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설득 (1)
점점 기온이 올라가자, 집안사람들은 고청운을 조금씩 풀어줬다.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감기에 걸릴 일이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고청운은 친척 형들과 놀 기회가 많아졌고, 그만큼 큰할아버지 댁에 자주 갈 수 있었다.
노진씨가 고백산을 원망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같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항상 일관된 태도로 대했다. 고백산은 한 마을의 촌장이었다. 또한 고씨 집안과 기근을 피해 도망 온 다른 혈연관계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다.
고청운은 큰할아버지 집에서도 환영받는 존재였다. 나이가 어리지만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뒤지지 않았고, 입은 옷은 항상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얼굴이 희고 부드러웠으며, 콧물을 질질 흘리는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고백산은 약 50세로, 청색 장삼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었고, 턱에는 수염을 길렀는데 오관(*五官: 눈, 귀, 코, 혀, 피부)이 고계산과 6할은 비슷했다. 각진 얼굴형에 이마가 넓어서 고계산보다는 젊어 보였고 풍채가 있었다.
고백산은 일 처리를 할 때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여, 마을에서의 지위와 명망이 높았다.
고청운은 집에 들어가 큰할머니와 인사를 했다. 큰할머니는 고청운의 손에 땅콩 몇 개를 쥐여주고는 얼굴을 몇 번 꼬집었다. 고청운은 익숙한 듯이 서재 방향으로 걸어갔다.
“형을 방해해선 안 된다. 공부를 하고 있거든.”
큰할머니가 당부를 했다.
큰할아버지 댁은 아무래도 집안사정이 조금 더 좋았다. 그 덕인지 큰할머니는 노진씨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더 젊어 보였다. 큰할머니 얼굴의 주름은 왠지 편해 보여서, 유난히 자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아이들도 큰할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지하게 답했다.
“문밖에서만 듣고 안에 들어가지는 않을게요.”
“너같이 어린아이가 서재에 가서 뭘 듣는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고청운이 몇 발자국 걸었을 때, 큰할머니가 중얼거렸다.
고백산의 저택 구조는 고청운의 집과 비슷했다. 흰색 벽과 회색 기와로 만든 튼튼한 집이었고, 후원에 서재가 따로 있다는 점이 같았다. 하지만 고백산의 저택이 고청운의 집보다 조금 더 넓고 질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다섯 마을이 모여 더 큰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고청명의 말에 따르면, 큰할아버지는 그렇게 다섯 동네가 모인 마을의 이정(*里正: 리(里)의 행정업무 담당자)이 되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이정은 작은 마을의 촌장보다 더 큰 권력을 지녔고, 호장(户长)처럼 세금 등을 감독했다. 기장(耆长)은 도둑을 전문적으로 감시했으며, 이 직급은 모두 시골 마을의 말단 관리직이었다. 말단 관리직은 일반적으로 현지의 지주가 맡았는데, 비록 말단직이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지금 조대의 황권이 농촌까지 오지 않아서 현급 이하로 리(里)단위를 설립하였고, 리 단위의 장관을 이정(里正)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아버지 고대하가 고청운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이정이 현대의 진장(*镇长: 지방 행정 구역인 읍의 우두머리) 격이라고 생각했다.
평상시 사람들은 ‘진(镇)에 가서 물건을 사자’고 했다. 다섯 개 마을 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마을에서 5일 혹은 10일마다 장이 열렸고, 이정 역시 그곳에서 거주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 서는 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가게를 열어 물건을 팔게 되었고, 서서히 이 마을의 인구가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곳을 ‘진’이라고 불렀다.
진에 사람이 많고 시끌벅적하면 날품을 팔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에 사람이 적고 한가하면 부수입을 벌기가 어려웠다.
현재 현지의 이정은 수재에 합격한 사람인데다가, 대지주 집안사람이었다. 고청운은 큰할아버지의 이상이 매우 높다고 여겼다. 하지만 수재에 합격하지 못하면, 이정 같은 건 될 기회조차 없어보였다.
고청운은 높은 문턱에 앉아서 몸을 움츠린 채로 문에 귀를 대고 엿들었다.
서재 안쪽에서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는 성조를 길게 늘어트렸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고, 가을은 수확하고 겨울은 쌓아 놓는다. 음, 으음……, 금은 여수에서 난다!”
고청명은 머뭇거리더니 마지막 문장을 제멋대로 내뱉었다.
“틀렸어, 틀렸어! 또 틀렸구나! 어쩜 그렇게 멍청한 것이냐? 사흘이나 되었는데 이 몇 마디를 외우지를 못하다니. 이실직고하거라. 어제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정말 외우긴 한 것이냐? 아니면 또 밖에 나가서 논 것이냐?"
고백산은 분노했다.
“저, 저어…….”
고청명이 우물쭈물했다. 고청운은 문에 귀를 댄 채, 고청명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손을 내밀거라!”
고청명은 손을 내밀지 않은 듯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을 내놓으라니까!”
고백산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서재 밖의 고청운은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
철썩!
고백산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나무 회초리로 고청명의 손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고청운은 몸서리를 치다가 문에 부딪쳤다.
“전자야, 왔어?”
고청명은 고청운을 보고 눈만 반짝였다. 고백산에게 매를 맞던 중이었기 때문에,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고백산은 고청운을 슬쩍 보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고청명의 손바닥을 한 번 더 때렸다.
그 순간, 고청명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외울 수 있어요.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고, 가을은 수확하고 겨울엔 쌓아 놓는다. 일 년 이십사절기 나머지 시각을 모아 윤달로 하니 이로써 해를 이루고, 이슬이 밤의 찬 공기를 만나면 찬 서리가 되어 내리며, 금은 여수에서 난다.”
그때, 고청운이 작은 몸으로 고백산처럼 두 손을 등 뒤에 진 채 유창하게 문장을 외웠다.
그러자 고청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청운을 쳐다봤다.
고백산도 매우 놀라서 고청명을 훈계하고 있던 것을 잊어버렸다. 고백산은 급히 고청운에게 다가가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고청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전자야, 할아버지에게 말해주렴. 누가 가르쳐 준 것이냐?”
“큰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잖아요.”
고청운이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내가?”
“네. 밖에서 듣고 있다가 외운 거예요.”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산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라 고청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고청운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고청명 쪽을 바라보니 고청명과 고백산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럼, 삼자경(*三字经: 중국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교과서)은 할 줄 아느냐? 얼마 전에 네 형에게 알려준 건데, 한 번 외워보지 않으련?”
고백산이 물었다.
“삼자경이 뭐예요?”
고청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서……”
고청운이 고백산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외우기 시작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선하다. 타고난 성품은 서로 가깝지만, 습관에 의해서 서로 멀어진다……. 주나라는 역사상 가장 장구한 왕조였고, 그 역사가 800년이 넘는다……. 열심히 학습한다면 진보할 수 있고, 유희에만 욕심을 부른다면 무슨 일이든 성공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권면(*勸勉: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하여야만 성공의 길로 갈 수 있다.”
고청운은 가까스로 끝까지 외웠다. 중간에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일단은 넘기고 계속 외웠다.
“그럼,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느냐?”
고백산이 또 물었다.
“몰라요.”
고청운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고백산이 고청명에게 내용에 대해 강해(*講解: 문장이나 학설 따위를 강의하듯이 논하고 풀이함)할 때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문밖에 있던 고청운은 그 내용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고청운은 그 뜻도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이런 내용을 어느 정도 보았기 때문이었다.
고백산은 드디어 미소를 지으며, 고청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할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알겠구나.”
고백산은 고청운에게 등자에 앉으라고 말한 후, 고청명에게 하던 수업을 계속했다.
고청운은 등자에 앉아서 얌전히 수업을 들었다. 고백산은 고청운의 수업 듣는 태도가 제법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고청운은 안도했다. 지난 7개월 동안 세운 계획이 성공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이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고백산은 마을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글을 알지 못했다. 고씨 집안은 글자를 많이 아는 축에 속했다. 삼대의 남자들 중 글을 아는 사람이 있으니, 조금 과장하자면 이 촌구석에서 고씨 집안 정도면 학문에 힘쓰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이날, 집에 돌아간 고청운은 조금 불안했다. 큰할아버지 댁에서 과한 행동을 취한 게 아닐까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며 이틀을 기다린 끝에, 저녁 무렵에 드디어 고백산이 집으로 찾아왔다.
고백산이 들어오자마자 노진씨가 바로 차를 내주었다. 그리고 노진씨는 며느리와 손녀들, 그리고 고청운을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호기심 많은 고청운은 노진씨가 고계산, 고대하, 고이하만 남겨두는 것을 보자 무슨 일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노진씨와 다른 이들은 기름등 아래서 옥수수 알갱이를 분리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고청운은 몰래 문밖으로 나가 후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옥의 목제 창문 아래에서 고백산, 고계산, 고대하, 고이하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낮은 탓에 겨우 몇 마디만 들려왔지만, 그래도 머리를 창문에 더 가까이 대니 대화가 잘 들렸다.
당옥 안에서는 고청운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 아이는 타고났어. 참을성 있게 앉아서 공부할 정도로 총명해. 공부를 시키지 않기엔 아까운 아이일세.”
“…….”
“돈이 없다고? 내가 돈이 있으니, 나를 따라 공부하게 하세.”
고백산의 목소리가 커졌다.
“형님, 제가 어찌 형님께 돈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고계산이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집안 사정이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형님네 은자를 막 다 갚아서 이제 빚 없이 숨 좀 돌리려고 하는데, 전자를 공부시키기엔 아직 부담스러워요. 공부는 십몇 년이 걸리는 일이잖습니까. 형님의 제안은 고맙지만 청명이와 청량이 공부도 시켜야할 텐데, 세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실 수 있겠어요? 글만 가르치는 건 가능하겠지만, 시험도 보게 하려면 은전이 많이 들 텐데요. 제가 해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럽니다.”
고계산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글공부는 마치더라도 나중에 무용지물이 될까 봐 걱정이기도 합니다. 농사일은커녕 혼인도 못 하게 되면, 아이를 망치는 게 아닌 게 아닐런지요.”
“농사짓는 일이 공부보다 중요하다고?"
고백산은 불만을 표했다.
“형님, 보세요. 원래 집에는 200묘의 밭이 있었죠. 그런데 형님을 위해서 100묘를 팔았고, 그때 형님은……”
“나도 안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