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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원하는 것(과거 편) 下 (12/15)

[9장] 원하는 것(과거 편) 下

고작 한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무려 1년을 누워 있던 몸이었다.

‘엘자!’

그러나 가야 했다. 엘리엇은 한순간이면 무너질 몸을 가까스로 지탱한 채 발을 움직였다.

우당탕―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이를 악물었음에도 눈앞이 흐려지더니 몸이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으…….”

고작 넘어진 것이긴 하나 약해진 몸에는 충격이 컸다. 울컥하고 참아 왔던 무언가가 엘리엇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폐, 폐하.”

앳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눈동자만 굴려 옆을 보니 안절부절못하는 아이가 보였다. 벨의 옆에서 몇 번 보았던 아이였다.

‘하! 그 많던 개새끼들은 어찌하고…….’

시시각각 저를 감시하던 눈들이 떠올랐다. 시체처럼 누워 눈만 뜨고 있는 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이들은 단 두 부류였다. 하나는 그 지긋지긋한 벨 라세르였고, 또 다른 하나는 페루스 그놈이 붙인 것이 분명한 궁인들이었다.

“히익!”

핏줄이 터진 눈이 매서워졌다. 그 바람에 엘리엇을 부축하려던 아이는 손을 내밀다 말고 뒤로 물러섰다.

아이의 반응에도 엘리엇은 개의치 않았다. 이를 갈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팔이 아팠으나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픔 때문인지 눈앞은 전보다 선명해져 있었다.

“엘자…….”

새어 나온 목소리가 누군가를 불렀다. 내 핏줄. 내 누이. 세상 하나뿐인 내 것. 엘리엇의 발걸음이 궁 입구에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더 가면…….’

철컹―

“돌아가십시오. 폐하.”

그러나 입구로 채 향하기도 전 검 두 자루가 검집째 겹쳐져 엘리엇을 가로막았다. 엘리엇은 감히 황제를 막아선 자들을 노려봤다. 우습게도 엘리엇을 막아선 이들은 황궁 기사단을 의미하는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당장 비켜.”

진득한 습기와 함께 쉬어 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엇을 막아선 이들은 입가에 피를 흘리는 그를 보며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철저히 명을 받았는지 그들은 눈을 굴리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명백한 거부였다.

“네놈들이!”

엘리엇이 팔을 휘둘렀다. 야윈 손이 검집에 부딪혀 쩔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튕겨 나왔다.

‘쳐 죽일 것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엘리엇의 손은 벌써 푸르스름해지고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쥔 채 엘리엇은 앞을 노려봤다.

까득―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검 한 자루 없는 데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저들 중 한 명도 뚫기 힘들다는 것을.

‘황녀께서 사경을 헤매는 것쯤은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엘리엇은 포기하지 않았다. 멍이 든 손이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엘리엇.”

손이 다시 휘둘러지기 전 누군가 그를 불렀다. 저 못지않게 쉬어 버린 목소리에 엘리엇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랬지?”

그걸 왜 내게 묻나. 징글징글한 네 핏줄에게 물어야지. 엘리엇은 저를 부른 이를 보며 분노에 차 그리 소리치려다 검은 눈에 입을 닫았다. 검은 눈은 본래의 색에서 더욱 까맣게 죽어 있었다.

“벨이 네게 뭘 그리 잘못했나?”

“…….”

“그 아이가 한 거라곤 네게…… 네게 마음을 준 것뿐이질 않나. 그런데…….”

“…….”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저리 죽을죄인가!”

분에 찬 억양과 다르게 말끝에는 애원이 묻어 있었다.

“…….”

절절히 묻는 말에 엘리엇은 잠시 고민했다. 에셀은 그가 본 어떤 이들보다 선한 이였다. 선천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멍청할 만큼 선한 구석이 있었다.

“내게 설명을…… 설명을 좀 해. 벨에게 대체 왜 그렇게까지…….”

지금 당장 속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면 그는 자신의 편에 설 것이었다. 거짓임을 알아도 분명 속아 넘어가겠지.

“그 아이가 싫으면 싫다 말하라 하질 않았나. 분명 몇 번이나 물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잔인한가?”

그러나 어쩐지 엘리엇은 그러기가 싫었다. 이렇게 궁지에 몰려 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거짓을 말하기 싫었다.

‘……왜?’

“넌 내 주군이기 이전에 친우가 아니었나?”

에셀은 엘리엇을 저버리려 했다. 차가워진 벨의 시신 앞에서 그리 약조했다. 그러나 막상 기사들에게 막힌 그를 보고 있자니, 처지가 가여워진 그와 닮은 누군가 떠올라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 안의 증오를 누르고 가까스로 엘리엇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

“엘리엇. 제발…… 내가 너를, 아니 너희 남매를, 엘자를 계속 지키게 제발 말을…….”

답을 고민하던 엘리엇은 에셀의 입에서 엘리자벳이 나오자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잊을 뻔했지. 에셀 결국 너도…….’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사실이 인지됐다. 엘리엇은 에셀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그를 믿지 않았다. 에셀 그가 엘리자벳을 보는 눈은 엘리엇 그 자신과 같았다.

‘내게 충성은 무슨. 너도 네 핏줄과 똑같을 뿐 아닌가.’

엘리엇은 에셀의 충심이 엘리자벳을 향한 감정에서 나온다 믿었다. 전 같았으면 그 감정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여겼겠지만 당장 엘리엇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모르는 척하지 마. 에셀. 이미 알고 있질 않나. 네 누이는 미친 여자야.”

배배 꼬인 심사와 함께 냉기 가득한 말이 엘리엇의 입에서 나왔다. 에셀은 벨의 이름을 담으며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 엘리엇을 충격받은 눈으로 바라봤다.

“벨은 정신이 나간 지 오래였지. 마음 아플까 말하지는 않았다만 그 때문에 나를 탓하는 건 곤란해. 솔직하게 난 그녀를 많이 봐줬어. 그 정도면 충분했지.”

“……너.”

“보질 않았나. 그녀는 스스로 죽었어. 나는 그녀를 찌르지 않았네. 책임이 없단 말이지. 그런데 쓰러진 엘자를 놔두고 이미 죽은 그녀를 안아 줘야 하나?”

에셀의 마음이 또 한 번 조각났다. 증오가 아교처럼 틈새를 메우는 걸 느끼며 에셀은 숨을 헐떡였다.

“난 지체할 시간이 없네. 엘자에게 가 봐야 하니 도울 생각이 없다면 그만해.”

벨을 언급할 때와는 감정의 무게가 달랐다. 에셀은 초조함이 가득한 엘리엇의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벨. 저자에게 넌…… 넌!’

에셀의 손에는 벨의 피가 여전히 흥건했다. 진득하게 굳기 시작하는 액체를 보다 에셀은 주먹을 쥐었다.

엘리엇은 저를 막아선 자들과 또다시 씨름 중이었다. 비척거리면서도 넘어가려 애쓰는 모양새에는 마음이 가득했다.

저 마음 귀퉁이만큼이라도 그 아이에게 베풀었으면. 에셀은 그리 생각하며 절망했다. 그리고 동시에 엘리엇에 대한 모든 마음을 저버렸다. 그는 더는 엘리엇과 오로르를 돕지 않을 참이었다. 바닥에 팽개쳐지는 엘리엇을 보다 에셀이 몸을 돌렸다.

“기절시켜도 좋다는 명이다.”

“황제를 말입니까?”

“황제는 무슨. 쳐 버려. 피곤해 죽겠는데.”

기사의 예민한 귀가 상상도 못 할 말을 주워들었다. 에셀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설까 고민하는 와중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쾌감을 인지했다.

나도 벨을 지키지 못했으니 벨을 죽인 너 또한 네 동생을 못 지켜야 옳지 않나.

* * *

타티카는 세상 홀가분함을 느꼈다. 기쁨을 주체 못 하는 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제 황녀를 자신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멍청한 인물들이 각자 어울리고 사고를 쳐 주는 바람에 최후의 승리자는 자신이 되었다.

“벨 라세르. 그 여자한테 꽃이라도 잔뜩 보내 줘!”

“예? 꽃이라 하면…….”

“장례를 치를 거 아냐. 보답을 해야 하는데 죽은 이한테 돈을 쥐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가는 길 꽃이라도 쥐여 줘야지.”

“아…… 예.”

“그리고 가서 이거 더 가지고 와. 또 아무나 쓸 만한 것 데려오고. 저번처럼 교육이 덜된 것 데려오면 알지?”

타티카는 소파에 드러누워 빈 술병 하나를 흔들었다.

“예.”

‘오늘도 노예 하나가 죽어 나가겠구먼.’

시중드는 이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주인의 모습에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주인은 기분이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매한가지로 위험한 이였다.

“흐음, 우리 황녀님. 엘리자벳. 엘리자벳. 이름도 예쁘단 말이야.”

시중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타티카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하얀 몸을 범할 생각을 하니 벌써 아랫도리가 근질거렸다.

‘페루스. 내가 황녀님을 구해 줄게. 다른 이들은 못 해. 대신 전부터 말했던 걸 들어줘야겠어.’

‘꺼져.’

‘참고로 시간이 없어. 이 상태면 열흘……? 아니지. 네가 황녀님을 너무 괴롭혀서 황녀님 몸은 영 말이 아니니깐…….’

타티카는 벨 덕에 엘리자벳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제외하곤 누구도 해독법을 모르는 독. 그는 그 독을 빌미 삼아 페루스에게서 엘리자벳에 관한 권리 일부를 양도받았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애달아하는 건 의외였단 말이야.”

타티카는 사경을 헤매는 황녀를 붙잡고 소리치던 페루스가 우스웠다. 못 죽여 안달을 내더니 이번에는 못 살려 지랄이었다.

황녀가 죽지 않을 것을 자신은 알았기에 상관없었지만 죽을 거라 믿는 이를 구경하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게다가 이번 일로 페루스를 쥐고 흔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기에 타티카는 더욱 만족스러웠다. 오로르건 라세르건 르온이건 툴란에서 제일 귀하다는 것들은 다 제 손아귀 안이었다. 누구에게나 천하다 듣는 그의 손안.

“씨발. 진짜 우스워서 미치겠네. 황녀님. 황녀님은 일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웃게 해. 응?”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타티카의 앞으로 옅은 머리색의 여자가 술병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짤그락거리며 떨리는 술병 소리에 타티카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 정말이지……. 아니다.”

타티카는 두 팔을 뻗어 순식간에 여자와 술병을 잡아챘다. 여자가 쟁반에 받쳤던 술잔이 와장창 비명을 지르며 깨졌다.

“봐줄게. 오늘을 기분이 좋으니깐.”

그러나 그 소리는 곧 들려온 비명에 비하면 정적과도 같았다.

* * *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어깨를 눌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무게감에 페루스는 숨이 막힘을 느꼈다.

페루스는 숨을 애써 느리게 쉬며 밑을 내려다봤다. 창백한 낯빛의 엘리자벳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다면.’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다른 이와 공유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녀가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기를 괴롭기를 바라면서도.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여러 사내에게 유린당하게 하는 것임에도 그랬다.

저번 일도 그렇고 왜 다른 이가 그녀를 만지고 범하는 것이 싫은지 그는 알지 못했다.

분명 네 고통을 원하는데. 그렇게 계획해 왔는데. 왜…….

타티카가 웃으면서 그에게 엘리자벳을 요구해 올 때는 차라리 죽게 놔두겠다 고함을 치며 그를 죽여 버릴 뻔했다. 감히, 라는 말이 수백 번 마음속을 헤집었다.

그러나 동시에 페루스는 자신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수치스럽고 불쾌했다. 이 여자에게 아직도 매달리는 것 같아 치가 떨렸다.

‘……고치게. 공작.’

‘흐음. 그러면 동의한 거다? 약속한 거야? 어기면 황녀님은 언제라도 이 꼴이 될 거야. 알았지?’

‘알았으니 당장 살려. 깨우란 말이다.’

하지만 끝끝내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페루스는 또다시 자신이 오로르에게, 엘리자벳에게 무릎 꿇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야. 나는 네가 괴롭길 바라고……. 엘자. 이 일로 넌 분명 더 괴로울 테니까.”

자괴감에 페루스는 일부러 입을 열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어차피 애초에 이리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중도에 포기했던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아까운 방법이었다.

‘여러 놈에게 깔려 봐야 제 처지를 알겠지. 언제까지고 제가 황녀라고 생각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세리 놈에게 내어 줄 바에야 한 놈 더 끌어들이는 게 좋겠군,’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던 페루스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그는 그렇게 한참 엘리자벳을 노려보다 거칠게 몸을 돌렸다.

밖에서는 제임스가 페루스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나오는 소리에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왔다.

“각하. 쉬셔야 합니다. 벌써 며칠째 주무시지도 않고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걱정 가득한 제임스의 말을 페루스는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입술을 한 번 물곤 입을 열었다.

“에셀 라세르를 불러.”

* * *

“황녀를 범해.”

페루스가 미쳤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셀은 자신에게 이따위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에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페루스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예의도 집어던진 채 멱살을 잡는 에셀을 보면서도 페루스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유로워 보이는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우세리 공과는 이미 말을 해 두었지. 황녀는 오로르를 제외한 세 동맹의 제물이 될 예정이야. 알지 않나? 오로르가 무너진 뒤 각 지역에서 내전의 낌새가 보인다는 걸.”

“미친 소리! 네놈이 모든 걸 장악했으면서 누가 내전의 낌새를 보인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당장 제대로…….”

“아, 경은 전쟁의 낌새가 없다 여기는군. 기사인데도 이래서야 원. 허나 북부에선 얼마 전 중앙 원로원으로 서신을 보내왔던데. 오로르가에 응징을 한 것은 다행이지만 다음 순번이 라세르가인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뭐? 그게 무슨!”

“모르는 척 말지. 엘라르 오로르가 제 가문에 황위를 묶어 놓기 전 툴란의 황위가 어떻게 움직였지? 그때의 순번으로 따진다면 라세르가 차례이긴 하다만, 나는 억울하게 물러난 내 가문이 우선이라 보는 입장이라.”

“그때의 일은 지나갔다. 그리고 감히 북부의 누가 그따위 소리를! 반역을 옹호하다니 내 가문에서 그럴 리 없어!”

“모르는 모양이로군. 하긴, 내내 누굴 지키느라 시간이 없었을 테지. 답을 해 주자면 마들렌 라세르, 경의 누이와 북부 원로원 두 군 데서 왔지. 이렇게 두 군 데서 같은 서신이 왔다면…… 북부의 의중은 자네 빼곤 같다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은데. 아닌가?”

에셀은 페루스의 말을 들으며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언제부터 그렇게까지 북부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을 진행했단 말인가. 에셀의 손에 절로 힘이 빠졌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만 북부에 황위를 양보할 생각도 없어서 말이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임시로 동맹을 맺는 건데…….”

“…….”

“경에게는 기회를 주는 거야. 라세르가의 수장은 정해져 있지 않아 불안하다만 역시 마들렌 그 여자보단 경에게 정통성이 있질 않나.”

“우세리는…… 우세리에서는 그걸!”

에셀은 타티카가 거절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리 물었다.

“공작은 경과 다르게 이미 작위가 있지. 우세리 공과는 경보다 먼저 합의했어. 르온이나 라세르가 황위를 원치 않는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겠다더군. 다만 황위를 움직인다면 우세리도 움직일 거라 경고했네. 욕심이 난다면서 말이야.”

답을 듣는 순간 에셀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페루스는 그런 그를 부축하지도 비웃지도 않은 채 그저 보기만 했다. 그리고 에셀은 그 순간 페루스가 모든 것을 정해 놓고 제게 통보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동맹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왜 하필 엘자, 아니 황녀를 걸고 넘어가나!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그럼 죽이겠나?”

“뭐?”

“오로르의 이름을 단 모든 이들을 죽이겠느냔 말이야. 동맹을 왜 한다 생각하지? 난 각 가문이 황위를 원하니 오로르를 허수아비 황가로 세워 내전을 막은 후 우리끼리 합의할 시간을 갖자 말한 것인데. 그게 아니라면 간악한 오로르를 살려 둘 필요가 있나. 오로르는 르온, 우세리, 라세르의 원수인데? 혹 충견 노릇을 하느라 가문의 원한을 잊은 모양인가?”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래. 네놈 말대로 내전을 막기 위해 오로르의 이름을 단 황제를 살려 둔다면 굳이 힘도 없는 황녀를 왜 제물 삼나!”

“원하니깐.”

에셀은 페루스가 그 말을 할 때 전신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런 걸 왜 묻나. 페루스는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라는 표정으로 에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그가 입만 벌리고 있자 페루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죽여도 상관없을, 죽이는 것이 더 좋을 황녀를 살려 둔 이유가. 제물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뭐겠나?”

“…….”

“황녀는 굉장히 아름답지. 게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됐고. 아름다운 여인이 만만한 데다 취할 수 있는 위치가 됐는데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솔직히 말하지. 난 내 가문의 피를 먹고 귀하게 자라 온 그녀를 천한 이로 끌어내리고 싶어. 하지만 당장은 그렇게 하지 못하니깐 전용 창부 노릇이라도 시켜야겠어.”

에셀은 뻔뻔하고 더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페루스가 역겨워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한때는 제 연인이 아니었나. 에셀은 엘리자벳이 저따위 사내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가여웠다. 그리고 저따위 놈 때문에 제 마음 한번 표현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경은 기사이니 이런 날것의 이야기는 좀 거북하겠지. 하지만 동의하는 부분 아닌가? 내가 알기론 경도…….”

“닥쳐!”

“…….”

“거짓말 마라. 페루스. 나는 분명 네가 엘자를…… 엘자를 보는 눈을 봤다. 그런데 네놈…….”

“착각이야.”

에셀은 발악하듯 페루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페루스는 냉랭하게 비웃음 치며 에셀의 말을 끊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할 리가. 황녀와의 관계는 모두 이날을 위해서야. 알 텐데. 내가 황제를 죽이고 그녀를 어떻게 다뤘는지.”

“너…… 너 엘자를!”

“아, 원수이긴 하나 그녀의 몸은 가질 만해. 귀하게 자란 것치고는 천박한 구석이 있거든. 사내를 즐겁게 하더군. 경도 만족할 거야. 얼굴도 그렇고 생각 외로 몸도 꽤 동하는…….”

퍽―

결국 에셀은 참지 못하고 페루스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페루스가 쓰러졌다. 그러나 구석에 넘어져서도 페루스는 여전히 기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놈! 네놈이!”

에셀은 검을 뽑아 페루스의 목 밑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예기가 제게 다가왔음에도 페루스의 눈은 여전했다.

“미쳤군. 감히 내게 주먹을 휘두르고 검을 들이밀다니. 하지만 한 번 봐주지. 동맹을 맺기 전 내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해.”

“미친 건 네놈이다! 페루스!”

“동의해. 경. 아니면 빠지든가. 다만 이 일에서 빠지겠다면 난 경을 수도에서 추방하고 마들렌 라세르와 동맹을 맺을 예정이야. 그녀는 오로르에 대한 분노가 대단하던데. 과연 황제나 황녀가 살아 있을 수는 있을까 모르겠군.”

에셀의 손끝이 떨렸다. 이따위 미친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황녀는 원수의 핏줄이자 원수지. 경도 얼마 전 또 핏줄을 잃었을 텐데. 오로르는 내게도 경에게도 저주야. 저주스러운 원수지. 나는 황녀가 괴롭기를. 아무도 그녀에게 따뜻함을 주지 않았으면 해. 당연히 사모하는 기사도, 친우도 그녀에겐 없어야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에셀을 보며 페루스는 자신의 속마음을 조금 내보였다. 엘리자벳이 더욱 절망하려면 에셀 라세르, 그를 제 편으로 만들거나 적어도 제 편처럼 보이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에셀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페루스는 피부를 조금 파고든 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자, 결정하게. 에셀 라세르 경.”

* * *

에셀은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냈다. 제대로 먹은 것도 없건만 위액이라도 뱉어 내지 않고서는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었다. 지나가던 궁인들이 그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에셀은 저를 보는 눈에도 계속해서 허리를 숙였다. 저는 미친놈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으윽…… 윽.”

지옥에 떨어질 일이다. 당장 죽어 명예를 갚아야 한다. 위액과 더불어 눈에서 무언가 쏟아졌다.

‘이것으로 당분간 툴란은 안정되겠군. 자세한 사항은 세 사람이 함께 정하지. 그리고 약조한 대로 이날 이후 그녀에게 일말의 정도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군. 사실 핏줄을 위해서라도 그게 맞질 않나?’

결국 그는 페루스를 베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말았다.

감히 그녀를 범하는 일에 동의하다니. 동참한다고 약조하다니. 이제 자신도 미친놈이었다. 개만도 못한 이가 되었다.

에셀은 계속해서 무언가 토해 내고 또 토해 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 *

“아, 망했……. 황녀님…… 해야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온 기억이 이상하게 섞여 엘리자벳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벨은 왜 그리 죽어야 하지?’

‘나는 엘자, 아니 엘리자벳 당신과 당신 오라비인 엘리엇을 더는 모시지 않겠습니다. 라세르가는 더는 오로르의 우군이 아닙니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에셀이 무어라 소리치고 간 말이었다. 그리고 짙은 장미 향, 또 같은 방,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인 것이 분명한…….

“아…… 으…… 아아, 내보내…….”

“하여간 페루스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황녀님을 왜 다시 거기로 끌고 가선! 게다가 그 개새낀 왜 어울리지 않게 황녀님한테 성질이야! 언제는 다시없을 충신처럼 굴더니! 황녀님을 죽이려 한 건 제 동생인데! 아 말도 못 하고! 짜증 나! 이래서는 난 언제 황녀님을 안아 봐? 일만 잔뜩 생겼잖아!”

“싫, 싫어! 싫어! 싫어! 잘못…… 잘못했…….”

“황녀님. 쉬이. 괜찮아. 이걸 먹어 보자. 자 여길…….”

“싫어! 나갈 거야! 여긴! 페루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 씨발! 여기 약이 있다고. 거기 뭐 해? 안 잡고!”

타티카는 이 상황이 짜증스러워 엘리자벳에게 손을 올릴 뻔했다. 연약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이리 약한 정신이 끔찍이도 짜증 났다.

독에서 해독된 엘리자벳은 일어나자마자 발작을 일으켰다. 이유는 장소. 에셀에게서 구출된 이후 황녀궁에서 아슬아슬하게 안정되고 있었던 정신은 장미궁이라는 장소를 인지하자마자 더 철저하게 부서져 버렸다. 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타티카는 재빨리 엘리자벳을 황녀궁으로 옮겼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갑자기 찾아온 에셀은 엘리자벳에게 독설을 잔뜩 늘어놓고 갔다. 타티카는 문가에 기대 비스듬히 그 꼴을 구경하는 페루스를 보고 에셀과 페루스 사이에 무언가 있겠거니 짐작을 했고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후폭풍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고칠 수 있나?”

억지로 약을 먹인 후 얌전해진 엘리자벳을 보며 쉬고 있는데 이 사태를 만든 이가 찾아왔다. 타티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세모꼴로 하곤 페루스를 노려봤다.

“몰라. 누구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생인데.”

“할 수 있다 하질 않았나.”

“라세르가 그 개새끼가 한 말은 기억하게 하고, 네가 한 짓은 지우라? 하! 내가 만능이야? 신인 줄 알아?”

“그리 만들어. 그래야 공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테니.”

“그건 불가능해. 다만 잠시 닫아 놓는 건 가능할 테니깐…… 황녀님이 일어나도 장미궁으로 끌고 갈 생각은 하지도 마. 아으, 짜증 나!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그게 더 좋겠군. 장미궁으로 끌고 가면 그녀가 지금처럼 괴로워하나?”

“야!”

“빨리하도록. 시간은?”

“예이. 예이. 나는 이러고 있는데 우리 공작님은 시간만 물어보면 되고. 참 편해?”

“시간은?”

“일주일. 넉넉잡아 열흘. 그 안에는 끝날 거야.”

* * *

엘리자벳이 깨어나고도 시간이 꽤 흘렀다. 페루스는 황녀궁에 방치된 엘리자벳이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다 보고받았다. 시녀와 시종. 그녀와 조그마한 접점이라도 있던 이들은 모두 수도 밖으로 내보냈다. 새로운 이들은 모두 그녀를 무시하란 명을 받았다.

본래라면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깨어나자마자 그녀에게 엘리엇의 목숨을 담보로 몸을 바치라 협박을 할 참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내들에게 그녀를 내어 주기 전 그는 문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임신. 아직 불안정한 엘리자벳이었지만 페루스는 그녀가 여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페루스는 당연하게 엘리자벳을 불임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 어차피 오로르의 핏줄은 더는 필요치 않았고, 엘리자벳이야 다리를 벌리면 그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의를 불러 불임 약을 만들라 하려던 순간, 그는 엘리자벳과 저를 똑 닮은 아이를 상상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황위에 앉는 상상을 이어 해 보았다.

‘성만 오로르라 물려주지 않으면 될 것이고……. 분명 그 멍청한 성격에 제 아이는 외면 못 할 테니 영영 도망치지 못하겠지.’

게다가 제 성을 딴 르온의 아이가 황위에 오르면 그 또한 복수가 아닌가. 페루스는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궁의를 내보냈다.

그러나 페루스는 곧 자신이 다른 사내들과 한 계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갔던 궁의는 다시금 페루스에게 불려 와야 했다.

“임신을 막는 약이 필요하다.”

“그것이라면 많지요. 궁중 여인들은 예부터…….”

“난 사내의 것이 필요해.”

“예?”

“사내가 복용할 만한 것이 필요하단 말이다.”

“아…… 물론 있습니다. 여인들 것보다는 부족하겠지만, 꾸준히 복용하면…….”

“효과는 완전하나? 기왕이면 완전한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피, 피임 방법을 쓰심이 어떠십니까. 약은 효과가 있으나 부작용도 있고…….”

“……내가 쓸 게 아니야.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지. 그리고 피임은 불안하니 차라리 불임 약이었으면 좋겠군.”

페루스의 말에 궁의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작은 지금 멀쩡한 사내들을 망쳐 놓고 싶다는 말이었다.

“사내에게 쓸 만한 불임 약은 몇 없습니다. 예전부터 그런 약들은 여인들 위주로 발달해 온지라 사내가 쓰면 부작용이 큽니다. 그리고 혹 몰래 쓰실 예정이면…… 몸에 반응이 바로 오기에 눈치채기가 쉽지요.”

페루스는 궁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피임약을 써도 되겠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언제 엘리자벳을 범할지 일일이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럼 효과가 오래가는 피임약은 없나? 몰래 쓸 예정이니 티도 나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군.”

궁의는 페루스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생각나는 물건이 있었다.

“있습니다. 한 번 복용하면 적어도 열흘은 가지요. 피임 효과도 거의 확실합니다. 게다가 꾸준히 복용하면 더욱 확실해지지요.”

페루스는 궁의에게 약을 구해 놓으라 이르고 입단속을 시켰다. 가족들의 목숨이 담보로 잡힌 궁의는 두려움에 질린 채 페루스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자벳은 오라비의 목숨을 담보로 몸을 세 사람에게 내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서약서를 적은 이후 황녀궁에서는 매주 한 번 저녁 만찬이 열리게 되었다.

만찬은 엘리자벳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요 타티카에게는 쓸데없는 일, 에셀에게는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페루스에게는 꼭 필요한 계획의 일부였다.

“저녁 만찬 때마다 우세리 공작과 라세르 경의 요리에 이것을 조금씩 넣어라. 각하의 명이시다.”

황녀궁의 요리를 총괄하는 이는 페루스로부터 이상한 가루를 전달받았다. 그러나 페루스의 사람이었던 그는 주인이 전한 물건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은 채 명받은 일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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