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갑(甲)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청운은 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하 수재는 그간 하던 일을 멈추고, 놀랍다는 듯이 고청운의 눈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좋다! 고 형님이 이런 제자를 키워냈을 줄이야! 사서오경을 잘 배웠다고 했지, 이렇게까지 꿰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하 수재는 고청운에게 앉으라고 한 다음, 그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하 수재가 걸을 때마다 나막신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 수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이제 막 열 살인데, 이미 경서를 이렇게 유창하게 외우다니. 나이에 비해서 매우 잘 외우는 편이로구나.”
하 수재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고청운을 보며 말했다.
“글자를 다시 한 번 써서 보여 다오.”
하 수재가 탁자 위의 붓, 먹물, 종이, 벼루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에 고청운은 먹을 갈기 시작했다. 고청운이 평소에 사용하는 먹보다 훨씬 질이 좋았다. 좋은 문방(文房)을 보니, 자연스레 더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고청운은 외워뒀던 <삼자경>의 한 부분을 적었다.
고청운이 쓴 글자를 본 하 수재는 더욱 기쁜 마음에 눈이 반짝했다.
“보아하니, 타고난 자질이 총명한데다가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좋다, 나는 바로 너 같은 사람을 가르치고 싶었다. 허나 네가 알아둘 것이 있다. 타고난 총명함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수재나 거인(举人)에 합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시험은 총명하다고 해서 붙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 특히 글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글씨 연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지금 네 나이에 이 정도면 글자를 매우 잘 쓰는 편이다. 아직 어떤 힘이 느껴지진 않지만, 네 나이에서 이 정도면 이미 매우 훌륭한 편이야. 그래, 평소에 글씨 연습은 어떻게 했느냐?”
고청운은 글씨 연습을 했던 과정을 말했다.
“훌륭하구나. 고생을 견뎌내야 더 큰 사람이 된다. 글자 연습에는 조금의 요행도 있어서는 안 된다. 가정환경이 안 좋은데, 이런 생각을 해낸 것만으로도 훌륭하구나.”
하 수재는 수염을 만지면서 도중에 읊조리곤 했다.
“그렇다면 너를 갑(甲)반에 넣어야겠다. 앞으로 중점적으로 글자 연습을 봐주고 경의(*经义: 경서의 뜻)를 강해(*講解: 문장이나 학설 따위를 강의하듯이 논하고 풀이함)하며 경의를 쓰는 법 등을 알려줄 게야. 이 외에도 <구장산술(九章算术)> 등 산학(*算學: 셈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과 관련된 지식을 배워야 한다.”
“전부 스승님의 계획에 따르겠습니다.”
고청운은 포권을 취하며 급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 * *
하 수재는 고청운과 함께 전원에 있는 학당까지 걸어가면서 간략하게 내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고청운은 조금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처음 뵈었을 때, 그토록 고고했던 스승님이 이제는 이토록 자애롭게 느껴지다니.’
하 수재가 미소를 짓지 않았는데도, 고청운은 그가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스승님이 나를 천재(天才)로 여긴다는 점이 유일하게 걱정되네.’
고청운은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전생과 현재를 모두 살지 않았다면, 여느 아이처럼 집중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다른 아이가 놀고 있을 때 외면하고 홀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고청운은 시간을 들여 시골 출신 아이의 총명함을 꾸며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육 년 동안 다진 기초로 향후 몇 년 간 또래 아이들보다는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천재나 집안 사정이 좋은 사람과는 비교가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더 오래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예비 시험에 내 자리가 있을 거야. 수재에 합격하려고 십 몇 년 동안 시험을 보는 사람도 있잖아. 나도 그렇게 노력하면 붙을 수 있겠지?’
학당에 도착한 하 수재는 고청운을 갑반에 데려다주고, 그에 관해 몇 마디하고서는 자리를 떠났다. 하 수재는 고청운에게 공부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겼다.
갑반이라는 곳에는 총 세 사람밖에 없어서, 고청운을 포함하면 네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거의 비슷한 또래로, 모두 열네다섯 살 정도였으며, 가장 큰 아이도 열여섯 살이 안 되었다.
학당은 크지 않아서, 들어가자마자 큰 탁자 네 장(张)이 두 줄로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청운은 탁자와 의자 모양이 현대에서 사용하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조금 더 세밀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달랐다. 탁자에는 붓걸이와 문방사우가 놓여 있었다. 뒷줄의 한 탁자만 비어 있고, 나머지 탁자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나이가 어린 고청운을 보고 놀랐다.
“사형(師兄)들, 안녕하세요. 저는 고청운이라고 합니다. 올해 열 살이고 임계촌에서 왔어요.”
아무래도 고청운이 어리다 보니, 먼저 자기소개를 하며 쑥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세 사람은 이 시대의 평범한 서생 장삼 차림이었고, 복장이 거의 비슷했다. 머리에는 청색 두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재질과 장신구가 달랐다. 이 부분에서 각자의 가정환경을 알 수 있었다.
문과 가까운 앞줄에 앉은 소년은 백색 주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열다섯 살이라고 자기 소개했다. 옷에는 대나무가 수놓아져 있었고, 허리에는 청(靑)대나무가 수놓아진 염낭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피부는 하얗고 보드라워 보였으며 용모가 준수했다. 비교적 진중한 태도를 지닌 그의 이름은 하겸죽(何谦竹)이고, 말수가 많지 않았다.
하겸죽과 같은 줄에 앉아 있는 소년은 올해 열일곱 살이고, 이름은 조옥당(赵玉堂)이었다. 조옥당은 목에 반짝반짝하는 자물쇠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고, 허리에는 색이 아주 고운 옥패를 차고 있었다. 조옥당의 얼굴은 마치 달처럼 희고 고왔지만 여드름이 몇 개 난 상태였고, 체격은 건장했다. 고청운은 말할 때 잘 웃는 조옥당이 매우 온화한 인상이라고 느꼈다.
가장 뒷줄에 앉은 사람은 조문헌(赵文轩)이었다. 조문헌은 고청운처럼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올해 열다섯 살이었다. 조문헌은 매우 말라서 마치 대나무 같았다. 넉넉한 옷이 조문헌의 몸에 걸쳐져 있었고, 평범하게 생긴 얼굴에서 약간의 병태(*病態: 어떤 병이 나타내는 증상)가 느껴졌다. 조문헌은 눈이 길게 찢어지고 얼굴이 창백했지만, 됨됨이는 무척 좋아 보였다. 조문헌의 눈에서는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조문헌은 고청운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인사를 나눈 후, 다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부유한 두 사람과 평범한 한 사람이라니. 함께 어울릴 수 있을까? 동창도 중요한 자원 중 하나인데.’
고청운은 유일하게 비어 있는 탁자에 가서 앉은 후, 책 상자 안의 물건들을 꺼냈다.
그때, 앞에 앉아 있는 조옥당이 고청운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갑반에 왔단 말이야? 그렇다면 이미 사서오경은 뗐다는 건데, 그럼 내년에 예비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겠네?”
“스승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사서오경을 확실히 떼긴 뗐는데, 여러 구절의 뜻은 아직 잘 몰라요.”
조옥당이 말을 걸자, 고청운은 학당의 상황을 알고 싶어서 얼른 미소를 띠며 답했다.
말이 많은 조옥당은 한참을 참았다는 듯이, 고청운에게 귓속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귓속말이었지만 학당이 너무 작고 사람도 적어서 모두에게 들렸다.
조옥당의 설명을 들은 고청운은 하 수재의 사숙에 열세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열세 명은 모두 예비 시험에 뜻이 있었고, 하겸죽, 조옥당, 조문헌 외의 열 명은 옆에 있는 을(乙)반에서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고청운과 고청명이 사숙에 왔으니, 총 열다섯 명이 되었다. 하 수재는 기력에 한계가 있어서 제자를 거의 받지 않았고, 특히 자질과 기초가 없는 자는 아예 받지를 않았다.
“이제 그만 떠드시죠. 스승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고청운과 조옥당이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하겸죽이 차갑게 이야기했다.
고청운과 조옥당은 잠시 말이 없다가 눈빛을 교환하고는 서둘러 책을 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 수재는 갑반에 들어오자마자, 하겸죽, 조옥당, 조문헌, 고청운에게 질문을 하라고 한 다음 강해를 시작했다. 고청운은 뒤편에 앉아서 열심히 들었다. 고청운이 질문하지 않아도 하겸죽, 조옥당, 조문헌이 질문했고, 그 질문에 고청운이 궁금해하던 부분이 있었다. 반 시진이라는 짧은 수업 시간 동안, 고청운은 많은 것을 얻었다고 느꼈다.
하 수재는 고청운에게 특별히 붓글씨를 잘 쓰는 비결을 알려줬다. 그 순간, 고청운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 수재는 고청운에게 습자첩(*習字帖: 습자의 본보기 책) 한 권을 빌려주며 모사할 것을 권유했다.
고청운이 습자첩을 건네받아 펼쳐 보니, 과연 자신의 글씨보다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이곳에 와서 공부하기로 한 것은 정말 옳은 일이었어.’
* * *
정오에 수업이 끝나자, 진에 사는 동창들은 집에 가서 밥을 먹었고, 그 외의 마을에 사는 동창들은 알아서 끼니를 해결했다. 사숙에서는 끼니를 책임지지 않았다.
고청운과 고청명은 먹을 것을 따로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에 있는 작은 식당에 가서 혼돈(*馄钝: 중국식 만둣국) 한 그릇을 먹었다.
“맛있긴 한데 너무 비싸네요.”
고청운은 탄식하며 한 입 먹었다. 만둣국 안에는 채소와 잘게 다진 고기가 들어 있었고, 뼈를 고아 우려낸 국물은 맛이 좋았다. 장사가 잘될 수밖에 없었다.
“속이 없는 하얀색 빵은 1문에 두 개, 만두는 1문에 한 개인데, 이 혼돈은 3문밖에 안 하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어차피 만두는 네 개는 먹어야 배가 부르니까 이게 더 저렴한 것 같아.”
고청명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고청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국물을 먹으면 배가 부르겠지만, 조금 있으면 배가 고파질 것을 알았다.
고청운은 더 이상 고청명과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을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사람이 많고 각자 진도가 달라. 그런데 스승님께서 정말 잘 가르쳐 주셔. 다 같이 외우라고 해놓고서 한 명을 옆방으로 부르시고는 궁금한 걸 물으라고 하셔. 그러면 질문에 답하신 후, 숙제를 내주시지. 그리고 옆방으로 갔던 사람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해.”
고청명은 매우 기쁜 듯이 웃었다.
“난 이렇게 공부하는 게 아주 좋은 것 같아. 동창이랑 교류하고, 내가 모르는 걸 동창들이 알고 있고, 그들이 모르는 건 또 내가 알고 있고. 시끌벅적하니까 공부할 맛도 나. 집에서는 뭘 배워도 지루했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아.”
“그 말, 큰할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안 돼요.”
고청운이 고청명을 흘겨봤다.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그러자 고청명도 고청운을 마주 흘겨봤다.
“점심에 한 시진 동안 쉴 수 있는데, 우리 이제 어디 가지?”
고청명은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고청명과 고청운은 책 상자를 짊어지고 있었는데, 짐을 봐주는 사람이 따로 없었고 사숙에 두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점에 가요. 서점에 가서, 제가 책을 베낄 수 있는 실력인지 알고 싶어요.”
고청운이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래.”
고청명은 자신이 돈을 벌 수 있으면 어머니께 돈을 받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