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절망과 희망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하얀 바탕에 세밀하게 세공되어 있는 장식과 그 가운데 그려져 있는 그림은 항상 봐 오던 것이었다.
엘리자벳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하는 생각에 옆을 보자 익숙하지만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제인!”
눈물 젖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은 제인이었다.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 그 밑에 자리한 둥근 얼굴, 상냥한 검은색 눈동자는 분명 제인이 맞았다. 제인은 엘리자벳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약간 물기 어린 눈동자는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전하.”
제인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엘리자벳은 오랜만에 느껴 보는 손길에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이마 위로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제인은 그녀가 어릴 적에도 종종 이렇게 이마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엘리자벳은 편안한 느낌에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제인 또한 아무 말 없이 손만 움직일 뿐이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제인은 유모였던 사라와 함께 엘리자벳 주변에 가장 오래 머문 사람이었다. 사라가 자식을 따라 동부로 건너간 이후, 제인은 엘리자벳의 수석 시녀이자 황녀궁 시녀장이 되어 그녀를 돌봐 왔다.
하지만 제인은 페루스로 인해 수도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났다. 다행히 튤린 자작 부인을 매개로 종종 근황이 적힌 편지를 받았지만 최근에는 그마저 끊겨 내심 걱정을 하고 있던 차였다.
“형부의 장례식을 핑계로 잠시 수도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어요.”
엘리자벳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의 형부는 작위는 없었지만 수도에서 나름 인망 있는 인사였다.
가까운 데다 유명한 인척의 장례식이니 페루스도 어찌하지 못했으리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엘리자벳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당분간 제인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당분간 궁에 머물러. 방을 비워 놓으라 이를게. 전에 쓰던 방은 못 쓰겠지만 남은 방이 많을 거야.”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전하. 들어올 때 해가 지기 전에 나가라는 명을 받았거든요.”
“누구한테?”
제인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뻔한 일이었다. 페루스나 타티카나 그도 아니면 원로원이나 그중 하나겠지.
그들은 모두 황녀인 그녀보다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친한 지인 하나 궁에 머무르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서글펐다. 엘리자벳이 고개를 푹 숙이자 제인이 다시 눈물을 훔쳤다.
“혹시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알아?”
“제가 궁에 들어온 후로도 종일을 누워 계셨어요. 궁의 말로는 중간에 잠시 일어난 것을 제외하면 꼬박 3일을 누워 계셨대요.”
그래서 몸에 힘이 없었구나. 엘리자벳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해했다.
“일단 편히 누워 계세요. 곧 약을 가지고 온다 했으니.”
물기 어린 제인의 눈에 엘리자벳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인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으…… 제인 더워.”
“가만히 계세요. 몸을 덥게 해야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죠.”
엘리자벳이 이불을 내리며 어리광을 피웠다. 그 모습에 제인이 살풋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본 황녀는 전보다 더 말라 있었다. 게다가 얼굴색은 어찌나 창백한지. 시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시체로 착각할 뻔했다.
“얼마나 괴로우시기에…….”
황녀를 보던 제인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엘리자벳은 제인의 눈물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를 오래 봤지만 제인이 우는 일은 드물었다.
아주 어릴 적 동부에 살 때야 제인도 초짜 시녀였으니 혼도 나고 눈물도 많이 보였지만 황궁으로 온 뒤에는 그녀가 우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난 괜찮아. 제인 울지 마.”
제인은 말라비틀어진 팔로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황녀를 보고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그러고는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사라 님의 편지예요. 지금 읽고 제가 다시…….”
“손님은 그만! 황녀님은 나랑 놀아야 해.”
갑자기 어디선가 짝짝하는 박수 소리가 났다. 제인은 재빠르게 편지를 다시 품 안으로 가져갔다. 침실 문가에 타티카가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제인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타티카는 그녀의 인사를 손짓으로 받고는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 옆까지 온 그는 엘리자벳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예의 없는 손짓에 엘리자벳이 눈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도 타티카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선객을 쫓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야 하나? 나가 봐.”
“황녀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제가 옆에서 돌봐…….”
“필요 없으니 나가 봐. 내가 황녀님의 전담 궁의라고.”
“공작……. 나는 제인이 옆에 있었으면 해요.”
“나가.”
제인이 머뭇거리며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타티카를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도 평소에 비해 거친 감이 있었다.
만찬 자리에서 보았던 시종이 생각났다. 엘리자벳은 제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버텨 봤자 제인은 나가게 될 것이다. 어차피 나갈 거라면 제인은 안전해야 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전하.”
제인이 천천히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불안한지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문 언저리에서 다시 고개를 돌린 제인의 눈에 황녀와 공작의 모습이 잡혔다. 공작은 무어라 속삭이더니 누워 있는 엘리자벳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제인은 그 민망한 모습에 고개를 황급히 돌리고는 방을 나왔다. 그러나 닫힌 문 너머 엘리자벳이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허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도 못 전해 드리고.’
품 안에서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동부에 있는 사라가 보낸 편지에는 황녀가 꼭 봐야 할 내용이 가득했다. 제인은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다음에 올 적에는 어떻게든 기회를 엿봐야 했다.
* * *
‘……몸이 안 좋은데.’
축축한 느낌과 함께 불쾌한 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자극했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귀를 핥고 있는 타티카를 지금 당장이라도 밀치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타티카를 감싼 분위기는 뭔가 위험했다. 또 그런 미친 짓을 할 참인가. 저절로 그의 주위로 시선이 갔다. 허나 다행히 그녀가 찾는 검은 주머니는 없었다.
돌아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확인한 타티카가 혀를 뗐다. 축축한 것은 떨어져 나갔건만 기분은 계속해서 바닥이었다.
“감격스러운 재회는 즐거웠어?”
타티카가 목으로 입을 옮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얀 목에는 소름이 잔뜩 올라 있었다. 그의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 차가운 피부 밑으로 엘리자벳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는 이대로 목을 깨물까 하다 마음을 바꿔 혀를 꺼내 들었다. 할짝이는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떨, 떨어지…… 읏.”
견딜 수 없어진 엘리자벳이 팔을 올려 타티카를 밀어 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밀어 내는 손을 맞잡고는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입술을 더 밑으로 떨어뜨렸다.
부드러운 피부 밑으로 딱딱한 쇄골이 그의 입에서 놀아났다. 그가 입에 힘을 줘 쇄골을 빨아 당겼다. 쯔읍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자국을 보다 자세를 바꿨다. 침대가 출렁거리며 그를 받았다.
“지금은 몸이 안 좋으니, 제발…….”
“몸이 안 좋으면 가만히 있어. 황녀님.”
엘리자벳은 타티카의 행동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 잡힌 손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타티카는 드러난 뼈를 콱 물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쇄골의 감촉이 좋았다. 이 밑으로 내려가면 부드러운 언덕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밑으로 좀 더 내려가면 쿵쿵 뛰는, 생명이 시작된 지점이 있겠지.
엘리자벳이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했다. 그는 무릎을 내리고 다리로 그녀의 몸부림을 막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힘들어요……. 힘들단 말이에요. 그만해요. 제발.”
“나도 몰라. 그러니깐 가만히 좀 있어 봐. 가만히 있는 건 안 힘들잖아?”
타티카는 자신도 왜 이러는지 잘 몰랐다. 약 때문인가? 아니면 그 쓰레기들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그저 욕구 불만인가? 그때 문득 쓰레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즐기다 지겨워지시면 저희도 맛 좀 보여 주시죠. 공작님.’
키득거리며 그에게 말을 내뱉은 이는 그가 참여하는 모임의 쓰레기들 중 하나였다. 모임을 생각하자 반듯한 그의 이마가 구겨졌다.
* * *
타티카가 자주 참여하는 ‘모임’은 돈깨나 있다는 귀족들이 모여 놀이를 하는 곳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승마나 카드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불법적인 놀이를 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하는, 아니 알아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모임의 주목적은 쾌락으로 이곳에서는 항상 광란의 파티가 열리고는 했다. 술과 마약, 창녀들과의 섹스는 기본이었고 즐거움을 위해 윤간이나 강간 심지어 살인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쓰레기장을 타티카도 주인의 자격으로 자주 이용했다.
원래 이번 주 그는 이곳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황녀라는 최고의 놀잇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와의 놀이로 하루 만에 앓아누워 버렸고 그는 지루해졌다.
지루했던 그는 집에 있는 장난감들과 모임 중 고민을 하다 모임이 열리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한 모임은 언제나와 같이 쓰레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방문한 날 메인은 한 귀족 영애였는데 아버지의 빛으로 모임에 팔려 온 모양이었다.
청순한 얼굴이 매력적인 아가씨는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발가벗겨져 단상 위에 경매품으로 올라가 있었다.
처음에 타티카는 경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자가 벗겨 낸 안대 뒤 연한 녹색 눈을 본 순간 그는 마음을 바꿔 경매에 참여했다.
결국 불쌍한 영애는 높은 금액으로 그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받아 본 상품은 그를 충족시키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닮았다고 생각한 눈도 가까이서 보니 차이가 많아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상품을 옆의 쓰레기들에게 넘기고는 약을 하기 시작했다.
가여운 여자는 사교계에서는 점잖았을 사내들에게 끌려갔다. 울면서 살려 달라는 외침이 그의 귀에 닿았지만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한참을 앉아 약을 빨고 있는 그의 옆에 누군가 앉았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쓰레기는 그에게 친한 척 대화를 이어 갔다. 쫓아내는 것도 귀찮았던 그는 그저 듣는 척 가만히 약만 했다. 그가 쫓아내지 않자 사내는 신이 나 다른 사내들까지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타티카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쓰레기들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참 사람은 한결같다는 생각을 하며 약을 맛있게 빨고 있는데 사내들이 갑자기 그를 쳐다보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한참이나 눈빛을 교환하던 중 한 사내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공작님이 황녀궁에 드나드신다는데 사실입니까?”
타티카는 약으로 이지러지는 정신 속에서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약으로 인한 즐거움이 날아갔다.
‘어떤 놈이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보랏빛 눈이 붉은 조명 아래에서 가늘어졌다. 하지만 남자는 타티카의 심기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엘리자벳의 얼굴과 몸에 관한 천박한 말들이었다. 그녀를 두고 더러운 농담이 이어지자 주변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타티카는 이상하게 살심을 느꼈다. 저런 말이야 엘리자벳 같은 약자에게 당연하다 생각했음에도 그랬다.
올라오는 살기를 감추기 위해 그는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눈앞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데도 옆에서 떠드는 쓰레기들의 말은 더욱 또렷하게 그의 귀에 박혔다. 한참을 떠드는 와중 처음 입을 연 사내가 그를 보며 말을 던졌다.
“즐기다 지겨워지시면 저희도 맛 좀 보여 주시죠. 공작님.”
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머리로 재떨이가 날아들었다. 돌로 만들어진 재떨이는 사내의 이마를 깨고 바닥을 굴렀다. 타티카의 주변으로 정적이 앉았다.
“시끄러워. 꺼져.”
이곳에 모여들었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람들이 흩어졌다. 타티카는 조용해진 주변에 소파에 드러누웠다. 눈 위로 붉은 등이 아프게 빛났다. 짜증이 났다. 이렇게 짜증이 늘다니, 욕구 불만이 쌓인 모양이었다.
약으로 충혈된 그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일으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교성이 들렸다. 아까 그가 넘긴 여자가 여러 사내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 당했는지 몸 이곳저곳에는 뿌연 액체가 묻어 있었다. 순간 여자의 녹색 눈이 그와 시선을 맞춰 왔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는 그에게 눈으로 살려 달라 말하고 있었다.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눈이었다.
‘……제법 꼴리는데.’
약 때문인지 아까와 다르게 여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가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여자의 눈이 희망으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멍청한 여자였다. 저를 넘긴 남자에게 기대라니. 타티카는 피식 웃으며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오는 그를 보고 주변의 사내들이 길을 터 줬다.
“살, 살려…… 살려 주세요.”
타티카는 애원을 무시하며 여자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었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여자의 머리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는 여자의 머리를 고정시키고는 버클을 내렸다. 그 모습에 여자의 눈이 절망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탁한 눈동자를 보며 며칠 전의 엘리자벳을 떠올렸다.
꼭 저런 눈이었다. 절망과 체념만 가득했던 녹색 눈을 떠올리자 그의 것이 더욱 반응했다.
그가 여자의 입에 그의 것을 물렸다. 내일은 꼭 황녀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쾌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주변 남자들도 다시 여자에게로 손을 뻗쳤다.
붉은 등 밑에서 즐기는 그와 여러 약쟁이들. 모임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 * *
타티카는 바스락거리는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품 안에 들어오는 작은 몸뚱이가 이불 밑에서 가는 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꼼짝도 못 하는 주제에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 버둥대는 꼴이라니. 그의 황녀님은 1년 동안 배운 게 없는 모양이었다.
“항상 이래 왔는데, 왜? 나랑 놀기 싫어?”
타티카는 점점 불쾌해지는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일부러 밝게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힘들어서 그래요.”
“어차피 거부도 못 하잖아? 입이라도 덜 움직여야 덜 힘들 거야.”
그는 한껏 비꼬며 엘리자벳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얇은 잠옷이 그의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엘리자벳 특유의 냄새가 잔뜩 묻어났다.
그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시선만을 위로 올렸다. 아까 물고 빨았던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새처럼 가늘고 긴 목이, 또 그 위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턱선이 보였다.
‘어쩐지 야한걸.’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문뜩 다시 엘리자벳의 눈이 보고 싶었다.
“다르네.”
그는 엘리자벳의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제 모임에서 자신이 가지고 논 여자와는 확연히 다른 색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보다 더 연한 녹색의 페리도트색을 띠고 있었다. 그가 손을 풀고는 홀린 듯이 엘리자벳의 눈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고는 눈가에서 피아노를 치듯 톡톡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가를 울리는 작은 자극에 엘리자벳이 눈을 깜박였다.
“황녀님. 황녀님. 사랑하는 황녀님.”
그는 아이를 어르듯 손가락 박자에 맞춰 그녀를 불렀다. 아주 예전 어미가 해 주던 애정의 표현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사랑 표현이, 느낌이 좋았다. 부질없는 것임을 안 지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해요?’
어린 자식의 물음에 그 남자는 뭐라 대답했더라. 분명 몇 번이나 묻고 답을 들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혼자 생존하며 사랑에 대해 배웠다. 쓰레기장을 뒹굴면서, 제 손에 목이 그인 스승 밑에서, 늙은 마녀를 보며. 그는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입으로 엘리자벳이 입고 있던 침의의 리본을 풀었다. 소리도 없이 매듭이 풀리며 하얀 가슴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혀가 깊은 골을 핥고 위로 지나갔다. 까슬한 돌기에 닿는 감촉은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엘리자벳은 이제 힘을 빼고 있었다. 포기한 모양인지 깨진 구슬처럼 빛을 잃은 눈동자는 멍하니 천장만을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타티카는 다시 불쾌해졌다. 분명 바라는 모습인데 오늘은 왠지 거슬렸다.
그가 바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바스락거리며 접힌 종이의 질감이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종이에는 그가 술에 타 먹는 마약이 가루 형태로 있었다. 워낙 독한 데다 후유증이 남는 물건이었기에 그 같은 특이 체질이 아니고서는 위험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환자를 괴롭힐 순 없지.”
하지만 의외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타티카는 후유증을 앓다 죽을지도 모르는 엘리자벳을 생각하며 약을 도로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엘리자벳이 안도하는 와중에도 의아한 눈을 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켠 타티카는 창가에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하다 만 애무에 그의 아랫도리가 부풀어 있었다.
“대신! 봐 주기는 해야 해 황녀님.”
상상도 못 한 그의 말에 엘리자벳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티카는 엘리자벳의 얼굴과 몸을 훑으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밖으로 튀어나온 타티카의 물건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역겨웠다.
“눈 돌리면 다시 할 거야. 그 예쁜 얼굴에 몇 번이고 싸지르는 게 싫다면 여기를 봐.”
타티카는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협박했다. 침대에 앉은 엘리자벳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기 시작했다.
“흐응. 정말이야. 그렇게 할까?”
그가 손을 떼지 않은 채 소파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겁을 먹은 엘리자벳이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다.
사방으로 떨리는 눈동자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뭐……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니깐.’
방 안에서 곧 끈적한 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타티카가 손을 움직이며 신음을 토해 낼 때면 침대 위 엘리자벳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수치심 가득한 실루엣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러나 떠는 와중에도 엘리자벳은 타티카가 정말 말대로 할까 봐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타티카는 그 모습에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엘리자벳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느낌이라 몸을 섞을 때와는 다른 쾌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한참 만에 그가 녹색 눈을 바라보며 하얀 체액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자벳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돌렸다.
타티카는 키득거리며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주변에는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더운 숨이 가득했다.
“황녀님이 하는 걸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해 볼래?”
엘리자벳은 말꼬리를 흐리며 끈적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런 괴로움은 또 처음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비명이 가슴을 울렸다. 비참함에 떠는 그녀에게로 타티카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돌아가 있는 그녀의 고개를 잡아챘다.
“응? 해 볼 테야?”
엘리자벳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볼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흐음. 아직은 싫은 모양이네. 뭐 기회는 많으니깐. 우선 약을 가져와야겠네. 빨리 일어나야 나랑 놀지.”
끔찍한 말과 함께 타티카가 소리 나게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징글징글한 감촉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그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엘리자벳은 무릎 위로 고개를 묻었다. 가느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등 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렸다.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 온통 하얀 벽, 여기저기 새겨져 있는 성스러운 조각상. 페루스는 툴란에서 가장 신성한 곳을 걷고 있었다.
찬란한 그의 금발에 신전 안 여사제들이 그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는 시선에도 앞만을 보고 걸었다. 마침내 긴 길을 지나 넓은 제단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어린 사제가 그를 보고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페루스는 어린 사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제는 넓은 제단 뒤 작은 문으로 그를 안내했다.
문 뒤에는 몇 번 본 적 있는 복도가 있었다. 복도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하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린 사제는 그의 앞에 서 아무 말 없이 복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그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몇 번 통로를 지나자 점점 길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많은 이가 들어오지 못하는 길은 누군가를 보호하기에는 좋은 구조였다. 마침내 사제가 어느 화려한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몇 초의 정적 후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열기 힘들 두꺼운 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부드러이 열렸다. 사제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페루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 페루스. 신의 피조물이자 내 친우여.”
밝은 목소리가 경쾌하게 방 안을 울렸다. 방은 문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안도 제단이나 신전 홀에 비하면 초라했다. 그러나 방 한가운데 의자만큼은 화려하기 그지없어 순백의 존재감을 가감 없이 뽐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루스는 의자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있던 사내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그래 오랜만이야. 동부로 갔다더니 금세 왔네? 거기 앉아.”
페루스는 눈앞의 사내를 조용히 응시하며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사내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보기 힘든 보랏빛 머리카락은 발끝까지 내려왔고 붉은 눈은 루비처럼 요요했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지?”
페루스가 말이 없자 사내가 먼저 물어 왔다.
“서약서를 하나 더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힘들겠는데. 서약서는 그렇게 함부로 남발하는 것이 아니야. 애초에 몇 장 없기도 하고…….”
사내는 페루스를 보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서약서라니, 저놈은 그걸 시중에 굴러다니는 종잇조각으로 아는 것인가.
“원하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내를 보고도 페루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만인의 아래에 있는 내가 더 필요할 것이 있을까?”
사내가 오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는 오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인의 위에 있는 자. 황제조차도 한낱 범인 취급 하는 사내는 ‘내려온 자’였다.
툴란의 사람들은 마법이니 연금술이니 하는 것들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눈으로 본 적도 없었거니와 그보다 가까운 기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툴란은 법령으로 자유 종교를 명시하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툴란인은 아슬란교를 믿었다. 그리고 믿음의 중심에는 ‘내려온 자’라는 아슬란교의 상징이 있었다.
내려온 자들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에게 기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신성력으로 표현되는 힘을 그들이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재해를 막았다.
몇 번의 기적 후 사람들은 내려온 자들을 중심으로 종교를 하나 만들었고 그것은 아스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내려온 자들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슬란교는 계속되었지만 내려온 자는 없는 시절이 더 많았다. 게다가 내려온 자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생기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려온 자는 신분이 노예였고, 또 언젠가는 귀족 영애, 거지, 상인, 살인범 등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갑작스럽게 내려온 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떤 신분이든, 어떤 사연을 지녔든 내려온 자가 되면 아스란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넌 너무 쉽게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딱 한 장 남았어.”
페루스가 요구하는 서약서는 아슬란교의 보물 중 하나로 ‘맹서의 서’라 불렸다.
보기에는 그냥 종이일 뿐인 맹약의 서는 어느 시절 괴짜인 내려온 자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보통 치유나 물리적인 힘에 권능을 쓴 선대들과는 다르게 발명에 자신의 힘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무슨 저런 내려온 자가 있냐며 비웃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허나 그가 만들어 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신비하고 대단했다.
그의 많은 발명품 중에서도 맹약의 서는 독보적이었다. 누군가 맹약의 서에 양식에 맞춰 서약을 쓰면 맹약의 서는 빛을 발하며 특유의 권능을 발휘했는데, 그건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나는 평생 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서약을 하면 그는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만약 어긴다면 신벌이 떨어져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했다.
아슬란교는 이 위험한 보물을 없애 버리려다 남겨 두고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가끔 세속의 지배자들과 거래품으로도 이용했다.
“그럼 나에게 황녀를 한번 데려오렴. 그녀가 그렇게 아름답다지?”
페루스는 사내의 말에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반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내는 원하는 것을 쥐여 주지 않으면 대가를 내놓지 않는 탐욕스러운 자였다.
“……다시 오겠습니다.”
페루스는 일단 고개를 까닥이곤 몸을 돌렸다. 어차피 당장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건방진 그의 태도에도 사내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이어 쿵 하고 문이 닫혔다.
“건방진 새끼.”
페루스가 나가자마자 사내의 입에서 애늙은이 같은 말투가 사라지며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방금 전까지의 고고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날것의 천박함만 사내에게 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의 사내였다. 사내는 자신의 긴 머리를 당기며 문을 노려봤다. 저 고고한 귀족 놈은 아직도 자신이 바닥을 기는 노예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도 꼬리를 잡아야…….’
사내가 다시 의자에 드러누웠다. 허리 밑에 자리한 짐승의 가죽이 푹신푹신했다. 전에는 생각도 못 한 사치였다.
사내는 이런 사치가 마음에 들었다. 높아진 자신의 지위도 좋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짐승의 가죽을 쓰다듬었다. 장기짝을 쓸 때가 온 것 같았다.
* * *
알렉스는 신전에서 온 편지를 뜯었다. 급한 전갈인지 빨간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편지지를 펼쳐 든 그가 글을 읽어 가기 시작했다.
장황한 말이 쓰여 있었지만 본론은 하나였다. 당장 신전으로 오라는 호출이었다. 그의 눈에 미미한 짜증이 서렸다. 신전에서 수도로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복귀하라는 명을 내린단 말인가. 그는 종이를 찢어 버렸다. 당분간은 수도를, 황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페테 경!”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반가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갈색 머리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는 재빨리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든 부인. 오랜만입니다.”
“그냥 제인이라 부르세요.”
“예. 제인도 그냥 알렉스라 부르십시오. 황녀 전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엘리자벳이 거론되자 제인의 얼굴이 걱정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예. 근데 저…… 어제 서부의 공작께서 오셨는데…….”
우물거리는 제인의 말을 알렉스는 인내심이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제인은 끝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알렉스는 그런 제인에게 웃어 보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빨리 들어가 보시죠.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런 알렉스를 보며 망설이던 제인이 용기를 내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저 혹시…… 알렉스는 전하께서 왜 공작님을 안 물리는지 아시나요? 항간에 도는 소문도 신경 쓰이고 어제 두 분 분위기도 이상한 것이…….”
제인이 또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녀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기 힘든 부분이군요.”
“아, 제가 괜한 걸 물어서. 잊어버리세요.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들어가 볼게요. 알렉스.”
“함께 가시죠.”
“아니에요. 저 혼자 뵙는 것이 편할 것 같네요.”
제인은 알렉스의 호의를 거절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하지만 사라는 무조건 제인 홀로 황녀를 만나 편지를 전해야 한다 당부했다. 그래도 알렉스라면 믿을 만할 텐데. 비록 양자이긴 하나 황녀의 외가인 페테가 출신이 아닌가. 게다가 신전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계획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홀로 계단을 올랐다. 알렉스는 그런 그녀에게 끝까지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참 다정한 사내야. 잘생기기도 했고. 우리 앨런이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어도 줄을 대 볼 텐데.’
제인은 어린 딸을 생각했다. 수도로 오기 전 그녀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자 그녀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알렉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역시 다시 봐도 괜찮은 사내라 생각하며 제인도 마주 고개를 숙이고는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그 뒤로 그녀의 인영이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은 이어졌다.
* * *
눈앞이 캄캄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엘리자벳은 가슴을 몇 번이고 쓸었다.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은 남자가 토닥거려 줬다. 그 따뜻함에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고마워요. 알렉스.”
시종이 나팔 소리와 함께 황녀의 입장을 알렸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알렉스가 그녀의 보폭에 맞춰 가며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의 눈앞에 화려한 카펫이 펼쳐진 계단이 나타났다.
“조심하십시오.”
휘청거리는 그녀를 알렉스가 빠르게 잡아챘다. 걱정스러운 그의 말에 그녀는 그저 고개만을 주억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홀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자벳은 바닥을 보던 고개를 들어 홀 안을 살폈다. 순식간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정확히는 계단부터 쏟아지던 시선을 그녀가 처음 발견한 것이었다. 등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오르고 싶었다. 이 장소는 그녀에게 너무나 괴로운 곳이었다.
“어머. 의외네요.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고……. 얼마 만이죠?”
“아 그 오로르의…….”
“황제가 올 수 없으니 황녀라도 참석해야지. 그래도 봉토를 내리는 날이 아닙니까.”
“말이 좋아 봉토 수여지 실상은……. 이번 수여로 오로르에 남은 땅이 얼마 없답니다. 기껏 해 봤자 본래 가문의 재산만 남았다더군요.”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당한 것이 얼마인데.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부족합니다.”
“하긴, 그 마녀에게 죽어 간 이들을 생각한다면이야. 쯧!”
“그래도 얼굴 하나만큼은 감탄할 만하군. 하지만 그 핏줄에 그 자손이니 알맹이는 뻔하지.”
“그것도 나이 들면 다 소용없습니다. 왜 엘라르 황제도…….”
엘리자벳은 한참을 멀뚱히 서 있었다. 황녀라는 신분이 무색하게 누구도 먼저 그녀에게 인사하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웽웽 울렸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듣지 않아도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오지 말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지 말걸.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오지말걸.
하지만 그녀에게는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다. 그녀의 처분에 관한 건 모두 페루스 그 사내가 쥐고 있었으니.
한 무리의 사내들이 엘리자벳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대상으로 질 낮은 농담을 한 것이 분명했다. 불쾌한 여러 쌍의 시선이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훑었다. 동시에 엘리자벳의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알렉스가 그녀를 감싸며 어딘가로 이끄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엘리자벳을 품 안에 넣듯 가리고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으로 나아갔다.
“전하.”
엘리자벳은 알렉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개인 휴게실에 와 있었다. 그가 휴게실에 비치된 술을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말 없는 배려에 엘리자벳이 미소를 지었다.
“알렉스. 항상 고마워요. 정말.”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그냥 엘자라 부르세요. 알렉스는 제 친구인걸요.”
알렉스는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엘리자벳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익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뭐랄까, 순간 더 아름다워 보였다. 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감각이 낯설었다.
“아…… 싫으시면 괜찮아요.”
그가 답을 하지 않자 엘리자벳이 실망한 듯 다시 말을 정정했다.
“아닙니다. 그냥 당황스러워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리 부르겠습니다. 엘자.”
바로 엘자라 말하는 알렉스를 보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소리가 휴게실에 울렸다. 그는 정말 한결같았다.
“알렉스는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말입니까?”
엘리자벳이 눈을 감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평소처럼 쉽게 표정을 바꿀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멋있다. 친절하다. 다정하다, 등의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에 반대되는 말은 꽤 들었던 것 같은데.
그는 가만히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독한 술이었는지 그녀는 취한 것 같았다. 소파에 앉은 자세가 아까와는 다르게 힘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문득 엘리자벳의 입술로 시선이 갔다. 화장을 했는지 평소보다 붉은 입술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엘리자벳의 얼굴에 묻어 있던 꽃잎을 털어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 입술이 유독 그의 시선을 끌었다.
밑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긴장해 있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술이 많이 약한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조용히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허리를 굽혔다. 그의 입술에 붉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져 봤다. 살짝 뜨거워진 온도가 나쁘지 않았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알렉스는 계속해서 엘리자벳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짧은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그러길 수십 번. 그가 소파 앞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봤다. 그녀의 입술연지는 계속 반복된 행위로 인해 색이 약간 바랬다. 그는 자신의 입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손가락에 붉은 것이 묻어났다. 그걸 보던 그가 소매로 입을 훔쳤다. 소매에 연한 자국이 남았다.
알렉스는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의 속은 표정과 같지 않았다. 그는 약간의 충격과 당황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다.
“으음.”
가까이서 들려온 소리에 그의 고개가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벳은 소파가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이 내려가더니 숫제는 누운 꼴이 되었다.
엘리자벳의 얼굴이 알렉스의 얼굴과 일직선을 이뤘다. 그러나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아까만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집었다. 혹시 그녀가 깰까 봐 머리카락을 잡은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넘어가며 보고 있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그 모습에 알렉스는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위에서 살짝 누르듯 하는 아까의 행위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으……음.”
자는 중에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엘리자벳이 고개를 틀자 살짝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알렉스는 약간의 섭섭함을 느꼈다. 그는 괜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뺨에 가져가 봤다. 열기가 오른 볼은 말랑했다.
순간 눌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남자가 엘리자벳의 뺨을 누를 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막상 손을 가져다 대니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살짝 줬다. 옴폭한 우물이 엘리자벳의 뺨에 생겼다. 왠지 재미있었다.
엘리자벳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부터 시선이 갔다.
굳이 생각해 보자면 다시 궁으로 돌아왔을 때부터일까 싶었지만, 그 전 북부로 몇 개월을 가 있는 동안에도 그는 엘리자벳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녀를 생각했다.
혹시 이게 스승이 말하던 인간다운 것일까? 알렉스는 고민했다. 하지만 스승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 인간답지 않은 것에 있다 했다. 그는 인간답지 않음으로서 완벽해진다고 스승은 당부했다.
당시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해가 될 듯도 싶었다. 일례로 최근 그는 길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는가.
그가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엘리자벳이 다시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좁은 소파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엘리자벳을 깨울까 고민하다 그냥 안아 옮기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뒷문으로 나가면 궁도 금방이니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가 조심히 엘리자벳을 안아 들었다. 향수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알렉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슴에 기댄 얼굴이 예뻤다. 그는 즉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더 강하게 밀려오는 향 끝에는 단맛이 났다.
* * *
차가운 바람이 팔을 스쳤다. 엘리자벳은 추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나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억지로 눈을 뜨려 애썼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 옆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내가 언제 창문을 열었지? 그녀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가누기 위해 노력했다.
한 잔 마신 술은 특히 그녀의 몸에 안 받는 종류였다. 흔들리는 시야로 뿌연 연기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봐?”
그림자의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벽안을 가진 사내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시가를 든 그의 주변은 하얀 연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냄새는 싸하기 그지없었다.
“황녀께서 일개 기사에게 업혀 침실로 들다니, 아랫것들에게 어찌 보일지 생각도 안 하는 건가?”
말투는 한껏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떨었다. 언제 돌아온 거지? 다음 주나 되어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나.
“아니면 그새 피 안 섞인 외사촌이랑 추잡스러운 연애질이라도 하는 건가?”
엘리자벳은 감정 섞인 말투에서 페루스의 심기가 뒤틀려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가 향 사이로 옅은 술 냄새도 났다.
그녀는 불청객을 쫓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녀의 목에 머물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서워. 손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페루스는 답 없이 떨고 있는 엘리자벳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리 떨고 있으니 꼭 스스로가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 같았다.
그가 엘리자벳을 훑었다. 아무도 옷시중을 들어 주지 않았는지 그녀는 연회복 차림 그대로였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가 평소보다 꾸민 티가 났다. 특히 저렇게 겹겹이 잔뜩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라 그는 꽤 오래 그녀를 바라봤다.
“왜 대답이 없지. 엘자.”
페루스는 대답 없는 엘리자벳이 답답한지 목깃을 풀었다. 또 한바탕해야 저를 보려나. 그의 눈이 잔인해졌다.
그는 피우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내던지곤 발로 밟았다. 불씨가 구두 밑에서 금세 꺼졌다.
“내일…… 내일 이야기해요. 지금은 술이 과해…… 과한 거 같으니깐…….”
엘리자벳은 가까스로 답했다. 그러나 페루스는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볼을 고정했다.
“정말 그놈하고 붙어먹기라도 하나?”
“그런 거 아니에요. 알렉스를 모욕하지 말아요.”
“또 그 이름이로군. 멍청해서 그런가. 넌 학습 능력이 없어.”
페루스는 그녀가 그의 앞에서 친해 보이는 알렉스의 이름을 뱉는 것이 싫었다. 저번에 강제로 장미궁으로 끌고 간 이유도 한낱 기사 따위를 제 사람이라 칭해서였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멍청한 엘자.
그는 소매를 걷고 엘리자벳을 뒤로 밀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여린 몸은 쉽게 침대로 넘어갔다.
엘리자벳이 입은 붉은 드레스가 하얀 시트 위에 부채꼴로 펼쳐졌다. 그녀는 오뚝이처럼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페루스가 허락할 리 없었다. 그는 엘리자벳의 어깨를 누르고는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다리 벌려.”
페루스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밑에 깔린 여자는 이제 희게 질린 채 발발 떨기만 할 뿐이었다.
겁에 질려 반항은 시도조차 못 하는 반푼이 같은 모습에 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그래 엘자. 네 위치는 여기지. 망할 오로르의 죗값을 받아 내며, 내 밑에 깔려 내가 내킬 때마다 다리나 벌리고, 내 밑에서 기는 것, 딱 그만큼이 네 위치지.
“넌 항상 손이 많이 가.”
엘리자벳이 떨기만 하자 페루스의 손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풍성한 치마를 아무렇게나 들췄다. 그 손길에 붉은색과 대조되는 흰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위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페루스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손가락을 허벅지 안쪽으로 가져갔다.
엘리자벳이 작게나마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는 쉽게 그녀의 행동을 물리고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아직 젖지 않은 내부가 고작 손가락 하나를 빡빡하게 물었다. 그가 손가락을 거칠게 움직였다. 자연히 그녀의 내부가 젖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면서도 항상 적시니 믿을 수가 있나. 창부 같아서는.”
엘리자벳은 페루스의 비웃음에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안을 때면 항상 이렇듯 그녀를 조롱했다. 아무렇게나 쑤셔 오는 손가락에는 배려나 애정 따위 없었다.
얼마간의 손장난으로 엘리자벳의 밑이 충분히 젖자 페루스는 손가락을 뺐다. 물소리와 함께 투명한 액체가 그의 손가락에 묻어났다.
그 모습에 페루스가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드레스 자락이 옆으로 물러나며 그녀의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엘리자벳의 발목을 잡고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엘리자벳은 수치심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 치워. 엘자.”
그가 그녀의 다리를 허리에 감으며 명령했다. 아래가 휑한 그녀와 다르게 그는 바지 앞쪽만을 내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엘리자벳은 더욱 큰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손 치워.”
그녀가 손을 치우지 않자 페루스는 다시 한번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끅끅거리며 손으로 더욱 세게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이 못내 거슬린 그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얇은 손목을 포개 위로 올렸다.
눈물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그의 눈에 잡혔다. 서러움과 수치심 그리고 두려움이 담긴 눈이 꼭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바짝 성이 난 물건이 허벅지를 찌르자 엘리자벳이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족스러운 기분과 함께 페루스가 엘리자벳의 비부에 물건을 비볐다. 곧 살들이 끈적이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페루스의 것이 엘리자벳을 단번에 침투했다. 여전히 일말의 배려심 따위 없는 행위였다. 안을 가득 채우는 크기에 고통스러워진 엘리자벳이 허리를 움직였다.
“그새 스스로 허리 움직이는 걸 배웠나 봐. 엘자.”
대답 없는 엘리자벳을 보며 페루스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할 때마다 밑에 깔린 엘리자벳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페루스가 상체를 엘리자벳 쪽으로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엘리자벳이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를 피했다.
불쾌해진 페루스가 허리를 더듬던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엘리자벳은 울고 있었다. 흐려진 눈에는 그저 체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다 엘리자벳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녹색 눈이 커지며 두려움을 가득 담았다.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는 거겠지. 얇은 목 위로 작게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페루스는 이대로 가는 목을 조르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엘리자벳과의 정사에서 그는 그녀를 목 졸라 죽여 버리고픈 충동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몇 번이고 엘리자벳의 목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나를 봐.”
그가 그녀의 목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두려움에 떨리는 눈이 그를 쳐다봤다.
그래. 나를 봐. 엘자. 내가 네 비참한 모습에 쾌락을 느끼도록, 네 두려움에 동정을 느끼도록. 그래야 내가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증오스러운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
페루스는 하얗게 질린 목에서 손을 뗐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엘리자벳의 몸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에 충실한 그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속 안의 가학심이 그를 자극하는 것이 느껴졌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거칠게 뒤집었다. 그러고는 개처럼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네게 잘 어울리는 자세지?”
눈물범벅인 여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하얀 둔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뒤에서 여자의 허리를 잡았다.
“으흣, 응……. 그만…… 아.”
아까보다 깊은 추삽질에 엘리자벳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신음을 들으며 드레스를 찢기 시작했다.
천이 비명을 지르며 제 모습을 잃어 갔다. 그리고 한참 후 천이 너덜너덜해지며 엘리자벳의 몸에서 떨어졌다.
엘리자벳은 이제 얇은 천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페루스는 그마저 찢어 버릴까 고민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살짝 비치는 천 아래 가슴이 탐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천 위로 엘리자벳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겨우 견디고 있던 엘리자벳의 상체가 무너졌다. 페루스는 그녀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켰다.
“견뎌. 네가 쓰러지면 내가 불편하잖나.”
엘리자벳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 뒤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이 진저리 치게 싫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뇌리를 파고드는 감각을 지워야 했다.
그때 페루스의 손이 그녀의 고개를 잡고 뒤로 돌렸다. 목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참을 새도 없이 입안으로 무언가 들어왔다. 끈적하고 물컹한 감각이 끔찍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득한 입맞춤은 계속됐다. 계속되는 키스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엘리자벳은 스스로가 짐승처럼 느껴져 비참했다.
마침내 진득한 키스가 끝나고 페루스가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빨라진 움직임에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질려 갔다.
꽉 다문 입이 열리며 그녀의 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참함과 쾌락이 뒤섞여 그녀를 감싸 안았다.
페루스가 그녀를 껴안으며 앞으로 함께 쓰러졌다. 불쾌한 것이 그녀의 안을 채웠다.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엘리자벳은 눈을 감았다.
방 안에는 거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안고는 옆으로 누웠다.
땀이 식으며 시원해지는 등과 달리 품 안은 작은 몸으로 뜨거웠다. 그는 자신에게 안긴 채 후희로 떨고 있는 엘리자벳을 쳐다봤다.
그의 품 안에서 그녀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여자의 몸을 지나 얼굴에 다다랐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닫힌 듯한 그 모습에 그의 머리가 순간 차갑게 식었다. 그가 엘리자벳에게서 몸을 떼고는 옷차림을 바로 했다.
침대 위는 찢어진 천으로 난장판이었다.
페루스가 몸을 떼자 엘리자벳은 아까보다 더 둥글게 몸을 말았다.
작게 떠는 어깨를 보니 그새 또 우는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참 한결같다는 생각과 함께 페루스의 손이 주머니를 뒤져 시가를 찾았다. 곧이어 뿌연 연기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페루스는 그녀의 하얀 뒤태를 보다 등을 돌렸다. 그의 걸음을 따라 시가 연기가 줄처럼 이어졌다.
문 앞에 선 그의 귓가에 조금 커진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우니 청승맞게 울지 마. 아랫것들 보기 부끄러워.”
핀잔을 준 페루스는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방 안과 다른 시원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하얀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사라지는 연기에 시선을 주다 걸음을 옮겼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여자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영 불쾌했다.
* * *
제인이 궁금증을 풀려면 약 1년 전 일을 알아야 했다. 당시 엘리자벳은 지금보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벨의 죽음이 엘리엇 탓이라 소리치고 나간 에셀이 엘리자벳을 만나려 들지 않았기에 엘리엇과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연기되었다.
그 후 황녀궁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했던 그녀는 엘리엇에 대한 걱정과 갑작스러운 에셀의 적대감에 피를 말리며 지내야 했다. 게다가 페루스에게 끌려가 장미궁에 감금되어 있던 시절, 제인을 비롯한 친한 시녀들이 모두 출궁했기에 주변에 그녀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톱만 물어뜯으며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 그녀는 궁에서 홀로 천천히 미쳐 갔다. 그러나 주변의 시중인들은 불안정한 그녀를 방치한 채 모른 척할 뿐이었다.
자신들끼리 속닥이다 그녀가 나타나면 파도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에 그녀는 더 큰 고독과 불안함을 느꼈다.
심지어 무슨 명을 받았는지 그들은 그녀의 질문에 답조차 하지 않았기에 어린 그녀의 정신이 더욱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 달을 지냈다.
그 어느 누구와도 대화조차 하지 못한 채 하루 또 하루를 세며 눈물로만 지새우고 있을 무렵, 그녀 앞에 세 사람이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평소 접점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그녀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그녀는 순간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심지어 그들 중 그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강간한 자가 있었음에도. 그만큼 한 달 동안 그녀의 정신은 고독과 불안감에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비록 셋 중 하나는 무표정으로, 또 하나는 징그럽게 웃으며, 마지막 하나는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상대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뿐이었다.
우선 그녀는 그나마 가장 가깝다 생각했던 친우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에요. 에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는 주체 못 하는 떨림이 담겨 있었다. 꽉 맞잡은 양손은 어찌나 긴장했는지 핏기가 가셔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사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눈빛과 거부였다. 에셀은 엘리자벳의 인사에 그녀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에셀의 차가운 태도에 그녀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연히 눈에 투명한 액체가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예상했지만, 아니 사실은 부정하고 싶었던 반응을 실제로 맞닥뜨리자 이겨 내기 힘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보드라운 카펫이 그녀의 눈에서 나온 액체로 얼룩져 갔다.
제게 왜 그러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기억조차 불안정하던 시절이었다.
“황녀님 울잖아. 기사가 숙녀를 울리다니 자격 미달 아냐?”
사내들 중 그녀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건 타티카였다. 엘리자벳은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의 요청에 몇 번인가 같이 춤을 춘 적은 있었지만 엘리엇이 워낙 그를 싫어해 그녀조차도 거의 피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소문이 좋지 않은 자였다. 그녀는 그의 주변에 도는 끔찍한 소문들을 떠올리며 팔로 몸을 감쌌다.
“울지 마. 황녀님? 응?”
끔찍한 소문의 주인공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거는 그의 행동은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녀의 연인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자신을 훑는 눈을 보며 왜 엘리엇이 그를 뱀이라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앞에서 무감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바짝 얼어붙었다. 사방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차마 눈앞의 사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그날 밤의 일과 그 후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탁―
무언가 책상 위에 올라오는 소리에 엘리자벳은 생각을 멈췄다. 그녀의 눈앞에는 한 장의 종이와 펜이 놓여 있었다.
종이는 은은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이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눈앞의 종이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무감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오라비를 살리고 싶나?”
페루스는 엘리엇을 황제라 칭하지도 않았다. 엘리자벳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하지만 파란 눈을 본 순간 하얗게 몰려오는 두려움에 다시 고개가 내려갔다. 무서웠다. 엘리자벳은 그가 너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묻지. 오라비를 살리고 싶나? 대답해.”
“살, 살려 줘요. 엘리엇을 살려 줘요.”
답을 해야 했다. 그는 엘리엇의 목숨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엘리엇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페루스는 눈앞에서 떨고 있는 엘리자벳을 물끄러미 봤다. 꼭 작은 짐승처럼 떨고 있는 엘리자벳은 두려움에 질려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당연한 일인데 묘하게 거슬렸다.
페루스는 그녀를 한 달 동안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누구도 그녀와 대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일부러 소문을 부추겨 불안감을 키우도록 조장했다.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떠는 모습을 보니 잘 먹힌 듯했다. 온실 속 공주님은 참 쉽게 무너졌다. 한 달을 못 견디다니.
그가 슬쩍 비웃음을 지었다. 그녀와 연애 놀음을 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참 멍청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하다 할 수 있었지만 황가가 저지른 일과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저리 순진하게 자란 것은 죄였다.
“제안을 하나 하지.”
“…….”
“내가 부르는 대로 쓰고 서명해.”
엘리자벳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엇을 요구할지 몰랐지만 일단 엘리엇을 살려야 했다. 이제 그녀의 곁에는 오라비, 엘리엇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펜을 잡았다. 허나 펜촉은 계속해서 떨렸다. 페루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엘리자벳 오로르는 이 시간부로 엘리엇 오로르의 목숨을 대가로 페루스 르온, 타티카 우세리, 에셀 라세르 세 사람이 원할 때 언제든 교접에 임한다. 끝. 서명란에 네 서명까지 써.”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자벳의 손에 들린 펜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평범하게 날씨 얘기를 하듯 담담히 페루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는 엘리엇의 목숨을 대가로 그녀의 몸을 요구했다. 거부권 따위 없는,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 안겨야 하는 창녀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에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그녀가 에셀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는 그는 이런 미친 짓에 동참할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셀은 그녀의 눈을 피했다.
“무슨! 그…… 그건 말도 안 돼! 난 창녀가 아니에요!”
그녀가 두려움조차 잊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창녀라는 노골적인 단어에 페루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창녀가 아니던가? 그래. 그렇다 해 두지. 하지만 넌 황녀로서 다음 대 황가를 정하는 데 필요한 주춧돌이야. 다음 대 황제는 네 배로 낳게 될 터이니.”
“그, 그게 무슨. 그런 일은, 그건…….”
“몰락한 황가의 황녀에게는 관대한 처분 아닌가? 아니면 그대 말대로 창녀가 되어도 좋아. 오로르에 원한이 쌓인 이들이 그대의 몰락을 기뻐하며 잔뜩 범해 주겠지. 물론 그 길을 선택한다면 당연히 황제는 죽을 테지만.”
너무도 잔혹한 말에 그녀의 몸이 의자로 무너져 내렸다. 엘리자벳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세 쌍의 눈이 너무도 끔찍했다.
오로르를 무너뜨렸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였다. 허나 서로 알력이 심하니 저들끼리 규칙을 정해 그녀를 말로써 쓰려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녀에게는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제발,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녀가 알아듣기 힘든 단어를 이어 나갔다. 괴로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에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엘리자벳에게 그런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한참 동안 방 안에는 그녀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흐느끼는 그녀가 안쓰러울 법도 했건만 방 안 누구도 그녀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눈물을 멈췄다.
“어떻게 하겠나?”
페루스가 압박을 가했다. 초점 없이 어두워진 녹빛 눈동자가 한때 연인이었던 그를 바라봤다.
“……엘리엇은? 이걸 쓰면 엘리엇에게는 손대지 않을 거죠?”
페루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반시체가 된 황제 따위. 지금은 의식이 있지만 곧 아예 쓰러질 것이다.
엘리자벳이 바닥에 떨어진 펜을 주워 들었다. 책상에 놓인 종이가 조금 더 가까이 그녀에게로 당겨졌다.
곧 종이 위로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녀가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갈 때마다 글자에서 빛이 나다 사라졌다.
그 모습이 신비할 법도 했지만 방 안 누구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펜이 그녀의 이름을 쓰고 책상을 굴렀다.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 끝에 맞춰 페루스가 품 안으로 종이를 넣었다.
“그럼 자세한 건 다음에 정하지.”
페루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특유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멀어졌다.
“황녀님. 가까운 시일에 봐.”
타티카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
에셀은 잠시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조용히 방을 나갔다.
모두가 떠난 방 안에는 멍하니 앉아 책상만 바라보는 엘리자벳만이 남았다. 그녀는 한 달 동안 완전히 미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미쳐 버렸으면 이런 일 따위 없었을 텐데. 속절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 * *
“세상에 그런 해괴한 것도 존재하는군요.”
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불쌍하신 전하. 어쩌자고 그런 일에 얽혀서는. 서약을 하면 그대로 행하게 한다니, 제인은 그런 기괴한 물건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연신 눈을 닦았다. 고귀했던 오로르가의 보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전하.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평생 이리 사실 수는 없잖아요. 일단 동부로 건너가서 몸을 숨기고 있으면 언젠가는 폐하도 모셔 올 수 있을 테고.”
“그건 절대 안 돼. 엘리엇을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리고 갈 생각도 없어.”
제인은 단호한 엘리자벳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제인은 사라의 편지를 엘리자벳에게 전하는 데 성공했다. 엘리자벳에게 전하기 전에는 읽어 보지도 못한 것이라 자신도 알지 못했던 편지의 내용은 놀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엘리자벳 황녀 전하께.
전하. 잘 지내고 계셨나요? 이 편지를 받으셨다는 건 무사히 제인을 만나셨다는 뜻이겠지요. 반역자들에게 둘러싸여 고생이 많으시다는 소문이 먼 동부 늙은이의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괘씸한 일당들이 이 편지가 전해지는 순간까지도 전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걱정돼 편지를 쓰는 늙은이의 눈앞이 흐려지는군요.
이곳 동부의 사람들은 모두 황제 폐하와 전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페루스 그 반역자가 오로르의 충신들을 도륙하고 동부 사람들을 핍박해 수도로 가지는 못하고 있지만요. 저는 지금 뮐렌 후작의 영지에 머무르고 있답니다. 뮐렌 후작은 아시지요? 오로르의 충신이자 페루스 그놈에게 세 아들을 모두 잃은 노장이랍니다. 선선대께서 살아 계실 적에는 툴란 의 대장군을 맡으셨죠. 그는 지금 반역자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답니다. 충신이라면 당연한 것이죠.
아 오랜만에 전하께 소식을 전하려니 주책맞은 늙은이의 사설이 길어졌군요. 전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중요한 것이니 누구에게도 말해서도 들켜서도 안 됩니다. 읽으시고 편지도 태워 버리세요.
전하, 동부로 오십시오. 준비는 제가 사람을 통해 하겠습니다. 황제 폐하도 모시고 싶지만 편지를 쓰기 전 황제께서 아예 의식이 없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찌나 참담하던지……. 그러나 이 늙은이는 폐하께서 그리되신 마당에 전하까지 잃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반역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궁을 떠나십시오. 아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 없군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편지가 무사히 전하께 전해지기를 아스란께 기도드리며…….
동부에서 사라가.」
편지를 읽으면서도 제인은 혹시 누가 오지 않을까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라의 편지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궁에 들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엘리자벳에 대한 감시가 얼마나 삼엄한지 몸소 겪지 않았나. 게다가 공작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니 사라가 준비를 한다 한들 수도는커녕 궁을 빠져나올 수는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옆에서 본 엘리자벳은 거의 반쯤 시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맹세의 서라니! 그런 기괴한 것으로 반역자 놈들은 엘리자벳에게 몹쓸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꼴만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제인에게 엘리자벳은 그냥 오래 모신 상전이 아니었다. 아주 젊었던 시절, 소녀였던 그녀가 오로르가에 들어가 처음 모셨던 상전이었다.
사라와 함께 갓난아이였던 엘리자벳을 키우며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그러나 고생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엘리자벳을 키우는 것은 즐거웠다.
그녀의 어린 상전은 착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쁘게 자라 줬다. 말을 할 수 있을 무렵에는 매일같이 제인, 제인 하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놓질 않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제인은 딸을 키우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제인의 마음속 첫딸은 앨런이 아닌 엘리자벳이었다. 그런데 그리 곱게 키운 엘리자벳이 저 불한당들 손에 놀아나다니…….
“전하, 제발. 이리 있으시는 건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실 거예요. 일단 사라 님 말씀대로…….”
“제인. 다시 말하지만 난 엘리엇을 두고 갈 수 없어. 내가 떠나면 분명 페루스가 엘리엇을 죽일 거야. 게다가 동부로 간다 한들 어찌하겠어. 내가 동부로 가면 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분명 동부로 쳐들어올 텐데, 그럼 동부는, 내 고향은 전쟁에 휩싸이게 되겠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거야.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오로르는 이미 무너졌어……. 황가는 동부 사람들이 목숨을 걸 가치가 없는 가문이야. 그러는 걸 볼 생각도 없고.”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제인은 답답한 엘리자벳의 말에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다. 엘리자벳의 말은 어차피 오로르는 무너졌으니 그냥 이 지옥에서 혼자 버티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게 오로르의, 황가의, 직계손에게서 나온 말이라니.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대로 사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안 돼요. 제가 못 봅니다. 아니 저뿐만 아니라 충신이라면 누구도 못 볼 꼴이지요. 게다가 그놈들이 전하를 건드리는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면서요! 그건 감히 오로르의 피를 저들의 더러운 핏줄에 가두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오로르를 복속시키겠다는 뜻이에요. 오로르의 역사가 얼마인데…… 고작 그따위 것들에게! 전하께서 그리한다면 하늘에 계신 선조들께서 피눈물을 흘리실 거예요.”
결국 제인은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엘리자벳에게 대거리를 했다. 그러나 분노를 주체 못 해 제 무릎을 쳐 대는 그녀의 모습에도 엘리자벳은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더 열불이 난 제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하께서 뭐라 하시든 저는 사라 님 말씀을 따를 거예요. 말리지 마세요!”
쾅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엘리자벳은 감았던 눈을 뜨고 문을 바라봤다. 그녀는 제인이 저리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겠지.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니 더는 자신으로 인해 위험하게 만들 수 없었다. 듣기로 제인은 가정을 꾸려 예쁜 딸을 두고 있다 했다. 결혼한 상대는 남부 출신이라 했던가.
만일 그녀가 사라의 말을 따른다면 제인의 가족들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남부면 페루스의 손아귀가 아닌가.
엘리자벳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녀는 궁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제인의 말대로 선대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오로르를 망쳤다고 그녀를 저주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죽은 선조들보다는 살아 있는 제 사람들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그녀를 임신시킬 수 없었다. 그러니 오로르의 피가 저들 핏줄에 들어갈 일 따위 없었다.
그녀의 눈이 거울 앞 화장대에 이르렀다. 풀만 남작 부인. 그녀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언젠가 사교계에 막 처음 나갈 무렵 엘리자벳은 아버지의 정부와 담소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 꽤 오래 아버지의 옆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성격이 워낙 사교적이라 엘리자벳은 그녀와 썩 괜찮게 지냈다.
‘호호. 황녀께서도 이제 사교계에 나가실 텐데. 이리 아름다우시니 뭇 사내들이 다 덤비겠어요.’
‘무, 무엄해요. 풀만 남작 부인. 그리고 난 사내들 따위 필요 없어요.’
‘전하. 무엄해요가 아니라 이럴 때는 무엄하다! 이리 소리치시는 겁니다. 그리고 왜 사내가 필요 없어요? 이제 한창 피어나실 때가 아닙니까. 아, 혹시 어릴 적 첫사랑 때문에?’
자신의 말투를 지적하며 부채를 착, 하고 접는 풀만 남작 부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색기가 흘러넘쳤다. 엘리엇이나 주변 사람들은 저리 천박하게 색기를 흘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녀와 남작 부인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엘리자벳은 그녀가 싫지 않았다.
‘세상에. 정말인 모양이군요. 전하 무슨 그리 순진하신 생각을. 요새 사교계에서 젊은 영애들이 어찌 다니는지 모르세요? 다들 이리저리 즐기며 다니는데 이리 아름다우신 전하께서 한 사내만 보시겠다고요? 말도 안 돼요.’
‘그렇지만 난 페루스만 있어도 좋고, 그리고 아직 잠자리는 결혼한 후에…….’
‘그러다간 그분이 도망갈걸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보자 남작 부인은 다시 부채를 펴고는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사교계의 꽃들이 그분을 가만히 놔두겠어요? 조각처럼 잘생긴 사내라……. 제가 폐하의 애첩이 아니었다면 당장 그를 넘어뜨렸을 거예요.’
‘넘, 넘어뜨린다니 무엄하다! 페루스는 그런 사내가 아니야.’
‘흐응. 조용하신 황녀께서 바로 고함을 치시는 걸 보니 그를 사랑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제가 다시 알려 드리죠. 그리 순진하게 구시면 그는 날아가 버릴 겁니다. 사내란 나비와 같거든요. 아무리 예쁜 꽃이 저를 봐도 꿀을 딸 수 없다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요. 그게 사내의 본성이랍니다. 아랫도리를 그렇게 타고난걸요.’
‘하지만 엘리엇도 그렇고 내 주변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걸.’
‘세상에. 전하 그러니 제가 순진하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호호, 황태자께서 어찌 전하를 속였는지. 참.’
‘그럼 어찌해야 할까?’
‘제가 묘약을 드리지요. 저만의 비밀인데, 전하께는 알려 드려야지요. 단 황제께는 비밀입니다. 들키면 전 쫓겨날지도 몰라요.’
엘리자벳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 부인은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더니 작은 병을 가져왔다.
‘이건?’
화장수를 담는 것처럼 보이는 병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남작 부인이 병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순식간에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엘리자벳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나자 남작 부인은 웃으며 병을 닫았다.
‘이건 제 고향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피임약이에요. 재료는 의외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죠. 황궁 정원에도 있답니다.’
‘피임약? 그건 아이를 못 가지게 하는 거잖아. 그게 무슨 묘약이야.’
엘리자벳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니죠. 전하. 전하께서는 고귀하신 분이니 그분과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어도 아이 걱정에 쉽게 그럴 수 없죠.’
‘아니. 결혼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 없다니깐!’
‘쉿. 들어 보세요. 그러다 다른 영애가 몸으로 그분을 채 가면 어쩌시려고요. 지금은 그분도 전하만을 보지만 세월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수도에 예쁜 영애가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여자의 마음은 모른다고, 전하께서 그분도 좋지만 다른 분이 좋아지실 수도 있는 노릇이잖아요? 제 경험에 따르면 사랑은 동시에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니 그러한 때 이걸 사용하세요. 아차! 제일 중요한 재료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묘약은 마일린의 뿌리를 말려 가루로 만들면 된답니다. 쉽죠?’
은근하게 몸을 붙여 오며 병을 쥐여 주는 남작 부인의 말에 당시 뭐라고 했더라. 아마 필요 없다며 뛰쳐나왔더랬지. 엘리자벳은 남작 부인과의 짤막한 대화를 회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남작 부인은 그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생일날 죽었다. 후에 듣기로는 단칼에 목이 날아간 걸 아무도 수습하지 않아 그냥 불태워졌다던가.
죽은 사람을 생각하니 그녀의 눈이 한층 더 깊게 가라앉았다. 엘리자벳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남작 부인 또한 그녀로 인해 오로르로 인해 죽은 것이었다.
평민이었고 천박하다 욕을 먹었으나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제게 잘해 줬는데.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시체마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니 더는 자신으로 인해 가문으로 인해 무고한 자들이 생기게 할 수 없다 생각하며 엘리자벳은 눈을 감았다.
* * *
에셀은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방금 북부의 수하가 그에게 급보를 전해 왔다. 누이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돌아오란 전갈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조금 더 남은 줄 알았거늘 누이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번에 황궁으로 온 것도 그의 시야를 돌리기 위해서였나?
수하가 보내온 종이에는 어느 가문이 마들렌을 따르는지, 마들렌이 어느 가문에 전령을 보내 그녀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지, 어느 가문이 에셀을 배신했는지 등 중요한 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이리 세세하게 적어 보낸 걸 보니 누이 쪽에서 딱히 숨길 생각 없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종이를 바라봤다.
북부의 영주들은 그와 누이를 비등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지만 이대로라면 글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 사람들은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시국이 이러하니 더욱 교활해져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자신들의 이익 재 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셀의 손가락이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책상을 두드렸다.
‘돌아가긴 해야겠지. 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봐도 돌아갈 때가 되긴 했다. 누이와도 매듭을 지어야 했고 가문의 가주 자리를 차지해야 그들과의 싸움에서 그녀를 지킬 수…….
에셀은 지킨다는 단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언제부터 제 목적이 바뀌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적은 어쩌면 처음부터 엘리자벳에게 있었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니 그녀와 몸을 섞은 후 이리 심란한 것이리라.
에셀은 마음이 착잡했다. 허나 지금 와서 이러면 뭐 하나, 차라리 가주 자리 따위 버리고 궁도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1년 전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엘리자벳이 무너지는 모습을 이미 봐 버린 이상 그에게 다른 선택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에셀은 종이를 꺼내 들고는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북부 수하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궁을 떠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북부 원로들을 찾아가라 편지에 쓰기 시작했다. 누이가 알면 치사한 놈이라며 길길이 뛰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북부의 원로들은 마들렌을 인정하지 않았다. 라세르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는 북부를 지배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원로들은 마들렌을 외면하고 항상 그에게 가문의 복수를 하고 라세르가, 나아가 북부의 명예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면 당장 가주로 추대하겠다며 회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요구에 지금까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이제는 대답해야 했다.
원로들이 말하는 복수에 엘리자벳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가주가 된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터였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옆에 그녀를 묶어 둬서라도 그리할 생각이었다.
‘엘자가 그걸 원할까? 한번 배신한 너와 함께하려 할까?’
그의 안 깊은 곳에서 속살거림이 들려왔다. 에셀은 문뜩 편지 쓰기를 멈추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거친 손은 전형적인 검을 잡는 기사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가 기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사를 꿈꿨다. 가문에서도 그걸 당연하다고 여겼고 재능도 뛰어났다.
하지만 집안에서 원한다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두 가지 조건만 필요한 거라면 시정잡배들 중에서도 기사가 나오리라.
그가 생각하는 기사는 검을 두고 숭고한 맹세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맹세는 북부, 가문, 가족 그리고 엘리자벳을 울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허나 부끄럽게도 그는 그중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다. 나는 기사라 할 수 있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 * *
“아 알렉스, 왔어요?”
“예. 엘자.”
엘리자벳은 요새 알렉스와 퍽 친밀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는 원래부터 그녀 옆에 있었고 항상 그녀와 잘 지냈지만 근래의 그는 뭐랄까,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서로의 이름을 불러서일까? 하지만 단순히 이름을 불러 친밀해졌다기에는 조금 묘한 구석이 있었다.
‘착각이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그녀는 설핏 웃고 말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 앉아 책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긴 백금발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오늘도 그 책이에요?”
알렉스가 들고 있는 책은 한때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사랑’이라는 책이었다.
가벼운 내용으로 여러 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은 툴란에서 인기가 좋은 연애 소설 중 하나였다. 다만 내용은 좀 지루한 감이 있었는데, 나온 지 50년은 더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다 엘리자벳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알렉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와 책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끙끙대는 강아지 같은 표정에 그녀는 당황했다.
“왜 그래요. 알렉스 할 말이라도?”
“책이 너무…….”
그는 한참을 망설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엘리자벳은 책에 무슨 문제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야한 장면이라도 있나? 그러나 그녀가 알기로 ‘사랑’은 매우 건전했다.
“책이 너무?”
“……책이 너무 어렵습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저 책이 어렵다니.
사랑은 어른은 물론 조숙한 7살짜리도 읽는 책이었다. 그만큼 내용도 단순했고 스킨십 부분에 있어서도 키스나 손을 잡는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그런 책이 어렵다니. 그녀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렸다.
“미안해요, 알렉스. 그런데 너무…… 푸흣.”
그녀는 사과하다 말고 다시 웃었다. 그 모습에 알렉스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옆으로 치웠다.
“책을 안 읽는 편은 아닌데…….”
그가 우물쭈물하며 변명을 했다. 엘리자벳은 눈가를 한 번 쓸고 그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웃어서 그런지 배가 아팠다. 눈앞의 기사는 부끄러운지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며칠 동안 읽고 있어서 재미있어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 이해가 안 가서…… 계속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부분이요? 책에 이해 안 가는 연인이라도 있었어요?”
“음……. 그냥 다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랑한다면서 싸우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울면서 입맞춤은 왜 하는 건지, 도통.”
엘리자벳은 알렉스의 의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알렉스는 궁 안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다 들었는데, 연애해 본 적 없어요?”
“없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앞의 기사는 연인들의 감정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앞부분을 읽으면 연인들이 왜 그러는지 알 텐데? 그러고 보니 알렉스는 신전에서 오래 자랐고 성인이 되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하지 않았나. 아마 그런 종류의 감정을 겪을 틈이 없었으리라.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시녀들한테 참 다정히 잘하던데. 그냥 성격인가.’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물었지만 엘리자벳은 넘어가기로 했다.
“음, 그러니깐 그건.”
그녀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니까? 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알렉스.”
“아닙니다. 제가 공부해 보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자신을 보던 눈이 다시 생각에 잠기는 것이 보였다. 왠지 죄책감이 들었다.
“아마 제목이 정답이 아닐까 해요.”
그녀는 결국 마음속 답을 꺼내 들었다. 손발이 저절로 쥐어졌다. 사랑이라니 어린아이도 안 할 대답이었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답은 그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답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생각한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손에 잡고 있던 책을 놓았다.
“두 분 다 사랑이니 뭐니 청승 그만 떠시고 이거나 드세요.”
침묵 사이로 제인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차와 간식류가 들려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했던 엘리자벳이 제인을 반겼다. 제인은 최근 황녀궁에 아예 눌러앉았다.
저번에 그녀에게 화를 내고 나가 한참이나 있다 들어올 줄 알았는데 금방 들어와서는 아예 짐을 풀었다.
그러고는 허가를 맡았다며 당당하게 엘라자벳을 돌보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제인이 머무는 것이 좋았기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요즘 산책 한번 안 하고 책만 읽어 대시니 건강이 안 좋아지시잖아요. 내일부터는 당장 정원이라도 나가세요! 드시기도 좀 잘 드시고요. 어휴 먼지가 아주.”
제인은 창문을 열더니 잔소리를 시작했다.
“알았어. 제발 제인! 사라 닮는 건 질색이야.”
엘리자벳은 지겹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지만 저절로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는 못했다. 정말로 그리웠던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 앞에서 찌르는 듯한 느낌이 났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알렉스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었다.
부끄러워진 그녀가 시선을 살짝 사선으로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제인이 그녀를 대신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기사님도 이거 좀 드셔 보세요.”
알렉스는 자신 앞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봤다. 푹신해 보이는 흰 크림 위에는 빨간 딸기가 올라가 있었다.
그는 포크를 들다 말고 슬쩍 엘리자벳을 봤다. 딸기만큼이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황녀에게 입을 맞췄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 깨닫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그 사람만을 바라보고, 무엇을 하든 그 사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 분명했다. 나는 어느새 레이첼,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는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생각했다.
“알렉스?”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그를 불러온 건 엘리자벳이었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그녀에게 다정히 웃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요?”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며칠 신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 함께 독서할 친구가 없겠구나. 며칠 궁을 나가 있겠다는 그의 말에 엘리자벳은 섭섭했다.
하지만 그는 신전에 묶인 몸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그저 미소 지으며 조심히 다녀오라 말을 꺼냈다. 알렉스가 평소와 같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제인이 케이크는 다 먹고 가라 불렀지만 그는 다정하게 사양했다. 문이 닫혔다.
“알렉스 또 나가시나요?”
방 밖을 나서자 스텔라가 그에게 바짝 붙어 왔다. 최근에 스텔라는 알렉스에게 좀 더 친밀한 척 다가왔는데 좀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다정하게 답했다. 아직 이용할 구석이 많은 여자였다.
“예, 아이작 영애. 며칠 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 스텔라라 부르신다고 저번에…….”
“아 제가 그랬습니까? 알겠습니다. 스텔라 양. 그럼 몸 건강히 지내시길.”
알렉스는 스텔라와의 대화가 너무 귀찮아졌다. 그래서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매정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 내고 돌아섰다.
정확히는 아까 엘리자벳이 했던 말이 신경 쓰여 스텔라를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응? 알렉스는 궁 안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다 들었는데, 연애해 본 적 없어요?’
그의 미간에 금이 갔다. 왜 신경이 쓰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질문을 듣는 순간 그는 기분이 나빠졌다.
왜? 평소 그는 일부러 시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들의 환심을 사고, 다정히 대했다. 그래야만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으니깐. 그러니 황녀가 그리 아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을 이해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 * *
루안나는 불행한 아가씨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불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수도의 자작가 출신의 영애로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조금의 차이점이 있다면 또래에 비해 조금 더 아름답다는 정도? 그러나 귀족 영애에게 있어 가문 다음으로 장점이 되는 것이 외모였기에 그녀의 적당한 아름다움이 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청순한 얼굴과 예쁜 녹색 눈으로 좋은 약혼자를 둘 수 있었으며 사교계에서는 비슷한 지위의 영애들보다 조금 더 대접받았다.
허나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지금 루안나의 신세는 저잣거리에 널린 천민보다 못했다.
“사교계에서는 그리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더니 순 내숭이었잖아.”
엎드린 그녀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며 비웃는 남자는 언젠가 열린 연회에서 그녀에게 수줍게 춤을 청하던 귀족 영식이었다.
“루안나 그거 알아? 너 때문에 모임에 온갖 것들이 다 모여드는 거. 다들 그 콧대 높은 루안나 멜 자작 영애를 안을 생각에 몸이 달아 제 순서만 기다리고 있다고.”
남자는 키득거리며 그녀를 모욕했다. 하지만 그녀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자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남자가 재미없다며 그녀의 뺨을 연달아 내리쳤다. 좁은 방 안이 날카로운 파공음으로 가득 찼다.
“잘못,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아리는 아픔에 그제야 루안나가 사내를 보며 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사내는 한 번만 봐준다며 한껏 자비롭게 말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더 이상 맞기 싫었던 루안나는 그저 사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한껏 자신을 낮추고 답을 했다. 그러길 몇 번, 마침내 사내가 그녀의 안에 파정했다. 그러고는 바지를 올리더니 쓰러져 있는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방 밖을 나섰다. 오물 그릇 취급이었다.
‘왜……. 내가 도대체 왜.’
루안나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질문을 다른 이에게도 해 봤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질문에 답해 주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그저 짓밟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아직 끔찍한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맞이해야 할 손님이 여럿이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방 한쪽에 마련된 간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혹사당한 몸이 쪼개지듯 아파 왔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 비명이 들렸다. 그에 루안나의 몸이 굳었다. 또 무슨 미친 짓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문을 잠가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소리를 들어 보건대 모임의 손님들이 여자를 윤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문을 잠그면 나중에 얻어맞겠지만 그냥 내버려 둔다면 술과 마약에 찌든 쓰레기들에게 죽을지도 몰랐다.
이곳의 인간들은 그녀같이 팔려 온 여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녀는 여자들이 죽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녀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 루우우안나아.”
하지만 루안나보다 빠르게 움직인 이가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를 보고는 하얗게 질렸다.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내는 그녀의 약혼자였다. 정확히는 약혼자였던 사내였다. 그의 뒤에는 대여섯 명의 사내가 더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약에 취했는지 눈이 풀려 있었다. 그 모습에 루안나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사내들을 밀치고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 미친년이!”
그러나 그녀는 곧 강한 힘으로 인해 앞으로 넘어졌다.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쓰러진 그녀의 눈에 문밖 풍경이 들어왔다.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여자가 피를 흘린 채 죽어 가고 있었다.
‘안 돼! 죽기 싫어.’
그 모습에 그녀는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그녀가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내들이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발을 잡아챘다.
‘죽기 싫어. 이렇게 죽는 건 싫어!’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그때, 그녀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눈 밑 점이 인상적인 사내는 그녀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처음 이곳에 팔려 왔을 때, 그녀를 구해 주지 않은 남자. 오히려 절망 속으로 그녀를 차 버린 남자는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살려 주세요! 공작님 살려 주세요!”
타티카는 자신을 부르는 여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끌려가는 꼴이 재미있어 보고 있었더니 왜 자신을 부르지? 나를 아나? 그가 눈을 게슴츠레 떠 여자를 봤다.
“아.”
녹색 눈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저번에 황녀와 비슷해 조금 가지고 놀았던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저보고 살려 달라 했던 것 같은데.
아직 미치지 않은 게 대단하잖아? 타티카는 흥미가 생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려 줘?”
루안나는 자신에게 물어 오는 남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또 저번과 같겠구나.
루안나의 눈에 체념이 서렸다. 그런 그녀를 보던 타티카가 빙긋 웃더니 그녀 뒤에 있는 남자들에게 말했다.
“죽이지는 마. 그 외에는 뭐, 알아서들 해.”
짧은 몇 초의 시간 동안, 그녀는 구원과 배반을 함께 맛봤다.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질질 끌려가며 그녀는 타티카를 봤다.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조금 있다 보자 인사했다.
그 잔인한 모습에 루안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꼭 죽여 버리겠어.’
* * *
“목줄을 풀고 다닌다고 개새끼가 주인이 없는 게 아니지. 안 그래? 응?”
남자는 의자에 앉은 채 화사한 백금발 머리를 밟았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제 밑의 개새끼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괴물 새끼.’
그는 제 밑에 꿇어앉아 있는 알렉스를 징그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몇 년이나 봐 왔지만 이 괴물은 변함이 없었다.
“신전에 매인 몸이면 재깍재깍 부름에 응할 것이지. 주인의 부름도 무시하고 말이야. 궁에 뭐 혼자 먹을 거라도 숨겨 놨나? 기사 나으리.”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가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서 남자 앞에 꿇어앉았다.
누가 보더라도 복종하는 개의 모습이었지만 남자는 더욱 심기가 상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눈앞의 기사를 사정없이 밟고 차기 시작했다. 퍽퍽, 하는 소리가 신성한 방 안에 울렸다.
“루, 루한 오…… 오빠 그……만해.”
그때 의자 옆에서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렸다. 루한은 발을 거두고 뒤를 돌아봤다. 저와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병신이 울먹거리며 저를 보고 있었다.
“루나. 너도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닥치고 있으렴.”
다시 폭력이 이어졌다. 위에서 날아오는 발은 사내의 것치고는 작았지만 위력은 충분했다.
순식간에 기사의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사는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익숙하다는 듯이 맞고 일어서고 또 맞고를 반복하는 모습에 울먹거리던 눈의 주인이 바들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한참 후 씩씩거리는 소리와 함께 폭력이 멈췄다.
그는 눈앞의 기사를 쳐다봤다. 눈 옆이 찢기고 온몸에 상처가 생겼지만 기사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심지어 자세 또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때린 건 자신이거늘 어째 기분은 제가 맞은 것 같아 남자는 신경이 곤두섰다.
“제길. 루나. 알렉스를 치료해 줘.”
한참 만에 남자의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의자 옆에서 울고 있던 여자가 무릎걸음을 시작했다. 그녀의 드레스 밑으로 힘없는 다리가 질질 끌렸다. 한참 만에 여자가 목적지에 닿았다.
“알, 알렉스.”
여자의 손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빛이 한차례 다친 기사의 몸을 감싸더니 사라졌다. 잠시 빛무리에 쌓여 있던 기사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여자가 헤실거리더니 기사의 옆으로 쓰러졌다.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저런 병신들을 데리고 이 자리를 지켜야 하다니.’
루한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쓰러진 여자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차가운 눈이 쓰러진 여자와 기사를 응시했다. 기사는 저 때문에 여자가 쓰러졌거늘 미동도 없었다.
“괴물 새끼.”
그는 결국 기사에게 속엣말을 뱉었다. 입 밖으로 나온 단어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 * *
루한과 루나 남매는 어느 노예상이 근친을 통해 만들어 낸 상품이었다. 배덕한 관계에서 나온 부도덕한 상품.
그러나 아름다운 상품이었던 남매는 일찍이 거금에 팔려 가게 되었다. 처음 남매를 산 것은 혼자가 된 지 30년이 넘은 어느 귀부인이었다. 남편을 일찍 보낸 그녀는 겉으로는 매우 인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한 꺼풀 밑 그녀의 본모습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매는 매일같이 학대를 당했다. 매질은 기본이요 루한은 어린 나이에 그녀에게 성적 학대까지 받았다. 그리고 루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인의 학대도 자라났다. 그녀는 해가 지날수록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남매를 괴롭혔다.
그러나 남매는 꿋꿋이 참아 냈다. 아니,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삶이 정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남매가 할 수 있는 일 따위 없었다. 그렇게 지옥에서 몇 년이 지났다.
세월이 지나자 남매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기 시작했다. 신비한 보랏빛 머리와 강렬한 루비색의 눈을 가진 남매는 누가 봐도 미인들이었다. 남매가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그들의 젊음을 시기한 부인의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가 지긋해진 노부인은 인자한 얼굴을 하고는 남매에게 서로 엉겨 붙을 것을 명령했다.
루한은 그것만은 따를 수 없었다. 애초에 태생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처음으로 주인에게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리고 주인에게 대든 죄는 여동생인 루나에게로 향했다.
노부인은 루나를 ‘모임’이라는 곳에 며칠 넘겼다. 그때 루한은 벌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내심 안도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 근친으로 함께하게 된 여동생의 존재는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주인은 그들 남매가 서로를 아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항상 여동생이 죽기를 소망했다. 그에게 여동생이란 그런 존재였다.
루나는 며칠 후 돌아왔다. 루나를 돌려주러 온 남자는 대여 상품이라 최대한 소중히 다루려 했으나 고객들이 워낙 거칠어 상품이 망가졌다며 노부인에게 연신 사과했다. 보상으로 큰돈도 건넸다.
물건은 언젠가 닳는 것이 아니냐며 노부인은 친절하게 사내에게 괜찮다고 했다. 돌아온 루나는 걷지 못하게 되었고 머리가 비어 버렸다. 루한은 그런 여동생이 더욱 끔찍해졌다.
그러길 몇 년이 지나고 노부인이 세상을 떴다. 사람들은 인자하고 정숙했던 그녀를 기리며 눈물을 흘렸다.
남매는 노부인의 유산으로 암암리에 가격이 매겨져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 루한은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가졌다.
하지만 남매가 머무르게 된 어느 곳이나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지옥이었다. 그는 남매를 사들이는 모든 인간들을 저주했다. 남매를 사들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귀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특히 귀족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가진 것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신이 내려앉은 것은 정말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주인의 밑에서 허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고 있는 그에게 갑작스레 빛이 내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이 무언가에게 선택받았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사제들이 찾아와 주인을 죽이고 그들 남매를 모셔 갔다.
그는 소망대로 살게 되었다. 그를 눌렀던 모든 이들이 그의 밑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심지어 황제조차 그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말에 그는 몇 시간이고 울고 말았다. 펑펑 우는 오빠를 여동생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내려온 자가 된 후로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권능을 쓰면 힘들고 지쳤지만 그는 그것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남을 도우며 수십 번이나 혼절하기도 했다.
세상은 그런 그를 세상에 다시없을 성인으로 봤다. 이 시기 그는 여동생에게도 잘해 줬다. 여동생은 다정해진 오빠를 전보다 더욱 좋아했다. 여동생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뭔가 공허함을 느꼈다.
그의 공허감은 점차 커져 갔다. 남을 도우며 느끼던 감사함과 행복감 따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그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을 무렵 여동생이 그의 옷에 침을 흘렸다. 팔에 묻은 액체를 보던 그는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그대로 내려쳤다.
‘병신 같은 년, 더러운 년, 세상에 있어서도 안 될 년이! 감히 나에게! 나에게! 신의 선택을 받은 나에게!’
한번 시작된 폭력은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그는 여동생을 때리며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흥분을 맛봤다.
누군가의 위에 있는 이 쾌감. 밑에서 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이 황홀감. 모든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은밀히 사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툴란에서 가장 신성한 곳의 지하에서는 지옥이 펼쳐졌다.
신전의 몇몇이 이를 눈치챘지만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쯤 신전의 늙은 사제가 그에게 개 한 마리를 선물했다. 개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했다. 충직한 개의 이름은 알렉스로 페테 가문의 양자였다.
그리고 몇 년은 그에게 가장 즐거운 때였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맛봤다. 예전에는 끔찍했던 여인들과의 교합도 너무나 즐거웠다.
특히 높은 신분의 여인을 짓밟으며 범하는 것은 그가 가장 즐기는 취미가 되었다. 그는 여인들을 예전의 그와 똑같이 대했다. 신전의 지하에서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시신이 나왔다. 모두 아름답고 고귀했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신은 그런 그에게 벌을 내렸다. 빛이 내려왔던 어느 평범한 날과 마찬가지로 그에게서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빛은 그의 옆에 있던 여동생에게로 갔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에 또 몇 시간을 울었다. 펑펑 우는 그를 여동생이 언제나처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와 여동생 그리고 개만이 같은 공간에 있어서일까? 그에게 다행스럽게도 사제들은 내려온 자가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빛무리가 그의 방에 내려 떨어지는 것을 본 사제들은 그저 그가 권능을 썼다 생각했다. 다시 노예로 돌아갈까 벌벌 떨던 그의 눈이 교활해졌다.
그래 어떻게 가지게 된 자리인데 이렇듯 쉽게 저 병신에게 내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여동생을 때렸다. 여동생은 그저 울며 저가 다 잘못했다 빌었다. 그는 겁에 질린 여동생에게 속살거리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렴. 그럼 이 오라비는 착한 오라비로 남을 거란다.’
다정해진 그의 말투에 여동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여동생을 이용해 자리를 유지했다. 그가 내려온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가 키우는 개와 여동생 그리고 자신밖에 없었다.
개와 여동생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뜻을 따랐다.
하지만 그는 개가 불편했다. 그는 진실을 아는 개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개는 쉽게 죽지 않았다.
그러길 몇 번, 그가 개에게 자결을 명했다. 개는 잠시 주인을 보더니 칼을 자신의 목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그는 명을 거뒀다. 이 멍청한 개새끼 아니 감정 없는 괴물 새끼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개를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사람의 노력으로 계속해서 정점에 설 수 있었다. 몇 번 삐꺽거린 적이 있었지만 그는 모두 이겨 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자였다.
* * *
“황녀를 데려와. 나는 그녀를 가지고 싶어.”
루한은 눈앞의 개에게 명했다. 개는 아무 말 없이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개의 얼굴 밑으로는 어두운 음영이 져 있었다.
“동부의 멍청한 것들이 도울 것이다. 나도 두 사람을 보낼 거고. 넌 그들과 함께 황녀를 성 밖으로 빼돌려. 그리고 밖으로 나오면 동부의 것들은 죽여 버려. 그리고 황녀를 여기. 내 앞으로 끌고 와.”
루한이 손짓으로 나가 보라는 말을 했다. 개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꾸벅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역시 징그러운 괴물이었다. 저의 개는.
그는 쓰러진 여동생에게 시선을 주다 의자에 드러누웠다. 그의 긴 머리채가 바닥에 끌렸다.
루한은 누워서 아름답다는 황녀에 대해 생각했다. 일차적으로 황녀는 페루스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 끔찍했던 노예 시절, 그는 귀족들이 황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 어린 황녀가 예쁘게 자랄 것이 분명하다고 떠드는 소리였다.
그때 그는 자신과는 반대의 위치에 있는 아이를 떠올려 봤다. 은발은 소문대로 찬란할까? 녹색 눈은 저들이 떠드는 것만큼 아름다울까? 그때 그는 그것이 항상 궁금했다. 그래 봤자 사람인 것을.
루한은 가장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다는 여자를 범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지하로 끌고 가 노예처럼 묶어 놓고 뒤에서 안으면 어떨까? 등이 터져 나갈 때까지 채찍으로 내리친다면?
아마 황녀는 지하의 어느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주지 말라 울면서 자신의 밑에서 빌 것이다.
그러면 그 입에 자신의 것을 처넣고 주인님이라 부르도록 해야지. 가장 고귀한 핏줄이 자신의 밑에서 그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자비를 구할 것을 생각하자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엄청난 흥분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지하로 내려가 봐야 했다.
그는 헐레벌떡 문으로 향했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가 떠난 하얀 방에는 화려한 의자와 진실된 내려온 자만이 남았다.
* * *
방 안은 어두웠다. 온갖 금박과 붉은 천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음에도 방은 어두웠다.
방 한가운데는 화려한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황제가 잠들어 있었다.
은발을 가진 젊은 황제는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이 방을 황제의 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와 황가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말이었다.
위엄을 빼앗기고 박제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운의 황제와 그 아름다운 여동생은 세간 사람들에게 궁이라는 황릉에 묻힌 존재였다.
침실의 창문이 아주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어둠과도 같은 인영이 스리슬쩍 커튼을 밀어 냈다.
방 안에 옅은 바람이 들어왔다. 인영이 주변을 조심히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있을 사람을 찾는 몸짓이었다.
검은 인영이 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대 옆에 다다랐다. 그러고는 칼을 빼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누워 있는 황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인영이 목 안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황제를 죽이는 일은, 평생 이런 일만 해 온 그에게 있어서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평소와 같지 않은 긴장감에 인영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인영은 곧 감정을 죽이고 칼을 위로 들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칼을 내리그었다.
얇고 날카로운 쇠붙이 아래에서 주르륵하고 피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베개가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인영이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짧은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왔을 때와 다름없이 스르륵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창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관 안에서 숨 쉬던 황제는 끝내 숨을 거뒀다.
* * *
끔찍한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울리는 소리에 시중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비명은 사람이 냈다 하기에는 너무 기괴할 정도로 높고 이상한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괴로움을 가진 자가 이런 소리를 낼까? 비명은 온갖 고통을 담고 있었다. 고개를 저으며 궁인들이 자리를 떴다.
듣고 있기 너무 괴로운 소리였다.
다시 한차례 비명이 하얀 궁을 관통했다. 제인은 무너지는 몸을 받아 내며 눈물을 쏟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엘리자벳을 들어 침대로 옮기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곁에 있던 시녀들이 그녀를 대신해 엘리자벳을 침대로 옮겼다. 제인의 눈에 엘리자벳의 몸이 들어왔다. 헐렁한 드레스 아래에 자리한 몸은 보기 힘들 정도로 상처가 가득했다.
목과 팔에는 스스로 낸 것이 분명한 손톱자국들이 기다란 피딱지와 함께 자리했으며 이마는 찍어 생긴 것으로 보이는 자상이 멍과 함께 자리했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는 엘리자벳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제인 그녀 또한 얼마나 놀랐던가.
소식을 들은 엘리자벳은 허옇게 질려서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넘어갔다. 쿵, 하는 소리가 바닥을 강타했다.
그 옆에서 멍때리며 저 시종이 뭐라 하나 생각하던 제인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불쌍한 엘리자벳은 반나절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제인은 차라리 엘리자벳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정신을 잃은 것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대로 한동안 주무셨으면 했다.
일어나면 분명 엘리자벳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제인은 그걸 볼 자신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쓰러진 엘리자벳의 손을 잡고 연신 흐느꼈다.
‘전하 주무세요. 푹 주무시고……. 차라리 잊으시고…….’
눈물로 온 소매가 젖어 들었다.
엘리자벳은 늦은 밤이 돼서야 일어났다. 가만히 눈을 뜬 그녀는 옆의 제인을 보더니 괴로운 듯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제인은 혹시 엘리자벳이 미친 것인가 걱정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미치지 않았다.
‘제인. 끔찍한 꿈을 꿨어…….’
‘제발, 제발 마음을 굳건히 하세요.’
‘응? 고작 악몽으로 무슨 마음을 굳건히 하기까지야.’
까르르 웃으며 엘리자벳은 제인의 손을 꽉 잡았다. 하얀 손이 온 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파란 핏줄이 손 위로 올라왔다.
제인은 엘리자벳의 얼굴을 쳐다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부탁을 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해 줘, 제인.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제인은 황녀의 부탁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엘리자벳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얀 손 위로 몇 방울인가 눈물이 떨어졌다.
엘리자벳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인은 그저 전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창백한 손이 제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눈빛에 제인은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엘리자벳이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목이 이상하다는 듯 그녀가 제 목을 더듬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곧 소리 없이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며 목을 더듬던 엘리자벳이 까무러쳤다.
제인은 핏기가 사라져 가는 엘리자벳의 몸을 붙잡고 궁의를 불렀다. 주변 시녀들이 엘리자벳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사람이 몇 시간을 주물렀을까.
한참 후에야 엘리자벳은 혈색을 되찾았다. 제인은 창백한 얼굴 위로 작게 떠오른 분홍빛 뺨을 연신 쓰다듬었다. 불쌍한 우리 전하.
엘리자벳은 며칠 의식이 없을지 모른다는 궁의의 걱정과는 다르게 새벽녘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행동은 궁의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어난 엘리자벳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제 몸을 자해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뜯고 침대 기둥에 이마를 찧는 행동에 제인이 엘리자벳을 잡아 세웠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평소의 그녀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하며 저 자신을 자해했다. 온몸이 상처로 가득 찼다.
제인은 그날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엘리자벳이 깨어나 있을 때는 그녀의 자해를 말리느라, 쓰러져 있을 때는 언제 일어나 자해를 시작할지 몰랐으므로 제인은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끔찍한 며칠이 흘러갔다.
* * *
페루스는 비어 있는 서랍을 괜히 찼다.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할 종이는 사라졌다. 아마 서약의 매개체였던 황제가 죽었기 때문이리라.
으드득 소리와 함께 그는 이를 갈았다. 설마 그놈들이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황제는 그에게 있어 당장 죽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언젠가는 제 손으로 죽여 없애 버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감히! 감히!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각하 제임스입니다.”
제임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온 신경이 뻗쳐 있던 페루스는 그를 향해 펜을 집어 던졌다.
“일을 어떻게 한 거지!”
제임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죽음에 전반적인 책임은 에셀 라세르에게 있었지만 암암리에 감시를 맡고 있던 자신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눈앞의 주인에게는 그랬다.
한참 그를 노려보던 페루스는 시가를 물더니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녀는?”
“여전하십니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책상 위 물건들이 떨어져 박살 나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잔이 꿇어앉아 있는 제임스의 뺨을 스쳤다. 주르륵하고 피가 흘렀다.
페루스는 눈앞 제임스의 상처 따위 관심 없었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단 하나였다.
죽은 황제의 동생. 엘리자벳 황녀. 멍청한 엘자.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쌉쌀한 향이 폐에 가득 찼다 다시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
여자가 며칠째 자해를 하고 있다 했다. 이대로 두면 위험할 수 있다고 알려 오던 궁의를 그는 검으로 베어 버렸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조리 다 찾아 놔. 살려서 끌고 와야 할 거야.”
제임스는 주인의 말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주인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제임스는 일어서 방 안을 둘러봤다. 온갖 것들이 깨지고 박살 난 방은 주인의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조용히 시녀를 불렀다.
“빨리 치워.”
시녀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주인이 오기 전에 방은 원래의 모습을 찾을 터였다.
그리고 주인도 돌아오면 원래의 모습을 찾으시겠지. 제임스는 등을 돌려 방문으로 향했다.
그새 시녀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 있었다. 그는 시녀에게 대강 주의점을 알려 주고 방을 나왔다. 뒤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 *
궁 안 사람들이 엘리자벳과 페루스를 쳐다봤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페루스의 손에 잡혀 위태로이 끌려가고 있었다.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신발이 질질 끌렸다. 엘리자벳은 여전히 비참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페루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가는 손목을 잡고 걷고 있었다. 빠른 속도에 결국 엘리자벳이 넘어졌다.
흙바닥에 드레스가 더러워졌다. 페루스는 끌려오지 않는 엘리자벳을 바라보다 그의 어깨에 들쳐 업었다. 엘리자벳이 버둥대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 움직이기가 쉬워진 발을 옮겼다. 엘리자벳과 페루스는 순식간에 궁 외곽으로 사라졌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끌고 장미궁으로 가는 중이었다. 제정신이 아님에도 길은 기억하는지 엘리자벳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가는 다리가 벗어나고 싶다는 듯 허공을 달렸다. 그러나 남자의 팔은 단단했다.
“그때처럼 머리채 잡히기 싫으면 가만있어.”
그러나 그 말에도 여자는 여전히 바둥거렸다.
“제인인가 하는 여자가 죽는 꼴을 보고 싶나? 응?”
그제야 엘리자벳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제 사람은 생각나는 모양이지.
페루스가 조소를 했다. 엘리자벳은 이제 시체처럼 힘을 빼고 있었다. 하지만 관목 너머 장미 향이 가득한 작은 궁이 나오자 그녀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점차 커지는 떨림에 페루스의 입에 물린 조소가 더욱 깊어졌다.
마침내 페루스의 걸음이 멈췄다. 그들의 눈앞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궁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초봄을 맞아 온 정원에 빨간 장미가 몽우리를 드러냈다. 아직 제대로 피지 않아 향이 약한 장미는 그래도 모여 있으니 제법 향을 뿌리고 있었다. 진한 장미 향 사이로 페루스는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궁 안으로 들어와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엎어진 여자는 미동이 없었다.
페루스는 침대로 다가가 엘리자벳의 얼굴을 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홀쭉해진 볼은 창백했고 이마는 붕대로 둘둘 감겨 있었다.
전형적인 환자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엘리자벳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세게 당겨진 천과 함께 처연한 얼굴이 그의 앞에 자리했다.
녹안에 빛이 없었다. 그저 흐리멍덩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본능인지 엘리자벳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왔다. 이지를 잊고 잠식된 눈 너머로 공포가 언뜻 비쳤다.
이거면 됐어. 원초적인 감정을 본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곳으로 엘리자벳을 끌고 온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래. 편히 미치면 안 되지. 이리 편히 네 오라비를 따라가면 안 되지. 너 혼자 편해지도록 내가 그리 둘 듯싶은가.
그가 던지듯 엘리자벳을 내려놨다. 이곳이 장미궁임을 인지한 그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억과 겹쳐 최근 이곳을 방문했던 기억이 한꺼번에 그녀의 머리로 밀려들어 왔다.
엘리자벳이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그녀는 픽 하고 쓰러졌다.
* * *
엘리자벳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아파 왔다. 정확히는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여긴 어디지?’
의문과 함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짝―
그런데 무언가 엘리자벳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그대로 엎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리엇!”
페루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의 눈에 순간 조금 놀랐다. 두려워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몸을 떨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잃을 게 없다는 건가? 아니면 공포보다 분노가 큰 것인가? 둘 중 무엇이 되었건 제정신이 돌아온 여자는 필사적으로 공포를 누르고 있었다.
“그새 배운 게 있는 모양이지. 그리 노려보는 걸 보면 말이야.”
“왜 그랬어요?”
페루스는 평생 엘리자벳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는 물론이고 멍청하게 헤실거리던 그 시절에도 엘리자벳은 그가 조금만 인상을 찌푸리면 눈동자를 떨곤 했다.
페루스는 새삼 엘리자벳에게 엘리엇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저런 독기 어린 눈이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왜 그랬느냐 물었어요! 나는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다, 다 했는데! 대체 왜! 엘리엇을 살려 준다 약조했잖아!”
“저 혼자 죽은 걸 내가 어찌 알지?”
“이!”
엘리자벳이 악을 쓰며 페루스에게 덤벼들었다. 온 힘을 다한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짝―
그러나 마찰음과 함께 엘리자벳은 다시 나동그라졌다. 양 볼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의 뺨을 봤다. 아까보다 색을 띠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악!”
그는 쓰러진 그녀의 머리를 잡았다. 헝클어졌음에도 반질거리며 윤기를 자랑하는 머리가 그의 손에 감기듯 잡혔다.
퉤하는 소리와 함께 피 섞인 침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녹색 눈은 온통 원한으로 가득했다.
페루스는 엘리자벳을 보며 웃었다. 얼굴을 닦은 그의 손이 올라갔다.
짝―
엘리자벳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아까보다 더 타올랐다. 찾아냈던 공포는 그새 어디로 갔는가.
페루스가 엘리자벳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없었다. 비참함과 공포가 눈에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페루스의 손이 올라갔다.
짝―
“아니지. 엘자.”
짝―
“넌 살아만.”
짝―
“있어야지.”
짝―
“이리 기어오르면.”
짝―
“안 되지. 망한 가문의 황녀님이 아니신가.”
짝―
“응? 황녀님.”
말을 툭툭 끊어 내며 페루스는 손을 휘둘렀다. 그의 입장에서야 조절하며 힘을 뺏다고는 하나 엘리자벳에게는 무시무시한 폭력이었다. 무자비한 폭력에 엘리자벳은 반항 한번 못 하고 휘둘렸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목을 타고 시트 위로 몇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잔인한 폭력에도 엘리자벳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페루스를 마주 봤다. 가느다란 손이 올라갔다.
짝―
페루스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 저번에는 왼뺨이더니 이번엔 오른쪽이군.
페루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자벳을 봤다. 저를 때린 손이 아픈지 그녀는 손목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반쯤 감긴 눈은 여전히 그를 죽일 듯이 보고 있었다.
그가 엘리자벳의 머리를 뒤로 당겼다. 뒤로 최대한 넘어간 얼굴 밑으로 길고 가는 목이 나타났다. 땀과 입에서 흐른 피로 목은 반들거리고 있었다.
페루스는 여자의 목으로 이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세게 물었다. 비린 향이 몰려오며 허덕대는 숨과 펄떡대는 여자의 심장이 그대로 그에게 전해졌다.
어쩐지 만족스러운 느낌에 페루스는 더 세게 엘리자벳의 목을 물었다. 그러자 엘리자벳이 저항을 하며 그의 얼굴을 긁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부딪쳐 그 손을 막아 냈다.
곧 서로의 힘에 그들은 함께 침대로 쓰러졌다.
* * *
하얀 목에는 스스로 낸 상처가 무수했다. 자그마한 칼로 그어 놓은 듯한 상처는 덜 아물어 아직 빨간 선을 간직하고 있었다.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목, 그 위에 그어진 선, 또 그 위에 박힌 잇자국. 엘리자벳의 목은 흡사 들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었다.
페루스는 온통 상처 입은 엘리자벳의 목을 쳐다봤다. 붉은 목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목 바로 위에 자리한 얼굴은 살아 있었다. 온갖 증오를 담고.
“네가 나를 그리 볼 자격이 있나?”
“살인자.”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는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살인자라…….”
페루스는 엘리자벳이 내뱉은 단어를 곱씹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라……. 그는 그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
물론 그의 앞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리 대놓고 그에게 살인자라 부른 이는 눈앞의 엘리자벳과 그에게 죽어 간 사람들 정도일까?
페루스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실이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가며 무수한 목숨을 베어 넘겼다. 그는 자신의 살인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들이 저에게 한 짓을 생각한다면, 살기 위해서라면 그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이라도 자신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그 말을 해도 좋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엘리자벳은, 오로르의 핏줄은 감히 그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뒤에서건 앞에서건 엘리자벳이 그를 살인자라 부르는 것은 참을 수는 모욕이었다.
“으, 읍…… 윽.”
“아니지. 다른 이는 몰라도 오로르는 내게 그 말을 할 수 없지.”
페루스는 힘껏 엘리자벳의 목을 졸랐다. 밑에서 숨을 쉬려 거칠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팔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그러나 그는 힘을 놓지 않았다.
‘페루스! 커서 너랑 결혼할 거야.’
‘나는 잘 지내. 페루스.’
‘너를 보고 싶어. 페루스.’
‘페루스 다시 만나. 만나서…… 흑.’
‘당신을 사랑해요. 페루스.’
순간 무수히 많은 엘리자벳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엘리자벳들이 그를 불렀다.
페루스, 페루스, 페루스, 페루스, 페루스…….
페루스의 손아귀 힘이 풀렸다. 그의 밑에서 엘리자벳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붉은 목에는 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자신이 만든 색에 페루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손을 들어 다시 엘리자벳의 목에 가져갔다.
그러나 부들거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엘리자벳의 얼굴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손 위로 파란 핏줄이 불거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왔다. 그 자극에 그는 눈을 깜박였다. 웬 뜨거운 액체가 한 방울 눈 밑으로 떨어졌다.
페루스는 빠르게 침대에서 물러나 얼굴을 비볐다. 액체가 마찰에 의해 금방 사라졌다. 저를 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엘리자벳이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만졌다.
페루스는 시야를 내려 엘리자벳을 봤다. 엉망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엘리자벳의 목과 얼굴, 그 밑에 구겨진 시트와 핏자국이 그의 눈에 들었다.
퉁퉁 부은 뺨 위로 엉망이 된 은빛 머리채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가련했다.
‘가련해?’
페루스는 입술을 꾹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는 엘리자벳을 노려봤다. 핏발이 선 파란 안광이 엘리자벳을 향했다.
그래 저 얼굴이 문제였다. 저를 홀리는 저 얼굴! 엘리자벳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겉가죽으로 그를 홀렸다.
처연한 눈을 하고서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 마녀를 꼭 빼닮은 주제에! 페루스는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페루스가 이를 갈며 다시 엘리자벳에게 다가갔다. 이곳으로 끌고 온 목적은 애초에 엘리자벳을 범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밑에서 절망에 빠져 울어야 했다. 얼굴이 문제라면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개처럼 엎어 놓고 안으면 저 얼굴 따위 보이지 않겠지. 그는 좀 더 엘리자벳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발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죽어 버려. 이 살인자!”
정신을 차린 엘리자벳이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신 따위를! 너 따위를 내가 사랑했다니! 그렇게 원했다니!”
한번 터져 나온 미움이 끝없는 파도가 되어 몰아쳤다. 엘리자벳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악을 썼다. 그런 엘리자벳을 보던 페루스는 결국 몸을 돌렸다.
페루스는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엘리자벳의 비명은 계속됐다. 계속해서 그의 등을 치는 소리의 대부분은 그를 저주하는 것이었다.
그는 걸음을 좀 더 빠르게 했다. 거의 뛰는 꼴이 우스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죽어! 죽어! 그냥 죽어 버려! 살인자!”
뒤에서 울음과 함께 계속해서 저주의 말이 들렸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욕적인 말에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페루스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방을 나서 복도를 걸었다. 적막한 궁에는 엘리자벳의 비명만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 * *
원탁에 툴란에서 가장 유명한 사내 셋이 앉았다. 시종들이 그들 앞으로 각자 마실 것을 올리고는 물러났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잘생긴 얼굴이 말이 아닌데?”
시종이 물러난 후 타티카가 자잘한 상처가 난 페루스의 얼굴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빙글거리는 것이 놀리는 것과 같았다.
“계약에 대해 다시 말해야 할 것 같군.”
그러나 페루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 말에 검은 머리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딴 계약 이제 그만두지. 어차피 엘리엇…… 아니 황제도 죽지 않았나.”
에셀이 페루스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계약을 끝내자 하는 거야? 우리 중에 제일 처지는 주제에!”
“그럼 이대로 어쩔 겁니까? 황녀는 이제 우리와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녀는 애초에 황제의 목숨을 대가로 묶여 있던 겁니다.”
“황제는 우리가 죽인 게 아니잖아? 왜 내가 잘못도 없이 황녀님을 포기해야 해?”
“그럼 그녀는 무슨 잘못으로 계속 그리 당해야 합니까!”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게다가 애초에 네 목적은 오로르에 복수하는 것이 아니었어?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아 혹시 그날 내가 도움 준 것 때문에 황녀님과 몸정이라도 들었나아?”
“……이!”
“저런 갈대 같은 오라비를 둬서 어쩌나. 여동생이 하늘에서 울겠어.”
타티카는 발끈하며 일어서는 에셀을 보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 모습에 에셀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곧 차가운 목소리가 팽팽한 대치를 갈랐다.
“거기까지 하지. 그리고 에셀 라세르, 경은 뜻대로 계약에서 빠져도 좋아.”
“그 무슨! 페루스 네놈은 우세리 공과 계속해서 이 짓을 이어 가겠다 이 말인가?”
에셀은 검을 뽑아 페루스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날카로운 예기에도 페루스는 조소만 흘릴 뿐이었다.
“어이가 없군. 누가 보면 경이 그동안 그녀를 위하며 지킨 줄 알겠어.”
“!”
“그리고 계약에 빠지라는 건 선택하란 뜻이 아니야. 경은 우리와의 약속을 어겼어. 기한이 지났건만 아직도 가문을 못 가지지 않았나. 라세르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누이에게 가문을 빼앗기기 직전인 경은 앞으로의 계약에 자격이 없다 보는데.”
“네놈한테 자격을 정할 권리 따위 준 적 없다! 더는 그녀에게 손대는 것은 용납이 안 돼!”
“우와. 뻔뻔해.”
에셀의 말에 타티카가 과장되게 말했다. 페루스는 에셀을 보며 더욱 입꼬리를 올렸다.
“경이 무얼 할 수 있지? 나와 공작은 각각 남부와 서부의 지배자야. 그런데 경은? 북부의 군권을 가졌나? 아니면 북부의 재력을 손에 넣었나? 그도 아니면 이름뿐이더라도 북부의 주인인가? 아니지. 경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 그런데 경이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를 막을 건가?”
“…….”
“경은 자격이 없어.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어도 안 돼. 황제의 짝은 적어도 한 지역의 지배자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깐.”
황제라는 단어에 에셀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페루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황녀는 다음 황제가 될 거다.”
“그게 말이 되나!”
“남은 황족이 그녀뿐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허나!”
“툴란의 법이 그렇지. 아니면 반역이라도 일으킬 참인가?”
에셀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페루스를 보며 입만 벌렸다. 저놈은 끝까지 그녀를 묶어 둘 참이었다. 끝까지 그녀를 지옥에 둘 참이었다.
“그 일은 엘자의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충분히 복수를 하지 않았나. 그녀는 너로 인해 아비를 잃었어. 그리고 이제 오라비도 잃었다. 이만하면 가문의 복수를 한 셈이 아닌가?”
“황녀를 황제로 세우는 일에 왜 내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군. 난 그저 법을 따를 뿐, 오로르의 마지막 핏줄을 황제로 세우는 게 잘못되었나? 그리고 난 애초에 말했네. 그녀의 몸을 탐하고 싶다고.”
“페루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내가 네놈 속셈을 모를 줄 아나! 그리 사람을 괴롭혔으면 그만둬야지. 그렇게 끝까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어! 특히 너라면 더!”
“난 아까부터 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
에셀은 페루스를 노려봤다. 찢어발길 듯 노려보는 시선에도 파란 눈은 차분했다.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끝까지 그리한다면 내가 막을 것이다.”
한참 숨을 몰아쉬던 에셀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쾅 하는 소리가 방 안 전체에 울렸다. 하지만 그 큰 소리에도 파란 눈은 지독히 차분하게 앞만을 볼 뿐이었다.
“음, 기사님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놀랐는걸?”
“공도 반대할 생각인가?”
“아니. 난 좋아. 황제가 되는 황녀님이라……. 괜찮은 거 같아.”
* * *
엘리자벳은 자신 앞에 선 에셀을 보지 않았다. 그녀의 고개는 그를 비껴 옆 바닥을 향할 뿐이었다. 그 공허한 모습에 에셀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건 그가 바랐던 상황이 아니었다.
“엘자. 나는 북부로 가야 해. 가서 누이와 싸워야 해.”
“…….”
“너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깐…….”
“…….”
절절한 말에도 엘리자벳은 끝까지 에셀을 보지 않았다.
그때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외면에 이렇듯 가슴이 미어졌을까. 아니 더했겠지.
에셀은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에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아팠을 엘리자벳을 생각하니 지금의 통증조차 사치로 느껴졌다.
“부탁이니 조금만 참아.”
“…….”
“네가 조금만 기다려 준다면 반드시 너를 지키러 오겠어.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그때 너에게 용서를 비마. 물론 용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너를 지키게만 해 다오.”
역시나 답은 없었다. 그는 말이 없는 엘리자벳을 보다 그 앞에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러고는 양 무릎을 꿇었다.
그가 경건하게 검을 들어 엘리자벳에게 바쳤다. 하지만 그녀는 검을 받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바닥만 볼 뿐이었다.
매정한 외면에 포기할 법도 하건만 검을 든 에셀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검을 뽑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들었다.
라세르가의 문양이 햇빛에 존재를 뿌렸다.
“기사 에셀 라세르, 저는 당신을 지킬 것을 제 목숨과 명예를 걸고 검 앞에 맹세합니다.”
짧지만 숭고한 울림이 에셀의 입을 타고 나왔다. 그가 말을 끝낸 후 검으로 자신의 팔을 살짝 그었다. 피가 하얀 칼날 위로 흘렀다.
마침내 검신을 타고 내려온 피가 라세르가의 문양에 다다랐다. 문양이 피로 인해 더욱 진하게 드러났다.
에셀은 한동안 그것을 보더니 일어났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의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다녀올게. 엘자.”
방문이 닫혔다. 에셀의 미련이 남은 목소리와 달리 엘리자벳을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에셀이 떠난 후에도 같은 자세로 바닥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햇빛 아래로 검은 머리의 기사가 뛰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를 보다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몸조심하길…….”
미처 전하지 못한 인사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고요히 허공을 갈랐다.
* * *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궁은 흑백으로 가득 찼다. 황제가 있었던 중앙궁을 비롯한 대다수의 궁에는 검은 천이 씌워졌다. 그리고 그 위를 하얀 꽃이 장식했다.
궁인과 궁에 드는 이는 모두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막 시작되는 봄날의 꽃밭 사이로 지나가는 검은 인영들은 꽤나 이질적인 모양새였다.
커다란 홀에서 나이 든 시종이 망자에게 올리는 고별문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고별문에는 죽은 황제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툴란을 얼마나 번성시켰는지 등의 내용이 담겼다.
고작 2년 동안 제위에 있었던,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을 침실에서만 보냈던 황제에게 바치는 글치고는 훌륭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그가 행하지 않았던 위업까지 추가되었건만 장례식에 참여한 어떤 이도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불행한 삶을 살다 간 망자에게 그 정도의 자비는 다들 베풀 줄 알았다.
한참 후 목을 가다듬으며 늙은 시종이 말을 마쳤다.
이후 검은 의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 황제의 관 앞에 흰 꽃을 내려놨다. 몇몇은 억지로나마 눈물을 짜내 닦으며 황제를 기렸다. 그러고는 관 옆에 자리한 황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심심한 위로의 표시를 했다.
오후가 되며 햇빛이 높다란 창문을 통해 바닥에 닿았다. 한번 유리를 거친 빛은 제법 따사로웠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색감의 빛이 오라비를 잃은 황녀를 위로하듯 비췄다.
그러나 황녀가 입은 검은색 상복은 빛 따위 흡수해 버렸다. 빛이 비침에도 그녀 주변 분위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온갖 보석과 꽃으로 치장된 화려한 관 옆에 자리한 황녀는 그저 제례에 필요한 물건인 양 앉아 있기만 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무감한 황녀를 본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오라비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없는 것 좀 보세요. 저리 매정하셔서야, 쯧.”
“너무 슬프셔서 그러시는 게 아니겠소. 알다시피 황녀는 이제 모든 핏줄을 잃었으니…….”
“그러기에는 너무 꼿꼿하잖아요? 이건 제가 들은 소문인데 황녀가 곧 황제의 자리에 오른답니다.”
“그 소문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공작님들이 가만히 놔두겠소?”
사람들의 시선이 황녀에게서 다른 이로 향했다. 허나 사람들의 시선에도 조문객들의 자리 가장 앞에 자리한 남자들은 황녀만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다시 수군거렸다.
“저것 보세요. 두 분 다 황녀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민망한 소문이 사실인 게지요. 그 왜 황녀께서 몸으로 공작가분들을…….”
“쉿. 황녀는 몰라도 두 분 공작께서 계시는데 듣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경을 치지! 그러고 보니 공작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북부 라세르가 사람들은 아무도 안 보이는군.”
“북부는 지금 후계권으로 시끄럽지 않습니까. 라세르 경이 피 안 섞인 누이를 베러 며칠 전 북부로 출발했다 하더군요.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장례식 따위 눈에 들겠습니까.”
“어찌 되었건 올라온 김에 공작님들께 눈도장이나 잘 찍어 두고 가야지. 그게 아니면 이런 데 참석할 이유가 있나.”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이번에 따님도 데리고 올라오셨다고. 혹시…….”
“크흠. 그런 거 아닐세. 그저 그 아이가 수도 구경을 하고 싶다 하여 견문도 넓혀 줄 겸 사윗감도 찾을 겸 데려온 거지.”
“백작 영애가 나날이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건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마침 두 공작님 모두 배필이 없으시니…….”
엘리자벳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로 인해 자리를 박차고 소리치고 싶었다.
제아무리 너희에게 무시당했던 황제라 하나 이름뿐이라도 황제이지 않느냐. 너희의 주군이지 않느냐. 어찌 그렇게 끝까지 엘리엇을……. 내 오라비를…….
아무도 엘리엇을 추모하지 않았다. 겉으로 숙연한 척 슬픈 척 꾸미는 것도 잠시였다.
사람들은 잔인할 만큼 금방 태도를 바꿔 저들의 이익을 살폈다. 엘리엇의 마지막에 이따위 것들이 있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엘리자벳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검은 베일이 그녀와 함께 밑으로 내려앉았다. 후드득 떨어진 눈물이 얇은 장갑 위로 스미며 그녀의 맨살에 닿았다.
“황녀님 운다!”
“…….”
“내가 가서 위로해 줘야겠지? 난 신사잖아.”
페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타티카를 잡지 않았다. 대신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저리 구는 군상들이 몇 번째인가. 그가 본 황제의 장례식은 항상 비슷했다. 조부의 장례식에서, 그 마녀의 장례식에서, 선대 황제의 장례식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사람들은 언제나 같았다. 언제나 똑같은 행동과 말을 했다. 다들 망자를 기리는 검은 옷을 입고 망자를 위로하는 흰 꽃을 들었건만 진심으로 황제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의 눈에 곧 엘리자벳이 잡혔다. 억지로 붙들린 듯 남자에게 잡힌 손은 작게나마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는 하얀 손을 따라 엘리자벳의 몸을 바라봤다. 며칠 새 더 말랐는지 드레스가 헐렁한 듯싶었다.
까만 천으로 덮은 목은 제 한 손에 들어찰 듯 가늘었다. 하지만 곧 죽을 듯 가냘파졌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페루스는 제 뒤에서 엘리자벳을 응시하는 다수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자벳을 본 순간부터 그녀만을 보고 있었다.
검은 베일을 쓰고 있어도, 검은 천으로 온몸을 둘러싸도 그녀는 사내들의 시선을 모았다.
제 조모를 빼닮은 저 반반한 얼굴은 어딜 가나 항상 문제였다. 오라비의 장례식에서도 사내를 끌다니. 페루스의 입가가 뒤틀렸다.
* * *
“나랑 말도 안 할 거야?”
엘리자벳은 잡힌 손을 빼기 위해 힘을 줬다. 하지만 고작 움찔거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타티카가 그다지 힘을 준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입술을 물었다.
“울면 안 되지. 아깝잖아.”
긴 손가락이 베일 밑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엘리자벳의 뺨을 잡고는 힘을 줬다.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입술을 물고 있던 이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치워요.”
“이제야 말을 하네. 난 황녀님이 벙어리가 되어 버린 줄 알고 걱정했잖아.”
“…….”
“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얼마나 예쁜데.”
엘리자벳은 끈적하게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 손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다수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몇몇은 이리로 시선을 힐끗거렸다.
모욕감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타티카는 그녀의 심기 따위 알 바가 아니라는 듯 더욱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침내 그녀의 목을 쓸며 타티카가 붉은 입술을 그녀의 귀 옆에 가져다 댔다. 살짝 치운 베일 밑으로 느껴지는 더운 숨에 소름이 돋았다.
“내 밑에서 예쁘게 울어야 하는데 벙어리가 되면 안 되지. 황녀님.”
혀가 귀를 한 바퀴 휘감고는 물러났다. 대놓고 하는 희롱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엘리엇이 옆에 누워 있는데, 오라비가 저를 떠나 관에 누워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 자리에서까지.
그녀는 손을 위로 올렸다. 저 얼굴을 한 대 내리쳐야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올린 손은 너무나 쉽게 타티카에게 잡혔다. 그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힘으로 내리눌렀다.
“보는 눈이 많아. 황녀님.”
그걸 아는 자가 그런 행동을! 모욕감에 그녀의 귀가 붉어지며 결국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그냥 엘리엇을 따라가야…….’
“황녀님. 이상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어떻게 그녀의 생각을 알았는지 타티카가 조용히 말하며 뒤로 시선을 줬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는 제인이 작은 여자아이와 있었다. 아이는 장례식이 지루한지 제 엄마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녀 옆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다정히 시선을 맞췄다. 단란한 가정이었다.
“황녀님한테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
아무 말 없이 손만을 움켜쥐는 그녀에게로 타티카가 다시 가깝게 다가왔다. 살짝 옆으로 튼 그의 몸 너머 인영들이 또렷했다.
제인은 여전히 그녀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다가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서는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런 것들이 있다는 거야.”
“…….”
“황녀님은 외면하지 못하지. 저것들이 어찌 될까 무서워서.”
계속되는 아이의 칭얼거림에 남자가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가 제 아버지의 팔에 앉아 이쪽을 바라봤다. 작은 손가락을 빠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이가 그녀를 보더니 아버지의 품으로 얼굴을 숨겼다. 아마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무서웠으리라.
“그러니 살아야지. 저 귀여운 손가락이 잘리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타티카는 아이를 보다 말고 황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베일 너머 눈이 커진 채 가족을 보는 모습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이리 쉬운걸…….’
타티카의 눈이 페루스를 향했다. 그도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타티카는 페루스가 똑똑한 듯싶다가도 멍청하다 생각했다. 저보다 황녀를 오래 봐 왔다는 그는 요 며칠 황녀가 어찌 될까 불안한지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표는 나지 않았지만 남자가 태우는 시가 개수가 평소의 두 배임을 타티카는 금방 알아챘다. 게다가 뭐가 그리 두려웠는지 결국 엘리자벳을 장미궁으로 끌고 가기까지 했다.
왜 그리 사서 고생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몇 마디 던지고 올가미만 걸면 되는 것을.
엘리자벳 같은 이는 제 주변에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유형이었다.
‘……뭐 좋은 말로는 착한 사람. 나쁜 말로는 멍청한 사람?’
타티카는 다시 몸을 돌려 엘리자벳의 손을 잡았다. 올가미에 제대로 걸렸는지 하얀 손은 이번에는 그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자색 눈이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정말이지 그의 황녀님은 쉬워도 너무 쉬웠다.
* * *
엘리자벳은 보호라는 명분 아래 궁에 갇혔다. 본래라면 10일의 장례식 중 앞으로 남은 9일도 자리를 지켜야 했건만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내보내 주지 않았다. 그저 궁에 박혀 홀로 엘리엇을 기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손에 쥐고 있던 펜던트가 열렸다. 이제는 유품이 돼 버린 물건 안에는 엘리엇과 그녀가 함께 자리했다.
그녀는 가만히 오라비를 쓰다듬었다. 어찌 보면 오라비는 더 편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처럼 이리 궁에 박제된 채 사는 것보다야 일찍 쉬는 게……. 아니, 안 될 생각이었다.
엘리자벳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리엇의 목에는 얇은 선이 있었다. 목깃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라비가 어찌 죽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어! 죽어! 그냥 죽어 버려! 살인자!’
며칠 전 그에게 소리치던 자신이 떠올랐다. 멍청한 엘리자벳. 그 순간까지도 그를 향해 그저 죽어 버리라고 소리쳤다.
아비를 죽인 원수의 손에 오라비까지 죽었는데 고작 하는 말이 죽어 버려라니. 그녀가 그리 소리친들 그가 죽을 리가 있나. 죽기는커녕 계속해서 그녀를 모욕하며 더 잘 살겠지. 자신에 대한 자조로 엘리자벳은 삐죽 웃음을 지었다.
“죽여 버려야지.”
순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말을 뱉는 순간 그녀는 진심이었다.
“휴우.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황녀님?”
툭하고 다른 목소리가 엘라자벳을 방해했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이 중 하나가 있었다.
* * *
타티카는 참을 수 없었다. 화려한 관 옆에서 홀로 앉아 숙연히 있는 엘리자벳을 본 순간 그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장갑에 검은 베일을 쓴 황녀님이라니. 평소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쁜 황녀님이었지만 오늘 황녀님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다.
검은 상복은 빛 한 점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엘리자벳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베일이 어떻게든 그녀의 말간 얼굴, 붉어진 눈가, 떨리는 목소리를 숨겨 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카는 온통 검은 천으로 가려진 엘리자벳이 얼마나 예쁜 얼굴과 야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타티카는 자신을 경계하는 엘리자벳에게로 다가섰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엘리자벳은 여전히 아까의 차림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베일을 벗었다는 것 정도?
그가 탁자에 놓여 있는 검은 베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피하는 엘리자벳의 턱을 잡아채 얼굴을 고정시킨 후 베일을 씌웠다. 긴 베일이 순식간에 엘리자벳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타티카는 손을 떼고는 예술품을 감상하듯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이 무슨!”
엘리자벳은 그가 손을 떼자마자 거칠게 베일을 끄집어 내렸다. 하늘거리며 베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아쉬워진 그의 입에서 절로 시무룩한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얼굴을 다 드러낸 엘리자벳 님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저 눈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보석이 아닌가.
엘리자벳은 여전히 그를 경계하며 의자 뒤로 최대한 몸을 붙이고 있었다. 팔걸이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꼴을 웃으며 보다 엘리자벳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당겨 오는 힘에 엘리자벳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일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한쪽은 온 힘을 다해 끌려가지 않으려 애를 썼고, 다른 한쪽은 그걸 구경하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던 중 지루해진 그가 슬쩍 힘을 더 줬다. 그러자 짧은 비명과 함께 엘리자벳이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넘어졌다. 넓게 퍼진 검은 드레스는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인과 함께 몹쓸 꼴로 구겨졌다.
“놔요! 당장 놔!”
오라비의 죽음 이후 그의 황녀님이 앙칼져졌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그 신의 힘을 담았다는 종이 쪼가리가 사라져서 그런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주제에 기가 이리 살아서야.’
피곤할 따름이었다. 꺾어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타티카는 넘어져 무릎을 꿇고 있는 황녀를 내려 봤다. 그녀는 일어서지도 못한 채 어떻게든 잡힌 팔목을 빼려 팔을 흔들고 있었다.
타티카는 손에 힘을 좀 더 줬다. 그러고는 하얀 손을 자신의 아랫도리에 가져갔다.
“여기가.”
엘리자벳이 경악하며 다른 팔로 자신의 팔을 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티카에게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힘이었다.
그는 엘리자벳의 팔목을 잡고 더욱 자신의 몸을 누르게 했다. 주먹을 쥐며 버둥거리는 손에 그의 것이 더욱 흥분했다.
“황녀님에게 흐응……. 얼마나 반응하는지 알겠어?”
그는 힘을 조금씩 줬다 뺐다 하며 누르는 압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천 밑에서 그의 것이 내보내 달라며 크기를 키워 갔다. 그걸 느꼈는지 하얀 손이 어떻게든 닿기를 거부하려 애썼다. 즐거웠다.
“그만……. 그만해요.”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결국 타티카의 밑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까의 앙칼진 얼굴은 그새 충격으로 인한 눈물로 가득했다.
고작 이따위 것으로 울다니 참.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긴 궁 안에서 곱게 자란 황녀가 어디에서 이런 걸 해 봤겠는가.
계속해서 그만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하지만 타티카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다른 손으로 제 하의를 풀었다. 갑갑하게 갇혀 있던 물건이 기다렸다는 듯 퉁 튀어나왔다.
“쥐어 봐. 황녀님.”
그가 뜨거운 살덩이로 하얀 손을 툭툭 치며 명령했다. 그러나 불쾌한 감촉에 엘리자벳은 울며 손을 더욱 오므렸다. 밑으로 떨어진 고개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안 해? 그럼 입에 처넣어 줄까?”
몰려오기 시작한 흥분감에 그가 나지막하게 협박을 했다.
그러나 그 말에도 황녀는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황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러고는 은빛 머리채에 손을 올렸다.
“한 번만 더 말할 거야. 그 예쁜 손으로 쥐어. 아니면 정말 입에 물려 줘? 사실 당장 밑구멍에 쑤시고 싶은데 참는 거야. 그래도 황녀님 가족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잖아?”
머리에 가해지는 힘을 느낀 엘리자벳은 결국 단단한 살덩이에 손을 올렸다. 그 감촉에 그가 팔목을 잡은 손을 풀고 황녀의 손 위로 한참 큰 그의 손을 포갰다. 곧 두 손이 함께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흣, 고개 들고 나 봐. 황녀님.”
한창 부드러운 손을 즐기던 그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밑에서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었다. 그저 떨리는 어깨만 있을 뿐이었다.
“오늘따라…… 읏, 황녀님이 왜 이리, 말을 안 들을까? 혼나고 싶어?”
결국 엘리자벳이 살짝 고개를 올렸다. 반쯤 넋이 나간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타티카는 떨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고양감에 빠졌다.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잡힌 엘리자벳의 손은 이미 힘을 완전히 빼고 있었다. 말랑한 감촉에 그의 것이 계속해서 꿈틀댔다.
“흐으…….”
마침내 그의 신음과 함께 백색의 액체가 엘리자벳의 손과 얼굴, 그리고 가슴께에 뿌려졌다.
“아, 아으…….”
충격이 컸는지 엘리자벳의 작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가여울 법도 했건만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좋았던 타티카는 욕심을 채우고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흐…… 흐윽. 제발…….”
처량한 부탁이 다시금 시작됐다. 그제야 타티카는 손을 풀었다. 툭 하고 밑으로 떨어진 하얀 손에는 번들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었다.
힘조차 주지 못하고 떨어진 손과 고개를 보며 타티카는 그저 미소 지었다. 상태를 보건대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꽤 할 만하지? 힘도 거의 안 들고. 다음번에는 요 머리카락이 좋겠어. 부드러워서 꽤 만족스러울 거 같아.”
다음이라는 말에 엘리자벳이 몸을 모았다. 그러게. 왜 덤벼서는.
타티카는 바닥에 떨어진 베일을 집어 들어 손을 닦았다. 검은 베일에 하얀 정액이 묻어났다.
그가 뒤돌아 방 밖으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상쾌한 걸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더러워진 베일이 팔랑거리며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엘리자벳은 타티카가 나가고도 한참 동안을 엎드려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흐려진 시야로 무언가 묻은 손이 보였다. 툭툭 소리를 내며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전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제인…….
“제인…… 제인……. 난…… 나는…….”
제인이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안아 왔다. 꼭 안아 주는 품이 따뜻했다.
“난…… 더 이상 흑…… 견딜 수가 없어. 흐윽…… 정말…… 더 이상 견딜 수가 흑……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엘리자벳은 엉엉 오열하기 시작했다. 정말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다른 것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녀로 인해 더 힘들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랬다.
이제 이런 삶은 싫었다. 정말 견딜 수 없었다.
“떠나요.”
그런 엘리자벳을 안아 주던 제인이 조용히 말했다. 아이를 쓰다듬듯 토닥이는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떠나자는 말에 엘리자벳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빨간 눈가가 안쓰러웠다. 제인이 엘리자벳의 눈가를 쓸며 다시 한번 조용히 말했다.
“우리 동부로 떠나요. 전하.”
* * *
엘리자벳은 떠나자는 제인의 말에 그녀의 품에서 계속해서 오열했다. 달래 주던 제인이 탈진을 걱정할 만큼 목이 쉬어라 울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목을 적셨다. 옷 밑으로 붕대가 축축이 젖어 가며 상처가 따끔거렸다.
엘리자벳은 그 아픔을 핑계로 마음껏 울었다. 2년간 눌러놓은 온갖 감정이 일시에 몸 전체에서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2년 전, 불행이 닥쳤을 때 그녀는 연인을 비롯해 복수하는 자들을 머리로나마 이해하려 했다.
조모가 벌인 일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고 원한을 쌓을 만한 것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 어떻게든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당시 그녀는 멍청하게도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했다. 결국 조모의 죄로 아비가 시신이 되어 그녀 앞에 놓였다.
오라비는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다. 그녀는 연인에게 강간당했다.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고통이 그녀를 찢어발겼다.
‘이만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미쳐 버릴 만큼 괴로웠지만 그녀는 그리 기대했다. 기대와 함께 희망을 바라보고 있을 때 친우가 죽었다.
친우의 죽음으로 다른 친우는 그녀에게 칼을 드밀었다. 그는 네 핏줄의 죄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 묻는 그녀에게 친우는 아무 말 없이 호의를 거뒀다. 그의 보호가 사라지자 남매에게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많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오라비를 찾았다. 하지만 같이 화살을 맞은 것이 분명한 오라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라비의 목을 틀어쥔 손이 보였다.
‘살려 주세요. 엘리엇을 살려 주세요.’
그녀는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잔인한 손의 주인에게 빌었다.
‘그럼 네가 대신 하렴. 오라비 대신 네가 스스로 이 손에 들어오렴.’
손의 주인이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수긍했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스스로 목을 갖다 바쳤다. 꽉 잡힌 목이 곧 죽을 것처럼 턱턱 막혀 왔다.
그러나 발밑의 오라비는 살아 있었다. 그녀는 미쳐 가는 와중에도 그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의 안도였다.
‘지금은?’
지금 그녀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죽어 버린 오라비와 오라비를 보내는 날조차 모욕당하는 몸뿐이었다.
조모의 죄? 오로르의 핏줄? 그게 당최 저와 무슨 상관인가. 엘리엇과는 무슨 상관인가. 이기적이라 욕할지 몰라도 그때의 남매는 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엘리엇은 죽어야 하며, 자신은 왜 이리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은 나에게서 엘리엇까지 앗아 갔는데 왜 나는 계속해서 고통받아야 하지?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에는 아직도 끔찍한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드레스 자락에 벅벅 닦았다.
검은 천 위에 끈적하게 묻어나는 체취가 끔찍했다. 격해진 감정은 끊임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는 더러워진 드레스 노려보다 손을 들어 천을 잡고는 이리저리 당겼다.
그러나 천은 약한 그녀의 손아귀에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짓에 따라 구겨질 뿐이었다. 이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전하! 그만하세요!”
제인이 빨개진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엘리엇…… 흑,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엘리엇.”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궁에 남아 오라비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들의 목을 베고 흐르는 피를 보고 싶었다.
“엘리엇 나는 지쳤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견뎌 낼 자신이 없어.”
하지만 그보다는 쉬고 싶었다. 그냥 이것저것 다 잊고 쉬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숨을 쉬고 싶었다. 엘리엇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랬다. 정말 아무것도 견디기가 싫었다.
오열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조용히 그녀를 달래 주던 제인은 더 이상 그녀의 눈물을 막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떠나자는 말만을 자장가처럼 반복해서 들려줬다.
그렇게 장례식 첫날, 그녀는 떠나 버린 오라비에게 미안함을 말하며 떠날 다짐을 했다.
* * *
한번 마음을 굳히자 일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사라는 이미 준비해 둔 것처럼 사람을 보냈다 연락해 왔고 날짜와 시간도 알려 왔다. 장례식이 끝나는 날 밤, 그날이 궁을 떠나는 날로 정해졌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궁에 남은 아이들은 어쩌지? 분명 피해가 갈 텐데. 궁을 지키는 기사들도…….”
제인은 엘리자벳으로 인해 머리가 아파 왔다. 당장 떠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많은데 그녀는 또다시 다른 사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라와 제가 어릴 때 너무 사람을 착하게 키운 듯싶었다. 물론 착한 건 좋다지만 그것도 저 자신이 먼저 살고 난 뒤 챙겨야 할 덕목이 아닌가. 빳빳하게 당겨 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제인은 최대한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니 전하! 지금 누굴 걱정하시나요. 궁의 아이들이요? 기사요?”
“내가 사라지면 분명 고초를 치를 거야. 특히 시녀들은 집안도 좋지 않은 아이들이 많아서 가문에도 피해가 갈 텐데.”
“그 아이들이 전하를 생각한답니까! 다들 전하를 감시하는 반역자 무리들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엘리자벳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신경 쓸 아이들이 아니었다.
제인이 떠나고 그녀의 궁에 배정된 시중인들은 그녀에게 매정했다. 딱 해야 할 것만을 했고 시키는 일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놓고 감시하는 티를 숨기지도 않았다. 저번에 한 아이는 그녀 앞에서 대놓고 공작과 애정 행각을 하지 않았나.
엘리자벳은 타티카가 누구랑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녀를 주인으로, 적어도 모시는 상전으로 여긴다면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기사들이요? 전하! 그것들이 원수의 칼입니다.”
그녀가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제인은 울화가 터지는지 옆에서 계속 화를 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알렉스는…….”
알렉스 이야기가 나오자 제인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는 다른 이와 달랐다. 우선 그는 황녀의 외사촌이자 엘리자벳의 직속 호위 기사로 배정되어 있었다.
엘리자벳의 옆에 머무른 기간도 아주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짧았던 것도 아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일단 가문으로 엮여 있는 데다가 공적으로 엘리자벳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니 그녀가 사라진다면 제일 먼저 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어제 돌아와 그녀에게 환하게 인사하던 알렉스의 표정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웠다.
“아스란이라는 뒷배가 있으신 분이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완전히 피해 가긴 어려울 거야.”
“전하. 우선 떠나는 걸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전하는 지금 떠나시는 걱정만 해도 과하지 않으세요. 다른 이는…… 동부로 간 다음 생각하셔요.”
“응…….”
제인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앉아 있는 엘리자벳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어린 상전은 너무 착했다. 그래서 이런 고초도 지금껏 홀로 견뎌 내신 거겠지. 엘리자벳의 목깃 사이로 붕대가 보였다.
그 밑에 자리한 상처를 생각하면……. 제인은 말없이 엘리자벳을 안아 줬다. 원래도 마른 몸이 더 말라 작은 제인의 품 안에도 쏙 들어왔다.
“일단 가셔서…… 가신 다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겁니다. 저랑 약속해 주세요. 안전해지기 전까진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요.”
“……약속할게. 대신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해 줘. 앨런은? 제인이 나랑 가면 제인의 가족은 어떻게 되지?”
“흥! 이 제인이 제 일 하나 못 했을 거 같습니까. 앨런과 루소는 이미 수도를 떠났답니다. 그리고 제 가족은 안전해요. 시아버님이 어떤 분인데. 아들과 손녀 정도는 지켜 주실 수 있는 분이랍니다.”
제인은 걱정하며 자신을 마주 안아 오는 엘리자벳을 안심시켰다.
그녀의 가족은 이미 시아버지의 영지로 향했다. 제인의 시아버지는 남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영향력 있는 인물로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유서 깊은 에든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제인은 가족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제인의 머릿속에는 남편 루소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제인. 안 됩니다. 황녀를 데리고 동부로 간다니요!’
‘난 가야 해요.’
‘절대 안 됩니다. 허락할 수 없어요. 지금 시국을 모르는 거예요?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벼랑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루소. 전하는 저에게 자식 같으신 분이에요. 이대로 저리 당하도록 지켜볼 수 없어요. 이리 뒀다간 그분은…….’
‘앨런입니다! 당신 자식은! 앨런이에요.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겁니다. 제발 제인.’
‘미안해요.’
‘그리 고집을 부린다면 가기 전에 나랑 갈라설 결심을 하고 가세요. 나는 이대로 앨런이 위험에 처하는 걸 볼 수 없습니다.’
매정하게 뒤돌아 가던 남편이 생각났다. 루소 그는 결국.
“아…….”
제인이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황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소리를 냈다.
“왜 그러세요? 전하.”
“아니. 제인 가족이 떠났다는 말을 듣고 생각난 게 있어. 그런데 그리했다가 그에게 상처를 줄 듯싶어서.”
“뭐길래 그러세요?”
“떠나기 전 알렉스를 호위에서 물리면 어떨까? 아니면 며칠 떠나보낼 수 없을까?”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요? 사실을 말해 주면 모를까 그 전에는…….”
“그렇지? 힘들겠지? 그럼 알렉스에게만 말해 주면…… 그는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제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녀도 알렉스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창하게 출세의 길을 달리는 그에게 황녀가 동부로 도망가는 걸 도와 달라 한다면…… 창창한 젊은이의 앞날이 막힐지도 몰랐다.
알렉스는 가진 게 많은 재능 넘치는 젊은이였지만 태생적으로 위치가 위태로웠다. 페테가의 후계자이긴 했지만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입양아였으며 신전 출신이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녀와 함께 동부로 간다면 기사직 박탈은 당연한 것이고 가문에서도 제명당할 것이다.
게다가 주인을 데리고 도망간 불명예를 안게 될 테니 신전도 그를 버릴 터였다. 아무리 엘리자벳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지만, 제인은 그런 상황이 상상되는 와중 그에게 손을 뻗기 힘들었다.
“극단적인 상황일 테지만…… 우리와 간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몰라요.”
엘리자벳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못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일단 사라 님이 알려 준 대로만…… 그대로만 가요.”
그 뒤로도 엘리자벳은 알렉스를 생각하며 몇 번 고민을 했다. 그에게 말할까? 상황을 설명하고 잠깐 떠나 있으라 해 볼까? 혹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는데 더 이상 폐를 끼치기는 싫었다.
결국 엘리자벳은 떠나는 날 알렉스에게 미안하다는 쪽지만을 남겼다.
* * *
“조심하십시오.”
엘리자벳의 손을 잡아 주며 남자가 말했다. 엘리자벳은 벌벌 떨리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봤다.
황녀궁의 외곽 바닥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언젠가 몇 번 그녀와 마주친 병사는 뒤집어진 채 미동하지 않았는데 그 밑으로 피가 흥건했다.
조용히 나가기 위해서라도 들키는 일은 없어야 했지만 네 사람의 기척을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황녀궁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일행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야 했다.
“이리로.”
사내가 그녀를 부축하며 잡아끌었다. 엘리자벳은 고개를 돌려 병사를 외면한 채 그를 따랐다.
“계속 궁 안으로 가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요?”
“걱정 마십시오.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부인.”
일행은 점점 궁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하지만 황궁의 중심임에도 어느 길로 들어서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도착한 건물을 본 제인과 엘리자벳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상에 여긴.’
건물은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다. 높게 올라간 첨탑들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으며 외관에 박힌 수백 개의 창은 화려한 유리로 색색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마 빛이 들면 더욱 오묘한 빛을 낼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쓰이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보였다. 대강 보수만을 하는지 금속 재질의 동상들은 녹슬어 있었고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문들은 끼익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들어가야 합니다.”
두 사람의 거부감을 느꼈는지 안내하던 두 명의 남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길이……?”
“황녀님의 조부께서 만들어 두신 통로가 있습니다. 바로 궁 밖으로 연결된 통로죠.”
남자가 덜덜 떠는 엘리자벳을 힐끗 보며 말했다.
“가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다른 남자가 재촉을 했다. 엘리자벳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건물에 들어섰다. 건물 안은 넓었다. 부들거리는 다리로 다 해진 카펫을 지나자 동그란 홀이 나타났다. 남자가 홀에 있는 제단을 오르더니 손짓을 했다. 일행은 제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남자가 제단 뒤 구석 벽을 만지자 바닥이 열리더니 지하로 가는 계단이 나왔다. 한 사람만이 겨우 지날 법한 계단은 꽤나 깊이 내려가 있었다.
남자 중 한 명이 먼저 허리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엘리자벳이, 제인이, 마지막으로 다른 남자가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밑 지하는 음산했다.
“어두우니 조심하십시오.”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미리 들고 온 등에 불을 붙인 남자가 발밑을 밝히며 말했다. 불이 있다고는 하나 좁고 어두운 길을 남자는 쉽게 걸었다.
올 때도 이곳으로 왔을까? 익숙한 듯 움직이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하 통로의 양옆은 이끼 가득한 돌벽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세월을 증명하듯 곳곳이 갈라져 있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에 엘리자벳이 발밑을 내려다봤다. 축축한 바닥은 천장에서 떨어진 물로 흥건했다.
“전하! 조심하세요.”
“고, 고마워.”
미끌거리는 바닥에 균형을 잃은 그녀를 제인이 걱정스럽게 부축했다. 제인은 후들거리는 황녀를 바라봤다. 백지처럼 하얗게 질린 황녀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 건물을 본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밖으로 나갈 테니.”
제인은 조금이지만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속삭였다. 엘리자벳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통로를 걸었다.
몇 마리의 쥐가 찍찍거리며 그들 옆을 지났다. 선두의 남자가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며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일행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통로가 점차 넓어지더니 온통 돌로 만들어진 공간이 나타났다. 작은 동굴의 모양새를 한 공간은 통로에 비해 훨씬 밝았다.
“다 왔습니다.”
남자가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뛰어내리더니 엘리자벳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벳은 남자의 손을 잡고 허공에 조심히 발을 디뎠다. 훅 꺼지는 느낌도 잠깐, 남자는 안전하게 그녀를 바닥에 착지시켰다.
“와.”
감탄을 할 때가 아니었지만 눈앞의 풍경에 엘리자벳과 제인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바위로 둘러싸인 공간 앞 통로는 달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빛은 통로를 제외하고도 바위 사이 곳곳에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별과도 같았다.
“여깁니다.”
잠시 그러고 있었을까. 남자가 넋이 나간 엘리자벳과 제인에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남자의 손짓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밖은 궁과 연결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나무와 풀이 울창한 곳이었다.
히이잉―
가까운 곳에서 말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풀을 헤치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마차와 함께 두 마리의 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남자 세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을 알아본 엘리자벳의 눈이 커졌다.
“……알렉스?”
마차 앞에 서 있는 사람 중 한 명은 분명 알렉스였다.
“아, 신전 기사님들입니다. 동부로 모셔 가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하셨죠. 사라님께 못 들으셨습니까?”
남자가 놀란 제인과 엘리자벳을 보더니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찌 된 건가요?”
먼저 정신을 차린 제인이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사라가 전한 소식에는 분명 신전 기사들이 합류할 것이라는 말이 있긴 했다.
하지만 누구인지 지칭하는 말 없이 신전 사람 셋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황녀의 주변 인물이 조력자인 것을 알았다면 사라가 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특히 알렉스라면.
‘사라 님도 모르셨나?’
제인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손톱을 물었다.
“…….”
제인의 물음에도 알렉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금안을 빛내며 일행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확히는 엘리자벳을 보는 것 같다고 제인은 생각했다.
제인 옆에 있던 엘리자벳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반가운 인사를 하려 할 때였다. 스르륵하는 매끄러운 금속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앞에 있던 세 사람 중 둘이 검을 뽑았다.
“무슨…….”
스걱―
당황한 남자가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검이 무언가 베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허물어진 몸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 이게…….”
다른 남자가 쓰러진 동료를 보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우측에 있던 기사가 빠르게 앞으로 달려오더니 남자의 옆구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푹 하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검을 맞은 남자는 피로 번져 가는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허나 기사는 검을 뽑고는 다시 한번 남자를 내리그었다. 순식간에 안내해 주던 남자 둘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 여인들이 그 자리에서 얼었다.
제인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려 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에 흙바닥이 젖어 가기 시작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왼쪽에 서 있던 기사가 제인과 엘리자벳에게 다가왔다. 함께하기로 했던 이들을 죽이고 모시겠다고? 어디로? 이들의 목적지는 동부가 아님이 분명했다.
제인은 우선 엘리자벳을 몸 뒤로 숨겼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제 손길에 쉽게 뒤로 넘어갔다.
제인은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알렉스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설명해 주세요. 알렉스.”
긴장으로 아까보다 목소리가 높게 올라갔다. 물음에 알렉스는 아무런 답 없이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달빛에 반사되어 새하얗게 빛났다.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에 제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뒤편에 있는 엘리자벳의 몸도 자연히 뒤로 물러났다.
검이 뽑히는 소리에 오른편에 있던 기사가 피 묻은 검을 털어 내며 알렉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기사의 얼굴에 왜? 하는 표정이 그대로 떠올랐다.
“아?”
그러나 그 표정도 잠깐, 환한 달빛 머리칼이 눈앞에 나타나며 그는 자신의 시야가 바뀐 것에 의문을 표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그는 짧은 단어를 끝으로 저가 죽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알렉스 님! 무슨 짓입니까!”
잠시 사태를 파악한 다른 기사가 검을 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금안의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으로 돌진했다. 기사는 자신을 향하는 검을 막기 위해 팔을 들었다.
챙 챙 챙 챙 챙 챙―
몇 번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두 개의 검이 앞으로 옆으로 날아들어 상대를 공격했다.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선들이 사방으로 그어졌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검선은 상대를 향한 살기로 가득했다.
그러길 몇 번, 알렉스가 기사의 검을 기사의 손목과 함께 날려 버렸다. 철그렁 소리와 함께 검을 든 손이 바위에 부딪혔다.
“아악!”
기사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제 팔을 잡았다. 콸콸 쏟아지는 피는 온 나무와 풀에 제 흔적을 남겼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팔을 잡고 뒹구는 기사를 향해 알렉스의 검이 가차 없이 떨어졌다.
“커걱.”
검이 기사의 목에 정확히 박혔다. 목에 집중되는 힘에 기사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꾸르륵 소리와 함께 피가 기사의 목으로 역류했다. 혀를 길게 뽑으며 기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피거품에 엘리자벳은 입을 틀어막았다. 속에 있는 온갖 것들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네 사람이 시체가 되었다. 저 잔인한 살인귀는 대체 누구인가. 분명 얼굴은 아는 사람인데…… 표정과 행동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주저앉기 직전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 * *
제인은 황급히 엘리자벳의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거기 있으면 안 된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꽉 잡힌 손목을 확인한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도망치기 위해 입은 거친 드레스가 다리를 슥 하고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달리자. 일단 달리자. 동부건 어디건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해.’
제인은 생각을 하며 앞을 봤다. 풀이 우거지긴 했지만 달빛에 시야는 밝은 편이었다.
푹―
그러나 순간 등과 복부에서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제인은 눈을 내려 제 몸을 봤다. 웬 날붙이가 복부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날붙이 끝에서는 뚝뚝, 하고 붉은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제인!”
옆에서 찢어질 듯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엘리자벳의 눈이 커진 채 그녀의 복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인은 다시 자신의 복부를 봤다. 피가 드레스의 갈색 천을 따라 번져 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생각을 하려던 차 엄청난 충격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내장을 가르는 고통과 함께 복부에 있던 날붙이가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순간 시야가 옆으로 돌아갔다.
“제인! 제인!”
바닥에 쓰러진 제인을 엘리자벳이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얀 손이 그녀의 복부를 잡고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오는 피를 막지는 못했다.
엘리자벳의 손이 빨갛게 젖어 갔다. 이리저리 흩어져 내린 은빛 머리채 끝에 빨간 피가 묻었다.
입에서도 뜨겁고 비린 액체가 흘러나왔다. 제인은 앞을 봤다. 흐려지는 눈앞에서 황녀가 그녀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아…… 이렇게 우시면 안 되는데. 우시면 또 목이 상하실 텐데……. 또 눈가가 부으실 텐데……. 우리 전하. 우리 가여운 황녀 전하.’
제인은 흐려지는 눈앞을 바로 하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평소보다 느리게 눈꺼풀이 감겼다 떠졌다.
‘안 되는데……. 이리 홀로 두면……. 연약하신 우리…….’
“전……하…….”
억지로 짜낸 목에서 간신히 말하고자 하는 단어가 나왔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뻐금거리는 입에서 더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겨우 내쉬는 숨과 피만이 전부였다.
“말하지 마! 하지 마 제인!”
몸이 흔들렸다. 엘리자벳은 이제 두 손을 모두 모아 그녀의 복부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바닥을 적시는 피를 보며 제인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내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얼굴을 한 번만 만지고 가야지.
하지만 목적지를 향하던 손이 공중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아무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순간 루소가 생각났다.
갈라서자는 말에 서류를 챙겨 온 그녀를 보고 남편은 눈물을 보였다. 결혼 승낙을 했을 때 이후로 처음 본 남편의 눈물이었다.
‘제발…… 우리 아이를 생각해서 마음을 돌려요. 제인.’
‘……앨런을 부탁해요.’
‘그만! 나한테 부탁하지 말란 말입니다! 앨런에게는 엄마가 필요합니다. 지금도 그대만 잡고 사는 아이인데.’
‘…….’
‘나는 그대가 잘못될까 너무 걱정됩니다. 제발 제인.’
‘미안해요. 이것밖에 할 말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한참 울던 루소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종이에 손을 올리고는 한 차례 더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밑으로 처진 입을 억지로 올리더니 말을 꺼냈다.
‘다녀오세요. 대신 돌아오셔야 합니다. 기다릴 테니…… 앨런을 키우고 있을 테니 언제고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찢어졌다.
‘……흑.’
‘울지 마세요. 제인.’
‘미안……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우리 걱정은 마세요. 아버지가 얼마나 엘런을 귀여워하시는지 알지 않습니까. 우린 안전할 겁니다. 그러니 제인 그대 몸이나 챙기세요.’
그러고는 그는 바로 수도를 떠났더랬지. 그녀가 걱정할까 봐. 마음 아파할까 봐 앨런을 데리고 급히 떠났더랬지. 문을 나설 때 웃는 얼굴로 인사할걸. 그때 사랑한다 한번 말해 줄걸. 떠나는 순간 한 번만 더 입맞춤해 줄걸.
소용없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 앞이 까맣게 변해 갔다. 이제 끝이구나. 제인은 몸에 힘을 빼며 홀로 남겨질 엘리자벳에게 마지막 말을 했다.
“울지…… 울지 마세요.”
* * *
엘리자벳은 눈앞에서 미동도 않는 제인을 계속해서 흔들었다.
“제발 일어나. 제인! 제발!”
그러나 잠든 듯 누워 있는 제인은 아무 답이 없었다. 제인이 입은 드레스는 피로 가득해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피와 섞여 흘러내렸다.
“도대체 왜! 왜!”
내 주변 사람들은 왜 다 이리되는 것일까. 손에 잡힌 제인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차가운 손과 흘러넘치는 피! 감은 눈!
모두 그랬다. 생일날 죽은 사람들도! 엘리엇도! 제인도! 모두 그녀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차가워지며 그녀만을 남기고 떠났다.
“엘자.”
위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아름다운 기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실 뜬 달이 그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려 있었다. 뚝뚝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제인의 피였다. 저건 제인의 피였다. 엘리자벳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으며 기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표정 없는 얼굴에는 금안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는 달이 쪼개져라 높게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