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외전 ― 그대를 위하여(엘라르 편) 上
툴란의 늙은 마녀.
학살자.
피에 미친 흡혈귀.
세기의 탕녀.
이 불명예스러운 별명은 단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크리스.”
화려한 바닥을 초라한 노인이 기며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뒤로 엎어진 노인의 머리는 하얀 백발이요 부드러운 카펫을 움켜쥔 손은 주름투성이에 갈퀴같이 말라비틀어졌다. 노인은 녹색 공단에 은박이 장식된 굉장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른 노인의 몸에는 너무 크고 길어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젠장! 난 크리스인가 뭔가가 아니야! 이 마녀!”
노인은 힘들게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아름다운 사내가 그녀를 보며 증오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금안은 어찌나 타오르는지 멀리서 본다면 불이 붙은 줄 착각할 만큼 형형했다. 그러나 노인은 사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손을 뻗었다.
‘아아 크리스.’
사랑하는 당신. 드디어 다시 내 곁에 돌아왔군요. 노인은 흐릿하게 보이는 사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눈앞의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봤다.
“돌아왔어…… 쿨럭.”
노인은 사내를 안으려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기침에 힘을 쓰지 못하고 꼬꾸라지고 말았다. 기침과 함께 한 무더기의 핏덩어리가 노인의 입에서 나왔다. 검붉은 것이 카펫 위에 떨어지며 진득하니 자국을 남겼다.
“징글징글한 괴물!”
사내가 일어서려는 노인을 보더니 단검을 뽑았다. 작지만 날카로운 검이 정밀히 세공된 장식된 검집에서 나왔다.
“큭…….”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검을 뽑아 든 사내는 곧장 쓰러진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노인의 백발을 잡아 올렸다. 강한 악력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뽑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들어 올린 노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손만큼 주름진 얼굴에 탁한 녹색 눈, 쩍쩍 갈라진 입술은 노인을 마녀라 불리기 충분케 했다.
“죽어!”
“……!”
사내의 검이 정확히 노인의 목 한가운데 박혔다. 순식간에 닥친 고통에 노인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만을 크게 떴다.
아까보다 많은 핏덩이가 꾸역꾸역 입 밖으로 나왔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검을 타고 사내의 손에 진득이 묻었다.
사내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노인의 목을 찔렀다. 푹푹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몇 번이고 방에 울렸다. 사내의 손짓에 노인이 푸들거렸다.
그 모습에 사내는 웃으며 몇 번이고 더 칼을 꽂아 넣었다. 숫제 미친 사람의 꼴이었지만 사내는 뭐가 그리 기쁜지 계속해서 칼질을 했다. 곧 노인의 몸이 축 처지며 생명이 꺼졌음을 알렸다. 그제야 사내가 손을 내렸다.
“다뷔네…….”
사내가 그리운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노인을 찌른 단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한 사람의 피를 먹었음에도 검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푹―
수십 번 방을 울렸던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백금발이 뒤로 넘어갔다. 그 소리를 끝으로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방금 전 소란 따위 없다는 듯 고요함만 남은 방 안에는 두 구의 시체만이 남았다. 그리고 얼마 후 툴란 안팎에 온통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퍼졌다.
‘황제가 애첩의 손에 죽었다.’
끝까지 불명예만을 안고 간 노인. 그녀는 툴란의 황제 엘라르 오로르였다.
* * *
“뒤발 오라버니 물러나요.”
나는 엉겨 오는 뒤발을 발로 밀쳐 내며 책을 펼쳤다.
“나의 엘은 왜 이리 매정할까.”
명백한 거절의 의사였건만, 이놈, 아니 뒤발 르온 영식께서는 장난으로 알아먹으셨는지 더 느끼하게 엉겨 붙었다. 어찌나 딱 붙었는지 책이 다시 덮이고 말았다. 오늘까지 해야 할 과제인데. 짜증이 난 나는 구두로 그의 발을 세게 밟았다.
“아―악.”
그가 과장되게 펄쩍대며 떨어졌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두꺼운 책은 페이지를 찾기가 힘들었다.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찾았다.”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내가 마침내 읽던 부분을 찾았다.
“엘. 그거 금서 아냐? 그 자식이 줬지?”
“……신경 꺼요.”
“크리스 그 자식이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어. 그 일로 집에서 쫓겨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너한테.”
“스승님은 잘못 없어요. 내가 가르쳐 달라 청한 것뿐이야. 그리고 좀 돌아가요! 곧 손님이 오신단 말이에요.”
“잘못이 없기는. 네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손님도 그 자식 말하는 거지?”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그새 의자 밑 잔디로 자리를 옮긴 그는 긴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워 있었다.
‘얼굴 하나는…….’
찬란한 금발과 파란 눈의 그는 화가 난 듯싶었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잘생겼기에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얼마 전 스승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대는 잘생긴 사내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질투 나세요?’
‘……됐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죠.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로르 영애.’
소소하게 질투를 하던 스승, 아니 크리스의 모습이 떠오른 나는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크리스 그는 내 스승이자 비밀 연인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아, 엘! 내 말 무시해!”
밑에서 뒤발이 내 다리를 쳤다.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어떻게 이리 유치할 수 있을까. 나는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런 내 눈빛에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 표정은 뭐야!”
“이런 분이 저같이 우아한 숙녀와 함께 자란 소꿉친구라니 부끄러워서요.”
“우아? 숙녀? 크크크큭.”
그가 배를 잡고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아까 전까지 분위기 잡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지. 평소와 같아진 그를 본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럼 우리 우아한 숙녀님.”
구를 기세로 웃던 그가 갑자기 내 옆으로 훅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 정말! 꺼져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내가 그를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목을 감싼 팔이 얼마나 단단한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얄미움에 분이 오른 내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발을 밟기 위해 구두를 들었다. 이거나 먹어라!
“그 정도로 되겠어?”
그러나 내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공격을 그는 쉽게 피했다. 더 분이 차오른 내가 계속해서 그의 발을 노렸다. 네 개의 다리가 이리저리 쫓고 쫓기기를 반복했다.
“좋은 광경입니다.”
조금 멀찍한 곳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님?”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내가 앞을 봤다. 크리스가 나와 뒤발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금안은 언제나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왜?
‘아차.’
나는 재빨리 뒤발의 팔을 풀려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 인간이?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크리스가 왔음에도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풀어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뒤발을 향해 속삭였다. 그러나 그는 팔을 풀기는커녕 앞만 바라봤다. 아 정말! 오늘 왜 이러니. 앞에서는 연인이 계속 나를 노려보고 옆에서는 소꿉친구가 이 난리이니. 결국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뒤발에게 말했다.
“풀어 주세요. 르온 영식.”
“싫어.”
“?”
“뒤발. 영애께서 불편해하시는군.”
“방계 사생아 주제에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불러.”
“뒤발! 무슨 무례예요!”
나는 도가 지나친 뒤발을 향해 소리쳤다. 이래서 둘을 마주치게 하기 싫었는데. 나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뒤발과 크리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뒤발이 크리스를 매우 싫어한다가 정답이었다.
뒤발은 방계의 다른 사생아 출신 친족들에게는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가문과 비교한다면 더 잘해 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는 유독 크리스에게는 냉하게 굴었다. 아니 그저 차가운 걸 넘어서 원수 보듯 한달까?
“꺼져. 이 사생아 자식아.”
“르온 영식! 물러나야 할 사람은 그대예요! 크리스, 아니 스승님은 제 손님이세요. 정말이지 제 집에서 제 손님에게 이리 무례하게 굴다니!”
나는 결국 뒤발을 밀어 냈다. 아까의 힘은 어디 갔는지 그는 의외로 순순히 밀렸다. 그리고 그는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자기가 잘못해 놓고 왜 주인한테 얻어맞은 강아지 표정이야?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그 표정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나는 단호히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뒤발이 거친 동작으로 일어섰다. 순식간에 일어선 그의 행동에 살짝 놀란 난 움찔거리고 말았다. 왜 성질이야.
“내일 또 오지.”
뒤발은 몇 발자국 걷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같이 굴 거면 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려다 크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 괜히 양심이 찔린 나는 무릎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장이 그새 바람에 몇 페이지 넘어가 있었다.
“갔군요.”
그의 말에 나는 앞을 봤다. 뒤발은 뛰어가기라도 한 것인지 그새 사라져 있었다.
“……미안해요, 크리스. 그런 말 듣게 해서.”
“그대 잘못이 아닙니다.”
내 사과에 크리스는 칼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평소와 다른 그의 목소리 톤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연인은 항상 이렇게 아닌 듯 티 나게 질투를 했다.
아 사랑스러운 남자. 나는 이 남자의 이런 질투마저 너무나 좋았다.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기에.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게 분명했다.
나는 올라오는 행복감에 미소 짓다 그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섰다. 올려다보니 큰 키의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빛에 그의 흐르듯 쏟아진 긴 백금발이 하얗게 빛났다. 아름다운 사람.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손짓을 했다.
“더 다가갈 공간도 없습니다.”
“분위기 모르는 스승님. 허리 숙여 봐요.”
내 핀잔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크리스. 둘이 있을 때는 이름을 부르십시오. 뒤발 놈도 이름을 불러 주면서 나는 스승입니까?”
나는 까르륵 웃고 말았다. 귀여운 사람.
“알겠어요. 허리 좀 숙여 주겠어요? 크리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앉아 있는 내 얼굴과 일직선에 자리했다. 나만을 담고 있는 금안이 보였다. 아 아름다운 사람.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있는 힘껏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숨이 가깝게 느껴졌다. 빠르게 뛰는 심장도.
“……정말이지. 이런다고 내가 풀릴 것 같습니까?”
이마를 맞댄 그가 눈을 내리깔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어찌해야 풀리겠어요? 내 사랑.”
나는 오글거리는 대사를 치며 눈을 감았다. 그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가 목울대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입 맞춰 주십시오.”
너무 바로 들어오는 거 아니야? 나는 심통을 조금 부리기로 했다.
“나는 왜 이름 안 불러 줘요? 불러 주기 전까지 난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내 심술에 잠시 머뭇거리는 그가 느껴졌다. 우리 옆으로 풀 내음 가득한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키스해 주십시오……. 나의 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의 엘. 나의 엘. 그 말에 나는 눈을 떴다. 약간 어두웠음에도 빨개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 내 얼굴도 그렇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입을 맞췄다. 누구 입술이 더 뜨거운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온 신경이 입술에 집중됨을 느꼈다. 보드라운 입술이 어찌 이리 거칠 수 있을까? 나는 마주한 그의 입술을 빨며 상반된 감각을 느꼈다.
거친 숨이 우리에게서 나왔다. 우리는 입술만을 부딪치며 빨고 핥고 깨물었다. 누가 들으면 도망갈 소리가 우리에게서 났다. 고작 입맞춤이었지만 그가 나를 갈망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술은 내가 도망갈 새라 끊임없이 쫓아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부족함을 느낀 내가 조심히 혀를 내밀었다. 동시에 내 혀와 같은 물렁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걸 신호로 조심히 내 등과 허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내 머리 뒤로 올라왔다. 끈적거리는 감각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나는 상체를 들어 그의 목을 감싼 팔에 더 힘을 줬다.
더……. 더……. 나는 더 많이 그를 알고 싶었다. 항상 충분히 그를 안다 생각했는데 이럴 때면 늘 부족했다. 우리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 가며 서로를 느꼈다. 그러길 몇 분, 아닌 몇십 분이 지났을까? 마침내 우리는 서로에게서 입을 뗐다.
더운 숨을 헐떡거리는 그가 보였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살짝 부은 입술, 붉은 뺨. 그는 온몸으로 저와 내가 같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숨을 참고 그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요. 크리스.”
* * *
크리스를 만난 건 수도로 올라온 후 몇 달이 안 된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당시 나는 어느 백작가에서 작게 열린 가면 연회에 참여했다. 작은 규모답게 별 볼 것은 없는 연회였건만 워낙 가자 조르는 뒤발에게 약속을 한 나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엘! 오늘 너무 예쁘다.”
“다음부터는 좀 이른 시간에 시작하는 연회에 참여해요.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누가 동부 촌 동네에서 올라온 거 아니랄까 봐. 이게 최신 유행이란 말이지.”
“촌구석이라고 하면 온통 평야밖에 없는 남부가 최고 아니던가요. 누구보고 촌뜨기래.”
어릴 적 함께 지낸 적이 있어서일까? 뒤발은 내가 수도에 올라온 후로 이렇듯 나와 함께 움직이고 싶어 했다. 저의 가문과 우리 가문 사이가 썩 좋지 않았건만 그는 항상 나에게 친한 척 굴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파란색 입고 올 줄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보면 연인인 줄 알겠어요.”
“응? 난 그냥 파란색을 입었을 뿐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그저 나와 색만 같은 옷을 입은 게 아니었다. 가면무도회답게 화려한 그의 옷은 내 드레스와 같은 파란색인 건 물론이요 분위기, 장식 심지어 가면까지 비슷했다. 누가 봐도 연인이나 부부가 맞춰 참여했구나 싶은 옷차림에 나는 눈을 세모꼴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같이 가 주는 대신 일행인 건 안 들키게 옷은 따로 입자 약속했으면서! 그런데 이러면 무슨 소용이야.”
“그러니깐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깐.”
“내 주변에 도대체 쥐를 몇 마리나 들여놓은 건지. 여차하면 르온가 끄나풀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끝까지 모른 척하는 그에게 짜증이 난 나는 날카로운 말을 흘렸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대가문끼리 벌이는 알력 싸움 끝에 죽는 가문 후계자가 어디 한둘인가. 특히 지금 오로르에 진정한 직계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복동생이 있긴 했지만 그의 생모는 신분이 워낙 낮았고, 나이도 어렸다. 반푼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이복동생은 오로르 본성에 머물지도 못하고 변방으로 쫓겨났다.
“절대 그럴 일 없어.”
갑자기 어깨를 잡아 오는 손길에 동생을 생각하던 내 이마가 구겨졌다.
“아파요!”
“그럴 일 없다고.”
나는 몸을 비틀어 뒤발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힘을 준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하……. 왜 이러는지. 모른 척하는 것이 얄미워 당황 좀 해 보란 심정으로 강하게 말하긴 했지만 뒤발의 반응은 내 예상 밖이었다.
“아프다고요!”
“아…… 미안.”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에게서 벗어났음에도 욱신거리는 어깨를 보니 멍이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그는 생긴 것과 다르게 너무 폭력적이었다. 꼭 동화책 왕자처럼 생겨서는 하는 짓은 저잣거리 깡패나 다름없지 않나.
“엘. 그게 아니라, 아니…… 내 말은 내 가문이 너를 해칠 일은 없…….”
“시끄러워요! 당분간 나랑 만날 생각도 하지 마요.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체술을 배웠음에도 고작 손 하나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뒤발에 대한 미움에 나는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을 끊고 뒤를 돌았다.
“그런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뒤에서 그가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알 게 뭐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면을 고쳐 쓰고는 입구로 들어섰다. 연회는 여전했다. 저번과 비슷한 규모, 가면 쓴 사람들, 항상 보는 음식들. 도대체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지루해.’
그냥 갈까 고민이 되었지만 온 김에 나는 발걸음을 저택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홀에는 짝지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 바퀴 돌고 다시 앞으로 돌고 이번엔 뒤로……. 술을 홀짝이며 뱅글뱅글 도는 사람들을 지켜보자 춤을 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슬쩍 홀 가운데로 발을 디뎠다.
나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내 움직임에 따라 예쁘게 퍼지는 드레스도 좋았고 이리저리 바뀌는 시야도 즐거웠다. 다만 평소 연회 때면 나는 몰려드는 예비 구혼자들로 인해 춤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나를 통해 어떻게든 오로르를 먹어 보려는 수준 낮은 것들. 그들은 정말이지 욕심에 충실했다. 귀족 사회에서 그들의 행동은 욕할 것이 아니었지만 절로 일어나는 경멸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를 모르는, 아니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하는 가면 연회는 내가 춤추기 적당한 곳이었다.
“어디서 한번 뵌 듯싶군요. 레이디 오로르.”
……가끔 이리 대놓고 티를 내는 족속도 있었지만.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구석으로 향했다. 역시 그냥 돌아가야 할 듯싶었다.
“그건 반역이오!”
홀을 나선 나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반역? 절로 돌아가는 고개에 맞춰 몸을 돌렸다. 연회에서 서로 토론이나 담소를 나누도록 만들어진 공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제 말 어디가 반역을 담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겨울 안개처럼 차갑게 깔리는 목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목소리 좋은걸? 나는 가면 구멍 너머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가발인 듯 보이는 화려한 백금발의 사내가 장식도 없는 단순한 가면을 쓰고 씩씩대는 남자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큰 키를 가진 사내는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존재감이 대단했다. 사내에게 호기심이 생긴 나는 슬쩍 자리를 차지했다.
“툴란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타국의 관습을 따르라? 하.”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그것과 다릅니다. 저는 타국의 관습을 따르자 한 적이 없습니다.”
“유일한 황가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타국의 집권 형태를 따르자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요!”
“제가 말하는 것은 강력한 일인의 군주입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휘하 귀족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타국의 집권 형태 따위 댈 바가 아니지요.”
“그게 그거인 게지! 당신은 지금 툴란의 집권 형태를 부정하고 있소.”
나는 그들이 무얼 가지고 싸우는지 알 수 있었다. 백금발의 사내가 ‘툴란의 위기는 분산된 권력에서 올 것이다.’라는 요 근래 심심찮게 나오는 위험한 주장을 펼친 모양이었다.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주장이라 바닥에서 겨우 숨만 쉬는 줄 알았는데 이런 연회 자리에서 떠드는 이가 있다니? 나는 대담한 사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겁먹지 않은 모양새였다.
“당신! 가면을 쓰고 만난 걸 다행으로 알아! 다음번에 만나면 아주 경을 칠 테니!”
흥미롭게 싸움을 보고 있기를 한참,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 계기로 대다수의 사람들도 떠나갔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진 공간에는 사내와 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사내가 나를 힐끗 보더니 등을 돌리려 했다.
“이봐요.”
나는 슬쩍 비친 금안에 사내를 잡았다. 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나 그쪽 말에 관심 있어요. 조금 더 이야기를 들려줘요.”
“난 레이디한테 관심 없습니다.”
“내가 관심이 있다니까요?”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 솔직히 말씀드리죠. 사내의 관심을 끌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내게서 한 발 물러서며 내 몸을 훑었다. 무감한 금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풍기는 분위기와 다른 경박한 행동에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곧 분노가 뒤따라왔다.
“이런 미친놈이!”
* * *
“나쁜 사람!”
“이게 무슨……. 엘?”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겼다. 이리 예쁜 색이니 가발인 줄 알았지. 무릎을 내준 채 내 이마를 쓸고 있던 그가 당황해 나를 불렀다.
“세상에. 그런 목소리를 하고!”
“무슨 말입니까?”
“우리 처음 만났을 때요. 그때 크리스가 했던 짓 생각 안 나요?”
“……그래서 흠씬 두들겨 맞지 않았습니까.”
“맞을 만했죠.”
“그래도 가면 때문에 뺨을 못 때린다고 부채로 머리를 내리치는 영애라니. 전 처음 봤습니다. 아니 생각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잡힌 그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그러나 금안은 슬쩍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
“씁. 왜 그랬냐니까요.”
나는 대답 없는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당겼다. 짧은 신음과 함께 그의 얼굴이 한층 가까이 붙었다.
“모릅니다.”
“자기가 한 일을 모른다고요?”
그같이 철저한 남자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절대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분명 모른다 하며 넘어간 거 같은데……. 나는 머리카락을 당기던 손을 놓고 팔을 들어 그의 얼굴을 잡았다. 얼굴이 고정된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거짓말.”
“정말 모릅니다.”
“말 안 해 주면 당분간 키스는 없어요.”
나는 입술을 모으며 그에게 협박했다. 이걸 참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반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자 위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말이 돼요? 난 얼굴도 가리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반한다고?”
“가면을 쓰고 있어도 누군지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왜 반했는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때 엘 눈이…….”
“눈이?”
“나를 잡아 세운 가면 뒤 눈이 들어왔습니다. 녹색 눈이 쳐다보는데…… 저절로 시선이 가서…….”
“그럼 눈만 볼 것이지! 몸은 왜 훑어요. 내 몸매가 좋긴 하지만.”
내 말에 그의 시선이 밑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정말!
“또 그런다!”
나는 얼굴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그의 볼이 내 손길에 움푹 들어갔다.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얼굴이 또 발개져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나만을 향해 지어 주는 얼굴.
“예쁜 내 사람.”
입이 저절로 마음에 담긴 말을 뱉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확장된 눈동자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손에 잡힌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뒷목을 감싸 안았다. 살짝 올라간 상체로 인해 그의 얼굴이 코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입 맞춰도 됩니까?”
그는 항상 나에게 물었다. 입 맞춰 주세요. 입 맞춰도 됩니까? 미리 알려 오는 그 말이 재미없다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좋았다. 항상 나에게 먼저 물어 오는 배려도.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도. 나는 그 부드러움이 너무 좋았다. 나는 손으로 천천히 그의 뺨을 쓸었다.
“물론.”
몇 번째인지 모를 키스가 이어졌다. 눈을 감은 나에게 익숙한 감촉이 다가오더니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끊을 수 없는 이 달콤함. 나는 그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입을 벌렸다. 그는 정말 예쁜 사람이었다.
* * *
“나와 결혼해 줘.”
나는 뒤발의 말에 한 발 물러섰다. 그는 지금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고 있었다. 장인이 정성 들여 만들었을 반지가 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나와 결혼해도 오로르의 주인은 그대일 거야. 그저 내 옆에 있어 줘. 엘.”
뒤발은 얼마 전 황제가 되었다. 우세리 출신 황제가 죽으며 르온가 가주인 그에게 생각보다 빠르게 차례가 온 것이다. 황제가 된 그는 한동안 매우 바빴다. 매일 찾아오던 그가 보이지 않자 섭섭할 정도였으니……. 그래서 그가 부른다 했을 때 나는 즐겁게 그를 만나려 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즐거울 수가 없었다.
“제발 엘.”
그는 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떠는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갖춰 입은 복식과 준비한 장소, 장미꽃 다발. 모든 게 완벽했지만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안 되겠어? 내가 이리하는데 정말 안 되겠어?”
내가 두 번째 거절의 말을 꺼내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물어 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삼킬 수 없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나는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진심이 오래되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았기에.
그는 어릴 적부터 나를 좋아했다. 가문 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그 시절, 그가 우리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울며 난리를 치던 때를 나는 기억했다. 게다가 그 후 그의 아버지 죽음에 우리 가문이 엮인 이후로도 그는 여전히 나를 좋아했다. 내가 수도로 왔을 때는 누구보가 먼저 달려왔지. 날마다 선물을 안기기도 했고. 그 정성을 알기에 나는 가문 때문에 그가 불편해도, 가끔 귀찮아도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크리스가 없었다면 언젠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는 내가 이리 생각할 만큼 나에게 헌신적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돌리자 밑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는 수 없지.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 좋아.”
일어선 그는 목소리를 애써 밝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에 미안해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대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난 아직 포기 안 했어. 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여기서 분명히 말해야 했다. 나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 포기하라고. 하지만 그의 눈을 본 순간 나는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는 울 것 같았기에.
“물러나겠습니다.”
결국 나는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황제가 된 뒤발도 문제였지만 나에게 더 큰 문제는 크리스였다. 그는 요새 나를 피하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자 앞에 앉은 시녀가 나를 걱정하듯 시선을 보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것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혼자 끙끙 앓고 있자 곧 마차가 멈췄다. 수도에 위치한 가문 저택은 황궁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왔니?”
“네. 왜 안 주무시고 나와 계세요?”
입구에는 의외의 인물이 나를 마중하고 있었다. 나와 닮은 녹색 눈을 가진 여인, 내 어머니.
“폐하와는 어땠니?”
“그냥 그랬어요.”
“청혼을 하셨다는데.”
나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어머니를 봤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폐하께서는 네 가주 자리를 유지해 주시겠다 말씀하시던데. 이참에…….”
나는 지긋지긋한 여자를 봤다. 수도로 따라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나를 잡으려 드는지. 아버지에게 첩이 생긴 순간부터 그녀는 내게 목줄을 채우지 못해 안달이었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한심했다. 아버지의 애첩은 몇 넌 전 독을 마시고 죽었고 이복동생은 저 멀리 변방으로 쫓겨났건만 내 어머니는 항상 불안해했다. 그리고 그 불안을 나를 감시하는 것으로, 내 삶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으로 표출했다.
“그 더러운 피는 안 돼.”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어머니가 느리게 말했다. 더러운 피?
“무슨 말씀이세요?”
“그 더러운 사생아! 사생아는 안 된다고! 안 돼! 절대 안 돼! 너도 네 아버지와 똑같이 더러운 피에! 안 돼!”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는 탁하게 죽어 버린 그녀의 눈을 봤다. 아버지가 첩을 들인 이후 어머니의 상태는 시시각각 이랬다. 이게 보기 싫어 친히 아버지의 애첩도 치워 줬는데……. 내 노력에도 어머니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버님은…… 가주님은 나를 사랑해요!’
‘그래?’
‘나는 그의 아들도 낳았어요! 나를 죽이면! 내 아들을 죽이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알아. 그래서 당신 아들은 죽일 생각이 없어. 이러나저러나 그 아이는 내 동생이니깐. 내 선 안이지.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그리고 아버지도 허락한 일이야. 어머니가 원체 힘들게 구시거든.’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긴 했다. 아버지는 그녀를 죽이지 말고 아들과 함께 변방으로 보내라 하셨으니. 하지만 그때 그녀를 살려 뒀다면 어머니의 상태는 더 안 좋아졌을 게 뻔했다. 그러면 나도 힘들어지고 가문도 시끄러워졌겠지. 가문의 후계자로서 나는 냉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프진 않을 거야. 마시면 아이는 사지 멀쩡하게 살려 줄게. 나도 하나뿐인 동생이 죽길 원하지는 않거든.’
내 말에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약을 마셨다. 하지만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도…… 너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거야. 아니 더 비참하게 당할 거다! 아주 비참하게!’
그러고 보니 소문에 그녀가 마녀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었던가. 하여간 여자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온갖 말을 하고 갔다. 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기에 그 말을 잠자코 들어 줬다. 불쌍한 여자. 하지만 당신이 마녀였다면 그리 쉽게 죽지는 않았겠지.
“안 돼! 더러운 피다! 더러운 피 따위! 오로르에!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는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뜯으셨다. 그 모습에 나는 크리스가 왜 나를 피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필시 어머니의 입김이 들어갔겠지. 나는 그에게 실망을 금하지 못했다. 고작 이런 미친 여자의 입김에 넘어가다니.
“너…….”
내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도 네 아비와 같구나. 너도 네 아비와 같아! 그 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
실제로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기에 무언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나는 크리스가 배신을 한다면 어머니처럼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죽도록 패거나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리지. 그럴 용기도 능력도 없어 미쳤으면서 왜 애먼 나를 붙잡고 이러는지.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
나는 주변 하녀들에게 명했다. 하녀들이 머뭇거리다 어머니를 붙잡았다. 어머니는 악을 쓰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내일 사람을 붙여 어머니를 동부로 모시고 가. 상태만 안 좋아지신다.”
옆에서 집사가 길게 허리를 숙였다. 이곳에 온 날 바로 보내 버렸어야 했는데. 귀찮다고 내버려 뒀더니 사람까지 붙이고. 나는 계속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소파에 앉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런데 왜 계속 그가 떠오르는 걸까?
“크리스…….”
나는 실망스러운 연인 생각을 계속했다. 고작 어머니의 말에 넘어간 당신을 어찌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매정하게 끊어 내야 할까? 아니면 용서를 해야 할까? 응? 어찌해야 할까? 나는 끊임없이 그에게 물었다. 물론 그는 내 앞에 없었으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찾을 사람이 있어.”
망설이던 내 입에서 결국 약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머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내 손짓에 집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대강 연인의 신상에 대해 알려 줬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더니 사라졌다. 어느 책에서 그랬지. 사랑하면 지는 거라고.
“한 번만 용서할 거야.”
그래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줄 거야.
결정을 내리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 * *
이리저리 테이블 위를 나뒹구는 술병과 책들, 화려한 옷을 입은 고급 창녀들, 그녀들에게서 나는 화장품과 향수 냄새, 시가에서 올라오는 하얀 연기,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를 악사와 가수. 공간은 온갖 소음과 냄새로 아수라장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입구를 뒹구는 병을 차 구석으로 보내며 말했다. 깡, 하고 병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동시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갑자기 등장한 나로 인해 당황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레이디 오로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남자가 나를 불렀다. 정말 그 오로르가 맞느냐는 표정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 줬다. 보고도 모르나. 무지한 것.
“맞아요. 멋진 신사분. 아, 제가 이름을 모른다 책망하지 마세요. 수도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동부 뜨내기라 몇몇 지인 외에는 아직 이름을 외우지 못했답니다.”
“아닙니다. 레이디의 명성에 비하면 저는 하찮을 뿐이죠. 전 하버 가문의 루앙입니다.”
“오 명망 높은 하버 백작가의 자제분이셨군요. 진작 알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럼 하버 영식?”
“예?”
“제가 이곳이 처음이라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넵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냥 루앙이라 부르십시오.”
“고마워요. 루앙.”
나는 얼굴이 익은 채 손을 내미는 남자에게 웃어 준 후 손을 올렸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앞다투어 내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누구입니다. 누구입니다. 앞에서 지겨운 인사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루앙. 좀 더 둘러보고 싶은데 안내해 주시겠어요?”
하지만 내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기에 나는 그들을 물리고 자리를 옮겼다. 아침에 집사는 크리스가 요즘 매일같이 이곳에 산다시피 한다는 소식을 물어다 줬다. 귀족가의 사생아, 부호, 자칭 예술가, 고급 창녀들이 모이는 이런 저급한 곳에 머문다니. 나는 연인에 대한 실망감이 한층 커졌다.
“그런데 레이디 오로르가 여긴 어쩐 일로……?”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찾을 사람이라니. 이곳에서 말입니까?”
“네. 제 스승께서 여기 계신다 하셔서요.”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래 너도 안 믿기지? 그런데 나는 어떻겠니. 나도 내가 이런 곳에 올 줄 몰랐으니 입 좀 다물렴.
“스승? 이름을 말씀해 주…….”
“루앙. 고마워요. 찾은 거 같네요.”
나는 옆에서 뭐라 떠들려는 남자를 밀어 냈다. 입구에서 좀 더 들어와 도착한 방은 처음 내가 본 곳보다 더욱 아수라장이었다. 약간 어두운 방은 상체를 거의 벗다시피 한 여자들과 술, 마약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쓰레기들이 소음에 맞춰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해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을 구석에 앉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박수를 치는 꼴이라니. 나는 어이없는 광경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마저 앗아 간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내 연인. 크리스였다.
그는 방 한가운데에서 거의 벗다시피 한 창녀와 춤추고 있었다. 흰색의 싸구려 가발을 뒤집어쓴 창녀는 그의 흰 셔츠에 입술 자국을 남기며 춤을 추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과연 춤인가? 하는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여자는 몸을 최대한 그에게 밀착시켜 그를 더듬고 있었으며 하얀 분을 바른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마주 안은 그는 여자의 가발인지 머리인지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퍽 다정한 연인 같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엎어 버려?’
하지만 화가 안 난다고 성질이 안 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성질대로 할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저 여자 머리채를 잡아 던져 버리고 검으로 사지를 잘라 버릴까? 어차피 저잣거리에 널린 창녀이니 내가 이 자리에서 팔다리를 자르든 목을 베어 버리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나는 일단 성질대로 여자를 처리하자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들을 봤다. 여전히 그들은 다정히 껴안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할까? 연인인 그는? 일단 뺨을 올려붙이고 배에 구멍을 뚫어 줄까? 아니면 감히 나를 농락했으니 있으나 마나 한 그 귀족 신분도 끊어 버려? 저 여자처럼 길바닥이나 기며 살게 해 줄까?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 순간 내 눈에 그의 입 모양이 들어왔다. 엘…… 나의 엘. 그러고 보니 저 여자의 가발.
“다른 걸로.”
“예?”
“못 알아먹나? 음악 바꿔. 기왕이면 지금처럼 늘어지는 것 말고 깔끔하고 격정적인 걸로.”
여긴 왜 이리 한 번에 말을 알아먹는 사람이 없는지. 나는 어물쩍거리며 반문하는 연주자의 악기를 툭툭 쳤다. 약간 거친 내 행동에 작은 현악기를 든 연주자는 허둥거리더니 일단 연주를 멈췄다. 갑작스럽게 질질 끄는 소음이 사라지자 방 안에서 춤을 추던 쌍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이쪽을 봤다. 그 안에는 익히 봐 온 금안도 있었다. 그는 지금에서야 나를 발견했는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은 빠르게 다시 가라앉았다.
“시작해.”
나는 그의 눈을 끝까지 마주 보며 연주자를 재촉했다. 적당히 힘 있는 소리가 방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높은 굽의 구두가 나무 바닥에 부딪치며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가 리듬을 타자 정신 못 차린 몇몇의 남자들이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머저리 같은 것들. 나는 그들을 피해 스텝을 밟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몇 걸음을 남기고 그의 앞에 섰다.
강한 음악이 살짝 속도를 냈다. 길게 이어지지 않고 끊기는 음악에 맞춰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 옆에 붙어 있던 여자가 제 짝을 뺏으려 하는 걸 알았는지 그에게 더욱 붙었다. 풍만한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착 달라붙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도 제법 예뻤다. 하긴 그걸로 빌어먹고 살아야 하니. 하지만 나는 속으로 여자를 비웃었다. 멍청한 것. 저가 대용품인 줄도 모르고. 아니나 다를까. 그가 여자를 밀어 냈다. 세게 밀린 여자가 바닥으로 추하게 넘어졌다.
“웃음으로 먹고사는 것이 그리 눈치가 없어서야.”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여자를 한껏 비웃어 줬다. 발끈한 여자가 뭐라 소리치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허나 나는 여자의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없었다. 내 손을 세게 잡은 손, 빨라진 음악만이 내 시야, 내 귀에 들어왔다.
나는 내 손이 부서져라 세게 잡은 손에 웃음을 흘렸다. 그가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몸이 팽팽한 힘에 이끌려 넓은 가슴팍에 안겼다. 알싸한 술 냄새와 함께 역겨운 여자 냄새가 그의 몸에서 진동을 했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세게 밀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하지만 한 손은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었기에 멀리 가지는 못했다.
탁탁 끊어지는 음악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에게로 갔다 벗어났다를 반복하며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음악이 못내 즐거울 적엔 그의 손을 위로 올려 빙그르 돌기도 했다. 그는 내가 제 품에서 벗어날 때마다 못내 안달 난 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의 금안이 그리 강렬한 색을 띠는 것을 나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 술 때문인지 빨갛게 실핏줄이 터진 흰자 가운데 금빛은 진한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엔 나를 향한 욕망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었다. 너를 원한다. 너를 달라. 소리치는 그의 눈동자에 나는 마음껏 우월감을 즐겼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음악이 절정과 함께 끝을 향했다. 나는 좀 더 빠르게 리듬을 타며 그를 애태웠다. 팔랑거리며 드레스 자락이 사방으로 피었다. 잡아 봐.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봐. 내가 원을 그리며 약을 올리자 참지 못한 그가 다른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번 원을 그렸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스쳤다 멀어졌다. 닿을 듯 말 듯 나를 놓친 그가 발을 멈췄다.
“안 돼. 엘.”
춤을 멈춘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춤을 췄다. 파트너가 가만히 있었지만 뭐 어떠랴. 내가 즐거우면 되는 것을. 내가 그를 쳐다보지 않고 혼자 춤을 추자 그의 눈에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도망치는 나를 보더니 작정한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곧 그에게 허리가 세게 잡혔다.
“너는 나를 벗어날 수 없어.”
그가 말을 함과 동시에 음악이 멈췄다. 그는 어느새 내 몸을 잡아 저에게 붙였다. 하체가 그의 다리에 딱 붙어 한 몸인 것처럼 고정됐다. 나는 가빠진 숨에 상체에 힘을 풀고 최대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위에서 그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보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고?
짝―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날렸다.
“웃기지 마. 내가 당신 옆에 있는 건 내가 원해서야. 그리고 어디서 반말이야!”
힘차게 날린 손에도 그의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내 말에도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뒤로 넘어간 상체가 그의 힘에 의해 올라왔다. 그는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 바르게 세워 주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러기를 잠시, 내가 어느 정도 고른 숨을 내쉬자 그가 무릎을 꿇었다.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나의 왕이시여.”
이번에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 앞에 올려진 손을 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이곳에 찾아왔을 때, 그에게 손을 내밀 때, 그와 춤을 출 때 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용서하겠어요. 대신 벌이 있을 거랍니다.”
나는 오만하게 그의 손을 잡아 줬다.
* * *
“짜증 나.”
나는 그의 위에 앉아 그의 셔츠를 마구잡이로 찢었다. 이리저리 거친 내 손길에 얇은 셔츠는 물론 그의 맨가슴에도 상처가 났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정도 상처는 감수해야 했다.
“어떻게 날 두고 고작 그런 여자랑!”
그의 셔츠에 찍힌 빨간 립스틱 자국에 나는 눈물이 났다. 아까는 화가 안 나더니 이제 와서 왜! 고작, 고작…… 그런 여자랑! 그리 껴안고! 슬프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조금 슬픈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내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자 밑에 깔린 그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치워요.”
그는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닦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싫었다. 에이 이따위 것! 나는 계속해서 셔츠를 조각냈다. 마침내 셔츠가 걸레보다 못한 꼴이 됐다. 나는 엉망이 된 셔츠를 집어 들고 있는 힘껏 던졌다. 차라리 유리면 소리라도 날 텐데 가벼운 천은 그저 벽을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합니다.”
“미안할 짓을 왜 하는 거예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엘.”
“목숨이 아깝다면 없어야 할 거예요. 다시 이러면 그냥 죽여 버릴 테니.”
내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았는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이에요. 오늘은 나 건드리지 마요. 나만 만질 거야.”
나는 미안한 듯 눈을 마주쳐 오는 그를 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왜 이리 쉽게 수긍하는지……. 나는 괜히 트집을 잡으며 입술을 씰룩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의 백금발이 하얀 시트 위에 퍼져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여자만큼이나 하얀 피부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부러워할 만한 얼굴, 찬란한 금안. 그러니 아까 그 여자도 주제를 모르고……. 울컥하고 다시 속에서 뭔가 올라왔다.
“윽…….”
나는 거칠게 손톱으로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 하얀 가슴에 빨간 선이 제대로 모양을 냈다. 흥! 좀 더 아파 보라지. 나는 상체를 숙이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어 내가 낸 상처를 핥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는지 그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걸로 느끼는 거예요?”
그의 아랫도리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한 내가 그를 비웃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바지 안에 넣었다.
“흣…… 엘.”
아니나 다를까 바지 밑 그의 것이 평소보다 커져 있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한 번도 이리 잡아 본 적이 없어 좀 부끄러웠지만 여기서 그걸 티 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가슴 상처를 빨며 손으로 그의 것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 그만…… 그만하십시오.”
“벌이라니깐요.”
내 손길에 당황한 그가 팔을 뻗어 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벌을 핑계로 쉽게 그를 제지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만하라는 거치곤 계속 딱딱해져요. 크리스.”
“엘 그런 말은…… 읏, 어디서 흐읏…… 배운 겁니까.”
“스승님한테요. 저번에 내 가슴 빨면서 그랬잖아요?”
“…….”
“자기가 가르쳐 놓고 까먹은 거예요?”
내 말에 그의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슬쩍 시선을 위로 하니 그는 목덜미가 벌겋게 변해 있었다. 나는 왠지 재미있어졌다.
“기억 안 나요? 혀로 툭툭 치면서 그랬어요.”
“제발…….”
“그리고 나한테 직접 만져 보라고도 했죠.”
“제발…… 그만.”
“그때 나 엄청 당황했는데. 멀쩡하던 사람이 변태인 줄 알았…….”
“그만!”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왜! 자기가 그랬으면서!
나는 그와 사귀면서 몇 번 침대도 함께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밤 생활(?)도 하게 되었는데 밤에 보는 그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낮에는 그리 정중하고 예의 발랐던 그가 밤이 되면 백팔십도 바뀌었다. 침대 기둥에 내 손을 묶어 두고 온갖 애무로 나를 농락한 후 여기가 이렇게 되었다, 저긴 이렇게 되었다 설명을 해 주질 않나. 나 때문에 제 몸이 이리 반응한다 보여 주질 않나……. 하여간 세상없는 변태였다. 그리고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는 그의 몸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하면서 저는 내 몸을 물고 빠는 것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당해 봐야 안다더니…….”
나는 꼼지락거리며 가만있지 못하는 그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억지로 참으려 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빨갛게 달뜬 얼굴. 촉촉한 눈. 살짝 열린 빨간 입술……. 다시 보니 그의 취향을 이해할 법도 싶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바지에 넣은 손도 빼고 무언가 찾자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음, 급한데 이걸로.”
아무리 찾아도 찾는 게 보이질 않자 나는 하는 수 없이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리본이 손에 들어왔다.
“엘……?”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의 양손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저도 배운 대로 해 볼래요.”
“잠깐! 잠깐만요, 엘!”
내가 리본을 팽팽하게 당긴 채 그의 손으로 가져가자 그가 급히 나를 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의 손을 모으고 리본으로 돌돌 감기 시작했다. 노란색의 리본이 그와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경악스럽게 보던 그가 작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하체를 지그시 그의 아랫도리에 문질러 그의 반항을 차단했다.
마침내 자극에 얌전해진 그가 순순히 리본에 묶였다. 앙증맞게 묶인 노란 리본은 완벽했다. 나는 내가 만든 걸작에 한가득 웃음을 지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뺨을 비비며 그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칭찬해 주세요. 스승님.”
* * *
“흐응…… 그만, 흐읏!”
“소용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세요.”
나는 밑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내가 그를 벌주고 있었는데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여기 야합니다.”
다리 사이가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시원할 법도 하건만 그로 인해 오히려 뜨거웠다. 나는 부끄럽게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으응…… 풀어 줘요. 흣! 약, 약속에 어긋나.”
“새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흐응.”
아 정말 내가 왜 그랬는지. 그를 괴롭히던 나는 심심해져 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팔이 묶인 채 이대로 밑에서 나를 먼저 보내면 리본을 풀어 주고 내가 대신 묶이기로. 팔이 묶인 채 깔려 있는데 어쩌겠느냐는 자신만만한 생각이 있었기에 했던 제안이었다. 그런데…….
“약속을 지켜야지요. 제자님.”
“으응…… 응, 잠깐.”
뭔가 축축한 것이 밑을 핥는 게 느껴졌다. 할짝이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생경한 감촉에 나는 다리 사이를 파고든 머리를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생각뿐…… 내 손은 그와 보냈던 여느 밤처럼 위로 묶여 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말…… 흐읏.”
답답한 손 때문에 내가 다리를 움직이자 탄탄한 손이 내 다리를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정점을 물컹한 것이 톡톡 하고 건드렸다. 참을 수 없는 자극에 나는 허리를 비틀며 다시 한번 신음을 뱉었다.
“좋습니까?”
내 신음을 들으며 그가 물어 왔다. 답할 수 있겠냐고요! 변태……. 나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더운 숨을 삼켰다. 오돌토돌한 돌기가 이상하리만치 잘 느껴졌다. 도대체 이 남자의 취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답.”
“흐윽…… 싫, 응…….”
그가 재촉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이런 자세로 거길 보여 주고 혀로 농락당하면서 좋다고 말하라고?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다리에 힘을 주며 고개만 젓자 밑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를 승리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아, 뭐! 뭐 하는!”
짧은 승리감도 잠시 그의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부드러운 것이 허벅지를 비비더니 축축한 것이 안으로 들어왔다. 뱀같이 소름 끼치는 감각에 나는 당황해 고개를 내렸다. 눈앞에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자극적인 장면이 있었다. 그의 머리가…… 빛나는 백금발이 아까보다 더 가까이 내 밑에 닿아 있었다. 츕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방을 울렸다.
“대답.”
색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나를 재촉했다.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면서도 그의 혀는 내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입구를 휘젓고 있었다. 저리 혀를 움직이면서 어떻게 말하지? 순간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깐 그가 손을 허벅지로 올려 힘을 주자 나는 머릿속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흐윽…… 앙, 그만…… 그만.”
더 벌어진 입구로 미끈한 것이 더운 숨과 함께 들어찼다 나갔다. 나는 하얗게 질리는 시야를 바로 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밑에서 계속되는 자극은 자꾸만 시야를 마비시켰다. 허리가 쾌감에 못 이겨 들썩거렸다. 참을 수가…… 참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쾌감으로 온몸을 덜덜 떨어 대며 입을 열었다.
“좋, 좋아, 으응……. 좋아요, 아…….”
수치스러운 답을 끝내자 밑에서 그가 잘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항복시킨 것이 그리 즐거운지 그가 웃으며 머리를 들었다. 빛나는 머리카락 사이 하얀 얼굴에 떠오른 금안이 야살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얄미워! 얄미워 죽겠어! 나는 속으로 외치며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손으로 제 입술을 닦았다. 곧 축축하게 젖은 빨간 입술이 열렸다.
“잘했어요. 제자님.”
* * *
크리스와 한바탕한 그날 나는 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내 갑작스러운 결정에 그는 살짝 당황한 듯싶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길로 곧장 동부로 향했다.
“결혼하려고요. 상대는 누구인지 아실 거라 생각해요.”
내 말에 어머니는 혼절하셨고 아버지는 딱 한마디 하셨다.
“내 핏줄이 너뿐인 줄 아느냐.”
아버지의 말에 나는 당장 동부 끝으로 달려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짜디짠 땅끝, 그곳에는 태어난 해를 제외하고 제대로 본 적 없는 이복 남동생이 있었다. 나는 떠는 동생을 보고 주저 없이 검을 뽑았다.
“누, 누님.”
아직 어린 아이는 의외로 영리했다. 아이는 저와 같은 머리색을 보고 내가 제 누이인 걸 단박에 알아챘다.
“이리 보는 건 처음이지?”
“누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고작 검 하나를 뽑아 들었건만 아이는 내 발을 잡고 빌기 시작했다.
“제법 잘 컸구나. 칭찬해야겠어.”
아이가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이 가득한 얼굴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어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는 있어도 머리 돌아가는 건 별로인가 보군. 영리하다는 말 취소.
“엎드려야 할 상대를 잘 알고 있단 뜻이란다. 동생아.”
“예?”
“나에게 누이라 부르며 구걸하는 걸 보니 똑똑하다고. 칭찬이야.”
아이는 그제야 내 말을 알아먹었는지 연신 감사합니다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아이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무릎을 굽혀 나와 같은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줬다. 불쌍한 것.
“널 살려 줄 수는 없단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지금보다 더 죽은 듯이 있을게요. 여기서 나가지 않을게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누군지 몰라도 아이를 가르친 사람이 아이에게 꽤 겁을 많이 준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에 저리 말하다니. 그러고 보니 아이가 5살? 아니 6살인가. 이 아이의 어미에게 약을 준 게 내 나이 열다섯일 때니……. 동생의 나이가 헷갈린 난 잠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누님.”
그 와중에도 동생은 계속 살려 달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한 것이 아이가 불쌍했다. 반이라도 피를 나눈 동생이라 그런 것인가. 나는 아이를 일으켜 눈물을 닦아 줬다.
“살고 싶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어미와 똑같은 붉은 눈이 나를 보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래, 아이의 어미는 이 어린 목숨을 담보로 자진했는데……. 변덕이긴 하지만 나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선택하렴. 팔다리가 중하니 아님 머리가 중하니?”
아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 걱정 말렴. 머리를 베어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야. 그저 살짝 손보겠다는 말이란다.”
나는 겁에 질린 아이를 토닥이며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말했다.
* * *
아버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잔인한 것! 끝까지 그 불쌍한 아이를! 그 아이를!”
그는 말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나에게 손가락질했다.
“전 살려 줄 생각이었어요.”
“살려 줄 생각? 네 검에 그 어린것의 목이 날아갔다는데! 살려 줄 생각!”
“믿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죠. 그러게 애초에 왜 지저분한 것을 들여서는……. 아니 아이라도 안 만드셨으면 이런 일 없잖아요? 아버지 때문에 제가 얼마나 귀찮은 일이 많았는지 아세요? 어머니는 매일 저를 붙들고…….”
“닥쳐라! 제 동생을 죽이고 왔으면서 귀찮은 일?”
나는 분노를 주체 못 해 책상을 내리치는 아버지를 봤다. 그는 평소의 냉정함 따위 버린 것 같았다. 고작 변방에 방치해 둔 아이 하나 때문에……. 그 한심한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웃기지 않으세요?”
“무슨! 뭐라는 거냐!”
“아니 그렇잖아요. 그리 아끼셨으면 제가 손을 대기 전 조치를 취하시든가, 아니면 저를 막으시든가.”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니면.”
나는 웃음을 멈췄다. 내 아버지. 멍청한 아버지. 어리석은 아버지.
“저한테 그런 소리를 하지 마셨어야죠. 내 핏줄이 너뿐인 줄 아느냐라니. 그런 소리를 듣고 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고작 뻐금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 나는 분노로 벌게진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힘이라도 키우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든가. 고작 스물 된 딸자식한테 밀려 수도도 못 올라오시면서……. 아니면 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못 빼앗아 가만히 있는 줄 아셨어요?”
“이!”
“그냥 귀찮아서 놓아둔 거랍니다. 동부 거기 있어 봤자 호수 말고 볼 것 있나요?”
“이, 고얀!”
“그리고 아버지 마음 아프실까 봐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 했는데.”
“고얀 것!”
“그 아이. 아버지 때문에 죽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말을 꺼내셔서요. 사실 저는 배다른 동생 따위 까먹고 있었거든요. 상대도 안 되는 어린것 생각해서 뭐 하나요?”
“괴물 같은 것!”
내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아버지가 고함을 지르며 온갖 물건을 던졌다. 책, 재떨이부터 시작해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이 죄다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재빨리 몸을 옮겨 물건들을 피했다. 나를 맞히지 못한 물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네가…… 네가 사람이냐?”
물건이 나를 맞히지 못하고 떨어지자 아버지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주름진 손 사이로 웬 액체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 여자가 죽었을 때도 그러셨지.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불쌍한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위로해야 했다.
“안 믿으시겠지만 저는 정말 그 아이를 살려 주려 했어요.”
“…….”
“그런데 그 아이 제 생각보다 우리 가문 피를 많이 타고났는지…….”
“…….”
나는 잠시 나를 마주 보던 동생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그리 살 바에는 죽겠다 하더군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아버지가 얼굴을 보였다. 그의 눈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도 못 하셨겠지. 나도 그 어린것이 그런 말을 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으니. 게다가 동생의 말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막내 삼촌 생각나지 않으세요?”
말을 하며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 항상 해 주시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막내는 비루한 목숨 말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나는 그게 자랑스러워 그 아이만큼은 비석을 세워 줬지. 아직도 성채 뒤편에 남아 있을 게야.’
아버지는 다섯 형제를 베시고 가주 자리를 차지한 분이셨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우셨는지 어린 나에게 항상 못이 박혀라 그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막내 삼촌 나이도 다섯이라 하셨던가요?”
“…….”
“그 아이가 그리 말하니 막내 삼촌이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저도 동생의 비석을 세워 줄까 해요. 막내 삼촌 옆에요.”
“…….”
아버지는 진정이 되셨는지 아무 말이 없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위로되셨구나 생각하며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으며 마지막 위로를 남겼다.
“자랑스러우시겠어요.”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나는 분명 아버지가 진정하셨다 생각했건만……. 아버지는 그날 밤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서재에서 목을 매셨다.
* * *
“미안해요. 결혼을 미뤄야 할 거 같아요.”
“결혼은 천천히 생각하면 됩니다.”
“흥! 너무한 거 아니에요?”
“무슨 말입니까?”
“아니, 결혼이 미뤄졌다는데 그리 태평하다니! 혹 나랑 결혼하기 싫어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의 엘.”
그는 토라진 내 뒤로 다가와 팔로 의자와 함께 내 몸을 감쌌다.
“……싫으면 언제든 이야기해요.”
아늑한 품에 나는 눈을 감으며 살포시 몸을 뒤로 했다. 그는 내가 눈을 감자 손을 올려 내 눈가를 쓰다듬었다.
“힘들지 않습니까?”
“뭐가요?”
“아버님 일 말입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답답했다. 아버지는 왜 스스로 목숨을 거두셨을까?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후 나는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뇨. 단지…… 마음이 불편해요.”
아버지와 나는 친밀하지 않았다. 주변 지인들은 우리 부녀를 보고 닮았다, 똑같다, 하곤 했다. 어머니도 나와 아버지가 똑같이 매정하다 항상 말씀하셨지만, 글쎄. 막상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내가 아버지와 닮았다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리 생각하셨을 테지. 이제는 물을 수 없었지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슬프지는 않아요. 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여하튼 슬프지는 않아요. 다만 그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좀 답답해요.”
“엘…….”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보려 고개를 젖혔다. 의자 뒤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가 흐리게 보이지? 얼굴에 닿는 뜨거운 감촉에 나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막았다. 그러고는 제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얼굴에 흐르던 뜨거운 것이 사라졌다. 손이 막힌 내가 흐려진 눈을 바로 하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정확히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엘이 이해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리송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그의 손길은 내게 편안함을 줬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얼굴 위를 그리는 손길을 느꼈다. 위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어요. 슬프지 않는데 왜 우시는 겁니까. 엘. 그대가 울면 내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그의 손길은 알아듣기 쉬웠다. 그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저 울지 말라 달래 주는 손길에 나는 그저 몸을 맡겼다. 아려 오던 눈가에 온기가 차며 눈이 시원해졌다.
“나 좀 잘래요. 침대로 데려가 줘요.”
피곤해진 나는 그에게 투정을 부리며 손을 뻗었다. 뒤에서 나를 매만지던 그가 앞으로 오더니 나를 쉽게 안아 들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비비적거리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곧 눈이 서서히 감겨 왔다. 완전히 눈이 감기기 직전 위에서 뭐라 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옳으니. 나의 엘.”
앞말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나의 엘이라는 단어는 내 귀에 정확히 박혔다.
나의 엘. 나의 엘.
그가 말하는 내 이름은 언제나처럼 달콤했다.
* * *
나는 아버지가 죽고 1년 후 크리스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주변 모두가 반대한 것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행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부부는 없다던가. 내 결혼 생활에도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말하기 싫어요.”
“해야 합니다.”
“하아, 몇 번 말했잖아요! 그건 잘못하면 반역이에요.”
“정말 그리 생각합니까?”
“물론 어느 정도 당신 말이 옳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천천히 사람들의 의견을 맞춰 나가야 할 문제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은 정말이지 그만 말하고 싶어요. 크리스.”
“미안합니다. 엘. 하지만 난…….”
“계속 이야기하겠다고요? 그럼 우리가 결혼하기 전을 생각해 봐요. 그때 당신의 주장은 음지에서나 이야기하는 것이었죠.”
나는 올라오는 짜증에 그의 말을 가로채고는 가시를 달았다. 그만하란 신호였다. 하지만 그는 내 날카로운 말에도 차분히 대화를 이어 갔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니 말하는 거예요. 이대로 가면 툴란은 알아서 변해요. 당신이 끌고 나갈 필요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제발 그만해요! 지겨워!”
“서둘러도 늦습니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르온가에…… 지금의 황제에게 기회가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거의 확정적으로 그리될 겁니다.”
“그래서요? 뒤발은 나쁘지 않은 황제예요. 또 르온가는 네 가문 중 가장 번성했죠. 그리된다 해도 문제 될 게 있어요?”
“……그는 안 됩니다.”
또 똑같은 대화의 반복이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식히기 위해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런 나를 말리려 그가 내 팔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밀치고 술병을 입에 갖다 댔다. 목으로 넘어가는 담색 술은 숨쉬기 힘들 만큼 독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계속 술을 마셨다. 옆에서 그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이 나올지 아는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왜요? 또 내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 말하려고요?”
“…….”
도대체 이게 몇 년째인지! 이 짜증 나는 대화는 5년도 더 되었다.
* * *
시작은 결혼 직후였다.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낡은 책을 하나 가져왔다. 결혼 전 그를 스승이라 부를 적 자주 본 책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에도 이 책이 있었으니 우리 부부에게 꽤 중요한 책이기도 했다.
‘이건 왜요? 다시 스승님이라 불리고 싶어요? 크리스?’
‘이제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응? 무슨 말이에요?’
‘지금부터 실천해도 20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오로르는 그리 강하지 못하니.’
나는 처음 그가 그리 말할 때 웃어넘기려 했다. 농담도 잘한다 웃으며. 그러나 책을 내려놓으며 나를 보는 금안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표정에 나는 얼굴을 굳히며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죠?’
‘아닙니다. 엘.’
나는 당시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책의 첫 페이지를 펴 놓고 나를 보는 그 눈!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문장의 끝은…….
「그리하여 툴란은 강력한 일인의 군주가 필요하다.」
나는 억지로 책만을 봤다. 도저히 얼굴을 들어 그를 볼 수 없었다. 왜냐면…… 왜냐하면…….
‘이 나라의 지배 체계는 너무 번잡합니다.’
‘…….’
‘어느 나라보다 공정한 역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가장 진화한 체계?’
‘…….’
‘가장 진화한 개소리입니다. 그저 욕심에 못 이겨 서로 돌아가면서 뼈다귀를 핥는 자들이 내는!’
‘…….’
‘그들이 나라를 얼마나 갉아먹는지 아십니까? 온갖 가면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린 그들의 위선 때문에! 그들의 욕심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이대로라면 아주 옛날 그 시절처럼 나라는 쪼개지고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국민들은 죽어나고 이 땅은 온갖 병과 재해에 시달리겠죠. 아니 이미 전조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
‘그러니 한 명의 지배자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청소하고 몰아내 버릴! 이 나라를 영광으로 올려놓을 강력하고도 명예로운 황제를 툴란은 필요로 합니다.’
‘…….’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자는.’
‘…….’
‘단 한 명입니다.’
‘…….’
‘나의 엘.’
당시 나를 보는 금안이 기괴하리만큼 광기에 차 있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