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산술
고청운은 화원조가 지은 시에서 '당대의 인물이 역사의 주인이다' (*数风流人物还看今朝: 모택동 어록)'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고청운은 그것을 보고 화원조도 시대를 거슬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청운은 그가 너무 딱 맞는 시기에 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옛날 사람들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화원조는 이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는데, 고청운은 특히 산술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화원조는 산술을 중시하여 수나라와 당나라 때처럼 명산과(*明算科: 산술에 능한 사람을 가려 뽑았던 잡과(雜科))를 증설하였으나, 전통 세력의 힘이 너무 강대했다. 그래서 많은 우수한 인재들은 사서오경을 고집했고, 명산과는 유학 이외의 학문이라고 여겨져 멸시를 받았다. 그로 인해 충분히 총명하지 못한 이가 명산과에 갔고, 승진도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어떤 이가 명산과 인력을 호부(*户部: 화폐와 식량, 호적을 담당했던 포정사의 민간명칭) 산수에 포함시키니, 업무 효율이 대대적으로 향상되어 갑자기 명산과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경쟁이 매우 치열했고, 명산과 인력이 윗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리하여 명산과는 고위험 직업이 되었고, 차차 명산과에 응시하는 사람이 줄어서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고대 중국에서 과거 제도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자 가난한 집 출신들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시대에는 시험을 치르는 이들의 사서오경과 같은 고전에 대한 이해도와 능숙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서 산수를 배우기보다는 사서오경을 익히는 쪽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이전 조대의 명산과 고시 역시 실질적인 산수 능력을 시험하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화원조가 산학의 지휘가 향상되기도 전에 이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고대 사람들이 산술에 실용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산술은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산술 이론을 연구하는 이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고청운은 전생에서 중국의 산술 수준이 오래전에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일찍이 산술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산술이 줄곧 느리게 발전해 왔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하지만 지금 산학(算學)은 어느 정도 중요하게 여겨져, 과거에서도 일정한 비중을 차지했다. 다만 그 비중은 매년 예비 시험의 주임 시험관이나 황제의 뜻에 따라 변하고는 했다. 산학 연구는 사서오경의 전통적인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좌우지간 경전 관련 시험을 잘 보기만 하면, 산수 실력이 우수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조정에서는 산학에 정통한 사람을 선발하여 부관 자리에 앉히려고 원시에 산학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호적, 토지, 조세, 부역의 현주부(县主簿) 등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정부 수뇌를 맡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 지식인들은 권력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없는 그 벼슬들을 냉대했다.
‘치수필교(*锱铢必较: 사소하고 자잘한 일을 하나하나 따지다.)’라는 성어에도 멸시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고청운은 사서오경 때문에 한창 고통받고 있어서, 그 방면으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주관(主官)이 되지 못하면 또 어떠한가? 고청운은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주관이 되라고 해도 감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대의 관리 사회는 무척 위험했다. 큰일이 아닌데도 집안이 망하고 머리가 잘렸으며, 천리나 떨어진 곳에 유배 가기 일쑤였다. 고청운은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없었다. 전생에서는 새싹 공무원이었고, 그 안의 숱한 배경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다.
고청운은 그저 열심히 노력해서 수재에 합격하고 싶을 뿐이었다. 만일 거인(举人)이 된다면 더욱 좋았다. 그럼, 현성에서 작은 관리를 할 수도 있었는데, 기술형 관리보다는 더 체면이 섰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모두 고청운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 고청운은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우선 산학을 제대로 배우기로 했다.
* * *
그렇다. 학당에 들어간 지 한 달 후, 고청운은 산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먼저 구구단을 외웠다. 하 수재는 누구에게든 먼저 구구단을 익히라고 했다. 구구단은 산학의 입문이나 다름없었다.
하 수재의 말을 들은 고청운은 놀랐다. 6년이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간 고백산은 한 번도 고청운에게 구구단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큰할아버지는 도대체 산학을 얼마나 싫어하는 거지? 아니면 내가 구구단을 서둘러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가?’
고청운은 하겸죽에게 물어본 후, 일반 사람들은 우선 간단한 덧셈과 뺄셈을 배우며 다른 산법은 곧바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익히려면 먼저 책을 읽어야 했고, 기본적인 삼관(三观)을 확립해야 다른 걸 배울 수 있었다. 산학은 선택 과목이고, 스승과 제자에 따라서 계획이 달라졌다.
수재에 합격하기 전에 현시와 부시에 먼저 붙어야 했다. 이 두 시험에는 산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 시험보기 일 년 전에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의 공부 계획은 거의 맞춤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구단은 중국 고대 산학에서의 곱셈, 나눗셈 등과 같은 기본 계산 규칙으로 지금까지 2000년 넘게 전해지고 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고청운의 표정 역시 찢어질 것 같았다.
‘아니, 거슬러 온 게 고대가 아니었나? 고대에 이미 구구단이 있었다니? 이곳에서 한 과목이라도 좀 득을 볼 줄 알았는데. 멋들어지게 외워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어…….’
그간 고청운은 헛된 꿈을 꿨다.
* * *
고청운은 여전히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고대에서는 구구단을 9단부터 내려가며 외웠다. 즉, 9 곱하기 9는 81로 시작해서 1 곱하기 1은 1로 마무리했다. 후세의 구구단 외우는 순서와 반대였다. 고청운의 학습 속도에 하 수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다른 동창들도 아무렇지 않았다.
<구장산술(九章算术)>을 배우게 되었을 때, 고청운의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고청운은 오래 전에 이 책의 이름을 들었다. 고백산은 산학을 너무 못해서 줄곧 수재에 낙방했기에 산학을 혐오했다. 그래서 고청운에게 산학을 가르칠 생각을 못했고, 고백산도 <구장산술>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다.
고청운은 우선 영부족(*盈不足: 만수(滿數)와 결수(缺數)) 단원의 문제를 봤다.
5척(*尺: 1척당 약 30cm)에 달하는 벽이 있고 쥐 두 마리가 양쪽에서 구멍을 뚫고 있다. 큰 쥐가 매일 1척을 뚫고, 작은 쥐도 첫날 1척을 뚫었다. 그리고 큰 쥐는 매일 전날의 2배만큼 벽을 뚫고 작은 쥐는 전날의 2분의 1만큼 벽을 뚫는다. 그렇다면 큰 쥐와 작은 쥐는 며칠 뒤에 만나게 될까?
하 수재의 강해를 들은 고청운은 답안 작성 양식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아랍 숫자가 없으니 고대 산술 양식에 맞춰 작성해야 했다.
이 문제는 고청운에게 매우 익숙해서 관련 지식을 배우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했다.
<구장산술>에는 총 246개의 문제가 실려 있었으며, 크게 9개로 분류할 수 있었다. 즉 9장(章)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 수재는 이 중에서 대표적인 문제 몇 개를 설명했다. 수업을 마친 하 수재는 나머지는 혼자 공부하라고 했다.
‘혼자서 공부하라고?’
고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고청운은 산학을 공부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고청운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빨리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고민하던 고청운은 조문헌을 비롯한 동창에게 몇 개의 문제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구장산술>을 거의 달달 외울 정도로 숙지해 버렸다.
사실 <구장산술> 문제를 푸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문제를 현대식으로 해석해 놓으면 풀 수 있었다. 고청운은 수능 경험자였기 때문에, 산수, 대수(代數) 위주의 산술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 수 있었다. 다만 고대의 산술 용어를 이해하고 현재의 양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이, 산학에서의 난점이었다.
하 수재는 고청운이 <구장산술>을 배우는 속도에 매우 놀라서 <구장산술주(九章算术注)> 독학을 권유했다. 이 정도면 원시를 칠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겸죽을 비롯한 동창들은 <구장산술>만 봤고 <구장산술주>와 <철술(缀术)>은 살짝 훑어보기만 했다. 그리하여 갑반 동창들이 고청운에게 산술 문제를 물어보곤 했다.
이 교류를 통해 고청운은 조문헌이 동창 중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고 기억력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문헌은 고청운과 며칠 전에 나눈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는데, 조문헌은 당시의 상황을 빠짐없이 정확하게 말하곤 했다. 조문헌은 고청운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그때, 고청운은 조문헌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또 어느 날은 고청운이 시구를 알려달라고 했고, 조문헌은 제대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고청운은 <고당시합해(古唐诗合解)>를 한 번 베낀 후 조문헌에게 보여줬다.
‘그 내용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청운아, 이건 네가 한 말인걸. 설마 발뺌하는 거야?”
조문헌은 눈썹을 찌푸리며 조금 불친절한 말투로 물었다.
조문헌은 고청운이 <고당시합해>를 베끼는 걸 분명히 봤다.
고청운은 당연히 부인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히 인정해야죠.”
<고당시합해>는 그가 서점에서 찾은 책으로 하 주인네 서점에 새로 들어온 책이었다. 과거시험에는 당연히 시 짓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시문을 짓는 것도 가능했다. 만약 산학에 쏟는 노력이 가장 적다면 시사(诗词)에는 충분히 많은 노력을 들였다.
하지만 여기엔 천부적 재능이 필요했다. 후세의 교육제도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고청운은 현재의 과거제도를 마주하면서 다시 한 번 고통 받고 있었다.
시를 읊는 일은 고청운에게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고청운은 현재 <성음계몽(声韵启蒙)>, <제자규(弟子规)>, <입옹대운(笠翁对韵)>이 없다는 것이 개탄스러웠다.
‘이 세 권만 있으면 시 짓기가 훨씬 수월해질 텐데. 안타깝게도 이 세 권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야 지어졌지. 지금의 역사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 이 책들을 찾는다는 건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을 거야.’
성음을 배운 후에 <시경(詩經)>을 읽는 것은 시 짓기를 배우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 외에도 시간이 나면 당시(*唐詩: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들이 지은 시)나 송사(*宋詞: 중국 송나라 때 쓰인 서정시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보고 최대한 외워야 했다. 이 중에서 어떤 시사는 이전에도 배운 적이 있었지만 지금 다시 배우니 새로운 수확과 깨달음이 있었다.
그래서 <고당시합해>를 본 고청운은 책을 베낀다는 구실로 두고 읽을 요량으로 종이를 더 사서 한권 더 베껴 두고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