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5)화 (5/504)

5화. 일력(日曆)

그날 이후로 고청운은 그 누구도 얕보지 않았다.

네 살밖에 안 된 이아의 시기심 때문에 저승에 갈 뻔 했는데, 어른들의 심보는 오죽하랴. 

고청운은 그날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모른 척했다. 당시에 고청운은 만으로 두 살도 되지 않았었다. 그는 이곳의 방언을 갓 배우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말이 매우 느렸다. 그런 고청운이 그날의 기억한다고 한들, 누가 믿겠는가. 그리고 이아도 같은 핏줄이니, 고청운이 이야기한다 해도 어른들은 믿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고청운은 여전히 이아를 살짝 경계했다. 이아가 멋모를 때 한 짓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아도 어쩌면 그때 일로 놀랐을지도 몰랐다. 활발했던 이아가 내향적으로 변했고 조금 소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 일을 보상하려는 마음인지, 그녀는 고청운에게 무척 잘해줬다. 

고청운은 이아가 당시의 일을 기억하는지, 그 일이 초래한 결과를 후회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좌우지간 그때 이후로 이아를 평범한 어린 여자아이로 보지 않았다. 

고청운은 전생에서 배가 다른 자매들에게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형제자매가 없더라도 전혀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에게 자신이 유일한 자식이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고청운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나름의 원칙을 정하고 행했다. 바로 ‘혈육에게는 겉으로 친절하게 행동하기’였다. 속마음은 다를지언정, 겉보기에는 누이들에게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이런 모습은 부모님께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진짜 혈육으로 받아들이기엔 오랜 기간을 요했다.

고청운은 골치 아픈 문제를 생각하면서 걷느라 이미 개울가에 도착한 것도 몰랐다.

“약골 왔다! 약골이 왔어!”

그때, 온몸이 까맣게 탄 어린아이가 물에서 나와 고청운을 발견하고는 목청껏 소리쳤다.

“어라, 약골이잖아?”

물에 들어가지 않고 놀고 있던 아이들도 고개를 돌려 고청운을 봤다.

그러자 고청운은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눈을 흘겼다.

‘난 그저 몸이 약한 것뿐이잖아. 왜 그런 별명을 붙인 거지?’

“그렇게 부르지 마. 내 동생 몸은 이미 다 나았다고! 또 그렇게 불렀다간 내가 혼내 줄 거야!” 

고청명(顾青明)이 물에서 나와 얼굴의 물기를 닦고 고청운을 보며 웃었다. 

“전자야, 너도 왔어? 같이 물고기 잡을래?”

고청명은 큰할아버지 고백산의 큰손자로서, 고청량(顾青明)이라는 친남동생 한명을 뒀다.

고청운은 고청명이 미꾸라지를 잡는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고청명은 아홉 살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대여섯 살 먹은 조무래기들처럼 굴었다. 적어도 속옷은 걸쳐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집에서 할 게 없어서 고기 잡으러 나왔어요.” 

고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입은 얇은 윗옷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형, 날이 이리 춥잖아요. 물놀이 하지 마세요. 감기 걸리면 안 좋아요.”

오늘의 기온은 십몇 도밖에 되지 않아서, 물에 들어간 아이는 두 명밖에 없었다.

“안 추워. 난 안 추운데?” 

고청명은 고개를 저으며 물장난을 하다가 말했다. 

“바로 올라갈게.”

“지금 안 올라오면 큰할아버지한테 가서 말할 거예요.”

고청운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진흙이 많이 있는 곳부터 팠다. 그때 갑자기 고청량이 나타나서 같이 파기 시작했다. 

“형, 형은 물에 안 들어가요?”

이 말을 들은 고청량의 두 뺨이 빵빵해졌다. 작은 입을 삐죽거리는 것이 무척 화가 난 듯했다.

“응, 안 들어가. 할아버지가 난 아직 어리고 날이 차다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

고청량은 고청운보다 한 살 많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먹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누군가 먹을 것을 준다면 거절하지 않고 바로 입에 넣으려고 했다. 큰할아버지 댁은 마을에서 가장 잘사는 집이었다. 그래서 고청량은 넉넉한 환경에서 몸이 둥글둥글한 아이로 자랐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토실토실한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이 시대에서 고청량과 같은 체형을 가진 사람은 복스럽게 여겨졌다. 삐쩍 마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고청량은 유난히 튀어서, 어른들의 각별한 귀여움을 받았다. 고청량은 직접 돈을 벌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혼인이 있을 때면 고청량을 불러 침상에서 구르게 했다. 이는 일찍 아들을 순산하라는 의미의 풍습이었다. 고청량은 능숙하게 구르기를 하고 매번 3문에서 5문이나 되는 돈을 받았다.

그래서 마을의 어린 아이들이 고청량을 매우 시기했다. 

“네가 너무 뚱뚱해서 그래. 물에 들어갔다가 가라앉기라도 하면 네 형이 널 못 끌고 나오니까.” 

마른 조무래기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약을 올렸다. 그 아이는 어디에서 구르다 왔는지 온몸이 더러웠다. 

이것이야말로 마을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흥, 막말하지 마라. 아니거든.”

고청량은 조무래기를 째려봤다. 

“난 뚱뚱한 게 아니라 체격이 큰 거야. 복이 있는 거라고.”

이어서 두 사람은 티격태격 말싸움을 했다. 

고청운은 그 둘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청운은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니까. 고청운은 열심히 땅을 팠고, 금세 지렁이 몇 마리를 잡았다.

잠시 후, 이아가 그물과 작은 나무통, 낚싯대 등을 가져왔다. 이것들은 고계산이 고청운을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누이, 누이도 가서 놀아. 난 물고기를 잡을게.” 

고청운은 냇가의 상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자아이들이 놀고 있었는데 물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냇가의 폭은 꽤 넓어서 4미터는 족히 되었다. 가장 깊은 곳은 일 미터밖에 되지 않았는데, 물이 맑아서 어떤 곳에서는 바닥의 돌마저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밭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어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건 비교적 안전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잠깐 고민을 하다가 고청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데나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서는 자리를 떠났다. 

고청운은 나뭇가지로 지렁이를 잘라냈다. 이걸 미끼로 쓰면 낚시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방법이지만 간단하고 효과가 좋으니, 아마 작은 물고기나 새우 같은 것을 낚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시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고청운의 작은 나무통은 작은 물고기와 새우로 가득 찼다. 저 멀리서 그물을 가지고 노느라 첨벙거리는 아이들이 물고기와 새우를 한곳으로 모는 데에 한몫을 한 셈이었다. 

고청명은 고청량에게 이아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이아가 도착하자, 고청운은 조무래기들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 * *

고청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물고기들을 잘게 조각내어 암탉 일곱 마리에게 먹이로 주었다. 이렇듯 고청운은 오늘의 임무를 완수했다. 닭이 매일 알을 낳도록 유도하려면 종종 지렁이, 물고기, 새우 등을 주어 건강하게 키워야 했다. 그래서 낚시하기 위해 외출하곤 했다. 

달걀은 고청운이 매일 먹는 영양 보충제 중 하나였다. 

고청운은 농사짓는 방법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물고기를 잡아서 닭의 모이로 쓰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래서 외갓집에 갔을 때 외할머니께 여쭈어보니, 정말로 물고기를 닭의 모이로 써도 된다고 하셨다. 다만 함께 넣어야할 지렁이를 삶아서 익히는 것이 조금 번거롭긴 했다.

고청운은 슬금슬금 당옥으로 갔다. 다른 가족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고청운도 무언가를 해야 했다. 고청운은 등자 위에 올라가 벽에 있는 일력(*日曆: 그날의 날짜, 요일, 일진(日辰) 따위를 각각 한 장에 적어 매일 한 장씩 떼거나 젖혀 보도록 만든 것)을 떼어낸 후 매일 하는 공부를 했다.

고청운은 글을 익히고 있었다. 아버지가 글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애초에 아버지가 아는 글자 자체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글을 읽고 쓰는 일이 드물어서인지, 글자 대부분을 잊은 듯했다. 고청운에게 가르쳐 준 글자는 30여 개 남짓이었다. 할아버지의 기억력도 글자 가르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력은 글자가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고청운은 지난 3개월간 가끔씩 일력을 보곤 했다. 어른들은 고청운에게 일력을 찢지 말라고 주의를 준 후,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고청운은 이제 일력에 있는 웬만한 글자를 읽을 줄 알았지만, 속으로 획은 외워도 쓰기에는 어려운 글자가 적잖았다.

그래서 맨손으로 공중에 획을 그으면서 연습했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체자와 간체자는 다르기 때문에, 구분하여 암기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노진씨가 주방에서 대야를 들고 나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왜 아직도 안 돌아오세요?”

날이 어두워져야 남자들이 돌아온다는 걸 고청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고청운은 노진씨에게 괜스레 물어보았다. 나무를 하러 갔던 고대하는 돌아온 것 같았다. 전원에 땔감이 두 묶음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대하는 눈앞에 보이지 않았고 고계산과 고이하도 오후 내내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숙부는 일하러 묘(苗)씨 집안에 갔단다. 묘씨네 이랑(*二郎: 차남)이 베틀을 만들어야 한다더구나.”

노진씨가 화사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돈이 생기면 할미가 사탕을 사주마.”

임계촌에서 베틀을 만드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집마다 베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틀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부품이 필요했다. 우선 베를 짤 때 사람이 앉을 나무틀을 만든 후, 그 외의 부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 구조가 복잡한 편이라서, 관련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고계산은 혼자서도 베틀을 제조할 수 있었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두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마을에 있는 베틀은 거의 고계산이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다른 마을에서도 가끔씩 고계산을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모든 목공들은 자신만의 활동 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같은 마을 출신의 목공에게 일을 청하고, 같은 마을 출신의 목공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만 다른 마을의 목공에게 일을 청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받거나 빼앗으면 누군가에게 원수를 질 수 있으므로 삼가야 했다.

목공의 업무는 대부분 목판을 깎는 일이었다. 그리고 도끼와 철을 갈고 톱을 수리하는 데에 일정 시간이 소요됐다. 이런 일은 먼지를 많이 날리고 소음이 심했다. 그래서 집안에서 일하지 않고 후원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목공방을 만들어 진행했다. 목공방은 집이라기보다는, 나무와 볏짚으로 만들어 세운 초막이었다. 

초막 안에는 산에서 베어 온 나무를 늘 말려뒀다. 

고청운은 고계산이 베틀을 만들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먹을래요.”

고청운의 말에, 노진씨는 미소를 지었다. 노진씨가 웃을 때면 얼굴의 주름이 국화처럼 피어났다. 노진씨가 한 손으로 고청운의 작고 부드러운 얼굴을 만지며 칭찬했다. 

“아이고, 철든 내 강아지.”

주방에서 나오던 숙모 이 씨는 그 모습을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다가, 자리에 멈춰 서서 크게 말했다. 

“어머니, 준비 다 됐어요. 언제 요리할까요?”

“간다, 가. 으이구, 내가 없으면 일을 못 하는 게냐?”

노진씨는 한마디 하고서 다시 고청운과 몇 마디를 나눴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청운은 일력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걸어두었다. 

‘반드시 선생님이 있어야겠어.’

큰할아버지 고백산에게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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