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고하 (1)
이날 고청운은 화본을 구상하고 있는데, 뒤편에서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고청평이 작은 몸을 말고서는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흠흠!”
고청운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
고청평의 작은 몸이 멈칫하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고청운이 만들어준 작은 나무 조각을 들고서는 읽는 척을 했다.
“하늘 천 따지, 사람 인, 나무 목, 돌아볼 고, 푸를 청, 평평할 평, 개 구, 할아버지, 할머니······”
그는 현지어가 아닌 관화(*官话: 옛날 중국어 표준어)를 말했다.
이는 대략 세월을 거슬러 온 황제가 남긴 혜택일까. 이 시대의 관화와 전생의 보통화는 꽤 비슷했기 때문에 고청운은 공부할 때 크게 힘이 들지 않았다.
고청운이 고청평을 흘겨보자, 고청평 역시 살짝 고청운을 보다가 시를 읊기 시작했다.
“봄잠에 날이 밝는 줄 모르네. 도처에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간밤에 비바람소리에, 떨어진 꽃잎이 얼마냐.”
고청운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 그 역시 어린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어린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그는 먼저 시를 외우게 하고 글을 익히게 했다. 글자는 평소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사물 위주로 외우게 했고, 그건 바로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효과가 있을까? 앞으로 아이가 생기면 이렇게 가르칠까?’
“형, 다 읽었어.”
고청평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큰 눈을 껌뻑이면서 고청운의 생각의 흐름을 끊어놓았다.
“네 이름이 써져 있는 종이를 찾으렴.”
고청운은 그의 귀여움을 모른 척 했다.
고청평은 눈앞에 놓인 종이조각들을 보다가 고민하더니 ‘고(顾)’와 ‘청(青)’을 골랐지만, ‘평(平)’자를 잘못 골랐다.
“다 읽을 줄 안다고 하지 않았니?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알려줄게. 다 배운 다음에 가서 놀아.”
고청운이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형, 이미 오랫동안 공부했는걸. 이제 배도 고파."
“배가 고파도 안 돼. 먼저 약속부터 해. 오늘 이 글자들을 다 익힌 다음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으니,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그에게 쓰는 건 바라지 않고 읽을 줄 아는 정도로 난이도 조정을 했다.
고청평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아버지가 창가에 나타난 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곤 입을 쑥 집어넣었다.
고청운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숙부 고이하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이 저으며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
고청평은 자신을 이 상황에서 꺼내줄 사람이 간 것을 보고, 얌전히 모르는 단어를 골라낸 다음 형을 따라 익히기 시작했다.
저녁 때 고청운이 고이하에게 설명을 했다.
“숙부, 제가 엄격한 게 아니라 동생이 너무 장난기가 많아요. 지금 지켜보면서 공부 습관을 제대로 들이지 않으면 나중에 앉아있게 하기도 힘들어요. 지난번에 들른 제 벗 방자명 보셨죠? 방자명 집안은 아버지가 거인 출신이에요. 3살 때 글을 익히기 시작했을 걸요? 우리는 농촌 집안 출신이라서 이런 집안처럼 좋은 스승님을 모시지는 못하니까, 반드시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청평이가 나중에 어떻게 다른 아이들과 경쟁을 하겠어요?"
고청운은 몇 년 동안 시험을 준비하면서 수없이 많은 응시생들을 물리치고 180등에 든 것이었다. 이는 분명 그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으리라.
“청운이 네가 옳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모질게 먹어지지가 않는구나.”
고이하는 약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겨우 살아남은 사내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애초에 모질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이 씨 역시 남편과 같은 마음이었다. 며칠 동안 고청운이 자신의 아들을 매우 엄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진작 마음이 아팠다. 만약 시부모님이 옆에 안 계셨다면, 아들에게 고청운을 따라 공부하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이때 그녀에게서 고청운이 고청평에게 공부를 가르친다고 할 때의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대하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
“동생아, 구단이 장래를 생각해야지. 그렇게 감싸기만 하면 안 된다. 전에 전자가 공부를 할 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공부를 다 마친 다음에 쉬게 했던 거 기억나니? 안 그럼 어떻게 오늘날 수재가 될 수 있었겠니?”
고이하는 당시 고청운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매우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눈으로 보아서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드디어 결심을 했다.
앞으로 아들을 조금 모질게 대해야겠다! 그 어느 집에서도 형이 할 수 있는데 동생이 못하는 법은 없었다.
그 시각 고청평과 고청안은 앞으로 자신들의 부모의 태도가 변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푹 잠들어 있었다.
중국에서 시대를 막론하고 아들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만들려고 하는 부모는 항상 많았다.
* * *
순식간에 고청운이 집을 떠나 부학으로 가는 날이 다가왔다. 전날 저녁 소진씨는 매우 아쉬워하며, 혹시 뭐 하나라도 빠졌을까봐 그의 방에서 싸놓은 짐을 보고 또 보았다. 이번에는 집에서 가까운 현학이 아니라 부성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치 하늘 끝에라도 가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어머니, 그렇게 여러 번 보셨으니 빠진 물건은 없을 거예요.”
고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가져가는 물건이라고는 책, 붓, 먹, 종이, 벼루, 갈아입을 옷, 목통, 면포, 이불 등 개인 생활용품이 다였지만, 언뜻 보기에는 물건이 꽤 많아 보였다. 부성에서는 사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산다면 너무 비싸서 집에서 가져가는 게 이득이었다.
“그래도 자꾸 무언가가 빠졌을까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단다. 참, 새로 지은 옷들을 이 가방에 넣어 놨으니 가서 오래된 옷 입지 말고 새 옷을 입으렴. 다른 수재들이 얕잡아 볼지도 모르잖니.”
소진씨는 고청운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계속해서 당부의 말을 건넸다.
고청운은 어찌 할 도리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걱정 말거라. 네 방에 있는 난화를 매일 같이 보살피고, 잊지 않고 물도 주마.”
소진씨는 고청운의 시선이 무성하게 자란 난화를 향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고청운은 최근 몇 년 동안 밖에서 공부를 하느라 집에서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가 집에 없을 때 소진씨가 분명 자주 자신의 방에 들렀기 때문에, 매번 집에 올 때마다 방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던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부학에서 잘 지내다가 춘절에 꼭 돌아올게요. 아니지, 10월 수확철에 방학이 있으니 그때 꼭 집에 올게요.”
그가 소진씨 옆에 가서 부드러운 허리춤을 만지며 말했다.
소진씨는 아들의 행동에 마음의 큰 위안을 얻었다.
두 사람은 또 한참동안 이야기하다가 고대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건너 와서야 떨어졌다.
좌우지간 시간이 조금 늦은 것도 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도강 부두에 가서 배를 타야 하는 고청운의 몸 상태를 고려해야 했다.
고청운이 막 어머니를 돌려보냈는데, 갑자기 문 앞에 둘째 누이 고하가 나타났다.
“누이, 무슨 일 있어?”
고청운은 책표지를 평평하게 피면서 호기심을 안고 물었다.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내일 네가 부성에 간다고 하니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고하는 자신의 양손을 꼭 쥔 채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고청운은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두 사람은 닭을 같이 돌보면서 보낸 시간이 가장 많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가장 많이 했다. 그녀는 자신의 방도 가장 많이 들락거렸는데, 이렇게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는 거야? 연지가 필요해?”
고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큰누이가 시집을 갔기 때문에 그녀와 삼아가 많은 집안일들을 하고 있었다. 집안일, 닭 돌보기, 잡초 베기, 베짜기 등 이런 잡다한 일들을 돌아가며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하의 피부색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목구비는 큰누이보다 조금 더 보기 좋은 편이었고, 키도 큰누이보다 조금 더 컸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막 14살이었다.
“아니야, 필요 없어.”
고하가 급히 고개를 내젓고는 잠시 침묵했다. 고청운이 책상에 놓은 <고문석의(古文释义)>를 보고서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전자야, 공부하고 있었니?”
고청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이, 나는 눈에 안 좋을까봐 밤에 불 켜놓고 공부는 안 해. 이 책을 부학에 가져갈까 생각중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져갈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방 공자께서 이전에 준 책이야?”
“응, 사례로 준 책이야. 총 세 권을 주었는데, 책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 앞으로 중점적으로 <자치통감(资治通鉴)>을 읽으려고 해.”
고청운이 탄식하며 말했다.
“방 공자는 사람이 참 좋아 보이더라. 전자야, 그분 혼사는 정해졌니?”
고하가 갑자기 물었다.
고청운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불빛 아래 놀랄 정도로 반짝이는 고하의 눈이 보였다.
“누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고청운은 꽤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고하는 그를 째려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되물었다.
“전자야,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해줬어.”
고청운은 그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자야, 답하기 어려운 문제야?”
고하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잘 모르겠어.”
고청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사람에게 압박을 주다니, 몇 년 동안 누이의 온화함과 내향적인 면만 보고 오해하고 있었구나.’
고하는 생각보다도 대담하고 조숙한 여자아이였다.
“방 공자랑 사이좋은 벗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같이 공부한 시간이 얼만데."
고하가 약간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고청운도 그 말을 듣고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나서 기분이 조금 나빴다. 억지로 그때의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당시의 무력감과 두려움이 생각나서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어? 그건 개인적인 일이고 우린 그런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없더라도, 방씨 가문과 우리 가문은 어울리지가 않아. 방자명이 준수하게 생긴 건 알지만 우리 두 집안의 격차가 너무 커서,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기적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기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이었던가?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을 논의 할 때 할아버지에게 집안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있도록,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밖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여자아이도 옆에서 듣게 하자고 건의할 생각이었다.
고청운의 태도에 놀랐는지 고하는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옷깃을 잡고 만지작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자야, 내가 방금 전에 너무 좀 그랬지. 마음에 담아 두지 마. 그렇게 잘생긴 분을 세상물정 모르는 내가 처음 뵈어서 호기심에 물어본 것 뿐이야. 나도 이게 망상인 걸 알고 있어. 그런데 마음이 놓아지지가 않아서 포기할 수 있도록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고청운은 눈살을 다시 한번 찌푸렸다. 고하의 태도가 바뀐 건 전부 그 때문이었다. 만약 어렸을 때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이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고, 도리어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모든 소녀들은 연정을 품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전생에서 학창시절 때 그녀는 어떤 남학생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허나 어떤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어나는 게 아니라면, 이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었다. 혼사가 정해진 후에는 소녀의 감정이 점점 퇴색될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입고 자는 그런 실질적인 것들이니까.
고청운은 그녀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런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