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같은 자리, 달라진 것 (7/15)

[6장] 같은 자리, 달라진 것

비명을 지른 후 엘리자벳은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제 목을 쥐었다. 끈적거리며 굳기 시작한 피가 질척이며 온 목에 묻어났다.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알렉스. 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궁으로 모시겠다고? 궁으로? 다시 그곳으로 가라고? 왜? 내가 왜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해? 내가 어찌 나왔는데! 싫어! 난 갈 수 없어! 가지 않을 거야! 돌아갈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알렉스의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벳은 잠시 제인마저 잊어버린 채 그리 말했다. 남자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제 목을 세게 조였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터였다. 이 기분이라면! 제 목을 죄여 죽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다시 궁으로 간다니. 저건 죽으란 소리였다. 얇은 목을 가느다란 손가락이 옥죄였다. 턱턱 숨이 막히며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괴로움을 줄지언정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못했다. 그녀는 제 목을 쥔 채 눈을 여기저기로 굴렸다.

약간 떨어진 곳에 검이 보였다. 엘리자벳은 손에 힘을 풀고 풀을 움켜쥐며 다리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힘이 풀렸는지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무릎까지 일으킨 다리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안 돼. 저리로 가야 해. 저걸 집어야 해.

그녀는 엎드린 채 아까보다 더 세게 풀을 쥐었다. 한순간 날카로워진 풀에 얇은 피부가 베여 버렸다.

“아…….”

일어나는 것에 실패한 그녀는 기어가기 시작했다. 잔뜩 피를 묻힌 손이 붉은 자국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손이 움직인 만큼 무릎도 슥슥 천과 마찰을 일으키며 아려 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지척에 있던 금안의 기사가 아주 작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대로 황녀를 두면 위험했다.

챙그랑―

그러나 다른 이가 더 빨랐다.

“이러면 안 되지. 엘자.”

목소리의 주인을 아는 알렉스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차에서 언제 내렸는지, 환한 달빛 아래 금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긴 다리로 황녀가 집으려 했던 검을 차 버렸다. 엘리자벳의 손끝에서 닿을 만한 거리에 있던 쇠붙이가 저 멀리 사정거리 밖으로 사라졌다.

“아…….”

엘리자벳은 놓쳐 버린 검을 황망히 쳐다보다 말고 신음을 흘렸다. 손등에서 전해지는 아픔은 절로 그녀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엘리자벳이 제 손으로 시선을 줬다. 피가 묻은 손 위로 까만 구둣발이 올라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구둣발이 더욱 세게 손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 아파.”

그저 누르는 것이 아닌 이리저리 비틀며 내려오는 압력에 그녀가 다시 한번 신음을 흘렸다. 아주 작게 나온 목소리는 며칠 굶은 아이처럼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짓밟고 있는 구두의 주인은 자비가 없었다.

살짝 들렸다 싶었던 구두가 이번엔 그녀의 손목으로 내려왔다. 아까와 다른, 지그시 누르는 힘이 아니었다. 구두는 그녀의 손목을 겨냥한 채 거센 힘을 담고, 단숨에 떨어졌다.

“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았다. 오른 손목이 미친 듯 아팠다. 분명 부러졌을 거야.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저절로 났다.

“이 정도로 빌빌거리는 주제에 죽기는 무슨.”

그녀의 손목을 작살낸 구두의 주인이 삐죽이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녀의 눈에 잔인한 사내가 비쳤다.

달빛을 받은 그는 신과 같았다. 빛에 더 반짝이는 금발은 부드러이 물결쳤고, 파란 눈은 나라 안 모든 여자들이 찬양할 만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비친 사내는 너무도 끔찍했다.

‘그가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잘못 봤나?’

“엘자.”

사내가 그녀 앞에 앉아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피로 인해 목과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친절히 넘겨 줬다.

엘리자벳은 자신을 응시하는 파란 눈을 봤다. 언젠가 그리 아름답다 느꼈던 눈 안에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이 또렷이 담겨 있었다.

지독히도 끔찍했다. 사내가 그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 너머 그녀가 기어 온 길을 따라 손가락질을 했다.

“앨런 에든이라고 아나?”

앨런? 제인의 딸.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린, 제 아비 품에 안겨 있던 아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엘리자벳의 시선이 퍼뜩 제인을 향했다. 차가운 바닥에 누운 제인은 미동이 없었다.

엘리자벳은 덜렁거리는 손을 들어 봤다. 매가리 없이 넘어가는 손에는 온통 제인의 피가 가득했다.

맺혀 있던 눈물이 투둑 밑을 향해 떨어졌다. 사내가 손가락을 위로 올려 부드러이 눈물을 닦아 줬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그가 무얼 말할지 알았다. 이 부드러운 손길 너머 어떤 줄을 목에 걸지 알았다. 그러나 그 줄에 평생 목이 매인다 해도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저 여자의 딸인데.”

조금 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숨이 조여 왔다.

이게 죽는 거구나. 아까는 숨을 죄는 흉내조차 내지 못한 거구나.

엘리자벳은 소리 없이 말을 뱉었다. 사내가 제 손을 그녀의 목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살짝 누르며 말을 이었다.

아아…… 결국.

“분명 살릴 테지?”

다시 제자리구나.

엘리자벳은 절망에 스러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자벳은 마차 안에 구겨진 채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금발의 사내가 무게로 짓눌렀다.

“아, 아…….”

사내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작음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드레스를 올려붙이고 하얀 다리를 움켜쥔 사내는 거침이 없었다. 사내는 무에 그리 화가 났는지 밑에 깔린 그녀를 죽일 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퍽퍽 하고 사내의 물건이 박힐 때마다 그녀의 머리도 같은 박자를 타고 마차 문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꽤 아플 만한 모습에 그녀를 타고 앉은 사내가 힐끗 그녀의 얼굴을 봤다.

그러나 정작 아픔을 호소해야 할 그녀는 아무런 반응 없이 몸을 늘어뜨린 채 눈만을 뜨고 있었다.

“이래서야 만족이 될 리가 있나. 허리라도 감아. 아니면 아이에게 토막 난 어미의 시신을 보낼 테니.”

그 모습에 짜증이 난 페루스는 입술을 뒤틀며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여자의 가족은 놓아 달라 그리 말하며 자신에게 먼저 안긴 건 저가 아닌가.

그런데 이리 넋만 놓고 있다니. 엘리자벳이 그의 말에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곧 매끈한 다리를 들어 페루스의 허리를 순순히 감았다. 순간 한 겹의 천 위로 걸쳐진 다리임에도 닿은 부위가 뜨겁다 그리 느껴졌다.

“제대로 감아.”

짝―

엘리자벳이 시키는 대로 했음에도 페루스는 그녀의 허벅지를 때렸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절로 들어간 손힘에 엘리자벳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하얀 허벅지 위에는 그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꽤 선명한 색에 페루스는 비식 웃음이 흘렀다.

멍청한 엘자. 이리 다시 끌려올 거면서 어딜 가려고.

* * *

엘리자벳의 도주 계획은 성공할 뻔했다. 앞에서 마차를 몰고 있을 놈만 아니라면.

황제가 죽고 며칠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의 방에 절대 올 리 없는 손님이 방문했다. 황녀의 외사촌이자 아스란의 충실한 개. 알렉스 페테였다.

그는 먼저 찾아온 주제에 한참 말이 없었다. 결국 페루스는 그에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경이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 떠나실 겁니다.’

알렉스가 꺼낸 말이 딱히 놀랍진 않았다. 황녀가 도망치려 한다는 건 자신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동부의 것들이 호시탐탐 황녀를 노리는 것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내가 그리 둘 것 같나.’

‘아스란에서 명이 내려왔습니다. 장례가 끝나는 날, 신전 기사들이 합류할 겁니다.’

그 말은 그로서도 꽤 의외였다. 전에 루한을 만나고 왔을 적 느낌이 안 좋다 싶었으나 이리 빨리 움직이다니. 황녀를 데려오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병이 도진 모양이지. 주제도 모르고. 페루스는 삐딱하게 입을 올렸다.

‘……그런데 그걸 왜 내게 말하지? 경은 신앙심 깊은 기사가 아니었던가.’

페루스는 여자처럼 곱상하니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평소에는 그리 여러 표정을 짓고 있더니 지금 그 앞의 남자는 꼭 조각같이 똑같은 표정만을 보이고 있었다.

‘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원? 주인을 배신할 만큼 원하는 게 뭐지?’

페루스가 비꼬며 물은 질문에 알렉스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싶습니다.’

‘네놈도 머리 한구석이 돈 모양이지.’

* * *

어찌 되었건 엘리자벳은 다시 페루스의 손안이었다. 페루스는 알렉스의 말을 들은 후 엘리자벳을 철저하게 꺾어 버리기로 작정했다.

일단 제인 에든. 페루스는 남부로 향한 제인의 가족을 비밀리에 잡아 가뒀으며, 에든 후작에게 남부 소금 광산 두 개를 향후 10년간 독점 제공할 터이니 아들과 손녀를 포기하라 일렀다. 물론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문 전체가 큰일을 당할 거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제 주인과 닮았군.’

페루스는 제인의 시체를 떠올리며 그녀의 순진함에 애도를 했다. 그녀는 에든 후작을 믿은 모양이지만 후작에게 삼남과 막내 손녀는 가문의 안위보다는 훨씬 못한 존재였다.

페루스는 제인에게 감사했다. 그는 제인으로 인해 수도에 숨어 있는 동부의 잔존 세력을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시신이 되어서도 충실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페루스는 죽은 여자를 놓지 못해 제게 순순히 구는 엘리자벳을 봤다. 그녀는 그에게 비부를 관통당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꼴이 꼭 덫에 걸린 사냥감 같아 페루스는 기꺼웠다.

“애초에 네가 문제지. 엘자.”

“아! 아으…… 아파요. 조금만…… 아…….”

갑작스레 파고든 페루스의 행위에 엘리자벳이 아픈지 허리를 비틀었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도망치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나?”

“……흐으, 잘못…… 잘못했으니깐…… 악!”

“사실 제인, 하아…… 그 여자가!”

제인이라는 이름에 엘리자벳이 눈이 파르르 떨며 아래를 조였다. 페루스는 죄책감조차 참으로 음탕하게 표현한다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 어린것이! 흐읏…… 무슨 죄가 있겠어.”

이제 네 살이라 했던가. 죽은 제인의 어린 딸은 어미의 뒤를 이어 덫으로 쓰일 터였다.

“다 주인인 네 탓이지.”

제인의 어린 딸이 거론되자 엘리자벳이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 네가…… 흡, 자초한 일인데 왜 눈물 바람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울음이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제 협박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엘리자벳의 입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안 그런가? 응?”

당연히 답은 없었다. 엘리자벳은 단지 입안을 헤집는 손가락을 견디며 울음 섞인 신음만을 뱉었다.

페루스는 평소처럼 답을 하라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가 말을 좀 더 많이 하며 엘리자벳을 잔뜩 유린했다.

달아오른 숨이 가빠져 페루스는 잠시 몸을 멈추고 엘리자벳을 내려다봤다.

엘리자벳은 아픈 듯 오른팔을 시트 밑으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두려운지 그 이외의 신체는 그에게 밀착하고 있었다.

이거로군. 쓸데없이 가까이 붙은 모습이 정답이었다. 특히 페루스는 그의 명대로 감아올린 매끈한 다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계속 길을 달려 나갔다. 페루스는 덜컹거리는 박자에 맞춰 좀 더 규칙적으로 허리를 돌렸다. 엘리자벳의 머리가 조금 전보다도 세게 마차의 벽에 부딪혔다.

‘제길…….’

신경이 쓰인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밑으로 끌어 내렸다. 그녀가 주르륵 내려오며 시트 위에 은빛 머리카락이 퍼졌다.

그는 엘리자벳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훅 하고 여자 특유의 향이 코 안에 들어찼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계속하던 짓을 이어 했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페루스는 강한 자극에 신음을 뱉으며 엘리자벳을 으스러질 듯 안았다. 곧 언제나처럼 그의 씨물이 엘리자벳을 채웠다.

일이 끝난 후에도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위에 있었다. 엘리자벳은 그의 무게에 팔이 아픈지 미미하게나마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에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다시 밀어붙이려다 말고 엘리자벳의 오른 손목을 잡았다. 덜렁대는 손목은 이미 부어 있었다. 페루스는 무언가 고민하다 입술을 물었다.

찌익―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드레스 자락을 찢어 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감기 시작했다.

새삼 가엽다거나 하는 감정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곧 궁에 도착할 것이었고 엘리자벳은 궁의 따위 보지도 못한 채 봐야 할 일이 있었다. 준비된 것을 보면 분명 온몸을 비틀며 퍼덕댈 테니 더 상하기 전 이리해 두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페루스는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배려심 없는 그의 손길에 엘리자벳이 계속해서 신음을 흘렸다. 페루스는 낑낑거리는 엘리자벳을 보다 짜증이 몰려와 고개를 틀었다.

저 멀리 궁의 끝자락이 보였다.

‘어찌 견딜까.’

궁이 가까워지자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침묵했다. 미리 알려 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페루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의 드레스를 아무렇게나 끌어와 체액과 피를 꼼꼼히 닦았다. 엘리자벳은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정리를 끝낸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누워 있는 시트 맞은편에 앉았다. 방금 전 정사를 벌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반면 그와 다르게 엘리자벳은 여전히 엉망인 채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제인의 피와 거친 정사로 인한 흔적을 고스란히 달고 있었다.

페루스는 그런 엘리자벳을 힐끗 보고 눈을 감았다. 청승 떠는 것이 꼴도 보기 싫었다.

* * *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을 향해 가고 있는 시각, 돌아온 황녀궁은 어두웠다.

“내려.”

엘리자벳은 다시 이곳으로 끌려와 있었다. 단 몇 시간 맛본 해방은 짧게 끝나 버렸다.

‘고작 이런 걸 얻으려 제인이…….’

엘리자벳은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페루스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그녀를 끌어 내렸다.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신발조차 없는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상관없다는 듯 그녀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의 빠른 걸음에 그녀가 몇 발자국 가지 못한 채 넘어졌다. 차가운 돌바닥에 찧은 무릎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잊고 있었던 이의 목소리가 엘리자벳의 귀에 박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백금발의 기사는 그녀가 가장 가깝다 생각한 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기사는 지금에 와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엘리자벳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나 뭐라 물어야 할까. 왜 제인을 죽였느냐 물어야 하나? 왜 우리를 배신했느냐 물어야 하나? 아니지. 정상적인 이라면 지금 물음을 할 게 아니라 왜 제인을 죽였냐며 소리칠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럴 힘도 의욕도 없었다. 이미 제인은 죽었다. 그녀가 소리치고 묻는다 해서 바뀔 것은 없었다. 묻는다고 답을 해 주긴 할까. 그런 생각만이 엘리자벳의 머릿속을 채웠다.

엘리자벳은 빠르게 포기했다. 어차피 이해 못 할 일만 한가득이었다.

‘그도 오로르와 악연이 있나? 할머니가. 아버지가. 엘리엇이. 내가. 또 무언가 잘못을 한 모양이지…….’

2년 전, 생일날 이후 그녀의 삶은 항상 그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죄를 지었고 벌을 받는 중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죄가 없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대가는 혹독했다.

‘내가 잘못한 건데 피하려다…… 회피하려다 제인이…… 제인이 그렇게 된 거야.’

엘리자벳은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일어나기 위해 잡히지 않은 오른손을 짚었다. 그러나 그 또한 그녀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천이 둘둘 감겨 있는 오른손은 아픔만을 줄 뿐 받침대 역을 하지 못했다.

“이만 경은 할 일을 하러 가지. 부지런히 말을 달려도 며칠은 걸릴 터이니.”

손을 뗀 엘리자벳이 어찌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그녀를 물건처럼 끌고 가던 페루스가 자신이 할 말만을 한 채 그녀를 들어 올렸다.

알렉스의 답 따위 필요 없다는 행동이었다. 축 처진 채 매달린 엘리자벳의 눈에 금안이 들어왔다.

알렉스는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엘리자벳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녀의 입 모양을 읽은 듯 알렉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가 답을 하기 전 엘리자벳을 둘러멘 페루스가 걸음을 모로 틀었기 때문이다.

옆으로 돌아간 엘리자벳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볼 수 없었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없는데 답을 할 필요는 없지. 알렉스는 몸을 돌렸다. 페루스의 말대로 당장 그는 갈 길이 멀었다.

* * *

“궁의를 불러.”

“말씀하신 대로 준비가 다…….”

“황녀의 상태가 보이지 않나.”

제임스는 그제야 황녀를 봤다. 피투성이에다 제 모습을 잃은 드레스, 옅게 나는 불쾌한 냄새.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짐작이 가는 꼴이었다.

제임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시종을 불러 궁의를 부르고 시중을 들 아이들도 보내라 일렀다. 그리고 페루스의 옆에 붙어 방금 들어온 긴밀한 정보를 말했다.

“동부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그 늙은이를 잡았다 합니다.”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수도 가까이 있어 쉬웠습니다. 그래도 사흘은 걸릴 겁니다.”

“그럼 일을 사흘 뒤로 미루지. 그보다 북부는 어때?”

“북부는…….”

제임스는 답을 하려다 말고 힐끗 엘리자벳을 봤다. 죽은 듯 엉망이긴 했으나 그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영 꺼려졌다.

“그냥 말해. 들어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아?”

“우세리 공작께서 잘해 주고 계십니다. 당분간 이곳에 신경 쓰기 어려울 겁니다.”

답을 들은 페루스가 손짓으로 제임스를 물리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니 호수가 보이는 복도가 나타났다. 옅은 물비린내가 여자가 풍기는 향을 몰아내고 들어왔다.

페루스는 호수로 시선을 던지며 복도를 걸었다. 저 끝 엘리자벳이 머물던 방이 보였다. 곧장 방으로 향한 그는 침대에 던지듯 여자를 내려놓았다.

어깨에 있던 작은 무게가 사라져 침대로 팽개쳐졌다. 궁은 조용했다. 평시에도 조용한 궁이었지만 오늘 밤은 더욱 그랬다.

‘아무도 없을 테니 당연한 건가.’

페루스는 주머니를 뒤져 습관적으로 시가를 물었다. 방 안에 그득한 연기가 가득 차자 머리가 좀 맑아졌다.

그는 엘리자벳을 내려놓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도 조용해 기절했나 생각했건만 엘리자벳은 의외로 또렷이 눈을 뜨고 있었다.

“성공할 거라 생각했나?”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물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눈을 굴리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기는.”

정말이지 멍청했다. 여기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니. 옆에 붙여 놓은 이들이 몇인데.

물론 아슬란의 움직임은 예상 밖이었다. 그리 빨리 움직일 거라곤, 동부 놈들하고 손을 잡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으니 알렉스가 없었다면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잠시 놓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랬다 하더라도 페루스는 자신이 언젠가 엘리자벳을 다시 잡아 왔을 게 분명하다 생각했다.

그러니 이 꼴을 다시 겪기 싫다면, 또 누가 죽어 나가는 걸 보기 싫다면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엘자.

“제인…….”

그가 절로 주먹을 쥘 때였다. 시체처럼 가만히 있던 엘리자벳이 입을 열고는 그에게 먼저 물었다.

“……제인의 시신은요?”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말에 바닥으로 시가를 던졌다. 기껏 용기 내 꺼낸 말이 죽은 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꺼져 가는 시가를 뭉개며 어찌 비웃어 줄까 고민했다.

어미를 찾는 어린 딸에게 보냈다 할까? 아니면 토막 낼 참이라 할까? 페루스는 전자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 말하면 분명 허옇게 질린 채 울음을 터뜨릴 테지. 아니면 제 오라비 때처럼 빌지도…….’

뭐가 되었건 엘리자벳의 그런 반응은 만족스러웠기에 페루스는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 여자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궁의는 왜 이리 늦는지. 기어 오는 것인가.

페루스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새 시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분명 손목을 밟았을 때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다. 제 죗값도 치르지 않고 죽으려 하는 엘리자벳 때문에 화가 나긴 했으나 무언가 이리 거슬리는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그로 인해 비명을 지를 때면 쏠쏠한 즐거움을 느꼈다.

‘제길!’

마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처음에 그는 신경 쓰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 손목이 눈에 띄더니 지금에 와서는 계획까지 틀게 하지 않았나.

원래 그는 오늘 엘리자벳에게 보여 줄 것이 있었다. 도망가면 어찌 되는지, 어떤 죄가 추가되는지 똑똑히 보여 줄 참이었다.

그러나 저 손목. 천을 둘둘 두른 손목이 계속 그의 눈에 밟히더니 마차에서 내린 순간 그는 제임스에게 궁의를 부르라 말하고 말았다. 벌여 놓은 일이 미루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리고 제인의 딸 말인데…….”

그가 말없이 연기 마시기만 반복하자 기다리던 엘리자벳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어 왔다. 아까보다 이채를 띤 눈에는 다급함이 있었다.

“어찌 되었을까?”

더럽게 맛없군. 페루스는 반도 피우지 않은 시가를 침대에 비벼 껐다. 치지직 하고 하얀 시트가 타들어 가다 멈췄다.

그는 엘리자벳이 묻는 게 거슬렸다. 그는 짜증이 나는데 눈치 없이 구는 게 거슬렸다.

“응? 어찌 되었을 거 같아. 엘자.”

그의 말투가 다시금 비웃음을 담았다.

너. 그리 제 주변을 애달파하고 못 견뎌 할 거면서 도망은 왜 갔나. 왜 나가려 했나. 왜 죗값을 치르려 하지 않나. 이리될 줄 왜 몰랐나.

그 여자가 죽은 건, 그 여자의 가족이 그리된 건 다 네 탓이다! 벗어나려 한 네 탓이야! 그저 수그리고 있었으면 될 것을 왜…….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

엘리자벳은 이제 고민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이번 일을 겪고 확실히 알았다. 완전히 납득했다.

다 제가 잘못한 것이었다. 멍청해 지금껏 아니라 고민해 왔지만 이제는 잘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도, 오라비가 죽은 것도, 제인이 죽은 것도 다 제 잘못이었다. 그의 말대로 조모를 꼭 닮은, 오로르의 피를 타고난 제 잘못이었다. 그러니 이제 갚아 가야지. 엘리자벳은 그리 생각하며 계속 말을 했다.

“잘못했어요.”

“…….”

그녀 앞에 있는 심판자는 말이 없었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에게 빌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픈 손을 끌어모았다.

“페루스. 당신 말대로 내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 말해 주세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시키는 대로, 이제 입 다물고 다 할게요. 엘리엇, 내 오라비 때와는 다를 거예요. 아무 조건 없이 따를게요. 반항하지도 소리치지도 않을게요.

그러니 페루스. 그만 입을 열고 알려 줘요. 내가 뭘 어찌할지. 내가 어찌하면 제인과 그녀의 딸을 놓아줄 건지 알려 줘요.

엘리자벳은 진심을 다해 페루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말이 없었다.

페루스는 그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저 인상을 펴야 하는데. 내가 아직 부족한가? 내가 그동안 너무 멍청히 굴어 믿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아까…….

“내가…… 아까 내가…… 너무 못했어요? 그저 누워 있어서…… 그런 거예요?”

엘리자벳은 마차에서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이래서야 만족이 될 리가 있나. 허리라도 감아. 아니면 아이에게 토막 난 어미의 시신을 보낼 테니.’

“더 잘할 수 있어요! 나, 나 그동안…….”

페루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저에게 다가오는 엘리자벳을 봤다. 그녀는 그새 정신이 나간 듯싶었다.

그는 턱을 덜덜 떨며 말을 하려 노력하는 엘리자벳에게서 물러났다. 그러자 엘리자벳이 다급히 그에게 붙어 왔다.

“그동안 많이…… 많이 배, 배웠으니깐. 아니, 어찌하는지 아니깐.”

그러고는 억지로 말을 늘어놓으며 그의 바지를 잡았다. 페루스는 그제야 엘리자벳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그녀를 거칠게 밀어 냈다.

“하! 그 꼴을 하고선 무슨!”

페루스의 힘에 밀린 엘리자벳이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서 그에게 몸을 던졌다.

“정말, 흐윽……. 잘…… 잘할 수 있어요. 정말이니깐, 기회를 주면…….”

“입 다물어!”

무언가 페루스의 몸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그는 아픈 머리를 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망할!”

페루스의 일갈에 엘리자벳이 입을 닫았다. 그러나 펑펑 눈물을 쏟는 눈은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페루스는 처음 본 엘리자벳의 눈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가 저를 배신하고 범했을 때처럼 괴로워하지도, 오라비의 목숨을 쥐었을 때처럼 체념하지도, 오라비가 죽었을 때처럼 분노하지도 않았다.

말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지? 그는 엘리자벳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녀의 턱을 잡고 가까이서 눈을 마주했다.

‘내가 잘못했어. 페루스.’

눈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붙잡던 작은 손이 생각났다. 손의 주인이 떠올랐다. 분명 그가 잘못했음에도 제가 잘못했다며 먼저 손을 내밀던 작은 아이. 노란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제 어깨까지 오던 아이가 생각났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딱딱한 소리에 페루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놓았다.

“안녕?”

궁의를 불렀건만 왜 저 인간이 와 있는지. 페루스는 휘어지는 보라색 눈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밝게 인사를 한 사내는 휘적휘적 방을 가로지르더니 침대 앞까지 빠르게 왔다.

“세상에! 말은 들었지만! 황녀님 누가 이런 거야?”

다 알고 있으면서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페루스는 심히 불쾌했다. 그러나 잘된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페루스는 침대 위 거의 엎어진 채 울음만을 삼키는 엘리자벳을 봤다. 그녀는 제 옆 가까이 붙은 남자의 부축에도 간절한 눈으로 페루스, 그만을 보고 있었다.

“부탁하지. 공.”

“걱정 말고 일하러 가. 벌여 놓은 것도 많던데. 황녀님은 내가 잘 돌볼 테니 염려 말고.”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눕히는 타티카를 보고는 몸을 돌렸다. 엘리자벳은 타티카의 손길에 이끌려 쉽게 침대로 넘어갔다.

방금 전까지 내게 매달린 주제에. 별거 아닌 행동이었건만 페루스의 기분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일단 물을 데우고……. 그래, 씻은 후에는…… 아, 내가 씻겨 줄까? 황녀님.”

등 뒤에서 타티카가 드문드문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욕 시중도 받고. 편하게도 사는군.’

페루스는 일을 미룬 것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그가 명한 일. 그 늙은이도 잡혔다 했으니 곧 일을 치를 수 있을 터였다.

밖은 여전히 호수에서 몰려온 물 내가 가득했다. 물 특유의 비린내에 아까 맛없다 버린 시가가 당겼다.

페루스는 딱 하나 남은 시가를 꺼내 물었다. 익숙한 향이 얼굴을 감고 그의 후각을 채웠다.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할 일이 있었지만 그는 잠을 좀 자야겠다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타티카는 실망스러웠다. 방에 들어서 만신창이가 된 엘리자벳을 봤을 적, 그는 그녀와 함께 욕탕에 들어갈 기대를 했다.

뜨거운 물이 가득 찬 공간에서 저 자그마한 몸을 안고 있으면 어떨까? 벗어나려 바르작거리겠지. 그럼 항시 맛보던 보드라운 피부와 밀착할 테고. 자신은…….

상상만으로도 흥분감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는 페루스가 저를 못마땅히 쳐다보건 말건 무시하고 곧장 엘리자벳에게로 다가섰다.

‘흐음. 힘들겠네.’

그러나 가까이서 본 엘리자벳의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그는 앞으로 엎어져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엘리자벳을 쭉 훑어봤다. 다행히 피는 그녀의 것이 아닌 듯했고 자잘한 상처는 금방 치료될 듯싶었다.

“세상에! 말은 들었지만! 황녀님 누가 이런 거야?”

문제는 부러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손목이었다. 천으로 대강 감고 있었지만 엘리자벳의 손목은 힘이 없는 것이 척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저걸 응급 처치라 하다니. 기가 막힌 엘리자벳을 부축하다 말고 페루스를 봤다. 저를 보는 걸 눈치챘는지 페루스가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페루스의 표정을 봤다.

‘지랄병이 또 도졌군.’

페루스의 표정을 본 타티카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부탁하지. 공.”

“걱정 말고 일하러 가. 벌여 놓은 것도 많던데. 황녀님은 내가 잘 돌볼 테니 염려 말고.”

타티카는 엘리자벳을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미약하게 힘을 주며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도 엎어져 무언가 비는 모습이었지. 무얼 빌고 있을지는 뻔했다.

타티카는 힘을 줘 엘리자벳을 눕혔다. 그 모습에 페루스가 등을 돌렸다.

“거기 너. 일단 물을 데우고 천도 넉넉히 준비해 와. 욕실에 물을 받아 놓는 것도 좋겠어.”

같이 들어온 시녀가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타티카의 시선은 방을 나서고 있는 페루스에게 가 있었다.

“그래, 씻은 후에야 치료가 가능할 터이니. 이리 있으면 찝찝하실 테지.”

처음보다 힘이 들어간 등이 보였다. 타티카는 조용히 웃으며 그 꼴을 보다 엘리자벳에게로 몸을 숙였다. 약 올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 내가 해 줄까? 황녀님.”

문 닫히는 소리가 좀 세게 났다. 타티카는 키득거리며 엘리자벳을 쓰다듬었다.

엘리자벳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닫힌 문만 보고 있었다. 묘한 섭섭함에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이러면 기분 상해. 지금 황녀님을 돌봐 주고 있는 건 나잖아.”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머리에 묻어 있는 지푸라기를 하나하나 털어 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말을 꺼냈다.

“도망쳤다지?”

“…….”

“좋았어?”

“…….”

“아닌가 보네. 다행이다. 만약 좋았다 말했으면 화가 났을 거야.”

답 없이 누운 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를 비켜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음에도 계속해서 그러자 타티카는 기분이 상했다. 그는 황녀의 멀쩡한 손목을 들었다.

‘나도 여길 부러뜨리면 되려나. 그러면 이렇게 봐 줄까?’

뜬금없이 호승심이 일었다. 그는 하얀 손목을 들어 살짝 깨물었다. 피를 비롯해 온갖 것이 묻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손목을 물린 엘리자벳이 그제야 그를 봤다. 딩동댕. 그는 제가 낸 잇자국을 핥으며 유치한 소리를 지껄였다.

“저…….”

타티카가 진득이 손목을 물고 빨 때였다. 시녀가 그가 명한 것을 들고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꺼져.”

저가 시킨 일이지만 방해는 방해였다. 타티카는 신경질적으로 시녀에게 명했다. 그의 기세에 눌린 시녀가 송구하다며 사죄를 올린 후 빠른 걸음으로 도망을 쳤다.

타티카는 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을 적셔 조심히 엘리자벳의 얼굴을 닦았다. 목욕 시중은 못 들게 되었지만, 이런 시중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천이 금방 제 색을 잃었다. 그러나 타티카는 인내심을 가지고 하얀 얼굴 전체를 닦았다. 어찌나 열심히 닦는지 엘리자벳이 민망함에 그를 밀어 내려 애쓰다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있어야지. 황녀님.”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이마를 잡아 고정했다. 당황한 엘리자벳이 눈을 사방으로 굴리는 것이 귀여웠다. 고작 얼굴 가지고 이러는데 좀 있으면 어떨까?

“보고는 있어 줘야 내가 시중들 맛이 나지.”

그는 기대감에 달아오르는 몸을 진정시키며 엘리자벳의 위로 몸의 위치를 바꿨다. 무릎을 세운 채 작은 여체 위로 몸을 붙이자 바지 아래서 그의 물건이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을 진정시키며 엘리자벳의 쇄골 주변을 닦았다.

“……비켜 주세요.”

엘리자벳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아까부터 몸을 지분거리는 사내에게 불쾌감이 일었다.

이제 어찌 되어도 괜찮다 싶었던 몸뚱이였건만 본능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어서려 애를 썼건만 그녀의 몸은 번번이 사내의 시선과 접촉에 무너졌다.

‘……벌써 황녀궁을 나섰을 텐데. 지금 쫓아가도 늦을 텐데.’

“환자는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녀의 걱정 따위 모르는 듯 타티카는 더욱 그녀를 눌러 오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제 상처 따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나가 버린 페루스를 따라가 어찌하면 될지 묻고 싶었다.

‘어찌하면 될까?’

묻고 확답을 받고 싶었다. 네가 이리하면 더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그 한마디만 듣고 싶었다.

하지만 문은 멀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고개를 잡아 오는 타티카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시선조차 문을 향하기가 쉽지 않았다.

“……황녀님.”

“악!”

엘리자벳이 한참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몸 위로 엄청난 압력이 느꼈다. 동시에 손목에서 하얗게 시야가 바뀔 만한 고통이 몰려왔다.

자연히 엘리자벳의 시선이 손목을 향했다. 말린 천 위로 사내의 손이 손목을 쥐고 있었다. 끊어질 듯한 아픔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말했는데. 요즘 왜 말을 안 들을까? 한 번에 들으면 이럴 일 없을 텐데. 왜 매를 벌까? 내 황녀님은.”

“흐읍……. 아파요. 아파!”

더 이상 지를 힘도 없다 생각했는데 큰 소리가 목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자벳은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타티카는 온몸으로 그녀를 콱 누르고는 놓으라는 말에도 더욱 세게 엘리자벳의 손목을 움켜쥘 뿐이었다.

“내가 만만해? 응? 그래서 이러는 거야?”

엘리자벳은 계속되는 고통에 이제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타티카는 분명 아파하는 것을 알 텐데도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쥐고 있는 엘리자벳의 손목을 아예 비틀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리 말해.”

“그만, 그…… 악!”

“잘못을 했으면 그리 말해야지. 밖에서 들으니 페루스한테는 잘 말하던데. 혹시 이것도 차별하는 거야?”

엘리자벳은 타티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달려들어 손목을 비틀더니 한다는 말이 왜 저 꼴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절로 분이 치솟았다. 그녀는 내가 뭘 잘못했느냐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순간 머릿속에서 그녀와 똑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또 무얼 물으려고. 그리 겪고도 몰라? 이해할 필요 없어. 그저 말해 줘. 원하는 대로.’

깨달음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옳았다. 방금 전까지 고민하지 않기로, 다 납득하기로 해 놓고, 무조건 수긍하기로 해 놓고. 다 내 잘못이 맞는데. 이들이 맞는데. 내 잘못으로 아픈 건데. 왜 또다시.

‘맞아요. 전하 때문이에요. 내가 그리된 것은……. 내 딸, 앨런이 그리된 것은 다…….’

나 때문이지. 죽어 가던 제인의 얼굴이 윙윙 눈앞에 보였다. 순식간에 온갖 이들이 쏟아지며 무어라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어지럽게 울리는 목소리에 아픔마저 날아갈 판이었다. 엘리자벳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사내가 원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응?”

“잘못했어요. 그러니 용서하세요.”

타티카는 내심 당황했다. 그리 말하라 시키긴 했으나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저 심술이라는 것을. 순간 화가 치밀긴 했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냥 넘기기에는 저를 안 보고 계속 문짝만 볼 터이니 평소처럼 경고를 주려 했을 뿐이었다.

만약 정말 화가 올라 참을 수 없었다면 벌써 반대쪽 멀쩡한 손목을 부러뜨린 후였을 거였다.

그런데 이리 쉽게 납득을 하다니? 그는 허탈감에 탁 하고 손을 폈다. 그의 밑에 깔린 엘리자벳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이제 가만히 있어야 해. 알았지 황녀님?”

타티카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다정히 물었다. 엘리자벳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해.”

타티카는 그리 말하며 엘리자벳의 허리 밑으로 손을 뻗었다. 얌전한 모습을 보니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고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그럼 다시 시작할게. 황녀님.”

마음이 편해지자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는 먼저 찢어져 드레스라 부를 수도 없는 천을 치웠다. 그런 후 그녀가 안에 받쳐 입은 드레스도 순식간에 벗겨 냈다.

“예쁘다. 황녀님.”

순식간에 엘리자벳은 헐벗은 모습이 되었다. 제대로 걸친 천 따위 없었다. 드레스 속에 차려입은 속옷은 마차 안에서 페루스가 진즉에 벗기거나 찢어 버렸다.

타티카가 다시금 젖은 천을 가져왔다. 그새 식어 버린 천이 차갑게 피부에 닿았다. 엘리자벳은 제 몸 구석구석을 닦는 손길을 내버려 뒀다. 타티카는 그녀의 몸 전체에 차별 없이 천을 문질렀다. 그리고 깨끗해진 피부 위로 꼭 한 번은 입맞춤을 했다. 가슴이나 배와 같이 은밀한 부위들도 예외는 없었다.

뜨거운 입술이 엘리자벳의 몸에 수십 번 닿았다. 그러나 음탕한 접촉에도, 난잡한 소리에도 엘리자벳은 말없이 천장을 봤다.

납득을 하고 나니 아까만큼 불쾌함이 들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타티카가 어떻게 제 몸을 희롱하든 내버려 둔 채 천장만 바라봤다.

그러자 타티카가 그녀의 편편한 배 위에 이를 세웠다. 저를 봐 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엘리자벳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곤 긴 손가락을 엘리자벳의 허벅지 안으로 가져갔다. 다른 사내의 체취는 비위 좋은 그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쾌했다.

긴 손가락이 구멍을 들락날락했다. 시간이 꽤 걸릴 듯싶었지만 타키카는 다른 사내의 흔적 따위 모조리 긁어낼 참이었다.

“아…….”

잠자코 있던 엘리자벳이 결국 가느다란 신음을 뱉었다.

희미하게 스러지는 소리가 타티카를 자극했다. 그는 어쩐지 엘리자벳에게 입술을 부비고 싶다 생각했다.

그는 손을 빼 양손으로 엘리자벳 얼굴을 쥐어 잡았다. 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이 선명히 들어왔다.

“사랑해. 황녀님.”

항상 속삭이던 고백을 하며 그는 참을성 없이 작은 입술을 내리눌렀다.

* * *

엘리자벳은 여전히 황녀궁에서 기거했고 같은 방에서 전과 비슷한 일상을 보냈다.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는 바뀌어 사소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페루스는 그녀 주변 시녀들을 모조리 바꿔 버렸다.

새로 온 시녀들은 생각 외로 싹싹했다. 그들은 항상 엘리자벳 주변에 머물며 그녀가 심심치 않게 무어라 떠들어 댔고, 그녀에게 이걸 먹어 보라 저걸 마셔 보라 권하기도 했다.

“전하. 오늘은 이게 어떠세요? 우세리 공작님이 선물하신 산호 팔찌인데 이걸 착용하고 있으면…….”

“주방장이 전하를 위해 크림슈를 아주 맛있게 만들었답니다. 남부에서 들여온 차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전부터 그녀 옆에 앉아 시답잖은 소리들을 늘어놓으며 시중을 들었다. 예쁘게 웃는 얼굴과 예의 바른 몸가짐은 상전을 모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손짓으로 그들을 모두 물렸다. 저리 입속의 혀처럼 굴면 무얼 하나. 그들은 친절하고 예의 발랐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전의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어제 딱 한마디 명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르온 공작님께 뵙고 싶다 청하고 오렴.’

페루스는 그녀를 끌고 온 날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그를 만나 묻고 싶은 게 있었기에 시녀들에게 그리 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명을 들은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기다리시는 게 좋겠다 답을 했다.

‘바쁘신가 보구나. 그럼 내가 직접 가야겠지.’

엘리자벳은 시녀들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내가 분수를 몰랐지. 가만 생각하니 저는 누굴 오라 가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가도 만나 줄지는 모르나 기다리면 언제고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일어선 순간 시녀들이 표정을 굳히더니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대표 격인 듯 보이는 금발의 시녀가 걸어 나오더니 딱딱하게 말을 했다.

‘전하께서는 이 방을 나서실 수 없습니다.’

단호한 말에 엘리자벳은 순간 몸을 굳혔다. 며칠 침대 신세를 지느라 알지 못하는 사이 제 발을 묶으라 명이 내려온 듯싶었다.

엘리자벳은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른 시녀를 쳐다봤다. 레베카라 자신을 소개한 시녀는 남부 유서 깊은 백작가 출신이었다. 고개를 숙인 레베카는 엘리자벳에게 작게나마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차갑게 빛나는 벽안을 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구나……. 몰랐어.’

그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 *

시녀들을 모두 물린 엘리자벳은 창가로 가 밖을 봤다. 가까이 자신이 꾸민 정원이 보였다. 이제 저리로도 가지 못하는구나. 절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까지고 갇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바깥출입이 어려울 것 같았다.

엘리자벳은 창밖을 향해 손을 뻗어 봤다. 볕이 따사롭게 손끝에서 부서졌다. 빛에 반짝거리는 손에서 손목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하얀 천으로 몇 번 감은 손목은 언제 부러졌냐는 듯 멀쩡히 제자리를 찾았다.

‘이 정도는 쉬이 고친다더니…….’

타티카는 믿기 힘든 속도로 그녀의 손목을 고쳐 냈다. 엘리자벳은 가만히 손목을 보다 천을 풀어냈다. 그리고 멀쩡한 손으로 아픈 손목을 세게 쥐었다. 찌르르한 아픔이 팔로 전해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입술을 물고 더욱 세게 손목을 잡았다.

“흐읏…….”

고통에 입술에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엘리자벳은 혼자 있을 때마다 손목을 이리 쥐었다. 아물던 곳이 다시 붓고 고통이 느껴지도록.

남이 보면 미쳤다 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혼자 있으면 사방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슬프게 울부짖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제인. 그녀가 페루스를 만나려 하는 이유. 제인의 죽음을 본 이후 엘리자벳은 계속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 언젠가부터 혼자가 되면 피투성이 제인이 어린 딸을 안고 저를 보고 있었다. 온 구멍에서 피가 쏟고,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엘리자벳은 그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저가 만들어 낸 상상이라는 걸 아는데도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누군가 저를 때리고 짓밟는 게 낫지.

엘리자벳은 제인을 잊기 위해 제 손목을 쥐었다. 그러면 잠시나마 제인은 모습도 소리도 감춘 채 사라졌다.

엘리자벳은 손목을 쥐고 히죽거렸다. 이리 제인을 지우고 잠시 편해지다 손목이 못 견디게 아프면 또 밖의 시녀들을 부를 터였다.

‘누군가 떠들면 제인은 사라지니깐…….’

얄팍한 수였다. 다른 이에게 그리 폐를 다 끼쳐 놓고 저 괴로운 것은 못 참는, 이기적인 도피였다.

제인의 죽음이 이리 쉽게 지울 수 있는 거라니! 제인은 죽었는데 나는 이리 쉽게 편해지다니! 그녀의 딸은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엘리자벳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동시에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상해. 분명 웃고 있는데…….’

엘리자벳은 그리 생각하며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닦고 또 닦아도 눈물은 마르지가 않았다.

‘전하…….’

흐려진 눈앞에 다시 제인으로 보이는 형체가 나타났다. 엘리자벳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연신 미안해, 미안하다 말하며 손목을 쥐었다. 억지로 더해진 고통에 하얗게 시야가 바뀌며 형체가 사라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엘리자벳은 죄책감에 몸서리치면서도 고통에서 벗어나려 끝까지 손목을 쥐었다.

* * *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한껏 묻은 피에 에셀은 얼굴을 닦았다. 놈이 마지막인 듯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부하들이 헉헉거리며 쉬고 있었다. 다들 온몸에 피를 묻힌 걸 보니 그 못지않게 적을 베어 넘긴 듯했다.

‘제길!’

절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들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펠릭서와 안튼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여럿이 부상을…….”

“오늘은 여기서 쉰다. 적당한 곳을 찾아보고 불을 피우도록.”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하면 위험합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위험했다. 에셀은 축축한 천으로 대충 흐르는 땀을 닦았다. 초조히 그를 보는 브륄이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벌렸다.

“어제 북부에서…….”

“나도 알고 있다 브륄. 그러나 우리 상태를 봐라. 여기서 더 움직였다간 북부에 도착하지도 못할 것이다.”

브륄이 고개를 숙였다. 꽉 쥔 주먹이 불안한 듯 떨렸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사흘 걸릴 거리를 열흘에 걸쳐 가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간 일정 맞추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브륄. 일단 부상자들을 치료해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

툭툭 어깨를 치며 달래 주니 브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하…….”

안심해라 말하긴 했으나 에셀은 답답함에 숨을 들이쉬었다. 말을 달린지 열흘이 훌쩍 넘었다. 내일이면 달의 반이 갈 터였다. 원래 지금쯤이면 북부의 성에 도착해 원로원을 소집하고 누이와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힘들겠지만 우선 설득을 하고 정 안 되면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가주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제길!”

속으로 삼키던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엘리자벳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죽은 듯 앉아서 저를 외면하던 모습. 오라비를 잃고 무너져 가던 그 모습. 그날 본 엘리자벳은 곧 스러져 없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도 어쩌면 페루스 그놈에게…….’

에셀은 페루스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페루스는 그가 북부로 간다 하자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고는 황궁 기사단장은 수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들먹이며 그를 해임시켜 버렸다.

덕분에 에셀은 지금 엘리자벳의 상황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부하를 심어 두긴 했지만 어찌 된 게 다들 황녀궁으로 제대로 출입도 못 했다.

에셀은 올라오는 분기에 피를 닦아 내다 말고 천을 바닥으로 던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부하들이 저를 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누굴.’

바닥에 떨어진 천을 보다 말고 그는 눈을 감았다. 다 제 탓이었다.

‘벨이 죽은 건 엘자의 탓이 아니야. 엘리엇이…….’

에셀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엇은 도대체 왜 벨이 엘자를 해쳤다 생각한 걸까? 에셀은 엘리엇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엘리엇! 네가 어찌! 그 아이가 너에게 어찌했는데!’

‘에셀. 알지 않나? 자네 동생은 미쳤어.’

‘뭐라고? 벨 그 아이를 죽여 놓고! 그게 할 말인가!’

‘난 자네 동생을 죽인 일이 없어. 그리고 먼저 일을 벌인 건 자네 동생이야.’

‘도대체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아니, 다른 것을 버리고 벨이 왜? 그 아이가 왜 그런단 말인가! 그 아이는 엘자의 친우야!’

‘……비켜 주게. 난 엘자를 보러 가야겠어.’

‘답을 하기 전에는 못 가네! 내가 길을 열 것 같나?’

‘비켜.’

저를 노려보던 녹색 눈이 생각났다. 에셀은 당시의 엘리엇을 잊을 수 없었다. 벨. 그 아이의 마지막조차 외면한 매정한 사내. 한때 친우라 생각했던 여자의 오라비.

‘난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에셀.’

제 목숨을 끊어 가며 말하던 벨이 생각났다.

불쌍한 내 동생. 내가 지켜 주지 못한 어린 내 누이. 벨…….

벨을 생각하면 에셀은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물론 벨이 엘리엇에게 어느 정도 집착한 건 사실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것이 그리 허망하게 목숨을 끊을 죄는 아니었다. 그리 비참하게 외면받을 죄는 아니었다.

‘허나 엘자의 죄도…….’

에셀은 과거 엘리자벳에게 감정을 푼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한순간의 감정이 어떤 상황을 만들어 냈던가.

덜덜 떨며 글을 쓰던 엘리자벳이 떠올랐다. 빛나는 글씨가 엘리자벳을 옭아매던 그 순간, 사실 그는 후회했었다.

그러나 당시 에셀은 상황을 돌이킬 용기가 없었다. 울며 눈을 감던 누이가, 벨이 불쌍해 그는 엘리자벳을 외면했다.

생각해 보면 죄책감을 엘리자벳에게 푼 것이었다. 판단 못 하는 세 살배기 아이처럼 에셀은 제 눈앞의 약자를 골랐을 뿐이었다.

엘리엇을 베어 버릴 용기는 없어 제일 약한 엘리자벳에게 화를 풀었을 뿐이었다.

에셀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스스로를 찔러 버리고 싶었다. 그리 비열한 이가 자신이라니. 이대로 검을 뽑아 스스로를 베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어이가 없군. 누가 보면 경이 그동안 그녀를 위하며 지킨 줄 알겠어.’

틀릴 것 없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그들 말대로 제일 뻔뻔한 건 저일지도 몰랐다.

‘너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녀 앞에서 그리 말했을까? 부끄러움에 에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도 모르고 여자 앞에서 그리 말하다니. 에셀은 엘리자벳이 그 자리에서 저를 내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빌고 왔어야 했는데…….’

에셀은 나중에 용서를 빌겠다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끝까지 뻔뻔한 저를 보며 그녀가 무엇을 생각했을지…….

얼굴을 감싼 손에 무언가 뜨뜻한 것이 떨어졌다.

“멍청한 놈. 비열한 놈. 뻔뻔한 놈…….”

그는 손가락으로 재빨리 눈 밑을 닦았다. 눈물을 흘릴 자격 따위 없었다.

“대장님?”

뒤에서 부하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눈치를 보며 부하가 조심히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북부에서 온 서신이었다. 그는 돌돌 말린 쪽지를 빠르게 폈다.

「마들렌 라세르 습격받음. 아군의 소행이라 의심받는 중.」

에셀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누이가 습격을 받아? 누구한테? 북부의 원로원인가?’

“저희를 공격하고 있는 이들을 알아냈답니까?”

“아니. 마들렌 누이가 습격을 받았다는군. 그것도 우리한테.”

“예? 하지만 대장님께서는…….”

“그래. 난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지.”

그러고 보니 자신들이 습격받는 상황도 이상했다. 마들렌은 워낙 반듯한 사람이라 승리를 갈구하면서도 편법은 잘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신을 쥔 에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최근 누이의 태도가 거칠어져 다른 곳을 의심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조금만 머리를 굴렸으면 알 일이었는데 마음이 급해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빠른 시일 내에 누이와 접선할 방법을 찾아. 전서구든 사람이든 어떤 방법이든 좋다!”

* * *

“곧 눈치챌 듯싶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

“남부에서 올라가는 밀도 대부분 차단했습니다. 철을 얻기가 좀 힘들어지겠지만 당분간 북부는 먹고살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비축분도 야민인들과의 전투로 거의 소진된 듯했습니다.”

페루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책상에 앉아 펜을 놀릴 뿐이었다. 그러나 답이 없다는 것은 만족스럽다는 뜻이기에 제임스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보고할 것을 읊었다.

“동부의 것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수도에 있는 잔당들도 오늘 내로 잡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간 유연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제임스는 눈치 빠르게 페루스의 표정을 살피다 어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준비할까요?”

“……아니.”

조금 늦게 답이 들려왔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답이었다.

제임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다 말고 주인에게 제 의견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 미루실 거면 그냥 조용히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면 귀족 사이에서 말이 돌 가능성이…….’

그러나 제임스는 침을 넘겨 말을 삼켰다. 표정을 보건데 말한다 해도 주인의 답은 변하지 않을 듯싶었다.

“무어가 후계자가 가담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차라리 다른 일이나 빨리 처리하자. 제임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페루스가 알아야 할 다른 사항을 읊었다.

“후작은?”

“장자인데 쉽게 쳐 내더군요. 차남에게 작위가 돌아갈 듯싶습니다.”

“무어가 차남은…… 이제 다섯 아니었나?”

“장자와 한 살 터울인 사생아가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 형을 고발한 것도 그쪽입니다. 영리한 것이 제 형보다는 훨씬 낫더군요.”

페루스는 장례식에서 본 무어가 후계자를 떠올렸다. 입을 벌리고 뚫어져라 황녀만 보고 있던 얼굴.

덜떨어진 놈. 여자가 제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는 제임스가 주는 종이를 받아 들고 펜으로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려 냈다.

“후작이 버렸다면 신경 쓸 거 없지. 팔다리를 자르건 눈을 뽑건 알아서 해. 다른 놈을 불 혀만 있으면 되겠지.”

그의 명에 제임스가 조용히 물러났다.

페루스의 수도 청소는 거의 끝나 갔다. 예상외로 많은 벌레에 좀 빠듯하긴 했으나 귀족들이 제 영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일을 끝마칠 수는 있을 듯싶었다. 가득 찬 황궁 지하를 생각하며 페루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엘리자벳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수도에는 그녀와 오로르를 따르는 무리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엘라르 황제 시절 고개를 들고 다녔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무어가 후계자를 비롯해 몇몇은 엘리자벳에게 홀린 몽매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아름다우시죠. 황녀님은.’

‘그분을 구해 드려야 합니다. 가련한 분이지요.’

빠직―

거친 소리와 함께 페루스의 손에서 펜이 반토막 났다.

“……누가 그 핏줄 아니랄까 봐 음탕해서는!”

그의 손에 있던 펜 토막이 저 멀리 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물건에 성질을 부렸음에도 한번 오른 화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페루스가 생각하기에도 엘리자벳에게는 사내를 끄는 구석은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고혹적인 분위기는 모두가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것 외에 엘리자벳의 장점을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무엇 하나 혼자 못 한 채 울면서 사내에게 다리나 벌리는 그녀는 그가 생각하기에 딱 고귀한 신분의 창녀였다.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디 첩 자리에나 어울릴 테지. 아니면 창부로 빌어먹고 살든가.’

페루스는 그리 생각하며 최대한 엘리자벳을 끌어내렸다. 핏줄 타고난 게 다행이라 억지로 비웃었다. 그러나 여자를 깔보면 깔볼수록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그였다.

그는 프란츠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엘리자벳을 기억했다. 학자들도 어려워하는 책을 엘리자벳은 제법 잘 읽어 냈다.

‘난 프란츠가 수줍은 사람이라 생각해. 책에서 그는 항상 인간이 악하다 본질이 더럽다 하고 있지만, 글쎄.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난 사실 그가 인간은 다정한 존재다. 선한 존재다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엘리자벳을 알았다. 전문가에 비해서는 부족한 솜씨였지만 그녀는 자주 그의 얼굴을 그려 선물하곤 했다.

‘부끄럽지만 난 페루스 네 얼굴 그릴 때가 제일 좋아. 특히 이 눈을 그릴 때면 난…….’

그는 다정한 성품의 엘리자벳을 떠올렸다. 엘리자벳은 낯을 심하게 가릴지언정 주변 사람들을 아낄 줄 알았다.

‘그녀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야. 아버지의 곁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많은걸. 물론 정부라는 게 그렇게 좋은 신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는 착해. 내게 잘해 줘.’

페루스는 쾅 하고 책상을 쳤다. 책상 위 가지런히 놓여 있던 물건이 제자리를 이탈했다. 불편한 배치에 그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아니 엘자. 넌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에도 쓸모없는 네 자리는 항상 내 밑이야. 넌 그저 내 밑에 깔려 버둥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저 내게 좋을 대로 이용되며 내가 내킬 때 다리나 벌리고 울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다 버려지고, 그러면 되는 거야. 그게 네 존재 이유고.’

그러나 순간 페루스는 떠올리고 말았다.

‘사랑해. 페루스.’

제게 수줍게 고백하던 엘리자벳의 모습을.

* * *

“왜 이리 안 나을까? 이상하다.”

타티카는 가느다란 손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뻔하지.’

그러나 사실 타티카는 알고 있었다. 억지로 쥐지 않는다면 이렇듯 악화될 리 없었다.

그는 손목을 살짝 주무르다 손가락으로 쓸었다. 손목은 붓기로 다른 곳보다 열기가 모여 있었다.

“이유가 뭘까? 뭐라 생각해 황녀님?”

진료라는 명목 아래 타티카의 다리 위에 앉게 된 엘리자벳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답을 하긴 싫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는 경험상 불안했다.

“공. 내려 주세요.”

“싫어.”

단호히 답한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양손을 잡아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엘리자벳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긴장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귀엽기는.’

이가 하얀 목에 박혔다. 갑자기 느껴지는 아픔에 엘리자벳은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여전히 타티카의 품속이었다.

몸을 감은 팔은 단단했다. 게다가 손조차 잡혔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엘리자벳은 몸을 꼼지락대다 결국 눈을 감았다. 힘 빠진 몸이 처진 채 사내의 품에 파묻혔다.

“환자가 솔직하지 않으면 안 돼.”

“……뒤척이다 보니 이렇게 된 거 같아요. 사람이 바뀌어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타티카는 힘없이 나오는 목소리에 대강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정도는 치료 시일이 문제였기에 별 상관 없었다.

“하아.”

그보다 문제는 그 스스로였다. 분명 치료만 해 주려 했는데 그의 몸은 그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그의 몸은 주체 못 할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찌한담. 할 일이 많은데. 에셀 그놈도 약 올려야 하고. 약도 완성해야 하고.’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몸을 좀 더 당겨 안았다. 품 안에 들어찬 작은 몸이 부드러웠다.

‘이대로 한번 하고 갈까?’

반응을 보건데 큰 반항은 없을 거 같았다. 결심을 굳힌 그는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더 깊이 묻으며 말했다.

“나 미치겠어.”

예상처럼 반항은 없었다. 그러나 반응도 없었기에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눈치를 살폈다. 살짝 비친 얼굴은 그저 체념을 한 채 있었다. 밑으로 내려온 눈꺼풀은 그따위 상관없다는 듯 바닥을 향해 팔랑거렸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불만스러워진 그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세게 틀었다.

거친 입맞춤이었다. 갑작스레 돌아간 고개에 엘리자벳은 목이 아팠다.

입 사이로 말캉한 것이 들어오더니 엘리자벳의 입안을 마구잡이로 훑었다. 치아를 건드리고 입천장을 누르더니 도망가는 그녀의 혀를 잡아채 막무가내로 얽었다.

숨이 막힌 엘리자벳은 고개를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단단한 손이 그녀를 막았다.

‘숨이…….’

엘리자벳은 계속되는 입맞춤에 질리고 말았다. 타티카는 쉴 틈도 없이 그녀를 얽어맸다.

한계에 다다른 엘리자벳이 손으로 타티카를 때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타티카는 그녀가 무얼 하든 제 욕심을 채워 나갔다.

“하아…….”

한참 후 타액이 늘어지며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 엘리자벳은 갑자기 들이닥친 공기에 컥컥대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사내는 힘겨워하는 엘리자벳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자색 눈이 잔인하게 휘어져 있었다. 툭툭 떨어지는 집착에 엘리자벳은 얼어붙었다.

“이런, 힘들어 보여. 황녀님.”

타티카는 손가락으로 엘리자벳의 입가를 닦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타티카는 헐떡이는 엘리자벳을 소파에 눕혔다. 일이 많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뭐 어차피 이 짓거리 하려 하는 일인데.”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옷 사이로 손을 넣어 내키는 대로 가슴을 쥐었다. 힘이 조금 강했는지 작은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파?”

엘리자벳은 이 상황이 끔찍이 싫었다. 적응하려 해도, 모른 척하려 해도, 제 몸인지라 본능이 항상 앞섰다.

타티카의 손이 가슴 위를, 허벅지 위를 스칠 때마다 콱 죽고 싶었다. 수치심은 항상 사라졌다 싶다가도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다.

“악!”

몇 번의 손길이 끝. 전희 따위 없었다. 단박에 들이닥친 사내에 엘리자벳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픔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타티카는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핥더니 목덜미를 빨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해 황녀님.”

끔찍한 소리가 위에서 쏟아졌다. 엘리자벳은 사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몸의 고통보다 귀 가까이 속삭이는 말이 더 끔찍했다. 흔들리는 시야와 함께 회갈색 머리칼이 눈가를 찔렀다.

“황녀님, 흐읏…… 내가 항상 하던 부탁……. 내 이름…… 이름 불러 줘.”

끔찍해하는 엘리자벳과 달리 타티카는 쾌락에 겨워 미칠 지경이었다. 게슴츠레 눈을 뜬 그는 엘리자벳이 저처럼 쾌락에 겨워 앙앙거리는 것은 못 보더라도 울면서 제 이름 부르는 건 봐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입술을 깨문 채 못 들은 척 엘리자벳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손을 올려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하아…… 그럼 안 돼. 황녀님.”

타티카는 불쾌함에 가는 팔을 뜯어내고 억지로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하얀 얼굴에는 슬픔, 체념, 고통이 가득했다.

엘리자벳은 도저히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러자 타티카는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의 가슴을 세게 쥐고 눈을 마주치며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해 왔다.

엘리자벳은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눈을 감았다. 저와 똑같은 목소리가 또 물었다.

‘참아 낼 수 있어? 고개를 저을 자신이 있어?’

‘……아니.’

정해진 대답이었다. 엘리자벳은 눈을 떴다.

“안 해? 안 해 주는 거야?”

잔뜩 열이 오른 채 타티카는 대답 없는 엘리자벳이 미운지 뭐라 중얼거리며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내리쳤다.

약한 힘이라곤 하나 사내의 손이었다. 고통과 함께 하얀 가슴 곳곳에 자국이 남았다.

엘리자벳은 결국 견디다 못해 힘없이 입을 열었다.

“타티카.”

* * *

“왜…….”

스텔라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발을 타고 바닥의 냉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스텔라는 부들부들 떨며 팔로 몸을 더욱 세게 모았다.

울음소리가 근처에서 들렸다.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동료의 소리겠지. 스텔라는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서 아일라가 울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아직 울 힘이 있구나. 스텔라는 그리 생각하며 방 안을 둘러봤다. 그러나 이곳은 방이라 하기도 민망했다.

사방은 단단한 돌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천장에는 습기로 뭉친 물방울이 뚝뚝 일정한 규칙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은 흔한 싸구려 카펫조차 없어 축축하고 차가운 채로 유지되었으며 가구는 눈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악!”

찍찍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발등 위로 지나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겪은 상황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스텔라는 적응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이곳으로 끌려온 첫날 스텔라는 울다 쓰러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까맣게 빛나는 짐승의 눈.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되는 거리에서 옆으로 저를 보며 사각사각 무언가 갉고 있는 짐승은 제 몸과 비교하자면 한참 작았지만 혐오감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쥐라니!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지만 스텔라는 귀족이었다. 동경하는 삶처럼 맘껏 사치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고용인이 있는 집에서 태어나 시중을 받고 자란 귀족 영애였다. 쥐 같은 짐승을 그리 가까이서 본 경험이 있을 턱이 없었다.

황궁에 들어와 시중드는 입장으로 바뀌긴 했으나 궁 안 그녀의 방은 집 못지않았다. 조금 좁긴 했으나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침대도 있었다. 창으로 빛은 항상 쏟아졌으며 하녀들이 집과 마찬가지로 아가씨라 높이며 시중도 들어 줬다. 차가운 바닥과 어두운 곳은 겪어 보지 못했다. 아니 겪을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왜!”

스텔라는 크게 소리치며 창살 밖을 노려봤다. 방 안이 어두운 것과는 다르게 창살 밖 통로는 적당히 환했다. 머무르는 방 너머 다른 방들이 보였다.

방들은 똑같았다. 스텔라가 머무는 방과 마찬가지로 모두 어둡고 더러웠으며 두터운 창살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차 있는 사람들은 모두 꼬질꼬질한 꼴을 하고 울거나 웅크리고 있었다. 아니면 그녀처럼 소리치거나. 하여튼 어느 방이나 멀쩡한 이는 없었다.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스텔라의 말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몇몇이 죽은 눈을 하고 그녀를 슥 스치듯 봤을 뿐이었다. 대다수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뻔한 상황에 스텔라는 몸에 힘을 풀었다. 답을 해 줄 리 없었다.

주린 배에서는 민망한 소리가 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프구나. 울컥 올라오는 눈물에 그녀는 눈에 힘을 줬다. 첫날 집어 던진 빵이 그리웠다. 거저도 안 먹을 말라빠진 빵과 물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스텔라는 배고픔에 왜라는 의문은 포기하고 좀 더 직접적인 소망을 떠올렸다. 언제쯤이면 나갈 수 있을까? 내일? 모레? 아니면 정말 운이 좋다면 오늘? 이곳에 있는 것은 너무도 끔찍했다. 씻기는커녕 마실 물조차 없고 배고픔에 죽어 갈 때쯤에야 나오는 식사, 잠자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바닥.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스텔라는 제 머리를 뜯었다. 이리저리 엉켜 머리카락이 아프게 뽑혔다. 손가락 사이사이 걸린 머리카락을 보며 스텔라는 머리를 굴려 봤다.

그녀의 예상이 맞는다면 여긴 감옥이 분명했다. 끌려올 때 분명 지하로 내려왔으니깐……. 소문으로만 들은, 궁 지하에 위치한다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나 가둬 둔다는 지하 감옥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왜? 억울함에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짓이에요!’

스텔라는 처음 이곳에 끌려오던 때를 생각했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평소보다 좋았다. 그 근래에는 제인 덕에 황녀의 시중을 좀 대강 들어도 되었으니. 저녁 이후 차나 올리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니 그 전에 동료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몰래 가로챈 과자를 먹으며 오라비를 잃고 어디로 팔려 갈까? 아니 곧 사형을 받지 않을까? 동료들과 황녀를 비웃었고 누군가 황녀가 곧 황제가 될지 모른다는 소문을 물고 와 말도 안 된다며 다 같이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그리고 목이 조금 아플 때쯤 동료와 함께 쓰는 방으로 향했다. 로즈의 죽음 이후 신참으로 들어온 동료는 그녀와 동향이라 꽤 잘 맞았다. 자기 전 황녀에 대해 조금 더 떠들었고……. 그리고 그 후엔?

자고 있는데 갑자기 기사들이 닥치더니 그녀와 동료를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 고함을 치며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지.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와 황녀궁 동료들은 이미 이곳에 갇혀 있었다.

‘물이 몇 번이나 들어왔지? 아홉? 열?’

스텔라는 손가락 사이 머리카락을 털어 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함께 갇힌 동료들 중 몇은 이미 정신을 놓고 있었다.

울면서 머리를 벽에 박는 아일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저리 살짝 찧는 정도지만 좀 있다가는 건너편 방에 갇힌 여자처럼 심하게 쿵쿵거릴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햇빛이 없는 공간의 특성상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지만 스텔라는 분명 한 달은 더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동료들이 저리 미쳐 나갈 리 없었다. 그녀와 동료들은 지체 높은 귀족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평민이나 천민들과는 달랐다. 배운 것이 있는데 쉽게 품위를 놓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지? 한 달이 더 되었다면 왜? 보통 귀족 가문에서 자제들이 이리 갇혀 있는데 가만히 있을까? 사람 한번 보내지 않았을까? 심지어 저기 레아는 사생아지만 후작가 출신인데?

스텔라는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은 깨달음. 거기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건너편에 이마가 깨진 채 웃고 있는 여자를 봤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옷을 보건대 여자도 귀족일 게 분명했다. 이제 서른쯤 되었을까? 저보다 한참 늦게 들어왔음에도 여자는 빠르게 미쳐 버렸다.

“저도 데려가세요. 루이 님 저도 데려가세요. 저도 그리 가고 싶어요.”

여자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팔을 공중에서 저었다. 완전히 미쳐 버린 모습에 스텔라는 입술을 물었다.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 더 있다간 저리될지도 몰랐다.

“메리! 정신 차리거라.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스텔라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고함이 들린 곳은 미쳐 버린 여자의 왼편에 위치한 방이었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단단한 소리에 스텔라는 창살로 다가갔다.

‘아…… 그 늙은이.’

목소리의 주인이 간신히 보였다. 얼굴을 확인한 스텔라는 다시 창살에서 물러났다. 사라라고 했던가? 스텔라는 잘 알지 못했지만 동료 몇은 노인을 알고 있었다.

노인은 스텔라가 들어오기 한참 전 궁을 총괄했던 이라 했다. 오로르 삼대를 모셨다 했던가. 덕분에 변방 자작가 출신임에도 한때 권세가 대단했다지.

“어머님……. 루이 님이 앞에 있어요.”

미쳐 버린 여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깔깔거렸다. 노인은 더 이상 고함치지 않았다. 오로르 따위를 모셔 권세를 얻다니. 돈과 권력에 미친 늙은이가 분명했다. 아니면 광신도일 테지.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어디다 버렸는지! 스텔라의 눈이 경멸을 담았다.

그러나 스텔라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그녀가 경멸하는 사라 오스틴이 그녀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 * *

“전하 잠시 치수를 재겠습니다.”

엘리자벳은 재단사가 시키는 대로 팔을 들어 올렸다. 재단사가 데려온 시녀 둘이 빠르게 줄자를 가져다 댔다. 드레스 위로 팽팽히 감기는 끈이 귀찮았다.

최근 들어 옷 맞추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재단사가 찾아와 이리저리 자를 대 보고 천을 그녀에게 보였다. 무슨 옷을 이리 맞추나. 엘리자벳은 자신의 방 안 가득한 드레스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 쓰일 건지 알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재단사가, 시녀들이 그녀의 물음에 답할 리가 없었다.

‘아마…….’

예상이 맞는다면 이 옷들은 곧 있을 연회에 쓸 것이 분명했다. 툴란은 황제가 죽으면 열흘 장례를 치르며 수도로 귀족들을 모았다.

그리고 빠르면 한 달에서 늦으면 두 달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가진 후 연회를 열었다. 떠난 이에 대한 애도와 함께 와 준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였다. 귀족들은 연회 동안은 검은 옷을 벗어 버리고 최대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충분히 애도했으니 즐기고 떠나라는, 전통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엘리엇…….’

과연 오라비를 애도한 자가 있긴 할까? 장례식 날 본 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엘리엇을 애도하지 않았다.

‘아니,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야.’

엘리자벳은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엘리엇을 네 오라비를 진정으로 애도했나? 누군가 그리 물으면 답을 할 자신이 없었다.

엘리엇의 죽음은 그녀에게 너무도 괴롭고 슬펐다. 분명 그랬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엘리엇을 애도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썼다.

그날 밤. 제인에게 매달려 온갖 울분을 토해 낸 날. 그날 이후 그녀는 엘리엇을 애도하기보다 떠난다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 제 한 몸 제대로 떠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초조해했다. 엘리엇은 죽었으니 이제 떠나도 되겠지 그리 생각했다.

‘난 엘리엇의 죽음을 이용한 거야.’

엘리자벳은 오라비의 죽음을 명분 삼았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엘리엇이 죽었으니 난 떠날 거야. 그리 생각한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같이 고통을 겪었으니 마지막까지 함께 했어야 했는데. 오라비가 궁에서 죽었으니 자신도 그리했어야 했는데. 오라비를 홀로 두고 이기적으로 저만 도망을 쳐 제인이…….

‘전하…….’

피투성이 제인이 나타났다. 또다시 딸을 안고! 다른 이와 있는데도 나타난 환영에 엘리자벳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 되었습니다!”

순간 들려온 재단사의 소리와 함께 눈앞의 제인이 사라졌다. 그는 박수를 치며 고생하셨다며 인사를 했다. 이리 아름다운 분의 드레스를 만들어 영광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드레스 따위 관심도 없었다. 그저 다행이야 그리 생각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걸어 준 재단사가 고마웠다.

‘나란 인간은…….’

하지만 곧 더한 아픔이 엘리자벳의 가슴을 찔렀다. 저 때문에 죽은 제인을 몰아내며 다행이라 생각하다니. 엘리자벳은 습관처럼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세게 쥐어도 전만큼 아픔이 몰려오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말끔해진 제 손목을 봤다. 아무는 데 몇 달은 걸릴 손목을 타티카 그 사내는 이 주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완치시켜 줬다. 엘리자벳은 다 나은 손목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그에게 범해질 때보다 더한 괴로움이 그녀를 덮쳤다. 타티카 그는 그녀가 작게나마 죄책감을 감추는 방법까지 앗아 갔다.

“전하. 정리할 동안 침실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힘드셨으니 한숨 주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시녀가 공손히 물어 왔다. 엘리자벳은 싫다 고개를 저였다. 오래 서 있느라 피곤했지만 잠을 자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릴 것이 뻔했다. 밤에 자도 마찬가지겠지만.

“하지만 궁의가 많이 주무셔야 한다고.”

리즈는 초조하게 말하며 상전을 봤다. 최근 황녀의 얼굴은 보기 힘들 정도로 초췌해져 갔다. 눈 밑으로 그림자가 졌으며 뺨은 생기를 잃었다. 하루에 한 번 황녀를 보러 오는 궁의는 잠을 잘 주무셔야 한다 일렀다. 약도 처방해 주고 갔다.

그러나 황녀는 약을 마셔도 잘 자지 못했다.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식은땀을 흘리며 깨곤 했다. 동료들은 신경 끄고 모른 척하라 했지만 리즈는 어쩐지 그게 힘들었다.

‘다들 알고 있지? 우린 명을 받고 들어온 거야. 그러니 서로 방해는 말자.’

레베카는 첫날 그리 말하며 도도히 굴었다. 남부 출신인 그녀에게 명할 이는 뻔했다. 그녀는 르온 공작의 이름을 사적으로 부르며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네가 할 일은 황녀의 일상을 보고 하는 거다. 제대로 못 하면 알지? 네 동생에게 가는 약이 끊길지도 모른다.’

비록 명에 따라 황녀궁 시녀로 들어왔지만 사람이 저리 말라 가는데 모른 척하기는 힘들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리즈는 그랬다.

황녀는 그녀의 동생과 닮았다. 툭 치면 사라질 것 같은 몸이나,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이 꼭 죽음만을 기다리는 제 동생과 같았다.

“따뜻한 물이나 가져오렴. 목이 아프구나.”

“그럼 차를 들여올까요? 얼마 전 목에 좋은 허브차가 들어왔어요.”

엘리자벳은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러고는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눈은 못 붙이더라도 누워 있기는 해야 할 거 같았다. 기침이 나오는 것이 감기가 든 듯싶었다. 콜록거리며 비틀거리는 그녀를 다른 시녀가 재빨리 부축했다.

“전하. 여기 있습니다.”

푹신한 침대에 기대앉아 있으니 시녀가 차를 가지고 왔다. 마시게 좋게 식은 차에서 배려가 느껴졌다.

엘리자벳은 차를 가져온 시녀를 봤다. 공손히 손을 모은 갈색 머리 시녀는 익숙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과 살짝 미소를 띤 입술이 어색했다.

근래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나 누군가가 떠오르는 표정에 엘리자벳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조금 오래 보고 있자 시녀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시녀의 갈색 머리가 눈에 좀 더 들어왔다.

‘제인.’

엘리자벳은 금방 답을 찾았다. 시녀의 머리색은 제인을 꼭 닮았다. 드디어 내가 미친 모양이지. 고작 머리색을 보며 제인을 떠올리다니. 그들은 제인과 다른데. 다른 이를 따르는 이들인데. 엘리자벳은 고개를 돌려 찻잔을 기울였다. 따뜻한 차가 까슬한 목을 적셔 줬다.

“물러나렴.”

엘리자벳은 찻잔을 물리며 시녀에게 명했다. 눕고 싶었다. 잠을 자진 못하더라도 그저 누워 있고 싶었다. 또 제인이 나타나겠지만 괴롭겠지만 그보다도 시녀가 보기 싫었다. 저 아이를 보며 제인을 떠올리는 자신이 싫었다. 꼭 기대하는 거 같아 기분이 나빴다.

흘러내린 몸 위로 시녀가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곤 나갔다. 혼자가 되자 이제는 익숙한 피투성이 제인이 나타났다. 엘리자벳은 그저 조용히 제인을 바라봤다.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지는 제인이 괴롭고 슬펐다.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검은 피를 토하며 제인이 입을 열었다.

‘전하…….’

그 모습에 엘리자벳은 오늘도 긴 하루가 되겠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 * *

“우세리 공작님이 매일같이 오세요. 그리고 그분이 침실에서 하시는 일은 뻔하지요.”

“…….”

“전하께서도 밀어내지 않으세요. 매일같이 다 아문 손목을 쥐고 창밖을 보시는 걸 보면 기다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

“…….”

“근래에는 우세리 공작님이 선물하신 드레스나 장신구를 자주 착용하세요. 특히 산호 팔찌를 굉장히 아끼시는데…….”

“레베카 양.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주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힘이 조금 들어간 글씨를 눈치챘다.

“백작님께서는 제 보고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죠?”

제임스는 조잘거리는 레베카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일을 하라 들여보내 놨더니 한다는 말이 매일같이 비슷했다. 게다가 그 말이 진실이면 모를까, 같이 들여보낸 다른 아이의 말에 따르면 황녀와 공작의 관계는 레베카가 말하는 것과 달랐다.

기다려? 자신이 들은 보고에 따르면 그가 올 때마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다던데. 그리고 산호 팔찌. 그건 레베카가 매일같이 황녀에게 착용시키려 해 혹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산호 팔찌에 있는 거냐고 되물음을 받았다.

“그러나 제 말은 다 사실이랍니다. 제가! 이 레베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들이에요!”

“……레베카 양의 임무는 황녀의 일상을 전부 보고하는 겁니다. 공작과의 관계만을 보고하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짜증이 났지만 꾹 눌러 담고 차분히 말했다. 애초에 레베카를 여기로 부른 게 잘못이었다. 저 여자의 아비만 아니었다면 볼 일 따위 없었을 텐데.

‘들켜도 상관없는 일이라 아무나 들여보냈더니…….’

“우세리 공작님과 매일같이 만나는 게 황녀님의 일상인걸요? 그리고 제 주인은 백작님이 아니에요. 백작님이 뭔데 저에게 이래라저래라죠?”

“일단 일차적으로 보고받는 일이 제 역할입니다. 규칙을 어기고 매번 이리 각하께 보고를 올리는 레베카 양이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페루스 님은 별말 안 하시는걸요.”

레베카는 말을 하며 페루스를 슬쩍 살폈다. 그는 별말이 없었다. 그녀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무언가 쓰며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마치 그녀 따위 없다는 듯, 신경 쓰지 않는 행동에 약간 섭섭함이 몰려왔다.

어떻게 하면 이리로 관심을 보이실까? 어떻게 하면 그 여자에게 관심을 거두실까?

“이만 물러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번부터는 이리 직접 각하를 찾지 마시고 저를 찾아 보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임스의 축객령에 레베카는 초조해졌다. 레베카는 입술을 물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퍼뜩 며칠 전 훔쳐 들은 소리가 생각났다. 좀 민망하긴 하지만 못 할 소리는 아니었다.

“전하께서 침실에서는 공작님을 항상 이름으로 부르세요. 항상이요.”

펜이 멈췄다. 레베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거짓이 있긴 했지만 어떠랴. 레베카의 목적은 그가 황녀를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

‘페루스 님 그런 여자 따위 잊고 빨리 황위에 오르셔야지요!’

레베카는 남자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 더 큰 거짓을 보태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말을 조금 낮췄다. 그리고 꼭 자신만 아는 비밀을 알려 주듯 남자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리 말씀하세요. 몰래 듣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달콤하게 고백하신답니다.”

아주 잠시 파란 눈이 죽일 듯 레베카를 봤다. 그러나 너무 금세 지나친 일이라 레베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제임스만이 주인의 심기를 눈치채고 초조해할 뿐이었다.

“그만 나가 봐.”

이게 아닌데? 레베카는 잠시 멈췄던 펜이 다시 움직이는 걸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남자의 표정은 아까와 같았다. 언뜻 짜증이 서린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그리 귀찮은 것까지 저에게 보고하지 말라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자자 이번에는 각하의 말씀이시니 나가 주시겠습니까? 레베카 양.”

“알았어요! 그리 재촉하지 않으셔도 돼요.”

왜 저리 저를 못 내보내 난리인지. 레베카는 제임스를 톡 하고 쏘아봤다. 그러나 주인을 닮았는지 제임스 또한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레베카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펄럭하고 풍성한 치맛단이 살짝 들렸다 내려왔다.

“거짓입니다. 레베카 양은 아시다시피 각하께 관심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스카 백이…….”

레베카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제임스는 얼른 페루스에게 말했다. 제 주인이 저런 말에 속아 넘어갈 리 없지만 혹시 몰랐다.

“제 아비의 명에 따라 내게 들러붙는 것들 중 하나지.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말을 끊어 드시는 걸 보니 심사가 틀리셨군. 젠장.’

제임스는 레베카를 생각하며 입술을 물었다. 바쁠 때에 꼭 사고를 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는 방금 전 나간 레베카를 쫓아가 지금이라도 한바탕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일단은 주인이 먼저였다. 제임스는 주인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귀찮으시다면 지금이라도 남부로 돌려보내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마 앞으로도 쭉 저리 보고를 할 것 같습니다. 하등 도움이 될 리 없죠. 어차피 영리한 아이 몇이 황녀 옆에 있으니 레베카 양 정도는 없어도 상관없다 생각합니다.”

“아니 그냥 둬. 저 여자는 쓸 곳이 있지.”

팔랑, 책상에 쌓인 종이 중 한 장이 밑으로 떨어졌다. 제임스는 재빨리 종이를 잡았다. 그리고 종이를 제자리에 두려 했다. 그러나 순간 그는 주인의 표정을 밑에서 정확히 보고 말았다.

‘무슨 일이 나겠군.’

제임스는 오늘 분명 일이 터지겠구나 생각했다.

‘저번처럼 방을 부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한숨을 쉰 그는 각을 잡아 종이를 바르게 했다. 폭풍이 일어날 것을 알면 뭐 하나. 대비할 방법이 없는데. 저번에 방 안 서류가 다 망가져 일정에 얼마나 차질이 생겼던가? 지금이라도 잉크를 치워 둬야 하나. 그날의 일을 떠올리니 눈앞이 캄캄했다.

‘차라리 황녀에게 가셨으면.’

주인이 그리로 가면 황녀가 어떤 일을 당할지 뻔했지만 그는 그리 빌었다. 어차피 원인은 황녀가 아닌가.

게다가 이 주간 보러 가지 않으셨으니 갈 때가 되었기도 했다. 페루스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제임스는 알고 있었다. 잠시 쉴 때 주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여기서 겨우 보이는 하얀 궁의 지붕. 틈이 있을 때마다 주인의 시선은 항상 그곳을 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지만 주인은 뚫어져라 하얀 지붕을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것처럼 주인은 늘 저곳을 보고 있었다.

‘오로르잖나. 일이 끝나면 그건 버려질 거야.’

그러나 제임스는 제 주인이 처음 황녀에 대해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주인은 저가 황녀에게 어떻게 행동하건 처음 말한 기본 원칙은 변함이 없을 거라 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슬금슬금 올라오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제임스는 가지고 온 종이를 들었다.

그의 말에 페루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제임스는 우선 중요한 일부터 간략하게 말했다.

“동부는 오스틴가가 무너진 후로…….”

* * *

엘리자벳은 꿈에서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꿈이라는 걸 아는데도 깰 수 없었다. 그날의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금안의 기사. 제인. 그리고 자신. 검이 제인을 뚫고, 기사는 저에게 돌아가자 말하고, 저는 고함치며 피를 뒤집어쓰고…….

‘전하.’

길었던 장면이 바뀌며 익숙한 이들이 나왔다. 피투성이 제인에게 안긴 채 제인의 딸 앨런이 저를 봤다.

장례식에서는 저를 보지도 못했는데, 무섭다 아비의 품으로 파고들었는데 지금은 또렷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엄마를 돌려줘요.’

아이의 작은 입이 열리며 그리 말했다. 엘리자벳은 미안하다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을 연 순간 무언가 비릿한 액체가 차더니 말을 막았다.

‘우리 엄마를 돌려줘!’

답을 하지 않자 아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돌려줘! 돌려 달란 말이야! 우리 엄마가 너 때문에! 나도 너 때문에! 돌려줘! 돌려줘! 가슴을 찌르는 말이 끝없이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

‘그…….’

‘안 돌려줄 거야?’

아이가 제인에게 안긴 채 다가왔다. 손가락을 문 채 저를 보는 아이는 다시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그러나 아이의 행동은 아까의 눈초리보다 더 무서웠다. 아이는 큰 눈을 뜬 채 제 손가락을 씹기 시작했다. 작은 손가락이 끝부터 사라져 갔다. 하얀 뼈가 보이고 피가 튀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손가락이 사라지면 아이는 다음 손가락을 물었다. 그리고 반복. 까드득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엘리자벳은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아파! 엄마 나 아파! 저 여자 때문에 아파!’

제인이 손가락이 없어진 아이를 달랬다. 우리 아가. 우리 아가 어르는 소리가 다정했다. 아이는 제인의 달램을 받으면서도 엘리자벳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엘리자벳은 손을 내려 뻗었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너만은.’

아이의 옷자락이 잡히며 막혀 있던 입이 풀렸다. 엘리자벳은 사과와 함께 너만은 어떻게든 구하겠다 그리 말하려 했다.

‘전하가 무슨 수로요?’

그런데 가만히 있던 제인이 입을 열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에 엘리자벳은 손을 놓고 뒷걸음쳤다. 제인이 그런 엘리자벳의 앞까지 슥 다가왔다.

‘전하가 무슨 수로 우리 앨런을 구해요? 자신도 어찌 못 하면서? 그자를 만나지도 못하면서? 무슨 수로!’

‘아니야. 내가 어떻게든 꼭…….’

‘전하는 못 하세요! 자신이 가장 중요한 분이시잖아요! 스스로가 제일 중요한 인간이잖아! 나도 못 구했잖아! 결국 또다시 혼자 살아남았잖아! 네가 한 게 뭐가 있어! 무얼 할 줄 알아! 어떻게 앨런을 구하겠어!’

제인이 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엘리자벳은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아아악!”

입을 연 순간에 제인이 사라지며 엘리자벳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새벽인지 방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엘리자벳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박였다. 또 비슷한 꿈이었다.

“보기 좋군.”

아주 가까이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 위로 느껴지는 타인에 온기에 그녀는 시선을 옆으로 꺾었다. 눈앞은 온통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어깨를 누르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페루스!”

“아주 재미있어. 엘자.”

비웃는 말투에도 엘리자벳은 반가움이 앞섰다. 영원히 안 올 것 같더니 오긴 오는구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왔으니 어떻게든! 어떻게든 빨리!

엘리자벳은 빠르게 이불 밖으로 나왔다. 힘껏 일어나는 힘에 페루스의 손이 엘리자벳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페루스! 제발…… 내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빌게요. 그러니깐 말해 줘요.”

엘리자벳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그의 바지 끝자락을 잡았다. 세게 쥔 힘 덕에 하얀 손가락 마디마디가 툭툭 튀어나왔다.

“무얼?”

“알잖아요. 제인의 딸……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주세요.”

엘리자벳은 손을 떨며 말했다.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어떻게 빌지 고민하고 연습했지만 입은 딱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제인, 제인은 어디에……. 그리고 제인의 가족은 어, 어떻게 되었는지 난, 난 몰라서. 아무것도 못 들어서, 알 수가 없어서…….”

엘리자벳은 무능한 자신을 자책하며 꾸역꾸역 말을 뱉었다.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위에서 시가 향이 짙어졌다. 눈물을 가득 담고 조심히 위를 보니 남자는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천장을 보며 힘을 빼고 나른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벳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대로 가다간 그가 나가 버릴 거 같았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말만이라도 해 줘요.”

엘리자벳은 갈팡질팡하다 몸을 앞으로 했다. 그리고 제 몸을 남자의 다리에 비비며 매달렸다.

당장 생각나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하얀 팔이 있는 힘껏 다리를 잡자 위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창부가 다 되었다더니…….”

남자가 말을 하며 더러운 걸 털어 내듯 다리를 움직였다. 가는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작은 신음과 함께 엘리자벳의 시야가 순식간에 바닥을 향했다. 가까스로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아팠다. 툭툭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흔적을 남기며 카펫을 적셨다.

“제발…….”

아픈 손을 뒤로한 채 엘리자벳은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의 발치에 도달했다. 팔이 다시 다리를 잡았을 때 툭 하고 그녀 옆으로 다 피운 시가가 떨어졌다.

구두가 꾹꾹 시가를 눌러 불씨를 꺼트렸다. 아주 작은 연기를 남기며 사라지는 불꽃에 엘리자벳은 왠지 마음이 급해졌다.

“제인. 그 여자 딸이 어찌 지내는지 알고 싶다?”

엘리자벳은 고개를 위아래로 격하게 끄덕였다. 그러자 파란 눈이 어둡게 빛났다. 남자는 이제 똑바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귀엽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지만 엘리자벳은 내색하지 않은 채 잘 길들여진 개처럼 스스로 남자의 손에 뺨을 비볐다. 흐르다 만 눈물이 남자의 손에 묻어났다.

“제법이야. 눈치도 살필 줄 알고. 꼭 개 같아. 그것도 꼬리 잘 흔드는 암캐.”

눈물 자국 남은 얼굴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더니 한 손으로 작은 얼굴을 세게 쥐어 올리며 자비롭게 말했다.

“그럼 네가 제일 잘하는 걸 해 봐. 엘자.”

* * *

페루스의 손길에서 의도를 읽은 엘리자벳은 그에게 조금 붙어 앉아 닥칠 일을 기다렸다. 저번처럼 뒤에서 누를까? 아니면 마차에서처럼……. 어찌 되었건 그녀는 사내를 만족시켜야 했다.

“벗어.”

그러나 페루스는 그녀를 밀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엘리자벳은 당황해 얼어붙고 말았다.

“안 할 건가?”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찌푸리는 페루스의 말에 엘리자벳은 그제야 옷을 벗었다.

편히 자기 위해 입은 한 겹의 얇은 천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페루스는 그대로 침대에 앉아 품평하듯 엘리자벳의 몸을 감상했다.

“손 내려. 그렇게 가리면 구경할 수가 없잖나.”

“…….”

창부와도 같은 대접에 엘리자벳은 파르르 몸을 떨며 팔을 내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리 와. 내가 말하기 전 알아서 시중을 들어야지. 제 몸을 파는 창부들은 알몸으로 손님의 옷을 벗긴다더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엘리자벳은 부끄러움에 붉어진 몸을 가리지도 못한 채 페루스의 명을 따랐다. 손이 덜덜 떨려 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손이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 버클 위로 올라갔다.

바지를 밑으로 내리자 뜨거운 살덩이가 손을 스쳤다. 무언가 올라올 것 같아 엘리자벳은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러는 거지?’

사내와 여러 번 몸을 섞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엘리자벳은 분명 페루스가 누르듯 그녀를 범할 것이라 생각했다. 옷이 찢기고 짐승처럼 당하겠지,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페루스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올라타.”

반쯤 선 물건에 고개를 돌린 엘리자벳에게 명이 떨어졌다. 엘리자벳은 잠시 원망스레 페루스를 쳐다보다 체념을 하고 그의 몸 위로 다리를 옮겼다. 작은 몸이 제 위로 그림자를 만들자 페루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박하게 몸을 비비든 무어라 속살거리든 내가 동하게 알아서 해 봐. 받아 갈 게 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래? 엘자.”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말에 엘리자벳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러나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쯧. 스스로 넣어.”

엘리자벳이 한참을 가만히 있자 페루스는 결국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짜증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물건은 몇 번의 스침으로 이미 꼿꼿이 서고 말았다. 엘리자벳은 그의 명에 눈물을 매단 채 살짝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는 도무지 밑을 볼 수도 이대로 앉을 자신도 없었다.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해서야…….”

페루스는 타박을 주곤 엘리자벳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그녀의 음부에 대충 제 것을 맞추더니 그대로 내려 버렸다. 아직 젖지 못한 내부가 빡빡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좁디좁은 내벽은 페루스에게도 힘든 것이라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술을 물었다.

“읏!”

엘리자벳이 짧은 신음을 질렀다. 다시 몸을 일으켜 몸속의 것을 빼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 단단한 것이 몸을 쪼개는 느낌이라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제 스스로 할 수 있겠지.”

그러나 페루스는 그런 그녀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 그 말에는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엘리자벳은 하는 수 없이 아픈 몸을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며 허리를 비틀 수밖에 없었다.

* * *

레베카는 침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먹을 쥐었다. 오늘 밤 불침번을 선 것이 잘못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리즈에게 떠넘기는 건데…….’

난데없이 들어온 페루스를 그녀는 반가워할 수 없었다. 그가 여기 이 시간에 왔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니깐.

레베카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고자 드레스 앞섶을 당겼다. 그러나 적당히 조인 끈들은 그녀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뜻대로 되지 않자 레베카는 신경질적으로 아무렇게나 옷을 당겼다. 그제야 천이 느슨해져 가슴께가 조금 편해졌다.

하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꺼운 문을 넘어 들리는 신음 중 하나는 레베카가 바라는 이의 것이었다.

레베카는 문을 노려봤다. 저 안에서 그녀의 주인에게 안겨 있는 이는 원수요 죽여 버려야 할 간악한 핏줄의 태생이었다.

남부의 얼마나 많은 가문이 희생되었는가. 르온 휘하의 가문들은, 물론 조금 힘이 있다 싶었던 가문들까지도 모조리 가주를 잃었다. 레베카의 조부도 그 희생양 중 하나였다.

‘왜!’

레베카는 문 너머 상황을 그리며 이를 갈았다.

‘페루스 님은 왜 저 여자를 살려 두실까? 그저 이용해 먹기 좋은 패여서? 아니야. 저 여자가 없어도 페루스 님은 충분히 그 자리에…….’

레베카는 찬찬히 생각해 봤다. 간악한 수로 황가를 차지한 오로르는 망했다 봐도 좋았다. 받쳐 줄 가문도 없고 그나마 유지하던 세력도 최근 무너졌다. 동부 전체가 망했다 봐도 좋을 상황이었다. 물론 법적으로 오로르는 여전히 황가였다. 하지만 오로르도 그러했던 것처럼 법이야 바꾸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라세르는? 거긴 제 지역 밥그릇 싸움으로 황위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게다가 북부는 애초부터 중앙 권력보다는 자신들끼리 뭉치는 걸 좋아하는 야만인들이었다.

그나마 우세리가 별 탈 없이 있었지만 글쎄, 현 서부 공작은 여기저기서 좋지 못한 말이 많이 나도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재 황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녀의 주인이었다. 르온은 지금 최대 세력을 구축했으며 남부는 툴란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자금도 많았고 가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한 깃발 아래 가장 잘 뭉쳐 있었다. 지역색이 없는 수도 세력이나 귀족들도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르온과 그녀의 주인을 가장 많이 지지했다.

‘그분의 앞날에 가장 큰 문제는 저 여자야! 어릴 적부터 페루스 님과 아는 사이였으니 정에 호소하며 반반한 얼굴과 몸으로 페루스 님의 눈을 가렸겠지!’

레베카는 페루스의 성정이 그런 것과 멀다는 걸 알았지만 애써 그리 생각했다.

‘혹시 황녀를 사랑…….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셨겠지. 그래, 저리 몸으로 유혹을 하니 페루스 님도 어쩔 수 없이…….’

레베카는 어떤 문장을 떠올리다 황급히 지웠다. 그것만은 상상으로도 끔찍했다.

‘잠시만 참자. 참으면 아버지가…….’

레베카는 주먹을 펴며 아비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투덜대는 그녀를 달래며 말하곤 했다.

지금은 황녀에게 빠져 있지만 그것도 금방이라고. 황녀에게 질리면 버리고 스스로 황위에 오를 거라고. 네가 그리되도록 옆에서 노력하라고.

레베카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페루스를 황제가 되도록 하는 것이 그녀와 그녀 가문의 숙원이었다. 그리고 숙원이 완성된다면 페루스의 곁에 있는 것은 저일 거라고 레베카는 생각했다.

“그, 그만! 흐윽…… 그만해요.”

“조용히. 집중해. 엘자.”

문 너머에서는 여전히 듣기 싫은 소리가 계속되었다. 레베카는 한 번 더 문을 노려보다 걸음을 물렸다.

어쨌든 그녀는 이 꼴로 있을 수는 없다 생각했다. 레베카는 방 밖에 있을 하녀에게 새 드레스를 가져오라 시키고는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 * *

짝―

가볍지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얀 허벅지에 또다시 붉은 자국이 생겼다. 몇 번째 손찌검인지 몰랐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마음에 차지 않게 굴 때마다 타박을 하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엘리자벳은 찌르르 울리는 아픔으로 제 허벅지 색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똑바로 해. 누가 쉬랬지?”

건조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픔에 잠시 얼어붙었던 엘리자벳이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사내의 물건이 그녀의 몸 안 깊숙이 박혔다 조금 나갔다. 살짝 들렸다 내려오는 허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살짝 숙인 그녀의 몸을 페루스가 조각상 다루듯 쓸었다. 튀어나온 골반을 건드리고 떨리는 허리를 지나 보기 좋게 움직이는 살덩이를 잡았다. 그리고 가지고 놀듯 이리저리 주물렀다. 그리고 한 번씩 정점을 꼬집으며 손장난을 쳤다.

“흐윽…….”

울음과 함께 신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엘리자벳은 신음을 감추려 입술을 물고 손에 힘을 줬다. 페루스에게 잡힌 가슴이 떨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아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거칠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저절로 움찔거리며 들렸다 내려왔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얇은 손가락 끝마디가 사내의 배를 꾹꾹 눌렀다.

“생각보다 잘하는군. 허리 놀리는 게 제법 쓸 만해.”

짙은 비웃음을 담은 채 페루스가 엘리자벳을 칭찬했다. 그는 제 위에서 몸을 흔드는 엘리자벳이 꽤 만족스러웠다. 달뜬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노력하는 여자가 귀여웠다.

전의 관계에서도 여자에게 비슷한 걸 시킨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리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에게 움직이라 시킨 적은 처음이라 새로웠다.

“더, 더 이상…… 읏!”

몇 번 사정한 후라 엘리자벳은 이미 지쳐 있었다. 게다가 쭉 이 자세로만 했으니 못 견뎌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매일같이 놀아났다 이거지? 페루스는 오전의 보고를 생각하며 입술을 씰룩였다.

레베카가 전한 말에 그는 생각보다 기분이 나빴다. 자신은 왜인지 모를 이유로 발걸음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놈과 매일같이 즐기고 있다는 말에 분통이 터졌다.

심지어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 속삭여? 누구 마음대로! 여자의 성정을 생각할 때 거짓임을 알았지만 상상만으로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빨리 움직여.”

짝―

페루스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그가 주는 자극에 엘리자벳이 신음을 뱉으며 안을 조였다. 앞의 정사들로 매끄러워진 내벽이 그의 물건을 조이자 페루스는 생소한 쾌락이 느껴졌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움직이며 페루스의 몸 위로 후드득 눈물을 쏟았다.

페루스는 그 모습에 한층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자신은 즐겨도 엘리자벳은 즐겨서는 안 됐다. 울며 그에게 다리를 벌릴지언정 쾌락에 겨워해서는 안 됐다.

“넌 안 돼.”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엘리자벳이 의문에 찬 얼굴을 하고 그를 봤다. 그러나 그는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엘자. 네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도록, 행복감에 웃도록 내가 그리 둘 것 같아? 너는 누구에게 안기든 쾌락이 아닌 괴로움에 울어야 해. 누구에게 사랑받건 수치심과 비참함을 느껴야 해. 어디서든 네 자리가 내 밑이라는 걸 깨닫고 절망해야 해. 왜냐면…….

“아파…… 흣, 아파요. 페루스.”

그래야 네게 동정을 느낄 테니깐. 그래야만 널 살려 둘 마음이 드니깐.

페루스는 아프다 소리치는 엘리자벳의 말을 무시한 채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제 손길대로 움직이는 새하얀 가슴이, 제 뜻대로 움직이는 가는 허리가 흡족했다.

“난 엘자 네가 이리 천박하게 구는 게…… 읏, 마음에 들어. 꼭 네 주제를 아는 것…… 으윽, 같아 마음에 차.”

엘리자벳은 밑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만하라 눈으로 애원했다. 제 몸을 마음껏 만지며 움직일 것을 명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수치심에 도망치고 싶었다.

“어때? 너도 네 꼴이 제법 괜찮은 것 같지? 그러니 벌거벗고 사내를 올라탄 와중에도 그런 얼굴을 하지. 안 그래?”

페루스가 말할 때마다 그녀는 창부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알몸으로 사내를 타고 앉아 허리를 돌리는 자신이 절망스러웠다.

“흐윽…… 흡.”

“대답 안 하나?”

“네에……. 흐읏…… 네.”

접합부에서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엘리자벳은 멈출 수 없었다.

엘리자벳은 그저 최선을 다해 페루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부끄러움보다, 괴로움보다 사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것이 더 두려웠다.

그가 만족하지 못하면. 마음에 차지 않다 말하면 어쩌지? 이대로 갑자기 그녀를 떼어 내고 제인의 딸을 죽여 버리겠다 소리치면 어쩌지? 엘리자벳의 머리에는 온통 그런 생각만이 가득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좀 더 가까이 자신에게로 당겼다. 맥없이 당겨진 몸이 겨우 그의 가슴을 잡고 견뎠다.

“그만……. 더 내, 내리면…….”

엘리자벳이 겁을 먹고 미약한 반항을 했다. 하지만 페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팔을 뻗어 가는 허리를 콱 붙잡고 여자의 하체를 자신에게로 더욱 내렸다.

엘리자벳이 입을 벌리고 끙끙거렸다. 페루스는 이대로 그녀를 엎어 버릴까 고민하다 관두고 허리를 쳐올렸다.

오늘은 어쩐지 저렇게 우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저로 인해 우는 모습을 계속 담고 싶었다. 그가 세게 허리 짓을 시작하자 엘리자벳이 다시 그만해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애원 따위 듣지 않은 채 제 욕심을 채워 나갔다. 퍽퍽 강하게 위로 쳐올리자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리 좋은데 내가 왜 피했을까? 다른 놈하고는 그리 물고 빨았다는데 손목 따위 신경 쓰지 말걸. 스스로 만족시키겠다 빌 때, 그때 진작 범할걸. 그 표정이, 목소리가, 고작 그게 뭐라고 멍청히 참았던 걸까. 쓸데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딜!”

계속되는 허리 짓에 엘리자벳이 저도 모르게 몸을 틀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재빨리 움직임을 막았다.

넌 못 가. 엘자. 여기가 네 자리인데 어딜 가려고.

강제로 잡아 둔 몸 안으로 그의 물건이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그 속도에 맞춰 엘리자벳의 눈물도 계속해서 그의 가슴을 적셨다.

“아아…….”

잠시 후 페루스가 파정함과 동시에 엘리자벳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몇 번이고 받아 냈지만 언제나 생경한 감각에 엘리자벳은 바르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페루스가 빨랐다. 그는 움직이려는 작은 몸을 가두고선 옆으로 돌려 안았다.

서로의 몸이 촘촘히 붙었다. 흐트러진 숨과 빠른 심장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상대의 숨과 심장 박동은 분명 불편한 것이었지만 페루스는 왠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맞붙은 피부가 축축한 것이 신경 쓰였지만 견딜 만했다.

아주 익숙한 향이 몸 전체 힘을 앗아 갔다. 어두운 시야에 페루스는 어느 때보다 편안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붙였다.

* * *

“어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어. 그래도 값은 치러야 하니 답을 해 주지. 아이는 네가 하기에 달렸어. 엘자.”

이른 아침, 깨어난 페루스는 엘리자벳에게 그리 말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그에게 시달린 엘리자벳의 입장에서는 허무한 답이었다.

“……고마워요. 페루스. 앞으로 내가 잘할게요.”

그러나 엘리자벳은 적선하듯 툭 던진 말에도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페루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겹의 침의만을 입고 막 목욕을 마친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 자신은 그의 목욕 시중을 드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였다.

엘리자벳은 까치발을 한 채 꼼꼼히 단추를 채우고 무릎을 꿇은 채 바짓단을 정리했다.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시중이었다.

“다행히 점점 나아지는군. 밤일도 그렇고 역시 넌 시중을 받는 쪽보다는 하는 쪽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야. 엘자.”

페루스는 그런 엘리자벳을 비웃으면서도 당연한 듯 오만하게 그녀의 봉사를 받았다.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비꼼에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만 곧 웃어 보였다. 그녀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럼 또 언제 올 거예요?”

엘리자벳은 페루스에게 크라바트를 매어 주며 조심히 물었다. 일단 희망이 보이니 조금 용기가 났다. 이대로 쭉 얌전히 군다면 그가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희망을 가졌다.

만족스럽지 않다 했으나 어제보다 확연히 기분도 좋아 보이고, 아까 자신이 기침을 하니 시가도 꺼 주지 않았나. 어차피 제인의 딸은 그에게 있어 저를 잡아 두는 용도였으니, 제가 도망갈 마음이 없음을 보여 준다면 페루스 그도 분명 조금은 자비를 보여 주리라.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미리 다리 벌릴 준비라도 할 참인가?”

“그게 아니에요. 난 그냥…… 그저…….”

“공작에게도 그리하나? 창부라 좀 일렀더니 정말 그리 돼 가나 보지? 그새 꼬리를 살랑거리는 꼴이라니. 나 참.”

그러나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페루스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엘리자벳을 침대로 밀어 버렸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을 억지로 엎드리게 하더니 침의를 올리고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아악!”

급작스럽게 닥친 고통에 엘리자벳이 계속해서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른 놈한테는 창부 짓 작작 해. 당장 안고 있는 게 이리저리 몸 굴리는 갈보 년이라도 티가 나면 짜증 나는 법이야. 몸을 팔기로 했으면 손님의 취향을 헤아릴 줄 알아야지. 네가 눈치 없게 굴 처지도 아니잖나. 응?”

“아니야.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니깐…….”

“눈치 있게 굴랬지. 입 닫아. 엘자. 지금은 내 욕정이나 받아야지. 네가 변명하는 시간이 아니야.”

페루스는 우는 엘리자벳을 누르고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얇은 침의 속 부드러운 가슴을 뭉개 버릴 듯 세게 쥐었다.

곧 엘리자벳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침부터 방 안 가득 진득한 열기가 퍼졌다.

‘감히 누구한테 또 꼬리를 흔들려고.’

페루스도 알았다. 그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엘리자벳이 그 부드러운 손으로 저 아닌 다른 사내를 씻겨 주고 시중을 든 후 언제 오냐 물을 것을 상상하니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얌전히 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그저 내가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거야. 알았어?”

“네, 흑……. 네에…… 흐읍.”

정사는 꽤 길었다. 긴 시간만큼 한껏 화를 푼 페루스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반하는 대답 따위 듣지 않겠다는 말투에 엘리자벳은 울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대답만 잘하지. 쯧!”

페루스는 그런 엘리자벳을 보더니 가늘게 떠는 몸 위로 이불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뭉친 채 떨어진 이불이 어느새 알몸이 된 엘리자벳의 하체를 간신히 가렸다.

‘또 혼자 청승이지.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페루스는 애처로운 엘리자벳의 모습에 화가 다시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더 이상 엘리자벳에게 화를 내는 건 무리였기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 * *

“몸은 어떠세요? 아! 물을 필요도 없나?”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엘리자벳이 이불에 가까스로 몸을 말고 아픔을 견디고 있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레베카였다.

엘리자벳은 금발 시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보지 않은 채 손짓으로 나가라 일렀다. 시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듯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그녀의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가여운 척 마세요.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치른 줄 알겠으니.”

“…….”

“매일 하시는 일이잖아요? 한 분만 오시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매일 우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

“…….”

“창부.”

“…….”

“전 사내 가랑이나 찾는 그런 것들이 제 처지 가엽다 하는 게 제일 이해가 안 돼요. 더러우니 그런 취급을 받는 거지.”

“…….”

“아. 설마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이르진 않으시겠죠?”

명백한 적의였다. 엘리자벳은 시녀에게조차 멸시당하는 제 처지가 비참했지만 뭔가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가렴.”

가까스로 입을 연 그녀는 레베카를 내보내려 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런 엘리자벳에게 더 약이 올랐는지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전하께서 이리 침대나 데우고 있을 때, 황녀님의 유모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 아시나요?”

약간의 흥분이 묻어 있는 말에 엘리자벳의 상체가 저절로 일어났다. 유모? 유모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설마…….

“사라 오스틴 말이에요. 그 여자 지금 반역죄로 잡혀 있답니다.”

엘리자벳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사라가 왜 여기에 있어? 사라는 분명 동부에…… 동부에 있어야 하는데. 동부에서 안전하게 있어야 하는데. 궁에 있다고? 왜? 혹시 내가 못 가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내가 잡혔단 소식을 못 들었나?

생각도 않고 있었던 인물의 근황에 엘리자벳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야. 저 아이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거야. 사라가 잡혔다면 페루스가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어. 제인의 가족들도 잡아서 내게 들이미는데 사라와 내 관계를 아는 그가 사라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이불 속에서 드러난 엘리자벳의 상체에는 무수히 많은 자국이 나 있었다. 그 흔적에 레베카의 눈이 더욱 올라갔다.

“페루스 님 말로는 곧 죽일 거라 하시던데, 목이 날아가기 전 한 번은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명색이 오로르의 충신이잖아요?”

“……목이 날아가? 누가?”

“다시 말씀드릴까요? 전하의 유모인 사라 오스틴이 곧 죽는답니다. 간악한 마녀의 수하다운 최후지요.”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며 레베카는 환하게 웃었다. 죽일 거라고 직접 들은 바는 없었지만 지하에 갇혀 있으니 죽는 건 맞을 것이다.

‘틀려도 뭐, 저렇게 괴로워하니깐.’

레베카는 입에서 무언가 게워 내기 시작한 엘리자벳에게서 살짝 떨어지며 마지막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까워요. 비록 섬기는 주인은 틀리지만 저는 그분을 존경해요. 주인이 무능해 처지를 몰라줘도 끝까지 충정을 바치잖아요? 요즘 세태에 어디 그러기가 쉽나요. 듣기로는 마지막 남은 아들도 이번에 죽었다던데. 그래도 끝까지…… 하아. 저도 그런 신하가 되고픈 마음뿐이랍니다.”

얼굴을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라는 엘리자벳에게 가장 가까운 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엘리자벳이 태어난 날부터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옆에 있었으며 엘리자벳의 유년기를 채운 이 중 하나였다.

‘아가씨! 어딜 가세요. 식탁에서는 함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죠!’

‘숙제를 다 하신다면 딸기를 듬뿍 올린 생크림 케이크를 간식으로 드릴게요.’

‘이번 구두는 황녀님이 좋아하시는 노란색이랍니다.’

‘쉿. 엘리엇 님께는 비밀로 해 드릴게요. 다만 다음부터 지도 그리는 일은 없으셔야 합니다. 소문이 나면 시집은 다 가신 거예요!’

비록 나이가 있어 이름만 유모였지만 사라는 엘리자벳과 엘리엇의 보육 전반을 맡았고 남매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벳을 아꼈다.

엘리자벳은 그녀가 있어 생모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으며 애정에 주리지 않고 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엘리자벳은 레베카가 아무렇게나 던진 소식에 까무룩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일부러 그랬지!”

“너 미쳤어? 이거 놔! 리즈! 이거 놓으라구!”

난리도 아니었다. 우아하게 꾸며진 방, 깔끔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이 서로 머리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보기 드문 싸움에 주변 시녀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다들 너무 당황해 말릴 정신도 없었다. 세상에 황궁 안에서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니. 그것도 귀족 가문 영애들이!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이 망할 것아!”

망할 것. 자신들이 들은 말이 정녕 사실인가. 시녀들은 입을 벌리고 서로를 바라봤다. 자신들도 경악스러운데 듣는 이는 어떨까. 심지어 그 당사자는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레베카였다.

“이…… 이게!”

역시나 들어 본 적 없는 말에 레베카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구경하는 이들은 말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 당황했는지 레베카는 리즈를 잡고 있던 손조차 놓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리즈는 더욱 세게 레베카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작은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는지, 레베카의 금발이 군데군데 빠져 손가락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하신데!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맞지?”

“아니라고 하잖아! 난 호의를 가지고 말한 거야! 충신이 그렇게 죽는다는데 알아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

이번에는 리즈의 입이 막혔다. 맞는 말이었다. 황녀가 쓰러지건 말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아니야! 황녀님이 쓰러져 죽기라도 한다면…… 동생이! 동생에게 갈 약이 끊길 테니깐!’

리즈는 입술을 물고 그리 생각했다. 그랬다. 황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분명 그녀에게 피해가 돌아올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무슨 목적으로 황녀궁에 왔는지 모르지만 리즈는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동생의 약값. 리즈는 그걸 위해 일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황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리즈는 제 마음을 그리 이해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너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저기 리즈. 일단 레베카 좀 놓아 주고…….”

보다 못한 샬럿이 나섰다. 그러나 리즈의 눈초리에 그녀는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가장 얌전하던 리즈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놀라웠다. 슬쩍 옆을 보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리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악! 못 참아!”

정신을 차린 레베카가 반격을 시작했다. 그녀는 잡힌 머리를 뒤로 빼려 하며 리즈의 머리를 잡았다. 엉망으로 풀린 갈색 머리가 다시 손아귀에 잡혀 들어갔다. 리즈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잡힌 머리를 풀기 위해 레베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레베카도 지지 않고 발길질을 했다.

“……못 말리겠어.”

샬럿은 저 개싸움을 말리기가 무서웠다. 사이에 끼었다간 제 머리채도 잡힐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다른 이들도 구경 올 게 뻔한데. 시녀장님께 혼날 텐데. 그것보다 이 말이 주인께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레베카 망할 것!’

겉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샬럿은 리즈와 마찬가지로 레베카를 욕했다. 저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와서 저와 같은 일을 맡게 되었는지. 제멋대로에다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뒤처리는 항상 내 몫이고. 이런 일도 출신 배경을 따지나? 한숨만 나왔다.

‘레베카가 산호 팔찌를 황녀님께 계속 권하는데 혹 제가 모르는 이유가 있나요? 독이라든지…….’

‘산호 팔찌? 독? 그게 뭡니까?’

‘……아닙니다.’

샬럿은 얼마 전 제임스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레베카는 너무 엉망이었다. 첫날 대놓고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질 않나. 대놓고 주인과의 친분을 과시하지 않나. 샬럿은 처음 레베카가 그리하는 게 다 명에 따른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레베카는 성질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그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그래도 지금껏 아슬아슬하게 황녀에게는 얌전하던 레베카였다. 레베카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의를 지키며 황녀를 모셨고 본분을 다했다. 물론 뒤에서는 다른 이에게 일을 떠넘기기 일쑤였지만 그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끝이지.’

그러나 오늘로 평화는 사라져 버렸다. 레베카는 드디어 황녀 앞에서 가면을 벗어던지고 제 성격을 드러냈다.

시작은 주인이었다. 샬럿은 아침 일찍 황녀의 방에서 나오는 페루스를 보고 기겁했다. 이른 시각이긴 했으나 아침에 나온 걸 보니 분명 일을 치른 것이 분명했다.

‘미리 준비해 놓으렴. 곧 목욕을 하실 거야.’

하녀에게 목욕물을 빨리 데우라 명한 후, 방을 들어선 샬럿은 입구에서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응접실에는 레베카가 있었다. 서 있는 채로 부들거리는 레베카는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러나 눈가가 거뭇한 것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방으로 가라 했어야 했는데…….’

샬럿은 최근 자신의 행동 중 가장 후회되는 걸 뽑으라면 오늘 아침의 일을 뽑을 것 같았다. 레베카가 주인을 좋아한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매일같이 이름을 부르며 팔랑거리는데 모르는 이가 있을 수 없었다. 샬럿이 드레스를 골라 놓고, 여기저기를 정리하며 하녀들과 부지런을 떨 동안 질투에 미친 레베카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샬럿 님! 전하께서, 황녀 전하께서…… 그 레베카 님이…….’

헐레벌떡 뛰어온 하녀가 전한 말에 샬럿이 들고 있던 모든 걸 내던지고 재빠르게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는 혼절한 황녀와 레베카가 있었다. 샬럿은 하얗게 질린 황녀를 붙잡고 빨리 궁의를 부르라 소리쳤다. 그리고 원흉이 분명한 레베카를 노려봤다.

‘레베카! 무슨 짓이야!’

‘난 사실을 일러 준 것뿐이야! 주인이면 제 아랫것들이 어떻게 고초를 받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혼자 편히 누워 있으면 다인가. 게다가 사라 오스틴은 오로르의 가장 충성스러운 충신이잖아? 그녀가 죽는다는 건 알아야지.’

‘너!’

레베카의 말에 샬럿은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지하의 일은 비밀이었다. 비록 궁 안의 대다수가 아는 일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기밀에 속했다. 특히 황녀에게는 더더욱! 그러나 레베카는 자신이 어떤 사고를 쳤는지 감이 안 오는지 황녀를 한 번 노려보곤 방을 나가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결국 싸움은 시녀장이 도착하고서야 끝났다. 레베카와 리즈는 각자 엄한 벌을 받고 독방에 갇혔다. 레베카는 억울하다 소리쳤지만 시녀장은 단호했다. 레베카는 주위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달라 소리쳤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전이 쓰러진 와중 두 사람의 행태는 벌을 받을 만한 것인 데다 레베카가 있으면 피곤해질 것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리즈가 왜?’

샬럿은 끌려가는 레베카보다 제 발로 걸어가는 리즈에게 더 관심이 갔다. 리즈는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저와 같은 주인을 모시는 아이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몇몇 이들처럼 눈속임으로 들어온 아이도 아니었다.

‘분명 명을 받고 들어왔을 텐데.’

레베카와 싸워서 좋을 이유가 있나? 조용히 고개를 숙인 리즈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리저리 엉킨 머리만 아니라면 아까 레베카와 싸운 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방으로 가야.’

그러나 샬럿은 일어서는 호기심을 정리했다.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샬럿은 침실에 함께 있을 황녀와 우세리 공작을 기억해 냈다. 황녀를 돌보겠다며 시녀를 모두 내보낸 그는 샬럿이 가장 집중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이었다.

“너희는 전하께 가 보렴. 공작님은 물리셨지만 언제 시중이 필요할지 모르니 밖에서라도 대기하고 있어야지. 쯧! 아직도 그런 머리가 없어서야.”

다행히 시녀장이 쌀쌀맞은 질타를 가장해 그녀를 도왔다. 샬럿은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 * *

“음, 그건 곤란한데. 황녀님.”

“제발! 공, 공은 할 수 있잖아요.”

“그보다 이름 불러 줘. 딱딱한 게 꼭 친분 없는 사이 같잖아. 섭섭해라.”

“타티카 부탁이에요. 좀 도와주세요. 할 수 있잖아요. 타티카는 할 수 있잖아요.”

타티카는 울면서 제게 매달리는 엘리자벳 때문에 난감했다. 혼절했다 들어 급히 왔더니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누군가를 구해 달라는 말이라니. 제 손을 구명줄인 것처럼 잡고 흔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동시에 좀 재미있기도 했다. 평소에는 닿는 것도 싫어하더니 약 없이도 매달릴 줄 아네?

“하지만 그건 페루스가 하는 일이고. 내가 간섭하면 페루스가 싫어할 거야. 난 미움받기 싫어, 황녀님.”

“……부탁해요. 제발요. 이렇게 빌게요. 타티카 제발…….”

“차라리 페루스에게 직접 부탁하지?”

“그럼 그를 좀 만나게…… 만나게 해 줘요. 난 여기서 나갈 수가 없어요.”

페루스를 불러오는 건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티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귀찮은 데다 먼저 페루스를 찾는 건 자존심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보상이 있다면야…….

“들어줄 수는 있는데 말이야.”

“정말? 정말이에요?”

“있긴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깐 페루스가 과연 황녀님 부탁을 들어줄까?”

“아…….”

“페루스가 잡아 온 사람들인데 그가 순순히 풀어 준다고? 황녀님 말을 듣고? 얼마 전에 황녀님 눈앞에서 제인인가 하는 여자를 죽인 것도 페루스 아니야?”

익숙한 이름에 엘리자벳이 말을 멈추고 불안한 듯 타티카를 봤다. 맞는 말이었다. 빈다고 해도 페루스가 그녀의 말을 들어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타티카는 흔들리는 눈을 보며 쐐기를 박기로 했다.

‘이참에 둘을 좀 떨어뜨려 놔야지. 그래야 내게 관심이 좀 더 올 거잖아?’

“내가 알기론 그 여자의 가족……. 그래. 여자의 남편도 죽었다지?”

“아니에요!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어요. 아이도 살아 있다고…….”

“아이만 살아 있는 거지. 페루스가 다른 이야기를 했어?”

작은 얼굴을 고정시키자 파르르 불신으로 떨리는 초록빛의 동공이 정확히 보였다. 타티카는 말없이 떨기만 하는 엘리자벳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줬다.

“아니지? 한 적 없지? 그 남자. 먼저 간 제 아내를 부르면서 죽었대. 안타까워라. 듣기만 했는데도 너무 불쌍한 거 있지.”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그렇게까지 했을 리가 없어요! 그는 그저 나를 미워해서, 우리 가문을 싫어할 뿐인데……. 내가 얌전히 있으면 분명 그렇게까지는 안 할 사람인데.”

‘생각보다 믿고 있네? 진즉 정 뗀 줄 알았더니. 그건 좀 불쾌한걸. 나는 새 모이만큼도 안 믿으면서…….’

타티카는 제 입을 엘리자벳의 귀로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우선은 불신을 키우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해? 내가 왜? 나는 페루스랑 달라. 황녀님을 아프게 하지 않아. 알잖아?”

타티카는 그리 말하며 얼마 전 고쳐 준 엘리자벳의 손목을 쓸었다.

“페루스처럼 여길 부수지도 않고, 이 예쁜 얼굴을 내려치지도 않지.”

엘리자벳은 타티카가 말하는 소리가 거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픔을 주지 않아? 거짓말을 안 해?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가 한 다른 말이 더 신경 쓰였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인의 남편이 죽었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페루스가 그리했을 것 같았다.

‘엘리엇도…… 제인도 모두 그가 죽인 게 맞잖아.’

그녀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간 건 페루스가 맞았다. 엘리자벳이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내가 이리 우물쭈물하다간…… 페루스만 기다리다간! 사라도 죽을 거야. 죽고 말 거야!’

“그럼 타티카는 나를 도와줄 거예요? 다르다고 했으니깐…… 부탁하면 도와줄 거예요?”

엘리자벳의 말에 타티카는 예쁘게 미소를 지어 봤다. 보라색 눈 밑에 찍힌 점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엘리자벳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훤히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저보다 페루스를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들키면 페루스한테 혼나긴 하겠지만 황녀님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타티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대신 나도 받아 갈게 있거든.”

엘리자벳은 바로 대가를 요구하는 타티카가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대가를 주고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그에게 빚을 졌다는 걱정 따위는 없을 테니.

‘하지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나? 그가 나에게 원할 거라곤…….’

“……내게 무얼 원해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게요.”

“별거 아니니 그런 눈 하지 마. 이건 그저 내 소망 중 하나일 뿐이거든. 물론 황녀님한테 어려울 수는 있지만.”

“……말해 줘요.”

엘리자벳이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말을 하자 타티카가 아주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엘리자벳의 아랫입술을 쓸며 말했다.

“나도 어디든 황녀님의 처음을 가지고 싶어. 그러니깐 말이야…… 여기로 페루스를 삼킨 적 있어?”

* * *

아일라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 웃으며 바닥을 긁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아일라를 걱정하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아일라는 방에서 가장 먼저 울어 재낀 것에 비하면 늦게 미친 편이었다.

요 몇 주? 며칠? 아니 몇 시간일까. 지하 다수의 사람이 짧은 시간 동안 미쳐 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들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스텔라는 첫날, 통로 끝에 있던 철문을 봤다. 지금 스텔라가 머무는 방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스텔라는 그곳에서 가끔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껏 애써 착각이겠거니 그리 생각했다. 생각해야만 했다.

‘죽었어. 분명 죽은 거야.’

통로 사이, 질질 끌리던 몸을 기억났다. 고함을 지르며 끌려가던 남자는 아주 짧은 시간 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나왔다. 어디가 상했는지 모를 정도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끌려갈 때와 다르게 조용했다. 남자를 끌고 나온 사내들은 아무 말 없이 통로를 지나 어디론가 가 버렸다. 바닥에는 아직도 그때의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굳기 시작한 피는 지하에 갇힌 모든 이의 가슴에 검은 자국을 남겼다.

입을 벌린 채 눈을 감은 얼굴이 스텔라의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스텔라는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막연한 불안감보다 아는 것이 낫다 여겼지만 아니었다.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한 머리는 시시각각 미쳐 갔다.

‘우리는 관계없는데……. 적어도 난 아무 상관 없는데!’

스텔라와 동료들은 남자가 죽어 나온 시점부터 자신들이 무슨 죄로 잡혀 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하에 가득한 동부 억양, 몇 번 본 적 있는 광신도들, 여기저기서 대화 속 간간이 들리는 황녀, 황제, 반역자, 오로르…….

‘난 억울해. 난 저들과 달라. 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스텔라는 철장 너머 동부 사람들로 추정되는 이들을 봤다. 시야 끄트머리엔 사라 오스틴이 보였다. 저 여자가 들어오고 한참 동안 진실을 외면했지만, 저 여자는 증인이었다. 오로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어느 가문이 되었건 황제가 바뀌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황녀를 모시던 저는 오로르의 측근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게 분명했다. 왜 시대가 바뀌면 꼭 그런 희생양이 있지 않나. 가장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을, 가장 만만한 이들을 희생양으로 쓰질 않던가. 자신은 그런 제물이 된 것이 분명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내 말을 들어 줬으면! 그러면 내가 얼마나 그 여자를 싫어했는지! 그 여자에게 한 톨 충성 따위 없었다는 걸 알릴 수 있는데!’

아주 큰 착각이었지만 스텔라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녀의 착각은 아주 조금 옳은 구석도 있었다. 그리고 이유가 어찌 되었건 스텔라는 별 볼 일 없는 장기 말이었기에 지하에 갇혀 있었다.

* * *

“아니야. 혀를 좀 더 써야지. 황녀님.”

엘리자벳은 제 입을 가득 채우는 살덩이를 뱉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편히 앉은 채 다리를 벌리고 그녀의 머리를 그 사이에 넣은 사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엘리자벳의 몸이 조금 괜찮아지자 타티카는 바로 그녀의 무릎을 꿇렸다. 그러고는 도움을 빌미로 보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사내의 물건을 입에 담을 것을 요구했다.

작은 입안. 미처 다 들어차지도 못한 사내의 것 때문에 엘리자벳은 숨이 막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 머리 안으로 별별 감정과 생각이 다 찼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턱턱 막히는 숨구멍은 시야를 하얗게 태워 버렸고 종국에는 그저 숨을 쉬고 싶다, 이걸 뱉어 내고 싶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흐응. 가르치려면 조금 걸리겠네.”

무얼 가르쳐? 더 이상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는데도 위쪽에서 들린 말에 머리가 반응했다.

‘싫어! 다시는 이런 짓 따위 하지 않을 거야.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어쩔 수 없으니깐…….’

엘리자벳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손에 힘을 줬다. 사내가 억지로 가져다 놓은 손에 부드러운 천이 잡혔다. 그 너머 단단한 사내의 다리가 느껴졌다.

“괴로워? 황녀님.”

타티카는 부들거리는 손을 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타티카는 잡고 있던 머리를 제 쪽으로 조금 더 밀어붙였다. 그리고 벗어나려 뒤로 가는 행위를 저지시켰다.

‘이리 도망만 가서야…….’

언제 끝나겠나. 떨리던 작은 손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해 봐. 혀를 쓰고 좀 더 조여. 황녀님의 아랫도리처럼 말이야. 그럼 빨리 끝날 거야. 쉽지?”

엘리자벳은 눈물을 쏟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이 행위 자체도, 끔찍한 감각도 싫었지만, 그보다는 숨을 쉬고 싶었다. 목까지 침범해 온 이것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엘리자벳은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타티카의 말대로 혀를 움직이고 입술을 조였다. 빠듯이 물어 오는 느낌이 좋은지 타티카의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도망칠 구석 따위 없는 단단한 힘이었다.

“하아……. 좋은걸. 그래도 처음치고는 말이야, 꽤 잘하는걸? 밑구멍처럼 윗구멍도 부드럽네. 상상 이상이야. 황녀님은.”

위에서 흥분 가득한 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을 저주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렇게 몸을 팔다니. 홀로 방조차 나서지 못해, 제 사람 하나를 구하지 못해 이리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다니. 문득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저를 보며 말한 단어를 떠올렸다.

‘창부.’

정말 제 처지가 창부와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돈을 안 받았다 뿐이지 무언가 부탁하기 위해 이 사내 저 사내에게 몸을 내주고 있는 자신이 창부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싼 드레스를 입고 진귀한 음식을 먹어도, 고귀한 핏줄을 물려받고 많은 이들에게 떠받아들어져도 본질의 차이는 없었다. 대가를 줄 이가 나타나면 스스로 옷을 벗고 알아서 다리를 벌리고 나아가 이제는 사내의 물건을 삼키고 있었다.

“하으, 응…… 그렇게…….”

‘그의 말이 맞아. 난 그들과 다름없어.’

한번 빠진 자책의 늪에선 헤어 나올 방법이 없었다. 엘리자벳은 위에서 어떤 말을 하건, 어떤 소리를 내뱉건 상관하지 않고 머리를 움직였다. 리듬감을 주며 그녀를 흔드는 사내의 손길에 그냥 저를 놓아 버렸다.

한껏 벌린 입은 마비되어 버려 더는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픈 것은 꿇어앉은 무릎이었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났는지 그녀의 무릎은 푹신한 바닥 위에 있었음에도 괴롭다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언제 끝날까.’

1초가 아주 느리게 흘렀다. 입에서 나와 턱에서 허벅지로 뚝뚝 떨어지는 제 타액을 느끼며 엘리자벳은 시간만을 재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입안에 가득 들어찬 것은 크기를 줄일 생각이 없었다. 열기와 단단함을 간직한 채 그것은 엘리자벳의 입안 너머 목을 찔렀다 나가길 반복했다.

“황녀님. 여기를 봐야지.”

한참 멍하니 눈을 감고 있는데 사내가 눈을 뜨라 명령을 했다. 갑자기 들린 턱에 엘리자벳은 느리게 눈을 뜨곤 사내를 봤다. 타티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제 것을 문 엘리자벳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봤다.

“아아…… 예뻐. 황녀님. 정말 예뻐. 너무 예뻐.”

타티카의 입에서 지겨울 만큼 자주 말하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는 제 것을 머금고 있는 엘리자벳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더 먹여 줘야지, 그리 생각하며 그는 조금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앞으로 손이 움직일 때마다 괴로워하는 엘리자벳의 모습이 고스란히 타티카의 눈에 담겼다.

엘리자벳의 얼굴은 눈물로 한껏 젖어 온통 축축함이 가득했다. 타티카는 그 축축함을 없애려 엘리자벳의 창백한 뺨을 쓸고 붉은 눈가를 비볐다. 꼭 연인의 눈물을 닦아 주듯 부드럽게 엘리자벳의 얼굴을 만졌다. 엘리자벳의 얼굴은 타티카의 손 하나에 가려질 만큼 작았으므로 그 행위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흐음.”

어느 순간 붉은 눈가를 매만지던 타티카의 손이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엘리자벳의 머리를 고정했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바닥으로 했다. 콜록거리는 그녀의 입안에서는 하얀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아깝잖아. 황녀님…….”

위에서 나른한 목소리로 타티카가 뭐라 중얼댔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시선은 바닥으로 고정되었다. 하얀 것이 선명히 눈에 담겼다. 동시에 제 입안을 도려내고 싶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 이걸로 닦아. 황녀님.”

고개를 숙인 채 얼이 나가 있는 엘리자벳의 입가에 손수건이 닿았다. 배려가 좋을 법도 했지만 엘리자벳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손수건을 쳐 내고 말았다. 지금은 남자가 주는 것이 무

엇이 되었건 받고 싶지 않았다.

“너무한걸? 나 섭섭해. 황녀님.”

그런 엘리자벳의 기분 따위 상관없다는 듯 타티카는 손수건을 주워 들고 엘리자벳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의 턱을 들어 올려 손수건을 입가로 가져갔다.

“괜찮으니 놔요, 놔!”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한껏 예민해진 엘리자벳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타티카는 손을 놓기는커녕 힘을 줘 엘리자벳이 억지로 저를 보게 했다. 입가를 닦아 내는 손길은 거칠었다. 타티카는 빨갛게 부어오르는 피부를 무시한 채 손수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리는 아픔에 고개를 빼려 엘리자벳이 바둥거렸다.

타티카는 그런 엘리자벳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다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손수건에 하얀 무언가가 묻어나 있었다.

“처음이라 봐준 거야. 다음번에는 모조리 먹어 줘야 해. 알겠어? 아랫입으로는 잘 먹잖아? 똑같은 건데 차별하면 안 돼.”

한껏 배려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힘이 빠졌다. 다음번? 다음번에도 이런 짓을 할 참인가? 분기가 솟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엘리자벳의 격한 감정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런 일이 또다시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흩어진 자리를 채운 건 끝없는 체념과 자책이었다. 엘리자벳은 들린 턱에 힘을 풀고 타티카를 봤다. 부서져 내린 얼굴에 담긴 뜻은 하나였다. 대가를 치렀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

“잘했어요. 그럼 상을 받으러 가 볼까? 황녀님.”

눈이 마주치자 타티카가 말했다. 휘어진 눈과 아직도 붉은 얼굴이 퍽 야살스러웠다.

엘리자벳은 자색 눈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사내가 대가를 빨리 치러 줄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 * *

사라 오스틴은 여러모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이름을 날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변방 자작가 출신으로 가문과 비슷한 자작가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며 아이를 낳고 키웠다. 또래 귀족 여인들과 비슷한 삶이었다. 당시의 사라는 자신의 삶이 그 틀에서 벗어날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은 마님! 작은 주인님께서…….’

그러나 그녀의 삶은 생각보다 빨리 바뀌었다.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은 그녀와 배 속의 아이를 두고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사인은 전쟁터도 아니요, 전염병도 아닌 급작스러운 심장 마비였다. 그녀는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렸다.

다정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편인지라 사라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사라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강한 기질이 있었던 그녀는 배 속 아이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딸인지 아들인지는 몰랐지만 이 아이를 남편의 후계자로 키우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했다. 이제 열아홉, 순진한 생각이었다.

‘아이는…… 아이만을 살려 주세요. 제발 형님을 봐서라도……. 핏줄이지 않습니까?’

‘어머님! 아버님! 제발 도와주세요. 그이의 아이를…… 손자를 살려 주세요.’

차기 가주 자리를 노린 시동생은 배 속 아이를 유산시켰다. 시부모는 형의 핏줄을 죽인 제 아들을 탓하기보단 손자를 지키지 못한 그녀를 꾸짖으며 가문 밖으로 내쳤다.

몹시 추운 겨울, 그녀는 하혈하는 몸을 이끌고 눈 덮인 벌판을 건너야 했다. 그 계절 그녀를 내쫓은 시부모의 뜻은 남편을 따라 죽으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라는 운이 좋았다. 무릎이 꺾이고 시야가 흐려지는 때, 그녀는 구원자를 만났다.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얀 담비 털 망토를 두른 긴 금발의 사내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크리스 오로르로 그는 나라 안 손꼽히는 권력자의 하나뿐인 반려였다.

크리스는 죽어 가고 있던 사라를 구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사라를 제 반려 엘라르 오로르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눈치 빠른 사라는 즉시 오로르 부부를 주인으로 모셨다. 크리스는 물론 엘라르 역시 자신보다 한참 어리지만, 영리하고 강인한 사라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성격이 비슷한 두 여인은 금세 가까워졌고 사라는 오로르 부부의 몇 안 되는 최측근이 될 수 있었다.

사라는 성심을 다해 주인들을 모셨다. 그녀에게 있어 크리스와 엘라르 부부는 완벽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사라는 특히 저를 구해 준 크리스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따랐다.

아마 크리스가 엘라르의 남편이 아니었다면 사라는 그를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라가 보기에도 엘라르는 너무 완벽한 이였기에 사라는 일찌감치 이성으로서 크리스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대신 사라는 맹목적으로 크리스가 말하는 것을 따랐다. 사라가 흔히 말하는 광신도가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저에게 고마워하셔야 해요. 가문은 대대로 영광을 누릴 테니 말입니다.’

오로르 부부는 사라의 복수를 도와줬다. 사라는 시동생의 배를 가르고 시부모를 발가벗겨 추운 겨울 쫓아낸 후 남편의 가문을 차지했다.

그녀는 명목상의 명분을 위해 결혼을 했다. 한참 어린, 한때 남편이었던 이의 또다른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아들을 봤다.

‘크리스 님! 엘리자벳 님은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그 후 사라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 주인 부부, 그중에서도 크리스는 그녀에게 힘든 일을 많이 맡겼다. 힘들었지만 사라는 최선을 다해 일했다. 크리스가 사라에게 주는 신뢰와 동질감은 너무 행복한 것이었다.

목숨이 몇 번 왔다 갔다 하긴 했으나 사라는 모든 일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상으로 주인 부부의 자녀, 나아가 손자들의 보육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 뜻에 따라 엘라르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사라는 기쁨에 잠겨 울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사라는 바로 오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뜻을 이루고 크리스가, 그녀의 주인이자 구원자가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이 찾아왔다. 사라는 몇 번이고 크리스를 따라 죽을까 고민했으나 결국 크리스가 남긴 뜻에 따라 홀로 남은 엘라르를 보좌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엘라르는 크리스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다 자멸했다. 실망한 사라는 가지 말라 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는 엘리자벳을 떼어 놓고 가족을 핑계로 동부로 돌아갔다. 그녀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사라가 동부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이 연달아 터졌다. 오로르는 무너져 갔고 사라는 수도에 출입하기도 어려웠다. 무언가 해 보려 손을 댈 때마다 희생만 늘 뿐이었다. 아들 둘은 엘리온과 함께 죽었고, 엘리엇은 제대로 황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곱게 키운 엘리자벳은 반역자들 손에 놀아났다. 사라는 몇십 년 동안 쌓은 탑이 모래처럼 무너지는 걸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수도의 인맥을 이용해 정보를 모으는 것과 그녀와 뜻이 같은 동지를 모으는 일뿐이었다.

‘전하를…… 구해야 해. 그분만이…….’

사라는 적게나마 사람이 모이자 멀쩡한 엘리자벳만이라도 구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제인을 보내고 지금껏 모은 사람을 모두 풀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엘리자벳은 탈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잡혀 들어갔으며 자신은 동지들과 아들 둘을 또다시 잃었다. 비참한 실패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사라는 철장을 바라보며 마음을 굳혔다. 잡혀 들어온 날, 마지막 남은 아들의 목이 날아갔다. 며느리는 그걸 보고 미쳐 버렸다. 가장 큰 동지였던 뮐렌 후작은 익사했다. 동지의 대다수는 죽거나 자신과 함께 이곳에 잡혀 있었다.

그러나 사라는 포기라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오랜 시간 인내할 줄 알았고 뜻에 굽힘이 없는 여인이었다.

‘돌아가신 크리스 님도 그 점을 가장 흡족해하셨지…….’

먼저 간 주인을 생각하며 사라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곳에서 죽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으리. 다들 미쳐 가는 지하 안에서 사라는 유일하게 정신을 바로잡고 있는 이였다.

“사라!”

그때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사라를 불렀다. 사라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봤다.

두꺼운 철창 너머 꼭 구해야 했던 엘리자벳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 * *

엘리자벳은 사라를 보는 순간 조마조마하게 뛰던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지하에는 그녀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이들이 가득했지만 엘리자벳에게는 사라만이 보였다. 사라는 엉망이었다. 백발은 묶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고 온몸엔 핏자국이 가득했다.

“전하!”

사라가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자벳은 창살 사이로 내밀어진 손을 잡으면 눈물만 흘렸다. 가까이서 본 사라는 마지막 인사 때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잡은 손은 물론 얼굴 전체에 주름이 가득했다.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는……. 가족과 편히 살았다면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텐데. 사라의 주름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엘리자벳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손에 힘만 줬다.

“나도 오랜만이지?”

“너는! 이 배신자 놈!”

엘리자벳 뒤로 나타난 타티카가 사라를 향해 친근히 인사를 했다. 사라는 타티카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타티카는 사라가 가장 죽이고 싶은 인물 중 하나였다. 주인 부부의 은혜를 입은 배은망덕한 노예 놈! 사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니!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혀를 끊고 죽어야지!”

“내가 왜? 그리고 사라. 아니 이제 할멈이 어울리겠다.”

“이! 천인공노할 놈이!”

“맞잖아. 이렇게 쭈글쭈글 늙어 버렸는데. 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사라는 빙글 미소를 지으며 약을 올리는 타티카를 노려봤다. 일이 끝났을 때 죽여 버려야 했는데! 사내를 죽이지 못한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전하. 왜 저놈과 함께 계십니까. 혹 저놈이 전하를 겁박해…….”

“아니야. 공작은 나를 도와주려고……. 내 부탁으로 왔어. 사라를 도와줄 거야.”

엘리자벳은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타티카는 상을 준다는 말 뒤, 시간을 정해 침실 창가에 서 있으라 엘리자벳에게 말했다.

엘리자벳은 그를 기다리는 동안 걱정과 초조함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 시각을 넘겼을 때는 속아 넘어갔구나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참 늦긴 했으나 타티카는 엘리자벳 앞에 나타났다.

“그걸 믿으시다니! 저놈은 믿을 만한 종자가 못 됩니다. 떨어져 이리로 오세요.”

사라는 철장의 존재도 잊고 엘리자벳을 잡아당겼다. 엘리자벳은 순순히 끌려가다 철장에 부딪혔다. 아픔에 엘리자벳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제야 사라는 퍼뜩 손을 놨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 늙은이가…….”

“사라. 난 괜찮으니 울지 마. 그보다 빨리 나가야 해.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들킬 거야.”

엘리자벳은 사라를 위로하며 사방을 살폈다. 황궁 밑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처음 와 본 지하는 끔찍한 곳이었다. 넓었으나 사방이 차가웠고 축축했다. 짐승처럼 철창에 갇힌 사람들은 다 어딘가 상해 있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줘!”

“이 망할 것! 엘리자벳! 엘리자벳 오로르! 나를 꺼내 줘. 너 때문에 죽게 생겼어!”

“황녀님! 이쪽입니다. 여기를 좀 봐 주십시오.”

“곧 그리 가요. 저도 곧…….”

사라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온갖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대부분 그녀를 향한 고함이었다. 어떤 것은 비난을 담고 있었고 어떤 것은 황홀감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 웃음소리와 말이 들리기도 했다.

압박감에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엘리자벳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다시 사라를 봤다. 분명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겠지. 들리는 소리 가운데는 익숙한 목소리들도 몇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귀를 닫았다.

‘모두를……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일단 사라만이라도……. 사라는 곧 죽인다 했으니깐. 그러니깐…….’

엘리자벳은 억지로 죄책감을 지우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들은 분명 자신 때문에 잡혀 왔으리라. 내 죄로…… 나 때문에……. 엘리자벳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외면하기로 했다. 사라만 구해 가면 분명 죄책감에 시달리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타티카. 사라를 구해 줘요. 약속을 했으니 지켜 주세요.”

단 한 사람만을 구해 가다니. 엘리자벳은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이기심이 역겨웠다.

그러나 엘리자벳에게 죄책감보다 중한 것은 사라였다.

‘사라도 제인처럼 그리 죽게 놓아둘 수 없어. 제인처럼 매일같이 피눈물 흘리게 할 수는 없어. 절대 안 돼!’

제인을 생각하면 엘리자벳은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사라도 제인처럼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빨리 사라를 데리고 나가요. 시간이 없다 했잖아요.”

그렇기에 엘리자벳은 여러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이번 일을 벌이며 앞뒤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라도 제인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제인처럼 매일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엘리자벳의 머리를 망가뜨렸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전부터 망가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엘리자벳은 2년 넘게 극한의 상황에 몰렸고 폭력에 시달렸다. 그녀는 그동안 자책감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에 엘리자벳은 항상 몸을 웅크렸고 숨어들어 갔다.

아무도 손을 잡아 주지 않은 2년간 천천히, 그러나 오래 쌓인 시간은 엘리자벳의 이지를 퇴화시키고 시야를 좁히기에 충분했다.

“미안. 황녀님.”

과연 타티카가 그녀를 도울 사람인가? 그가 돕더라도 사라를 구할 수 있는가? 들키면 어떻게 될까?

엘리자벳은 이 당연한 질문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엘리자벳은 사라를 구하겠다는 그 생각만을 가지고 타티카에게 매달렸고 부탁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계획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항상 이러는군. 정말 변함이 없어. 말은 죽어도 안 듣지.”

* * *

“이 반역자 놈! 당장 떨어져라! 전하! 물러나십시오!”

페루스는 옆에서 들리는 고함을 무시하고 엘리자벳 앞에 섰다. 파래진 얼굴을 보니 공포에 질린 것이 분명했다. 페루스는 손을 들었다. 엘리자벳은 팔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곧 닥칠 아픔에 대비한 것이었다.

“준비하지.”

그러나 페루스의 손짓은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가 손을 들며 말하자 뒤에 있던 사람 몇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빗나간 예상에 엘리자벳이 주춤하면서 몸을 조금 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 게 아니었다.

“악!”

“무슨 짓이냐! 당장 놓아라! 당장 놓아! 이 반역자 놈!”

“살살 좀 해. 페루스. 황녀님한테 폭력은 좀 그렇잖아?”

페루스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엘리자벳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머리카락을 휘어 감은 채 비명을 지르는 얼굴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철장 앞에 꿇어앉아 있던 엘리자벳의 무릎이 절로 들렸다. 페루스는 저를 보며 떠는 동공을 한 번 보고 부어오른 붉은 입술에 시선을 줬다.

‘무슨 일이지. 공.’

‘알잖아. 방 밖에 있는 쥐새끼들 다 봤는걸? 열심히 듣고는 네게 말 안 해 줬나?’

‘…….’

‘그리 보지 마. 그냥 이야기나 하자고 온 거야.’

‘무엇을? 혹시 공이 그 멍청한 여자를 꼬드긴 걸 말하는 거라면 그만하지. 듣기도 지겹고 그리되게 내가 둘 것 같나.’

‘누가 뭐래?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닌데. 난 다른 걸 알려 주려고 왔어.’

‘…….’

‘쥐새끼가 말 안 해 줬어? 황녀님이 나한테 뭘 해 줬는지?’

‘……별로 듣고 싶지 않군. 내가 이제 공의 은밀한 취향까지 알아야 하나?’

‘아냐, 들어야 해. 자랑하고 싶어서 이리로 온 거란 말이야. 황녀님이 말이지. 그 작은 입으로 말이야…….’

‘……천박하군.’

‘아아, 뭐라 해도 좋아. 너무 좋았거든. 그 얼굴을 너도 봤어야 했는데. 꼭 우유 마신 새끼 고양이 같았어.’

‘…….’

‘혹시 기분 나빠? 하지만 황녀님의 처음은 네가 가져갔잖아? 난 원래 그런 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억울했단 말이야.’

불쑥 떠오른 대화에 페루스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형형한 눈에 엘리자벳은 아픔조차 잊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들켰어. 들키고 말았어.’

너무 무서웠다. 엘리자벳은 끅끅 딸꾹질하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전하! 이놈이! 내가 네놈을!”

사라가 쾅쾅 철장을 쳤다. 페루스는 손에 힘을 더 주며 엘리자벳을 제 가까이 끌었다. 머리부터 끌려온 엘리자벳이 그의 한 팔에 잡혔다.

“잘, 잘못했…….”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놓자 품에 가득 찬 몸에서 잘못했다 비는 소리가 들렸다. 페루스는 그 지겨운 소리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할 짓을 왜 하나. 항상 이리 빌 것을.’

“미래의 황제께서 반역자들을 이리도 보고 싶어 하시니…….”

황제라는 말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페루스는 공포에 정신이 나간 와중에도 제 말을 똑똑히 들은 엘리자벳을 칭찬하듯 쓰다듬어 줬다.

“친히 보여 드려야지. 제임스.”

“예.”

“의자도 하나 준비하도록 해. 오래도록 보셔야 하니 편한 거로 준비하는 게 좋겠지.”

남은 이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들은 말을 가늠해 보려 했다.

‘황제? 황제라니? 누가?’

엘리엇이 죽은 이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분명 페루스나 누군가가 이을 거라고, 자신은 죽을 때까지 궁에 유폐될 거라 그리 생각했다.

“그게 무슨 말…….”

“가지. 공은 따라올 텐가?”

“그러지 뭐. 심심하기도 하고 너랑 두기에는 황녀님이 염려돼.”

말을 붙여 봤지만 돌아온 건 무시였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아무렇게나 안아 들더니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전하를 놓아 드려라! 전하! 전하!”

뒤에서 사라가 악을 썼다. 그러나 사라의 외침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페루스가 일행을 데리고 사라지자 지하 안으로 기사와 병사들이 잔뜩 들이닥쳤다.

그들은 지하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묶고 입에 천을 물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몇몇이 반항했다. 사라도 그중 하나였다. 사라는 엘리자벳을 찾으며 병사들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반항하는 이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곧 지하 사람 전부가 묶인 채 구속당했다.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전부 끌고 나간다!”

병사들을 총괄하는 기사가 명을 내리자 그들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끌어내기 시작했다.

곧 지하 감옥의 통로에는 울부짖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이 모조리 끌려 나가자 지하는 누가 있었느냐는 듯 조용해졌다.

* * *

“그만해요! 제발 그만하란 말이야! 그만해!”

또다시 사람이 쓰러졌다. 기사의 손짓 한 번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사람의 죄목은 앞서 목이 베인 사람들과 같았다. 재판도 없이 즉결로 내려지는 처형식에 엘리자벳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깨가 눌린 몸은 엘리자벳이 의자에서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누른 채 앞을 바라봤다.

“아, 다리 아파. 나도 앉고 싶은데. 황녀님 같이 앉을래?”

바로 옆에서 타티카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무시하며 페루스는 제임스에게 손짓했다. 제임스는 주인의 손짓에 누군가를 호명했다. 곧 기사들이 누군가를 끌어내 내던졌다. 이번에는 엘리자벳도 아는 얼굴이었다. 온몸이 묶인 채 신음을 토하는 남자는 무어가의 장남이었다.

한창 때인 그는 엘리자벳만 보면 얼굴을 붉히던 이로 먼 옛날 무도회에서 엘리자벳에게 몇 번 춤을 청하기도 했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퉁퉁 부은 얼굴에서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는 이의 얼굴이 나오자 엘리자벳의 손이 또 한 번 공중을 긁었다.

“다미어 무어. 죄인은 들으라. 그대는 귀족으로서 황제 폐하와 툴란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고 반역자들과 내통하여 나라를 어지럽혔다. 특히 황궁을 오가며 시종을 매수하고 황궁 지도를 그린 일은 용서받지 못할 죄다. 그러므로 그대를 반역 죄인으로 선포하고 사형에 처한다.”

“아아아아…… 그만!”

엘리자벳은 바닥에서 억지로 일으켜진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제 사형을 듣는데도 고함을 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뜨고는 엘리자벳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윽고 여기저기 터진 입술이 열렸다.

“나는…….”

남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원하게 공중을 가른 검이 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털썩 소리와 함께 숨이 빠져나간 몸이 바닥을 굴렀다.

엘리자벳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녀의 입에서는 아, 아, 하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스텔라 아이작.”

좀 더 익숙한 이름이 호명되었다.

“난 억울하다고! 난 죄가 없어. 반역이라니! 난 저 여자 옆에 있었던 것뿐이야. 그것조차 내 뜻이 아니었다고!”

엘리자벳은 멍한 눈으로 앞을 봤다. 서로 정을 쌓진 못했지만, 꽤 오랜 시간 옆에 있었던 시녀였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보는 일은 괴로웠다. 그러나 아는 이의 죽음을 보는 일은 훨씬 더 괴로운 것이었다. 친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미워하던 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사람의 얼굴을 아는데 목소리를 들었는데 제 눈앞에서 죽는다면? 심지어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엘리자벳은 또다시 등장한 아는 이의 얼굴에 미칠 것 같았다.

“페, 페루스. 그만해요. 저들은 잘못이 없잖아요!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나간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이제 와서? 저 아이는 잘못이 없어요. 저 아이는 본인 말대로 내 옆에서 시중을 든 죄밖에 없어요! 그날 나가려 했던 건 나뿐이었어요! 나가더라도 무엇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엘리엇이 죽고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엘자. 여기가 아니라 앞을 봐야지. 살아 있는 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잖아.”

페루스는 저를 보는 얼굴을 다시 앞으로 돌려놨다. 물론 저 시녀는 제가 알기로도 일에 관련이 없었다. 본인 말대로 엘리자벳 옆에서 시중만 들었지.

그러나 죄가 없는 건 아니었다. 페루스는 스텔라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받고 상전의 일상을 누설한 죄, 감히 상전을 헐뜯고 비방한 죄. 따지고 보면 그것도 죄는 죄이지 않은가? 황궁법에도 함부로 상전의 행동을 누설한 시녀는 목을 매달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공작님! 저는 죄가 없어요. 저는 저 여자에게 충성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어요! 망할 년! 나를 살려 줘. 당장 일어나서 나를 살려달라 빌란 말이야! 너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잖아! 내가 왜 너 때문에 죽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엘리자벳은 저를 보며 악을 쓰는 스텔라를 보고 고개를 돌려 페루스를 보려 했다. 그러나 억센 손아귀에 잡힌 고개는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스텔라 옆에 선 남자가 다미어 무어 때와 마찬가지로 무얼 읽어 내렸다. 끝은 같았다. 반역죄. 죽음.

“페루스 제발요……. 제발 그만해요. 제발……. 차라리 날 찔러요. 이럴 거면 차라리 날 죽이라고요! 날 죽여!”

애원과 고함도 소용없었다. 유연히 떨어진 검은 다시 한번 목을 그어 내렸다.

“아아아악!”

엘리자벳은 쓰러지는 몸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뒤에서 똑바로 봐야지, 엘자. 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페루스는 눈을 뜨지 않으면 더 잔인하게 처형을 하겠다 말해 왔다.

“눈을 파 버리고 혀가 잘리는 것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엘리자벳은 물어 오는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피가 굳었는지 처형인이 검을 바꿨다.

“그러므로 그대를 반역 죄인으로 선포하고 사형에 처한다.”

반역자들의 편지를 전달한 죄로 시종 하나의 목이 잘렸다.

“그러므로 그대를 반역 죄인으로 선포하고 사형에 처한다.”

황녀의 일상을 반역자들에게 누설한 죄로 시녀 몇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므로 그대를 반역 죄인으로 선포하고 사형에 처한다.”

늙은 학자는 반역자들에게 명분을 줄 글을 썼다는 이유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끝마쳤다.

“그러므로 그대를 반역 죄인으로 선포하고 사형에 처한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가주는 반역자들에게 수도에 있는 집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눈을 감았다.

사형에 처한다. 사형에 처한다. 사형에 처한다. 사형에 처한다. 사형에 처한다.

사람 목숨이 저리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것이었나. 엘리자벳은 눈을 감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들의 죽음을 봐야 했다. 기절하면 저들의 사지를 찢어 죽일 거야. 도망치면 저들의 가족도 잡아 올 거야. 부드러이 협박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울렸다.

“……저들은 죄가 없어요.”

처형인이 다시 검을 바꿔 들었다. 엘리자벳은 질질 끌려 나가는 시체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왜 죄가 없어. 저들은 다 반역 죄인들이야.”

“반역죄? 반역죄라니! 누가 반역 죄인이에요? 저들이? 저들이 어딜 봐서! 반역죄를 저지른 건 저들이 아니야! 당신이야! 당신이라고 페루스!”

말도 안 되는 누명에 엘리자벳은 참지 못하고 울며 악을 썼다. 제 얼굴을 잡은 손을 힘껏 뿌리쳤다.

반역죄라니. 저들이 군사를 키워 나라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몄나! 자신을 납치해 황제로 세울 궁리를 했나! 저들 중 다수는 그저 제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엘리자벳의 눈이 증오를 담은 채 페루스를 노려봤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반역자에 가까운 이는 페루스였다.

“내가 반역 죄인이라니 무슨……. 우습지도 않는군.”

“뭐가 됐건 내 아버지는! 엘리엇은 황제였어! 그들을 죽인 건 페루스 당신이잖아!”

페루스는 코웃음 쳤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이리 판을 깔아 줬는데도 엘리자벳, 이 멍청한 여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엘자. 아직 모르겠나?”

그렇다면 알려 줘야지. 페루스는 끌려 나오는 늙은 여자를 보며 엘리자벳에게 고갯짓으로 앞을 보라 가리켰다.

“사라! 안 돼! 페루스 멈춰! 멈추라고!”

페루스의 예상대로 엘리자벳이 날뛰기 시작했다. 페루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는 엘리자벳을 세게 잡았다.

‘기껏 생각해서 미뤄 줬더니…….’

그녀를 잡아 온 첫날 일을 벌이지 않은 자신이 멍청했다. 그때 이리했어야 했는데, 내가 왜 이 여자를 보며 고민했지? 여자는 배려를 해 줘도 차 버리는 이였다. 가만히 있으라 말을 했는데도 몸을 팔아 가며 끝까지 자신의 말을 어긴 이였다.

“놔! 놓으라고!”

진실을 알려 줘야지. 멋도 모르고 나만 원망하는 네게 모든 것을 알려 줘야지. 나만 매일같이 원망을 받을 수는 없지 않나. 내 죄도 아닌데 내가 왜…….

페루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죄목을 읽으려는 부하를 멈추고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엘리자벳을 제 품 안으로 완전히 고정했다. 그리고 바닥에서 이쪽을 향해 고함치는 사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엘자. 네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네 오라비 엘리엇. 과연 누가 죽였을까?”

* * *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페루스에게 안긴 채 발을 구르고 사라의 이름만 부를 뿐이었다. 제 말을 무시하는 행태에도 페루스는 아이에게 가르치듯 다시 한번 상냥하게 물었다.

“누구일까? 일국의 황제를 감히 누가 죽였을까? 나라고 생각해?”

멀리서 사라의 눈이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그녀는 아직 페루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늙은이. 네 죗값을 치러야지.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고 저만 충신인 척, 고고하게 굴겠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필요 없으니 사라를 풀어 줘! 풀어 달란 말이야!”

가여운 엘자. 아무것도 모른 채, 원수를 살리려 애쓰는 꼴이라니.

페루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비처럼 연약한 꼴을 보고 있자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오싹오싹한 감각에 그는 잠시 입을 닫았다. 그에게 안긴 엘리자벳은 여전히 몸부림쳤고 부하들은 그만 바라봤다. 사라는 죽일 듯 그를 노려봤으며 타티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그를 보며 입꼬리를 유연하게 올렸다. 페루스는 제임스를 향해 다른 이를 부르라 소리쳤다. 곧 제 말에 꺾일 여자가 예측됐다.

“메리!”

“어머님. 아, 어머님. 전 루이 님을 보러 가요. 그분과 만날 거예요.”

사라가 옆으로 끌려 나온 며느리를 불렀다. 아들이 죽은 후 정신을 놓아 버린 며느리는 여전히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지하에서 끌려 나온 이후 이곳에 없어 내심 안심하던 차였는데, 사라의 얼굴이 굳었다.

“기뻐해 주세요. 어머님. 곧 루이 님을 만나게 해 준대요. 루이 님을 만나면 제 아이도 돌아오겠죠?”

“메리! 정신 차리거라. 반역자들의 손에 놀아나면 안 돼!”

사라의 말에 춤을 추던 몸짓이 멈췄다. 깔깔 소리 높이던 웃음이 끊기고 한순간 메리의 표정이 사라졌다.

“……반역자? 반역자?”

반역자. 반역자. 반역자. 메리는 반역자란 단어를 반복해서 읊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말끝을 흐리더니 사라를 향해 뛰어갔다.

“어머님!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전 루이 님과 헤어져도 좋아요. 아무 자격 없이 루이 님 옆에 있을게요. 예전처럼 하녀라도 좋아요. 그러니 어머님, 아니 마님 제발 루이 님을 놓아주세요. 루이 님은 이런 일을 힘들어하세요. 루이 님은…….”

“메리! 입을 닫아!”

사라는 호통을 쳤다. 이래서 출신이 미천한 것들이란! 사라는 입을 열어야 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 못 하는 메리를 쏘아봤다.

사라의 막내며느리 메리는 본디 천한 하녀였다. 사라는 메리가 막내 루이를 꼬드겼다 생각하고 몇 번이고 메리를 내쳤다. 그러나 루이는 그럴 때마다 메리를 다시 제 품으로 보듬었으며 사라를 막아섰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그 사람은 아무 죄가 없어요. 제가 좋아한다 했고! 제가 혼인하자 했습니다.’

사라는 오랜 기간 둘을 인정하지 않았다. 메리는 오스틴가의 핏줄을 낳았지만, 첩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엘리온 황제와 죽고, 사라는 마음을 바꿨다. 사라는 루이에게 죽은 형제들이 하던 일을 맡기고 대신에 그의 원대로 메리를 인정했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분을 놓아주세요.”

사라는 정신이 나간 메리를 보다 말고 앞을 봤다. 황녀가 반역자 놈에게 잡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페루스의 파란 눈이 사라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간악한 반역자 놈!’

사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흉흉한 눈빛에도 페루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엘리자벳에게 속살거렸다.

“내가 황위를 차지하고 싶었으면 진작 너와 네 오라비를 죽였겠지. 그 번거로운 계약서를 써 가며 네 숨통을 살려 둘 이유가 어디 있겠어. 엘자.”

“닥쳐! 이 상황에 그리 말하면 마음이 편해? 반역자는 당신이야! 저들이나 사라가 아닌 당신이라고! 당신은 날 미워하니깐! 엘리엇과 내 가문을 증오하니깐! 그러니깐 이러는 거야! 이제 와 감히 엘리엇을 끌어들여?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 해도 내가 믿을 거 같아?”

“아니지. 엘자.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엘리엇. 네 오라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엘리엇은!”

“그래. 황제 폐하께서는 목이 찔렸지. 내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침실에서 말이야.”

“거짓말! 지키긴 뭘 지켜! 엘리엇을 죽인 건 당신이잖아! 페루스 당신이!”

“엘자. 똑똑히 들어. 내가 그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네 오라비는 그렇게 편히 죽지 못해. 어떻게든 일으켜 세운 후에 네 가문의 죄를 고하게 만들었겠지. 그런 다음 내 아버지처럼 몸을 터뜨려 죽였거나 아니면 만인의 앞에서 목을 날려 버렸을 거야. 그리고 넌!”

조곤조곤 말하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높이 올라갔다. 페루스는 말을 멈추고 엘리자벳을 봤다. 흥분한 탓인지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넌 어떻게 됐을까.’

악물린 입안으로 비릿한 맛이 났다. 페루스는 그대로 말을 끝냈다. 그가 꺼낸 말이었건만 이후의 말은 그도 알 수 없었다.

“여자에게 죄를 고하게 해.”

대신 페루스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너를 미워해, 네 가문을 미워해 황제를 죽였다고? 이대로 두면 엘리자벳은 계속해서 저를 범인으로 생각할 터였다.

이대로 두면 너는 마음 편히 나를 원망하겠지. 아비를 죽이고 오라비를 죽이고 저를 범한 놈이라 나만을 미워하겠지.

페루스는 그리 둘 생각이 없었다. 엘리자벳이 자신만을 향해 증오를 불태우며 원망하는 꼴은 더는 사양이었다.

그러면 네 삶이 너무 편하지 않나. 계속 나만을 증오하고 네 사람을 감싸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나.

넌 알아야 해. 네 주변 사람들도, 네가 네 편이라 믿었던 이들도 나와 똑같다는 걸! 네 주변에 같은 편 따위 없다는 걸! 넌 알아야 해.

“메리 오스틴은 앞으로 나오시오.”

제임스가 호명한 후 빠르게 눈치를 줬다. 병사 둘이 달려 나와 사라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메리를 끌어냈다. 그러고는 사라보다 앞, 엘리자벳에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메리를 데려다 놓았다.

엘리자벳은 갑자기 끌려 나온 여자를 보고 발길질을 멈췄다. 사라와 아는 사이인 것이 분명한 여자였다.

“정말 모두 말하면…… 아는 대로 말하면 루이 님을 만나게 해 주는 거지요?”

페루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거푸 인사를 했다. 페루스는 손짓으로 인사를 물렸다. 이어 제임스가 질문을 시작했다.

“메리 오스틴 그대는 반역자 무리에 가담한 것을 인정합니까?”

“예! 인정해요. 비록 제 뜻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루이 님도…… 제 남편도 본인이 원해서 한 게 아니에요. 그분은 그저 어머님 뜻으로 저를 위해! 저와 제 아이를 인정받게 하려고…….”

“인정하면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언제부터 가담했습니까?”

제임스는 메리의 말을 냉정히 잘랐다. 어차피 대다수의 질문은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가담? 아…… 그건 아마 작은 주인님하고 둘째 도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맞아요! 그때쯤이었어요. 어머님, 아니 마님이 저랑 막내 도련님을…….”

메리는 움찔 몸을 떨더니 제임스의 질문에 다시 답했다. 다시 길어지는 사설에 제임스는 미간을 모았다.

“메리! 입을 닫아! 닥치란 말이다!”

사라가 메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한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죄송해요. 마님. 죄송해요 어머님.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전…….”

메리는 사라의 고함에 땅에 머리를 찧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본인과 남편 루이 오스틴이 이번 일에…….”

제임스가 질문을 계속했다. 인정합니까? 언제 알았습니까? 확실히 보고 들은 사실이 있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메리는 충실히 답했다. 메리가 답을 할수록 사라의 얼굴은 질려 갔다.

“안 돼! 입을 닫아 메리! 반역자들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메리가 입을 열 때마다 사라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메리는 계속해서 충실히 제임스의 질문에 답했다.

“언제부터 황녀님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습니까?”

“뮐렌 후작님이 성에 오셨을 때요. 그때였어요. 정확히 기억해요. 봄이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날…… 이제 막 꽃봉오리가 나온 그날은 제가 형님께 뺨을 맞았는데 루이 님이 약을 발라 주셨어요. 곧 끝나 가니 일을 끝내고 멀리 떠나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반역자 놈들! 메리, 넘어가서는 안 된다!”

“황녀님을 납치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저는 그것까지는 몰라요. 그저 귀한 분을 모셔 올 거다, 그렇게만 들었어요. 어차피 상관없었어요! 루이 님과 나는 곧 떠날 예정이었으니깐! 어머님이 그토록 바라던! 귀한 분이 저와 무슨 상관인가요. 저는 천한 하녀인걸요. 마님이 누굴 불러오건 허리를 숙일 따름이지요. 하지만 루이 님은, 루이 님은…….”

메리의 말은 점차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 되어 갔다. 어떤 질문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웃고 울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꼭 한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루이 오스틴. 남편을 잃고 미쳐 버린 여자는 말끝마다 제 남편을 담아냈다. 제임스는 더 이상 질문을 하기 싫었다. 가련하게 미쳐 버린 여자가 불쌍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건 본인이 저번 심문 때 밝혔던 내용입니다. 메리 오스틴. 다시 묻습니다. 황제 폐하를 시해한 범인을 알고 있습니까?”

시시각각 감정을 바꾸던 여자가 조용해졌다. 제임스는 천천히 들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다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죽은 것처럼 풀린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꼭 제정신인 것처럼.

“……예. 알아요. 잘 알고 있어요.”

“메리……. 오, 불쌍한 아가. 안 된다. 그만하렴. 반역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돼. 그건 조상께, 아니 루이에게 죄를 짓는 거야. 루이가 누구 손에 죽어 갔는지 생각하렴.”

메리는 뒤를 돌아봤다. 사라는 머리색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알아요, 어머님……. 제가 그걸 모를까 봐서요?

작게 속삭이는 입 모양에 사라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그래. 아가. 루이를 죽인 건 저들이다. 그런데 네가 저들에게 넘어가면! 루이가 널 어떻게 보겠니?”

살살 달래는 목소리에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에 사라는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그래. 메리. 내 아들을 따라가렴. 아무 말 없이 떠나렴. 그것도 네 복이지.’

“알고 있다 하니 누군지 이 자리에서 밝히십시오. 황제 폐하를 시해한 범인이 누구입니까?”

두 여자의 행태를 보다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질문을 들은 메리의 입꼬리가 히죽 위로 올라갔다.

메리는 사라를 향해 크게 미소를 지어 주곤 고개를 바로 했다. 메리의 눈앞에는 유령같이 하얀 여자가 있었다. 어머님이 찾던 이가 당신이구나. 메리는 엘리자벳을 슬쩍 보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를 죽인 이는 어머님이요. 죽이라 명한 이는 어머님이세요.”

앞선 대답과는 다른 침착한 목소리였다. 메리는 제 남편을 찾지도 구구절절 이상한 말을 쏟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또렷한 눈을 하고 앞을 보며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담담히 말했다.

“요망한 것! 네가 감히!”

뒤에서 사라가 비명을 지르며 메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라는 메리에게 닿기도 전 저지당하고 바닥을 굴렀다. 제 옆에서 흙을 묻힌 채 구르는 사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메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는 무치라 하시며 그러셨어요. 작고하신 황제 폐하는 더는 황제 노릇을 할 수 없다며 황녀님을 새로운 황제로 세워야 한다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셋째 도련님과 루이 님께 황제 폐하를 시해할 사람을 구해 보라 명령하셨어요.”

“어, 어디서 거짓을! 누구 앞이라고 그런 간악한 거짓을 고해!”

사라는 바닥에 눌린 채 메리를 향해 호통을 쳤다. 자신을 향한 비난에 메리는 사라를 봤다. 사라는 메리의 눈을 보고 이를 갈았다.

저 요망한 것! 미친 척 연기를 한 것이구나! 메리는 구겨진 사라의 표정을 보며 깔깔 큰 소리로 웃었다.

‘루이 님. 저 성공했어요. 보세요. 당신을 죽인 이를! 우리를 괴롭히고 벼랑에 몰아넣은 이의 표정을 보세요!’

“어머님! 저에게 루이 님을 죽인 이를 생각하라 하셨죠? 저…… 멍청하지만 계속 생각했어요. 어머님을 생각하며 계속 고민했어요.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루이 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

“고얀 것!”

“칭찬해 주세요. 저 성공했어요! 루이 님의 복수를 제가 했어요. 하찮은 제가! 성공했다구요!”

메리는 다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사라는 바닥을 긁으며 일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위에서 누르는 병사들의 힘은 노인이 당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모래 바닥을 짚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퍼뜩 가장 중요한 이가 떠오른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아…….”

그곳에는 엘리자벳이 있었다. 엘리자벳은 눈을 뜬 채 이상한 소리를 뱉고 있었다. 꼭 말을 못 하는 이처럼.

사라는 저에게 향해 있는 눈을 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먼저였다.

“거짓말이지?”

* * *

툴란에는 모두가 아는 집단이 있었다. 소수지만 유명한 집단의 사람들은 광신도라는 오명을 썼으며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다수의 사람에게 배척당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배척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엘라르 오로르 생전 생긴 이 집단은 처음에는 황제의 측근들로 이루어진,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모임이었다.

엘라르 오로르가 동부 출신이었으므로 모임의 다수는 동부의 귀족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외에는 몇몇 학자들과 권력에 빌붙는 떨거지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꽤 큰 권력을 가졌다. 경쟁자인 다른 지역 귀족들이 구심점을 잃은 채 흩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옆에서 적당히 눈치를 보며 제 잇속을 챙겼다.

그러나 사라를 비롯한 소수를 제외하고 그들은 황제를 진심으로 섬기지는 않았다. 제 몸을 언제 터뜨릴지 모르는 황제는 공포였을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임은 강성했을지언정 광신적인 성격을 띠진 않았다.

엘라르가 죽고 엘리온이 즉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온 황제는 그들에게 충성을 받기는커녕 그의 모친처럼 공포를 주지도 못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이것저것을 바치며 더욱 권세를 불려 나갔다.

그러나 그 기간은 정말 잠깐이었다. 엘리온은 복수를 꿈꾸던 세력에 의해 즉위 4년 만에 독살당했다. 아름다운 황녀의 생일날, 모임의 다수는 황제와 함께 죽었다. 허무한 끝이었다.

권력이란 무서운 것, 어느 유명한 학자는 말했다. 권력은 도박보다 중독이 강해 한번 맛보면 벗어날 수 없는 덫이라고. 게다가 모임의 다수는 그날 밤 가족과 친우를 잃었다. 허무함과 원한. 이 두 가지 감정은 이후 모임을 광신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참하게 떨어진 사람들은 곧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사라는 모임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오로르 일가와 가까웠으며 핏줄과 친우를 그들이 소위 반역자라 부르는 이들에게 잃었다. 게다가 사라는 포기하지 않고 실천해 나가는 불굴의 추진력을 갖추고 있었다. 모임은 사라를 리더로 밀었고 사라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건 할 수 없습니다.’

모임에 아주 조금이지만 힘이 생겼을 때, 사라는 처음으로 구성원들과 부딪쳤다. 황제 엘리엇에 관한 문제였다. 사라는 구성원들의 의견 중 황녀를 빼내는 데는 찬성했지만, 황제를 죽이는 데는 찬성하지 못했다.

‘황녀만 데려오면 저쪽에 더 큰 명분이 갑니다!’

‘그럼 황제도 같이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황녀를 몰래 데려오기도 쉽지 않은데 무슨! 게다가 황제는 시체 꼴인데 데려와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우리 손으로 죽이고 더 큰 명분을 쥐는 것이 어떠합니까? 황제를 죽인 반역자들 손에서 황녀님을 구해 냈다! 얼마나 좋은 선전입니까? 백성들도 우리를 도울 겁니다. 누워 계시는 황제 폐하께서도 그걸 원하실 거고요.’

집단은 개인보다 미치기 쉬울 때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세 사람 이상이 찬성하면…….

사라를 비롯해 소위 배웠다는 모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사라는 눈물을 머금고 엘리엇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어릴 적부터 키워 온 엘리엇이 눈에 어른거렸지만 사라에게는 오로르 그 자체가, 크리스의 가르침이 더 소중했다. 지금 당장 뜻을 세울 동지와 모임이 더 소중했다. 사라는 엘리엇이 죽은 날 괴로움에 허덕이면서도 환희에 찼다. 저 자신이 고통을 감수하고 큰 뜻을 이루는 인물이 된 것 같아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큰 희생을 치렀으니 앞으로의 계획은 탄탄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계획은 실패했고 모임은 붕괴됐다. 남은 자식들은 모두 사라보다 먼저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사라가 구해 내고자 했던 엘리자벳은 숨기려 했던 잔혹한 진실을 목도해 버렸다.

* * *

“거짓말이지?”

사라는 엘리자벳을 보는 순간 입을 닫고 말았다. 거짓을 말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분명 옳은 길이라 생각했는데 저를 보는 녹색 눈에 가슴이 아파 왔다.

‘전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늙은이도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리 말해야 할까? 하지만 말을 꺼내려 할수록 엘리자벳의 표정이 눈에 들어와 사라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엘리자벳은 입가에 버석한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곧 울 것같이 눈물을 담고 있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줘. 이 개새끼들이 꾸민 일이라고 말해!”

“우와. 나 황녀님이 욕하는 거 처음 들어 봐.”

아무 말 없는 사라를 보며 엘리자벳은 악을 썼다.

사라가 그런 게 아니야. 이들이! 아버지를 죽인 이들이! 오라비도 죽인 거야. 사라가 왜 그랬겠어! 사라는 나뿐만 아니라 엘리엇을 키운 사람이기도 한걸. 엘리엇과 사라는 잘 지냈는걸. 우리 셋은 어릴 적 항상 함께였어.

“……전하. 용서하세요. 이 늙은이를…… 용서하세요.”

한참 만에 사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엘리자벳에게 차마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거짓을 말하면 숭고한 뜻도 거짓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다 자라셨으니 이런 사실을 아실 때가 되었지. 언제까지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실 수는 없지.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계속해서 순수하신 것도 좋지만 나라가 이러하니 하나 남은 오로르도 강해져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굳건히 하세요! 이 늙은이라고 그러고 싶었겠습니까. 저는…… 저도…….”

사라는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제 최선이라 여겼다. 차라리 이참에 황녀에게 사실을 알리고 뜻을 이루라 말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라 여겼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크흐흑. 전하. 제발 큰 뜻을 보세요.”

제 아픈 마음을 지우기 위해 사라는 엘리자벳이 제 생각보다 강한 이일 거라고 믿어 버렸다. 이 정도는 견뎌 내실 수 있는 인물이라 착각해 버렸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사라의 생각만큼 강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세상천지 믿었던 인물에게 칼에 찔린다면 충격을 받지 않을 이는 드물었다.

“엘자. 네가 선택해.”

조용히 있던 페루스가 주저앉은 엘리자벳 뒤로 다가왔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사라는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있었고 얼굴을 붉히며 제 뜻을 피력하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입을 벌린 채 눈앞을 멍하니 응시했다.

‘여기만 지옥이라 생각했는데…….’

엘리자벳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운 밤 제 주위 사방으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상 전부가 똑같았어.”

엘리자벳은 사방에 깔린 악마를 바라보며 얼굴을 감쌌다. 어딜 가도 탈출구 따위, 행복 따위 없었던 것이다.

엘리자벳은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에 웃음을 터뜨렸다. 경쾌한 소리가 높이 올라가 퍼졌다. 사람들이 놀란 눈을 하고 그녀를 쳐다봤다.

손가락 틈 사이, 금이 생겨났다. 쩌적 갈라지는 틈을 보며 엘리자벳은 손을 치웠다. 세상 전체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규칙 없이 갈라진 틈은 다시는 메꾸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갈라지기 시작한 세상에서 엘리자벳은 제 손을 봤다. 제 손도 여기저기 조각난 채 떨어지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부서져 내리는 몸뚱이가 우스워 엘리자벳은 더 크게 웃었다. 곧 다 무너져 내리겠지. 산산이 조각나겠지.

“네가 선택해. 저 여자를 죽일 건가, 말 건가.”

시시한 질문이 귀에 박혔다. 엘리자벳은 뒤를 돌아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봤다. 페루스. 그에게 물을 말이 있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요?”

엘리자벳은 딱 한마디, 그 질문만을 남기고 고개를 바로 했다. 답은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리자벳의 눈이 점차 깊숙이 잠겼다. 끝없이 떨어져 내리며 엘리자벳은 위를 봤다. 장례식 날 입었던 드레스만큼이나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엘리자벳은 스스로 세상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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