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끊어지다 下 (10/15)

[8장] 끊어지다 下

페루스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저와 꼭 맞붙은 몸이 나긋하고 따뜻했다. 정사 후 여자는 아기처럼 쌕쌕 숨을 뱉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부드럽게 풀린 표정에 그는 여자의 이마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미지근한 피부에 왠지 심장이 간질거렸다.

“엘자.”

페루스는 잠시 그러고 있다 여자를 불렀다. 깊게 잠긴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피로하다. 실제로 페루스는 힘이 쭉 빠진 기분이었다. 쉴 새 없이 뛰다 겨우 멈춰 선, 숨이 한계까지 차올라 이제는 뛰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이 힘들거나 지쳤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묘할 정도로 가라앉은 기분이 그에게 피로감을 줬다. 그럼에도 머리는 어느 정도 말끔해졌다. 축 늘어진 몸과 다르게 그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그는 깨끗이 돌아온 시야로 여자의 은빛 머리칼을 응시했다. 윤이 흐르는 머리는 어두운 방 안에서도 반짝거리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약속을 지켜. 엘자.”

그는 제 손가락 사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다 어릴 적 여자에게 자주 했던 말을 충동적으로 해 봤다.

‘응. 페루스 네 말대로 할게.’

귀에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얼핏 스쳤다. 앳된 목소리를 기억해 내자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조부가 살아 있던 어릴 적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당시 자신은 꼭 이랬다. 여자가 다른 이에게 웃는 것을, 다른 이와 그를 똑같이 대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딴 새끼하고 얘기하면 다시는 너 안 볼 거라 했지!’

‘하, 하지만 그 애는 우리 집 손님인데…….’

‘입 다물어. 엘자. 넌 약속을 어겼어. 내가 너를 볼 일은 이제 없어.’

‘잘, 잘못했어. 페루스. 내가……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흑…… 가지 마아.’

‘다시 또 그럴 거야?’

‘아, 아니야. 흑. 다른 애들하고 안 놀게. 흐으……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 그러니깐 가지 마. 페루스.’

그 시절 그는 여자에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집착했다. 조부는 자신과 똑같은 저주가 너에게도 떨어졌다 한탄하곤 했지만, 그는 그것이 저주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 제발 그만해. 페루스.’

‘네 처지가 아직도 실감이 안 되나? 또 맞기 싫으면 얌전하게 굴지.’

‘제발…….’

짝―

저주라기에 그는 쉽게 여자를 끊어 냈다. 조부처럼 끌려다니지도, 상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 여자를 망가뜨렸다. 나락에 처박고 진창에 내던졌다.

‘페루스. 항상 그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만 더 힘들어질 뿐이니 괴롭히지 말고 잘해 주렴. 다행히 그 아이는 너를 좋아하니 너는 나처럼 괴롭지는 않을 게다.’

조부의 말이 생각날 때면 페루스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자를 봤다. 보세요. 저는 다릅니다. 저는 당신처럼 그깟 여자에게…….

그러나 정말 다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조금 전 연회 때만 해도 그는 분명 조부와 다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한심하기는. 그는 고작 몇 시간 만에 달라진 자신에게 조소를 금할 수 없었다.

여자가 추운지 제 품을 파고들었다. 편안히 제 품에 안긴 모습에 페루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꽤 어여쁜 것 같기도……. 생각해 보면 몇 시간 만에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여자를 끊어 낸 적이 없었다. 진정으로 끊어 냈다면 벌써 죽인 후겠지. 아니면 더한 지옥으로 처박았거나.

그는 여자를 지금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처음 계획대로 수십이 넘는 사내들에게 여자를 던져 줄 수도 있었고, 여자에게 노예의 인장을 찍을 수도 있었다. 노예의 인장을 박아 천하다 손가락질받게 한 후 온갖 사내에게 몸을 더럽히면 목을 뎅겅. 그 장면을 얼마나 오래 그려 왔던가.

‘……하지 않았지.’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계획대로 여자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는 제 손으로 계획을 망친 날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너 따위를 왜! 네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나 여자 때문에 자신을 죽일 수는 없는 법. 대신 그는 최대한 여자를 망가뜨렸다.

‘엘자. 넌 견뎌야 해. 왜냐면 그래야 내가…….’

견뎌.

네가 있는 힘껏 괴로워야, 동정심이 들 만큼 힘들어야 내가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고 너를 살려 둘 마음이 들지 않겠어? 난 널 죽이지 않았어. 난 네게 자비를 베푸는 거야. 그러니 너는 내가 주는 모든 고통을 견뎌야 해.

여자가 무너질지 모른다 예상하면서도, 결과를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면서도 끝없이 폭력을 휘두른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여자를 끊어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 그는 그 감정을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네 탓이야! 모조리 네 탓이야!’

그는 여자를 탓하며 자신을 달랬다. 내 탓이 아니야. 전부 네 탓이야. 여자의 고통을 다디달다 즐기며, 여자가 망가져 순종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며 그는 항상 여자의 탓이다 되뇌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괴감을 잊을 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해졌다.

“엘자. 나는 너를…….”

하지만 지금 와서는 다 소용없었다. 입이 막힌 듯 말은 안 나왔지만, 여자는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페루스는 오늘에서야 그런 제 감정을 인정했다.

엘자. 나는 네가 다른 이에게 웃어 주는 꼴은 볼 수 없어! 네가 다른 이와 나를 똑같이 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외면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어릴 적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여자에 대한 감정만은 그때와 한 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럴 수는 없었다.

조금 늦게 여자가 망가진 후에야 깨우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절대 여자를 끊어 낼 수 없을 거라 깨끗이 인정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집착을…… 감정을…… 멈출 수 없겠지.

페루스는 제 품에서 잠든 여자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마른 몸이 안쓰러웠다.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몰려왔다. 여자가 특별한 이라고, 절대 끊어 낼 수 없는 이라고 자신이 빠르게 깨달았다면……. 그랬다면 여자가 망가질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마르지도 않았겠지. 손끝에 딱딱한 뼈가 잡힐 때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제 행동이 후회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그는 제 과거 행적이 크게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엘자. 너를 용서해. 내가 네게 죄를 묻는 일은 이제 없어.”

오만하고 이기적인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자비를 베푸는 입장이라 생각했다.

네가 그 마녀의 핏줄인 건 사실이지 않나. 과한 면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네 핏줄의 죗값이질 않나. 나는 너를 죽이지 않았고 결국 너를 용서했어. 그러니 너도 내 탓을 해서는 안 돼. 내가 너를 용서했으니 넌 전처럼…….

“내게만 웃어 줘야 해.”

내가 시키는 대로 나만 보고 나에게만 웃어.

페루스는 여자를 꽉 안은 채 그리 속삭였다. 잠든 여자는 절절한 속삭임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른 숨을 뱉는 여자를 더듬다 바르게 눕혔다.

눈앞의 하얀 나신이 눈부셨다.

* * *

얼마 전까지 눈보라가 쳤던 것이 무색하게 하늘은 맑았다. 브륄은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푸르륵거리는 말을 토닥였다. 자신의 말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브륄은 주변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밖을 구경하게 된 말들은 대부분 흥분한 듯 거친 숨을 뿜거나 땅을 긁었다. 하긴, 밖을 나선 지 꽤 되었지. 자신처럼 말을 달래는 동료를 보며 브륄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곧 지워졌다. 브륄은 홀로 앞에 있는 에셀을 보며 한숨을 쉬곤 말을 몰아 그의 옆으로 갔다. 성문 앞에 바짝 붙은 에셀은 브륄이 온 줄도 모른 채 성문 저 위를 보고 있었다.

“각하. 위험하니 조금만 물러나십시오.”

“아……. 그렇군.”

에셀은 브륄의 경고에 그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는 말을 뒤로 물렸다.

“그보다 브륄. 각하라는 호칭은…… 좀 어색하군. 전처럼 불러도 좋아.”

“이제 공작님이신데 그리 불러야지 뭐 때문에 전처럼 부른답니까.”

즉각 답하는 브륄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에셀은 브륄의 답에 헛기침했다. 공작이니 각하니 하는 호칭은 그에게 아직 낯설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이 가지게 된 힘은 여자를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엘자……. 드디어 너에게 가. 늦었지만 가고 있어.

눈앞에 그리던 이가 어른거렸다. 잡힐 듯 말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 여자의 모습에 에셀은 이를 물며 성문을 노려봤다. 하필 이럴 때!

「깨어나셨지만 황녀님의 상태는……. 정신이……. 속된 말로 백치라…….」

가장 최근에 온 서신에 따르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간자는 아주 조심스럽지만, 백치라는 단어도 쓰고 있었다. 에셀은 서신을 읽어 가며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나마 편지 곳곳에 그럼에도 무사하십니다, 라는 말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 말조차 없었다면 그는 미쳤을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눈보라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관리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주인을 보다 말고 브륄이 말을 꺼냈다.

“……그렇겠지.”

“걱정 마십시오. 작업한 지 꽤 되었으니 곧 열릴 겁니다.”

“알고 있다.”

담담한 말과 다르게 에셀은 여전히 성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브륄은 입을 삐죽이며 성문에 붙은 사람들을 봤다. 요 며칠 심하게 몰아친 눈보라 때문에 바깥 성문을 여는 장치 중 일부가 단단히 얼어 버렸다. 흔한 일이라 금방 작업을 시작해 곧 마무리될 테지만 일분일초가 아쉬운 주인은 그 잠깐도 참기 힘든 듯했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끝나 가는 작업을 보다 브륄이 흘러가듯 물었다. 곁눈질하는 그의 눈은 붕대를 칭칭 감은 에셀의 왼쪽 눈가에 가 있었다.

“괜찮다. 견딜 만해.”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잘못했다간 영영 눈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괜찮기는! 나으실 때까지 머무르실 것이지. 브륄은 타박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짧은 염려만을 전했다. 의사도 못 말리는 걸 자신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 주인은 결투를 한 후 내내 앓다 며칠 전에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수도로 내려가겠다는 걸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주인을 붙잡고 있느라 온몸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눈보라가 심해 강제로 발이 묶여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라세르가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가주를 잃을 뻔했다.

“그래…….”

에셀은 브륄의 목소리에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왼쪽 눈가를 만졌다. 의식 않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의식을 하니 아픔이 느껴졌다.

‘누이는…….’

눈가가 아파 오자 자연히 마들렌이 떠올랐다. 일어난 그와 다르게 마들렌은 아직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직 정신도 완벽히 못 차렸다지. 그는 뒤를 돌아 높디높은 성 어느 창을 올려다봤다.

“……미안합니다.”

하나 남은 누이는 일생 두 가지 원을 가지고 살았다. 하나는 북부의 주인으로 인정받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가족의 원수를 갚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누이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걱정 마십시오. 의사 말이 가까운 시일 내로 일어나신다 합니다.”

“…….”

“이제 와 후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마들렌 님이 저리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닙니까.”

“…….”

“그나마 두 분이서 깨끗이 정리하셔서 다행이지 소문처럼 전쟁이라도 벌였다면 빨라도 일이 년은 지나 끝났을 겁니다. 길면 뭐…… 몇 년, 아니 그 이상 갈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그렇게 되었으면 북부는 약해졌을 테고, 수도에 가 황녀님을 만나는 것도 힘들어졌겠지요.”

“누이의 팔은?”

“각하의 눈과 비슷합니다. 운이 좋으면 돌아올 것이고, 나쁘면 검 들기는 글렀다 들었습니다.”

“돈을 아끼지 말고 방법을 강구하라 해.”

“벌써 전해 두었습니다. 그러게 명이라도 내리고 나오실 것이지……. 제가 만약 명을 안 내렸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누구 하나는 다시 성에 들어가 죽상을 하는 이들을 또 봐야 했겠지요.”

“누이의 기사들에게도 차별을 두지 마. 그들도 라세르가의 기사가 아닌가.”

“아니요. 그놈들은 당분간 좀 눌려 살아야 합니다. 각하께서 수도에 있는 동안 북부에 남은 우리 쪽 애들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아십니까. 갚아 줘야지요.”

“……그런 일도 있었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인이 집에 없는데……. 기 좀 눌리고 살았다 투덜거리더군요.”

“미안하다 전해야겠군.”

“됐습니다. 각하께서 공작위를 계승하셨으니 다들 뭐…… 다 풀렸을 겁니다.”

“그래.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겠지…….”

에셀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사실 그는 아직도 공작위에 대해서는 별 미련이 없었다. 자신을 묵묵히 따르는 이들에겐 미안했지만, 그에게 이 직위란 그저 여자를…… 엘자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이제 마들렌 님에게 붙인 감시는 없애도 됩니까?”

“아니. 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누이에 대한 감시는 더욱 강화하는 게 좋겠어.”

“예?”

브륄은 놀랐다. 결판도 난 마당에 감시를 줄이기는커녕 늘리라니. 아! 남은 세력 때문에 불안하신 건가?

“……성에 두고 가시는 게 불안하십니까? 그럼 지금 떠나라 명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공개적인 결투였으니 패자에게 떠나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기가 죽은 저들도 내심 바라고 있을 겁니다. 대충 적당한 영지 하나 마들렌 님께 드리고 몸을 추스르는 즉시 그곳으로 가라 하면…….”

“그건 안 돼. 누이는 내 시야 안에 둬야 한다. 못 떠나게 하면 더욱 좋지. 그냥 감시만 늘려.”

브륄은 왜 그러시느냐 물으려다 말을 멈췄다.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셀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마들렌이 있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브륄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주인의 표정에 그는 신을 찾을 뻔하다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눈동자는 더욱 어둡게 물들어 있었고 입은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다. 무표정하게 창을 바라보는 눈에 담긴 것은 적을 향한 경계뿐. 하나 남은 누이를 걱정하는 표정은 더 이상 어느 곳에도 없었다.

“……황녀님 때문입니까?”

“…….”

생사를 걸고 누이와 결투를 할 적에도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주인은 누구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자 누구보다 제 사람을 아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브륄은 제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에셀에게 물었다.

“혹 원수를 갚겠다, 마들렌 님이 황녀님께 해를 끼칠까 봐 그러십니까?”

“…….”

에셀은 브륄의 질문에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임을 모를 브륄이 아니었다. 브륄은 잠시 멍해졌다. 무언가에 맞은 듯 충격을 받은 그는 그제야 주인이 황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주인에게 황녀는 그 누구보다…… 같이 자란 형제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참 침묵이 흘렀다. 에셀은 말이 없어진 브륄을 한 번 보고는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멀리서 작업을 하던 이들이 다 끝났다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이만 가지. 수도로 간다!”

“예!”

에셀의 말에 브륄을 제외한 기사들이 절도 있게 외쳤다. 성문 틈 사이 얼음덩어리가 후드득 깨부수어지며 열렸다. 브륄은 생각을 멈추고 급히 동료의 옆에 섰다. 주인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자신도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성문 밖으로 수십 마리의 말들이 기사를 태운 채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북부의 말들이 동시에 앞으로 전진했다. 두두두, 땅이 울리며 사방으로 눈이 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 안 어느 곳에서 전서구 하나가 높이 날아올랐다.

* * *

강을 따라 줄지은 듯 있는 하얀 대리석 집, 서부 특유의 붉은 모래땅, 단맛이 강한 과일들……. 바다와 연결된 기다란 강을 가진 디본은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이자 외국에서 들여온 사치품들의 교역장으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것. 몇 년 전부터 디본은 황금 세공품, 동물의 뿔, 이국적인 옷차림보다는 다른 것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마약.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지금의 디본을 대표하는 상품은 다양한 종류의 마약이었다. 도시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우세리가는 서부 사막 지대에서 암암리에 재배한 마약들을 디본에 모아 두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 특히 수도의 귀족들을 상대로 아주 비싼 값에 약을 팔았다. 덕분에 원래 부유했던 디본은 더욱 부유해졌다.

돈이 모이면 사람이 모이는 법. 디본엔 돈을 보고 온 어중이떠중이가 많았다.

“모, 모르는 일입니다. 흐억, 제발…….”

“누굴 병신으로 보는지! 다시 묻지. 내 물건 어디 있지?”

이 자리, 무릎을 꿇고 억울하다 외치는 사내 벤 또한 그런 이 중 하나였다. 수도 출신인 그는 큰 도박 빚을 지고 가족과 함께 얼마 전 디본으로 도망친 어중이떠중이였다.

‘디본으로 가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도박도 끊을 테니 금방 돈이 모일 거고……. 그럼 빚을 갚을 수 있겠지.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아내에게 진주 목걸이를 하나쯤 사 주는 건 일상이 될 테지.’

벤은 장대한 꿈을 안고 디본으로 왔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디본이라 해서 아무나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디본에서 부자가 되려면 적당히 많은 돈과 운이 따라야 했다. 아니면 우세리가와 연줄이 있거나. 벤은 몰랐지만, 그처럼 가난하고 운 없는, 공작가와 연줄 따위 꿈도 꿀 수도 없는 자는 절대 디본에서 부자가 될 수 없었다.

‘제길! 똑같아! 내 삶은 언제나 같다고!’

그렇기에 벤은 다른 가난한 이들이 그렇듯 고작 잡일밖에 할 수 없었다. 배에서 짐을 내리고 받는 돈은 고작 푼돈뿐. 꿈을 꾸며 왔건만 실망스러운 현실에 벤은 절망했다. 절망감을 핑계로 그는 끊을 거라 다짐했던 도박을 다시 시작했다.

‘디본에서는 대박을 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수도에서도 그러했듯 운 없는 벤은 디본에서도 돈을 잃기만 했다. 그리고 돈을 잃은 그는 습관처럼 도둑질을 했다. 자신이 옮기던 물건 중 아주 작고 낡은 상자를 말이다.

‘귀족 나리들은 이런 거에 신경 안 쓰지. 비도 오는데 수고비라 생각해 어느 귀족 나리.’

벤의 생각대로 보통의 귀족이었다면 별문제 없었을지 몰랐다. 돈 많은 귀족들은 물건을 담는 상자조차 귀한 것을 원했으니 말이다. 낡은 상자 하나쯤이야.

그러나 그날 벤이 맡은 물건들은 우세리 가문의 것이었다. 우세리 가문은 자신들의 물건을 가져가는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위험한 물건이 그득했기 때문이리라. 어떤 것이든 우세리가의 물건을 슬쩍한 이상 벤의 목숨은 위험했다. 게다가 그가 슬쩍한 낡고 작은 상자에 공작이 천금을 주고 들여온 아주 희귀한 것이 있다면야.

‘잡아떼야 해! 모르는 일이라고. 안 그랬다간 나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전 그때…….”

“아, 죽고 싶은가 보지?”

“아닙니다. 공작님. 살려 주십시오. 제발……. 하지만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물어보십시오! 저는 그날 일만 했습니다! 다른 놈이 벌인 짓이 분명합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놈을 친히 죽여 주지. 네놈의 그 불어 터진 배를 가르는 건 나도 싫지만 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응?”

“정말 제가 한 짓이…….”

벤은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보라색 눈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찢어 버릴 듯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죽는다.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거야.

“그, 그게 사실, 공작님께서 아끼시는 물건이라곤……. 다 부서져 가는 상자에 들어 있길래 버, 버리는 것인 줄 알고! 정말 몰랐습니다.”

그게 뭔데! 고작 돌덩이 아닌가. 녹색으로 빛나긴 했지만 그다지 비싸 보이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물건을 옮기며 그 많은 상자 중 가장 허름하고 작은 상자 하나를 챙겼을 뿐이었다. 그렇게 두면 당연히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보석이 아니라고 값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벤은 억울했다. 하필이면!

“저도 모르게 손이……. 여기서 일하면 다들 하나씩 챙긴다길래,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값도 얼마 안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네놈이 그걸 팔아넘겼다는 건 지나가는 개새끼도 예상할 일이야. 내 말은 어디에 팔아넘겼느냐 이 말이다.”

“히익!”

“어디냐고!”

“그게…… 그때 술, 술에 취해서…… 여기 끌려오기 전까지 기, 기억이…….”

“…….”

“고작 은화 두 개를 받았습니다. 제, 제가 열 배로…….”

“……닥쳐.”

퍽―

타티카는 구둣발로 무릎 꿇고 있는 벤의 입을 사정없이 찼다. 벤은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옆으로 쓰러졌다. 옅은 색의 대리석 바닥에 피가 뿌려졌다.

“그게 뭔 줄 알고!”

타티카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쉬다 말고 이번에는 쓰러진 벤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벤이 흐으, 이상한 신음을 내며 꿈틀거렸다.

“개새끼가! 감히 너 따위 개새끼가!”

“용, 용서…….”

파랗게 질린 얼굴에 멈출 법도 했건만 타티카는 고함을 지르며 벌레처럼 꾸물거리는 벤을 계속해서 찼다. 솟구친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퍽―

코에 한 대.

퍽―

피를 흘리며 벌어진 입에 한 대.

퍽―

가슴에 한 대.

“으…… 사……려 줘.”

쓰러진 벤을 향해 가차 없는 발길질이 계속 떨어졌다. 벤은 타티카를 향해 손을 뻗기도,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했다. 뭉개진 발음이 이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러나 타티카는 벤이 움직일 때마다 발길질을 더 세게 할 뿐이었다. 곧 벤이 죽은 듯 늘어졌다.

“데려가.”

한참 후에야 발길질이 멈췄다. 진한 밤색 소가죽 구두에 붉고 진득한 것이 잔뜩 묻었다. 얼굴에까지 튄 피를 닦으며 타티카는 제 뒤편 뻣뻣이 굳어 버린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부하들이 후다닥 재빠르게 달려와 피투성이 벤을 잡았다. 두 사람에게 질질 끌려가는 벤의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진 채 온통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타티카에게 벤의 꼴은 당연했다. 감히 그걸 훔쳐! 피를 대강 닦은 후 소파로 걸어가 앉은 타티카는 저 멀리 쭈뼛거리며 서 있는 사내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하얀 대리석에 낭자한 자국을 보고 있던 로빗은 허옇게 질렸다. 먼저 뛰어갈걸……. 차라리 피투성이 사람을 끄는 게 낫지 주인과 둘만 남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이미 지나간 후였다. 그는 구두코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는 타티카의 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저놈 행적은 뒤져 봤나? 그걸 샀다는 놈을 찾았냐 이 말이다!”

“그, 그게 말입니다. 일대를 전부 뒤졌는데 아직까지…….”

“너도 죽고 싶은가 보지?”

“아, 아닙니다. 각하.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찾아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래야 할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야 뭔데! 응? 물건 하나를 간수 못 해서는! 못 찾으면 네놈들을 다 죽여 버릴 거야!”

‘멍청한 놈! 썩을 놈! 죽을 것이면 혼자 죽을 것이지.’

로빗은 끌려 나간 벤을 속으로 욕했다. 놈은 일을 쳐도 단단히 쳤다. 주인은 원래 이곳에 잘 오지 않았다. 수도와 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언젠가부터 주인은 수도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인이 이곳에 온 건 단 한 가지 이유. 벤 저놈이 훔쳐 달아난 물건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 공작은 직접 디본으로 오겠다 전해 왔다. 그런 물건인데 하필! 벤 저놈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었다.

“그…… 저놈을 찢어 죽일까요?”

“아니. 살려.”

“…….”

“살려 놔. 저놈은…… 저 개새끼가 감히!”

“알겠습니다.”

온갖 욕이 난무했지만 가장 무서운 단어는 살리라는 것이었다. 로빗은 공작이 사람 죽이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이상한 약을 마시고 녹색으로 녹아내린 피부, 꼬챙이에 파여 사라진 눈, 이국의 휘어진 칼에 세로로 찢어진 입, 뒤틀린 채 여기저기 부러진 뼈……. 로빗은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당장에라도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물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았다.

“놈의 가족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잡아 뒀습니다만…….”

“가족이라. 구성원이 어떻게 되지?”

“처와 아이 넷이 있습니다. 아들딸 하나에 쌍둥이 남매가 하나입니다.”

“적당한 곳에 넘겨. 그러고 보니, 모임에서 아이들을 구한다 했지. 수도로 보내. 대신 이번에 넘길 물건값은 좀 오를 거라 전하고.”

“알, 알겠습니다.”

불쌍한 것들. 벤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인생도 망쳤다. 차라리 도박 빚에 저 멀리 노예로 팔려 가는 게 나을 테지. 그건 뭐, 그래도 평범하지 않은가?

하지만 모임에 가게 될 아이들은…… 이제 막 6살이나 되었을까? 오, 신이시여 그 불쌍한 것들을. 자신도 같은 나이의 아들이 하나 있었기에 로빗은 벤의 막내 쌍둥이들을 생각하며 신을 향해 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 멀리 있는 신보다 그에게는 가까운 공작의 명이 더 중요했다.

* * *

“절대 안 됩니다!”

제임스의 손에 있던 종이가 책상에 밑으로 추락했다.

“목소리를 낮춰.”

“그럼 농담이라고 해 주십시오. 당장 입을 닫겠습니다.”

“…….”

비꼬는 말이 분명했지만 페루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제임스의 목소리에 미간만 살짝 찌푸릴 뿐 여전히 바쁘게 펜을 놀렸다.

밤이면 지긋지긋한 연회가 열릴 터였다. 참여하기 싫었지만, 그는 꼭 참석해야 할 몸. 연회 시작 전 엘리자벳과 산책을 나가려면 쉴 틈이 없었다.

“뭐라 말씀을 해 주십시오.”

제임스는 답답한 듯 주먹을 쥐다 참지 못하고 페루스를 재촉했다. 평소라면 이렇듯 재촉하는 일은 없었다. 페루스는 과묵한 편이었고 제임스는 그가 입을 열건 닫건 시키는 대로 하고 보고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도저히 시키는 대로 할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말하지. 테리오 후작에게 서신을 보내. 우세리가와 전쟁을 하겠다면 지원해 주겠다고 말이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북부에서 에셀 라세르가 공작이 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가 곧 도착할 텐데 지금에 와서 서부와 전쟁을 일으키면……. 우세리 공이 떠나면 북부를 압도적으로 누르기 힘들어집니다. 위험이 커진다 이 말입니다!”

“그럴지도…….”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신단 말인가! 제임스는 결국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쾅!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페루스는 지적하지 않았다. 제임스가 저리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

이유가 있었지만 페루스는 제임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유를 말해 준다면 제 앞에 서 있는 부하는 뒤로 넘어갈지도 몰랐다.

‘더는…….’

페루스는 더 이상 엘리자벳을 누구와도 나눌 생각이 없었다. 계약이 어찌 됐건 엘리자벳은 제 것이었다. 에셀 라세르건 타티카 우세리건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제 것. 물론 이리된 것은 제 탓이 컸다. 잠시 판단을 잘못해 실수를 한 건 자신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질 않나.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안겨 있던 엘리자벳을 떠올리고는 펜을 거칠게 놓았다.

“오늘 안으로 후작에게 서신을 보내. 공작이 돌아오기 전에 후작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깐 타당한 이유를 말…….”

“그만.”

“……죄송합니다.”

제임스는 저를 보는 파란 눈을 응시하다 한숨을 쉬곤 사죄했다. 무례하기도 했거니와 주인은 한번 결정한 일은 도통 바꾸는 일이 없었다. 어차피 꺾지 못하느니 차라리 빠르게 수긍하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 전에 한 번만 더…….

“테리오 후작이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키겠습니까? 지원해 준다 해도 고민할 겁니다. 그러니 시일을 조금 두고 보다…….”

“후작은 공작이 유통한 마약으로 아들 셋을 잃었지…….”

“오래된 일 아닙니까. 후작이 그 일로 공작을 탓하긴 하지만, 그는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승기가 확실하다 판단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좋아. 마침 오늘 밤 후작의 손녀가 마약을 하다 운 없이 죽을 예정이니. 내 서신이 도착할 때쯤이면 손녀의 소식도 전해지겠지.”

서부를 정말 전쟁터로 만드실 작정이군. 제임스는 그제야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젠장! 갑갑했다. 드문 일이지만 주인은 아주 간혹 이렇게 자신을 애태웠다.

‘그 여자…….’

주인을 이렇게 만든 이는 뻔했다. 아까는 너무 놀라 생각 못 했지만, 엘리자벳을 떠올리자 제임스는 짜증과 걱정이 몰려왔다. 멀쩡하던 주인은 황녀와 얽히면 늘 이랬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이유는 모르겠다만 분명 이번 결정에도 그 여자의 영향이 있겠지. 연회 첫날 일 때문인가.

“각하. 혹 이번 일……. 하아, 아닙니다.”

제임스는 울컥 화가 나 황녀에 대해 물을까 하다 입을 닫았다. 답을 듣기 겁났다. 추측만 하는 것과 확실히 확인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보다 언제 발을 빼시겠습니까? 지원한다 해도 공작이 이길 가능성이 높으니 빠르게 빠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만.”

대신 제임스는 전쟁에 집중했다. 페루스가 몰래 지원을 한다 해도 후작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주인도 모를 리 없으니 서부 세력이나 약화시키실 참이겠지.

“최대한 밀어 줘. 어느 쪽이건 완전히 이길 수 없게.”

“예?”

“서부의 다른 이들도 후작의 편에 서도록 설득을 도와. 공작은 서부 귀족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으니 생각보다는 수월하겠지.”

그러나 제임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그게 무슨!”

“……공작이 수도로 돌아오는 일은 이제 없어.”

“불가능합니다! 서부 귀족들은 공작을 버릴 수 없습니다. 공작 때문에 그들이 벌어들이는 이익이 얼마인데!”

귀족 사회에선 타티카를 은근하게 배척해 왔다. 창부 출신의 어머니, 권력을 쥐게 된 바탕, 그를 둘러싼 잔인한 소문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티카의 자리는 확고했다. 특히 서부에서 그는 거의 신에 가까웠다. 진심으로 따르는 이가 거의 없는 그가 그토록 권력을 쥘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돈. 타티카는 서부의 사막에서 마약의 재료들을 대량으로 키우며 부를 쌓았다. 돈은 눈에 보이는 것. 보이는 것을 좇아 서부의 귀족들은 원한을 잊고 타티카에게 충성을 쉽게 맹세했다.

“그들이 그걸 포기하겠습니까? 원한이 많다 하나 그들은 대부분 돈을 택할 겁니다.”

제임스는 사람의 습성을 잘 알았다. 돈을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지! 제 주인이 언제 이렇게 순진해지셨나. 제임스는 다시 소리를 높였다.

“서부는 이 시기에 건조하지.”

“무슨 말…….”

그러나 페루스는 무심히 다른 말을 했다. 뜬금없이 나온 서부의 기후에 제임스는 무슨 말씀이냐 따지려 했다. 그러나 페루스가 먼저 말을 이었다.

“창고와 경작지에 불이 나더라도 이상할 게 없어.”

“…….”

화재. 제임스는 페루스의 뜻을 알아들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불법이 아닌가. 공작이 아쉬워하겠지만…….”

그자는 돌아오지 못해, 엘자. 네 곁으로 다시 오게 할 수는 없지. 정신 나간 짓은 한 번뿐이야. 감히 내 것을 탐하는 것들은…….

“모조리 태워 버려.”

* * *

알렉스와 엘리자벳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물론 둘 사이에 무언가 있어 그런 분위기가 생긴 건 아니었다. 묘한 기류는 가까운 거리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알렉스가 엘리자벳에게서 떨어진 거리는 단 한 발짝. 그는 엘리자벳이 어딜 가건 그 거리를 유지했다. 거기에 그는 엘리자벳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와 온종일 함께하는 시간. 호위 기사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황녀 곁에 지나치게 붙어 있는 호위 기사는 여자들끼리의 일상에 익숙한 시녀들에겐 불편한 존재였다.

“저, 경?”

“무슨 일입니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세요. 전하께서는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

예를 들어 이런 경우. 전 같았으면 문밖에 있었을 알렉스가 지금은 하루 종일 내실에 있으니 시녀들은 그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말을 해야 했다.

“계속 이래야 하는 거야? 매일같이 비켜 달라 부탁하는 건 너무 불편해.”

“하지만 우리가 뭐라 하겠어.”

“누군가 뭐라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호위 기사라 하더라도 사내인데 명도 없이 침실을 드나드는 건 좀…….”

“위에서 별말 없잖아. 그리고 난 좋은걸. 이러나저러나 페테 경은 잘생겼고…….”

시녀들은 엘리자벳에게 오전보다 조금 얇은 드레스를 입혀 주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녀들은 알까? 시녀들 못지않게 알렉스도 그들이 거슬렸다.

왜인지 알렉스 그 자신도 몰랐지만, 그는 엘리자벳과 단둘만의 시간을 원했다. 돌아왔을 땐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렉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 그냥 엘자라 부르세요. 알렉스는 제 친구인걸요.’

엘자. 엘자. 엘자. 그는 엘리자벳을 엘자라 부르고 싶어 애가 탔다. 하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잘생겼다 해도 싫어. 사람이 어쩜 그렇게 변할까?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자, 전하도 계시는데 떠들지 말고 집중해. 거기 좀 당겨 봐. 높이가 안 맞아.”

알렉스는 엘리자벳이 들어간 문을 봤다. 시녀들의 속닥거리는 소리와 천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의 머리에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엘리자벳의 몸이 떠올랐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얇은 드레스니 한층 시원하실 거예요.”

“그보다 마리. 머리도 땋아 드리는 게 게 어때?”

“그럴까? 전하 어떠세요?”

문 너머의 소리는 계속되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거리며 밑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그는 제 천박한 생각에 놀라 발을 몇 걸음 물렸다.

“아…… 경, 여기 계셨나요?”

“예.”

그가 한창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 엘리자벳이 시녀들과 함께 나왔다. 엘리자벳을 부축하던 시녀들은 혹 그가 자신들의 대화를 들었나,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알렉스는 대강 대답한 채 엘리자벳에게만 시선을 뒀다. 그의 귀는 아직 붉었다.

드레스는 달라졌지만, 알렉스가 보기에 그녀는 항상 같았다. 하얗고 아름답고…….

그를 본 엘리자벳이 고개를 들더니 미소 지었다. 막 갈아입은 녹빛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싱그러운 미소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엘리자벳의 미소에도 알렉스는 서글펐다.

돌아온 첫날 꼭 저렇게 웃는 엘리자벳을 보며 알렉스는 크게 당황했다. 왜……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보시다시피 전하께서는…….’

물론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엘리자벳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보고 느끼고……. 엘리자벳이 어떤 모습이건 알렉스는 그것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다만 알렉스는 엘리자벳에게 사과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사과하고 싶었는데. 제인을 죽인 그날, 어떻게든 제 상황을,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는데. 그날 그녀를 슬프게 한 건 분명 자신이었다.

‘돌아왔습니다.’

‘…….’

‘알렉스 페테. 황녀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

‘……제게 할 말이 없으십니까?’

‘…….’

‘화내지 않으십니까?’

알렉스는 엘리자벳이 화내기를 기다렸다. 화를 내면 사과를 해야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지. 그리고 왜……라고 물었던 것에 대해 답해 드려야지. 그러나 엘리자벳은 화를 내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알렉스가 무어라 하든 입을 닫은 채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엘리자벳에게 알렉스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쩌겠는가. 대신 알렉스는 엘리자벳 곁에 있는 내내 속으로 말했다.

당신이 아끼던 그녀를 죽여…… 당신을 울게 해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동부로 갔다면 당신이 죽을 것을 알았기에 그리했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곁에. 엘자 당신의 곁에 있고 싶었을 뿐.

“……그게 다였습니다.”

“예?”

“아닙니다. 그보다 황녀님을 다시 침실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아…… 예.”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엘리자벳을 감싸며 침실로 이끌었다.

“잠, 잠깐만요. 경?”

“경?”

할 일을 빼앗긴 시녀들이 한 박자 늦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알렉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벳의 시중을 드는 것이 제 일인 것처럼 굴었다.

서로 무어라 속삭이던 시녀 중 하나가 침실로 따라 들어왔다. 알렉스는 따라 들어온 시녀를 무시한 채 엘리자벳을 창가 의자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둥근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천 옆 살짝 드러난 피부의 온기가 느껴지자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볕이 좋습니다.”

“…….”

“마음대로 나가시질 못하니 이렇게라도 햇빛을 쬐는 것이 좋습니다.”

“…….”

그와 다르게 엘리자벳은 조용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창으로 돌아간 고개와 느슨히 내려간 어깨로 엘리자벳이 만족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챘다.

빛이 눈부실 법도 했건만 엘리자벳은 뚫어져라 창밖을 봤다. 따뜻해진 날씨만큼 밖은 푸른 녹음으로 가득했다. 엘리자벳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손을 뻗었다.

알렉스는 손길에 담긴 의도를 알아채고 창을 밀었다. 스르르 밀린 창 사이로 풀내 가득한 바람이 불어와 엘리자벳을 쓸었다.

빛을 받아 부서질 듯 반짝이는 은발, 커진 녹색 눈, 좋게 휘어진 입술. 알렉스는 입안이 마르는 느낌에 또다시 침을 삼켰다.

“록산 영애.”

“예?”

“차를 가져다주시겠습니까? 황녀님이 목이 마르신 것 같습니다.”

“하, 하지만…….”

로잘린은 알렉스의 부탁에 어찌할 바 몰랐다. 리즈나 샬럿 등 다른 이였다면 단호하게 거절했겠지만, 로잘린은 거절을 망설였다.

“부탁합니다.”

결국 뚫어져라 저를 보는 금안에 질린 로잘린이 먼저 손을 들었다.

“잠, 잠시만 기다리세요.”

꾸물거리긴 했지만, 로잘린은 황녀와 호위 둘만을 남겨 둔 채 자리를 떴다.

시녀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알렉스는 다시 엘리자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벳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저 멀리 밖을 보며 미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자.”

초조했던 만큼 급박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엘자. 너무 많이 들어 그것이 저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엘리자벳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한 발 떨어져 있던 거리는 이미 손가락 한두 마디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머뭇머뭇 공중에서 몇 번 멈춘 손이 엘리자벳의 얼굴에 닿았다. 잡았다고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약한 힘이 작은 얼굴을 감싸더니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가…….”

“…….”

겨우 입을 뗐건만 알렉스는 뒷말을 하기 망설여졌다. 작은 얼굴을 받쳐 든 채 허리를 살짝 굽힌 알렉스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깔았지만 그럼에도 눈앞은 선명했다.

녹빛, 흐려진 눈을 한 엘리자벳이 그를 마주 봤다. 알렉스는 작게 한숨 쉬었다. 처음 느끼는 명치를 꽉 누르는 무게가 너무 이상했다. 엘자, 당신 앞에만 서면 나는…….

“입 맞춰도 되겠습니까?”

알렉스는 결국 쫓기는 듯한 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엘리자벳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두어 번 속삭인 후 미끄러지듯 엘리자벳의 입술로 입을 가져갔다.

부드럽게 문지르는 촉감에 엘리자벳이 입을 살짝 열었다. 그렸던 온기에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허겁지겁 서둘렀다. 엘리자벳의 입술은 도둑처럼 입맞춤할 때와는 달리 뜨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알렉스는 엘리자벳이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운 입술을 가져도 좋았다. 아니, 차라리 차가웠으면 했다. 그래야 제 온도를, 자신도 주체 못 할 이 온도가 내려갈 것이 아닌가.

벌어진 균열 사이 알렉스는 혀를 조심스레 밀어 넣어 봤다. 입술만으로도 마비될 것 같았던 단맛이 혀를 타고 온 입안에 맴돌았다. 그 맛을 음미하기 위해 알렉스는 일부러 혀를 느리게 움직였다. 여기저기 입안을 쓸자 엘리자벳이 천천히 화답했다. 곧 적막함을 깬 채 타액이 넘나드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엘리자벳 위로 그림자를 씌운 알렉스는 그녀가 숨을 쉬려 밀어 낼 때가 되어서야 입을 뗐다. 숨이 막힐 듯 집요한 입맞춤에 지친 엘리자벳이 의자에 눕듯 기댔다.

“……죄송합니다.”

그런 엘리자벳을 보며 알렉스는 또다시 사죄했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그의 눈에는 아쉬움이 그득했다.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닦은 그는 아까와 다르게 머뭇거림 없이 엘리자벳의 입술을 매만졌다. 축축해진 입술이 좋았다. 귀를 발갛게 물들인 그는 엘리자벳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좀 전과는 다른 쪽, 하는 소리뿐인 입맞춤이었다.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가벼운 입맞춤에 대한 사죄를 한 후 잠시 머뭇댔다. 한 번만 더……. 엘리자벳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내 툭 떨어졌다. 아쉬웠지만, 마음 같아선 계속하고 싶었지만 누가 올지 몰랐다.

툭―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알렉스가 허리를 펴자 품에서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렉스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종이가 접힌 채 떨어져 있었다. 알렉스는 무릎을 굽히고 종이를 품속으로 급히 가져갔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몸을 일으킨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엘리자벳을 확인했다. 엘리자벳은 그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종이를 좀 더 깊이 품으로 밀어 넣었다.

‘그보다 내가 부탁한 것은 가지고 왔나?’

‘루한 님께서 거짓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찾으시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모르는 이들은 그저 종이로 알겠지만 그래도 혹 몰랐다. 알렉스는 이것을 비밀로 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들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엘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얼마나 있었을까. 알렉스는 저와 다르게 거리낌 없이 엘리자벳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 * *

페루스는 방 안을 빠르게 가로질러 엘리자벳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밖을 보고 있는 엘리자벳을 제 쪽으로 일으켜 세운 후 품에 꼭 안고는 진하게 입을 맞췄다.

“잘 지냈어? 불편한 건 없었고?”

안 본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는 몇 년은 헤어져 있던 연인처럼 굴었다. 스스럼없는 말투와 자연스러운 접촉에 알렉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물러나지.”

페루스는 제 품에 안긴 엘리자벳을 요리조리 살피다 알렉스를 향해 나가라 손짓했다. 알렉스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몸을 돌려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저놈과 무슨 일이 있었지?”

“…….”

“응? 엘자.”

알렉스가 문 너머로 사라지자 페루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엘리자벳을 채근했다.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저놈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 없지. 제 것을 뺏긴 것처럼 못마땅한 얼굴이라니, 불쾌했다.

“혹 저놈에게 여길 허했어?”

작은 몸을 바짝 당기며 묻는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입술을 더듬는 긴 손가락은 차가웠다. 엘리자벳은 힐끔 페루스를 보다 파랗게 얼어 가는 눈을 보곤 고개를 숙였다.

“여길 내줬냐고.”

엘리자벳이 고개를 숙이자 페루스의 목소리에도 냉기가 서렸다. 차가운 분위기에 엘리자벳이 뻣뻣이 굳기 시작했다.

그러나 굳은 몸에도 페루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겁먹은 엘리자벳은 보기 싫었지만, 그보다 더 보기 싫은 건 그녀가 알렉스 그놈과 단둘이 있는 꼴이었다.

둘만 두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는 엘리자벳과 관련된 일이라면 작은 의심조차 참기 어려웠다. 고작 둘이 있는 걸 본 것뿐이었지만 페루스의 머리에는 이미 한창 진득한 상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저 개새끼가 감히 내 걸 제 것인 양 쳐다봐? 왜! 입이라도 맞췄나? 아니면 서로 더듬기라도 했나? 알 길이 없으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페루스는 분기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엘리자벳을 안은 채 소파로 갔다.

“아니면 여기야?”

푹신한 소파에 자리 잡은 페루스는 제 다리 사이에 엘리자벳을 앉히고는 드레스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을 쥐었다. 부드럽고 말캉한 가슴이 손에 착 감겼다. 그는 협박하듯 살덩이를 세게 주무르며 엘리자벳의 반응을 기다렸다.

“고개라도 저어 봐. 엘자. 그래야 내가 믿지.”

“…….”

당연히 답은 없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가슴을 농락하건 말건 숨 막히는 분위기에 오들오들 떨 뿐이었다. 그녀에겐 아픈 가슴보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말은 못 해도 고개 정도는 저을 수 있지 않나. 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던 페루스는 자극에 바짝 선 정점을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짜증을 애써 꾹꾹 눌렀다.

히끅거리기 시작한 엘리자벳은 귀 끝까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화를 내 봤자 소용없겠지. 게다가 전처럼 하겠다 약속한 건 자신이지 않은가.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그러니 떨지 마.”

한숨을 쉰 페루스는 드레스에서 손을 뺀 후 겁먹은 엘리자벳을 다독였다. 쉿, 하며 아기처럼 어르는 손길에 엘리자벳은 금방 진정했다. 딸꾹질 소리가 사라지자 페루스는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허탈해졌다.

“밖에 나갈 시간이지?”

밖이라는 말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살짝 페루스 쪽으로 했다. 작은 반응이지만 저를 향하는 게 좋아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저를 잘 볼 수 있도록 옆으로 앉혔다.

“그 전에…….”

투둑, 가슴께 리본은 쉬이 풀렸다. 페루스는 미소 지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천을 끌렀다. 그러자 상체를 감싼 천이 허물 벗듯 허리에 걸쳐지며 뽀얀 가슴과 옴폭 파인 배가 드러났다. 페루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지분댄 가슴을 응시하다 엘리자벳을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나가고 싶으면 어찌해야 하는지 알지? 가르쳐 줬잖아.”

얌전히 눕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엘리자벳은 멍하니 그를 보다 스륵 다리를 열고 페루스의 목을 감쌌다. 그 모습에 페루스는 만족스러운 듯 경쾌하게 웃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군.’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어찌하는지 알지, 라는 말에 엘리자벳은 알아서 다리를 벌리고 목을 감쌌다. 페루스는 제 뜻대로 교육이 성과를 보이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전이라면 다리 벌리는 것도 목을 감싸 안는 것도 따로 말해야 했을 것이다. 뭐, 그것도 결과는 같지만, 기분이 다르지 않나.

‘대신 황녀님이 좋아하시는 걸 보상으로 주시고…….’

‘그건 꼭 개를 훈련시키는 것 같지 않나.’

‘크흠, 흠.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지만 저런 백치 상……. 아니, 황녀님 같은 경우는 그리 교육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요, 반응도 보이시니 곧잘 따르실 겁니다.’

페루스는 제 마음을 인정한 후로 엘리자벳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엘리자벳을 정확히 마주 보고 그녀의 상태를 인정했다.

전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네가 내 뜻대로만, 전처럼 내 것만 되어 준다면 어떤 상태건 상관없어.

“엘자. 조금 있다 밖으로 가자. 너를 위해 꽃을 더 심으라 일렀어.”

제 욕망에 거추장스러운 엘리자벳의 옷가지들을 벗기며 페루스는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입맞춤했다.

* * *

엘리자벳은 온몸을 발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얀 소파 위 실오라기 하나 없이 더운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꽤 선정적이었다.

“읏…….”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페루스는 엘리자벳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꽃구경을 가자 약속한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엘리자벳보다 더 깊은 쾌락에 빠져 버린 그는 산책이고 연회고 모든 걸 잊어버린 채 그저 엘리자벳을 물고 빠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엘자. 적당히 물어. 이러다 내 걸 끊어 먹겠어.”

음탕한 말이 페루스의 입에서 나온 지는 오래였다. 전처럼 하겠다 마음먹은 후에는 이런 지저분한 말 따위 안 할 줄 알았건만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안고 있을 때면 저도 모르게 시정잡배처럼 굴고 있었다.

그는 저를 받아들인 채 끙끙대는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다 그녀의 허벅지를 손자국이 날 정도로 꽉 잡았다. 그러곤 진득한 미소를 띤 채 느리게 제 것을 뺐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천천히 빠지자 엘리자벳은 어찌할 바 모르고 손을 허우적댔다. 그게 꼭 저를 잡으려는 행위 같아 페루스는 낮게 키득거리다 결국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는 한참 웃다 반쯤 빠진 제 것을 다시 찔러 넣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엘리자벳이 허우적대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허리를 들었다.

소리도 내면 좋으련만 목에 이상도 없다는데 왜 신음조차 지르지 못하나. 페루스는 그 모습에 아쉬움을 느낀 채 제 입술을 핥았다.

페루스는 발끝을 오므리는 엘리자벳의 허벅지를 쥔 채 다시 안을 올려붙이기 시작했다. 그가 안을 헤집고 드나들 때마다 엘리자벳은 허리를 틀며 손을 콱 쥐었다. 손을 쥐며 어깨를 최대한 뒤로 펴자 봉긋한 가슴이 제 존재를 더욱 드러냈다.

“만져 달라 이건가?”

보기 좋게 흔들리는 가슴에 페루스가 장난스럽게 묻고는 몸을 숙여 엘리자벳의 가슴을 물었다. 축축하고 간질거리는 감촉에 고개를 젖힌 엘리자벳이 손을 내려 페루스의 머리를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저를 방해하는 손을 쉬이 막은 채 둥근 가슴을 세게 빨았다. 곧 밑에서 질척대는 소리 못지않은 또 다른 음탕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페루스는 저 좋을 대로 엘리자벳의 가슴을 빨다 혀로 단단해진 유두를 툭툭 건드리며 핥기도 했다. 페루스가 그럴 때마다 엘리자벳은 몸을 떨었다.

발발거리는 엘리자벳을 느끼며 페루스는 그녀의 나머지 빈 가슴을 쥐었다 원을 그리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의 말랑한 가슴은 페루스의 손에 딱 알맞게 찼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알맞음이 꼭 제게 맞춰진 것 같아 페루스는 기분 좋게 살덩이를 애무했다.

양 가슴을 감질나게 자극하자 엘리자벳은 잘게 떨면서도 몸을 풀었다. 페루스는 딱 붙은 하체로 그걸 느끼다 이를 콱 세웠다. 그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었지만 엘리자벳의 가슴엔 잇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강한 아픔에 엘리자벳이 자지러지며 안을 꽉 조였다.

커진 눈과 벌어진 입은 그녀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잘 보여 줬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아픔은 페루스에게 큰 자극이었다. 바르르 경련하며 빠듯이 물어 오는 느낌에 페루스는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미소였다.

페루스의 삐뚜름한 미소와 함께 엘리자벳의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쾌락과 아픔에 파들대며 우는 그 모습에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눈가를 혀로 쓸었다. 다정한 그의 행동에 엘리자벳은 눈을 껌벅거리다 말고 연하게 미소 지었다. 단순한 반응에 페루스는 아파? 묻고는 제가 괴롭힌 엘리자벳의 가슴을 다시 주물렀다.

손안에서 모양을 바꾸는 하얀 가슴은 붉은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페루스는 제가 남긴 흔적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열이 오른 유두를 손톱으로 세게 짓이겼다. 엘리자벳이 갓 잡힌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말할 수 있었다면 그만하라 몇 번은 소리 질렀으리라. 이번엔 여길 잘근잘근 씹어 볼까? 하얀 가슴 위 분홍빛 정점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그러면 아파하겠지.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괴롭히고 싶지도,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기 싫다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제 밑에 깔린 엘리자벳을 더 괴롭히고 울리고 싶었다. 세게 물고 자극하면 소리 내 울지도 몰라.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지도 모르지. 들은 지 한참 된 엘리자벳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페루스는 눈을 빛냈다.

페루스가 움직임과 동시에 엘리자벳의 눈물이 다시 뺨을 가로질렀다. 가슴을 물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가슴을 더는 괴롭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엘리자벳의 허리를 잡고 추삽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엘리자벳에게 더 괴로운 것이었다. 콱콱 제 것을 박아 넣는 페루스는 거칠었다. 부드럽게 해 줘도 힘들 텐데 욕심껏 세게 들이닥치는 페루스의 물건은 엘리자벳에게 지나치게 버거웠다. 엘리자벳은 제 밑을 헤집는 감각과 무게를 실은 채 내리꽂는 힘에 무력하게 흔들렸다.

느슨히 땋았던 은빛 머리가 풀린 채 흩어졌다. 입을 뻐금거리며 겨우 숨을 내쉬는 엘리자벳은 고통과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약하게 버둥댔다.

“안 돼. 엘자. 얌전히 있어야지.”

자신을 향한 어떤 거부 행위도 싫었던 페루스는 훌쩍이는 엘리자벳을 뱀처럼 칭칭 감고는 어떻게든 저를 받아 내도록 했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접합부에서는 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점점 조여 오는 곳 깊숙이 제 것을 쑤시며 페루스는 끝없이 엘리자벳의 이름을 불렀다.

“엘자…… 흐읏.”

그가 엘리자벳의 이름을 한 번 부를 때면 엘리자벳의 고개는 뒤로 끝까지 젖혀져 축축해진 하얀 목을 여과 없이 보였다. 페루스는 그렇게 드러난 아름다운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쉽게 자극받는 피부에 입 도장을 찍고 혀로 핥으며 이를 세웠다. 곧 엘리자벳의 목은 페루스의 흔적으로 뒤덮였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페루스는 제 욕심껏 엘리자벳 안을 드나들었다. 퍽퍽, 그가 제 것을 찔러 넣을 때마다 엘리자벳이 입을 벌린 채 힘들어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멈추지 않았다. 엘리자벳과의 교합은 그에게 모든 개념을 앗아 갔다. 흐르는 시간도, 할 일도, 페루스는 모든 것을 잊었다. 약을 한 것도, 술을 한 것도 아닌데 뇌가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한 여자. 제 밑에서 저 때문에 우는 엘리자벳뿐이었다.

엘자. 나는 너를……. 거친 숨과 함께 끝맺지 못한 말이 속을 울렸다.

몇 번이고 절정에 다다른 엘리자벳이 기절하기 직전에야 페루스는 허리 짓을 멈췄다. 흐으, 낮은 신음을 흘리며 그가 제 욕망을 쏟았다. 뜨뜻한 액체가 안에 퍼졌지만 엘리자벳은 너무도 지쳐 작은 반응조차 못 한 채 오롯이 그의 것을 받아 냈다.

잠시 굳은 채 떨던 페루스가 힘을 놓았다. 쓰러지듯 엘리자벳에게 붙은 그는 멍한 얼굴 여기저기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연결된 접합부에서 허연 것이 흘러나왔다. 눈물로 흠뻑 젖은 엘리자벳의 얼굴은 저 먼 곳을 보는 눈만 제외한다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생기가 넘쳤다. 홍조 띤 피부, 부푼 입술. 그러나 몸은 아니었다. 엘리자벳의 가는 몸은 축 늘어진 것이 인형 같았다. 그나마 숨 때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온몸 가득한 붉은 자국이 그녀의 몸이 살아 있는 이의 것이 맞다 알려 줬다.

페루스는 이대로 조금 있을까 하다 제 무게에 힘들어하는 엘리자벳을 생각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안에 있던 그의 것이 빠져나오자 엘리자벳의 손가락이 움찔, 작게 경련했다.

페루스는 흐린 눈으로 천장을 보는 엘리자벳을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침대는 좁았던 소파와 다르게 두 사람이 눕기에 충분했다. 그는 엘리자벳을 안은 채 침대 헤드에 편히 기대 한 이불을 덮었다.

“엘자……. 정원은 내일 가는 게 좋겠어.”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창밖을 보며 페루스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힘없이 그의 가슴에 기댄 엘리자벳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엘리자벳의 입장에선 워낙 지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페루스는 축 처진 몸이 괜히 신경 쓰였다. 꼭 사기꾼 같지 않은가! 힘없이 내려간 둥근 어깨를 쓸며 그는 혹 시간이 되나 계산을 해 봤다.

“너도 피곤한 것 같고 오늘은 이대로 쉬어.”

그러나 저녁이 되면 연회에 가야 할 테고 씻고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물론 다른 이를 붙여 엘리자벳을 내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는 또 싫었다. 저 없이 밖에 내보냈다간 또 누구에게 웃으려고!

“대신 내일은 일찍 온다 약속해.”

“…….”

“식사도 정원에 준비하라 이를게. 함께 식사를 한 후 네가 원하는 만큼 밖에서 머물면…….”

“…….”

“괜찮지?”

안 된다. 결론을 내린 그는 엘리자벳의 귀를 살짝 물며 이해해 달라 속삭였다. 엘리자벳은 반응하지 않았다. 워낙 지쳐 버렸기에 엘리자벳은 졸린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벳이 괜찮지 않다 거부를 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랬다면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묶어서라도 그 뜻을 꺾어 버렸을 테니깐.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엘리자벳의 몸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다 작은 손을 제 손안에 넣고 초조하게 조몰락거렸다.

사실 그는 여기 오기 전부터 엘리자벳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던 말이 있었다.

“그보다 네게 할 말이 있어.”

“…….”

“우리 결혼해.”

그는 하얀 손을 한참 매만지다 숨을 내쉼과 함께 고민하던 말을 툭 던졌다. 제정신인 엘리자벳이 들었다면 미쳤냐며 수십 번은 소리쳤을 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엘리자벳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페루스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벳에게서 작은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자 페루스는 예상했음에도 입안이 썼다. 예전이라면 사랑한다, 고맙다 속삭이며 발을 동동 굴렀겠지.

“물론 너에겐 갑작스러울 수 있어. 하지만 시기가 좋아. 거슬리는 것들도 없을 때고 세간에 도는 소문도 알맞아.”

“…….”

“그동안 우리 사이 일이 많았지. 하지만 그건 이제 정리됐고…….”

“…….”

“슬슬 때가 된 것 같아.”

“…….”

“나와 결혼해. 엘자.”

말을 다 뱉고 나자 페루스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갑자기 정한 것도 아니요 오래전에 결정한 일인데 왜 이러나.

실제로 페루스는 엘리자벳과 결혼할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해 왔다. 물론 처음 엘리자벳을 장미궁으로 끌고 갈 적에는 분명 성 노예로 굴리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글쎄……. 엘리자벳을 장미궁에 가둔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그녀를 성 노예는커녕 첩으로도 추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끔찍하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리 안 한 것이 다행이었지만 당시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죽이기는커녕 천하게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시일은 걸리겠지만, 즉위식을 마치면 엘자 네가 황제가 되고 난 후 곧장 식을 올릴 거야.”

“…….”

“사실 나는 더 빨리했으면 해. 그래서 말인데…… 우선 약식으로 하자.”

“…….”

“기억해? 엘자 네가 내게 천일홍을 주던 날……. 내년에 천일홍이 필 때면 흰 드레스를 입고 싶다 했지. 늦었지만 올해 입을 수 있어. 내가 장담해.”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손을 쥔 채 혼자만의 생각을 읊었다. 엘자. 다른 건 몰라도 흰 드레스를 입은 넌 누구보다 아름다울 거야. 엘리자벳과 나란히 서 식을 올리는 장면을 그리자 페루스의 얼굴에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내 앞에 서 있겠지. 그러면 나는 네게 입맞춤할 테고. 나와 너.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될 테지.

“식을 올리고 나면 더 잘해 줄 거야, 엘자. 내가…… 내가 너를 그동안 힘들게 한 것도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

“정말 잘해 줄 거야. 약속해.”

“…….”

“첫날밤도…….”

첫날밤에 생각이 미치자 페루스의 표정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제가 한 짓이지만 엘리자벳의 첫날밤은 끔찍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했던 짓이지만 엘리자벳에게 그날 밤은…….

‘그만……. 제발 그만해. 페루스.’

‘네 처지가 아직도 실감이 안 되나? 또 맞기 싫으면 얌전하게 굴지.’

‘제발…….’

짝―

‘아악!’

‘귀 울리니깐 소리 지르지 마. 그리고 말을 높이라 몇 번이나 말했지. 아까 그렇게 맞고도 머리가 안 돌아가나?’

‘잘, 잘못…….’

짝―

‘더듬지 말고 제대로 말해.’

‘흐윽……. 잘…… 잘…… 잘못…….’

짝―

‘하아, 몇 번을 더 말해야 하지? 응?’

‘잘못했어요! 잘못…… 흑, 했어요.’

‘……알았으면 네가 할 일을 해.’

‘……할 일?’

‘하……. 다리를 벌리라 이 말이야. 이제 창부가 될 테니 네가 할 일은 그뿐이지.’

‘아냐! 나는…… 창부가 아니야! 페루스 나는 네…….’

짝―

그날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페루스는 좋았던 기분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엘리자벳을 가만히 응시했다. 제 품 안에 있는 엘리자벳은 작고 가녀렸다. 그때도 분명 이랬겠지. 이렇게 작았을 거고 이렇게 가녀렸을 게 분명했다. 때릴 구석이라곤…… 없었겠지.

“……첫날밤도 네가 원했던 그대로 할게. 이번엔 안 된다 웃지 않아. 네가 원했던 대로 촛불도 켤 테고 꽃잎도 흠뻑 뿌릴 거야. 장미 향 가득한 욕조에서 함께 목욕하는 것도 좋겠지.”

“…….”

“행복할 거야. 너도 나도.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분명 행복할 거야……. 그럴 거야.”

“…….”

페루스는 작은 손을 세게 잡으며 어떻게든 떨림을 멈추려 노력했다.

아냐. 엘자. 그날은 네 첫날밤이 아니야. 우리는 이제 시작할 테고 네 첫날밤은 나중이 될 거야.

페루스는 행복할 앞날을 억지로 그리며 과거를 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리할수록 과거의 기억은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들러붙었다.

페루스는 결국 떨쳐 내기를 포기했다. 그는 바닥까지 떨어진 기분을 줍지도 못한 채 엘리자벳을 더욱 꽉 안았다. 익숙한 체취에 마음이 위로받는 것 같기도 했고, 더 괴로운 것 같기도 했다. 미묘했다.

적막함 속, 얽힌 손끝에 엘리자벳의 배가 닿았다. 그러자 문득 아이에게 생각이 미쳤다. 자신과 엘자의 아이……. 아이…….

생경한 단어에 페루스는 판판한 배에 원을 뱅뱅 그리며 입술을 달싹이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엘자. 너는 아이를 좋아하니 네 몸만 괜찮다면 하나…….”

“…….”

“아니 둘……. 셋 정도는 괜찮겠지. 아이는 많으면 좋다지만 넌 몸이 약하니깐.”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페루스는 제 얼굴이 약간 뜨거운 것 같다 느끼며 입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한번 열린 입은 아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는지 쉬지 않았다.

“만일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는 너와 나를 꼭 반반씩 닮았으면 해.”

“…….”

“물론 너만 닮았어도 사랑스럽겠지만, 기왕이면 나를 닮은 구석도 하나쯤은 있는 게 좋겠어.”

말을 꺼내다 말고 그는 제 상상에 놀라 입을 닫았다. 그는 스스로 장담하건대 아이를 크게 원한 적이 없었다.

엘리자벳은 몸이 약했고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가 임신하는 것이 크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엘리자벳을 멸시한 지난 세월, 그녀에게 아이를 낳으라 종종 종용하곤 했는데, 이유는 단 하나였다.

구속.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로 인해 좀 더 제게 얽매이길 바랐고 그걸 위해 귀찮은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원하지 않지만 원하는 아이.

엘리자벳을 제게 묶어 둘 구속품.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제게 묶어 두기 위해 항상 안달했다.

입을 닫은 페루스는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해는 이제 거의 끄트머리에서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늦더라도 다시 올 거야. 시녀들에게 말해 둘 테니 먼저 자고 있어.”

가기 싫었지만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페루스는 엘리자벳 뒤에서 몸을 조심히 일으켰다. 그러나 순간 엘리자벳의 고개가 갸우뚱하더니 아무렇게나 넘어갔다.

“……엘자?”

축 늘어진 몸에는 힘이 없었다. 놀란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부르며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아무런 반응 없이 코에서 주륵, 피를 흘렸다.

“엘자!”

곧 방 안에서 페루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 * *

엘리자벳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그녀는 컴컴한 그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 한없이 밑으로 또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것을 안다 해서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추락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속도가 워낙 느려 별 두려움을 못 느꼈다.

그리고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편한 곳. 누가 들으면 우습다 할 이야기였다. 컴컴한 곳에서 홀로 떨어지고 있다는데 좋아할 이는 없다 보는 것이 타당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에게는 이곳이 그 어디보다 편했다. 혼자 있는 곳. 얼마나 좋은 곳인가. 엘리자벳 자신도 어느 순간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냥 어느 날, 어느 때. 그녀는 이곳을 인지했고 그 순간부터 추락하고 있었다.

‘이렇게 떨어지다 보면 언젠가 다 끝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엘리자벳이 간혹 떠올리는 것은 끝이었다. 편히 이곳에 안주하는 주제에 과한 욕심일지 모르지만…… 엘리자벳은 여기서 쉬는 것도 그만두고 싶었다. 편한데 왜 끝내고 싶냐 물으면 이유는 단 한 가지.

‘……엘자.’

‘……대로 ……황녀님.’

‘……뿐이 ……니다.’

목소리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엘리자벳은 아주 가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괴롭게도 그녀는 그 목소리들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았다.

오로르도. 엘리엇도. 페루스도. 타티카도. 에셀도. 벨도. 제인도. 사라도……. 모두 다 잊고 종국에는 자신조차 잊고 싶은 그녀에겐 가끔이라도 들리는 목소리가 큰 고역이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몰랐지만, 목소리들은 점차 선명해졌고 들리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괜찮으실……. 몸이……. 그보다…….”

“……정말 ……건가?”

지금도 마찬가지.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는 이였으나 다른 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아는 이였다. 엘리자벳은 익숙히 아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이런 말…… 모르…….”

“……말해.”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목소리들은 선명히 귀에 박혔다. 전보다 선명해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에 엘리자벳은 귀를 막은 채 악을 질렀다. 검은 공간에 아악 하는 비명이 찼다. 아니, 찬 줄 알았다.

“……상황을 볼 때…… 정확하지는……. 하지만.”

다른 이의 소리는 오히려 가까워진 가운데 엘리자벳은 제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큰 두려움이 성큼 몰려왔다.

‘안 돼! 절대 안 돼!’

뭐가 안 되는 건지도 모른 채 겁에 질린 엘리자벳은 필사적으로 아래로 향하려 했다. 떨어져야 해. 저 밑으로 가야 해. 저 소리에서 멀어져야 해!

하지만 추락 속도는 여전했다. 엘리자벳은 헤엄치듯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조금 전까지 편하다 느꼈던 공간이 악몽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결론이 뭐지.”

죽어도 듣기 싫었던 이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저 멀리 있었는데. 끔찍한 목소리는 이제 바로 옆에서 들렸다. 공포에 질린 엘리자벳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옆을 봤다.

다행히 엘리자벳이 피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없어. 그는 없어. 지

독하리만치 텅 빈 공간을 보며 엘리자벳은 안도하곤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는 여전히 여기야.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나는 이곳에 있어. 그를 볼 일은. 그들을 다시 볼 일은 없어. 나는 홀로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그러나 숨을 내쉰 다음 순간, 엘리자벳은…….

“전하께서는…….”

“…….”

“……아이를 잉태하신 것 같습니다.”

끝끝내 보기 싫었던 이와 마주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