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설득 (2)
고백산은 조금 부끄러운 듯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시 내가 자네와 제매(*弟妹: 남동생과 여동생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서운하게 했지. 그런데 아버지 소원이 딱 그거 한 가지였네. 우리 고씨 집안에서 수재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나와야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얕보지 않는다고 하셨어. 그때 내가 자네보다 조금 더 타고난 부분이 있어서, 내 공부 뒷바라지를 해주신 거고. 그 뒤 수 해 동안 시험을 봤는데도 제대로 된 명분을 얻지 못해서 자네와 제매를 고생시켰지."
“형님을 원망하는 게 아닙니다. 전조는 부패가 상당했고 합격을 은자로 사는 치들이 넘쳐나던 때니까요. 상대적으로 넉넉지 않던 우리 사정에 형님은 실력으로 승부했지 않습니까? 형님은 새로운 황조가 들어서자마자 동생(童生)으로 합격하셨으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고계산은 당시에는 내심 자신의 형이 원망스러웠지만, 오늘 고백산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말이 부드러워졌다.
고백산과 고계산은 서로 한탄을 나눴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새로운 황조가 들어서고 많은 사람이 죽었잖느냐. 사람이 적으니까 내가 돋보이게 된 것이지. 게다가 좀 구석진 곳에 있어서 배운 사람이 적으니, 나 같은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거고. 하지만 결국 마지막 시험인 원시(院试)는 두 번이나 봤지만 합격하지 못했지 뭔가.”
고백산은 있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며 탄식하고는 계속 말했다.
“원시에 산학(算学) 내용이 추가 되었는데, 내 배움이 부족하여 줄곧 낙방했었지. 하지만 우리 전자는 반드시 현시(县试)와 부시(府试)를 통과할 걸세. 진이나 현에 가서 괜찮은 사숙(*私塾: 사설 글방)을 찾아보세. 전자는 타고난 재능으로 합격할 것이야. 이는 고씨 집안의 미래가 걸린 일이네. 내가 가문에 은자를 출자해 달라고 요구하겠네.”
고계산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애꿎은 잎담배만 피웠다.
“고씨 집안도 이제는 임계촌에 뿌리를 내린 셈이지. 옛 터전이 홍수에 사라졌지만, 조상님의 산소도 이곳으로 이전했으니 앞으로 임계촌이 우리의 뿌리인 셈이야.”
고백산은 고계산의 두 아들을 보면서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대하네는 형제 셋이 살아남았지만, 내 아래로는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그 자식은 어떻게 가르쳐도 공부할 재목은 아닐세!
재산은 떠밀려 내려가거나 빼앗길 수 있지만, 배운 지식은 아무도 훔쳐 갈 수 없네. 천하 그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결국 지식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법일세. 오죽하면 ‘만반개하품유유독서고(*万般皆下品惟有读书高: 세상만사 오직 공부길이 가장 높다)’는 말이 있겠는가. 보게, 내가 공부하지 않았다면 임계촌의 촌장이 될 수 없었을 걸세.”
창밖에 있던 고청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큰할아버지는 역시 배우신 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글을 좀 읽은 지난 시대의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생각이 트인 분이실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고백산은 촌장으로서, 사사로운 정에 붙들리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 정도는 은근히 살펴줄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고백산의 체면을 봐서라도 고씨 집안사람을 괴롭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임계촌에 성이 고(顾)씨인 가구(家口)는 다섯이요, 그 인원은 마흔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묘씨와 이 씨인 사람이 70명에서 80명 정도 되는 것에 비하면, 고씨인 사람은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촌장은 고씨 사람이었다.
현재 묘, 이, 고, 세 가문의 세력은 팽팽했다. 다른 성씨를 가진 집이 몇 채 있었지만, 모두 평화롭게 지냈다. 마을 자체가 단결이 잘되는 분위기였다.
관계를 논하자면, 물론 고계산과 고백산이 혈연상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고대하와 고이하는 공부할 재목이 아니었고, 고백산에게는 성년인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고신하(顾申河)였다. 고신하는 고대하와 나이가 비슷했다. 고신하도 공부할 재목은 아니라서 글자 몇 자만 겨우 깨우쳤다.
고신하는 아내 도 씨(陶氏)를 얻어 아들을 둘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고청명과 고청량이었다. 도 씨는 아들을 둘 낳은 덕택에 가문에서 지위가 높았다.
“그러니까, 고씨 집안이 앞으로 더 잘살려면 손자들에게 기대야 하네. 지금 청명이를 붙잡고 공부 시키고 있으니 적어도 동생(童生)에는 붙을 것이고 아무리 못해도 내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네. 어린 녀석은 아직 재능을 보이지 않네. 그렇게 먹을 걸 좋아하니, 아마 가망이 없을 것 같더구나.”
고백산은 손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손자 이야기에 이르자 고계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 우리 집은 더 참담합니다. 손자라고는 전자 한 녀석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둘째 며느리가 제구실을 못하고 계집애를 낳았네요.”
대왜자와 이왜자는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고청운은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 고씨 집안은 고청운도 세상을 저버릴까 봐 명줄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전자(栓子)’라고 지었다.
“계집애들은 명줄을 잘도 보전하는데,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니.”
옆에서 듣고 있던 고이하는 지금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또 딸을 낳다니!
“백부님, 아버지,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때, 고대하가 입을 열었다. 고백산과 고계산이 모두 한숨 쉬는 것을 지켜보자니,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 고중산(顾仲山)이 떠올라서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백산과 고계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대하는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덧붙였다.
“저는 전자의 공부 뒷바라지에 찬성합니다. 백부님께서 가르쳐 주신다니 송구합니다. 책을 빌려주시면, 집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붓, 먹, 벼루, 종이를 구비하겠습니다.”
고대하는 잠시 멈추고는 고백산과 고계산을 살폈다. 그 둘이 딱히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지 않자, 고대하가 말을 이었다.
“붓은 야생초로 직접 만들 수 있으니 돈이 들진 않을 겁니다. 먹은 진흙으로 대체하고, 주로 석판이나 목판을 쓰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붓, 종이, 먹, 벼루를 모두 아낄 수 있습니다. 전자가 글씨는 잘 쓰게 되면, 그때 저렴한 종이에 연습을 하게 해주죠.”
이것들은 고청운과 고대하가 미리 의논해 둔 내용이었다.
고백산과 고계산이 찬성하는 기색을 내보이자, 고대하는 더욱 자신감을 가졌다.
“전자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백부님의 가르침으로 동생(童生)에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전자가 글자를 어느 정도 익히면 현이나 진에서 책을 베끼는 일로 돈을 좀 벌면서 생계를 꾸릴 수도 있을 거예요. 좌우지간 저와 전자 어미는 열심히 돈을 벌어두겠습니다.”
고대하는 말을 마치고 고이하를 바라봤다. 이어서 진심을 담아 미안함을 표했다.
“나중에 아우가 아들을 낳으면, 똑같이 뒷바라지할 겁니다!”
그러자 고이하는 머리를 만지며 실없이 웃었다.
“전 아무 의견 없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하죠.”
고백산은 만족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것이 바로 부자자효(*父慈子孝: 어버이는 자식에게 두터운 사랑을 베풀고 자식은 부모를 잘 섬기는 일)라고 생각했다.
고계산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고대하는 전에 소진씨가 이야기한 것을 떠올리고 그 내용을 가감하여 말했다. 그 내용 중에는 고청운의 부역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고계산의 얼굴에 안쓰러움과 우려가 동시에 서렸다.
그들은 고청운에 관한 토론을 마치고 올해의 농사와 수확 이야기를 나눈 후, 마침내 각자 흩어졌다. 고청운도 얼른 노진씨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어디 갔던 거니? 날이 어두우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급히 뛰어오는 고청운을 보고, 노진씨가 말했다.
이 씨가 또 딸을 낳자, 고청운은 노진씨의 마음에서 더욱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진씨는 고청운이 평소에도 사랑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잘해줬다.
“변소에 다녀왔어요.”
고청운은 젖은 손을 내보이며 웃었다.
“또 물기 닦는 걸 깜빡했구나.”
대아가 등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고청운의 이마를 부드럽게 두드리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아줬다.
* * *
이날 저녁, 고계산은 고청운의 공부 뒷바라지를 할 것인지에 대한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일단 결심을 하면 목돈을 고청운에게 써야 했다. 향후 몇 년간 집안 경제 사정이 빠듯해질 것이 빤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농가에서 책을 읽는 건 매우 사치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고계산은 수차례 고민했다.
이 부분을 고대하가 언급했을 때, 소진씨의 걱정에도 살짝 변화가 생겼다. 소진씨는 잠든 고청운의 얼굴을 보면서 살포시 말했다.
“아버지가 분명 어머니와 상의할 거야. 이 집에서 어머니도 절반 정도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 한 몫 할 수 있단다.”
소진씨는 잠시 웃고는 말했다.
“다행히 동서가 딸을 낳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머니가 동의할 기회도 훨씬 적었을 텐데.”
소진씨는 며칠 뒤에 시간을 내어 절에 가기로 결심했다. 보살님께 소망을 들어주십사 빌기 위해서였다.
고대하가 소진씨의 혼잣말 같은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달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두 달 전의 일도 잊지 마시오. 이 일은 우리가 평생 마음에 담고 가야 하는 일이오.”
소진씨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논하니, 소진씨는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이제 고청운의 공부는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두 달 전, 고대하와 소진씨는 유랑하는 노도사에게 노진씨를 꾀어 달라고 부탁하며 모아둔 돈을 전부 써버렸다.
노진씨는 사리 분별을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여느 노년 여인처럼 미신을 강하게 믿었다.
소진씨는 사람을 사서 도사로 변장시키고서는, 집안일과 지령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를 숙지한 도사는 노진씨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성사했다. 그리고 일단 신뢰를 얻은 후 감언이설로 세뇌 시켰다.
도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고씨 집안에는 학문의 기운이 있소. 선조의 묘지에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모(官帽)가 있으니, 고씨 집안에서 반드시 벼슬에 오르는 사람이 나와 효도할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후반생의 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이 말을 들은 노진씨는 기분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후, 노진씨는 마을에서 도사에 대해 알아봤다. 그런데 한 가족이 노도사를 만났다며, 노도사가 하는 말이 잘 맞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로 인해 노진씨는 생각이 많아졌는데, 그 와중에 고백산이 집에 찾아와서 고청운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며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장담한 것이었다.
그날 밤, 고대하 일가족은 달고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