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원하는 것(과거 편) 上
엘리자벳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아이 특유의 보들보들한 피부, 땡그란 녹색 눈, 작게 오물거리는 입.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엘리자벳이 흥얼거리며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꼭 돌아보곤 했다.
게다가 엘리자벳은 상냥했다. 본디 오로르가 사람들은 냉혹한 성격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그런 편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런 가족들과 다르게 다정했다.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소녀가 방긋거리며 인사하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엘리자벳을 키운 사라와 제인은 물론이요 오로르가의 고용인들은 이 작고 사랑스러운 주인을 퍽 귀엽게 여겼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엘리자벳은 그녀를 낳아 준 부모에게는 그다지 귀애받지 못했다.
엘리자벳의 아버지인 엘리온은 딸을 제법 예뻐하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여자와 술로 어미에게 반항 중인 그는 방탕한 삶을 즐기느라 바빴기에 어린 딸에게 무심했다. 그 덕에 엘리자벳은 아비에게 안긴 횟수를 손으로 셀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벳의 어머니 헬렌은 딸에게 묘하게 굴었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남편과 별다를 바 없이 엘리자벳에게 무심한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 그녀는 엘리자벳에게 큰 관심을 뒀다. 관심이 좋은 방향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헬렌의 딸을 향한 관심은 나쁜 쪽이었다.
헬렌은 오로르가에 시집오기 전 나라 안에서 제법 유명한 아가씨였다. 밀색 머리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매력적인 외모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영리하고 재치 있는 수완으로 자신만의 사업을 성공시킨 젊은 영애로 더 이름나 있었다. 헬렌의 아버지는 딸이 사내들의 영역인 사업을 한다 심기 불편해했지만, 곧 들어온 혼담에 입을 다물었다.
‘자네 딸이 꽤 영리하다지.’
‘아, 아닙니다. 각하. 그건 소문입니다. 제 여식은 그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자네 딸이 내 아들과 결혼했으면 해.’
엘라르는 헬렌의 존재로 페테 가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멍청한 이를 질색했던 그녀는 멍청한 아들의 짝으로 헬렌을 골랐다. 적당히 괜찮은 가문에 또래보다 영리하다 스스로 증명한 아이. 헬렌이 엘라르에게 선택받은 이유는 그게 다였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다.’
‘저한테요? 어디에서요?’
‘무려 오로르가다. 나는 네가 이 혼담을 받아들였으면 하구나. 물론 네가 아직 혼일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건 알지만 이번 기회는 가문에 큰 득이야.’
헬렌의 아버지는 헬렌의 성정을 생각하며 그녀가 혹 혼사를 거부할까 노심초사했다.
‘알겠어요.’
그러나 그의 염려가 무색하게 헬렌은 단박에 혼사를 받아들였다.
‘오로르라……. 멍청한 한량 하나가 후계자라지?’
젊고 야심만만했던 헬렌에게 오로르가는 크고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였다. 헬렌은 시어머니가 될 엘라르 오로르의 명성을 떠올리며 자신이 엘라르를 제치고 공작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날을 꿈꿨다. 가문 하나 잘 타고난 여자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까. 젊었던 헬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곧 가족이 될 오로르가 일원들을 얕봤다.
그리고 그건 헬렌에게 불행으로 돌아왔다. 헬렌은 결혼한 후 곧바로 오로르가를 장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제법 똑똑했기에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었다. 상대가 보통 이들이었으면 말이다.
‘헬렌. 넌 영리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이래서는 네 아비에게 혼사를 물리자 따지고 싶구나.’
‘자중하렴. 내 아들의 짝이라지만…… 나는 네가 가주께 덤비는 꼴은 못 본다.’
‘그거 안 된다고 했지. 어머니가 어떤 분인데. 너 따위 계집애가 나댄다고 눈 하나 깜박할 위인이 아니야.’
그러나 헬렌이 생각한 만큼 오로르가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가주이자 시어머니인 엘라르는 헬렌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상대였고, 시아버지인 크리스는 항상 그녀의 수를 훤히 꿰뚫고 경고했다. 게다가 결혼 전 무시했던 남편 엘리온조차 헬렌의 생각처럼 멍청하지 않았다. 어미와 꼭 빼닮은 그는 어떻게든 해 보려 발버둥 치는 헬렌을 비웃었다.
‘아…… 이제야, 얌전 읏, 해졌군. 왜? 요즘은 어머니께 안 덤비나? 응?’
‘…….’
‘하긴, 주제를 흐으…… 알 때가 됐지. 넌 그냥 우리 가문 애를 낳기 위해서 들어온 계집이니깐.’
‘…….’
‘그거 알아?’
‘…….’
엘리온이 헬렌을 비웃는 방법은 최악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다른 여자의 체취를 묻히고 와 헬렌을 안으며 조롱했다. 그 때문에 엘리온의 화사한 외모에 잠시나마 호감을 느꼈던 헬렌은 곧 남편이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
‘내가 널 안는 건 오직 어머니……. 제길! 어머니가 시켜서야. 그게 아니면 나긋한 재미도 없는 너 따위 안을 일 없지.’
‘…….’
‘그래도 그 표정은 꽤…… 흣, 괜찮네. 주제를 아는 것 같아서 말이지.’
‘…….’
‘열흘 후 다시 올 거야. 그동안 미드실라 거리 누구에게라도 좀 배우고 와. 지금 너는 영…….’
‘…….’
‘아니면 빨리 애라도 배든가. 어차피 그게 네 일이잖아?’
엘리온은 헬렌을 안는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어미에 대한 반발심을 어미가 고른 헬렌에게 풀며 그녀를 연이어 농락했다. 헬렌은 그의 말에 울컥했으나 별달리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뭐지.’
야망 있게 꿈을 좇던 어린 아가씨는 더는 없었다. 헬렌은 그녀가 그토록 경멸하던 또래의 삶을 살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그림자에 가려져 애나 낳아야 하는 존재. 누구는 당연하다 말할 삶이었지만 헬렌에게는 그 삶이 지독히 싫었다.
‘좋으시겠어요. 오로르가라니! 얼마나 호강하실까. 남편분도 참 아름다우시고 축복받았어요. 부인은.’
‘페테가에서 여식이 결혼을 못 할까 전전긍긍하더니……. 나도 우리 딸들에게 사업이나 시킬까 보오.’
‘맞아요. 적당히 사업놀이나 하다 공작가에 시집이나 보내면, 지참금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
그렇기에 누군가 그녀를 부러워할 때면 헬렌은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은 이리 끔찍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불행할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행운아. 헬렌은 그 말에 짓눌리며 미쳐 갔다.
‘축하합니다. 부인. 아들이십니다.’
다행히도 헬렌은 미치기 직전 아이를 낳았다. 첫아이인 엘리엇을 품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이 비웃던 또래들의 삶과 같아졌구나, 허무함을 느꼈다. 그러나 막상 아이가 태어나자 헬렌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내 아이야……. 이 아인 오로르가의 핏줄이지만 내 아이이기도 해.’
엘리엇을 품 안에 안으며 헬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편이 돼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이 아이로 반드시!
작은 온기는 헬렌의 야망에 다시 불을 지폈고 헬렌은 얼마간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곧이어 엘리자벳이 태어났다.
‘딸이라니 아쉽네.’
엘리자벳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헬렌은 딸아이에게 별달리 감정이 없었다. 그녀는 당시 엘리엇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딸로 태어난 엘리자벳에게는 비교적 무심했다. 그래도 가끔 얼굴을 비치고 얼러 주기도 했기에 엘리자벳은 엄마라는 단어를 온종일 외며 헬렌을 찾았다.
그 정도였다면. 엘리자벳은 헬렌을 찾고, 헬렌은 엘리자벳에게 가끔 애정을 던져 주는 정도로 계속 지냈으면 별문제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귀족 사회의 일원 중 다수의 부모 자식은 그런 유대감을 쌓았으니깐.
하지만 몇 년 후 헬렌은 제가 계획한 아들과의 관계에 큰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고 그건 엘리자벳과 헬렌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줬다.
엘리엇은 헬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모의 머리와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이는 다섯 살이 되기도 전 극성스러운 어미를 멀리했다. 엘리엇에게 있어 저에게만 매달리는 어미는 귀찮은 존재였다.
‘엘리엇! 네가 누구 아들이지?’
‘어머니요.’
‘그래! 넌 내 아들이야! 그런데 왜!’
엘라르의 자랑스러운 손자는 어린 나이에도 냉혹한 성품을 가졌다. 조모를 빼닮아 오만한 천재로 자란 엘리엇은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헬렌은 저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는 아들을 보며 초조해졌고 더욱 아들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헬렌이 그럴수록 엘리엇은 더더욱 그녀를 경멸하며 멀리했다.
‘내 아들인데……. 내 배로 낳은 아이인데…….’
아들인 엘리엇에게도 무시당하자 헬렌은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했다. 희생양은 그녀의 어린 딸 엘리자벳이었다. 엘리자벳은 엘리엇과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조모의 빛나는 외모를 물려받은 것을 빼곤 그다지 타고난 게 없었다. 엘리자벳은 또래보다는 총명했으나 제 오라비처럼 아주 뛰어나진 않았고, 성품도 지나치게 유순했다.
‘엘리자벳. 하여간 너는……. 엘리엇의 반만이라도 따라가 보렴.’
‘아비를 닮아서 할 줄 아는 거라곤 얼굴 파는 것밖에……. 쯧.’
‘너도 어미를 무시하는 거니? 정말 못된 아이로구나!’
또래의 아이처럼 어미의 사랑을 갈구하는 엘리자벳은 헬렌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엘리자벳이 헬렌을 닮았으면. 그녀의 밀빛 머리나 하늘색 눈을 물려받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오직 오로르의 특성만을 타고난 데다 놀랄 정도로 조모를 닮았다. 그 덕에 엘리자벳은 헬렌의 분과 열등감을 받아 내야 했다.
헬렌은 어린 딸에게 오로르가 일원들을 투영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무시했던 것처럼 딸을 대했다. 그녀는 엘리자벳을 무심하게 대하다가도 엘라르에게 잔소리를 듣고 올 때면 어린 딸에게 괜한 잔소리를 했고, 엘리온에게 비웃음을 당하면 엘리온과 딸을 빗대며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부녀라며 비웃었다. 엘리엇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이 엘리자벳에게 돌아가는 건 예사였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가. 우리 엘자.’
차라리 쭉 그렇게 했으면 좋으련만……. 헬렌은 딸아이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도록 가끔 진심 반, 거짓 반이 섞인 애정을 던져 줬다. 오락가락하는 미움과 애정. 혼란에 휩싸인 어린 엘리자벳은 헬렌에게 상처받고 울면서도 헬렌을 찾았다.
‘잘, 잘못했어요. 어머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엘리자벳이 더 노력할게요.’
‘…….’
‘그, 그러니깐 가지 마세요. 저만…… 엘리자벳만 두고 가지 마세요.’
‘…….’
그리고 우습게도 헬렌은 그런 딸을 보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아이를 망치고 있는 거야…….
‘이 어미가 너를 낳다 몸이 상한 건 알고 있지? 몸이 힘들어 그런 거란다. 어미가…… 힘들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거란다.’
헬렌은 쌓이는 죄책감을 지우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나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어미의 아픔이란 크나큰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자신 때문에 아프다니! 엘리자벳은 심한 강박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어린 엘리자벳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 *
“엘리엇?”
엘리자벳은 발갛게 부은 눈가를 문지르며 오라비를 찾았다. 다정한 엘리엇은 엘리자벳이 헬렌에게 혼날 때면 그녀를 따뜻하게 다독거려 줬다. 하지만 엘리자벳이 문을 연 방에는 엘리엇이 없었다.
‘수도에 오면 같이 놀 시간이 많을 거라 해 놓곤……. 거짓말쟁이!’
분명 수업을 듣고 있겠지. 엘리자벳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엘리엇이 어디 있을지 짐작했다. 어느 정도 자유를 허락받은 그녀와 다르게 영리한 오라비는 제법 바빴다.
‘너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잖니! 딸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나를 닮아 머리라도 굴려야지. 자랑스러운 오로르가 손녀는 무슨! 매일같이 눈물만 줄줄…….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렴. 당장 나가!’
나도 엘리엇처럼 똑똑했으면……. 조금 전에 들은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 엘리자벳은 괜히 스스로가 미워졌다.
‘할머니…….’
한참 텅 빈 방을 배회하던 엘리자벳은 엘리엇 다음으로 엘라르와 크리스를 생각했다. 조모와 조부는 엘리자벳을 퍽 귀여워했다. 엘리자벳은 서러운 마음을 그들에게 달려가 풀고 싶었다.
‘바쁘시니깐…….’
그러나 그들은 바빴다. 수도에는 처음 왔지만 엘리자벳은 조모, 조부가 영지에 있을 때보다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게다가 눈물 자국을 조모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운 일로 조모가 어미에게 벌을 준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나가면 어머니가…….’
엘리자벳은 병상에 누워 있는 파리한 안색의 어미를 생각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조모에게 제 얼굴을 들킬 수는 없었다. 자신이 몰고 올지 모를 파장에 지레 겁을 먹은 엘리자벳은 그냥 가만히 있다 얼굴이 나아지면 사라에게로 가 딸기를 얹은 케이크나 만들어 달라 졸라야지 결심했다.
“수도도 별거 없구나…….”
엘리엇의 방은 꽤 높은 곳에 있었다. 엘리자벳은 까치발을 들곤 밖을 내다봤다. 높은 곳이었지만 저택 자체가 외곽에 있는지라 수도 전경이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벳의 시야에 보이는 건 파란 하늘과 저 멀리 화려하고 큰 집뿐. 엘리자벳은 그게 황궁인지도 모른 채 잠시 시선을 주다 이내 흥미를 잃고 밑을 봤다.
“아가씨! 엘리자벳 아가씨! 어디 계세요!”
제인이 그녀를 찾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키득거리다 들킬까 발을 내렸다. 제인은 엘리자벳이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생각하며 엘리자벳은 제인과의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엘리엇의 방은 너무 쉬우니깐…….’
엘리자벳은 작은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제인이 오기 전 이곳에서 벗어나야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자벳은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게 요리조리 뛰다 저택에 딸린 후원 한구석으로 숨어들어 갔다.
“예쁘다!”
저택 후원은 잘 꾸며져 있었다. 구석구석 깔끔히 손질된 꽃과 나무들을 보다 엘리자벳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엘리자벳은 숨바꼭질을 그만둔 채 후원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작은 발로 얼마나 걸었을까. 하얀 대리석 조각과 마주친 엘리자벳은 치맛단을 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분수에 있는 조각상은 아름다운 천사상이었다. 엘리자벳은 긴 드레스를 늘어뜨린 채 온화하게 저를 바라보는 조각상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도 웃으면 저렇게 예쁜데…….
“어머니가 저를 낳고 아파요.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조각상의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보다 엘리자벳은 책에서 본 것처럼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듯 바람이 살랑 지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리자벳은 눈을 뜨곤 퐁퐁 물이 올라오는 분수에 발을 담갔다. 따뜻한 날씨였으나 물은 차가웠다. 그러나 물이 주는 감촉이 좋았던 그녀는 툭툭 발 장난을 치며 차가움을 즐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였다. 헝클어져 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엘리자벳은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제인?”
엘리자벳은 그제야 숨바꼭질을 기억하곤 제인을 불렀다. 그러나 답 없이 발걸음 소리는 가까워졌다. 엘리자벳은 두려움에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제인? 하고 불렀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겁에 질린 엘리자벳은 분수에서 일어나 몸을 완전히 돌렸다.
그리고 순간. 엘리자벳은 환한 금발 밑으로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소년과 마주쳤다.
* * *
튀어나온 이가 엘리엇 또래 아이라는 것을 깨닫자 엘리자벳의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괴물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엘리자벳은 아이답게 안도하면서도 실망했다.
“안녕?”
엘리자벳은 일단 상냥하게 인사하며 아이를 살폈다. 아이는 정말 예뻤다. 엘리자벳은 저와 대조되는 찬란한 금발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예쁘다. 저런 색은 처음 봤어. 반짝거리는 금발에 빠져 버린 엘리자벳은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 생각하며 눈을 반짝였다.
“…….”
그러나 아이는 엘리자벳의 반응에도 사납게 인상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들은 것이 분명한 인사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이의 새파란 눈은 여전히 엘리자벳을 쏘아보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제게 박히는 적의에 조금 당황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주춤한 엘리자벳은 저도 모르게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팔짱을 낀 채 엘리자벳을 보는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고압적인 면이 있었다. 엘리자벳은 아이가 내뿜는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압도당했다.
“너…….”
살짝 겁을 먹은 엘리자벳이 시선을 비킨 채 힐끔거리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엘리자벳은 응? 대답하려다 서늘한 눈과 마주치곤 입을 닫았다. 또래의 아이는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왜 저러지…….’
잘못한 것도 없건만 엘리자벳의 고개는 밑으로 계속 내려갔다. 꺾인 시야에 푹 젖은 치맛자락이 보였다. 내 드레스! 엘리자벳은 물로 얼룩진 천을 보다 아이를 잊고 사라에게 혼이 날 것을 걱정했다.
무거워진 드레스를 든 채 엘리자벳이 분수 밖으로 급히 나서려 할 때였다. 엘리자벳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엘리자벳은 작은 구두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언제 왔는지 조금 떨어져 있던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비……!”
엘리자벳은 나가기 위해 비켜 달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 아이가 분수의 낮은 턱을 넘더니 엘리자벳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놀란 엘리자벳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아이는 팔을 뻗어 엘리자벳의 멱살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아이의 손에 순식간에 잡힌 엘리자벳의 눈이 커졌다. 귀하게 자란 엘리자벳에게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엘리자벳은 뭐라 말도 못 한 채 커진 눈만 깜박였다.
“나를…… 기억 못 해?”
아이는 이를 물더니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딱 붙은 몸과 험악하게 잡혀 올려진 멱살 때문에 엘리자벳은 발을 들어야 했다. 스르륵, 뒤늦게 잡아 올린 치맛단이 작은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다시 물에 빠져 흐느적거렸다.
“흐윽…….”
몇 발작 물러난 탓에 분수의 중앙, 조금 높은 곳에서 흐른 물이 엘리자벳의 몸을 적셨다. 이해 못 할 분위기와 축축이 젖은 몸, 서러워진 엘리자벳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는 건 금방이었다.
“흐아앙! 엘리엇! 어디 있어! 엘리엇!”
맺혀 있던 눈물이 툭 터지며 엘리자벳은 습관처럼 오라비를 찾았다. 엘리엇! 하고 외치는 목소리에 아이의 미간이 더욱 주름졌다. 그러나 아이의 손은 조금 느슨해져 엘리자벳은 발을 내릴 수 있었다.
“왜 울어!”
엘리자벳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아이가 빽 고함을 질렀다. 제 울음보다 큰 소리에 엘리자벳이 몸을 한 번 움찔하곤 억지로 소리를 삼켰다. 어찌나 놀랐는지 펑펑 쏟아지던 눈물도 쏙 단번에 들어가 버렸다. 곧 분수에서는 엘리자벳이 끅끅거리는 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잡아.”
엘리자벳이 히끅거리며 울음을 멈추자 아이가 멱살을 놓고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벳은 흐려진 시야로 아이를 올려다봤다. 아이의 미간은 반듯하니 펴져 있었지만 엘리자벳의 눈에는 여전히 사나워 보였다. 지레 겁을 먹은 엘리자벳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아이의 미간이 다시금 구겨졌다.
“잡아.”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건만 엘리자벳은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벳은 결국 제게 향한 손을 거부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손을 뻗었다.
탁―
우물쭈물하는 것이 싫었던 것인지 아이가 엘리자벳의 손을 낚아챘다. 꽉 잡힌 손으로 엘리자벳은 아이의 손이 아주 뜨거운 것을 알아챘다. 열이 나는 건가? 방금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엘리자벳은 아이를 봤다. 엘리자벳이 분수의 작은 턱을 넘게끔 도와주는 아이의 얼굴에는 확연한 홍조가 있었다.
“이따위 꼬맹이…….”
그러나 아이는 엘리자벳의 눈길을 눈치채지 못한 듯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아이가 뱉는 말이 썩 곱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자벳의 눈은 아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말끔해진 시야로 보니 아이는 눈에 띄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픈 거야! 엘리자벳은 감기로 크게 고생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도 꼭 이랬다.
“저……. 괜찮아?”
“뭐가?”
엘리자벳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 중얼거리던 아이는 엘리자벳이 제게 말을 걸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게…….”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아이의 대꾸에 엘리자벳은 용기를 잃고 말았다. 엘리자벳이 답답하게 굴자 아이가 엘리자벳을 재촉했다. 그러나 불친절한 말과 다르게 아이는 엘리자벳을 보더니 제 겉옷을 벗었다. 그러곤 엘리자벳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제 옷을 걸쳐 주었다.
엘리자벳은 아이가 어깨에 올린 겉옷의 축축함을 느끼고는 이것도 젖은 것 같은데, 라고 말하려다 민망해할 아이를 생각해 그만뒀다. 대신 엘리자벳은 고마워, 작게 속삭이며 아이를 향해 웃었다. 엘리자벳이 저를 보며 웃자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아이의 거부에 도리어 민망스러워진 엘리자벳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 조금 이상해…….
“일단 가서……. 하여간 너 때문에 옷을 버렸잖아.”
아이가 엘리자벳의 손을 더욱 꽉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라는 말에 엘리자벳은 어이가 없었지만, 별달리 대꾸하지는 않았다. 반박해 봤자 자신이 질 것 같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엘리자벳은 이미 아이의 중압감에 눌려 버렸다.
‘그런데 누구지?’
엘리자벳의 머릿속에 가장 중요한 물음이 떠오른 건 아이와 한참을 걸은 후였다.
‘나 애 모르는데……. 따라가도 될까?’
아이의 보폭에 맞춰 뛰다시피 걷던 엘리자벳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의 주위 인물들은 그녀에게 모르는 이는 따라가서도, 대화를 나눠서도 안 된다 당부하곤 했다. 엘리자벳은 귀에 박힌 그 말들을 생각하며 아이의 손을 뿌리쳐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니겠지?’
엘리자벳은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저택 안이기도 했거니와 아이를 뿌리치기엔…… 아이가 조금 무섭기도, 마음에 들기도 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엘리자벳은 반짝거리는 아이의 머리칼을 보며 이름을 물었다. 어머니보단 연하고, 할아버지보단 진한 색.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아이의 머리카락 색은 정말 예뻤다.
엘리자벳이 이름을 묻자 아이가 멈춰 서더니 엘리자벳의 손을 던지듯 놓았다. 갑자기 멈춘 아이 때문에 엘리자벳은 앞으로 넘어질 뻔하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뒤를 돌아본 아이는 뭐가 불만인지 또다시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었다.
또 왜! 이유도 없이 계속되는 아이의 인상에 순한 엘리자벳도 어느새 반감이 들었다. 엘리자벳은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는 대신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파란 눈을 마주 볼 자신은 없어 엘리자벳의 눈은 아이의 입가로 고정됐다.
“알아서 기억해. 난 네게 이름을 알려 줬어. 엘자.”
낯선 아이에게서 제 애칭이 나오자 엘리자벳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는 분명 자신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만났지? 나는 수도도 처음이고, 이렇게 예쁜 애를 잊을 리 없는데. 아이가 씨근덕거리며 엘리자벳을 노려봤다. 꼭 제 잘못 같아 급해진 엘리자벳은 어떻게든 아이를 기억해 내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도 아이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미안해진 엘리자벳은 세웠던 고개를 푹 내렸다.
“저…… 나는, 그러니깐 미, 미안.”
엘리자벳이 사과를 할 때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아이가 비틀거렸다. 놀란 엘리자벳은 아이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손을 뻗자 아이는 탁 소리 나게 손을 쳐 냈다. 아이의 매서운 거부에 엘리자벳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을 부여잡고 아, 하는 신음만 흘렸다.
아이는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엘리자벳을 향한 시선만은 거두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살짝 부푼 손을 쓸곤 비틀비틀 쓰러질 것 같은 아이에게 다시금 다가갔다. 손이 아프긴 했지만, 아이가 더 걱정이었다.
“다가오지…… 읏!”
다가오는 엘리자벳을 본 아이가 손을 젓다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겁을 먹으면서도 아이에게 다가갔다.
털썩―
엘리자벳이 아이의 거부를 무시한 채 손을 뻗을 때였다. 작은 손이 닿기도 전 아이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옆으로 픽 꼬꾸라졌다. 눈앞에서 쓰러진 아이를 보며 엘리자벳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순간, 엘리자벳의 머리에 지금과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다. 쓰러지는 아이, 금발, 파란 눈…….
‘페루스. 내 이름은 페루스 르온이야.’
“엘리엇! 할머니! 할아버지! 사라! 제인! 아무나 좀…….”
아이의 이름을 떠올린 엘리자벳은 그제야 목이 터져라 가까운 이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아이 옆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택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의 울음을 들은 제인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고, 검술 수업을 듣고 있던 엘리엇은 검을 든 채 동생의 울음소리를 따랐다.
그러나 엘리자벳에게는 그 기다림도 긴 시간. 공황 상태에 빠진 엘리자벳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픽 쓰러져 버렸다.
* * *
황궁은 한바탕 뒤집혔다. 황가의 막내며느리가 아들을 대동하고 아픈 친우를 보러 오로르가로 갔다 황손이 쓰러지는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페루스 르온.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컸다. 황제 뒤발의 하나뿐인 손자, 그가 아들들보다 사랑하는 핏줄. 그런 아이가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오로르가에서 쓰러졌으니 르온가 휘하의 귀족들은 벌떡 일어났다.
독살이다. 반역이다, 소리치는 그들을 막은 건 황제였다. 뒤발은 공작저로 가는 것은 자신의 허락이 있었던 일이라면서 공격받는 엘라르를 두둔했다. 자신들의 머리가 그렇게 나오니 어쩌겠는가. 황제파 귀족들은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깨어났나?”
“예. 그런데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하셔서…….”
뒤발은 정무가 끝나자마자 손자를 찾았다. 넓은 방, 침대에 누운 페루스는 모든 시중인을 물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페루스는 쓰러진 이후 일주일 내내 열병에 시달리다 오늘에서야 깨어났다.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 알려 온 궁의의 말을 기억하며 뒤발은 침대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페루스. 괜찮으냐?”
“…….”
“조심해야지. 내 누누이 당부하지 않았느냐.”
“…….”
감히 황제의 말을 무시했건만 뒤발은 노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모른 척하는 손자를 다정하게 바라봤다. 아직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것을 보니 열이 덜 떨어진 모양이었다.
“네 어미가 걱정이 많아.”
그제야 페루스의 고개가 뒤발을 향했다. 페루스의 어미이자, 뒤발의 막내며느리 잔느는 마음이 여린 이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들을 데려가 그런 일이 벌어졌다 자책하고 있었다. 그런 어미의 성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페루스 입술을 꼭 물었다.
오로르가에서 쓰러진 건 어머니의 탓이 아니었다. 문제는 오로지 자신. 아니, 자신과 그 아이에게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
“내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했구요. 망할!”
페루스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억울한 듯 주먹을 쥔 아이는 어른이 있다는 자각조차 못 한 채 험한 말을 입에 담았다. 뒤발은 그런 손자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바 어린 손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손자는 지나친 면이 있었다.
“그 아인 이제 여섯 살이야. 그리고 세 살 때 일을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한 거란다.”
“하지만…… 저는 기억해요! 전 세 살이었어도 걜 기억했을 거예요!”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에 페루스가 발끈했다. 감히 나를 기억 못 해? 페루스의 속은 분노로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페루스. 할아비가 뭐라 했지?”
“……참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페루스의 숨이 거칠어지자 뒤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손자의 손을 세게 잡고는 물음을 던졌다. 페루스는 조부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먹에 힘을 뺐다. 그리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조부가 매일같이 강조하던 말을 했다.
“그래. 페루스. 참아야 한단다. 네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줄 알아야 해. 아니면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이리 아플 거란다.”
“…….”
“그때마다 쓰러지면 그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할 텐데. 그건 너도 싫지 않겠느냐.”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 페루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발은 그런 손자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했다. 저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게지. 불쌍한 것. 손자가 이런 것은 다 제 탓이었다. 내 핏줄로 태어나 어린 네가 이런 고통을 받는구나……. 페루스는 르온가의 핏줄 일부에게만 전해지는 끔찍한 저주를 받았다.
「진정한 르온가의 사자는 심장이 없다. 오직 한 사람에게 그것을 바치기 때문이다.」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책의 첫 구절을 생각하며 뒤발은 손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꼭 안아 줬다. 작은 아이는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아 뜨거웠다.
“할아버지!”
자신이 다 컸다 생각하는 페루스는 그런 조부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댔다. 그러나 뒤발은 손자를 놓지 않았다. 결국 먼저 포기한 건 페루스였다. 페루스는 자신은 아이가 아니라며 툴툴거리면서도 가만히 뒤발에게 안겼다. 뒤발은 그런 페루스를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도 이런 적이 있어요?”
뒤발은 한참 후에야 페루스를 놓아 주었다. 페루스는 뒤발이 흐트러뜨린 머리를 정리하다 말고 항상 묻던 것을 또 물었다.
“비밀이다만…… 나도 너만 할 때는 몇 번 그랬지.”
뒤발은 울컥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곤 항상 하던 답을 해 줬다. 답답하니 또 묻는 것이겠지. 저와 같은 일을 겪은 이라곤 이 늙은이밖에 없으니. 페루스의 물음은 여섯 살 때부터 계속되던 것이었다. 뒤발은 똑똑한 손자가 어떤 기분으로 같은 질문을 하는지 잘 알았다.
“저만큼 할아버지도 아팠어요?”
“그래. 아팠지. 그래도 이 할아비는 이겨 냈단다.”
“……거짓말.”
“정말이란다. 할아비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어떻게 이겨 냈어요?”
“어느새 이겨 냈단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이겨 낸 것 같지 않지만, 그 아이는 잘 살고 있거든. 여전히 똑똑하고 강하더구나. 할아비는 그 모습을 보며 이겨 냈단다.”
“…….”
“이상한 놈이 달라붙어 있긴 하나 행복한 듯도 싶고…….”
“…….”
“이해 못 하는 표정이구나. 하지만 페루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란다.”
“……뭘요.”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 말이다. 그 아이가 웃기만 하면 다 괜찮은 거란다. 그걸 보면 어느새 너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리고 자연히 병을 이겨 낼 거란다.”
거짓말! 페루스는 허허거리면서도 슬픈 듯 보이는 조부의 표정에 반박하고 싶었다. 몇 번이고 들은 말이었지만 페루스는 조부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만 행복하면 된다니! 병을 이겨 낸다 해도 그건 싫었다. 내가 행복해야 너도 행복한 거야. 내가 슬프면 너도 슬퍼야 해. 그게 당연한 거야. 할아버지가 틀린 게 분명해!
“걜 봐야겠어요. 궁으로 초대할래요.”
속으로 울분을 토하던 페루스는 뒤발에게 조심스럽게 본심을 꺼냈다. 은발의 소녀를 생각하면 항상 입이 바짝 말랐다. 엘자, 엘자……. 나를 기억 못 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다시 만나면 그 가느다란 팔목에 내 이름을 새겨 놓든지 해야지. 잔인한 생각이었건만 페루스는 제 생각이 꽤 괜찮다 만족했다.
“흠……. 그 아이를 오로르가에서 보내 줄지 모르겠구나.”
“……안 보내 주면 거길 부숴 버릴 거예요. 오로르가 따위 없애 버리고 그 앨 잡아 올 거예요. 내 옆에만 붙여 놓을 거야!”
뒤발이 확신을 주지 않자 페루스의 울분이 날뛰기 시작했다. 참을 줄 알아야 한다 말한 지 몇 분이나 되었나. 뒤발은 약한 손자의 인내심에 인상을 찌푸리다 한숨을 쉬었다. 나아지질 않는군. 몇 년째 옆에서 봐 와 알고 있었지만, 손자는 자신보다 더 지독한 저주에 걸린 것 같았다. 이런 광기라니…….
“페루스.”
뒤발은 엄한 목소리로 손자를 불렀다. 벌겋게 얼굴을 물들인 페루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조부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단단히 화가 난 뒤발은 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엄히 저를 보는 눈에 페루스의 자존심이 꺾였다. 페루스는 조부의 말에 여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똑똑한 그는 조부에게 숙이지 않으면 아이를 볼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건 절대로……. 페루스는 뒤발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제 잘못을 빌었다. 손자의 진심 어린 듯 보이는 사죄에 뒤발은 그제야 굳은 얼굴을 조금 풀었다.
“정말이냐? 네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아?”
“제가 참질 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할아버지.”
뒤발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그는 손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거리며 웃는 조부를 보곤 페루스는 냉큼 고개를 들었다.
“네 잘못을 아니 상을 줘야지. 거기 밖에 누구 있느냐.”
여우 같은 처신이었지만 뒤발에게는 그런 모습도 귀여웠다. 페루스의 볼을 한 번 꼬집은 뒤발은 밖에 있을 시종을 불렀다.
상이라는 말에 페루스는 시큰둥했다. 뒤발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페루스는 하루에도 몇 번 상을 받곤 했다. 아침 인사를 했다고 받고, 말을 잘 탔다고 받고, 음식 투정을 안 한다고 받고……. 뒤발은 손자의 사소한 행동에도 큰 의미를 두곤 했다. 페루스는 그게 조부의 사랑 표현임을 알았지만 가끔은 너무 과하단 생각을 했다.
제 방엔 이제 물건을 둘 때가 없어요, 할아버지.
“데려오거라.”
그러나 뒤발의 다음 말은 좀 의외였다. 데려와? 이제 사람까지 주실 참인가.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페루스는 약간의 호기심을 가지고 선물을 기다렸다.
“들어가시지요.”
시종은 금방 돌아왔다. 그리고 시종이 데려온 선물을 본 순간 페루스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안, 안녕? 페루스.”
침실 문 너머에는 작은 소녀가 라일락 꽃을 든 채 어색하게 손을 들고 있었다.
* * *
병문안 이후 엘리자벳과 페루스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뒤발은 페루스를 위해 엘리자벳이 황궁으로 언제든지 발걸음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덕에 엘리자벳은 하루가 멀다 하고 궁으로 들어오라는 페루스의 서신을 받아야 했다.
감히 오로르가의 직계를 오라 가라 하다니! 이는 황가와 경쟁 관계에 있는 오로르가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페루스의 행태를 불쾌하게 여긴 오로르가 사람들은 엘리자벳이 궁에 가지 않았으면 했다.
‘흐아아앙. 엘리엇 바보! 멍청이!’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엘리엇 도련님!’
‘…….’
특히 엘리엇은 직접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했다. 그는 가지 말라는 제 말이 무시당하자 엘리자벳의 신을 모조리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엘리자벳이 신고 있던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라비의 과격한 행동에 엘리자벳은 주저앉아 울었고 시중인들은 입만 벙긋거렸다.
엘리엇은 곧 엘라르에게 불려 가 크게 혼이 났다. 그러나 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잘못했단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자벳이 벌을 받는 엘리엇 곁으로 가 잘못을 빌었는데, 저로 인해 오라비가 벌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집 안이 시끄러워졌지만 가주인 엘라르는 어린 손녀의 외출을 막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궁으로 들어갈 일이 있을 때마다 엘리자벳과 함께 움직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른 아침부터 조손은 함께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엘리자벳은 이른 시간임에도 눈을 반짝이며 밖을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었지만 엘리자벳에게 페루스에게로 가는 길은 항상 설렘 가득한 길이었다.
“엘자. 우리 아가. 그 아이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
엘라르는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이는 손녀를 보며 미소 짓다 페루스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밖을 보던 엘리자벳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네! 할머니. 페루스는요…….”
엘리자벳은 조모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페루스에 대해 늘어놨다. 페루스는 다정해요. 어제는 페루스가 책을 읽어 줬어요. 책을 읽으면서 슈를 먹었는데……. 참 딸기 케이크도 있었어요. 사라의 것만큼은 못하지만 페루스가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래요. 딸기가 이만큼이나 있었어요. 먹다 입에 묻었는데 페루스가 닦아 줬어요.
엘리자벳은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작은 입에서 나오는 첫 단어는 하나같이 페루스라는 이름이었다. 엘라르는 손녀의 말과 행동에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맞장구를 쳐 줬다. 엘리자벳은 조모가 그렇구나, 좋겠어, 하는 말에 더욱 신이 나 페루스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반응과 다르게 엘라르는 뒤발의 손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페루스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라곤 뒤발의 유일한 손자라는 것과 엘리엇과 같은 나이라는 것뿐. 르온가의 중요 일원이긴 하지만 이제 아홉 살인 페루스는 엘라르의 신경 밖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엘라르는 페루스에 대해 알고 싶은 척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랑스러운 손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엘라르는 제 어린 핏줄을 아꼈기에 그 정도의 수고는 마다치 않았다.
“할머니도 페루스를 보고 싶으세요?”
엘리자벳이 한창 떠들다 말고 잠시 멈췄다. 그러곤 한껏 부푼 목소리로 엘라르에게 물었다. 엘라르는 손녀의 기대감 가득한 표정에 조금 당황했다. 어린 엘리자벳은 엘라르에게 저랑 같이 가요, 작게 속삭였다.
“오, 아가. 물론 보고 싶지. 하지만 이 할미가 요즘 바빠요. 다음에 시간이 나면 함께 보자꾸나.”
엘라르는 어린 손녀에게 실망을 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나 자신이 페루스를 보러 가는 일은 좋지 않았다. 뒤발을 보는 것도 아니요, 이제 아홉 살인 뒤발의 어린 핏줄을 보러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면 휘하에 있는 세력들은 자신이 르온가에 고개를 숙였다 웅성거릴 것이 분명했다.
‘막으셔야 합니다! 어린 아가씨께서 르온가 소굴로 들어갔다 어찌 될 줄 알고!’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 한단 말입니까!’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각하.’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엘리자벳이 궁에 드나드는 일로 가문 안팎에서 말이 많았다. 몇몇 이들은 르온가의 소굴로 갔다 엘리자벳이 다치면 어찌하느냐며 지금이라도 막으라,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엘라르는 그 말들을 무시했다.
엘라르는 어린 손녀가 언젠가부터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알았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음에도 엘리자벳은 기를 못 폈다. 항상 눈치를 살폈고 또래 아이들이 할 법한 흔한 떼조차 거의 부리지 않았다. 엘라르는 그런 엘리자벳이 안쓰러워 눈여겨봤다. 그리고 엘리자벳의 성격이 아들 내외의 무관심과 학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나 크리스가 엘리자벳과 함께하며 그러한 것들을 막아 줄 수 있음 좋으련만. 그러기에 부부는 너무 바빴다.
그래서 엘라르는 궁에서 연락이 왔을 때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어린 손녀는 뒤발의 손자를 보고 오면 한층 밝아졌다. 게다가 하루 종일 궁에 있으니 도움 안 되는 제 어미도 거의 보지 않았다. 얼마나 잘된 일인가. 귀한 손녀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엘라르로서도 불쾌했지만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았기에 엘라르는 수도에 머무는 동안은 엘리자벳을 궁에 계속 드나들게 할 참이었다.
“그럼 다음에는 꼭…….”
엘리자벳이 엘라르를 향해 작게 말했다. 엘라르는 오냐, 긍정을 표하며 엘리자벳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실망스러운지 조금 전보다 확연히 축 처져 있었다.
‘헬렌. 그 아이 때문이 아닌가. 영리한 줄 알았더니 엘리온 못지않은 머저리일 줄이야.’
속상해하는 손녀를 보자 이 사달을 낸 이들이 생각났다. 아들 내외, 그중에서도 헬렌을 생각하며 엘라르는 인상을 굳혔다. 아들 엘리온이야 키우면서 포기했으니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영리하다 해서 들인 아들의 짝은…….
‘엘. 헬렌 그 아이, 이대로라면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요? 방법이 없나?’
‘희귀한 약을 꾸준히 쓰면 10년 정도는……. 하지만 약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한 달에 수도 일반 저택 하나 가격은 가볍게 넘기더군요.’
‘그럼 됐어요, 크리스. 엘자를 생각하면 지금껏 죽이지 않은 것도 자비지. 그 아이가 가문에 들어와 사고 친 것만 생각하면……. 그 아이는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아둔한 것! 그냥 명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요.’
‘아이들이 어린데 괜찮겠습니까?’
‘그런 어미는 엘리엇과 엘리자벳에게 없는 게 낫지요. 그래도 우리 가문에 들어와 두 아이를 낳았으니 편히 가도록 의사 하나쯤은 붙여 둬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 아이, 오로르의 성을 가지고 죽겠군요. 당신에게 저지른 무례를 생각하면……. 엘, 당신은 정말이지 훌륭합니다.’
오로르가로 온 헬렌은 몇 년 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망가졌다. 파리한 낯짝, 말라비틀어진 팔다리, 냄새나는 몸……. 한때 사교계를 휩쓸었던 매력적인 아가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라르는 헬렌에게 별 연민을 느끼지 못했다. 쓸모없는 것. 아이를 낳은 것으로 쓰임을 다한 헬렌은 엘라르에게 더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엘라르가 헬렌을 생각하며 인상을 계속 구기자 엘리자벳이 눈치를 보더니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엘라르는 얼른 얼굴을 펴고 손녀를 향해 웃어 줬다.
‘불쌍한 것. 엘리엇을 조금만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이였으면 나약하다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라르에게 세상 다른 이들과 손녀는 질적으로 달랐다. 엘라르는 열이 넘어가는 아들의 사생아들은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도륙했지만 엘리자벳은 생채기 하나라도 날까 품 안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키웠다. 사랑스러운 것. 가여운 것……. 엘라르에게 저를 똑 닮은 손녀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보물이었다.
엘라르가 갑작스럽게 안아 오자 엘리자벳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조모의 온기와 사랑이 싫지 않았기에 엘리자벳은 따뜻한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각하.”
한 시간은 금방이었다. 페루스의 궁에 도착하자 엘리자벳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엘라르는 눈에 띄게 즐거워하는 손녀의 옷차림을 가볍게 정리해 줬다.
“다녀오겠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엘리자벳은 조모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익숙한 황궁 시녀를 향해 달려갔다. 엘라르는 시녀가 엘리자벳을 이끄는 것을 본 후 발걸음을 돌렸다. 즐거운 손녀와 다르게 엘라르에게는 해야 할 일과 싸움이 한가득 기다리고 있었다.
* * *
“나가!”
문이 열리기 무섭게 페루스의 고함과 함께 무언가 엘리자벳을 향해 날아왔다. 퍽! 흰 물체가 엘리자벳의 머리를 덮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얼떨떨한 충격에 엘리자벳이 저를 치고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봤다. 발치의 물건은 작은 쿠션이었다.
“황자님!”
문을 열어 준 시종이 경악하며 페루스를 불렀다. 시종이 아는 황자는 이럴 이가 아니었다. 어린 황자는 받들어져 자라 오만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화를 내더라도 나이에 맞지 않게 내시는 분인데……. 그러나 시종의 경악에도 페루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문가에 있는 엘리자벳을 노려봤다.
“페루스…….”
씩씩대는 페루스를 보고 엘리자벳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병문안 이후 페루스는 다정했기에 엘리자벳은 지레 겁을 먹고 말았다.
“너!”
다시 쿠션이 날아왔다. 시종은 빠르게 엘리자벳을 막아섰다. 그 덕에 엘리자벳은 맞지 않았지만 페루스는 그게 더 화가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영애께서 놀라시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넌 나가.”
“계속 이러시면 폐하께…….”
“나가! 넌 나가라고! 내 말 안 들려?”
엘리자벳이 시종 뒤에 숨은 꼴이 되자 페루스는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성큼성큼 엘리자벳에게 다가온 페루스는 시종이 저를 막아서자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처음 보는 모습에 시종이 움찔 물러섰다.
그 틈을 타 페루스는 억지로 엘리자벳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꽉 잡힌 팔에 엘리자벳이 연신 아프다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 소리를 무시한 채 제 방 가장 깊은 침실로 엘리자벳을 끌고 갔다. 곧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들어오지 마.”
“아, 아파. 페루스.”
페루스는 그제야 엘리자벳의 소리가 들리는지 팔을 던지듯 놓았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엘리자벳을 찌르고 있었다. 까닭 모를 분노를 직격으로 맞은 엘리자벳은 혼이 반쯤 나간 채 문에 딱 붙어 페루스의 시선을 피했다.
“너…….”
한참 후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페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리자벳을 불렀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응? 하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화가 풀렸나? 엘리자벳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왜 그랬어?”
그러나 엘리자벳의 기대를 와장창 부수며 다시 알 수 없는 질문이 시작됐다. 엘리자벳은 양 손가락을 툭툭 마주치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물쭈물 반문했다. 엘리자벳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페루스의 숨이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모, 몰라. 난 잘못한 게…….”
“율리히 프란츠.”
울컥한 엘리자벳은 겁이 난 와중에도 페루스에게 눈을 감은 채 덤비려 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 페루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엘리자벳은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고 말았다. 그제야 얼마 전 페루스와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랑 노는 거 좋아? 엘자?’
‘응! 좋아.’
‘나랑 계속 놀고 싶어?’
‘응!’
‘그럼 약속해. 나 말고 다른 애들이랑은 안 놀기로.’
‘그건…….’
‘싫어? 나보다 다른 애들이 더 좋은 거야?’
‘아니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너야. 페루스.’
‘엘리엇은?’
‘엘리엇은 오빠니깐……. 가족은 예외야!’
‘좋아. 엘리엇은 봐줄게. 대신 친구는 나뿐이야.’
‘으응? 하지만…….’
‘엘자. 내가 가장 친한 친구라 했잖아. 아니야?’
‘……맞아.’
‘그럼 이제 네 친구는 나뿐이야. 그러니깐 넌 나랑만 놀아야 해. 나랑만 얘기해야 하고. 다른 애들은 안 돼. 알겠어?’
엘리자벳은 사실 그 약속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루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저도 모르게 페루스와 손가락을 걸며 약속하고 말았다.
‘응. 페루스. 네 말대로 할게.’
‘좋아. 그럼 여기 네 이름을 써.’
‘왜?’
‘우리 약속의 증표야.’
그러나 엘리자벳은 고작 여섯 살이었다. 이상한 약속은 엘리자벳의 머릿속에서 그날이 채 가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엘리자벳은 그다음 날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다.
율리히 프란츠. 엘리자벳의 새 친구는 이웃 나라인 루프첸의 왕자님이었다. 까만 머리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여덟 살의 어린 왕자님은 우연히 궁에서 페루스와 놀고 있던 엘리자벳을 보고 친구가 되고 싶다며 오로르가에 서신을 보내왔다.
‘엘자. 루프첸의 왕자와는 언제부터 알았지?’
‘루프첸? 왕자님……?’
당사자인 엘리자벳은 물론이요 오로르가에게도 갑작스러운 서신이었지만 오로르가는 율리히 왕자를 환영했다. 툴란과 루프첸은 오랜 동맹 관계였다. 그 덕에 각국은 상대국에 소소하게나마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르온가에게 살짝 밀리는 오로르가로서는 작은 영향력도 큰 힘. 율리히 왕자는 오로르가에서 융숭하게 대접받았음은 물론이요 원하는 대로 엘리자벳과 친분도 쌓았다. 엘리자벳도 처음에는 율리히 왕자가 어색했지만 다정하고 친절하게 구는 또래에게 금방 마음을 열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딴 새끼하고 얘기하면 다시는 너 안 볼 거라고 했지!”
“하, 하지만 그 애는 우리 집 손님인데…….”
너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야. 엘리자벳은 페루스에게 그렇게 알려 주려 했다. 실제로 율리히 왕자가 아무리 좋다 한들 엘리자벳에게는 페루스가 최고였다. 그러나 페루스는 이번에도 엘리자벳의 말을 끊어 먹었다.
“입 다물어. 엘자. 넌 약속을 어겼어. 내가 너를 볼 일은 이제 없어.”
단호한 페루스의 말에 엘리자벳은 하얗게 질렸다. 나를 안 봐? 페루스가 나를 더는 안 보는 거야?
보기 힘든 아버지와 예측 못 할 어머니. 방치와 학대를 일삼는 부모 틈에서 자존감이 저 밑바닥으로 낮아진 엘리자벳에게 페루스가 주는 애정은 소중한 것이었다. 물론 조부모와 오라비를 비롯해 많은 주변인도 엘리자벳에게 큰 애정을 줬다. 그러나 정치, 학업, 일에 바쁜 그들에게 엘리자벳은 일 순위가 아니었다. 많은 애정을 받았지만 집중되는 애정을 받아 본 적 없는 어린 엘리자벳은 저를 제일 우선으로 놓고, 오롯이 저에게만 향하는 페루스의 집착 어린 애정에 이미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애정이 사라진다니……. 여섯 살 어린 마음에 이유 모를, 하지만 큰 두려움이 몰려왔다.
게다가 영악하게도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그런 심리를 눈치챘다. 여리디여린 심장이 어떤 두려움을 가졌는지 기민한 감으로 훑어 낸 어린 사자는 엘리자벳이 가장 두려워할 만한 행동을 했다.
달깍―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세게 밀치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힘에 넘어져 주저앉았다가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 했다. 정말 가는 거야? 나를 두고 가는 거야?
“잘, 잘못했어. 페루스. 내가……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흑……. 가지 마아.”
결국, 엘리자벳이 울음을 터뜨리며 페루스에게 매달렸다. 작은 손이, 하얀 얼굴이 오롯이 저를 원하며 들러붙자 페루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열을 느꼈다.
“……다시 그럴 거야?”
쾌감으로 찌릿거리는 몸을 꾹 눌러 참고 페루스는 짐짓 차갑게 물었다. 연기한 목소리였지만 알 도리가 없는 엘리자벳은 훌쩍거리며 페루스의 발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 아니야. 흑……. 다른 애들하고 안 놀게. 흐으,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 그러니깐 가지 마. 페루스.”
그러곤 애처롭게, 거의 빌다시피 페루스에게 매달렸다. 멀찍이 제삼자의 눈으로 본다면 우스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어린 엘리자벳은 제게 닥친 두려움에 눌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약속을 어긴 내가 잘못한 거야. 페루스의 마음을 돌려야 해.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
“흑……. 페루스.”
“…….”
“흐아앙. 잘못했어. 용서…… 용서해 줘. 흐윽.”
“용서해 줄게. 일어나. 엘자.”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울음을 만족할 만큼 들은 후에야 손을 내밀었다. 흐린 눈을 하고 엘리자벳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마자 작은 몸이 어느 품으로 훅 빨려가듯 끌어당겨졌다.
“다시는 그러지 마. 엘자.”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도닥거리며 속삭였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품에서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루스는 얌전히 제 말을 듣는 엘리자벳의 머리를 쓸다 하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두 아이는 한참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놀기 시작했다. 다정해진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그네를 태워 주고 케이크를 손수 먹여 줬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뛰는 아이들은 평소와 같았다. 페루스에게 딸린 시종은 제 눈을 비비다 아이들의 싸움이었구나, 가슴을 쓸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한쪽에 쏠려 있던 관계는 이 일을 기점으로 더더욱 한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 * *
엘리자벳과 페루스, 두 아이는 각자 안정을 찾아갔다. 엘리자벳은 과격하긴 했지만 페루스의 과한 애정을 받아 마음속 결핍을 채웠다. 그리고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존재 자체로 안정을 찾아갔다. 두 아이의 조부모들도 만족했는데 엘라르는 손녀가 밝아져서 흡족했고, 뒤발은 페루스가 앓는 일이 없어져 기뻐했다.
“안 돼!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나, 나도 싫어. 하지만 이제 집에 가야 한대.”
그러나 시간은 짧았다. 수도에서 일이 끝나고 오로르가는 다시 동부로 돌아가게 되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페루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내 궁에 방이 많아. 하나 줄 테니깐 거기서 지내.”
“가야 하는데…….”
“내가 방까지 내준다는데 갈 생각은 아니지?”
“…….”
“응? 엘자.”
엘리자벳은 손을 잡아 오는 페루스를 보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가겠다는 거야!”
엘리자벳이 말없이 고개만 숙이자 결국 페루스가 빽 고함을 질렀다. 멀찍이 떨어져 두 아이를 보고 있던 시종이 슬그머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황자께서 어린 영애께 또……. 시종은 두 달간 엘리자벳에게 성질을 내던 페루스를 심심찮게 봐 왔기에 사태가 험악해지면 막을 요량이었다.
“흐윽…….”
“가겠다는 거냐고!”
“나도 가기 싫어! 싫단 말이야! 나, 나도 너랑 계속 같이…….”
결국 시종이 도착하기도 전에 엘리자벳이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도 가기 싫었다. 오래도록 페루스와 있고 싶었고 놀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엇도 아니고…… 자신이 조른다 해서 어른들이 들어줄 리 없었다. 그런데 페루스는 자신에게만 화를 내니, 도무지 어쩌란 말인가.
“울지 마.”
엘리자벳이 서럽게 울자 페루스는 묘한 얼굴을 하곤 목소리를 낮춰 엘리자벳을 달래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니! 자신과 함께 있고 싶다니! 상황은 짜증스러웠지만, 기분은 흐뭇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등을 토닥이며 울지 마라 달래자 더욱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리고 오를 대로 오른 감정은 전혀 여과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워! 매일 화만 내고!”
“…….”
원망, 서러움 등의 감정이 밉다는 단어로 정리됐다. 실제로 페루스가 밉기보단 더욱 떼를 쓰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엘리자벳의 실수였다. 밉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자벳을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내 마, 마음은 이해도 못 해 주고! 페루스 싫어!”
“…….”
“내 잘못이 아니야! 그런데 나한테만 화를 내고!”
“…….”
엘리자벳이 페루스의 분위기를 눈치챈 것은 몇 마디 더 꺼낸 후였다. 떼를 쓰던 그녀는 묘한 기류에 고개를 들었다. 페루스는 눈을 세모꼴로 한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내가 밉다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엘리자벳을 향해 쏟아졌다. 엘리자벳은 바로 울음을 그치고 얼어붙었다. 페루스가 저런 표정일 때면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을 엘리자벳은 두 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 충분히 배웠다. 학습된 두려움이 몸을 잠식하자 엘리자벳은 발발 떨기 시작했다.
“…….”
“싫어?”
“…….”
페루스는 순식간에 벙어리가 된 그녀를 윽박질렀다. 답을 하라 재촉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페루스 덕에 엘리자벳은 본래의 서러움은 말끔히 잊은 채 사과하기 바빴다.
“잘못했어. 페루스가 미운 게 아니라…….”
“싫다는 건?”
“아니야! 싫은 것도…….”
“그럼 왜 그렇게 말했어?”
“그건…….”
두 아이의 행태에 얼이 나간 건 시종이었다. 두 아이는 시종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지만 시종은 두 아이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그는 대화의 양상에 어이가 없었다. 누가 봐도 어린 영애에게 큰 잘못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황족에게 무례했다 정도? 그러나 그건 황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평민 아이도 아니요 보통 귀족 가문도 아닌 대가문의 영애였다. 그런데 저리 윽박지르시니…….
“두 분. 간식을 드실 시간입니다.”
시종은 오늘 일은 황제에게 알려야겠다 생각하며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두 아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침 간식 시간이 되기도 하여 딱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페루스는 급작스럽게 끼어든 시종에게 네놈이 뭔데 끼어들어! 라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무어라 말을 하진 않았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있는 엘리자벳의 눈가가 더 붉어지는 것은 페루스로서도 원치 않았다.
엘리자벳은 시종에게 저도 모르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눈물 가득한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자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정원으로 자리를 옮기지. 가자 엘자.”
“예. 그렇게 이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정원에 도착한 그는 더는 엘리자벳의 귀향에 대해 별말 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페루스가 조용해진 것이 의아했지만, 분위를 냉랭히 만들고 싶지 않아 입을 닫고 달콤한 쿠키만 한껏 베어 물었다.
“여기 묻었어.”
“응…….”
페루스는 다시 다정해졌다. 엘리자벳은 몇 번, 부드러운 손길에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페루스가 자신을 이해했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생각과 다르게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떠날 때까지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화를 참느라 모든 인내심을 동원해야 했다.
* * *
페루스는 잠도 미루며 엘리자벳과의 이별에 대해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제 궁에 가둬 두고 싶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엘리자벳 앞에서는 제멋대로 가지 말라 억지를 부렸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페루스는 엘리자벳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페루스는 오로르가와 자신의 가문 사이의 알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여섯 살인 엘리자벳이 제 궁에 드나드는 일로도 툴란의 정치계는 시끄러웠다. 조부와 오로르 가주의 묵인이 없었다면 엘리자벳은 제 궁에 발도 들이지 못했으리라.
‘차라리…….’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르온 휘하의 남부 귀족 영애였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랬다면 일은 편해졌을 것이다. 남부의 귀족들은 제 또래 어린 여식을 벌써부터 제게 못 드밀어 난리였다. 오로르가 출신의 엘리자벳이 자신의 소꿉친구 자리를 꿰찬다 불평도 매일같이 한다지. 우스운 일이었다. 페루스는 여섯 살 때, 세 살배기 엘리자벳을 본 순간부터 엘리자벳 외에 제 옆에 있을 아이는 없다 깨달았다.
건방진 제 오라비 뒤로 겨우 서 있던, 자신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던 작은 아이. 페루스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보는 순간부터 어찌나 마음에 걸리던지……. 자신의 경쟁 상대라던 아이의 오라비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페루스는 귀엽게 말아 올린 은발에, 동그란 녹색 눈에, 오물거리는 작은 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왜 저리 저놈을 잡고 있나. 네가 잡아야 할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처음 봤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페루스. 내 이름은 페루스 르온이야.’
그래서 원래 목적이었던 엘리엇도 제쳐 놓고 엘리자벳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엘리자벳은 물론이요 엘리엇도 당황한 듯했다. 엘리엇은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무어라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엘리엇의 말을 기억할 수 없었다. 엘리자벳에게 제 이름을 말한 후 그는 몽롱한 정신과 뜨거운 몸에 곧바로 쓰러졌으니깐.
지독한 열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페루스는 그날 이후 엘리자벳을 생각하며 앓아누웠다. 그리고 조부는 그럴 때마다 그의 머리맡을 매일같이 지켰다.
‘불쌍한 것. 도대체 왜…….’
이상한 열병을 몇 번이나 겪자 조부는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엘리자벳을 보기 전이었다면 절대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페루스는 조부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페루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다행히 열병이 찾아오는 주기는 점차 길어졌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페루스는 공부를 하다가도, 자다가도 심심찮게 열병을 앓았다. 열병은 페루스의 일상이 되었고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의 한숨은 늘어 갔다. 조부는 그를 볼 때마다 자신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이르곤 했다.
시간이 느리게 지났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보고 싶었지만 오로르가는 수도로 어린 핏줄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가 동부로 갈 일도 없었다. 페루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동부에 있을 엘리자벳의 소문을 모으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엘리자벳에 관한 소문은 거의 없었고 페루스가 알 수 있는 정보도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페루스는 엘리자벳에 관한 소문이면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엘리자벳이 딸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들릴 때면 그는 온종일 딸기를 먹었다. 게워 내면서도 딸기 입에 넣는 아들을 보며 그의 부모는 아이의 머리 어딘가가 잘못되었나 싶어 궁의를 부르곤 했다. 르온가의 저주를 믿지 않는 그들은 페루스를 걱정할지언정 이해하지는 못했다. 페루스를 이해해 주는 유일한 인물은 조부인 뒤발뿐이었다.
3년……. 페루스는 3년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열병과 부모의 걱정 어린 시선……. 그 모든 게 싫었지만 제일 끔찍했던 건 엘리자벳을 보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조부와 아무리 훈련을 해도 엘리자벳을 향한 감정은 잘 조절되지 않았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다시 보기 전 매일 밤 피가 말라 가는 느낌에 괴로웠다.
‘또 그래야 한다니!’
그런데 고작 두 달 만에 또 그 생활로 돌아가게 생겼다. 3년을 견디고 고작 두 달……. 너무도 짧은 보상에 페루스는 벌써 미칠 것 같았다. 너는 왜 오로르여서! 왜 동부에 적을 둬서! 페루스는 괜히 엘리자벳의 출신을 원망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은 이미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하지만 피곤하기보다는 짜증감만 앞섰다. 사흘 뒤면 오로르가는 떠날 것이다. 엘리자벳도 당연히……. 초조해진 페루스는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일이 오면 몰래 가둬 둘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본 페루스는 새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봤다. 어디서 온 것인지 떼를 지은 수십 마리의 새들은 일제히 날아올라 화살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페루스는 그걸 무심히 보며 등을 돌리려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다시 새의 무리를 뚫어져라 봤다. 새들이 눈에서 사라지자 페루스는 곧장 밖을 향해 뛰었다.
* * *
엘리자벳은 오자마자 선물이랍시고 페루스가 내놓은 백 마리가 넘는 비둘기를 보고 무서워 뒷걸음쳤다. 푸드덕거리며 난리를 치는 전서구들은 어린 엘리자벳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선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겁에 질린 엘리자벳을 억지로 끌어 전서구 사용법을 알려 주는 데 몰두했다.
“얘네를 가지고 하루에 한 통 나한테 편지를 보내. 다리에 통 보이지? 여기 이만한 편지를 넣어서…….”
왕복으로 편지를 전달하는 새라면 몇 마리로도 충분했겠지만, 전서구들은 편도로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보지 못하는 대신 하루에 한 통씩 편지를 받아 보기로 스스로와 합의한 페루스는 새벽녘에 최대한 많은 전서구를 훔쳐 냈다.
그러나 황궁에서 한두 마리도 아닌 백여 마리의 전서구가 사라진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심지어 그게 군사용이라면! 엘리자벳이 전서구를 선물받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서구들은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씩씩대면서 발길질을 하는 페루스 옆에서 엘리자벳은 속으로 안도했다.
뒤발은 손자의 행동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 많은 전서구를 어떻게 훔쳐 냈는지. 전서구 담당자에게 벌을 줘야 하겠지만 너무 재미있어 벌 대신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홉 살,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는 손자였지만 이럴 때면 꼭 제 또래 아이 같았다. 뒤발은 전서구를 빼앗긴 채 시무룩하게 있는 페루스에게 파란 깃털이 아름다운 새 한 마리를 내렸다.
“자, 페루스. 이걸 그 아이에게 선물로 주거라.”
뒤발이 손자에게 준 파랑새는 청대조로 툴란에서 몇 없는 희귀종이었다. 영리하고 지구력이 좋은 이 새는 전서구보다 훨씬 속도가 뛰어난 데다 왕복이 가능한 새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쟁터나 중요한 편지를 전달할 때는 배제되었는데 워낙 깃털이 화려해 눈에 잘 띄기도 했거니와 아무렇게나 쓰기에는 번식이 힘들었고 무엇보다 값이 너무 비쌌다.
그러나 연인이 편지를 주고받는 데는 그만한 새가 없었다. 페루스는 뒤발에게 받은 새를 곧장 엘리자벳에게 선물했다. 엘리자벳은 새를 소중히 안아 들곤 동부로 떠났다.
그리고 엘리자벳이 동부에 도착하고도 두 달이 지난 뒤에야 페루스는 첫 편지를 받아 볼 수 있었다.
* * *
엘리자벳이 편지를 늦게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아이는 신이 나 잊었지만 아무리 영리한 청대조라 하더라도 훈련 기간이 필요했다. 두 달간 속을 썩인 페루스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열병을 앓았지만 엘리자벳에게 편지를 받은 순간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리자벳의 편지는 기다린 것이 무색하게 형편없었다. 아직 글 쓰는 것에 익숙지 않은 여섯 살 아이에게 편지 쓰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에 괘념치 않고 엘리자벳의 편지를 차곡차곡 모았다.
청대조가 동부와 수도를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틀에서 사흘. 두 아이는 하루하루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며 날을 지새웠다.
“엘리엇! 나 저 책 좀 빌려줘.”
“할머니. 저도 엘리엇처럼 선생님이 필요해요.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는 배우고 싶어요.”
“사라. 여기 이 단어 맞아? 답장이 왔는데 페루스가 왜 이렇게 틀린 글자가 많으냐고…… 알아보기가 힘들대.”
페루스와의 편지 주고받기는 엘리자벳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페루스에게 예쁘고 멋진 말을 써 줄 거야! 편지에 몰두하게 된 엘리자벳은 책을 읽고 글 쓰는 것을 연습했다. 엘리자벳은 더 이상 홀로 심심하게 엘리엇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에 쓸 내용을 찾아 책을 뒤지고, 예쁜 글귀를 위해 시를 읽었다. 밖에 나가 놀 때도 열심히 단어를 익히기 바빴다.
‘저 꽃은 노란색이라 할 수도 있고 병아리색, 개나리색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저건…….’
홀로 있어도 안정을 찾자 헬렌에 대한 비이상적인 애정 갈구도 사라졌다. 창가를 드나드는 새를 기다리며 엘리자벳은 나날이 밝아졌다. 방긋거리며 정원을 뛰어다니는 엘리자벳을 보며 가족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했다.
“엘자. 우리 아가. 잘했다.”
“어찌나 배움이 빠르신지. 가르치는 입장에서 본다면 천재나 다름없으십니다.”
엘리자벳을 가르치는 선생은 침이 마르도록 그녀를 칭찬했다. 엘라르는 그 말에 약간의 아부가 있음을 알았지만 흐뭇해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손녀의 시를 감상했다. 노부부에게 있어 어린 손녀의 재롱은 삶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엘자는?”
“작문 수업 중이십니다.”
엘리엇은 엘리자벳의 변화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동생이 사라지자 이상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여동생의 창가를 드나드는 파랑새도 못마땅했다. 저 짐승의 목을……. 그러나 엘리엇은 제 감정을 교묘히 숨긴 채 여동생을 평소와 같이 대했다.
“너! 이제 너까지 나를 무시하는 거니? 지긋지긋한 핏줄들 같으니라고!”
헬렌은 자신을 찾지 않는 딸에게 원망과 분노를 토해 냈다. 엘리자벳은 헬렌을 만나러 갔다 머리를 잡혔다. 비쩍 마른 손으로 딸의 은발을 잡고 흔드는 헬렌은 흡사 미친 것 같았다.
엘리자벳은 이리저리 흔들리다 침대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렸다. 그 일로 집안은 한바탕 뒤집혔다. 엘라르는 가주의 권한으로 헬렌과 엘리자벳의 만남을 금했다. 엘리자벳도 충격이 컸는지 헬렌을 만나게 해 달라 엘라르에게 조르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온은 여전했다. 그는 엘리자벳의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한심한 아버지의 온상인 그는 여전히 엘라르를 향한 혼자만의 반항을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는 것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보건 엘리자벳의 일상은 단조로우면서도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글쓰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엘리자벳은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수도로 가는 편지에 작은 꽃들을 비롯해 여러 가지 동물들을 그렸다. 알록달록 작은 종이를 채운 그림들을 보고 페루스는 작은 선물을 들려 보내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이 그린 꽃 모양의 핀, 동물 브로치……. 어느 것은 엘리자벳의 그림과 너무도 같아 어떻게 찾아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청대조가 날씨, 계절에 상관없이 혹사당할 때, 두 아이는 점차 서로에 대해 애틋해졌다.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아니었다면 페루스는 몰라도 엘리자벳은 이렇듯 페루스에 대한 마음을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섯 살, 어린 나이. 편지에 담긴 애정에 취한 엘리자벳은 훗날 이 인연이 어떻게 흐를지 조금도 예상 못 한 채 페루스에 대한 마음을 빠르게 키워 갔다.
두 아이가 편지를 주고받은 지 1년을 넘어 곧 2년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평온하던 엘리자벳의 일상에 문제가 생겼다.
“흐윽……. 할머니! 흐아앙.”
엘라르는 산책을 하다 울고 있는 손녀를 보고 놀라 달려갔다. 조모를 본 엘리자벳은 더 서럽게 울었다. 엘라르는 무슨 일이냐 물으려다 손녀의 손에 들린 새를 보고 이유를 알아챘다. 엘리자벳의 손에 들린 파랑새는 목이 꺾인 채 죽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엘라르는 거의 혼절할 듯 꺽꺽대는 엘리자벳을 겨우 달래 돌려보낸 후 근처에 있는 시중인들을 불렀다. 그러나 시중인들 중 누구도 새가 왜 저리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엘라르는 어떻게든 캐낼까 고민하다 조용히 일을 묻어 두기로 했다. 손녀에게는 안 된 일이었지만 청대조의 존재는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다. 황가와 싸움 중인 이때 황가에서 날아온 새가 드나드는 것은 여러모로 불안했다.
“엘자. 들고양이가 그런 모양이다. 아랫것들에게 잡으라 일러뒀으니 잡히면 혼쭐을 내 주마.”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 분명했지만 엘라르는 엘리자벳에게 거짓을 말했다. 누군가 네 새를 일부러 죽였다 말하면 여린 손녀는 분명 상처받으리라.
“페루스! 페루스가 보고 싶어요. 할머니!”
편지를 보낼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되자 엘리자벳은 종일 울며 페루스를 찾았다. 엘리엇이 일부러 시간을 내 여동생을 달래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엘리자벳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았다. 엘라르는 우울하게 창밖만 보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며 수도로 데려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들 부부와 엘리엇은 간간이 수도를 찾았지만 엘리자벳은 2년이 다 되도록 수도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래, 이제 꽤 자랐으니…….
“뒤발. 황제로군요.”
“수도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며 꼭 오라 적혀 있더군요.”
“이번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가요. 어제 엘자가 페루스가 보고 싶다 울더군요. 도대체 그 아이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원.”
마침 도착한 뒤발의 편지는 그녀의 고민을 날려 줬다.
청대조의 죽음으로 엘리자벳은 수도에 다시 한번 방문하게 되었다. 페루스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말에 엘리자벳은 종일 옷을 골랐다. 페루스가 예쁘다 칭찬한 노란색도 넣고, 엘리엇이 예쁘다 한 파란색도 넣고……. 어린 주인이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자 시녀들은 까르륵 웃으며 명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수도행은……. 즐거움만 가득할 줄 알았던 수도 방문은 끔찍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 * *
2년 만의 재회는 그다지 좋은 분위기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페루스! 이거 내가 만든…….”
“너!”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만나자마자 화를 냈다. 침대에 누워 더운 숨을 뱉고 있던 그는 엘리자벳이 방에 들어오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얼마나……. 늦어도 사흘에 한 번은 창을 두드리던 청대조가 두 달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아 페루스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혹 가문의 일로 연락이 끊어졌는가. 동부로 보낸 사람은 백지만 들고 오고……. 열병에 매일 밤잠을 설친 그는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저리 밝은 모습이라니! 환하게 미소 짓는 엘리자벳을 매일 그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를 거칠게 팽개쳤다.
“약속을 또 어겨? 너는 내가 만만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준비한 선물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엘리자벳은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엘리자벳의 입장에서는 페루스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슨 약속! 페루스와 한 약속이라곤 편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대조는……. 청대조 일은 할머니께 부탁해 사람을 보냈다. 괜찮다고 답장도 보내 놓곤……. 엘리자벳은 눈물을 머금고 원망스레 페루스를 올려다봤다.
“아파! 페루스. 아파!”
미안한 표정은커녕 저를 노려보는 엘리자벳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말린 머리를 쥐고 세게 당겼다. 뜯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친 행동이었다. 예쁘게 말려 있던 머리 한쪽이 풀어지며 어깨 근처에서 대롱거렸다. 엘리자벳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갑작스러운 폭력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순간 헬렌과 있었던 일이 엘리자벳의 머릿속에 스쳤다.
‘이 망할 계집애! 이 빌어먹을 은발!’
‘아파요! 어, 어머니 아파요!’
‘너도…… 너도 그 핏줄인 거야! 나를 망친 그 연놈들의 핏줄이야!’
아픈 머리. 붉은 피. 비명……. 핏기가 싹 가신 엘리자벳은 손톱을 세워 페루스의 손을 할퀴었다. 따끔한 통증에 페루스가 엘리자벳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놓았다. 엘리자벳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뒤를 돌았다.
“으아앙.”
“당장 서!”
황궁에는 때아닌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시중인들은 울며 도망가는 엘리자벳과 씩씩거리며 쫓는 페루스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어찌나 빠른지, 다람쥐처럼 요리조리 시중인들의 손을 피해 뒤발과 엘라르가 있던 정원까지 달려갔다.
“으아앙. 할머니!”
“엘자!”
“페루스가 아니냐?”
조모를 발견한 엘리자벳은 울면서 엘라르의 품으로 도망쳤고 페루스는 그제야 쫓기를 멈췄다.
“너!”
“내, 내가 뭘……. 뭘.”
“엘자. 우리 아가 무슨 일이냐?”
눈물범벅에 머리를 풀어 헤친 엘리자벳의 꼴을 본 엘라르는 인상을 구겼다. 한창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지만 그보다는 손녀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이리저리 엘리자벳을 살펴본 엘라르는 손녀의 얼굴에 난 작은 상처를 발견하곤 페루스를 노려봤다.
“페루스가…… 페루스가…….”
“네가 먼저 약속을 어겨서잖아!”
페루스의 뻔뻔한 말에 엘라르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뒤발이 먼저였다.
“내 핏줄이 실례가 많군. 이만 가고 내일 다시 오는 게 좋겠어. 엘.”
“이 무슨…….”
“사과는 내일 하지. 꼬마 숙녀님도 내일 다시 사과받으러 오렴. 할아비가 이 못된 녀석을 혼내 주마.”
엘라르는 할 말이 많았지만, 뒤발의 얼굴을 보고 별말 없이 엘리자벳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엘리자벳은 엘라르와 함께 걸으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페루스는 뒤발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페루스도 마찬가지였다.
“페루스! 내가 뭐라 하더냐!”
“감정을…….”
뒤발에게 막힌 그는 멀어지는 엘리자벳을 볼 수 없었다. 뒤발은 저를 보는 척하면서도 제 뒤를 힐끔거리는 손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엘리자벳에게 정신이 팔린 페루스는 조부의 한숨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내일 잘 말하면…….’
‘내일 오기만 하면!’
두 아이는 말없이 속으로 내일을 그렸다. 한바탕 난리가 있었지만 두 아이는 서로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내일 만나서……. 두 아이는 하루 뒤 있을 만남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 * *
페루스는 이른 아침부터 뒤발에게 가고 있었다.
「페루스 르온」
삐뚤긴 했지만, 정확히 제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에 페루스는 다시 웃고 말았다. 이런 것을 준비했을 줄이야.
엘리자벳이 떠난 후 제 방바닥에서 발견한 상자에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들어 있었다. 첫 작품이라고 작게 쓰인 상자 속 서툴긴 했지만 정성 들여 수놓은 것이 분명한 손수건……. 페루스는 그걸 본 순간 모든 화를 잊고 엘리자벳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빨라도 두세 시간 이후에나 올 터, 그 전까지 이 기분을 참을 수 없었던 페루스는 뒤발에게 선물을 자랑하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어린 황자가 이른 시각부터 중앙궁에 모습을 드러내자 시중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허리를 숙였다.
“황자님……?”
시종장도 마찬가지였다. 집무실 밖에서 막 안으로 들어갈 참이었는지 문손잡이를 잡은 시종장은 페루스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 폐하를 뵈러 왔다.”
“들어가시지요.”
시종장은 어린 황자가 고개를 들고 격식을 차려 말하자 귀엽다는 듯 웃으며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페루스는 왠지 애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불쾌했지만, 뒤발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시종장을 한 번 노려보곤 고개를 팩 돌렸다.
“황자님!”
페루스가 시종장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막 들어갈 참이었다. 갑자기 시종장이 작지만 급하게 페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페루스는 조금 짜증스럽게 시종장을 봤다. 왜 이리 귀찮게 구는지…….
“또 아침을 거르실 모양이신지……. 들어가시면…….”
“알았어. 그…… 내 것도 준비해.”
그러나 시종장의 말이 뒤발에 대한 걱정임을 알자 페루스의 얼굴은 금세 풀렸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페루스는 제 몫도 챙기라 이르곤 문안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집무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페루스는 또 아침부터 집무실에서 주무시나, 한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뒤발은 집무실 의자에 기대 편히 눈을 감고 있었다. 왜 침실을 놔두고 이러시는지. 페루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곤 뒤발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
꽤 깊게 잠이 들었는지 뒤발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페루스는 안 되겠다 싶어 뒤발에게 손을 가져갔다.
“아……?”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페루스는 오싹한 느낌에 뒤발에게 닿았던 손을 거뒀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발의 얼굴을 봤다. 눈을 감고 있는 조부는…… 평소와 같았다. 잠이 참 깊게 드셨나 보다. 페루스는 소름이 돋은 채 움츠려 있는 팔을 애써 다시 뻗었다.
“할아버지?”
아까보다 센 힘이 뒤발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자 뒤발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페루스 쪽으로 무너졌다.
“할아버지!”
놀란 페루스는 그제야 고함을 질렀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랐지만 조부의 상태는 이상했다. 축 처진 팔다리. 힘이라곤 하나 없는 고개……. 페루스의 눈이 커졌다.
“여봐라! 시종장! 거기 누구 없어!”
한순간 숨을 참고 있던 페루스가 고함을 질렀다. 어린 황자의 비명에 후다닥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뒤발의 몸이 완전히 페루스 쪽으로 거꾸러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황자 전하……? 폐하!”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발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궁의를 불러라! 당장! 폐하!”
시종장은 고함을 지르는 어린 황자와 쓰러진 황제를 보다 궁의를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성이던 인물들이 빠르게 등을 돌렸다.
“할아버지!”
페루스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뒤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평온히 눈을 감은 뒤발에게서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페루스는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뒤발의 코로 가져갔다.
“아…….”
그러나 바랐던 숨결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페루스는 뒤발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도 못한 채 흔들리는 눈으로 뒤발의 얼굴을 봤다. 이게 무슨……. 할아버지……. 뒤발을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황자님은 우선!”
“으…… 아…….”
옆에서 시종장이 말을 걸었다. 그러나 페루스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페루스는 모든 소리를 차단한 채 신음만 흘렸다.
주륵. 페루스의 손에 축축한 무엇인가가 묻었다. 질척거리는 느낌을 따라가자 새까만 무언가가 보였다.
“이, 이건……. 폐하!”
뒤발의 코에선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페루스는 제 손에 묻어나는 피를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닿는 순간 느꼈던 오싹함, 힘없는 몸, 그리고 검은 피까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페루스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뒤발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곤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이런 것 따위! 손수건은 금방 피로 얼룩덜룩해졌다.
“일어나세요…….”
“황자님!”
“할아버지. 저 아침을 아직 못 먹었어요. 같이 가서…….”
“곧 궁의가…….”
“일어나란 말이야!”
페루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고한 황제의 얼굴 여기저기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물로 뿌옇게 변한 페루스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끅끅 올라오는 울음을 겨우 막은 채 페루스는 계속해서 뒤발의 얼굴을 닦았다. 시종장의 만류에도 소용없었다.
“할아버지!”
구겨진 손수건은 더는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그러나 페루스는 멈추지 않았다. 닦고 또 닦고. 궁의가 오고 시종들이 억지로 뒤발에게서 그를 떼어 놓을 때까지 페루스의 손은 쉬지 않았다.
* * *
“아아아악!”
저택에는 오늘도 잔느의 비명만이 가득했다. 그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는가. 페루스는 제 방에 틀어박혀 날짜를 헤아리다 곧 멈췄다.
‘할아버지……. 엘자…….’
손에 들린 손수건……. 이제는 그저 더러운 천 쪼가리라고 불러야 하는 그것에서는 퀴퀴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걸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아아아아…….”
잔느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페루스는 어미의 절절한 비명에 손을 귀로 가져갔다. 눈을 억지로 꾹 감자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뺨을 가로질렀다.
르온가는 몰락했다. 이상하리만치 빨리 치러진 뒤발의 장례식 후 르온가 식솔들은 궁에서 쫓겨나다시피 거처를 옮겨야 했다. 페루스의 큰아버지를 필두로 남부의 귀족들이 항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새로이 황가로 추대받은 오로르가는 이미 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뒤발이 오로르가 엘라르에게 황위를 넘긴다 작성해 놓은 서류는 이 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사랑받은 황제. 뒤발은 그 명성이 무색하게 빠르게 잊혔다. 이익에 재빠른 귀족들은 떠오르는 태양만을 반길 뿐 지는 태양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뒤발의 죽음에 수군거렸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감히 누구도 앞장서 오로르가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거기까지였다면…… 르온가는 밀려났을지언정 몰락했다는 말을 듣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르온가는 남부의 패자. 재력도 넘쳤고 휘하 가문들도 많았다. 백성들도 르온가를 더 지지했다. 하지만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로 르온가는 완전하게 무너졌다.
르온가의 일원은 페루스와 잔느를 제외 모두 사망했다. 피의 즉위식. 엘라르가 황제가 되면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본디라면 잔느와 페루스도 그 즉위식에 참석해야 했지만 하필 그날 열병을 앓게 된 페루스 덕에 두 사람은 목숨을 부지했다.
“아아아아아…… 아…….”
그러나 그것이 진정 다행일까? 페루스는 어미의 비명을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문의 모든 사람이 죽은 그날, 당연하게도 페루스의 아비 또한 명을 달리했다. 한 줌 핏물로 돌아온 남편을 본 잔느는…… 아들 앞에서 미쳐 버렸다. 그리고 페루스는 미쳐 버린 어미와 함께 이 거대한 저택에 감금당했다.
시중인이라곤 충직한 몇 사람뿐. 나머지는 저택 문이 잠기기 전 도망을 쳤다. 몇 없는 시중인들은 잔느를 보살피랴 넓은 저택을 이끌어 가랴 바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잔느보다 괜찮아 보이는 페루스는 자연히 홀로 방치되는 날이 많았다.
“보고 싶어…….”
페루스는 홀로 죽은 조부와 가족들 그리고 엘리자벳을 그렸다. 갇혀 있었지만 어름어름 들려오는 말로 상황을 짐작한 페루스에게 오로르가는 원수였다. 할아버지를 죽이고 그들은 축배를 들고 있겠지. 엘라르 오로르 그 늙은이는 지금쯤 할아버지의 자리에서……. 절로 이가 갈리고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여린 그의 소녀는 원수가 아니었다. 물론 아예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페루스는 이 상황에서도 엘리자벳만큼은 미워할 수 없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엘자. 나, 나 지금 너무 힘들고 외로워. 그는 무릎에 고개를 묻곤 그 말만 되풀이했다.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 해서 속이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지독한 절망과 외로움에 휩싸인 페루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오른손에 휘감긴 천에 눈물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제 눈물로 젖어 드는 손수건을 느끼며 페루스는 ‘페루스 르온’이라 새겨진 글자를 쓰다듬었다. 울퉁불퉁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 글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미쳤을지도 모른다. 엘자…… 엘자…….
“엘자…… 흐윽.”
그는 문밖에 혹 사람이 있나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 하나 없었다. 페루스는 한참 귀를 기울이다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쳐 울고 싶었지만 잔느, 어미를 생각해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어미가 저리 비명을 지르는데 자신까지 합세한다면 남은 시중인들은 더욱 견디기 힘드리라.
넓고 차가운 방. 페루스는 동그랗게 몸을 말곤 소리 죽여 한참 울다 잠들었다. 엘자…… 엘자……. 깊은 잠에 빠지고, 꿈속에서는 엘리자벳이 그의 곁에 있었다. 조부도 살아 있었고 잔느도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그는 아무도 없는 찬 공간과 눈앞 공중에서 흔들리는 어미를 봐야 했다.
* * *
새로이 주인을 맞은 황궁은 고양되어 있기는커녕 침울했다. 세간에서 피의 즉위식이라고 부르는 즉위식. 그 일의 파장은 워낙 커 주인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아랫사람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의 남편인 크리스의 의뭉스러운 죽음에 이어 병석에 있던 황태자비 헬렌의 죽음이 연달아 터지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가중됐다.
그러나 분위기와 상관없이 황궁은 바쁘게 움직였다. 새로 주인이 된 엘라르는 일밖에 모르는 것처럼 움직였고 밑에 새로이 바뀐 관료들은 그에 맞춰 바쁘게 움직였다.
그나마 여유가 흐르는 곳은 황녀궁. 까다롭지 않은 어린 주인 덕에 황녀궁의 시중인들은 다른 궁에 비해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들이 모시는 어린 주인은 내내 축 처져 있었다. 시중인들은 일이 없어 편하다 생각하면서도 시무룩한 주인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라와 제인은 어미인 헬렌을 잃은 탓이라 생각하며 엘리자벳에게 더욱 정성을 쏟았지만 엘리자벳은 그들의 정성에도 말문을 잘 열지 않았다.
“엘자……. 무슨 일이야.”
보다 못한 사라는 엘리엇에게 도움을 청했다. 황태자가 되어서도 놀기 바쁜 아비 대신 황손으로서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엘리엇은 사라의 말을 듣자마자 모든 일을 제치고 엘리자벳에게 달려왔다. 그도 점점 심해지는 엘리자벳의 증상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엇.”
엘리엇은 속삭이듯 침울하게 자신을 부르는 엘리자벳의 모습에 다시 한번 심각성을 느꼈다. 보통 때였으면 달려왔을 텐데. 역시 어머니 때문인가.
근 1년간 헬렌은 일어서지도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그나마 황태자비가 된다는 말에 잠시 기운을 차린 듯 보였지만 결국 그녀의 끝은 침상 위였다.
‘쯧……. 마지막까지 도움이라곤.’
엘리엇은 마지막까지 자신과 엘리자벳을 저주하던 어미를 생각하며 정말 징글징글한 여자라 생각했다. 무능력한 주제에 권력을 탐하던 여자. 저를 도구로 여기며 휘두르려 했던, 주제도 모르는 여자. 친모에 대한 엘리엇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러나 엘자, 착한 여동생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생각나?”
엘리엇은 주저앉아 있는 여동생의 옆에 앉았다. 어쨌든 여린 여동생에게는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괴로우셨으니 차라리…….”
“……아니야.”
“응?”
“어머니…… 어머니 때문이 아니야.”
엘리엇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자 순간 당황했다. 어미 때문이 아니다? 그는 여동생의 발간 눈을 보며 그럼 이 아이가 왜 이러나 곰곰이 생각하다 한 인물을 떠올렸다.
‘분명…… 분명 온다 했어! 온다고 할아버지가 말해 줬단 말이야! 페루스…….’
즉위식 다음 날 여동생이 르온가 아이를 찾으며 울던 것이 생각났다.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물었다. 진즉 끊어 놨어야 했는데. 페루스는 엘리엇에게 있어 묘하게 거슬리는 아이였다. 가문 간의 일로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그 아이와 여동생과의 관계가 신경 쓰였다. 꼭 자신이 밀려난 느낌이랄까.
“……르온가 자제 때문이야?”
별 시답잖은 게! 엘리엇은 엘리자벳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며 다정히 물었다. 그는 제 속이 어떻든 엘리자벳 앞에서는 항상 제 감정을 능숙히 감췄다. 가끔은 참지 못하고 화풀이를 하기도 했지만……. 보통 때는 일부러 페루스와의 관계를 추궁하며 여동생을 놀리기도 했고 시간이 나면 자신도 만나고 싶다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페루스. 흐윽…… 페루스으…….”
오라비의 다정한 물음에 엘리자벳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헬렌의 죽음도 엘리자벳에게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무서웠던 어미라도 어미는 어미였으니. 그러나 얼마간 울고 나자 어린아이의 마음은 금세 무뎌졌다. 최근 몇 년 서로 거의 보지 못한 데다가 헬렌이 끝에 보여 줬던 모습이 워낙 독했기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정은 두려움에 가려졌다.
그러나 페루스는 어찌 된 일인지 보지 않으니 더욱 그립고…… 보고 싶었다. 마지막 날 도망치지 말걸. 내가 약속을 어겨서 오지 않는 거야. 내가 미워져서 오지 않는 거야. 몇 번이고 약속을 어겨서……. 엘리자벳은 손수건을 준 날의 제 행동을 후회하며 페루스를 그렸다.
“엘자. 그 아이는…… 일이 있어 집으로 간 거야.”
며칠 전 제 외숙과 남부로 갔으니……. 엘리엇은 르온가의 하나 남은 일원을 생각하며 속으로 조소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그 거대한 재산과 권력이 어린아이 한 명에게 갔는데, 아마 갈기갈기 찢어지다 제 외숙에게 모든 걸 빼앗기겠지. 아이의 외숙인 뒤트발 남작은 저와 조모 앞에서도 욕심을 숨기지 못했다.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 텐데 페루스가 여동생의 곁으로 오는 건 꿈도 못 꾸리라.
“여기가 페루스의 집이잖아. 엘리엇이 사는 곳이 페루스 집이었는데……. 페루스는 여기 안 살고 어디로 간 거야?”
“엘자…….”
이런 질문은 참. 엘리엇은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에게 어찌 말을 해야 하나 난감했다.
“할아버지도 안 보이고, 할머니는 바빠 나를 만날 수가 없대. 페루스에게 편지라도 보내고 싶은데 사라는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즉위식과 관련된 일은 어린 엘리자벳에게 금기였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지만 당장은 엘리자벳에게 숨기자는 게 주변 이들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나는…… 나는 페루스…… 흐아앙.”
오래도록 쌓인 불안감과 외로움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엘리엇은 아무 말 없이 엘리자벳을 토닥거렸다.
“쉬……. 괜찮아. 엘자.”
“엘리엇…… 흐윽.”
엘리엇은 우는 엘리자벳을 보면 마음이 미어졌다. 울지 마. 엘자.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들어줄게.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원하는 게 르온가 자제라면, 내가 도와줄게.”
“정말? 도와줄 거야?”
눈물을 닦아 주며 약속하는 엘리엇을 보며 엘리자벳이 눈을 빛냈다. 나랑 다르게 엘리엇은 똑똑하니깐 분명…….
“그래.”
“엘리엇…….”
“응.”
“엘리엇이 있어서……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도움도 안 되는데 매일 울기만 하고…….”
“…….”
“항상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나도. 엘자.”
엘리엇은 그길로 조모에게 갔다.
얼마 후 엘리자벳은 페루스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을 수 있었다.
* * *
“세상일이란 모두 내 뜻대로! 흐흠!”
타티카는 음울한 황궁 분위기와 대조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이제 열일곱. 성인도 채 되지 못한 소년이었지만 그가 지나가자 모두 허리를 깊이 숙였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가사야. 그는 살면서 지금처럼 좋았던 적이 없었다.
“그렇지?”
“예?”
“세상이 참 좋지 않느냐 이 말이야.”
“그, 그렇습니다. 각하.”
“각하라……. 킥.”
각하. 공작님. 전부 저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타티카는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우스워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가문의 수치, 창녀의 태를 타고난 사생아, 어린 성 노예, 실험체……. 얼마 전까지 자신을 따라다니던 호칭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각하라니! 공작님이라니!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 위로 오르면 허파에 공기가 차고 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다시 말해 봐.”
“예?”
“나를 불러 보라고.”
타티카를 안내하는 시종은 새파랗게 어린 공작의 명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신분이 최고인 것을.
“각, 각하?”
타티카는 시종이 더듬거리며 명을 수행하자 배를 잡고 웃었다. 끅끅거리며 웃는 모습에 시종은 혹 이자가 미쳤나, 불경한 생각을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각하.”
“아, 크큭. 그래. 알겠어.”
다행스럽게도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시종은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도 웃어 재끼는 타티카를 보며 돌아갈 때 안내는 절대 자신이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폐하. 우세리 공작입니다.”
시종이 타티카의 방문을 알리자 문안에서 금방 시종장이 나왔다. 타티카는 그제야 웃음을 참으며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군, 공작. 아랫것들 보기 좋지 않아.”
엘라르는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하는 타티카를 보며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타티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스운 일이 있어서요.”
“우스운 일?”
“별거 아닙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전혀 아니에요.”
“그래. 너에게 우스운 일이라 해 봤자…….”
흘러가는 말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하자 타티카의 눈썹이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건 찰나의 순간. 그는 곧 생글생글 웃으며 엘라르를 마주 봤다.
“그보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알 텐데.”
“말씀 안 해 주시면 모릅니다.”
“타티카.”
“예. 예이. 알겠습니다. 크리스 님에 대해 말씀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 첫 만남부터 이야기해 보렴.”
“그건 몇 번이나 들으셨잖아요. 계속 말하는 저도 생각을 해 주셔야…….”
“타티카.”
우스운 늙은이. 모두가 두려워하는 황제였건만 타티카에게 엘라르는 두렵다기보다 우스운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아이가 발락으로 그 정신 나간 것을 만들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폐하. 크리스 님이 이 아이를 시켜 비밀리에…….’
엘라르와 타티카의 첫 만남은 즉위식이 있고 얼마 후 이루어졌다. 크리스를 범인으로 공표한 엘라르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크리스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타티카와 만나게 됐다.
‘내 탓을 할 참이에요?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들을 죽인 건 내 탓이 아니야.’
‘어허! 감히 노예 따위가 어느 안전이라고!’
‘닥쳐! 난 노예가 아니야. 이봐. 황제 폐하.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난 크리스, 당신 남편이라는 사람하고 계약을 했어. 그걸 만들어 주면 내 자리를 찾아 주겠다고 말이야!’
타티카는 그 자리에서 엘라르에게 덤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느 정도 제 목적을 달성했다. 가문을 못 먹은 건 아쉽지만 뭐, 아비를 죽였으니 반은 성공한 셈인가?
‘이놈이! 이 천한 것을 폐하께서 직접 상대하실 가치가 없습니다. 제가 당장 입을 열도록!’
‘그만. 크리스와 계약이라……. 증거가 있나?’
그러나 뜻밖에도 엘라르는 타티카를 죽이지도 고문하지도 않았다. 그냥 죽는 건 몰라도 고문당하다 죽는 것은 싫었기에 내 탓이 아니다 주장한 타티카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확실히 크리스의 친필이 맞아. 게다가 그 눈. 우세리가의 핏줄이 확실해. 아니라도 상관없다. 내 남편이 약속했으니. 널 우세리 공작으로 만들어 주마.’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엘라르는 타티카가 우세리 공작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줬다. 우세리가는 당연하게도 반발했다. 몇 안 남기는 했으나 서부의 세력 또한 제법 크게 목소리를 냈다. 타 지역보다 신분의 고하를 까다롭게 따지는 서부의 세력들은 창부 출신의 어미를 둔 서자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일을 모욕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타티카는 자신이 서자가 아니라 주장하며 엘라르의 용인 아래 반발하는 가문들의 후계자 몇을 독살해 버렸다. 하나, 둘, 셋……. 그 숫자가 열이 넘어가기 전 서부의 가문들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쯤 타티카의 이복동생 둘과 공작 부인이 실종됐다. 누가 일을 벌였는지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황제의 힘을 배경으로 타티카는 서자로 태어났음에도 우세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가주 자리에 올랐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제가요? 혹 누굴 독살할 일이 있으신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엘라르는 타티카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타티카는 엘라르가 저를 개로 부릴 것으로 생각했다. 힘을 줬으니 값을 하라는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별 상관 없었다. 타티카는 제힘으로 누군가 짓누르는 게 즐거웠다.
아아……. 고귀하다 떠들던 놈들이 살려 달라 발치에서 비는 꼴이라니. 그는 그들을, 자신이 잘났다 떠들던 놈들을 더 짓밟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너는 사형. 너는 노예. 너는 창부. 네놈들이 욕하던 꼴이 되어 보라지! 제 손가락질 하나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들을 보며 타티카는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살고 있었다.
‘……크리스에 대해 말을 해 다오. 너는 내가 모르는 그를 알고 있으니 네 입으로 크리스에 대해 들으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엘라르가 요구한 것은 생소한 것이었다. 타티카는 엘라르의 말을 듣고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세간의 사람들이 엘라르를 범인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타티카는 크리스가 즉위식 학살을 벌인 장본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봤건만 자신이 본 크리스는 눈앞의 황제에게 완전히 미친 자였다.
‘그를 원망하지 않으신가 봐?’
‘…….’
‘사람들은 폐하를 학살자라 부르죠. 폐하께서 진실을 밝히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으니…….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누명을 쓰셨다는 것을요.’
‘…….’
‘나라면 이런 상황을 만든 그를 원망할 것 같은데…….’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억울…….’
‘그 입 닫아.’
‘…….’
‘네 알량한 자리가 누구 도움인지 잘 알 텐데. 나는 네가 계모와 동생들을 어디에 뒀는지도 알고 있다.’
‘…….’
‘너는 스스로 내 개가 된 듯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
‘넌 내 개도 되지 못해. 내가 너를 거둔 건 크리스 덕분이야. 그와 네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의 글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보지도 않았다. 너를 공작으로 만들어 줄 일은 더더욱 없었지. 그리고 그랬다면 넌 노예로 죽었을 테지.’
‘…….’
‘그러니 다시 밑바닥에 떨어지기 싫으면 시키는 일이나 하렴. 그게 네 역할이니.’
타티카는 그날 처음으로 엘라르에 대해 공포를 느꼈다. 그저 말하는 것뿐인데……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위압감. 죽은 남편이 만들었다는…… 즉위식에서 그 수많은 사람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관을 머리에 쓴 채 저를 보는 황제에게서는 가릴 수 없는 위엄이 흘렀다. 그가 왜 당신에게 미쳤는지도 알 것 같아. 황제 폐하 당신은…….
“처음 만난 장소는 스승님이 운영하시던…….”
그러나 그 이후 크리스에 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마녀라 불리는 황제가 크리스 그자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면 알수록…… 두려움은 우스움으로 바뀌었다. 경외는 무슨. 아직은 괜찮지만, 곧 미칠 늙은이야. 황제는 단단한 데다 빈틈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사실 꽤 커다란 틈을 가지고 있었다. 타티카는 아무도 모르는 그 틈을 자신만 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틈을 타고 황제가 부스러지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즐거웠다. 자신이 죽인 반려를 그리워하는 황제라…….
“크리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크리스. 가장 고귀해진 당신의 황제 폐하는 곧 무너질 거야. 못 막았다 나를 원망은 마.’
“예. 생각보다 놀란 얼굴이었습니다. 특히 제 눈을…….”
‘폐하는 당신 때문에 무너지는 거니깐. 그래도 약속을 지켜 줬으니…….’
“그가 나에 대해서는……. 나에 대해 너에게 한 말은 없었나?”
‘황제가 외로움에 미쳐 간다는…… 이 재미있는 사실은 비밀로 해 줄게.’
“물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폐하에 대해 말했습니다. 거의 습관처럼요. 저와 함께 있을 때면…….”
“크리스…….”
엘라르가 타티카를 부르는 횟수는 점차 잦아졌다. 어린 공작은 나이 많은 황제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척하며 은근슬쩍 외로움의 틈새를 넓혀 갔다.
크리스. 크리스……. 죽은 이를 그리며 황제는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고 그 모습을 보며 간악한 공작은 속으로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 * *
때는 피의 즉위식이 있기 전 아직 공작들과 크리스가 살아 있을 때였다.
크리스는 바쁜 아침 일찍부터 손님을 맞았다. 헐레벌떡 그를 찾아온 손님은 우세리 공작. 나란 우세리. 젊은 시절 창부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 세간의 비웃음을 샀던 그는 이제 어엿한 공작이 되어 있었다.
“크리스! 당신이 내 아들을! 타티카를 데리고 있다고!”
“각하. 오랜만입니다. 우선 앉으십시오. 거기 차를 내오도록.”
우세리 공작이 왜 왔는지 아는 크리스는 차분히 그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어찌나 급한지 우세리 공작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크리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차는 됐소! 그보다 내 아들을 보여 주시오!”
“급하십니다. 듣기로는 버린 자식이라고 하던데……. 찾으시는 걸 보니 잃어버린 자식인가 봅니다.”
“버린 것이 아니오!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하던가? 버려졌다고?”
“…….”
“그렇군……. 그 아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군.”
에스멜다와 타티카. 나란은 두 모자를 생각하면 잠조차 편히 잘 수 없었다.
‘어머니! 저는 그녀와 약속했습니다. 그녀만을 아내로 들이겠다고! 그녀는 제 유일한 아내입니다. 저는 그녀와 아이도 뒀어요! 공작위 따위 필요 없어요. 저는…….’
‘나란. 내일 당장 그 둘을 죽여 네 앞에 보여야 정신을 차리겠니?’
‘어머니! 진정 제가 죽는 꼴을 보고 싶으세요?’
‘가문의 법을 따라. 그러면 그들을 살릴 수 있단다.’
정말 사랑했던, 지금도 가슴 아픈 제 연인과 그녀의 아이. 지키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했던 제 진정한 가족. 그때는 분명 제 외면이 그들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건만. 유약했던 자신의 오판이었다.
“다 내 잘못이지. 아이의 어미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곤……. 아니지. 어머니가 그들을 그렇게까지, 그들을…….”
어미가 모자에게 그렇게 가혹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즉 공작위 따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행태를 알아채지 못한 것도 제 잘못. 타티카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잡았어야 했는데…….
나란은 타티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아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도 한참 후에나 알았다. 게다가 어미 생전에는……. 어미에게 눌려 대놓고 사람을 풀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의 어미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고 그는 타티카를 찾아 온 툴란을 뒤졌다.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타티카, 그 아이는 각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제가 후원자로 있으니 우세리가에 데려가시는 것보다야 지금처럼 지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세리가 서자의 삶은 가혹하니까요.”
“그건 안 되오! 그 아이는 더는 서자가 아니야! 나는 에스멜다를 정식 부인으로 호적에 올렸고 그 아이는 내 장자요. 나는 그 아이에게 내 모든 걸 물려줄 거요! 그 아이의 어미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까지 하신다면야.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타티카는 저에게도 귀중한 인재인 만큼 우세리가에서 보상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크리스는 나란이 가문 안 사정을 말한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나란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타티카가 이곳에 있다 알려 온 건 크리스 저자였다. 뻔뻔하게 그 아이의 초상을 보내 놓곤…….
“좋소. 뭐든 말해 보시오.”
“아실 테지만 그리 말씀하시니……. 즉위식에 참석해 주셔야겠습니다. 당연히 지지도 해 주셔야겠지요. 협박 같으실 수 있겠지만, 서부 가문들이 르온가 편을 들며 불참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알겠소.”
나란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르온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타티카 그 아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야……. 나란은 불참하려 했던 즉위식에 참석할 것을 약속했다.
“오로르가를 대표해 감사합니다. 본래라면 가주께서 직접 말씀드려야겠지만 아시다시피 즉위식 준비로 바빠…….”
“됐소. 오로르가 가주가 친우의 죽음에 슬퍼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 우습지도 않아. 아이나 보여 주시오! 당장!”
“즉위식 후에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워낙 중요한 일이라 제가 걱정이 많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뭐요!”
나란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나 크리스는 완고했다. 결국 나란은 타티카의 안전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는 말을 듣고 물러났다.
“즉위식 후에도 이런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그러나 나란은 즉위식 후에도 그토록 그리던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며 즉위식에 참석했던 그는 즉위식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를 죽게 한 자는 그가 찾던 아들이었다.
타티카는 나란이 크리스를 찾아온 날, 아비의 자리에 발락의 점액질이 가장 많이 퍼지길 기도했다.
‘뼛조각 하나, 살덩이 하나 안 남기를…….’
아들의 뜻대로 나란은 뼛조각도 살덩이도 남기지 않았다. 나란. 그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피에 젖은 천 조각 하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곧 그 흔적마저 그의 아들은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 * *
페루스의 삶은 전과 백팔십도 달라졌다. 외숙이라 찾아온 아롤드 뒤트발 남작은 여동생 잔느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페루스를 데리고 남부 르온가 영지로 향했다. 페루스는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렸지만, 임시 양육자로 황궁의 허락을 받은 남작은 어린 조카를 억지로 마차에 태웠다.
남부 영지에 도착한 페루스는 아무 권한 없는 영주였다. 조카의 어린 나이를 핑계로 아롤드는 남부의 모든 것을 거머쥐었다. 일개 남작에 불과했던 아롤드는 곧 저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이에게도 먼저 인사를 받는 인사가 됐다.
“잔느! 그것이 살아생전 나를 모른 척하더니. 꼴좋다.”
페루스는 잔느가 왜 그리 아롤드와 연을 끊고 싶어 했는지 알게 됐다. 젊은 시절 유흥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여동생까지 팔아먹으려 했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했다.
“네 어미는 혼자 고고한 척 구는 재수 없는 년이었지. 여자로 태어난 주제에 나를 어찌나 무시하던지.”
아롤드는 페루스를 잡아 놓곤 시도 때도 없이 죽은 잔느를 모독했다. 그래 봤자 계집년이다. 천벌을 받아 속이 시원하다. 네 가문이 이리된 것도 그 재수 없는 것 때문이다. 아롤드는 르온가가 건재할 당시에는 입 밖에도 내지 못했던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그는 여동생이 르온가로 시집간 후 제 뜻대로 재물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가, 응? 그년 때문에 작위까지 팔았어! 공작가로 시집갔으면 알아서 친정 오라비를 챙길 줄 알아야 하거늘. 그까짓 푼돈 얼마나 한다고 나를 거지꼴로 만들어. 고얀 것! 나를 없는 인간 취급 하더니 벌을 받은 게 아니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귀한 조카님.”
“…….”
“그래도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해야지. 대신 조카님. 넌 이 외숙의 은혜를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아니면 고아인 너를 누가 거둬 줬을까.”
“미친놈.”
“응? 뭐라고 했지. 조카야?”
“조카라 부르지 마. 나는 네놈을 외숙으로 둔 적이 없어.”
“……조카야. 넌 네 어미처럼 예의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퍽―
페루스는 그날 처음 폭행을 당했다. 물론 뒤발에게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훈육을 위한 것이지 이런 야만적인 폭력은 절대 아니었다.
“우욱.”
배를 걷어차인 일은 페루스의 예상보다 훨씬 괴로웠다. 페루스는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겪으며 속 안에 든 것을 게워 냈다. 그러나 그런 페루스를 보고도 아롤드는 거침없었다. 그는 배를 걷어찰 수 없게 되자 옆구리를 걷어차며 어린 조카를 폭행했다.
퍽―
“허윽!”
“이제 정신이 드니? 조카야.”
퍽―
“예의범절이 좀 생각나느냔 말이다. 이 새파란 것아!”
“끅…….”
희번득한 눈을 한 아롤드는 즐거워 보였다. 르온가. 그 거대한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인 이 아이를! 빌어먹을 여동생의 하나뿐인 자식인 이 아이를! 짓밟는 기분이란. 그는 죽은 누이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사라짐을 느낌과 동시에 르온가를 가진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다 내 것이다! 이 어린놈이 내 손에 있는 한 다 내 것이야! 이 거대한 성도! 저 광활한 평지도! 이 안에 사는 많은 인간도!’
퍽. 퍽. 퍽. 아롤드의 욕심만큼 폭력은 계속됐다. 페루스는 온몸을 강타하는 폭행에 결국 의식을 놓았다.
“쯧. 새파란 것이. 일어나면 좀 정신을 차리겠지.”
아롤드는 이후 페루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으면서도 페루스는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롤드는 그런 조카가 점차 불쾌해졌다. 핏줄 좋은 페루스를 폭행하면서 덜떨어진 열등감을 채우던 그에게 있어 조카의 꼿꼿함과 경멸 어린 눈빛은 격한 분노를 불러왔다.
“이게!”
“가, 가문에서…… 끄…… 꺼져. 네……놈은 내 외숙이…… 아냐. 쓰레기야!”
남부의 화려한 성안에서는 쉴 새 없이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시중인들은 아롤드를 말리던 늙은 집사가 한칼에 죽는 것을 본 후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조카야. 네게 편지가 왔다.”
“…….”
성안은 거의 1년이 다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아롤드는 계속되는 폭력으로 퍼렇게 멍이 든 채 다리를 저는 페루스 앞에 한 장의 편지를 흔들었다.
“오, 페루스. 네게 어린 공주님이 있는 모양이지?”
“내놔!”
“예의를 차려야지. 아직도 예의범절이 이 꼴이니! 예절 선생을 붙여야겠구나.”
“당장 내놔!”
“쯧. 거기 둘. 이리 와 영주님 좀 잡아 드려라.”
고작 편지 한 장이었지만 그 힘은 대단했다. 아롤드는 처음으로 페루스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어떤 폭력도, 폭언도 없었다. 고작 날뛰는 조카를 붙들게 하고 편지를 읽어 나간 것. 그게 그가 한 전부였다.
“정중하게 부탁해야지. 그래야 내가 상을 줄 게 아니냐.”
“달란 말이다!”
“페루스. 꼭 답장을 줬으면 해. 너를 보지 못해 너무도…….”
어떤 발버둥에도 페루스는 편지에 손조차 댈 수 없었다.
“……숙부님.”
편지를 읽은 지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 결국 페루스는 아롤드에게 숙부님이라는 존칭을 붙이며 무릎을 꿇었다.
* * *
“돌려줘!”
“벨. 그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구나.”
“나한테 명령하지 마!”
“벨.”
“엄마도 아닌 주제에……. 엄마 흉내는 집어치워! 당장 내 편지나 돌려줘!”
또 시작이로군. 에셀은 문밖까지 들리는 고함에 깊은 한숨을 쉬고 문을 열었다.
“……벨을 데려가. 방에 두고 내 명이 있을 때까진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고.”
“놔! 놓으라고!”
아니나 다를까 문밖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들어서자마자 에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시녀 둘에게 잡힌 여동생 벨과 그런 벨을 보며 서 있는 새어머니 타티아였다.
“에셀! 도와줘!”
“무슨 일입니까?”
시녀들에게 붙잡힌 벨은 에셀을 알아보곤 바로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에셀은 벨을 보는 대신 타티아에게 물었다.
“벨에게는 훈육이 필요해.”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러니 명을 거둬 주세요. 어머니.”
에셀은 타티아의 단호한 말에 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시녀들을 떼어 낸 후 벨을 제 등 뒤로 보냈다.
“내가 네게 명령을 받을 위치니? 네 질문에 답을 해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되는구나. 그리고 내 앞에서 무슨 짓이지. 난 아직 명을 거두지 않았다. 에셀.”
타티아는 등 뒤로 벨을 숨기는 에셀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에셀은 타티아의 눈빛과 책망하는 말투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게도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는 뒤로 보낸 여동생을 다시 내놓지는 않았다.
‘에셀……. 네 동생을 부탁한다. 그 아이는 너무 어린데…… 내, 내가…….’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벨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이번만 제가…….”
“에셀! 됐어! 이 천것! 누가 누굴 훈육한다는 거야!”
대신 그는 허리를 숙였다. 여동생의 이런 행동은 제 실책이었다. 아버지와 형제를 잃은 지 1년……. 북부로 돌아온 벨은 많이 변했다. 언젠가부터 벨은 잘 지냈던 새어머니와 하루도 빠짐없이 불화를 일으켰으며 마들렌을 무시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천한 것이라니! 가주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벨!”
“당신은 라세르가 사람이 아니야! 우리 가문 피라곤 한 방울도 없는 외부인인 주제에! 에셀에게 명령하지 마! 빌리 할아버지가 그랬어! 가주가 되어야 할 사람은 너 따위가 아닌 에셀이라고! 에셀의 자리를 훔친 주제에 감히 누구…….”
짝―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에셀은 결국 여동생에게 손을 올렸다. 짧지만 날카로운 파공음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셀을 보다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에셀은 울컥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킨 채 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께 사과드려.”
에셀이 사과를 종용하자 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눈물을 매단 채 에셀을 노려보던 그녀는 일부러 꾹 입술을 물었다.
“아직도 말릴 생각이니?”
“죄송합니다.”
한참을 기다리다 타티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벨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에셀은 여동생을 대신해 다시 허리를 숙였다. 타티아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에셀을 보다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대로 못 넘…….”
“아으으…… 아아아악!”
그러나 순간, 어디선가 기괴한 비명이 들려왔다. 속을 긁어내는 소리에 타티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만 올라가 보렴. 나는 마들렌에게 가 봐야겠구나.”
“정말 죄송합니다.”
타티아는 에셀의 사과를 채 듣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의 굳건함은 어디 갔는지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초조하고 급해 보였다.
에셀은 사라지는 타티아를 보다 마들렌이 있을 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의붓 누이는 미쳐 버렸다. 펠릭스가 죽은 건 누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만약 자신의 검이 벨을 관통했다면, 자신도 안 미칠 수는 없었으리라.
“벨. 이리 와.”
그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는 여동생의 팔을 잡았다. 벨은 타티아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타티아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있었다.
“벨. 그만 가자.”
벨은 에셀이 몇 번 팔을 흔든 후에야 움직였다. 한순간 몸을 홱 돌린 그녀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짜증 나.”
“벨!”
“집안 꼴이 이게 뭐야!”
“벨. 제발…….”
다행히 벨은 입을 닫았다. 남매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랐다. 시중인 몇이 남매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눈보라 때문에 들어왔어?”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을 때였다. 작게 난 창밖으로 몰아치는 눈보라를 보다 말고 벨이 밝게 물었다.
“맞아.”
“그럼 오늘은 더는 훈련 안 하는 거지?”
에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 말에 묻어 있는 절실함을 읽었다. 나랑 있어 줘. 여동생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래.”
“좋아! 혼자 두면 또 심심하게 책이나 읽을 테니 내가 놀아 줄게. 에셀.”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에 눈물 나게 혼쭐을 내 주겠다, 다짐한 결심이 흩어졌다. 에셀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옆에서 걷고 있는 벨을 바라봤다. 저와 똑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진 여동생은 그새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벨은 어려. 아직은 달래자. 하지만 어머니께 다시는…….’
에셀은 웃고 있는 여동생에게 차마 엄하게 말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부탁하듯 여동생의 손을 잡고 걸음을 멈췄다.
“벨. 다시는 어머니께 그러지 마.”
“……싫어.”
“어머니는 가주야. 네가 절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지. 게다가 그분은 우리 어머니야. 벨. 넌 어머니께 그래서는 안 돼.”
“그 여자는 우리 엄마가 아니야, 에셀! 나와 너를 낳지도, 우리랑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았잖아! 심지어 라세르가의 피도 없는 여자야.”
“벨. 어머닌 우리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어머니야. 아버지가 그분을 선택하셨고, 우리를 키워 주셨잖아. 기억 안 나?”
“키워 준 걸로 따지자면 유모가 내 어머니지. 게다가 그 여자는 출신상 원래 아버지 옆은커녕 발치에도 못 서는 여자라며! 천한 사냥꾼 집안의 여자라 들었어.”
에셀은 벨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고작 아홉 살인 동생이 도대체 언제부터 천한 집안 같은 걸 따졌단 말인가. 1년 전까지만 해도 여동생은 새어머니를 누구보다 따랐다.
“벨. 누가 너한테 그런 걸 알려 줬어?”
“…….”
“빌리 할아버지야?”
“……아냐.”
에셀은 벨의 한 박자 느린 답에 누가 범인인지 알아챘다. 빌리 할아버지. 남매가 친근히 부르는 노인은 북부의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남매를 누구보다 아끼는 빌리는 라세르가 방계인 데다 과거 북부를 대표하는 전사였다. 그는 원래도 북부에서 발언권이 켰는데 남매의 아버지를 비롯해 북부의 전사들이 죽은 후 더욱 큰 발언권을 가지게 됐다. 에셀도 그를 전사로서 원로로서 친척 어른으로서 존경했다. 하지만…….
“벨. 그분은 알다시피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걸 알면서도 계속 그분과 가까이 지내면 어머니와 사이는 더 안 좋아질 거야.”
“그러라지. 난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여자보다 빌리 할아버지가 더 좋아. 그리고 할아버지 말이 맞아! 우리 가문의 뒤를 이을 사람은 에셀, 오빠야! 그 여자는 도둑질을 한 거라고!”
“벨! 난 아직 가문을 이끌 수 없어. 검술도 부족하고 전쟁 경험 하나 없는 내가 가문을 이끌었다간 북부는 순식간에 무너질 거야!”
똑같은 대화가 반복됐다. 에셀은 벨을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벨이…….’
그런데 문뜩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빌리는 원로다. 원래라면 굉장히 바쁘실 텐데…….
“벨. 빌리 할아버지는 바쁘셔. 귀찮게 하면 안 돼.”
“내가 간 거 아냐. 빌리 할아버지가 오시는걸.”
“네게 찾아오신다고? 언제부터?”
“꽤 됐어. 에셀이 훈련으로 바쁘니깐…… 내가 심심해 보이셨대.”
에셀은 점점 작아지는 벨의 목소리에 그제야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아는 빌리는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는 이는 아니었다. 아마 벨이 진정 외로워 보이셨겠지.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개 벨에게……. 남매를 끔찍이 아끼는 그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돌아온 이후 벨과 함께해 준 시간이 거의 없었다. 여동생을 돌보기에는, 에셀 그 자신도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가 떠오르고, 펠릭스가 떠오르고…….
에셀은 돌아온 이후 훈련에만 매진했다. 새어머니나 북부의 다른 이들처럼 복수에 매달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복수도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사실 별로 심심하지는 않았어. 나도 훈련을 하고 있고…….”
“…….”
“빌리 할아버지한테는 뭐라 하지 마. 빌리 할아버지한테 배우는 것도 많아. 활 쏘는 것도 할아버지가 가르쳐 줬어!”
“…….”
“할아버지는 우리랑 피가 섞여서 그런지 제 자식만 챙기는 누구랑은 다르게 나한테 잘해 주셔. 이름만 가족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란 말이야.”
벨 이 아이는……. 에셀은 그 말에 벨의 상태가 정확히 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어린 여동생은 외로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훈련에만 매진하고 새어머니는 미쳐 버린 누이 챙기기에 바쁘고.
에셀은 새어머니와 마들렌을 향한 이해 못 할 벨의 적개심이 어디서 온 것인지 눈치챘다. 가족들 사이에서 소외당한 벨은 나름대로 제 소외의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저를 챙겨 주는 빌리와 어울리게 됐고, 아마 그가 별 뜻 없이 내뱉는 말에서 그 이유를 만들어 냈겠지.
“벨…….”
에셀은 여동생을 꼭 안았다. 이유를 알게 된 이상 고쳐 나가야겠지만 이 아이에게 잘못 따윈 없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를 챙기지 않아서, 어머니 유언을 지키지 못해서…….
“으…… 떨어져. 에셀!”
벨은 에셀을 밀어 낼 듯 손을 들었다. 그러나 작은 손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녀는 슬쩍 에셀의 눈치를 보다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너는 내 가족이지 에셀?”
“응.”
“항상 내 편이지?”
“응.”
“약속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에셀, 오빠는 내 편이야. 그 누구보다 나를 챙겨 주고 나를 먼저 생각해야 해. 왜냐면…… 왜냐면 우리는 유일하게 같은 피를 가졌잖아.”
“꼭 그럴게. 나는 항상 네 편이야. 맹세해.”
벨은 그제야 에셀을 밀어 냈다. 오라비에게서 맹세를 받아 낸 그녀는 제 키에 맞춰 허리를 굽힌 오라비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렇게 보지 말란 말이야! 나 나름대로 바빴어. 요즘은 엘리엇이랑 엘자랑 편지도 주고받고…….”
“엘자?”
에셀은 벨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 아까 그 편지가……. 깊숙이 묻어 뒀던 얼굴이 떠올랐다. 성에 사는 작은 공주님……. 은발에 벨보다도 작은 소녀.
“어머니가 가져가신 편지가…….”
“응. 맞아.”
“네게도 그런 말은 없었잖아. 오로르와 편지라니. 벨. 그만둬.”
“에셀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소리를 할 참이야? 오로르는 다 죽여야 한다고? 내가 어리지만 이건 알아. 왕자님은…… 엘리엇과 엘자는 잘못 없어.”
벨의 말속에는 작은 적개심조차 없었다. 에셀은 순간 벨의 어깨를 세게 쥐고 말았다. 벨,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몰라? 네게 말은 안 했지만 너도 알잖아. 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가문이 왜 이렇게 됐는지 대강 알잖아. 네가 말하는 아이들을……. 벨을 향한 고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순간…….
‘엘리자벳 오로르라 합니다.’
숨이 턱 막혔다. 뭉쳐 있던 고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셀은 분명 벨에게 화를 내려 했다. 너 그 아이들이 누군지 알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 또한 엘리엇과 엘리자벳. 특히 엘리자벳에게 적개심 따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이를 생각하면…….
머리와 가슴이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셀은 그제야 왜 자신이 엘리자벳을 깊숙이 묻어 뒀는지 알 수 있었다.
“맞아. 그 아이들은 잘못이 없어. 우린 그 애들과 친구였고.”
머리에 있던 말 대신 다른 곳에 있던 말이 나왔다. 말을 꺼낸 에셀은 제 입에서 나온 말에 충격에 빠져 입을 틀어막았다.
“에셀……?”
벨이 그런 에셀을 이상하게 봤다. 여동생의 시선에 에셀은 입을 가린 채 입안을 물었다. 비릿한 맛이 입안에 금세 가득 찼다.
“그래도 다행이야. 오빠가 나랑 생각이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던 벨은 에셀이 말이 없자 긍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에셀은 아니라 말하려 했지만, 벨의 눈을 보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 편을 들어 주기로 하지 않았나.
“편지 오면 이제 에셀에게도 보여 줄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해. 내가 같이 써서 보낼 테니까.”
“……그래.”
‘벨의 말이 맞는 거야. 그 아이도 아무것도 모를 테니깐…….’
모순된 머리와 가슴. 에셀은 자신이 꼭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가문을 배신하고 북부를 배반한 것 같았다. 그러나 죄책감은 꼴깍 삼킨 침과 함께 그의 안 깊숙한 곳으로 떨어졌다.
* * *
엘리자벳이 벨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 데에는 엘리엇의 영향이 컸다. 엘리엇은 제게 온 벨의 편지를 무시하려다 여동생에게 그 편지를 넘겼다. 페루스에게 향하는 여동생의 까닭 모를 애정과 관심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벳은 조금 주저했지만, 벨과의 교류를 받아들였다. 비록 페루스 몰래 사귄 친구이긴 했으나 그녀도 또래의 동성 친구가 싫지는 않았다.
“엘리엇. 벨한테 할 말 없어?”
“내 이야기는 쓸 필요 없어.”
“그래도…….”
“그보다 엘자. 나랑 있을 때도 편지야? 섭섭해.”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편지 쓸 시간이 없는걸.”
“편지가 나보다 더 중요해? 응?”
“알았어. 엘리엇. 대신 나중에 편지 쓸 시간 내게 역사학 숙제 도와줘. 문제도 어렵고 양도 많아서 힘들어.”
“좋아. 도와줄게. 대신 펜 놓고 이리 와. 오랜만에 같이 나가 놀자.”
“응! 엘리엇.”
엘리자벳의 일과는 제법 바빠졌다. 나이가 차기 시작하며 그녀는 제법 많은 시간 동안 교육을 받아야 했다. 엘라르는 손녀를 귀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교육에는 가차 없었다. 엘리자벳은 황녀로서 소양을 갖추기 위해 저녁까지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다. 편지는 자연히 밤늦은 시간이나 틈틈이 남는 시간을 활용해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벳이 제일 먼저 챙기는 이는 페루스였다. 그녀는 이 주에 한 번 보낼 수 있는 편지를 위해 매일같이 시간을 냈다.
「보고 싶은 페루스에게.」
엘리자벳은 작은 손으로 빼곡히 편지를 채웠다. 페루스에게 가는 편지는 너무나 상세해 꼭 일기와도 같았다. 오늘은 뭘 배웠는지, 뭘 먹었는지, 누구를 봤는지, 그리고 얼마나 보고 싶은지……. 엘리자벳은 편지에 자신을 꼼꼼히 기록했다. 한 획, 한 획. 편지에는 그리움이 가득 찼다.
「나는 잘 지내. 너는 어때?」
엘리자벳은 편지 끝에 꼭 이 문장을 썼다. 사실 엘리자벳이 적고 싶었던 말은 첫 문장과 같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뒤 너는 어떠냐, 그 물음이 부끄러워 그녀는 항상 잘 지내냐는 문장으로 제 감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보고 싶어. 너도 내가 보고 싶어? 페루스…….
엘리자벳의 편지에 비해 페루스의 답장은 형편없었다. 짤막한 글로 몇 마디 적힌 편지에는 그의 일과도 감정도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찾을 수도 없었다. 외숙의 보살핌에 건강하다. 외숙의 아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 외숙은 친절한 분이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만 가득한 답장에 엘리자벳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한참 읽고 쓰다듬었다.
그리고 편지를 외울 때가 되었을 무렵 그리움과 함께 편지들을 상자에 켜켜이 보관했다.
* * *
“페루스. 내 사랑스러운 조카. 네 작은 공주님께서 또 편지를 보내오셨구나.”
“이리 주세요.”
“일단 내가 봐야 하지 않겠니. 난 네 후견인이니…….”
“달라고 말씀드렸…… 으윽.”
“귀하고 귀하신 르온가 핏줄이라 그런가. 아주 예의가 발라.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아아악!”
“별 쓸모없는 내용뿐이구나. 답장은…….”
아롤드는 제게 차여 신음을 흘리면서도 조각 난 편지를 긁어모으는 페루스를 보고 히죽 웃었다. 더 이상 재수 없는 꼬맹이는 없었다. 그의 조카는 이해할 수 없는 데에서 무릎 꿇고 저에게 항복했다.
“평소처럼……. 아니다. 페루스. 공주님은 항상 네가 보고 싶다고 졸라 대더구나. 궁에 갈 일도 있으니, 이참에 해리를 황녀에게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
“…….”
“해리에 대해 네 공주님께 상세히 소개하거라. 그 아이는 너와 같은 나이니 황녀와도 잘 어울릴 게다.”
황자와 어울리게 되면 더 좋고. 아롤드는 굴러온 복을 이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제 곧 페루스는 공식적으로 후견인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된다. 남부의 귀족들도 슬슬 저에게 기어오르는데, 페루스가 이대로 열다섯이 되면 곤란했다.
‘그 전에 저걸 죽여 없애야지.’
아롤드는 페루스가 열다섯이 되기 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죽일 수는 없었다. 이대로 죽인다면 필시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될 게 분명했다. 그걸 막기 위해 아롤드는 페루스를 죽이기 전 황궁에 붙을 생각이었다. 황가도 르온가의 하나뿐인 핏줄이 거슬릴 테니 자신이 조금만 신임을 얻는다면 저따위 꼬맹이를 죽이는 것쯤이야 눈감아 주리라.
‘저놈만 사라지면 이것들은 진짜 내 것이 되는 거야!’
아롤드는 주위를 쭉 둘러보다 창밖 너머 광활한 평야에 눈을 뒀다. 툴란에서 가장 부유한 남부가 제 것이 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알아들었지? 그럼 난 이만 가 보마. 저녁까지 제대로 써 두는 게 좋을 게다. 저번처럼 몇 문장으로 끝내면, 알지?”
“…….”
“안타깝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너를 이번 수도행에 데려갈 수 없단다. 예의 없는 조카를 데려가면 후견인인 내가 얼굴 들기…….”
“잘 알겠습니다. 숙부님.”
‘멍청한 놈.’
수도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든 페루스는 아롤드의 협박이 끝나기도 전에 숙부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답했다. 아롤드는 그런 페루스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어차피 이번 수도행은 페루스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황제는 페루스를 직접 보겠다 명을 보내왔다. 아롤드로서는 황제가 왜 조카를 부르는지 몰라 불안했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르온가의 핏줄을 좋은 일로 볼 일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저 대신 손을 써 줄지도 몰랐다.
“크흠.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저녁에 보자꾸나.”
아롤드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페루스는 허겁지겁 조각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직 읽지도 못한 편지는 장수가 많은 만큼 조각도 많이 났다.
‘엘자…….’
페루스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소매를 들어 눈을 닦았다. 읽지도 못한 편지가 젖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페루스에게 엘리자벳의 편지는 절망이자 구원이었다. 편지가 없었다면 저따위 놈에게…….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길 바랐다. 편지가 아니라면 외숙에게 허리를 굽힐 일도 그를 높여 부를 일도 없었으니깐. 하지만 동시에 그는 편지만을 종일 기다렸다. 엘리자벳에게서 오는 편지가 아니라면 도저히 살 수가……. 온몸 가득 쏟아지는 폭력과 모욕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허리 굽히길 몇 시간. 드디어 편지가 완성됐다. 페루스는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쥐고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나갔다.
「나는 잘 지내. 너는 어때?」
“엘자. 흐윽…….”
몇 시간 참았던 인내는 부질없어졌다. 마지막 문장을 읽기 무섭게 페루스는 눈물을 쏟아 냈다. 뚝뚝 볼을 타고 편지로 떨어진 눈물은 종이를 적시고 글자를 일그러뜨렸다.
“크흑…… 으흑.”
멈추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소매가 더는 눈물을 받지 못할 만큼 젖었을 때가 돼서야 페루스는 팔을 내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무너져 내린 몸 밑으로 편지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 * *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타티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나와 인사를 했다. 타티카는 그들을 보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물리곤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재빠르게 그의 뒤에 붙었다.
“장사는?”
“잘되고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후원하신 후로 어찌나 많은 분이 오시는지.”
타티카는 최근 ‘모임’이라는 곳에 꽤 많은 투자를 했다. 그가 거의 모임의 주인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 모임은 온갖 불법적인 것들이 판을 치는 곳이라 귀족이라면 손대기 꺼리는 곳이었지만 돈 있는 인간들을 손님으로 삼는 만큼 돈 벌기는 쉬웠다.
“그래?”
“예. 매출이 세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납품해 주시는 물건의 질도 워낙 좋고 상품들도 나날이…….”
“내가 여기 손님들 취향을 잘 알지. 있어 봤거든.”
“…….”
뒤를 따르던 남자는 그 말에 그만 굳고 말았다. 귀족 사회에서는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오래 종사했던 이곳에서 과거 우세리 공작이 노예로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목숨이 아까워 다들 쉬쉬하는 참인데,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남자는 쩔쩔매며 공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흐음. 그리 떨 필요 없어. 입만 안 놀리면 난 관대한 편이야. 그보다 어머니는 잘 계시나? 얼마 전에도 난리를 치셨다던대.”
“예? 아……. 공작 부…… 아니 그 상품은 잘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아직도 제 처지를 모르고 고개를 들고 있을 줄 알았는데.”
“찾으시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 과거가 어떤 상품보다 특출 나다 보니.”
“그래서 핏줄이 중요하다는 거야. 그 나이 먹어서도 과거 신분 때문에 인기가 좋다니.”
남자는 타티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착한 인간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었지만, 이자는…….
“안내해. 오랜만에 아들이 어머니를 봬야지.”
남자는 타티카를 가게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홀 안, 약에 취한 이들을 지나 긴 복도로 들어서자 양옆으로 여러 개의 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일반인이라면 차마 듣기 힘든 비명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다수는 여자의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간간이 남자와 아이의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문을 좀 더 두껍게 해야겠는걸. 손님들은 비밀스러운 것을 좋아하잖아?”
이곳에 오래 있었던 남자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소리였건만 타티카는 콧노래를 부르며 쓸데없는 농담이나 던졌다. 남자는 그런 그를 보며 완전히 질려 버렸지만 차마 내색할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숙인 채 그렇습죠, 고개만 꾸벅거릴 뿐이었다.
“여기입니다.”
“흐응……. 가 봐.”
깊은 복도에서도 가장 깊은 방 앞에서 남자가 멈췄다. 타티카는 남자를 물리곤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넓고 고급스러웠다. 전체적으로 붉은 방 안에는 웬만한 귀족가에서도 구할 수 없는 카펫에 가구가 들어서 있었고 비치된 장식품들도 훌륭했다.
“오랜만입니다. 생각보다 잘 지내시는 것 같네요.”
타티카는 방 안을 둘러보곤 침대 위 여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도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던 여자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너! 네놈!”
타티카를 발견한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침대에 걸려 있는 족쇄 덕에 한 발짝도 제대로 걷지 못한 채 앞으로 쓰러졌다. 타티카는 그 모습을 보고 키득거리며 여자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조심하셔야죠. 비싼 몸인데. 아, 꼴을 보니 곧 값도 떨어지려나?”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온몸의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여자는 손을 벌벌 떨며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지 그녀는 번번이 넘어졌다. 결국 일어서기를 포기한 여자는 쓰러진 상태에서 팔만 뻗어 타티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 내 아이들! 그 아이들을 어찌한 거야!”
“나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보단 못하지만요.”
“뭐, 뭐라고?”
“어머니만큼은 못 지낸다 그 말입니다. 솔직히 이런 방이 노예 신분에 가당키나 합니까. 말도 안 되지.”
“이 악마 같은 놈! 그 아이들은, 나드리카와 피르나는 공작가의 적자다! 그런데 네놈이 감히!”
타티카는 적자라는 말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곧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털어 냈다. 여자는 약한 힘에도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예. 동생들은 적자죠. 그런데 어쩝니까. 적자인 동생들은 죽었는데. 살아 있는 건 같은 이름을 가진 노예뿐이야.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건지.”
“노예는 네놈이야!”
“반응도 참 한결같아.”
어떻게든 제게 덤벼드는 여자를 피해 일어서며 타티카는 우습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실종 상태로 남겨 뒀습니다. 차마 아들 된 도리로서 관을 만들지는 못하겠더군요. 덕분에 뭐, 새 신분을 가진 동생들과 다르게 일단 어머니는 공작 부인이십니다. 다행이지요?”
“악마 새끼! 사람 같지도 않은 놈!”
웃으며 말하자 쓰러진 여자가 다시 악을 썼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였지만 타티카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 상황까지 와서도 할 수 있는 욕이 저것뿐이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타티카가 어머니라 부르는 여자의 이름은 안젤라.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툴란에서 가장 귀한 신분의 여인 중 하나였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우세리 공작가로 시집을 간 그녀는 자신의 삶이 죽을 때까지 고귀할 것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놈은 적자가 아니에요. 창부 출신의 천것에서 난 서자란 말입니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우세리가는 서자에게 후계권을 주지 않아요! 그놈은 가문의 노예에 불과해요.’
‘공작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호적을 바꾸셨습니다. 그분은 우세리가의 적장자이십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말도 안 돼요! 남편의 뒤를 잇는 건 나드리카예요. 그 아이는 유일한 후계자로 자랐고 교육받았어요! 이제 와서 별 시답지 않은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놓아둘 수는…….’
‘물러나십시오, 부인. 폐하께서도 새 공작 각하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남편이 죽으며 그녀의 삶은 달라졌다. 남편이 그렇게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녀의 아들은 천한 신분의 서자에게 공작 자리를 뺏겼다.
‘아버님…… 흐윽…….’
‘걱정 말거라. 안젤라. 서부의 귀족들이 대부분 반대를 하고 나섰다. 너는 그저 기다리면 된단다.’
당연히 그녀는 아들의 자리를 찾아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친정은 제법 세가 컸기에 사실 별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단 몇 달 사이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모조리 독살당하거나 사고로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실종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사실 안젤라와 두 아이는 실종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공작가를 차지한 타티카로 인해 신분이 노예로 탈바꿈된 채 사회 가장 밑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안젤라는 약을 억지로 먹은 채 거의 벗다시피 해 이상한 무대로 끌려 나갔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고귀했던 공작 부인은 생선처럼 값이 매겨져 팔리고 경멸하던 창부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 난리를 피우셨다 들어 들렀습니다.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마시고…….”
“아이들을 어찌했어!”
처음 그녀는 자결을 하려 했다. 이리 살 바에야 죽음을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타티카는 그녀가 자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인질로 붙잡힌 안젤라는 겨우 정신을 유지한 채 목숨을 붙여 나가고 있었다.
“어머니.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지. 살아는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들을…… 내 아이들을 풀어 줘!”
“하, 곱게 말하니깐.”
퍽―
안젤라의 옆구리에 타티카의 발이 닿았다. 타티카는 비명을 지르며 구르는 안젤라를 무감하게 보다 한쪽 무릎을 굽혀 몸을 숙였다. 그리고 안젤라의 금발을 잡아채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가까이 가져왔다.
“계속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더는 당신들한테 속해 있는 노예가 아니야.”
“흐…… 으극, 그…….”
“이제 내가 당신. 그리고 당신 태에서 난 그것들의 주인이라고.”
“으…….”
“그러니 아이들을 위한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기기나 해. 알아들었어? 고매하신 공작 부인?”
“…….”
안젤라는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년. 창부로 살며 폭력에 많이 노출되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폭력이, 익숙해지지 않는 이 고통이 두려웠다.
타티카는 안젤라의 눈을 잠식하는 공포를 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네가 천하다 욕한 나도 견뎠는데 당신네도 견뎌 봐야지? 우아하게 비명도 지르지 말고 어디 한번 견뎌 봐.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어머니. 다음에 또 뵙죠. 그동안 이 아들을 위해 돈 많이 벌어 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요즘 새로 시작한 사업에 꽤 돈이 들어가서요. 제법 인기도 많으시다 들었으니 몸 적당히 굴리셔도 가랑이에 돈 꽂아 주는 인간들은 넘칠 겁니다.”
타티카는 한참 안젤라의 공포를 기분 좋게 감상하다 몸을 일으켰다. 안젤라는 타티카가 떠나려 하자 흠칫, 잠시 몸을 떨더니 타티카의 발치로 몸을 던졌다. 억울했지만…… 비참했지만, 자신과 아이들의 목줄을 잡고 있는 건 이자였다.
“어…… 어머님이 그런 거였어. 나와 공작님은, 너를…… 네 어미를 그렇게까지 대할 생각 없었어. 너도 봐서 알지 않아! 나는 네 어미와 네게 관심도 없었어. 그녀가 죽은 것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내 아이들은 더욱 그렇고! 그러니 제발 아이들만이라도…… 나드리카와 피르나만이라도…….”
“…….”
“제발, 각하. 부탁드립니다. 비록 반이지만…… 그래도 그 아이들은 각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아이들이 아닙니까. 흐윽…… 제발, 여린 아이들인데.”
안젤라는 모든 자존심을 버렸다. 그녀의 애절한 부탁에 타티카는 몸을 돌렸다. 그러곤 다시 몸을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무, 무엇을…….”
“나는 도망친 적이 없단 말이지. 그 성에서.”
“무슨 말을…….”
“그런데 다들 내가 어머니 죽음에 충격을 받아 도망쳤다 알고 있어. 참 이상하지?”
“……그건 어, 어머님이.”
“죽은 노인네 핑계는 그만둬.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당신네는 거짓 따위 말하지 않는다며? 자신이 한 행동에 꼭 책임을 진다며?”
“…….”
“나. 나를 잡아다 팔아넘긴 게 누군지 잘 알고 있거든?”
“…….”
“팔더라도 좀 좋은 데로 보내 주지.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안 했지. 당신이 말하는 그 피를 봐서라도 말이야. 내가 천한 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래. 당신 말대로 반은 당신 애들하고 같은 피잖아? 당시 나는 지금의 피르나보다 더 어리기도 했고 말이야.”
“…….”
“그런데 이곳에 팔다니. 팔기 전에 그랬다지? 천한 어미에게서 태어났으니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오, 자비롭기도 해라. 눈에 뵈지도 않는 서자 앞길도 생각해 주시고.”
안젤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데도 남편이 너를 찾으니깐. 그 여자가 죽었는데도 천한 네놈을…….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이런 곳인 줄 몰랐어. 정말…… 몰랐어.”
“그래?”
“그, 그래도 너는 살지 않았니. 내가 그때 죽이라고 했으면…… 너는 이렇듯 공작도 될 수 없었을 거고, 그러니깐 너는.”
“풋.”
타티카는 횡설수설하는 안젤라를 보고 소리 내 경쾌하게 웃었다. 어찌나 웃는지 안젤라는 말을 멈추고 타티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나 웃었을까. 너무 웃어 맺힌 눈물을 닦으며 타티카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도 살려 드리잖아요. 어머니.”
“아…….”
“죽이지 않았으니 저처럼 기어올라 다시 공작가를 차지해 보세요. 천한 나도 해냈는데 귀한 당신이라고 못 할까.”
안젤라는 그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타티카는 멍하니 저를 보는 안젤라에게서 떨어져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젤라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소식을 좀 더 상세하게 알려 줬다.
“나드리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등에는 저와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고. 지금쯤이면 얻어맞고 있겠네요. 가문의 노예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피르나는 어머니처럼 지금 하는 일에 제법 소질이 있어요. 손님들이 아주 좋아하는 상품 중 하나랍니다. 가문에 제법 돈을 벌어다 주고 있지요.”
“아, 아…….”
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모임의 복도에 위치한 대부분의 방에서는 그와 비슷한 비명이 즐비했다. 그리하여 별 특출 날 것 없는 안젤라의 비명은 곧 묻히고 말았다.
* * *
날은 화창했다. 황제의 집무실을 방문한 타티카는 창가 소파에서 고개를 뒤로 젖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했다. 황제 앞에서 보이기에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엘라르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젊은 공작의 저런 태도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도무지 고치질 못하는군. 천것의 핏줄이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그는?”
그녀는 어린애처럼 햇빛을 손에 쥐려 하는 타티카의 모습에 미미하게 인상만을 찌푸리곤 무심히 지나가듯 물었다.
“모르겠어요.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려서.”
무심한 질문만큼이나 무심한 답이 돌아왔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대상은 황제가 아끼는 정부 필립이었다. 부인과 아들이 눈앞에서 잔인하게 던져지는 것을 목격한 그는 가엽게도 완전히 미쳐 버렸다.
“오히려 괜찮을지도 몰라요. 제정신을 차리고 폐하를 죽이려 들으면 어쩌시게요.”
“그건 내 탓이 아니다. 거짓으로 나를 기만한 건 그야. 고얀…….”
“그래도 던져 죽이신 건……. 듣기론 황녀님께서 그 모습을 보셨다 들었는데.”
타티카의 말에 엘라르는 펜을 놓았다. 그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손녀에게 그런 꼴을 보였다는 것은 후회스러웠다.
엘리자벳은 그 일을 목격한 후 며칠을 앓았다. 그리고 엘라르는 완전히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렸지만, 그 일을 벌인 것이 조모임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다행히 별달리 문제는 없다더군. 아직 어린 나이니 곧 잊어버릴 테지.”
“그렇겠지요.”
타티카는 고개를 들고 애써 상황을 좋게 보려는 엘라르를 향해 긍정적인 대꾸를 해 줬다. 그러나 속 안 생각은 정반대. 그가 보기에 어린 황녀는 그 일로 심한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제법 귀여운 황녀님이었지. 이 인간하고 닮았다고는…….’
타티카는 몇 번 본 황녀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어린 황녀가 황제와 점점 닮아 간다 말하고는 했지만, 그의 머릿속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다. 물론 외모로만 놓고 본다면야 꼭 닮았지만…….
‘흐응. 위대하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황녀님 나이 때에도 눈물 한 방울 없었을 것 같단 말이지.’
첫 만남, 엉엉 울고 있던 엘리자벳을 떠올리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본 황제는 그렇게 울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차라리 황자 쪽이 똑같지. 생긴 것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고. 귀여운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요즘 심심찮게 말이 들려오더군. 불법적인 일에 가담한다지?”
타티카가 황제와 황손들을 비교해 볼 때였다. 다시 서류를 보고 있던 엘라르가 한 장의 종이를 유심히 보더니 말을 꺼냈다. 타티카는 눈을 좁혀 엘라르가 집어 든 종이를 살폈다.
“사라! 글씨가 예쁘군요. 유모로 완전히 일을 옮겼다 들었는데. 아직도 정치에 관여하나 보죠? 욕심도 많아서는…….”
“타티카. 나는 말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녀는 저를 싫어하죠. 제가 폐하를 현혹했다나 뭐라나. 도대체 폐하께서 정부를 들이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솔직히 세상에 정부 하나 안 두는 황제가 어디 있습니까.”
“그녀가 내게 이렇게 보고를 올린 건 네가 선을 넘었다는 의미겠지.”
“선을 넘었다라……. 제가 하는 일에는 애초에 선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더 버느냐. 그것뿐이죠. 대신 드리는 것도 늘지 않았습니까. 겸사겸사 폐하께 방해되는 것들도 치워 버리고. 저번 달에는 글란 백작이 약물 중독으로 우리 곁을 떠났죠. 그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덕분에 폐하는 사병 금지 법안을 통과시키셨죠.”
“전대 공작 부인에 관한 말이 많아. 그 밑에 아이들도 그렇고. 복수할 참이라면 그쯤하고 죽여. 아니면 아이들처럼 공작 부인의 신분도 완전히 없애 버리든가.”
“다들 우리 가문에 대해 왜 그리 관심들이 많으신지.”
“내 말은 뒤탈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지금은 사라뿐이다만 다른 이에게도 말이 들어오면 나는 조사를 명할 수밖에 없어.”
“그 전에 말을 꺼낸 놈들을 제 손으로 죽여 버리죠.”
“일이 조금이라도 밝혀지면 나는 네게서 보호를 거둘 거다. 공작이라고는 하나 넌 출신의 한계가 있지. 약점을 더 만들지 마.”
출신의 한계라는 말에 타티카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이제 숨길 생각도 않는군.’
엘라르는 과거와 다르게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 타티카를 보며 자신이 천것을 너무 키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위험하다 생각하면서도 엘라르는 타티카를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천한 놈.’
엘라르에게 있어 타티카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좋은 패였다. 문제 있는 출신을 가진 그는 엘라르가 시키는 온갖 더러운 일을 했다. 그리고 엘라르를 대신해 오명을 뒤집어썼다.
‘허나 천해서 좋지.’
그렇기에 엘라르는 타티카가 건방지게 나와도 관용을 베풀었다. 게다가 그는 엘라르에게 외로움을 잊게 해 주는, 꼭 필요한 놀이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이쯤은 참아 줘야지. 어차피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패.’
“뒤탈이라. 폐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지?”
“오늘 르온 공작, 아니 아직 작위를 인정받지 못했으니 르온가의 하나 남은 핏줄이 온다죠?”
“…….”
“그 아이는 폐하의 뒤탈이 아닙니까? 그런데 죽이기는커녕 제가 알기로는 오늘 작위를 인정해 주실 예정이라고.”
“…….”
“우습지요. 그 아이야말로 정치적 뒤탈의 대표 격이죠.”
“…….”
“물론 폐하께서 벌이신 일이 아니지만 그 아이는 학살의 대표적 피해자인 동시에 증거인…….”
“닥쳐!”
“…….”
“그 입 다물란 말이다. 이 천것아!”
타티카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참고 또 참으려 했던 엘라르는 학살이라는 말이 나오자 결국 인내를 무너뜨리고 고함을 질렀다.
상전의 입에서 적나라하게 나온 천것이라는 단어에 타티카는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이름표. 천것. 공작이 되고 황제의 개가 되었지만,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지긋지긋하군. 저 단어를 없애 버리든가 해야지.
타티카가 천것, 천것이란 단어를 되뇌고 있을 때였다. 고함과 함께 비틀거리며 일어섰던 엘라르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자신을 주체 못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일의…… 그날 일은 내가 벌인 게 아니야!”
“…….”
“크리스! 그놈이! 내 아이들도 죽이고! 내 옆에 달라붙어 평생을 속인 그 개새끼가!”
“…….”
“그놈이 벌인 일인데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지? 내가 왜! 이렇게…… 그건 내 죄가 아닌데…….”
“…….”
“다들 나를 피한다. 다른 이들은 상관없어. 하지만 아이들은……. 엘자, 그 아이까지 나를…….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
“크리스! 망할 크리스……. 죽여 버리겠어. 아니, 이미 죽였지. 내가. 찔러 죽여 버렸지. 크리스…… 흐윽.”
“일어나세요. 폐하.”
엘라르는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타티카는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추태를 보다 한숨을 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발작처럼 이어지는 황제의 광기는 점차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만 건드려도 이 꼴이니. 황제가 이러는 것도 지겨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만큼 즐거움을 주는 일도 없었다. 만인지상, 오만한 황제가 이럴 때면 길가에 쓰러져 있는 늙은 거지 같았다. 타티카는 속 깊이 열등감이 채워지는 쾌감을 느끼며 엘라르를 부축했다.
“커윽……. 크리스, 흑……. 크리스. 보고 싶어요. 크리스. 크리스.”
나의 엘. 나의 엘이라 불러 줘요. 크리스를 향한 엘라르의 증오는 깊었지만 그리움은 더 깊었다. 추워……. 너무 추워. 엘라르는 온몸을 잠식하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린 반려를 불렀다.
“아무나 들어와.”
엘라르를 겨우 일으킨 타티카가 밖을 향해 말했다. 황제의 고함 소리에 대기를 하고 있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장이 들어왔다.
“침실로 모셔 가. 그리고 그 궁에 있는 아무나, 아니지. 폐하를 모시는 것들 중 다섯 정도 폐하 곁으로 보내.”
“예? 궁의를 불러야…….”
“이 사달 난 거 한두 번 봐? 조금 있으면 진정하실 테니 시키는 대로 해. 그 허여멀건 금발을 떼거리로 보면 한결 나아지시겠지.”
시종장은 더는 반문하지 못한 채 황제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타티카는 엘라르의 모습을 보다 오래전 목을 맨 한 여자를 떠올렸다. 참 재미있어. 황제나 천것이나 다들…….
“사랑 타령에는 귀천이 없나 봐. 안 그래? 어머니.”
* * *
엘라르의 발작으로 페루스는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어찌 보면 고작 하루였지만 페루스는 짧다고 느낄 수 없었다. 가족들의 죽음 후 감금되어 있었던 곳이자 어머니 잔느가 눈앞에서 자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대했던 엘리자벳과의 만남도 하루 뒤로 미뤄진 것이 아닌가. 페루스는 계속 마르는 입을 적시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느린 하루가 가고 페루스는 아롤드와 함께 옛집이자 이제는 주인이 바뀐 황궁으로 들어가게 됐다. 황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외벽도. 장식도. 정원도 거의 그대로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 황궁에 살았던 페루스의 눈에는 달라진 점이 확연하게 보였다. 조부가 좋아하던 히아신스는 제철임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 자신이 엘리자벳과 놀았던 잔디밭은 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페루스는 왠지 모를 분노와 슬픔을 느끼며 달라진 것들을 지긋이 노려봤다.
‘도둑놈들.’
“제길. 내 아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것들이 아직도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 모르는 게 분명해!”
아무 말 없이 조용한 페루스와 다르게 아롤드는 시끄러웠다. 아들 해리를 어떻게든 입궁시켜 황손들에게 보이려 했던 그는 계획이 무산돼 심사가 틀려 있었다.
‘이쪽도…… 도둑놈이지.’
궁 안 시선은 생각조차 안 한 채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는 외숙을 보며 페루스는 시선을 발밑으로 뒀다. 이런 멍청한 놈에게 잡혀 사는 게 부끄러웠다.
“크흠. 이리로 오십시오.”
안내하고 있던 시종이 보다 못해 넌지시 눈치를 줬다. 그제야 아롤드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불만은 여전한지 그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시종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두 사람은 시종이 이끄는 대로 황궁 안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중앙궁에 들어섰다. 인상을 찌푸리던 아롤드는 천장에 있는 금장식들을 보며 연신 감탄을 쏟았다. 페루스는 채신머리없는 그 모습에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앞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종이 뒤를 슬쩍 돌아보며 비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다행히도 부끄러운 동행은 금방 끝났다. 어느 방문 앞에 다다르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페루스 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이구.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자, 조카님. 빨리 들어가십시다.”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아롤드가 반색을 하며 페루스를 이끌고 문 앞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었다.
“남작은 물러나시게. 오늘 폐하를 뵐 손님은 페루스 님뿐이야.”
아롤드는 대뜸 제게 반말을 하는 시종장을 노려봤다. 그러나 시종장은 황제의 측근이자 백작위를 가진 자로 그보다 신분이 높았다. 시종장의 행동은 예의가 없는 것이긴 했으나 딱히 지적할 만한 곳은 없었다.
“우리 조카님이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제가 후견인이니 함께 들어가서 폐하도 뵙고 그간의 일도 설명해 드리면…….”
“폐하의 손님은 페루스 님뿐이야. 게다가 아까부터 듣자 하니 조카님이라니. 후견인이라고는 하나 자네 신분을 알아야지.”
남의 시중이나 드는 주제에! 무시를 당한 것도 화가 나는데 지적까지 받자 아롤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가만있으니깐…….”
결국, 참지 못한 그는 한마디 해 주려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순간. 문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밖에 뭐 하느냐.”
시종장의 고개가 더욱 빳빳해졌다. 그는 치켜 올라간 아롤드의 손가락을 경멸 서린 눈으로 한 번 쳐다봐 주곤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더 지체하기는 힘들겠네. 거기 너. 남작을 다른 곳으로 안내해라.”
“예. 이리로 오십시오. 잠시 기다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도 들어갈 자격이 있질…….”
“남작. 계속 행패를 부린다면 궁 밖으로 내칠 수밖에 없소. 여기가 남부인 줄 아나, 후작이나 백작이나 다들 남작에게 고개를 숙이게……. 자 이리 드시지요. 페루스 님.”
시종장의 말은 신분의 고하도 무시한 채 아롤드에게 붙은 남부 귀족들의 행태를 비꼬는 말이었다. 아롤드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터져 나갈 듯 핏줄이 섰다. 그러나 시종장은 콧방귀를 뀐 채 페루스만을 이끌고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쿵―
“밖이 소란스럽더군.”
페루스는 몇 번 들은 적 있는 차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빛바랜 은발, 차가운 녹안, 몸을 휘감고 있는 푸른색의 드레스. 눈앞의 노인은 조금 마르고 파리하긴 했으나 그것을 상쇄할 만큼 위풍당당해 보였다.
‘뻔뻔한 살인자!’
그러나 페루스는 그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끼기보다 분노를 느꼈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남작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길래…….”
“우스운 작자로군. 그보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페루스…… 르온. 뒤발의 손자였지.”
“…….”
페루스는 아무 말 없이 엘라르를 노려보기만 했다. 감히!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 입에 담아? 그는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그동안 너무도 힘들어 복수심 따위 다 스러진 줄 알았는데……. 이 늙은 마녀의 낯짝을 보니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페루스 님. 폐하의 앞이십니다. 그런 태도는!”
“자네는 물러나 있게. 내 이 아이와 단둘이 할 말이 있어.”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느껴지는 적개심에 시종장이 나섰다. 그러나 엘라르는 페루스의 증오 어린 눈빛을 담담히 받아 내며 시종장을 만류했다. 시종장은 안 된다고 말을 하려다 엘라르의 눈빛에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탁―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레 문이 닫혔다. 시종장은 나가면서 페루스에게 자중하라 눈짓을 줬지만 페루스는 시종장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나를 보기 꺼리는 것 같으니 짧게 끝내마. 오늘 너를 부른 것은 네 작위 문제 때문이다. 아직 나이가 차지는 않았으나, 네 작위를 정식으로 인정할 생각이다. 제법…….”
“살인자.”
아직 어린애로군. 당분간 걱정할 필요 없겠어. 엘라르는 전혀 숨겨지지 않는 증오심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영리하다 들었는데 아닌 모양이로군. 복수를 원한다면 발톱을 숨겨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더냐?”
“당신은 살인자야.”
“이래서야 뒤발의 손자라고는. 그는…….”
“감히 할아버지 이름을 입에 담지 마!”
엘라르는 일어서 페루스에게 다가갔다. 환한 금발에 파란 눈. 소년은 제 조부의 어릴 적과 꼭 닮았다.
앙칼진 눈만 지운다면 뒤발이 살아 돌아온 줄 알겠어. 엘라르의 눈이 가라앉았다. 비록 자신이 죽이지는 않았지만, 어찌 보면 자신으로 인해 죽은 친우. 차가운 심장을 가진 그녀였지만 죄책감이 없을 수 없었다. 엘라르는 페루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채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했다.
“나는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이런 뻔뻔한!”
“나는 그 일의 범인을 밝혔어. 그 일은……. 크리스. 그래, 내 반려였던 그가 벌인 일이지. 나는 그에게 죄를 물었다. 그는 그 일에 책임을 인정하고 내 손에 죽었어. 그러니 그만하고 예를 갖추거라. 나는 네 증오의 대상이 아니야.”
페루스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 엘라르의 얼굴에 기가 찼다. 이 마녀가 낮은 신분의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건 세상 모두가 알았다. 그런데 조부를 잃은 그가! 몰락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그걸 모를 것으로 생각하는가.
퉤―
황제의 얼굴에 침이 묻어났다. 엘라르는 제 뺨을 타고 흐르는 침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이런 대접은 또 처음이로군. 엘라르는 대놓고 저를 향하는 경멸에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짝―
노인의 힘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우당탕거리며 페루스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옆으로 쓰러졌다.
“건방지구나. 지금 네 행동이 죽어도 할 말 없는 죄인 것은 알고 있겠지?”
엘라르는 욱신거리는 손바닥의 고통을 애써 참으며 무릎을 꿇고 쓰러진 페루스와 눈높이를 같이 했다. 가엽고도 애처로운 뒤발의 손자야. 여기까지 하렴. 내 인내심을 더 시험하지 말렴.
“……살, 살인자.”
“그래. 살인자는 맞지. 내 살아오며 꽤 많은 이를 죽였거든. 하지만 그렇게 친다면 네 조부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도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페루스는 엘라르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힌 목구멍은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분노로 다시 뚫렸다. 이 마녀가! 늙은 마녀는 말장난으로 자신을 현혹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건! 내가 말하는 건!
“그렇게 말하면 당신 죄가 사라지나! 살인자!”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그는! 뒤발은…… 크윽.”
갑자기 엘라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그녀가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페루스는 그 꼴을 보며 히죽,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봐! 당신이 죄를 거부하니 몸이 반응하지 않는가!
“살인자.”
비틀린 입매 사이로 또 같은 단어가 나왔다.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던 엘라르의 눈이 순간 광기에 찼다.
짝―
“아니라 하지 않았나!”
“으……윽. 살, 살인……자. 당…… 당신은 살인자야!”
아까보다 더 매서운 손길에 하얀 볼이 터져 나갔다. 연이은 타격에 머리가 울리고 비릿한 것이 입안에 고였지만 페루스는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이 할 말을 했다.
쾅!
“무,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필요 없다! 물러나! 내 명도 없었는데 감히!”
안에서 들려온 고함에 시종장이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황제는 그가 들어오기 무섭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종장은 어찌할 바 모르고 문 앞에서 발을 구르다 엘라르의 광기 어린 눈빛에 궁의를 모셔 오겠다 말을 뱉곤 밖으로 도망쳤다.
“살인자.”
“그만.”
“살인자.”
페루스는 끝없이 말했다. 쉴 새 없이 나오는 단어에 엘라르는 순간 페루스를 죽여 버릴까 고민했다.
‘뒤발. 젠장! 이 아이는 뒤발의 손자야. 하나뿐인 그의 핏줄이야.’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그 충동을 참아 냈다. 엘라르는 손을 뻗어 페루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와 함께 일어서 소파 앞에 마련되어 있던 작은 탁자로 페루스를 끌었다.
탁자 위에는 종이 한 장과 펜이 놓여 있었다.
“넌 오늘부터 르온 공작으로 임명될 것이다.”
“살인자.”
“하지만 그 전에 여기에, 적어 줘야 할 것이 있어.”
“살인자.”
“이 종이에 황제 자리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르온 공작으로 살아가겠다 맹세하는 글을 써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페루스는 그제야 살인자라는 소리를 거뒀다. 엘라르가 억지로 들이민 종이는 고급스러운 것이 딱 봐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위한 종이였다. 내게 맹세를 하라고? 네년의 발치에 꿇어 영영 신하로 살아가라고?
“절대 그럴 일 없어. 나는 당신을 끌어내릴 거야!”
“하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나도 내 핏줄들에게 해가 될 싹을 남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죽여. 할아버지처럼 나도 죽이라고! 이 마녀!”
“네가 죽는다면 아롤드, 네 외숙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그를 도울 작정이다. 그자는 제 욕심을 위해 남부를 내게 바칠 위인이거든.”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엘라르는 페루스가 정말 죽을 작정을 한 것을 알아챘다. 넘실거리는 증오심은 어떤 말에도 꺾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죽이자. 죽이면, 이 아이만 사라지면 일이 쉬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이의 증오 어린 푸른 눈을 볼 때면, 관에 누워 있던 친우가 떠올랐다. 뒤발……. 얼마 없는 죄책감이 엘라르를 꾹 짓눌렀다. 엘라르는 입술을 꾹 물곤 페루스를 옭아맬 방법이 없을지 생각했다.
‘할머니! 저는 페루스가 좋아요.’
‘페루스랑 있으면…….’
‘황녀님께서는 정기적으로 페루스 르온에게 편지를…….’
‘엘자가 르온가 자제와 너무 가까워지고 있어요. 남작이 그를 이용해 그 아이에게 접근하려 할 겁니다.’
그때 엘리자벳이 생각난 건 왜였을까. 엘라르는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 몇 개를 떠올렸다. 그래. 이 아이. 엘자. 그 아이와 있을 때면…… 엘라르는 눈앞의 소년이 제 손녀에게 보이던 눈빛을 기억했다. 그러나 죽음도 불사하는 아이가 과연 그따위 정에 넘어갈까?
‘말도 안 되지만…….’
“엘자. 그 아이가 울겠군.”
“죽……여.”
그러나 반신반의했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엘라르는 손녀의 애칭에 흔들리던 페루스의 눈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조그마한 것들이 벌써 사랑이라도 하나. 우습군.
“그 아이는 항상 네 얘기를 하더구나.”
“…….”
“얼마 전에도 너를 보고 싶다 졸라 댔지. 세상에 볼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요즘도 편지를 주고받는다지? 나를 증오하는 것치곤 내 손녀에게 잘해 주는구나. 그 아이는 내 핏줄인데.”
“…….”
“아직 그 아이에겐 네가 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이 끝나면 그 아이와 만나게 해 주마.”
“…….”
페루스는 떨리는 제 몸을, 환희에 휩싸여 가는 제 가슴을 저주했다. 엘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잊었다. 복수심도. 증오도. 저주스러운 이 마녀도 그의 눈앞에 없었다. 그저 보이는 건…….
「보고 싶은 페루스에게.
나는 잘 지내. 너는 어때?」
엘자. 내 작은 소녀. 나는 너를…….
“물론 내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그 아이와 넌 만날 게다. 나는 그 아이에게 네 죽음을 숨길 생각이 없거든. 엘자는 네 시신을 보게 될 거야.”
“…….”
“분명 많이 울겠지. 나를 원망할지도 몰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아이도 다른 이를 찾을 거고.”
“…….”
“넌 잊힐 게다.”
“이리 내.”
잊힌다는 말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엘라르에게서 펜을 가로챈 페루스는 곧장 종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엘라르를 향한 증오심을 어떻게든 죽이려 했다.
엘라르는 사나웠던 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진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 아이를 제어하는 데는…….
“잘 생각했다. 공작. 그럼 적어야 할 말을…….”
종이는 신비스러웠다. 페루스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글씨가 반짝거리며 빛을 뿜었다. 그러나 그 광경도 페루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엘자. 너를 만나러 가.’
엘자……. 엘자……. 몇 년을 그린 제 소녀를 부르며 페루스는 스스로 족쇄를 찼다.
* * *
페루스는 펜을 놓자마자 일어섰다. 당장 엘리자벳을 보게 해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알 수 없는 눈으로 페루스를 보던 엘라르는 시종에게 그를 안내하라 일렀다.
“얼마나 걸리지?”
“조금만 가시면 됩니다.”
시종은 금방이라 했지만 페루스의 마음은 급했다. 장작 몇 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동안 참아 왔던 모든 이유가…… 그동안 삶을 감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랜만이야.”
얼마나 걸었을까 급한 페루스의 눈앞에는 기대하던 엘리자벳 대신 다른 이가 나타났다.
“엘리엇.”
페루스는 엘리자벳과 닮은 구석이 많은, 하지만 전혀 보고 싶지 않았던 이의 얼굴을 노려봤다. 저 눈도, 저 코도, 입도 다 엘자와 닮았는데…… 어쩌면 저렇게 징그럽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여기서부터는 내가 안내할 거야. 너는 돌아가 봐.”
“하지만…….”
“어허! 전하께서 말씀하시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페루스를 안내하던 시종이 당황스러운 듯 말을 흐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호통에 시종은 고개를 숙인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필요 없으니 비켜. 네가 뭔데 안내를 해.”
페루스는 자신이 황자였을 시절에도 엘리엇이 싫었다. 태생적인 이유로 자신보다 엘리자벳과 가깝다는 점도 불쾌했지만, 그보다는 엘리자벳의 곁에서 다정한 척, 착한 척 다른 이처럼 구는 꼴이 더 싫었다. 본디라면 얼음장보다 차가운 놈이…….
“감히 전하께!”
“됐어. 리처드. 자네가 그리 말할 수 있는 이가 아니야. 르온가 자제는……. 아니지, 이제 공작인가? 공작은 내 친우이자 내 동생의 친우거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제법 만났지.”
“너 같은 친우를 둔 적 없는데.”
“그래도 난 네게 존댓말을 썼던 것 같은데 말이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적응이 안 되나 봐?”
엘리엇이 과거 신분이 바뀌기 전 상황을 넌지시 비치자 페루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웃기지도 않는군. 내가 네놈에게 말을 높일 일은 세상이 둘로 나뉘어도 없어.”
“세상이 둘로 쪼개지진 않았지만 뒤바뀌긴 했지?”
“너!”
돌아오는 말들은 죄다 페루스의 마음속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것들이었다. 가족과 제 상황에 다시금 생각이 미치자 엘리자벳을 만날 생각에 들떴던 페루스의 마음은 다시금 증오심으로 가득 찼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엘리엇은 으르렁거리는 페루스와 대조되게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루스는 제 미간에 힘이 더 들어감을 느꼈지만, 주먹을 와락 쥔 채 참으려 노력했다. 어차피 지금은…….
“됐으니 비켜. 너 따위와 낭비할 시간 없어.”
“기다려 봐. 내 동생을 만나러 가려는 모양인데…….”
왜 계속 길을 막나! 페루스는 주먹을 꾹 쥔 채 엘리엇의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엘리엇 옆에 있던 시종 둘이 그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인내심이 끊긴 날카로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사람들이 있었다면 다들 돌아볼 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페루스의 눈에 엘리엇의 얼굴이 들어왔다.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은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작게 웃음까지 터트리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잖아. 내가 직접 안내한다고.”
“필요 없다고도 분명 말했어!”
“아냐. 사양하지 마. 뭣들 하나, 손님을 모셔야지.”
“필요 없…… 읍!”
거절하는 페루스의 입을 시종 중 하나가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페루스는 눈을 크게 뜨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를 꽉 붙든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곧 페루스는 완전히 제압됐다.
“무례를 용서해. 공작. 하지만 공이 만나려 하는 이는 내 여동생이잖아? 오라비로서 아무나 만나는 게 걱정이 되어 말이야.”
“으……읍. 읍.”
엘리엇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이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페루스는 그 모습에 소리치려 했지만 입을 막고 있는 손은 여전히 굳건했다.
페루스를 제압한 시종이 엘리엇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시종의 몸짓에서는 공작을 향한, 대가문의 주인에 대한 예의 따위 없었다. 꺾인 팔의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페루스를 보며 시종 중 하나가 킬킬거렸다.
“공작은 무슨. 남부 놈들은 배알도 없다지? 하긴, 나 같아도 네놈보다는 덜떨어지더라도 그 남작 놈에게 인사하겠다.”
페루스는 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업신여기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모멸감과 치욕감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리처드. 예의를 갖춰라.”
“예. 황자님.”
엘리엇은 뒤에서 새파랗게 증오를 불태우는 페루스를 느끼고는 시종에게 주의를 줬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읍으으읍!”
‘제길! 다 죽여 버리겠어! 내가 네놈들을 다!’
“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깐 만남이라 하기는 힘들겠어. 내 동생은 너를 볼 수가 없거든.”
살짝 보이는 입술이 얄밉게 올라갔다. 페루스는 끔찍한 소리를 하는 엘리엇을 향해 어떻게든 달려들고 싶었다.
페루스는 어떤 모욕이건 엘리자벳을 볼 수 있다면 감수할 생각이었다. 마녀가 내민 종이에 그 굴욕적인 글을 쓴 것도 오로지 그걸 위함이었다. 그런데…… 네놈이 뭔데! 너 따위가 무엇인데!
“읍! 으브!”
“억울해하지는 마. 그 아이에겐 지금 선객이 있어. 옛 친우도 중요하지만…… 손님의 신분이 워낙 중해서 말이야. 너도 알 거야. 율리히라고. 네가 이 궁에 있을 때 종종 들른 아이지?”
“으……읍!”
“그러고 보니 율리히 왕자를 핑계로 내 동생에게 손을 댔다 들었는데…….”
감히. 작게 읊조린 엘리엇의 표정이 일순간 섬뜩해졌다. 그러나 페루스에게 있어 또래의 차가운 표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엘리자벳을 볼 수 없다는 말, 그리고 지금의 상황. 그게 그에게 있어 훨씬 섬뜩한 일이었다.
“주제를 알아야지. 이참에 내가 너에게 예의를 가르쳐 줄까 해. 리처드. 조용히 시켜. 엘자에게 가기 전에 입을 완전히 막아 버리는 것도 좋겠지.”
퍽―
배에 꽂히는 성인의 주먹에 페루스의 눈이 커졌다. 턱 하고 막힌 숨은 입을 막은 손바닥이 사라졌음에도 소리 한 자락 내지 못하게 했다.
“으……읍!”
겨우 숨을 뱉었을 때 무언가 꾸역꾸역 페루스의 입으로 들어왔다. 불쾌한 냄새가 가득한 천이었다.
“그게 네가 내 동생을 대해야 할 자세야. 입 다물고! 그 아이에게 보이지 않고! 그 아이의 머릿속에서!”
비웃음이 가득한 말의 끝은 광기에 가까운 흥분이었다. 엘리엇은 침착해 보였던 조금 전과 다르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로 거의 내지르는 듯 페루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웃음이든 광기든 페루스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배와 한계까지 벌어진 입. 페루스는 겨우 숨만 쉬는 무력한 상태였다.
페루스에게서 신음조차 들리지 않게 되자 엘리엇이 걸음을 멈췄다. 헐떡거리는 숨은 몇 발자국 짧은 거리에서 그새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
“그 아이가 너로 인해 그나마 조금은 밝아졌으니깐. 아까 말한 대로 마지막 자비를 베풀겠어.”
“…….”
“엘자는 널 보지 못하겠지만 넌 엘자를 볼 수 있을 거야.”
* * *
“자. 이것도 먹어 봐. 엘자.”
“괜찮은데……. 그만 먹을래요.”
“또! 또! 서로 말 낮추기로 했잖아.”
“이게 편해서…….”
엘리자벳은 이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는 율리히. 루프첸의 왕자. 몇 년 만에 본 반가운 지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넌 약속을 어겼어!’
엘리자벳은 그를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왕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율리히는 몇 년 만의 만남인데도 매우 친밀하게 굴었으며 다정하고 예의 바르게 엘리자벳을 대했다. 그러나 그를 보면 계속 페루스와의 마지막 일이 생각나는 데다가 페루스에게 미안해 도저히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엘자. 내가 싫은 거야? 불편해?”
엘리자벳이 시무룩하게 있자 율리히의 표정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그는 스푼으로 퍼 올렸던 푸딩을 내려놓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엘리자벳에게 물었다. 축 처진 눈가가 숫제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아뇨!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조금 피곤해서…….”
“그럼 자! 피곤할 때는 단것이 좋대.”
완연히 드러난 실망감에 엘리자벳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변명을 했다. 엘리자벳이 제 말을 부정하자 율리히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변했다. 내렸던 스푼을 다시 냉큼 올린 그는 엘리자벳에게 어떻게든 푸딩을 먹이려 애썼다.
‘페루스도 이렇게 해 줬는데…….’
잊으려고 해도 율리히가 하는 모든 행동은 페루스를 떠올리게 했다. 엘리자벳은 울컥하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채 입을 우물거렸다.
‘사라가 율리히에게는 잘 대해 줘야 한다 했으니깐.’
루프첸의 프란츠 왕가는 최근 오로르가에 부쩍 친밀감을 숨기지 않았다. 원래 르온가와 친밀했던 왕가라 엘라르는 의아함을 표했지만…….
‘그쪽 왕자가 엘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엘자는 아직 열둘도 되지 않았어.’
‘루프첸은 조혼 풍습이 있지 않습니까? 열넷 왕자의 짝으로 열 살 안팎의 여아를 찾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역겹군. 내 손녀를 그런 자리에 보낼 생각은 없다. 가서 전해. 엘리자벳의 약혼은 그 아이가 열다섯이 되기 전까지 없을 거라고!’
‘하지만 루프첸과 더 가까워질 기회입니다. 허락을 안 하시더라도 여지는 주는 게…….’
‘눈치 볼 나라도 아니지 않나?’
‘그래도 나쁠 건 없지요. 그쪽도 약혼을 꼭 허락해 줄 거라 생각은 안 한 모양입니다. 다만 왕자를 말리기 힘들어하는 눈치더군요. 곧 정식 후계자로 책봉도 될 왕자라 하니 황녀님께서 조금만 수고해 주시면…….’
‘쯧. 하긴 엘자도 슬슬 가문의 일을 도와야지. 엘자가 왕자와 친분을 쌓도록 유도해. 사라에게 말하면 알아서 하겠지.’
엘리자벳은 어른들의 사정이나 정치적 영향 등은 잘 몰랐다. 그러나 사라가 당부하는 말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았다.
“혼자 먹을 수 있는데…….”
“한 번만. 응? 내가 먹여 주고 싶어서 그래.”
한숨을 쉰 엘리자벳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작은 입이 열리자마자 율리히는 과장된 몸짓을 하며 엘리자벳의 입에 자주색 푸딩을 넣어 줬다.
푸딩은 달콤했다. 순식간에 혀를 감싸는 다디단 맛에 엘리자벳의 표정은 조금 느슨해졌다.
“와……. 맛있어요.”
“고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푸딩이야. 우리나라에서만 나는 보라색 딸기를 넣고 만들면 되는데 엘자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붉은 율리히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기쁘게 해 줬다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실제 그는 엘리자벳을 위해 루프첸의 왕궁 요리사를 사절단에 포함시켰다.
“네가 좋다면 계속 만들어 줄게. 아니, 요리사를 두고 갈까?”
이렇게 좋아하는데……. 엘리자벳은 율리히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내 기분 때문에 이 자리를 망칠 수는 없어. 페루스와의 일은 율리히의 잘못이 아닌걸.’
“그럴 필요까지는……. 내일은 내가 딸기 케이크를 준비할게. 이것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맛있어.”
엘리자벳은 배시시 웃으며 율리히에게 말을 내렸다. 스스럼없이 구는 엘리자벳의 태도에 율리히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엘자 너!”
“아, 혹시 말을 내려서 기분이 상한 거라면…….”
“아니야. 엘자! 이제야 너랑 친구가 된 기분이야! 또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내일도 꼭 올게.”
두 아이는 이후로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이끄는 것은 주로 율리히였다. 그는 엘리자벳을 어떻게든 즐겁게 하려고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총동원했다.
“여긴 없는데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말 등 위에 큰 혹이 있다면…….”
엘리자벳은 율리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어느새 푹 빠졌다. 동부에 있을 때나 수도에 있을 때나 밖에 많이 나가지 못했던 엘리자벳에게 있어 율리히의 이야기는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툴란에 오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하는데, 이번 여행길에서는 괴물을 만났어. 몸집은 집채만 하고 다리는 여덟 개인…….”
“다리가 여덟 개? 문어 아니야?”
“맞아. 문어랑 비슷해. 하지만 이건 엄청나게 크다니깐. 우리나라 전사들이 용맹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한창 율리히가 만났다는 바다 괴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장시간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있던 게 불편해진 엘리자벳은 목을 살짝 위로 들었다. 파란 하늘. 뭉게구름. 예쁜 색의 금…….
‘응? 페루스!’
그건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엘리자벳의 눈에 찬란한 금발과 새파란 눈이 스쳤다. 잊을 수 없는 색에 놀란 엘리자벳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위를 봤다.
그러나 그건 착각인 듯싶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일어서 고개를 든 것이 무색하게 페루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엘리엇?”
‘엘자.’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오라비 엘리엇이었다. 엘리엇은 엘리자벳이 자신을 쳐다보자 손을 흔들며 입 모양으로 애칭을 불렀다.
‘페루스를…… 본 것 같았는데.’
부풀었던 심장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엘리자벳은 엘리엇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응? 엘자 누가 있는 거야? 아…… 엘리엇 황자!”
엘리자벳이 손을 흔들며 제 뒤를 보자 율리히가 고개를 돌렸다. 율리히는 엘리자벳의 오라비인 엘리엇과는 별로 친분이 없었지만, 일단 먼저 인사를 했다. 또래 소년에게 먼저 인사하는 건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처사였지만 어쩌겠는가. 미래의 처남이 될지도 모를 이인데!
엘리엇은 율리히의 인사에는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작게 고개를 까닥거린 그는 율리히와 눈이 마주치자 냉한 평소로 돌아왔다.
“엘리엇은 엘자 너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 닮기는 엄청나게 닮았는데 어딘가…….”
율리히는 머쓱해져 엘리자벳에게로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엘리자벳에게서 작은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흐윽…….”
“엘자?”
엘리자벳은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다. 다만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해 불편할 뿐이었다. 엘리엇에게 인사를 해 준 직후, 왜인지 모르게…….
툭―
소매를 들어 눈가를 닦기도 전이었다. 노란 신발에 작은 얼룩 하나가 생겼다. 왜 이러지. 율리히도 있고 엘리엇도 보고 있는데. 이러면 안 돼. 이러면…….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보지 못해도 편지가 있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흐아아앙.”
율리히는 당황한 얼굴로, 엘리엇은 약간 굳은 채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 어느 시선도 개의치 않은 채 엘리자벳은 엉엉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 * *
“벨!”
“엘자!”
황녀궁에 손님이 들었다. 친밀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응접실 안에 들어선 이들은 같은 색의 검은 머리를 가진 남매였다. 기다리던 이들이었기에 엘리자벳은 반가운 목소리로 이들을 맞았다.
“벨. 존칭을 써야지.”
“나는 괜찮아요. 에셀.”
“우리 황녀님이 괜찮다고 하잖아. 엘자! 용서해. 몇 년 전쟁터에서 구르더니 완전히 고리타분해졌어. 여기까지 오는 데도 어찌나 잔소리하던지. 내가 마차 안에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니깐.”
“벨. 전하께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흥! 왜? 엘자 앞에서는 달라 보이고 싶은 거야?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일찍 옷 고른다고…….”
“벨!”
엘리자벳은 들어서기 무섭게 투닥거리는 남매를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조모가 죽은 지 1년. 장례식 이후 처음 본 이들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밝고, 여전히 사이가 좋구나.
편지를 꾸준히 주고받은 엘리자벳과 남매는 저절로 친해졌다. 몇 년간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와 벨의 친화력. 그 두 가지 덕에 엘리자벳은 조모의 장례식에서 오랜만에 본 남매와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촌스럽게 굴지 마. 엘자도 웃잖아. 엘자가 착해서 망정이지 수도 인간들이 얼마나 깐깐한데. 그렇게 굴면 북부 촌뜨기라 놀릴 거야.”
“벨 말이 맞아요. 에셀. 우린 친구인데 이런 자리에서도 서로 격식을 차린다면, 내가 불편해요. 에셀이 나를 편히 대하지 않으면 나도 라세르 경이라 불러야…….”
“아닙니다. 그럼 저도 엘…… 엘자라고…….”
“전에 만났을 때 서로 말도 편히 하기로 했는데…….”
“……죄송합니다. 조금 적응이 되면……. 아! 황녀님이 불편한 건 아니고! 벨 말처럼 제가 전쟁터에 오래 있다 보니 그게…….”
에셀은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에 벨은 잡고 있던 엘리자벳의 손을 놓고 얼굴에 부채질을 시작했다.
“에셀. 정신 차려! 오 세상에. 내 오라비가 이래서야. 내가 다 부끄러워.”
“…….”
동생의 타박에 에셀의 입이 일자로 닫혔다. 엘리자벳은 벌겋게 달아오른 에셀의 얼굴에 왠지 자신이 그를 민망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벨. 그러지 마. 에셀의 말이 맞는걸. 오랜만에 보는 데다 내가 너무 편히 대했나 봐. 에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떻게 하셔도 상관없어요.”
“…….”
에셀의 표정이 순간 억울한 듯 변했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우물거렸으나 끝내 말을 뱉지는 못했다. 벨은 그런 에셀을 보곤 가볍게 혀를 찼다.
“신경 쓰지 마. 엘자. 이럴 줄 알았으면 두고 오는 건데.”
“아니야. 난 에셀도 보고 싶었는걸. 1년 만이잖아. 보고 싶었어. 그보다 이번에는 얼마나 머물 참이야? 편지에는 기대하라고 했잖아. 석 달은 있을 거지?”
“석 달…… 흐음.”
“왜? 그건 힘들어?”
엘리자벳의 얼굴에 약간의 실망감이 비쳤다. 벨은 그런 엘리자벳의 얼굴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소리 없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셀은 그런 여동생을 잠시 흘겨보다 툭 쳤고 벨은 그제야 엘리자벳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아냐. 엘자. 우리 수도에 엄청 오래 있을 거야. 놀라게 해 주려 편지에는 안 썼는데 에셀이 이번에 황궁 기사로 서임받았어. 석 달?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3년은 있을걸.”
“정말? 정말이야? 너무해! 벨. 미리 얘기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미안. 나도 참느라 얼마나 손이 근질거리던지! 그래도 네 이런 표정도 보고……. 이제부터 내가 싫다 해도 매일 보러 올 거야! 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그…….”
자신감 있던 벨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엘리자벳은 말끝을 흐리는 친구를 보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도 보고?”
“아니야. 전하는 바쁘시니깐 온다 해도 보기 힘들 거고…….”
“오기 전에 사람을 보내. 내가 엘리엇을 부를 테니.”
“……고마워.”
“아냐. 오히려 좋은걸. 그렇지 않아도 요즘 너무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것 같아 걱정이야. 에셀. 황궁에 아예 들어오는 거지요?”
“당분간은 그럴 겁니다만 익숙해지면 이 녀석과 수도 저택에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궁에는 계속 오실 테니깐……. 저번 토벌에서 엘리엇과 많이 친해지셨다 들었어요. 궁에 들어오시면 엘리엇을 잘 부탁해요. 요즘 바쁜지 통 밖에도 안 나오고……. 햇빛을 저렇게 안 보니 건강을 해칠까 봐 걱정이에요.”
걱정스러운 엘리자벳의 목소리에 에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배정받은 곳은 황태자의 궁. 부탁하지 않아도 내내 붙어 있게 되리라.
“맞아! 말이 나온 김에 에셀! 황자님께 내 욕은 절대 안 돼! 저번에도 네가 난 철이 없다 전하는 바람에 전하께서 나를 애로 보시잖아!”
“벨. 전하를 귀찮게 할 생각은 마. 벌써 걱정이다.”
“흥! 귀찮게 안 해. 나도 미움받기 싫어. 대신 엘자랑 있을 때는 괜찮지?”
“미움받다니! 벨. 엘리엇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분명 반가워할 거야. 저번에 나랑 있을 때도 네 이야기를 했는데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보고 싶어 했어. 에셀. 엘리엇이 같이 있을 때 벨 이야기 많이 했지요?”
에셀은 엘리자벳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토벌 때 거의 종일을 함께했지만, 엘리엇은 벨에 대해 먼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벨의 이야기는 엘자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지.’
그가 본 엘리엇은 벨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이야?”
“그렇다니깐! 난 엘리엇과 남매잖아. 엘리엇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아!”
저렇게 좋아하는 여동생과 확신하는 엘리자벳에게 차마 아닌 것 같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벨. 에셀이 서임받았다고는 하지만 오래 집을 떠나 있어도 되는 거야? 내가 듣기론 지금 북부는 후계…….”
한참 엘리엇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엘리자벳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별생각 없이 벨에게 물었다 입을 닫았다.
‘아, 내 실수야. 이런 이야기는…….’
아니나 다를까. 말을 꺼내기 무섭게 벨과 에셀의 표정이 굳었다. 엘리자벳은 제 입을 원망했다. 걱정스러워 물은 말이긴 했지만, 가벼이 해서는 안 될 물음이었다.
“……에셀이 걱정되나 보구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벨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미안해. 내가 주제넘었어. 죄송해요. 에셀.”
“아냐. 북부는 마들렌 언니가 있으니깐 괜찮아. 후계는…… 이미 들은 것 같은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시끄러워. 그래도 뭐, 언젠가 결정되겠지. 어차피 우리는 형제인데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어. 참고로 나도 후계자 중 하나야. 멋있지?”
벨의 답에 엘리자벳보다 더 놀란 건 에셀이었다. 에셀은 담담한 여동생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폈다.
‘벨…….’
새어머니가 암살당하고, 정신 차린 마들렌과 벨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전쟁터에 있었던 그와 달리 마들렌과 벨은 가문의 권력을 두고 몇 년째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언니는 외인이야. 라세르가의 일원이라 하기엔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잖아? 정당한 후계자는 에셀과 나뿐이지. 그러니 물러나.’
‘나는 가문의 법도 아래 후계권을 가지고 있다. 피를 운운하기 전에 넌 자격이나 갖추도록 노력해. 남자에게 잘 보일 거라고 검도 놓은 주제에 누굴……. 날 훈계하기 전에 스스로나 돌아봤으면 좋겠군.’
‘뭐라고! 이! 자격도 없는 천!’
‘벨! 그만해라. 누님의 말이 옳아.’
그대로 둔다면 피를 보는 싸움, 전쟁까지 갈 것 같아 에셀은 일부러 벨을 데리고 수도로 왔다. 반대할까 봐 걱정도 했지만, 엘리엇 때문인지 벨은 순순히 수도로의 동행에 동의했다.
“……응. 벨. 너는 멋있어.”
엘리자벳은 벨이 진정으로 멋있다 생각했다.
‘벨은 이렇게나 예쁘고, 당당하고, 검도 잘 다루고. 나랑 나이도 같은데…… 부끄러워.’
올해 열다섯이 된 엘리자벳은 자신이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 같았다.
‘벨이 옆에 있으면 나도 나아질 거야…….’
“엘자. 사실 난 멋있기보다 예뻐지고 싶어. 너처럼!”
“응? 벨 그게 무슨 말이야. 나보다는 네가 훨씬 예쁜걸.”
벨은 눈앞의 친구가 농담을 하나 살폈다. 그러나 표정을 보건대 친구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얜 참…….’
물론 자신은 예뻤다. 윤기 나는 이 머리도, 가느다란 허리도, 크고 아름답다 칭송받는 눈도! 벨은 스스로가 뒤처지는 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흔히 마들렌을 북부 미인의 대명사로 꼽기는 했지만, 그렇게 불리는 데에는 검술이나 부가적인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마들렌은 영 아니었다.
‘마들렌은 키도 지나치게 크고, 전통적으로 추구하는 미인상은 아니지. 특히 수도는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인상을 좋아한다니깐 딱 엘자가…….’
벨이 원하는 미인상은 눈앞에 있는 엘리자벳 같은 미인이었다. 가녀려 보이고 지켜 주고 싶은……. 벨은 수도에 있는 엘리엇도 엘리자벳 같은 인상의 여인을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
‘엘자를 보고 사니깐 엘리엇의 눈도 높을 거야. 조금 더 먹는 걸 줄여야겠어.’
사실 엘리자벳은 어떤 인상이다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 북부에 있는 동안도 엘리자벳에 대한 말은 항상 들려왔다. 열다섯밖에 안 된 소녀에게 찬란한 얼굴이니 한 떨기 꽃이니 하는 말들이 벨은 우습다 생각했지만, 냉정히 보더라도 엘리자벳의 미모는 칭송받을 만했다.
‘여자엔 관심 없는 에셀도 엘자만 보면 저러는데.’
“내숭은 별로야. 엘자. 내가 듣기론 루프첸의 왕자가 몇 년째 네게 구애 중이라던데.”
“율리히랑은 그냥 친구야!”
“하긴, 우리 나이에 결혼은 좀 그렇지. 루프첸, 그 나라는 좀 징글징글한 구석이 있다니깐. 어린 나이에 결혼을 왜……. 잠깐, 엘자! 왜 이렇게 흥분해. 혹시…….”
“놀리지 마. 벨, 나는!”
벨의 말에 반박하려던 엘리자벳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흥분은 벨이 추궁할 만한 여지를 남겼다.
“나는……?”
“…….”
벨과 에셀.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엘리자벳에게 꽂혔다. 벨은 엘리자벳을 물고 늘어졌으며 에셀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는, 난…… 율리히랑 친구라고…….”
에셀은 엘리자벳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다 흠칫 몸을 떨었다. 누가 봐도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다행히도 벨과 엘리자벳 두 사람 다 에셀의 몸짓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닌 것 같은데. 에셀. 네가 봐도 수상하지?”
“…….”
“수, 수상하다니. 아니야…….”
“우리 엘자가 왜 이럴까. 왕자는 아닌 거 같고. 누굴까. 우리 엘자를……. 설마! 너!”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엘리자벳을 보다 무언가 떠오른 벨이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르온 공작 때문이야?”
“…….”
벨은 엘리자벳의 침묵에 확신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르온 공작과 친우가 지금까지 교류하고 있다고.
‘그동안 말이 없어서……. 편지를 받았다 자랑한 게 언제였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그는 황가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맞아. 엘자. 요즘 남부 귀족들이 얼마나 거만한데. 듣기로는 황자 전하도…….”
가만히 있던 에셀이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이어 벨도 걱정스럽게 말을 했다. 엘리자벳은 친우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페루스를 봤다 착각하고 울어 버린 날. 엘리엇은 엘리자벳에게 그간의 상황에 대해 말해 줬다. 르온가와 가문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페루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겠어? 엘자. 당장 울음 그치고 분명히 기억해. 그의 처지에선 우리 가문은 원수야. 그리고 넌 우리 가문의 일원이지. 그는 너를 친구로 생각할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까지 편지는 잘 받았…….’
‘이제 그 편지도 오지 않을 거야.’
엘리엇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페루스에게서 편지가 오는 일은 없었다. 엘리자벳은 먼저 편지를 보내 볼까 했지만, 엘리엇에게 들은 말에 도무지 용기를 낼 수 없었다.
‘페루스는 우리 가문 때문에 가족을 잃었어. 페루스는 할머니 때문에 힘들어졌어. 페루스는 나를 보기도 내가 연락하는 것도 싫을 거야.’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보고 싶다 더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페루스에 관해 귀를 열어 두었다.
「르온 공작. 그동안 권리 침해받아. 아롤드 남작 고소. 소송 진행 중. 남부 귀족 연합. 공작의 편에 서.」
‘나이 어린 공작이 일을 꽤 잘하나 봐요. 이번에 남부에서…….’
‘차갑기 그지없다던데. 과거 일이 있어서 그런지 눈물도 피도 없다고…….’
궁에 있는 엘리자벳이 들을 수 있는 소식은 아주 적었지만, 엘리자벳은 그것에도 안도했다. 비록 연락할 수는 없지만 페루스는 그녀가 걱정한 것과 다르게 나름대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누구 편지라고?’
‘르온 공작의 편지입니다. 전하.’
그렇게 몇 년을 보냈을까.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왔다. 엘라르가 죽기 딱 1년 전쯤이었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엘리자벳은 놀랐지만, 그보다는 눈물이 돌 정도로 반가웠다.
「보고 싶은 엘자에게.」
‘그런 일이 있었지만 페루스는 아직도 나를…….’
편지는 다정했다. 엘리자벳은 먼저 손을 내민 페루스 덕에 용기를 냈다.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교류했다. 중간에 엘리엇에게 편지를 들켜 혼이 나기도 했지만 엘리자벳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페루스는 내 친……구인걸.”
“그렇겠지. 하지만 엘자, 조심하는 게 좋아. 그 일을 생각하면…….”
“벨.”
벨이 그 일을 입에 담자 에셀이 그녀를 막아섰다. 정신을 차린 벨이 입을 닫았다. 그 일에 관해서는 여기 있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원인이었던 선대 황제는 죽었고 피해자들도 다들 땅에 묻혔는데, 남은 자손들은 그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엘리자벳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처음 엘리엇에게 그 일에 대해 듣고, 자라며 더 많은 걸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끔찍했던가. 엘리자벳은 언젠가부터 제 어깨를 무언가 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내 잘못이 아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자신은 조모의 핏줄이었고 당장 눈앞의 두 사람은 그 일의 피해자들이었다. 시간이 지났고 더 이상 피를 보는 일은 없었지만, 그 일은 진행형이었다.
‘보통이라면…… 두 사람도 나와 친구가 되기는커녕 나를 싫어했겠지? 난 과연 죄가 없을까?’
주변 이들 중 가장 진실을 뒤늦게 알았건만, 엘리자벳은 주변 인물들 중 가장 크게 그 일에 얽매였다. 그녀는 오라비 엘리엇처엄 담담히 그 말을 하지도, 아버지 엘리온처럼 웃으며 그 일을 언급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제삼자처럼 조모를 욕할 수도 없었다.
항상 잘못한 것 같고, 항상 미안한. 죄책감과도 비슷한 그 부채감은 알게 모르게 엘리자벳을 위축시켰다. 그 덕에 그녀는 자라나며 더욱 소심해졌다.
“벨. 너무 오래 있었어. 이만 가자. 집 안도 봐야 하고. 시간도 늦었어.”
“으응? 그래. 에셀. 엘자! 우리가 너무 귀찮게 굴었지? 피곤할 텐데 미안해.”
“조금 더 있다가 가지. 날도 어두워지는데 저녁이라도 함께하면…….”
“아니야. 에셀 말대로 집도 둘러봐야 하고 내일 다시 올게.”
“그렇구나. 그럼…….”
만남은 첫 시작과 다른 분위기로 끝났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가며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드리운 그림자는 깊었다. 누구도 처음만큼 웃지 못했다.
‘내가…… 다 내가…….’
엘리자벳은 이런 분위기가 자신의 탓처럼 느껴졌다. 친우들을 마중하며 울지 않기 위해 엘리자벳은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엘자 탓이 아닙니다.”
갑자기 들려온 에셀의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눈물이 맺혔는지 그가 조금은 흐리게 보였다.
“그, 벨이 말실수를 해서……. 막내로 자라다 보니 저 녀석이 생각 없이 말을 뱉을 때가 있어서 그렇지 엘자 탓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가 가는 건 정말 집 때문입니다.”
“…….”
“벨도 그렇고 저……도 엘자가 보고 싶어 황궁부터 왔습니다. 가서 침대가 멀쩡한지도 봐야 하고, 시중인들도 봐야 하고. 그러니깐 제가 말주변이 없긴 한데……. 하여간 엘자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에셀…….”
“그러니 환하게 웃으면서 보내 주시겠습니까? 우는 건 제가…….”
“에셀! 뭐 하고 있어?”
그새 마차에 도착한 벨이 에셀을 불렀다.
“벨이 불러요. 그만 가 보세요.”
벨의 부름에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던 에셀이 다시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그리고 머뭇머뭇 입을 열더니…….
“내일도 올게. 엘자.”
엘리자벳은 친근해진 에셀의 말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자벳의 눈에 에셀의 얼굴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아…….”
엘리자벳은 무어라 답을 하려 했다. 그러나 에셀은 빠르게 움직여 휘적휘적 마차로 다가갔다. 긴 다리로 마차까지 가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엘리자벳은 마차에서 손을 흔드는 벨을 보며 뒤늦게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응. 내일 봐. 에셀.”
* * *
“이미 결정 난 일이다. 반대해도 소용없다. 황태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소리를 높이는 엘리엇과 다르게 황제 엘리온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화려한 관을 쓰고 거울을 보는 그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히죽거리며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위험합니다. 얌전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즘 남부 귀족들의 행태가 어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밀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선대께서 금지하신…….”
“그깟 밀 가지고 무얼 그리 흥분해. 그리고 대신 조합 세금을 두둑이 낸다 전해 오지 않았느냐. 황궁에 돈이 더 들어올 텐데……. 그들이 말한 금액이면 이번에 우리 세리자에게 궁을 하나 더 지어 줄 수가 있지.”
그깟 밀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식량 수급을 남부에 의존하고 있는데. 느긋하다 못해 멍청한 소리에 엘리엇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조합은 그들이 밀 공급을 독점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걸 허락하면 남부 세력의 힘이 강해질 텐데 그러면!”
“엘리엇. 내 그걸 모르겠느냐. 하지만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던? 툴란은 이제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러려면 화해와 협치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조합을 허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보이는 자비이자 화해의 손짓이야.”
몇 번이고 들은 말에 엘리엇은 턱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벽과 대화해도 이보다는 나을 테지!
‘언제까지 서로 원망할 참이지. 툴란이 발전하려면 서로 용서해야 하지 않겠는가.’
엘리온은 황제가 되자마자 어머니인 엘라르를 교묘히 부정하고 나섰다. 압도적인 힘과 위압으로 중앙 권력을 공고히 했던 그녀의 방식을 스리슬쩍 비판한 것이다.
엘리온의 주장은 황가의 권력이 견고했다면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큰 권력들 간의 대치는 나라에 좋지 않은 것들이었으니. 그러나 오로르 황가는 엘라르 말년에 많이 무너져 있었다. 황제의 기행과 악명, 측근 동부 귀족들의 부정부패, 점차 고개를 드는 지방 세력들. 당장 자비나 화해를 내세우기에 황가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건 훗날을 기약해도 되실 일입니다. 지금은 조금 더 힘을 키워 저들을 제어해야!’
‘어허. 황태자. 감히 내 방식에 토를 다는 것이야? 나는 선대와 같은 폭군이 아니다.’
게다가 엘리온의 방식은 순전히 그의 열등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평생 어머니에게 눌려 산 그는 모친의 사후에 그녀의 모든 정책과는 반대로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짐도 선대이자 내 어머니의 죄를 인정할 테니 다들 과거의 짐을 벗어 버리도록 하라.’
그것도 최악의 방법으로 말이다. 엘리온은 어미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고 어미를 낮추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그것은 황제로서의 위엄을 버리는 위험한 행위였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 자신의 바로 위 선대에게 죄가 있다, 말하는 황제라니! 엘리온 황제는 선대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나아가 황가의 정당성을 훼손시켰다.
“그렇다 해도!”
“그만! 더는 듣기 싫다.”
밀 문제도 황제가 만만해지며 생긴 일이었다. 그나마 황태자인 엘리엇이 상황을 정확히 인지했지만, 막무가내 부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너나 선대처럼 그리 고집만 피운다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야. 다들 같이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눈앞만 봐서는, 쯧. 안 그런가 공작?”
아들의 말이 귀찮아진 엘리온이 대화의 방향을 다른 이에게로 틀었다. 그러자 편히 의자에 기대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가 허리를 폈다.
“그렇지요.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 너무 걱정이 많으십니다.”
엘리엇은 씩 웃는 남자를 노려봤다. 얄밉게 웃고 있는 남자는 엘리엇이 가장 싫어하는 자 중 하나였다.
“공작은 입을 다물지. 이건 공이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폐하께서 제게도 물으시기에 한 말이랍니다. 그리고 일단 저도 공작이다 보니, 폐하께는 못 미치겠지만, 전하만큼의 자격은 있지 않겠습니까?”
“감히!”
“거기까지! 엘리엇. 공작의 말이 옳다. 그는 툴란의 기둥 중 하나인데 그 정도는 말할 자격이 있지. 하하. 공. 황태자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껏 하게. 그게 더 충신다운 태도가 아니겠나.”
“예. 폐하. 그러나 전하의 눈을 보니…… 제가 먼저 사과드려야겠습니다. 전하.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저 천것부터 어떻게!’
엘리엇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그러나 황제가 말린 이상 더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입술을 한 번 세게 물고는 다시 밀 조합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려 입을 열었다.
“폐하 한 번…….”
“폐하. 두브앙 자작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 어서 들라 하라.”
하지만 엘리엇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울 앞에 있던 엘리온이 그를 무시한 채 누군가를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세리자가 무슨 일이지? 또 아프다고 하던가?”
“그…….”
안으로 들어온 시종이 엘리엇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엘리온은 떠듬거리는 시종이 답답한지 재촉을 했다.
“어허. 어서 말을 해 보라.”
“자작 부인께서 페하를 찾으십니다. 배, 배 속 아기씨께서 계속 움직인다며…….”
“이런, 이런. 아이가 벌써 아비의 얼굴이 보고 싶은 게지. 냉큼 안내하라. 내 당장 가 봐야겠다.”
서늘한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인지 엘리온 황제의 얼굴은 기쁨과 기대만이 가득했다. 엘리엇은 아비의 얼굴을 보며 비죽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내 일이 바쁘니 나머지는 네게 맡기마. 공작.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황태자와 이야기나 나누다 가시오. 아니면 궁을 둘러봐도 좋고.”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폐하.”
엘리온 황제는 시종을 이끌고 뛰듯이 방을 나섰다. 황제의 위엄 따위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작 부인이 폐하를 잘 모시나 봅니다. 폐하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다니……. 신하 된 입장에서 감격스럽네요.”
황금을 녹인 듯 진한 금발이 매력적인 두브앙 자작 부인은 현재 황제가 가장 아끼는 정부였다. 그리고 그녀를 황제에게 소개시킨 이는…….
“공이 소개시킨 그 창녀가 얼마나 갈 거 같나?”
우세리 공작. 타티카였다. 엘라르 사후 뒷배를 잃고 무너질 위기를 맞이했던 그는 눈치 빠르게 엘리온의 방탕함에 빌붙었다.
‘공작이라 하나. 그대는…….’
‘맞습니다. 폐하. 제 출신에는 문제가 있지요. 허나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일이지요.’
타티카는 황제에게 약과 여자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황제는 천것이다 무시하던 그를 순식간에 충신이라 칭찬했다.
‘공작! 나는 좀 더 강한 것을! 내 이 머리는 좀 더 그…….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을 원해!’
황제 엘리온은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타티카가 자신에게 제공하는 여자와 돈, 은밀한 약 그것들을 마음껏 즐겼다. 불법이라는 개념은 황제의 머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세상 자극적인 그것들은 중독을 불러왔다. 곧 타티카는 엘라르 시절보다 더욱 큰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여자라면 넘치게 있으니. 황제신데 열 여자, 아니 백을 원하신다 해도 문제 있겠습니까? 아예 이참에 전하께도…….”
“닥쳐.”
뻔뻔한 얼굴에 결국 엘리엇은 험한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런 말쯤은 흔히 듣는 듯 타티카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절 별로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은 압니다만, 지금은 저와 손을 잡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네놈과 함께할 일은 없어.”
“흐음. 폐하께서 계속 이러시면 남부 세력에게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제가 함께한다면 사정이 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타티카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빠르게 성장하는 남부, 점점 입지가 좁아지는 황가. 이런 참에 서부의 힘은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엘리엇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타티카가 하는 불법적인 일이나 출신 때문은 아니었다. 불법이야 그에게 흠만 주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이었고 출신이야 천하면 이용하고 버리기 좋았으니.
“선대께서도 네 덕에 좋은 일 당하셨지. 난 뱀 새끼를 키우지는 않아.”
엘리엇은 조모가 타티카와 함께하며 어느 부분에서 무너졌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상대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제 잇속만 챙기는 뱀 같은 자.
‘저놈한테는 충성이라는 단어가 없지. 도움을 받으면 언젠가 배로 뱉어 내게 할 것이 분명해.’
엘리엇은 그런 위험 부담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아래에 완전히 놓이지 않는 자는 위험했다.
“아, 선대 폐하의 일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평민 출신 정부가.”
“흥. 평민이라. 평민으로도 못 태어난 자가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되던가?”
타티카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자르며 끼어든 엘리엇을 쳐다봤다.
“전에는 그런 말을 들어도 웃더니 이제는 아닌 모양이지 공작?”
엘리엇은 얼굴을 싹 바꾸는 타티카를 보며 물었다. 턱을 살짝 치켜든 그에게는 타티카의 출신에 대한 경멸과 제 출신에 대한 오만함이 가득했다. 나는 네놈과 선이 달라. 숱하게 봐 온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타티카는 제 안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새파랗게 어린 게! 허나 아직은…….’
“전하는 제가 표정 관리를 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 아니시죠. 그리고 전하만큼은 안 되겠지만, 곧 저도 더 귀해질 참입니다.”
타티카는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를 했다. 하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비위가 상했기에 그는 황제와 은밀히 나누고 있던 주제를 툭 던졌다.
“웃기는군. 공은 이미 공작위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뿐이야. 날 때부터 가진 출신이란 바꿀 수 없지. 아니면 반역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천한 제가 전하와 곧 가족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녀님……. 아직 성년이 되지는 않으셨지만, 약혼은 가능한 나이 아니십니까? 때가 되면…….”
“그럴 일은 없어.”
차갑게 벼려진 말이 떨어졌다. 시퍼런 냉기에 타티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감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엘리엇의 표정은 이때까지와는 조금 궤를 달리했다. 그는 조금 전만큼 분노하는 것 같지도, 흥분한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엘리엇이 한 단어 한 단어 뱉을 때마다 타티카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무슨…….’
맹수를 앞에 둔 듯 타티카는 잠시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침을 삼킨 그는 자신의 상태에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저 새파란 황자에게 놀란 것인가? 자신이? 타티카는 이를 질끈 물었다. 황제도 아니고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못한 황자에게 잠시나마 겁을 먹은 것이 자존심 상했다.
‘이대로…….’
“감히는 무슨. 황태자 전하. 지금 이 궁에서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큰 것 같아?”
금이 간 자존심에 타티카가 얇게나마 쓰고 있었던 가면을 집어 던졌다. 공대는 사라지고 가면 아래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혀를 보였다.
“폐하가 누구 말을 더 들을 것 같으냔 말이야. 귀찮은 데다 선대를 닮아 보기 싫은 당신? 아니면 혀같이 굴어 주는 나? 장담하건대 우리 위대하신 폐하께서는 나를 선택하실 테지. 알 텐데. 폐하께서는 핏줄보다 쾌락을 더 중시하시는 분인 걸. 그리고 황제에게 내가 바친 년이 아들이라도 낳으면 어쩌려고?”
“…….”
엘리엇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표정에 타티카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곧 황태자 전하의 동생께서도 내 품으로 들어올 거야. 아직 어려 품어 봤자 재미도 없겠지만, 신분이 황녀라면 꽤 색다른 재미가 있지 않겠…….”
쉐엑―
타티카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그의 회갈색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은 정확히 그의 목을 노렸다. 빠르게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관통했으리라.
“네놈은 꼭 내 손으로 죽여 주지. 그리고 네놈의 창녀는 곧 세상 구경 하기 힘들 거다. 그 태에 품은 천것과 함께.”
엘리엇의 목소리는 냉혹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타티카는 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조금 지나친 감이 있었다고는 하나 방금 황태자가 한 짓은…….
“전하. 완전히 미쳤어? 가만 보면 꼭…….”
타티카는 선대같이 미쳐 가느냐 소리치려다 말을 멈췄다.
‘그런데 왜? 황녀와는 돈독하다더니 제 핏줄을 모욕했다 이건가?’
의뭉스러운 것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타티카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묘한 것이 자신의 신경을 건드림을 느꼈다.
‘하지만 저놈 평소 성정을 생각하면 지나친데. 그러고 보니 아까 그런 표정을 지은 것도 황녀…….’
그러나 생각은 끊기고 말았다. 등을 돌리는 엘리엇을 보며 타티카는 묘한 기분을 가까스로 떨쳐 냈다.
쾅―
“아, 실수. 그래도 미래의 황제인데 말이야.”
쾅 하고 닫히는 소리에 타티카는 엘리엇과의 관계가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일을 그르쳐도 단단히 그르쳤다. 하지만 후회가 되진 않았다. 저 재수 없는 것 밑에 있을 수는 없지. 잘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쓰다듬으며 타티카는 엘리엇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미래에 내 살길을 찾아야 하고……. 이걸 어쩌지?”
사실 타티카가 사이 나쁜 엘리엇에게 동맹을 좀 이르게 제의한 이유는 지금의 황제 엘리온의 건강 때문이었다.
“10년? 아니지 그보다 오래 살아도 세상천지 분간 못 하는 상태면 황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깐.”
타티카가 바친 여자와 약들로 엘리온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었다. 게다가 중독 상태도 심각해 엘리온은 언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지 몰랐다.
“자동으로 황태자가 황제가 될 테고. 헌데 저놈은 나와 한배를 탈 생각이 없는 모양이란 말이야.”
내 살길. 내 살길이라……. 황태자의 입지가 나쁘지 않은 지금으로써는 황녀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엘리엇에게 큰소리친 것과 다르게 황제는 뜻밖에도 황녀와의 약혼을 쉽게 허락해 줄 낌새가 아니었다. 그래도 제 자식이라 출신은 따져야겠다, 그거지. 웃기는 놈들!
“어떻게든 밀어붙여 결혼한 후에 저놈을 처리하고, 차라리 황녀를 황제로 만들어? 그러고 보니 우리 황녀님 이름이 뭐더라. 매일 황녀, 황녀 하니 알 턱이 있나.”
“엘리…… 엘리자벳? 맞아. 엘리자벳이라 했지.”
궁에 꽤 오래 머물었지만 타티카는 엘리자벳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제법 예쁘장했던 것 같지만, 너무 어렸기에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황녀는 권력 한 줌 없었다. 힘없는 어린 계집애. 엘리자벳에 대한 타티카의 평은 딱 그 정도였다.
“본 지도 오래됐단 말이야. 장례식 때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근래에는 제 궁에서 나오지도 않고. 얼굴 본 지가…… 흐음.”
엘리자벳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타티카는 문득 어린 황녀를 본 지가 꽤 됐음을 깨달았다. 궁에 있으면서 이렇게 안 마주치는 것도 힘들 텐데.
타티카가 엘리자벳과 접점이 없는 데는 제 궁에서 나오지 않는 엘리자벳에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엘리엇의 영향이 컸다. 엘리엇은 사교계 생활을 여동생에게 보여 주기 꺼려 했다. 그 덕에 엘리자벳은 엘리엇과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지인들, 주변 시녀들을 제외하고 가끔 티 파티에 초대되는, 엘리엇이 엄선한 부인과 영애들만을 만날 뿐이었다. 자연히 타티카와는 같은 황궁에 있더라도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타티카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건드리며 눈을 좁혔다. 이상한 일이란 말이야. 왜 못 봤지? 작은 호기심이 커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좋아. 그래도 청혼하고 있는 처지인데 우리 황녀님 얼굴이나 보러 갈까?”
타티카는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섰다. 그러곤 어린 황녀에게 줄 선물로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며 엘리엇이 나갔던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황제의 정부가 급사했다. 이유는 불명. 진한 금발의 앳된 자작 부인은 새벽녘 제 침실에서 새파랗게 질린 채 배 속 아이와 함께 죽어 있었다. 황제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궁의들을 채근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송구하다 떨리는 목소리뿐이었다.
죽은 황제의 정부는 궁 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애도를 받지 못했다. 그 우세리 공작이 데려온 천출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평소 그녀의 성정이 워낙 오만한 탓이었다. 어떤 이는 차라리 천한 그녀가 죽은 것이 좋다 말했다. 분위기가 그러하니 그녀와 가까웠던 몇몇 이들도 애도를 잘 표하지 않았다. 그녀와 아이의 죽음을 티 나게 슬퍼해 주는 이는 단 한 사람, 황제뿐이었다.
황제는 슬픔에 빠졌다. 그는 만사를 제쳐 놓은 채 죽은 정부와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기렸다. 황제가 어찌나 슬프게 애도를 하는지 몇몇 이들은 황제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나 황태자를 비롯해 황제의 곁에 오래 있었던 이들은 황제를 걱정하지 않았다. 황제의 성정을 잘 아는 탓이었다.
‘전하. 페하께서 오늘도……. 저러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찌할지…….’
‘걱정 마라. 폐하께서는 곧 털고 일어나실 테니깐. 아마 이번 주를 넘기지 않을 게다.’
아니나 다를까 사흘이 지나기도 전 황제는 새 여자를 침실로 끌어들였다. 이번에도 우세리 공작이 선물한 여자였다. 젊고 아름다운 새 정부에게 빠진 황제는 죽은 전 정부 따위 까맣게 잊어버렸다.
“황제 폐하 곁에 새로이 붙은 여자가 창관에 있었대요. 다비드 백작님이 언제가 그 여자를 봤다지 뭐예요?”
“세상에. 설마요. 우세리 공작께서 추천한 여자라던데, 공작께서 감히 하자 있는 상품을 폐하께 바칠 리가!”
“아이참. 왜 그러십니까. 다 아시지 않습니까. 공작님이 여자를 어디서 데려오는지. 폐하께서도 경험이 많은 것들을 더 선호하신다니…….”
“호호. 하긴, 조신한 영애들이나 귀부인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으시지요. 천한 것 아래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더니…….”
엘리엇은 눈살을 찌푸렸다. 단상 위에서 조금씩 들리는 소리가 거슬린 탓이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엘자. 이리 와. 그쪽으로는 안 가는 게 좋겠다.”
“왜? 벨과 에셀이 저쪽에 있는데……. 내려가면 안 돼?”
“넌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해. 나중에 나랑 첫 춤을 추고 나면 그들을 볼 수 있을 테니 조금만 참아.”
엘리자벳은 사교계 데뷔를 알리는 하얀 드레스와 하얀 화관을 쓰고 있었다. 몇 번을 봤지만, 눈이 부실 듯 아름다운 모습에 엘리엇은 잠시 여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몇 번을 봐도…… 저 풋풋함과 붉은 뺨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내 눈에도 그럴진대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보이겠지. 역시 엘자 넌 아직 나와서는 안 돼. 조금만 더…… 아니 가능하다면 더 오래도록 이런 자리는…….
“엘리엇. 아파! 그런데 춤……. 나 실수하면 어떡하지? 맨 처음이라 모든 시선이 다 모일 텐데.”
“걱정하지 마. 네가 틀리면 그다음부터는 틀린 게 옳은 것이 될 테니까.”
“그런 게 어딨어! 틀리면 틀린 거지. 차라리 춤 안 추고 싶어. 엘리엇하고만 추면 몰라도…… 나중에는 다른 사람하고도 춰야 하잖아? 에셀은 발을 밟아도 된다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걸.”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음 춤은 생략해도 좋아. 첫 춤만 춰도…….”
“그건 싫어. 이 옷 입고 추는 건 오늘뿐이잖아. 제인이 그러는데 엘리엇이 이 옷을 골랐다며? 신경 써 줬는데 내가 망칠 수는 없어.”
엘리엇은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엘리자벳에게 춤을 추지 않는 게 더 좋다. 네가 다른 이의 손을 잡지 않는 걸 원한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말. 그는 웃는 여동생을 따라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뭐야 그 표정은. 사실은 내가 실수할까 봐 속으로는 걱정하는 거 아냐? 그래서 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걱정하지 마. 연습 많이 했으니깐.”
“그래.”
엘리자벳은 제 농담조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엘리엇을 보고 조금 의아해졌다.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정말 내가 실수할까 봐 걱정되는 건가?
‘연습할 때 엘리엇 발을…… 많이 밟기는 했지.’
연습 상대를 해 주던 중 몇 번이고 저한테 발이 밟힌 엘리엇이 떠오르자 엘리자벳은 괜히 미안해졌다.
“흠흠. 그건 그렇고 저번에 벨하고는 만나 봤어? 어땠어?”
“바쁜 일이 있어 못 봤어.”
“뭐? 벨은 그런 말 없던데……. 왜 조금만 시간 내서 만나 보지. 벨 엄청나게 보고 싶어 했잖아.”
아냐. 난 그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다만 네게 맞췄을 뿐이지.
“다음에……. 다음에 에셀하고 같이 자리를 마련하려고. 숙녀인데 나와 단둘이서 만나는 건 그녀의 평판에 좋지 않아.”
“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럼 다음에 나랑 같이 볼까? 벨을 먼저 초대하고 엘리엇이 뒤에 오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아니.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마음속 답은 항상 같았다. 그러나 엘리엇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마음과는 정반대의 답을 뱉었다.
“……그래. 엘자. 그건 괜찮겠다.”
“그럼 내가 빠른 시일 내에 약속을 잡을게. 벨도 기뻐할 거야!”
모든 일이 해결된 듯 엘리자벳이 작게 박수를 쳤다.
‘……엘자에게도 어지간히 눈치를 주는 모양이로군.’
엘리엇의 시선이 저 멀리 검은 머리 남매에게로 닿았다. 라세르가 남매는 오래전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엘리엇이 눈길을 주자마자 반응을 보였다. 엘리엇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볼을 붉히는 벨을 넘기고 작게 묵례하는 친우에게만 눈인사를 보냈다. 시무룩해하는 소녀의 모습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엘리엇.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여기에 있으니깐 사람들이 계속 이쪽을 보는 것 같아.”
“엘자. 이런 건 익숙해져야 해. 이제 자주 나올 텐데 계속 부끄러워할 수는 없어.”
“응…….”
“폐하께서 오시면 시작될 거야. 네 첫 데뷔인데 아버지가 시작해 주셔야지.”
첫 데뷔라는 말에 엘리자벳의 얼굴에 다시 긴장감이 서렸다. 열여섯도 되지 않은 나이. 궁에서 제한된 이들만 만났던 그녀에게 사교계와 많은 인파는 조금 두려웠다. 특히 엘리자벳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나를, 우리 가문을……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이 중에도 분명 가족이 죽은 자가 있겠지. 다들 벨이나 에셀처럼 나를 좋아해 주진 못할 거야.’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만 자신에게 모일 때면 엘리자벳은 의기소침해졌고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엘자. 걱정하지 마. 내가 있어.”
여동생의 떨림을 느낀 엘리엇이 엘리자벳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그는 여동생의 긴장과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도 너에게 뭐라 할 수 없어. 자, 어깨 펴고 앞을 봐야지. 우린 주눅 들어서는 안 돼. 항상 당당해야지.”
자신이 못난 모습을 보여도 고쳐 주는 오라비. 엘리자벳은 엘리엇의 말에 어깨를 폈다.
“엘리엇이 있어 다행이야.”
작게 속삭이는 말에 엘리엇이 순간 몸을 굳혔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앞을 봤다. 조금 위에 있을 뿐이었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엘리엇의 말에도 아직 견디기 힘들었다.
엘리자벳이 삼삼오오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지나 멀리 출입문을 본 건 우연한 일이었다.
‘또 누가 들어오는 모양이네. 정말 많이들 온다. 이 앞에서 내가 춤을…….’
시종이 여는 문을 보며 매일같이 연습했던 스텝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였다.
환한 금발. 익숙한 얼굴이 엘리자벳의 눈에 들어찼다.
“아…….”
동시에 엘리자벳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너는…….
그리고 그녀의 녹안이 최대한으로 커졌을 때.
‘나도 보고 싶었어. 엘자.’
시린 벽안의 주인이 정확히 그녀를 마주 보고 소리 없이 말을 걸었다.
* * *
“엘자.”
“…….”
엘리엇은 낮은 목소리로 엘리자벳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은 조각상처럼 굳은 채 다른 곳만을 바라봤다. 그와 똑 닮은 저 눈. 자신의 존재 따위 잊은 듯 다른 사내를 보는 시선에 엘리엇은 사람들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미간을 구겼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분명 사랑스럽겠지.’
엘리엇은 엘리자벳의 작은 생채기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였지만 순간 잔인한 생각을 했다.
“엘자!”
엘리엇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여전했다. 차라리 저 눈이 누구도 담질 못했으면. 그랬으면 이런 기분도, 이런 감정 따위도 느끼지 않았을 텐데.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마음을 숨긴 채 엘리엇은 엘리자벳의 시선을 쫓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담고 있는 사내는 여전했다. 그 어린 날 앳된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찬란한 금발도, 오만한 푸른 눈도 그대로였다.
페루스 르온. 금발의 사내는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이쪽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옆. 굳어 버린 엘리자벳만을 삼켜 버릴 듯 보고 있었다. 페루스의 입이 여동생의 애칭을 속삭이자 엘리엇의 눈은 한층 차가워졌다. 언젠가는 저 눈을 파 버리고 저 입에 넣어 버려야지. 그다음엔 다시 엘자 이 아이를 부를 수 없게 꿰매 버려야지.
엘리엇은 눈앞으로 다가온 위기감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까맣게 가슴이 타들어 가는 만큼 온몸이 불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삼켰다. 그의 이러한 감정은 절대, 적어도 지금은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엘자. 그만. 곧 사람들이 이쪽을 볼 텐데 그런 시선은…….”
엘리엇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은 채 엘리자벳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엘리자벳이 멀어졌다. 엘리엇의 손끝에 엘리자벳의 뜨거운 손이 스쳤다.
“엘자!”
“어머!”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엘리자벳이 갑작스레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엇의 고함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페루스에게서 엘리자벳에게로 옮겨 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황녀는 높은 구두를 신고 위태롭게 달렸다.
왕족들이 서 있는 곳과 페루스가 있는 홀의 입구는 서로 끝과 끝. 꽤 멀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전혀 힘든 줄 몰랐다. 뿌옇게 변해 가는 시야를 애써 바로 하며 그녀는 한 사람만을 보고 달렸다.
탁―
“조심!”
“어, 어…….”
“황녀님!”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위태롭게 달리던 엘리자벳이 페루스의 코앞에서 그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 것이다. 모두가 숨을 들이쉬었다. 작고 여린 황녀는 바닥에 넘어지면 부서질 듯 약해 보였다.
엘리엇은 엘리자벳이 비틀거리던 순간 바로 앞으로 뛰어갔다. 그의 머리는 지금 가 봤자 여동생을 구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엘리엇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사람이 있었다.
“……이런.”
엘리자벳은 모두의 우려와 다르게 무사했다. 그녀의 몸이 완전히 기울어지기 전 하얀 장갑을 낀 손이 그녀를 잡아챘다.
쿵쿵쿵―
엘리자벳의 귀에는 단 두 가지 소리만 들렸다. 하나는 그녀 자신의 심장 소리요.
또 하나는…….
“조심해야지. 엘자.”
눈가에 아롱아롱 매달린 눈물이 떨어졌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에 힘을 줬다.
“위험하잖아.”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과는 다르게 페루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높지도 낮지도 심지어 넘어질 뻔한 그녀를 걱정하는 낌새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다.
“흐…….”
작은 소리가 엘리자벳과 페루스 사이를 채웠다.
“…….”
더운 숨, 축축한 눈물. 그것들에도 엘리자벳을 감싸듯 안은 페루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작은 미소. 그러나 하얀 장갑 너머 꿈틀거리는 근육과 미세한 손 떨림을 페루스는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페루스는 입술을 꾹 물었다. 아아, 아직이구나. 항상 이랬지.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매일 다짐을 해도 몸은 머리를 따르지 않지.
‘그러나 나는 반드시…….’
수십 번 반복했던 말을 속으로 다시 되뇌며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일으켰다. 그의 품에서 감정을 토해 내던 엘리자벳은 순간 무엇인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황녀님.”
페루스 여전히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변해 버린 그의 말투에 거리감을 느꼈다.
당황함에 엘리자벳이 울음을 그치고 페루스의 얼굴을 봤다. 눈이 마주치자 페루스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다른 사람이 보잖아. 엘자.”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돌렸다.
홀 안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 쏟아지는 시선.
뿌옇게 변했던 시야가 이번에는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야와는 반대로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 갔다.
“아…….”
지나친 긴장에 엘리자벳이 혼절하기 직전, 누군가 그녀를 잡고 당겼다. 조금 센 힘에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엘리엇!”
순식간에 제게서 떨어진 시선에 페루스의 미간이 미미하게나마 굳었다.
엘리엇은 저를 부르는 엘리자벳을 조금 더 제 쪽으로 당겼다. 엘리자벳은 조금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안도감이 먼저였다.
“페…….”
“오랜만이군.”
그녀가 익숙함에 기댄 채 페루스를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엘리엇이 페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보다 딱딱한 듯 굳은 목소리에 엘리자벳이 엘리엇을 다시 봤다. 엘리엇의 얼굴은 목소리만큼이나 굳어 있었다.
‘아…….’
심각한 오라비의 표정에 엘리자벳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지만 페루스와 그들은……. 르온과 오로르는…….
엘리자벳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방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를 견디기 힘들어졌다.
‘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분명 가, 가해자 주제에 뻔뻔하다고 생각할 거야.’
첫 사교계 데뷔를 준비하며 눌러 왔던 두려움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페루스도 어쩌면…….’
편지는 다정했지만 속은 몰랐다. 힘들었을 텐데 용서할 리 없어! 어쩌면 지금도 우리 가문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아서…….
엘리자벳은 페루스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엘리엇에게 더욱 바짝 붙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페루스는 창백해져 가는 엘리자벳에게서 시선을 떼곤 엘리엇에게 인사를 했다.
아주 정중히.
깊게 숙여지는 허리에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는 곧 커졌다.
그리고 그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엘리온 오로르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 * *
더없이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팽팽했던 정치적 긴장감은 페루스가 고개를 숙임으로써 어느 정도 일단락됐다. 황제는 젊은 공작이 자신에게 깍듯이 굴자 기뻐하며 그에게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그러나 그 뒤 페루스가 황제에게 더 많은 것을 바쳤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물론 아직은 페루스의 진위를 의심하는 이는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젊고 유망한 그 앞에서 그런 의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황태자 엘리엇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 드레스의 촉감은 정말 신기하군요. 얇고 시원한데 가벼워요.”
“조금 비싸긴 하지만 시가 하면 남부지. 이번에 남부 농장을 하나 사들였소.”
“어머! 진한 빛에 티끌 하나 없는 것이 남부 사파이어로군요. 곧 자작가에서 결혼식이 있을 거라던데. 약혼자께서 선물하셨나 봐요?”
표면적인 평화와 함께 수도에는 남부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부유함을 바탕으로 화려함을 추구하는 남부 문화는 수도 귀족들의 구미를 당겼다. 남부에서만 난다는 보석, 직물이 수도를 휩쓸었고 궁정에는 나긋나긋한 남부 말투가 흘렀다.
남부의 대표 격인 페루스는 이로 인해 수도에서 큰 인기와 명망을 얻었다. 외숙을 비롯한 먼 친척들과 제 편에 섰던 남부 연합 일부 구성원을 잔인하게 숙청해 얻게 된 악명은 부유함과 권력 앞에서 곧 사그라들었다. 르온 공작의 숙청은 정당한 것. 페루스의 외숙이었던 아롤드는 한때 가졌던 권력이 무색하게 잊혔다.
“나이가 차셨으니…….”
“이번에 수도에 오신 이유도 신붓감을 위해서…….”
젊은 영애들을 비롯해 혼기 찬 딸을 가진 귀족들은 페루스와의 만남을 원했다. 뛰어난 외모, 재력, 권력. 그것을 마다할 귀족들은 몇 없었다.
“연회 날 기억 안 나세요? 황녀님과 그 모습은……. 게다가 요즘도 두 분이 만난다 들었는데.”
“황녀님은 아직 나이가 어리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다 자라신 거지요.”
“하지만 황녀님은 루프첸의 왕자와 혼사가 정해진 것 아니었나요? 제가 듣기론…….”
“모를 일이지요. 폐하께서도 르온 공작을 퍽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솔직히 하나뿐인 딸을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 할까요? 저라면 못 보내지요.”
그러나 아직 대놓고 딸을 페루스에게 소개하는 이들은 몇 없었다.
르온 공작이 나타나기 무섭게 달려간 엘리자벳 황녀. 그리고 꽤 친밀하게 황녀를 붙잡은 공작. 수상하고 애틋해 보이는 관계에 눈치 빠른 귀족들은 권력자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너무 멋졌어요! 아아……. 언젠가 저도 그런 분을 만나고 싶어요.”
“어머. 약혼자도 두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면 어찌해요?”
“그렇지만 멋진 건 사실인걸요.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눈치를 살피는 이가 많은 만큼 말은 쉽게 돌았다. 그리고 빠른 소문은 페루스에게 결코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남부와 황가 사이에 작은 알력은 있을지언정 큰 다툼은 없을 것이라 짐작했고, 페루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엘리자벳과의 미묘한 만남. 페루스는 그 낭만적인 장면으로 흉흉한 소문을 거두고 쉽게 수도에서 자리를 잡았다.
“난 싫어.”
벨은 저 멀리 두 사람을 노려봤다. 엘리자벳과 페루스. 밀착한 채 다정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은 꼭 연인 같았다.
에셀은 벨과 같은 곳을 씁쓸히 바라보다 여동생의 적대감 어린 말투에 고개를 돌렸다.
“엘리엇 님이 그러시는 건 모두 다 저자 때문이야.”
“전하라 불러야지. 벨. 그리고 그는 공작이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들으라고 해! 누구라도 감히 가볍게 입을 놀렸다간 그 혀를 잘라 버릴 테니까!”
타이르는 에셀의 말에도 벨은 여전했다. 알 게 뭐란 말인가! 잠을 설친 그녀의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저자 때문에! 벨은 페루스가 매우 싫었다.
“저자가 온 이후로 엘리엇 님의 심기가 불편하셔. 벌써 몇 달째 뵙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최근 벨은 엘리엇과 만나지 못했다. 원래라면 다정한 오라비인 엘리엇이 엘리자벳을 만나러 황녀궁에 왔을 테고, 우연을 가장한 척 황녀궁에 들르는 벨과도 만났겠지만, 페루스가 엘리자벳을 만나기 시작하며 엘리엇은 황녀궁에 발길을 끊었다.
“엘자도 그래! 엘리엇 님이 저자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매일같이 붙어 다니고! 아무리 오냐오냐 자랐다지만 정말이지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벨. 그만해.”
“그만하긴 뭘! 에셀, 오빠도 알잖아. 저자는 능구렁이야! 지금 수도 상황만 봐도…….”
“그만! 엘자는 정치와 관계없어. 그녀와 공작은 그저…… 친분이 두터울 뿐이야.”
에셀이 자세를 바로 했다. 물론 엘리엇의 측근인 에셀도 페루스가 껄끄러웠다. 아무리 얌전히 있다지만 남부의 힘은 지나치게 컸고 지금도 계속 커지는 중이었다. 벨의 말대로 정치적으로 본다면 엘리자벳은 페루스와 떨어지는 게 옳았다. 아무리 정치와 먼 황녀라지만 그녀도 황가의 핏줄이니…….
그러나 엘리자벳이 얼마나 그런 문제로 힘들어하는지 아는 에셀은 차마 엘리자벳에게 그와 떨어지라 충고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죄책감에 오들오들 떨던 엘리자벳이 떠오르자 에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벨은 에셀의 말에 더 화가 난 듯 눈초리를 올렸다.
“하! 편을 들 걸 들어야지! 다들 오빠처럼 쉬쉬하지만 나는 못 참아! 나중에 엘리엇 님이 보위를 이으실 텐데 전대 황가의 자손이 있으면 얼마나 거슬리겠어? 위험 요소가 너무 크잖아. 게다가 저자는 부유하고 영리해! 오빠가 충신이면 지금이라도 저자를 죽여 없…….”
“벨!”
에셀은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동생에게 경악했다. 누가 듣기라도 했다면! 에셀은 주변을 살핀 뒤 벨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너! 아직 어리다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쯤은 알잖아!”
“몰라.”
벨의 눈은 더 타올랐다. 일말의 반성도 없는 벨의 눈에 에셀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이러는지……. 에셀이 보기에 그의 여동생은 매우 명석했다. 비록 검은 포기했지만 벨은 활, 전술, 작문, 화술, 예법, 춤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다. 특히 북부의 스승들은 그녀의 판단과 사고가 형제 중 누구보다 뛰어나다 입이 마르게 칭찬하곤 했다.
허나 그러한 장점들은 엘리엇이 관계되는 순간 사라졌다.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지만 에셀은 여동생이 지나치게 엘리엇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 염려스러웠다.
엘리엇. 엘리엇. 벨은 언젠가부터 모든 인생의 초점을 엘리엇에게 두었다. 의붓 누이와의 다툼 또한 표면적으로는 마들렌이 정당한 핏줄이 아님을 내세웠지만, 에셀은 여동생이 의붓 누이를 미워하고 몰아내려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저 천한 핏줄이 우리 가문을 빼앗은 뒤 어디로 검을 겨누겠어? 감히 엘리엇 님께 이를 드러내겠지. 에셀! 그건 절대 안 돼! 알지?’
엘리엇. 그녀의 왕자님께 해가 될 테니깐.
“상황이 이렇지만 당장 공작은 잘못한 것이 없어. 폐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고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데 네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그건 엘리…… 아니 황태자 전하께 폐를 끼칠 뿐이야.”
엘리엇이 거론되자 벨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에셀은 불만 어린 벨의 표정에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직 어리니…… 어려서 그런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 다른 곳에선 이런 말을 않겠지. 자라면 나아지겠지.
“……벨. 난 네가 위험해지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 알지?”
“…….”
“먼저 가 봐야겠다. 퇴궁할 때 데리러 올게.”
에셀은 벨의 머리를 쓰다듬곤 몸을 돌렸다. 몸이 완전히 돌아가기 전 저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의 인영에 왠지 마음이 아팠지만…… 모든 짝사랑이 그렇듯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위선자.”
발을 떼기도 전이었다. 벨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에셀은 굳어 버렸다.
“에셀…… 오빠는 위선자야.”
“…….”
“사실 나보다 네가 더 나서야 하는 거 아니야? 엘리엇 님이 힘들어하시는 것도 그렇지만…….”
“…….”
“엘자를 좋아하잖아! 그녀가 다른 사람하고 붙어 있는데 병신같이 그냥 두고 본다고?”
폐부가 찔린 듯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잔인한 벨의 말은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렇게 착한 척 위선을 떠니깐 그런 거야. 티를 내야지! 매일같이 보기만 하면 엘자가 그리로 고개라도 돌릴 줄 알아? 그녀는 멍청해! 온실 속 화초라 엘리엇 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살핌만 받고 살았다고! 보기만 해서는…….”
“그만.”
에셀은 걸음을 뗐다. 벨은 성큼성큼 사라지는 에셀을 원망스레 봤다. 도움이 될 줄 알았더니!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멍청이!
“짜증 나.”
벨은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도움이 되는 듯 안 되는 엘리자벳도 짜증 났고 남부 영애들을 잔뜩 몰고 온 것도 모자라 엘리엇과의 만남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페루스 저자도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엘리자벳을 싸고돌며 자기편을 안 들어 주는 오빠 에셀이 제일 짜증스러웠다. 에셀이 조금만 적극적이었다면, 페루스 저자가 오기 전 엘자와 가까워졌다면 자신이 이리될 일은 없었을 텐데.
“원래라면 지금 엘리엇 님을 볼 시간인데…….”
아픈 가슴을 움켜쥔 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엘리엇은 이상하게도 엘리자벳이 말한 것과는 다르게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엘리자벳과 함께 있을 때만 다정했으며 그녀가 없으면…….
문득 아주 이상하고 거슬리는 생각이 벨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너무도 말이 안 되는 것이라 벨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금세 망각했다.
“흐윽…….”
결국 서러움이 몰려와 벨은 그만 울기 시작했다. 바라던 수도 생활은 이게 아니었는데. 엘리엇. 나의 왕자님…….
* * *
“으…… 흐흑…….”
“아악! 살려 주…… 읍!”
사방은 고통에 찬 비명과 신음으로 가득했다. 절망스럽게 울부짖는 그 소리에는 생생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역겹군요.”
보다 못한 제임스가 결국 옆에 있는 페루스에게 중얼거렸다. 별별 꼴을 다 본 제임스였지만 눈앞 광경은 가관이었다.
“가만, 가만있어야지.”
“히히히…… 히익! 히히!”
“아, 아…… 좋아. 더…….”
고통스러운 소리 사이사이 정반대의 소리가 가득했다. 제임스는 비명과 신음보다 음습한 웃음소리들이 더 소름 끼쳤다.
페루스와 제임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수도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었다. 쾌락을 좇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타락한 자들이 방문한다는 이곳은 명성에 걸맞은 꼴을 하고 있었다.
벌건 눈을 한 채 술과 약에 취한 이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을 제물 삼아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이런 곳으로 부르다니 아주 미친 자입니다.”
“알고 있지 않았나.”
글로 보는 것하고 직접 보는 건 틀리잖습니까! 제임스는 제 불만에 무심히 대꾸하는 페루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돈은 잘 끌어모으겠군요. 최근 수도에서 파산한 귀족 중 다수는 여길 거쳐 갔다는데. 꼴을 보니 사실이겠지요.”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모임은 예전부터 악명으로 이름 높았다. 약, 강간, 살인, 폭행. 쾌락이란 이름 아래 거의 모든 범죄가 자행되는 이곳을 몇 번 황제나 나라 안 권력자들이 처단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아무리 강한 권력자도 모임을 없애지 못했다. 없어진 듯 보여도 모임은 어느새 다시 나타났으며 다시 나타날 때마다 더욱 은밀해졌다.
“소문으로는 공작이……!”
“살, 살려 주세요!”
미간을 찌푸린 채 페루스 옆에서 떠들던 제임스는 우당탕 소리와 함께 갑자기 튀어나온 소녀로 인해 말을 멈췄다.
“제발……. 제, 제발…….”
소녀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옷은 걸쳤다 표현하기도 민망한 정도였으며 약해 보이는 피부 위로는 무수한 매 자국과 멍이 보였다.
이제 열댓 살은 되었을까. 절대 어른으로 보이지 않는 그녀는 파들파들 떨며 페루스의 옷깃을 잡았다.
“물러나십시오.”
놀라 한 발 물러선 제임스가 빠르게 소녀의 손을 떼어 내곤 밀었다. 소녀는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도와줘야 할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매정한 제임스의 손길에 소녀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임스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저, 저는 아무 잘……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왜……. 그러니깐 갑자기 여기…… 여기 있었는데,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 아버지한테 데려다주시…… 아악!”
“이년이! 감히 나한테서 도망을 가아? 오늘 하루 네년을 산다고 내가 얼마를 냈는데!”
횡설수설하던 소녀가 또다시 뒤로 넘어갔다. 제임스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힘이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끈 것이다. 날카로운 비명에 제임스는 페루스의 앞을 아예 막아섰다.
소녀를 뒤로 끈 남자는 뚱뚱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그는 소녀만큼이나 헐벗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소녀와 다르게 애처롭기보다는 역겨웠다.
퍽―
“아아악!”
퍽―
“악! 잘, 잘못…….”
남자는 무자비하게 소녀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그 잔인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역겨운 놈들뿐이로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불쌍한 소녀는 척 봐도 할아버지뻘인 노인에게 타의로 판매된 것 같았다.
그러나 제임스는 그 이상 나서지는 않았다. 소녀가 가엽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제임스는 소녀를 구할 이유도 노인을 말릴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이곳의 규칙이겠지. 통제하지 못할 곳에서는 나서지 마라. 주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 몇 년. 짧은 시간 페루스와 함께하면서 깨달은 교훈이자 생존 법칙이었다.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시죠. 이곳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페루스에게 권유했다. 애초에 약속을 거절했어야 했는데! 올 때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술과 약에 취한 이들이 주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만.”
그러나 제임스의 바람과 다르게 페루스는 제임스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들고 있던 지팡이를 노인과 소녀 사이에 놓았다.
페루스의 눈에는 소녀를 향한 연민 따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을 향한 경멸과 분노는 있었다. 이런. 제임스는 머리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저자는…….
“이건 또 뭐야아!”
퍼억!
“커…… 크헉.”
제 몸으로 가긴 글렀군.
페루스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단단한 나무 위 쇠를 덧댄 부분이 노인의 머리를 세게 휘갈겼다. 노인은 신음을 겨우 내지르더니 곧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제임스는 페루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페루스는 평소의 차분함을 잃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신경 꺼.”
짜증스럽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페루스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닦았다. 제임스는 더는 페루스를 자극하지 않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소녀의 몸을 자신의 옷으로 덮어 줬다.
“감, 감사……합니다.”
소녀가 힘겹게 말했다. 제임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옷을 덮어 준 것은 온전히 페루스 때문이었다. 주인의 트라우마가 아니었다면 이따위 번거로운 일 따위 하지 않았으리라. 왜 하필 이 앞에 뛰어들어서는. 페루스는 아닌 척하면서도 소녀의 상처를 보고 있었다.
‘쯧. 귀찮게…….’
그 모습에 처음 페루스를 만난 날을 떠올린 제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멍이 잔뜩 든 더러운 소년. 외숙에게서 도망쳐 자신의 가문으로 찾아온 그는 도저히 남부의 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눈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겠지.
‘페루스 님만 데리고 온다면! 우리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아롤드 그 돼지 같은 자를 몰아내고 진정한 남부의 주인을 세웁시다!’
페루스가 찾아올 당시 제임스의 가문은 공작의 외숙임을 빙자해 위세를 떠는 아롤드를 밀어낼 연합을 만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페루스 님. 아니 공작님. 그놈에게 붙잡혀 계시느라 얼마나 고생을…… 크흑.’
제임스의 아비를 비롯한 남부 연합은 페루스를 허수아비로 세운 후 권력을 차지할 속셈이었다. 어린 제임스는 아비의 속셈에 비소를 흘리며 저만큼이나 어린 남부의 주인을 동정했다.
‘매질이야 없겠지만…… 여기도 본질은 비슷할 텐데.’
그러나 제임스의 예상은 빗나갔다.
페루스는 대단한 이였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남부 연합을 교묘히 이용해 외숙과 대부분의 친족들을 숙청했다.
‘나는 네 아비를 비롯한 몇몇 이들을 죽여 버릴 거야. 욕심 많은 승냥이 떼를 개로 두는 취미는 없거든. 본디라면 네 아비를 죽이면서 너도 죽여 없애 버리는 게 맞지만…….’
그리고 후에 제임스의 가문을 비롯한 이용 가치를 다한 남부 연합의 대표 가문들도 몰락시켜 버렸다.
‘첫날 네가 제일 먼저 내게 물을 준 걸 기억해. 기회를 주지. 나를 선택하겠어, 아니면 가문과 함께 가겠어?’
제임스는 페루스가 아버지를 비롯해 삼촌들을 죽일 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랐다. 가문 밖에서 어미가 낳아 온 혼외 자식이라 무시당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저…… 죽기 싫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스물도 넘지 못한 소년이 무엇을 한다고. 그러나 당시 제임스는 페루스를 따르지 않으면 자신도 죽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제임스의 선택은 옳았다.
가문이 몰락한 후 제임스는 군말 없이 페루스를 따르며 그의 측근이 됐다. 그리고 자연히 페루스의 비밀스러운 면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매질해야 말을 듣지요. 어쩔깝쇼? 제가 당장이라도!’
‘……나는 먼저 가 있지. 제임스, 일이 끝나면 부르러 와라.’
‘……예.’
페루스는 사람을 칼로 찌를지언정 절대 때리지 않았다. 특히 그는 뺨을 때리는 행위를 매우 경멸했는데, 제임스는 그것이 페루스의 외숙 아롤드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임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래도 요즘엔 좀 괜찮다 싶더니만…….’
제임스는 페루스를 살폈다. 페루스의 표정은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았지만 제임스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미미하게 난 땀, 꽉 쥔 주먹…….
“역시 다음에 다시 오는…….”
“이런. 중요한 손님이 온다 해서 오늘을 조금 조용히 즐기라 했는데……. 손님이 이런 취향이셨네?”
걱정된 제임스가 다시 페루스에게 말할 때였다. 불쑥 누군가 제임스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오늘은 말을 끝까지 못하는 날인가. 불쾌해진 제임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신비한 보랏빛 눈을 반달처럼 휜 예쁘장한 사내가 있었다.
‘우세리 공작.’
“때리는 걸 좋아하나? 그런 방으로 안내해 줘? 여기 많은데. 원한다면 죽여도 좋아. 아아, 물론 값은 지불해야겠지?”
공작이라는 자가 하기에는 천박하고 잔인한 말이었다. 그러나 내용과 상반된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 제임스는 사내가 일부러 자신들을 이곳으로 초대했음을 알아챘다.
넘어갈 수야 없지. 제임스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오겠다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곳에 제 주인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공작 각하께는 죄송하지만…….”
그러나 제임스의 말은 또 끊어졌다.
“좋아. 안내를 부탁하지. 공작.”
제임스의 표정은 아주 팍 구겨지고 말았다.
* * *
황궁 안에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국경 너머 이민족과의 전투에 참전하게 된 기사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였다.
“너무 자주 나가는 거 같은데. 벨도 걱정이 많아. 에셀.”
“내 일이야.”
에셀은 자신을 걱정하는 녹색 눈에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내가 엘리엇한테 말을 해 볼까? 혹시라도 힘들면…….”
“그럴 필요 없어. 엘자. 이번 일도 내가 자원한 일인걸.”
조금은 단호한 에셀의 말에 엘리자벳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몰랐던 사실이겠지. 에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리자벳을 향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아…….”
“걱정할 필요 없어. 아주 소규모 전투가 될 거야. 내가 앞장설 일도 없을지 모르지.”
에셀은 내일모레 출정하게 될 전투를 머릿속에 그려 봤다.
‘동부 메일란 산맥 근처였던가. 백 명도 안 된다지. 하…….’
황제 엘리온은 보여 주기 식 업적을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그는 정복 황제라는 칭호를 매우 얻고 싶어 했는데, 아쉽게도 툴란 주변에는 쉽게 정복할 만한 나라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엘리온은 화풀이로 국경 지대 소수 이민족을 전쟁이라는 이름하에 자주 토벌하곤 했는데, 에셀이 보기에는 그건 그냥 학살이었다.
‘차라리 북부 국경으로 토벌을 간다면……. 누이가 최근 다쳤다던데.’
에셀은 약자인 그들을 적이라는 이름 아래 도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엇의 측근인 그는 일부러라도 자주 전투에 지원하곤 했다. 최근 황제와 황태자 엘리엇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세력이 빠져나가는데, 폐하까지 계속 엘리엇에게 압박을 가하면 엘리엇과…….’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 저번에도 다쳐서 돌아왔는데…….”
‘……엘자가 위험할 거야.’
“그건 그냥 작은 상처였어. 약속할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엘자.”
“응.”
에셀이 새끼손가락을 장난스럽게 내밀자 그제야 엘리자벳의 얼굴이 밝아졌다. 에셀은 저를 보며 환하게 웃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조금 비켜 시선을 둔 채 미소를 지어 봤다.
‘또…….’
에셀의 그런 태도는 조금 티가 나는 것이라 엘리자벳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 참. 벨과 엘리엇은 조금 있다 같이 올 거야. 이제 공식적인 연인인데 내가 손을 썼지!”
자랑스럽게 말하는 엘리자벳에게 에셀은 무어라 답을 할지 잠시 고민했다. 벨과 엘리엇. 에셀이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엘리자벳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내 착각이겠지. 요즘 엘리엇은 예민해져 있으니.’
하지만 에셀은 애써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황태자 전하, 아니 친우로서 부탁하지. 나와 내 가문 때문에 벨과 억지로 사귀는 거라면 그만둬. 그 아이가 널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벨 그 아이를 북부로 돌려보내지. 귀찮다면 상대해 줄 필요 없어.’
‘……그녀에게 먼저 청을 한 건 나야. 네가 걱정할 일은 없어.’
일전 엘리엇에게 물었을 때 그는 분명 벨에게 자신이 먼저 연인이 되어 달라 청했다고 말했다.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에셀은 엘리엇을 믿었다. 자신이 친우인 그에게 충성과 우정을 바친 만큼 그도 자신의 동생을 홀대하진 않을 터였다.
“그래. 나도 벨에게 들었어. 전하께 바쁜 일이 있어 조금 늦겠지만 같이 온다고. 그보다…….”
에셀은 말을 하다 잠시 머뭇거렸다.
“응? 그보다?”
“넌 왜 그와……. 공작 각하와 함께 오지 않았지?”
사실 계속 묻고 싶은 말이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온 뒤로 거의 모든 연회를 그와 함께 짝을 지어 나타났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오늘 연회에서 그녀는 에셀에게 파트너를 부탁했다.
“아…… 혹시 불편해?”
“아니. 절대 그런 것은 아니야. 그냥. 혹시 그가 너를…….”
바람맞혔나 해서. 너를 홀대하나 해서…….
“저번에 나와 춤추고 싶다 했잖아.”
엘리자벳의 답은 의외였다. 알아듣지 못할 답에 에셀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엘리자벳을 봤다.
“얼마 전 생일 때 나한테 그랬는데. 기억 안 나는 거야?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에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제야 그는 얼마 전 있었던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 냈다. 지인 몇몇만 초대한 작은 파티. 술을 평소보다 많이 마셨고, 그때 하필 홀로 있는 엘리자벳을 봤고…….
‘엘……자. 나랑…… 나랑…….’
‘에셀! 괜찮아? 많이 취했어. 사람을 부를 테니깐…….’
‘아냐. 잠시 내 말 좀. 나랑 한 곡만…… 언제라도 좋으니깐…… 어떤 곳에서든 좋으니깐…….’
“의외이긴 했어. 에셀은 평소에 연회도 거의 참석 안 하고 춤도 벨하고만 춰서…… 그다지 춤을 좋아할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미안.”
젠장. 에셀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어쩌자고! 도대체 어쩌자고!
“아냐. 이해해. 나도 춤을 좋아하긴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하고 추기는 조금 부끄러워서. 춤은 가까운 사람하고만 추는 게 좋지.”
얼굴이 홧홧하긴 했으나 에셀은 엘리자벳의 말에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말은 자신은 그녀와 가까운 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페루스랑 안 온 건…….”
그러나 엘리자벳의 다음 말에 에셀의 기분은 추락하고 말았다.
“페루스는 내가 다른 이랑 춤추는 걸 잘 허락하지 않아. 파트너로 왔으면 파트너랑만 춰야 한다나. 흥!”
새침한 말투와 다르게 엘리자벳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행복감이 묻어났다. 발그레해지는 볼. 더욱 빛나는 눈. 에셀은 가슴 한가운데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그건 공작이 허락하고 안 하고 할 일이 아니야. 엘자. 넌 황녀야. 누구라도 네가 원한다면 같이 춤출 수 있어.”
욱신거림 다음에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에셀은 엘리자벳의 말에서 페루스가 엘리자벳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히 누굴!
“그렇지? 하지만 매번 그러는 건 아니야.”
에셀의 말투가 차가워지자 엘리자벳은 에셀의 눈치를 살피며 페루스를 변호하고 나섰다.
“…….”
그러나 에셀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엘리자벳에게 들은 것은 처음이었지만 궁 안 다른 이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많았다. 르온 공작이 황녀와 만나는 이들을 정해 준다더라, 그녀가 다른 이와 함께 있는 걸 못 본다더라 하는 등. 사교계에서는 그게 낭만적인 연인의 작은 질투로 포장되는 듯했지만 에셀이 보기에 그건 그냥 통제요 심하게 말하면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이었다.
‘누굴 손아귀에 넣으려고…….’
몇 번 만난 페루스를 떠올리고 에셀은 인상을 찌푸렸다. 벨처럼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페루스는 위험한 구석이 많은 사내였다. 사교계에서는 신사로 정평 나 있었지만 꿍꿍이도 잘 모를 인사였으며 최근에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엘리엇과 미묘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혹시 엘자를 이용해서…….’
“아냐. 에셀. 생각하는 거하고 달라. 내가 장난친 거야. 페루스는 항상 많은 사람하고 사귀라고 하는걸.”
엘리자벳은 계속해서 페루스를 변호하고 있었다. 에셀은 불안해하는 엘리자벳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엘자.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 심지어 가족인 엘리엇조차 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에셀의 눈에는 엘리자벳의 상처가 그대로 보였다. 병적인 죄책감을 가진 엘리자벳은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넌 남에게 상처를 주느니 네가 상처를 받으려 하겠지. 에셀은 그게 항상 마음 아팠다.
“저번에는 파트너로 갔는데도 첫 춤을 엘리엇에게 양보했어.”
에셀은 결국 억지로 표정을 풀고 웃었다. 엘리자벳은 에셀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가슴께의 손을 살포시 풀었다.
그래. 넌 이렇게 웃어야지. 불안해하지도 말고 상처받지도 말고…… 행복해야지.
“그럼 약속대로……. 자, 황녀 전하. 저에게 당신과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에셀은 엘리자벳을 완전히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와 눈을 맞추며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벳은 자신을 다정히 보는 검은 눈에 편안함을 느끼며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에셀은 항상 고마운 친구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이해받는 느낌이었고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페루스는 에셀이 그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했지만……. 엘리자벳은 다른 이는 몰라도 벨, 에셀 남매와는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안녕. 황녀님.”
손과 손이 닿기 직전이었다. 엘리자벳과 에셀 사이 흰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귓가로 훅 하고 들어온 소리에 엘리자벳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엘리자벳과 키를 맞추고 있던 에셀도 무례한 인사에 허리를 폈다.
그러자 그 틈을 타 방해꾼은 완전히 엘리자벳과 에셀 사이로 파고들더니…….
“나랑 한 곡 출까?”
엘리자벳의 손을 낚아채곤 소리 나게끔 입을 맞췄다.
* * *
엘리자벳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빙글 원을 그리는 타티카가 연회장 어떤 이보다 불편했다.
흐응. 그런 엘리자벳의 모습에 타티카는 일부러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의 손을 꽉 잡았다.
엘리자벳이 놀랄 틈도 없이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작은 손을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엘리자벳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희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원을 그리는 게 저번보다 늘었어. 황녀님. 그새 연습이라도 했나 봐? 아니면…….”
마주친 자색 눈은 아주 진득한 장난을 머금고 있었다.
“매일 밤 누구랑 안고 빙빙 구르나? 침대에서? 아님 정원 같은 데가 취향인가? 황녀님은 요정처럼 생겼으니깐 정원이 더 잘 어울리기는 해.”
당장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무례한 말이었다. 하지만 타티카는 이 겁 많고 소심한 황녀가 자신에게 아무 말 못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자벳은 어찌할 바 모른 채 안절부절못하기만 했다.
‘우리 황녀님. 내 말 알아듣기는 한 거야? 머저리 같기는. 그래도 이런 모습이 귀엽단 말이지.’
불쾌한데. 분명 무례한 말인데. 나는 공작님께 편히 대하라 말한 적이 없는데…….
‘별 뜻 없이 하신 말일 거야. 그리고 말을 낮추시는 것도 내가 처음부터 별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내 탓이야.’
타티카의 생각과 다르게 엘리자벳은 분명 타티카의 행동이, 말이 잘못됐음을 알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상대를 탓하기보단 자신을 탓했다. 남들과 부딪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그녀에겐 그 편이 가장 편한 길이었다.
“내가 칭찬해 줬는데 답례 한번 안 해 주는 거야? 선물도 그렇고 우리 황녀님 너무한걸. 생각보다 매정해.”
“아, 그게…….”
“왜. 내가 칭찬해 주는 게 싫어? 응?”
“……감사합니다. 공작님.”
엘리자벳은 타티카가 자신에게 왜 이리 친근하게 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엘리자벳에게 있어 익숙하지만 동시에 아주 낯선 이였다.
엘리자벳은 조모 엘라르 시절부터 꽤 오래 그를 봐 왔지만 그는 당장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엘리자벳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화는커녕 본 척하는 일조차 거의 없었는데……. 엘리자벳은 최근 들어 자신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보이는 그가 부담스러웠다.
‘엘자. 다른 이는 몰라도 그는 모른 척해. 지저분한 인간이야. 천한 게 꼭 뱀을 닮아선…….’
게다가 오라비인 엘리엇이 워낙 그를 싫어했기에 엘리자벳은 그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이 차라리 편했다.
‘와! 전하. 이거 보세요. 이렇게 큰 오팔은 본 적이 없어요.’
‘이것도요. 모르간 푸른 산양의 안쪽 털로만 짠 것 같은데! 이건 폐하께서도 3년에 한 번만 진상받으신대요.’
하지만 언제부터였나. 타티카는 온갖 귀한 선물을 엘리자벳에게 보내며 노골적인 친근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척 봐도 과한 선물에 연인에게나 보낼 법한 편지까지. 엘리자벳은 크게 당황하며 그에게서 온 모든 것을 돌려보냈지만 연회나 황궁 안에서 말을 걸어오는 그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바로 오늘처럼.
‘최근에는 별로 나타나질 않으셨는데. 그래도 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깐.’
괜찮아. 엘리자벳은 자신의 손을 주무르는 그를 애써 무시하려 했다. 어차피 자신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자신이 여기서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면 잘 즐기고 있는 모든 이를 불편하게 하리라.
‘……별일 아닌 거야. 내가 예민한 거야. 공작님은 그냥…….’
엘리자벳이 기분을 감추고 억지웃음을 보일 때였다. 훅 하고 강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
엘리자벳은 타티카와의 간격이 사라짐을 느끼며 붉은 무언가를 봤다.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려 했지만…….
뱀의 혀처럼 보이는 그것은 날름거리며 엘리자벳의 귀를 스쳤다. 할짝. 습한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무…… 무슨 짓……. 도를 넘은 행위에 엘리자벳의 몸은 뻣뻣이 굳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황녀님.”
드레스 밑 다리가 후들거렸다. 허나 그녀를 그리 만든 이는 힘으로 그녀를 끌며 춤을 추듯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어 왔다.
엘리자벳은 입술을 꾹 물었다. 이제 엘리자벳은 불쾌함을 넘어 눈앞 사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벗어나고 싶어.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왜인지 잘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엘리자벳은 지금 당장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엘리자벳의 눈에 곧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씨발.’
그리고 그 순간 태연한 얼굴과 다르게 타티카의 속은 비이상적인 욕망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제가 붙잡고 있는 황녀를 무릎 꿇리고 싶었다.
‘억지로 입을 벌리고 내 걸 처넣어야지. 저 작은 머리를 잡고 흔들면 어떻게 우려나.’
컥컥거리며 버거워할 엘리자벳을 상상하던 타티카는 입술을 핥았다.
‘엉엉 우는 꼴도 보기 좋겠어. 그럼 저 얼굴에…… 저 눈가에…….’
희고 추잡스러운 액이 저 말간 얼굴을 범한다니! 아아,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엘리자벳의 눈에 눈물이 더 맺히는 만큼 타티카는 점점 참기 힘들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위험스러운 감각을 인지하고도 그는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먹여 보는 것도……. 아니야. 우는 꼴을 보면서 뒤로 박는 게 더 꼴릴 테지. 제법 잘난 핏줄이니 그렇게 암캐처럼 대하면 꽤 볼 하겠어.’
가늘게 열린 입술 사이, 뜨거운 숨은 이제 엘리자벳에게도 닿을 지경이었다.
“공, 공작님.”
“왜?”
“제가 몸…… 몸이 안 좋아서……. 그, 그만 가, 가 봐야…….”
“멀쩡한 거 같은데? 나 이래 봬도 유능한 의사야. 황녀님. 거짓말하면 안 되지.”
잡힌 사냥감처럼 애처롭게 떠는 엘리자벳은 이제 힘을 써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웬만해선 봐주고 싶지만, 그러기 싫은걸. 타티카는 손에 힘을 더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장담컨대 타티카는 몇 년 전까지 엘리자벳에게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제 궁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한다는 어린 황녀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시시하고 재미없는 계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그런 타티카가 엘리자벳에게 처음으로 관심이 생긴 건 그녀의 오라비 엘리엇 황태자와의 문제 때문이었다. 저를 무시하는 황태자의 콧대를 꺾을 수 있는 방도 중 하나.
황태자의 누이인 엘리자벳과의 혼인.
타티카는 한때 그걸 추진하고 있었다. 비록 여러 이유로 지금은 무산되었지만.
“조금만……. 손이…… 손이 아파서.”
타티카는 작게 떨며 자신에게 말을 해 오는 엘리자벳을 봤다. 분명 어린 계집일 뿐이었다. 얼굴이 꽤 반반하고 제법 잘난 핏줄을 가진.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계집. 그러나 타티카는 요즘 이 별거 없는 황녀에게 계속 관심이 갔다.
‘그렇게 아낀다니 그놈 앞에서 범하는 것도 재미있겠네. 고귀한 제 핏줄이 천것인 내 밑에서 성 노예처럼 앙앙거리는 꼴을 보면 뭐라 하려나.’
아마 처음은 그날이었을 것이다. 타티카가 황태자와 직접적으로 부딪친 날이자 호기심에 무작정 황녀궁을 찾아간 그날.
그날 타티카는 보고 말았다. 찾아간 황녀궁의 정원에서 잠든 소녀를.
엘리자벳은 살짝 그늘이 진 나무 아래 대리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에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시녀들은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타티카는 엘리자벳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타티카는 엘리자벳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새 많이 자란 소녀가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이 집안 외모에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타티카는 엘리자벳이 제 조모, 아비, 오라비와 흡사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을 보는 순간 타티카는 엘리자벳이 그들과 닳았으면서 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들은 고양이 새끼 같더니 이건 멍청한 개새끼같이 생겨 그런가.’
‘보고 싶어. 페루스.’
타티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였다. 새근새근 잠든 소녀는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애절한 목소리에 타티카는 움찔,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빼다 엘리자벳의 얼굴을 보고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한껏 풀어졌지만 동시에 울 듯한 얼굴.
‘……남부의 애새끼로군.’
설명하긴 묘한 감정이었다. 자신도 모를 감정에 불쾌해진 타티카는 결국 그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타티카는 엘리자벳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타티카는 엘리자벳에게 지금만큼의 관심을 보내진 않았다. 가끔 생각나긴 했으나 더 중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타티카가 엘리자벳에게 정확히 지금 같은 관심을 두게 된 건 그녀의 첫 데뷔 때였다.
타티카는 연회 날 드레스를 날리며 달리던 엘리자벳에게. 사내에게 안기던 그녀에게. 눈물을 흘리던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찌나 얄밉던지! 저를 보지도, 저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소녀가 얼마나 무정하던지!
스스로도 우스운 생각인 줄 알았다. 저도, 엘리자벳도 오랜 시간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그날 이후 조금 관심을 두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왜……. 타티카는 아직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이후로 그는 엘리자벳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손이 아파? 미안. 내가 황녀님과 너무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힘이 들어갔나 봐. 용서할 거지?”
“……네. 괜찮아요.”
이제 끝났으니깐. 엘리자벳은 끝이 난 음악에 안도했다.
“즐거웠습니다. 공작님.”
“다음 곡도 어때? 오늘은 페루스도 없잖아? 나랑 몇 곡 더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걸.”
엘리자벳은 타티카의 입에서 나온 페루스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페루스가 이름을 부를 만큼 친근했던가? 난 몰랐는데……. 왠지 모르게 페루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엘리자벳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타티카의 청을 거절했다.
“……선약이 있어요. 원래라면 에셀과 먼저 약속을 지켰어야 했는데…….”
공작님 때문에 못 지켰어요. 엘리자벳은 힐끗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는 에셀을 봤다. 그는 조금 굳어 있었다. 엘리자벳은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눈짓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사실 엘리자벳은 조금 억울했다. 그녀는 분명 에셀과 먼저 춤을 출 생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타티카에게 손을 낚아채어 거절할 틈도 없이 그와 춤을 추게 되었다.
“에셀? 아아…… 라세르 경을 말하는 거야?”
엘리자벳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곤 에셀 쪽으로 발걸음을 급히 옮기려 했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줄래? 내 이름 알지?”
그러나 바로 들려온 목소리와 손목을 잡는 힘에 그녀의 걸음은 무산됐다.
“그건 좀…….”
엘리자벳은 또다시 크게 당황했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엘리자벳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싫은데. 뭐라 해야 하나.
“응? 허락해 주는 거야? 황녀님.”
엘리자벳이 말을 않자 손목을 쥐는 힘이 강해졌다. 엘리자벳은 다시금 두려워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려움보다 분노가 조금 더 앞섰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제멋대로야!’
“싫…….”
“각하.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불편해하시지 않습니까!”
결국 화를 참기 어려워진 엘리자벳이 작게 팔을 털어 내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누군가 앞서 타티카의 팔을 잡아 그녀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아…… 아야. 경. 너무한 거 아냐? 그래도 내가 윗사람인데.”
“황녀께서는 더 윗분인 걸 모르십니까!”
큰 키와 등에 가려진 엘리자벳은 잠시 멍해졌다. 언제 왔는지 에셀은 그녀를 뒤로 보내고 타티카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최대한 억눌렀지만 엘리자벳은 에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큰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공작 각하셔도 조금 전과 같은 행동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에셀의 목소리가 커지자 연회 안 모든 이들이 주목했다. 엘리자벳은 왠지 자신이 모두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에셀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에셀…… 그만해도…….”
“감히 누구에게…….”
엘리자벳의 만류에도 에셀은 화를 참지 못했다. 타티카를 노려보는 그는 검이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그를 베어 버릴 것처럼 살기를 띠었다.
“이야, 경. 완전 개 같아. 왈왈.”
그러나 타티카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제 손을 주무르며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어깨를 으쓱이더니 에셀을 향해 장난스럽게 개 소리를 냈다.
왈왈. 우스꽝스러운 그 소리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북부 라세르가의 일원이자 기사로 이름 높은 이를 개에 비유하다니.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모두가 기겁할 만한 일이었다.
“각하!”
타티카의 모욕에 에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자신의 손에 있는 장갑을 벗어 타티카에게 던져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에, 에셀.”
하지만 순간 눈물 가득한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엘리자벳은 아까보다도 더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 채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다.
“……전하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에셀은 결국 손에 힘을 뺐다. 그는 자신이 당한 모욕보다 엘리자벳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전하. 가시죠.”
곧 에셀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엘리자벳을 연회장 밖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남은 한 사람에게로 집중됐다.
‘이야. 우리 황녀님. 대단한데. 안 그런 척하며 몇 놈을 홀려 낸 거지. 응? 의외로 다리 벌리는 데 소질이 있나.’
그러나 남은 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홀로 키득거리며 술만 홀짝일 뿐이었다.
* * *
“폐하. 그만 드세요. 이른 시각인데 이러다 몸 상하십니다.”
중앙궁 황제의 침소에서는 이른 저녁부터 교태로운 소리가 들렸다.
“역시 나를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구나. 하지만 샤르샤.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느냐. 내가 곧 진정한 황제로 거듭날 텐데!”
엘리온은 제법 기분이 좋았다. 국경 지대로 기사들이 승전보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정복 황제 엘리온 오로르! 이 얼마나 위대하고 위대한 이름인가. 어머니! 그 잘난 어머니도 가지지 못한 영광을 제가 가집니다! 내가 가진다고요!
“그래도 정신 차리세요. 아니면 빨리 주무시든가. 내일은 오전부터 회의도 있고 저녁까지 바쁘실 텐데요.”
“그런 사소한 건 엘리엇이 있지 않아! 내가 응? 내가…… 정복 황제다. 그런 일은 볼 시간이 없다 이 말이야.”
풀만 남작 부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해가 지기도 전부터 들이부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혀를 질질 끄는 황제는 누가 봐도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태자께서는 폐하의 의중을 조심히 떠보라 하셨지만……. 어차피 취하셨으니 괜찮겠지.’
풀만 남작 부인. 그녀는 엘리온 황제의 옆을 가장 오래 차지하고 있는 정부였다. 같이 지낸 세월이 있는 만큼 서른이 넘는, 정부치고는 많은 나이의 그녀였지만 황제는 어린 정부들보다 그녀를 더 귀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 색기 어린 자태로 황제를 사로잡았다 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오래 자리를 보존한 데는 황태자 엘리엇과의 관계에 있었다.
비록 대외적으로는 사이가 나쁜 척을 하고 있지만, 실제 그녀는 엘리엇이 타티카가 바친 여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잠입시킨 여자였다.
“폐하. 여기에 기대세요.”
그녀는 취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황제를 보다 제 가슴께로 그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이리된 것, 대놓고 물어봐도 황제는 모르리라. 황제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헤벌쭉거리다 그녀의 가슴골 사이로 머리를 처박았다.
“아이. 우리 폐하는 어리광도 많으셔. 참! 폐하, 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엘리자벳 황녀님…… 황녀님의 혼처를 정하고 계시다면서요?”
“응? 내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했던가?”
“말씀하셨으니 제게도 말이 들어왔지요. 전하를 누구에게 보내실 거예요? 아시다시피 황녀 전하께서 제게 보통 잘해 주시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른 분들처럼 천하다 구박도 안 하시고……. 흑, 주제넘지만 어미 같은 마음이 들어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정말 주제넘은 말이었지만 풀만 남작 부인은 엘리엇의 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엘리자벳의 혼처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가 본 황녀는 신분에 맞지 않게 워낙 순진하고 여린 이라 왠지 보듬어 주고 싶은 구석이 있었다. 자신에게 정말 잘해 주기도 했고.
“아직 정하지는 않았다. 뭐…… 후보들을 보면 우세리 공작도 괜찮지. 출신은 천해도 좋은 사람 아닌가. 나를 많이 돕지. 아니면…… 엘자,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르온 공작도 괜찮고 말이야. 버르장머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건실해. 다들 툴란을 짊어지고 있는 젊은이들이니 누구라도 엘자에게 과한 혼처지.”
“아니, 폐하! 기왕이면 황녀님께서 좋아하시는 분과 이어 주셔야지요. 하나뿐인 따님이시잖아요. 그리고 과한 혼처라니요. 황녀님께서 보통 아름다우십니까. 벌써 세상에 소문이 쫙 돌았다구요.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고. 게다가 친절하고 착하시기까지. 누구에게 가시더라도 상대 쪽이 과분한 분을 데려가시는 거지요.”
‘아비라는 이가…… 쯧.’
전하께서 얼마나 괜찮은 분인데. 풀만 남작 부인은 고운 딸에 대해 박하게 말하는 엘리온에게 저도 모르게 새초롬하게 말했다.
“샤르샤. 네가 그 아이와 친한 건 잘 알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아이를 이 나라에 두고 싶지 않아.”
그러나 정부의 기분은 조금도 헤아리지도 못한 엘리온은 술에 취해 속에 있는 말을 쉽게 내뱉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풀만 남작 부인은 엘리온을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짐짓 태연한 척 물었다.
“아이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장난이시죠?”
“어허. 장난이라니, 샤르샤. 황제는 그런 것. 딸꾹. 그런 것 따위 모른다.”
풀만 남작 부인은 얼굴을 굳혔다. 황제는 지금껏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딸에게 무관심하기는 했으나 외국으로 딸을 팔고 싶어 하는 것만큼 박정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이럴수록 황제의 의중을 더 알아야 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천연덕스러웠다.
“하나뿐인 따님인데 황녀님을 외국으로 보낸다 이 말씀이세요?”
엘리온은 그녀의 물음에 잠시 답을 하지 않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녹색 눈은 조금 전과 다르게 뚜렷한 빛을 띠고 있었다. 허나 그 빛은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풀만 남작 부인은 황제의 눈에 서린 증오와 미움, 분노를 여실히 느꼈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예? 황녀님이나 황태자님이나 폐하를 꼭 빼닮으셨는걸요.”
“엘자 그 아이는…… 나와도 닮았지만, 내 어미와 너무 닮았어. 징글징글하게 닮았지. 그 눈. 그 코. 입까지! 어느 구석 하나 안 닮은 곳이 없지.”
풀만 남작 부인은 엘리자벳이 엘라르 황제와 닮았다는 데는 동의했다. 그러나 솔직히 외모만 놓고 말하자면 엘라르 황제와 가장 닮은 건 황녀도 황태자도 아닌 엘라르 황제의 아들, 엘리온이였다. 다만 그럼에도 엘리자벳이 엘라르 황제와 닮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이유는 같은 여성에다 긴 머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나는 내 어미의 얼굴이 싫다. 꼴도 보기 싫어. 만약 그 아이가 어미와 성격까지 닮았다면 난 그 아이를 진즉 도륙했을 거야.”
“…….”
“사실 지금도 꼴 보기 싫다. 예전에는 제 궁에만 처박혀 있더니, 쯧. 왜 기어 나와선! 그 어디던가. 그래. 루프첸의 율리히 왕자가 아직도 엘자에게 청혼한다지? 그곳이 좋겠어. 어차피 여자란 남자가 귀애해 주면 좋은 것이 아니냐. 엘자를 좋아한다니, 외국이라도 고생은 안 하겠지. 한다 해도 제 잘못이고. 그 애는 멍청한 제 친어미한테도 맞고 지냈어. 얼마나 멍청하면 같은 멍청이에게 맞느냐 이 말이야.”
“…….”
풀만 남작 부인은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곁에 있은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엘리온이 누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지, 누굴 가장 지워 내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낳은 어미를 세상 무엇보다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였다. 하지만 제 친딸조차 그런 이유로 미워하는 건……. 풀만 남작 부인은 엘리자벳이 가여웠다.
엘리온은 술기운에 더욱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그다음 그의 입에 담긴 것은 아들 엘리엇이었다.
“엘리엇 그놈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아니지. 샤라샤. 네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주마. 내 아들이지만 엘리엇 그 애도 문제야. 차갑기만 한 것이 아비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볼 수도 없질 않나.”
“폐하! 아시다시피 저는 그런 욕심이 없어요. 그저 폐하 옆에 오래 있고 싶을 뿐이랍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출신인지. 아이를 낳아도 인정받지 못할 거예요. 천것이라 손가락질받는 건 저만으로 충분하답니다.”
아무 말 않던 풀만 남작 부인은 엘리온이 후사 이야기를 하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영리했다. 그녀는 황제가 저리 달콤한 약속을 해도 지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정말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나를 황후로 올리려 했겠지.
물론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만약 아이를 가지면……. 그 순간 죽을 것이 뻔했다. 실제로 그 길을 간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허튼 소리! 엘리엇 때문에 그러느냐. 그래 봤자 내 밑이다. 그 앤 아직 황제가 아니야!”
고작 아들을 망신 주기 위해……. 엘리엇의 사람인 그녀로서는 황제의 말이 우스울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황제에게 묘한 동정을 느꼈다.
‘……불쌍한 사람.’
엘리온은 천한 출신의 그녀가 봐도 좋지 못한 황제였다. 그는 비겁한 데다 무능력했다. 그리고 이유 없이 귀하고 고고한 이들을 미워했다.
자연히 황제의 곁에는 무능력하고 천박한 이들만 모였다. 심지어 황제의 정부가 모두 천출인 것도 그가 숙녀라 불릴 만한 이들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귀족 영애, 귀족 부인. 심지어 그는 학자의 딸들도 글을 쓸 줄 안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똑똑하고 고귀한 여자는 다 싫다는 게 황제의 지론이었다. 심지어 황제는 귀족 여인이 가문을 물려받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의 그런 태도는 툴란을 더욱 남성주의 사회로 만들었다.
게다가 엘리온은 아버지로서도 최악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큰 열등감을 느꼈다. 제 자식인 딸은 고작 어미에 대한 증오로 외국으로 보내 버리려 하는 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풀만 남작 부인은 그가 가끔 가련했다. 특히 지금처럼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 때면 왠지 모르게 황제가,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다는 황제가 그냥 아이 같았다.
아아……. 내가 제 아들과 한패인 줄도 모르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고작 나에게…….
‘아버지를 따르는 낌새가 보이면 너를 당장 죽이겠다. 누가 너를 살려 이 자리에 세웠는지 기억해.’
엘리엇의 경고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팔에 힘을 줘 황제를 제 품으로 더 당겼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사랑 가득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쉬. 폐하. 술을 드시고 화를 내시면 몸 상하세요. 제가 자장가를 불러 드릴게요. 푹 주무세요.”
곧 중앙궁에는 어둠과 함께 감미로운 자장가가 울렸다.
그것이 풀만 남작 부인, 천한 정부 샤르샤가 황제에게 진심으로 해 줄 수 있는 단 하나였다.
* * *
“공작.”
페루스는 저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눈에 든 이는 엘리엇이었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루스는 고개를 숙이며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깍듯한 그의 태도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엘리엇은 제게 인사하는 페루스가 못마땅한 듯 노려봤다.
“기척도 못 느끼더군.”
고개를 들기 무섭게 가시 박힌 빈정거림이 날아왔다.
“아아, 죄송합니다. 정신이 팔려서. 미처 오시는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공은 중요한 사람인데.”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궁이었다. 궁이 위험하다니. 페루스는 위험한 말을 하는 엘리엇을 봤다. 어쩐지 그는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였다.
초조한 모양이지. 엘리엇이 왜 이러는지 잘 아는 페루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제 연인이신 황녀께서 너무도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그만.”
페루스는 더욱 핏기가 가시는 엘리엇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 차려입은 여인들 틈 사이로 웃고 있는 엘리자벳이 보였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들 사이였건만 그녀는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홀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주변을 살피려 해도 저리로만 시선이 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달콤한 말이었다. 누가 듣더라도 낭만적인. 연인을 사랑하는 이의 절절한 고백. 그러나 엘리엇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와락 구겼다.
페루스의 말 자체는 옳았다. 엘리자벳. 그의 누이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이였으며 특히 엘리엇, 그의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이였다.
하지만…… 너 따위가. 저 아이를.
엘리엇은 당연하다는 듯 페루스의 입에서 나오는 연인이라는 말이, 사랑스럽다는 말이 끔찍이도 싫었다. 나는 할 수가 없는데. 나는 숨길 수밖에 없는데.
“물론 전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테지만.”
묘한 말이었다. 엘리엇은 저를 비웃는 듯한 말에 페루스의 눈을 마주 봤다. 파란 눈에는 말보다 좀 더 솔직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승리감, 도취감, 비웃음…….
엘리엇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상대에게 더는 기쁨을 주고 싶지 않았던 그는 빠르게 제 안의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차갑게 대꾸했다.
“……공작에게는 과분한 아이지.”
“그렇습니까? 저는 전하께서 저희가 황제 폐하께 인정받는 데 힘을 써 줬다 들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외국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깐. 엘리엇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눈앞의 찢어 죽일 놈, 아니 누구와도 엘리자벳과 맺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있는데 그 아이가 왜 다른 이의 옆에 선단 말인가! 왜 다른 이의 연인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 엘리온 황제 때문에 엘리엇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만일 누구와도 맺어 주지 않았다면 분명 엘리자벳은 외국으로 갔으리라. 그리고 영영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겠지.
엘리엇은 페루스와 엘리자벳이 아직 혼인 날짜를 잡지 않은 것을 위로로 삼았다. 어차피 곧 내가 황위에 오르면……. 엘리엇은 약과 여자에 찌들어 날로 악화되어 가는 엘리온과 은밀히 찾아 놓은 ‘순수한 피’에 대한 서적을 생각했다.
“공작은 아직 내 누이와 혼인하지 않았지. 그런데 저희라니. 내 앞에서 누이를 너무 친밀히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대가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황족과는 다르지 않나. 게다가 잘 알다시피 공은……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하는 처지 아닌가.”
이번에는 페루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웃기는군. 이제는 네놈이 저 아이의 밑인 걸 알아야지. 엘리엇은 황자라는 이름하에 엘리자벳을 매일같이 궁에 부르던 페루스를 기억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네놈은 이제 저 아이보다 고귀하기는커녕 같지도 않아.
“그리고 말이 나온 참에 내 공작에게 경고 하나 하지. 과분한 걸 손에 쥐려 버둥대지 않는 게 좋아. 집착할수록 다른 것도 잃기 마련이거든.”
친누이에게 발정하는 주제에. 뒤이어 나온 엘리엇의 말이 너무도 우스워 페루스는 끓었던 감정이 팍 식음을 느꼈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는 엘리엇이 누구를 마음에 담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저 눈. 결코 누이를 누이로만 보지 않는 눈. 모를 수 없지. 과하다……. 과하다니! 세상천지 제 핏줄을 탐하려는 것보다 과한 것이 있을까?
허나 페루스는 제 속을 감추고 전보다 더욱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페루스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주변 이들은 왠지 무거운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고 호기심이 인 듯 연신 힐끔거렸지만 둘에게 차마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곧 반가운 듯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높이 뜬 빛을 받아 눈부셨다.
한 발, 한 발. 아무것도 모른 채 반가워하는 웃음이 점차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 언제 왔어?”
그리고 페루스와 엘리엇은 자신들 바로 앞에 도달한 이를 보며 완벽하게 같은 눈을 했다.
* * *
날씨는 화창했다. 적당한 볕에, 적당한 바람. 산책하기에 꼭 알맞은 날씨에 아름다운 후원 풍경을 두르니 그 위를 걷는 연인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그림 속 주인공 중 하나인 엘리자벳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에셀이 이번에는 꽤 오래 궁을 떠난다 해서 걱정이야. 돌아온 지 몇 달 안 된 것 같은데…….”
엘리자벳은 최근 자잘한 걱정들이 꽤 생겼다. 대부분 주변 인물들의 문제로 그녀는 그들 걱정 때문에 곧 있을 자신의 생일 연회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페루스는 자신과 있으면서도 바닥만 보는 엘리자벳을 보며 눈썹을 조금 올렸다. 하얀 얼굴은 평소 헤실거리던 모습이 아니었다. 항상 멍청할 정도로 웃어 대서 짜증이 났는데, 남 걱정을 하며 울상인 꼴은 더 거슬렸다. 특히 그게 이름을 부르는 사내라면…….
“그러고 보니 라세르 경이 내일 출정한다지.”
페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퉁명스럽게 엘리자벳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런 페루스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걱정을 조금 더 털어놨다.
“위험할 텐데. 게다가 에셀…… 엘리엇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두 사람 다 말도 안 해 주고…….”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 예리한 눈썰미였다. 에셀 라세르와 황태자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는 건 아는 이가 거의 없는데…….
‘제 주변이라 이건가.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엘자. 내가 알기론 라세르 경 고향에 야만인들이 쳐들어왔다던데. 전하와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마 고향에 홀로 있는 누이 걱정 때문일 거야.”
“아, 그런가?”
페루스는 제 말에 금방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엘리자벳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자벳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신뢰와 애정이 있었다.
착각할 뻔했어. 엘리자벳은 바보가 맞았다. 아니라면 다른 이의 말 한마디에 이리 휘둘리지는 않겠지. 페루스는 속으로 멍청한 것이라 비웃으며 겉으로는 엘리자벳에게 자상히 말했다.
“그래. 걱정하지 마. 라세르 경의 충정은 궁 안 모두가 아는데. 만일 문제가 있었다 해도 지금쯤 다 풀었을 거야.”
“하지만 풀었다 하기에는 두 사람 다 말을…….”
“사내들의 싸움은 보통 쓸데없는 것이 많지. 아마 네게 말을 하기는 부끄러운 거겠지. 괜히 묻지 마. 전하께서도 그렇고 라세르 경도 민망해할 거야.”
페루스는 엘리엇과 에셀의 신경전이 꽤 심각한 일을 기반으로 한 것을 알았다. 벨 라세르……. 그 여자 문제라지. 하지만 그는 일부러 엘리자벳에게 반대로 말했다.
어차피 길들여진 여자였다. 자신이 저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달콤함에만 취해서 자신의 말은 무엇이든 믿는 여자였다.
“응.”
아니나 다를까. 페루스의 예상대로 엘리자벳은 그의 말에 일말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또?”
“응?”
“표정을 보니 라세르 경 문제 말고도 뭐가 있는 거 같은데. 엘자.”
“아…….”
엘리자벳은 감탄을 하며 연인을 올려다봤다. 내 마음을 정말 잘 알아주는구나, 페루스는……. 다정한 그녀의 연인은 정말 섬세했다. 엘리자벳은 간질간질한 감동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끼며 페루스에게 제 걱정을 한 가지 더 털어놨다.
“사실…… 이건 내 착각 같은데. 아니, 아마 내 착각일 텐데…….”
머뭇머뭇 말을 끝맺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얼굴에는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다. 또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려나. 모든 일에 소심한 엘리자벳을 아는 페루스는 귀찮다 생각하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어차피 이 짓도 곧 끝날 테니, 조금만 더…….
“벨이…….”
마침내 엘리자벳이 속에 있던 걱정을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벨이 요즘 나를 조금 멀리한달까. 그러니깐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같기는 한데, 왠지…… 나를 볼 때마다 차가워진 것 같고. 또 나를 밀어내는 거 같아서…….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해 봤는데 생각나는 것도 없고…….”
엘리자벳은 말을 하면서도 벨에게 미안했다. 꼭 친우를 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벨은 최근에 이상했다. 갑자기 약속을 잡고 오지 않거나, 연회나 티 파티에 같이 가자 하곤 혼자 먼저 가 있거나, 같이 간 연회에서도 은근히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게다가 엘리자벳은 간간이 보이는 벨의 그 시퍼런 칼날 같은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어라 묻기에는 친우가 섭섭해할까 봐 엘리자벳은 홀로 끙끙 앓는 중이었다.
“페루스는 나랑 자주 같이 있으니깐. 혹시 내 행동 중에 벨을 섭섭하게 할 만한 걸 알면…….”
‘그 여자…….’
페루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꾹 눌러 참았다.
‘결정했어요. 내가 할게요.’
벨 라세르. 에셀 라세르의 동생. 황태자에게 제대로 미쳐 버린 여자. 덕분에 한결 쉽게 일을 해결할 열쇠.
‘이용할 만한 건 줄 알았더니. 그새를 못 참고…….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페루스는 눈치 없는 엘리자벳에게 어떤 식으로든 눈치를 채게 한 벨이 한심스러웠다. 쉽게 그 일을 하겠다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차라리 지금 여자를 처리하고 게획은 뒤로……. 페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회는 앞으로 또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라면. 아니 그 전에라도. 페루스는 속으로 수를 하나하나 헤아려 봤다. 기다리던 순간이었지만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야 미루는 것이 낫지 않나.
‘그래도 엘리엇 그자와는 만나지 못한다니.’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돌렸다. 말을 한 이는 고작 엘리자벳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항상 꽃밭에만 있는. 무능한 제 아비보다 더 머리가 빈 여자.
눈치챈 이가 너라 다행이야. 엘자. 페루스는 눈을 끔뻑이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 여자가 아니라 기민한 황태자였다면 진즉 눈치챘으리라.
게다가 왠지 계획을 물리기엔 그의 마음이 조급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분간은 이 여자를 망가뜨릴 수 없겠지. 저 밑으로 처박을 수 없겠지. 아껴 주는 척, 달콤한 말을 또 한참 지껄여야 하겠지. 또 한참을 기다려야겠지. 내내 나만 이를 갈고 가슴을 뜯으며 살아야겠지. 나만! 나만 이렇게! 너는 또 행복한 채로…… 네 오라비를 찾고, 라세르가 놈을 부르고.
제 주변 사내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엘리자벳을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열일곱, 곧 열여덟이 되는 엘리자벳은 예전보다 낯을 덜 가리게 되면서 제법 많은 사교장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상냥하고 아름다운 황녀.
페루스는 엘리자벳과 함께하며 그녀가 사내들에게 어떤 주목을 받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온갖 사내를 홀려 내겠지. 과거에 자신을 홀렸던 것처럼 또 주변 모두를……. 그런 거에 타고난 여자 아니던가.
페루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증스럽고 역겹기는! 순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왜 자신의 기분이 이리 바닥을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버릴 여자인데……. 곧 후들거리는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페루스!”
“……!”
페루스가 멍하니 있자 엘리자벳은 그녀답지 않게 제법 섭섭한 티를 냈다.
“내 말 듣고 있어?”
그제야 페루스는 정신을 차리고 엘리자벳을 봤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이미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무언가를 본 후였다.
“……시가잖아.”
엘리자벳은 페루스와 관련된 거라면 모든 것이 좋았지만 한 가지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랑 있을 때는 안 한다고…….”
기관지가 원체 약한 그녀는 조금의 연기에도 쉽게 기침을 하곤 했다. 페루스는 시가를 끊지는 못했으나 그런 그녀를 배려해 그녀의 앞에서는 시가 태우기를 자제해 왔다. 당장 현재는.
“아…… 미안. 엘자. 잠시 습관처럼.”
“건강에도 안 좋은데…….”
엘리자벳이 계속해서 툴툴거리자 페루스는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시가를 꺼낸 작은 은빛 상자였다.
“아…….”
“아직 끊지는 못했어. 대신 엘자 네가 준 거로 개수를 줄였지. 그러니 좀 봐줘.”
엘리자벳의 볼에 들어찼던 바람이 빠졌다. 페루스의 손에 들린 정교한 은세공 상자는 엘리자벳이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끊지 못하면 줄여 보기라도 하라고.
“흥. 그래도…….”
“네 말도 듣고 있었어. 라세르 영애가 신경 쓰이는 모양인데……. 너도 알잖아. 그녀가 최근 황태자 전하와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걸.”
페루스가 꺼낸 말에 엘리자벳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엘리엇과 벨. 엘리자벳이 가장 응원하고 있는 연인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최근 대외적으로 티가 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널 보며 황태자 전하를 떠올리겠지. 너도 알다시피 전하와 너는 꽤 닮았잖아?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너를 보면 라세르 영애의 기분은 좋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다 보니 네게 조금 거리를 뒀을 테고.”
“하지만.”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단호한 말에 무어라 항변하려 했다. 벨과 엘리엇은 우리만큼이나 오래 알았는걸.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어! 너와 나처럼. 그런데 이렇게 쉽게…….
페루스는 울 듯한 엘리자벳의 팔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곤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그녀를 다독였다.
“엘자. 모든 이들이 우리와 같을 수는 없어.”
“…….”
“우리는 영원하겠지만 세상에는 아닌 이들이 더 많지.”
영원.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달콤한 말에 이유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분명 다정한 목소리에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는데……. 어째 그녀는 순간 페루스가 음울하다 그렇게 느꼈다. 꼭 진득한 늪을 한 발 앞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벌써부터 걱정은 마. 두 사람이 아직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 조금 이러다 곧 다시 전처럼 돌아갈지도 몰라. 나는 그런 이들을 많이 봤지.”
하지만 무언가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기 전 페루스의 사려 깊은 말이 이어졌다.
‘그래. 페루스는…….’
충고를 해 주면서도 저를 위로하는 페루스를 보며 엘리자벳은 순간적으로 느꼈던 찜찜한 기분을 쉽게 떨쳤다.
“맞아. 페루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한 말에 강한 긍정을 표했다. 자신이 아는 친우와 오라비는 서로를 사랑했다. 비록 지금은 문제가 있지만 두 사람은 곧 다시 함께하리라.
“두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걸 거야. 그래서……!”
엘리자벳이 벨과 엘리엇에 대해 열을 올릴 때였다. 갑자기 페루스의 손이 엘리자벳의 뺨에 슬쩍 닿았다. 엘리자벳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조금 놀랐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페루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은 항상 설렜다. 갑작스럽든. 아니든.
“엘자. 그만. 두 사람 이야기도 좋지만 오늘 우리 얘기는 하나도 못 했잖아.”
“응…….”
엘리자벳은 파란 하늘 같은 눈에 홀려 아무렇게나 답을 했다. 언제 봐도 페루스 네 눈은 정말이지…….
엘리자벳은 분명하게 읽었다. 푸른 눈에 담긴 애정을. 사랑을. 자신을 향한 모든 따스한 감정을. 그 순간 그녀는 눈앞의 연인이 자신과 꼭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그럼 엘자. 일단 네 생일 말인데…….”
“사랑해. 페루스.”
때문에 엘리자벳은 부끄러움조차 잊은 채 속에 있던 말을 뱉었다. 사랑해. 사랑해. 페루스. 내가 많이 사랑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 순간 말을 뱉지 않고는, 감정을 쏟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사랑한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는 곧 나머지 한쪽 손 또한 엘리자벳의 뺨으로 가져갔다. 정답기 그지없었다.
“……나도. 엘자.”
여전히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적당한 볕에, 적당한 바람…… 서로 꼭 껴안은 연인.
그리고 엘리자벳은 그 가운데서 더없이 큰 행복을 느꼈다.
그것이 딱 열여덟. 그녀의 성대한 생일날까지만 지속될 행복인 줄도 모른 채.
* * *
사랑해. 사랑해. 내가 많이 사랑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 페루스.
* * *
엘리자벳은 페루스와의 첫 입맞춤이 달콤한 푸딩 같다 생각했다.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동시에 푸딩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데일 것 같은 뜨거움과 강렬한 맛을 그와의 입맞춤에서 느꼈다.
허나 그 감촉이. 맛이. 느낌이 어떻든 어떠하랴. 엘리자벳은 처음 느껴 본 그 묘한 무언가가,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그 감각이 아무래도 좋았다. 분명 써도 다디달다 느꼈을 테고, 시어도 다디달다 느꼈을 테니.
‘페루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게 입 맞추고 있던 상대가 페루스란 것이었다. 내게 입 맞추고, 혀를 얽고, 이렇듯 세게 안은 건 네가 처음이야. 내게 이런 기분을 주고, 이렇듯 사랑받는다 느낌을 준 것도 네가 처음이야. 네가…… 페루스 네가 모두 처음이야.
엘리자벳은 제 의식이 살짝 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녹아내리는 시야가 그걸 증명하듯 흐물거렸다.
‘아, 행복해.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자연히 행복하다는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엘리자벳은 살포시 입꼬리를 올리며 페루스를 부르려 했다. 네가 있어 행복하다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페……루…….”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 엘리자벳은 제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왜. 이런 소리가…….
“……페, 페…….”
눈꺼풀도 들어 올리기가 힘들었다. 온몸이 이상하리만치 힘이 없었다. 당황한 엘리자벳은 어떻게든 눈을 뜨려 했다.
“……악!”
시야가 채 넓어지기도 전이었다. 오른 발목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엘리자벳은 뜨려던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아, 으…….”
자연히 입술 새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아파. 아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자벳은 아찔한 정신 사이 훅 하고 감각들이 돌아옴을 느꼈다.
처음 돌아온 것은 후각이었다. 엘리자벳은 익숙지 않은 비린내를 맡았다. 이게 무슨……. 토기가 올라오는 느낌에 엘리자벳은 손을 더듬거렸다. 무언가 진득한 것이 손바닥 전체에 묻어 있었다.
엘리자벳은 제 손을 움직여 눈앞으로 가져왔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시야 사이로 검붉은 무언가가 손에 잔뜩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커진 동공이 캄캄한 곳에서도 선명한 윤곽과 색을 잡아냈다. 피!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엘리자벳은 확신했다. 제 손에 묻은 것은 피라고.
너무 놀란 나머지 엘리자벳은 멍해졌다.
‘왜…… 왜 피가 내 손에…….’
엘리자벳은 멍하니 손을 응시하다 오소소 돋는 소름에 팔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딱딱한 어딘가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청한 엘자.’
사랑하는 연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엘리자벳은 페루스……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다 그의 목소리가 왠지 차가운 것 같다고, 잔인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무언가 언뜻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손에 있는 피만큼 붉은 어떤 광경이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페루스랑 피라니. 불길하게.’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앨리자벳이 머리를 흔들려고 할 때였다.
‘엘자.’
‘망한 황가의 여식에게는 이런 대접이 어울리지 않겠어?’
머리가 두피째 뽑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분명 예쁘게 말아 올렸던 머리가 풀어 헤쳐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왜……? 나는 왜 여기 누워 있지? 내 머리는…….’
비스듬한 시야. 쏟아진 머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일단, 일단은 일어나자. 엘리자벳은 제 눈이 흔들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손을 바닥에 짚었다.
그러나 몸은 고통을 호소하며 따르길 거부했다. 계속 느껴지는 발목의 고통을 넘어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아……?”
손은 후들후들 병자처럼 떨리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떨리는 손 아래 제 팔목을 감싸던 노란 천이, 하얀 레이스가 너덜너덜해진 채 피로 젖어 있는 것을 봤다. 왜…… 왜 이런 거야. 순식간에 스쳤던 붉은 광경이 조금 느리게 흘렀다.
저를 보고 고개를 떨구던 엘리엇. 쓰러진 아버지. 사방에 난무하던 핏자국. 그리고…….
“아…… 아…… 아……?”
‘멍청한 엘자.’
비소를 물고 있던.
페루스?
“정신을 차렸어?”
엘리자벳 머리 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각선으로 눈을 굴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다리를 꼬고 침대에 걸터앉은 이가 보였다.
“페…….”
엘리자벳은 페루스를 부르려다 그의 반질거리는 구두 위 바짓단에 묻은 얼룩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붉은빛 광경이 계속 머리를 헤집은 탓이었다.
“이리로 기어 와. 엘자.”
캄캄한 공간. 페루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정하고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저도 모르게 몸을 달달 떨었다.
붉디붉은 광경은 이제 아주 선명하게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하긴 넌 멍청하니깐. 말로 하면 한 번에 들어 먹는 일이 없었지.”
엘리자벳이 제 말을 듣지 않자 페루스는 몸을 가볍게 일으켰다. 그리고 우아하게 엘리자벳 앞에 서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악!”
세게 휘어잡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엘리자벳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에게 잡혀 올라간 머리도 아팠지만 그보다 강한 힘에 목이 뽑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아프다고 말하기 전에 더 큰 고통이 그녀를 휘감았다.
짝―
홧홧한 뺨과 함께 엘리자벳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게 무슨. 페루스가 왜.
“……분명 더러운 기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엘리자벳이 넘어간 고개와 쓰러진 몸을 가누기도 전이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방금 전보다 훨씬 센 악력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데. 아주 좋아. 엘자.”
짝―
옆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고정된 머리는 엘리자벳에게 더 큰 충격을 줬다. 주륵. 빨간 뺨 옆, 엘리자벳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아…… 아…….”
방울방울 피를 떨어뜨리면서 엘리자벳이 입을 열었다. 두려움에 질려 겨우 낸 목소리였다.
“말했을 텐데?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벌써 잊었나? 네겐 이런 대접이 어울린다고.”
“페루스 왜…….”
“딱 한 번만 말하지. 내 이름을 그리 친밀하게 부르지도, 내게 말을 낮추지도 마. 더 이상 난 네 연인 따위가 아니니깐.”
냉랭한 말이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이 흐린 시야 밑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엘리자벳은 멍하니 위를 봤다. 이자가 자신의 연인이 맞나. 페루스가 맞나 살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무언가 채 확신을 하기도 전에 부욱,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하얀 가슴이, 그 밑에 자리한 가는 허리가 드러났다.
하. 고작 이따위 것 때문에 내가. 페루스는 신경질적으로 엘리자벳을 놓았다. 내던졌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페루……!”
몸을 타고 오른 사내는 흉흉했다. 엘리자벳은 등에 부딪치는 바닥의 딱딱함을 느낄 새도 없이 실리는 무게에 경악했고 그녀의 드러난 상체를 더듬는 손에 파랗게 질렸다.
“하, 하지 마. 이러면…….”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슴을 더듬는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에게 수치와 두려움을 주는 손은 미약한 손짓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만…… 그만해.”
“말을 높여. 멍청한 것.”
짝―
“악!”
비명이 방을 울렸다. 가느다랗게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페루스는 비죽 잔인하게 입매를 올렸다.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여자는 짐승처럼 울고 비명 지르고. 자신은 여자를 사냥하고 찢어발기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부족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드레스를 완전히 찢어 내기 시작했다. 노란 드레스가 찌익, 찌익 비명을 지를 때마다 엘리자벳은 자연히 새된 소리를 질렀다. 두려웠다. 두려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두려움에 질려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그녀에게 또다시 손이 날아왔다.
짝―
“시끄러워.”
“아악!”
짝―
“시끄럽다 했지. 닥쳐. 엘자.”
“아…… 흐…… 흐읍.”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음에도 엘리자벳은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달달거리는 손가락이 있는 힘껏 입술을 내리눌렀다. 순간의 아픔들이 두려워 나온 반응이었다.
이제야 좀 알아듣는군. 개만도 못해서는. 페루스는 제 입을 틀어막은 엘리자벳을 보니 뿌듯했다. 그럼 그렇지. 네까짓 게, 네까짓 게 뭐라고…….
페루스는 오만하게 그리고 경멸을 담아 엘리자벳을 보다 그녀의 드러난 허벅지를 일부러 주물렀다. 엘리자벳에게 수치를 주기 위한, 더한 공포를 주기 위한 행위였지만 사실 그보다는 아까부터 일기 시작한 음습한 욕망 탓이 컸다. 하얀 여체는 어느 곳곳이나 눈 안 가는 곳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다리 사이는 그의 가장 천박한 어느 곳을 자극했다.
‘……쓸데없이 음탕해선.’
뜨거운 손이 제 은밀한 곳에 닿자 후드득 엘리자벳이 몸을 비틀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얀 여체를 제 뜻대로 즐기고 있던 페루스의 눈에 불이 튀었다. 그는 심사 틀린 맹수가 그러하듯 으르렁거리며 엘리자벳의 허벅지를 꽉 쥐어 고정했다. 강한 악력에 뺨뿐 아니라 하얀 허벅지에도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네 처지가 아직도 실감이 안 되나? 또 맞기 싫으면 얌전하게 굴지.”
“제발…….”
엘리자벳은 몸짓을 멈추고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려 모았다. 그리고 있는 모든 용기를 그러모아 페루스를 바라봤다. 제발…… 제발……. 꼭 잔인한 신에게 자비를 청하는 모습이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한편에 찌그러져 있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가여운 제물의 형상이었다.
“제, 제발 그만둬. 흐윽. 제발…… 난…… 나는…… 내가 다…… 다 잘…… 잘못했으니깐…….”
페루스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봤다. 부은 뺨에, 알몸을 한 채 제게 비는 꼴이 꽤 볼만했다.
길거리 창부도 이런 꼴은 하지 않는다지. 엘자. 네게 딱 어울리는 꼴이야. 하지만.
짝―
“또 말을 못 알아먹는군.”
“아악!”
“귀 울리니깐 소리 지르지 마. 그리고 말을 높이라 몇 번이나 말했지. 아까 그렇게 맞고도 머리가 안 돌아가나?”
“잘, 잘못…….”
짝―
“더듬지 말고 제대로 말해.”
“……흐윽. 잘, 잘못…….”
짝―
“하아. 몇 번을 말해야 하지? 응? 다시.”
“잘못했어요! 잘못…… 흑…… 했어요.”
내리 맞은 뺨에 엘리자벳은 무작정 빌기 시작했다. 열여덟. 툴란에서 가장 귀하게 자란 이 중 하나인 그녀는 이런 야만적인 폭력을 보는 것도, 마주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알았으면 네가 할 일을 해.”
그러나 동정 없는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부어오른 뺨을 보다 차갑게 말했다. 할 일을 하라는 말에 엘리자벳의 두려움 가득한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할 일?”
우그러진 물음이 한심스럽다는 듯 페루스는 얼굴을 구겼다. 험악해지는 미간에 엘리자벳이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최대한 수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또다시 손이 날아올까 싶어 보인 반사적인 행위였다.
“하……. 다리를 벌리라 이 말이야. 이제 창부가 될 테니 네가 할 일은 그뿐이지.”
그러나 페루스의 답에 엘리자벳의 눈은 다시 커다랗게 뜨였다. 상상조차 못 해 봤던 경악스러운 말에 엘리자벳이 앞선 고통들을 잠시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
“아냐! 나는…… 창부가 아니야! 페루스. 나는 네…….”
짝―
연인이야. 네가 사랑하는 이야.
“……계속 말하면 지금 당장 저잣거리에 널 던질 거야. 알몸으로 천것들에게 보이고 싶나? 응? 소원이라면 계속해.”
으득. 말을 끝낸 페루스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항상 더러운 기분이었다. 이 여자와 하는 사랑놀음은. 그런데 제 앞에서 감히! 이 상황에 와서도 감히!
근 몇 년을 떠올리자 역겨움이 몰려왔다. 페루스는 속을 게워 내는 대신 엘리자벳을 더 냉랭하게 노려봤다.
앞선 폭력보다 강했던 탓인지 엘리자벳의 고개는 아주 돌아가 있었다. 페루스는 저를 보지 않는 엘리자벳의 턱을 집어 제 쪽으로 돌렸다.
“흐…… 흐읍…… 흑, 흐으…….”
“반역이라 하지만, 사실 멍청한 너도 알잖나? 오로르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그는 엘리자벳이 가장 아파할 부분을 일부러 끄집어냈다.
어차피 사실 아닌가. 진짜 죄인은 네 가문인 오로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한 것은 네 가문이야. 그러니 지금 내가 네게 하는 짓은 정당해. 이게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야.
가문이 거론되자 엘리자벳의 표정이 변했다. 페루스는 그녀의 얼굴에 짙게 깔린 죄책감을 쉬이 잡아냈다.
아아, 그래. 엘자. 너도 인정하는 거지. 네 가문이, 네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지. 사실 전에 네가 그런 얼굴을 할 때면 가증스러워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한결 느긋한 얼굴이 된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뺨을 때린 손으로 다시 그녀의 가슴을 잡아챘다.
“아으…….”
눌린 신음을 삼키며 수치와 고통으로 엘리자벳이 얼굴을 붉혔다.
페루스는 시정잡배가 창부의 가슴을 주무르듯 배려 없이 손을 놀렸다. 말랑한 살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 줘? 네 가문에 복수하고 싶어 날뛰는 놈들을 내가 많이 아는데…… 그중에는 희한하게도 황제도, 네 오라비도 아닌 유독 널 짓밟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제법 있지.”
나를 포함해서 말이지.
“그러니 그들 전체를 당장 상대하고 싶은 게 아니면.”
말을 잠시 멈추고 페루스는 점차 오므라지는 다리 사이를 벌리려 허벅지 위 손에 다시 힘을 줬다. 하얗고 연약한 다리는 두려움에 완전히 억눌렸는지 쉽게 열렸다. 제게 벌어지는 다리를 보며 페루스는 픽 웃었다. 그리고 모욕을 이어 갔다.
“다리 벌려. 알아서 창부처럼 굴란 말이야. 그럼 혹시 알아? 내가 옛정을 봐서. 나만…… 흡.”
엘리자벳을 짓누른 채 바지를 내린 페루스는 두려움에 질려 굳어 버린 엘리자벳을 무시한 채 크기를 키운 제 것을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악, 하고 계속해서 참았던 비명이 울렸다.
“상대하게 해 줄지. 흐으……. 그래도 귀한 황녀님이었는데 한 사람만 상대하는 게 좋잖아?”
엘리자벳은 너무 큰 아픔에 순간 의식이 사라짐을 느꼈다. 페루스의 잔인한 말도 너무도 큰 고통 앞에 희미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아으…… 아읍…….”
막힌 목구멍으로 기괴한 신음만이 넘어왔다. 줄줄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는 제 안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짐을 느꼈다.
그는 엘리자벳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제 감정을 몸으로 풀어냈다. 화풀이라 해도 좋았다. 단단한 몸에 정면으로 부딪친 엘리자벳이 뭉그러진 울음을 토했다.
“……하. 내가 얼마나…….”
페루스는 우는 엘리자벳의 몸 깊숙이 자신을 처박는, 제 것을 강제로 품은 채 울부짖는 엘리자벳을 보는 지금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페루스는 자신이 이 순간을 위해 참아 왔음을, 살아왔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네가 우는 꼴을 보니 기뻐.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꼴이 이리 즐거울 수 없어.
차오르는 고양감에 페루스는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남에게 고통만을 안기는 행위가,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가 이렇듯 즐거울 거라곤 계획하면서도 몰랐다.
엘자. 이래서 사람들은 다른 이를 괴롭히나 봐. 이래서 네 조모가 내 조부에게 그리했나 봐. 네가 내게 그랬나 봐.
따스한 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아이와 함께 웃고 떠들던 엘리자벳이 선하게 떠올랐다.
페루스는 갑작스러운 분노에 두 손을 뻗어 엘리자벳의 목을 쥐었다. 얇은 목은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듯 연약해 보였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박동이 손을 타고 그의 가슴께로 전달됐다.
페루스는 제 몸으로 느껴지는 생명력에 왠지 모를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곧 희열감과 광기에 찢어져 옅어졌다.
“으…… 아으…….”
엘리자벳의 눈은 점차 뿌옇게 색을 잃어 갔다. 아…… 아……. 숨을 못 쉬는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제 안을 헤집는 감각이 시시각각 강해지는 것이 더 괴로웠다.
“……아주 제대로 조이는군. 음탕한 것.”
이러니 그 나이부터 사내를 홀렸겠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오라비도 홀렸겠지. 제 주변 모든 사내란 사내는 다 홀려 집어삼키려 들었겠지.
짝―
이번엔 어처구니없는 핑계조차 존재 없는 폭력이었다. 페루스는 단지 엘리자벳에게 이유 모를 분노를 느껴 그녀의 뺨을 올려붙였다. 막혔던 숨을 제대로 쉬기도 전 엘리자벳은 제 고개가 돌아감을 알아야 했다.
“넌 이제 창부야.”
그렇게 살아갈 거야. 내가 그리 만들 거야. 페루스는 강하게 허리 짓을 하며 오래도록 그려 온 계획을 또다시 그렸다.
범하고 범하다 지겨워지면 뭇 사내들에게 내줘야지. 여러 사내에게 짓밟히는 꼴을 구경해야지. 동전 한 푼에. 아니 대가 없이 몸을 내주는 노예로 끌어내려 천한 것들에게도 내줘야지. 아주 바닥까지 끌어내려 제 처지를 알게 해 줘야지. 그러면 그리 헤실거리지 못하겠지. 어디 죽을 때까지 그리 살아 보라지.
좋은 햇살. 우아한 티 테이블. 마주 앉은 아이들. 자신만 빼고 밝았던. 자신은 잊은 듯 웃던 소녀.
분노와 만족감이 번갈아 고개를 들이밀었다. 페루스는 하얗게 변하는 머리에 입술을 묻고 엘리자벳의 허리를 잡았다.
“그만……. 제발 그만…….”
밑에서 무어라 울며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무지 언제쯤이면 알아들을지. 페루스는 한탄스러운 여자의 지능에 또 손을 올릴까 하다 급히 올라오는 사정감에 그만두었다.
페루스는 눈물을 흠뻑 머금은 녹빛 눈을 마주 봤다. 고통. 공포. 원망. 슬픔. 분명 어떤 긍정의 빛도 없는 눈이었다.
‘페루스. 사랑해.’
하지만 순간. 페루스는 어쩐지 엘리자벳의 전혀 다른 눈을 떠올렸다.
“……제길.”
지독한 쾌감이 그를 감쌌다. 페루스는 낮게 욕지거리를 하며 저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엘리자벳에게 밀어붙였다.
흡, 하고 숨이 절로 들어와 막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이상하고도 진득한 감정과 함께 비슷한 무언가가 토해졌다.
“흐으…… 흑…….”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제 안에 무언가가 들어찼고 그것이 결코 좋지 않음을 직감한 엘리자벳이 소리 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당장 얻어맞는 것보다 제 안에 꾸역꾸역 들어오는 뜨거운 것이 더 두려웠다.
페루스는 깔린 와중에도 어떻게든 몸을 말며 우는 엘리자벳을 보자 하얗게 타 버린 머리가 돌아옴을 느꼈다. 불쾌함과 함께 묘한 만족감이 그의 안을 메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아, 부족해. 부족해.
사정을 마치고 내쉬는 숨이. 허덕거리는 숨이 무언가를 갈구했다. 아직 부족해……. 페루스는 제 목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것 같다 생각했다.
‘내가 왜…….’
알 수 없는 의문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마음 가는 대로 여자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때렸고, 범했고, 울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기분이 좋았건만 이상했다.
페루스의 이성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절제하려 했다. 하지만 쉬이 되지 않았다.
‘제길…….’
페루스는 절제되지 않는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엘리자벳을 노려봤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처량했다.
하지만 그 가련한 모습이 페루스의 가학심에 다시 불을 질렀다. 페루스는 숨을 고르다 엘리자벳의 목을 다시금 쥐었다.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질질 짜지 말고 다시 벌려.”
* * *
엘리자벳의 삶은 한순간에 얼룩졌다.
당장 그녀의 얼굴처럼.
엘리자벳의 얼굴은 양쪽 모두 부어 있다 못해 파랗게 멍이 들었다. 생기 있고 도톰한 입술은 진즉 터져 굳어 버린 피딱지가 마른 입술에 눌어붙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몸은.
선명한 손가락 모양의 붉은 줄을 가지게 된 목을 중심으로 곳곳에 빨간 울혈과 잔인하게 문 잇자국이 생겼다. 흡사 사냥당한 꼴이었다.
“아으……. 아, 아…….”
내지 않으려 했지만 목에서는 쉴 새 없이 신음이 흘렀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지 못했다.
달그락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윙윙 소리만 가득한 머리는 그 소리를 주워듣자마자.
“아, 아……. 잘못했어요! 잘…… 잘못했어요. 아, 으. 제가…… 잘, 잘못했어요. 흐……윽……. 잘못했어요. 공작님. 제가 잘못…… 잘못했어요.”
당장 빌라고 명령했다.
엘리자벳은 다 쉬어 버린 목소리를 어떻게든 끌어모으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빌기 시작했다. 꼬꾸라진 고개 넘어 엉망으로 엉클어진 머리채가 쏟아졌다.
“흐…… 우욱. 잘, 잘못……. 웩.”
몸을 일으키자 다리 사이로 끔찍한 감각이 느껴졌다. 엘리자벳은 제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진득한 정액에 신물을 올리고 말았다. 입안에 고여 있던 피와 말간 액이 섞여 침대 시트로 떨어졌다.
“아악!”
자신이 토해 내곤 엘리자벳은 경기를 일으켰다. 또 맞을 거야. 싫은 내색을 보이면 안 된다 했는데. 엘리자벳의 머릿속에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이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처지를 알아라. 주제에 맞게 굴어라. 얌전히 다리를 벌려라. 말을 높여라. 소리 지르지 마라. 감히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넌 이제…….
짝―
짝―
짝―
창부야.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페루스, 공작님, 해서는 안 될 것들, 창부, 잘못, 아픔.
하지만 요지는 하나였다.
그의 심기를 거슬려선 안 돼. 그에게 거슬려서는 안 돼. 공작님께 빌어야 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해.
엘리자벳은 몸을 웅크리곤 덜덜 떨었다. 부러진 것 같은 발목도. 다 벗겨져 형체를 알 수 없는 드레스도. 피와 토사물이 묻은 시트도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사냥당한 짐승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끝에 가선 저를 사냥한 이의 자비만을 바라는 것처럼 굴었다.
“흐윽…….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흐…… 흐으. 아…… 잘…… 잘못했어요.”
공포에 완전히 잠식당한 엘리자벳은 그녀를 아는 이가, 아니 그녀를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다.
“아윽……. 자, 잘…… 잘못했…… 흑.”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생일 연회를 빙자한 살육 현장 목격 후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볼만해. 엘자. 네게 어울려. 꼭 원래부터 그랬던 이 갔군.”
그러나 엘리자벳을 그리 만든 이는 창가에 앉아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엘리자벳을 감상하며 시가를 맛있게 태울 뿐이었다.
* * *
무자비한 손찌검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끔찍했던 밤 이후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엘리엇을 포함해 주변의 안위를 물을 때를 제외하곤 손을 거의 들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정신을 반쯤 놓은 와중에도 엘리자벳은 오라비와 제 주변인들을 걱정했으므로 끊어질 듯 말 듯 잔인한 손찌검은 이어졌다.
게다가 손찌검을 대신해 다른 부류의 폭력이 세를 넓혔으므로 실상 엘리자벳의 고통은 더 커졌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얼룩진 몸에 시도 때도 없이 제 몸을 가져다 댔다.
그 행위는 엘리자벳에게 있어 고통 그 자체였다. 그녀는 제 위를 짐승처럼 올라탄 페루스를 의사와 상관없이 받아야 했다. 배려 없는 사내의 허리 짓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매 순간이 그랬지만 특히 교접할 때면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단 1초도 편히 있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엘리자벳이 힘에 부쳐 신음이나 울음을 멈추고 초점을 흐릴 때면 어김없이 모욕이 날아들었다.
‘허리 좀 더 들고 다리 제대로 감아. 발목 좀 부러졌다고 다리도 못 움직이나? 쯧.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서는.’
‘창부인 네가 나를 즐겁게 해야지, 내가 네게 봉사하는 처지인가?’
그녀가 울며 다시 신음을 뱉을 때가 되어야만 페루스는 만족스러운 낯을 했다. 그는 꼭 엘리자벳을 괴롭히고 싶어 안달 난 이처럼 보였다.
‘……형편없기는. 이래선 창부도 못 되겠군. 창부 노릇도 못 하면 도대체 널 어디 써먹지? 그 얼굴이나 몸뚱이가 아니면 네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냔 말이야.’
정사가 끝난 후에도 엘리자벳은 모욕에 시달려야 했다. 창부라는 단어를 항시 뱉던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완전히 제 성 노예처럼 부렸다.
‘……얌전히 기다려.’
엘리자벳은 정사 후 물건 취급 되는 노예들이 그러하듯 어떤 배려도 받지 못했다. 몸을 씻을 물도. 혹사당한 몸을 위한 제대로 된 식사도. 심지어 그녀는 몸을 가릴 옷도 한 벌 받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것은 페루스를 위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낮과 밤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게끔 커튼이 쳐진 컴컴한 방 안에서 엘리자벳은 한참이나 방치됐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러다 페루스가 올 시간이 되면 웬 여자들이 나타나 홀로 신음하는 엘리자벳을 욕실로 끌고 갔다. 남에게 만신창이가 된 몸을 보이기 수치스러웠던 엘리자벳은 혼자 씻길 원했다.
‘싫어! 혼자 할 수 있으니깐…….’
그러나 여자들은 엘리자벳의 사지를 잡은 채 강제로 명받은 것들을 해 나갔다. 여자들이 몸 안 정액을 거칠게 긁어 낼 때면 엘리자벳은 콱 죽고 싶었다.
‘……먹고 싶지 않아.’
끔찍했던 목욕이 끝난 후에야 엘리자벳에게 묽은 수프 한 그릇이 제공됐다. 수프는 매우 엉망이었다. 투박한 나무 그릇에 다 익지 않은 무언가의 비린내까지. 황궁이라는 특성을 고려해보 건데 일부러 만들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수준의 음식이었다.
‘싫…… 읍!’
어차피 음식 따위 먹고 싶지도 않았기에 엘리자벳은 수프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그녀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강제로 엘리자벳의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처음 엘리자벳은 수프를 게워 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들은 다시 수프를 가져왔으므로 세 번째 식사 이후 엘리자벳은 얌전히 수프를 먹었다.
그러길 몇 날 며칠이 되었을까. 그녀는 욕실과 방 사이를 지날 때 강한 장미 향을 맡았다.
‘궁에서 이렇게 강한 장미 향이 나는 곳은…….’
자신이 페루스에 의해 어디로 끌려온지 몰랐던 엘리자벳은 그 장미 향으로 인해 그제야 자신이 장미궁에 있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장미궁 안의 모든 시간이 엘리자벳에게는 수치와 모욕의 연속이었다. 페루스에게서 명받은 것이 분명한 낯선 이들은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엘리자벳은 말 한마디 없는 딱딱한 표정의 여자들이 저를 씻길 때. 수프를 가져다줄 때. 그녀들의 손에 담긴 노골적인 멸시와 경멸을 느낄 수 있었다.
‘……저기.’
‘…….’
‘혹, 혹시 황태자…… 아니 엘…… 엘리엇이 어떻게 됐는지…….’
‘…….’
‘폐하는…… 흑. 누구라도 좋으니깐 그날…… 그날 누, 누가 죽고 살았는지……. 아니야. 누가 살았는지만이라도…….’
‘…….’
그러나 페루스를 제외한다면 그들이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었기에…… 엘리자벳은 모든 것을 참고 그들에게 제 오라비의 가족의 지인들의 안부를 물었다.
‘알려 줘. 아니지……. 미안해요. 알, 알려 주세요. 네? 제발…….’
‘…….’
하지만 애절한 그녀의 물음에도 대꾸는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말해 줘! 엘리엇이! 내 친구들이! 무사한지 말해 달란 말이야!”
그러다 결국 어느 날 초조함으로 정신을 놓은 엘리자벳은 그들을 밀어 내며 소리를 질렀다. 남에게 화를 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엘리자벳이었지만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깐 말하란 말이야! 내 몸에 손대지 마! 대면……. 대면…….”
엘리자벳을 욕실로 끌고 가려던 여자들은 생각보다 엘리자벳이 완강하게 굴자 서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귀의 얼굴을 한 페루스가 들이닥쳤다.
“며칠이나 됐다고. 다시 교육이 필요한가?”
온 힘을 다해 패악을 부리던 엘리자벳은 페루스를 보는 순간 원치 않았음에도 굳고 말았다.
그에게 소리쳐야 하는데……. 그는 분명 알 텐데…….
“내가 묻잖아. 엘자.”
여자들을 내보낸 페루스는 멍이 시퍼렇게 든 엘리자벳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이제 엘리자벳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하듯 완전한 하대를 하고 있었다.
“말 안 하나? 응?”
엘리자벳은 발발 떠는 것 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페루스. 그를 보면 이제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끝없는 두려움. 엘리자벳은 뺨을 비롯해 온몸이 아파 옴을 느꼈다.
“아…… 아으…….”
결국, 이상한 소리를 흘리며 엘리자벳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페루스는 아무 말 없이 엘리자벳을 보다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악!”
페루스는 거침없는 손길로 엘리자벳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상체를 침대에 내리눌렀다. 엘리자벳의 몸을 감싸고 있던 얇은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익숙해질 수 없는 아픔에 놀란 엘리자벳이 바동거리며 침대 위 깔린 시트를 움켜쥐었다.
페루스는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엘리자벳의 하체를 붙잡더니 바지를 내렸다. 흉흉히 선 물건이 다리 사이로 비벼지자 공포를 느낀 엘리자벳이 본능적으로 거부를 표했다.
“하지……!”
짝, 소리와 함께 엘리자벳의 둔부에 벌건 손자국이 남았다.
“네가 낼 수 있는 소리는 두 가지뿐이라 했을 텐데. 창부처럼 앙앙대든가 울든가, 둘 중 하나만 해.”
“흐…… 흐윽…….”
“……울음도 듣기 싫군.”
페루스는 섧게 우는 엘리자벳의 머리를 옆으로 돌려 눕힌 후 세게 눌렀다. 녹색 눈에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대각선으로 흘렀다.
“그냥 창부처럼 굴어. 그게 네게 제일 잘 어울리니 말이야.”
크기를 키운 것이 단박에 안을 파고들었다. 하악. 엘리자벳이 숨을 들이쉬더니 뱉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녀와 반대로 페루스는 감겨 오는 쾌락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을 꽉 조여 오는 내부에 그는 엘리자벳이 타고난 창부라 생각했다.
끔찍이도 좋은 것이 짜증스러웠다. 벌써 다섯 번째 밤이 지났다. 본래라면 이때쯤 이 여자를 내쳐야 했을 텐데. 페루스는 계획대로 엘리자벳을 내버리고 싶었다. 이 몸을 범하려 기다리는 이들이 좀 많던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망할 것.’
페루스는 속으로 욕을 하며 엘리자벳에게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그러자 엘리자벳이 파드득 떨며 그를 자극했다.
“음탕해서는!”
자신의 욕망에 화가 난 페루스는 괜히 엘리자벳을 탓하며 벌주듯 거칠게 몸을 놀렸다. 더러운 창부 같은 게!
엘리자벳이 우는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페루스는 그것마저도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앙앙거리라고 했지만, 벌을 받는 주제에 감히 즐기는 것 같아 고까웠다.
“창부가 아니라 암캐라 불러야겠어. 나랑 구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나. 응?”
‘아니야. 나는 개 따위가 아니야.’
엘리자벳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페루스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는 그에게 아니라 말하지 못했다.
무서워. 엘리자벳은 아니라고 하면 페루스가 자신을 더욱 몰아붙일 것을. 심하면 손을 올릴 것을 짧은 경험으로 알았다.
“얼마 전까지 황녀였다고는…… 쯧. 하긴 애초에 이랬어야 했지.”
엘리자벳이 말을 않자 심사가 뒤틀린 페루스는 더욱 모욕적인 말을 쏟아 냈다. 그는 엘리자벳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다 싫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처량한 얼굴을 노려봤다. 엉킨 생각은 다 이 여자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네 탓이야. 모든 게 다 네 탓이야. 페루스는 짜증스러움을 이기려 엘리자벳에게 왈칵 역정을 쏟아 냈다.
어차피 이러려고 살려 둔 여자였다. 죽일까 하다 자신의 감정이나 받아 내라, 네 가문의 죗값이나 치르라 살려 둔 여자였다.
“……이게 딱 네 자리야. 엘자.”
어떻게 하든. 어떻게 대우하든 상관없는 여자였다. 페루스에게 엘리자벳은 쓰고 버릴 물건이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엘리자벳은 괴로워했다. 페루스는 눅진하게 들러붙는 여린 살을 마음껏 유린했다. 그래, 이게 네 할 일이니깐. 하얀 다리가 힘없이 달랑거렸다.
한참 만에야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놓았다. 그가 손을 떼자마자 엘리자벳은 허물어졌다.
“네 주제를 알아.”
“…….”
“내가 먼저 찾기 전까진 너는 죽은 듯이 있어야 해.”
“…….”
“대답해야지?”
페루스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며 엘리자벳에게 경고했다. 그와 다르게 엘리자벳은 하얀 나신이었다.
“……네. 흐윽…….”
엘리자벳은 답을 하지 않으려다 페루스가 주는 공포에 마지못해 뭉개진 대답을 했다. 울음 섞인 답에 페루스는 눈썹을 올렸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네 오라비의 목숨은 없는 셈 치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엘리엇의 생사를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바짝바짝 숨통을 조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등만 보인 채 쌕쌕 울음 섞인 숨만 내쉬는 그녀가 페루스는 어쩐지 언짢게 눈에 밟혔다.
페루스의 입에서 엘리엇의 이름이 나오자 엘리자벳이 몸을 돌렸다. 흐려진 눈 속 한 줄기 희망이 스쳤다.
페루스는 한참 만에 저와 눈을 마주쳐 오는 엘리자벳이 묘하게 흡족스러웠다. 그러나 수 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기분은 다시 곤두박질쳤다.
“엘, 엘리엇! 엘리엇이 살아 있어요? 엘리엇이 무사해요?”
엘리자벳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걱정과 애정이 묻어났다. 그녀는 나신을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은 채 페루스에게 매달렸다.
“만나게…… 엘리엇을 만나게 해 주세요. 뭐든 시켜도 할 테니깐 엘리엇만……. 제발 엘리엇만 보게 해 주세요. 공작님.”
공작님이라는 칭호에 페루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분명 페루스. 그가 시킨 일이었다. 그는 엘리자벳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고 실수로라도 엘리자벳이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고민 없는 손찌검을 했다.
짝―
페루스는 순간 참지 못하고 엘리자벳의 뺨을 후려쳤다. 짧은 비명과 함께 그에게 바짝 다가와 있던 그녀가 다시 나동그라졌다.
“……그건 네 가문이. 네 조모가 내게 씌운 굴레가 아닌가.”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목을 잡으려 다시 침대 위로 올랐다. 거친 그의 몸짓에 침대가 출렁였다.
“죽기 싫으면 함부로 내게 그런 호칭을 마. 당장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리고 싶으니.”
완전한 억지였다. 세상천지 그런 억설이 없었다. 이름도 부르지 마라. 작위로도 부르지 마라. 그럼 도대체 어찌 불러야 한단 말인가? 페루스 그 자신도 답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엘리자벳의 입가에 또 피가 흘렀다. 퍼런 멍들 위로 다시 붉은 자국이 맺혔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울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날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오라비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그저 잘못을 빌었다.
무어라 해도 소용없어. 그냥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 하면……. 지금은 그저 엘리엇만 생각하자. 살아 있는 것 같으니 엘리엇만…… 엘리엇만이라도…….
그러나 목소리의 떨림만은 감출 수 없었다.
“맞아요. 다 내, 내가 잘못한 거예요.”
엘리자벳은 꾹꾹 모든 감정을 누르며 창백한 손을 들어 페루스의 옷깃을 간절히 잡았다. 잔뜩 모인 어깨가 마른 몸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 그러니 엘리엇…… 페루…… 잘못……. 그게 아니라…… 흐윽. 엘리엇…….”
엘리엇. 엘리엇. 엘리엇. 페루스는 그 이름이 지긋지긋해졌다. 저는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는 주제에! 하! 그는 제게 매달려 오는 엘리자벳을 차갑게 내쳤다. 꽉 잡았다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엘리자벳은 사라진 감촉에 절망했다.
등을 돌린 페루스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엘리자벳은 무어라 웅얼거리다 방문 밖으로 사라지는 페루스를 보며 무너졌다.
‘……페루스.’
원망이 마음을 비집고 나오려 날뛰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을 최대한 눌러 담았던 것처럼 엘리자벳은 원망조차 꾸욱 눌러 담았다. 미련하고 딱한 형태였다.
‘……그건 네 가문이. 네 조모가 내게 씌운 굴레가 아닌가.’
차곡차곡 쌓여 온 죄책감이란.
‘너를 사랑해. 페루스.’
그보다 더 쌓아 왔던 감정이란 무서운 독이었다. 엘리자벳은 습관처럼 자신 스스로를 찔렀다. 죽 그어지며 내려온 눈물이 입가의 핏방울과 섞여 내렸다. 엘리자벳은 입가를 닦지도 않은 채 몸을 말았다.
곧 둥글게 말린 몸에서 끅끅 압축된 울음이 터져 나왔다.
* * *
진흙 가득한 신, 땀에 젖어 붙은 머리카락, 흐트러지다 못해 여기저기 찢어진 옷깃. 에셀은 누가 보더라도 엉망이었다. 대가문 라세르가의 일원이라고는, 황궁의 기사단장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가 뽑아 든 검이, 몸에서 나오는 기세가 워낙 흉흉했기 때문이었다. 에셀과 마주 선 기사들은 차마 그를 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뒀다.
“……단장님.”
결국, 뒤에서 기사들을 지시하던 이가 나섰다. 어두운 청록색 눈을 가진 침착해 보이는 인상의 기사였다. 에셀은 제 바로 밑 부단장으로 있던 그를 알아보고 턱에 힘을 줬다.
“맥켈…….”
맥켈 클레이. 그는 에셀과 가까운 이 중 하나였다. 조용한 성격에 검 솜씨는 평범했지만 비상한 머리와 침착한 성격을 지닌 그는 오직 제힘만으로 궁에서 자리를 차지한 몇 안 되는 이였다. 그는 자신과 대치한 에셀을 보며 착잡해 보이는 낯을 했다.
“돌아가십시오. 명이 떨어졌습니다.”
“누구의 명인가! 맥켈!”
“중앙 원로원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단장님은 중앙궁 출입이 금지되셨습니다.”
“클레이 경! 언제부터 황궁 기사단이 원로원 말을 따랐지?”
“…….”
에셀의 말에 맥켈의 얼굴에 살풋 금이 갔다. 에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중앙 원로원은 황궁 기사단이 따를 자들은 아니었다.
“당장 비켜! 감히 황족을 감금하다니! 경들이 하는 짓이 반역이라는 사실은 다들 아나?”
반역. 무서운 단어에 에셀을 막아선 기사들의 얼굴 전체가 굳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단장님.”
맥켈이 앞으로 한 발 더 나왔다. 그의 얼굴은 음울하기 짝이 없게 변해 있었다. 아까의 착잡함은 어느새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저희가 하는 일이 왜 반역입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임에도 억울함, 분노, 원망 등이 그대로 느껴졌다. 에셀은 맥켈의 황당한 반문에 무어라 하려 했다. 그러나 맥켈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저는…… 아니 저희는 지금 하는 일이 반역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이 왜 반역입니까?”
오래도록 묵혀 놓았던 감정이 뚝뚝 흘러 에셀의 앞까지 왔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먼저 시작한 쪽이 어디입니까? 먼저 시작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에셀은 그제야 맥켈이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아버지는 그날 돌아가셨습니다. 영지를 가지고는 있었으나 준작위를 가졌던 분이라 본디 그 자리에 있을 필요도, 초대도 받지 못했던 분인데……. 대관식을 꼭 한 번 보겠다 그 안으로 들어가셨더랬죠. 어머니께 듣기로는 돈도 제법 들이셨다더군요.’
‘…….’
‘욕심을 부리신 거지요. 사실 그분은 누가 황제가 되더라도 상관없어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남부 출신이었지만 딱히 르온가에 충성하지도 않으셨고요. 기사셨지만…… 확실히 기사의 귀감은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분은…… 아버지는 오직 자신의 명예와 성공만을 바라셨습니다.’
‘……지금의 황가를 원망하나?’
‘그때 여러 가문이 죽어 나가 제가 이 자리에 섰으니 저는 수혜자지요. 사실 제 출신에 부단장이라니……. 아니 어찌 보면 황궁 기사도 가당찮지요. 변변찮은 작위도 없는데.’
‘…….’
‘궁으로 일찍 들어와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힘이 없어도 황궁 기사가 되자 친척들이 순순히 영지에서 손을 떼더군요.’
‘…….’
‘……아버지 일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오래 제 곁에 계셨으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펴 줬으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맥켈은 몇 년 전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다른 이들처럼 분노하거나 원망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씁쓸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에셀이 맥켈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 심지어 에셀이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북부 기사들조차도 그 일에 관해서는 에셀을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왜 복수할 생각을 안 하나, 왜 오로르를 그리 따르나. 그런 말들은 에셀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들이었다.
물론 에셀은 그들의 의문과 분노를 이해했다. 아버지를,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 그도 끓어오를 때가 있었다. 당시 북부 기사들과 제 가문을 생각하면 그도 분노했고 복수를 꿈꿨으니 말이다.
‘에셀…….’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오로르에 반기를 들려 할 때면 엘리자벳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엘리자벳은 죄가 없어. 그녀는 단지…….’
에셀이 봐 온 엘리자벳은 항상 충분히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죄를 지은 듯 처지는 눈초리, 눈물, 떠는 말투, 미안하다 항상 웅얼거리는 목소리. 괴로웠지만 에셀은 그런 엘리자벳만은 원망하고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에셀은 그녀를 동정했다.
그녀는 그 일을…… 몰랐을 테니깐. 오로르라는 이름 외 그 일과 관련 없는 이니깐.
‘왜 복수를 꿈꾸지 않으십니까! 저는 에셀 님을 존경하지만…… 마들렌 님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주변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차마 오로르에 검을 들이밀지 못했다.
‘에셀! 나는 엘리엇과 혼인할 거야. 도와줘!’
게다가 그에게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로르의 핏줄에 빠져 버린 지켜야 할 여동생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에셀은 당시 맥켈에게 기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분명 화가 나겠지. 분노하지 않을 리 없다. 티 내진 않지만 맥켈 그도 나처럼 오로르를 원망하고 있겠지.
그러나 오롯이 미워하기엔 걸리는 것이 우리 둘 다 있지 않나. 나는 누군가를 미워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그는 오로르에게 가족을 잃었으나 동시에 가족을 지키고 혜택을 받았으니.
‘저보다는……. 단장님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나는…….’
우리는 비슷하지 않나.
“단장님. 저희 모두는 단장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단장님과 뜻을 같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는 비슷하지 않았다. 에셀은 맥켈을 보며 그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에셀은 맥켈의 양옆 자신을 막아선 기사들을 보았다. 개중에는 북부 출신의, 어릴 적부터 봐 왔던 이들도 있었다.
‘……이상하게 토벌에 가지 않는다더니. 이 때문이었나.’
반역에 참여한 이들 중 북부 기사가 다수 있다는 믿기 싫었던 말을 에셀은 믿을 수밖에 없게 됐다.
‘에셀 라세르. 너에게는 북부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 너는 북부의 심정을 대변하지 못해. 말로는 한다 하지만 네 눈은 항상 우리의 뜻을 비켜나 있지. 네놈은 위선자야.’
반역 소식에 황궁으로 급히 말을 돌리기 전 마들렌은 그에게 그리 말했다. 분명 누이도 관련이 있겠지.
위선자.
에셀은 그 말에 동의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
자신은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오로르를 완전히 섬기지도, 그렇다고 오로르에 검을 들이밀지도 못하는 정체성 결여의 회색분자.
“돌아가십시오. 단장님과 이렇게 검을 부딪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에셀은 맥켈이 부러웠다. 그는 그래도 결국 선택하지 않았나. 자신처럼 멍청하게, 이리 우둔하게 어디로도 못 가고 갈팡질팡하는 것을 끝낸 것이 아닌가.
에셀은 결국 먼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맥켈을 찬찬히 살폈다. 에셀이 저를 그리 보자 맥켈의 눈에 조금은 당황한 빛이 스쳤다.
“……하나만, 아니 두 가지만 묻지.”
“말씀하십시오.”
“황녀 전하는 어디 있나? 그분은 무사한가? 그리고 내 동생은…… 벨은 무사한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 중앙궁에 있다 들었는데.”
맥켈은 조금 질린다는 낯을 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라세르 영애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만나게 해 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보증합니다. 그리고 황녀는…….”
“황녀께선?”
벨의 이야기와 달리 맥켈은 조금 주저했다. 그러나 에셀이 재촉하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극비 사항이라 저도 잘 모릅니다만, 장미궁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셔도 만나기는 힘드실 겁니다. 그곳에는…….”
“누가 있나?”
“남부 기사들만 주둔하고 있습니다. 황궁 기사단 출신은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황궁 안에서 황궁 기사단이 한낱 사병에게 밀렸군.”
에셀답지 않게 비꼬는 말이 나왔다. 맥켈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조금 붉혔으나 흥분하거나 에셀에게 덤비지는 않았다. 부끄러웠으나 사실이었다. 궁 안에 황궁 기사단 외 다른 기사단의 출입은 황궁 기사단에게 큰 불명예였다. 맥켈 옆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도 부끄러움이 어렸다.
“…….”
에셀은 순간 눈을 질끈 감는 맥켈을 보았으므로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질책은 그만해야 했다.
에셀은 아무 말 없이 세워 놓은 말에게 다가갔다. 쉬었음에도 말은 거의 졸도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잘 훈련된 탓인지 말은 주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랴!”
에셀이 말의 옆구리를 찼다. 긴 울음소리를 내며 말이 뿌연 연기를 날렸다.
“……하아.”
남아 있던 이들 중 누군가 숨을 뱉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이들도 연이어 긴장 풀린 씁쓸한 숨을 내뱉었다.
모두 착잡한 얼굴이었다.
* * *
“다시없을 충신이로군.”
페루스는 유리창 너머 꼿꼿이 선 검은 머리 사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한참이 지났건만 사내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아주 눈물겨워.”
무심한 듯 보였지만 페루스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뜨거운 볕 아래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기사의 표본이라 불리는 저 사내, 에셀 라세르가 싫었다.
매우.
까마귀의 털처럼 빛나는 정수리를 보다 페루스는 제 앞 흰 피부를 천천히 쓸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등의 주인이 그의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좋겠어. 엘자.”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거침없이 움직이더니 이내 부드러운 젖가슴을 세게 쥐었다.
“흑!”
“저리 너를 생각하는 기사도 있고.”
“제발……. 차라리 안에서…… 안에서 하면…… 흐윽.”
엘리자벳은 어름어름 겨우 말을 이어 가다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그보다는 아까부터 눈앞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애원에도 좀처럼 손길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슴을 주무르던 손에 힘을 더 줬다.
“왜? 부끄럽나? 하긴 몇 없는 충신인데 이런 꼴을 보이면…….”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강하게 쳐올렸다. 아으으. 겨우 소리를 죽이고 있던 엘리자벳은 순간 올라오는 자극에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도망칠 테지.”
“흐…… 흑으읍.”
“저가 모시던 게 황녀가 아니라 창부인 걸 알게 될 테니 말이야. 안 그래? 황녀님.”
창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틀린 말이 아니야. 엘리자벳은 밑에 있는 에셀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자신이 봐도 이 꼴은, 알몸으로 창가에서 신음을 지르는 모습은 황녀와 거리가 멀었다.
‘그의 말대로 창부에 가까워.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자 입을 막은 손으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페루스는 내키는 대로 그녀의 뒤에서 허리 짓을 할 뿐이었다. 까치발을 든 작은 발이 한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창을 열어 줘? 듣자 하니 오라비 말고 친우도 찾았다던데. 라세르 경도 네가 친애해 마지않던 친우 아니던가? 지금 당장 눈물겨운 재회를 해 보지 그래.”
페루스는 그리 말하며 닫힌 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엘리자벳은 눈물 젖은 얼굴을 하얗게 바꾸곤 페루스의 팔을 잡았다. 절박한 매달림이었다.
“안 돼요!”
“…….”
“그것만은 안 돼. 싫어요!”
장미궁에서 지낸 시간 동안 엘리자벳은 이렇듯 단호하게 제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페루스는 그녀가 제게 반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모진 폭력과 모욕이 따르더라도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페루스를 막아야 한다고 엘리자벳은 생각했다.
“제발요……. 하지 마세요.”
매달린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엘리자벳은 곧 쓰러질 얼굴을 하면서도 에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녹색 눈이 불안감을 안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올려다보면 안 돼. 그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분명 수치심에 죽으리라.
“왜 말이 바뀌지. 언제는 보겠다 그 난리를 피우더니. 아직도 네가 변덕 부릴 위치에 있는 줄 아나? 우습군.”
엘리자벳의 떨림이 전해지자 페루스는 오히려 느긋해졌다. 그는 달달 떨고 있을 엘리자벳의 눈을 구경할까 고민하다 긴장으로 조여 오는 내벽에 집중하기로 했다.
“싫, 싫어요. 이런 건…… 싫어.”
에셀이 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말을 어긴 채 말을 낮추고 있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타박하지 않았다.
“싫다면서 오물오물 더 물어 오는군.”
그는 지금 당장 엘리자벳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것이, 보든 말든 에셀의 앞에서 엘리자벳을 능욕하는 것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작은 실수쯤이야. 기분이 한껏 올라간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벌하지 않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가 제 것을 위쪽으로 우겨 넣을 때마다 엘리자벳의 머리가 창에 톡톡 부딪쳤다. 엘리자벳은 그 작은 소리가, 흔들림이 에셀에게 닿을까 겁에 질려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흑……. 싫어. 흐읍……. 에셀이 보면…… 악!”
엘리자벳이 에셀의 이름을 부르자 페루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물고 있던 미소를 내려놓고 흐트러진 엘리자벳의 뒷모습을 흉흉히 노려보더니 더 거칠게 움직였다.
“교육을 좀 받아야겠어. 창부들은 봉사할 때 손님을 나긋나긋하게 부르지. 그래야 동전 한 닢이라도 더 받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엘자. 내게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받는 너도 나를 불러야 해. 저놈이 아니라.”
페루스는 이 흰 등을, 여린 살을 터질 때까지 채찍질할까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차오른 말을 뱉었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의외였던지라 곧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창밖을 보며 에셀이라는 단어를 몇 번 더 웅얼거리자 페루스는 재차 제 이름을 재촉하며 그녀의 고개를 옆으로 세게 꺾었다.
그는 엘리자벳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저 말고 다른 이를 부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짜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에셀. 에셀. 에셀. 그러고 보면 시답잖은 연인 연기를 할 때도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내 이름이나 외. 아니면 정말 저놈이 보고 싶어 그리 부르나. 그래서 그런 건가?”
“흐윽……. 아니요. 아니에요. 페, 페루스 그게 아니라…… 나는 그냥…….”
이성이 날아간 페루스의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잡힌 턱이 아팠다. 하지만 페루스의 저 목소리가 주는 두려움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페루스는 성질대로 엘리자벳의 안을 헤집었다. 페루스와의 이 행위는 아무리 해도 그녀에게 괴로웠다. 그러나 원치 않는 쾌락에 비하면 차라리 아파 괴로운 것이 나았다. 엘리자벳은 곁눈질로 에셀을 살피면서도 강한 아픔과 쾌락에 끊임없이 울었다. 끔찍스러웠다.
“흐응……. 잘못했…… 흐윽. 잘못했어요. 페루스.”
“이 꼴을 구경시키고 싶은 게 아니면 알아서 해.”
페루스는 올라오는 쾌감에 평소보다 수다스럽게 굴었다.
이런 짓은 질 낮은 인간들이나 하는 줄 알았건만. 그는 엘리자벳을 좀 더 세게 밀어붙이며 허벅지에 힘을 줬다. 부드러운 여체가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창에서 조금 전보다 큰 소리가 났다. 쿵쿵. 낌새를 느낀 건지 조각상 같던 에셀이 조금 움직였다. 엘리자벳은 그 모습에 숨을 들이쉬며 몸을 굳혔다.
안 돼. 안 돼. 에셀.
“왜? 저놈이 볼 것 같으니 좋은가 보지? 아주 잘도 감겨. 이리 천하게 굴어서야…….”
긴장으로 바짝 수축되는 내벽에 페루스가 비아냥거리며 에셀 쪽을 응시했다. 페루스는 에셀이 엘리자벳과 자신이 붙어먹는 걸 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홀딱 벗겨 놓은 꼴을 보는 건 못마땅했지만 제게 안겨 우는 꼴은 보이고 싶었다.
‘보더라도 주먹이나 쥘 테지.’
제 누이를 핑계로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페루스는 에셀이 엘리자벳을 보겠다 시위하는 것이 우스웠다.
‘선택하는 법이 없지. 이 여자도 포기 못 하고 착한 오라비 노릇도 포기 못 하고. 욕심이 없기는 무슨. 저놈이야말로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놈인데.’
사람들은 물론이요 페루스의 측근조차 에셀은 욕심 없는 이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페루스의 눈에는 에셀만큼 욕심 많은 이가 없었다.
“저놈이 왜 가만있는 줄 아나? 엘자.”
페루스는 엘리자벳과 에셀의 관계가 탐탁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벳이 에셀을 친우라 부르며 걱정하는 꼴이 그렇게 고까울 수 없었다. 물론 에셀이 엘리자벳을 걱정하는 꼴도 마찬가지였다.
“……너를 구하면 벨 라세르, 그의 누이를 죽이겠다 했거든. 그래도 핏줄이라고 저리 가만히 서 있네.”
네가 고통받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오랜만에 다정히 속삭였다. 저건 곧 너를 버릴 거야. 그래도 핏줄이 중하거든. 몇 년 본 너보다는 제 누이와 더 가깝거든. 네가 네 오라비를 찾는 것처럼 말이야.
“아……. 벨. 안 돼. 벨은 안 돼요. 페루스. 내가 잘못한 건데 왜……. 왜…….”
그러나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예상과는 다른 말을 했다. 페루스는 그녀가 제 뜻대로 에셀에 대한 원망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벨을 걱정하자 얼굴을 굳혔다.
넌 정말……. 이 여자에겐 모든 이들이 소중했다. 그 여자가 너를 배신한 것을 알아도 이럴까?
“……벨은 아무런 잘못도…… 흑, 하지 않았어요. 알잖아요. 벨은 당신처럼 그때의 피해자인걸요. 나, 나는……. 내 가문은 잘못했을지 모르지만 라세르가는 르온가처럼…….”
“입 다물어.”
“당신 가문처럼 같은…… 윽!”
페루스의 손이 순식간에 엘리자벳의 목을 감았다. 엘리자벳은 막힌 숨에 말을 멈췄다.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더니 꼭 한 번에 못 알아먹지.”
“하아…… 읍…….”
“잘못을 그리 잘 알면 가만히 있어야지.”
버둥대는 엘리자벳을 쉽게 누르며 페루스는 증오 어린 눈을 했다. 엘리자벳이 제 가문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분노가 끓어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 네 탓이야! 네 탓이지!
“사실 너. 네게 잘못이 없다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 이리 덤비는 거지? 응?”
“커흑.”
“……넌 그날 일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어, 엘자. 큭…….”
머리는 분노로 식어 갔지만, 몸은 솔직했다. 페루스는 온몸을 강타하는 쾌감에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곧 그의 몸에서 이제는 익숙한 것이 엘리자벳에게로 쏟아졌다.
페루스는 사정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엘리자벳을 떼어 냈다. 목이 졸린 엘리자벳은 졸도하기 직전 겨우 벗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하으…… 흑…….”
힘이 풀린 몸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페루스는 쓰러지듯 앉은 엘리자벳의 가랑이 사이 빠져나오는 희뿌연 액체를 보곤 얼굴을 굳혔다.
‘또…….’
원래라면 그는 엘리자벳을 범할지언정 그녀에게 사정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뭐 좋다고 저 여자에게 씨를 뿌리겠는가.
그러나 그는 엘리자벳을 범한 첫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안이 아닌 밖에 사정한 적이 없었다. 몰려오는 회의감에 페루스는 입술을 물었다.
‘만약 이러다 아이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몸에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언젠가는 아이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순간 묘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엘리자벳의 얼굴을 가진, 그러나 제 얼굴도 있는 아이.
페루스의 낯빛이 변했다. 창백한 얼굴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엘리자벳 못지않았다. 페루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엘리자벳은 갑자기 뒷걸음질 치는 페루스를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눈물 가득한 녹안이 저를 쳐다보자 페루스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다.
* * *
에셀은 도망치고 있었다. 달리지는 않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짐승 같은 놈! 죽여 버려야!’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도 전장에 있었던 기사였다. 작은 소리, 기척, 심지어 나무 흔들리는 그림자에도 몸을 곤두세우는 기사.
덜컹거리는 창과 선명한 인영. 거리가 조금 있다고 하나 못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보지 말란 입 모양도 그리 잘 보일 수가 없었다.
물린 입술 새로 비린 맛이 났다. 자신이 봤다는 것을 엘리자벳이 눈치를 챌까 모른 척했지만…… 아니 사실 그건 변명이었다.
손에 닿는 검이 차가웠다. 이걸 뽑아 그놈을 베어 넘겼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하지 않은 행동이 후회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경의 누이께서도 경 못지않게 용맹하시더군요.’
‘벨! 그 아이를! 어디 있나!’
‘워워. 걱정 마십시오. 공작 각하께서는 이번 일에 도움을 준 라세르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보내신 것도…….’
‘닥치고 벨 그 아이에게 당장 안내해! 아니면 당장 네놈의 목을 치겠다.’
‘……다시 말씀드려야겠군요. 경. 걱정 마십시오. 라세르 영애는 혼란 속에서도 황태자 전하의 곁을 지키는 공이 높으신바, 공작님께서 특별히 명한 호위 둘과 안전하게 계십니다.’
그러나 검에 손을 가져갈 때마다 에셀은 벨이 생각나 차마 검을 뽑을 수 없었다. 그가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분명 벨이 위험해지리라. 에셀은 페루스가 특별히 붙인 호위가 순식간에 벨을 죽일 암살자로 돌변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온갖 힘든 일에 엮인 그의 누이 벨. 자존심이 강하니 분명 태연한 척하고 있겠지만, 에셀은 엘리엇의 곁에서 불안해하며 내심 저를 찾을 벨을 떠올렸다. 강한 척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검을 휘두를 줄 안다고 하나 사람에게는 제대로 써 본 적도 없질 않나.
에셀은 벨이 살육을 목격하고도 짝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됐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 왔다. 자신이 지켜 줬어야 했는데. 엘리엇과 다툰 후 북부로 간 것이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 아니 엘리엇. 분명 말했지. 네가 원치 않으면 벨을 데리고 북부로 가겠다고. 괜찮다 한 건 네가 아니었나!’
‘……그녀는 괜찮아. 오히려 그녀 때문에 내가 안 괜찮지. 동생을 위하는 건 좋지만 에셀…….’
‘그만. 그만 말하게. 듣고 싶지 않아. 한 번도 네게 이런 적 없지만 이번에는 친우로서 경고하지. 계속 이런다면 나는, 아니 내 가문은 네게 호의를 베풀 수 없어.’
‘……하! 에셀 라세르. 너는 벨 라세르의 핏줄이기 이전에 나와 내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다. 잊었나? 감히 충성을 협박하는 데 이용하다니, 미쳤군.’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잠시 북부로 가 있겠네. 돌아왔을 땐 이런 싸움이 없었으면 하네.’
기분이 상한 척 떠나는 시늉을 하면 벨을 박대하던 태도가 조금 나아질 것 같아 그랬다. 벨 그 아이가 시작한 것이지만 엘리엇, 그도 분명 좋다 허락한 관계가 아니던가. 그러나 얕은수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벨에게나, 엘리엇에게나. 또 그녀에게나…….
‘도대체 나란 놈은…….’
성큼성큼 걷던 에셀은 결국 제자리에서 바닥을 찼다. 누이도, 주군도, 여자도 다 지켜 주겠다, 이 검에 맹세한 이들인데. 그는 자신이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에셀은 고개를 숙여 찌릿거리는 발끝을 쳐다봤다. 힘껏 땅을 찬 탓인지 마른 흙먼지로 신은 뿌옇게 변해 있었다.
에셀은 신을 멍하니 보다 그 옆에 있는 하얀 꽃을 발견했다. 이름은 모르나 작고 여린 하얀 꽃이었다.
‘에셀…….’
흰색을 보자 여자가 떠올랐다. 엘리자벳. 엘자. 에셀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꽃을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꽃은 약했다. 손가락만 잘못 스쳐도 흩어질 만큼 가녀렸다.
‘이대로는 안 돼.’
에셀은 양손을 사용해 흰 꽃을 조심히 감쌌다. 이래서는 안 됐다. 고민은 충분했다. 지금은 뭐가 됐든 행동해야 했다. 시간을 끌어 봤자 계속 아무도 지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뒤를 봤다. 멀리 있는 궁에서는 장미 향이 흘러나왔다.
‘너는 분명 지금도.’
에셀은 얼굴을 굳혔다. 벨도, 엘리엇도, 엘자도 모두 자신이 구해야 할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리 손만 놓고 있다니.
상황은 전쟁과 같았다. 그리고 에셀은 전쟁에서 고민을 길게 하는 법이 없었다. 기사는 빠르게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체 없이 움직여야 할 때였다.
* * *
“재미있게 돌아가네. 그래서 주인 잃은 개새끼가 어디로 갔대?”
“에셀 라세르는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상입니다만, 아마 고민하고 있을 기사들에게로…….”
“흐응. 그렇겠지. 알았어. 나가.”
타티카는 조심스럽게 나가는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의자에 앉아 펜을 굴렸다. 아무렇게나 굴리는 펜은 일을 치르기 전 페루스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다. 동맹의 상징 정도일까. 온통 까만 것이 꼭 페루스의 속내 같다 생각하며 타티카는 비실 웃었다.
“그래도 역시 이편에 붙길 잘했단 말이야.”
상황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재수 없던 황태자 놈은 제가 만든 독으로 산송장 꼴이고, 이 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황제는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갔다. 그리고 잘났다 소리치던 놈들은 자신의 눈치를 본다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중이었다.
“팔아먹을 상품도 많이 나오고. 귀한 핏줄들은 팔아먹을 때 값이 비싸서 좋단 말이야. 하긴, 좋은 것만 처먹고 살았을 테니 비싸야지.”
타티카는 거들먹거리던 귀족들을 자신이 뒤를 봐주는 곳에 팔아먹을 생각을 하며 키들키들 웃었다. 지금도 바쁜데 더 바빠지겠어.
“돈도 잔뜩 번 참에 농사나 좀 더 지어 볼까.”
몰락한 동부 귀족 중에는 제법 비싸게 팔릴 만한 여자들이 많았다. 하얗고 야리야리한 동부 여자들은 어디서나 인기가 많았으니깐.
타티카는 그들을 양분 삼아 제 영지의 ‘농장’ 규모를 키울 생각을 했다. 수확 철이 되면 농장의 작물들은 분명 그에게 수십 배의 부와 지금보다 더한 힘을 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신이 나 책상 위 리스트를 죽 살폈다.
인기 좋겠네. 백작가, 후작가, 남작가……. 곧 밑바닥으로 추락할 이들의 이름을 보다 타티카는 한 여자를 떠올렸다.
‘인기 많은 상품 하면 아무래도…….’
얇은 몸 선. 새하얀 피부. 온통 흰 여자. 겁에 질려 저를 보던 녹안이 그려졌다.
“……인기 하면 우리 황녀님이지. 여기저기 못 가져서 안달하잖아?”
달아오른 몸에 타티카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엘리자벳 황녀는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일이 없었다. 사라지긴커녕 일이 이렇게 되고 나자 타티카는 그녀에게 욕심이 슬슬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몰랐어도 오로르가 이 지경이면 제게 떨어질 만도 하지 않나.
‘소문대로 엘리자벳 황녀는 르온 공작에게…….’
듣자 하니 우리 황녀님. 연인의 탈을 썼던 늑대에게 홀랑 먹히고 있다지. 은밀히 알아본 일을 생각하며 타티카의 손이 책상 아래로 사라졌다. 장미궁에서는 매일같이 황녀의 울음과 신음이 들린다 했다. 곧 쩔그럭거리며 버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나눠 먹자, 하아…… 부탁까지 했는데. 페루스 그놈도 참 치사해. 동맹이라 입으로만 나불대고 말이야. 흥! 나한테도 좀 맛 보여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공작이 넘볼 만한 것에 황녀가 있었던가. 그건 아니지. 우리 사이 거래는 끝났다 생각했는데.’
무심한 척 굴면서도 뺏길까 그르렁거리던 모습이 생각나 흥분이 더해졌다. 얼마나 괜찮은 몸이면 매일같이 범하면서 그리 굴까. 그것도 원수라 할 수 있는 여자를. 타티카는 페루스가 어떻게 굴든 엘리자벳을 꼭 한 번은 안아 봐야겠다 결심했다.
“뭐. 괜찮으면 빼앗아 와야지.”
자고로 뭐든 빼앗아 가지는 것이 최고 아니던가. 타티카는 손을 좀 더 빠르게 움직이며 신음을 뱉었다. 눈앞에 온갖 모습으로 능욕당해 울고 있을 엘리자벳이 떠올랐다.
흰 피부는 온통 붉어졌을 것이고 얼굴은 눈물로 엉망일 테지. 약한 눈가는 짓물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은……. 여린 몸은 사내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짓눌려 있을 것이 생생했다. 울음과 함께 신음을 흘리면서.
“흐응…… 내가…….”
내가 그 꼴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다른 놈이 아닌 이 내가 가장 먼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엘라르 황제와 엘리엇 황태자를 똑 닮은 얼굴이라 더 구미가 당기는 여자였다. 그들과 닮았으면서 약해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페루스 그놈을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것이 가장 마음에 찼다. 제 세상을 바친 것이 다 보이는 순수한 황녀님이었지. 황녀님은. 타티카는 눈앞에 그려지는 광경에서 페루스를 치우고 엘리자벳이 보는 대상을 저로 바꿔 봤다. 그러자 입가에 자연스럽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믿었던 연인에게 찔려 절망하고 있을 가엾은 황녀님. 어떻게 절망하고 있을까? 어떻게 울부짖고 있을까? 어떤 꼴이어도 아름답겠지. 그런 게 다른 놈 손에 있을 생각을 하니 타티카는 배가 아팠다.
“내 것이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황녀에게 혼인도 자신이 제일 먼저 청하지 않았던가.
‘나한테 오면 침대 위를 제외하곤 잘해 줄 텐데 말이야.’
타티카는 제 품에 있을 엘리자벳을 상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하니 아니었다. 그런 여자면 침대 밖에서도 울리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집무를 볼 때는 책상 밑에 두고 제 것을 빨게 하고, 밥을 먹을 때는 앉은 채로 울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가까이서 예쁜 목소리로 지저귀면 식사 시간이 즐거워지겠지. 잘 울면 제 것을 떠먹여 주며 귀여워해 줄 생각이었다. 여러 선물도 안겨 주고.
엘리자벳의 몸에 여러 액세서리를 달아 줄 생각을 하자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의 손은 흘러나온 액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그건 내 거야. 황녀님은 내가 가져야 해. 까닭 모를 집착이 물씬 올라왔다.
‘……어디를 파고들어야.’
가만 생각해 보면 황녀를 가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뭐든 가지려면 혼란스러울 때가 좋았다. 타티카는 쾌락으로 눅진하게 녹아 가는 머리를 차분히 굴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눈앞에는 제게 안겨 울고 있을 황녀가 계속 떠올랐다. 뭔가 생각하려 해도 엎어져 절망하고 있을 그녀가 생각나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젠장! 결국 참지 못한 타티카는 짜증스럽게 엘리자벳을 대신할 여자를 찾았다.
* * *
페루스는 창가에서 엘리자벳을 범한 이후 한동안 그녀를 찾지 않았다. 엘리자벳으로서는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편한 날이었다. 괴롭히는 이가 없자 몸의 멍은 조금씩 옅어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얼마간의 고요가 지금의 상황을 불러왔더라면 차라리 괴로운 걸 택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싫어! 페루스. 싫어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러지 마요. 제발!”
언젠가 한 번씩은 본 적 있는 젊은 사내 여럿에게 둘러싸인 채 엘리자벳은 필사적으로 페루스를 불렀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충격과 공포였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없었다. 엘리자벳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정신을 겨우 붙잡고 페루스를 봤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여전히 그녀와는 다르게 깔끔히 옷을 챙겨 입고, 정돈된 채로.
“차라리…… 페루스. 흐윽. 차라리 지금 당장 페, 페루스 당신이 나를……. 이러지 말아요. 나는 페루스한테만…….”
엘리자벳은 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못 한 채 어떻게든 페루스가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 그에게 먼저 범해 달라 청하는 그녀는 비참했다.
하지만 비굴해도 상관없었다. 하얀 손이 바닥을 짚고 기기 위해 움직였다. 마찰에 여린 손가락 살들이 벗겨지며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제발…….”
그러나 그녀의 앞은. 뒤는. 옆은. 모든 출구는 사내들로 인해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지시한 것이 분명한 페루스는 평소와 같은 차가운 얼굴로 엘리자벳을 외면한 채 남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것만 지켜.”
페루스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남자들은 고저 없는 목소리에 눌린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흘러나왔다. 수그러진 고개 밑으로 여러 개의 눈이 엘리자벳의 몸을 훑었다.
“페, 페루스. 페루스! 싫어! 싫어! 싫어!”
끔찍스러운 일을 짐작한 엘리자벳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는 제대로 서질 못했다.
“그것만 지킨다면 그 외에는…….”
몇 번 휘청거리다 엘리자벳은 다시 주저앉았다. 충격에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다. 엘리자벳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페루스를 보며 계속 비명만 질렀다.
“안 돼! 페루스! 싫어!”
그쯤이면 한 번 돌아볼 만도 했지만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못 본 것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잔인한 선고가 떨어졌다.
“……어떻게 해도 좋아. 이참에 확실히 자네 가문들의 분을 보여 주는 게 좋겠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루스는 몸을 돌렸다. 곧바로 문이 닫히며 엘리자벳의 비명이 방 안으로 갇혔다.
“페루스! 나만 두고 가지 마! 가지 마! 페루스!”
엘리자벳은 끝까지 페루스를 찾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점멸돼 가는 시야에는 그녀에게로 뻗치는 다른 이들의 손만 남을 뿐, 페루스의 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 * *
너를 버릴 수 있다. 너 따위 더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이다. 네가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야.
오히려 네가 고통스러울수록 나는…….
“만족스럽겠지.”
페루스는 닫힌 문 너머로 속삭였다. 잡아 달라. 저를 두고 가지 마라. 조금 전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의 의미는 명백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손을 외면했다. 일부러 내던졌다.
이것으로 된 것이다. 페루스는 망가져 버릴 엘리자벳을 그렸다. 저대로 사내들에게 능욕당한다면 저 여자의 약한 몸은, 정신은 버텨 내지 못할 게 뻔했다.
죽음을 택하거나 죽지 않더라도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아가지 못하겠지.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네 끝인데, 엘자. 네게 남은 한 가지 길인데.
페루스는 천천히 발을 떼며 묘한 감상에 잠겼다. 하고자 하니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이리 쉬운 것을 그동안 왜 못 했던가. 스스로가 한심해 그는 자조했다.
죽은 조부는 저주가 따르니 여자를 버리지 못할 것이라 했다. 여자를 아프게 해선 안 된다 했다.
“……보십시오. 제가 못 할 리 없잖습니까.”
페루스는 괜히 조부에게 답하듯 말했다. 하지만 듣는 이는 그뿐.
“당신이 틀리셨습니다. 틀리셨어요.”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페루스는 그것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짐을 벗어 던졌는데 왜 또다시 천근만근 짐을 지는 것 같나.
‘페루스. 나는…….’
그는 항상 엘리자벳이 신경 쓰였다. 직접 보든 안 보든 그의 일생 어느 부분도 여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저건 원수의 핏줄일 뿐인데. 멍청하고 우매한, 할 줄 아는 거라곤 우는 것뿐인 머저리일 뿐인데. 그럴 뿐인데…….
나는 왜 네게 신경 쓸 수밖에 없나. 왜 너를 계속 보게 되나.
페루스는 저를 휘두르는 엘리자벳이 세상 무엇보다 원망스러웠다. 지독히도 미웠다. 장담컨대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조부를 죽이고 가문을 무너뜨린 엘라르보다 훨씬 더 증오한다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조모도 너만큼 증오스럽지는 않아. 엘자.
“이걸로.”
그러나 페루스는 더 이상 엘리자벳을 증오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오늘 저 방에서 완벽히 엘리자벳을 끊어 냈다. 방을 나서며 모든 것을 정리했다.
오늘이 지나고, 이 시간이 지나면 여자는 제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져 있을 터였다.
지긋지긋한 엘리자벳, 지독한 엘자. 나는 너를 버릴 수 있어. 너를 남에게 넘겨줄 수 있어.
“이걸로 끝이야. 엘리자벳 오로르.”
페루스는 일부러 끝을 입 밖에 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잠긴 목소리는 여전했다. 제 목소리를 들은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괜찮다고 말도 할 수 있질 않나. 나를 갉아먹는 벌레를 드디어 내던지지 않았나.
페루스는 걸음을 멈췄다. 꽤 걸어왔다 생각했는데 복도의 반도 오지 못했다. 부들부들 움켜쥔 손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페루스는 꼭 한겨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소름을 맛봤다.
‘가지 마! 페루스!’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지독한 한기가 찾아왔다. 페루스는 끝까지 저를 붙드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저주는 괜히 저주가 아니었다. 이렇게 끈질기다니. 꽉 깨문 이가 달달 떨렸다.
“아…….”
식은땀, 한기, 소름. 페루스는 자신이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질 않나. 그는 억지로 발을 뗐다. 그러나 순간 가슴이 아파 와 그는 침음을 뱉으며 멈추고 말았다.
‘보고 싶어. 페루스.’
페루스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빙빙 도는 시야로 하얀 얼굴이 들어왔다. 방금 자신이 버리고 온 이의 얼굴이었다. 저를 보는 녹색 눈은 공포와 원망에 질린 조금 전과 다르게 다정하고, 다정하고, 또 다정하고 사랑스러웠다. 흰 얼굴은 눈앞에서 그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페루스. 나는 너를…….’
얼굴을 가진 이는 증오스러워 미칠 지경인데, 이상하게도 당장 눈앞의 얼굴은 미치도록 애달팠다. 우스운 일이었다.
‘아악! 페루스.’
‘잘못했어요. 잘, 잘못했어요. 공작님.’
엘리자벳에게 폭력을 가한 후 페루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그는 더 이상 남이 맞는 것을 보아도 짐승이 채찍질당하는 것을 봐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 구토감이 밀려오지 않았다. 불쾌할지언정 그 상황을 담담히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누군가 목을 아주 콱 누르는 기분이었다. 턱턱 막히는 숨이. 떨리는 손이. 올라오는 구토감이 끔찍했다. 지배를 벗어나 제멋대로 반응하는 몸이 두려웠다. 꼭 사라진 트라우마가 다시 생긴 것 같았다.
‘사랑해. 마음 깊이 너만을 사랑하고 있어.’
까르륵 웃던, 그러나 수줍었던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했다.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페루스는 또 한 번 비틀거렸다.
“젠장!”
결국 페루스는 몸을 틀어 느리게 걸어온 길을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준비했다는 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곧 가슴이 터지도록 내달렸다.
* * *
엘리자벳은 길게 앓았다. 멍투성이 몸과 얼굴, 대강 치료한 것으로 보이는 발목, 영양실조 상태에 가까운 건강.
‘……사람 하날 아주 폐인으로 만들어 놨군.’
궁의는 그녀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이러하고 황녀가 오로르라지만 아직 어린 여자에게 너무하질 않는가. 그는 밝게 웃던 황녀를 기억했기에 동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신체는 정신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정신이 무너져 내린 엘리자벳은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일으켰다.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하는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여웠다.
‘어느 때나 윗분들이란! 다들 본인이 당해 봐야 알지.’
궁의는 하루에도 몇 번 엘리자벳에게 안정제를 놓으며 잔인한 권력자들을 저주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페루스의 말과 스스로 한 제 진찰조차 의심했다.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황녀님의 상태를 보면 이곳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계신데……. 이곳에 계속 계시면 치료에 차도가 없습니다.”
화가 난 궁의는 페루스에게 꽤 강경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태도였다.
“불가하다.”
그러나 궁의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페루스는 단호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조금 움찔한 궁의는 페루스를 노려보려다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하, 하지만.”
“어떤 것을 써도 좋아. 들어 보니 수도 저잣거리에서 발작과 간질에 효과 좋은 것이 있다던데. 황족이라 저어할 필요 없다. 내가 허락할 테니 황녀에게 그걸 써.”
“그, 그것은…….”
페루스의 말에 궁의가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분명 그런 것이 있긴 했다. 정신병이나 간질 환자들에게 쓰는 것. 의원들이 비싸게 팔아먹는 그것. 꽤 돈이 되는 것이었기에 궁의도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간간이 그걸 팔았다.
“그것은 황녀님께 쓸 것이 못 됩니다. 널리고 널린 천한 것들이나 쓰는 것이죠. 일종의 마약이라 볼 수 있는 데다가 부작용 커……. 게다가 증상을 치료한다기보다 심박수를 낮추는 것에 불과한 약이라 부르기도 힘든 위험한 것입니다. 잘, 잘못하다간 심장이 멈출 수도 있는지라…….”
공작이 직접 명했으니 쓸까 했지만 저리 누워 있는 황녀에게 쓰기에는 궁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잘못했다간 황녀의 목숨이 사라질 텐데 그러면 모든 책임은 제게 오질 않나. 궁의는 제 밑에 줄줄이 딸려 있는 입들을 생각했다.
페루스는 궁의가 주절거리는 것을 들으며 인상을 찌푸리다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까닥했다. 하! 그래. 한순간 정신이 나가 구한 목숨인데 그렇게 죽일 수는 없지.
“한심하군. 나가 봐.”
퇴출 명령이 떨어졌다. 궁의는 환자를 두고 가는 것이 불안한지 곁눈질로 엘리자벳의 파리한 안색을 살폈다.
“좀 더 곁에서 상황을 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있나?”
차가운 말에 궁의의 목이 쑥 들어갔다.
‘공작! 당신이 있는 것보단 내가 있는 게 낫질 않겠소!’
나이 많은 궁의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젊은 공작의 벼린 듯한 분위기는 너무도 무서웠다. 그는 결국 뒷걸음질 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페루스는 그런 궁의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엘리자벳을 응시했다. 죽어? 네가 죽어? 누구 마음대로! 치밀어 오르는 화에 이가 절로 갈렸다.
목에 감긴 크라바트가 형편없이 내팽겨졌다. 페루스는 드러난 제 목에 손을 가져가 이대로 조를까 고민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끝을 보기 직전 스스로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할 수 있었는데! 잠시를 참지 못하고! 여자를 버릴 수 있음을 그는 결국 증명하지 못했다. 저주에 또 지고 말았다. 몰려오는 자괴감에 페루스는 씩씩대며 죽은 듯 누워 있는 엘리자벳을 노려봤다.
“전부 네 탓이야. 엘자.”
“…….”
“네 탓이라고! 듣고 있나? 네 탓이라 하질 않아!”
페루스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시체처럼 누운 엘리자벳에게 악다구니를 썼다. 벌겋게 오르는 열기가 얼굴을 통해 느껴졌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 아픈 목을 감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대조되어 들렸다. 저걸 끊어 내지 못하다니. 저 가느다란 숨 하나 끊질 못해 이 꼴이라니.
분명 사내들에게 던져 준 후 노예의 인장을 찍고 마지막에 목을 베어 낼 참이었다. 허나 그것들을 다 하긴커녕 그는 그중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자괴감에 페루스는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답을 내야 해.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이유를 찾아야 해.
“……그래. 네가 문제야 엘자. 모든 것은 네 잘못이야.”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고심하던 페루스는 어느 순간 깨닫고 말았다.
“……네 탓이야.”
아아…… 그랬다. 처음부터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으려 한 것이 문제였다. 그가 가진 모든 문제는 모두 이 여자에게서 온 것인데. 원수의 핏줄인 것도 이 여자고, 제 고민도 모두 여자의 잘못이자 죄인데. 왜 스스로를 책망했나. 왜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으려 했나.
답을 내리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심장은 너무도 빠르게 뛰었다. 페루스는 벌건 눈을 한 채 엘리자벳 옆에 누웠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에 제 손을 올렸다.
“네가 벌받으면 끝 아닌가.”
자신의 잘못을 굳이 찾자면 너무 자비롭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한때 함께해 정이 남은 것이리라. 그래서 못 죽이는 것뿐이리라.
페루스는 제 자비가 원망스러웠다. 그 하나의 감정이 제게 고통을 주고 있다 생각하니 짜증스러웠다.
“내가 아니라 네가 고통스러워야지. 엘자.”
“…….”
“비명을 지르고 울어. 비참하게 그 목숨을 부지해. 네가 속죄할 길은 그뿐이야.”
그래야 내가 스스로를 원망 않지.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 네 목숨을 부지해 줄 마음이 들겠지.
머릿속을 정리한 페루스는 앞으로의 엘리자벳의 삶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생 제 발치에서 굴종해야 했다. 온 삶을 피해자인 그에게, 그의 자비에 고개 조아리며 살아야 했다.
내가 너를 차마 죽이지 못하니…….
“너 자신을 죽여. 죽을 정도의 고통에 허덕여.”
“…….”
“그래야 내가 너를 살려. 살려 줄 거야.”
죽일 수 없으니 죽음과도 같은 진창에 밀어 넣으리라. 네 고통을 발판 삼아 살아가리라.
어느새 힘이 들어간 손 밑으로 약하지만, 급히 뛰는 심박이 전달됐다. 페루스의 힘에 엘리자벳이 컥컥거렸다. 페루스는 입꼬리를 올린 채 잠시 그걸 구경하다 손을 뗐다.
숨이 넘어갔다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소름 끼치는 소리였건만 페루스는 그 소리가 만족스러웠다. 그는 엘리자벳의 옆에 딱 붙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그래야지. 엘자. 이러는 게 네 역할이지.”
* * *
타티카가 장미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페루스는 그것이 싫었지만 엘리자벳이 점차 나아지는 것을 보며 타티카의 탁월함을 인정했다.
엘리자벳은 마법에 가까운 약으로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일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마법 같은 약이라도 그녀를 감싼 공포를 완전히 걷어 낼 수는 없었다. 엘리자벳은 후에도 몇 번 발작을 일으키며 장미궁이 싫다 비명을 지르곤 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발발 떨며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약을 억지로 입에 부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강간했다.
엘리자벳은 전처럼 견디지 못했다. 앓은 후 그녀는 페루스를 조금 다르게 대했다. 그녀는 한순간도 페루스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듯한 그 모습은 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미묘한 변화를 페루스, 그리고 엘리자벳 그녀도 느꼈다.
페루스는 그것이 화가 나 전보다 더 잔인하게 굴었다. 자신과는 눈도 못 마주치는 엘리자벳이 만족스러운 동시에 불쾌했다. 폭력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벳은 고통과 두려움만을 느꼈다. 영혼이 시시각각 죽어 가는 것이 너무도 생경했다. 하지만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가장 괴로웠다. 비참함, 복종……. 그녀는 자신이 두 가지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페루스에게 목이 졸린 채 창밖을 보던 엘리자벳은 계절이 바뀜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같은 방에 갇혀 같은 시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야지.’
어느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놓겠다 결심했다. 약에 절여 있는 것도, 다리를 벌린 채 신음하는 것도 이제 싫었다. 마침 시녀인지 하녀인지 모를 여자의 실수로 창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페루스.”
퇴색된 이름을 그녀는 불러 봤다. 분명 같은 이름, 같은 이를 부르는 것인데 전과 같은 차오름이 없었다.
잔인한 이이니 엘리엇을, 그녀의 가족을, 지인들을 살려 둘 리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자신은 살려 뒀지만. 희망을 잃은 그녀는 비적비적 걸었다. 한 발 뗄 때마다 다리 사이 흐르는 그의 잔재가 끔찍했다. 한때는 이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데…… 이제는 싫었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엘리자벳은 창에 다다랐다. 밑을 보니 죽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엘리자벳은 뛰어내리기로 했다. 머리라도 깨져야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렵게 힘을 내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엘자!”
그러나 그녀는 앞으로 꼬꾸라질 수 없었다. 웬 사내가 그녀를 뒤에서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이야!”
제일 먼저 새카만 머리카락과 그 밑 뺨에 묻어난 피가 보였다.
“무슨! 아니지. 소리쳐서 미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괜찮나? 괜찮은 거야?”
“……에셀?”
“그래. 나야. 엘자. 나니깐 제발 말을 해 봐. 괜찮나?”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엘리자벳은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에셀? 에셀이야? 죽지 않았어? 에셀!”
안도와 함께 무언가 돌아옴을 느꼈다. 조금 선명해진 눈을 하고 엘리자벳은 연신 묻다 에셀의 얼굴을 쓸어 봤다. 뜨거운 피부가 만져졌다.
“에셀! 에셀! 나는 에셀도…… 에셀도 죽었을 거라고, 흐윽…….”
엘리자벳은 울고 말았다. 낯익은 친우의 얼굴이 이리 반가울 수 없었다. 에셀. 에셀. 그녀는 그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다 퍼뜩 다른 이들을 생각해 냈다.
“에셀! 엘, 엘리엇은? 벨은? 페, 페루스가…… 그가 말을 안 해…… 흐윽, 줘서…… 나는…….”
“폐하. 아니 엘리엇은 무사해. 벨도 마찬가지고. 그보다 네가……!”
“에셀!”
엘리자벳은 에셀의 말을 다 듣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에셀은 제 품에 안기는 엘리자벳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손을 들어 위로를 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가만있어야 하나.
한참 고민하던 에셀은 엘리자벳의 얼굴에서 피를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가져다 댔다. 확인해 본 결과 다행스럽게도 피는 에셀의 옷에서 묻어난 것이었다.
“엘자. 잠깐. 여기 좀 봐. 응? 피가 묻잖아. 엘자.”
“에셀…… 흑, 에셀.”
사시나무 떨듯 그만 찾는 엘리자벳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마른 몸에 가득한 멍들이 에셀을 후벼 팠다.
“엘자. 쉬이. 진정해.”
에셀은 지금도 너무 늦었다 자책했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중앙궁보다 여길 먼저 왔어야 했는데. 에셀은 생각을 하다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누이가 생각났다.
‘……그리로 가는 거야?’
‘가 봐야지. 너와 폐하가 무사한 걸 봤으니 빨리 엘자에게 가 봐야 해. 거긴 내 힘이 전혀 닿질 않아 시간이 없어.’
‘에셀. 오빠의 힘은 여기도 미약해. 여기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도 봐. 아는 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출입이나 했지 나나 엘리엇을 데리고 나가지도 못하잖아.’
‘그건…… 미안하다. 벨. 조금만 기다려. 여길 지키는 이들은 그래도 너를 지켜 줄 거야. 하지만 장미궁은 페루스 그자가.’
‘변명 마! 알고 있잖아. 황제를 유폐한 중앙궁보다 장미궁이 삼엄한 이유를 몰라? 그는 엘자를 죽이지 않아. 죽였다면 진즉 죽였겠지.’
‘벨!’
‘넌 그냥 선택한 거야! 핏줄인 나나 주군인 엘리엇이 아닌 엘자를 선택한 거야!’
‘그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잖아!’
‘몰라!’
‘벨. 금방 올게. 금방 오겠다 약속할게. 응?’
‘……중앙궁에 유폐된 게 나나 엘리엇이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게 엘자였다면…… 넌 분명 동료였던 이들을 베고 왔을 거야.’
차마 동의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아니라고 부정도 못 했던 말이다.
‘나는 그게 섭섭해 에셀. 다른 이도 아니고…… 내 오라비인 너도 그녀에게로 달려가는 게 섭섭해.’
에셀은 벨에게 미안해졌다. 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누이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등을 돌린 이유를.
‘……미안하다. 벨.’
벨도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자신이 필요했을 텐데.
“에셀. 에셀…….”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이 여자를 내던지고 갈 수 없는 것을. 누이에 대한 죄책감이 등을 눌렀다. 그러나 에셀은 그 무게를 애써 무시한 채 엘리자벳을 꼭 안았다.
* * *
벨은 초조했다. 이건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무섭다는 건 스스로를 보며 알고 있었지만 우유부단한 에셀이 이렇게까지 추진력 있게 굴 줄은 몰랐다.
‘페루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게다가 아슬아슬한 동맹인 페루스조차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에셀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엘리엇이 다시…….’
에셀이 구해 온 엘리자벳이 떠올랐다. 야위었지만 엘리자벳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독히 예쁜 그대로였다.
‘그 앨 찾을 거야. 엘리엇은 똑똑하니깐 지금 당장 못 움직여도 언젠가는…….’
세게 문 손톱 끝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벨은 손가락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방 안을 서성였다.
그러길 얼마나 됐을까. 한참 불이 켜져 있던 벨의 방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추가됐다.
* * *
“지켜보라고 하셨던 이들 중 하나가 움직였습니다.”
“응? 페루스? 아님 멍멍이? 그것도 아니면…… 우리 황녀님?”
“아닙니다. 에셀 라세르의 동복누이 벨 라세르입니다.”
그건 좀 의외인데. 타티카는 소파 뒤로 넘겼던 고개를 바로 했다. 쯔읍거리는 물기 가득한 소리가 바로 밑에서 들렸다.
“벨 라세르라……. 아! 그 까마귀 같던 여자!”
벨 라세르를 떠올린 타티카가 손을 거칠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가랑이 사이 머리를 박고 있던 연한 머리색의 여자가 컥컥 소리를 냈다.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타티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쓸모없긴. 그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아, 이게. 야! 이거 어디 출신이야?”
“동부 세르비도 백작의 차녀였습니다만, 지금은 모임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교육이 부족한 것 같으니 끌어낼까요?”
“뭐야. 귀족 출신인데 이래? 세르비도 영애. 백작이 뭘 먹을 때는 소리 내선 안 된다 가르치지 않았어?”
세르비도 영애였던 여자가 겁에 질려 움찔움찔 떨었다. 그러나 혹독한 교육 덕분인지 그녀는 울거나 입안의 것을 토해 내진 않았다. 그 모습에 타티카는 기분이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흐응. 그래도 뭐……. 제대로 해. 아니면 그 예쁜 입이 헐 때까지 이 짓을 해야 할 거야. 물론 사내 하나론 안 끝나겠지.”
여자에게 겁을 주며 타티카는 그녀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아까보다 더욱 숨이 막혀 왔지만, 여자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았다.
소리를 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그 모습에 타티카는 히죽 웃었다. 어차피 한 번 실수한 물건이었다. 딱히 마음에 차는 것도 아니니 말한 대로 해 줄 요량이었다. 그래야 다시는 안 그러지. 그는 스스로가 장인 같다고 생각했다. 팔아먹는 물건에 흠결을 용서치 않는 장인.
“그래. 그건 그렇고, 벨. 그 여자가 왜? 걘 그냥 황태자, 아니지 황제 폐하 곁다리 아니었어?”
“그녀가 어제 은밀히 저희 가게를 찾았습니다. 방문한 이는 하녀였습니다만…….”
“약을 시작했나? 우리 폐하가 여전히 쌀쌀맞은 모양이지. 돈은 많을 테니 적당히 좋은 물건을 대접해. 단골이 되면 에셀, 그 개새끼를 골릴 수 있을 거야.”
“약이 아닙니다.”
“그럼?”
“그녀가 극독을 주문했습니다. 해독제 없는.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는 독을 달라 하더군요. 물론 아직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의외의 말에 타티카는 게슴츠레하던 눈을 완전히 떴다.
“어디에 쓰는지는 알아봤어? 아니지. 극독이면 누굴 죽이거나…….”
“…….”
“스스로 죽어 나자빠지려고 사겠지. 그런데 그 여잔, 독으로 자살할 치는 아니니깐…….”
누굴 죽이려는 거네. 타티카는 눈을 반짝였다. 뭔지 모르지만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좋아. 까마귀를 계속 지켜봐. 누구한테 쓰려는지도…… 흐읍.”
타티카는 말을 하다 올라오는 사정감에 입을 닫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여인의 머리가 몇 번 흔들리다 멈췄다.
“……알아보고, 약을 달라 하면 제조한다 하고 기다리라고 해. 그리고 이건 데려가. 어디로 보낼지는 알지?”
“예.”
내팽겨진 채 있던 여인이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타티카의 앞에 있던 사내가 빨랐다.
“아…… 용서하세요. 공작님! 아니 주인님! 제발 용서하세요!”
거칠게 저를 잡는 손길에 여자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타티카는 바지를 올리고 소파에 앉은 채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줄 뿐이었다.
* * *
“난…… 나는…… 괜찮아. 그보다 에셀, 엘, 엘리엇은…….”
에셀은 제 눈치를 보는 엘리자벳이 안쓰러웠다. 원래부터 눈치를 많이 살피는 엘리자벳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거의 병적이었다. 그가 일어서기만 해도 불안한 듯 눈을 움직이고 질문 하나 제대로 못 했다.
게다가 좋아했던 것이 기억나 놓아뒀던 장미는 보자마자 혼절해 버렸으며 방에 커튼을 치기만 해도 울며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장미궁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에셀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엘자. 편히 말해도 돼. 묻고 싶은 게 있어?”
“계속…… 계속 물어보는 것 같, 같아서요. 엘리엇이 보…… 보고 싶은데.”
습관이 된 듯 더듬는 말에 드문드문 나오는 높임말. 에셀은 엘리자벳을 저리 만든 이에 대한 살심이 올라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귀찮으…… 아!”
그러자 엘리자벳이 놀란 얼굴을 하고 눈을 감았다. 한껏 구겨진 몸과 높이 들어 올린 팔에 에셀은 가득했던 멍을 기억해 냈다.
“잘못했어요. 아으으, 잘못…… 흐윽.”
엘리자벳의 울음에 에셀은 제 얼굴이 더욱 구겨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폐하는 곧 뵐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줘. 엘자.”
억지웃음이 찼다. 에셀은 표정 하나 제어 못 하는 자신을 자책하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리자벳에게로 손을 뻗었다. 저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에셀의 손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에셀은 그 모습을 보다 슬그머니 손을 물렸다.
‘벨과 대화할 때는 괜찮은 듯싶더니…….’
“미안.”
에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과뿐이었다. 그의 사과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함, 죄책감, 충격, 두려움. 온갖 감정이 눈에 들어 있었다.
‘병신 같긴.’
에셀은 스스로를 욕했다. 행동 하나 말 하나가 전부 엘리자벳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사과조차 그녀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다니. 에셀은 엘리자벳을 살피며 입안 살을 깨물었다.
“조금 뒤에 벨이 올 거야.”
벨이 올 적에는 엘리자벳이 말을 더듬는 것도, 저리 몸을 움츠러드는 것도 현저히 줄었다. 같은 여자가 편한 모양이지.
에셀은 조금이라도 엘리자벳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는 최대한 표정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엘리자벳이 주춤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벨에게 말해 줘. 아니면…… 내게 말해도 좋고.”
엘리자벳은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에셀.’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에셀은 그녀의 입 모양을 읽었다. 네가 왜 미안한가. 에셀은 순간 울컥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지금의 엘리자벳에게 할 수는 없었다. 격한 감정도, 제 표정도 그녀에게는 모두 공포일 게 뻔했다.
“몸조심하고. 폐하는 조금만 기다려. 나는 이만 가 볼게.”
결국, 에셀은 그녀에게 씁쓸히 웃어 주곤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알게 된 사실은 흥미로웠다. 저를 돌아보지 않는 사내에게 먹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내를 무너뜨린 이를 노릴 줄 알았는데.
‘손님께서 원하는 대로 흔적도, 일말의 고통도, 해독제도 없는. 단 3초 안에 죽어 나가는 물건은 이뿐입니다. 매우 희귀한 물건입죠. 다만 효과가 확실한 만큼 조금 번거로운 구석이 있지요.’
타티카는 벨에게 일부러 두 번 먹어야 하는 약을 사도록 유도했다. 그녀가 목표한 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번거롭다고요? 어떤…….’
‘보름 간격을 두고 두 번 먹어야 합니다. 한 번 먹이면 효과가 없는 물건이지요.’
‘그게 말이 되나요! 툴란에서 제일가는 가게라 들었는데! 제 주인께서…… 아니, 제가 찾는 것은 그런 번거로운 것이 아니에요! 다른 것은 없나요?’
‘워낙 요구하시는 것이 많으셔서……. 그냥 바로 보내 버리거나 편히 잠든 듯 죽이는 약은 많지만, 손님께서 원하시는 효과가 있는 것은 이 물건뿐입니다. 어디든 가 보십시오. 이런 물건이 있나.’
‘……양을 늘리면 어때요?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깐 걱정 말고.’
‘양을 많이 쓰면 매우 고통스러워하죠. 시꺼멓게 얼굴이 바뀌다 일곱 구멍으로 피를 쏟을 겁니다.’
고민하던 이는 다시 오겠다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다시 들러 결국 물건을 받아 갔다. 고통 없이 가는 것이 확실하냐 연신 물으며.
타티카는 누군가를 죽이려 독을 사 가면서도 고통이 없었으면 하는 벨의 심정이 우스웠다. 그러나 벨이 독을 먹인 상대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지만 독한 향은 타티카 그만이 아는 향이었다. 그는 독에 일부러 묻힌 향이 황녀궁의, 누구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방에서 솔솔 새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 황녀님은 얼굴값을 한단 말이야. 오라비한테도 사랑받고.”
그저 핏줄을 싸고도는 것으로 생각했건만. 벨의 대상이 엘리자벳이었다는 것을 안 타티카는 설마설마했던 의심 하나에 대한 답을 찾았다.
“누이한테 붙어먹는 황제라니 참 재미있어. 아…… 그때 황녀님이랑 결혼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황제의 관을 쓴 엘리엇을 꼼짝도 못 하게 묶어 놓고 그 앞에서 하얀 몸을 짓밟으면 좋을 것 같았다. 제 누이의, 사랑하는 여자의 구멍에 천하다 욕하던 사내의 것이 박히는 꼴을 보면 그 오만한 어린놈은 분명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러면 더 박아 대야지. 그러다 조금 불쌍해지면 우리 황녀님 입 정도는 한번 양보해 줘야지.
오라비의 것을 빨며 제 것을 물어 댈 황녀의 배덕한 모습이 떠오르자 웃음이 나왔다. 온갖 방탕한 짓을 해 온 그가 생각해도 자극적인 상상이었다.
“아주 온갖 놈들을 홀려 댄단 말이야. 황녀님. 알고 보면 전설 속에나 나오는 마녀 아냐?”
춤추며 더듬었던 피부는 보드라웠다. 붉은 눈가는 핥으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타티카의 입에서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홀리고. 황녀님은 마녀가 분명해.
흥분으로 손이 벌벌 떨렸다. 타티카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곧 눈앞이 기분 좋게 흘러내렸다.
“흐응……. 홀려 낸 건 우리 황녀님이지. 황녀님이니깐…… 나도 맛을 봐야겠어. 페루스 그 잘난 놈 혼자 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나도 가질 거야. 보라색 눈이 질척하게 허공을 봤다. 투툭,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감정이 음습하기 그지없었다.
* * *
‘신에게 한 언약을 담은 것입니다. 이 종이 위 서약은 고칠 수도 돌이킬 수도 없지요.’
예상했던 답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결과였다. 그러나 예상하는 것과 확인을 받는 것은 달랐다.
쨍그랑―
아무렇게나 휘저은 손에 유리 재떨이가 떨어져 깨졌다. 페루스는 산산이 조각난 유리 파편들을 보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시가를 비벼 껐다. 값나가는 책상에 조그마한 연기와 함께 자국이 남았다.
“……오로르. 망할 오르르.”
복수는 결코 완전해지지 못하게 됐다. 그가. 하나 남은 르온인 그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조부가 뺏긴 자리는 그렇게 영영 남이 차지하게 됐다. 오로르들을 끌어내리고 죽여도 황제의 관을 그는 쓸 수 없었다.
‘……서약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합니다. 황제가 될 수 없는 것을 알면 아직 남아 있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 분명합니다. 아! 차라리…….’
제임스는 황제라 칭하지만 않으면 되질 않느냐 물었다. 어차피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이니 황제나 다름없질 않느냐면서. 말을 하면서도 파리한 낯빛을 한 제임스는 불안과 충격으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페루스는 그렇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엘라르가 작성하도록 했던 그 내용이 생생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만 아쉽기는 했다. 짜증도 났다. 황좌에 앉았다면 오로르를 향한 완벽한 복수가 됐을 텐데. 끝맺음이 시원찮았다. 올라오는 신경질에 페루스는 시가 하나를 다시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네 탓이야.’
어그러진 계획의 시작점이 생각났다. 당연하게도 또 그 여자였다.
“엘자.”
온갖 가여운 얼굴을 하고, 저를 가해자로 만드는 여자.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항상 우는 여자. 여자가 질척하게 제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네 탓이잖아. 네가 내게서 앗아 갔으니 벌을 받아야지.”
너도 빼앗기고 괴로워해야지.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탓이라 결정한 후 그녀에게서 빼앗아 갈 것을 정했다.
“……그 관은 값싼 것이 아니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 중 하나를 앗아 간 대가는 어떻게 치르게 해야 할까? 페루스는 조부의 목숨, 가문, 주변 지인들을 모두 집어삼킨 관의 무게를 가늠해 봤다.
하나하나 값을 따져 보니 의외로 계산은 쉬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제 가문이 망한 것처럼 오로르는 망했다. 황제였던 조부가 죽었으나 오로르의 황제도 제 손에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가족과 지인. 수많았던 가신들. 그의 주변에 넘쳐 나던 르온의 사람들.
“네 주변도 사라져야 옳아.”
내 주변도 사라졌으니. 페루스는 에셀에게 안겼다던, 그의 품에서 울었다던 엘리자벳을 떠올려 봤다. 여자는 자신과 다르게 남은 이들이 많았다.
라세르가 남매는 곧 사라질 터였다. 그리고 황제에 오른 여자의 오라비는 인질로서, 아무것도 못 하는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다 언젠가 죽어 나자빠질 예정이었다.
여자의 조모는 멍청했다. 고작 르온 공작으로 살아가겠다, 황제 자리에 앉지 않겠다는 맹세만 쓰게 하다니. 그냥 죽였어야지. 아니면 제 핏줄에게 영영 충성을 맹세하도록 쓰게 했어야지. 내가 오로르에 손도 대지 못하게 그렇게 만들었어야지.
아마 그 늙은 마녀는 제가 이리 올라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제 핏줄들을 믿었거나. 멍청한 실수였다.
늙은 마녀와 닮은 여자가 그려졌다. 모두를 잃고 제 발치에서 떨 모습이 기대됐다.
‘페루스…… 흐윽. 페루스…….’
나중에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제 마음대로 할 참이었다. 눈물도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게 제 옆에서 고통스럽게 괴롭힐 참이었다.
문득 하얀 몸에 손을 대고 싶었다. 그 얼굴을 감상하며 목을 조르고 제 것을 여자의 안에 처박은 채 헐떡이고 싶었다.
“나도 미쳤군.”
책상 위에는 재가 제법 쌓였다. 꽤 많은 양을 태운 듯싶었다. 그것을 인지하니 두통이 느껴졌다.
똑똑―
페루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물을 가져오라 명하려 했다. 그러나 입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울리는 소리에 페루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각하.”
들어온 이는 제임스였다. 그는 어쩐지 긴장한 듯 보였다.
“무슨 일이지?”
시가로 인해 쉰 목소리가 나왔다. 엉망인 바닥과 가라앉아 보이는 주인의 기분을 눈치챈 제임스가 침을 삼켰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말을 해.”
페루스가 짜증스럽게 재촉했다. 제임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
“……황녀가. 황녀가 쓰러졌습니다.”
* * *
“……네놈은 뭐냐.”
“온종일 누워 있어 적적하실 폐하께 제 주인이신 우세리 공작께서 이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분명 흥미로울 거라는 말씀과 함께.”
“…….”
깡마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명백히 저를 놀리는 듯한 말투에 엘리엇의 손에 삐죽 힘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하게 침실에 감금된 지가 오래. 당최 무슨 약을 쓰는지, 몸은 깨어났으나 당장 걸음을 뗄 힘조차 엘리엇에게는 없었다. 눈앞의 남자도 그 사실을 아는지 황제의 앞임에도 그는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우선 진작 손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정확히는 꼴좋게 됐다고 하셨지요.”
“그 천한 것이!”
“그래도 황녀는 멀리 달아나 버리게 생겼다고, 손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엘자! 엘자가 도망갔나? 그 아이가 네놈들 손에서 무사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 물론 누워 계시느라 바깥일에 어두워지신 것은 잘 알지만, 누이이신 황녀께서 사경을 헤매는 것쯤은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엇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을 부릅뜬 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지껄이는 이가 그 천한 타티카의 종놈이라는 것도 잊었다. 그의 뇌리에 오롯이 떠오른 것은 하나. 엘리자벳의 얼굴뿐이었다.
“엘…… 엘자. 엘자 그 아이가…….”
한참 만에 입을 연 엘리엇은 두려움에 질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보다 최악인 상황은 없다 생각했건만. 엘리엇은 오로르가 이렇듯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엘리자벳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황가가 쓰러지면 구성원들 목숨은 사라졌다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엘리엇에게 엘리자벳은 항상 이성 밖의 인물이었다.
“아…… 아…….”
“그렇다고 제 주인을 원망하시면 곤란합니다. 폐하. 비록 폐하께서 이리 누워 계신 것에는 제 주인께서 관여하신 상황이나 황녀께서는…….”
엘리엇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비열함과 쾌감이 스쳤다. 주인이 시켜 한다기에는 지나친 감정이었다.
“폐하의 약혼녀이신 라세르가 영애 덕에 누워 계시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엘리엇이 고개를 들어 환한 얼굴을 한 남자를 봤다. 남자의 얼굴에는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저를 사랑한다 매일, 조금 전까지도 지껄이던 여자가 떠올랐다. 징그러운 그 눈. 제 오라비와 다르게 징글징글한 파충류 같은 눈! 엘리엇은 그 눈이 엘리자벳을 어찌 보는지 잘 알았다.
“감히! 감히! 저따…… 커헉!”
엘리엇의 눈이 분노로 붉어졌다. 엘리엇은 자신이 병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닥친 감정을 버텨 내지 못하고 피가 몸 안에서 역류해 입 밖으로 튀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폐하.”
시커먼 피를 보고도 남자는 태연했다. 아무리 명받은 처지라지만 황제가 피를 토했는데 걱정은커녕 남자의 눈에는 오히려 희열마저 묻어났다.
‘콱 죽어 버리라지. 간악한 오로르의 핏줄.’
“……피곤해 보이시니 천것은 물러갑니다. 푹 쉬시지요.”
“어딜! 당장 나를…… 커윽…… 데려가라! 엘자에게로…… 욱.”
엘리엇은 갈퀴같이 마른 손을 들어 남자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경쾌한 남자의 발걸음은 엘리엇의 손을 스쳐 멀어졌다.
‘엘자…….’
남자가 간 후 엘리엇은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비틀거리는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지금 갈 테니……. 엘자, 엘자…… 제발…….”
몇 번의 시도 끝에 엘리엇은 겨우 일어섰다. 그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지만 침대에서 책상까지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그사이 벨은 작은 죄책감과 큰 기쁨을 지닌 채 긴 복도를 지나 황제의 침실 앞에 섰다.
* * *
“벨! 벨! 눈을 떠! 궁의는? 궁의는 어딨나?”
눈을 감은 벨은 미동이 없었다. 에셀은 피가 나오는 누이의 몸을 붙잡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궁의를 찾았다. 그러나 축 처진 몸은 이미 온기를 잃어 가고 있었고 숨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러지 마. 벨. 제발…… 제발 눈을 떠 봐!”
전장을 누볐던 그다. 식어 가는 몸이 나오지 않는 숨이 뭘 뜻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애타게 궁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늦었다는 걸.
이리 갈 네가 아닌데. 에셀은 식어 가는 몸을 꼭 붙잡았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고생만 했던 가여운 누이였다. 그보다 어린 누이였다.
그런데.
‘엘리엇! 내가 엘자에게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가지 말아요. 엘리엇. 제발 엘리엇!’
이 아이의 끝이 왜 이리 비참해야 한단 말인가. 무심히 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나던 사내가 떠올랐다.
사내는 끝까지 누이를 외면했다. 외면한 것뿐 아니라 죽음으로 몰았다. 어찌 그럴 수 있나.
“……이 아이가 어떻게 했는데. 벨이 네게 어떻게 했는데.”
원수에게 붙었다, 몸을 내줬다 온갖 오명에도 사내만을 보던 누이였다. 목숨을 위협받아 가면서도 사내 옆에만 있던 아이였다. 모든 것을 사내에게만 바친 아이였다.
엘리엇. 사내가 미치도록 미웠다. 나 또한 아비를 잊어 가며 충성을 했는데.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분노가 에셀을 덮쳤다.
‘난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에셀.’
아픔에 달달 떨리던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눈물 가득한 눈이 감겼음에도 자신을 계속 바라보는 것 같았다.
“벨! 벨! 벨! 아아…….”
핏줄의 죽음은 에셀에게 모든 걸 망각하게 했다. 에셀은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엘리엇이 엘리자벳이 독을 먹은 사실을 어떻게 알았으며, 설사 벨이나 시종들을 통해 알았다 해도 왜 벨이 했다 믿는지, 그 이상함에 대해 일말의 의문조차 가지지 못했다.
“네가 왜! 왜! 왜!”
지금 당장 에셀의 머릿속에는 벨밖에 없었다. 그는 누이의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
죽은 누이는 아비도 하지 못했던 증오를 제 오라비에게 심어 줬다. 에셀에게 내린 증오의 뿌리는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그의 몸을 잠식했다. 독을 마신 엘리자벳에 대한 극심했던 걱정도 증오에 희석됐다.
누이에게로 몸을 숙였던 오라비가 고개를 들었다. 핏발 선 눈에서 원망이 흘러넘쳤다.
창밖에서는 계절을 이기지 못한 흰 꽃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에셀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서렸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꺾었다. 당장 그가 신경 쓸 이는 시신이 돼 버린 누이였다.
‘난 그게 섭섭해. 에셀.’
에셀은 벨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아 내던졌다. 익숙한 쇠붙이는 더운 피를 먹고도 차가웠다.
누이가 사랑하던 그 사내만큼.
더는 그를 지키지 않으리. 엘리엇에 대한 충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벨. 미안해. 하지만 난…… 그를 지킬 수 없어.”
너를 해친 그를 지킬 수 없어. 에셀은 죽은 벨 앞에서 맹세하려 했다. 핏줄을 해친 오로르의 기사로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려 했다. 착한 누이는 죽어서도 그걸 원치 않겠지만 에셀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에셀 라세르는 오로르에 바쳤던…….”
그러나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의문을 품기 무섭게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은 여자가 떠올랐다.
“엘자…….”
으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엽고 아름다운 이. 차가운 핏줄과 다르게 오로르이면서도 여리고 다정한 여자. 핏발 선 눈이 순간 풀렸다.
에셀은 저도 모르게 밖을 봤다. 떨어지고 있는 꽃은 생기를 잃고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아마 저대로 바닥에 떨어진다면 짓밟히겠지. 이리저리 뭉개지겠지.
에셀이 아려 오는 마음에 손을 뻗으려 할 참이었다. 그의 움직임에 벨의 차가운 손이 툭 떨어졌다.
먼 꽃과 다르게 가까이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에셀의 눈이 다시 벨에게로 향했다. 그래. 벨. 네가 우선이지.
‘섭섭해. 에셀. 섭섭해. 가여운 나를 끝까지 봐 주지 않는 그가, 죽은 내 앞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하는 오라버니가 섭섭해.’
누이는 죽어서도 말하고 있었다. 정말 가여운 건 제게서도 밀려난 이 아이였다. 내가 진작 챙겼다면. 좀 더 신경 써 줬다면. 벨의 죽음은 켜켜이 쌓여 있던 에셀의 죄책감에 불을 지폈다.
아비와 남동생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누이. 어린 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오로르의 탓이었다. 오로르가 그의 가족을 죽였다.
죽은 벨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눈이 가려진 에셀은 눈을 꼭 감은 채 묵념할 뿐이었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