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장] 외전 ― 그대를 위하여(엘라르 편) 下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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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외전 ― 그대를 위하여(엘라르 편) 下

“알 게 뭐예요! 나라 따위 알 게 뭐냔 말이에요! 난 그따위 것 신경 쓰기 싫어요! 당신은!”

나는 결국 올라오는 화기를 참지 못하고 술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병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그의 말이 끔찍이도 싫었다. 비현실적이어서? 무게감 있는 말이라? 아니, 사실 평소의 나는 그가 뭘 주장하든 참아 낼 자신이 있었다. 처음 본 그 광기 어린 눈은 잊기 힘들었지만 순간의 감정이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미쳐 있는 구석이 있으니. 실제로 5년간 힘들긴 했으나 어찌어찌 잘 넘기기도 했고. 좀 급진적인 몽상가 남편을 뒀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깐.

“지금 그따위 것을 내 앞에서 말할 기분이 나요? 나는!”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참아 내기가 힘들었다. 아니 참기 싫었다. 왜냐면 우리는…….

“아이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그 핏덩이를 잃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얼마 전 세 번째 아이를 잃었으니깐.

“이제 일주일이에요! 로랑이 죽은 지! 다섯 달밖에 안 된 그 아이가…….”

“…….”

“내 배 속에서 죽은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고요! 그런데 내 앞에서! 이제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 아내에게! 그따위 말을 하고 싶어요? 당신은 그 아이, 우리 불쌍한 로랑 생각도 안 나요?”

그는 내 절규에 말이 없었다. 나는 이참에 온 울분을 그에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안 그러면 미쳐 버릴 테니.

“당신도 봤잖아요! 그 아이 팔도 다리도 있었어요! 눈도 코도! 자그마했지만 다 있었다고요!”

“…….”

“아니면 이제 세 번째 유산이니깐! 아무 느낌도 없어요? 무덤덤해요? 또 죽었구나, 그뿐이에요?”

“아닙니다.”

가만히 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차분한 그 목소리에 더 분통이 났다. 자기 아이가 죽었는데! 어찌 저리 차분할 수 있지?

“아니긴 무슨! 당신은 항상 그랬어! 로사 때도! 아일린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내가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자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등을 보였다. 왜 가는 거야! 나를 위로해 주고 가야지! 달래 주고 가야지! 나는 멀어지는 그를 보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 때문에 온 얼굴이 축축했다. 나는 손을 들어 배를 만져 봤다. 옴폭 들어간 배는 허전했다. 얼마 전까지 분명 이곳에 내 것 말고 다른 심장이 있었는데……. 나와 그를 닮았을 사내아이였는데……. 분명 예뻤을 텐데.

수군거리던 시녀들의 말이 생각났다.

‘핏줄을 그리 죽였으니…….’

‘아이 엄마가 마녀였다지? 죽기 전 저주를 내렸다던데.’

몹쓸 것들! 고작 그따위 천것과 그 핏줄을 내 아이에게 가져다 대? 나는 내 아이를 대두고 저주를 운운하는 그녀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혀를 자르고 눈을 지져 버린 후 목에 돌을 달아 호수로 던져 버렸다. 꿈틀대며 입에서 피를 쏟고 살려 달라 손짓하는 그녀들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라 간청했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저주? 하, 웃기지 마.”

나는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부드러운 카펫 덕에 손에는 아무 피해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손이 아팠으면 했다. 그러면 이 고통이 조금이라도 잊힐 것 같았으니. 그러나 카펫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내 가슴은 언제나처럼 아프고…….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줘 봤건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배를 내려다봤지만, 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죽겠어요. 그렇게는 살 수는 없어요.’

덜덜 떨다 말고 나를 쳐다보던 붉은 눈이 생각났다. 제 어미와 같은 눈을 가진 반쪽짜리 오로르. 어린 나이에 내 손에 죽은 동생. 그 아이는 마지막에 뭐라 했더라.

‘언젠가는 돌려받을 거예요, 누님. 전 그리 배웠거든요.’

독한 것. 가문의 피를 더 많이 이어받았다 생각했건만 제 어미를 닮은 구석이 더 많았는지 아이는 마지막에 그리 말했다. 나는 분명 자비를 베풀어 줬건만 차 버린 건 저면서 나를 저주했지.

‘네가 사람이냐?’

아버지가 생각났다. 딸인 나를 괴물이라 부르며 보던 그 눈. 자신도 제 형제를 그리 도살하셨으면서 뭐가 그리 억울해 나를 괴물 취급 하셨는지.

“아니. 저주 따위 없어.”

갑자기 왜 그 사람들이 생각나는지. 나는 아파 오는 머리를 감싸고 꾹 눌렀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의사의 말처럼 아이를 잃은 지 얼마 안 돼 마음이 병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얼굴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쉬어야 했다.

“크리스. 침대로 옮겨…….”

오래된 습관이 눈치 없게 튀어나왔다. 쓸데없이! 나는 주먹을 쥐고는 꼿꼿이 허리를 폈다. 언제부터 내가! 엘라르 오로르가 다른 사람을 이리 찾았다고. 나는 천천히 침대를 향해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밖에 있을 시녀를 불렀다.

“물 좀 들여와.”

누군가 오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누웠다. 두껍고 부드러운 천이 몸 위로 올라오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대로 한숨 쉬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지겠지. 나는 눈 밑까지 천을 올렸다.

그러기를 잠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 누군가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익히 아는 발걸음이었다.

“……왜 왔어요?”

“내가 미안합니다.”

따뜻한 손이 내 이마 위로 올라왔다.

“됐어요. 내가 술에 취해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괜히 눈물이 나 그의 손을 피하며 모로 누웠다. 하지만 손은 내 이마를 끝까지 따라왔다.

“물 가지고 왔습니다.”

“안 마셔요. 그냥 잘 거야.”

“이대로 자면 머리 아플 겁니다. 몸도 안 좋은데 일어나 마시고 잠자리에 드세요.”

“…….”

나는 다정한 그의 말에 고집을 피우며 몸을 말았다. 나쁜 사람! 미운 사람! 이리 다시 올 거면 아까 왜 가 버렸담. 서러움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가 물잔을 어디 내려 두는 소리가 들렸다. 또 가려고? 정말…… 눈치 없어.

‘지금이라도 잡을까?’

나는 고민을 하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미웠지만 나는 그가 필요했다. 따뜻하고 넓은 품에 안겨 그저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몸을 일으키기 전 누군가 침대로 들어왔다. 곧 너무나 익숙한 체취가 뒤에서 났다.

“울지 마십시오. 엘.”

“……안 울어요.”

“항상 말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울면 내가 아프다고.”

“나는 크리스 때문에 아파요.”

“다 내 잘못입니다.”

그가 나를 좀 더 세게 안아 왔다. 뜨거운 품이 나를 한껏 감싸 안고는 내 손을 그러쥐었다. 그 덕에 나는 눈물을 닦지 못하고 그저 흐르게 둘 수밖에 없었다.

“미워요. 정말 미워.”

나는 계속 그를 밉다 욕했다. 그는 꼼지락거리는 내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그저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딱 붙은 몸에서 나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나는 그게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가 생각나 서러웠다.

“아이는…… 우리 아이들이 혹 나 때문에.”

나는 속 깊이 감췄던 진심을 꺼냈다. 아무에게도 그에게도 보이지 않은, 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찌르던 말이었다.

“쉿. 괜찮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시기가 안 맞았을 뿐입니다.”

“정말? 하지만 사람들이…….”

“사람들 말은 잊으세요. 그저 못된 소리로 남 깎아내리기만 할 줄 아는 인간들입니다. 다른 이의 불행을 즐기며 제가 행복한 줄 착각하는 이들이지요.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 던져 버리고 저를 따라 해 보세요.”

그가 나를 껴안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내쉬었다. 나도 그를 따라 숨을 허파 안에 가득 채웠다 뱉었다. 그러길 몇 번, 나는 내 심장이 아까보다 천천히 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손을 풀더니 한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나머지 손을 내 배 위로 올리더니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귀 가까이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눈 위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예전에도 해 준 아린 눈가가 시원해지는 손길이었다. 적당히 따뜻한 손에 감긴 눈이 더욱 감겨 왔다.

“……나 잘 때까지, 아니 자고 일어날 때까지 있어 줘요.”

내 말에 그가 아무 말 없이 웃음을 흘렸다. 작게 흩어지는 웃음에 나는 몸을 더욱 말았다. 이대로 더욱 작아져 그의 품 안에 완전히 들어가고 싶었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항상 듣던 단어가 들려왔다.

“나의 엘…….”

“한 번 더…….”

나는 입을 움직여 계속 불러 달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잠이 와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잠들더라도 계속해서 나를 부를 터였다. 그걸 너무나 잘 알기에 미소 지으며 편안히 의식을 놨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의 엘.”

그는 나를 불렀다.

* * *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다. 내 나이 불혹에 가까워져 세상에 난 귀한 오로르의 장자. 제 앞에 여섯 명의 형제를 보내고 태어난 아이는 작고 예쁜 사내아이였다.

“엘. 아이가 당신을 닮았습니다.”

크리스가 아이를 안고는 나를 봤다. 통통한 볼을 가진 아이는 아비의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아이를 봤다. 나를 꼭 닮은 은빛 머리칼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눈을 뜨면 나를 닮은 초록빛 눈을 빛내겠지.

“그러네요.”

나는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이입니다.”

그가 혼잣말하듯 아이를 어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이는 누구라도 귀애할 것이 분명했다. 나와 그를 닮았을 테니 아름다운 외모에 가문이 준 귀한 신분까지, 날 때부터 완벽한 아이였으니.

“쉬고 싶어요. 데려가요.”

하지만 나는 아이가 귀찮았다. 정확히는 아이에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죽은 채 태어난 아이들을 보다 살아 있는 아이를 보니 생소해서 그럴까? 분명 바라던 아이였는데, 배에 있을 때만 해도 고대하던 아이였는데 막상 살아서 꿈틀대는 아이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고작 이런 감정을 느끼려 15년을 기다렸다니. 아까운 세월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보던 그가 아이를 유모에게 넘겼다. 나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그를 보지 않았다. 분명 나를 매정하다 생각하고 있을 테지.

“엘. 어디 불편합니까?”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모로 돌린 내 얼굴을 매만졌다. 그의 손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게는 말해야 했다. 이 이상한 감정을.

“……아이가.”

“엘리온이?”

입을 떼기가 너무 힘들었다. 분명 할 말은 가득 찼는데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품고 있기에는 가슴이 너무 답답했기에. 나는 일단 혀를 굴려 까슬한 입안을 적셨다.

“싫어요.”

말해 버렸다. 올라오는 수치심에 나는 고개를 더욱 반대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충격을 먹었는지 그가 손길을 멈추고 팔을 내렸다. 순식간에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괜히 말했나? 나는 그가 받을 충격이 걱정되었다. 지난 세월, 아이 때문에 나만큼이나 괴로웠을 그일 텐데 나 때문에……. 죄책감이 온몸을 감쌌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너무 놀라 수치심도 잊고 그를 봤다. 항상 똑같은 금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놀란 눈을 하고 마주 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한 겁니다. 우리에게 아이는 익숙지 않으니까요. 의사도 그러더군요. 출산 직후 그런 산모들이 있다고……. 너무 힘들게 낳은 아이일 경우 미움이 커 잠시 아이 보기를 싫어한다고.”

“익숙지 않아서?”

“예.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엘리온 그 아이가 그대를 좀 많이 괴롭혔습니까. 올 때부터 괴롭게 오더니 낳을 때도 그대를 고생시켰죠. 그때 엘 그대가 지르던 비명을 생각하면 나도 엘리온이 밉습니다. 내 아이지만 그대를 아프게 했으니까요.”

그가 이번에는 내 두 뺨을 모두 쥐었다. 세월로 인해 약간 거칠어진 손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다정했다.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엘리온은 고생스러운 아이였다. 잦은 유산과 늦은 나이로 나에게 오기까지 힘들었던 아이고 배 속에서도 앞의 아이들보다 고생스러웠다. 의사조차 고개를 저을 만큼 약하기도 했다. 엘리온을 가진 동안 난 몇 번이나 피를 흘렸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곧 누구보다 엘리온을 사랑하게 될 터이니.”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맞는 말이었다. 어떻게 낳은 아이인데……. 이리 이상한 감정이 드는 것은 일시적일 게 분명했다. 15년을 기다린 아이인데. 이제 아이를 기대하기도 힘든데. 이따위 감정 조금만 지나지면 사라지겠지.

그가 내 몸을 안아 왔다. 익숙한 품이기에 나는 힘을 풀고 눈을 감았다. 그가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그의 손길이었다.

“맞아요. 난 누구보다 엘리온을 사랑할 거예요.”

깜깜해진 눈가 위의 따스함을 느끼며 나는 되뇌었다. 그래. 엘리온은 내 아이였다. 그와 내가 낳은 우리의 아이였다.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엘리온…….”

나는 내가 사랑하게 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가 약간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 * *

“이리 멍청해서야!”

나는 멍청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들을 향해 종이를 집어 던졌다.

“……죄송합니다.”

“그 말 지겹지도 않니? 도대체 몇 번째야!”

죄송하단 소리에 나는 다시 터져 나오는 분기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이따위 것 하나 제대로 못 해내다니. 이러니 내가 저를 좋아할 수가 있나.

“엘리엇이 너보다 낫겠구나.”

“…….”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보렴.”

제 어린 아들과 비교를 하는데도 저리 입만 다물고 있으니. 나는 방문 너머 사라지는 아들을 보다 머리를 잡았다. 엘리온 저 아이가 일을 어떻게 망쳤는지 우리 쪽으로 붙었던 수도 세력 중 삼분의 일이 황가로 붙었다. 그것도 한 달 만에!

“내 핏줄이 맞나?”

자조 섞인 혼잣말을 하며 나는 아들을 떠올렸다.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내 얼굴인데…… 머리는 누구를 닮은 거지? 일단 나는 저리 멍청하지 않고 그도 우둔한 편은 아닌데. 아니 나와 남편은 오히려 저 나이일 때 손에 꼽을 만큼 똑똑했다.

“엘리온은 그대 아들이 맞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척 좀 하고 다녀요.”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너무 많이 봐 잊으려야 잊지 못하는 평생을 함께한 얼굴. 내 반쪽.

“그리 얼굴을 찌푸리면 주름만 집니다.”

“이제 주름이 없으면 이상한 나이예요. 당신도 한가득이면서…….”

나는 그에게 앉으라 손짓하며 허리를 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던 그가 내 앞에 와 앉았다. 마주 본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찬란하던 백금발은 더 환해졌고 언제까지고 아름다울 것 같았던 얼굴은 곳곳에 주름이 자리했다. 아마 나도 똑같은 모습이겠지.

“아닙니다. 당신은 아직 그대로인걸요. 나의 엘.”

“벌써 노망이 난 거예요? 정신 차려요.”

60을 넘은 지 한참인데 그대로는 무슨. 나는 그를 향해 핀잔을 줬다. 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기에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내렸다.

“엘리온이 또 사고를 쳤습니까?”

“……그 아이가 언제 제대로 뭔가를 해낸 적이 있던가요.”

아들 이야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엘리온. 나와 그 사이의 유일한 자식. 내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어 갈 아이. 그리고 황제가 될 아이.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온은 안 되겠어요.”

“그렇습니까?”

나는 진지하게 말을 꺼냈건만 눈앞의 남편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나는 답답해졌다. 나 홀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 * *

내 아들 엘리온. 나는 결국 그 아이를 사랑하지 못했다. 물론 처음에는 의사와 그의 말대로 몸의 문제라 생각했다. 힘들어서 심신이 지쳐 아이를 멀리하는 거겠지. 스스로 그리 다독였다. 그러나 몸이 나아지고 시간이 지남에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깨달았다.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하지 못해.

‘그럴 리 없어!’

그 사실을 깨달은 날, 나는 부정했다.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다. 나 같은 신분은 상상도 할 수 없음에도 아이에게 내 젖을 물리고 자장가를 불러 주며 너를 사랑한다 필사적으로 아이에게 속삭였다. 사람들은 내가 아이를 너무 사랑한다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 말과 다르게 나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이를 사랑하는 척할 뿐이었다.

‘내가 어미가 될 자격이 있나?’

나는 부채감에 시달렸다. 아이에게 미안했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 아이가 미웠다.

어느 날 밤 나는 아이의 얼굴에 베개를 가져다 댔다. 아이는 숨이 막히는지 몸을 움직였다. 강보에 싸여 있음에도 살기 위해 작은 팔다리를 버둥댔다. 아이의 발길질이 내 손을 쳤다. 그리고 순간 나는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죽지 않았고 나는 부채감에 죄책감까지 떠안게 되었다.

‘대신 다른 걸…….’

나는 이 끔찍한 감정을 어떻게든 덜어 내야 했다. 그리고 감정을 덜어 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이에게 무언가 안겨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내 하나뿐인 후계자로 이미 커다란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줄지 고민했다.

‘만인지상. 단 하나뿐인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

나조차 가지지 못할 자리. 나는 순간 크리스가 항상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마침 아이는 운 좋게도 다음 순번으로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툴란의 황제는 잠시 맡는 것에 불과하기에 완전한 자리가 아니었다.

‘크리스. 당신의 말을 따르겠어요. 대신 내가 아닌 엘리온을 위해서요.’

그는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곧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정계에 나섰다. 완전한 일인의 군주를 꿈꾸는 이들을 불러들이고 후원했으며 세력도 모았다. 황제와 황가는 내 행동을 지켜봤다. 아니 암암리에 나를 돕기도 했다. 자신들에게도 좋은 패가 될 수 있으니 손해 볼 게 없다는 속셈이겠지.

나는 엘리온의 교육에도 박차를 가했다. 아이는 3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했으며 다섯 전에 검술을 배웠다. 잠은 하루에 다섯 시간으로 정해졌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툴란 최초 하나의 황가를 세울 인물은 누구보다 뛰어나야 했으므로.

‘못 해요!’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계획에 가장 중요한 엘리온, 아이는 너무 나약했다. 아이는 매일 나를 붙잡고 울었다. 이것도 못 한다 저것도 못 한다. 말을 하게 된 순간부터 아이의 입에서는 항상 못 한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참았다. 어리니 힘들 수 있겠지. 나는 울지 말고 한 번만 더 해 보자 아이를 달랬다. 그러나 아이는 달랠 때만 잠깐 나아질 뿐 계속 멍청하게 굴었다.

짝―

아이가 10살이 되던 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손을 올렸다. 처음 맞아 본 아이는 바닥에 쓰러진 채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애처로웠지만 동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이는 너무 멍청했다! 내 자식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멍청했다. 매일같이 울고 떼쓰고 도저히 나아지지가 않았다. 나는 저 나이에 저리 우둔하지 않았는데!

‘엘리온. 네가 누구의 핏줄이라 생각하는 거냐!’

아이에게 손을 올리는 것은 교양 없는 천것이나 하는 행동이라 생각했건만. 손찌검은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나는 아이 옆에 매를 드는 교사를 뒀다. 아이는 종아리에 항상 멍을 달고 살았다. 생기는 멍만큼 아이는 점차 나아졌다. 어리광을 부리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러길 10년, 나는 꽤 만족하며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문제가 생겼다. 머리가 좀 크자 아이는 다시 멍청해졌다. 아이는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다녔다. 게다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여자를 건드리는 통에 내 머리카락은 금세 희게 변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태어나는, 가치 없는 손자들을 죽여야만 했다.

‘잘못했습니다.’

웃기는 건 그 와중에도 아이는 나에게만은 기를 못 폈다. 밖에서는 세상없을 사고뭉치라 들었건만 집 안에서 아이는 어릴 적 그대로였다. 아이는 어미인 나와는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바닥으로만 내리깔았다. 나는 그 꼴이 어느 것보다 보기 싫었다. 미래의 황제가 다른 이와 눈도 못 마주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결혼하렴. 페테가 정도면 괜찮지.’

죽어 나가는 핏덩이들 보기가 지겨워진 나는 아이를 결혼시켰다. 전부터 봐 둔 영애는 꽤 영리한 아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들이 태어났다.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하나. 아이들은 어릴 적 나를 닮아 예뻤다. 엘리온 때와 다르게 나는 귀여운 손자들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손자들은 너무 귀엽고 여린 존재들이었다.

‘잘했다. 엘리엇.’

특히 이제 막 10살을 넘긴 첫 손자 엘리엇은 모든 방면에서 나를 만족시켰다. 그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배움을 청하고 스스로 익혔다. 나와 크리스를 닮아 영리한 아이였다. 그러나 손자들의 아버지인 아들은 여전히 부족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아들과 손자 비교하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엘리온이나 엘리엇이나 내 피를 이어받은 건 똑같은데 왜 아들은 손자만 못할까.

‘황제가 될 재목은…….’

계획의 시작은 아들을 황제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20년을 넘게 황제 자리를 생각해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서 주객이 전도되었다.

* * *

“그렇습니까가 아니라 당신 생각이 궁금해요. 나는 역시 엘리온 대신 엘리엇을…….”

“나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뜻대로 하세요. 나의 엘.”

“……그렇게밖에 말 못 해요?”

크리스는 언젠가부터 나와 대화할 때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말하지도 않았고 내 말에 부정을 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할 때부터였나? 너무 오래되어 생각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쯤부터 이랬지.

“아까도 말했지만 얼굴 찌푸리면 주름집니다. 그보다 이거 받으세요.”

은근히 넘어가는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다 책상 위에 올려진 초대장을 봤다. 고급 재질에 금박, 가운데 박힌 사자 문양.

“뒤발. 황제로군요.”

“수도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며 꼭 오라 적혀 있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라……. 얼마 만이지? 손자들이 생긴 후로 나는 동부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다녀왔지만 전처럼 수도에 상주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시끄러운 수도가 좋았는데 지금은 동부의 조용한 호수가 더 좋았다. 늙긴 늙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가요. 어제 엘자가 페루스를 보고 싶다 울더군요. 도대체 그 아이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원.”

손녀 엘리자벳을 떠올리자 저절로 한 아이가 떠올랐다. 제 할아비 어릴 적 모습을 꼭 빼닮은 뒤발의 손자 녀석.

“그러지요. 아이들까지 데려가려면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겠습니다.”

“대강 준비해서 가요. 올라가면 다 있을 텐데 뭐.”

“어째 엘은 나이가 드니 더…….”

“더 뭐요?”

“아닙니다.”

싱겁기는. 나는 그의 손을 툭 하고 쳤다. 나이가 들었건만 그의 손은 여전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 눈가로 가져갔다. 그가 알아들은 듯 내 눈가를 문질러 줬다. 피로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 수도로 가면 할 일이 많겠지요?”

“아마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당신이 있으니깐?”

“…….”

내가 말을 가로채자 그가 입을 닫았다. 나는 작게 웃었다. 그렇지. 크리스 당신만 있다면 걱정할 필요 없지. 나는 내 눈을 문지르는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낯간지러운 말을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크리스.”

* * *

발락 ― 붉은 꽃이 아름다운 식충 식물. 향으로 작은 곤충을 유인한 다음 꽃잎을 닫아 가둔다. 그 후 특이한 점액질을 분사, 점액질에 닿은 곤충은 순식간에 폭사 후 소화당한다.

* * *

“많이 늙었군. 엘.”

“폐하보다는 항상 젊지요.”

“성격은 변함없어 좋아.”

나는 손뼉을 치며 호탕하게 웃는 뒤발을 바라봤다. 찬란했던 금발은 백발이 됐건만 그의 파란 눈은 젊은 시절과 같았다. 똑같이 장난기 많았고 유쾌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뒤발이라 부르게. 폐하라니 듣고 있기 힘들군.”

또한 친근한 척 붙어 오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50년간 잘 들어 놓으시곤.”

“50년이라……. 벌써 그리되었군. 하지만 알지 않나. 내가 왜 그랬는지.”

“폐하께서 그리 속 좁은 분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자네만큼은 아니지. 난 몇 번이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지금도 나는 이름을 부르는데 자네는 아니잖나. 엘.”

정말이지 그는 여전했다. 나는 내게 내밀어진 손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 잡아 주는 건가 엘. 자네 말대로 난 나이가 많아져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하다고. 다리가 영 후들거려.”

“또 잡았다가 몇 시간이고 못 벗어나면 어찌합니까.”

“그런 걱정은 마. 너는 이제 그때만큼 아름답지 않으니.”

내가 기억 하나를 꺼내 들자 그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옆을 보니 그는 팔을 거둔 채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세상에 다 늙어서 무슨 추태를. 아이도 아니고. 그래도…….

“숙녀에게 그런 말은 실례예요. 뒤발 오라버니.”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망했지만 말투도 그 시절처럼 바꿔 봤다. 누가 보면 주책이라 하겠지만 어떤가. 시종들은 한참 떨어진 곳에 있을 테고 다가오지도 않을 텐데. 가끔 이리 옛 시절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지.

“숙녀?”

이번엔 그가 웃기 시작했다. 배까지 잡고 고개를 젖힌 그의 웃음소리에 나는 언젠가 있었던 기억 한 편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리 녹음이 우거진 곳이었지. 나는 책을 읽었고 그는 잔디에 누워 뒹굴면서 저리 웃었지.

“그럼.”

무언가 내 발을 쳤다. 밑을 보자 그가 내 구두를 툭툭 치고 있었다.

“그때처럼 내 발도 밟아 보라고.”

“흥! 아이도 아니고. 이제 그만하시지요.”

이 인간이 한번 받아 주니깐! 그러나 나는 말을 그리하면서도 그의 구두 위로 슬쩍 내 구두를 옮겼다. 그러고는 인정사정없이 밟아 줬다. 그러자 그가 작게 신음을 내며 허리를 굽혔다.

“솜씨는 여전하군.”

나는 아무 말 없이 턱을 약간 들어 보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수긍했다.

“정말 그대로야.”

“폐하도 마찬가지십니다.”

그가 내 손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니 내가 포기를 못 했지.”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나는 당황해 그의 손을 떨치려 했다. 그러나 순간 마주친 파란 눈에 동작을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50년 전과 같은 눈이었다. 나에게 청혼하던 그 시절.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

그는 나에게 처음 청혼을 거절당한 이후로도 몇 번이고 반복해 다시 청혼을 해 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크리스가 있었으므로 그는 항상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크리스와 결혼하기를 결정했을 때 그는 나를 궁으로 부르더니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엘…… 제발…….’

‘폐, 폐하?’

‘절대 안 돼! 특히 그 자식은 안 돼!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를 놈이란 말이다.’

그는 당시 그리 소리치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다 큰 사내가 그것도 한 나라의 황제가 흘리는 눈물에 엄청 당황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결혼한다고 대성통곡하는 황제라니……. 아마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라 그랬겠지. 그날 아마 그에게 반나절은 잡혀 있었지?

“그래도 손자도 보시고 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손자라 해 봤자 한 녀석뿐이지. 걱정이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자식이 없어 반평생 마음을 졸였다면 뒤발은 손자가 정말 없었다. 그는 자식을 다섯이나 뒀는데 이상하게도 손자는 막내아들 부부에게서 본 딱 한 명이었다.

“그보다 오늘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재미없게.”

내가 본론을 꺼내자 그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추억 팔이는 이쯤에서 그만해야 했다. 본디 수도로 올라온 목적은 딴 곳에 있었으니. 게다가 먼저 부른 것은 그가 아닌가.

나는 뒤발을 좋아했지만 그것과 다르게 그와 내 입장은 확연하게 달랐다. 물론 크게 보자면 한 가문이 황권을 차지해 분산되어 있는 권력을 모으자는, 그리하여 툴란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이상은 비슷했다. 그러나 그건 뻔지르르한 구실일 뿐 실제로는 각자의 욕심을, 가문을, 이익을 위해 그리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조용히 빼내고 그와 거리를 조금 벌렸다. 사실 이리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조차 주변 사람들이 기함할 일이지.

“양보하지.”

내가 가만히 떨어지자 그가 다시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예?”

“내가 양보하겠다 이 말이야. 하고 싶을 대로 해. 이번에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니.”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는 내 손을 쥔 채 그저 바닥을 보고 있었다.

“진심이십니까? 혹 저번처럼…….”

“아니야. 정말로 하는 말이야. 가문이라면 걱정 마. 내가 막을 테니. 그리고 저번 일도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들놈들이 마음대로 한 거지.”

그가 미소 지으며 나를 봤다. 나는 그의 눈에서 무언가 포기한 아니 내려놓은 듯한 분위기를 읽었다. 믿으면 안 돼. 이성이 경고했다. 그러나 내 입은 다른 말을 꺼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예전에 약속하지 않았어. 내가…… 가문이 너를 해칠 일 따위 없다고. 이대로 가면 분명 네가 다칠 텐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꼴은 못 보지.”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기억조차 못 하는 오래전의 약속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지?

“그래도 하나는 약속해 줘야겠어.”

“말씀하십시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건 안 돼. 네가 무얼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사람 죽이는 건 그만두었으면 좋겠군. 특히 그 미친…… 아니 네 남편, 그놈 좀 막아. 뜻을 이룰 거면 사람들을 설득해야지. 아니 어차피 내가 빠지면 사람들은 알아서 네게 붙을 테니…….”

“그게…….”

“으아앙. 할머니!”

갑자기 등장한 크리스 이야기에 내가 의문을 표할 때였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엘리자벳이 울면서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금발의 아이가 쫓아 들어왔다.

“페루스가 아니냐.”

“너!”

금발의 아이는 제 할아버지의 부름에도 손녀만을 바라봤다.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 씩씩대며 손녀를 노려보는 파란 눈은 온갖 것을 다 태워 버릴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내, 내가 뭘…… 뭘.”

울면서 내 품에 안긴 손녀가 그런 아이를 보고는 말을 더듬더니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엘자. 우리 아가. 무슨 일이냐?”

“페루스가……. 페루스가…….”

한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손녀가 제 머리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손녀의 꼴이 이상했다. 같이 궁에 들어왔을 적만 해도 머리를 예쁘게 땋아 옆에 붙이고 노란 천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뜯어 놓은 것처럼 천은 없고 머리카락은 삐져나와 있었다.

“네가 먼저 약속을 어겨서잖아!”

갑자기 금발의 아이가 고함을 빽 하고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다 얼얼했다. 아이의 소리에 놀랐는지 품에 숨은 손녀가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니 무슨 저런 게 다 있나 싶어진 나는 아이를 향해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뒤발이 이리로 오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내 핏줄이 실례가 많군. 이만 가고 내일 다시 오는 게 좋겠어. 엘.”

“이 무슨…….”

제 손자라 감싸는 건가. 어이가 없어진 난 손녀를 뒤로 보내고 그를 봤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저 제 핏줄을 두둔한다기에는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아이를 혼내는 표정도 감싸는 표정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뒤를 보니 손녀가 잔뜩 겁에 질린 채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었다. 나를 닮은 눈망울에는 아직도 눈물이 가득했다. 찬찬히 보니 눈 옆에 생채기도 있었다. 고작 아이들 싸움에 불과하거늘, 그 모습에 다시 울컥하고 분기가 올라왔다. 도대체 황제의 손자면 단가! 남의 집 귀한 손녀를 이리 만들어 놓다니. 어려도 숙녀인데 감히 누구에게 손을!

“사과는 내일 하지. 꼬마 숙녀님도 내일 다시 사과받으러 오렴. 할아비가 이 못된 녀석을 혼내 주마.”

한 소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 뒤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등을 돌렸다. 오늘은 그가 양보해 준 것도 있고 하니 나도 하나쯤 양보하는 것이 좋았다. 그 이상한 표정도 마음에 걸리고…….

“엘자. 괜찮으냐.”

정원을 걸어 나오며 나는 손녀에게 물었다. 아이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당하고 있으면 어찌해. 너도 한 대 때려 줘야지.”

“하지만…… 그러면 페루스가 아픈걸요. 난 페루스가 아픈 게 싫어요.”

나는 순간 턱 하고 올라오는 분통에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내려다봤다. 나를 닮은 녹색 눈은 진심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리 가르쳤는지! 나는 손녀가 혹 바보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녀는 어쩌고?”

“응? 사라랑 제인은 집에 있잖아요.”

“아니 그 아이들 말고. 여기 올 때 같이 온 아이 말이다.”

“애나요? 모르겠어요.”

“그래?”

어린 상전 하나 제대로 못 봐 이 사달을 내다니. 나는 제 일을 제대로 못 한 아랫것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것 얼굴에 생채기가 났으니 그저 매질하는 걸로는 안 되겠고. 상전도 못 쫓는 쓸모없는 다리를 잘라야 하나? 작은 손이 내 손을 더욱 꼭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귀여운 것. 나는 내일 반드시 뒤발의 손자 놈에게 사과를 받아 내겠다 다짐하면 궁을 나섰다.

* * *

황제가 죽었다.

사과를 받기도 전에. 나를 만난 다음 날 집무실에서 그는 죽은 채로 발견됐다.

‘황제가 죽었습니다. 엘.’

나는 궁을 들어갈 준비를 하다 크리스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그의 어린 손자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내가 뭐라 했더라.

‘죽었다고요? 어떻게요!’

‘모릅니다.’

‘그게 말이 돼요? 황제가 죽었어요!’

‘……궁의들이 사인을 찾고 있다 들었습니다.’

“어째서?”

나는 속에서 끓고 있던 물음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는 건강했는데? 다리가 아프다 불평을 하긴 했지만 크게 아픈 모양새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왜?

“폐하. 잠시만 팔을.”

나에게 옷을 입히던 시녀가 내 팔을 조심스레 들더니 무언가를 입혔다. 한 겹, 두 겹, 세 겹……. 끝없이 많은 천이 내 몸 위로 올라왔다.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거울을 봤다.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사람이 생경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잘 어울립니다. 엘.”

나는 거울에 비친 남자를 봤다. 내 반쪽. 그는 나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또한 평소와 다르게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온갖 장식이란 장식은 다 붙은 복식에 어느 때보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내가 선물해 준 예식용 검까지. 결혼식 때도 저리 화려하지는 않았는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나의 엘.”

그가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손짓을 해 시녀들을 물렸다.

“긴장됩니까?”

오늘은 뒤발이 죽은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즉위식 날이었다. 내 황제 즉위식.

“아뇨. 그냥…….”

“그냥?”

“꿈같아요.”

멍청한 대답이었다.

“나도 꿈같습니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가만 보니 그의 얼굴에는 보기 힘든 홍조가 있었다. 그 붉은색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흥분했다. 아냐, 크리스. 내가 말하는 건 당신이 생각하는 거랑 달라. 나는 오늘이 어떻게 왔는지, 어제는 어떻게 지냈는지, 그제는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꿈같다 한 거야. 머리가 너무 붕 떠 지난 한 달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어 그리 말한 거야.

‘엘! 오늘 너무 예쁘다.’

‘내 옆에 있어 줘.’

‘예전에 약속하지 않았어.’

뒤발이 죽은 후 나는 계속 이 상태였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가슴이 아렸다. 뭔가 빈 느낌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뒤발이 죽은 후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는 생각보다 나에게 가까운 존재였다. 그저 소꿉동무라, 경쟁자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나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의 청혼도 거절했는데. 그와 항상 싸워 왔는데. 나는 그와……. 다시금 몰려오는 슬픔에 팔로 몸을 감쌌다.

“이리 껴입었는데 춥습니까?”

누군가 나를 안아 왔다. 거울을 보니 크리스가 나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밀쳤다. 당신!

“왜 그럽니까. 나의 엘.”

“내 얼굴 안 보여요!”

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에게 왜 화가 나지?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찬찬히 뜯어봤다. 화려하게 차려입긴 했지만 평소와 같은 그인데? 왜? 나는 계속해서 올라오는 의문을 누르며 시선을 위로 했다. 그리고 순간.

‘아.’

나는 이 분노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울 속 그는 웃고 있었다. 눈은 휘어져 내려가 있었고 입은 그와 반대로 올라가 있었다. 그의 뺨은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아, 그랬다. 그는 내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슬픔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제 감정에 취해 있었다. 그는 너무 기뻐 내 슬픔을 무시하고 있었다.

“왜 웃어요?”

나는 떨려 오는 손을 억지로 말아 쥐고 그에게 물었다.

“너무 기뻐서요.”

“뭐라고요?”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리 답하는 그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혀 왔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그가 나와 이리도 상반된 감정을 느끼다니……. 그가 나에게 공감을 못 하다니……. 그가 나를 위로해 주지 않다니……. 순간 싸한 바람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지난 한 달 내내 이랬던 것 같았다. 내가 무기력하게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를 부축해 장례식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뒤발의 죽음을 파헤치고 있을 때, 그는 아주 명쾌한 목소리로 귀족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검은 옷을 입은 뒤발의 손자를 볼 때, 그는 손자들에게 붉은 옷을 맞춰 주고 있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지? 난 지난 한 달간 무얼 하고 있었지? 왜 벌써 즉위식을?’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멀쩡하던 황제가 의문사로 죽었다. 그런데 새 황제가 한 달 만에 등극한다고? 핏줄로 왕위를 물려주는 타국이 아닌 여기 툴란에서? 사인이 밝혀지지도 죽은 황제가 묘에 제대로 안장되지도 못했는데? 르온가는 무얼 하고 있지? 다른 가문은?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머리가 갑자기 깨질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둑이 터지듯 온갖 의문이 쏟아졌다.

“걱정했습니다.”

“?”

“오늘 같은 날까지 잠들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무슨 말이에요?”

“이런 날은 맑은 정신으로 맞아야지요. 꿈속을 헤매면 안 되지요.”

나는 아픈 머리로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그를 봤다. 그는 황홀한 듯 내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찬찬히 올라오는 그의 시선은 내 붉은 신을 보고 붉은 드레스를 보고 붉은 망토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

그를 부른 것은 나이건만 나는 거울 속 금안을 피하고 말았다.

‘단 한 명입니다.’

‘…….’

‘나의 엘.’

그의 눈이 그때와 같이 기괴한 광기에 차 있었으니깐.

내가 시선을 돌리자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나의 엘.”

다정한 손길이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줬다. 곧 거울 속 그의 입이 내 귓가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항상 듣던 목소리가 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건만 소름이 돋은 나는 그를 밀치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거울 속 내가 옆으로 기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조금만 더 주무세요.”

나는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그를 보며 까무룩 의식을 놓았다.

* * *

나의 엘.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막 성인이 될 무렵, 동부 오로르의 성 연회에서였다. 본디 나는 연회에 초대받기 힘든 신분이었지만 가문에 자식이라곤 나밖에 없었으므로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나를 데리고 오로르 성으로 향했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눈에 띄지 말고 들어가 있으라 떠밀렸지만.

‘이러면 왜 데리고 왔는지.’

오기 싫다는 자식을 억지로 데려온 주제에 사람들 앞에는 나서지 말라니. 나는 우스운 아버지를 비웃으며 마련된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나는 곧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 그래서 당신 아들은 죽일 생각이 없어. 이러나저러나 그 아이는 내 동생이니깐.”

고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복도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방이 보였다.

“……아버지도 허락하신 일이야. 어머니가 원체 힘들게 구시거든.”

목소리의 주인은 잔인한 말을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딱 들어도 비밀스러운, 손님으로서 훔쳐봐서는 안 될 내용. 하지만 나는 홀린 듯 방을 훔쳐봤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방 안에는 한 소녀와 여인이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방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데다 눈에 띄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은 곧 소녀를 향했다. 왜냐면 소녀는 뒷모습만 보였음에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깐. 소녀는 여인과 대조되는 환한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엘라르 오로르.’

오로르의 무남독녀. 장차 고귀해질 내 사촌 동생 뒤발만큼이나 고귀한 소녀. 나는 소녀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왔다. 소녀는 별빛 같은 은발에 동부의 녹음을 빼닮은 녹색 눈을 가진 빼어난 미인이라고 남부에서도 유명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해 소녀의 얼굴을 보려 노력했다. 살짝 드러난 옆얼굴. 소녀는 소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아프진 않을 거야. 마시면 아이는 사지 멀쩡하게 살려 줄게.”

하지만 난 소녀의 외모보다, 소녀가 가진 신분보다 소녀의 행동에 더욱 관심이 갔다.

“나도 하나뿐인 동생이 죽길 원하지는 않거든.”

소녀는 제 아버지의 첩에게 자결을 명하고 있었다. 이제 열다섯이 되었다 들었는데……. 나는 소녀의 행동거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가 병 하나를 여인에게 내밀었다. 작고 하얀 손에 들린 병은 앞의 대화로 짐작해 보건데 위험한 것이 틀림없었다. 무릎 꿇고 있던 여인이 소녀를 노려봤다. 눈물 가득한 붉은 눈은 보기 힘들 정도로 매섭게 타고 있었다. 멀찍이 보고 있는 내 오금이 저릴 만큼. 그러나 소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인의 손에 병을 쥐여 주곤 손까지 토닥여 줬다. 저보다 큰 성인 여성에게 죽음을 강요하며 힘내라 위로하는 모습이 참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질감을 줬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나는 소녀에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소녀는 잔인했다. 고작 그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며 저리 평온하다니. 누가 보더라도 소녀의 심성이 의심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저 미운 아버지의 첩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미운 사람을 죽인다는 통쾌함이 없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공포도 없었다. 냉정한 얼굴을 한 소녀는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소녀의 표정에서 연민을 볼 수 있었다. 얼핏 잔인해 보이는 소녀는 여인에 대한 동정으로 가녀리게 손가락을 떨고 있었다.

「황제는 때로 악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무얼 행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

나는 떨리는 그 하얀 손가락을 본 순간. 소녀가 그것을 감추려 소매로 손을 숨기는 순간. 그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흥분감에 휩싸인 나는 사람들에게 이 장면을 보여 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저 강하고도 연약한 소녀를 보라. 그녀는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이니. 하지만 나는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 들켜서는 저 완벽한 장면이 깨져 버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눈물이 흐르는 눈을 깜박이며 소녀와 여인에게 더욱 집중했다. 순간 무언가를 마신 여인이 쓰러졌다.

“너도…….”

여인이 피를 토하며 쇠 긁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꾸르륵 피를 흘리며 핏발을 세우는 붉은 눈이 얼핏 나를 봤다. 들킨 것인가? 당황한 나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다행히 내 걱정은 착각인 듯, 여인이 말을 이었다.

“너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거야.”

크지 않았음에도 여인의 말이 온 귀에 웅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숨을 넘기며 죽기 직전에 여인이 뱉어 내는 단어는 그만큼 듣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차분한 몸짓으로, 연민 가득한 눈을 하고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꼿꼿이 서 있는 자태가 정말이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아니 더 비참하게 당할 거다! 아주 비참하게!”

여인이 핏덩이와 함께 마지막 말을 토해 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간 소리가 내 귀에도 생생히 닿았다. 여인의 비명에 소녀가 살짝 비틀거렸다. 나는 당장 가서 여인을 걷어차며 닥치라 소리치고 싶었다.

소녀가 뭐라 말을 하며 쓰러진 여인에게 경건한 기도를 올려 줬다. 그러고는 가만히 여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여린 모습에 나는 달려가 소녀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관객일 뿐, 저곳에 난입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소녀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소녀에게 모습조차 보이지 못할 초라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 * *

나는 한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만큼 막살았다. 소녀가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술과 마약은 물론 전에는 멀리했던 여자도 마음껏 품고 다녔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 꼴을 보지 못하겠다며 돈 몇 푼과 함께 나를 내보내셨다. 이제 돌아오지 말라 이 소리겠지. 그 와중에도 혹시 어린 적자가 어찌 될지 몰라 나를 가문에서 제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또 한 번 비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동안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 소녀가 당분간 수도에 머문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곧장 수도로 향했다. 어떻게든 한 번 더 소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이봐요.”

소녀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모습에 당황한 나는 처음엔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소녀가, 아니 그녀가 먼저 나를 잡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입을 벌리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웃기게도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넸을 때, 내 입은 그녀에게 무례한 말만을 던지고 있었다.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 솔직히 말씀드리죠. 사내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내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그녀를 훑는 눈도 파 버리고 싶었다. 나 자신이 미친 게 분명했다. 그나마 가면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가 분기를 담은 채 나를 향했다.

“이런 미친놈이!”

* * *

나는 거의 2주간 바깥출입을 못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을 만들어 준 신께 내 목숨을 바쳐 감사하고 싶었다. 왜냐면 그 후 나는 그녀의 삶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깐.

가까이서 겪은 그녀는 완벽한 여자였다. 사람은 어딘가가 차면 다른 곳이 비는 존재라 하던가. 그러나 그 말은 그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는 모든 방면에서 훌륭했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외양은 물론이요 머리, 성품까지 정말이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자비를 베풀어 주마. 오늘 여기 온 건 네 탓만이 아니니. 데려가서 눈을 파 버려. 나를 노려봤을 때는 그만한 각오는 했겠지.”

“살려 주세요. 귀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저분이 영애님의 연인인 줄도 몰랐어요. 그저 저처럼 불려온 천것인 줄 알고…….”

「황제는 모욕을 당했을 때 그 누구보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것이 벌이든 자비이든. 그렇지 않으면 온갖 것들이 경멸하며 무시하려 든다.」

그녀는 몇 없긴 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달랐다. 그녀는 제 신분에 취해 누군가를 함부로 짓밟지도, 겉으로 가식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선을 정해 놓고 상벌을 행할 뿐이었다.

“나랑 결혼해요.”

“다들 반대하실 텐데요.”

“크리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요. 내가 말을 꺼냈을 때는 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황제는 만인을 이끌어 갈 존재이므로 누구보다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남들이 욕을 하든 칭송을 하든 흔들리지 않고 항상 제 생각대로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번 꺼낸 말은 어떻게든 지켰다.

그녀는 나와 결혼하기 위해 동생을 베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마음을 다져 갔다. 비록 청혼을 받기 전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는 고작 핏줄에 휘둘리는 이었나 싶어 잠시 고민을 하기도, 그녀가 황제에게 청혼을 받았다 들었을 때는 고작 황후 자리에 만족하는 여자였구나 싶어 포기할까라는 멍청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항상 행동을 통해 자신을 보여 줌으로써 내 고민을 날려 줬다.

물론 그녀도 사람은 맞는지라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일에는 이리…….

“……다만 그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좀 답답해요.”

잘못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잡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하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아니 사실 기뻤다. 그녀의 작은 흠을 가려 줄 수 있는 나. 그녀를 더 완벽하게 만들 나라는 존재.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엘이 이해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그녀 옆에 있을 명분이 생긴 것 같아 환희가 몰려왔다. 더 이상 초라하게 방문 틈 사이로 그녀의 극을 지켜보기만 하는 초라한 관객이 아닌 그녀 옆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내 가치가 생긴 것 같아 너무도 기뻤다.

“나 좀 잘래요. 침대로 데려가 줘요.”

그래요. 나의 엘. 드디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으니 당신은 그저 쉬고 싶을 때 이리 내 품에 안겨 주무세요. 내가, 당신의 종이 당신이 걸어갈 길을 닦아 놓겠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옳으니. 나의 엘.”

* * *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한동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녀는 내 말을 이르다 하면서도 귀를 기울여 줬고 내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줬다. 그걸 토대로 나는 그녀를 위해 차곡차곡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혼 후 1년쯤 지났을 때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생겼대요!”

아이였다. 그녀는 아이가 생기자 모든 걸 팽개치기 시작했다. 보통의 여인들처럼 아이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우리 첫아이 이름 사내아이면 롤랑, 여자아이면 로사 어때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를 감싸며 하는 고민이 저것이라니.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물론 나도 아이가 반가웠다. 나와 그녀의 결실이니. 하지만 그녀의 삶이 고작 누군가의 어머니, 부인으로서 끝나는 건 싫었다. 완벽한 그녀는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했다. 나는 전보다 자주 그녀에게 계획을 이야기했다. 연인 시절 함께 봤던 책도 꺼냈다. 그러나 그녀는 책을 보지도 나와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자는 단 한 명입니다. 나의 엘.”

심지어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한 순간 눈을 피하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돼. 차라리…….’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더욱 발전해야 하는데!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고작 배 속의 아이 때문에……. 나는 아이에게 묶인 그녀를 풀어 줘야 했다. 비록 그녀의 몸이 상하고 내 마음이 찢어지더라도! 나는 행해야 했다.

“로사…….”

“울지 마십시오. 나의 엘.”

그녀는 아이를 잃고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프게 울었다. 나는 나를 누르는 죄책감과 슬픔을 억지로 이겨 내며 그녀를 위로했다. 미안합니다. 나의 엘. 하지만 이리 아프니 다시는 아이 생각은 안 하겠지요. 다시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그대를 위해서입니다. 이리 울지 마세요. 그대가 울면 내 마음이 아프니. 그러나…….

로사.

아일린.

로랑.

라이언.

베넷.

카론.

나는 로사 이후로도 다섯 아이를 더 죽여야 했다. 처음 로사를 잃은 후 나는 그녀에게 아픔을 주기 싫어 몰래 피임을 시도했다. 그러자 그녀는 전보다 더욱 아이에게 집착했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하루 종일 왜 아이가 안 생기나? 태가 잘못된 건가? 내 남편이 문제인가? 의사를 닦달해 댔다.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이인 듯, 그녀는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를 가졌을 때보다 더 예민하게 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 번만 더 그녀에게 아픔을 주자, 한 번만 더 내가 아프자 다짐했다. 하지만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으며 결국 여섯이 되었다.

“울지 마세요. 나의 엘.”

“도대체 왜! 왜!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데 왜!”

그녀의 태 안에서 죽어 나온 아이들은 다 작고 예뻤다. 라이언은 형태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로랑은 성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여섯 아이들은 모두 고작 핏덩이에 불과했지만 나는 아이들을 죽일 때마다 끝없는 죄책감과 아픔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가 가지게 될 미래를 그리며 자식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칼질을 하는 것만큼 심장이 조각나고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녀는 슬픔에 잠식되어 스러져 갔다.

“죄송합니다. 태가 많이 상해 이제 아이를 기대하시는 건…….”

의사의 말을 들은 그녀는 거의 미쳐 버렸다. 나는 분명 아이들을 죽여서라도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 했는데 어째서 그녀는 계속 무너져 가는가. 나는 쓰러진 그녀를 잡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잘못 생각했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는가?

“아이가 생기셨습니다. 다만 워낙 약한 듯싶어 기대하시기에는…….”

“그동안 나를 돌봤던 의사들이 어찌 되었는지 봤지?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지 못하면 너도 그들처럼 될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5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다시 아이를 가졌다. 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놓아두어야 하나? 아니면 다시 죽여야 하나?

내가 고민하며 망설이던 차 일곱 번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 엘리온이었다. 나는 내심 걱정했다. 이 아이 때문에 그녀가 이대로 멈춰 서면 어쩌지? 15년 만에 본 아이인데 이 아이만 바라보고 살면 어쩌지? 그러나…….

“……아이가 싫어요.”

그녀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느껴지는 쾌감이란! 지난 십여 년간 내 몸을 휘감은 불안감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난 내 반응을 걱정하며 고개를 돌린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랑스러운 나의 엘. 고작 나 따위를 걱정하고 있다니. 내가 그런 것에 상처받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아니요. 나는 지금 너무 기쁩니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악물고 그녀에게 속삭여 줬다.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연한 겁니다. 우리에게 아이는 익숙지 않으니까요. 의사도 그러더군요. 출산 직후 그런 산모들이 있다고……. 너무 힘들게 낳은 아이일 경우 미움이 커 잠시 아이 보기를 싫어한다고.”

‘어차피 이리될 것이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어리석었습니다.’

“익숙지 않아서?”

“예.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엘리온 그 아이가 그대를 좀 많이 괴롭혔습니까. 올 때부터 괴롭게 오더니 낳을 때도 그대를 고생시켰죠. 그때 엘 그대가 지르던 비명을 생각하면 나도 엘리온이 밉습니다. 내 아이지만 그대를 아프게 했으니까요.”

‘당신은 고작 아이에게 묶일 사람이 아닌데.’

“그러니 걱정 마세요. 곧 누구보다 엘리온을 사랑하게 될 터이니.”

‘늦게 알았습니다. 로사 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맞아요. 난 누구보다 엘리온을 사랑할 거예요.”

‘그리하면 그때 당신의 아픔을 끝냈을 텐데.’

정말 미안합니다. 나의 엘.

* * *

엘리온은 보물이었다. 그녀를 달라지게 했으니. 그녀는 처음 엘리온을 두고 왜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못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어느 날 밤은 고민이 깊어져 아이를 죽이려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를 사랑하려 발버둥을 쳤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자장가를 불러 주며 그녀는 부채감을 지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나는 그저 간간이 그녀의 귀에 바람을 불며 느긋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곧 어찌할지 알았기 때문이다.

“크리스. 당신의 말을 따르겠어요. 대신 내가 아닌 엘리온을 위해서요.”

그녀는 부채감을 지우기 위해 뭐든 아이에게 주려 했다. 그러나 엘리온은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그녀가 공들여 그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알겠습니다. 엘. 내가 돕겠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먹자 모든 일이 편히 풀렸다. 그녀는 뜻을 따르는 이들을 모으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황가를 견제하며 세력을 불렸다. 나는 그녀를 도우며 내가 할 일을 찾았다.

“살려 줘! 제발.”

보통 내가 할 일은 그녀가 편히 길을 갈 수 있도록 거슬리는 것을 치워 버리는 일이었다. 일은 고단했다. 그녀가 걷는 길에는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비루한 것들부터 시작해 황가의 첩자들, 남부의 귀족들, 그녀와 내 주장에 딴죽을 거는 지식인 등 쓸모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네 눈이 예전부터 썩어 있다는 걸 알았지.”

그렇게 열심히 청소만 하고 있기를 몇십 년, 그녀의 길에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 나를 불렀다.

* * *

황제. 뒤발 르온. 그녀의 친우. 나의 먼 사촌 동생.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몸 건강히 지내셨는지요.”

“누가 앉으라 했나.”

“……참 한결같으십니다.”

저가 불러 놓고는 보자마자 이를 드러내는 그가 나는 어이없었다.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그는 도무지 바뀐 구석이 없었다.

“오늘은 내 말이나 들으라 부른 거니 그 입을 좀 다물었으면 좋겠군.”

그는 예전부터 나를 싫어했다. 물론 이유는 알고 있었기에 별로 상관하지는 않았지만. 나이를 먹고 난 후에도 저리 대놓고 물어뜯겠다는 표정이라니. 익숙지 않았다. 그와 독대한 적이 그 긴 세월 중에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서인가?

“그럼 빨리 말씀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할 일이 있어…….”

“네 일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그래도 바쁘다니 바로 묻지. 또 무슨 수작질을 하러 여길 왔지? 엘은 동부에 있다는데 네놈만 여기 근 석 달을 머물더군.”

“폐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만, 하명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작님’의 명 때문입니다.”

나는 그녀를 사사로이 엘이라 부르는 그가 거슬려 직접 그녀의 호칭을 정정해 줬다. 그러나 내 앞의 사내는 내 말 따위 신경 쓸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친우의 이름을 부르는데 네놈이 당최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엘의 명 때문이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아무리 폐하라도 제 아내의 애칭을 이리 함부로 부르는 건 거슬리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폐하는 제 아내에게 몇 번이고 청혼하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닥쳐!”

나는 책상을 쳐 대며 상스러운 말을 외치는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그가 부르르 떨며 들고 있던 펜을 부러뜨렸다. 다 늙어서 성질하고는, 쯧.

“하……. 엘은 네가 이런 놈인 줄 아나? 아니 모르겠지. 엘 앞에서는 또 고상한 척 말을 아끼고 있겠지. 그러니 내가!”

그가 다시 쾅쾅거리며 책상을 쳐 댔다. 나는 다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이 나이 먹고 앉지도 못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황제와의 대화는 정말이지 피곤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리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와 대화할 때면 나도 이상해짐을.

“없으시면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그와 대화하면 이상하리만치 말이 삐딱하니 엇나갔다. 황제가 저런 덜떨어진 성격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녀를 항상 애칭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항상 이랬다. 평소의 나와는 분명히 달랐다. 오히려 그 앞에서는 어느 때보다 침착해야 하는데……. 그녀가 가야 하는 길에 가장 방해가 될 인물이거늘.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등을 돌리고 입안을 꾹 물었다. 알싸한 피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거기 서 당장!”

나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섰다. 눈앞의 황제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은 안 돼.’

나는 차분히 이 이름 모를 감정을 가라앉혔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매번 내 앞에서 저리 감정을 표출하는데……. 역시 다시 봐도 당신은 아니야. 절대 아니지. 그 자리에 어울리는 건 그녀뿐이야.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네놈이 뭘 하든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

“내가 이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줄 아나? 얼마 전 루프 백작가에 이유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더군. 화재로 백작을 비롯해 모든 식솔들이 타 죽었다지? 응?”

“…….”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사체들이 다 묶인 자세였다더군. 백작은 타 죽기 전 두개골이 박살 난 상태였고.”

“루프가의 일은 저도 안타깝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왜 내 눈엔 네놈의 좋아라 웃어 재끼는 표정이 떠오르지? 백작은 훌륭한 교육자로 젊은 지식층에게 인기가 좋았지. 특히 툴란 연합론으로 말이야.”

“소수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 치면 폐하께서 가장 큰 용의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툴란에서 황가가 연합론을 배척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말이야 그런 사건은 이상하게도 우리 가문이 연합론을 들먹이지 말라 강하게 주장한 후에만 나타난단 말이지.”

“…….”

“꼭 내가 뒤집어쓰길 바라는 듯이 말이야. 이상한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하실 말씀이 그뿐입니까?”

“아니지. 이건 그냥 주절대 본 거고 내가 말하려던 건 아까 다 했지.”

“…….”

“포기해. 네놈이 뭘 하려고 하든 실패할 테니. 더 이상 엘을 이 상황에 끌어들이지 마. 그녀는 원래 이런 것에 관심도 없는 이였으니!”

“그리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이건 그녀의 뜻…….”

“그 입 다물어! 네놈이 그녀에게! 엘에게 속살거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그 아이는 분명 네놈을 만나고, 아니 지금도 이 일에 네놈만큼 집착하지 않지.”

“…….”

“그걸 어찌 아냐고? 그녀는 생각만큼 급박히 움직이지 않아. 급히 추진하는 일도 겨우 내게 안 뒤처질 정도지. 그래서 살펴보니 엘은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를 생각이 없더군.”

“…….”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 주변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

쓸데없는 곳에서 날카롭기는. 제 가문 인간들은 세력 견제에만 신경 쓰고 있건만 그는 다른 곳을 짚어 냈다. 그렇지 않아도 들킬까 얼마 전에나 살짝 언질을 준 것이 다인데, 그새…….

나는 그에 대한 평가를 아주 조금 바꿨다. 저 나이까지 나름 인기를 유지하며 앉아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역시 피곤한 인물이다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더 이상한 건 엘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 똑똑한 이인데 말이야. 그래서 다시 생각을 해 봤지. 왜일까 하고.”

“…….”

“답은 하나더군. 누군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게지. 철저하게. 그리고 그럴 만한 인간은…….”

“…….”

“네놈뿐이지.”

“이제 다 하셨습니까?”

“내 눈앞에서 그 징그러운 면상 치우는 걸 허락하지. 허나 기억해야 할 거다. 네놈 뜻대로는 안 돼!”

나는 파랗게 빛나는 눈을 보고는 등을 돌렸다.

* * *

“어찌 저리 멍청한가.”

나는 마차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황제는, 내 고귀한 사촌은 정말이지 너무 멍청했다. 기껏 불러서 하는 말이 경고라니. 이건 숫제 적에게 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르쳐 준 꼴 아닌가. 그래도 황제를 만나 중요한 것 두 개를 얻었다. 하나는 그가 멍청히 뭔가 하겠다 불어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껏 깨닫지 못한 그러나 항상 궁금했던 물음의 단서였다.

나는 부드럽게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밖을 봤다. 수도 거리는 항상 같은 느낌이었다. 껴안고 있는 연인들, 시끄럽게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다들 즐거워 보였다. 저들은 곧 제 하늘이 바뀔 것을 알까?

사소한 고민을 하던 차에 마차가 멈춰 섰다. 수도 한가운데 있다 생각하기 힘든, 조용한 골목이 나타났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익숙한 길을 걸었다. 이번에 수도에 머물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 있었다.

길 구석 평범한 저택을 들어서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그들 중 한 명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였다.

“결과는?”

나는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게…….”

“안내하게.”

나는 허리를 숙인 이가 어물쩍 말을 붙이려는 걸 막았다. 하지만 속에서는 짜증이 밀려왔다. 장담한 지가 언제 적인데. 저택 안쪽 몇 번 와 본 적 있는 방에 들어서니 내가 찾는 사람이 무언가를 보며 중얼대고 있었다. 꼴을 보니 이번에도 실패로군.

“마올.”

“누구……? 잉? 크리스 님이 아니십니까?”

마올. 특이한 회색 피부를 가진 그는 바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를 암암리에 열리는 모임에서 처음 봤다. 어떻게 팔려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더러운 곳에서 머리를 빡빡 깎인 채 사슬에 묶여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빼빼 마른 팔을 들어 무언가 열심히 만드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기에 나는 그날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음에도 모임을 관리하는 이에게 그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저건 뭐지?’

‘아 저 회색 짐승 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거 완전 물건입니다.’

관리인이 그에 대해 말해 준 정보는 흥미로웠다. 회색의 이방인은 전쟁 통에 어찌어찌 툴란으로 팔려 왔는데 괴상한 생김새로 사는 이가 없어 모임에 헐값으로 팔려 왔다 한다. 그런데 이놈이 제 나라에서는 왕조차 인정한 학자이자 의사라더니 놀이에서 죽어 나가는 상품들을 대번에 고쳐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번에 툴란 말을 배우더니 모임에서 비싸게 주고 사는 약들도 어찌나 잘 만드는지…….’

흥미가 생긴 나는 그 자리에서 마올을 샀다. 그 정도 재주이면 어디에 쓰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기에.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필요한 온갖 것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입을 열 수는 있나?’

‘혀는 살려 뒀습니다. 물으시면 무엇이든 술술 불 겁니다요.’

저를 구해 준 것이 나라고 느꼈는지 그 이상의 역할도 해 줬다. 모임에서 물이 든 것인지 아니면 본디 그런 성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고문에도 제법 소질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꽤 편히 일을 할 수 있었다.

“아직도 멀었다지?”

“그런 것을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그러나 최근 나는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돈을 잔뜩 쏟아부어 부탁한 것이 완성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째로 날려 버려도 좋아.”

“그, 폭발력이 아직 부족합니다. 몰래 실험할 곳도 많지 않고. 그래도! 많이 발전했습죠.”

“마올. 할 수 있다 장담한 것은 자네야. 약속한 기한에서 벌써 몇 달이 지났는지 아나.”

내 조용한 질책에 그가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래. 아직 시간이 남았지. 정 안 되면 위험할 수 있지만 무력으로 밀어붙여도 될 것이고…….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예에.”

나는 마중 나오겠다는 그를 물리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오면서 맡았던 매캐한 냄새가 더욱 심하게 났다. 이래서 다른 이에게 안 들키나?

살짝 염려되는 의문을 가지며 온 길을 돌아가고 있을 적이었다.

“이봐.”

어디서 깡마른 손이 내 옷깃을 잡았다. 나는 손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러자 꾀죄죄한 꼴을 한 소년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이 회색인 걸 보니 저택의 실험 노예가 분명했다.

“누구지?”

나는 사람을 부를까 하다 소년의 눈을 보고 그만뒀다. 소년의 눈은 드문 보라색이었다.

“보면 몰라. 여기 노예야.”

이제 열댓 살 되었을까? 길게 머리를 기른 소년은 노예답지 않게 오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소년에게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짐작이 맞는다면 소년은 여기 있을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말없이 저를 보자 소년이 다급하게 매달려 왔다.

“당신.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괴물 늙은이한테 뭔가 만들라 시키고 있지? 펑 하고 터지는 거 말이야. 그거 내가 할 수 있어. 그 늙은이보다 더 잘.”

소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괴물 늙은이라 함은 마올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보다 뭘 잘 만든다고? 나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이 내 옷깃을 더 세게 잡아 왔다.

“정말이야. 나 그 늙은이 제자기도 해. 지금껏 괴물이 만든 것 중에 반 이상은 내가 만든 거야.”

“정말이냐?”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일단 물어보았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했다. 아니 확실하지 않아도 이 정도로 같은 색이라면 이용할 가치가 있지. 나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소년에게 물었다.

“너 우세리랑 무슨 관련이 있지?”

소년이 크게 흠칫거렸다. 반응을 보건데 확실했다. 나는 우세리 공작이 늙은 어미가 죽은 후 아이 하나를 몰래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첩에게서 얻은 서자라든가……. 처음 그 정보를 들었을 때는 웃고 말았는데.

“당신 뭐야!”

소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나는 소년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리 편히 이용할 패가 생기다니. 나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갑자기 바뀐 내 태도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손을 잡아 왔다.

“일단 들어는 보마.”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소년은 두 달 만에 제 스승이 못 해낸 것을 해냈다.

* * *

「발락: 붉은 꽃이 아름다운 식충 식물. 향으로 작은 곤충을 유인한 다음 꽃잎을 닫아 가둔다. 그 후 특이한 점액질을 분사, 점액질에 닿은 곤충은 순식간에 폭사 후 소화당한다.」

어느 사건이 있은 후 툴란에서 인위적으로 재배 및 가공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 * *

질퍽하게 눌어붙은 살덩이들, 온 바닥을 적시고 있는 핏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뼛조각, 진동하는 비린내. 높다란 창문 사이 따사로이 빛이 비치는 경건한 홀에 지옥이 펼쳐졌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감상하다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서 구역질을 하며 속에 든 것을 게워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치우라 데리고 왔건만. 저리해서는 이 명망 높은 시신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게 아닌가. 쓸모없는 것들.

찰캉―

발에 무언가 치였다. 밑을 보니 라세르가 문양이 분명한 검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초록빛 천이 피에 절은 채 살덩이와 함께 구르고 있었다. 툴란의 검으로, 이름 높은 북부의 주인도 한순간에 이리될 수 있다니. 나는 죽은 이에 대한 예우로 기도를 하며 검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어린 자식들이 생각났다. 제 아비를 잡아채 이곳에 넣을 미끼 역할을 해 준 아이들. 내 손자들과 비슷한 나이라 했나? 불쌍하게 되었지.

“라세르 공작이 여기 있다. 조심히 수습하라.”

나는 조용히 검을 내리고 사람을 불렀다. 부름을 받은 이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검은 상자를 들고 왔다. 작지만 고급스러운 천으로 감긴 상자였다. 안타깝게 죽은 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덜덜 떨며 시종이 장갑을 낀 채 살덩이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아내린 살덩이는 질척한 핏물이 되어 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뼈라도 잘 추슬러 담거라. 검도 챙겨 라세르가 자제에게 전하고.”

꼭 모래 같구나. 나는 그리 생각하며 명했다. 바닥에 꿇은 이가 히끅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믿음이 안 가는 모습에 나는 흘끗 시종을 바라보다 걸음을 다시 앞으로 했다. 질퍽거리는 피와 살이 천으로 된 신발을 적시며 맨살에 축축이 닿아 왔다. 다리가 무거워지며 바닥에서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내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기에 나는 쉬지 않고 걸었다.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나이가 들어 먹먹해진 귀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길마다 얼굴이 나타났다. 온통 빨간 핏물로 만들어진 것들은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 살아 있던, 마지막 직전까지 나와 대면했던 이들. 그들은 입을 벌리고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그 소름 끼치는 광경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얼굴들이 빠르게 내 주변으로 모였다. 한순간에 몇백이 되는 얼굴들이 달려오자 붉은 강이 만들어졌다. 순식간에 내 허리까지 차오른 핏물에 나는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대로 걸어야 하나? 헤엄을 쳐야 하나? 나는 손을 들어 핏물에 슬쩍 담가 봤다. 그러자 묽은 줄 알았던 핏물들이 끈적해지며 나를 당기기 시작했다. 이 무슨! 당황한 나는 손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핏물들은 강하게 나를 옭매었다. 그러고는 더 위로 더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턱 밑까지 차오른 핏물에 나는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형체도 없건만 핏물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죽어라 외쳤다. 쉴 새 없이 몰려오는 소리에 난 손을 들어 귀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붙잡힌 팔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난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내가 데려온 많은 이들은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거기 누…….”

당황한 내가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위로 올라온 핏물이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입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 내 얼굴을 잡고 있는지 벌려진 입은 닫히지 않고 핏물은 끊임없이 들이찼다. 의식을 잃을 만큼 비릿한 피가 꾸역꾸역 목 안으로 넘어갔다. 꾸르륵 소리와 함께 폐에도 핏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속으로 외치며 핏물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몸은 핏물에 잠겨 꼼짝을 하지 못했다. 이제 핏물은 코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곧 비릿한 액체가 내 숨을 앗아 가기 시작했다. 죽는 건가? 이리 죽는 건가? 숨을 쉴 수 없게 되자 자연히 머릿속에 죽음이 그려졌다. 그러나 난 지금 죽을 수 없었다. 이리 죽을 수 없었다. 난 안간힘을 쓰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빛이 보였다.

‘나의 엘.’

빛은 그녀였다. 그녀는 내가 향하려 했던 단상 위에서 화려한 관을 쓰고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살풋 올라간 입술이 아름다웠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나를 잡고 있던 핏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괜,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누군가 내 팔을 잡아 왔다. 고개를 돌리니 방금 전까지 없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부축하던 이를 툭 하고 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목적지는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단 세 칸뿐인 계단이 어찌나 높던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아…….”

몇 걸음 되지 않았지만 어려운 여정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나는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나는 조심히 목표물을 쓰다듬었다. 금속이 손에 차갑게 감겼다. 그러나 난 쓰다듬기를 멈출 수 없었다. 차갑지만 아름다운 것! 쓰는 이에게 모든 영광을 안겨 주는 것! 그건 내가 그녀를 위해 만든 관이었다. 만인지상의 존재로 군림할 그녀를 위해 몇 년간 장인을 재촉해 만든 걸작품. 관은 앞으로 후대에 자랑스레 전해 줘도 될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특유의 무게감도 갖추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긴 했다. 나는 관 위에 묻은 피를 봤다. 내 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붉은 자국은 관 위에 진득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조심히 관을 닦기 시작했다.

‘나의 엘. 흠은 전부 내가…….’

내 손길을 따라 서서히 옅어지는 피를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 *

그녀가 내게 말을 낮췄다. 그 드문 모습에 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은 미쳤어!”

‘그렇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목깃을 잡고 흔드는 그녀를 보며 그저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따위 미친 짓을! 아아악!”

그러자 그녀가 미친 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같이 살아오며 그녀가 이리 감정을 표출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왜 그런 거야! 왜! 왜! 입을 열어! 그리 다물지 말고!”

“항상 말해 오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녀의 물음에 차분히 답을 했다. 나의 엘. 나는 그대에게 항상 말해 왔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건 그대라고.

“언제! 당신이 언제 내게 그랬어! 언제 이리 미친 짓을 벌이겠다 말했어!”

“평생을 말해 왔습니다.”

짝―

나는 돌아간 뺨을 만지며 그녀를 쳐다봤다. 걸치고 있던 옷을 대부분 찢어 버린 그녀는 내 뺨을 올려붙이곤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미친 새끼.”

그러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단어를 뱉어 냈다. 신호였다. 그녀는 검을 검집째 집어 들더니 나를 향해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미친 새끼.”

퍽―

“악마 같은 놈.”

퍽―

“이런 게.”

퍽―

“왜 내 옆에.”

퍽―

“붙어서!”

한 대. 두 대. 세 대. 사방에서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아픔이 몰려왔다. 팔다리, 허리 할 것 없었다. 결국 나는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 나이에 어찌 저런 힘이 있는지. 나는 몰아치는 폭력에 힘들었지만 눈을 뜨고 그녀를 봤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나에게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퍽―

정확히 머리를 가격한 폭력에 위쪽에서 피가 흘렀다. 순간 사라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뜨거운 피가 눈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좀……. 내가 당신을 볼 수 없잖아. 나는 앞을 봤다. 그녀가 검집을 들고 다시 한번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탁―

나는 가까스로 검집을 잡았다.

“엘. 그만하십시오. 이러다 그대가 먼저 쓰러집니다.”

“……미친놈이!”

내가 그녀를 제지하자 예상대로 그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힘을 뺐다. 나는 흐려진 시야를 최대한 바로 하며 그녀를 봤다. 나의 엘. 그녀는 울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중얼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아픈 팔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울지 마십시오.”

“닥쳐.”

“항상 말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울면 내가 아프다고.”

“제발 닥쳐.”

그녀가 비틀거리며 내게서 물러나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검을 내려놨다.

“…….”

“…….”

우리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고라 말해야 해. 어떻게? 하여간 밖에는 그리 알려야 해.”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아까에 비하면 아주 차분해져 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틀어잡아야……. 어차피, 하……. 다들 죽어 버렸으니 쉬울 거야.”

“…….”

“당신은 동부로 가 있어. 아니, 그냥 여기 있어. 내가, 어떻게든…… 차라리 내가 한 걸로 하면……. 아니지, 식 중에 르온가에서 반역을 일으켰다 그리하면.”

“안 됩니다.”

나는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을 잡아 세웠다. 초록 눈이 또르륵 구르며 나를 봤다. 바들바들 떨리는 눈동자 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그럼 어찌할 셈이야!”

나는 소리치는 그녀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녀는 손을 떨고 있었다. 그때 방 안에서 처음 그녀를 본 순간처럼 가녀리게. 나의 엘. 사랑스러운 나의 엘. 당신은 끝까지…….

“우선 그 검으로 나를 찌르세요.”

그녀가 무슨 미친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대는 이제 황제입니다. 나의 엘.”

“아직도 그 소리를 하고 싶어? 누가 그걸 몰라! 그보다 지금은 당신이 한 미친…….”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황제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모르겠습니까? 나의 엘. 당신은 황제입니다.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럼…….

“그러니 흠결 따위 없어야지요.”

“흠? 당신이 한 미친 짓만 아니면 그따위 것 생기지도 않았어! 당신이 내게 흠을 내 놓고 그런 말이 나와!”

그녀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있었다. 내가 한 짓 따위 당연히 당신에게 흠이 될 수 없지요. 나의 엘. 내가 말하는 건…….

“고작 그런 걸 흠이라 생각하다니. 틀렸습니다, 엘. 내가 말하는 흠이란 다른 겁니다.”

“?”

“나의 엘. 내가 당신 옆에 얼마나 있었지요? 10년? 20년? 30년? 아니지요. 이제 곧 50년이 돼 갑니다. 내가 그 세월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알다시피 당신을 황제로 만드는 것. 불완전한 황제가 아닌 완전한 황제로 만드는 것. 그게 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난 그걸 위해 그 긴 세월을 달려왔습니다.”

나의 엘. 나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그녀를 보며 오랫동안 속에 품어 왔던 진심을 고백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의문이 생기더랍니다. 왜 이리 더디지? 나는 이리 달리는데 왜 이리 더딜까. 왜 앞으로 나아가기가 이리 힘들까.”

그녀는 내 말에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 다 이야기해 두어야 했다.

“그러다 그와 이야기하며, 그가 죽었을 때, 엘 당신의 태도를 보며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멍청한 내 사촌. 뒤발 르온. 그는 죽기 직전 내게 도움 되는 일을 하나 했다. 그는 오랜 세월 내가 품어 온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너무 약합니다. 그들에게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적은 한창 설치던 르온가 놈들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학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대의 진정한 적은 아버지, 아이, 친우…….”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꺼내기에는 나조차 힘이 들었다. 그러나 해야 했다.

“그리고 나입니다.”

“제발! 제발 헛소리 좀 작작 해! 지금 그런 미친 소리를 떠들 때야? 크리스 당신 정말 돌았어? 머리가 아예 미쳐 버린 거야?”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외쳤지만 그녀는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꼭 그때처럼. 그러고 보니 내가 가장 간절하게 말을 할 때 항상 그녀는 이러했다.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에 나는 혀로 입을 축였다. 오늘 하루 종일 맡은 비린내가 온 입안을 맴돌았다. 나는 억지로 그것을 삼켜 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엘. 당신은 이 일이 벌어질 걸 알았다면, 예상했다면 분명 막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황제가…… 뒤발 그자가 그러더군요. 영리한 당신의 눈을 누군가 가리고 있다고요. 내가 그때 얼마나 머리가 얼얼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계속 고민했습니다. 정말 내가 완벽해서 그대가 눈치채지 못한 걸까? 내가 너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서 그대가 아무것도 몰랐을까? 나는 내심 그러길 속으로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지요. 그의 말대로 똑똑한 그대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원래의 그대라면요. 그러나 엘. 당신은 몰랐습니다. 내가 일을 이리 꾸밀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지요. 작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지요. 왜일까?”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평생을 지은 죄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나는 분명 그녀의 작은 흠을 가리려 옆에 존재했는데!

“나의 엘! 그대는 나를 너무도 신뢰했습니다! 나를 너무도 믿어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늙어 주름이 생긴 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오래된 내 죄를 고하는 것이, 내 존재가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내가 있었기에! 나 때문에! 당신은 완전해지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가장 큰 흠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그대를 가장 높은 곳으로 인도한 이라 해도! 내가 그대의 작은 흠을 메꾼 존재라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를 고한 나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감히 내가 보지 못할 이였지만, 나는 그날 문틈 사이로 그녀를 보듯 그렇게 그녀를 봤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르륵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나타난 그녀의 표정은.

“크리스…….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리 미쳐 있었던 거예요?”

내가 예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분노하지도 내게 말을 낮추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경멸을 퍼부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경멸 대신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 가득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아픈 이 취급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입안에 씁쓸함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실망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나는 죄를 고한 죄인이었다. 나에게 남은 건 이제 벌뿐이지. 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를 죽이십시오. 나를 죽여 완전해지십시오.”

“당신 동부로 가는 게 좋겠어요. 가서 호수나 보며 얘들이나 봐요. 나으면…… 크리스 당신이 괜찮아지면 보러 갈게요.”

그러나 그녀는 내게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나는 다급해졌다. 왜? 어째서? 나는 이리 당신에게 모든 죄를 고했는데! 어째서 들어주지도 않아! 어째서 나를 벌하지 않아! 왜 나를 죽이고 완벽해지질 않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나를 외면했다. 내가 이리 목을 대 주는데도 검을 쥘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로사, 아일린, 로랑, 라이언, 베넷, 카론…….”

나는 또 다른 죄를 고해서라도 죽음을 받아야 했다. 나에게서 그녀를 해방시켜야 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다시 나를 봤다. 희게 뜬 얼굴은 그 이름은 왜? 라는 의문을 담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비록 앞서 고한 죄보다는 가벼운 것이었으나 이것이 그녀에게 더 크게 다가올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죽였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당신이 나에게 아침마다 달라 조르던 물에 조금씩 넣어 두었지요.”

“그게 대체!”

“히올락즙을 말입니다.”

남은 작은 죄마저 털어놓고 나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바닥에 편히 누워 버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곧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날이 내 심장 위에 올라왔다.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배신감에 가득 찬 그녀는 내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거짓이라 말해! 그러나 나는 그저 미소를 지어 줬다. 끝이 보였다. 다만 날카로운 검날을 보며 나는 한 가지가 염려되었다. 나의 엘. 그녀는 나에게 너무도 다정한 이라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나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배신감에 사로잡혀 나를 베어 내지 않고서는 못 견딜 테니!

그녀의 팔이 위로 올라갔다.

푹―

소리를 안 내려 했지만 차갑게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에 나는 단말마의 비명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왈칵 피가 입 밖으로 나왔다. 바로 심장을 찔려서인가. 눈이 빠르게 감겨 왔다.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다. 아주 작게 열린 눈 틈새로 웬 소녀가 보였다. 아…….

방문 틈으로 본 그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불러 봤다.

‘나의 엘.’

내 부름에 소녀가 뒤를 돌아봤다. 세상 어느 것보다 찬란한 녹안이 나를 정확히 봤다.

‘다음 생이 있다 해도 나의 엘. 그대를 위하여…….’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결말이었다.

* * *

툴란의 늙은 마녀.

학살자.

피에 미친 흡혈귀.

세기의 탕녀.

툴란의 황제 엘라르 오로르가 처음부터 이런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즉위 후 몇 년 동안은 그 어느 황제보다 훌륭했다. 특히 이리저리 분산된 권력을 수도로 집중시켜 중앙 집권 체계를 공고히 한 것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학자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칭송과 별개로 그녀에게는 항상 검은 그림자가 따랐다.

즉위식 날 벌어진 잔인한 학살. 그 죄는 어떤 훌륭한 업적으로도 덮을 수 없는 죄였다. 처음 그녀는 학살의 주범이 다른 이라 주장했다. 남편을 비롯해 저를 광신적으로 따르는 일부 무리들의 짓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죄를 한미한 출신의 제 반려에게 뒤집어씌운 후 죽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아들조차 잔인한 그녀를 믿지 않았다. 나라 안에서 그녀의 업적을 칭송하는 이는 있었어도 그녀, 황제 자체를 칭송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툴란 유일의 황제였으나 그뿐이었다. 전대의 르온가 황제처럼 호평받지도 못했고, 그 전대 우세리가 황제처럼 존경받지도 못했으며, 또 그 전대 라세르가 황제처럼 찬양받지도 못했다.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길 몇 년, 그녀는 점차 미쳐 가며 제가 죽인 남편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들을 불러 모았다. 궁 안에는 온갖 신분의 첩들이 넘쳐 났다. 중앙궁에서는 밤낮없이 음탕한 파티가 벌어졌으며 국고는 순식간에 낭비되었다. 귀족들은 그녀를 향해 복수심을 드러냈으며 백성들은 궁 담벼락에 침을 뱉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전적을 더욱 선명히 떠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어린 핏줄들조차 그들의 조모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백 명을 죽이고 그 피를 마셨다더라, 금발에 금안이면 어린아이도 침실로 들인다더라, 하는 괴악한 소문들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그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7년이 안 되던 해, 가장 아끼는 애첩의 손에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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