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1)화 (1/504)

1화. 임산현(林山县)

홍정(洪正) 10년, 월양군(越阳郡) 임산현(林山县) 임계촌(林溪村). 

3월의 임계촌은 탐스러운 복숭아가 열리는 계절로, 따스한 해가 내리쬐고 푸릇푸릇한 풀이 자라며 맑은 물이 졸졸 흘렀다. 이맘때면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농지로 나가 바지런히 일을 했다. 끼니때가 되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개와 닭의 울음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농가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고씨 집안 정원에서 한 어린아이가 홀연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어린아이의 아명(兒名)은 전자(栓子), 정식 이름은 고청운(顾青云)이었다. 고청운은 정원 내의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에 활짝 핀 꽃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맴돌며 꼬리를 흔들어대던 강아지 소흑(小黑)이 멍멍 짖어댔다.

고청운은 소흑이를 한 번 곁눈질했을 뿐, 무심히 작은 등자(*凳子: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서 넋을 놓았다.

이 시공에 온 지 무려 4년에 접어들었다. 고청운은 칠삭둥이(*제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아이)로 태어났다. 고청운이 무탈하게 성장한 것은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년(*盛年: 혈기가 왕성한 한창때의 나이. 또는 그런 나이의 사람)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顾)씨 가문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가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청운이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생에 여자였는데 말이다!

* * *

전생에서는 그녀가 세 살이었을 무렵, 부모가 이혼을 했다. 그녀가 딸이라 대를 이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부모는 현지 시(市) 정부 기관 소속이었고, 당시 출산 정책이 엄격하여 둘째를 낳을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가 정부 기관 소속이 아니었다면, 둘째를 낳고 벌금을 내면 됐다. 하지만 정부 기관 소속이었으므로 출산 정책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혹여 둘째를 낳는다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직장을 잃어야 했다. 그들은 직장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이혼을 택했고, 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부모는 서로 그녀를 키우지 않겠다고 미뤘다. 이혼 후의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어머니가 양육권을 갖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고작 몇 푼 안 되는 양육비를 받기 위한 방도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나마 외할머니는 그녀에게 잘해주곤 했다. 당시에 외할머니는 혼자 살고 있었고 외손녀와 함께 살게 됨으로써 의지할 곳이 생겼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외손녀니까, 혈육의 정이 발동한 것이다. 그 덕택에 그녀는 성년이 되기까지 외할머니의 정에 의지해 무럭무럭 자랐다. 부모와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녀는 매월 카드에 입금되는 숫자로 부모의 존재를 실감했다. 그러다가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후에는 아빠, 그리고 엄마의 집에 각각 방문할 수 있었다.

부모의 근황은 꾸준히 전해 들었다. 이를테면, 그녀의 부모가 각각 재혼을 했고, 각각 또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말이다. 이 소식을 접한 그녀는 매우 기뻤다. 엄마, 아빠가 또 이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부모는 헤어지지 않고 잘 살았다. 

어렸던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또 딸을 낳았으면서 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이혼 사유는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는가. 어쩌면 자신이 딸인 것은 핑계였을 거라고, 부모의 감정이 전부 소모되었던 것뿐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부모가 재혼한 후 양쪽 집안에서 그녀를 싫어한다는 점도 불쾌했다. 심지어 동생들은 그녀를 언니 대우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가급적이면 부모의 새로운 가정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녀는 열여덟 살까지만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 명문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학자금 대출로 학비를 해결했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외할머니가 그녀에게 용돈을 내밀곤 했지만, 차마 받을 수 없었다. 연로한 외할머니는 매월 몇 백 위안 정도의 양로금을 받아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전전긍긍하며 어렵사리 졸업한 그녀는 곧바로 현지 지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에 그녀는 외할머니를 보살필 생각이었다. 허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넘어져서 돌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를 치른 그녀는 상심이 도를 지나쳐 쓰러져 잠들었다.

눈을 뜨니, 이 세상으로 오게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시공에 미련이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전부 갚았고 다른 사람에게 진 빚도 없었으며, 모은 돈으로 외할머니 장례까지 치렀으므로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됐다.

만약 그녀가 거액의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소위 혈육이라는 인간들이 자신의 유산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 * *

이쪽에서 태어난 후, 몸이 약하게 태어난 그녀, 아니, 고청운은 온몸이 아팠다. 특히 두통이 심했다. 전생의 기억 탓에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갓난아이답게 젖이든 약이든 꿀꺽꿀꺽 잘도 삼켰다. 가냘픈 울음으로 가끔 갓난아이 흉내를 냈다.

그렇게 고청운은 네 살이 되었다.

새로 언어를 배운 후에도 고청운은 지금이 어느 조대(*朝代: 왕조의 연대)의 어느 지역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큰할아버지 고백산(顾伯山)이 지금은 홍정 10년이고, 이곳은 월양군 임산현 임계촌이라고 가르쳐 준 것만 새겨들었을 뿐, 나머지는 알 수 없었다. 

임계촌은 산수와 조화롭게 어우러진 좋은 곳으로, 마을에는 30여 호의 인가 200명 정도만 있었다. 이곳은 구석진 곳에 위치했는데, 아마 남쪽에 있는 것 같았다. 구체적인 것은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임계촌은 고(顾), 묘(苗), 이(李), 세 가문의 성씨가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이고, 모두 외지에서 이주한 가문이었다. 

십수 년 전, 100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홍수가 강남을 뒤덮었다. 홍수는 비옥한 논밭을 삼켰고 집을 무너뜨렸으며, 백성과 가축이 물에 잠기게 하였다. 또한 대재앙이 지나자마자 역병이 돌아서 살아남은 사람이 더욱 적었다. 당시,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 본래의 터전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홍수는 바로 한 조대를 매장시켰다. 새로 지어진 황조는 10년 만에서야 원기를 조금 회복했다. 

당시 조정은 백성들이 임산현에 개간하여 정착하기를 장려했다. 그러하면 3년 동안은 세금을 감면해주는 우대 정책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뜻에 따라 고청운의 할아버지도 임계촌에 정착했다. 고향은 이미 홍수와 산사태에 잠겨,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큰할아버지 고백산은 동생(*童生: 생원 자격 획득을 위한 과거 급제자)으로서 촌장에 임명되었다. 이 역시 고가(顾家)가 귀향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임계촌에 정착한 이후 고씨 가문이 집을 짓고 밭을 사고 나니 가산이 얼마 남지 않아 생활이 빠듯했다. 다행히 새로 지어진 황조에서 농업과 양잠업(*養蠶業: 누에를 치는 사업)을 장려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세금을 적게 징수했기에 다들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갈 수는 있었다.

남자가 된 고청운은 처음에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전생에서는 남자가 아닌 것을 원망했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남자가 될 줄이야! 

하지만 어느 날 같은 마을의 한 여자아이가 인신매매업자에게 팔려가고, 그 여자아이의 부모가 웃으면서 돈을 세는 것을 본 고청운은 벌벌 떨었다. 

자신이 남자아이인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남자아이가 팔려 가는 경우는 드물었고, 팔린다고 해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므로 안심할 만했다.

이 조대에서 고청운은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다. 본래 한 살 많은 형이 있었지만, 한 차례 고뿔을 앓고는 세상을 저버렸다. 이에 상심한 모친은 걷다가 넘어져 조산하게 되었다. 의원은 모친에게 다시 아이를 갖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고청운이 남자였으니 망정이지, 여자였다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청운의 집안에는 3대가 같이 살고 있었다. 호주(户主)인 할아버지 고계산(顾季山)은 올해 47세로 농부와 목수를 겸직하였다. 

할머니 노진씨(老陈氏)는 46세에 억척스럽고 못하는 일이 없었다. 집안에서 할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할머니의 뜻에 따랐다. 

노부부의 슬하에는 3남 1녀가 있었는데, 그 중 아들 하나는 가정을 꾸리기도 전에 역병 때문에 세상을 등져버렸고, 딸은 시집을 간 후 기근 때문에 살던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 행적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두 아들만 곁에 있었다. 큰아들은 고청운의 아버지인  26살 고대하(顾大河)로, 아내 소진씨(小陈氏)와 1남 2녀를 슬하에 두었다.

작은아들 고이하(顾二河)는 올해 20세로, 아내 이 씨(李氏)와 딸 하나를 두었고, 둘째를 회임한 지는 3개월이 되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대를 이을 유일한 손자로서, 집안에서의 지위가 막강했다. 그는 조부모와 부모님의 절대적인 보배였다.

그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고청운의 허약한 몸을 부지하기 위해 꽤 많은 돈을 썼다. 고청운은 열이 조금만 올라도 안 됐다. 그랬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렇듯 허약한 고청운은 여러 번 위기를 모면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제대로 된 약도 먹기 힘들었다. 

고계산은 아픈 고청운을 위해서 지인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의원에게 진찰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고계산과 노진씨는 고청운을 포기할 뻔하기도 했다.

고청운이 한 살일 무렵, 숙부 고이하에게 고청운보다 훨씬 건강한 아들이 생겼다. 당시에 할아버지 고계산과 할머니 노진씨의 마음은 온통 고이하의 아들에게 쏠렸다. 그래서 고청운을 위해 쓰는 돈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고청운에게는 좋은 부모님이 있었다. 소진씨는 다시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대하 부부는 고청운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으로 대했다. 고청운은 집안의 대를 잇는 유일한 씨로서 대우받았다.

아버지 고대하가 틈만 나면 진(镇)으로 나가 날품을 팔아서 번 돈과 어머니 소진씨가 집에서 죽어라 천을 짜서 번 돈은 모두 약값으로 쓰였다. 

사실 벌어들인 은전은 관청에 바쳐야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고계산은 고대하 부부의 행위를 눈감아 주었다.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자신의 작은 목숨을 아주 소중히 여겼다. 이 시대에는 이런저런 안 좋은 점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고 싶었다. 다시 살 기회가 어렵사리 주어졌으니까. 고청운은 세 살이 되자, 전생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더욱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고청운의 사촌 동생은 작년에 외할머니 댁에 갔다가 병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고청운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사내든 계집이든 오래 살아야 뭐라도 가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고, 내 귀염둥이 손자야. 밖에 앉아 있으면 어떡하누. 바람이 불면 어떡하려고?"

고청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할아버지의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땀내 나는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 돌아오셨어요!”

놀란 고청운은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주름이 가득한 고계산의 볼에 뽀뽀하며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할아버지, 전자(*栓子: 고청운의 아명)는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왜 이제야 돌아오신 거예요?”

“할아버지는 밭에 가서 풀을 뽑았지. 우리 전자는 오늘 뭐 했누?”

고계산은 고청운을 안고서 당옥(*堂屋: 안채의 한가운데 방)으로 들어갔다. 

“닭에게 모이를 주고 밥을 먹었어요.”

고청운이 대답했다. 이어서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숙부, 숙모, 모두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받은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당옥으로 들어간 할아버지는 고청운을 내려놓으며 장난기 가득한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은 뜰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몸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어냈다. 

“온통 흙투성이인 몸을 하고 내 귀여운 손자를 안다니, 어서 가서 씻고 오세요.”

할머니 노진씨는 고계산을 밀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고청운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전자야, 오늘 아침에 누이가 달걀찜 해준 거 먹었니?”

“네, 다 먹어버렸어요.”

고청운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걀은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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