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외전 ― 닮은 꼴(알렉스 편)
“폐,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크리스. 내가 배신을 용서할 이로 보여요?”
“그게 아닙니다. 다뷔네는…… 폐하를 만나기 전에…….”
“저렇게 장성한 애새끼도 있고 말이야.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필립은 제 앞에 끌려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족들을 보았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이야! 가족들은 엉망이었다. 부인 다뷔네의 초록 머리는 헝클어졌고 온몸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 알렉스는 한쪽 눈이 퉁퉁 부어 어미 품에 안긴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가족들 목이 떨어질 것을 생각하자 필립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안 돼! 내가 어떻게 숨겨 왔는데!
“나, 나의 엘. 그만하세요. 그만하고 나와…….”
짝―
“시끄러워요. 입 다물어요. 크리스.”
씨발. 미친 노친네 같으니라고! 필립은 제 뺨을 잡으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분명 저를 보며 크리스, 크리스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 때인데, 나의 엘이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아, 아버지.”
다뷔네의 품속에서 알렉스가 필립을 불렀다. 필립은 저와 똑 닮은 금안을 보며 입에 힘을 줬다.
“나의 엘.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오 그런가요. 크리스.”
연인에게 하듯 황제가 필립의 뺨을 쓸었다. 그렇게 자신이 때린 뺨을 부드러이 쓸더니 필립의 목에 팔을 둘렀다. 곧 진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붙어 오는 황제에 필립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이대로 비위를 맞춘다면 가족을 살릴 수 있기에 필립은 열정적으로 답을 했다. 다뷔네는 그 장면에 재빨리 알렉스의 입과 눈을 막았다. 자신은 필립을 이해했으나 어린 알렉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분명했다.
“믿지는 않지만 용서하겠어요. 크리스.”
입을 떼며 황제가 말했다. 필립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황제의 손에 입을 맞췄다. 필립의 손을 잡고 황제가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을 향하는 걸음에 필립은 당황했지만 애써 모른 척 황제를 따랐다. 그러나 저절로 떨리는 손은 어찌할 수 없었다.
“크면 크리스를 똑 닮겠구나. 10년만 지나면 내 곁으로 들일 만하겠어. 아니면 지금 들일까?”
가벼운 어투였지만 황제 주변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심지어 다뷔네는 제 처지조차 잊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나를 버릴 참입니까? 이런 아, 아이 때문에? 나의 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필립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을 펴고 다뷔네 앞에 섰다. 어미 품에 안긴 채 위를 올려다본 알렉스는 오랜만에 아비의 등을 볼 수 있었다. 함께였을 땐 항상 저 등에 업혔는데……. 익숙한 등에 알렉스는 힘껏 팔을 뻗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 봤자 모두 크리스, 당신의…….”
황제가 이리저리 더듬는 손에 필립은 자신의 얼굴을 뜯어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 얼굴 때문에! 다뷔네가 사랑스럽다 멋지다 쓰다듬어 줄 때는 그렇게나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뷔네가 햇살 같다 칭한 금발도, 알렉스가 신기하다 만지던 눈도, 지금은 끔찍했다. 이 얼굴은 자신과 가족을 생이별시켰고, 가족을 울게 하며, 끝내는 가족을 위험하게 했다. 필립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필립은 제 감정을 잠재우고 헤실헤실 웃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엘.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그럼 우리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시종장.”
조금 떨어져 있던 남자가 후다닥 황제 옆으로 달려왔다.
“정부들이 부정을 저지르면 어찌하나.”
“……부정을 저지른 상대와 본인 모두 사형입니다만, 기본적으로 폐하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엘! 그게 무슨! 저들은 나와 상관이!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필립. 그만해도 좋아. 너는 살려 주마. 내 가장 귀애하는 그대를 죽일 수는 없지. 하지만 저들은 용서가 안 돼.”
필립은 제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목소리에 황제의 발치로 몸을 던졌다. 그새 정신을 차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 이름을 정확히 부른다 해서, 위엄을 찾았다 해서 황제가 제정신인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는 황제가 멀쩡한 정신으로 미친 명을 내리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살려 주십시오. 폐하. 제 가족을 살려 주십시오. 이들은…… 제 부인과 아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헤어지기 싫다 제가 붙잡아 그런 것입니다. 그저 기다린 것뿐입니다. 폐하 곁에 온 후로는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오, 그런가? 하지만 내 알기로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던데. 그리고 얼마 전 수도로 이들을 이사시켰지. 감히 내가 하사한 물건들로 말이야.”
“그, 그건.”
필립은 고개를 더 수그린 채 황제의 발을 잡았다. 그럼 생이별한 가족과 편지 한 통 주고받을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여기 온 것은 내 뜻이 아닌데.
하지만 그는 감히 불만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황제의 침궁으로 끌려온 이들은 전부 과거의 연을 끊어야 했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상관없이.
아무도 이유를 몰랐지만 지엄한 황제의 명이었기에 모두 티클만 한 불만조차 낼 수 없었다.
“필립. 할 말이 더 있나?”
“하지만 다른 이들도! 다른 이들도 그리하지 않습니까. 봐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폐하. 저에게만, 제 가족에게만 가혹하실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말에 황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억울함에 시야가 흐려진 필립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황제의 침궁에 있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가족과 연을 끊었지만, 뒤에서는 아니었다. 황제의 옆자리는 정식이건 아니건 권력을 얻어먹기 좋은 곳.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권세를 위해 조건에 맞는 이를 노예로 사들이거나 제 자식까지도 팔아 황제의 옆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궁에 들어온 이들은 은밀히 제 뒷배와 연락하며 베갯머리송사를 했다. 황제는 그 사실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아끼는 정부라면 어느 정도 요구를 들어주었다.
“넌 안 된단다. 필립. 내가 크리스란 이름을 하사한 이상 넌 안 돼. 다른 이들은 눈을 감아 줄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없구나.”
황제는 엎드려 울부짖는 필립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었다. 들린 얼굴은 누군가와 꼭 닮았다. 단순히 금발에 금안인 것을 넘어……. 크리스? 아니야 놀이는 끝이야. 이러면 안 되는데. 황제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울고 있는 이는 분명 크리스였다. 머리는 필립이라 하는데 눈은 크리스를 보다니……. 웃음이 나왔다. 최근 이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
“폐하. 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정한 황제의 말에 필립이 말을 더듬으며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듣고 있지 않았다. 황제는 필립을 쓰다듬으며 다른 이를 보고 있었다. 아아, 크리스. 제 손으로 죽였지만, 황제는 크리스를 잊을 수 없었다. 제 생애 그만큼 저에게 사랑을 준 이가 없었기에, 그만큼 제 옆에 오래 머문 이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를 잊을 수가 없어. 그를……. 죽도록 미운 사람인데 잊을 수가 없어.’
‘그럼 제가 놀이를 가르쳐 드릴게요. 재미있는 놀이를 알고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걸?’
시작은 간단한 놀이였다. 크리스 옆에 머물렀다는 자색눈의 소년은 황제에게 재미있는 놀이를 제시했다. 멍청한 놀이라 생각했지만, 마음이 끌렸기에 황제는 장난삼아 놀이를 시작했다. 금발, 금안의 사내들을 모으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 크리스와 연애하듯 즐겼다. 꽤 즐거운 놀이였다. 놀이는 황제의 지루한 삶에 활력을 주었고, 외로움도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그러나 놀이는 속임수일 뿐, 놀이가 끝나면 황제는 더욱 크리스가 그리웠다.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 황제는 놀이를 계속하게 되었다. 침실에서 잠깐 하던 놀이는 시간을 점차 늘려 나갔다. 티타임, 식사 시간, 일어나는 아침 등 업무 시간을 제외한 대다수의 시간이 놀이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놀이 시간이 늘어날수록 황제의 정신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다.
“크리스…… 당신은 안 돼.”
크리스 당신은 안 돼. 약속했잖아. 다시는…… 그날처럼 다른 여자에게 안기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나한테 말했잖아.
눈을 깜빡이자 주변이 바뀌었다. 울부짖는 정부, 화려한 궁은 사라지고 그날 낡은 건물 안에 황제는 들어서 있었다. 삐걱거리는 마루.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술병. 왁자지껄 떠드는 이들. 천한 여자와 춤추는 크리스가 보였다.
“폐하 제발. 제가 이리 빌겠습니다. 다뷔네와 알렉스를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만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들에게 편지 한 통도, 아니 작은 메모 한 줄도 보내지 않겠습니다. 이들을 그리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폐하 옆에 있을 테니…….”
짝―
힘껏 내리친 손에 필립의 뺨이 전보다 더 붉게 부어올랐다. 황제는 저를 거역하는 정부를 발로 차고 시선을 돌렸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초록 머리 여인은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황제는 저보다 젊고 싱그러운 여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다 발을 들었다.
천한 것이! 저 얼굴을 한껏 때린 다음 목을 베야 화가 풀릴 것 같았다. 내 것이야! 내가 평생을 사랑한 내 연인이고 내 반려야! 그런데 감히 너 따위가!
발이 정확히 누군가를 때렸다. 그러나 황제의 발에 닿은 건 목표했던 여자가 아닌 정부의 등이었다. 언제 기어왔는지 필립은 제 가족을 힘껏 감싸고 있었다.
아비가 억 하고 신음을 토해 내자 어미와 아비 품에 갇힌 아들이 아버지! 하고 고함을 쳤다. 울면서 아비를 부르는 어린 아들의 모습에 방 안 사람들이 입을 막고 안타까움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나 이 가족을 살릴 권한을 가진 단 한 사람, 황제의 눈에는 그 장면이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가여운 가족의 모습은 황제의 열등감을 부추겼다. 크리스가 죽은 후 황제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물론 아들도, 잘 따르던 손자들조차 그녀를 피했다. 한평생 사람들의 정이나 사랑 따위 갈구한 적 없는 그녀였지만, 황제 엘라르는 현재 너무도 외로웠다. 왜 저를 피하는지 모를 사람들을 보며, 한 조각 진심이 없는 사람들을 대하며 그녀는 한없이 떨어져 갔다.
만약 그녀가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았다면, 그래서 행동을 고쳤다면 손자들은 여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젊은 사내를 옆에 끼고 조부라 부르라 명령하는 조모는 어린 손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기 충분했다.
“……시종장.”
붉게 핏줄이 선 눈을 보며 시종장이 가까스로 답을 했다. 황제의 표정을 보건데 저 가족은 끝이 좋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모시는 주인이지만 역시 잔인한 이라고 생각하며 시종장은 안타깝게 가족을 쳐다봤다. 천한 것이 얼굴 하나로 궁에 와 정부의 자리를 받고 온갖 시중을 명할 때는 콱 죽어 버리라지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사람은 분수에 맞게 평범히 사는 게 최고지라는 생각을 하며 시종장은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저것들을 여기서 던져 버려라. 아, 물론 크리스는 안 돼.”
“예?”
“말을 못 알아듣는가! 저것들을 던져 버리라고! 당장! 던져 버려! 죽을 때까지 던져! 내 눈앞에서 죽여 버려!”
펄펄 뛰는 황제는 광인 그 자체였다. 시종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병사들을 불렀다. 여기서 한 번 더 지체했다가는 제 목이 잘릴 판이었다.
곧 빠른 속도로 처형이 준비되었다. 햇살이 가득한 오후,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서 어울리지 않게 병사 여럿이 왔다 갔다 분주히 움직였다.
“안 돼! 폐하 그만하십시오. 그만하세요!”
필립은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냉엄한 황제는 묶인 정부 옆에서 앞만을 봤다. 병사들이 모자를 밖으로 밀어 던졌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떠밀린 여자는 아이를 제 품 안에 깊이 끌어안았다. 아주 잠깐,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다뷔네는 밑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온몸을 때리는 강한 충격을 느꼈다. 아픔에 신음을 흘리며 다뷔네는 아들을 더욱 꽉 안았다.
“살아 있습니다.”
“아, 아……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다행히 푹신한 잔디가 모자를 살렸다. 모자가 살아 있다는 말에 필립이 신에게 감사를 올렸다. 그러나 시종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안도가 아닌 끔찍한 처형의 시작을 알리는 한숨이었다. 애초에 여기서 던져 봤자 죽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낮은 2층인 데다 밖은 잔디……. 그러나 황제는 미쳐 날뛰는 와중에도 분명히 말했다. 죽을 때까지 제 눈앞에서 던지라고.
“다시 시행하시오.”
“그게 무슨 말이야! 폐하! 이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황제는 꼼짝하지 않은 채 다시 제 눈앞에 끌려온 모자를 봤다. 아이는 충격으로 혼절해 있었고 여자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여기저기 풀을 묻힌 채 떠는 여자는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특히 아이를 잡은 손은 핏기가 사라지다 못해 시체처럼 창백했다.
“안 돼! 안 됩니다! 폐하 제발 그만두라 말해 주십시오!”
“살려 줘요. 필립…….”
뒤늦게 황제의 의도를 눈치챈 필립이 고함을 질렀다. 다뷔네는 제 운명을 알아채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처형은 계속되었다. 모자는 다시 한번 필립의 앞에서 사라졌다. 몸을 틀며 반항하는 다뷔네는 병사들의 손짓에 쉽게 공중으로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펄럭거리며 드레스 끝자락이 필립의 시야에서 머무르다 곧 없어졌다. 여자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고 바닥에 부딪치길 반복했다. 여자의 몸이 넝마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미친 늙은이!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여라! 내가 죽고 말지! 내가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그만둬! 이 마녀야!”
필립은 제 혀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콰직 하고 물린 것은 황제의 팔이었다.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황제는 제 팔을 물려 놓곤 시종에게 눈치를 줬다. 곧 시종이 필립의 입안에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보기 힘든 광경의 반복. 비명 소리가 사라졌다. 다뷔네는 한계를 넘는 고통에, 필립은 막힌 입으로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다뷔네는 살아 있었다. 시종장을 비롯한 방 안 사람들은, 심지어 처형을 집행하는 병사조차 다뷔네 보기가 괴로워 시선을 떨궜다. 그러나 한 사람. 황제는 또렷이 다뷔네를 봤다.
“다시 시, 시행하시오.”
또다시 반복. 다뷔네는 더 이상 걷지 못했다. 온몸 가득 피가 흥건했고 머리를 부딪쳤는지 의식도 또렷하지 않았다. 팔도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오면서도 다뷔네는 제 팔의 힘을 놓지 않았다. 다뷔네의 품 안 아이는 잠을 자듯 미동이 없었다. 여기저기 흐르는 피가 아니었다면, 비틀린 발목이 아니었다면 잠을 자는 것으로 착각할 만했다. 아이를 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여자의 목을 베어라. 그리고 아이는…… 아까우니 살려 둬.”
황제의 머리가 어느 정도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황제는 이 이상 했다가는 제 정부에게 이상이 생길지 모른다 판단했다. 게다가 크리스와 닮은 아이는 죽이기에 아까웠다.
황제가 오만하게 일어서더니 시중인들을 이끌고 방 밖을 나갔다. 시종장은 따라나서려다 방 안 상황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필립은 혼절해 있었다. 쯧쯧,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좋지. 비참한 광경에 시종장은 혀를 차다 황제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필립에게 이상이 생겼다면 타티카를 보내. 그리고 그 아이…….”
“폐하! 알려 드릴 일이 있습니다.”
황제가 시종장에게 알렉스의 처분을 명하고 있을 때 급히 시종이 뛰어왔다.
“그…… 엘리자벳 황녀님이.”
“엘자!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빨리 말해 보라.”
“그…….”
“폐하의 말씀이 들리지 않나.”
답답해하는 황제를 대신해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폐하께서 처, 처형을 명하실 때 황녀께서 밑을 지나가신 것 같습니다.”
“뭐! 그 아이가 다쳤나? 천한 것과 부딪치기라도 했어!”
황제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요즘 자신을 멀리하긴 했으나 여전히 귀여운 손녀였다.
“아닙니다. 보기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충격이 크셨는지 혼절하여…….”
황제는 가만히 멈춰 눈을 감았다. 왜 하필! 다치지 않았다는 안도도 잠시, 황제는 손녀를 생각하며 입술을 물었다. 최근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겨우 달래 놨는데. 분명 일어나면 다시 멀리하겠지.
“……알았다. 충격이 남지 않게 잘 치료하도록 하라. 가능하다면, 기억을 없애는 것이 좋겠지. 그 아이는 여려 그런 것을 못 보니 말이다.”
손녀가 자신을 멀리할 것을 생각하자 큰 상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손녀에게 좋아하는 선물이라도 보내야겠다 생각하며 황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을 벌이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다.
“폐하.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아이는 적당한 곳에 보내는 것이 좋겠어. 살아만 있으면 상관없다.”
황제의 몇 마디로 가족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다뷔네는 그날로 목이 잘렸으며 필립은 미쳐 버렸다.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사랑하는 외모는 그대로였기에 필립은 여전히 황제의 품에 머물렀다. 1년 후, 타티카가 그를 고쳐 냈으나 미래를 봤을 때 필립의 정신을 고친 건 황제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황제의 명에 따라 치료 후 적당한 곳에 입양되었다. 새로 부모가 된 인물들은 페테가의 먼 방계로 작위 하나 겨우 이어 가는, 말로만 귀족인 이들이었다. 아이가 없어 안타까워하던 그들은 황제가 내린 아이를 퍽 귀여워했다. 아름다운 외양에 황제의 명으로 내려진 아이라니! 그러나 아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아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알렉스. 제발! 어떤 표정이라도 좋으니 지어 보렴.”
“울지도 웃지도 않아요. 괴물 같아 미치겠어요!”
입양된 아이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알렉스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말도 거의 없었다. 아이에게서는 작은 찡그림조차 보기 힘들었다.
머리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고서도 아이는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흔한 엄마 아빠 소리도 듣지 못한 부부는 아이를 점차 방치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황제가 정부의 손에 죽었을 때, 그들은 아이를 지나가던 늙은 사제에게 버리듯 맡겨 버렸다. 악마가 들었다는 이유였다. 흔쾌히 알렉스를 맡은 사제는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너는 사람 흉내를 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명심하렴. 너의 가치는 사람답지 않은 것에 있단다.”
사제는 알렉스를 악마라 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알렉스를 경건한 신상 앞에 꿇린 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알렉스는 10년 이상, 그 말처럼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