들었는데, 만약 교수가 자리에 없어도 보통 그곳에서 앉아 개인 공부를 해야 했다.
매일 반 나절 동안 수업을 듣고 나면, 오후에는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훈도 앞에 얼굴 도장을 찍으면 밤에 외박을 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그들 원자에서 묵는 세 수재는 부성 출신이기 때문에 매일 점심에 집에 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부학으로 돌아왔다. 모두 혼인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묵지 않는 건 당연했다. 숙소는 책을 두는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가끔 필요할 때 묵을 뿐이었다.
고청운이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서른이 거의 다 된 수재가 숙소에서 묵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내와 다투다가 목을 할큄 당하기도 했는데, 이웃 원자 수재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돌아오고 있던 그가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매우 난처했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자에는 보통 고청운, 방자명, 황언성 세 수재와 고청명, 지기, 황 수재의 서동 황종 총 6명밖에 없어서 이들의 원자는 호젓한 편이었다.
고청운은 양궁과 퉁소 두 수업을 선택했는데, 여기서 퉁소 수업은 금원(琴院)에서 하는 수업이었다.
방자명은 모든 수업을 선택했는데, 좌우지간 집에서 모두 배웠었기 때문에 부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나중에 가장 훌륭한 스승을 골라서 자신의 실력을 키울 거라고 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흘길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과외를 받은 인간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먼저 양궁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퉁소와 금을 가르치는 스승이 벗을 보러 가기 위해 한 달 동안 휴가를 냈기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 휴가라니…… 고청운은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제멋대로라니 정말 선택 수업을 중시하지 않는구나.’
* * *
부학에서 고청운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매일 아침 묘시 사각(*오전 6시)에 일어나서 씻은 후 반 시진 동안 운동을 했다. 운동을 마친 후 돌아와서 방을 정리하면서 고청명을 깨워 같이 아침밥을 먹고 천천히 학사로 걸어갔다. 보통 20분 전에 학사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때 고청명은 같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서동들은 학사 뒤에 있는 작은 방이나 등자를 옮겨 복도에 있을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교수가 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고청운은 일찍 학사에 도착했는데, 이렇게 하면 먼저 어제 스승이 내준 과제 중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 없는지 볼 수 있었고, 오늘 질문해야 하는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허나 교수에게 질문을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그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부학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2시까지가 수업시간이었다. 반 시진 동안 수업을 들은 후 일각동안 쉴 수 있었다. 물론 이 시간은 엄격하게 지켜지는 대신 교수가 알아서 분배했다. 만약 그가 수업을 하고 싶지 않으면 수재들에게 오전 내내 혼자 공부를 하라고 해도 되는 것이었다.
교수들이 가르치는 내용에는 경의, 율법, 잡문, 산학, 책론 등이 있었고, 네 명의 교수가 한 사람당 한 과씩 가르쳤다. 산학은 교수 몇 명이 번갈아가면서 가르쳤는데 그들의 산학 수준은…… 그들이 거인 시험을 치렀을 때는 깊은 산학 수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독학 혹은 서로 가르쳐주면서 산학을 익혔다.
책론은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사치(吏治)등 방면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는 명제 형식 혹은 현대 국어 시험에서 나오는 논술 문제와 비슷했다. 명나라 때의 팔고문(八股文)처럼 너무 심하게 엄격한 건 아니었지만, 지켜야 하는 고정 양식이 있었다.
좋은 책론문은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관점이 명확하며 언어가 예리해야 했다. 여기에는 관련된 분야가 많아서 한 사람의 학문과 견해를 많이 시험했다. 게다가 주로 역사 및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개인의 처세능력과 임기응변 능력도 시험했다.
이곳에 온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교수는 책론의 양식 정도만 이야기 했다. 그들에게 파제(破题), 접제(接题), 원제(原题), 소강(小讲), 대강(大讲), 결제(结题)하는 법을 알려주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쓰라고 한 적이 없었다.
책론에는 문자 조직법, 감정 표현법 등이 쓰였지만, 그들이 전에 배웠던 의논문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고청운은 경의보다 책론이 조금 더 쉽게 느껴져서 마음이 덜 무거웠다.
정오면 수업이 끝났기 때문에 오후와 저녁은 자유활동 시간이었다. 기본적으로 이때가 되면 부학의 숙사는 반 정도가 비었다. 집에 돌아갈 사람은 집에 돌아가고, 집에 못 돌아가는 이들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학에는 별의 별 학생들이 다 있었다. 수업 내용은 매년 중복되었고, 어떤 수재들은 이미 부학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훈도에게 미리 신청을 하면 항상 수업에 오지 않고 세시와 과시 때만 오면 되었다.
특히 이미 장가를 들어 아이가 있는 이들은 일 년 내내 그림자조차 보기가 힘들었다.
고청운과 방자명은 모두 신진 수재였기 때문에 휴가를 청하기가 어려웠고, 반드시 부학에서 통일적인 관리를 받아야 했다.
기본적으로 부학에 상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서른 몇 명의 수재가 있었고, 이 수재들은 보통 오후에 퉁소, 바둑 등등과 같은 선택수업이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잠깐 축국을 할 수도 있어서 여가 생활이 매우 풍부한 편이었다.
고청운은 전에 대학을 다닐 때보다도 더 자유롭다고 느꼈다. 내년 8월 향시를 치르지 않는다면, 준비할 시간이 4년 정도나 있었기 때문에 모두 시간이 많으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청운은 부학에서 어떤 사람은 꾸준히 매우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조금 노는 걸 즐기는 것을 발견했다.
수업이 끝난 후 고청운은 보통 다른 사람의 초대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부학에서 방자명 외에 그는 같은 원자에 사는 황언성과 관계가 가장 좋았고 다른 사람들과는 오고 가며 인사 정도를 하는 사이였다. 기본적으로 같이 문제를 토론할 수는 있을 정도의 사이였지만, 같이 모여서 놀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 역시 그를 자주 찾지는 않았다. 어떤 곳은 12살밖에 되지 않은 고청운이 가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예의상 두어 번 자리했지만, 나중에는 아예 완곡하게 거절해버렸다.
다른 활동이 없을 때는 고청운은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고 두 시 반에 일어났다. 원자를 한 바퀴 돌은 다음 공부를 하면서 필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다섯 시 반에 저녁을 먹고 반 시진 정도 산책을 했다.
이 시간은 고청운이 고청명을 위해 남겨둔 시간이었다. 고청명은 매일 이 시간에만 그에게 마음껏 질문을 할 수 있었고, 그는 인내심을 갖고 답해주었다. 다른 때는 항상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보통 대답을 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 계획이 흐트러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