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사라져 버린 것 (14/15)

[11장] 사라져 버린 것

엘리자벳은 페루스와 에셀. 두 사람에게만 손을 허락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는 다른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그 덕에 서약한 이는 두 사람이 유일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 그날 보고 들은 광경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감히 입을 벙긋할 수조차 없었다.

소문보다 더한 사실들이 빠르게 밖으로 퍼져 나갔다. 허수아비 새 황제의 즉위식이 어떠했는지 다들 떠들기 바빴다. 늦게 도착한 이들은 거짓말이라 손사래를 치다 같은 이야기를 연거푸 들은 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쓰러졌다는데……. 그 드레스 밑으로…… 피가 흘렀대요.”

“황궁에서 쓸풀 태우는 냄새가 연신 난다고……. 하혈할 때 그만한 게 없으니 확실하다고 봐도…….”

그러나 곧 즉위식보다 훨씬 충격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리 마른 몸인데도 어쩐지 배가…….”

“궁의들이 모조리 중앙궁에만 있다질 않아요? 즉위식 연회도 여기서 하고. 왜, 즉위식인 만큼 연회는 중앙궁에서 하는 게 전통이잖아요?”

새로 즉위한 황제의 회임 소문.

걷잡을 수 없는 소문의 파장에 연회를 핑계로 황궁에 머무는 이들은 삼엄한 경비에도 중앙궁을 이리저리 살폈다.

* * *

“더는 막을 수 없습니다. 워낙 큰 사실이라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입단속을 시켜도 새어 나가기 마련입니다.”

제임스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즉위식 후폭풍에, 계속되는 연회,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와 정적. 본래 잠이 적은 제임스였지만 최근 그는 목숨 위협을 느낄 정도로 잠을 줄여야 했다.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일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의 주인인 페루스는 그보다 더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발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본래의 계획에도 가깝고 또 약식이긴 하나 두 분은 이미 혼인하신 사이지 않습니까.”

제임스의 말에 페루스는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 껐다. 엘리자벳의 임신 사실을 안 뒤부터 금연했던 페루스였지만 최근 겹친 일은 그에게 다시 시가를 찾게 했다.

“……방해할 이들은?”

“다들 시끄럽게 굴기는 하겠습니다만 밝힌다 한들 크게 반발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두 분 사이의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임스의 말을 들으며 페루스는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사제가 직접 서명한 혼인 서약서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 이것도 유효할 테고. 우리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 수도 없지.”

페루스는 서류를 몇 번이고 읽다 다시 서랍에 넣고 새 시가 하나를 빼 들었다.

“그럼 언제가 좋겠습니까?”

“멀리 갈 필요도 없어. 당장 다음 회의 때 내가 나서지. 그보다 에셀. 그래, 라세르 공작은 무얼 하고 있지? 중앙궁에는 출입하지 못했을 테고. 조용한 걸 보니 소란도 안 피우나 보지?”

“예. 별달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의 매시간 중앙궁 앞에 서 있습니다. 신분이 있는 데다가 서약도 충실히 마친 터라 딱히 제재를 할 수도 없고…….”

“굳이 중앙궁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면 내버려 둬. 이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우쳐 봐야지. 검 하나 들고 같은 공작이라 불러도 제까짓 것이 감히 나와 겨룰 수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겠지.”

“하지만 그 밑에 브륄이라는 자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라세르 공작이 황궁 기사단 안에서는 영향력이 꽤 있는 모양이라 이대로 지켜보기만 한다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가 수도 밖에서 불러들일 기사들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 상황이 온다면 막을 수 없나?”

칼 같은 말이 뿌연 연기를 갈랐다. 제임스는 연기 사이로 흐리게 비치는 주인의 눈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켜봐. 그렇지 않아도 내게 반기를 든 이들이 그를 찾아간다지?”

“적게 남아 있던 수도 북부 세력과 중립이었던 이들 중 일부. 그리고 원로원 몇몇이 노선을 그리로 옮겼습니다. 아무래도 본인들의 몫이 적다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리 큰 세력은 아닙니다.”

“곧 더 나오겠지. 항상 더 달라 난리를 친 것들이니. 에셀 라세르도 불쌍하군. 단기간에 이익으로 뭉친 것들이야 결속력이 뻔하질 않나.”

“…….”

“시간이 되면 다 같이 묻어 버려야지. 북부야 본래 수도로 올 족속들은 아니니 야만인들과 어울릴 정도로만 살려 두면 될 테고. 나머지는 어차피 버러지니, 깨끗이 정리해야지. 새 황제 폐하의 시대인데.”

“…….”

“전에 한번 해 봤을 테니 이번에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알 거라 믿어. 제임스.”

오래전 있었던 남부 세력 다툼이 생각나 제임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 아버지와 형제들이 어떻게 몰락했던가. 페루스를 이용해 잇속을 챙기겠다 덤비다 갈가리 찢겨 나가지 않았던가.

페루스는 상대의 욕심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제임스는 지금 에셀의 곁으로 붙은 이들의 끝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신전……. 그것들을 더 감시해. 서부 것들이 거기로 들락거린다니 보통 꿍꿍이가 아닐 테지.”

제임스가 짧은 상념에 빠져 있을 무렵 페루스는 짤막한 명령을 내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임스가 쌓인 서류 뭉치를 보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몸을 돌린 페루스를 향해 급히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씻으러.”

그 말에 제임스는 입을 꾹 물었다. 페루스는 당장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욕실로 향한다는 것은 목적지가 뻔했다.

분명 시가 향을 지우려는 거겠지. 제임스는 순식간에 사라진 주인을 보다 쌓인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망할…….’

오늘 매캐한 연기 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 이는 저뿐인 듯싶었다.

* * *

타티카는 그답지 않게 방 안을 초조히 돌고 있었다. 약에 취한 걸음이 어찌나 불안한지 지켜보는 수하와 노예들은 혹여나 그가 넘어질까, 그리고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으냔 말이야. 아, 황녀님. 아니 우리 폐하. 내가 곁에 있지도 못하고 어떡하면 좋지.”

손에 들린 구겨진 종이를 다시 살펴본 타티카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임신.」

그 단어가 주는 충격은 세상 무엇보다 컸다.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임신 소식에 이상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 짜증 나!”

결국 몸이 넘어가기 직전 타티카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소파 밑에 엎드려 있는 노예의 등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발을 굴렀다.

“아…… 으…… 으…….”

퍽퍽퍽 소리와 함께 노예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작은 소리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타티카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망할! 닥쳐! 혀를 자른 지가 언젠데 듣기 싫은 소리를 내! 목에 구멍이라도 내야 할까? 네놈 때문에 글에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실상은 약 기운 때문이었지만 노예는 일단 손을 모으고 고개를 더 조아렸다. 날아오는 발길질이 더 매서웠지만 한번 날벼락을 맞은 노예의 입에서는 더는 그 작은 신음도 들리지 않았다.

“내 아이겠지? 확률적으로도 그렇고…….”

타티카는 제가 엘리자벳에게 자주 먹인 미약을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흐응……. 나랑 황제 폐하를 꼭 빼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페루스 그 개자식이 분명 우리 아이를 죽일 텐데.”

중얼거리는 말에는 엘리자벳이 임신한 아이가 제 아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는 슬피 울 테고, 나도 슬프고…….”

타티카는 과장된 몸짓을 하며 계속해서 노예를 차다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조카란다! 네 조카가 생겼어. 동생아. 아니지. 네게 작은 주인이 생긴 건가? 넌 노예니 말이야! 더럽고 벌레 같은 노예.”

시퍼렇게 멍이 든 노예의 고개를 발로 들게 한 타티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타티카와 같이 보라색 눈을 한 금발의 노예는 갑자기 들린 고개에 컥컥 막힌 숨을 뱉었다.

“아버지와 네 어미가 나를 원망하지는 않겠어! 황녀님은 원체 고귀한 피를 이어받았으니깐 내 피가 섞여도 우세리의 자손은 여전히 고귀하겠지!”

“으우…… 으…….”

“아니지. 황제 폐하의 자손은 황족이니깐……. 나로 인해 우리 가문의 피는 더욱 고귀해진 거로구나. 폐하께서 내 아이를 낳는다면 난 부군이 될 테고, 황제의 부군은 황족이니 말이야. 난 역시 훌륭한 가주로군.”

끊임없이 피와 고귀함을 말하는 타티카에게서는 광기가 엿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빙글빙글 돌며 창가로 다가섰다.

높다란 방에서는 넓은 영지의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타티카는 여러 색의 장미를 일구는 노예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노란 장미가 내 황녀님만큼이나 예쁘게 피었네.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어.”

* * *

툴란의 세력은 한 달간 이어진 즉위식 연회가 끝나는 날 극명히 갈렸다.

페루스는 일부 세력이 떨어져 나가기는 했으나 남부 세력과 많은 수도 세력의 지지에 여전히 가장 공고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기득권에 가장 가까운 그들은 즉위식 이후 자신들만의 세력을 과시하며 여러 분야에서 다른 세력을 압도했다.

에셀은 충성심과 무력 높은 북부 세력을 필두로 페루스에게 반기를 든 자들과 기사단 일부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대놓고 새로운 황제와 오로르를 지지했기에 새로운 이들을 많이 포섭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갑작스레 모인 이들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시도 때도 없이 내분이 일어났다.

하지만 권력은 이 두 세력만으로 나뉜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충성 서약을 했던 두 공작의 틈을 파고들고 새로운 세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약소하게 남은 서부 세력과 신전 안에서도 새로이 힘을 키우고 있는 신흥 세력. 그들은 완전히 손잡은 듯 함께했다. 새로운 구심점은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알렉스로 그는 꼭 타티카를 대변하는 것처럼 굴었다.

나이 많은 신전 사제들과 신전의 구세력들은 툴란에서 가장 타락했다 평가받는 우세리 공작과 아슬란을 대표하는 기사의 협력을 못마땅해했지만 새로 즉위한 내려온 자는 강하게 알렉스를 지지했다.

“무슨 자격으로 나선단 말이오!”

“그렇다면 자네는 무슨 자격인가? 고작 남작 나부랭이가!”

“그쪽은 전쟁이나 끝내고 끼어드시지! 서약 하나 받지도 못한 주제에!”

“고작 두 사람 받은 서약에 생색은! 그렇게 따진다면 자네는 아예 이곳에 올 자격이 안 되는 이였어!”

즉위식이 끝나고 처음 열린 대회의는 난장판이었다. 새로운 판도에서 먼저 우위를 점하려 사람들은 아귀싸움을 벌였다. 여기저기서 고함은 물론이요 펜과 종이가 날아들기도 했다. 회의록을 작성하는 서기들은 펜대를 놓고 멀뚱히 폭력이 난무하는 회의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만.”

사람들을 진정시킨 것은 페루스였다. 회의장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그는 느릿하게 사람들을 훑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조금 전까지 싸우던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이 무슨 추태지.”

에셀과 알렉스 등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냉정한 시선에 눈을 피했다.

“폐하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우리가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다들 일할 생각이 없군.”

에셀은 페루스의 입에서 엘리자벳이 거론되기 무섭게 입술을 물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면 중앙궁 앞을 서성였건만 한 달째 엘리자벳의 드레스 자락조차 보지 못한 그였다. 그런데 저리 쉽게 그녀에 대해 말하다니. 끝없는 무력함이 그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그날 끝까지 따라붙었어야 했는데! 강제로라도 뚫고 들어가야지.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울컥하는 에셀의 속내를 어떻게 알았는지 옆에서 브륄이 속삭였다.

“전면전은 가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공작도 영영 알현을 막지는 못할 겁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지금도 저희는 위태롭습니다.”

에셀은 저와 눈을 마주쳐 오는 브륄을 보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황궁으로 돌아만 온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누이를 이겨 작위를 얻었다 한들 자신은 여전했다. 지키기는커녕 싸움에서 진 개처럼 얌전히 대기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분통이 터졌다.

에셀의 심경을 눈치챘는지 페루스가 비웃듯 그를 바라봤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나. 확연한 의미를 가진 표정에 에셀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이대로는 폐하께 근심만 안겨 드리겠어. 가뜩이나…….”

쾅!

순간 에셀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갑작스러운 반동에 넘어갔다. 에셀의 거친 행동에 페루스의 세력 중 몇몇도 야유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뒤이어 한숨 쉬는 브륄을 비롯해 에셀 편에 있던 몇몇 이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폐하를……!”

팽팽한 대치 속에서 에셀은 엘리자벳을 보여 달라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일어선 에셀과 시선을 계속 마주하며 빠르게 멈춘 말을 이었다.

“……홑몸도 아니신데 말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적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근간에 도는 소문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정확한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런. 다들 몰랐던 모양이군. 난 폐하에 대해 하도 떠들어 대기에 다들 아는 줄 알았건만.”

에셀은 페루스를 노려봤다. 페루스는 충격받은 기사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저 멀리 서부에 떨어져 있는 이도 이미 엘리자벳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 선한 척만 할 줄 아는 기사님은 황궁 안에 있음에도 중요한 정보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작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난 기사들은 그런 것에 예민하다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긴 알았다면 공이 그렇게 얌전히 있지는 못했겠지.”

페루스는 에셀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환한 웃음이 비웃음이라는 것을 모를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모두의 앞에서 발표하지. 중요한 일이라 더 미룰 수도 없고…….”

에셀을 비웃은 페루스는 일부러 말을 느리게 빼며 좌중을 둘러봤다. 현 최고 권력자인 그가 중대한 말을 할 듯싶자 모두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폐하께서 회임하셨으니 곧 국혼을 발표할 계획이오. 그러잖아도 황가에는 폐하 한 분뿐인 데다 다른 황족들도 없으니, 귀한 첫 황손을 욕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길지 않은 말에 담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황제의 회임 사실에 이어 국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몇몇 이들이 침묵을 깨고 반응했다.

“사생아! 혼인하지 않은 채 회임하셨다면 첫 손은 아무리 귀하다고 하나 당연히 사생아요! 그런 가당찮은 수로!”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꼬장꼬장하게 생긴 사제였다. 알렉스의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는 사제는 신에 귀속된 이답지 않게 핏대를 세웠다.

“여인의 몸이시기는 하나 황제가 사생아를 가지는 것이 무어 그리 흠이라고 벌써 국혼을 들먹인단 말입니까!”

“흠이 아니라니! 여인은 여인! 혼인도 전에 아이를 가진 것이 무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

“감히 폐하를 들먹이는 것이오! 다들 미쳤군. 당장 각하의 말씀처럼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거늘!”

사제의 말을 신호탄으로 여기저기서 고함이 나왔다. 충격받은 와중에도 제 세력의 우두머리를 비호하는 이, 타락했다며 신을 찾는 사제들, 도덕을 찾으며 황제를 비난하는 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문 사람들. 회의는 다시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그런데 그 사생……. 폐하께서 잉태하신 황손의 아비가 누구랍니까?”

그러던 와중 누군가 망각하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꺼냈다. 시끄러웠던 좌중은 그 질문에 입을 꾹 닫고 페루스를 봤다.

‘……먼저 말을 꺼낸 르온 공작이 아비겠지. 아니라면 저렇게 말할 리가 있나. 하여간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소문에 황제가 황녀였을 시절 난잡하게 놀았다지. 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도 사내들과 밤마다 놀아나느라……. 아비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겠군.’

‘누구의 자식이건 남부에서 이용하려 드는 거군. 하긴, 국서가 된 후 아이는 사산했다 하면 그만이지 않나.’

‘공작과 연인이었다는 건 기정사실이니깐 당연히…….’

‘소문을 이용해 없는 아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어이쿠. 뭐가 사실이든 다시 저쪽 편으로 옮겨야…….’

잠시 묻혔던 여러 소문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배회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엘리자벳은 사내를 밝히는 황녀에서 사생아를 가진 난잡한 황제가 됐다.

“조모의 핏줄이 어디 가지를…….”

“아니지요. 엘라르 황제는 사생아는 없었으니 손녀보다 낫다 할 수 있지요.”

“나이가 많아 없었던 것이지. 모르지 않습니까. 당시 사내들이 얼마나 많이 궁으로…….”

자연스럽게 엘라르 황제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엘라르 황제 당시 이런 회의장에서 감히 그녀에 대해 이리 대놓고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없었다. 어찌 되었건 황제인 데다 공포로 자리한 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황제라는 지위를 가지게 됐음에도 쉽게 입방아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는 세월 동안 오로르라는 가문이, 황가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잘 보여 주는 일례였다.

“황손의 아비가 누구이든 혼인 전 가진 자식은 제국법상 사생아요. 그건 황제 폐하라도 마땅히 적용되는 법이지.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아이를 가지고 남부에서 선수를 치려는 모양인데, 난 용납하지 못하겠소!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소문을 한두 개쯤은 듣지 않았나.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하셨는지!”

수군거리는 소리에 힘을 얻은 기틀란 후작이 말문을 열었다. 오로르에 원한이 깊은 그는 오로르를 척살해야 한다 공공연하게 소리치고 다니던 이로 페루스와는 엘리자벳의 즉위와 생사를 가지고 완전히 틀어진 사이였다.

“옳소! 인정할 수 없소!”

“황손이 있다는 것도 거짓 아닙니까? 공작 각하 혼자 폐하를 알현하면서 어찌 그 사실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몸과 정신이 모두 허약하시어 국무를 볼 수 없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이참에 르온 공작께서는 나라를 삼키려 하십니다그려.”

강경한 기틀란 후작의 어조에 몇몇 이들이 동조했다.

페루스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과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을 유심히 봤다. 제일 먼저 잘라 버려야 할 것들. 엘리자벳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이들. 가장 먼저 척살할 이들의 명단이 대충 정해졌다.

페루스가 제임스에게 명단을 작성하라 눈짓을 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을 때 나선 이가 있었다.

“그만!”

큰 소리와 함께 본래라면 검이 있어야 할 허리춤을 더듬는 에셀은 기틀란 후작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어찌나 매서운지 페루스의 눈길도 어느 정도 담담히 받아 낸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죽고 싶나?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언사를 지껄이는 거지. 후작.”

사나운 기세에 기틀란 후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일 뻔했다. 그러나 곧 상대가 이제 막 공작이 된 북부 촌뜨기인 것을 깨닫고 그는 고개를 억지로 뻣뻣이 들었다.

‘제까짓 것이 아무리 공작이라고 하나 수도에서 평생 굴러먹은 나를 이겨 먹게 둘까 싶으냐.’

“무, 무례하십니다. 공작.”

“무례라니! 그렇다면 그대와 그대 패거리들이 폐하께 지껄이는 말은 모두 다 목이 잘릴 죄겠군!”

패거리라 지칭된 이들의 안색이 벌겋게 변했다. 한평생 패거리로 지칭된 적 없는 이들에게 에셀의 말은 모욕적이었다.

“각하! 아무리 공작 각하라고 하셔도……!”

“입을 다물라! 아니면 당장 그 숨을 거둬 주지. 검이 없다 한들 내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목 하나 못 비틀까?”

에셀의 분노를 지켜보던 페루스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에셀이 나서 주는 덕에 적을 늘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수도 정치는 처음이라 앞뒤 분간을 못 하는군. 엘자의 곁에 있겠다 하는 놈만 아니면 더 이용했을 텐데. 아쉽군.’

에셀의 솔직한 분노는 기사단장 시절에는 존경과 찬탄을 받을 미덕이었다. 그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사였고 그들은 그런 부분을 충정과 정직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능구렁이들이 가득한 수도 정치에서 한 무리의 우두머리로 선다면? 글쎄…….

‘차라리 저쪽이…….’

페루스의 시선이 조용히 앉아 있는 백금발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하얀 옷을 입은 채 마찬가지로 하얀 옷을 입은 사제들과 몇몇 귀족들의 앞에 선 모습이 신성해 보였다.

‘……훨씬 이 자리와 어울리는군.’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눈 색에서는 아무런 동요나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페루스는 에셀과 기틀란 후작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알렉스를 보다 혀를 찼다.

‘엘자를 즉위식으로 데려온 것도 저놈이라 했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그새 자리를 갈아타고……. 뱀 같은 놈. 쯧.’

순간 기묘한 금색 눈이 페루스를 마주 봤다. 페루스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보다 무시하듯 고개를 돌렸다.

“허어! 이 사람 먼저 베어 보십시오! 서약했다 벌써 수도에서 유세를 부리시니 원! 내 무서워 회의장에 나올 수가 있나!”

에셀은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에셀과 마주한 기틀란 후작 또한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그만.”

이만 사태를 끝내야겠다 생각한 페루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공작.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모르는 모양인데 여긴 함부로 누구의 목을 비튼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시작한 게 누구인데!”

지적하는 페루스를 보며 에셀이 이를 드러냈다. 눈가 흉터가 꿈틀댔다. 그러나 페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틀란 후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허나 공작의 말도 옳아. 기틀란 후작. 경은 어떤 자리건 폐하를 모욕했으니 당장 목이 베이고 일가가 노예로 전락해도 할 말이 없네.”

에셀에게 회심의 미소를 보이던 기틀란 후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남부의 원한을 잊으시더니 공작께서도 이미 오로르의 개가 되셨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통탄스럽습니다!”

핏대를 세운 기틀란 후작은 페루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마저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잉태하신 황손을 사생아라 부르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

“허……! 사생아를 사생아라 부르는 게…….”

“폐하께서 임신한 황손은 황가의 첫 손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내 핏줄이거든.”

페루스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렀다. 몇몇은 그럴 줄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와그작―

에셀은 제 앞 탁자를 꾹 잡았다. 강한 악력에 100년은 족히 넘게 자리를 지켰던 나무가 으스러졌다.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

기틀란 후작은 번번이 막힌 말에도 꿋꿋이 제 의사를 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페루스는 그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믿건 말건 상관하지 않네. 하지만 난 황가와 르온의 핏줄을 이은 아이가 사생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고로 폐하께서는 국혼 자리에서 나와 함께하시겠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일 사실이라고 해도 이렇게 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배태하신 씨가 황가와 공작가의 결합이긴 하나 사생아임은 분명한 것 아닙니까! 고작 사생아를 빌미로 국혼을 밀어붙이시겠다는 것은!”

“사생아라……. 계속 듣고 있자니 불쾌하군. 엄밀히 따지자면 혼전 임신에 가깝지. 모두들 잊은 모양이지만 폐하와 나 사이의 약혼은 깨진 일이 없어. 게다가 그분과 난 얼마 전 사제 앞에서 약소하게나마 정식으로 식을 치렀네. 증거가 필요하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

뻔뻔한 페루스의 말에 기틀란 후작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이 입을 쩍 벌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리온 황제 때 시작된 그들의 약혼 관계는 오로르가 몰락 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사자인 엘리자벳조차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 황제께서 등극하신 이래 피를 보고 싶지는 않지만 내 핏줄을 계속 욕되게 한다면 라세르 공작보다 내가 먼저 검을 꺼내 들지. 어떤가 후작. 계속하겠나?”

기틀란 후작이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

“……염병. 지금도 골치가 아픈데, 하…….”

기틀란 후작이 물러나자 브륄이 작게 욕을 했다. 평시 말을 조심하는 그였지만 페루스가 일으킨 파장은 그에게 거친 북부 말투를 끌어내기 충분했다.

“지금이라도 저희 쪽에서 강하게 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국혼을 막지 않는다면 국서 자격으로 계속 알현을 막을 텐데……. 이러다 정말 담을 넘어 폐하를 뵙게 생겼습니다.”

브륄은 조금 전 가만히 있으라 한 것을 잊고 그리 말했다. 그러나 어쩐지 에셀은 브륄의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언젠가 아이를 가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에셀은 숨이 턱 막혔다. 순간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는 했으나 실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페루스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은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일 터였다.

‘원하지 않는 아이라고 해도…… 엘자를 구해 준다는 명목 아래 행하는 내 행동이 옳은 것인가? 아니,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에셀은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제길.’

그렇기에 그는 엘리자벳을 놓아두고 북부로 갈 때도, 엘리자벳의 임신 소문을 들었을 때도 아이의 존재는 버려두고 오로지 엘리자벳 하나만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빼 오면 되겠지. 착취당하고 있는 그녀를 목숨 바쳐 구해 내면 되겠지. 그게 에셀이 가진 목표요 생각 전부였다.

“각하?”

“……가만.”

그러나 곧 에셀은 마음을 다잡았다. 엘리자벳이 임신을 했건 누구의 아이건 상관없었다. 자신은 그녀를 안전하게 구해 내면 끝인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는다. 여기서 국혼을 막았다간 기틀란 후작처럼 폐하를 욕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아. 담을 넘어야 한다면 목숨을 걸고 넘어야지. 그리고 폐하께 국혼을 원하시는지 여쭙는 게 우선이다. 원하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막아야지. 하지만 당장은 엘자의…… 폐하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없어. 그건 내 분수에 어긋나는 짓이야.”

브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툴란 귀족 사회에서 임신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마당에 이대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면 황제의 명예는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바닥인 것 같지만…….’

브륄은 턱을 파들파들 떠는 에셀의 시커먼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의 속도 속이지만 황제를 은애하다 못해 애달파하는 주군의 속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모두 축하해 주는 것으로 믿지. 곧 계획을 발표하겠네.”

그렇게 기틀란 후작을 끝으로 페루스의 말에 반대하는 이는 사라진 것 같았다. 페루스는 빙그레 미소를 짓다 회의를 파하라 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좌중이 조용해진 틈을 타 누군가 차분한 목소리로 분명한 반기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각하. 폐하께서 각하와 혼인하시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 * *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페테 경이 나선들 무얼 할 수 있겠소.”

“공작님께서 연락하셨다 들었는데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려온 자께서 경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만 역시 이런 자리는 처음이시니…….”

알렉스는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주변에서 여러 사람이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그는 듣지 않는 듯했다.

“…….”

“당최 말씀을 안 하시니…….”

알렉스가 침묵을 지키자 말을 건 이 중 하나가 가슴을 두드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셋…… 넷…… 다섯…… 열하나.’

그러나 알렉스는 속으로 수를 헤아리기 바빴다. 감히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을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의 귀와 눈은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다 정리하려면 꽤 걸리겠습니다. 그때처럼 쉬운 상대들도 아니고 처리한다 해도 시끄러워질 테니.”

“예?”

“…….”

“어이구.”

“포기하시게. 내려온 자께서 보내신 편지에 답장 한 번 안 하는 분이시니.”

“하지만 사제님. 페테 경 말고는 공작님이 지시하신 사항을 아무도 모르는데…….”

「친애하는 페테 경에게.

기쁜 소식을 받은 와중에도 새 황제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경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 내가 장담하건대 페루스 그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어. 아이를 죽이거나 제 아이라 착각해 이용하려 할 테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 페루스를 막아 줘야겠어. 자세한 건 말이야…….

아 아이에 대해 어떻게 장담하느냐고? 당연히 비밀이지. 경은 시키는 일이나 잘해 주면 고맙겠어. 잘만 해 주면 음……. 난 페루스처럼 멍멍이한테 속 좁게 질투해 자리 빼앗는 소인배는 아니니깐 경 자리는 충분히 남겨 줄게. 그럼 내가 돌아갈 때까지 폐하 잘 챙기고 있고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미르실라 거리 네 번째 골목 ‘작은 집’을 찾아.」

“필요하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

기틀란 후작이 쩌렁쩌렁하게 에셀과 싸우는 와중에도 알렉스의 주변은 조용했다. 대표격인 이가 아무 말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모두 축하해 주는 것으로 믿지. 곧 계획을 발표하겠네.”

‘이놈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참인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르온 공작과 손잡은 늙은이들이 의기양양해할 텐데.’

알렉스의 뒤에 있던 사제는 그제야 초조해졌는지 알렉스를 살폈다.

‘난 늙은이들 눈 밖에 완전히 났단 말이야. 내려온 자가 편을 들어 주고 우세리 공작과도 친분이 있다 해서 도움을 자처했더니……. 서약도 못 받고 이대로 한마디도 없이 회의장 밖을 나서면 난 끝이야.’

사제의 간절한 바람이 신에게 닿았을까. 조각상처럼 가만히 있던 알렉스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머리 옆으로 손을 올렸다.

“죄송하지만 각하. 폐하께서 각하와 혼인하시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무슨?’

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알렉스가 의견을 내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이렇듯 대놓고 르온 공작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줄은 몰랐다.

“경! 괜찮겠소? 공작께서 지시하신 일이 있는가?”

사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사제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똑바로 페루스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와 혼인하시려는 이유가 그분이 품으신 황손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이 큰 이유지.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황가에는 귀한 첫 손이자 르온의 핏줄이니…… 귀한 황손을 불명예스럽게 탄생하게 둘 수는 없지.”

“그러니 더욱 안 된다는 겁니다. 두 분의 혼인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 말을 꺼냈으면 똑바로 끝내.”

페루스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팔짱을 낀 그는 노골적으로 화를 드러냈다.

“폐하께서 품으신 황손은 각하의 핏줄이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두 분의 혼인은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알렉스가 황제를 둘러싼 문란한 소문에 근거해 주장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페루스가 황손이 제 핏줄이다 주장하며 황제와 혼인하겠다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감히 그에게 직접 저런 말을 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소문은 소문일 뿐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 새 황제의 위신을 꼬꾸라뜨리고 공작에게 반기를 들다니, 모두 알렉스의 행동이 무모하다 생각했다.

“경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 거지? 일개 기사가 감히 폐하와 공작인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가. 우습지도 않군.”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의 예상대로 페루스는 고압적으로 알렉스를 압박했다.

‘……설마.’

그러나 어투와 다르게 페루스는 속으로 내심 불안감을 느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 중 대다수는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그 본질은 진실에서 기인했으니 말이다.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설마 엘자의 명예를 가지고…….’

“신께 진실만을 보고 듣고 말하기로 맹세한 제가 근거입니다.”

불안은 정답이었다.

신전 기사라 설마 주군의 명예를 더럽힐까 넘어간 것이 패착이었다. 고작 기사라 얕보고 타티카와 손잡은 것을 가볍게 보며 미친놈이라는 것을 망각한 대가였다.

“황제 폐하께서 황녀 시절 그분의 호위 맡는 명예를 가지며 제가 직접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들었습니다. 그분의 침실에 든 이가 한 명이 아닌 것을요.”

빛을 그대로 박아 넣었다 찬탄받는 기사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주저도 없었다. 오히려 말을 뱉는 그는 지금껏 조각상처럼 잠잠했던 것과 상반된 얼굴을 했다.

“너!”

에셀이 알렉스 쪽으로 달려들었다. 회의장에 다시 소란이 닥쳤다. 그러나 여러 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 페루스는 알렉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경은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예. 감히 다시 말하건대 제가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황제 폐하께서 품으신 황손이 각하의 핏줄이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외람스럽다는 말조차 없었다. 알렉스는 회의장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눈을 반짝이자 경건함을 갖춘 아슬란의 종은 사라지고 요사한 마귀가 인간으로 둔갑한 것 같았다.

그러나 간악한 기사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사람들의 앞에서 주인의 치부를 밝힌 그는 진실에 제가 원하던 거짓을 조금 발랐다.

“심지어 저조차 그분의 침실에…….”

퍽―

검은 그림자가 알렉스를 덮치며 거짓은 끊어졌다. 그러나 회의장에 모인 이들 중 기사의 뒷말을 못 알아먹을 멍청이는 없었다.

* * *

증언으로 국혼은 세력 다툼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페루스에게 기가 눌려 있던 크고 작은 타 세력들은 이때다 싶어 자신들도 황손에 대해 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했다.

누가 황제의 침실에 들었느냐는 낯간지러운 말이 경건한 회의의 주제로 스스럼없이 올랐다.

황제와 말 한번 나누지 않은 이도 자신이 황제와 동침하는 관계라 주장했다. 그 수가 열을 넘어가자 사람들은 대부분 주장이 거짓임을 알아챘다.

주장 하나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만 수일이 걸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로지 저와 제가 속한 무리의 이익이었다.

엘리자벳은 흡사 씨받이였다. 그녀의 명예와 권리는 눈 뜨고 씻어 봐도 없었다. 배태하고 있는 아비 모를 아이만이 사람들이 보는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오로르는 여전히 황제의 관을 차지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 * *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떠들든 엘리자벳의 삶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페루스가 엄선한 몇몇을 제외한 누구도 볼 수 없었고 페루스가 정한 곳 외에는 걸음 할 수 없었다. 원한다면 누구든 만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세간이 생각하는 황제와는 동떨어진 삶이었다.

그러나 삶이 어떻게 지속되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의 배는 점점 불러 왔다. 이제는 확연히 티가 나기 시작한 둥근 배는 마른 몸과 대조되어 아이의 존재를 더욱 과시했다.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엘리자벳은 걸었다. 한 번 하혈을 한 후 궁의가 계속 누워 있으면 안 된다 충고한 탓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하혈을 막는 쏠풀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그러나 힘들게 아이를 위해 움직이면서도 그녀는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혼란을 겪는 중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문뜩 치밀어 오르는 울증의 대부분은 아이 때문이다.

“폐하. 여기에 아기님이 있는 거죠? 갑갑하겠다. 뛰지도 못하고…….”

혼란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운 건 앨런이었다. 폐하라는 단어가 이제 막 입에 익은 앨런은 엘리자벳의 배 속 아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호기심과 호감을 보였다.

엘리자벳과 꼭 붙어 총총 걷는 앨런의 눈이 엘리자벳의 배에 닿았다. 그런 앨런 앞에서 엘리자벳은 차마 아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아이들은, 특히 앨런처럼 화목한 부모를 뒀던 아이가 아기에 대해 받아 왔을 교육은 뻔했으니 말이다.

“아기가 아직 작아서 괜찮아. 지금은 여기에 있는 게 아기에게도 좋은걸.”

배 속의 아이는 그렇게 타의인지 자의인지 모를 어미의 보살핌을 받고 나날이 커 갔다.

* * *

“흐으…….”

몸이 계속 무거워짐에 따라 잠을 설치는 횟수가 늘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눕는 것도, 높아진 체온도, 매시간 피우는 쏠풀 내도 모두 엘리자벳을 괴롭혔다. 게다가 꿈조차 모조리 악몽이어서 엘리자벳은 근래 깊게 자 본 적이 없었다.

이 밤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엘리자벳은 결국 쏠풀 내에 역겨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엘자.”

엘리자벳이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페루스가 그녀를 불렀다. 침대 위 그녀의 곁에 몸을 누인 그에게서는 시원한 비누 향이 났다.

“…….”

엘리자벳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페루스가 밤마다 그녀의 침대로 기어들어 오는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잠든 척해 왔건만 오늘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엘자…….”

페루스가 팔을 뻗어 조심스레 엘리자벳의 뒷머리를 감싸듯 잡아끌었다. 곧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품에 들어갔다.

부푼 배가 두 사람이 완전히 밀착하는 것을 막았다. 엘리자벳은 비누 향에 아주 적게나마 시가 냄새가 묻어 있는 것을 느끼곤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미안. 아예 끊는다는 게 요즘 일이 많아서…….”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불쾌감을 기민하게 느끼고 사과했다. 그러나 사과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 하지 않으려 했지만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 곁에 잠시 뒀던 미친놈이 일을 쳤어. 네가 외사촌이라 믿고 데리고 다녔던 그 기사 놈 말이야.”

알렉스를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는지 페루스는 이를 갈았다.

“그놈이 사람들 앞에서 너를 모욕했어. 네가 여러 사내와, 그러니깐…….”

“…….”

“……네 잘못이 아닌 일을 네 잘못인 양 떠들었다 이 말이야. 젠장!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

“하지만 제일 화가 나는 건…… 내가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야. 뭐라 해도 시작은 나였지.”

“…….”

“처음부터 너를 그리 몰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함께다, 사람들에게 당당히 알렸겠지. 감히 네가 여러 사내와 놀아났다는 그런 소리 따위 아무도 하지 않았겠지. 우리 아이도 축복 속에 인정받았겠지.”

“…….”

“내 잘못이야. 네가…… 네가 이런 그런 말을 듣는 건 다 내가 자초한 일이야.”

괴로운 듯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품에 파묻혔던 고개를 들고 페루스를 올려다본 엘리자벳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음울히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엘리자벳은 가까스로 왜? 라는 물음을 삼켰다. 페루스가 왜 저런 눈을 하고 자책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틀린 말이 아니니깐.”

머뭇거리던 엘리자벳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와 말을 섞는 것은 피곤했지만 주시하는 푸른 눈을 보니 피할 도리가 없었다.

“누구로 인해 그렇게 됐건 내가 여러 사내와 몸을 섞은 건 사실이고 그 결정에는 내 선택도 있었으니까요.”

페루스의 얼굴이 구겨짐에 엘리자벳이 재차 말을 했다. 그녀는 그가 화를 내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분노는 항상 그녀나 그녀 주변을 위태롭게 했다. 가장 최근에는 즉위식에 참석한 것으로 이름 모르던 시녀와 기사 몇이 주변에서 사라졌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치 않는 것도 사실이고…….”

엘리자벳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꺼냈다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한 말이었다. 배 속 아이를 한순간에 해할 수 있는.

“아니. 이 아이는 분명 너와 나 사이의 아이야!”

“…….”

“……믿어도 좋아. 정말이니깐.”

그러나 엘리자벳의 염려가 무색하게 페루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엘리자벳은 과한 페루스의 반응에 왜라는 질문을 하려다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저만 아는 무언가 있는 모양이지. 저리 확신하는데 괜히 의심을 만들어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대화를 튼 김에 생각해 왔던 부탁을 하기로 했다.

“……부탁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엘리자벳의 부탁에 페루스가 놀란 표정을 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뭐지?”

“……만날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을 만나겠다는 말에 페루스의 얼굴에 냉정함이 서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녹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페루스는 얼마 전 전해 들은 보고 하나와 그 보고에 관련된 사람을 떠올렸다.

“혹시 그 사람들 중에 에셀 라세르도 포함되어 있나?”

페루스의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엘리자벳은 다수의 경험으로 페루스의 심기가 상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여기 올 때마다 기사님을 봬요. 키도 엄청나게 크고 항상 서 계시는데! 엄청나게 멋있는 분이세요. 눈에 난 상처가 조금 무섭긴 하지만요.’

에셀이 매일 궁 앞에 서 있다는 것은 방 안에 갇힌 엘리자벳도 알았다. 앨런이 몇 번이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에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하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게 됐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얼굴에 난 상처와 매일같이 서 있다는 말이 그녀의 신경을 갉았다.

‘저번에는 저한테……. 아, 그러고 보니 기사님이 이걸 폐하께 전해 달라 하셨어요!’

게다가 얼마 전에 그는 간 크게도 앨런을 이용했다. 아이가 비교적 자유롭게 중앙궁의 정원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앨런! 약속해! 다시는 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폐, 폐하? 흐윽.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그 후로 엘리자벳은 에셀에게 신경을 거둘 수 없었다.

처음과는 다른 이유였다. 처음에는 그가 떠날 때 했던 말이 신경 쓰였지만 앨런에게 손을 뻗친 이후로 그러한 이유는 모조리 묻혔다.

혹시 그로 인해 페루스의 심기가 틀리면 어떡하지? 그래서 앨런이 다치면?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제인 에든의 딸이 에셀 라세르와 말하는 걸 누가 봤다고 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페루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손을 뻗어 페루스의 가슴팍에 올렸다. 떨림이 팔을 타고 페루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앨런에게 손끝 하나 대지 마요. 아이를 건드리면……. 건드리면 내가…….”

위협적인 말은 흐릿했다. 페루스는 두려움에 떠는 엘리자벳을 보며 눈을 좁혔다. 어차피 무슨 일이 있건 앨런 에든을 어찌할 생각 따위 없었다. 확신이 있는 목줄을 없애 버릴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이를 건드리지 않아. 네가 아끼는 아이잖아. 또 아이가 어린데도 너를 제법 즐겁게 해 주는 것 같고. 내가 아이를 해칠 이유가 없지.”

‘거짓말.’

부드럽게 자신을 달래는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럴 때면 자신의 처지가 여전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당장 앨런을 해치지 않겠다는 말에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페루스의 가슴팍에 올라간 손은 주먹이 꾹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부탁은 안 돼. 지금은 위험해. 밖에 너와 아이를 노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주먹에 제 손을 가져갔다. 사내의 긴 손가락이 주먹의 여러 틈새를 뚫고 꽉 쥔 힘을 쉽게 풀어냈다.

엘리자벳은 쉽게 풀린 주먹을 황망히 보다 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엘리자벳은 풀어진 손가락을 조심스레 페루스에게 붙였다.

“그러면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을 보게 해 줘요.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요.”

손가락으로 페루스의 가슴을 톡톡 친 엘리자벳은 자신이 꼭 애교를 떠는 애완동물 같다 생각했다.

“그래. 뜻대로……. 내 황제 폐하.”

결국 페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귀찮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의 말처럼 계속 그녀를 가둬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황제였고 언젠가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결국 다가올 일. 페루스는 자신이 양보하기로 했다.

‘여차하면 만난다 하기 전에 모조리 쫓아 버려도 될 노릇이고…….’

“네 부탁을 거절할 수 없지. 하지만 대신…….”

물론 완전한 양보는 아니었다. 페루스는 일정을 당겨 주는 대가를 받으려 운을 띄웠다.

“이제는 전처럼 나를 대하면 안 되나?”

푸른 눈이 간절한 바람을 말했다. 엘리자벳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댄 페루스는 눈을 감고 아련한 과거를 그리기 시작했다.

“엘자. 요즘은 예전이 더 그리워. 그때의 너는 내게 말도 편히 했고…… 이름도 자주 불러 줬잖아? 내게 먼저 안기는 것도 항상 너였지. 네 몸이 워낙 작고 가벼워 느낌도 없었지만 그래도 네 몸의 온기는 지금과 꼭 같았어.”

엘리자벳의 얼굴이 굳어졌다. 페루스에게 말을 편히 하는 것은 지금의 엘리자벳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을 높이라 했지, 멍청해서 못 알아먹나?’

당시의 충격이 아직도 선연했다. 얼마나 많은 폭력과 얼마나 많은 모욕이 있었는가. 엘리자벳은 페루스에게 짓밟힌 후 몇몇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쉽게 말을 놓지 못했다. 시녀와 하녀처럼 아랫사람에게 말을 편히 하는 것도 가끔은 혀가 따라 주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못 하면……. 못 하면…….’

엘리자벳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는 말을 높인다고 뺨을 맞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불안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사방으로 튀는 눈동자를 못 알아챌 페루스가 아니었다. 하얀 얼굴에 담긴 극도의 공포를 확인한 페루스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가까스로 열었다.

“알아. 내가 시작했다는 거. 지금 엘자 네가 이러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다시 변할 때도 되지 않았나? 게다가 넌 이제 황제인데 내가 네게 말을 높였으면 높였지, 지금처럼은 안 돼. 사람들을 보겠다 했지? 그러면 지금부터 연습이라도 해야지.”

초연하려 했으나 말에는 초조함이 잔뜩 묻어났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부탁마저 들먹이며 그녀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말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래. 내가 성급했어. 엘자.”

결국 이번에도 페루스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는 엘리자벳의 등을 쓸어내리며 떨림을 진정시키려 했다.

“좀 더 기다릴게.”

그러나 어쩐 일인지 엘리자벳은 더 몸을 떨었다.

“……엘자?”

두려움으로 인한 반응이겠거니 생각한 페루스는 이상함을 느끼고 엘리자벳을 불렀다.

“흐윽…… 윽.”

답 대신 돌아온 것은 신음이었다. 고개를 최대한 숙인 엘리자벳은 배에 손을 가져다 댄 채 피가 터질 정도로 입술을 물고 있었다.

“엘자! 왜 이러는 거야? 엘자. 나를 봐!”

“아으. 배가…… 으으, 배가 아파. 흐윽. 배가…….”

뭉그러진 발음을 간신히 알아들은 페루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이미 피로 젖은 침대보였다. 붉은 피와 대조되게 페루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엘리자벳을 붙잡고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궁의! 궁의는 어딨나! 아무나 빨리 궁의를 불러!”

* * *

새 황제는 즉위한 지 1년이 가기도 전에 남녀 쌍둥이를 낳았다. 조산이었다.

논란 속에 태어난 쌍둥이는 황제의 자식임에도 정식 자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혼인이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아와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아는 누가 봐도 오로르와 르온의 색을 띠고 있었다.

가장 고귀한 어미와 나라 최고 권력자 아비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툴란에서 제일 귀한 아이들임은 자명했다. 아직 핏덩이였으나 쌍둥이가 인정받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페루스를 필두로 한 세력들은 어깨를 활짝 폈다. 그들은 갖갖이 꽃을 사들여 황궁으로 보냈다. 주인이 황제와 국혼을 치르고 국서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었다.

한쪽에서 기쁨을 누릴 때 감히 쌍둥이를 의심했던 무리는 큰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르온 공작은 이제 막 태어난 확실한 증거를 빌미로 그들을 단단히 옥죄여 왔다.

아이들의 존재는 본래부터 기울어졌던 권력의 추를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알렉스 페테를 위시한 일부 신전 세력과 우세리 공작을 따르는 서부 세력은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다 못해 목숨을 위협받았다. 일부는 이미 짐을 싸 들고 고향으로, 신전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알렉스 페테는 어느 날 종적을 감췄다. 어떤 이들은 그가 도망갔다고, 또 다른 이들은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에셀 라세르가 이끄는 북부와 반페루스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부터 분열되어 있던 세력은 빠르게 분해되어 갔다. 상황이 그렇게 흐르자 에셀은 정말 중앙궁 담을 넘을 계획을 짰다.

출산한 황제의 회복기에 맞춰 슬슬 국혼이 준비됐다. 1년.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는 행사였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시간은 느리면서도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빠르게 흘러갈 게 분명했다.

페루스는 국혼 이야기를 저잣거리에 슬그머니 풀었다. 물론 보수적인 툴란 사회에 맞춰 쌍둥이의 소식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귀족 사회 일원들이 아는 만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지만.

한때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엘리자벳과 페루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즉위식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 그들은 성대한 국혼을 기대했다.

사람들은 악명 높았던 오로르의 황제를 떠올리기보다 인기 좋았던 르온가의 황제를 기억하며 국서가 될 페루스를 지지했다. 과격한 이들은 황제의 축출을 감히 입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은 이미 나라에 일고 있는 전운을 불안해했다. 특히 서부 내전으로 인한 참상을 보고 들은 데다 직간접적으로 경제적 피해를 본 이들이 늘고 있었기에 대부분 과격한 권력 교체를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안정이었다.

이는 엘리자벳에게 호재였다. 귀족들은 흉흉한 페루스의 눈빛과 국민의 여론에 오로르의 황제를 모시지 않겠다는 말을 감히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조상의 원한보다는 당장의 목숨과 알량한 권력을 중시한 결과였다.

다만 귀족들과 평민 모두 무능하고 연약한 황녀에서 황제가 된 여인이 전운을 막고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만큼 페루스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다.

거리에는 황제인 엘리자벳보다 페루스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공연에서 엘리자벳은 대부분 페루스에게 의지하는 한 떨기 꽃 같은 연약한 황제로, 연인으로 그려졌다.

사랑 이야기 속 처연한 미인. 새 시대에 엘리자벳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 * *

출산 직후 엘리자벳은 산욕열을 크게 앓았다. 원래부터 약한 몸에 조산으로 아이 둘을 낳느라 모든 기력을 다한 탓이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는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침대 옆에 꿇어앉았다. 황제의 손만 쥔 채 미동도 없는 주인을 보며 제임스는 저러다 장례식을 두 번 치르게 되는 것이 아닌지, 그러면 제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행히 페루스가 애달파 죽기 전 엘리자벳의 병세는 호전됐다. 본인들의 목숨을 걱정한 궁의들이 최선을 다한 까닭이었다.

엘리자벳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자 페루스는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 생에 이렇게 예쁜 아이들은 본 적이 없어. 보통 갓난아기들은 꿈틀거리는 것이 벌레처럼 징그럽더니. 꼭 내 아이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천사 같군. 그렇지 않나? 제임스.”

“예. 확실히 어여쁘신 아기님들이십니다.”

“신이 날개를 줘 날아가 버릴까 걱정이 될 정도야. 세상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것이 나를 보는군. 이 눈을 봐. 세상 어떤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지 않나.”

강보에 싸인 쌍둥이를 안아 들은 페루스의 얼굴에는 반평생을 쫓아다닌 제임스조차 보기 힘들었던 미소가 가득했다.

‘자식 푼수로군.’

페루스는 제임스가 감히 주인에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 늘었다. 모두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르고 골라 고용한 유모에게 직접 아이를 안는 법을 배운 그는 툴란의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자상한 아비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어미인 엘리자벳은 달랐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이들을 보여 줬다. 그러나 하얀 포대기에 싸여 잠든 아이들을 본 엘리자벳은 손을 뻗으려다 말고 몸을 홱 돌려 외면해 버렸다.

‘……보기 싫으니 데려가요.’

그리고 명확한 목소리로 페루스에게 아이를 치우라 명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태도에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초조함을 느꼈다. 어미에게 거부당한 아이들이 너무 가엽고 애탔다.

그러나 그는 차마 아픈 엘리자벳을 닦달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그는 궁의들을 불러 엘리자벳이 왜 저러느냐 크게 역정을 냈다.

“폐하께서는 출산 전후로 신경 쓰이는 일이 워낙 많으셨던 터라 심신이 안정된 보통의 귀족 산모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안정될 틈 없는 이들 중 대다수는 폐하와 같은 반응이겠군. 말이 되나? 난 어떤 상황에서도 모정 없는 어미보다는 있는 쪽을 더 많이 보고 들었는데 말이야.”

“폐하께서는 초산이신 데다 회임 중 여러 번 앓으셨지요. 지금은 모정보다 몸이 괴로웠던 기억이 크실 겁니다. 흔히 나이 어린 산모들이나 그…….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겁간을 당해 임신한 여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심신이 안정되시면 아기님들을 찾으실 겁니다.”

궁의 중 대표격인 이가 타이르듯 하는 말에도 페루스의 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벳보다 훨씬 어린 여인들도 임신을 하는 데다 엘리자벳과 자신 사이의 아이들은 겁간의 산물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엘리자벳과의 관계 중 강제적이지 않은 것은 없었다. 아이들이 생긴 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게다가 애초에 엘리자벳이 강제로 몸을 열게 된 것도 그가 강제로 내건 서약 때문이지 않았던가. 그들의 관계 중 겁간이 아닌 것은 없었다.

페루스는 처음으로 엘리자벳과 관계를 맺은 것이 후회되고 부끄러웠다. 폭력을 행사한 것을 후회하기는 했으나 이렇듯 자신의 존재가 혐오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얼굴이 너무도 뜨거워 페루스는 제 신발과 바닥 외에 다른 것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엘리자벳의 눈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딸이 저를 볼 때면 자괴감에 제 눈을 찌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여운 것.”

그렇기에 페루스는 쌍둥이 중 아들보다 딸을 좀 더 자주 품에 안고 얼렀다. 뒤에 태어난 쌍둥이 오라비보다 가벼운 딸아이는 안는 것만으로 그의 지독한 자괴감과 죄책감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각하. 아기님들의 식사 시간입니다.”

페루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쌍둥이를 돌봤다. 그는 쌍둥이를 제법 길게 안고 있었는데 덕분에 쌍둥이의 유모들은 아이들의 식사 시간을 항상 먼저 알려야 했다.

“아기님들이라. 계속 듣고 있자니 짜증 나는군.”

“조금만 참으십시오. 국혼을 올리고 나면 정식으로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가 될 것입니다.”

페루스는 쌍둥이를 유모들에게 건네며 짜증을 냈다. 인정받지 못한 쌍둥이는 황손임에도 따로 신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페루스는 못내 거슬렸다.

“황자와 황녀로는 발표하지 못해도 르온가의 직함을 붙일 수는 있질 않나? 아기님이라니. 제대로 된 세습 작위도 없는 가문의 아이들 같아 불쾌하기 그지없어.”

“정식으로 두 분은 아직 태어난 게 아니니 어쩔 수 없습니다. 대외적인 발표도 1년 뒤에나 할 것이고, 아마 호적에도 출생일이 그때로 기재될 예정이라…….”

“싸그리 없애 버려야지. 그것들 때문에 내 핏줄이 제대로 된 인정도 받지 못하다니.”

“……혼전 임신에 이어 혼전 출산은 정서상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느끼니 조금 더 참으셔야 합니다. 급하게 움직이셨다간 아기님들의 명예에 오히려 독인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임스의 말에 페루스는 얼굴을 구겼다.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벌써 주동자와 거짓을 말한 이들 다수를 가두고 추방했지만 분이 풀리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그래도 아기님들이 일찍 태어나신 덕에 일이 쉬워졌습니다. 다들 시간이 조금 더 있다 생각했으니……. 요즘 신전은 조용해졌습니다. 우세리 공작 쪽이야 뭐 말 다 했지요. 라세르 공작도 내부 문제로 바쁜 듯하고…….”

“아이들도 부모가 좀 더 편하길 바란 거지.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부모를 챙기다니. 보물이야. 내 아이들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자 페루스의 표정이 싹 풀렸다. 제임스는 예민하고 흉포하던 주인의 변화를 보며 문뜩 자신도 혼인 상대를 물색해 봐야 하나 고민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제임스가 그렇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집무 책상을 향해 가던 페루스는 문뜩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췄다.

“그보다 제임스. 황궁에서 아직도 몰래 시가를 태우는 놈들이 있다더군.”

“아…….”

날카롭게 묻는 페루스의 말에 제임스는 딴생각을 지우고 몸을 굳혔다. 페루스는 쌍둥이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금연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황궁에 금연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금연이라는 것은 쉽지 않아 제임스도 페루스가 오래 자리를 비울 때면 한 개비씩 시가를 태우곤 했다.

“그리 말했건만. 적발되는 즉시 손을 잘라 버려.”

“……이대로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강한 처벌을 하시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제임스는 어쩐지 억울해져 조심스레 페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스트레스가 심한 그에게 완전한 금연은 자신이 없었다. 다른 이들처럼 황궁 밖 집으로 매일 나간다면 모를까. 그는 주인을 따라 황궁에서 거의 상주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단호했다.

“안 돼. 대체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가를 위해 일하는 것들이 황가에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이 말이 되나. 엘리샤와 루이스의 건강을 조금이라도 해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니 그래도 피우겠다면 손 하나쯤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 거겠지.”

강한 페루스의 어투에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이려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기님들의 존함은 언제……?”

“어젯밤. 엘자에게는 이미 말했어. 답은 없었지만 싫다고도 하지 않았으니 동의한 거겠지.”

씁쓸한 목소리에 제임스는 페루스가 혼자 희망을 품고 있음을 알아챘다. 지금껏 황제의 반응을 보았을 때 무언을 했다는 건…….

어쩐지 주인과 어린 쌍둥이가 가여워진 제임스는 손뼉을 치며 조금 크게 축하를 해 줬다.

“축하드립니다. 직함은 아직이니 당분간 존함을 불러 드리면 되겠지요. 엘리샤 님과 루이스 님이라……. 폐하와 각하의 핏줄임을 나타내는 좋은 이름입니다. 빨리 두 분을 모시는 자들에게 알려야겠군요. 그래야 두 분도 빨리 자신의 존함을 익히실 테니까요.”

제임스의 말에 페루스는 아무 말 없이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주인이 우쭐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자식 푼수.’

제임스는 기뻐하는 쌍둥이의 아비를 보며 속으로 다시 한번 불충한 별명을 불렀다.

* * *

쌍둥이에 대한 엘리자벳의 무관심이 이 주를 넘기자 궁의는 조심스레 출산 우울증을 말했다. 페루스는 궁의에게 그런 건 언제쯤 사라지느냐 물었지만 궁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안정을 취하실 때까지 폐하와 두 분만 두시는 건 안 됩니다.”

다만 궁의는 엘리자벳의 무관심이 공격성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주의 또 주의하라 당부했다.

페루스는 우울증이 심한 산모가 제 아이를 죽였다는 일화를 기억했다. 이대로 엘리자벳이 아이들을 영영 돌보지 않으면 이 불쌍한 것들은 어떡하나, 페루스는 눈을 감으며 그렇게 절망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였다.

“폐하! 엘리샤 님이 오늘 저를 보셨어요! 눈이 꼭 엄마 목걸이 보석과 같은 색이었어요. 어라? 그러고 보니 폐하의 눈과도 똑같아요! 폐하의 아기니깐 당연한 건가. 하지만 루이스 님은 달랐는데…….”

“…….”

시작은 제인의 딸인 앨런이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쌍둥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앨런의 말을 무심한 척하면서도 모두 듣고 있음을 알았다.

‘그 아이가 뭐라고.’

페루스는 조막만 한 아이에게 질투를 느끼면서도 안도했다.

그 후 앨런은 페루스의 명으로 엘리자벳 외에 아이들과도 자주 만났다. 당연하게도 엘리자벳은 쌍둥이에 대해 전보다 훨씬 많은 말을 들었다. 엘리샤가 이제 눈을 완전히 떴다든가. 루이스가 옹알이를 했다든가. 엘리자벳은 최대한 무심한 듯 반응하려 했으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또 하루. 나날이 엘리자벳의 신경은 쌍둥이에게로 향했다. 외면은 나날이 어려워졌다. 그리고 결국 엘리자벳은 어느 날 제 곁에 앉은 페루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그녀가 쌍둥이를 출산한 지 한 달 하고도 이 주가 넘은 날이었다.

* * *

‘엘자. 결국 네가 나를 죽인 사내의 아이를 낳았구나. 원망스럽다. 네가 원망스러워. 엘자.’

‘전하……. 앨런은 우리 아이는 그렇게 잡혀 있는데…… 전하는 아이를 낳으셨군요. 앨런을 잡아 둔 원수의 아이를 낳으셨어요.’

‘오로르의 피를 결국 르온에게 종속시키셨군요. 아아, 지하에 계신 엘라르 님과 크리스 님을 제가 무슨 낯으로 봐야 할까요. 당최 부끄러워 도저히 지하로 갈 수 없어요. 오로르가 르온에게……. 대 오로르의 영광이…….’

‘나는 네가 멍청하다는 걸 너를 낳은 순간 알았단다. 그래서 싫었지. 하지만 보렴! 지금은 너무 기쁘구나! 네가 자랑스러워! 너로 인해 오로르가 명망을 다했으니! 황제라! 멍청한 네가 황제라니! 어머님! 내 배로 낳은 어머님의 손녀가 어머님의 위신을! 오로르의 영예를! 모두 갉아먹는군요.’

‘……실망스럽구나. 엘자. 네가 모든 것을 망쳤어.’

엘리자벳은 지독한 산욕열을 앓으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 엘리엇, 제인, 사라, 심지어 헬렌과 엘라르까지. 그녀는 끝없이 나오는 원혼들의 비명 속에 파묻힌 채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러나 열이 사라진 후에도 원혼들의 잔상은 뚜렷이 그녀의 눈앞에 존재했다.

특히 그녀가 쌍둥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할 때면 원혼들은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속살거림은 보통 원망으로 시작해 저주로 끝났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은 원혼들이 무언으로 그녀와 쌍둥이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온몸을 서게 하는 그 섬뜩한 시선들에 엘리자벳은 도저히 쌍둥이를 볼 수가 없었다. 쌍둥이는 그녀가 지은 죄의 증좌요 죄책감과 원망의 산물이었다.

‘……보기 싫으니 데려가요.’

하지만 그녀는 하얀 천에 싸여 쌕쌕거리던 숨소리를 기억했다. 비록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왈칵 눈물이 터뜨렸다.

‘엘자.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 않았지?’

‘…….’

‘너와 나를 닮은 아이들이야. 딸아이는 너와 같은 눈동자에 르온의 영광스러운 황금을, 아들은 네 은실 타래와 내 눈을 가졌어. 누구도 부정 못 할 우리의 아이들이지.’

엘리자벳은 울다가도 페루스가 아이들에 대해 말할 때면 이가 갈렸다. 정말 페루스의 아이였다니. 즉위식 때의 무모한 감정이 다시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엘리샤와 루이스야. 애칭은 샤샤와 루스. 마음에 들어?’

‘폐하! 아기님들을 보셨어요? 너무너무 귀여운 아기님이에요. 아기님들을 보니깐 엄마가 왜 저보고 귀엽다 예쁘다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시시각각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 변했다. 낳고 나면 원망과 애정 둘 중 어느 한 곳으로 안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엘리자벳은 계속해서 갈팡질팡하는 제 기분이 참담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아이들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느덧 엘리자벳은 페루스와 앨런, 나아가 시녀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엘리샤와 루이스 둘 중 누구지? 엘리샤가 자주 운다고 했는데……. 본 적이 없어 구분이 가질 않아. 혹시 젖이 부족해 배가 고픈가? 앨런이 저번에 아이들이 자주 젖을 찾는다고……. 아니야. 유모가 여럿인데 젖이 부족할 리는 없어.’

그리하여 밤새 쌍둥이가 울던 날, 엘리자벳도 꼬박 밤을 지새웠다. 벽 넘어 아이의 울음소리와 드문드문 아이를 어르는 페루스의 자장가 소리가 너무도 선명했다. 게다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함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가슴께를 적시는 젖이 서글펐다.

“와아. 폐하께서 안아 주시니 루이스 님이 웃었어요. 처음이에요!”

결국 참지 못한 엘리자벳은 다음 날 쌍둥이를 품에 안았다. 유모의 가르침 아래 침의를 내리고 어색하게 젖을 물리는 행태가 다급했다.

쌍둥이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처음 맞이하는 어미의 품을 파고들었다. 팔다리는커녕 이제 막 고개를 가누기 시작한 아이들은 천에 감긴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며 엘리자벳에게 꼭 붙어 있으려 했다. 어미를 알아보는 모양새였다.

엘리자벳은 쌍둥이에게 번갈아 젖을 물리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힘차게 젖을 빠는 아이들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페루스는 엘리자벳 못지않게 격한 감정을 느꼈다. 소식을 들은 그는 한걸음에 달려와 엘리자벳이 쌍둥이에세 젖 물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등장에 불편함과 수치심을 느꼈지만 아이들을 떼어 놓을 수 없었기에 잠자코 아이들만을 바라봤다.

“고마워. 엘자. 사랑해. 오, 신이시여.”

마침내 엘리자벳이 일을 끝내자 페루스는 쉴 새 없이 엘리자벳과 아이들에게 입 맞췄다. 입맞춤 사이 간간이 신을 찾는 그는 황홀경에 빠진 듯 보였다.

엘리자벳은 페루스를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비의 입맞춤이 이제는 익숙한 듯 엘리자벳보다 자연스럽게 페루스의 애정 표현을 받아 냈다.

엘리자벳은 아이들에게 입 맞추는 페루스를 멍하니 보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신경 쓰였던 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

여러 유령들. 그들은 반투명한 형체로 여전히 방 한구석에서 엘리자벳과 쌍둥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면 괜찮을 거야. 잠을 조금 더 자고 건강을 회복하면 사라질 거야.’

“엘자? 저기 뭐가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시 딴생각을…….”

엘리자벳은 아무 말 없이 꼿꼿이 서 자신을 노려보는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피곤해 보여. 아이들을 물릴까?”

“괜찮아요. 조금 더 안고 있을래요. 지금까지 같이 못 있었으니깐…….”

“그럼 루스를 이리 내게 줘. 둘을 안고 있는 건 힘들 거야.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으니 말이지. 루스. 이리 와야지. 네가 오빠니 샤샤에게 양보하는 법을 배워야 해.”

엘리자벳에게 붙은 루이스는 꼭 페루스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찡그린 얼굴이 꼭 울 것 같아 엘리자벳은 불안했다.

“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리 주세요. 둘 다 안고 있을 수 있어요.”

엘리자벳이 적극적으로 페루스의 손을 막았다. 페루스는 쉬이 아들을 놓았다. 가느다란 팔이 되찾은 아이를 꼭 안았다.

“미안해. 루스. 갑자기 움직여서 놀랬지?”

엘리자벳은 한쪽 팔로 어색하게 아이를 얼렀다. 작은 아이는 어미가 뺨을 비비자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얼굴을 했다. 페루스는 그 모습을 묘한 얼굴로 보다가 침대로 올라 엘리자벳 곁에 앉았다.

“네 뜻대로 해. 엘자. 하지만 힘들 테니깐…….”

긴 팔이 엘리자벳의 어깨를 감싸고 넓은 품이 엘리자벳과 쌍둥이 모두를 감싸 안았다. 엘리자벳이 아이들을 좀 더 쉽게 안을 수 있게 자세를 고친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러면 됐지?”

페루스의 배려는 확실히 편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으로서는 힘은 덜 들지언정 더 불편한 자세였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태롭게 떨리는 팔에 아이들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므로 심정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해야 마땅했다.

페루스는 기분이 좋은 듯 낮은 웃음을 터뜨리곤 곧이어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이 매일 밤 벽 너머로 듣던, 남부 특유의 색체가 담긴 따뜻한 자장가였다.

“하늘하늘 나비 날갯짓. 끔벅이며 눈꺼풀 감는 내 아가…….”

익숙한 소리에 쌍둥이가 꼬물거리다 어미의 가슴에 기대 숨을 뱉었다. 엘리자벳은 그 규칙적인 숨소리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딱히 행복하다거나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그녀에게 사치인 지 오래였다.

다만 그녀는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자신도 이 아이들처럼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를 했다.

* * *

“이리로 얼굴 좀 돌려. 아프다고 피하면 약을 어떻게 바르냔 말이야.”

“으어어…… 으으.”

“……그러게 왜 맞고만 있니? 멍청하게. 눈치 좀 보다 적당히 숨지.”

루안나는 주인의 폭력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타박을 했다.

“으우어…… 어.”

“그렇게 소리 내도 난 무슨 말인지 몰라. 하긴 너도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못 알아듣겠지.”

루안나는 제가 돌보고 있는 노예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았다. 물론 처음에도 노예의 희귀한 보라색 눈동자에 우세리 공작가를 둘러싼 소문을 떠올리기는 했다. 그러나 설마 했던 의심을 확신하게 된 건 타티카를 따라 서부로 왔을 때였다.

타티카는 서부 그의 영지로 돌아오자 노예로 전락시킨 핏줄을 동생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내 인생도 바닥이지만, 넌 참. 어휴, 가만히 있어 봐!”

끔찍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한 루안나는 제 인생이 지옥임에도 눈앞의 노예를 동정했다. 그녀 자신이야 애초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하급 귀족이었다지만, 눈앞 온갖 신체 불구에 정신까지 온전치 못한 이 노예는 한때 대 우세리가의 후계이지 않았나. 루안나는 이 노예만큼 비참하고 기구한 인생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잘 참았어. 자, 이건 상이야. 창밖으로 날아오는 것을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래서 그녀는 노예를 최대한 잘 챙겼다. 자신도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차마 노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주어진 새로운 일 자체가 이 노예를 돌보는 것이었다. 힘들다는 핑계로 매일 같은 방에서 마주치는 불쌍한 인간을 외면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우으…… 으? 아아아! 아!”

“……좋아?”

확실히 눈에 띄는 반응에 루안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노예는 다른 감각들이 망가진 탓인지 후각이 유독 민감했다.

여러 날 노예를 돌본 루안나는 코를 벌름대는 그가 장미 향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그녀는 창틀로 날아온 장미 꽃잎을 조금씩 모았다.

“아아! 아으으…….”

“밖에 나가면 네가 좋아하는 장미가 천지인데. 미친놈이 장미만 주구장창 키우거든. 넌 못 보겠지만 여기……. 그래, 이 구멍에 코를 대 봐.”

밖에는 여전히 노예들이 장미를 분주하게 키우고 있었다. 루안나는 막힌 창틀 사이 조그맣게 난 구멍으로 노예를 이끌었다.

“우…….”

바람을 타고 진한 장미 향이 올라옴과 동시에 흥분하던 노예가 차분해졌다. 루안나는 어쩐지 그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너도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이지. 하긴 나도 장미를 좋아했었어. 지금은 별로지만.”

루안나는 약혼자였던 남자에게 빨간 장미 다발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더랬지. 하지만 그는 그녀가 몰락하자마자 그녀를 강간했다. 루안나는 그 끔찍한 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망할 놈들. 다 죽여 버리겠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루안나는 영영 그럴 기회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을 강간하고 폭행한 그들은 여전히 귀족이었고 자신은 벌레만도 못한 노예였다.

그녀의 눈에 군데군데 하얗게 탈색된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황녀의 대용품 역할을 하느라 바꾼 머리색은 슬슬 본래의 색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나 보네.”

루안나는 변해 가는 머리를 손에 감아 봤다. 워낙 오래 머리카락 색을 바꾼 터라 본래의 머리카락 색을 보는 건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나를 찾질 않잖아.’

바뀐 색은 루안나에게 조금은 평안했던 최근의 일상을 깨우치게 해 줬다. 서부로 온 뒤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곤 타티카에게 불려 간 적이 없었다.

루안나는 주인이 이대로 자신을 잊기를 바라다 제 옆에서 코를 킁킁거리는 노예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매일같이 불려 가는 사람 앞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제 삶은 조금이나마 느슨해졌건만 눈앞의 사내는 아니었다. 루안나는 손을 뻗어 노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꽤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뿐. 얼굴부터 몸까지 상처투성이인 노예에게 온전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선연하게 남은 피멍 자국과 곳곳에 팬 상처를 보며 루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노예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래. 나만큼이나 너도…….

“기회가 있으면 그놈 죽여 버리자. 우세리가의 후계였던 네 인생의 일부라도 찾아야지. 너 네 어미와 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우우으?”

달라진 루안나의 말투를 느꼈는지 노예가 코를 떼고 루안나 쪽으로 흐려진 초점을 돌렸다. 분명 보지 못하는 눈이건만 루안나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소문에는 너만큼이나 비참하게 살고 있대.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복수하고 싶지 않아? 나는 복수하고 싶어. 나를 팔아넘긴 아비에게도, 나를 강간한 그놈들에게도. 하지만 제일 죽여 버리고 싶은 건 지금의 주인 새끼야.”

“…….”

“복수는 둘째로 두더라도 우리 당장 인간답게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밖에는 네가 좋아하는 장미가 많아. 네가 누리지 못한 것들 천지라고!”

루안나는 이제 씩씩거리고 있었다. 눌러 왔던 증오와 분노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노예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를 테니 당연했다.

그러나 루안나는 마지막까지 노예의 귀에 속삭였다. 귀에 바짝 붙인 입술이, 혀가 붉디붉은 증오를 뱉었다.

“내가 함께할게. 그러니 기회가 있다면 네 형이라 부르기도 뭣한 그놈을 죽여 버리자.”

* * *

모든 상황이 타티카에게 좋지 않았다.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쫓기는 듯싶더니 갑자기 반격을 시작했다. 수도의 끄나풀들은 대부분 연락이 끊겼으며 그 대신이었던 알렉스 페테는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화나게 한 것은 다른 소식이었다.

“으아아아아! 아! 망할! 망할!”

쨍그랑―

우당탕―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조리 집어 던졌다.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물건들이 벽에 부딪쳐 떨어지고 부서졌다.

「남녀 쌍둥이. 태어난 쌍둥이의 아비는 르온 공작으로 확실시.」

한참 만에 받은 소식은 타티카에게 충격이었다. 약에 취했을 때보다 더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타티카는 손을 벌벌 떨었다. 빗나가 버린 확신이 그에게 준 충격은 그만큼 컸다.

“말도 안 돼. 분명 그 태에 씨물을 제일 많이 부어 넣은 건……. 아니 당장 내가 쓴 약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분명 페루스 그 개새끼가 수를 쓰는 거겠지.”

타티카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움직여 다시 쪽지를 봤다.

「쌍둥이의 눈과 머리카락 색은 황가와 르온의 빛. 곧 황제와 르온 공작의 국혼 예정.」

너덜너덜해진 종이는 곧 찢어질 듯 보였지만 쓰인 활자들은 아직도 선명했다.

“으아아아악! 아악!”

부정 못 할 증거가 적힌 종이에 타티카는 다시 광분하고 말았다. 종이를 그대로 찢어 버린 그는 자신이 찢은 종이의 잔해 위에 털썩 앉았다.

그가 만든 약의 효과를 생각한다면 천 분의 일, 아니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타티카가 아는 엘리자벳은…….

“……알아서 피임하고 있었잖아?”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피임 사실을 알았다. 그가 확인한 그녀의 피임 방식은 꽤 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 확률이 높다고는 하나 완벽하지는 않았기에 그는 엘리자벳에게 따로 또 임신을 조절하는 약을 먹였다. 미약의 형태를 띤 약은 그와 동침하는 날 외에는 피임 효과를 극도로 높여 줬다.

게다가 엘리자벳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주기가 불안정했다. 애초 그녀의 임신 확률은 극도로 낮았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그가 제게 유리한 약을 썼음에도 엘리자벳은 임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애초 힘든 그 임신이. 그로 인한 것이 아니라니. 페루스가 놓은 덫에 대해 모르는 타티카로서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고귀한 태는 비천한 씨 따위 못 품는다 이 말인가.”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목이 쉬었다. 타티카는 그동안 기쁨에 들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심스러웠던 어린 시절이 기억났다. 비천한 어미의 태를 빌렸다는 그의 삶이 어떠했던가. 무기력하고 한심했더랬지. 타티카는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이를 박박 갈았다. 이런 패배감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씨발…….”

약 기운이 돌며 황녀 시절 노란 드레스를 입고 꽃과 같았던 엘리자벳이 어른거렸다. 항상 그를 피하고 페루스의 곁에 서 있던 고귀한 소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를 대놓고 천한 이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존재만으로도 그를 발가벗겼다. 특히 타티카는 엘리자벳이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그를 피할 때, 즐거움과 재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극도의 불쾌감을 느꼈다.

제 조모와 오라비와는 다른 고귀함을 뽐내는 사랑스러운 황녀. 정말 동화 속 공주처럼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사랑하는 이만 바라보며 웃는, 보는 것만으로도 환한. 그렇게 온몸으로 그와 다르다 표현하던 고귀한 소녀.

그렇기에 타티카는 어떻게든 엘리자벳을 가져야 했다. 누구와 나눠 가지든 독점하든 그 여린 살결에 제 이를 박아 저와 다른 그 고귀함을 착취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건 배신이지. 폐하. 나에 대한 배신이야.”

타티카는 바닥에 흐른 약 가루를 아무렇게나 찍어 먹었다. 과한 양에 머리가 핑핑 돌았으나 그는 제 분을 삭이지 않았다.

“……페루스보다 폐하가 미워. 나는 폐하를, 황녀님을 그렇게 사랑해 줬는데. 나쁜 왕에게서 폐하를 구해 준 것도 나인데. 끝까지 나를 밀어내겠다 이거지?”

홀로 당한 배신의 맛은 썼다. 타티카는 저를 배신한 엘리자벳을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황녀님이니깐.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내 황녀님이니깐. 벌을 받는다면 용서도 생각해 볼게. 아니다. 벌을 받는다 해도 완전히 용서하기는 그렇고, 대가를 받아야겠어.”

타티카는 다시 만날 엘리자벳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 봤다.

‘싫어하는 구음을 시키며 그 여린 등이 터지게 채찍질은 어떨까? 아니면 아이를 배태할 때까지 침대에 묶어 두고 박을까? 이참에 뒤로 덮쳐 암캐 취급도 괜찮겠지. 나를 주인님으로 부르며 멍멍거리는 황녀님도 귀여울 테니까 말이야.’

엘리자벳을 두고 온갖 변태적인 상상을 하며 히죽거리던 타티카는 벌러덩 누워 버렸다.

천장에는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작은 샹들리에가 있었다. 반짝거리며 하나하나 제 존재를 뽐내는 크리스털 조각은 꽤 날카로웠다.

“아프겠지. 괴로울 거야. 하지만 벌이란 그런 게 아니겠어?”

이번에 그가 내릴 벌은 저것에 찔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플 터였다.

타티카는 엘리자벳이 어떤 얼굴로 반성할까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핏줄을 타고 도는 약은 이완제였는지 세상이 도는 와중에도 솔솔 잠이 오기 시작했다.

* * *

에셀은 언제나처럼 중앙궁 앞에 서 있었다. 매일같이 중앙궁으로 오는 에셀이 이제는 익숙한 듯 지나가던 궁인들은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에셀은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벽을 기어올라 엘리자벳을 만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도 정도껏이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끌고 온 기사들을 보고 남부에서 딴 뜻이 있는 것 아니냐 압박을 하는데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목숨이 위험합니다.’

‘…….’

‘르온 공작의 피를 이은 황손이 태어났습니다. 분하지만 수도는, 아니 툴란 전체가 당분간 그의 손아귀 안입니다. 각하께서 공작위에 오르셨다고는 하지만 북부에는 아직 각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습니다. 곧 야만인들도 몰려올 거고요.’

‘…….’

‘북부로 가시지요. 황손도 태어났고 르온 공작의 태도로 보건대 폐하를 해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브륄을 필두로 한 수하들은 반대했다. 수도에 오기 전까지는 벽을 타자 호탕하게 말한 그들이었지만 태어난 쌍둥이를 보며 모두 고개를 저었다.

‘브륄. 내 뜻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녀를 지키기로 맹세했어. 그녀가 누구의 자식을 낳았든 그건 상관없는 문제야.’

‘각하.’

‘물론 내가 무능력해 뭣도 못 하고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갈 수는 없어. 난 그녀가…… 폐하께서 어떤 답이건 하실 때까지 용서를 빌어야 하는 죄인이다.’

‘…….’

‘그리고 목숨을 다해 그분을 지키고 그분이 원하는 것을 이뤄 드려야 한다. 너와 다른 이들에게는 항상 미안하군. 기껏 따르는 주군이 이런 말이나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난 북부에서 누가 날 내일 당장 밀어낸다 해도 이곳에 있어야 해.’

‘…….’

‘지금 내가 얼마나 후회하는지 아나? 어차피 이렇게 무능력할 것이었다면 공작위는 누이에게 미루고 폐하의 곁을 지키는 것이 나았다고 몇 번이고 생각해. 너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스럽지만 생각이 바뀌지는 않아. 한 번이라도 그녀를 돕고 죽는 것이 낫지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내게 지옥이야.’

‘…….’

‘나는 가지 못해. 그러니 브륄. 나를 설득하지 말고 원한다면 돌아가.’

하지만 수하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에셀은 단호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죽더라도 엘리자벳을 만날 생각이었다.

‘벽을 탈 거면 밤이 좋겠지. 문제는 폐하께서 내가 생각한 방에 있느냐는 것인데…….’

굳건히 서 있는 그는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실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궁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에셀은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포인트를 보고 있었다.

‘저리로는 항상 기사들이 있으니 힘들 테고. 아이를 만났던 정원 쪽이 그나마 허술할 터인데.’

에셀이 한참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중앙궁의 기다란 계단을 따라 한 여인과 기사가 나왔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중앙궁의 시녀장과 에셀을 대신해 이제는 황궁 기사단장이 된 맥켈 클레이. 에셀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그들을 마주 봤다.

“라세르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

시녀장이 먼저 허리를 푹 숙였다. 맥켈은 짧게 묵례를 할 뿐이었다. 에셀은 그들의 인사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분명한 페루스의 사람. 그들과 자신은 좋은 일로 볼 확률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녀장의 말에 에셀은 몸을 딱딱히 굳히고 말았다.

“각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 * *

쌍둥이를 대하는 엘리자벳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페루스는 사람들과 그녀의 만남을 생각보다 빠르게 허락했다.

물론 엘리자벳이 제일 먼저 찾은 이가 에셀이라는 사실은 페루스에게 불쾌한 것이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얼굴을 굳히면서도 엘리자벳과 에셀의 만남을 막지는 않았다. 모처럼 찾아온 엘리자벳과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페루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리자벳은 에셀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에셀을 기다리며 손님 하나를 더 맞이해야 했다.

‘네가 뭔데 에셀을 부르는 거야?’

벨. 부르기도 미안한 이름의 주인공은 다른 여러 원혼처럼 방 한구석에서 생기더니 엘리자벳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은 쌍둥이를 품에 안은 후부터 원혼들의 존재를 애써 지우려 했지만 에셀을 기다리는 시간에 벨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예 벨과 대화를 시작했다.

“벨……. 나는 아직도 네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 자세히 몰라. 다만 엘리엇이 관련되어 있다고만 들었어.”

‘알 것 없어. 멍청한 내 친구. 하지만 내 오라비를 네 일에 끌어들이지 마. 제대로 된 라세르는 에셀뿐인데 그마저 망쳐 놓으려는 거야? 네 조모가 우리 아버지를 죽인 것으로 모자라니?’

벨은 다른 원혼들처럼 엘리자벳을 원망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제인과 사라처럼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엘리자벳은 벨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걱정 마. 벨. 그와 만나는 것도 이걸로 끝이야. 나는 그냥 그와 마지막으로 말을 나누고 싶을 뿐이야. 신세를 많이 졌지. 에셀에게는. 나도 양심이 있으니 더는 그를 괴롭게 하지 않을 거야.”

‘엘자. 네 존재가 우리 가문에는 죄악이야. 오, 세상에. 그런 얼굴이라니. 뻔뻔하구나.’

뾰족한 벨의 말에 엘리자벳은 입을 다물었다. 벨과 이야기하면 할수록 확실해졌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원혼들의 존재는 죄책감이 만들어 낸 허상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허상이라 한들 어쩌겠는가. 그 허상이 당장 눈에 보이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인 것을.

“내가…… 내 가문이 너를 비롯한 네 가문에 죄를 지은 것은 잘 알고 있어. 나도 잘 아니깐…….”

‘아니. 엘자. 넌 몰라. 그러니깐 혼자 살아남아 황제까지 됐지.’

“…….”

‘뻔뻔한 것! 에셀이 그때 너를 왜 미워했겠어? 왜 너와 네 오라비를 외면했겠어? 왜 네 가문을 더는 섬기지 않겠다 했겠어? 결국 나도 너 때문에! 네 가문 때문에 죽은 거라고. 엘리엇 때문이라고? 그럴 수도 있지. 엘리엇도 오로르니깐.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엘리엇을 들먹여! 또 네 책임은 회피할 속셈이 아니야?’

“난 몰라. 모르니깐 물어본 거야. 그러니깐 알려 줘. 벨. 넌 도대체 왜 죽은 거야?”

벨은 아무 말 없이 깔깔거리기만 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살아 있을 적처럼 아름다웠다.

얼마를 그렇게 웃었을까. 갑자기 웃음을 멈춘 벨이 벽을 노려봤다.

‘……너.’

벽 넘어 방에는 쌍둥이들이 있었다.

‘결국 페루스의 아이를 낳았구나. 그렇게 그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다 노래를 부르더니.’

“나는…….”

‘나는 엘리엇과 혼인하지 못하고 죽었어. 차가운 땅에 묻혔단 말이야. 나도 그와 혼인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데.’

“…….”

‘역시 넌 위선자야. 아니라고, 원했던 것이 아니라고 계속 말하지만 결국 다 네가 원하던 것이네? 거기다 오라비의 황제 자리까지! 대단해! 엘자! 넌 대단한 욕심쟁이야!’

엘리자벳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페루스와의 혼인도 아이도, 황제 자리도 원하지 않았다. 모두 억지로 건네받은 것인데 왜.

‘엘자. 내가 모를 줄 알지? 아니 난 알아. 네가 에셀을 잠시나마 원망했다는 것을. 감히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넌 너와 오라비를 버렸다 가여운 내 오라비를 원망했지. 가족과 종국에는 누이마저 잃은 내 불쌍한 오라비를 말이야.’

“…….”

‘못된 것. 그러니깐 네가 그렇게 당한 거야. 페루스와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너는 좀 더 당해야 하는데…….’

“…….”

‘에셀은……. 에셀도 본래라면 널 계속 미워해야겠지. 하지만 그는 마음이 너무 여린 데다 너무 바른 사람이라 널 봐준 거야. 자신이 희생한 거라고. 그러니 엘자. 내 이기적인 친구. 혹여나 내 오라비에게 매달리고 도움을 구할 생각은 마.’

“…….”

‘네가 처음 말한 대로 에셀을 네 인생에서 보내 주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 * *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벳은 단정한 차림새만큼이나 차분해 보였다. 벅찬 표정을 한 에셀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감히 용서해 달라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에셀은 엘리자벳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인사도 없이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

엘리자벳은 당황한 듯 낯빛을 굳혔다. 고개를 푹 숙인 사내는 죄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엘리자벳은 에셀이 이렇게까지 비굴한 사죄를 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무릎 꿇은 에셀에게 빠르게 말했다.

“이러지 말고 일어나세요.”

“폐하께서 제게 말을 높이시는 것은 가당찮습니다.”

에셀은 일어서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엘리자벳을 지적했다.

“……내가 원하지 않아요. 난 이게 편해요.”

엘리자벳은 페루스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내고는 조금 날카롭게 거부의 의사를 전했다. 엘리자벳의 어투에서 불쾌함이 느껴졌는지 에셀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뜻대로 하십시오. 폐하.”

“바닥에서도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옷이…… 더러워질 거예요.”

에셀은 엘리자벳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섰다. 엘리자벳은 거인처럼 우뚝 솟은 그가 큰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챘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폐하.”

단조로운 답과 다르게 에셀은 어쩐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그가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다 이내 먼저 말을 꺼냈다.

“……우선 공작이 된 것을 축하해요.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자리가 좋은 주인을 만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오늘 부른 건 공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예요.”

딱딱하게 예의를 차리는 말투에 에셀은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이름 정도는 불러 줄 거라 생각했건만. 그러나 그런 실망감을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작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제 표정을 가렸다.

“뭐든 하명하십시오.”

“늦었지만 벨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어요.”

엘리자벳은 최대한 초조함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에셀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숨겨지지 않았다.

“아……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요.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말을 꺼내는 것도 미안해요. 하지만 난 벨의 마지막에 대해 아직도 정확히 몰라서……. 그 일 때문에 화가…….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게 화가 난 건 알아요.”

“…….”

“……나나 내 가문 때문에 일어난 일이 맞죠? 전에 분명 원망한다고, 벨이 왜 그렇게 가야 했느냐고 원망했으니깐.”

“…….”

“난 아직도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해요.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고, 사실 진실을 아는 게 두렵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정확히 알고 싶어요.”

버벅거리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엘리자벳은 스스로가 뭐라고 말하는지 모를 정도로 동요했다. 결심한 것이라 괜찮을 줄 알았건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그러나 에셀도 그녀만큼 동요했다. 에셀은 벨의 일에 관해 엘리자벳이 이토록 쉽게 스스로를 탓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엘리자벳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자벳은 벨의 최후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다. 감금과도 같은 생활 속에 학대당하던 엘리자벳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엘리자벳이 아는 것이라곤 벨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벨의 죽음으로 에셀이 자신을 원망하게 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미움을 받은 후로도 엘리자벳은 몇 번 에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도록 쌓은 유대감에 희망을 건 탓이요 친우인 그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에게 돌아오는 답은 무시나 원망, 그것도 아니라면 방관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검은 눈은 다시 엘리자벳을 따뜻하게 그리고 가엽게 바라봤다. 그리고 끝끝내 에셀은 그녀에게 전의 다정한 친우요 든든한 기사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하지만 에셀이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이미 엘리자벳은 그에게도 빗장을 잠근 채 무너져 버린 후였다.

‘……벨은 그런 식으로 갈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에셀은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 입술을 꾹 물었다.

그때는 엘리엇에게 너무 큰 배신감을 느껴 뭐든 제 탓을 하는 엘리자벳을 배려하지 못했다. 아니,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벨을 지키지 못했던 것을 오로르의 탓이라 돌리며 죄를 미루기 바빴던 시기였다.

“……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에셀은 이제라도 엘리자벳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동안 전후 사정도 모른 채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을까.

사실을 들은 엘리자벳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한 것을 들었다는 듯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 일은 폐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 모든 책임은 저한테 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감히 폐하의 가문에 책임을 씌우고 기사의 서약을 어겼습니다. 그건 당장 지옥으로 떨어져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끊으라 말씀하신다면 바로 행하겠습니다.”

에셀의 긴말에도 엘리자벳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자책하는 에셀의 책임론 따위 듣지 못했다는 듯 반문했다.

“거짓말. 벨의 죽음에 엘리엇이 관련돼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벨은…… 엘리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건가요?”

벨의 죽음에 엘리엇이 관여돼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에셀의 표정이 곤란한 듯 변했다. 그런 에셀의 표정을 본 엘리자벳은 기다리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왜요? 혹…… 혹시 엘리엇을 지키려고 벨이 그런 선택을……?”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벨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선황께서 벨을 원하지 않아 그리된 것입니다. 그리고 벨은 그걸 못 견뎌 했습니다.”

“그, 그럴 리가. 아니에요. 엘리엇과 벨은 사랑했어요! 당시에 잠깐 싸우기는 했지만 일이 있기 전에도 후에도 두 사람은 함께였어요. 알잖아요. 내가 장미궁에 있을 때도 벨은 약혼녀의 자격으로 엘리엇과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는 걸!”

“……동생이 욕심을 부렸습니다. 제가 벨의 욕심을 막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게 계속 에셀 책임이라고만 말하지 마요!”

흥분한 엘리자벳이 소리를 질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울면서 헐떡였다.

“제대로 설명을 해 달란 말이에요. 다들…… 모두 나에게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요. 내가 멍청하고…… 말귀도 어둡다는 건 나도 알아. 설명해 주기도 귀찮겠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자. 아니야!”

에셀.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이었지만 에셀은 어쩐지 엘리자벳과 예전의 관계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엘리자벳의 말을 자르며 과거에 몸을 던졌다.

“한 번도 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러니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제대로 말해 줘요. 에셀. 지금의 나를 전처럼 친우로까지 대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 예전에 우리가…… 벨과 나, 엘리엇과 에셀이 함께 있던 때를 생각해서라도. 그때를 한 번이라도 기억한다면 있는 그대로를 말해 줘요. 네?”

그가 갑작스레 맛보게 된 과거는 쓰디썼다. 그러나 에셀에게는 눈물을 쏟고 있는 엘리자벳을 보는 것보다야 쓴 열매를 삼키는 것이 나았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인 그는 결국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시에 엘자 넌 독을 먹고 쓰러졌어.”

“독? 하지만 난 기억이…….”

“기억하기 어려울 테지. 하지만 당시 넌 사경을 헤맸고…… 엘리엇은 그 배후로 벨을 의심했지. 상황이 어지럽긴 했어. 벨이 다녀간 뒤 네가 쓰러진 건 사실이니깐.”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그러나 엉킨 기억 속에 가물가물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엘리자벳은 제 기억을 의심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물었다.

“엘리엇이 왜 그런 의심을? 말이 안 되잖아요. 벨이 내게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나도 벨이 그랬다고 믿지 않아. 나도 후에야 제대로 안 일이지만 누군가 누워만 있던 엘리엇에게 그런 말을 흘려 넣었고…… 벨의 집착에 지쳐 있던 엘리엇은 벨이 너를 질투해 그런 일을 벌인 거라고 믿는 모양새였지.”

“엘리엇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말을 믿을 리 없어요!”

“당시 벨의 상태는 심각했다. 많이 불안했고…… 너와 만날 때는 괜찮았지만 일상에서 그 아이는 신경 쇠약 상태였지.”

“…….”

“게다가 엘리엇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힘들었을 때야. 반란이 일어나 그렇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어려웠겠지. 너조차 만나지 못한 그는 벨만큼이나 불안정했어. 당시 엘리엇은 누구도 믿지 못한 채 너를 보려고만 했지. 너처럼 말이야.”

“…….”

“자세한 정황은 나도 이 이상 모르지만 네가 독을 마시고…… 두 사람은 크게 다퉜어. 그리고 벨은…….”

“…….”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스스로에게 검을 찔러 넣었어. 그리고 엘리엇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

엘리자벳은 숨 쉬는 것을 잠시 잊었다. 엘리엇이 죽어 가는 벨을 그렇게 뒀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괴로워 보이는 에셀의 얼굴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를 원망했다. 그리고 나아가 네 가문을. 더 나아가 너도 원망했어. 네게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했지.”

“…….”

“……나는 벨이 죽은 후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른 것을 원망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방어했지. 가문이 위태로운 것도 아버지가, 벨이, 가족 친지들이 죽은 것도 다 남 탓이라 생각하면서 말이야. 비겁한 생각이라는 건 오래전에……. 아니 처음부터 알았어.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 멈추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

“…….”

“후에, 엘자 네가 그렇게 된 후에야 후회됐다. 한참을 외면하다 난 내가 저지른 죄를 너무 늦게 깨달았어. 내 죄를 마주 보기 싫어 시간을 벌어 너를 이용한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맺혀 있었다.

엘리자벳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에셀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부끄러움에 숨죽이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에셀은 바닥만을, 엘리자벳은 충격에 그런 에셀만 봤다.

“너무 늦었지만……. 엘자. 지금이라도 네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 전에도 말했다시피 받아 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아. 그냥…… 비겁하다 욕해도 좋아. 내가 생각해도 이제 와 용서를 비는 건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엘자. 나는 네게 꼭…….”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에셀의 얼굴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 그럴 필요 없어요.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에셀.”

해야 했던 말이 끊긴 에셀은 괴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가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뗐다.

“에셀은…… 전부터 나를 쭉 지켜 줬어요. 게다가 벨이 죽기 전까지 제게 한 번도 뭐라 하지 않았어요. 내 가문으로 득을 본 자들까지 당시 가문을 욕하며 수군거렸던 걸 생각하면…… 오히려 고마울 뿐이에요.”

“…….”

“죄스럽다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에셀이어도 그랬을 거예요. 사랑하는 가족이 그렇게 죽었는데 어떻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어요. 나는 내 가문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엘리엇을 그렇게 죽게 한 사람들을 원망해요.”

“…….”

“물론 에셀도요.”

원망한다는 말에 가슴이 저렸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도 아픔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에셀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난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엘리엇과 나를 져 버렸을까. 사실 난 어느 부분에서는 엘리엇이나 페루스보다 에셀을 믿었어요. 에셀은 벨의 오라비이자 내 오라비의 친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친우기도 했잖아요. 그래서 가끔은 누구에게도 못 했던 말들을 에셀에게 했어요.”

“그랬나? 하지만 이제는 끝이겠지. 내가 망쳐 버렸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우리 관계가 틀려 버린 건…… 에셀의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내 상황 때문이지. 에셀은 힘든 상황에서도 결국 나를 도와줬는걸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에셀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가장 커요. 그러고 보면 이 상처도 결국 나 때문이겠죠? 그런데 용서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자벳은 에셀의 눈가 상처를 가만히 쓸었다. 그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아팠을 것이 분명한 상처를 볼 때면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뭐라 해도 에셀에게 자신은 항상 피해만을 끼치는 존재였다.

에셀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을 굳혔다. 엘리자벳은 에셀의 상처를 한참이나 쓸다 손을 뗐다. 그리고 아까부터 에셀의 뒤에 있던 이에게 잠깐 시선을 줬다.

에셀과 같은 검은 머리의 벨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내 친구. 빨리 약속을 지켜.’

“……그래서 늦었지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사실 오늘 에셀을 부른 것도 이 말 때문이에요.”

“뭐든 말해 줘. 엘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엘리자벳의 말에 에셀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이 떠올랐다. 엘리자벳은 화색이 도는 얼굴을 씁쓸히 봤다.

“그만 북부로 돌아가세요.”

“뭐?”

“난 에셀이 여기 없었으면 해요. 물론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아요.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요. 하지만 난 에셀에게 사과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황제라고는 해도 뭘 줄 수 있는 권한도 능력도 난 없어요. 원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고요.”

“엘자! 난 네게 뭘 원하는 게 아니야. 그딴 건……!”

에셀은 엘리자벳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막상 엘리자벳의 입에서 떠나라는 말이 나오자 그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겠지만 내겐 아이들이 생겼어요. 페루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와 닮았어요. 난 곧 그와 식을 올릴 거예요.”

아이들의 이야기에 에셀은 마음이 아팠다. 분명 다 내려놨다 생각했건만 엘리자벳의 입으로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 부정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제가 했던 다짐을 다시 가슴에 새겼다.

“아이들이 누구의 자식이건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엘자 너를 지키러 온 것이지 다른 것은 상관없어. 물론 네가 원한다면 아이들도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어!”

“그래서 돌아가라는 거예요. 에셀은 나를, 아이들을 지킬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에셀이 있으면 내가 불편해요.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요. 하지만 난 에셀을 보기가 힘들어요.”

‘정말 에셀을 놓아주려고? 이기적인 네가?’

벨이 코웃음을 쳤다. 따끔한 시선이 여전히 아팠다. 엘리자벳은 벨에게 가는 시선을 억지로 에셀에게 고정했다.

“……페루스는 아이들에게 잘할 거예요. 이대로라면 아이들도 아버지를 사랑하겠죠. 그리고 난 그걸로 만족해요.”

“아이들 때문에 그의 곁에 남겠다고? 그럼 너는? 네 삶은? 엘자. 페루스 그놈이 네게 한 짓은…….”

에셀은 페루스가 행했던 악행을 말하려다 말을 멈췄다. 지난 세월 엘리자벳의 몸과 얼굴에는 폭력의 잔재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라고 아무 책임이 없을까?

“……그는 내가 필요한 모양이에요. 내 몸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가문이 그의 목적에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있는 한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은 없어요.”

엘리자벳은 차분히 말하며 제 팔을 쓸었다. 몸 여기저기는 물론이요 머릿속까지. 아직도 많은 고통의 흔적이 그녀를 삼키고 부수는 중이었다.

“난 아마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이만 내게 매여 있지 말고 떠나요. 에셀.”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어쩌면 페루스는 또 그녀를 때리고 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 일이 다시 반복된다 해도 자신이 감내해야지 에셀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싫어. 난 그렇게 못 해. 엘자.”

“에셀. 내 말을…….”

“엘자. 아까 우리 관계가 끝이라고 했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네게 다시 친우로서 남을 수는 없나?”

“……다시 말하지만 난 에셀이 떠났으면 해요.”

“아니. 난 여기에 남겠어. 더는 네게 용서를 빌지 않으마. 네 명을 어김으로써 난 영원히 자격을 잃었으니 이제 이런 변명도 끝이지.”

마음을 정한 엘리자벳은 완고한 에셀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완고했다.

“난 네 친우로서 네 기사로서도 자격이 없어. 그러니 너의 종으로서 주인인 너를 지킬 거다.”

에셀이 엘리자벳의 앞에 두 무릎을 모두 꿇었다.

“……원하지 않아요.”

엘리자벳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완곡한 거부였다. 그러나 그녀의 거부만큼이나 에셀의 신념 또한 단단했다. 그는 엘리자벳의 발에 입을 맞추고는 몸을 완전히 숙였다.

“감히 명을 어기는 종을 벌해 주십시오.”

엘리자벳은 몸을 숙인 에셀 너머 벨의 드레스 자락을 봤다. 얼굴이 일그러진 그녀는 제 오라비의 등을 노려보다 몸을 휙 돌렸다.

‘간악한 것. 넌 끝까지 이기적이야. 엘자.’

차가운 목소리가 공중에서 스러졌다. 엘리자벳은 이로써 벨이 자신을 영영 용서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 * *

“에든 후작을 불러 줘요.”

에셀을 보낸 엘리자벳은 자신을 찾아온 페루스에게 바로 다음 상대를 말했다. 에셀의 일로 심기가 틀린 페루스는 그녀가 누구를 말하든 한 번은 강하게 트집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딸아이를 안아 든 채 자신을 보는 녹안은 그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든 후작은 그 아이를 버렸어. 더는 제 핏줄로 생각하지 않는다 했지.”

결국 페루스는 강한 어조 대신 중얼거리며 간접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그건 페루스 당신이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서예요.”

그러나 돌아온 것은 비난 서린 말이었다. 엘리자벳답지 않게 강경한 어투에 페루스는 제법 놀랐다. 그러나 페루스의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엘리자벳은 유모에게 엘리샤를 넘기고 루이스를 받아 안아 들었다. 아이는 어미의 품이 좋은지 안기기도 전에 팔을 뻗으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인은 에든 후작이 손녀인 앨런을 아낀다 했어요. 그런 에든 후작이 앨런을 버렸다면 분명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가령 가문의 존속을 가지고 누군가 협박을 했다든가. 아니면 남은 가족 전부의 목숨 줄을 쥐고 흔들었다든가.”

엘리자벳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에든 후작은 가문과 남은 가족들로 페루스에게 협박당했다. 막내아들 일가를 버리지 않는다면 에든가 식솔 모두를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그러나 그 사실은 페루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에든 후작가 따위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일까.

페루스는 에든 후작과의 일을 아주 잠시 생각하다 곧 지웠다. 그리고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엘리자벳을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에셀 라세르가 네게 뭐라 했지? 엘자.”

엘리자벳이 마지막에 본 이가 에셀임을 기억한 페루스의 심기가 단단히 꼬이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타오른 질투는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충분했다.

쉽게 드러나는 노기에 루이스를 안고 살살 어르던 엘리자벳의 몸이 잠깐 멈췄다. 그러나 그녀는 비스듬할지언정 페루스를 마주 보며 아들 루이스를 고쳐 안았다.

“……내 말이 틀렸나요?”

“질문은 내 질문에 답한 다음에 해. 에셀 라세르가 네게 무슨 말을 한 거지? 뭐라 했기에 네가 이렇게 나오는지 궁금하군.”

부모의 싸움을 직감한 아이의 작은 손이 흘러내린 엘리자벳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엘리자벳은 제 머리카락을 당기는 아들의 얼굴을 품에 묻으며 제게 성큼 다가온 페루스의 시선을 피했다. 기껏 용기를 냈건만 몸에 박힌 두려움은 쉬이 가실 것이 아니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어요. 에셀은 그냥…….”

“에셀? 그새 다시 정이 든 모양이야. 왜 그가 네게…….”

“흐아앙.”

페루스의 어조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할 때였다.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샤가 울기 시작했다. 상전의 다툼에 눈치만 살피고 있던 유모들이 화들짝 놀라 아이를 달랬다. 그러나 아이는 쉬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 나가 봐.”

결국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서 떨어져 엘리샤에게 손을 뻗쳤다. 잔뜩 겁에 질린 유모들은 조심스레 엘리샤를 건넨 채 도망치듯 물러났다.

“샤샤.”

그렇게 짧은 신경전이 끝났다. 페루스는 익숙하게 엘리샤를 다독이며 엘리자벳에게 다가갔다.

두려움에 살짝 떨고 있던 엘리자벳은 딸을 보는 페루스의 얼굴이 느슨해진 것을 찬찬히 살피며 속으로 안도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엘리자벳은 제 태도에 페루스가 손을 올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가 손을 올린 지는 꽤 됐으나 폭력적인 것은 여전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 생각한 그녀였으나 아이들 앞에서만은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예민했던 모양이야. 긴장하지 마. 엘자.”

엘리샤를 어르던 페루스가 엘리자벳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는 딸아이를 보니 또다시 제가 잘못을 반복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엘리자벳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의 반응에 씁쓸해진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미안하다 사죄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에셀과의 만남에 대해 세세히 듣지 못한 앙금이 남았다. 대신 그는 엘리자벳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에든 후작을 불러들이겠어. 몸이 좋지 않아 네 즉위식 때도 오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오게 만들어야지.”

“……그의 몸이 안 좋나요?”

“에든 후작은 나이가 꽤 많아.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지.”

엘리자벳은 제인의 일가를 쉽게 버린 에든 후작을 미워했다. 협박을 당한 그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음을 이해했음에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자 엘리자벳은 고민에 빠졌다. 비록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저를 만나러 오다 앨런의 조부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꼭 그가 아니어도……. 그를 대신해 에든가를 대표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아요.”

“그럼 에든 후작 부인을 부르지. 장남인 베뷔스 백작과 함께 수도에 머무르고 있으니 금방 올 거야.”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든 후작 부인을 생각해 냈다. 나이 지긋한 노부인은 성격이 부드럽기로 유명했고 무엇보다 여인이었다.

“고마워요.”

용건이 끝난 엘리자벳이 페루스에게서 시선을 싹 거둔 채 안고 있는 아들만을 봤다. 바로 거둬지는 관심에 페루스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자식을 질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관심을 조금이나마 나눠 받고 싶었다.

“엘자. 샤샤가 너를 찾아. 루스는 이리 주고 안아 줘.”

그는 제가 안고 있던 딸아이를 교묘히 이용했다. 익숙한 페루스의 품에서 막 울음을 그친 엘리샤는 영문도 모른 채 엘리자벳 쪽으로 슥 내밀어졌다.

엘리자벳은 갑작스레 제게 오는 엘리샤를 얼떨결에 받고 루이스를 페루스에게 넘겼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 엘리자벳에게 딱 붙은 페루스는 그녀와 살갗이 닿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전에도 느낀 것이었지만 어쩐지 이 방법을 자주 애용할 것 같았다.

“아……. 루스도 네게 가고 싶은 모양이야. 아무래도 네 품이 많이들 그리웠나 봐.”

페루스는 그 시간을 늘리려 딸에 이어 아들 또한 이용했다. 두 아이 모두를 안기 버거웠던 엘리자벳은 어쩔 수 없이 페루스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페루스는 원대로 엘리자벳에게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었다.

꼭 사소한 싸움을 한 부부 같지 않은가.

페루스는 자신을 반기지는 않았지만 거부하지도 않는 엘리자벳을 보며 자신들이 아이들로 인해 화해한 사이좋은 부부 같다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작게 싹을 틔웠던 희망이 크게 자라났다. 엘리자벳의 허리에 슬그머니 손을 올린 페루스는 아이들을 보며 속닥거렸다.

“정말이지 이 아이들은 내게 가장 큰 보물들이야. 엘자.”

* * *

리즈는 황궁으로 온 뒤 구사일생의 삶을 살았다.

북부 고향에서 죽어 가는 동생의 약을 위해 에셀 휘하 북부 세력의 첩자가 되었으며, 가족을 버리고 간 약쟁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나약한 어머니 때문에 타티카의 명 또한 따라야 했다.

두 세력의 간자 노릇을 하는 그녀의 목숨은 항상 위태로웠다. 그러나 위태로운 만큼 그녀는 운이 좋았다.

페루스가 제가 뽑은 시녀들을 제외한 엘리자벳의 모든 시녀들을 치워 버릴 때 레베카와의 일로 궁 구석으로 쫓겨나 있던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포위망을 벗어났다.

게다가 수도에서 쫓겨난 타티카의 세력들은 며칠 서신을 보내지 못한 그녀가 죽은 줄 착각한 것인지 그녀에게 관심을 끊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 그녀에게 짐 덩이였던 아버지는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몸져누웠다지만 소식을 전해 받은 리즈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나마 믿을 만했던 고향 북부에 비해 서부의 치들은 믿을 구석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은 그녀는 또다시 큰 위기를 맞이했다. 궁으로 돌아온 에셀 일행은 자세한 궁 사정을 위해 그녀를 불러들였고 그 덕에 페루스 휘하 제임스 또한 잊고 있던 그녀를 기억해 냈다.

리즈는 제 목숨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페루스의 오른팔로 불리는 사내는 주인과 마찬가지로 냉철하게 일 처리를 하기로 유명했다.

“끌고 가. 간악한 세력과 결탁해 황제 폐하를 감시한 반역자다.”

반역자. 그 말 한마디에 리즈는 반역자가 되어 감옥에 갇혔다. 너무 큰 죄목 때문인지 그녀를 찾았던 북부인들 또한 더는 접근하지 않았다.

리즈는 제 처형 일을 알 수 없었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긍정적인 리즈였으나 죽음 앞에 그녀는 크게 낙담했다. 제 죽음으로 동생도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동생의 죽음은 지금껏 그녀가 행했던 모든 일이 수포가 됨을 의미했다.

“나와라. 네 무고함이 증명됐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가. 희망을 잃고 울고 있던 리즈는 또다시 목숨을 부지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처형당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감옥에서 다시 바깥으로 나오며 리즈는 그래도 에셀 휘하 북부 세력이 저를 구해 줬겠거니 생각했다. 북부인들은 사람들이 쉽게 죽어 나가는 지역 특성상 나름대로 지역민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수하를 쉬이 버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샬럿?”

“살아남은 걸 축하해. 리즈. 따라와.”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는 샬럿을 본 순간 리즈는 제 예상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누가 날 살려 준 거지? 네 주인이야?”

“리즈. 겨우 살아났는데 다시 죽고 싶은 거야? 넌 똑똑한 듯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고를 치더라.”

“…….”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다만 넌 네 머리카락에 감사해야 해.”

샬럿은 아리송한 말을 끝으로 리즈를 안내했다. 리즈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목숨이 더 중요했기에 묵묵히 샬럿을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곧 한 아이 앞에 도착했다.

“폐하의 명이야. 리즈 넌 앞으로 이 아이를 돌보면 돼. 앨런. 인사하렴. 너를 돌봐 주실 분이야.”

“안녕하세요. 앨런 에든입니다.”

샬럿의 말에 제 머리카락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리즈는 앨런이라는 아이와 제 공통점을 쉽게 발견했다. 연한 갈색의 머리. 아이가 가진 머리카락은 제 것의 색과 흡사했다.

“잠깐. 샬럿. 에든이면…….”

“맞아. 네가 생각하는 사람의 아이야. 지금은 뭐 보다시피 궁에 머무르고 있지.”

리즈는 그제야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 머리카락을 빤히 보던 가여운 황녀가 기억났다.

‘당시 측근인 제인 에든을 잃고 꽤 큰 슬픔에 잠겨 계셨지……. 보지 못한 지 오래됐는데 잘 지내고 있으시려나. 걱정이네.’

어찌 되었건 엘리자벳이 그녀를 기억해 낸 건 리즈에게 큰 행운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여전히 몰랐지만 리즈는 제게 운을 준 신과 엘리자벳에게 속으로 감사하며 몸을 낮춘 채 앨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 꼬마 아가씨. 난 리즈 라즈벳이야. 리즈라 불러도 되고 언니라 불러도 돼. 잘 부탁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앨런은 다정한 행동에 리즈에게 다가갔다. 아직 어린아이인 그녀는 리즈의 머리색이 자신과 어미인 제인과 비슷한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얼마 만에 제게 다정히 대해 주는 사람인가. 눈치를 많이 보는 앨런이었지만 그녀는 어린아이였다.

“금방 친해지겠네. 그럼 난 가 볼게. 리즈. 아이를 잘 부탁해. 자세한 건 조금 있다 들어올 하녀에게 물어봐.”

“그래. 샬럿. 자 앨런. 언니에게 인사하자.”

“안녕히 가세요.”

샬럿은 리즈가 앨런을 안아 드는 것을 본 뒤 빠르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리즈는 앨런과 함께 그런 샬럿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리즈는 고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슬아슬한 황궁 안에는 항상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그녀처럼 높은 분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동생에게 약을 보낼 수 있음에, 당장 살아난 것에 감사했다.

손에 힘을 꼭 준 채 배웅을 마친 리즈는 앨런을 보며 활짝 웃었다.

“자. 식사 시간인데 우리 뭘 좀 먹을까?”

* * *

에든 후작 부인은 빠르게 답신을 보내왔다. 허락만 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들어오겠다는 말에 엘리자벳은 허락을 했고 에든 후작 부인은 알현 시간이 되기 무섭게 궁에 들이닥쳤다.

“앨런……. 아가. 이 불쌍한 것.”

엘리자벳은 앨런을 안고 오열하는 늙은 여자를 보며 제인의 말대로 에든 후작 부부가, 적어도 에든 후작 부인은 막내아들의 핏줄을 아꼈음을 확신했다.

“……미안해요.”

그러나 제인 부부는 이미 죽었으므로 엘리자벳이 후작 부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죄뿐이었다.

“아닙니다. 폐하. 모든 일은 저희 바깥양반이…… 매정한 그이가 문제지요. 그리고 제게 말을 높이시는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잠깐 앨런을 데리고 나가 줘.”

갑자기 조모를 만나 얼떨떨해하는 앨런을 내보낸 뒤에도 후작 부인은 계속해서 눈물을 보였다. 제인의 일에 죄책감이 가득한 엘리자벳은 그런 후작 부인의 모습에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끝내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녀 자신에게 그럴 권리 따위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하지만 폐하. 저희 막내가. 그러니깐 루소와 제인은 반역죄를 저지를 아이들이 아닙니다. 물론 제인 그 아이가 동부 출신인 건 사실입니다만 한미한 가문 출신인 데다 폐하의 시녀 노릇을 잠시 한 것 외에는 쭉 남부에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워낙 발이 좁은 아이들이라 다른 이들과는 교류도 없었는데……. 흑, 불쌍한 것들.”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후작 부인의 첫마디는 막내아들 부부의 무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벳은 후작 부인의 말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반역죄라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반역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은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인 네가…….’

엘리자벳은 어느새 후작 부인의 뒤에 나타난 제인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피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배를 관통한 검상은 여전히 붉은 피와 함께였다.

“물론 주제넘은 말이지요. 한낱 여인에 불과한 제가 참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매정한 저희 후작님도 더는 말하지 말라 했지만……. 그랬지만…… 전 그 아이들이 그런 일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 누명을 쓴 게지요. 그러니 폐하…….”

“…….”

“불쌍한 우리 앨런을 봐서라도…… 가문의 묘에 아이들을 묻게 허락해 주세요. 지금 그 아이들은 공동묘지에 버려져 있어요. 제 아들 루소와 제인에게 쓰인 죄를 사해 주세요. 아니면 앨런은 에든가의 성을 쓰지 못합니다.”

다시 울기 시작한 후작 부인을 보며 엘리자벳은 속에서 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페루스가 잔인하고 무정한 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몰랐던 사실들이 이렇게 들춰질 때면 엘리자벳은 저도 모르게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제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페루스에게 화를 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뻔했다.

폭군인 그는 제인의 일로 엘리자벳이 제 심기를 거스른다면 앨런뿐 아니라 숨죽이며 사는 에든가 또한 위협할 것이 분명했다.

“약속해요.”

“예?”

“두 사람의 누명을 내가 어떻게든 풀어 주겠어요. 그리고 앨런은……. 그렇지 않아도 부인을 보고자 한 일은 앨런 때문이에요.”

엘리자벳은 분노로 달달 떨리는 턱을 억지로 고정한 채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후작 부인에게 약속했다.

당연히 해야 할 도리에도 후작 부인이 감격한 듯 손을 모아 쥐었다. 그 모습에 엘리자벳은 참담함이 몰려옴을 느꼈다.

“앨런은 곧 에든가의 당당한 핏줄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아이는 가족과 함께해야지 더는 이런 곳에 둘 수 없어요.”

“하, 하지만 제가 듣기로 앨런은 평생 궁에서 폐하께 봉사하게 되었다고……. 아, 물론 저는 그것도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후작 부인의 말에 엘리자벳이 칼같이 일갈했다. 앨런을 평생 제 곁에 묶어 두다니, 그런 끔직한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부인께서도 아실 텐데요.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게다가 내 곁에 있다는 건 항상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에요.”

엘리자벳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후작 부인은 비록 반평생을 영지에만 있었다지만 한편으로는 남부의 권세 높은 에든가의 안주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의 치세에 이 유약한 황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그 황제의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인지 잘 알았다. 그리고 황궁 안 위협은 어린아이라고 비껴갈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게다가 후작 부인의 친정과 에든가 역시 오로르에 원한이 있었다. 막내아들의 일이 없었다면 후작 부인 또한 오로르의 황제에게 자존심을 굽히며 울음을 터뜨리는 일 따위 없었을 터였다.

“폐하의 말씀은…….”

후작 부인은 처연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엘리자벳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어린 손녀인 앨런을 데리고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부인께서 앨런을 잘 지켜 주리라 믿어요. 앨런은 곧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예요.”

무언가 이상했다. 후작 부인은 엘리자벳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살짝 비켜나 뒤로 향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러나 원했던 목표를 이룬 후작 부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막내아들 일가의 일만 풀린다면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삶, 영영 수도에 발걸음 하지 않을 참이었다.

* * *

“그놈은 절대 안 돼.”

“분명 누구든 만나도 좋다 했어요.”

“난 이미 네 뜻에 많이 따랐어. 에든 후작 부인을 불러 줬고 앨런 에든 그 아이에게 네가 지목한 시녀 또한 붙였지. 그렇다면 이제는 네가 양보해야지. 엘자.”

“이건 앨런의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앨런 문제에 대해서 아직 내게 답을 주지 않았잖아요.”

“제인. 그 여자가 너를 데리고 궁 밖을 빠져나간 건 반역죄에 해당해.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 또한 제 죄를 자백했어.”

“거짓말! 그렇게 만든 건 페루스 당신이잖아요. 당신이 죽인 내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마!”

내 사람이라는 말에 페루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엘리자벳은 그늘지는 그 얼굴이 두려웠지만 똑똑히 눈을 뜨고 바라봤다.

“분명 약속했어요. 아이들이 태어나면 내 뜻대로 누구든 만나라고.”

에든 후작 부인을 만난 후 엘리자벳은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생각했다. 죽을 마음을 끝까지 가져갔으면 모를까. 살기로 작정한 이상 훗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조금씩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페루스를 향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이겨 내는 것이었다.

덕분에 피곤해진 것은 페루스였다. 그는 엘리자벳과 만날 때마다 불붙는 비슷한 다툼들이 지긋지긋했다.

“다시 말하지만 안 돼. 그리고 놈은 사라졌어. 제 죄를 아는 모양이지. 도망친 걸 보면.”

“난 그를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페루스. 당신이 그를 얌전히 풀어 줬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나마 그가 이러한 다툼에서 얻는 위안이라고는 엘리자벳이 느릴지언정 그를 외면하는 일이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똑바로 눈을 마주쳐 오는 감정 어린 시선에 페루스는 우습게도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고 있음을 생생히 느꼈다.

“엘자!”

그러나 그가 소리를 조금 더 높이자 엘리자벳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리다 휘청거렸다. 엘리자벳이 혹여나 넘어질까 놀란 페루스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챘다.

하지만 손이 닿기 무섭게 눈을 질끈 감은 엘리자벳을 본 페루스는 참담했다. 장담컨대 그는 엘리자벳에게 다시는 손을 대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엘리자벳의 반응을 볼 때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곡차곡 쌓이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앉아. 엘자. 앉아서 얘기해. 오래 서 있는 건 네 몸에 좋지 않아.”

“…….”

“발목은 괜찮은 건가?”

결국 그는 달래듯 엘리자벳을 소파로 이끌었다. 그리고 혹여나 엘리자벳이 발을 삐끗했을까 무릎을 꿇고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은 순간 발목이 쿡쿡 아려 옴을 느꼈다. 그녀의 발목은 페루스가 그녀의 생일날 부러뜨린 후 치료를 했음에도 종종 이런 고통을 가져다줬다.

“……그놈은 네 명예를 실추시켰어. 감히 제 뒷배를 믿고 날뛴 놈이라고. 그가 너에 대해 뭐라 했는지 말해 줬잖아.”

“명예? 그가 그 말을 하기 전부터 내겐 명예 따위 없었어요.”

명예라는 단어에 엘리자벳이 날을 세웠다. 누그러진 페루스와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잘 알고 있잖아요.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듣고 살았는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내 명예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큰 책임은 페루스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자의든 타의든 난 여러 사내와 잠자리를 가졌어요. 물론 태어난 아이들은 당신 말대로 르온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아이들이 있다 한들 내가 다른 이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요.”

꼭 제삼자에 대해 말하듯 무감한 어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날 선 자조는 페루스를 난도질하기 충분했다.

그는 그만하라는 듯 엘리자벳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당장 이 자리에 아이들이 없음을 안도했다. 알아듣지 못할 갓난쟁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들에게 제가 행한 치부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만해.”

“먼저 말을 꺼낸 건 당신이에요. 약속을 지켰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어요.”

그 말에 페루스는 또다시 손을 들었다. 제 치부가 엘리자벳의 입을 통해 드러난 이상 그에게는 싸울 힘 따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는 엘리자벳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그를 만나려 하는 거지?”

“…….”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지 않나?”

“그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그렇다면 나와 함께 만나. 그놈은 위험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말이야.”

“싫어요.”

“……정말이지 끝까지 야속하군.”

엘리자벳은 상처 입은 듯 구는 페루스가 우스웠다. 그는 매사 왜 자신의 삶 전부에 간섭하지 못해 안달인 걸까?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그에게 문뜩 물어보고 싶었다.

“알았어. 만나. 대신 그놈과 접촉하는 건 안 돼.”

“할 생각도 없어요. 난 단지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자존심을 꺾고 한발 양보를 하니 날을 세운 모습도 퍽 아름다워 보였다. 페루스는 인형처럼 무기력한 모습보다는 확실히 이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 뭐든 뜻대로 해. 엘자. 내 황제 폐하.”

그의 엘리자벳은 살아 있었다. 살아서 숨 쉬는 것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페루스는 그대로 엘리자벳의 무릎 위에 제 얼굴을 묻었다.

엘리자벳은 과한 접촉에 불편한 듯 다리를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제 뜻대로 끝난 대화 덕인지 아니면 그저 받아들인 것인지 거부의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예전처럼 해 줬으면 좋겠지만…….’

덕분에 페루스는 혼자만의 망상에 쉬이 젖어 들었다. 그는 많은 일이 있기 전 엘리자벳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것을 기억했다. 소풍을 나가자 조르는 그녀의 말을 들어줄 때면 엘리자벳은 그를 제 다리 위에 뉘고 머리를 부드럽게 흐트러뜨리고는 했다.

‘너를 처음 봤을 때 이 색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어. 아마 난 그때 네게 반했나 봐. 페루스.’

‘……그래? 타고난 이 색에 감사해야겠네.’

물론 당시에는 그런 그녀가 매우 귀찮고 가증스러웠다. 이런 연기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마저 들던 기억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해 주지 않는 엘리자벳이 야속했다.

난 돌아갈 준비를 마쳤는데 왜 넌 그때로 돌아오지 않는 걸까.

페루스는 속으로 그때를 그렸다. 생각할수록 아쉽고 또 애틋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페루스는 언젠가는 그날이 다시 찾아올 것을 고대하며 눈을 감았다.

* * *

엘리자벳이 원한 마지막 만남이 성사됐다. 페루스는 몇 번이고 자신도 같이 있으면 안 되겠냐 청했지만 단호히 고개를 젓는 엘리자벳을 보며 그는 결국 짜증스럽게 만남을 준비시켰다.

그렇게 엘리자벳이 있는 곳으로 끌려온 알렉스의 몰골은 심각했다. 페루스에게서 이미 들은 바가 있는 엘리자벳은 알렉스가 무사하지 못했을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만큼 수려했던 얼굴이 잔뜩 부은 것도 모자라 피딱지가 앉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대충 휘감은 붕대 사이 언뜻 보이는 손가락은 아직까지도 핏물이 흐르고 있었기에 엘리자벳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엘자…….”

알렉스는 목소리마저 힘겹게 뱉었다. 그러나 목소리와 달리 사금같이 빛나는 눈동자만은 기이한 빛을 띠고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에 엘리자벳은 꽁꽁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알렉스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팔을 사용 못 해 무릎걸음으로 꾸물거리며 걸어온 알렉스가 엘리자벳의 코앞에서 머리를 내렸다.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긴 머리카락이 엘리자벳의 발치에 닿을 뻔했으나 깜짝 놀란 그녀는 주춤거리며 발을 빼 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알렉스의 첫마디는 사죄였다. 엘리자벳은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도 그가 똑같은 말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의 사죄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에게 와닿지 못했다.

그녀는 더는 알렉스를 아끼지 못했다. 어떤 이유가 됐건 그는 제인을 죽인 이였다. 엘리자벳은 그를 볼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 아래 죽어 가던 제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 그녀는 그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제게 벌인 일들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고 따지는 것은 지금의 엘리자벳에게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알렉스에게 앉을 자리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 무의미한 사람을 만날 만큼 그녀의 정신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엘리자벳이 만남을 청한 건 그녀가 알렉스에게 비밀리에 받을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없었다면 그녀는 페루스와 감정 소모를 해 가며 절대 그를 만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막상 눈앞에 꼬꾸라진 그의 몰골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본 그녀에게 알렉스의 상태는 보는 것만으로 고문에 가까웠다.

“……들어오세요.”

결국 머뭇거리던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명으로 문 바로 밖에 대기하고 있을 기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 있는 알렉스를 일으켜 맞은편에 앉히라 명했다.

알렉스는 엘리자벳의 명을 반기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벳의 가까이서 자신이 선택한 자세를 유지하길 원했다. 그렇기에 만약 누군가 그가 가엽다 일으켜 세우려 했다면 그는 이로 그자의 손을 물어뜯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명을 내린 건 엘리자벳이었다. 알렉스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저를 일으키는 기사들에게 몸을 맡겼다.

“경을 부른 건 부탁할 일이 있어서예요.”

엘리자벳은 알렉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알렉스는 그런 엘리자벳을 찬찬히 살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웠던 녹색 눈에는 끝내 감추지 못하는 미움이 삐죽 솟아 있었다.

‘그 여자의 일인가.’

알렉스는 그 부정적인 감정의 이유를 손쉽게 찾았다. 제인 에든. 그가 죽인 시녀가 분명 문제의 원인임이 분명했다.

이유를 찾은 알렉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가 먼저 하고 싶었던 사죄는 지난 만남 때 감히 엘리자벳에게 주제넘은 말을 한 것에 관한 것이었다.

본래라면 즉위식 날, 엘리자벳을 돕기 전 해야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간이 충분치 못했고 알렉스는 그 후 엘리자벳을 한동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알렉스는 사실 제인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사죄를 해야겠다 생각한 일의 발단이 제인의 죽음이었음에도 그랬다.

알렉스는 이내 결정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어떠하건 죽은 시녀의 일을 먼저 해결하기로. 시작점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다음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았다.

“그 여자가 죽어 많이 슬프셨습니까?”

알렉스의 배려 없는 물음에 엘리자벳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그녀는 일부러 회피하던 시선을 바로 해 알렉스를 노려봤다.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슬그머니 이는 것을 느꼈다. 억울함이었다. 저번에도 그러했지만 제인은 그에게만큼은 엘리자벳의 저런 시선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런 이 때문에 그리 울고 이리 매정하게 나를 밀어내시다니.

게다가 제인이 죽은 이후 그는 제정신인 엘리자벳을 도통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엘리자벳의 똑바르면서도 증오 어린 시선은 그로서는 거의 처음이었다. 바라고 바라던 상대에게 받는 적의는 돌처럼 굳어 버린 그의 심장에도 적잖은 아픔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감히 엘자가 아끼는 이를 제가 죽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우선 엘리자벳에게 사죄를 했다. 감정과는 별개로 그는 자신 때문에 엘리자벳이 아프고 힘들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왜…….’

입을 뻐금거리며 그에게 소리 없이 질문을 던지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알렉스는 사실 그 당시 한편으로는 후회하고 있었다. 큰 목적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저로 기인해 아파하는 모습이. 망가진 모습이 너무 죄스러웠다.

‘……저를 데려가지 않으려 하셨잖습니까.’

당시를 기억해 낸 그는 저번처럼 무례한 것이 아닌 제대로 된 답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제 처지와 당시의 상황을 말한다면 분명 이해해 주리라. 계속 곁을 지킬 수 있게 허하리라.

“……엘자. 그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예. 물론 변명이지만, 저는 저를 데려가실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 저와 엘자의 관계는 그렇게 끊어질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제게 의지하셨고 분명 저를…….”

“…….”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끼는 이라고도 말씀하셨지요.”

“…….”

“저는 그저 엘자의 옆에 있고 싶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서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들처럼 당신을 아프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그뿐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한 최선이었습니다. 엘자를 지키고 동시에 제가 엘자 곁에 설 수 있는 최선의 방도였습니다.”

들은 적 있는 말에 엘리자벳은 눈을 깜빡였다. 아이를 가져 혼란스러울 때도 눈앞의 사내는 비슷한 말을 했다. 아니,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똑같았으니 똑같은 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보다 말이 길어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뭐가 됐든 결국 변명일 뿐 아닌가. 결국 그가 제인을 죽인 이유는 하나였다.

‘나 때문이라고.’

엘리자벳은 그녀를 원인으로 삼는 이를 많이 봤다. 모두들 쉽게 그녀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녀의 핏줄, 가문, 외모, 성격.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원흉이었다.

엘리자벳은 제게 향하는 화살에 분노하면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사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런 말에 대부분 긍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싫었다. 적어도 오늘, 당장 이 순간은 사내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전하…….’

엘리자벳은 시시각각 제게 모습을 보이는 제인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달라지고 싶은데. 아이들을 인정한 후 엘리자벳은 죄책감에서 기인한 유령들을 어떻게든 이겨 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끝끝내 듣는 말은……. 엘리자벳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뗐다.

“……끝까지 내 탓을 하는군요.”

“엘자를 탓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다만 그 여자는 데리고 가시면서 그 여자보다 더욱 도움이 될 저는 놓아두고 가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검조차 휘두르지 못하는 한낱 여인은 데려가시면서 곁을 계속 지켰던 호위인 저는 두고 가지 않으셨습니까.”

“…….”

“엘자. 전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의 명을 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가 곁을 따를 방법은 그뿐이었습니다. 전 어떤 말도 없는 당신을 따를 유일한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벳은 허탈했다. 자신은 끝없을 것 같은 죄책감과 싸우고 있는데. 제인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고작 그런 이유라고. 제인을 그렇게 죽인 이유가 고작 내 곁에 있으려 그런 거라고…….’

엘리자벳은 제인의 죽음을 너무도 쉽게 말하는 알렉스가 징그러웠다. 그는 그녀에게는 잘못을 빌면서도 제인에게는 어떤 사죄의 말도, 일말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황금빛 찬란한 눈이 파충류의 것처럼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내게…… 내게 말해 볼 수도 있었잖아요. 다른 방법이 없었다니, 유일한 방법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인에게……. 제인은 그대와도 친구였어요! 내 곁에 있을 때 그녀와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둘이서 같이 나를 보살펴 줬잖아요!”

참지 못한 엘리자벳이 감정을 보였다. 끔찍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벳은 그를 따뜻하고 다정한 이라 기억하고 있는 머리 일부분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러다! 당신께 데려가 달라 빌었다 거절당하면 어찌합니까. 엘자가 싫다 말하면 저는 들을 수밖에 없질 않습니까!”

엘리자벳이 감정을 드러내자 얌전한 기색만을 보이던 알렉스도 조금 격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는 억울함으로 진작에 감정적이었다. 물론 그는 어떻게든 차분해지려 노력했지만 늦게 깨우친 감정들은 쉽게 통제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제 귀로 분명 들었습니다. 그 여자가 말하는 걸요. 엘자는 분명 내게 말을 하려 했는데…… 그 여자가 막아섰어요. 그녀가 엘자와 저 사이를 막아섰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겁니다. 제가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게 만든 건 그녀입니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억울함에 엘리자벳은 말문이 막혔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는 그녀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의 사고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런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매달리듯 사죄했다.

“물론 엘자……. 제가 그녀를 죽여 엘자를 슬프게 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죄드리는 겁니다.”

“…….”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초조해지기 시작한 알렉스는 결국 차분함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엘자. 정말이지 그 상황에서는 방법이 그것뿐이었습니다. 저도 편치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엘자 당신께…….”

“…….”

“이런 마음이 주제넘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조금은……. 이런 마음을 품은 제게 조금은 그때처럼 대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저는 처음입니다. 이런 감정도 이런 마음도 이런 기분도 처음입니다.”

“…….”

“……불쾌해하셔도 좋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가지는 어떤 감정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게 분명 엘자…… 엘자가 제게 좋아한다 말했던 책 속의 그런 감정이지요? 사랑이라 부르던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이건…….”

“…….”

“……당신께 좋은 일이 아닙니까. 분명 그러셨습니다. 사랑받는 일은 행복한 거라고. 감사한 일이라고.”

뭐든 너무 늦어지면 문제가 되는 법이었다. 사람으로서 깨우쳐야 할 여러 감정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알렉스는 엘리자벳의 침묵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뒀던 마음을 꺼내 보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그 실수가 상대에게 최악의 수로 다가간다는 것을 몰랐다.

“나를 사랑한다……. 언제부터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래되었습니다. 어쩌면 첫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엘리자벳에게 가장 끔찍한 말 중 하나가 사랑이었다. 그 감정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던가. 우습지도 않은 고백에 엘리자벳은 조소를 감추지 않고 알렉스에세 물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요?”

“…….”

“들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나와 동침했다는…… 그런 말을 했다고.”

“……그것은!”

제가 한 거짓말을 엘리자벳의 입으로 들은 알렉스는 당황했다. 다른 어떤 이들이 제 거짓을 알아채도 그는 괜찮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알렉스는 제 거짓에 수치를 느꼈다.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한 시작은 타티카의 명이었다. 잠시 타티카의 그늘에 있었던 그는 타티카가 서신으로 전한 명을 충실히 따랐다.

엘리자벳의 과거를 밝혀 우선적으로 페루스와의 결혼을 막는 것. 물론 엘리자벳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알렉스는 그보다 페루스로 인해 영영 엘리자벳과 헤어질 것이 더 걱정되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명을 수행했다.

‘심지어 저조차 그분의 침실에…….’

그러나 그 말은 명에 없던 그의 충동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던가. 누군가의 명이 아닌 자의로서 엘리자벳을 욕보이는 말임을 그는 알았다. 꺼내고 나면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도 알았고 잘못하다간 목이 잘릴 수 있는 거짓임도 알았다.

“나는 기억이 없어요. 여러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만 제게 손댄 이 중 당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요.”

“……저도 그들처럼 하고 싶었습니다. 몰래 입 맞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저는 항상 그 이상을 원하고 또 원했습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으시니깐…….”

알렉스는 만천하에 드러난 제 거짓을 순순히 인정했다. 대놓고 마음을 보인 마당에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다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도 자신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을 알았다. 비록 순간의 거짓이었을지언정 그는 그 말을 함으로써 아주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만약 하나라도 나를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분께서 나와 비슷한 구석이 하나라도 있는 아이를 품으신 거라면……. 어쩌면 잠깐일지라도 내가 반려 행세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종종 정말 자신이 엘리자벳과 동침했다 착각하곤 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싶을 만큼 엘리자벳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자는 자신의 아이라 확신했지만, 만약 르온 공작의 아이라면? 르온 공작의 색과 엘자의 색이 잘 섞인다면 내 것과 비슷한 색이 나올지도 모르고…….’

상상을 어떻게든 현실과 연결하기 위해 알렉스는 바쁜 와중에도 오로르가의 기록을 찾아봤다. 엘리자벳의 조상 중에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이가 없나 하고.

‘있어! 이렇게 가까이에…….’

그러다 자신과 똑 닮은 크리스에 대한 기록을 찾은 알렉스는 큰 기쁨과 희망을 가졌다. 물론 그와 동시에 엘라르 황제와 그녀에게 잡힌 아비의 일도 잠깐 기억해 냈지만 어린 시절 기억들은 그에게 별달리 상관없는 문제였다.

물론 알렉스의 희망은 짧은 시간 안에 깨졌다. 타티카의 말과 달리 쌍둥이로 태어난 아이들은 누가 봐도 르온과 오로르의 결합이었다. 덕분에 그는 반려 노릇은커녕 타티카가 약조한 엘리자벳의 곁에 설 자격조차 잃고 고문실로 끌려갔다.

“……이제 그만해요. 무슨 생각을 하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엘리자벳은 알렉스와 더는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그가 미쳤다는 생각만 커졌다.

절절한 제 말에도 엘리자벳이 꼼작하지 않자 알렉스는 불안해졌다. 이대로면 그녀와 내 사이는 끝이야. 그는 어떻게든 엘리자벳에게 매달리려 저조차 잊고 있었던 과거를 꺼내 들었다.

‘……나보다 더 괴롭게 한 이들도 과거를 생각하시고 곁에 두시니깐.’

“……제게도 그들 못지않은 사정이 있습니다. 저도 그 일의…….”

“그만. 이제 그만 듣고 싶어요. 무슨 말을 해도 난 이해하지 않을 거예요. 하고 싶지도 않아요. 조금 전에 스스로 이야기했잖아요. 내 뜻을 거역할 수 없다고……. 난 더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시도는 빗나갔다. 엘리자벳은 단호하게 알렉스의 말을 막았다. 절망감에 막막해진 알렉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걸 주세요.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런 알렉스를 알아채지 못한 채 엘리자벳은 오늘 만남의 본론을 꺼냈다. 그녀로서는 빨리 만남을 매듭짓고 싶었다.

“……무얼?”

침잠해 버린 눈이 일말의 빛을 가지고 물어 왔다. 내게 쓰임을 찾으신 거야.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들 내가 바보 천치가 되었다고 그때를 기억조차 못 하는 줄 아나 봐요. 머리가 비고 목소리가 사라졌어도 내 눈과 귀는 여전했는데.”

그러나 엘리자벳의 말을 들은 순간 알렉스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찾으시는 것이……. 그는 고문실로 끌려가기 전 숨겨 둔 물건 하나를 떠올렸다.

“주세요. 난 그게 필요해요.”

“……어디에 쓰실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묻지 마세요.”

차갑다. 알렉스는 엘리자벳이 제게는 말도 없이 시녀 하나와 동부로 떠날 때를 떠올렸다. 그때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마음이 아려 왔다.

‘너는 사람 흉내를 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명심하렴. 너의 가치는 사람답지 않은 것에 있단다.’

분명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예. 엘자.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다니 곧…….”

“……그걸 준 다음 떠나면 좋겠어요.”

알렉스는 후회했다. 늙은 스승의 말을 끝까지 기억하고 따라야 했다.

“이걸 끝으로 내가 더는 알렉스를 찾을 일은 없을 거예요. 보고 싶지도 않고요.”

루한을 배신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무감했던 삶이 어그러지긴 했다.

차라리 루한의 명에 따라 눈앞의 여자를 신전으로 끌고 갔으면 좋았을까. 이 눈으로 죽는 것을 보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용당했다 생각해도 좋아요. 그걸 위해 알렉스를 부른 건 사실이니까요.”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의 그는 절대 여자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할 터였다.

“제가 죽는 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명해 주십시오. 엘자. 저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마지막으로 알렉스는 제 목숨을 걸며 매달려 봤다. 그동안 보아 왔던 여자는 이런 것에 약했으므로.

간사하다, 약아빠진 놈이라 욕을 들어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곁에 머무르게 해 준다면…….

“……죽는 걸 원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난 경이 떠나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다르게 엘리자벳은 주춤할지언정 꺾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제야 인정했다. 그가 완전히 그녀의 선 밖의 인간이 되었음을.

“도서관에서 책을 찾으십시오. 한때 가장 좋아하셨던 책 말입니다.”

“……고마워요.”

그걸 끝으로 그들은 어떤 말도 이어 가지 않았다. 곧이어 기사들이 들어와 다시 알렉스를 끌고 갔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자벳은 알렉스가 지하 감옥을 탈출해 수도 밖으로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 * *

엘리자벳은 도서관에서 ‘사랑’을 찾아오게 했다.

한때 유행했던 것이 무색하게 책은 사람의 손을 탄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여기저기 닳은 자국만이 옛 영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오랜만에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의 어느 곳에도 엘리자벳이 찾는 물건은 없었다.

그러다 문뜩 엘리자벳은 두꺼운 재질의 종이로 덧대어진 책의 뒤편이 같은 재질의 앞편보다 더 두껍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엘리자벳은 책을 들어 겉표지를 찢으려다 다시 내려놨다. 무엇이 있는지 알았으니 당장 쓸 것이 아니라면 이대로 두는 것이 좋았다.

‘……어디에 쓰실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엘리자벳은 겉표지 아래의 물건을 이용해 아이들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 속셈이었다. 아이들의 아비 페루스는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으므로.

그는 언제 바뀔지 모르는 사내였다. 잘해 주는 척하다 다시 되돌아가면 어떡하나. 그 폭력이. 그 상황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게다가 엘리자벳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 폭력이 아이들에게 간다면? 그 지옥에 아이들마저 빠진다면?

에셀에게는 페루스가 아이들에게 잘할 거라 말했지만 그건 그를 떠나보내기 위한 말이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를 믿지 않았다. 그가 보이는 다정한 모습이 언제고 사라질 신기루에 가깝다 믿었다. 이미 한번 겪지 않았나. 세상이 쪼개져도 변치 않을 거라 믿었던 다정한 연인은 한순간에 악귀가 됐다. 그러니 다정한 아비도 한순간 무정해질 수 있었다.

당장 그녀를 황제로 추대했다고는 하나 상황이 언제 바뀔지 몰랐다. 이 겉가죽이 시들면. 이 몸뚱이에 질리게 된다면. 이유 모를 그 지긋지긋한 집착이 색을 바래게 되면. 감정이란 우스운 것이어서 용암처럼 끓다가도 한순간에 빙하처럼 차가워지는 법이다. 엘리자벳은 10년 이상 간직한, 영원할 것 같았던 마음이 짧은 시간 사라진 것을 기억했다.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유폐되거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페루스의 마음이 변하는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마음이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런 대접을 받게 둘 수는 없었다. 허수아비 신세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미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했다.

‘이게 아니면 안 돼.’

인간이 만든 어떤 지장도 어떤 맹세도 권력의 정점인 페루스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손짓에 종이는 찢길 것이고 법은 바뀔 것이다. 그를 완전히 옭아맬 수 있는 건 신의 힘뿐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써 줄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좋지.’

다행스럽게도 물건은 그녀의 손안이었다. 엘리자벳은 어떻게 페루스에게 서약을 받아 낼지 어떤 말이 아이들을 보호해 줄지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페루스는 그녀의 뜻대로 쉬이 움직일 이가 아니었다. 어디서 났는지 묻는다면? 빼앗아 간다면? 꼬리를 무는 질문에 결국 책은 엘리자벳의 침실 한편에 자리하게 됐다.

페루스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책의 존재를 반가워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행복을 감추지 않았다.

“다시 보는 건가? 하긴, 엘자 네가 이 책을 많이 좋아했지.”

“…….”

“기억 안 나? 예전에 항상 내게 읽어 줬잖아.”

“……그랬던가요.”

* * *

툴란은 모두의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권력 다툼이 어느 정도 끝을 보이자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승자의 편에 붙으려 했고 당분간 남부의 세는 공고할 터였다.

물론 변수는 있었다. 페루스의 주도 아래 수도 내 타티카의 서부 세력과 아슬란교의 신진 세력은 대다수 쫓겨났지만 불안정할지언정 북부의 세는 유지되고 있었다. 생각 외로 견고히 유지되는 에셀의 세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황궁 기사단이 둘로 나뉘었다던데……. 라세르 공작께서 예상외로 선전하신다고.”

“같이 검을 든 자들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비슷한 치들끼리 어울리게 되는 모양이지요. 르온 공작님께는 안 된 일입니다.”

“맥켈이던가? 변변찮은 작위도 없는 이를 단장으로 앉히신 게 큰 실책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작과 일개 기사라니. 내가 기사단이어도 전자를 따르지. 가문의 기사보다 못한 단장을 누가 따른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요. 황궁 기사단은 대대로 명문가 출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내세울 가문도 없는 대장이라니. 허허, 참.”

“그렇다고는 하나 이 이상 라세르 공작님께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기사단이 아무리 드높은 명예를 가진다고는 하나, 결국 속되게 말하면 집 지키는 개가 아닙니까. 국혼이 끝나면…… 뭐, 결과야 뻔하지요.”

엘리자벳과의 만남 이후 에셀은 방향을 확고하게 잡았다. 그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세웠다. 우두머리가 확고한 결심을 내세우자 충성심 높은 세력은 두말없이 명에 따랐다.

엘리자벳은 더는 에셀이 그녀의 곁에 머물 필요도 그녀를 지킬 이유도 없다 했다. 하지만 에셀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명을 어기기로 했다.

비록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한들 에셀은 엘리자벳에게 자유와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실행하기 위해 위해서 에셀은 페루스와 제대로 다툴 필요를 느꼈다.

‘폐하께서는 몸이 좋지 않아. 할 말이 있다면 내게 하게. 예외는 없어.’

국혼이 정해진 이후 페루스는 엘리자벳에 대해 자신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듯 굴었다.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쌍둥이가 태어난 후 제 세상인 양 나서는 페루스를 보며 에셀은 조금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생각 외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르온 공작의 세력이 무인보다는 문인들을 선호하는지라…… 불만이 쌓인 기사들이 제법 있더군요. 곧 6기사단은 각하를 따를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모자란 나날이 시작됐다. 얼마 안 되는 데다 흩어지기까지한 세력을 다시 규합하고 단단히 뭉치고, 쓸모없는 이들은 쳐 내고. 에셀은 몸이 세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들어온 소식입니다만, 르온 공작이 곧 맥켈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공작님의 경쟁자로는 부족하다 생각한 모양입니다.”

“다음번에 그쪽에서 밀어 줄 예정자는?”

“엘리온 황제 때 같이 토벌에 참여했던 미술라 백작을 기억하십니까? 노장에 영지는 변방에 있지만 수도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높지요. 뭐 가장 중요한 건 르온 공작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미술라가라……. 골치 아프군.”

“어떻게 할까요? 확실히 맥켈보다는 상대하기 힘듭니다. 세력도 든든하고 무엇보다 기사 가문으로 유명한 미술라가다 보니…….”

“이제 막 서임받은 기사들 중심으로 불만 세력을 만드는 게 좋겠군. 나이 많은 이들이나 미술라가와 사이 나쁜 가문의 이들로 뭉치게 하면 좋겠지. 맥켈이 버림받는다는 식의 소문도 좀 퍼트리고. 다만 꼿꼿한 기사가 버림받는다, 그 이상은 안 돼. 동정. 맥켈에게 붙을 감정은 딱 거기까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이가 이렇게 되긴 했지만 맥켈은 한때 각하와…….”

“그때 그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그에게 보일 감정은 사치지.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해.”

브륄은 이럴 때면 꼭 북부에 갇혀 감시를 받고 있을 마들렌이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봐 온 그의 주인은 가끔 생각 외로 매우 냉정해지곤 했다. 소름이 돋을 만큼.

하지만 동시에 브륄은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에셀이 항상 정에 얽매이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면 와해하고 쓰러지는 것은 결국 저와 같이 에셀을 따르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브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으로 맥켈은…….’

맥켈은 남부 세력에게도 버려질 패가 분명했다. 에셀이 북부로 떠나기 무섭게 기사단장으로 임명했으면서도 변변한 작위 하나 주지 않은 데다 미술라 백작을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뻔했다.

그의 끝은 이미 정해졌다. 미술라 백작을 견제할 도구로 쓰일 맥켈은 아주 잠시 자리를 지키다 에셀에게 밀려 물러나게 될 터였다. 그리고 수도도 떠나게 되겠지.

한때 동료였던 맥켈을 생각하면 브륄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먼저 자신들을 배신한 것은 그였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나 황궁 기사단장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제 몫을 챙기지 못한 그 자신도 문제였다.

‘하긴 애초에 제 몫을 챙기는 성격이었다면 르온 공작이 그에게 단장 자리를 주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고향으로 가면 될 테고……. 됐다.’

브륄은 올라오는 동정심을 고개를 흔들며 없애 버렸다. 에셀의 말대로 그를 향한 감정은 사치였다.

* * *

쌍둥이가 태어난 지 열 달이 조금 안 됐다. 제법 사람들을 가리게 된 쌍둥이는 몇 달 전과 다르게 단순히 웃고 울지만은 않았다. 쌍둥이는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며 기어 다니는 것에서 벗어나 걸음도 곧잘 옮겼다.

특히 쌍둥이 중에서도 루이스는 유독 달라진 반응을 보였다. 아이는 태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건만 부모 사이의 기이한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부모 모두와 함께 있는 자리면 아비를 꼭 빼닮은 파란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살피곤 했다. 어느 때나 어눌한 발음으로 단어를 읊는 엘리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페루스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웠다. 그는 매정한 엘리자벳이 루이스에게 악영향을 준다 투덜거리면서도 부모를 살필 줄 아는 똑똑한 아이라 매번 자랑하곤 했다. 덕분에 힘들어진 건 그 자랑을 고스란히 받아 줘야 하는 제임스였다.

어찌 되었건 페루스는 행복했다. 소소하게 뱉는 불만들조차 그가 느끼는 행복의 일부였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행복감에 잔뜩 고양된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비롯해 쌍둥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가지기 위해 제 일정을 모두 중앙궁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중앙궁 내 황제의 침실에 딸린 집무실을 이용하기 시작한 그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 수군거렸지만 페루스의 속내는 정말 깨끗했다.

시간. 가족과 함께할 시간. 집무실에 담긴 목적은 그뿐이었다.

엘리자벳으로서는 자신과 아이들 곁에서 온종일을 머무는 그가 불편했다. 이대로 살아가기로 했으나 페루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녀는 페루스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보는 것도 모두 두려웠다. 내색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손의 떨림조차 자주 통제하지 못했다.

‘……싫어.’

그리고 그런 시간이 늘어 감에 따라 엘리자벳은 페루스를 향한 제 감정이 무엇인지 더욱 확실히 깨우칠 수 있었다.

두려움과 혐오.

한때는 상상조차 못 했던 감정이었다. 엘리자벳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떠올려 보려 했다. 제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았던 사랑이 이토록 한 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녀로서도 놀라웠다. 그러나 노력 끝에 남는 것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뿐이었다.

“요즘은 노란색이 싫어? 얼마 전에 들어온 개나리색 비단으로 드레스를 지었다던데. 한 번도 입을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아직 보지 못했어요.”

“그래? 이상한데. 내가 듣기로는 분명……. 뭐, 그래. 그럼 언제 한번 입고 함께 온실로 가. 우리가 낮잠 잤던 곳에 그때처럼 하얀 데이지가 만개했다 들었어. 노란 드레스를 입고 가면 꼭 그때와 같을 거야.”

“…….”

“아이들도 함께 갈까? 아직 밖을 보기는 이르지만 이제 슬슬 나가 봐야지.”

그렇기에 엘리자벳은 지금처럼 페루스가 과거의 일을 꺼내는 것이 싫었다. 분명 그녀로서는 기만당한 과거일 뿐인데 그는 꼭 그 시절이 진실하였던 양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끔찍하다 느끼면서도 엘리자벳은 감히 페루스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를 좀먹은 체념은 이미 고질적인 병에 가까웠다.

“……바람이 차서 안 돼요. 온실은 따뜻해도 가는 길이 춥잖아요. 아직 어린데…… 감기에 걸릴지 몰라요.”

엘리자벳이 할 수 있는 것은 변명과 그것을 기반으로 둔 간접적인 거절이었다. 하지만 페루스에게 그녀의 주장은 항상 꺾기 쉬운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궁의에게 물어보니까 오히려 실내에만 있으면 더 약해진다더군. 그리고 가는 길쯤이야 내가 꼭 안고 가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보다 네 걱정부터 해. 엘자. 요즘도 식사가 입에 안 맞나? 더 마른 거 같은데…….”

“…….”

결국 엘리자벳은 아무 말 없이 엘리샤를 안아 드는 것으로 거부 의사를 멈췄다. 곧 아이들을 물리고 식사를 하고 나면 페루스는 그녀를 끌고 제 머릿속 생각을 시행하려 들 것이 뻔했다.

“엘리샤와 루이스를 데려가게. 충분히 먹이고. 식사 때라 이 녀석들도 배가 고픈 모양이군.”

페루스의 입에서 데려가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루이스가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울음에 엘리샤를 안고 있던 엘리자벳이 루이스가 앉아 있는 요람을 내려다봤다.

아이는 어미에게 서럽게 손을 뻗으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울음과 아이 특유의 발음에 어찌할 바 모르던 엘리자벳이 엘리샤를 유모에게 넘기고 루이스 살폈다. 갑작스레 어미의 품에서 벗어난 엘리샤 또한 어눌한 발음으로 무어라 했지만 오라비의 울음에 누이의 옹알이는 묻혔다.

“마…… 먀마. 먀……마.”

“괜찮으니 물러나요. 내가 젖을 물려야겠어요.”

엘리자벳은 자신을 부르며 우는 아들을 안아 들곤 손을 내저었다. 루이스를 향해 다가오던 유모가 엘리자벳의 손짓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젖이 갑자기 바뀌어 우는 거래요. 궁의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랬어요. 아이들은 예민해서 그걸 알아챈다고.”

엘리자벳은 얼마 전 궁의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곤 루이스에게 젖을 물리려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도 전 그녀는 페루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엘자. 네가 평민도 아니고 유모가 둘이나 있는데 왜 일일이 아이에게 젖을 물려?”

“갑자기 데려가서 그렇잖아요. 유모를 쓴다 해도 원래라면 천천히 바꿔야 하는데…….”

엘리자벳은 자신을 막은 페루스를 향해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본래 아이들에게 직접 젖을 먹이던 그녀는 얼마 전 그 권한을 빼앗기고 말았다. 건강이 이유였다.

“네가 아이들을 도통 떼어 놓지 못해 말을 안 했지만, 이러는 건 옳지 않아.”

“말을 안 한 대신 그냥 데려갔잖아요. 내게 상의도 없이…….”

“엘자. 어느 귀족도 이렇게 하지 않아. 특히나 넌 몸도 약한데……. 루이스를 이리 줘.”

페루스는 결국 루이스를 빼앗을 듯 팔을 뻗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빠르게 몸을 틀었기에 그의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그러니깐 조금만 더 내가…….”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말을 했다. 아들을 꽉 쥔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건 뭐…… 내가 악당 같군.’

페루스는 눈물이 그렁한 엘리자벳의 눈을 본 순간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뼈마디가 드러난 엘리자벳의 몸을 본 그는 제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안 돼. 엘자. 그리고 솔직히 너처럼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는 산모의 젖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루이스에게도 유모의 젖이 더 좋을 거야.”

“아…….”

매정한 말과 함께 조금은 거친 손길이 루이스를 앗아 갔다. 페루스의 말에 충격을 받은 엘리자벳은 아차 할 틈도 없이 아이를 빼앗기고 말았다.

“데리고 나가.”

도망치듯 나가는 유모들을 보며 엘리자벳이 서러운 낯을 했다. 작지만 무게감 있던 아이가 품에서 사라지자 항상 어려 있던 체념감이 가시고 격한 감정이 치솟았다.

알고 있었다. 페루스를 향한 감정과는 별개로 그가 나쁘지 않은 아비라는 걸. 그의 말과 행동이 옳은 쪽이라는 걸.

하지만 눈가가 시큰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페루스에게 보일 눈물이 아직 남았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고개를 떨궜다.

페루스는 당황했다. 엘리자벳이 눈물을 보일지도 모른다 예상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보이는 표정과 눈물은 자신의 어느 곳을 쿡쿡 찔렀다.

울고 있는 엘리자벳을 보는 것은 수십, 수백 번이었다. 아주 어릴 적 그들의 연이 시작된 순간부터 그녀는 많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특히 그날, 그가 엘리자벳을 모욕하고 짓밟은 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과 있을 때면 매번 눈물을 보였다.

그때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우는 걸 즐겼으며 그녀가 비탄에 잠겨 있을 때 행복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달래는 일 따위 없었다.

물론 제 마음을 자각한 후에는 그도 변했다. 페루스는 더는 엘리자벳이 그를 보며 눈물짓지 않기를 원했다. 예전처럼 자신만을 보며 곱게 웃음 짓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는 내가 어떻게 했지?’

분명 해 본 적 있는 일이었다. 어릴 때 엘리자벳이 울 때면 그는 화를 내다가도 손수 눈물을 닦아 주고 무언가를 먹이고는 했다. 또래 아이답게 달콤한 디저트에 약했던 엘리자벳은 그가 그리하면 곧잘 울음을 멈추고 조그마한 입을 우물거리곤 했다.

다정한 연인인 양 한창 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주변 여자들에게 말을 걸고 다정히 대하는 것으로 일부러 엘리자벳을 자극한 적이 많았다. 주변 환경으로 자존감이 낮았던 엘리자벳은 한 번도 그에게 그런 일로 화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남몰래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훌쩍이는 엘리자벳을 비웃으며 지켜보다 눈가가 짓무를 때쯤에야 이마에 입 맞추며 달래던 일이 선했다. 당시에는 귀찮다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제게 안기던 작은 몸이. 제게만 향하던 울먹이는 눈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쉬웠는데…….’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달래던 과거를 추억하며 많은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에겐 엘리자벳을 울리는 것만큼 달래는 게 쉬웠다. 엘리자벳은 아무리 서럽게 울어도 금세 그를 받아들였다. 안아 주며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그에게 멍청하리만치 솔직히 고백했다.

페루스는 여전히 찌르는 듯 아픈 가슴을 꾹 내리누른 채 엘리자벳에게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안아 줄 참이었다. 그때처럼 이마에 입도 맞추려 했다.

예전에는 몇 번이고 했던 일이니 쉽겠지.

그러나 그의 손이 닿자마자 엘리자벳은 몸을 떨었다. 그의 손길을 쳐 내거나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문뜩 페루스는 이 장면이 제 눈에 더 익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면서 제게 안기던 엘리자벳은 그 시절 과거에나 있을 뿐, 언젠가부터 지금 같은 상황이 그들에게는 더 당연했다.

마주치지 않는 시선이 그것을 증명했다. 엘리자벳은 더는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음을 소리 없이 전하고 있었다.

“……울지 마.”

“…….”

“울지 마. 엘자.”

목소리가 어그러졌다. 페루스는 저도 모르게 엘리자벳과 똑같이 울고 싶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자신마저 울면 아이들이 태어난 후 나아지고 있다 생각했던 엘리자벳과의 관계가 사라질 것 같았다. 조바심을 내 가며 겨우 믿었던 상황이 한순간 허상이라 확신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세게 깜빡이는 것으로 눈물을 억지로 막았다.

“내가…….”

“…….”

“내가 잘못했어. 엘자. 내가…… 내가 모자란 놈이야.”

대신 그는 엘리자벳에게 빠르게 사죄했다. 즉위식 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두려움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래도 즉위식 때는 계산이라도 할 이성이 남아 있었다. 상황을 제게 유리하게 이끌 방안이라도 생각해 냈다.

‘정말 제자리일지도.’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저 두려웠다. 아무것도 계산할 수도, 머리를 굴릴 수도 없었다. 고작 여자의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냐. 그럴 리는……. 좋아지고 있으니깐. 이건 그냥…….’

마음을 바꾼 후 여러 굴곡이 있긴 했으나 상황은 항상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엘자. 너를 용서해. 내가 네게 죄를 묻는 일은 이제 없어.’

제 뜻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엘리자벳은 누구에게나 웃어 주던 백치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임신이라는 경사와 함께.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가지고 놀 거야?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이렇게 네 뜻대로 이렇게!’

‘……보기 싫으니 데려가요.’

쌍둥이를 낳기 전후 몇 번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기는 했으나 결국 아이들을 안아 들며 그것도 해결됐다.

심지어 조금 과장하자면 아이들을 받아들인 후 엘리자벳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를 두려워하는 낌새는 여전했으나 곧잘 그에게 말도 했고 그와 다투기도 했다.

다른 이들 때문에 엘리자벳과 다투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페루스는 그것들이야말로 관계 회복의 증거라 생각했기에 기꺼이 엘리자벳에게 양보했다. 항상 자신이 져 주려 노력했다. 물론 그의 기준에서.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두려운 걸까.

“울지 마. 그렇게 울면 내가……. 내가 다 잘못했으니깐 울지 마.”

그가 엘리자벳에게 이렇듯 맹목적으로 사죄를 한 일은 처음이었다. 페루스는 제 행동을 몇 번이고 후회했지만 엘리자벳에게 미안하다 생각한 적도 죄스럽다 생각한 적도 딱히 없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의 가문은 그의 원수였고 그녀는 가문의 일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저토록 서럽게 우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는 후회와는 묘하게 궤를 달리하는 감정을 느꼈다.

죄책감. 얼마 전부터 슬며시 고개를 든 그 감정은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저 야윈 몸도 큰 소리로 울지 못한 채 내 눈치를 살피는 눈도 다 내가…….’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이 그녀를 다시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페루스는 계속해서 흔들리는 제 믿음이 고통스러웠다. 계속해서 상황을 의심하는 제 촉에 화가 났다.

“엘자…….”

불안감을 없애는 방안은 하나였다. 페루스는 손을 뻗어 엘리자벳을 세게 꼭 안았다. 야윈 어깨와 등을 감싸고 몸 전체를 옭아맸다.

그의 악력에도 잘게 떨리는 몸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듯 품에 있는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페루스는 불안감을 조금은 떨칠 수 있었다.

‘시간이 걸리겠지. 적어도 몇 년은, 아니 그 이상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한 체취가 그를 진정시키고 희망을 불어넣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며 마음을 다잡았다.

“엘자. 내가 미안해…….”

하지만 페루스는 몰랐다. 그가 처음으로 엘리자벳에게 사죄하고 있던 날 그의 희망을 산산조각 낼 일이 터지고 말았다는 걸.

* * *

‘여기까지 왔는데 폐하도 아기님들도 볼 수 없고……. 치.’

앨런은 멍하니 앉아 입을 삐죽였다. 오랜만에 중앙궁으로 왔건만 바라던 이들은 볼 수 없는 탓이었다.

쌍둥이가 태어나고 페루스가 집무실을 옮긴 뒤로 앨런은 엘리자벳을 보기 힘들어졌다. 일차적으로 페루스가 그것을 못마땅해했으며 엘리자벳 또한 혹여나 앨런과 에든가가 페루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일부러라도 멀리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앨런은 숙소마저 중앙궁에 딸린 별궁으로 옮겨야 했다.

물론 새로이 온 리즈가 그녀를 잘 보살펴 줬고 조모도 자주 그녀를 보러 왔다. 하지만 앨런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가. 곧 집으로 갈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견디렴.’

조모는 앨런에게 어색한 사람이었다. 한 살 차이가 큰 나이. 앨런에게 조모는 기억 속에서 바랜 사람이었다. 같이 산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폐하를 보고 싶은데…….”

앨런은 집으로 가기보다는 엘리자벳을 보고 싶었다. 가장 두려웠을 때 자신에게 잘해 줬던 예쁜 사람을 앨런은 어느새 꽤 의지하고 따르고 있었다.

“정말 아기님들 때문일까?”

앨런은 가만히 앉아 엘리자벳이 왜 저를 예전만큼 부르지 않는지 고민했다.

“리즈도 그랬지……. 폐하는 아기님들 때문에 바쁘다고.”

앨런이 내린 결론은 아이다웠다. 아직 어린 그녀가 추론할 수 있는 최선은 쌍둥이였다.

“치……. 아기님들은 매일 울기만 했는데. 난 울지도 않고 얌전하고 책도 잘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내가…… 앨런이 더 착한데.”

앨런은 괜히 쌍둥이보다 저가 더 나은 점을 찾으며 툴툴거렸다. 쌍둥이들이 좋았지만 지금 당장은 미웠다. 어린아이의 질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앨런은 어렸지만 이런 말을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엘리자벳도 리즈도 심지어 몇 번밖에 못 본 조모도 그녀에게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 일렀으며 짧게나마 궁에 있는 동안 자연히 보고 배운 것이 많았다.

괜스레 누가 들었을까 툴툴거림을 멈춘 앨런은 주변을 돌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심한 참에 리즈도 바쁘니 방이라도 돌아볼 참이었다.

“그건 호가니에서 난 진주 귀걸이야. 지역에서 바친 모양이니 저리로 둬.”

“이건? 이건 어디서 온 거지?”

“보자. 형태를 보면 그것도 진상품 같은데…….”

“어휴. 국혼 날이 정해지니 너도나도 정신없이 뇌물 공세네. 이걸 언제 다 정리한대?”

“뇌물이라니. 입조심해. 그러다 높으신 분들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야.”

앨런이 있는 응접실은 선물 꾸러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앨런은 한쪽에서 시녀들과 선물을 분류하는 리즈를 힐끔 보곤 구석으로 갔다.

여러 가지 색상의 상자를 구경하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화려한 비단으로 둘러싸인 것도 있었으며 금을 입힌 종이로 감싼 상자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앨런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알록달록한 리본들이었다. 좋은 재질의 천이나 비단, 실크로 만들어진 리본들은 상자를 한층 더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예쁘다!”

앨런은 저도 모르게 리본들을 만지작거렸다. 이 많은 것 중 하나만 머리 끈으로 쓸 수 있다면.

그러던 중 작은 상자의 리본이 앨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러 색의 천을 꼬아 만든 리본은 무지개색으로 조금 유치했지만 아이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앨런은 리즈를 비롯한 시녀들의 눈치를 힐끗 살피다 리본을 끌렀다. 손 위의 리본이 너무도 마음에 찼다.

‘하나 정도는…….’

한참 리본을 만지작거리던 앨런은 주머니에 리본을 숨길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도둑질이야!’

동화책에서도 도둑들은 항상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다. 괜스레 겁이 난 앨런은 리본으로 다시 상자를 감싸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다시 포장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몇 번 낑낑거리던 앨런은 결국 씩씩거리며 상자를 노려보다 툭 쳤다.

툭―

그리고 가벼운 상자는 쉬이 떨어졌다. 작은 소리였지만 앨런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시녀들은 많은 양의 일에 앨런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상자가 떨어지며 안의 물건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앨런은 빠르게 물건을 집어 들다 눈을 크게 떴다.

“아…….”

떨어진 물건은 공갈꼭지 두 개였다.

앨런은 홀린 듯 공갈꼭지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갈꼭지 자체는 평민 아이들도 하나쯤은 가질 만큼 흔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천이 아닌 말랑하고 투명한 유리실라의 뼈로 만들어진 물건은 좋은 귀족 가문 아이들이나 하나쯤 가질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앨런의 손에 있는 물건은 고리는 황금이요 그 끝에는 자잘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아이들에게 물리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봐도 좋았다.

앨런은 저도 모르게 공갈꼭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예뻐서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갈꼭지는 그녀에게 어미인 제인을 생각나게 했다. 이렇듯 좋은 물건은 아니었지만 제인은 앨런이 울 때면 아주 가끔 공갈꼭지를 물려 주곤 했다. 입 모양이 못생겨진다 하여 금방 빼앗아 가긴 했으나 앨런은 제인이 웃으며 자신에게 공갈꼭지를 물려 주는 것이 좋았다.

‘엄마…….’

사실 앨런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미는 이제 없다는 걸. 엘리자벳은 끝끝내 말해 주지 않았으나 궁에서 나오는 말을 모두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는 앨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동안의 서러움과 그리움이 터져 나왔다.

“앨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리즈가 일어나 앨런에게 다가왔다.

“앨런? 우는 거니?”

“잠깐! 쟤 입에 물고 있는 게 뭐야? 설마 거기서 꺼낸…….”

“세상에. 리즈 빨리 가서 빼. 저기는 귀한 것만 뒀는데 큰일이야.”

앨런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녀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반응을 보건대 호되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걱정스러운 리즈의 얼굴을 보며 앨런은 공갈꼭지를 빼려 했다. 그러나 입으로 손을 가져간 순간 앨런의 세상이 핑 돌았다.

“아…… 아파. 리즈…… 나 아파요.”

작은 아이의 입에서 쿨럭거리며 피가 터져 나왔다. 흥건히 피를 묻힌 채 공갈꼭지가 바닥을 굴렀다.

“꺄아아악!”

“앨런! 앨런!”

“누가 궁의 좀 불러!”

리즈가 쓰러진 앨런의 몸을 받쳐 들고, 샬럿이 빠르게 궁의를 찾았다.

중앙궁에 상주하는 궁의가 금세 달려왔다. 그러나 아프다는 말을 끝으로 식어 버린 아이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 *

앨런의 장례식은 빠르게 진행됐다.

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는 화장됐다. 날씨와 거리로 보건대 온전한 시신을 가지고 고향 남부로 가기에는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조부는 어려운 가문의 상황을 핑계로 그 비용을 댈 생각이 없다 말했다. 대신 막내아들 일가 모두를 다시 가문에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례식에는 몇몇만이 참석했다. 울어 주는 이는 아이의 조모인 에든 후작 부인과 리즈뿐이었다. 그러나 섧게 우는 조모조차도 화장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죽은 손녀 하나에 많은 돈을 쓰기에는 아직 남은 자식과 손자들이 많은 탓이었다.

중앙궁에서 일어난 독살에 페루스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의 분노가 큰 만큼 범인은 쉽게 밝혀졌다.

남부에서 온 것으로 위장된 상자는 조사 결과 서부에서 온 것이었다. 페루스는 즉시 타티카를 반역자라 불렀다. 그는 서부 반타티카 세력을 지지함과 동시에 국혼이 끝나는 대로 반역자를 토벌할 것이라 예고했다.

앨런을 죽인 물건은 누가 봐도 쌍둥이를 위한 것이었다. 보물 공갈꼭지 두 개에는 각각 다른 독이 발려 있었다.

하나는 즉사하는 것이요. 하나는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라. 무색무취의 두 가지 독은 시간의 차가 있을 뿐이지 모두 지독한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앨런이 선택한 것은 즉사하는 것이었다. 비록 몇 안 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잔인한 수법에 죽은 아이를 애도했으며 한편으로는 저보다 귀한 황족을 살린 아이라 칭송했다.

그러나 초라한 장례식만큼 아이를 향한 칭송도 빠르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아이 하나의 죽음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국혼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겨우 진정되기 시작한 정세에 가문이 어떻게 이익을 볼 것인가가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하지만 정작 국혼의 주인공이 될 이들은 아이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엘리자벳은 다시 쌍둥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귀를 틀어막은 채 침대에 웅크린 그녀는 누군가 저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려 하면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페루스는 다시금 불안감이 저를 잠식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꾹 물었다.

“엘자. 샤샤가 울어.”

“…….”

불안감은 인내심을 더욱 빨리 소진할 뿐이었다. 엘리자벳이 침실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이 흐르기도 전에 페루스의 인내는 바닥났다.

“루스도 마찬가지야. 네가 없으니 둘 다 울기만 해. 밥도 거부한 채 잘 자지도 놀지도 않아.”

“…….”

“자, 달래 줘. 아이들이 너를 찾고 있잖아. 보이지 않아?”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엘리자벳에게로 온 그는 어떻게든 엘리자벳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채 등을 돌린 엘리자벳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달이 차 가며 점차 우는 것을 줄여 가던 쌍둥이가 다시 자지러질 듯 울어 재꼈다.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았건만 갑자기 사라진 어미의 품을 아이들이 못 느낄 리 없었다.

페루스는 품에서 서럽게 울며 엘리자벳에게로 팔을 버둥거리는 아이들이 서럽고 불쌍했다. 엘리자벳을 갈구하는 아이들이 꼭 저 같아서 더 감정이 북받쳤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페루스는 고작 시녀 출신의 어미를 둔 아이 하나 때문에 그와 그의 자식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억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억울해할 자격도 없었다. 앨런을 죽음으로 이끈 이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에든 후작 부인을 만났어요. 허락만 한다면 아이를 데리고 빠르게 떠난다 했어요.’

‘에든 후작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데? 그는 네가 아이를 데리고 있어 줬으면 했어.’

‘말도 안 돼!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앨런을 데려가라 해요!’

‘엘자. 넌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잖아. 어차피 내려보내 봤자 부모 잃은 아이가 에든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겠어?’

‘그래도 여기보다는 나아요. 내려보내요.’

‘당장 내일이라도 늙은 에든 후작 부부 내외가 급사하면? 알잖아. 후작은 몸이 좋지 않아. 그리고 후작 부인은……. 글쎄. 아무리 아이를 아낀다지만 가문의 다른 아이들보다 확연히 티 나게 앨런 에든을 총애하는 것 같진 않던데…….’

‘…….’

‘엘자. 그러지 말고 여기 두고 교육받게 해. 촌구석보다 훨씬 환경도 좋고 무엇보다 궁에서 키운 다음 조금 자라면 네 측근 시녀로 삼아. 너도 그 아이를 좋아하잖아? 네 곁에서 앨런 에든은 총애받는 시녀로 자라날 거야. 당연히 결혼도 훨씬 좋은 가문으로 가겠지.’

페루스는 어떻게든 앨런을 궁에 남아 있게 하고 싶었다. 쌍둥이가 생긴 이상 에든가 아이는 가장 큰 패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일어날 일을 대비한 패로는 충분해 보였다. 엘리자벳은 제 시녀였던 여자의 아이를 끔찍하게 아꼈고 아이가 궁에 있는 이상 페루스는 좀 더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움을 자처하면서까지 남겼던 패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젠장…….’

페루스는 우는 쌍둥이를 혼자서 어떻게든 달래 보려다 결국 포기하고 유모에게 맡겨 내보냈다.

“엘자. 나랑 얘기 좀 해.”

“…….”

“언제까지 그럴 거야?”

“…….”

“네 눈에는 우리 아이들이 안 보여? 너를 찾으며 울잖아. 엘리샤는 목이 나갔어. 저 작은 아이가 너를 찾으며 아파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묵묵부답뿐이자 말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끝끝내 그를 외면했다.

“엘자!”

결국 페루스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파묻고 있는 엘리자벳의 팔을 억지로 잡았다. 강한 악력에 약한 여체는 쉽게 들어 올려졌다.

막상 마주하게 된 얼굴을 본 페루스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무 말 없이 있을 거라 생각한 엘리자벳은 무어라 끊임없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죽을죄를 지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은 다 같은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페루스는 그제야 엘리자벳의 눈이 허공 여기저기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자! 정신 차려!”

엘리자벳의 어깨를 쥔 페루스가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웅얼대는 사과의 말 사이에는 간간이 페루스도 아는 이름들이 나왔다. 제인, 엘리엇, 사라, 벨, 앨런 등 모두 죽은 이들의 이름이었다.

페루스는 목구멍이 틀어막혀 말을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벳이 무엇에 이리 힘들어하는지 너무도 선명히 보인 탓이었다. 여자는 망령에, 죄책감에 극도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만.”

“잘못했……. 내가…… 죽을죄를…….”

“그만해.”

“……용서해……. 미안…….”

“그만!”

페루스는 거칠게 엘리자벳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손바닥 밑으로 그녀는 어떻게든 입을 열려고 했다.

“젠장. 엘자. 그건…….”

“읍…… 으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

“그건 내 잘못이라고. 내가 잘못한 거라고.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페루스의 입에서 한때 습관처럼 나오던 것과는 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 줘야 할 엘리자벳의 정신은 이미 저 멀리 가 있는 듯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엘리자벳을 보다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네가 느끼는 그 쓸데없는 죄책감 따위 모조리 삼켜 버릴 거야.

엘리자벳이 원하는 만큼 입술을 열지 않자 페루스는 그녀의 턱을 세게 꾹 쥐었다. 그러고는 벌려진 입술로 제 혀를 집어넣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숨이 막힌 엘리자벳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팔을 뻗어 페루스를 밀치려 했지만 곧바로 그에게 저지당한 채 입맞춤을 받아들여야 했다.

“싫…… 읍. 싫어…… 흐으…….”

발작이 시작되려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헐떡이며 거부하는 엘리자벳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입을 맞췄다.

페루스는 차라리 그를 거부하는 엘리자벳이 나았다. 자신을 보지 않는 엘리자벳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문뜩 페루스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방안을 떠올렸다. 경험상 그는 이미 몇 번이고 이런 일을 이겨 내 왔다. 그리고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아이가 생기면 다시 돌아올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엘리자벳이 처음으로 페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엘리자벳만큼이나 돌아 버린 눈을 한 페루스는 기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잖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굴다가도 아이들을 봐 줬잖아. 나도 봐 주고 나랑 이야기도 했잖아.”

“…….”

“그 얜 다른 이의 아이야. 우리 아이는……. 네 배로 낳은 아이는 아니잖아. 엘자. 그냥 오래 봐서 정을 많이 줘서 그런 거지? 넌 마음이 약하니깐.”

거친 손길이 가슴께를 더듬다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페루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엘리자벳은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우리 아이 하나 더 가져. 어차피 지금 임신해도 국혼 때 티 나지 않을 거야. 옷도 두껍게 입을 거고 넌 사람들 앞에 모습도 그다지 보이지 않을 테니깐 괜찮을……. 아니지. 티가 나면 어때. 우리 아이인걸. 어차피 우리의 혼인이니깐 티가 나도 괜찮아. 다들 보라지.”

버둥거리는 엘리자벳을 꾹 내리누른 페루스는 한 손으로 하의를 풀었다. 그러고는 말려 올라간 드레스 밑으로 손을 넣어 흰 허벅지를 벌렸다.

엘리자벳은 고개를 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천을 찢어발기는 듯 높고 괴로운 소리였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아이 하나……. 아니, 엘리샤와 루이스처럼 쌍둥이도 좋아. 하나보다는 둘이 더 좋지. 안 그래?”

엘리자벳은 저를 내리누르는 페루스의 등 뒤로 여러 인영이 서 있는 걸 봤다. 항상 피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던 그 망령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을 찟으며 웃음 짓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엘리자벳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크고 징그러운 소리에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제 가슴을 틀어쥔 채 아이처럼 빨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언제면 끝낼 수 있어?’

엘리자벳은 탈출구를 찾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갈퀴처럼 휘어진 손이 적은 행동반경이나마 앞으로 뻗쳐 나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끝도 없이 웃어 재끼는 망령이었으며 만져지는 것이라곤 그녀를 찍어 누르는 지옥 불처럼 뜨거운 사내의 피부뿐이었다.

망령과 불.

불과 망령.

희망 잃은 하얀 여체는 아무렇게나 치대는 사내의 허리 짓에 흔들렸다. 그에 맞춰 망령들도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흔들렸다.

‘이 지옥은…… 언제까지야?’

사내의 더운 숨결까지도 지옥 불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 * *

리즈는 앨런과 함께 지내던 별궁의 방에 감금됐다. 앨런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와 더불어 예전에 서부의 끄나풀 행세를 하던 것이 일정 부분 드러나 독살의 공범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눈을 팔아서 앨런이…….’

끝나 버릴 제 인생에 눈물을 떨구던 몇 달 전과 달리 지금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리즈는 오히려 자신의 멍청함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곱씹고 있었다.

울 자격도 없어. 리즈는 제 실수가 앗아 간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벽의 한기가 등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떠나간 어린 생명의 자리를 스산함만이 채우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죽겠지.’

한번 목숨을 건지고 또다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왠지 감회가 달랐다. 리즈는 어쩐지 저번보다 생을 차분히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았다.

“미안해…… 리베.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 같아. 꼭 낫게 해 주겠다 했는데.”

정리한 삶의 유일한 미련은 동생이었다. 아픈 동생이 여전히 걱정되고 안타까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미안해. 정말 다들…….”

얼마쯤 앨런과 동생에게 사죄했을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육체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잠이 들기 직전 끼익하는 소리가 한순간 잠을 달아나게 했다.

‘누구? 혹시 벌써…….’

죄를 지은 궁인들이 새벽에 가장 많이 처형된다는 소리를 기억해 낸 리즈는 겁에 질려 문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검은 옷을 입은 집행관들이 아닌 뜻밖의 인물이었다.

“폐하?!”

놀랍게도 리즈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엘리자벳이었다. 구름이 가린 달빛에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달보다 밝게 빛나는 은발이 그를 증명했다.

“여, 여긴 어떻게……. 아니, 잠깐. 폐하 그 상처는…….”

당황한 리즈는 어떻게 오셨나 물으려다 엘리자벳의 몰골을 보고 말을 흐렸다. 축 젖은 침의 하나를 걸친 엘리자벳의 몸 곳곳에는 울긋불긋한 피멍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해라도 당하신 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리즈는 엘리자벳을 걱정했다. 그러나 곧 가까이서 본 피멍이 가슴과 목 주위에 집중되어 있는 데다 특수한 모양새를 띠고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리즈……. 네 이름 맞지?”

갈라진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리즈는 맞는다고 대답하려다 엘리자벳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고개만 끄덕였다.

“……앨런은 어떻게 갔니?”

리즈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엘리자벳이 물어 왔다.

앨런의 최후를 묻는 목소리에 리즈는 어쩐지 왈칵 눈물이 났다. 듣기만 해도 알 것 같았다. 황제는 리즈만큼 아이의 죽음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앨, 앨런은……. 흑…… 흐윽, 폐하…….”

“많이 괴로워했어? 난…… 그 아이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어. 하지만 독이라고 했으니깐…… 많이 괴로워했겠지? 작은 몸이니깐 더 아팠을 거야.”

물음은 아이의 고통에 집착하는 모양새였다. 리즈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피를 왈칵 쏟으며 아프다 말했던 아이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 내곤 고개를 떨궜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 아이의 어미도…… 제인도 괴롭게 죽었어. 나 때문에 피를 쏟고…… 그렇게 갔어. 가족도 있었는데. 그 가족도 전부 나 때문에 죽었어.”

“앨런이 죽은 건 폐하 때문이 아니에요! 독살을 지시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그 사람이 잘못한 거지 폐하께서는 잘못이 없어요!”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을 듣기 힘들어진 리즈가 큰 소리로 반박했다.

‘언니…… 미안해. 나 때문에 언니도 그렇고, 다들…….’

리즈는 엘리자벳이 가여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황제는 저런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꼭 제 동생처럼.

그러나 리즈의 반박은 엘리자벳에게 그다지 소용없었다. 엘리자벳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낯을 했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 하지만 제인이 나를 너무 노려봐. 너무 미워해. 어떻게 빌어도 소용이 없어. 귓가에서 계속 울부짖어.”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가 불안한 듯 사방으로 움직였다. 리즈는 불안해하는 엘리자벳이 꼭 귀신에 홀린 이 같다 생각했다.

“내가 좀 더 앨런을 일찍 내려보냈다면……. 좀 더 강하게 말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앨런은 살아 있었겠지. 항상 그런 식이야. 난…….”

끝없이 저를 채찍질하는 말에 리즈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죄인이 따로 있다고 큰 소리로 말했지만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저도 끝없이 빠져 있었으니.

“벌을 받아야 하는 걸 알아. 빌어야 하는 것도 알아. 그런데…….”

“…….”

“너무 괴로워.”

엘리자벳은 괴롭다 말하면서 제 목을 세게 긁었다. 순식간에 목에 빨간 선이 죽죽 그어졌다. 놀란 리즈는 벌떡 일어서 저도 모르게 엘리자벳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제인과 참 닮은 아이야. 제인도 이렇게 날……’

리즈의 모습에 엘리자벳은 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없이 리즈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리즈는 엘리자벳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알아챘다.

“폐하. 혹시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세요?”

리즈가 눈치를 살피며 먼저 묻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엘리자벳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니?”

여전히 주저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리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었다. 어차피 한 번은 눈앞의 황제에게 목숨을 빚지지 않았나.

“북부 사람들은 은애를 잊지 않아요. 그러니 말씀하세요. 폐하.”

“고마워. 그럼 지금 나랑 이곳을 같이 나가면…….”

“예에? 하지만 어떻게 그런…….”

그러나 막상 엘리자벳의 부탁을 듣자 리즈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벳은 주저할 만한, 아니 감히 상상도 못 할 부탁을 말했다.

“힘든 거 알아. 그래도 부탁할게.”

“…….”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그러니깐 제발 부탁해. 그리고 내가 부탁한 일이라 하면 에셀은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여기 이걸 그에게 보여 줘. 그는 내 필체를 아니깐 널 의심하지 않을 거야.”

리즈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황제의 신분을 가졌으면서 애처롭게 부탁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마지막 희망처럼 바라보는 눈이 도저히 그녀에게 거절할 용기를 주지 못했다.

거절해야 하는데……. 머릿속은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에 리즈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날이 밝아 왔다. 에셀은 해가 희뿌옇게 뜨는 것을 바라보다 중앙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맥켈은 오늘부로 단장 자리에서 해임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페루스가 추천한 미술라 백작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게 됐다.

남부에서 올라온 기사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기존의 기사들은 에셀의 생각보다 훨씬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에셀은 그런 이들의 지지를 제게 모으는 데 성공했다.

무언가를 성취한 기분이었다. 공작이라는 자리와 다시 찾은 기사단장 자리는 엘리자벳을 지킬 좋은 방패가 돼 줄 터였다.

‘이것으로 시작이야. 가까이서 엘자를 지키고 정치적으로 그녀를 보필한다면 분명…….’

에셀은 오늘부터 당장 중앙궁 경비를 제 휘하로 가져올 참이었다. 페루스가 막아서려 하겠지만 명분은 그에게 있었다.

‘가 봐야지. 혹시 모를 것에도 대비해야 하고…….’

한참 중앙궁을 응시하던 에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을 앞둔 탓인지 마음이 들뜨면서도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에셀은 괜스레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연무장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웬 여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작님.”

한 번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를 지지하는 북부 원로 중 하나가 절대 배신은 하지 않을 거라며 그에게 간자로 추천한 여인이었다.

“저 아시죠? 왜 공작님의 명을 잘 따르면 제 동생의 약값을 대 주신다 하셨잖아요. 동생이 잘 지내고 있다 편지를 보내왔어요. 감사합니다.”

에셀은 목숨을 걸고 첩자질을 시키는 것이 애초에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리자벳의 곁에 눈을 둬야 할 것 같아 여자의 존재를 묵인했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엘리자벳의 근황을 적은 편지를 간간이 받았다. 그러나 단연코 말하건대 그는 여자를 어떤 것으로 협박한 기억은 없었다.

‘브륄…… 아니면 에드먼드겠지.’

여자의 눈을 보건대 거짓이 없었다. 에셀은 자신 밑의 누가 여자를 저런 것으로 협박했을까 눈을 찌푸리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따져 묻기엔 여자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에셀이 먼저 물음을 던져 주자 여자는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에셀에게 빠르게 편지를 내밀었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어요. 그리고 우선 빨리 황자님과 황녀님을 빼내야 해요.”

“뭐?”

여자의 말에 에셀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황자와 황녀라니. 궁에서 그리 불릴 아이들은 단둘이었다.

“미쳤나? 너 누구의…….”

“저를 믿지 못하시니 우선 편지부터 읽으세요. 폐하께서 그걸 보면 공작님께서 저를 믿을 거라 하셨어요.”

에셀은 여자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른 아침부터 그를 찾아온 여자가 의심스러웠다.

‘혹시 남부 쪽에서 내게 누명이라도 씌우려…….’

독살 사건으로 서부의 타티카는 완전히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에셀은 페루스가 타티카처럼 자신 또한 반역자로 만들려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여자의 눈은 너무도 진실되어 보였고 무엇보다 편지지 위 필체는 엘리자벳의 것이 분명했다.

「내 친우 에셀에게…….」

가지런하고 부드러운 필체는 에셀에게 엘리자벳의 목소리를 불러일으켰다. 에셀은 눈에 힘을 주곤 편지를 쏘아봤다.

‘……일단 보고 판단해도 되겠지.’

결국 에셀은 의심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편지를 뜯었다.

* * *

엘리자벳은 곁에 없었다. 오랜만에 푹 잠든 페루스는 차가운 곁을 느끼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싫…… 읍, 싫어……. 흐으…….’

분명 싫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행동을 후회했음에도 그는 같은 행동을 또다시 반복하고 말았다.

‘미친놈…….’

이성이 돌아온 머리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아이가 하나 더 생긴다고 엘리자벳이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그녀의 깊은 죄책감과 절망감은 새로운 아이 하나로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페루스가 매달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도통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다시 어그러져 버린 엘리자벳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페루스는 괜스레 빈 옆자리를 노려봤다.

답답한 마음과 별개로 엘리자벳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불안해 죽을 것 같았다. 페루스는 침의를 대충 걸치고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

그러나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그의 시야에 조금 열린 문이 들어왔다.

“엘자?”

황제의 침실과 바로 연결된 곁방은 대대로 황제를 밀착 보필하는 수석 궁인들에게 내려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황제들은 바로 붙어 있는 곁방을 아끼는 정부에게 주거나 조촐히 쉬는 공간으로 꾸미곤 했다.

엘리자벳의 경우 특이하게도 침실에 딸린 곁방을 아이들의 방으로 쓰기를 원했다. 그러나 페루스가 생각하기에 곁방은 유모가 여럿 딸린 쌍둥이의 방으로는 너무 작았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리하여 곁방은 아이들이 저녁을 먹은 후 잠을 자는 용도로 쓰였다. 유모 하나쯤은 충분히 머물 수 있었으므로 페루스도 결국은 엘리자벳의 말에 따랐다.

“……거기 있었어?”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엘리자벳이 창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유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요람 안에서 어미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벌렸다.

“유모는 어디 갔지?”

페루스의 입에서 말이 차갑게 나왔다. 머리로는 엘리자벳을 이해했지만 막상 외면받는 아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보냈어요.”

“왜?”

“당신과 말하는 데 방해되니까요.”

타오르던 분노가 엘리자벳의 차분한 어투에 단박에 식었다. 페루스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엘리자벳에게 한 번 놀랐고 차분히 답을 하는 그녀에게 또 한 번 놀랐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거야?”

페루스의 어투가 저절로 누그러졌다. 가만 보니 방 안에서는 젖내도 조금 풍겼다. 그새 아이들에게 젖을 먹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채지도 않고……. 양껏 먹은 모양이지.’

미미하지만 달큰한 내음에 페루스는 심장 한구석에서 돌덩이 하나가 사라진 듯 포근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살폈다.

“진정이라……. 네. 어제 많은 생각을 했으니까요.”

엘리자벳은 그의 질문에 쉬이 수긍했다. 그러나 긍정의 표현에도 페루스는 어쩐지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이들을 향했던 시선이 금세 엘리자벳을 향했다.

“어제는 미안해.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사과는 됐어요.”

페루스는 제 불안감을 누르며 엘리자벳의 용서를 빌었다. 언젠가부터 하게 된 사과는 이제 쉽게 나왔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사과를 단칼에 자르며 뒤를 돌아 창을 활짝 열고는 창틀에 앉았다. 가볍게 올라가는 몸과 하늘거리는 침의 때문에 그녀는 꼭 찰나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새벽의 여신 같았다.

“…….”

“…….”

엘리자벳 뒤로 서서히 뜨고 있던 해가 더욱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부모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루이스는 요람에 주저앉아 차분히 상황을 관찰했다. 그러나 엘리샤는 여전히 옹알옹알 보채며 엘리자벳에게 고사리 같은 손을 뻗었다.

“……엘자. 샤샤 좀 안아 줘.”

보다 못한 페루스가 엘리자벳에게 부탁 조로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다시 돌아 페루스를 바라보기만 할 뿐 엘리샤 쪽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결국 항상 같은 자리예요. 당신과 같이하면 끝없이 이런 삶만 이어질 뿐이야.”

한참 찬찬히 페루스를 살피던 엘리자벳이 문뜩 말했다. 격한 감정이 드러난 어투는 아니었지만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

“그 말은 나랑 있는 게 끔찍하다는 거로 들리는데…….”

“맞아요. 난 당신과 함께 있는 게 끔찍이 싫어요. 페루스.”

어느 정도 예상한 답이었지만 상처 입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페루스는 입술을 꾹 내리 물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좋아질 거야. 내가 노력할게. 그러니깐.”

“페루스. 나는 너무 지쳐요. 항상 그런 기분을 느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과 있으면서 너무 지쳤어. 우리는 좋아질 수 없어요.”

엘리자벳은 또 한 번 페루스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강하게 제 혐오를 표현했다.

“……아이들을 생각해. 엘자. 그래. 당장은 내가 밉겠지.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넌 나를 계속 미워할 수 없어. 그래선 안 돼.”

“……미워할 수 없어?”

“…….”

“맞아요. 난 당신을 미워할 수 없어요. 미움이라는 단어로는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없거든요.”

대화를 나눌수록 페루스는 심장이 졸아들었다. 엘리자벳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깨우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스스로를 방어하려 오래도록 쌓은 거짓 희망은 엘리자벳의 말 한마디에 쉽게 바스러졌다.

“엘자. 우선 아이들도 있는데 이러지 말고……. 봐. 루이스가 네 눈치만 살피잖아. 가엽지도 않아?”

페루스는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인 희망을 한 톨이라도 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가 끝끝내 내세운 방패막에도 엘리자벳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이들을 내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

“물론 루이스에게는 미안해요. 엘리샤도 가여워요. 하지만 동시에 난 아이들조차 증오스러워요. 그 아이들은 내 핏줄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아이기도 하잖아. 난 그 사실에도 지쳐요. 아이들이 당신과 나를 연결하는 끈 같아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견디기 힘들어.”

“…….”

“지금도 봐. 어떻게든 아이들을 가지고 날 옭아매잖아요.”

페루스의 마지막 보루가 와장창 무너졌다. 엘리자벳의 말은 모조리 사실이었건만 페루스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해.”

견디기 힘든 듯 억눌린 말이 나왔다. 꾹꾹 눌린 어투에는 억울함, 원망, 분노와 같은 감정이 그득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괴로움에 부들부들 떠는 페루스를 빤히 보다 다른 말을 꺼냈다.

“……만약 내가 없어지면 어떨 거 같아요?”

질문을 받는 순간 페루스는 심장이 멎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깨우쳤다. 상상만으로도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살 수 없어.”

무력해진 페루스는 솔직히 말했다. 그랬다. 그는 엘리자벳이 없으면 살 수 없었다. 그토록 부정하며 오랜 시간 스스로를 속여 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살 수 없다고요?”

어떤 의미론 대단한 말이었지만 엘리자벳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녀는 우습다는 듯 픽 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래.”

“…….”

“정확히 봤어. 엘자. 난 네가 없이는 살 수가 없어.”

단호히 돌아간 고개가 외면 같아 페루스는 저도 모르게 엘리자벳에게 갈구하듯 말을 이었다.

“…….”

“사랑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 엘자. 그래서 난 너 없이는 안 돼.”

그리고 마침내. 그는 언젠가 엘리자벳이 끝없이 외쳤던 말을 지껄였다. 그러나 옆을 향한 시선은 절절한 사랑 고백에도 돌아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마나 다행이네요. 헛된 일이 아닐 테니깐.”

무언가 고민하듯 내리깔린 눈꺼풀은 한참 만에야 올라왔다. 초조함에 휩싸여 있던 페루스는 내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엘리자벳이 저를 보는 것에 감읍한 듯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아. 엘자. 난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할 거야.

“물론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아는 그 말은 페루스 당신이 할 수 없는 말이거든요.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요.”

“…….”

“그래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 마지막으로 복수하는 기분이에요. 한편으론 시원하기도 하고, 또…….”

불길한 이야기가 반복되자 페루스는 미칠 것 같았다. 왜 저런 말을 하는가. 넌 어디도 가지 않을 텐데.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하며 엘리자벳을 봤다. 문뜩 활짝 열린 창과 창틀에 앉은 엘리자벳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진심이든 거짓이든 내게 고백했는데 이런 말 하기는…….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이니깐 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해. 뭐든 말해. 엘자.”

긴 대화 중 처음으로 엘리자벳이 부탁을 해 왔다. 페루스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했던 말이에요. 다시 듣느라 지겨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본 당신은 멍청한 내 말을 답답해했으니깐.”

“그건! 알잖아. 그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엘자. 정말 멍청했던 건 나야.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듣는 일은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엘리자벳의 입에서 나오자 페루스는 가슴 여러 곳에 구명이 생기는 듯했다.

“그럼 허락했으니 말할게요. 페루스. 난 후회해요. 한때나마 당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걸 너무나 후회해요. 내 모든 감정을 당신에게 부은 걸 후회하고 또 후회해요. 당신 말마따나 멍청하게 당신을 사랑한 나 자신을 후회해.”

엘리자벳은 숨조차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했다. 페루스는 그녀가 사랑과 후회라는 단어를 반복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후회해도 좋아. 다시 후회하지 않게끔 만들면 되니깐. 내가 너한테 잘해서 네 마음을 돌리면 되니깐.”

“끝까지 이기적이네요. 페루스. 하지만 난 이제 믿지 않아요. 내가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당신을 믿으려 할 때면 항상 내 주변 이들은 죽어 갔어요.”

“…….”

“하긴, 항상 그래 왔으니 조금의 교훈도 얻지 못한 내 잘못이지. 당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같았는데.”

페루스는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엘리자벳의 말은 일정 부분 맞았다. 자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한순간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사실을 말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폭력을 엘리자벳에게 행했는지, 얼마나 그녀를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하였는지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니. 그는 감히 그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그런 당신이라도 분명 좋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의 나는…… 아마 당신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도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실제로도 그랬지. 엘리자벳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페루스를 향한 마음을 간직했는지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에게 가족을 잃었을 때도. 그의 폭력에 무참히 쓰러졌을 때도. 한편 구석에 그를 향한 마음은 항상 있었다. 견디기 힘들어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면서 참았던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신이 왜 그토록 좋았을까?”

그러나 그 마음은 언젠가 모조리 사라졌다. 정확히는 깎이고 바스러지며 서서히 사라져 갔고 종국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인데…….”

스스로를 자조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기력을 모두 소진한 듯 엘리자벳이 비틀거리자 페루스는 다가서려 했다. 엘리자벳 뒤 텅 빈 공간이 어쩐지 너무도 환해 보였다. 그녀를 삼킬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좀 진부하지만…… 다음번 생이 있다면 우리 절대 만나지 말아요. 페루스 당신을 또 만나면 너무 괴롭고…… 힘들 거 같아.”

꼭 끝내는 것 같은 말에 페루스는 그녀에게 차마 다가가지는 못한 채 팔을 뻗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엘리자벳을 꼭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엘리자벳은 등 뒤에 감춰 뒀던 무언가를 꺼냈다. 갑자기 나타난 물건에 페루스는 손을 멈추고 그것이 무엇인가 살폈다. 그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루한 님께서 거짓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찾으시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그토록 찾았지만 찾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리저리 사람을 풀었지만 소득이 없었기에 포기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저기에 있는가.

「엘리자벳 오로르는 페루스 르온을 영원히 사랑한다.」

바람에 팔랑이는 종이 위로 이미 가지런한 황금빛 글씨가 쓰여 있었다. 영원히 사랑을 맹세하는 글귀가 달콤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기뻐할 수 없었다. 가장 듣고 싶었던, 가장 그리웠던 말이었건만 장담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서명란의 끝만이 빈 것을 확인한 페루스의 얼굴에 핏기가 빠졌다.

“안 돼! 엘자.”

엘리자벳이 말하던 것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페루스는 다시 팔을 뻗으며 힘껏 몸을 던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손은 이미 마지막 글자를 내리 적은 후였으며 그녀의 가벼운 몸은 뒤로 넘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펜이 떨어짐과 동시에 하얀 손에 잡힌 종이 위 유려한 글씨가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엘자!”

창밖에서도 웬 고함이 들렸다. 그러나 페루스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세계에는 엘리자벳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몸을 던진 페루스의 손아귀에 엘리자벳이 닿았다. 그러나 그가 안도하며 미소 짓는 순간 환한 빛이 쏟아졌다. 신의 기적이자 맹약을 어긴 자에게 신벌이 행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슨……!’

푸른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디가 긴 손안에서 빛무리가 모래처럼 하나하나씩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형체를 가지고 있던 여인은…….

사라져 버렸다.

찰나의 시간, 신의 기적이 다녀간 곳에 남은 거라곤 울며 어미를 찾는 아이들과 사내뿐이었다. 세 사람이 찾는 여인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모습을 감춰 버렸다.

“으…… 으으.”

창틀에 가까스로 몸을 걸친 채 제 손만을 노려보던 페루스는 불현듯 아픈 왼 가슴을 움켜쥐었다.

당연하게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 *

“각하! 루이스 님과 엘리샤 님이 납치되셨습니다! 어서 찾아야 합니다!”

쌍둥이들이 납치됐다. 범인은 라세르 공작이었다. 곧은 기사의 표본이었던 그가 유괴를 왜 저질렀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셋…… 아니 이제는 둘뿐이었다.

당연하게 궁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쌍둥이들의 어미인 황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아비인 르온 공작은 미동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르온 공작의 측근이 부모를 대신해 사람을 풀었다. 도망가는 북부의 기사들과 쫓는 남부의 기사들 사이에 추격전이 일었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다. 그리고 라세르 공작은 가장 아끼는 측근 중 하나를 잃어야 했다.

전투의 결과로 쌍둥이 중 여자아이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남자아이는 눈발 휘날리는 북부 땅으로 사라져 버렸다.

르온 공작의 측근은 남자아이를 찾아와야 한다고 말하며 북부를 공격하겠다 말했다. 허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들의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내버려 두라 말했다. 그리고 저에게 아이들 이야기는 하지 말라 못 박았다.

그렇게 쌍둥이는 헤어졌다. 그들이 다시 만난 건 장작 15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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