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화원조(华援朝)
임계촌은 자연환경이 아름다웠다. 다만 평평한 땅, 즉 농경지가 적었다. 하지만 진이나 현까지 도보 반 시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 다른 마을에 비해 임계촌에 분배된 밭이 많았다. 그것은 고백산이 임계촌에 정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이기도 했다.
고백산은 집안에서의 위망이 매우 높고, 그를 우러러보는 아우가 있었기에, 결국 임계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임계촌은 현 그리고 진과 가까웠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현이나 진에 가는 데에 시간을 적게 들여도 돼서, 다른 마을 사람들보다 날품 팔 기회가 많았다. 이를테면, 임계촌의 뒤편에 있는 마을은 장보러 갈 때마다 큰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진이나 현에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 마을 사람들은 임계촌에 사는 사람들보다 몇 묘의 땅을 더 배분받았지만, 살기가 편리하지 않아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임계촌에 사는 아이들은 진이나 현에 가서 공부할 때, 왕복 한 시진을 소요했으므로 힘들지 않았다. 자연스레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일을 겪으니, 머리가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당시에 고백산이 어떤 셈을 했는지, 고청운이 알 리 없었다. 만약 고청운이 고백산의 셈을 알았더라면 더욱 존경했으리라.
고백산의 말을 들은 고청운은 이 시대를 얕잡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청운이 갓 공부를 시작했을 무렵, <삼자경>은 배울 만했다. 전생에서 배운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입에 잘 붙었고 외우기가 쉬웠다.
그래서 고청운은 한 달 만에 고청명의 진도를 따라잡았는데, 사실 그것도 자제한 결과였다. 너무 빨리 배우면 고백산이 자신을 천재로 오해할까봐 우려되었다.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고청운이 자제했는데도, 고백산은 매우 놀라 기뻐했다. 이를 지켜본 고청명은 긴장하여 더욱 노력해서 공부했다.
천자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자, 고청운의 배우는 속도가 더뎌졌다.
고백산은 질손인 고청운이 천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매우 실망했다. 하지만 고청운은 아직 어렸다. 앳된 얼굴이 통통했고, 키는 고백산의 허벅지 높이에 불과했다. 고백산은 실망한 기색을 표하지 않고 기대를 다잡았다. 고청운은 아직 어리니 천천히 가르치면 따라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고청운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고청운은 한번 본 것을 줄줄 외울 수 있는 천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보다 살짝 나은 정도였을 뿐, 지극히 일반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더욱 노력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자, 고청운은 자신이 어느 조대에서 환생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고청운은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책을 보면서 시기를 가늠했다. 이곳에서 송나라 이후 천하를 호령한 건 원나라가 아닌, 화원조(华援朝)라는 한인(汉人)이었다. 화원조가 화조(华朝)를 세우고, 400년 후에 지금의 천자가 화조를 전복했다.
고청운이 계산해 보니, 지금은 청나라 초기와 비슷한 시기인 1600년에서 1650년 사이였다.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다. 고백산의 말에 따르면, 이전 조대는 매우 발전해서, 지금 생산량이 높은 작물은 이전 조대에서부터 서서히 보급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손들이 선조가 세운 조대를 지키지 못했다.
고청운은 크게 깨달았다. 어쩐지 이곳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고대와 조금 다르더라니. 예를 들어, 세금 징수도 익히 듣던 고대 상황보다 훨씬 좋았다. 고청운은 그 이유가 그저 새로운 황조가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화원조 역시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인가? 너무나도 시대적 특색이 있는 이름이잖아!’
그러나 고청운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화원조는 죽은 지 이미 몇백 년이 지난 데다가, 고청운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화원조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시대로 거슬러 온 것일지도 모르는 자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이 시대와 다른 점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고청운이 태천(*胎穿: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는 것)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더 걱정할 뻔했다. 지금은 공부 문제를 걱정할 때였다.
* * *
고청운은 외우는 속도가 느렸다. 고백산은 그저 글자를 어떻게 읽는지만 설명하며, 뜻은 음을 다 암기하면 가르쳐 주겠다고 덧붙였다. 고청운은 큰할아버지의 수업 방식이 탐탁찮았다. 획이 많고 낯선 번체자는 보고 있으면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뜻을 모르는 채로 암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전생에서 공부할 때는 뜻을 이해하면서 음도 암기했기 때문에 훨씬 수월했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고대하가 만들어준 목탄필(木炭笔)로 번체자를 간체자로 한 자 한 자 평평한 석판 위에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간체자로 보면 친근해서 암기하기가 수월했다.
고청운은 전생에서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어문 실력은 갖춰서 간체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맞고 틀리는 건 일단 각설하고, 암기에 도움이 되면 그만이었다.
전생에서 십여 년간 공부했던 내공은 역시 쓸모 있었다. 이 방법을 응용한 후 고청운의 암기 속도가 빨라졌고, 그 모습을 본 고백산은 무척 놀랐다.
암기 문제를 해결한 고청운은 간체자를 다시 번체자로 바꿔 썼다. 반드시 글자를 번체자로 정확히 쓸 줄 알아야 했다. 획과 필을 하나라도 틀려서는 안 됐다.
* * *
고청운은 공부에 열중하며 세월을 보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육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비로소 고청운은 열 살이 되었다.
열 살이 된 고청운은 많이 건강해졌다. 육 년 전에는 또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작았지만, 이제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과거 예비 시험에 뜻을 세운 고청운에게 건강한 신체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을 볼 때 초조하여 몸이 차가워지곤 했다. 이러한 고시장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여 시험에서 낭패를 보면, 심한 경우 폐인이 되곤 했다. 운이 좋으면 몇 달 내에 상태를 회복했지만, 운이 나쁘면 그대로 황천길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홍루몽>의 인물 가주(贾珠)를 들 수 있었다. 대지주인 가씨 집안이라는 좋은 조건이 가주를 뒷받침하여, 그는 고시에도 붙었다. 그러나 가주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고청운과 같은 가난한 집안 출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는 여러모로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보약을 먹을 수 없으면 스스로 몸을 챙길 줄 알아야 했다.
특히 조산아였던 고청운은 더욱 몸을 챙겨야 했다. 백세까지 만수무강하지는 못하더라도 예순까지만 살아도 족했다. 고청운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고청운에게 보양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전생에서 보양과 관련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전생의 기억에 다시금 감사했다.
고청운은 전생에서 외할머니와 사이가 가까웠다. 그래서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 일했을 때, 외할머니 댁에서 묵을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수록, 그는 외할머니가 정말 연로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할머니를 잃을까 봐 두려워진 전생의 고청운은 노인의 보양 비법을 담은 책을 자주 읽고 인터넷을 통해 관련 정보를 검색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청운은 보양하는 법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다. 그때의 지식이 지금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보양은 중년층이나 노인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며, 어렸을 때부터 보양을 중시하면 더욱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고청운은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러면 잠에서 깼을 때의 불편한 느낌이 해소되고 머리가 맑아졌다. 그리고 고청운은 물을 반드시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그 행동이 위를 보호해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을 한 번에 벌컥벌컥 마시면 복부의 장기가 팽창할 수도 있었다.
이어서 고청운은 뜰을 한 바퀴 돌았다. 몸을 쭉쭉 펴는 체조를 하고 태극권을 하기도 했다. 동작의 정확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근육과 뼈를 유연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이후에는 아침을 먹고, 천천히 고백산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전 내내 혹은 한 시진 동안 공부를 했다. 고백산의 일정에 따라서 공부하는 시간이 달라졌다.
마을에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집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소지주였던 고씨 집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었다. 금전적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은 시기에는 두 끼 식사량을 세 끼로 자잘하게 나누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고청운이 건강해진 후에는 집안 상황이 좋아져서 든든한 세 끼를 먹기가 어렵지 않았다.
고청운은 점심을 먹은 후에 약 일각(*一刻: 15분) 동안 서 있다가, 방에서 이각(二刻) 동안 걸어 다닌 후 잠시 낮잠을 잤다. 이 모든 것을 하는데 이각에서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이후에는 전생에 했던 것처럼 삼각(三刻) 동안 공부한 후에 잠시 쉬었다. 쉬는 동안에는 닭장 청소를 하거나 집안일을 했다. 노진씨와 소진씨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
고청운은 종종 어린 사촌 남동생을 안아주기도 했다. 그랬다. 3년 전, 고청운이 일곱 살이었을 때 이 씨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구단(狗蛋)이라고 지었다. 이 씨는 일 년 전에, 또 아들을 낳았다. 첫돌을 맞이한 아들의 이름은 구잉(狗剩)이었다.
사촌 남동생이 둘이나 생긴 고청운은, 그들의 이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구단(狗蛋)과 구잉(狗剩)이라니, 차라리 자신의 애칭이 나았다. 고씨 집안사람들은 이름이 천할수록 인생이 평안해진다고 믿었다. 구단과 구잉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이름을 이상하게 지은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 씨가 아들을 낳은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아들을 낳기 전의 이 씨는 항상 조용했고 노진씨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그런데 아들을 둘이나 낳은 후에는 이 씨가 집안일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 의식을 가지게 된 것처럼, 더 이상 크고 작은 집안일에 빗겨난 채로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고청운은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을 뒷바라지해 주는 고대하와 소진씨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대하와 소진씨는 이방(二房)쪽에서 고청운이 공부하는 데에 이견을 내비칠까 봐,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를테면, 고청운이 공부하다가 시험에 합격하면 고계산, 노진씨, 고이하, 이 씨에게 어떻게 보은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다. 또한, 고백산이 고청운을 칭찬한 일은 반드시 집안에 알렸다.
노진씨는 고청운의 공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얌전한 고청운을 항상 아낌없이 칭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뻐하며 머리카락 한 올도 가만두지 않았다.
노진씨는 영리하게도 집에서만 고청운을 칭찬하고 바깥에서는 요란을 떨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끌지 않는 것이 나았다. 노진씨는 남이 고씨 집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고청운도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호감을 사려면 무표정으로 일관해서는 안 됐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현명했다. 고청운은 타고난 피부가 하얗고 보드라운데다가 귀엽게 생겼다. 게다가 말도 예쁘게 잘했고, 공부하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을 사로잡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세뇌되었다. 고청운이 공부를 하는 것을 적극 지지함은 물론, 잘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청운은 생각이 바른 아이였다. 만약 고청운이 바르지 않은 아이였다면, 자만했을 것이다. 자신은 똑똑하다고, 수재에 합격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오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고청운은 고대하와 소진씨가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뒷바라지하는지 잘 알았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성실했다.
그래서 구단과 구잉이 태어났는데도, 집안에서 고청운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고청운은 여전히 고계산과 노진씨의 보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