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관의 무게
“성문을 여시오!”
브륄은 다시 고함쳤다. 벌써 몇 시간째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높은 성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힐끗 그를 훔쳐보는 성문 위 그림자에 브륄은 인상을 구기다 에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약한 것들. 아무래도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싶습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던 에셀은 브륄의 말에 고삐를 조금 팽팽히 잡았다. 말이 푸루루 숨을 뱉음과 동시에 에셀의 고개도 위를 향했다.
“이곳 영주가 누구지?”
“랄트 스로우입니다. 스로우가는 대대로 이곳을 맡아 온지라 인망이 나쁘지 않습니다. 북부와도 가까운 곳이라 지금껏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금 행태를 본다면 이미 적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에셀은 성문 위 분주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들 중 일부는 빛에 반사되는 쇠붙이를 지니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부와 수도를 이어 주는 곳으로 이곳 성문을 지나면 북부를 지나왔다 말할 수 있었다.
“북부를 벗어나자마자 이 꼴이군.”
“어찌할까요? 강제로 열려면 열 수 있습니다. 다만…….”
에셀은 브륄이 어째서 말을 흐리는지 알았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북부를 벗어나자마자 길이 막혔다. 이는 곧 이 이상 오지 말라는 소리였다.
“멈출 이유가 없다. 한 시간만 더 기다리고 그때도 문을 열지 않는다면 진격한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책잡히시면…….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브륄이 에셀 뒤로 쭉 늘어선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그는 혹여나 오늘 일로 에셀이 반역자로 몰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스로우가에서 대꾸도 없이 저리 나온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일 텐데.
“지금 가나 기다렸다 가나 저들은 똑같은 논리를 세울 테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 우리는 한 시간만 더 기다린다.”
그러나 에셀은 완고했다. 그제야 브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이냐 지금이냐. 맞는 말이었다. 기다려 봤자 상대는 똑같이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영주는 들으라! 마지막 경고요. 한 시간 내로 길을 비키지 않으면 무력으로 뚫고 가겠소!”
브륄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성문 위 누군가 빠르게 움직였다. 에셀은 영주에게로 향할 것이 분명한 움직임을 보다 눈을 감았다.
말의 체온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고향과는 확연히 다른 온기가 공기 중에 느껴졌다. 에셀은 가만히 제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다 브륄에게만 들릴 정도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엘자.”
브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에셀은 말을 달리지 않을 때면 늘 황녀의 이름을 중얼거리곤 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지만 에셀에게 계속 붙어 있었던 브륄은 계속 들리는 황녀의 애칭이 슬슬 물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저 마음을 지금껏 어떻게 숨겼나. 고개가 절로 좌우로 움직였다.
한동안 사방은 고요했다. 가끔 말들이 투레질하는 땅을 긁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러나 팽팽한 긴장감은 계속되었기에 아무도 이 고요가 지루하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에셀이 눈을 떴다. 잠이라도 든 듯 미동 없던 그가 움직이자 브륄은 놀라 움찔거렸다.
“……어떻게 아셨답니까. 딱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몇 번 부르다 보면…….”
“예?”
“아무것도 아니다. 대열을 갖춰라! 진격한다!”
뻥진 븨륄을 둔 채 에셀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곧 기사들이 대열을 맞추고 말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땅이 울렸다.
두두두두두―
울리는 진동에 성문 위에 있던 이들이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무어라 소리쳤지만 모두 땅 울리는 소리에 막혔다.
에셀이 검을 공중에 휘둘렀다. 그러자 떨어져 있던 성문이 무언가에 맞은 듯 크게 흔들렸다.
‘생각 외로…….’
성문은 무사했다. 에셀은 인상을 찌푸리다 다시 검을 쳐들었다.
“오늘만 살 작정이십니까!”
그러나 그 손은 곧 브륄에게 막혔다. 언제 따라온 것인지 바짝 붙은 그는 에셀을 막고선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보단 약했지만 충분히 강한 충격이 성문을 강타했다.
툴란에서 기사로 인정받으려면 검기를 쓸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검기는 기사로서 인정한다는 의미 그 이상을 지니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사는 아주 미미한, 있으나 마나 한 검기를 뿜었으며 그마저도 한 번 쓰고 나면 탈진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검기는 상징적인 역할만 할 뿐 효용성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기사들에게 검기를 좀 더 익히도록 종용했다. 야만인들과의 싸움에서 일당백의 역할을 할 때나 무너진 광산을 파괴하는 데는 검기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회복도 다 하시질 못하셨으면서, 원.”
하지만 아무리 익혀도 검기는 몸에 무리가 컸다. 에셀과 같이 검기를 제법 단련한 전성기의 젊은 기사도 하루에 두세 번이 한계였다.
브륄이 검기를 날린 후 몇몇 기사들도 검을 휘둘렀다. 몇 번 울리던 성문이 와자작 거친 소리를 내며 쪼개지더니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뚫린 문과 그 뒤 당황한 이들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채 에셀의 흑마는 단박에 성안으로 들어섰다.
* * *
루안나는 끔찍한 장면에 눈을 감았다. 눈앞의 벽, 바닥 할 것 없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비릿한 냄새와 질척거리는 무언가가 징그러워 연신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는 혹여나 제 존재가 눈에 띌까 무서워 손으로 입을 꾸욱 틀어막고 있었다.
“씨발…… 그 개새끼가……. 빌어먹을 놈이…….”
사태의 원흉인 타티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욕설과 함께 무어라 웅얼거리고 있었다. 장식으로 걸려 있던 세검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다 못해 흐르고 있었다. 루안나는 혹여나 세검이 자신을 향할까 봐 눈을 내리깔다가도 눈동자를 굴려 세검을 봤다.
“씨발! 죽여 버릴 거야!”
잠시 웅얼거리기만 하던 타티카가 다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제 분을 못 이겨 날뛰는 꼴이 흡사 미친놈 같았다. 퍽퍽, 하고 무언가 타티카의 발에 계속 차였다. 루안나는 지하실 생활을 하며 가끔 본 이가 질척한 피를 두른 채 고깃덩어리에 가까운 형태로 차이는 것을 목격하곤 눈을 감아 버렸다.
“개새끼! 빌어먹을 놈! 오냐오냐해 줬더니 제까짓 게 뭐라고!”
소리가 커질수록 행동도 잔인해져 갔다. 타티카는 제 보물들을, 재산의 원천을 태워 버린 페루스를 생각하며 발길질과 더불어 손에 잡힌 검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검을 배우지 못한 자의 투박한 손길이 시체를 아무렇게나 할퀴고 지나갔다.
서부 영지 땅에 은밀히 심은 것들이 재가 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타티카의 힘은 대부분 그곳에서 나왔다. 툴란 내는 물론이요 국외까지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약들. 동일한 무게의 금보다 값어치 있는 그것들은 타티카가 가진 부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라지다니. 게다가 땅에 심어 놓은 것들만 잿더미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비축분과 대부분의 종자들. 창고 안에 있던 그것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곳곳에 비축분이 조금씩은 있지만 당장 팔려 나가는 양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더러운 사업이나 신뢰가 중요한 거래. 당분간 전처럼 돈을 만지기는 힘드리라.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영, 영지의 재배지가…….’
타티카는 소식을 듣고 범인이 누군지 대번에 눈치챘다. 증좌가 없다 하지만 감히 그에게 이런 짓을 벌일 자는, 그리고 벌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이었다.
“감히 내 걸 망쳐! 지가 황제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거 같은데…… 씨발.”
시체가 페루스라 생각하니 손발이 마구잡이로 나갔다. 이리저리 튀는 살점과 핏방울을 피하지도 않은 채 타티카는 푹푹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정신 나간 짓에도 끝은 있었다. 타티카는 발밑 시체를 갈가리 찢은 후 헐떡이는 숨과 함께 가까스로 진정하기 시작했다. 흰자가 불그스름한 것이 완전히 진정하려면 아직 먼 듯 보였지만 더 날뛰기엔 그의 체력이 지나치게 소모됐다.
챙강―
“힉!”
아무렇게나 던진 검이 원을 그리며 날아가다 루안나의 발치에 닿았다. 지금껏 숨소리도 조심했던 루안나는 피투성이 검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타티카는 저와 시체 말고 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보랏빛 눈이 짜증스럽게 루안나를 스쳤다.
“주, 주인님…….”
“씨발. 이건 또 뭐야. 너……. 아, 이름이 루루였나?”
“잘, 잘못……. 전…… 여기 있으려 한 게…… 원래 여기 있던…….”
절벅거리며 핏자국이 남는 걸음을 본 루안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바로 뒤는 벽.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빌기 시작했다.
‘죽기 싫어.’
“시끄러우니깐 입 닫아.”
“아…… 아으…….”
“찢어 버리기 전에 조용해. 아님 정말 찢어 줘?”
험한 말과 다르게 음습한 장난기가 묻어난 말투였다. 짐짓 다정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루안나는 아까와 다른 분위기에 더욱 바짝 얼었다. 화를 내는 것보다 안 좋았다.
‘나도…… 나도 죽을 거야.’
그녀의 주인은 이럴 때면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실험하며 가지고 놀다 죽이곤 했다. 사실 죽였다는 말도 틀린 것이 대부분. 이들은 타티카가 하는 놀이 도중에 죽었다. 고통으로.
“넌 멀리서 보면 참 괜찮은데 말이야, 가까이서 보면 참 짜증 나게 생겼어. 저기서 볼 때는 닮았다 생각했는데 다시 보면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잖아.”
루안나는 타티카가 누굴 말하는지 이제는 알았다. 또 그 여자구나. 엘리자벳 황녀.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여자와 그녀는 항상 이렇게 비교당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꼭 선물을 받았다 뺏긴 기분이란 말이지. 귀한 보물이라 한껏 기대했는데 막상 보면 쓸데없는 유리 조각이니. 쯧.”
루안나는 타티카가 이런 소리를 할 때면 엘리자벳 황녀가 증오스러웠다. 귀한 신분에서 한순간에 보통 노예만도 못한 신세가 된 것도 억울한데 비교까지 당하며 남 흉내 내기를 해야 하다니. 옛날 당당했던 시절의 그녀가 영영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뭐. 없는 것보단 나으려나.”
그러나 루안나는 엘리자벳 황녀와 느낌이라도 닮은 것이 제 삶을 이어 주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녀는 곧 재빨리 눈물을 글썽이며 주인이 소위 가장 꼴려 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님…….”
처연하고 가여운 루안나의 눈매를 본 타티카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머리카락이 자라 정수리가 본래 색으로 돌아간 줄도 모르는 주제에 흉내라니.
타티카는 루안나의 행동이 건방지다 느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본디 자신 밑에 바짝 엎드린 인간들을 좋아했다. 특히 엎드린 인간이 한때 귀한 이였다면 더더욱.
타티카가 생각하기에 루안나는 과거에도 썩 귀한 이는 아니었지만 못난 신분도 아니었다. 타티카는 손을 뻗어 꿇어앉은 루안나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어떤 의도를 가졌건 지금 당장 기분을 풀 만한 것을 찾았다 생각하니 화가 아주 조금은 가셨다.
“똑똑하구나. 루루. 어떤 놈들이랑 다르게 이렇게 비위도 맞출 줄 알고. 하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흉내 낼 줄 알아야 할 거야. 이따위 천박한 색은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지.”
루안나의 이마가 꾹꾹 눌러졌다. 그녀는 타티카의 말과 행동에 바짝 긴장했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니. 하지만 다음을 말했으니 당장 죽지는 않으리라. 루안나는 수치심과 함께 안도를 느꼈다.
“오늘은 내가 자비를 베풀지. 엎드려 암캐.”
지독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루안나는 즉각 움직였다. 개처럼 구는 것이야 수도 없이 했다. 덕분에 실수할 일이 적을 테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멍!”
곧 익숙한 소리를 내며 루안나는 허리를 바짝 내리고 엎드렸다. 꼭 개와 같은 자세였다.
* * *
페루스는 옅은 녹안이 저를 스치는 것을 똑똑히 봤다. 아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온몸으로 엘리자벳을 보고 있었기에 그는 단박에 그녀가 깨어났음을, 죽은 듯 숨겼던 정신을 돌이켰음을 알 수 있었다.
“엘자.”
엘리자벳을 살피던 궁의가 페루스의 팔에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궁의 따위 알 바인가. 페루스는 기쁜 낯을 엘리자벳에게 들이밀었다.
“…….”
그러나 엘리자벳은 이미 그를 비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경악이라는 단어로는 표현 못 할 감정을 지닌 채 그녀는 시선을 밑으로 깔고 있었다. 몸이 쉽게 움직였다면 아마 상체를 벌떡 일으켰으리라.
한계까지 내린 시선에는 가슴만 비칠 뿐. 봉긋 솟은 가슴 아래 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 아…… 아…….”
미칠 듯이 두려운 사내도 그녀에겐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깨어난 후 처음 들은 말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아이를 잉태하신 것 같습니다.’
아이. 잉태. 그녀와는 먼 단어였다. 아니 먼 단어여야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한 녹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니……. 아…… 아니야…….”
굳은 듯 꼼짝을 않던 손이 배를 향했다. 움푹 들어간 배는 차가웠다. 이리 평평한데.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그 무슨. 어질어질한 시야에 눈물이 차올랐다.
“엘자. 쉬이……. 넌 흥분하면 안 돼.”
흐트러진 정신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엘리자벳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박혔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 익숙한 목소리를 처음 듣는 듯했다.
알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의 소리.
그 차이에 엘리자벳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응? 떨지 말고. 자, 편하게 누워야지. 이리 몸을 굳히면…….”
배 위에 있던 엘리자벳의 손 위로 다른 이의 손이 겹쳤다. 도닥거리는 행동이 다정했다. 허나 다른 이의 온기가 느껴지는 순간 엘리자벳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우리 아이에게 안 좋아. 그렇지 않아도 몸이 상했는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인가. 엘리자벳은 살랑거리는 금발을 보며 생각을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우리 아이…….’
그러나 머릿속에 차오르는 건 아이라는 단어뿐이었다.
‘우리 아이. 아이. 아이. 우리 아이…….’
머릿속이 아이라는 단어 하나로 너무도 가득 차 엘리자벳은 그 단어를 입 밖에 내려 했다. 그렇게라도 뱉어 내야만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라는 단어 대신 경악에 찬 비명이 입 밖으로 튀었다.
“싫어!”
엘리자벳이 비명을 지르자마자 그녀를 달래던 손길이 뚝 멈췄다.
“싫어! 싫어! 아니야! 나는! 아으…… 아아악!”
“엘자. 진정해야지.”
페루스는 비명을 지르는 엘리자벳과 다르게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허나 바닥에서 비스듬히 그를 올려다본 궁의는 페루스가 말투와 다르게 격한 감정을 보임을 눈치챘다. 그의 얼굴은 기괴했다.
“이러면 우리 아이가 상한다 하질 않아. 응?”
기기한 장면이었다. 헐떡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여인과 그런 여인을 껴안은 채 무어라 속삭이는 사내.
궁의는 해괴한 취향을 가진 화가가 그린 작품을 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페루스가 저를 노려본 탓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다 부르면 들어와.”
혼비백산한 궁의는 재빨리 일어서 문으로 뛰었다.
“싫어!”
궁의가 문 닫는 순간까지도 엘리자벳은 울부짖고 있었다. 연신 외치는 싫다 외치는 말에 페루스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엘리자벳의 거부는 항상 그에게 참을 수 없는 분을 줬다.
전이었다면 손이 나갔을 것이다. 페루스는 파들거리는 제 손을 느끼며 쉬이 휘둘렀던 폭력이 그새 습관이 됐음을 알았다. 미친 짓이었다.
“엘자. 가만있어.”
당최 때릴 때가 어디 있다고 그랬는지.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몸을 더 세게 껴안았다.
그는 엘리자벳이 이리하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을 부르거나 봐 주지 않는 것은 섭섭했지만 어떠랴. 눈을 떴을 때를 보니 그녀는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돌아왔으니 이제는 다른 사내에게 헤실거리지 않을 터였다. 그것만으로 페루스는 만족했다.
“엘자. 아이를 생각해야지. 자, 그만하고…….”
“싫어!”
세게 안은 여체는 말랐다. 페루스는 품에 들어오다 못해 스러져 버릴 것 같은 몸속에 제 씨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너도 분명 좋을 거야. 몇 번이고 생각했잖아. 나와 네 아이는 어떤 모습일지.”
“싫어! 싫다고!”
묘한 감상은 페루스의 눈을 가렸다. 페루스는 제게 안긴 엘리자벳과 자신이 다른 공간과 시간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과거를 더듬어 올라갈 때 엘리자벳은 현실로 건져져 다시 패대기쳐졌다. 고기가 물 밖에 나온 듯 엘리자벳은 숨이 막히는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송골거리며 맺힌 식은땀과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녀가 이 상황을 어찌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 줬다. 그러나 제 감정에 도취한 페루스는 눈을 감고 계속 속살거렸다.
“첫아이는 너를 닮은 아이였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지. 네 얼굴에 내가 조금 묻어나면 어떨까 몇 번이고 생각했어.”
그에게 안긴 이가 그 너머 멀리 열린 창을 보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음을 모른 채.
* * *
“첫아이는 너를 닮은 아이였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지. 네 얼굴에 내가 조금 묻어나면 어떨까 몇 번이고 생각했어.”
창밖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던 엘리자벳은 그 말에 몸을 굳혔다. 격한 감정과 혼란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동시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답도 찾았다.
“아이…….”
울음기가 가신 메마른 목소리에 페루스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기쁨을 조금도 감추지 못했다. 흥분과 도취가 파란 눈을 반짝 빛내고 있었다.
“그래. 우리 아이.”
페루스는 조심스럽게 엘리자벳을 일으켜 앉혔다. 쉽게 당겨진 엘리자벳의 고개는 아래로 푹 내려가 있었다. 덕분에 페루스는 엘리자벳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네게 아이가 생겼어. 엘자. 그러니 울지 마.”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고개를 살포시 들곤 눈가를 쓸었다. 마른 목소리와 다르게 녹색 눈은 여전히 촉촉했다. 페루스는 몇 번 더 엘리자벳의 눈가를 쓸다 몸을 숙였다.
습한 소리가 길게 났다.
더운 입맞춤에도 엘리자벳은 미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페루스가 제게 혀를 얽는 것도 아프도록 입술을 지분대는 것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체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움찔거리는 손가락뿐이었다.
반응 없는 엘리자벳에 페루스는 과감히 손을 올렸다. 여윈 여체를 더듬는 손은 뜨거웠지만 어딘가 초조했다.
“하…… 엘자…….”
“…….”
“우린 행복할 거야.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가 있으면…… 하아.”
“…….”
페루스는 긴 입맞춤과 흥분으로 가쁜 숨을 뱉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답은 없었다.
계속되는 상대의 침묵에 페루스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는 왜인지 모르게 불안했다. 제 생각과 다르게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퍽―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페루스가 다시 말문을 열 때였다. 얇은 팔이 그를 밀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페루스는 얼떨결에 밀렸다.
그러나 충격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페루스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를 밀친 엘리자벳이 창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엘자!”
뛰다 말고 튕기듯 던진 몸이 가까스로 엘리자벳을 움켜쥐었다. 엘리자벳의 손이 창틀에 닿기 직전이었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함께 뒤로 굴렀다.
“놔…… 놔아!”
페루스에게 잡힌 엘리자벳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바둥대는 힘이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저를 잡은 손을 긴 손톱이 아무렇게나 할퀴었다.
죽죽 그어지는 선에도 페루스는 손에 힘을 놓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더욱 힘을 주었다.
“싫다고 하잖아! 아이라니 그런 끔찍한!”
“……너 방금.”
으득, 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페루스가 음산히 읊조렸다. 그는 한 손으로는 계속 엘리자벳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어 일어났다.
“아무나 당장 들어와!”
엘리자벳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 고정시킨 페루스가 고함을 질렀다. 터져 나온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가득했다. 후다닥 소리와 함께 궁의를 비롯한 시중인들이 한 번에 들이쳤다.
“당장 창에 못을 쳐라! 창이란 창은 모조리 막아 버려! 당장!”
이해 못 할 명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반문하지 못했다. 시중인들은 흉흉한 페루스의 얼굴에 답도 못 한 채 고개를 바닥에 닿을 듯 굽히곤 뛰쳐나갔다.
“너…… 너, 엘자 너.”
“놔! 제발 나를 놔…… 아흐!”
페루스는 몸을 비트는 엘리자벳 위에 자리 잡았다. 그러곤 그녀가 꼼짝 못 하도록 어깨를 잡고 다리로 하체를 눌렀다.
“너…… 너어!”
페루스의 손이 위태롭게 떨렸다. 적잖게 충격을 받은 듯 파란 눈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가 있다 했는데도…… 나와 네 아이가 있다는데도…… 홑몸이 아니라는데도…….”
살기 가득한 목소리는 손 못지않게 떨리고 있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런 페루스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질렀다.
“아이라니! 끔직해! 싫어! 차라리 나를 죽이지! 왜 항상! 왜 항상 나를! 내가 뭘 얼마나…….”
“닥치지 못해!”
“……우읍.”
“네가 감히! 우리 아이인데…… 어째서…….”
페루스는 날카로이 저를 파고드는 말들을 더는 듣지 못하고 엘리자벳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혐오감 가득한 녹안은 여전히 페루스를 응시했다.
“그 눈 치워! 뭐가 문제야!”
“……으읍!”
“돌아가자 말하질 않았나! 예전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전처럼…… 다시 같이하자고! 내가 먼저 네게……. 내가 그 꼴을 당하고도 너한테……. 그런데 넌!”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다시금 증오스러워졌다. 미웠다.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목 근처로 갔다. 동시에 학습된 공포가 엘리자벳의 눈에 어렸다.
“나한테…….”
젠장. 그 모습을 본 페루스는 입을 닫고 손을 거뒀다. 그리고 곧 엘리자벳의 숨을 틀어막고 있던 다른 손 또한 떨어졌다.
갑작스레 들이찬 공기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꺾고 콜록거렸다. 페루스는 그 모양새를 보며 있는 힘껏 인내심을 끌어올렸다.
“……얌전히 있어.”
한참 만에 입을 뗀 페루스가 꺼낸 말은 결국 똑같았다. 항상 하던 말. 그가 엘리자벳에게 항상 내리던 명.
엘리자벳은 여전히 숨이 차는지 헐떡이고 있었다. 페루스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몸에 다시금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채 닿기도 전 엘리자벳은 고개를 모로 틀었다. 명백한 거부였다.
결국 페루스는 주먹을 쥔 채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차가워진 머리가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말하고 있었다.
‘……바로 되돌아가긴 힘들겠지.’
페루스는 자신이 자만했다 인정했다. 자신만 마음을 바꾼다 해서 전과 같아질 수는 없었다.
조금 전 엘리자벳의 눈에 선명히 보였던 공포가 떠올랐다. 저걸 지워 내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초조하고 답답했다.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과 제 관계가 이리 틀어진 데에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오로르라 생각했다.
“……차라리.”
갑자기 엘리자벳이 무어라 웅얼거렸다. 페루스의 시선이 자연히 엘리자벳에게로 향했다.
엘리자벳은 똑바로 그를 보고 있었다. 흐릿했지만 확연히 그를 향해 있는 눈이었다.
“……죽여. 나를 죽여 줘요.”
제 목숨을 담았다기에는 지나치게 메마른 목소리였다. 끊어질 듯 가느다란 음성이 곧 사라질 것 같았다.
“이렇게 살기는……. 아이라니, 그건 내게……. 더 이상은 살 수가……. 그러니깐 차라리 이대로 끊어 내. 죽여 줘요. 페루스.”
페루스는 순간 제 심장의 뜀이 멈췄다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만만해져 그렇구나. 다시 다정히 대해 주니깐. 약하게 굴어 주니깐 이러는 거구나. 그래. 넌 항상 멍청했지 엘자. 그러니 이리 가르치지 않으면…….
때릴 곳이 어디 있나 생각하던 것이 무색하게 손이 올라갔다. 그러나 곧 손은 허물어지듯 내려갔다. 페루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등을 돌렸다.
“……전하께서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하시니 손발을 결박해 보호하라.”
갑작스러운 명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시중인들은 화들짝 놀랐다. 음울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물기가 어려 있었다.
“결박은 부드러운 것으로 해 조금의 상처도 생기지 않게 행하고, 궁의와 시녀들은 항상 곁에서 보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간부로 내 명 없이는 누구도 이 방에 들 수 없다. 작은 사고라도 생긴다면 모두 목을 벨 것이다.”
말을 끝낸 페루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죽여 달라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따랐다.
문을 닫고도 들리는 소리에 페루스는 지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 * *
눈앞이 흐린 것이 당장에라도 까무룩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야와는 다르게 정신은 너무도 선명했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졌으면. 엘리자벳은 몸을 둥글게 만 채 깨어 있는 제 정신을 저주했다.
‘왜 죽질 못해서…….’
떠오르는 생각은 그뿐이었다. 엘리자벳은 죽지도 못한 채 이리 연명하고 있는 제 목숨이 끔찍했다. 도피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 했다. 끝내 죽지 않고 눈만 감았더니 이 꼴이었다.
묶여 있는 양 손목이 아려 왔다. 깨어난 직후 한바탕 난리를 치다 틈을 봐 창으로 달려든 것이 화근이었다.
창가에서 그녀를 낚아챈 페루스는 충격이 꽤 큰 듯 보였다. 그러나 그가 충격을 받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당시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달라진 행동이나 말투 따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다른 말에 충격을 받은 후였다.
‘첫아이는 너를 닮은 아이였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지.’
“우욱…… 웩.”
들은 말을 되짚자 다시 토기가 밀려왔다. 엘리자벳 곁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은 몇 번 더 헛구역질을 하다 몸을 돌돌 말았다. 가운데로 모인 두 손이 무릎에 닿았다.
아이라니. 단어를 되새길 때마다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엘리자벳은 지금껏 목숨을 연명하며 공포를 충분히 느꼈다 생각했다. 가족과 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손찌검을 당했을 때, 사내들에게 눌려 강제로 몸을 열어야 했을 때, 그리고 그 순간들을 견딜 때.
매번 반복되는 일이었기에 언젠가부터는 체념하긴 했지만 그 모든 순간이 그녀에게 끊임없는 공포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공포가 남아 있다니. 그녀는 아이에 대해 극심한 공포 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뱉고 말았다.
“아으…… 아니야. 흐윽…… 흑.”
* * *
알렉스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던 신전은 루한의 죽음 이후 점점 그와 멀어졌다. 새로이 내려온 자가 된 레아는 알렉스가 제 오라비를 죽인 후에도 그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레아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녀가 알렉스를 지지한들 그의 처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렉스와 손잡았던 페루스가 알렉스를 위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 짧은 목적으로 이어진 관계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페루스의 눈치를 보던 신전의 일부 세력은 알렉스의 파문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우습게도 루한의 거짓을 더 빨리 못 알아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알렉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짓을 벗은 후 떨어진 평판도, 사라지는 신전의 후광도 알렉스의 신경 한 톨 건드리지 못했다.
“이 이상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는 초조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눈앞의 시녀를 베어 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호위 기사다.”
“황녀께선 지금 심기가 불편하셔서 누구도 뵙지 않겠다 하십니다. 경도 예외는 아니지요.”
뻔한 거짓이었다. 엘리자벳이 저리 말할 리도,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알렉스는 시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감각한 눈빛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건만 살풋 눈을 내리깐 시녀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들어가야…….’
알렉스는 검을 슬쩍 쥐었다.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닐 테지만 곤두선 신경 탓에 충동을 이기기 어려웠다.
시녀는 알렉스가 검을 쥐자 약간은 긴장한 듯 어깨를 올렸다. 그러나 어떤 명을 받았는지 그녀는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흐…… 흑…… 흐으.”
문뜩 알렉스의 귀에 울음소리가 잡혔다. 잔뜩 예민해진 귀는 익숙한 울음소리를 대번에 잡아냈다.
스륵―
검이 주저 없이 뽑혔다. 시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켜.”
말과 동시에 알렉스는 시녀를 옆으로 밀쳐 버렸다. 그러곤 그대로 문안으로 들어섰다. 거칠게 열린 방문에 움츠리고 있던 인영이 보였다.
“…….”
눈이 마주친 순간 알렉스는 희열을 느꼈다. 얼마 전과 다르게 녹색 눈은 저를 기억하는 것이 대번에 티가 났다. 그는 엘리자벳을 보지 못해 느꼈던 초조함이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꼈다.
“엘자.”
알렉스는 엘리자벳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무언가에 묶인 엘리자벳의 양손은 알렉스의 힘에 쉽게 끌려갔다.
오랜만에 주인을 보는 개처럼 반짝이던 금안에 엘리자벳의 손목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엘리자벳의 손목을 풀어 주는 대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얼마 전까지는 경황이 없으셔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알렉스 페테. 당신의 호위가 돌아왔습니다. 엘자.”
“…….”
알렉스는 어떠한 기대를 담고 말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무슨 생각인지 알렉스를 빤히 보기만 했고 조금 당황한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때 복귀하고 바로 말씀드렸지만 못 들으신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리했던 것은.”
“그만.”
엘리자벳은 어색하게 이어지는 말을 막았다. 그리고 알렉스에게 잡힌 손을 아무렇게나 빼냈다.
“아…….”
알렉스는 사라지는 온기를 놓치기 싫은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와 마주치던 시선을 피하며 손을 더욱 움츠리는 것으로 명백한 거부를 표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알렉스는 그런 엘리자벳에게 감히 손을 뻗지는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사죄의 말부터 했다.
“제 행동에 실망하셨다는 것도 제인 그녀를 죽여 눈물 흘리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
“그리했던 것은, 제가…… 제가 그리했던 것은…….”
무릎을 꿇은 채 우물쭈물 말을 이어 가는 귀가 붉었다. 그는 흡사 연인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이 같았다. 하지만 제인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엘리자벳의 얼굴은 희게 질렸다.
“……저는 배신을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엘자의 눈에는 배신처럼 보였겠지만 저는 그저 엘자 당신의 목숨을 위해…… 그리고 엘자 곁에.”
혼자만의 고백에 푹 빠진 알렉스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그는 제인이 엘리자벳에게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진 사람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눈물을 그만큼 흘리셨으니 그 정도 여자야 잊으셨겠지. 그녀는 당신의 눈물 한 방울보다 가치 없는 사람이니깐.
“곁에 있고 싶어 그리한 것입니다. 물론 저따위가 의중을 묻지 않고 그리했으니 화가 나셨겠지만…….”
“……나가.”
“엘자?”
“나가라고!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보기 싫어! 왜! 왜 전부 내 탓이야! 너희들이 그리했으면서! 하고 싶어 했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나한테 묻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당신들은 왜 다들 내 탓이라…….”
엘리자벳이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다 쓰러졌다. 묘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한 채 있던 시녀들이 엘리자벳의 비명에 정신을 차린 듯 우르르 몰렸다.
“경. 돌아가세요,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궁의! 궁의를 불러.”
“전하! 전하!”
시녀들의 채근에도 일어서지 않았던 알렉스는 결국 기사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러나 질질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는 엘리자벳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알렉스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약간의 분노가 있었다. 결국 방문까지 끌려온 그는 문이 닫히기 직전 엘리자벳을 향해 짓씹듯 답변했다.
“……저를 데려가지 않으려 하셨잖습니까.”
* * *
타티카는 방금 자신이 죽인 이를 노려봤다. 핏발이 선 눈은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잘 보여 줬다.
‘서부를 평정하기 전까지는 수도엔 출입하실 수 없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무슨 소리지? 수도 출입이 금지되었다니, 네놈이 돌았나? 나는 공작이다.’
‘예. 분명 아직은 공작 각하시지요. 하지만 서부의 주인이라 증명을 못 하시면 곧 각하라 불리지 못할 게 아닙니까.’
‘증명? 네놈이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릴 생각인가 보지?’
‘각하. 저도 이런 말씀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로원에서 명하시니 어쩌겠습니까.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부 전쟁에 혹시 다른 세력이 끼어들어 정식으로 인정한 공정하고도 신성한 전쟁의 물을 흐릴까 걱정되어…….’
‘하? 정식? 내 땅인데 누구 마음대로 전쟁을 허락하고 말고야! 페루스! 페루스 그놈 짓이지! 그 새끼 불러! 당장!’
‘허어. 그리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르온 공작 각하께서는 오로지 서부의 독립성을 배려하셔서 그리 조치를 취하셨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하지요. 아니면 혹여나 원로원에 반기를 들 생각이십니까?’
‘개소리 말고 닥쳐. 죽고 싶나? 응?’
‘여기서 계속 이러실 게 아니라 빨리 영지로 돌아가시지요. 디본이 서부 영지와 가깝다고는 하나 이리 지체하시면 정말로 공작위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 커헉! 컥!’
‘씨발. 죽어. 죽는 게 소원이라는데 죽여 줘야지.’
타티카가 이를 갈았다. 평소에는 저를 쳐다보지도 못한 버러지가 겁 없이 그딴 말을 하는 것 보면 원로원이 페루스의 지시 아래 통째로 뭉친 것이 분명했다.
“서부 패권을 다투라? 이것도 네놈 짓이겠지? 페루스…… 망할 개자식.”
타티카는 자신의 출생에 문제가 있는 만큼 잔인하면서도 영악하게 서부를 지배해 왔다. 서부의 가문들은 몇 번의 독살 이후 감히 그에게 반항하지 못했으며 약으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재력에 굴복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끝없는 부. 그것들로 눌러놓은 이들이 이리 움직이는 데는 분명 배경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준비한 듯 움직일 리가 없었다.
사실 타티카에게 서부 영지로 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서부 영지는 지금 있는 디본에서도 제법 가까웠고, 서부 세력들이 뭉쳤다고는 하나 그는 지금껏 다져 놓은 것들로 반역자들을 뭉갤 자신이 있었으니깐.
하지만 중앙 원로원에서 전쟁을 정식으로 허락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자신은 하나 남은 우세리인데. 지역 패권을 다투는 전쟁을 원로원에서 허락한 사례는 툴란 전쟁사를 통틀어 대가문 안의 핏줄끼리 싸울 때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조차도 단 두 번 있었던 일로 애초 원로원에서 전쟁을 허락하는 일은 아주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그런 잔챙이들에게 저와의 전쟁을 허락하다니. 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가 분명했다.
‘천한 것!’
‘우리 가문의 서자는 노예로 살게 될지어니 서자라는 단어도 네겐 쓸 수 없느니라. 네게 찍힌 낙인이 그를 증명할 것이다.’
‘천것의 출생이 황제를 업고 공작이라…….’
끝없이 들었던 말이 상기되었다. 타티카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던져 버렸다. 와장창 물건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방을 울렸다.
‘왜?’
고가의 물건이 얼마나 부서졌을까. 물건을 박살 내던 타티카의 머리에 갑작스레 의문이 들었다.
페루스가 뒤에 있다는 것 정도는 재배지가 불탔을 때부터 알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하니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타티카는 물건 던지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슬쩍 움직였다.
‘왜? 갑자기 나를 왜 치는 거지? 디본에 와 있는 참에 죽여 없애겠다는 건가? 아니면 갑자기 깨끗한 척하는 병이 도져서 약장사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건가?’
타티카는 페루스가 약을 아주 경멸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례로 페루스는 타티카와 동맹 상태일 때도 약 문제만큼은 어느 정도 선을 지키라 항상 경고했다. 물론 타티카는 무시했지만.
‘아니지 에셀 그놈도 상대해야 하는 판에 그럴 리는 없고…….’
하지만 타티카는 곧 고개를 저었다. 북부의 움직임이 있는 판에 페루스가 그럴 리 없었다. 타티카의 눈이 순식간에 가느다랗게 변했다.
“저…… 주, 주인님.”
“뭐야?”
“수, 수도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급하다고…….”
한참 생각에 잠긴 그에게 부하가 편지를 내밀었다. 수도라는 말에 타티카는 마침 잘됐다 싶어 빠르게 편지를 낚아채 펼쳤다. 편지에는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촘촘히 쓰여 있었다.
곧 편지를 읽은 타티카가 고개를 들고 편지를 와락 구겼다.
“아하. 황녀님을 혼자 독식하시겠다?”
구겨진 편지만큼이나 비틀린 미소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 * *
툴란에 전운이 감돌았다. 서부 지역은 타티카와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 간의 내전이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었고 새로이 북부의 공작이 된 에셀은 페루스의 측근이라 부를 수 있는 스로우가의 성을 박살 냈다.
사람들은 이러다 온 나라가 전쟁의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 걱정을 뒷받침하듯 툴란을 드나드는 외국 상단의 배와 마차에는 특산품이 아닌 철과 무기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겉으로 드러난 전운은 귀족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황가는 유명무실한 상황. 지역색이 강한 세력들은 저들끼리 뭉쳤고, 말로 중립이라 떠들던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어디로 가야 제 가문에 이득인가 쉴 새 없이 눈을 굴렸다.
귀족들이 대거 일하는 황궁에도 자연히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가문을 위협할 간자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궁정인들은 입을 굳게 닫았다. 덕분에 황궁은 조용함을 넘어 스산한 분위기마저 감돌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곳이 있었다.
가장 고귀한 이가 머무는 중앙궁.
중앙궁은 여자의 울음과 비명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다급히 달리는 시중인들과 궁의들로 인해 조용할 틈이 없었다.
장미궁에서 그새 중앙궁으로 옮겨진 엘리자벳은 멍하니 밖을 보다가도 발작적으로 울며 비명을 질렀다. 거기까지였다면 괜찮았겠지만 엘리자벳은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자해를 시도했다.
덕분에 시중인들과 궁의는 하루 종일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마을을 졸여야 했고 엘리자벳의 손목을 묶은 끈은 나날이 팽팽해졌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으로 인해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 올라오는 중앙궁 소식에 그의 책상 밑에는 찢어진 서류의 잔해만이 흩뿌려져 있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제임스였다. 고작 며칠이었으나 페루스는 일이 많은 이였다. 영지의 주인으로 남부의 일은 물론이요, 툴란 정치의 중추인 페루스의 업무량은 황제를 능가했다. 게다가 서부와 북부를 모두 적으로 가정하고 있었기에 평소처럼 한다 해도 일은 밀리는 판이었다.
그러니 제임스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진척이 되긴커녕 망가지는 일에 이럴 거면 차라리 황녀 곁으로 가 버리시라 주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한낱 종이었기에 무시무시한 주인의 표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를 데려와.”
한숨도 못 잔 채 일을 마친 제임스가 퀭한 눈으로 이른 아침 페루스를 봤을 때 그 못지않게 눈 밑이 거뭇해진 페루스는 대뜸 아이를 찾았다. 멍한 정신의 제임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이 말하는 아이가 도통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앨런 에든.”
다행히 제임스가 되묻기 전 페루스는 한 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어딘가 익숙하긴 했지만 여전히 낯선 이름에 제임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에든이면…… 겁쟁이 늙은이가 있는 곳 아닌가.’
그러나 곧 그는 에든 가문의 늙은 가주를, 이어 그의 자식들을 기억했으며 마침내 어미와 아비를 모두 잃은 것도 모자라 가문에서도 버림받은 불쌍한 에든가의 어린 여아 하나를 기억해 냈다.
‘……죽었다는 소식은 없었으니 살아 있을 테고.’
“어디에 쓰시려고요?”
“살려 두길 잘했지. 중앙궁으로 보내. 그 여자를 끔찍이 아꼈으니, 여자의 아이도 외면하지 못할 테지.”
그 대화를 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아이가 중앙궁으로 들어왔다. 이제 다섯은 되었을까.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짙은 회색 눈이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푹 숙인 아이의 얼굴은 어딘가 주눅이 들어 보였고 어른들에게 끌려 급하게 계단을 오르는 몸은 겁을 먹은 듯 잔뜩 굳어져 있었다.
아이는 중앙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곧장 엘리자벳의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자, 이리로…….”
엘리자벳은 처음 아이가 자신의 지척에 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떤 이가 제 곁에 오든 그건 그녀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부드러운 천에 강제로 매이게 된 그녀는 고개를 모로 돌린 채 하루의 대부분이 그렇듯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 전하…….”
시녀들의 부름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제게 말을 거는 것도 제 관심을 돌리려 하는 것도 엘리자벳에게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아이가 시녀의 손에 밀려 내밀어졌을 때 엘리자벳은 창밖을 향하던 고개를 다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앨런 에든이라고 전에 있던…….”
엘리자벳이 관심을 보이기 무섭게 다시 고개를 돌릴까 시녀가 아이의 이름을 빠르게 말했다. 아이를 샅샅이 보던 엘리자벳은 낯익은 이름에 얼굴을 굳혔다.
“제인…….”
갈라진 목소리가 아이의 어미를 불렀다. 두려움에 질려 엘리자벳을 보던 아이는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우리 엄마…… 아니 어머니를 알아요?”
약간 새는 발음에는 아이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 엘리자벳은 아이의 순진무구한 어투에 자신도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엄마 어디 있어요?”
아이는 제인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엘리자벳은 회색 눈에 담긴 그리움과 더불어 어미를 아는 이를 만났다는 반가움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다섯 손가락 접으면 온다고 아빠가 말했는데, 다섯 손가락 다 접어도…… 엄마도 안 오고 아빠도 갑자기 사라지고…….”
‘결국…… 제인의 남편도 죽였구나.’
예상했던 일을 확신하게 된 엘리자벳의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욱 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잠시 묻어 두었던 죄책감과 함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떠나요. 우리 동부로 떠나요.’
‘울지…… 울지 마세요.’
“쉿.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입을 여는 거야.”
엘리자벳을 살피던 시녀 중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타박하며 앨런을 거칠게 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끌어당겨진 앨런의 입이 꾹 닫혔다.
“이 아이는 전하의 말동무를 하기 위해 궁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궁의가 말하길 기분이 좋지 않으실 때는 아이와 말씀도 나누시고 산책도…….”
앨런을 끌어당긴 시녀는 엘리자벳이 한참 후 구역질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가 궁의 어느 방에 머무르게 될지, 무얼 할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앨런에게도 중간중간 해야 할 일과 자세에 대해 말했다.
“명심해야 한다. 이제 본분을 다해 전하를 모시고 이러한 영광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
영광이라니. 엘리자벳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은 말로 포장을 해 봤자 아이의 역할은 하나였다.
자신을 옭아맬 희생양.
이미 자신 때문에 모친과 부친을 모두 잃은 아이였다. 저 나이의 아이에게 닥칠 수 있는 최대한의 불행을 이미 저 때문에 겪은 아이였다.
끔찍한 죄책감의 무게가 엘리자벳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이미 나은 손목의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아이는 어미인 제인의 역할을 페루스에게서 부여받은 것이 분명했다. 찢고 나온 죄책감에 엘리자벳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더 캄캄해질 것도 없는 앞날인 줄 알았는데……. 한참 입술만을 깨물던 엘리자벳은 결국 눈을 감고 아이를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감고 있음에도 앨런의 동그란 눈은 엘리자벳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 * *
음침한 감옥은 얼마 전 동부 세력이 단체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꽤 비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채 고통을 당하는 이들도 많았기에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신음이 즐비했다.
그러나 감옥의 어느 한구석에 위치한 사내는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지독한 피비린내에도 미동 없이 앉아 눈만 감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기사의 신분으로 아주 큰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이런 지하 감옥까지 끌려올 일은 거의 없었다. 기사로서 이곳에 끌려왔기에 지위와 목숨을 걱정해야 하건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보기 싫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는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을 계속해서 곱씹을 뿐이었다.
‘그따위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죄송하다 사죄드렸어야 했는데…….’
끌려 나오면서 스스로 내뱉은 말에 그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감히 그분을 원망하고…… 분노를 표하다니.’
스스로를 타박하던 사내는 고운 얼굴을 찌푸리곤 눈을 떴다. 환한 금안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뿌렸다.
‘비록 눈앞에 계시지는 않지만, 죄를 빌어야 해.’
사내의 앞에는 그의 감정과도 같은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한참 그런 그림자를 보던 그는 벌떡 일어서 제 그림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쪽이겠지.’
그림자가 진 울퉁불퉁한 돌벽은 차갑고 음습했다. 곳곳에 전에 이곳에 머물렀던 죄수들의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벽만 뚫어져라 봤다.
쿵.
그리고 곧 고개를 빠르게 홱 젖힌 채 그대로 이마를 벽에 박았다.
한 번의 부딪침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이마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아픈 기색 한번 하지 않은 채 또다시 고개를 젖혔다.
쿵.
무게감 있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반대편에 있던 죄수가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봤다.
쿵쿵.
누가 보든 말든 사내는 계속 이마를 박았다. 그러길 몇 번, 사내를 보며 무어라 말하던 죄수도 그가 계속해서 이마를 박자 미쳤겠거니 포기하고 등을 돌려 버렸다. 이곳에서 자해는 흔한 일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만! 거기 뭐 하는 거야!”
보초를 서던 간수가 자해하는 사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사내는 그제야 행동을 멈췄다. 간수는 벽에 흘러내린 피와 무표정하게 그것들을 보는 사내를 보며 질린 표정을 했다. 자해하는 죄수들은 많이 봐 왔지만 사내는 그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사내는 정신을 놓은 것 같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유 모를 경건함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간수에게 기괴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미친…….”
쿵.
간수가 얼어 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사내는 다시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간수는 들어가 사내를 매질이라도 할까 생각하다 사내의 신분과 이상한 두려움에 포기했다.
“아니, 무얼 먹인 것도 없는데 그새 미쳤나! 기사라는 놈이 정신력이…….”
대신 간수는 안전한 창살 밖에서 사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금색 눈동자가 저를 스치자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사내는 간수가 도망간 후에도 얼마 더 머리를 박았다. 몇 줄 흐르던 피는 이미 사내의 하얀 얼굴 대부분을 적시고 있었다.
쿵.
벽에 머리를 박은 사내는 휘청거릴 때가 돼서야 자해를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벽에 이마를 댄 채 그대로 무릎을 꿇자 기다란 핏줄이 연결된 채 벽에 그어졌다.
무릎을 꿇은 사내의 이마가 천천히 바닥을 향했다. 곧 음침한 감옥 한편에서 신전 기사들이 중대한 죄를 지었을 때 읊는 기도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피가 흐르는 벽의 방향은 중앙궁, 그중에서도 엘리자벳이 위치한 방의 방향이었다.
* * *
“미친 모양이지.”
알렉스가 지하 감옥에서 자해를 했다는 말에 페루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페루스는 알렉스가 자해하다 죽어 버리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 엘리자벳 곁에 거슬리는 것 중 가까이 남아 있는 이는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명을 어겼다고는 하나 신전 소속의 기사입니다. 큰 죄도 아니고 거기에 가둬 두시는 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 자칫…….”
“검을 빼 들고 황제가 될 황족을 위협했다. 무엇보다 큰 죄지. 게다가 아스란 내에서도 끈이 떨어져 영향력이 줄었을 텐데 눈치 볼 것 있나.”
“물론 신전 세력 중 다수가 페테 경을 못마땅해합니다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언제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놈들이니까요.”
“그럼 당분간 내버려 뒀다 신전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황녀도 호위로 내켜 하지 않고 그가 궁에 더 머물 이유는 없질 않나.”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신전으로 돌려보내는 게 나았다. 그러나 과연 알렉스 그가 순순히 물러날지 제임스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보다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제임스가 이리저리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앞서 걷던 페루스가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아이에 관해 물었다.
“어제 들어가 별달리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예상하신 대로 황녀님의 심기가 조금은 안정된 모양입니다. 아이가 있을 때는 울지도 비명 지르는 일도 없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큼, 자해는 생각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이에 관해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뻔했기에 제임스는 주인의 등을 보며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했다.
“……다행이군. 괜찮아졌으니 식사도 아이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해. 그럼 조금 더 먹겠지.”
제임스는 페루스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똑똑히 봤다.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지.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제임스는 황녀와 관련된 주인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해 봤자 껍데기 말고는 그다지 쓸모도 없지……. 아니 차라리 없는 게 편하지. 내걸고 쓸 만한 명성이 오로르에 남은 것도, 딱히 정통성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나 지금껏 곁에서 봐 온바 주인은 황녀를 버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미 전에 자신과 했던 약조 따위 까맣게 잊은 듯 굴고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해 골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제임스는 어쩐지 약조를 지키라 말하기가 거북했다. 아마 안 될 것은 진즉에 포기하는 성미 때문이겠지.
“……가 보시겠습니까?”
건방진 제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벌어지던 다리가 멈췄다. 제임스는 페루스가 언짢아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동시에 어쩐지 제 말을 반기고 있다는 인상 또한 받았다.
“주제넘는군.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기분이 상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한 페루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그 뒤에서 어깨만 으쓱거릴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늦은 밤, 페루스는 제 집무실에서 연거푸 시가를 피우다 결국 일어섰다.
“결국 저러실 것을…… 쯧.”
그리고 제임스는 급해 보이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말았다.
* * *
얇은 침대 커튼 막 너머 자는 얼굴이 창백했다. 어쩐지 볼 때마다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 같아 페루스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도통 먹지를 않으니 좋아질 리가 없지. 이럴 때는 그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만.’
엘리자벳은 입이 짧아 전부터 음식을 가렸다. 게다가 최근 몇 년은 여러 이유로 곡기를 끊은 날도 많았으니 이럴 때만은 타티카가 있었으면 좋겠다, 페루스는 생각했다.
‘넓은 세상 그따위 놈 하나 없을 리 없지. 의사쯤이야 어디서든 구하면 되는 거고…….’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이유라도 엘리자벳의 곁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은 그의 독점욕에 불을 지폈다.
가까이서 본 엘리자벳은 죽여 달라 소리치던 것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나빴다.
여전히 묶여 있는 팔목은 부드러운 천에 감싸여 있음에도 붉어져 있었고 목을 비롯한 몸 여기저기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페루스는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면 제 몸부터 자해하는 엘리자벳의 성미가 참 고약하다 생각했다. 차라리 다른 이를 할퀴고 다치게 했다면 이렇듯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텐데.
“아프겠지.”
페루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피딱지가 앉은 상처를 만졌다. 부드러운 피부와는 이질적인 까슬한 감촉이 불쾌했다.
그래도 못 보는 것보다야 이렇게 보고 불쾌해하는 것이 나았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못 보고 어떻게 견뎠는지 스스로가 신기했다. 당장 이리 보고 만지는 순간도 애달픈데.
동시에 그는 엘리자벳을 원망했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그리 부정적인 반응만 하지 않았어도 계속 보러 왔을 텐데. 싫다 거부의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리 험악하게 입을 틀어막지는 않았을 텐데.
엘리자벳은 몰랐을 것이다. 당시 그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충격과 별개로 페루스는 일정 부분 엘리자벳의 행위에 대해 이해했다. 저지른 행위가 있으니 엘리자벳이 그를 밀어내고 멀리할 것이라고 예상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지 않은가.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아이마저 거부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자신은 엘리자벳과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만으로 이성이 날아가 버릴 만큼 기뻤기에 그는 마음 여린 엘리자벳도 내심 아이의 존재를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나쁜 마음을 먹는 것조차 자책하던 여자 아니던가.
‘아이 때문이라도 마음을 돌려야지. 다시 나를 사랑해야지.’
물론 모든 부모가 다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 정도야 페루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벳과 관련된 일에는 회로가 정상적이지 못한 그였기에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그래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스스로 이성적이지 못한 답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우리의 결실인데 기뻐해야지. 응? 그렇지 않아? 엘자.”
심사가 틀린 페루스는 어루만지던 엘리자벳의 상처를 조금 힘주어 눌렀다. 아픈 모양인지 옅은 숨소리만을 내던 엘리자벳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기뻐. 엘자.”
페루스는 저에게 반응하는 엘리자벳을 보다 걸터앉은 자세에서 상체를 숙였다. 최근 자르지 않아 길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귀가 이불 위에 닿았다.
아예 내려놓은 것도 아닌 머리가 닿자마자 이불이 내려앉았다. 쉬이 파이는 감촉에 페루스는 잠시 엘리자벳의 배에 아이가 있는 것이 맞나 의심을 했다.
그러나 곧 엘리자벳의 배가 이것보다 더 움푹 들어갔던 것을 기억해 낸 그는 제가 여자에게 잉태시킨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대로 잠들면 무리가 가겠지.’
만족감에 몽롱해진 페루스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를 들었다. 이대로 편히 기댔다간 엘리자벳의 몸과 아이에게 무리가 갈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페루스는 몸을 일으키며 엘리자벳의 곁에 누울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엘리자벳이 싫어할 것을 알아 그냥 가려 했지만 오랜만에 느낀 몽롱함은 그가 이기적인 선택을 할 것을 강요했다.
‘일어나기 전까지라면 괜찮으려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엘리자벳을 빤히 보던 페루스는 결국 엘리자벳 곁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올리곤 엘리자벳의 얼굴을 바라봤다.
옅지만 고른 숨소리.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심장 박동. 페루스는 어쩐지 엘리자벳이 아까보다 조금은 생기가 도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만의 착각일지언정 당장은 그랬다.
피를 타고 희망이 온몸을 돌았다. 수마는 금방 찾아왔다. 미간을 매끈히 편 페루스는 곧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한 밤이었다.
* * *
‘결국 내 아이도 전하 때문에…….’
어둡기만 한 공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엘리자벳은 피 흘리는 제인을 봤다.
끔찍했으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몇 번이고 되감아 본 장면에 엘리자벳은 곧바로 제가 악몽을 꾸고 있음을 직시했으나 악몽에서 깨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뜨면 더한 죄책감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차라리 이편이 견딜 만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벌을 받는 거겠지. 쉽게 죄책감을 지우려 하는 제 이기적인 마음가짐이 역겨우면서도 엘리자벳은 편리함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엘리자벳은 제인을 보며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을 웅얼거렸다. 미안. 미안. 미안해. 미안해 제인. 말을 뱉고 나니 현실이 아님에도 눈앞이 흐려졌다. 엘리자벳은 결국 울면서 무릎을 꿇었다.
엘리자벳이 무릎을 꿇자 저주를 뱉던 제인이 다가왔다. 질질 끌리는 드레스 끝에 피가 흥건했다.
제인은 창백한 손을 뻗치더니 무릎을 꿇고 있던 엘리자벳의 어깨를 잡아챘다. 얼음처럼 차갑고 가시나무처럼 뾰족한 손가락의 감촉에 엘리자벳이 순간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를 틀어쥔 힘이 어찌나 강한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하. 끝까지 도망치시는군요. 나는…… 내 그이는…… 내 딸은 전하 때문에 생을 망쳤는데 전하는 여전하시군요. 여전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여전히 이기적이세요. 여전히 끔찍한 인간이세요…….’
피눈물이 엘리자벳의 얼굴과 팔, 등으로 떨어졌다. 엘리자벳은 아픔과 두려움에 신음을 지르다 문득 제인이 제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음을 느꼈다.
붉은 피가 넘치는 눈이 향한 곳을 알아챈 엘리자벳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파랗게 질렸다.
‘안 돼!’
선득한 소름에 엘리자벳이 제인을 있는 힘껏 털어 냈다. 어찌 된 일인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제인은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제인에게서 물러난 엘리자벳은 스스로도 자각 못 하는 사이 배를 감싸고 있었다. 달달 떨리는 몸과 함께 전에 없던 적의가 제인을 향했다.
제인의 얼굴이 더욱 무섭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제인을 감싸던 공간조차 비틀려 이리저리 어지러워졌다.
‘깨어나야 해.’
엘리자벳은 눈을 질끈 감고는 악몽에서 깨길 고대했다. 시각이 차단된 공간에서는 제인의 비명과 알지 못하는 이들의 비명이 한데 섞여 울리고 있었다.
‘싫어!’
기기하게 한데 모인 소리가 가까워지자 초조해진 엘리자벳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순간 꼬꾸라지는 느낌과 함께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다.
“아악!”
순식간에 환해진 세상. 저절로 뜨인 눈에 담기는 것은 어스름한 새벽빛과 끔찍하고도 익숙한 풍경.
“엘자.”
그리고 악몽보다 더한 사내였다.
* * *
먼저 눈을 피한 건 언제나처럼 엘리자벳이었다. 눈앞의 페루스를 흠칫거리며 바라본 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잡힌 어깨가 아려 왔지만 이 정도 아픔이야 페루스와의 자리에서는 늘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악몽인가.”
결국 말을 먼저 붙인 것은 페루스였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벳의 입은 일자로 다물렸다.
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잠이 들며 풀어진 응어리들이 어느새 다시 스멀스멀 뭉쳤다.
“싫다고 하던데. 뭐가 싫은 거지?”
“…….”
“싫은 게 있다면 치워 주겠어. 시녀건 궁의건. 아니면 이 방이 싫은가? 다시 예전 궁으로 돌아갈까?”
페루스는 애써 불쾌감을 눌렀다. 다정히 꾸며 낸 목소리는 여느 과거와도 같이 따뜻했다.
“……아이. 아이가 싫어. 그러니 없애 줘요.”
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페루스의 예상과 다르게 엘리자벳은 입을 열었다. 정신도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그러나 버석하게 마른 입에선 차갑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말이 흘렀다.
“…….”
페루스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엘리자벳의 어깨를 잡은 손의 악력도 그의 기분과 함께 거세졌다.
매섭게 노려보는 푸른 눈에 엘리자벳은 제 몸이 벌벌 떨림을 느꼈다. 감히 그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다니, 순간 후회를 할 정도로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두려웠다. 분명 이제는 절망할 것도 잃을 것도 없다 느꼈건만 각인된 두려움은 여전했다.
“이, 이만하면…… 됐잖아요. 나한테 이만큼 했으면 할 만큼 한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하지만 흘러나오는 말은 계속됐다. 엘리자벳은 제 입을 틀어막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두려움에 좀먹혀 조금 떠는 것을 제외하곤 이성을 잃었던 지난 며칠보다 훨씬 침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엘리자벳의 태도는 페루스의 이성을 날리는 촉매제였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힘들 것이 분명하니까. 애써 그런 말들로 감싸 놓은 얇은 인내심은 엘리자벳이 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자 또다시 뚝 끊어져 버렸다.
“죽여 달라 하더니 이제는 아이를 없애 달라?”
“…….”
“내가 왜?”
“…….”
“고분고분 네 말을 들어주기만 하니 그새 내가 우스워졌나 보지? 엘자. 정신 차려. 잊은 모양인데 너도 아이도 내 거야. 네가 함부로 죽이니 마니 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야.”
페루스에게 예전처럼 강압적으로 구는 것은 쉬웠다. 그는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떼곤 엘리자벳의 양 볼을 잡았다.
“온전한 내 것이라고. 내가 원해서 네게 싸지르고 잉태시킨 씨앗인데 왜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응?”
움츠러든 엘리자벳이 사랑스러웠다. 페루스는 제가 주는 공포에 반사적으로 복종할 낌새를 보이는 엘리자벳이 만족스러웠다. 분명히 이 시간이 지나면 더러운 기분으로 남을 만족감이었지만 당장은 그랬다.
“넌 내 아이를 낳아야 해. 그리고 나랑 결혼해야 해. 이건 너도 원했던 거 아닌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데 왜 이리 모자라게 굴지?”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당최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그럴 때가 있긴 했다. 이제는 스러져 형체조차 남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죽여 달라느니 아이를 없애겠다느니 그딴 말들을 입에 담으면 네게 붙여 놓은 그 에든가 애새끼부터 부모 곁으로 갈 줄 알아.”
씩씩대는 페루스의 마지막 말은 결국 협박이었다. 앨런의 이야기가 나오자 엘리자벳의 눈에 체념감이 떠올랐다.
페루스는 이따위 협박으로 엘리자벳을 잡아 놓는 자신이 비참했다. 약점을 틀어쥔 관계는 절대 개선될 리 없었기에. 하지만 이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너진 자존심을 감추려 페루스는 더욱 가혹하고 차갑게 말을 뱉었다.
“이번 아이가 없어진다 해도 넌 다시 내 아이를 가지게 될 거야. 난 네게서 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까지 널 안을 테니. 그리고 난 아이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해. 그러니 네가 순순히 포기해.”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왜 아이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에는 저를 괴롭히기 위해, 오로르를 복속시키기 위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오로르에 유일하게 남은 자신만 처리한다면 그는 더 손쉽게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해결되지 못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엘리자벳이 아무 말 하지 않자 페루스는 그녀가 완전히 체념한 것이라 짐작하고 손에 힘을 풀었다.
“……이런 감정 소모도 네게는 안 좋으니 얌전히 있어.”
페루스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엘리자벳의 입술을 지분댔다. 무언가 바라는 손짓이었다.
그러나 순간 엘리자벳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아이라 확신하는 거지?’
문득 떠오른 물음은 엘리자벳에게는 그 자체로 큰 충격이었다. 덕분에 엘리자벳은 눈앞 페루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분명 그때…….’
사람들이 백치라 수군댔던 상태.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저 자신만의 공간에서 부유했던 그때도 분명 몇몇 기억은 존재했다. 보지 않으려 듣지 않으려 해도 보이고 들릴 때가 있었으니.
그리고 그때 엘리자벳은 저를 희롱하며 올라탄 사내가 페루스 한 명이 아님도 분명 기억해 냈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타티카는 물론이요 동시에 언뜻 황궁 정원에서 눕혀진 채 낯선 사내들을 봤던 기억이 났다. 미수로 그친 일이었지만 불안정한 기억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모르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모를 수가…….’
혼란스러웠지만 엘리자벳이 생각할 수 있는 답은 결국 하나였다.
‘……그는 모르는 거야.’
엘리자벳은 저를 온종일 감시하는 페루스가 그러한 사실들을 모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게밖에 결론지을 수 없었다. 아니라면 저렇게 제 아이라 확신할 리 없으니.
‘만약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
답을 내리기 무섭게 엘리자벳은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묶인 손목은 팽팽히 당겨지며 그녀를 방해했다.
“불편한가? 그러니 왜 이상한 짓을 해서는.”
엘리자벳의 낌새를 알아챈 페루스가 그녀의 손목을 보더니 결박을 풀기 시작했다. 혹여나 그녀가 아플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나 그 손길에 엘리자벳은 굳고 말았다.
‘죽일 거야. 제 아이가 아니면 살려 둘 리 없어. 들키면 안 돼.’
아이를 죽여 달라 말한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악몽 속에서 제인과 마주쳤을 때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를 지켜야 해.
“몸조리하면서 조용히 잘 있으면 밖으로도 가끔은 나갈 수 있을 거야. 궁의도 몸이 괜찮아지면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했으니. 네가 좋아하는 꽃들도 많이 볼 수 있겠지.”
‘……아니. 그의 아이건 다른 이의 아이건 없어져야 해.’
그러나 페루스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엘리자벳의 아이를 지킬 마음은 다시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금 아이가 죽길 바랐다. 그녀를 강간한 이들이 심은 씨앗이었다. 제 가족과 주변 이들을 도륙하고 저에게 고통을 준 이들이 끝까지 저를 고통스럽게 하려 씌운 저주였다.
아이만은 가지지 않으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그 쓰디쓴 것들을 무슨 마음으로 삼켰는데. 들킬까 봐 마음 떨면서 어떻게 그것들을 씹었는데.
스스로조차 왜 이런 상반된 마음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자벳은 아이가 당장에라도 콱 죽었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전하길 바랐다.
“몸이 불편할 테니 식은 아이를 낳고 올리면 되겠지. 물론 그 전에 미리 서약은 할 거야. 사제는 언제나 궁에 있으니깐 약식으로나마 빨리 준비를…….”
페루스는 계속 무어라 엘리자벳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로서는 생각도 한 적 없는 그만의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독한 마음이 엘리자벳 속에서 개화했다.
‘……그래. 무슨 상관이야. 없어져야 하는 것을.’
엘리자벳은 자유로이 풀린 한쪽 손목의 감각을 느끼며 제 배로 손을 가져갔다. 아까와는 다른 마음을 품은 손길이었다.
엘리자벳을 살피던 페루스는 그 모습에 감동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너를 바라지 않으니 떠나라 속으로 말할 참이었다.
‘나는 너를…….’
그러나 배에 손을 올린 순간 아릿한 통증과 함께 묘한 감각이 그녀의 배 속 아이가 있을 법한 곳에서 울렸다.
그리고 그 감각에 엘리자벳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무너져 엉엉 울고 말았다.
* * *
수도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타티카는 결국 제 영지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찾은 영지의 성은 전쟁을 앞둔 상태에도 여전히 고아하고 아름다웠다. 타티카는 제가 들어서 있는 정원이 넓은 옅은 색의 성이 그때나 지금이나 참 엿같다고 생각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언제 와도 진절머리 나게 재수 없는 꼴이군. 물도 제대로 안 나는 땅에 이런 풀때기들은 왜 심어 놓는 것인지. 하여간 돈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지.”
타티카가 신경질적으로 걷자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거슬리는 소리에 몇몇 시중인들의 시선이 타티카의 뒤로 향했다.
타티카의 뒤로는 노예 하나가 목줄을 한 채 개처럼 기어 오고 있었다. 성 밖에서부터 그렇게 끌려왔는지 노예의 무릎은 이미 까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태였다.
주인이 노예를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는지 들은 이들은 그 광경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심기가 불편한 주인이 또 누구에게 저리 대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두려움에도 기어 오는 노예를 향해 경악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여러 명의 시선이 제 뒤로 향하자 타티카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잡고 있던 줄을 세게 당겼다. 그 힘에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걷던 노예가 꼬꾸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원하는 곳까지 오지 못한 노예를 본 타티카는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되돌아가 앞으로 쓰러진 노예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좋겠어? 오랜만에 집에 와서. 반기는 이들도 많은 것 같고. 안 그래? 친애하는 동생아.”
노예는 아무 말 없이 끙끙 신음만을 흘렸다. 그것이 잘못을 비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는 타티카는 비식 웃음을 지었다. 귀찮은 짓이었지만 바라던 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 네놈들의 옛 주인 꼴이 어때?’
“오, 아니지. 내 동생은 진즉 죽어 없어졌지. 네놈이 하도 동생과 비슷해 착각한 모양이야. 나도 정신이 없는 모양이지. 이런 천한 노예를 감히 우세리가 핏줄과 비교하다니 말이야. 하하하.”
경악한 이들 중 몇몇의 안색이 질려 갔다. 타티카는 그들을 구경하다 말고 노예의 얼굴을 아무렇게나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음을 흘리던 노예가 옆으로 쓰러졌다.
“쯧. 이건 못 쓰겠군.”
피를 쏟으며 쓰러진 노예를 한 번 흘낏 본 타티카는 피가 묻은 신발에 혀를 차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저건 거기에 대충 던져 놔. 죽지는 않을 테니 내가 잊으면 알아서 끼니를 챙기고. 목숨은 붙여 둬야지.”
노예에 대한 명을 내린 타티카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막았던 여러 문이 그의 발길질에 뻥 차여 열렸다. 그러나 거친 발길질과 다르게 타티카의 기분은 꽤 좋았다.
“저것의 동생은 어때? 어미는 진즉 죽어 나자빠졌지만 그건 쓸 만하다 했잖아?”
대대로 우세리 공작이 쓰던 방에 도착한 타티카가 저를 따라오던 이들 중 하나에게 물었다.
“예상하신 대로 아직 살아서 공작님의 재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데? 무슨 문제 있나? 그래도 귀한 핏줄이라고 값이 좀 나갈 텐데. 몇 년 전에도 꽤 값을 받고 저기, 음…… 하여간 그 돼지 새끼가 3년 잡고 데려갔잖아.”
“계약이 종료되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모임에서 일하고 있지요.”
“그랬나? 그러고 보니 노예로 떨어진 지 10년도 넘었네. 그럼 이제 그것도 헐값인가?”
수하는 아무리 싫어한다지만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물건처럼, 그것도 10년 이상 노예로 부리다 못해 그들을 망가뜨리는 주인이 좀 징그럽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을 팔아먹는 장사를 하며 별별 꼴을 다 봤기에 그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약을 조금 많이 한 데다 여기저기 원하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정신이 온전치 못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 하더니. 황녀님을 보살피느라 잠시 신경을 안 썼더니 그 꼴이 났군. 가끔 구경 가면 제 어미와 오라비를 살려 내라 고함을 지르는 꼴도 재미있었는데. 쯧. 뭐 어찌 됐건 그것도 좋지. 호적에서는 지워졌어도 나랑 같은 피가 흐르는……. 뭐 어떻게 보면 여동생이잖아? 당분간 수도엔 가지도 못할 거 같고……. 관리가 안 될 수 있으니 이 근처로 데려와. 보호하면서 가문을 위해 한 몸 바치게 잘 보살펴.”
잘 보살피라는 말은 오래도록 노예로서 착취하며 부리라는 의미였다. 수하는 얼마 전 직접 마주한, 이제는 노예가 되어 버린 전 우세리가 공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여자가 참 불쌍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주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제 이복동생들의 삶을 계속해서 망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아는 주인에게 밉보였다간 자신에게도 큰일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 버러지 놈들의 움직임은?”
타티카는 이복동생들에 대한 제 잔인한 욕구를 채운 후에야 수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를 꺼냈다.
“그들끼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공작님을 상대로 연합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돈도 제대로 갖춘 군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들끼리의 다툼도 있고……. 하지만 염려하신 대로 뒷배가 되는 이가…….”
“페루스 빌어먹을 자식. 그걸 어떻게 엿 먹이지? 에셀 그놈한테는 연락해 봤어? 제 놈도 페루스하고 싸우고 있으니 당연히 동의했겠지?”
“그게…….”
“뭐야! 그 개새끼가 거절했어?”
“……예. 친서를 전하러 간 부하가 말에 묶인 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작님과 손잡을 일은 없으니 앞가림이나 잘하라 적힌 종이가 말에…….”
“그 개새끼가…… 허.”
타티카는 예상 밖의 결과와 너무도 어이없는 답변에 헛웃음을 뱉었다. 그가 본 에셀은 재미없게 고지식하고 지랄 맞은 정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페루스를 부술 수 있는 자신과의 동맹을 거절하다니.
“개새끼라 지능이 짐승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 망할 놈. 죽어도 나 같은 것과는 손잡지 않겠다? 저는 뭐가 다르다고. 고귀하신 기사에서 이제는 공작 나리가 됐다 이건가?”
사실 타티카는 에셀이 공작위를 계승한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자신도 공작이었지만 페루스나 에셀의 공작위와 자신의 공작위에는 무언가 차이가 있었다.
그나마 셋 모두 수도에 있을 적, 에셀은 공작이 아니었기에 직위로 무시를, 페루스는 자신과 손잡았기에 같은 더러운 놈이라 욕을 했지만, 지금은 아니라 생각하니 더욱 엿같았다.
이유를 알 것 같은 거슬림. 타티카는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망할.’
입안이 썼다. 동시에 제 손안에서 망가지던 고귀한 여자가 생각났다. 하얀 피부와 낭창한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은발.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제 밑에서 하지 말라 울던 황녀.
“씨발. 그건 네놈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오로르가의 적녀.
고귀한 황녀님.
자신과 다르게 태어난 여자.
꼭 자신처럼 특별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자신과 같이 귀한 신분의 특별한 한 사내에게만 유별나게 굴던 소녀. 그러나 그 사내로 인해 창녀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한. 그럼에도 여전히 고귀하고 특별한 이.
엘리자벳의 곁에 있으면 그는 페루스나 에셀이 자신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실상은 조금 우위를 느꼈다. 그녀를 치료하는 것도, 더 괴롭게 하는 것도 자신이 있었으니.
엘리자벳의 입에 제 것을 넣은 채 작은 머리를 흔들었던 첫 순간이 떠올랐다. 고상한 페루스. 그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타티카는 당시 페루스의 분한 얼굴을 떠올리며 실실 웃다 제가 먹인 묘약 덕에 제게 웃던 엘리자벳이 떠올랐다. 그때만큼은 페루스보다 저를 더 따르던 황녀님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도 특별했어. 아니 오히려 내가 더 황녀님에게 특별했지.
“그러니 이제는 내 것이지. 분명 그랬잖아? 나쁜 왕에게서 구해 주겠다고. 악당에게서 구해진 공주님은 누구의 것? 정의의 것이지.”
거기까지 생각한 타티카는 어떻게든 빨리 상황을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에셀의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 이참에 차라리 제가 둘 모두 없애 버리면 될 참이었다. 그러면 황녀님도,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도 제 것이 될 게 아닌가?
“우리 쪽에서 황궁 안에 넣어 둔 이들은?”
“황녀 곁에 머물던 이들은 다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 전 서신을 보내온 약쟁이 딸은?”
“그녀도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는 걸 보면 처리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몇몇 이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중요치 않은 곳에 있습니다.”
“흠……. 그렇지. 페루스 그 약은 놈이 그대로 둘 리가 없지. 그럼 딸자식도 죽었겠다, 쓸모없는 약쟁이 애비는 죽여. 그리고 새로 써먹을 만한 인간을 찾아봐. 당연히 쓸 만한 놈으로. 또 가족 중 누군가가 우리 고객이면 더 좋겠지? 그게 아니면 페루스 그 개자식이랑 원수라든가.”
목표를 잡은 영악한 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명을 내렸다.
“그리고 나를 죽이겠다 모인 놈들의 자식이나 가족 중에 약에 미친 놈이 없는지 알아보고……. 전쟁을 허락한 원로원 늙은이들 몇에게는 선물이나 할까? 로지오 후작 그놈은 원로 회의실까지 손자를 데려올 정도로 아낀다지? 작위도 아들이 아닌 영특한 손자에게 물려줄 거라 선언하고 다닌다는데……. 오랜만에 노인네 눈에서 눈물 좀 빼 보자고.”
얼마 뒤 로지오 후작가의 어린 자손이 사라졌다. 로지오 후작이 원로원 회의마저 불참하며 아이를 찾았지만 끝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피가 묻은 아이의 신발과 쪽지 하나였다.
* * *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서럽게 울음을 터트린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새벽 이후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예상보다도 훨씬 고분고분해졌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시키는 대로 끼니를 챙겨 먹고 약을 먹었다. 죽은 듯 잠을 자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는 시간도 줄었다.
“손목은 좀 어떻지?”
“괜찮아요. 궁의가 며칠이면 다 아물 거라 했고…….”
대화도 수월했다. 엘리자벳은 자신을 찾아오는 페루스를 외면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페루스가 말을 걸면 거는 대로 그녀는 꼬박꼬박 답을 했다.
“……진작 이러지 그랬어. 엘자 네가 그때는 워낙 네 몸을 아끼지 않으니깐.”
“이해해요.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페루스는 도리어 불안감을 느꼈다. 분명 상황은 그가 원하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 알 수 없는 위화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불안하다 한들 페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며 가만히 있는 엘리자벳을 전처럼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이 불안하기는 했으나 페루스 그도 지금의 평화가 한편으로는 마음에 찼다.
그리하여 페루스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누르며 엘리자벳에게 손을 뻗었다.
“아…….”
손이 제게 뻗쳐 오자 엘리자벳이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뺐다. 조금 전까지의 행동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 페루스는 그런 엘리자벳의 모습에 입안이 썼다.
‘그러고 보면 여전히 눈도 못 마주치고 있지.’
그러나 페루스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엘리자벳에게로 다가갔다.
“그래도 내가 한번 봐야겠어.”
긴 소파는 두 사람이 앉기에 충분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아무렇지 않게 엘리자벳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정, 정말 괜찮…….”
갑작스러운 접촉에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조금 전 행동을 인지한 탓인지 아니면 두려움 탓인지 그녀는 페루스를 밀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말에도 꿋꿋이 그녀의 손목을 살폈다. 그러나 심각한 표정과 다르게 그의 온 감각은 밀착된 부드러운 여체에 쏠렸다.
“……오랜만이야.”
“…….”
“이렇게 너랑 있는 거. 쓸데없는 감정 소모 없이 평화롭게 우리 둘만 앉아 있는 거 정말 오랜만이야. 엘자.”
감상에 빠진 듯한 목소리에 엘리자벳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동시에 손이 닿은 허리를 시작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아…… 둘이, 아니지. 이제 셋……인가.”
“…….”
“앞으로 이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어. 듣자 하니 아이는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와의 교감이 중요하다 하더라고. 어미와 아비 모두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선생…….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
“아랫것들에게 보이기는 좀 민망하지만 종종 이렇게 있으면 아이에게도 좋겠지.”
페루스는 자신이 혼자 떠들고 있음을 자각했다. 답 없는 엘리자벳에게서는 높은 벽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초조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엘리자벳은 여린 여자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커서도 변함없었다. 다정한 말투와 가까운 사람에게 약했고 그중 누구보다 자신에게 상냥한 이였다. 몇 년간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본성이 바뀔 리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페루스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생각과 실제 기분은 별개였다. 초조함이란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해도 갑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마련.
“그러고 보니 제대로 전하지 못했는데 엘자 네 즉위식을……. 왜 그때도 한번 이야기했잖아.”
페루스의 초조함은 최악으로 나타났다. 반응 없는 엘리자벳에게서 주제를 바꿔 보려 한 페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즉위식을 입에 담고 말았다.
“……즉위?”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페루스가 원하던 반응은 아니었다.
엘리자벳의 얼굴에 설핏 금이 가는 것을 본 그는 입술을 물었다. 충격받은 듯 공허한 녹안은 실수라는 그의 생각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참에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겠지.
‘……어떻게 보면 이건 보상이기도 하니까.’
“좀 빨리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배가 부르기 전에 빨리 끝내는 게 네 건강에도 좋고, 네 상황에도 알맞아. 엘자.”
“즉위식이라고…… 내가?”
“이대로 너를 두면 계속 입방아에 오를 텐데 그건 너에게나 태어날 아이에게나 좋지 않아. 즉위식을 올리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고.”
“그건 엘리엇의…… 엘리엇의 자리인데. 아니지. 엘리엇은…… 오빠는 이미.”
초조함이 분으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듣기 싫은 이름을 들은 페루스의 심기는 한순간에 뒤틀렸다.
“엘자.”
페루스는 신경질적으로 엘리자벳을 불렀다. 그는 그녀가 무어라 횡설수설하며 또다시 정신을 놓은 듯 구는 것 따위 봐줄 생각이 없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엘리자벳이 그제야 페루스의 심기를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펑펑 쏟아져 나오는 눈물은 의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궁의나 선생이나 이 정도 접촉은 괜찮을 거라 하더군. 오히려 어느 정도는 좋다고도 하니깐.”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옥죄였다. 임신한 엘리자벳을 배려한 듯 큰 힘은 없었다. 그러나 별다른 힘 없이도 그는 쉽게 그녀를 잡아 올렸다.
곧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무릎 위로 올랐다. 부드러이 움직이는 페루스의 손은 거침없었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젖은 얼굴과 목을 한 번 훑어 내리더니 곧장 옷 속으로 들어왔다.
“흐윽…… 흑.”
“다른 건 괜찮아. 엘자. 지금껏 있었던 일은 너에게도 힘들었으니까. 네가 성질을 부리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무어라 해도 돼. 지금처럼 울어도 되고. 들으니 자주 우는 건 아이를 밴 여자에게 쉬이 나타나는 감정이라지?”
손에 닿는 부드럽고 둥근 감촉에 페루스가 조금은 진정한 듯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옷 위로 느껴지는 온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해 냈다.
“나는 네가 우는 게 싫지만 네 몸이 괜찮다면 뭐,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 그런 걸 참는다는 게 개 같은 건 내가 잘 아니 말이야. 하, 젠장.”
페루스는 제 입에서 나오는 욕지거리를 참지 않았다. 이 부드러움을. 따뜻한 살 내음이 세상 무엇보다 좋았다.
“그런데 엘자, 네가 자해를 하거나, 응? 다른 놈을 부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엘리자벳의 목에 얼굴을 박은 그는 조용하지만 차갑게 일갈했다. 길게 빠져나온 혀가 길게 뻗은 목을 핥아 올리더니 귓불에 닿았다.
“너는 내 아이를 품고 이렇게 내게 안겨 있는데……. 네 옆에 사내새끼라고는 이제 나밖에 없는데…….”
드러난 이가 축축이 젖은 귀를 야무지게 물었다. 꽤 강렬한 아픔에 엘리자벳이 몸을 움츠렸다.
“왜 다른 놈을 부르지? 응? 엘자. 알려 줘.”
물었지만 답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페루스는 제 흉포함을 충족시키기로 했다.
그는 엘리자벳의 귀를 잘근잘근 씹다가도 핥아 올리고 귓불을 빨았다. 질척한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엘리엇은.”
귀를 내준 엘리자벳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엘리엇. 오라비를 부르는 건 당신이 죽인 그가. 내 오라비가 너무 가엽고 한순간이라도 오라비를 잊은 자신이 끔찍해서라고, 엘리자벳은 말하려 했다.
비록 조용히 있는 것이 이 상황에 좋다는 것은 경험상 알았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엘리엇. 내 오라버니는…… 흡.”
그러나 엘리자벳이 제대로 말문을 트기도 전 그녀의 입은 막혔다.
그녀가 세게 돌아간 고개를 인지하기 무섭게 거친 숨결과 함께 귀를 적시던 혀가 입안으로 들어찼다.
그녀의 모든 걸 삼킬 듯 움직이는 혀에 엘리자벳은 결국 죽은 오라비를 위한 작은 항의조차 멈춰야 했다.
진득한 입맞춤에도 엘리자벳은 눈을 감지 않았다. 동시에 펑펑 쏟아지는 눈물 너머 그녀를 씹어 삼키는 사내 또한 그 파란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쏘아져 나간 전서구는 어림잡아도 수십이었다.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새들은 목표하는 장소로 빠르게 날아갔다.
전서구들이 전한 소식은 새로이 황제가 될 엘리자벳의 즉위식에 관한 것이었다. 빠듯하다 못해 코앞에 닥친 즉위식 일정에 엘리엇 황제의 장례 이후 수도에 머물렀던 이들은 안도를, 돌아간 이들은 다시 수도로 향할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황녀께서 황제라……. 하지만 참…… 못마땅한 결과예요. 오로르는 이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저희 아버님은 소식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시더군요.”
“르온 공작께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지요. 사실 여기저기 시끄러운데 황위를 차지하겠다 나서면 내전이나 일어나겠지요.”
그러나 빠듯한 일정과는 별개로 귀족 사회는 엘리자벳의 즉위를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음 황제가 될 거라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접한 소문에 배후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황제의 추모 연회 때 끝내 말이 없었다며 소문을 부정했던 몇몇 이들은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애초에 별 영향력이 없었다.
“하긴, 저희같이 힘없는 이들이야 윗분들 눈치만 볼 뿐이지만, 각 공작님들께서는 서로 황위를 가지고 싶으실 테니……. 어찌 보면 르온 공작께서 현명하신 거죠. 사실 황녀님이야 허수아비도 못 될 재목이잖아요?”
“앞에 세우지도 않으실걸요. 즉위식 때 관이나 씌울지 몰라. 국정 참여는 아예 배제하시겠죠.”
“그게 옳은 일이죠. 매일같이 궁에서 몸이나 가꾸셨던 분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목숨이라도 건져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진즉 죽었어야 옳은 분이잖아요? 하나 남은 오로르만 아니었어도…… 쯧.”
“어머. 두 분은 아직 모르셨나 봐요. 이건 궁에 있는 지인에게서 들은 말인데 사실 황녀께서 죽지 않고 즉위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다만 즉위식이 확정되자 엘리자벳에 관한 소문은 최악을 달렸다. 전부터 있었던 은밀한 소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여기저기로 퍼졌기 때문이었다.
“망측해라. 그게 사실이면 황제가 아니라 창부가…….”
“말을 조심하세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우리만 있는데 뭐 어때요? 황녀께서…… 아니지, 황녀가 반반하니 사내를 꾀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소문이 사실이면 여러 사내에게 다리를 벌렸다는 건데, 그게 창부가 맞지 아니면 뭐겠어요?”
가문은 권력을 잃고 가족들은 모두 죽은. 그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홀로 살아남아 곧 황제가 될 가련하고 아름다운 황녀.
엘리자벳의 유별난 외관은 그녀의 평판에 해악이었다. 사람들, 특히 남의 불행을 바라며 물어뜯는 것을 즐기는 다수의 이들은 자신들보다 고귀하면서도 약자인 엘리자벳에 대해 이러저리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이라면 공작님들이 안타까워요. 유혹에 넘어가셔서는. 툴란에는 공작님들께 어울리는 순수한 영애들이 많은데요…….”
“맞아요. 르온 공작님을 사모하는 영애들만 몇이에요. 안타까운 일이죠.”
우스운 건 그들은 자신들보다 강자인 이들에 대해서는 뒷이야기라 하더라도 혹 해가 올까 조심스레 말을 아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입방아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건 대부분 엘리자벳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런 말도 있더라구요. 황녀가 엘라르 황제 때부터 그런 쪽으로……. 왜 엘라르 황제도 유명했잖아요? 전국에서 남자들을 끌어모아 황궁 안에 들이고서는…….”
“그 피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지요. 낯이 뜨거워 즉위식에서 얼굴이나 볼 수 있을지. 쯧. 차라리 참석 안 하는 게 아이들 보기에도 좋을까 봐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리고 즉위식이 뭐 황녀를 위한 것인가요. 다른 분들이나 뵈러 가는 거지. 그리고 사실 궁금하긴 해요. 전 황녀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터라 소문 같을지도 모르겠고.”
“흐음. 어차피 가셔도 보실 수 없을 거 같은데……. 즉위식이 작은 파티도 아니고 저희 가문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안으로 들어설 수가…….”
“뭐라고요! 지금 그 말은!”
그러나 즉위식의 주인공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건 즉위식은 성황리에 치러질 예정이었다. 즉위식같이 큰 행사는 평소 보기 힘든 고위 귀족들도 대부분 참석하는 데다가 새롭게 황제가 될 엘리자벳 또한 나쁜 소문과는 별개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두 분 다 진정하시고……. 그럼 다들 참석할 예정이시니 계속 여기서 머무실 건가요?”
“아니요. 저는 다음 주부터 동생네에 머무르기로 했답니다. 여기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그쪽이 편하겠지요.”
“부러워라. 저희는 수도에 가까운 친인척이 없어 꼼짝없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요.”
즉위식이라는 큰 행사는 사람을 모았다. 나라 안 전운이 가득한 것과 상반되게 몰려들기 시작하는 사람들로 수도는 축제 분위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시끌시끌하게 즐길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파티 가는 것도 자제했는데 좋은 기회예요.”
그러나 즉위식의 주인공. 툴란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의식의 중심이 될 황녀에게, 엘리자벳에게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다.
“어떤 드레스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붉은색은 피해야겠죠?”
“아아, 이미 깨진 지 오래된 규칙이지만 일단 즉위식이니까요. 뭐, 황제 폐하가 되실 그분을 배려해야겠지요. 게다가 평소보다는 엄격할 테니…….”
“바다 건너 디딜론에서 진한 장미색이 인기인데 아쉽게 되었네요. 오랜만에 제게 받는 색이라 그걸로 하려 했는데, 이게 뭐람.”
엘리자벳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날개에 화살을 맞은 전서구가 사내의 손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일정이 생각보다 훨씬 앞당겨졌습니다. 고작 보름이라니. 멀리서 오는 가문들은 즉위식 끝물에나 당도하겠군요. 손님 없는 즉위식이라……. 하.”
“그걸 원하겠지.”
“영악하기는. 더는 공작님을 막지 못할 것을 알고 먼저 수를 쓰는 겁니다. 우리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게요.”
“초조해하지 마라. 브륄. 처음 북부로 떠날 적에는 다시 수도로 돌아올 때 이미 그녀가 황제가 돼 있을 거라 예상하지 않았나.”
“하지만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즉위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충성 서약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황녀께서 황제로 즉위한다 한들 공작님의 발언권이 르온 공작보다 약해집니다. 충성심과는 별개로요! 그렇지 않아도 중앙에 있는 놈들은 다 그자의 수족인데 공작님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저들끼리 뭉쳐 저희를 북부로 쫓아 보낼 겁니다.”
“저 언덕만 넘으면 금방이야. 이제 앞을 막을 만한 자들도 없고 말을 달린다면 이틀이면 충분해.”
“그 언덕 너머가 제일 문제지 않습니까. 막는 자들이 없으면 뭐 합니까. 지나가도 된다는 허락이 없으면 저희는 꼼짝없는 반역자인데요.”
“…….”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도적을 빙자하는 놈들 때문에 하루 걸릴 거리가 사흘은 걸립니다. 앞을 막는 자들은 없다지만 방해하는 자들은 분명 도착 전까지 계속 나타날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브륄의 신랄한 말에 에셀은 입을 꾹 물며 눈앞의 나지막한 언덕 뒤, 설핏 보이는 작은 성을 봤다.
그의 시야에 잡힌 작은 성은 성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볼품없었다. 고작 초소 몇 개가 붙어 있는 것이 다였으니. 다만 성 가운데 넓게 벌어져 있는 관문만은 위용이 대단한 데다 관리가 잘되어 있었는데 그건 이 성의 관문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샤를의 문’이라고도 불리는 관문은 오래전 툴란의 황제 중 하나인 샤를 르온이 수도 근처에 세운 것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처음 관문은 일종의 개선문으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샤를 황제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후에 그 위치가 탁월한 것을 인정받아 반란으로부터 수도를 방비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작은 성 또한 문이 생긴 후 한참 후 증축된 것이었다.
수도를 출입하는 일정 수 이상의 군대는 이유를 불문하고 샤를의 문에서 중앙 정부, 즉 황제나 중앙 원로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즉위식이 없으니 황제 폐하도 없는 마당입니다. 누가 허락을 해 주겠습니까. 설마 페루스 그자가 해 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말을 하다 성이 난 브륄은 페루스에 대한 공대조차 버렸다. 차분한 그의 성격으로 미뤄 보건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브륄은 속이 탔다. 차라리 일정이 아주 지체되어 수도 근처에 당도하지 못했으면 쉽게 포기했을 터였다. 애초에 그들이 떠나자마자 엘리자벳이 황제가 될 것을 예상했으니. 하지만 눈앞에 목적지를 두고 가지 못할 거 같으니 더 분이 터졌다.
“이래서 머리만 굴리는 남부 것들은 잔머리만 가득해서는…….”
씩씩거리는 브륄이 다친 전서구의 날개를 조심스레 접으며 남부 지역을 싸잡아 욕할 때였다.
문득 듣고만 있던 에셀이 눈을 빛냈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예?”
* * *
도통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페루스는 신전에서 온 서신을 와그작 구겼다.
“이건 무슨 개소리지?”
“아무래도 신전에서 페테 경을 버리지 않을 모양인 거 같습니다.”
“끈 떨어진 개를 어디에 쓰려고?”
“……새롭게 내려온 자가 된 그 여자가 생각 외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건 백치라 하지 않았나?”
“예…….”
“그런데 그 여자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말이 되나.”
“……죄송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답을 못 한 제임스는 그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바닥을 향한 시선에 구겨진 서신이 잡혔다. 신성한 문양이 선명했다. 알렉스의 일은 제임스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황궁에 남는 걸 전적으로 알렉스 페테 본인에게 맡기겠다 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스란의 기사를 핍박한 것에 대해 정확히 묻겠다니.
“하……. 모독이라. 단단히 미쳤군. 루한 놈을 죽이고 소꿉놀이나 하라 놔줬더니 백치를 앞세워 이런 걸 보내는군.”
“죄송합니다. 빠르게 알아보겠습니다.”
“됐어.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예상하기도 했으니……. 새로 황제도 즉위하는 마당에 내게 머리를 숙이기는 싫다는 말이겠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일단 풀어 줘. 풀어 주면 그놈 뒤에서 이 음침한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게 되겠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으나 페루스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즉위식만 아니었다며 진즉 쓸어버렸을 텐데. 그는 성큼 다가온 즉위식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절대 황녀 곁으로 보내서는 안 돼. 알렉스 페테는 이 시간부로 황궁에 머무르는 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갈 수 있는 곳을 한정하고 철저히 감시해.”
“예.”
“그리고 에셀은? 그는 어떻게 하고 있지?”
“아직 샤를의 문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만, 곧입니다.”
“이브릴 백작이 생각보다 쓸모가 없군. 벌써 거기까지 당도시켰으면 코앞 아닌가.”
“상대가 북부 기사들이니…… 이브릴 백작의 수하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막기 어려울 겁니다. 실상 이 정도로 걸음을 늦춘 것도 훌륭한 편입니다.”
“실패는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셀 라세르는 즉위식 전까지 수도로 들어서지 못한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즉위시킨 즉시 그녀의 측근이자 누구보다 가까운 이로 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아래 반역자들을 처리할 참이었다. 물론 반역자들은 만들어질 참이었고.
“물론 그 후로도 안 되지. 지금 같은 기회는 없어. 황가의 곁에는 남부만이 함께한다.”
“예.”
제임스는 예전의 계획을 생각하며 말하지 못할 분을 주먹을 쥐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화가 난다 한들 어쩌겠는가. 자신이 그렸던 계획은 이미 바뀌고 해지다 못해 사라진 것이었다.
‘정말 그 여자가 황제가 되는 건가.’
제임스는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허탈했다.
“그 외의 세력은 이제 사라져야 해.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공작도 즉위식 때 황녀에게 충성 서약을 할 수 없어. 새 황제의 곁에 서는 것은 르온과 나로 충분해.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남부는 더는 남부만으로 남지 않겠지. 새 황제의 이름 아래 르온은 툴란이자 황가 전체를 상징할 테니.”
그러나 이어진 주인의 말에 제임스는 자신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주인은 황제가 되지 않을 테지만 황제보다 더한 권력자로 군림할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 나뉘어 있던 툴란은 하나로 합쳐질 테고 중앙 권력과 지역 권력이 분리되는 일도 사라질 터였다.
‘……끝장을 보겠군.’
제임스는 툴란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에 애정도 그렇다고 가문이나 핏줄에게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 페루스를 따른 것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가족이 모두 페루스에게 죽임을 당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페루스를 따르게 된 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니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순간 제임스는 페루스가 처음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가 생각났다. 찬란한 금발을 가진 이는 어렸지만 잔인했고 잔인한 만큼 위압적이었다.
지난 세월 제임스는 한 번도 페루스를 어긴 적이 없었다. 많은 유혹에 배신을 한 번쯤은 생각할 법도 했지만 꿈도 꾸지 않았다. 아예 그런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때도 이랬던가? 그래서 나는 이분을 따랐나?’
제임스는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느끼며 스스로 그렇게 물었다.
* * *
엘리자벳은 작게나마 미소 짓고 있었다. 눈앞의 아이 덕이었다.
“황녀 전하. 이것도 드세요. 엄청 맛있어요.”
앨런은 어미인 제인만큼이나 따뜻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였다. 응석을 부릴 나이임에도 남을 먼저 생각했고 챙길 줄 알았다.
“나는 아까 먹어 배가 부르구나. 맛있으면 하나 더 먹으렴.”
“……정말요?”
“응. 어서 먹어.”
“하, 하지만 전하의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그렇기에 엘리자벳은 아이가 움츠러들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렸다. 아이가 움츠러드는 이유는 지금처럼 대다수 자신 때문이었으니.
“……괜찮아.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먹었다고 해 줄게. 그러니 어서 먹어. 응?”
엘리자벳의 말에도 앨런은 뒤를 몇 번 더 돌아보았다. 혹시나 지켜보고 있을 시녀가 있나 살피기 위함이었다.
“감사합니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앨런이 엘리자벳에게 작게 인사를 하며 양손에 딸기 슈를 집어 들었다.
앨런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에 엘리자벳은 눈가가 시큰거림을 느꼈다.
‘나만…… 나만 아니었다면 이 아이는 제인의 품에서…… 아비의 품에서 사랑을 받으며 안겨 있었겠지. 이렇게 눈치 보는 일도 저렇게 간식 하나 허겁지겁 먹는 일도 없었겠지.’
앨런은 엘리자벳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보는지도 모른 채 입안 가득 슈를 우물거리다 엘리자벳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많이 먹으렴. 앨런.”
“예. 잘 먹겠습니다!”
엘리자벳은 그 모습에 간신히 울음을 참고 따라 웃어 보였다.
“우리 엄마는 딸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저도 딸기가 좋아요. 황녀님도 딸기가 좋으세요?”
그러나 인내는 길지 못했다. 한참 슈를 먹던 앨런이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빨며 제인의 이름을 올리자 엘리자벳은 결국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터뜨렸다.
입을 막은 채 최대한 소리를 죽였지만 아이는 엘리자벳의 눈물을 알아채곤 입에서 손을 빼지도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 모를 어른의 울음은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곧 아이의 눈에도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앨런이 울먹이기 시작하자 엘리자벳은 빠르게 눈가를 훔쳤다. 가여운 아이를 더는 자신 때문에 울리고 싶지 않았다.
“자…… 앨런. 이리 오렴.”
“흐으…… 흑.”
“쉬…… 앨런. 괜찮아. 미안해. 내가 괜히…….”
엘리자벳이 일어서 팔을 벌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앨런의 작은 몸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엘리자벳은 몸을 숙여 자신에게 안기는 앨런을 꼭 안아 주며 토닥였다.
앨런은 울 듯하면서도 저를 안아 주는 따스함에 소리를 줄여 갔다. 품을 파고드는 아이 덕에 엘리자벳은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엘자.”
앨런을 얼마나 안고 있었을까. 엘리자벳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만 아이를 내보내는 게 좋겠어. 아이를 데려가.”
페루스는 그새 엘리자벳과 앨런의 코앞에 닿아 있었다. 그가 손짓하자 언제 왔는지 모를 시녀들이 앨런을 엘리자벳에게서 떼어 냈다.
“아…….”
아이는 어른들의 배려 없는 손길에 굳고 말았다. 큰 눈에 맺혀 있는 눈물에 엘리자벳은 손을 뻗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루스를 보고는 그대로 거뒀다.
“쯧. 아무리 어리다지만 네게 안겨 울다니. 예의를 가르칠 선생을 붙여야겠군.”
“……내가 울린 거예요. 앨런은…… 아이는 잘못이 없어요. 아직 어린걸요.”
페루스는 문밖으로 사라지는 앨런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빠르게 페루스의 심기를 살피며 변명을 했다.
“어리다라……. 그래. 엘자. 네 말이 옳아. 저 아이보다 시녀들이 문제지. 네게 그런 무례를 저지르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다니. 분명 제대로 지켜보라 했는데 일을 안 하는군.”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엘리자벳의 변명에도 심상찮은 페루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혹 앨런에게 해가 갈까 덜덜 떨며 다시 제 탓을 했다.
그러나 덜덜 떠는 엘리자벳을 보는 페루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위로 올라가는 수려한 눈썹에 엘리자벳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걸음으로 페루스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일어나. 바닥이 얼마나 차가운데. 우리 아이에게 안 좋잖아.”
먼저 다가온 엘리자벳의 몸짓에 페루스의 목소리가 다소 풀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엘리자벳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엘리자벳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순순히 페루스에게 몸을 맡겼다.
의자에 엘리자벳을 앉힌 페루스가 몸을 숙여 엘리자벳의 이마에 키스했다. 뜨거운 입술의 감촉에 엘리자벳은 조금 움찔거렸지만 이번에도 순순히 페루스의 애정을 받아들였다.
“울지 마.”
“…….”
“네가 고작 저런 아이 때문에 우는 건 안 돼. 우리 아이에게 안 좋아.”
“…….”
“나는 네가 나나 우리 아이 때문에만 울었으면 좋겠어. 아니, 우리 아이도 네게 눈물 나게 하면 안 되지.”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 아이라는 단어에 엘리자벳은 속이 역겨웠다.
엘리자벳은 태동을 느끼고 섧게 울었던 그 새벽 이후 아비가 누구든 이 아이를 받아들이겠다, 어느 정도 다짐했다.
그러나 다짐이 무색하게 아이에 대해 언급하는 페루스를 볼 때마다 아이가 밉고 증오스러웠으며 끔찍했다.
또한 동시에 제 배 속 아이에 대한 감정 하나 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 없었다.
‘하긴, 난 예전부터 그랬지. 뭐 하나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주위에 해악만…….’
“네가 울어야 한다면 슬프든 행복하든 무슨 이유든지 그건 나로 기인해야 해.”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자신에 대한 혐오로 올라오는 신물을 조용히 넘길 때도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의 입술은 엘리자벳의 이마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물론 울지 않는 게 더 좋지만.”
“…….”
“이제 에든가 아이 때문에 울지 않을 거지?”
“…….”
“엘자. 답을 하지 않으면 나는 네 건강과 우리 아이를 생각해 저 아이를 네게서 떨어뜨려 놓는 수밖에 없어. 물론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지금처럼 지내지 못하겠지. 에든가라고는 하나 에든가의 가주인 저 아이의 조부는 무심하게도 아이를 버렸거든. 하긴 아들이 큰 죄를 짓고 죽었는데 감싸는 게 더 이상한가.”
페루스의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엘리자벳은 차라리 그가 전처럼 차갑게 저를 겁박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다.
강제적인 협박은 탓을 하기 쉬웠다. 하지만 지금처럼 따스하고 조곤조곤한 말씨는 그녀를 심리적인 가해자로 만들고 있었다. 벌어질 모든 일은 네 행동으로 말미암을 것이라는.
“……울지 않을게요.”
“그렇다기에는 지금도 울 거 같은데.”
“약속해요. 앨런을 보고 우는 일은 이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깐 그만해요.”
“기왕이면 앨런이라 부르는 것도 그만두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에는 그렇게 야박하게 굴면서 에든가 아이는 왜 그리 자주 부르는 거야. 섭섭하게.”
“……그것도 고칠게요. 섭섭하게 해서 미안해요. 페루스.”
“미안하기는……. 나야말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엘자.”
“…….”
“사랑스러운 나의 엘자. 사랑해.”
페루스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엘리자벳의 얼굴을 타고 내려오더니 다물린 입술에 닿았다.
엘리자벳은 입술을 살짝 깨무는 감촉에 아무런 반항 없이 입을 열었다. 곧 질척하고 거센 힘이 그녀를 모조리 빨아들일 듯 들이닥쳤다.
어느 정도 거칠지만 다정한 구석이 많은 입맞춤이었다. 으스러질 듯 턱을 잡고 강제로 입을 열었던 때를 생각하면 한없이 부드럽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단순히 공기가 폐로 들이차지 않는 것과는 다른 숨 막힘이었다.
온몸의 구멍은 모조리 틀어막힌 채 그것도 모자라 사지를 결박당한 채 물속으로 침전하는 감각.
‘……숨 막혀.’
괴로움과 답답함에 익사하는 기분. 엘리자벳은 자신을 옭아매는 이 사내의, 페루스의 애정에서 그런 것을 생생히 느꼈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와 반대였다. 지금처럼 엘리자벳을 물고 빨며 이렇게 삼킬 때만 그는 새로운 감각을 깨우치는 것 같았다. 많은 시간 엘리자벳을 안고 입 맞췄지만 그녀는 항상 색달랐다. 그리고 그 색다름을 느낄 때마다 페루스는 제 몸 안 구석구석이 충만한 무언가로 채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광활하고 녹음이 가득한 숲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길고 끈적했던 입맞춤이 끝난 후 엘리자벳과 페루스는 대조적인 얼굴을 했다. 둘은 흡사 제물이 된 처녀와 흡혈귀 같았다. 지쳐 가까스로 숨을 쉬는 엘리자벳과 생기 가득한 페루스. 페루스의 숨은 엘리자벳의 숨과 달랐다.
“우리 아이는 언제 태어날까. 엘자.”
입맞춤이 끝난 후에도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가만두지 않았다. 양손을 이용해 그녀를 쓸고 주물렀으며 짧은 입맞춤을 몇 번이고 했다.
“이럴 때면 네 배 속에 있는 우리 아이가 야속해. 당장이라도 너를 안고 싶은데…….”
엘리자벳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페루스는 그렇게 속삭였다. 페루스는 스스로가 발정 난 짐승 같다 생각했다. 아이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필시 엘리자벳을 엎어 놓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을 터였다.
“하아. 엘자. 나의 엘자. 나의 엘리자벳.”
아이는 그에게 한 줌 남은 이성이었다. 페루스는 아이를 상기하며 쉼 없이 엘리자벳을 불렀다. 끙끙 앓는 듯한 소리와 숨이 방 안 가득 찼다.
한참 만에야 거친 숨이 잦아들었다. 이성을 잡은 페루스는 눈을 몇 번 깊게 감았다 떴다. 엘리자벳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그와 다르게 정적이었다. 그 조각상과도 같은 모습에 페루스는 가슴이 아렸다. 왠지 모를 감정이 그의 몸을 감싼 후 한기만을 남기고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에게 전할 중요하고 기쁜 소식이 있었기에 페루스는 부러 그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은 채 목을 다듬었다. 앨런 때문에 잠시 미뤘지만 페루스의 방문 목적은 사실 이 때문이었다.
“엘자. 지금 갈 곳이 있어.”
“어디를……?”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는 그녀 앞으로 움직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올려다보는 그의 푸른 눈은 매우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밑에 사제가 와 있어. 그가 너와 내 혼약을 축복해 줄 거야.”
* * *
궁 구석에서 조용한 식이 열렸다. 약식으로 진행된 식은 간소했다. 그러나 모든 구색은 갖추어져 있었다.
신부는 간소했지만 정교한 상앗빛 비단 드레스를 차려입었고, 비록 생화는 아니었지만 밀랍으로 만들어진 오렌지 꽃 화관을 썼다. 그리고 분홍색의 천일홍 부케는 신부의 손에 다소곳이 들려 있었다.
하얀 신부 옆 신랑은 엄숙한 가운데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제는 중간중간 헛기침을 하며 꽤 긴 시간 서약을 말했다.
몇몇 증인들은 신부와 신랑을 둘러싸고 기꺼이 증인이 될 것을 맹세했다.
약소했지만 완벽한 식이었다. 사제가 마지막 서약을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부 엘리자벳 오로르는 부군인 페루스 르온을 영원히 따르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사제의 서약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으나 황제가 될 엘리자벳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툴란의 오래된 관습을 본다면 여인은 남편을 따르는 것이 덕목이기는 했다. 여인은 남편과 가문에 종속된다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 하지만 여인이어도 황제는 다른 누구를 따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이였다.
그러나 그렇기에 페루스는 약식으로나마 식을 진행했다. 엘리자벳이 정식으로 황제가 되고 자신과 정식으로 식을 치를 때쯤이면 저런 서약 따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자신을 따른다는 서약에 예라고 답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그녀와 평범한 이들처럼 혼인하고 뭇 사내들이 제 여인에게 강요하듯 그녀를 제게 종속시키고 싶었다.
“…….”
하지만 엘리자벳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사제가 몇 번이고 그녀에게 다시 물었지만 잔꽃 무늬 면사포 속 그녀의 다물린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답 없는 신부로 인해 한 시간이면 끝날 식은 몇 시간이나 지속됐다. 엄숙한 가운데서도 기뻐야 할 식은 정막만이 흘렀다. 긴 기다림에 증인으로 나선 이들과 사제 또한 힘든지 표정을 굳혔다.
페루스는 겉으로는 큰 변화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로 구성된 증인들은 그의 심기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식장. 그 자리에서 처음과 같은 표정과 감정을 가진 이는 신부인 엘리자벳 하나였다.
그러나 신부의 무언에도 결국 식은 끝이 났다.
“끝을 내. 내 귀한 신부는 말을 아끼고 싶은 모양이야.”
페루스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신부의 약지에는 화려한 세공을 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자리했다.
“그럼 이것으로 페루스 르온과 엘리자벳 오로르는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말을 읊었다.
“축하합니다.”
“두 분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사제의 말을 끝으로 박수 소리와 축하 인사가 터져 나왔다.
페루스는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식의 대망인 입맞춤을 위해 신부의 면사포를 젖혔다. 보통의 신랑들처럼 부드러운 손길은 아니었다.
페루스는 넘어간 면사포 뒤 엘리자벳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있는 엘리자벳은 최근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꽤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그녀는 그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제 신부가 표출하는 분노의 원인 따위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사제의 말에 대꾸하길 거부함으로써 이미 신부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인내심을 꺾었다.
페루스는 앞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신부의 부푼 입술을 쓸며 신부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읊조렸다.
“식은 마저 끝내야지.”
“…….”
“입 벌려. 엘자.”
* * *
샤를의 문이 저 멀리 뜨는 해에 반사되어 빛났다. 브륄은 이제는 작아진 언덕 위 문을 보다 피로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위에서는 동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밤새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렸건만 동료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간단한 방법이지만 대단해. 나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
“그러니깐 네가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나는 진즉 알고 있었지.”
“거짓말! 네놈이 나보다 멍청하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데.”
“그런데 정말 공작님은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행하시지 왜 즉위식을 코앞에 두고 움직이신 거지.”
“하긴, 그러게. 브륄 넌 뭐 들은 말 없나?”
“……빨리 들어섰으면 분명 우리를 막을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 테니까. 이렇게 허를 찌르는 게 좋지.”
고개를 든 브륄의 간단한 답에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헹. 남부 놈들 지금쯤 어찌할 바 모르고 있겠지?”
“하하. 똑똑하다 해도 설마 우리가 이 인원으로 들어설 줄은 몰랐을 테니까. 샤를의 문은 군대가 불가한 거지, 기사 무리가 불가한 건 아니니 말이야. 우리 공작님 의외로 똑똑하시단 말이야.”
“밀리언. 주군에게 무례한 말이다.”
“브륄 넌 너무 딱딱해. 당사자인 우리 각하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우리는 긴장하고 걱정해야 해. 이 인원으로 수도를 들어서면 순식간에 죽을 수 있어. 통행을 하기 위해 우리는 군대를 포기했고 위험을 감수한 거다. 떼로 달려들기라도 하면 답이 없어.”
“비실비실한 놈들 따위 내가 다 무찔러 주지. 그리고 뒤따라올 동료들도 사람들 틈새에 조금씩 섞여 들어오기로 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렇지. 우리가 누구인데. 브륄, 걱정 말라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동료들의 말에도 브륄은 걱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들이야 에셀의 이름으로 어떻게든 통과했으나 뒤에 올 동료들은 무슨 이유로 통행이 막힐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리 개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적의 소굴에서 많은 수의 적을 상대로 괜찮을까? 게다가 황궁에서 지내본바 수도나 남부의 기사들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이구. 출발하시려나 보다. 우리도 움직이자.”
브륄은 동료의 말에 생각을 접고 앞을 봤다. 그새 에셀은 휴식을 끝내고 말에 오르고 있었다.
‘한시가 급하시군.’
빠르게 말에 오르는 에셀을 보며 브륄은 고개를 저었다. 주군이 저리 구는 이상 자신들의 목숨도 어느 정도는 운에 맡겨야 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 * *
앨런은 엘리자벳의 상아색 드레스에 감탄한 듯했다. 페루스가 오래도록 보라고 걸어 놓은 드레스는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와, 정말 예쁘다. 저도 나중에 이런 옷 입을 거예요. 정말 공주님 같아.”
“……그래?”
“네. 이렇게 입고 빙글빙글.”
엘리자벳은 드레스를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드레스를 치우고 싶어 한들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엘자. 다시는 그런 자리에서 어리광 피우지 마.’
게다가 결혼식 때의 일로 페루스의 심기가 바닥에 닿아 있음을 알았기에 엘리자벳으로서는 드레스를 찢어 놓을 용기 따위도 가질 수 없었다.
‘……차라리 앨런에게라도 기쁨을 줘서 다행이야. 즐거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나마 앨런이 예쁜 드레스라며 즐겁게 구경했기에 엘리자벳은 그곳에서 위안을 찾았다.
“이런 공주님 옷은 결혼할 때 입는 거죠?”
“응. 맞아. 이런 건…… 결혼할 때 입는 거야.”
“역시! 엄마 방에서 본 적이 있어요. 저도 나중에 크면 이런 옷을 입고 결혼한다 그랬는데……. 황녀님도 결혼하신 거예요?”
“……글쎄.”
애매한 엘리자벳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뿐. 앨런은 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앨런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오렌지 꽃 화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화관을 만지는 작은 손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앨런. 그게 가지고 싶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이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욕심을 들킨 것이 퍽 부끄러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오죽 가지고 싶었는지 아이는 곧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 이리 와 봐.”
엘리자벳은 주춤주춤 다가온 앨런의 머리 위에 화관을 올렸다. 아이에게 조금 큰 오렌지 꽃 화관은 엘리자벳이 썼을 때와 다르게 뒤가 살짝 내려갔다.
“정말 주시는 거예요?”
“그래. 이제 그건 네 거야. 다만 이게 여기 없으면 안 되니깐 이곳에서 나와 있을 때만 써 보자. 약속할 수 있지?”
“네!”
앨런은 양손으로 화관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퍽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엘리자벳은 씁쓸히 웃었다.
뱅뱅 돌던 앨런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아이는 멈춘 후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엘리자벳에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
“선물 주셨으니까, 저도 이거…… 선물. 여기서 얼마 전에 주웠는데 안에 천사님이 있어요. 황녀님이랑 닮았는데…… 앗!”
작은 손에 들린 물건을 본 엘리자벳이 놀란 얼굴을 하더니 거칠게 물건을 건네받았다. 흡사 뺏는 것처럼 급한 몸짓이었다.
엘리자벳의 생소한 반응에 앨런은 혹여나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는지 목을 움츠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앨런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물건에 집중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웅얼댔다.
그리고 그런 엘리자벳의 행동에 앨런은 움츠린 목을 풀곤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엇이 누구지?’
* * *
서부의 전쟁은 치열했다. 우세리가의 영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지겨워 죽겠군. 여긴 도통 재미난 게 없단 말이야. 차라리 공성전이라도 한판 하는 게 재미있지. 이거야 원.”
그러나 타티카는 그런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크고 작은 전투가 많았다고 한들 그의 군대는 단 한 번의 패배도 맛보지 않았다.
타티카는 제 방 긴 소파에 누워 자신의 밑 누군가가 올린 서류를 한 장 한 장 뒤로 던졌다. 그가 던진 서류에는 누구의 아들자식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고, 누구의 딸자식을 어디에 팔아넘겼다는 사실들이 값이라는 숫자와 기호로 나열되어 있었다.
얼마를 그랬을까. 수십 장의 서류를 바닥에 뿌린 그는 한 장의 서류에 몸을 일으켰다.
타티카가 손짓을 하자 구석에 있던 여자 노예 하나가 재빠르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들고 있던 쟁반을 공손히 그의 앞에 올렸다.
“쯧. 이런 걸 먼저 올려야지. 하여간 일 처리들 하고는. 죽고 싶어?”
쟁반에 놓인 시가 형태의 약을 집으며 타티카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그의 앞에 서 있던 수하가 몸을 떨었다.
수하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각 서류의 순위를 매겨 올렸으니. 게다가 타티카가 말한 서류는 그가 주인에게 올릴 때만 하더라도 맨 앞장에 있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러나 수하는 재빠르게 양 무릎을 꿇고 주인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죄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타티카는 제 발치에 있는 수하의 머리를 꾹 밟으며 연기를 뿜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가 부리는 많은 이들 중에도 수하는 제법 뛰어난 편이었고 두려움이나 재물만으로 그를 섬기는 이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충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이였다. 덕분에 보통 제 수하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않는 타티카는 발치의 수하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됐고, 노원. 설명이나 해 봐. 거기 네년은 이리로 오고.”
타티카가 슬쩍 발을 떼자 수하는 한 번 더 머리를 조아리곤 일어섰다. 타티카는 노원이 일어서자 노예의 얇은 옷자락 안으로 손을 넣곤 자세를 비스듬히 했다. 세게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노예는 아픈 듯 아주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소리를 내거나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로지오 후작은 제 손자 때문에 그렇다 치고, 이자는 어떻게 넘어온 거지? 이거 쉽지 않았을 텐데. 머리도 살짝 간 놈이고, 에셀 그놈보다 더한 개새끼거든. 이거.”
“르온 공작과 크게 사이가 틀어진 것 같습니다. 그 신분에 지하로 갔다는 것도 의외인 데다 아스란의 도움으로 나왔다고는 하나 황궁에서 쫓겨나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손님으로 대우받는 것도 신전에서…….”
“신전? 하긴 신전 것들도 페루스 그놈이 싫겠지. 그래도 받은 돈이 얼마인데 대놓고 페루스 그놈한테 반대할 입장은 아닐 텐데?”
“그 새로운 내려온 자가 생각 외로 제 권력을 잘 휘어잡는 것 같습니다. 르온 공작의 세력과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수하의 말에 약을 피우던 타티카가 눈을 뜨고는 주무르던 노예를 바닥으로 밀쳤다.
“응? 그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병신인데.”
“그래서 더 빠르게 신전을 장악한 것 같습니다. 아무도 예상을 못 한 일이라……. 하지만 보여 주는 힘은 진짜다 보니 추종자들도 빠르게 생기고 있습니다.”
“하긴, 신전에 몸담는 놈들이 진정으로 미친 것들이 많지. 약도 못 당한다니까 광신도들은. 오, 내려온 자여.”
타티카는 제 머리 옆으로 원을 그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가벼운 행동과 다르게 그의 자색 눈은 빛났다.
“그래. 그렇다 치고. 그런데 그게 알렉스 그놈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놈이 배신한 게 지금 그 위대하신 분의 오라비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내려온 자가 생각 외로 알렉스 페테 그자에게 애착을 보인다 합니다. 아직 제 위치도 불안정한데 대놓고 알렉스 그자를 감싸고돈다고……. 저희에게 접촉하며 내건 조건 중 하나도 알렉스 페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하의 말에 타티카가 서류 한구석을 찬찬히 살폈다. 세세히 적힌 내용 중에는 내려온 자가 알렉스 페테를 도와준다면 신전은 그의 편에 서겠다, 적힌 내용이 있었다.
“하여간 그놈이 정상이 아니니 주변도 미쳐 돌아가는구먼. 좋아. 우리로서는 신전이 이쪽 편에 서면 손해 볼 일이 없지.”
“그럼…….”
“흐응. 우스운 일이지. 약 파는 사생아라 신성한 자신들과는 말도 못 섞을 놈 취급을 하더니. 당장 제대로 접촉해. 내 황녀님의 즉위식은 내 뜻대로 안 되겠지만, 이후는 다르지.”
“예. 알겠습니다.”
수하가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타티카는 다시 노예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참고 있었던 약 기운이 몽롱했다. 눈치 빠른 노예가 재빠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타티카는 픽 웃으며 생존 욕구로 가득한 노예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노예의 연한 회색 머리칼이 빛에 반사돼 거의 은발에 가깝게 보였다.
“우리 황녀님. 그래도 황제 폐하가 되는데 내가 가 보지도 못하고 어떡하나. 그래도 내 선물은 제때 갔겠지?”
한숨 가득한 말끝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처연함이 가득했다. 그리움을 헤아리며 타티카는 그 자신이 보낸 수십 가지의 선물들을 떠올려 봤다.
제 취향의 향유와 제 손으로 만든 미약이 섞인 차들. 속이 훤히 비치는 네글리제. 그것들을 가리기 위한 여러 벌의 드레스와 여러 종의 보석들. 제 이름을 달고 보낸다면 엘리자벳에게 도착하기도 전 페루스의 손에 스러질 것이었기에 다른 이의 이름으로 보낸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걸치고 저를 기다릴 엘리자벳을 상상하자 구음에 익숙한 노예가 버거운 듯 타티카의 밑에서 컥컥 소리를 냈다. 그러나 꿈꾸듯 제 상상에 빠진 그는 손아귀 힘을 더할 뿐이었다.
* * *
대다수의 예상과 다르게 짧은 시간에도 즉위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실질적으로 궁을 지휘하고 있는 페루스의 명 아래 즉위식은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황궁 사용인들은 바빴다. 곳곳에는 크고 작게 열릴 연회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고, 황궁에 머무를 만한 손님들의 방은 환기를 위해 모두 활짝 열어 두었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이들이 많다고는 하나 황궁만큼은 가득 찰 것이 분명했다.
샬럿은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전부터 엘리자벳을 감시하며 페루스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은 그녀는 쭉 하고 있었던 맡은 바 일에 즉위식으로 인한 자잘한 잡일까지 하게 되었다.
샬럿은 피곤함과 긴장감으로 거뭇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엘리자벳이 있을 방문을 넘었다. 바로 전까지도 잡무에 시달린 참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중앙궁 깊숙한 침실 안에는 언제나처럼 엘리자벳이 자리했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샬럿은 황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시중드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황녀를 무시했지만 샬럿은 그간의 경험으로 그러한 무례가 어떤 형식으로 돌아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황녀가 샬럿의 인사에 슬쩍 뒤를 돌아봤다. 희미한 움직임이라 아주 찰나 옆모습이 보였지만 그 순간도 참 아름답다, 샬럿은 속으로 감탄했다.
샬럿에게 뒷모습을 보인 엘리자벳은 멍하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황녀가 항상 넋이 나간 듯 창밖이나 침실 구석을 보는 일은 흔했기에 샬럿은 조용히 침실 문가에 섰다.
엘리자벳은 시중인들에게 무어라 불평을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샬럿은 그녀가 에든가 아이를 제외한 누구의 접근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멀리 떨어지는 것. 그건 감시를 멈출 수는 없는 샬럿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침실은 즉위식으로 부산한 황궁 대부분과 다르게 여전했다. 새로이 꾸며지지도 않았고 가꿔지지도 않았다. 사실 황제들이 쓰는 방인 만큼 원래부터 화려했던지라 주인의 의중이 없다면 새로이 꾸며질 필요가 없기도 했다.
엘리자벳은 아무 말도 행동도 없었다. 항상 하던 일이었지만 샬럿은 이 시간이 참 지루하다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지. 그때 생각은 못 하고 지루하다니. 나도 참. 차라리 이런 분위기가 좋지.’
엘리자벳이 한창 자해를 하고 소란을 피울 때를 생각한 샬럿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샬럿의 눈에 화려한 무언가가 잡혔다.
‘즉위식에 가지도 않으실 텐데. 도대체 왜?’
샬럿의 눈에 잡힌 것은 화려하고 위엄 있는 드레스였다. 금사와 은사로 수를 놓고 하나같이 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색 드레스는 하얀 담비 털로 장식된 붉은 망토와 함께 긴 자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자태가 어찌나 화려한지 옆에 있는 하얀 드레스는 아예 존재감이 없었다.
샬럿으로서는 저 성 하나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것 같은 드레스의 존재가 참으로 이상했다.
‘그날 넌 여기 있을 거야. 엘자. 사람들도 많고 네게 위험한 이들도 많을 테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기 머물러. 식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네가 황제가 되었다 공표할 뿐인 자리니깐.’
샬럿이 알기로 엘리자벳은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본래 그렇게 알고 있었고, 얼마 전 황제의 관을 가지고 가며 페루스가 엘리자벳에게 한 말을 직접 들었기에 샬럿은 그 사실에 일말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황제가 될 주인공 없는 즉위식이라니, 타국에서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 없는 즉위식의 전례는 이미 엘리엇 황제 때 한 번 있었기에 툴란의 귀족들은 의외로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동요하기는커녕 대다수가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엘리자벳이 황제가 되는 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황제에 으뜸가는 권력은 그녀를 권좌에 앉힌 르온 공작에게 갈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게 본다면 이번 즉위식은 진정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즉위식이었다. 르온 공작의 참여는 분명했으니 말이다.
“……저걸 치워 줘.”
샬럿이 드레스의 존재에 의문을 가질 때였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았다.
“예?”
“저걸 치워 달라고. 관은 가지고 갔잖아. 필요도 없는데 도대체 왜 여기에 두는 거야, 왜……. 나는 입을 일도 없는데…….”
엘리자벳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 드문 엘리자벳의 감정 표현에 샬럿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손만 만지작거렸다.
“제발. 치워 주면 안 돼? 따로 보관하는 곳도 있는데……. 보고 있기가 힘들어. 그리로라도 치워 주면…….”
아까와 다르게 엘리자벳은 몸을 아예 샬럿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목에 걸린 펜던트를 꼭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공작님이…….”
“샬럿? 이름이 샬럿 맞지? 넌 페루스가 언제 오는지 알고 있잖아. 그가 올 때만 이리로 옮기고……. 알다시피 나는 그의 명 없이는 침실에서 벗어나지도 못해. 내가 피할 수도 없으니깐, 부탁이야.”
내일이면 황제가 될 이였다. 그 신분에 맞지 않는 애절한 부탁에 샬럿은 기함했다. 동시에 샬럿은 평상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엘리자벳이 가여웠다.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러나 샬럿은 엘리자벳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값싼 동정에 목숨을 맡길 수는 없었다. 샬럿은 일의 경중을 알고 분수를 아는 이였다. 이는 페루스가 높이 산 부분이기도 했다.
엘리자벳의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샬럿은 엘리자벳의 심사가 한편으로는 이해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괴로울 것이 분명했다. 가족들은 다 죽고 가문은 빛을 잃었다. 오라비가 허수아비 황제였던 것도 서러울 텐데 본인도 허수아비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참담할까. 황제의 상징을 나타내는 궁도, 방도, 저 드레스도 다 싫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고작 드레스였다. 엘리자벳은 오로르 중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 이였다. 게다가 허수아비라고는 하나 툴란에서 가장 높은 신분에 오르게 될 터였다. 그런데 고작 드레스 하나에 보기 싫다 우는소리를 내다니.
샬럿은 저런 감정이 사치스럽다 여겼다. 자신의 가문은 그녀가 태어날 적부터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여러 불행한 가문들처럼 엘라르 황제나 황가의 일 때문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가문의 몰락에 무어라 불평 하나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가문은 그냥 서서히 기울다 폭삭 망했다.
불행에 탓을 할 수 있고 없고, 그 차이는 컸다. 탓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정을 분출하고 훗날 가해자에서 보상을 받아 낼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뜻했으니 말이다.
샬럿에게 그런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몰락이 가져온 폭풍은 남들과 똑같이 맛봤다. 가문은 남부 백작가로 꽤 지체 높았지만 돈도 권력도 없었다. 어디서나 귀족이 가난하면 힘든 일이었지만 부유한 남부에서 돈도 권력도 없다는 건 특히나 힘든 일이었다. 덕분에 샬럿은 저보다 높은 신분의 이들에게도 낮은 신분의 이들에게도 무시와 조롱을 당했다.
감정은 당연히 사치였다. 투덜거리거나 투정을 부리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불평 한마디 하려 해도 줄줄이 딸린 동생들이 먼저였다. 몰락한 집안의 장녀란 그런 것이었다.
샬럿은 페루스의 눈에 띄어 궁으로 들어오기 전 제 상황을 곱씹었다.
‘난 싫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지. 아마.’
심지어 시녀로 들어온 것도 페루스에게 발탁된 것도 제 뜻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동정해. 주제도 모르고.’
샬럿은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담담한 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 저 숙여진 고개가, 내려간 어깨가 신경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모로 황녀는 보고 있기가 참으로 어려운 이라 생각하며 샬럿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 엘리자벳을 외면했다.
* * *
엘리자벳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햇살이 얼굴 위로 가득 쏟아졌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곤했다.
‘……치워 줘요. 보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나는 즉위식에 참석하지도 않으니까 저런 건 필요 없…….’
‘황제의 의복은 즉위식 때만 필요한 게 아니지. 자주는 아니겠지만 몇 번이고 입게 될 텐데, 혹 마음에 들지 않나?’
‘…….’
‘저건 네 권리야. 엘자.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익숙해져야지. 난 황제가 될 네가 모든 걸 누리길 바라.’
간밤에 나눴던 페루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권리라니.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거짓말을 참 잘한다 생각했다. 모든 걸 누리길 원하는 이가 당장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즉위식에 불참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사실 즉위식 따위 참석하라 한들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페루스의 아래, 허울뿐인 황제 자리 아닌가. 가장 높다고는 하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멸감만 가득한 자리였다.
그러나 사실 엘리자벳은 모멸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어차피 페루스에게 휘둘리는 삶이었고 반항한다 한들 제 삶은 그의 뜻대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모멸감을 느낄 자존심 따위 스러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엘자.’
‘…….’
‘넌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너를 황제로 올리는지? 왜 네 신하로 남으려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렇기에 페루스의 물음 또한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황제 자리에 오른다 들었을 때 왜라는 말을 뱉기는 했으나 그 의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어떤 필요 때문에 그리했겠지.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판단에 어떤 관심도 의문을 가질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쉬어. 내일은 밤이 돼서야 올 거야.’
엘리자벳이 답을 않자 페루스는 그녀를 노려보다 침실을 나섰더랬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중요한 의미는 아닐지언정 그 자리는 엘리자벳에게 큰 감정의 동요를 줬다. 제 가족들이 차례로 앉았던 자리는 그녀의 죄책감을 시시각각 건드렸다.
“엘리엇…… 엘리엇은 그렇게 죽었는데.”
특히 엘리자벳은 엘리엇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제 삶을 강탈당하고 짓밟힌 건 더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게 제 삶인데 어쩌겠는가. 그러나 불쌍히 가 버린, 얼마 전까지 이 침상에 시체처럼 누워 있다 정말로 차갑게 식어 버린 오라비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페루스건 사라건 누가 엘리엇을 죽였건 엘리엇은 온전한 피해자였다.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다. 엘리자벳은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엇은…… 오빠는 침상에 누워 허수아비 황제라 모욕당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어. 나랑은 다르게 엘리엇은 똑똑했는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페루스를 경계하던 엘리엇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자신이 뭐라 했던가.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엘리엇에게 그를 감싸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는 멍청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녀는 오라비를 잃었다.
엘리엇과 함께했던 과거가 떠오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엘리엇은 단 한 번도 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엘리자벳은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 펜던트를 쥐었다. 앨런이 주웠다며 준 이 펜던트는 정신을 놓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지중지 몸에서 떼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엘리엇이 그려진 펜던트. 엘리엇의 물건이자 이제는 유품이었다.
엘리자벳은 엘리엇이 생전 펜던트를 항상 지녔던 것을 떠올리며 물건을 소중히 쓸었다.
“미안해. 엘리엇.”
엘리자벳은 사죄의 말을 속삭이기만 했다. 어쩌면 엘리엇은 이곳에 머물고 있는지도 몰랐다. 예전부터 자신을 지켜봐 주던 엘리엇이니깐. 엘리자벳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오라비의 이름을 불렀다.
바깥은 들뜬 사람들로 인해 부산스러웠다. 엘리온이나 엘리엇 황제 때와 다르게 중앙궁 홀이 아닌 곳에서 즉위식이 열린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들끓는 탓이었다.
‘……이곳 홀에서 즉위식이 열렸다면 더 시끄러웠겠지.’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결정에 자신도 모르게 감사했다. 이보다 소란스러웠다면 더욱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엘리자벳은 저리 들뜬 사람들이 모조리 미웠다. 그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무도 엘리엇을 가엽게 여기지 않아. 그렇게 죽었는데. 그래도 황제였는데……. 툴란의 자신들의 황제가 그렇게 죽었는데.’
멀리 여인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귀에 박혔다. 엘리자벳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이 미웠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는 자신은 더더욱 미웠다.
‘왜 아무도 엘리엇을 추모하지 않아?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당신들은 상관없는 거야?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들의 황제는 누가 되어도 상관없는 거야?’
페루스가 권리라 속삭인 드레스가 선명했다. 미움은 쉽사리 마음에 불을 질렀다. 엘리자벳은 타오르는 분기에 드레스를 노려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흐…….”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배가 아팠다. 엘리자벳은 빠르게 배를 끌어안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시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없는 듯 서 있지만 항상 존재하는 페루스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자벳은 가만히 손을 내저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손짓에 시녀가 주춤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천천히 쉬자 진통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엘리자벳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배를 쓸었다.
‘내가 무슨…….’
그러다 문득 엘리자벳은 제 행동에 온몸이 식는 것을 느꼈다.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찬물을 맞은 것만 같았다.
아이에 대한 감정이 불과 얼음처럼 시시각각 바뀐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까지 배 속의 아이를 걱정할지는 몰랐다. 배가 아픈 순간 그녀는 모든 것, 심지어 엘리엇조차 잊었다.
‘엘리엇을 생각하고 있던 주제에 배 속 아이를 걱정해?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원수의 아이를?’
엘리자벳의 감정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불안정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알았지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엘리자벳은 조금 전 행동이 무색하게 싸늘히 제 배를 바라봤다. 이제 조금씩 부풀기 시작한 배는 아직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마른 그녀의 몸에 작은 굴곡을 그리고 있었다. 앉은 상태에서 내려다보니 누워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보다도 확연했다.
“……너를 증오해. 넌 내 오라비를 죽인 이들이 내게 심어 놓은 씨앗이거든. 난 너를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을 거야.”
제 몸속 아이가 철저한 약자임을 알아서일까? 엘리자벳은 페루스에게도, 고작 시녀들에게도,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한 증오의 말을 아이에게는 쉽사리 표현했다. 스스로의 몸에 대고 중얼거리는 말에는 살기가 묻어 있었다.
“누구의 아이든 넌 내게 부정당할 거야. 나는 네가 빨리 죽어 버리길 소망해. 내 손으로 널 안아 보기 전에 그리된다면 더 좋고.”
싫다. 미워한다. 엘리자벳은 부정적인 말을 넘어 저주를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그녀의 어머니 헬렌이 그녀에게 했던 학대를 답습하는 느낌이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순간 자신에게 저주를 쏟아 냈던 헬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미운 자식을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제 살과 피를 갉아먹는 악마로 여기면 모를까.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하는 까닭은…….”
그러나 그 말에 이르러 그녀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유를 그녀도 알지 못해서였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손을 배에서 내려놓을 수 없다는 모순된 사실이 끔찍했다.
엘리자벳은 제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미친 것 같은 자신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엘리자벳은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내다 몸을 숙였다.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녹색 눈에 기괴한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한동안 가만히 숨만 쉬던 엘리자벳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전하?”
“…….”
“전하! 어디 가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황녀 전하!”
갑작스러운 엘리자벳의 행동에 그녀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움직였다. 엘리자벳은 그들에게 쉬이 막혔다.
“놔! 당장 놓으란 말이다! 내가 내 발로 간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얌전한 황녀가 갑자기 이러자 곤혹스러웠다. 오랜만의 발작인가. 엘리자벳을 잡은 시녀들은 그리 생각하며 손에 힘을 줬다.
“샬럿!”
“궁의! 궁의부터 불러!”
감시하는 이들의 대표격인 샬럿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소리쳤다. 명을 받은 시녀가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기사들에게 궁의를 부르라 말을 하기 위해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옅은 금빛 머리의 성기사였다.
“아……?”
당황한 시녀가 주춤거렸다. 기사는 그런 시녀를 슬쩍 밀치고는 엘리자벳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기사를 알아본 샬럿의 낯빛이 굳어졌다. 샬럿은 엘리자벳을 붙잡은 손을 떼곤 두 팔을 벌려 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기사는 쉽게 그런 샬럿을 밀쳤다. 좀 전의 시녀 때보다 거친 손길이었다.
“윽!”
샬럿이 옆으로 쓰려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샬럿을 보며 시녀들이 그 자리에 굳었다.
“줄리아. 뭐 하고 있어! 전하를 보호해.”
샬럿은 쓰러진 와중에도 착실히 제 할 일을 하려 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뻣뻣해진 줄리아는 샬럿의 말에 멍청한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시녀들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사이 기사는 엘리자벳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코앞에 닿은 그는 천천히 양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노예와도 같이 아주 깊이 고개를 숙였다 들곤 엘리자벳을 마주 봤다.
본래 선명히 빛나던 금빛이 더욱 빛을 뿌렸다. 다른 이를 바라볼 때면 무감한 눈이 광기로 점철된 채 이채를 띠었다.
기사는 몸이 달아오른 듯했다. 주인에게 제 쓰임을 다하고 싶다 열렬히 애원하는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떨리는 입술이 열리고 마침내 기사가 제 주인에게 경건히 말을 걸었다.
“……나가고 싶으십니까?”
* * *
황궁으로 온 이들은 즉위식 장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황궁의 중심에 위치함에도 지난 10년간 누구의 출입도 없었던 곳. 엘라르 황제가 사방에 피를 뿌리며 즉위식을 치른 장소. 그 참담함에 일을 벌인 엘라르 황제조차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는 곳.
화려한 장식과 황금 샹들리에도,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꾸며진 넓디넓은 벽도, 그 위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높디높은 천장도 건물 자체가 주는 의미를 지우지는 못했다.
“세상에.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이곳에서…….”
“소름 끼치는군.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분이 돌아가셨는데.”
“아아 저기 기틀란 후작님 표정을 좀 보세요. 그 일에 전대 후작님을 비롯해 집안 남자분들이 모조리 돌아가셨더랬죠.”
사람들은 끊임없이 수군거렸다. 그만큼 장소가 주는 의미는 대단했다. 툴란의 근간을 바꾸고 지난 10년간 벌어진 일들의 시작점.
엘리자벳의 즉위식은 이곳에서 시작될 참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또 처음이군. 엘리엇 황제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제임스는 뻣뻣이 굳은 사람들을 돌아봤다. 들뜬 얼굴을 하고 있던 이들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이곳에 초대될 만한 이들 중 ‘그 일’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드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 사람들을 살피던 제임스는 제단을 바라봤다. 제단 위에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관이 있었다.
엘라르 황제가 처음 썼다는 관은 그녀가 벌인 피의 즉위식 때도 같은 자리에 있었을 터였다.
제임스는 문뜩 저 관에 당시 사람들의 피가 묻었을까 궁금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전해지는 글에 따르면 지금 이 장소는 사람들의 피와 짓무른 살덩이로 발 디딜 틈도 손 닿을 곳도 없었다 했다. 게다가 당시 사용되었던 발락이라는 식물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필시 관에도 피가 묻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관만을 본다면 그 장면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었다기에 관은 지나치게 위엄 있었고 반질반질 윤이 났다. 항시 닦아 주는 이들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제임스는 피가 묻은 관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저걸 계속해서 황제의 관으로 두다니. 무슨 생각이시래요. 아무래도 저건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게 좋지 않았겠어요?”
“계속해서 오로르가 황위를 받는 상황인데 저것만 한 것이 어디 있겠소. 오르르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피를 잔뜩 머금었으니 저 저주받은 요물만큼 오로르의 새 황제에게 어울리는 것도 없지.”
“저주받은 요물이라……. 확실히 어울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참, 요물답게 아름답군요. 전 저 관에 박힌 루비만큼 영롱한 루비도 저 다이아몬드만큼 큰 다이아몬드도 본 적이 없어요. 소문에는 성 수십 채의 값이 들었다던데…….”
“확실히 녹이기는 아까운 물건이죠. 그 일만 없었다면 지금껏 존재했던 어떤 황제의 관보다 황제의 이름에 걸맞은 물건이었을 텐데. 안타까워라. 사실 물건이 무슨 죄겠어요. 저걸 쓰겠다 만든 사람의 잘못이지…….”
관을 보고 있었던 것은 제임스뿐만이 아니었다. 홀 안 대부분의 사람은 관을 보며 눈을 빛냈다.
‘가관이군. 조금 전까지 죽은 제 조상과 핏줄을 애달파할 때는 언제고 한낱 물건에 넋이 나가서는……. 어차피 평생이 가도 손 한번 못 가져가 볼 물건인데.’
제임스는 물건을 요물이라 칭하면서도 욕심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을 비웃었다. 관을 본 순간부터 그들은 요물이라 부르는 그것에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황녀는 오지 않는 거죠? 본인의 즉위식이잖아요. 엘리엇 황제 때는 몸이 성치 않았다고는 했지만……. 아니면 주제를 알고 알아서 피하는 것일까요? 사실 저 관은 황녀에게 너무 아깝잖아요? 당장 교수형에 처해야 할 여자가 황제라니. 나 원 참…….”
“오로르에 그런 염치가 있겠소? 있었다면 진즉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듣기로는 머리에 조금 문제가 있다 하더이다.”
“정말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연회 때 봤을 때도 이상하기는 했죠. 한마디 말도 없이 르온 공작님께 이끌리기만 하더니. 정신에 문제가 있었군요.”
“정신이 문제건 제 오라비처럼 몸이 문제건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저 관을 쓸 자격도, 이곳에 참석할 자격도 없는 여자인 것을. 아마 이 자리에서 저걸 썼다간 제 가문의 죄를 못 이기고 목이 뚝 부러졌을 테지.”
“그럼요. 맞는 말씀이세요. 게다가 왜 그 목숨도 창부 짓을 해서 부지했다는 게…….”
사람들은 즉위식이 진행됨에도 관에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담긴 것 중 대부분은 관과 관의 새로운 주인에 관한 것이었다. 제임스는 질 나빠지는 말들을 주워들으며 저 멀리 단상에 앉아 있는 페루스를 살폈다.
단상 위 중심에 황제의 좌와 관이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원로원과 고위 귀족들 몇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페루스는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앞에 당당히 홀로 앉아 있었다.
본래라면 단상 위에는 황제와 시중드는 몇몇 이들만 있어야 했지만 이미 지난번 즉위식 때 그 전통은 깨졌다. 어차피 진정한 권력을 가질 이들은 단상 위 앉아 있는 이들이 될 터였기에 아무도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페루스의 심기는 퍽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좌가 빈 상황에서 페루스는 꼭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어느 한 곳만 보고 있었다.
페루스가 보고 있는 것은 여러 사람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좌 바로 앞에 놓인 관이었다. 평소와 같은 냉랭한 푸른 눈은 일순 무감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주인이 무감해 보이는 가면을 일부러 덧씌웠다 확신했다. 페루스는 다른 이들처럼 관을 보며 물욕이나 권력 따위를 갈망하는 욕망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그것들은 그의 손에 있는 것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그가 관을 가지기를 원했다면 이미 저것은 남부 어느 창고에서 구르고 있었으리라.
‘화가 나셨나? 하지만…….’
그러나 그 냉한 눈에는 물욕이나 권력욕과는 다른 기기한 욕망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엇에 관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임스는 주인의 집요한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툴란에 새 영광을 가져다줄 축사가 있겠습니다. 본래 축사는 새로이 자리에 오르신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진행하실 사항이지만…….”
페루스의 기묘한 눈빛은 사제가 그에게 진행을 넘겨줄 때 끝났다.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인을 보며 허리를 바로 했다. 황제가 읽어야 하는 툴란의 위대함을 주인이 대신 읽는 것을 보니 새삼 자신이 권력의 최중심에 있음이 느껴졌다.
“오, 위대한 툴란. 이 땅 신께서 만드신 많고 많은 나라 가운데 가장 중심에 선…….”
시작은 흔했다. 건국제와 같이 큰 행사 때 읽는 축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페루스의 입에서 툴란의 영광을 찬탄하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무궁한 영광을 오래도록…….”
찬사는 30분을 넘어섰음에도 한참 남았다. 사람들은 경건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가끔 지루함을 참지 못한 이들은 하품했다.
‘차리리 일을 하는 게 낫지.’
제임스 또한 슬슬 지겨워지는 참이었다. 저 축사는 그도 참여한 작품이었다. 이 자리가 있기 전 수십 번은 읽고 들었기에 일부 내용은 외고 있을 지경이었다. 제임스는 주인의 입 모양을 바라보며 축사를 감상하기보다는 오늘 일정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툴란의 영광과 함께 영원히 우리들의 추종과 충성을 받아들일 위대한 오로르시여…….”
그렇게 또 몇십 분이 흘렀다. 단상 위 페루스는 이제 황가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오로르를 찬양하는 말에 축사를 경건히 듣고 있던 사람 중 일부가 분통을 터뜨렸다. 대놓고 큰 소리를 내거나 행동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홀 안 누구나 들을 만한 소리였다.
그 덕에 홀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제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그냥 빼라 말씀드렸건만.’
“큰일 났습니다! 백작님!”
제임스가 축사를 읽는 페루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쉴 때였다. 어수선해진 분위기와 동시에 수하 하나가 제임스의 곁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쉿.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데, 무슨 일인가.”
“그, 그게 말입니다. 지금 여기로…….”
불안한 표정의 수하는 주변을 살피더니 귓속말로 급히 말을 쏟아 냈다.
“그…… 황녀께서 여기로 오고 계십니다.”
“뭐?”
수하에 말에 제임스는 방금 자신이 한 경고도 잊은 채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의 근처에 있던 이들이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쏠린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임스는 단상 위 주인을 한 번 보고는 입술을 물었다. 지금 당장 보고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어디까지 오셨느냐?”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서 구석으로 빠르게 빠졌다. 그가 계획에 없는 움직임을 보이자 단상 위 페루스가 의아한 빛을 보였다.
“제가 들었을 때는 이미 중앙궁을 벗어나셨다고 합니다.”
“멍청하기는! 말이 되나. 거길 지키는 게 몇 명인데!”
“그것이…… 도, 도운 이들이 있답니다. 신전 쪽 인물들인데…….”
쾅―
수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홀의 출입문이 갑작스레 열린 탓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뒤로 향했다.
커다란 문은 처음 사람들을 받을 때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황녀…….”
그리고 열린 문 중앙에 선 이를 보며 제임스의 잇새에서는 낭패스러운 소리가 흘렀다.
* * *
엘리자벳의 꼴은 우습다 못해 경악스러웠다. 단색의 얇은 드레스는 거의 잠옷에 가까웠고 아름다운 색을 지니긴 했으나 머리칼은 풀어 헤쳐진 채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었다.
“세상에 황녀 전하 아니에요? 여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꼴이 저게……. 대체 무슨 일이죠?”
갑작스레 등장한 주인공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엘리자벳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엘리자벳의 얼굴은 차림새 못지않았다. 눈물 자국이 가득한 볼 위 녹색 눈은 흐리멍덩한 동시에 핏발이 서 있었고 입술은 얼마나 짓씹었는지 여러 군데가 터져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인가 보이. 저 꼴이…….”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온 걸까요. 세상에. 무서워요.”
그리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황녀가 미쳤다는 소문을 확실시하게 되었다.
“…….”
단상 위 페루스는 아무 말 없이 제게 다가오는 엘리자벳을 봤다. 그녀가 들어온 이래 그의 축사는 멈춰 있었다. 그는 엘리자벳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출입문 쪽에 서 있는 기사를 힐끗 봤다.
기사의 존재로 엘리자벳이 어떻게 이리로 왔는지 알게 된 페루스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그는 홀을 살피며 표정을 갈무리하곤 단상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자벳이 단상을 내려온 페루스의 앞까지 닿았다. 페루스는 자신의 코앞에 서 있는 엘리자벳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어색함이 전혀 없는 모양새였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의 이상한 기류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장면에 아까처럼 무슨 일이냐 의문을 제기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의 눈은 더욱 커졌다.
짝―
먼지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은 적막 속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스쳤다. 동시에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거세게 올린 엘리자벳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파리하던 뺨은 그새 분노로 점철된 열이 올라와 있었다.
오히려 따귀를 맞은 페루스의 얼굴은 여전했다. 수려한 얼굴의 뺨이 붉어지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페루스의 표정도 자세도 여전했기에 어떤 이들은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인가 눈을 비볐다.
“……끔찍해.”
“…….”
“엘리엇을. 나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여기서 이러면 즐거워?”
“…….”
“엘리엇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 오빠는 당신들한테 죽어 차가운 땅에 묻혔는데! 여기서 이렇게 떠들고 있어?”
페루스의 시선이 힐끗 드러난 엘리자벳의 목을 더듬었다. 훤히 드러난 목 사이로 눈에 익은 목걸이 하나가 그의 시선에 잡혔다.
아, 저것 때문이군. 페루스는 이 예상치도 못한 난리의 원인에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
“죽였으면! 그렇게 죽였으면 제대로 추모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엘리엇이 땅에 묻힌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나를 그 자리에 앉혀!”
페루스의 비소에 엘리자벳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대로 페루스의 옷깃을 세게 잡은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절규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이 날카로운 가운데서도 구슬펐다.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가지고 놀 거야?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이렇게 당신 뜻대로 이렇게!”
페루스는 구겨지는 예복에도 개의치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을 향하는 분노와 원망에도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그게 너무도 분했다. 자신은 산 채로 미쳐 가며 이렇게 발작하는데 그는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다. 자신의 발악조차 그에게는 유희 같아 절망스러웠다.
오랜만에 격렬한 감정을 토해 낸 엘리자벳이 휘청거렸다. 페루스는 그제야 자세를 풀고 빠르게 엘리자벳을 낚아챘다.
“흐으…… 놔.”
엘리자벳은 숨을 헐떡이다 못해 기침을 토해 내면서도 페루스를 밀었다. 그와 맞붙은 피부가 도려내고 싶을 만큼 끔찍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여느 때처럼 엘리자벳의 말을 무시했다. 놓으라는 말을 듣지 못한 듯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손목을 더욱 꽉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단상을 오르는 계단을 향했다.
“놔! 놓으라고!”
잠시간의 표출로 지쳐 버린 육체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이끄는 대로 계단을 오르고 황제의 좌로 끌려갔다.
“아윽!”
단상을 오른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억지로 권좌에 앉혔다. 크고 화려한 권좌는 푹신했지만 등받이는 세공으로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그곳에 부딪친 엘리자벳이 신음 소리를 냈다.
“놔! 싫다고 하잖…….”
“여기 앉으려 저놈까지 꼬드겨 온 거 아닌가?”
눌린 어깨 위 손을 뿌리치려 발악하는 엘리자벳을 향해 페루스가 말했다. 엘리자벳에게만 보이게끔 숙인 얼굴은 좀 전의 무감함이 싹 사려져 있었다.
“오고 싶었으면 진즉 말하지 그랬어. 엘자. 그랬다면 네가 직접 오기 전에 내가 데리러 갔을 텐데. 황제를 데리러 가는데 적어도 공작이 나서야지, 일개 기사가 움직이는 건 보기에 그렇잖아?”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섬뜩했다. 온몸에 돋는 소름에 엘리자벳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페루스를 올려다봤다. 거대한 뱀에 몸이 휘감긴 기분이었다.
“관을 가져와. 폐하께서 축사를 읽으시기 전에 격식을 갖추셔야지.”
얼어붙은 가운데서도 페루스의 시선을 받은 시종이 움직였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며 관을 받침대째로 들고 옮겼다. 혹여나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목이 잘릴 일임을 알았기에 시종의 발은 현저히 느렸다.
“무겁군. 네 작은 머리가 걱정될 정도야. 엘자.”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응시한 채로 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두 손에 잡힌 관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관이 엘리자벳의 은발 위로 올라갔다. 관의 무게에 엘리자벳이 일순 고개를 휘청거렸다. 누군가 말한 대로 잘못하다간 고개가 뚝 끊어질 기세였다.
“뭣들 하나. 다들 앉아서는. 새 황제께서 관을 쓰셨다. 당장 일어서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충성을 맹세하라!”
엘리자벳의 머리 위로 관을 씌운 페루스가 뒤를 향해 일갈했다. 뻣뻣이 굳어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 하나둘 일어섰다.
“황제 폐하 만세! 오래도록 툴란을 다스리소서.”
“황제 폐하 만세! 오래도록 툴란을 다스리소서.”
“황제 폐하 만세! 오래도록 툴란을 다스리소서.”
세 번의 찬사가 끝나고 사람들의 허리가 일제히 깊이 숙여졌다. 다들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춘 모양새였다.
듣기 싫은 찬사와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 엘리자벳은 토악질이 나왔다. 몰려오는 구토감에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숙이려 하자 페루스의 손아귀가 움직였다. 그새 권좌의 뒤로 간 그는 엘리자벳의 어깨를 잡고 팽팽히 당겼다. 덕분에 엘리자벳은 허리를 강제로 세워야 했다.
“엘자. 넌 변덕이 너무 심해.”
입을 막은 엘리자벳의 뒤에서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죽은 듯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오늘은 내가 네 입을 강제로 틀어막기라도 한 듯 입을 놀리고.”
“우욱…… 윽.”
“불만 하나 없다는 듯 얌전히 굴더니 갑자기 오라비를 찾으며 스스로 네 즉위식을 망치질 않나.”
혀를 차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엘리자벳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대신해 고개를 젖혀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노려봤다.
“……도통 네 변덕에 맞출 수가 있어야지.”
엘리자벳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머리 위 관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런, 조심하셔야지. 폐하. 의복도 갖추지 못했는데 관까지 없으면 무엇으로 증명하겠어.”
페루스는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곤 두 손으로 관을 꾹 눌렀다. 흔들거리던 관이 누르는 힘에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관을 썼으니 축사를 읽어. 그리고 내 영원한 충성을 받는 거야. 기꺼이 네게 무릎을 꿇지. 황제 폐하.”
충성이라는 말에 엘리자벳은 기가 찼다. 자신이 왜 서 있기만 해도 구역질 나는 이리로 달려왔는데!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조금이라도 당황했으면 했다. 그녀는 그가 계획한 즉위식을 망치며 엘리엇을 나름대로 추모하려 했다. 물론 한 것이라곤 추모라기보다는 미친 듯 감정을 토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로써 네 가문은 영원히 승리하는군. 엘자. 축하해.”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페루스가 한 번 더 관 위로 손을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관에 불쾌함이 쌓여 더는 견디기 힘든 무게가 느껴졌다.
엘리자벳은 양손을 머리 위로 가져갔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부어오른 손과 대조되어 선명히 느껴졌다.
쨍깡―
쇠붙이가 바닥과 부딪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보석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처음으로 페루스의 눈이 커졌다. 위를 올려다본 엘리자벳은 그 표정에 일순 희열을 느꼈다.
관은 단상 위 바닥을 굴렀다. 무게 덕에 멀리 가지는 못했으나 단단한 바닥에 부딪친 관은 일부가 일그러지고 망가져 있었다. 무게와 값에 비해 매우 연약한 내구도였다.
“너…….”
페루스의 얼굴에는 깊은 낭패감이 어렸다. 그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고 엘리자벳을 노려봤다. 내가 저걸 네게 무슨 마음으로 넘겼는데!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관은 페루스가 꼭 원했던 것이었다. 저 물건 때문에 가문이 몰락하고 핏줄이 모조리 죽어 나갔다. 오로르가 어떻게 했는가. 저것 하나 독점하겠다, 그 사달을 냈다.
그러니 그로서는 저 관을 자신이 차지하고 오로르에게 주지 않는 것이 진정한 복수의 큰 조각이었다.
하지만 페루스는 평생 저 관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끔찍한 서약에 묶여 기회가 있다 한들 욕심조차 내지 못하는 물건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원하는 엘리자벳으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영 저 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래서 수하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 준비하는 과정도 막지 않았다.
‘도대체 왜 더는 나아가지 않으십니까! 버리십시오! 황태자도 황녀도 죽여야 합니다!’
‘황녀 때문이십니까?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고작 여자 때문이십니까?’
‘버리지 못하신다면 황녀는 노예로서 취하시고 그 자리에 오르십시오. 처음 저희에게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발버둥 쳐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았다. 그랬기에 페루스는 자신이 엘리자벳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 인정했을 때 저 관을 영영 포기하자 마음먹었다.
‘……나는 황제가 될 수 없다. 다음번 황제는 황녀의 차지야.’
어차피 그는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고 그럴 바에야 지금껏 고생했던 엘리자벳에게 일종의 보상으로 주는 것이 좋겠다고 페루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주겠다 마음먹었다 한들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달려온 목표 중 가장 큰 것을 버렸는데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문제였다.
싫다는 엘리자벳 앞에 황제의 예복을 가져다 놓은 것도, 안전을 핑계로 그녀가 즉위식에 불참하게 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자신의 작은 심술.
그러나 한편으로는 엘리자벳이 제가 지으라 명한 드레스를 입고 망토를 걸치기를 바랐다. 제 손을 잡고 즉위식에 참석해 주기를 바랐다.
‘넌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너를 황제로 올리는지? 왜 네 신하로 남으려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랬기에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제게 저 질문을 해 줬으면 하고 내심 바랐다.
‘네게 큰 양보를 하는 거야. 엘자.’
그런 답을 하면 치졸한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좀 더 속 시원하게 양보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자비를 베풀어 그녀를 즉위식에서 가장 빛나는 이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를 세상 누구보다도 귀애하기에 네 손에 가장 큰 영광을 쥐여 주고 나는 신하로 남는 거야. 너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네게 영원히 무릎 꿇고 네 손등에 정중히 키스하길 마다치 않는 거야.’
또한 그녀에게 직접 관을 씌워 주고 구애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엘리자벳이 저를 다시 처음처럼 봐 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사내를 마다할 여인은 없으니깐.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의 예상을 아주 엎어 버렸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관을 보며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저 질문을 할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이 없으니 그가 그녀에게 관을 바치며 구애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영영 이렇게 끝나면?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
어렵게 바친 제물이 거부당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몰려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넌 왜 알아주질 않아.
땅이 훅 꺼지며 영영 발 디딜 곳을 잃은 기분이었다. 페루스는 순간 큰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었다.
몸이 떨리는 것과 동시에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양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울 듯 말 듯 한 와중에도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엘리자벳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인상을 구겼다.
“다시 써. 엘자.”
페루스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이는 흡사 비는 꼴이었다.
결국 페루스는 구르고 있는 관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엉망으로 망가진 관을 보니 비참함을 넘어 비통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아까처럼 관을 씌워 주기에는 다시 거부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컸다. 만약 다시 던져 버리면? 그는 결국 관을 양손으로 꾹 쥔 채 엘리자벳에게 말했다.
“……네 몫이지 않나. 내가 양보한. 내 마음이지 않아.”
허탈한 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냉기도 오만함도 없었다. 페루스는 여러 사람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엘리자벳에게 애원하듯 말을 붙였다.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내 수하들이. 저 뒤에 서 있는 저들이 내게 뭐라고 하는지 아나?”
“…….”
“왜 내가 이걸 차지하지 않느냐. 가문의…… 그 수많은 피는 잊었나, 항상 물어.”
“…….”
“왜겠어?”
터져 나온 진심은 단단했던 그의 오랜 아집을 무너뜨렸다. 굳건했던 무릎 한쪽이 꺾이고 페루스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완벽히 몸을 낮춘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엘리자벳의 무릎 위에 관과 제 손을 함께 올렸다.
“넌 관심도 없었겠지만…… 내가 이걸 차지하려면 너를 죽이거나 노예로 꿇려야 하는데, 너를 베어야 하는데…….”
물론 엘리자벳을 베어 죽인다 한들 서약에 묶인 페루스는 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과 오만함을 내버린 채 굴욕스럽게 매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교묘히 머리를 굴려 계산을 마쳤다.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러지 못해. 너를 베어 죽인다니…….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나는 너를 아껴. 너를 귀애해. 네가 소중해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굳이 엘라르와 엮인 서약의 비밀을 밝히지 않아도 많은 것을 잃을 터였다. 복수를 외치는 지지 세력도, 체면도, 자존심도 모두 크게 상실하겠지. 그러니 가장 차지하고 싶은 목표라도 쟁취해야 했다.
마음이 여린 이니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사랑해. 엘자.”
그는 계산된 패배를 선언했다. 엘리자벳의 눈이 커졌다. 혼란에 흔들리는 녹색 눈을 본 페루스는 치욕스러운 와중에도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내가 네게 바치는 이걸 받아 줘. 이 관을 쓰고 내 위에 군림해 줘. 나의 황제 폐하.”
아아, 그래도 넌 아직 내 손안이구나. 내 이 불안감은 스러질 것이로구나. 내가 너를 놓지 않는다면 너 또한 나를 놓을 일 따위 없겠지.
그러나 마음도 세상일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신은 가장 중요한 순간 농간 부리기를 좋아하는 족속들이었고 지금 순간 페루스를 골려 줄 것을 택했다.
“저들은 누구죠?”
“즉위식에 저런 복장이라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자리를 피해야…….”
페루스가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엘리자벳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사들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저 문양 눈에 익은 듯한데…….”
향내 가득한 홀을 메운 바람 냄새, 잘 정돈된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기사 무리. 그리고 무리의 가장 앞 칠흑 같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보고만 있어도 오금이 떨리는 기세를 가진 사내.
“에셀 라세르…….”
누군가 신음처럼 사내의 정체를 말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홀 안에서도 앞을 차지한 세력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고 뒤쪽에 모여 있던 아주 소수의 무리는 얼굴을 활짝 폈다. 그리고 곳곳에 딱히 무리 짓지 않은 이들은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흥미미진진한 표정을 했다.
엘리자벳의 시선도 자연스레 페루스의 뒤로 흘렀다. 페루스는 제게서 시선을 거둔 엘리자벳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음영이 드리운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우아하게 돌아간 몸이 엘리자벳의 앞을 막아섰다. 그 덕에 엘리자벳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에셀을 볼 수 없었다.
* * *
긴 그림자가 빠른 걸음과 함께 점차 짧아졌다. 급히 왔는지 에셀이 몰고 온 바람 냄새에는 거친 숨의 열기와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도 함께였다.
에셀은 자신을 보는 수많은 눈에도 한 곳만을 바라봤다. 비록 가려져 있었지만 단상 위에는 그가 지난 몇 달간 그리던 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곧 전쟁이라도 벌일 듯 무겁고 예기 넘치던 남자의 기세가 단상 앞에서 변한 것을 느꼈다.
위를 올려다본 에셀의 눈에는 환희, 비통함, 분노 등 여러 감정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하염없이 여인의 드레스 자락을 보다 단상을 꾹 쥐었다.
단단한 몸이 가볍게 단상을 올랐다. 긴 다리가 바닥에 가뿐히 착지함과 동시에 어두운 빛의 망토가 뒤로 휘날렸다.
“용케 제시간에 도착했군.”
먼저 말을 건넨 것을 페루스였다. 엘리자벳의 앞을 막아선 그는 아직 몸을 일으키기 전인 에셀을 냉혹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오만한 어투에 에셀은 짧게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를 보는 페루스와 달리 에셀은 페루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엘리자벳 앞을 가로막은 페루스를 피해 빠르게 권좌 옆으로 다가갔다.
여러 감정으로 복잡했던 얼굴이 엘리자벳을 보자 일그러졌다. 헝클어진 머리. 자리에 맞지 않은 얇은 옷. 그리고 수척한 뺨과 얼굴 가득한 눈물 자국.
“엘자…….”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참담함이 가득했다. 마음 편히 있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직접 목격하고 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거의 잠옷에 가까운 얇은 옷과 훤히 드러난 목을 살핀 에셀이 제 망토를 벗어 대충 털어 냈다. 그리고 떨고 있는 엘리자벳의 몸을 덮었다.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군. 먼지 구덩이에서 구르고 온 것을 씌워 드리다니. 치우는 게 좋겠어. 공작. 여기는 아무것이나 주워 입는 그대의 고향과는 다르거든. 고향에 오래 머물고 있다 보니 자리에 맞는 격을 잊은 모양이지?”
바로 옆에서 빈정거리는 말이 들렸다. 그러나 에셀은 제 고향을 모욕하는 말에도 잠자코 있었다.
사람들은 단상 위 긴장감에 숨도 쉬지 못한 채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는 황제가 된 황녀와 르온 공작. 조금 전 그 두 사람 사이의 일도 경악하다 못해 믿지 못할 광경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라세르 공작의 합세라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그들은 모가지를 길게 빼고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엘리자벳 또한 에셀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황한 채 그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봤다. 그러기를 한참. 엘리자벳은 어느새 제 키보다 훨씬 긴 망토에 둘둘 감긴 모양새를 하게 되었다.
“그 상처는…….”
적막을 깬 건 뜻밖에도 엘리자벳이었다. 에셀이 망토를 여며 주는 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계속해서 신경 쓰던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눈가에 길게 난 상처는 수려하고 서글서글했던 인상을 다소 거칠어 보이게 하고 있었다.
“신경 쓸 게 아니야. 그보다 이제 좀 따뜻한가. 입고 있기에 좀 더럽겠지만 혹여나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깐.”
따뜻한 말과 망토가 주는 열기에 엘리자벳은 어쩐지 뭉클했다. 과거에 저를 챙겼던 그가, 몇 달 전 용서를 빌며 기다려 달라던 그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무슨 소용일까.
‘그도 마찬가지인걸…….’
엘리자벳은 아무 말 없이 에셀의 상처에서 시선을 거뒀다. 망토 속 손에 잡힌 목걸이의 차가움이 그녀에게 그보다 더 시린 현실을 깨우치게 해 줬다.
한바탕 소란을 피운 것이 조금 전인데 급격하게 무력함이 밀려오며 온몸에서 힘이 사라졌다.
엘리자벳은 저조차 모르는 제 심경의 변화가 혹 임신 때문인가 자문해 봤다. 궁의는 임신 중 급격한 심경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몇 번이고 말했다. 그러나 임신으로 인한 것이라 백번 양보해 봐도 자신의 상태는 지나쳤다.
‘……내가 미쳐 가는구나.’
엘리자벳은 자신에 대해 덤덤히 답을 내렸다.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말과 행동이 평상시와 달라지는 것.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 인정하고 나니 그렇게 뻔한 답도 없었다.
에셀을 빤히 바라보던 녹색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닥을 향했다.
에셀은 그 모습에 애가 탔다. 차라리 화를 내 줬으면 했건만. 왜 이제 왔냐. 죽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에셀은 차라리 엘리자벳이 그리 화를 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렇게 죽은 듯 힘없는 모습은 몇 달 전 떠날 때와 꼭 같았다. 아니 더 심해진 것 같았다. 파리한 안색과 멍한 눈동자가 이미 삶에 대한 의지를 잃은 것 같아 에셀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공작. 그만하고 비키지. 아직 식이 끝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줘야 아나?”
상황이 초조한 것은 페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오만함을 되찾은 그는 구경하듯 두 사람을 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말을 붙였다. 자신을 뺀 채 엘리자벳이 다른 누군가와 있는 꼴은 그 역시 두고 보기 힘들었다. 특히 에셀 라세르, 그라면 더더욱 그랬다.
“몸이 이러신데 식을 진행하겠다고? 네놈은 여전히 마음대로군!”
“이 자리가 어디라고 감히 고함을 치나. 그리고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내가 이리로 모신 것이 아니야. 직접 제 발로 오신 거지.”
“그걸 내가 믿을 것 같나!”
“잘 알 텐데. 나는 지금 이 시각 이 자리가 비어 있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야. 오로르의 성을 가진 새 황제가 내 허수아비라 만천하에 알려야 한이 풀릴 참이거든.”
페루스는 조금 전의 구애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복수를 입에 담았다. 제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엘리자벳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폐하께서 자리에 계셔 가장 크게 덕을 본 이는 그대가 아닌가. 만약 여기 안 계셨다면 어쩌려고? 설마 저 기사들을 데리고 중앙궁이라도 쳐들어가려 했나? 그것도 좋았겠군. 그랬다면 야만족과 결탁해 황제를 시해하려 한 공작을 벨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에셀이 엘리자벳을 살피며 페루스를 노려봤다. 그러나 페루스는 눈 하나 깜빡 않은 채 손에 관을 쥐고 에셀과 엘리자벳에게만 들리게끔 말을 이었다.
“식이 끝나지 않았어. 어차피 공의 목적도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에 있겠지.”
새 황제가 즉위하는 날, 그 자리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못 하고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즉위식 당일 황제의 신체에 입을 맞추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몇몇 고위 귀족들과 허락된 측근들만의 특권으로 그 자체가 큰 의미였다.
특권을 부여받은 이들은 별다른 조건 없이 중앙 원로원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으며 황궁을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정 이상의 높은 자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반대로 특권을 누리지 못한 이들은 공후작쯤 되는 고위 귀족이 아니라면 평생이 가더라도 중앙 권력에 다가가기 힘들었다.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이었지만 시작을 아는 이들은 모두 서약과 특권의 상관관계에 대해 납득했다.
서약의 시작은 대대로 네 가문이 황제를 번갈아 가면서 할 당시 제 지역 기반 세력에게 힘을 실어 주고 다른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황제를 낸 세력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나아가 제 세력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다른 세력의 즉위식 참석을 막았다.
그만큼 서약이 주는 의미와 특권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엘라르 오로르의 즉위식 사태 이후로는 전만큼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동부를 제외한 세력들은 우두머리를 잃었으며 황제위는 독점됐다. 더는 서약이 강력할 이유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퇴색된 규율이라고 한들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기에 전 황제였던 엘리엇의 경우 침대에 누워 페루스가 고른 몇몇 이들의 충성 서약을 억지로 받아야 했다. 서약의 시작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다.
“아니면 지금 네 세력으로는 엘자 곁은커녕 황궁에 머무를 자격을 갖추기도 쉽지 않겠지. 그러고 보면 참…… 영리한 건지 멍청한 건지.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목숨을 담보로 걸다니 말이야.”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꼭 그런 걸 계산하고 달려온 것은 아니었기에 에셀은 저도 모르게 엘리자벳을 봤다.
“엘자. 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에셀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페루스는 행동을 개시했다. 엘리자벳 가까이 다가온 그는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엘리자벳의 머리 위에 다시 관을 씌웠다. 그리고 엘리자벳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살짝 쥐었다.
“폐하…….”
“각하! 무엇 하십니까! 빨리 무릎을 꿇으세요! 빨리요!”
단상 밑에 있던 브륄이 에셀에게 고함을 쳤다. 즉위식의 첫 충성 서약은 황제 다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황제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 했다. 그렇기에 늦게 왔다면 모를까 당장 자리에 함께 있는데 양보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황제 폐하.”
브륄의 고함에 에셀이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엘리자벳의 나머지 손을 쥐었다.
“당신의 종이 충성을. 만수무강하소서.”
“당신의 종이 충성을. 만수무강하소서.”
페루스의 말이 조금은 빨랐으나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들의 서약은 엇비슷했다.
두 사람은 입술을 하얗고 가녀린 손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는 무릎을 꿇는 같은 자세였을지언정 가까이서 본 두 사람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페루스는 몸을 숙이고 작은 손에 입술을 꾹 댄 순간에도 고개를 완전히 숙이지 않았다. 위로 향한 시선은 어떻게든 엘리자벳을 보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 했으며 입술에서는 무언가 빨아 먹듯 습기에 찬 진득한 소리가 났다. 단상 밑 누구도 페루스의 모습에서 충정을 찾을 수 없었다.
반면에 에셀의 자세는 책에 나온 정석과도 같았다. 그는 몸도 고개도 최대한 깊게 숙인 채 눈을 감고 엘리자벳의 손에 입을 맞췄다. 최대한 힘을 뺀 채 손을 잡은 그는 입술 또한 닿을 듯 말 듯 가볍게 떨고 있었다. 온몸을 다해 제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종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앞의 역사서에서도 앞으로 있을 역사서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엉망인 몰골로 권좌에 앉아 있는 황제와 그녀가 쓰고 있는 부서진 관.
위엄과 기품 따위 찾아볼 수 없는 황제에게 동시에 충성을 맹세하는 두 명의 젊은 권력자.
후대의 사람들이 본다면 거짓으로 쓰였다 할 만큼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