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외전 ― 내가 사랑하는 왕자님 (3/15)

[3장] 외전 ― 내가 사랑하는 왕자님

아이의 삶은 대부분 눈으로 가득했다. 처음 눈을 뜨고 세상을 인지했을 때 본 것도 눈, 자라면서 가장 많이 본 것도 눈, 그리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면서 보는 것도 눈이었다.

아이는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마차 안에서 밖을 바라봤다. 하얀 언덕 위의 성이 점차 멀어졌다. 멀어지는 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가운 눈송이가 손에 부딪히며 녹아내렸다.

“벨! 창문 좀 닫아. 추워 죽겠다.”

마차 안에서 그녀를 향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위의 오빠 펠릭스의 것이었다. 벨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눈바람을 맞았다. 차가운 바람에 귀와 볼이 빨갛게 얼었으나 벨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어디론가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벨. 그만 들어와. 감기 걸린다.”

차분히 타이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벨은 그제야 얼굴을 다시 마차 안으로 들였다. 빨갛게 얼은 귀 위로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아버지를 닮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오빠 에셀이었다. 손의 따뜻한 온기에 얼어붙었던 귀가 서서히 녹았다.

“에셀. 수도에는 왕자님하고 공주님이 살고 있대.”

그녀는 동화책을 펴 들며 에셀을 향해 조잘거렸다. 그녀가 펴 든 동화책 안에는 예쁜 공주님과 왕자님이 그려져 있었다. 공주님이 오빠인 왕자님을 구해 내는 내용이 담긴 동화책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굽이치는 금발을 가진 왕자님과 공주님은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참 아름다웠다.

“멍청아. 왕자님하고 공주님이 널 만나 줄 것 같아?”

앞에서 펠릭스가 그녀를 향해 심술궂게 말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가진 펠릭스는 하얀 얼굴에 통통한 분홍빛 볼이 귀여운 소년이었으나 벨과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아마 부모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아주 어릴 적에는 이 사실을 몰랐으나 그녀는 크면서 자연스레 의붓형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들 형제는 항상 함께였으며 서먹할지언정 서로에 대한 정만은 깊었다.

“누가 멍청이야! 수도 성에 갈 테니 왕자님과 공주님을 보는 건 당연한 거야. 이 바보야!”

벨은 신고 있던 신을 의붓오빠를 향해 날렸다. 작게 포물선을 그린 신이 정확히 대각선에 있던 펠릭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맞은 펠릭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벨의 신이 들려 있었다. 그가 울컥하는 표정으로 벨을 향해 신을 던지려 했다.

“펠. 앉으렴.”

옆에서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펠릭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작은 신이 들려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손을 내밀었다. 펠릭스는 투덜거리면서 신을 건네주었다. 신을 건네받은 손이 벨의 발을 들어 신을 신겨 주었다.

벨은 자신에게 신을 신겨 주는 의붓언니를 보며 입을 우물거리다 말았다. 6살이나 많은 의붓언니는 벨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비록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잘 챙겨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무표정한 언니의 얼굴을 볼 때면 괜스레 겁이 났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동생들을 보며 에셀이 쿡쿡거렸다. 벨과 펠릭스가 동시에 에셀을 노려봤다.

“형. 수도로 가도 계속 활 쏘는 거 가르쳐 주는 거지?”

몇 분 후 펠릭스는 에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벨은 갑자기 에셀과 자신의 옆으로 비집고 들어온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에셀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붓 남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긍정의 표시였다. 사이좋은 형제의 모습에 벨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비켜! 비좁단 말이야.”

“그럼 네가 절로 가든가!”

다시 다툼이 시작됐다. 마들렌은 투닥대는 동생들을 보다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말려도 소용없을 터였다. 수도까지 가려면 며칠이나 남았더라.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마들렌의 옆으로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셀이었다.

그는 자신을 두고 싸우는 동생들을 피해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자리를 옮긴 그에게 동생들이 우우거리며 고함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셀은 등받이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모두에게 시작은 편안한 여행이었다.

* * *

수도는 따스했다. 갑자기 얇은 옷을 입게 된 벨은 신이나 뛰어다녔다. 수도의 저택에서 벨은 북부에서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며칠 후 라세르 공작은 자녀들을 데리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벨은 그곳에서 왕자님을 만났다. 왕자님의 이름은 엘리엇이었다. 비록 동화책에서 나온 것처럼 화려한 금발은 아니었지만 벨의 눈에 왕자님의 은발은 충분히 예뻤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발을 보며 그녀는 헤, 하고 침을 흘렸다. 그 모습에 펠릭스가 그녀를 놀려 댔다. 벨이 왕자님 앞에서 창피를 준 펠릭스를 쫓고 있는데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왕자님과 똑같은 은발의 아이는 형제들을 보더니 재빨리 왕자님 뒤로 숨었다.

“엘자. 라세르 공작가의 자제들이야. 인사해야지.”

왕자님이 여자아이를 앞으로 밀어 냈다. 왕자님의 손에 이끌려 아이가 주춤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섰다. 작은 손으로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린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벨도 여자아이와 마주 서 수도에 오기 전 배운 예법대로 인사를 했다. 아이의 이름은 엘리자벳이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마음이 가는지 벨에게 계속해서 시선을 줬다. 벨 또한 왕자님과 닮은 아이가 싫지 않았다.

문뜩 옆을 보니 에셀과 펠릭스가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벨은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나 에셀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에셀은 그 힘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라세르가 형제들은 그날부터 매일같이 황궁에 들렀다. 쉽게 허락이 떨어졌는지 형제들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벨은 황궁에서 왕자님 남매와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다.

황궁 사람들은 모두 라세르가 형제들에게 친절했다. 특히 왕자님의 유모라는 사람이 주는 화려한 과자와 케이크는 북부에서 쉽게 맛보지 못한 것이기에 벨의 마음을 금세 앗아 갔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왕자님을 보는 것이었지만…….

“엘리엇! 난 커서 기사가 될 거야. 우리 가문 사람들은 다 기사거든.”

“여자가 기사가 된다고? 북부는 특이하네. 하지만 난 여자 기사는 별로야.”

엘리엇의 시큰둥한 반응에 벨의 기세가 팍 죽었다. 엘리엇은 여자가 기사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걸까. 나는 엘리엇을 지켜 주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펠릭스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수도의 사람들은 여자가 검을 드는 것을 싫어한다고. 그리고 남녀 가리지 않고 검을 드는 북부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 한다고. 벨은 고개를 들어 엘리엇을 봤다.

엘리엇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에셀과 엘리자벳이 있었다. 에셀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검을 드는 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일입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마들렌이 읽던 책을 놓고 끼어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머리만큼이나 불타올랐다.

“내가 실수했군. 라세르가가 훌륭한 기사 가문인 것을 잊었어.”

언니가 얼마나 기사가 되기를 소망하는지 아는 벨은 엘리엇과 언니가 싸울까 봐 염려되었다.

그때 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자벳이 뛰어왔다. 엘리엇은 그런 동생을 보고 팔을 벌렸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런 오라비를 지나쳐 벨을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벨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당황한 사람이 있었으니. 엘리엇은 벨을 안는 동생을 보다 어정쩡하게 팔을 내렸다. 벨은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다.

“벨! 사라가 새로 딸기 케이크를 만들어 준대. 이번에는 크림을 잔뜩 올려 준다니까 같이 먹으러 가자.”

“정말? 당장 가자. 엘자!”

사라가 만드는 딸기 케이크는 그녀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인 벨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엘리자벳의 애칭을 부르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녀보다 예쁘고 오빠들의 시선을 가져가는 아이가 조금 거슬렸지만 지내보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엘자는 엘리엇의 동생이 아닌가.

엘자가 벨의 손을 잡아 왔다. 빨리 딸기 케이크를 먹으러 가고 싶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벨은 어두운 분위기에 숨이 막혀 울 수도 없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에셀의 품 안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 에셀은 몇 시간째, 아니 며칠 동안 상자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아버지가 있다고 했다. 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북부에서도 몇 번 어른들의 죽음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길고 커다란 상자 안에서 가문의 깃발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런 작은 상자에 들어가 있다니? 벨은 다시 상자를 유심히 살폈다. 검은 상자는 그녀의 몸보다도 작았다.

앞에서 아으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들렌 언니의 소리였다. 언니의 눈은 평소와 달랐다. 항상 날카로웠던 언니의 눈은 꼭 생선 눈같이 불투명해져 있었다.

마들렌의 손은 천으로 묶여 있었는데 그 밑으로 난 상처가 징그러웠다. 언니는 때때로 천을 끊으려 손목에 힘을 줬다. 하지만 몇 번이고 둘린 천을 끊어 내지는 못했다.

마차 뒤 상자에 누워 있는 펠릭스가 생각났다. 펠릭스는 평소와 다르게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는 펠릭스의 얼굴은 창백했다.

벨은 펠릭스의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을 내지는 않았다. 그저 아픈 것뿐인데 자신이 말을 꺼냈다가 정말로 펠릭스가 죽으면 큰일이 아닌가.

마차가 북부로 들어섰는지 길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싸늘한 바람이 마차 안까지 들어왔다.

벨은 괜스레 닫힌 창문을 한 번 더 만졌다. 분명 어딘가 열린 곳이 있어 이렇게 추운 것이리라.

그녀가 손으로 몸을 감싸 안으려 했지만 붕대를 감은 팔이 잘 올라가지 않았다. 결국 팔로 몸을 감싸는 것을 포기한 벨이 다리를 흔들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신이 마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신에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를 맞아 씩씩대던 펠릭스도, 조용히 그녀에게 신을 신겨 주던 마들렌 언니도, 그녀를 보며 쿡쿡대던 에셀도 없었다.

마차 밖을 보니 눈발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눈이 햇빛에 반사돼 은처럼 빛났다. 그 모습에 벨은 엘리엇을 생각했다.

‘왕자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 *

“으응, 엘…… 엘리엇, 흐읏.”

화려한 방 안에는 여인의 신음 소리만 가득했다. 있는 힘껏 교성을 지르는 여인은 온몸을 붉히며 사내의 몸 밑에 깔려 있었다. 밀착된 피부가 서로 끈적이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여인의 다리는 사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뱀처럼 휘감긴 하얀 다리가 매끈하니 색스러웠다. 여인의 가슴이 사내의 가슴과 빈틈없이 맞붙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좋을 법도 했지만 사내는 달라붙는 여인을 냉정하게 떼어 냈다.

“엘리엇 흣. 더 안…… 안아 줘요.”

사내의 냉정한 몸짓에 여인의 팔이 사내의 목을 감았다. 사내는 그런 여인의 팔을 떼어 내곤 위로 올렸다. 동그랗고 뽀얀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여인은 사내에게 가까이 닿고 싶은지 상체를 들어 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눌러 오는 사내의 하체에 번번이 실패했다. 사내가 허리를 거칠게 쳐올렸다. 여인이 신음을 높이며 자지러졌다.

벨은 엄청난 흥분에 숨을 몰아쉬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반짝거리는 은발 밑으로 얼굴선을 따라 땀이 흐르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흥분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벨이 입꼬리를 요염하게 올리고는 사내의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에 더욱 힘을 줬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사내가 신음을 흘리며 더욱 밀착해 왔다.

그녀의 밑으로 익숙한 감각이 계속해서 진퇴를 반복했다. 참지 못할 쾌락에 벨의 허리가 들썩였다.

‘손을 놔 주면 좋을 텐데.’

벨은 사내를 꼭 안고 싶었다. 그와 온몸을 부딪치고 하나가 된 양 안고 싶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녀의 손을 놔 주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약간은 거친 사내의 손에 부드러운 가슴이 비명을 질렀다. 젖무덤을 움켜진 손가락 사이로 분홍빛 유두가 존재를 뾰족이 드러냈다. 가려운 기분에 벨이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사내는 그녀의 신음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허리만을 움직였다. 벨은 그런 사내를 원망하며 내벽을 조였다.

사내가 손을 놓았다. 자연스러워진 그녀의 팔이 자연스럽게 사내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땀과 함께 등에 달라붙었다.

벨은 사내의 입술을 바라봤다. 사내치곤 붉은 입술이 그녀의 눈에 들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사내의 입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뜨거운 피부가 맞붙기 직전 사내가 그녀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격한 허리 짓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거친 오르가즘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높아지는 그녀의 교성과 함께 사내의 두 손이 그녀의 골반을 잡아챘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마침내 그녀의 안을 드나들던 사내가 그녀의 끝에 닿았다. 벨은 신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순간 따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충만한 감각을 끝으로 벨의 몸이 움찔거리며 경련을 하다 멈췄다.

사내의 몸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갑자기 몰려오는 차가운 공기에 벨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사내를 쳐다봤다.

손에 옷가지를 든 사내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벨은 조심히 일어나 사내를 등 뒤에서 안았다. 사내의 몸은 아직까지 따스했다.

따뜻함을 기분 좋게 느끼고 있을 때 사내가 매정히 그녀를 떼어 냈다.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녹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뭘 더 바라나?”

사내의 입에서 얼음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 뜨겁게 사랑을 나눈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벨은 그가 내려다보는 눈빛에 서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니요. 그냥 같이 식사나 할까 하고……. 엘리엇이 싫으면 괜찮아요.”

엘리엇은 애써 표정을 숨기며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여인을 바라봤다. 벨 라세르, 친우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소꿉친구, 여동생의 하나뿐인 절친.

어찌 보면 그녀는 자신에게 핏줄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지금의 벨은 가장 멀어지고 싶은 여인이었다. 징그러울 정도의 집착과 애정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는…….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군. 다음에 보지.”

벨은 매정하게 등을 보이는 사내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그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빠르게 옷을 입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입맞춤 한번 해 줄 법도 하건만, 사내는 무정했다. 옷을 다 입은 사내가 곧장 방 밖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그녀는 그제야 억지웃음을 내려놨다. 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자국이 생겼다. 벨은 팔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지금의 상황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이렇게 될 걸 알았음에도 왜 그리했을까.

닦았건만 한번 떨어진 눈물은 그칠 새 없이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 * *

벨은 툴란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애 중 한 명이었다. 북부의 대가문 라세르가의 막내인 그녀는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과 고양이처럼 올라간 진녹색 눈이 매력적인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사교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외모만으로도 뭇 남성을 사로잡는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녀의 배경이었다.

그녀의 핏줄들은 다 대단한 기사였다. 게다가 광물로 부를 축적한 라세르가에서 막내인 그녀를 위해 지참금으로 알짜배기 광산 3개를 내어놓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흠이긴 했으나 그건 툴란의 유망한 귀족 가문 대부분이 해당하는 사항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황태자 엘리엇을 향한 짝사랑이었다. 그녀는 수도 사교계에 올라온 날부터 황태자만을 쫓아다녔다.

처음에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자 사람들은 어린 영애의 치기라며 황태자께서 보통 잘생겼냐고 웃으며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에서 막 상경해서 사교계 생활을 하는 영애들 중 다수는 꼭 황태자를 짝사랑하고는 했다.

하지만 라세르가 막내의 짝사랑은 좀 심각한 것이어서 이제는 꼬박 3년을 채울 판이었다. 보통의 영애들에게 3년은 짝사랑으로 울고불고 난리를 친 후 적당한 짝을 찾아 청첩장을 돌리는 시간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녀는 다양한 파티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제철마다 열리는 황궁 연회를 비롯해 또래 영애들의 티 파티, 사교계 명사 루앙 백작 부인의 시 낭송회, 거리 예술가 후원 연주회까지 그녀는 이리저리 다양한 곳에 얼굴을 비쳤다.

처음에는 그녀가 참석하는 파티의 기준을 몰랐던 사람들도 곧 그 기준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황태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 곳들이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그의 옆에 서서 헤실거리며 웃곤 했다.

“벨. 오늘은 그만둬. 전하께서 불쾌해하신다.”

에셀은 오늘 밤 어느 후작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치장을 하고 있는 벨을 조용히 만류했다. 그녀가 이렇듯 요란하게 치장하는 건 그의 친우인 엘리엇 때문이었다.

하지만 벨은 에셀의 말이 안 들린다는 듯이 귀걸이를 번갈아 대 보며 뭐가 나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에셀은 오전에 만난 엘리엇에게 들은 부탁을 기억해 냈다. 동생을 말려 달라며 눈가를 문지르는 엘리엇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전 엘리엇이 참석한 파티에서 벨은 한바탕 사고를 치고 왔다. 엘리엇이 파트너로 데려온 어느 백작 영애의 머리를 휴게실에서 죄 뜯어 놓은 것이다.

게다가 그에 그치지 않고 벨은 검을 뽑아 백작 영애에게 살벌한 협박을 했다. 백작 영애는 엉망인 모습으로 혼절했고 에셀은 어제 백작 영애의 가문에서 날아온 고소장을 받았다.

“에셀. 이게 좋을 것 같아? 아니면 이거?”

“벨. 난 장난하는 게 아니야.”

벨은 왈칵 쏟아지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주일 전에 백작 영애와의 일은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시작은 그 영애였다. 백작 영애는 휴게실에서 화를 삭이고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구질구질하다며 한바탕 모욕을 퍼부었다.

게다가 엘리엇을 들먹이며 그녀를 비웃었다.

‘왈패 같은 영애를 전하께서 좋아하실 리가 있나요.’

그런 말을 듣고도 참으라니. 그 상황에선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오라비를 봤다.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알았어. 에셀. 오늘은 집에 있을게.”

에셀이 표정을 풀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하지만 벨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조금 뒤 에셀은 근무를 위해 밖을 나서야 했다. 그렇다면 좀 늦기야 하겠지만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요즘 엘리엇이 대놓고 자신을 피하자 시답지 않은 여자들이 그의 곁에 꼬였다. 그 꼴만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벨은 후작저 저택 3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 도착한 연회는 절정에 올라 다들 한껏 취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 엘리엇은 보이지 않았다. 주최자인 후작 부인에게 넌지시 물어보자 한껏 취한 후작 부인은 전하께서 쉬러 가셨다고 알려 줬다. 친절하게 방까지 알려 준 후작 부인은 벨의 짝사랑을 응원하고 있는 인사 중 한 명이었다. 한쪽 눈을 찡긋거린 후작 부인이 손님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시끌벅적한 홀과는 다르게 계단으로 이어진 위층은 한산했다. 가끔 어딘가에서 야릇한 신음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런 파티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라 신경이 가지는 않았다.

3층은 고위 손님만을 위한 공간인지 더욱 한산했다. 후작 부인이 알려 준 방은 복도의 왼쪽 끝에 있는 큰 방이었다.

“으흣. 전하…… 으응.”

방 앞에서 벨은 멈춰 섰다. 여인의 교성 사이로 들리는 신음은 그녀가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벨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의 눈과 같은 색의 치맛단이 손 밑에서 구겨졌다. 벨은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문을 열고 싶었다. 안에서 얽혀 있을 남녀를 떼어 놓고 엘리엇에게 붙어 있을 여자의 목에 검을 꽂아 넣고 싶었다. 안에서는 계속해서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벨은 문을 뚫을 듯이 노려봤다.

한참 후 교성이 잦아들었다. 안에서는 이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벨은 조용히 복도 옆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두꺼운 커튼은 어두운 복도와 함께 그녀의 몸을 없는 듯 숨겨 주었다.

문 앞으로 또각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앳된 얼굴을 한 영애가 드레스 자락을 펴며 나왔다.

옅은 머리카락에 여리한 몸 선이 아름다운 영애였다. 영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계단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갔다.

벨은 커튼 뒤에서 영애를 노려보다 입술을 물었다. 엘리엇이 침실로 끌어들이는 여자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그녀와 대조되는 순한 인상에 옅은 머리카락 색, 전체적으로 가는 몸 선……. 엘리엇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계단 밑으로 영애가 사라지자 벨이 다시 몸을 움직여 문 앞에 섰다. 고급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벨은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몇 번 문손잡이 위로 올라갔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등을 돌려 다시 복도 쪽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이곳에 온 것을 들킬까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눈은 이미 뿌옇게 젖어 있었다.

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벨은 당당히 고개를 치켜세우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금박으로 장식된 진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향해 많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주목을 받는 것이 익숙한 듯 그녀는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평소 안면을 튼 영애들이 보였다. 무리의 한 영애가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무리 안으로 들어섰다.

“벨.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통 격조하셔서 걱정했어요.”

벨의 옆에 자리한 영애가 부채를 살랑이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옆에 있던 많은 영애들이 먼저 인사를 전해 왔다. 그녀들은 모두 좋은 명문가 출신의 영애들로서 사교계에서 입지가 큰 편이었다.

벨은 그 출중한 무리에서도 가장 중심에 자리했다. 북부의 공녀라는 칭호와 아름다운 외모는 사교계에서 벨의 입지를 최고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3년 가까이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그녀의 일념은 또래 영애들에게는 로맨틱한 상상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물론 지난번 백작 영애처럼 그녀의 사랑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감히 대놓고 그녀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이는 드물었다.

벨은 자신에게 인사해 오는 영애들에게 명랑하게 답해 주고는 한 영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엘리엇과 함께 방에 있었던 영애는 한 남자 옆에서 웃으며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벨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하자 무리의 시선 또한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벨의 시선을 눈치챈 한 영애가 속삭였다.

“어머. 황태자 전하는 어쩌고 저리 있대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까는 전하 옆에 붙어 웃음을 흘리더니 이번에는 베르타 후작 영식에게 붙었네요. 부끄럽지도 않나.”

“아시는 분인가요?”

벨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앞다투어 정보를 알려 줬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시골뜨기로 아버지는 고작 지방의 자작을 지내고 있다는 영애의 이름은 엘리사 기온이었다.

벨은 엘리사라는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 이름까지 엘리엇과 닮았는지 점점 거슬리는 게 많은 영애였다.

“오늘 전하께서 기온 영애를 파트너로 데려오셨다죠.”

벨은 짐짓 가녀리게 한숨을 쉬며 영애들에게 말했다. 영애들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위로를 던지기 시작했다. 라세르 공녀께서 파티에 참석을 안 하신다는 전갈을 듣고 아무나 데려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서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촌뜨기를 파트너로 삼으실 이유가 없지 않느냐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잠시 쉬러 갔다 기온 영애가 전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걸요.”

벨은 영애들의 말에 눈물을 훔치는 척 손수건을 눈가로 가져갔다. 그 말에 사방에서 날카로운 탄성이 튀어나왔다.

툴란의 수도 사교계는 미혼의 남녀가 연애를 하는 것에 자유로운 편이었다. 게다가 아이만 가지지 않는다면 연애 대상끼리 잠자리를 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몇몇 가문과 나이 지긋한 귀족들은 그런 풍조를 질색했지만 젊은 층은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영애께서 전하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온 사교계가 아는 사실인걸요!”

진한 갈색 머리의 영애가 발끈하며 부채를 접었다. 동시에 주변 영애들이 기온 영애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벨은 엘리엇과 어떤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 무리에서만큼은 공식 커플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나이나 가문으로 보면 황태자의 짝에 가장 어울렸고 그녀의 짝사랑이 워낙 지극해 감정적으로 영애들에게 동조되는 이유도 컸다.

벨은 울음을 감추는 척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그 모습에 영애들이 안 되겠다며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떠들어 댔다. 그리고 파티가 있은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가여운 기온가의 영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 * *

엘리엇은 요즘 도통 심기가 좋지 않았다. 황가의 입지는 날로 좁아져 가고 있었다.

여우 같은 페루스의 움직임은 최근 이상했고 북부의 라세르가는 장녀가 야만인 토벌을 이유로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서부의 우세리는 별 움직임이 없었지만 수장인 사내를 생각하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그가 엘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뱀의 것과 같아서 할 수만 있다면 그 눈을 파 버리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아버지인 황제는 애첩의 치마폭에 빠져 있으니 그는 몰려드는 업무에 항상 빠져 살 수밖에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신경질적인 엘리엇의 눈이 방문자를 확인하고는 바로 풀렸다.

“엘자.”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 엘리자벳이었다. 원래도 아름다웠던 그의 여동생은 한창 피어나는 중이었다. 하얀 얼굴에 복숭앗빛 뺨은 볼살이 빠지며 예쁜 색을 띠었으며 입술은 점차 붉고 도톰해져 갔다. 성숙해지기 시작한 육체는 겹겹이 입은 드레스로도 감출 수 없는지 굴곡을 드러내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허리까지 내려왔다.

“엘리엇. 이거.”

엘리자벳의 뒤에 있던 시녀가 공손히 그 앞에 무언가를 놓고는 물러났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 안에는 노란색의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의 눈앞의 엘리자벳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자 엘리자벳은 창가 쪽 소파에 앉았다.

천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살짝 보이다 사라진 복숭아뼈가 예뻤다. 엘리엇은 햇빛을 받아 빛나는 엘리자벳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얼굴을 매만지는 목소리에는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엘리엇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차를 마셨다.

호로록하는 소리에 하고 싶은 말이 묻혀 사라졌다. 조용히 차를 마시는 모습에 엘리자벳이 다시 미소를 짓고는 책을 펼쳐 들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표지 끝이 너덜너덜했다. 책 옆에 쓰인 ‘사랑’이라는 제목에 엘리엇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 참. 이번에도 페루스가 파트너를 해 주겠대.”

엘리자벳의 표정이 기대에 가득 찼다. 책을 잡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페루스라는 이름에 엘리엇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책에 시선을 준 엘리자벳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엘리자벳은 빠르게 페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페루스가 이랬다, 저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만큼 엘리엇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져 갔다.

“엘자. 바쁘구나.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그는 앞에서 조잘대는 말을 끊고는 조용히 말했다.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당황하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지만 그는 모른 척 서류에 집중했다.

그의 심기를 눈치챈 엘리자벳이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천천히 쉬어 가면서 하라는 말을 남긴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는 손에서 펜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이 그의 손에서 서서히 따뜻해졌다.

한참이나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중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남매가 그려진 작은 초상화가 나타났다. 서로 붙어 있는 남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초상화 왼편에 자리한 엘리자벳을 바라봤다. 그와 닮은 녹색 눈동자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하며 책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수십 번 반복해서 욕설을 하던 목소리가 어느새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엘자, 엘자, 엘자. 여동생의 애칭을 입에 담은 그의 손이 빨라졌다. 그가 다른 한 손을 펴 초상화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은 순수하게 웃고 있었다.

오래전부터였다. 이런 더럽고 더러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생긴 것은. 그는 아주 먼 옛날부터 여동생의 모든 행동이 신경 쓰였다. 엘리자벳에게 친한 상대가 생기는 것도,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웃어 주는 것도, 다른 사람과 춤추는 것도 싫었다. 그냥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것 자체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조절할 수 없는 자괴감과 흥분이 동시에 몰려오는 그때 살짝 열린 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는 진녹색 눈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 * *

“엘리엇.”

나는 방문을 닫고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혹감, 분노, 부끄러움, 두려움. 나는 엘리엇의 얼굴이 그렇게 다양한 표정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에게 항상 완벽한 사내였다. 툴란의 황태자로서 훌륭했으며 동생인 엘리자벳에게는 다정한 오라비, 내 오라비인 에셀에게는 충실한 친우였다.

비록 그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잔인한 사내였지만 난 그의 잔인함조차 완벽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여동생에게 욕정하고 있었다. 에셀과 마들렌 언니처럼 의붓형제도 아니고 피가 반만 섞인 이복형제도 아닌 온전히 모든 피가 섞인, 저를 꼭 닮은 제 여동생에게 그는 욕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나는 방금 눈앞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처음 열린 문틈 사이로 그가 수음하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당황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여인들과 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내뱉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분노와 치욕에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엘자. 그가 부르는 이름은 내 친우의 이름이자 그의 여동생 이름이었다.

질투와 모멸감으로 떨리는 눈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려는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동공 속 다양한 감정 그리고 그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읽었을 때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기쁨에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야 했다.

“엘리엇.”

“…….”

다시 한번 그를 불렀건만 그는 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옷차림을 재빨리 추슬렀다.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볼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 줬다.

마침내 그가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를 바라봤다. 아까의 감정들은 그새 사라져 있었다. 감정들이 사라진 눈에는 나를 향한 살기만이 가득했다. 그는 여차하면 나를 죽일 기세였다.

나는 어릴 적 기사의 길을 포기했다. 마들렌 언니나 에셀만큼 타고난 재능이 없기도 했지만 엘리엇이 여기사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내가 기사의 길을 포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기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검을 잡고 생명을 죽여 본 적이 있는 나는 나를 향한 살기를 또렷이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된 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에셀이 내 오라비인 이상, 내가 엘자의 친우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뭘 원하지?”

이번에는 그가 먼저 내가 말을 건네 왔다. 나는 속에서 밀려오는 황홀한 감정을 주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냉정한 말투였지만 나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이미 내가 그의 비밀을 올가미 삼아 뭔가를 요구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섰다. 그가 의자를 뒤로 빼며 나를 피했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조용히 책상에 앉았다. 높은 책상 위에 앉자 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평소보다 빠를 것이 분명한 심장 박동이 팔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더 이상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그의 귓가에 가져갔다.

“제 연인이 되어 주세요. 저를 안아 주세요. 그게 제가 비밀을 지켜 드리는 조건이랍니다. 엘리엇.”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여과 없이 하며 그를 꽉 껴안았다. 그가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제 나를 미워할 것이다. 아니 증오하겠지. 허나 상관없었다. 어떤 모습이라도 저는 엘리엇을 사랑할 자신이 있었으므로 정말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 * *

“엘리엇이랑 싸운 거야?”

나는 눈앞의 멍청한 친우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엇이 가장 사랑하는 그녀는 나와 그의 결합에 가장 기뻐했다. 입안에 딸기 케이크를 물고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친우는 누가 보더라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제 핏줄인 오라비도 꾀어낸 것이겠지. 속에서 올라오는 화에 상큼한 레몬차를 들이켰다. 그러나 시고 달달한 음료는 속을 더 아프게만 할 뿐이었다.

“약혼 소식도 없고, 혹시 엘리엇이 바람피우는 거야?”

‘망할 계집애,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말을 하지 않고 웃어 보이자 흥분한 친우는 그런 거냐면서 계속 추궁해 왔다. 나와 엘리엇은 공식 연인이 된 지 꽤 오래 지났다. 주변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와 그의 결합에 환영의 표시를 보내왔다. 나를 말리던 에셀도 조용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교계에서도 다를 것은 없어 드디어 3년의 결실이 맺어졌다며 눈물을 흘리는 영애들도 있었다. 나 또한 그와 연인이 된 초창기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누렸다.

공식적인 인정과 축하, 나와 엘리엇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과 시, 엘리엇 주변을 얼씬거리던 영애들의 시샘까지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그 기간은 잠시였다. 가장 중요한 엘리엇의 태도는 바뀐 것 없이 여전히 냉랭했다. 아니 전보다 훨씬 나빠져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그는 나와 대화하는 것조차 끔찍하게 여겼다. 그런 그의 태도는 밖으로도 삐져나와 눈치 없기로 유명한 엘리자벳까지 알아챌 정도였다.

“아니야. 전하와 난 괜찮아. 다만 요즘 바쁘셔서 신경이 날카로우신가 봐. 그보다 공작 각하와는 어때? 이제 완전히 수도에 자리 잡았다던데. 매일 너를 보러 온다며?”

“아, 아냐. 페루스가 매일 오는 건 아니고……. 아니 사실 매일 오는데…….”

볼을 붉히며 눈을 내리까는 친우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행복감이 가득했다. 친우는 최근에 공식적으로 르온 공작과 사귀기 시작했다. 찬란한 금발에 푸른 벽안을 가진 그 사내는 전형적인 동화 속 왕자님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엘리자벳과 공작을 생각하자 문뜩 에셀이 생각났다. 불쌍한 자신의 오라비는 엘리자벳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기에 오라비와 가까운 자신 외에는 알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엘리자벳은 계속해서 자신의 연인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 모습에 속이 쓰려 왔지만 내색할 수 없어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한참 엘리자벳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을 때 엘리엇이 들어왔다. 여동생을 보러 들어왔을 그는 나를 보고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작은 찌푸림에도 가슴이 뚫린 듯 아팠다.

“엘자. 내가 방해한 건 아니겠지?”

“엘리엇! 방해라니. 그보다 벨에게 인사부터 해야지.”

그가 제 동생의 핀잔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들어진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아팠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봤지만 그는 이미 고개를 여동생 쪽으로 돌린 후였다. 그가 여동생의 볼을 잡아당기며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작은 여동생의 키에 맞추기 위해 숙인 허리에는 배려심이 가득했다. 나에게는 해 준 적 없는 모습에 다시 가슴이 아려 왔다. 그가 뭐라 속삭였는지 친우가 화를 내며 그의 팔을 두드렸다.

닮은 두 사람이 그러고 있자 왠지 내 스스로가 불순물이 된 느낌에 비참해졌다. 제 오라비의 팔을 두드리고 꼬집던 엘리자벳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눈치가 없었네. 엘리엇이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난 페루스랑 약속이 있어서 가 볼게. 두 사람은 차라도 마시고 가.”

친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와 그만이 남은 공간에는 불쾌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어디 가 계셨어요? 궁으로 찾아가도 통 뵙기가 힘들었어요.”

“내 궁이 아무나 드나드는 곳인 줄 아나.”

그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답을 했다. 그의 시선은 엘리자벳이 사라진 그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난 엘리엇의 연인이에요. 아무나가 아니라고요!”

순간 눌러놓았던 화가 터져 나왔다. 이만하면 나를 봐 줄 때도 되었잖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얼마나 기다렸는데.

목에서 아까 마셨던 레몬차의 알싸한 신맛이 느껴졌다.

“그래. 넌 내 연인이지.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아, 이 자리에서 안아 주길 바라는 건가? 세상에. 에셀이 알면 뒤로 넘어가겠군.”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내 목소리에도 엘리엇은 무감했다. 아니 그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리될 줄 몰랐냐고 한껏 비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엘리자벳이 나간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요. 안아 줘요. 엘리엇. 지금 당장 여기서 안아 줘요!”

그 모습에 오기가 생긴 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나가다 말고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지긋지긋하다는 감정과 당혹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의 표정에서 통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머물던 곳에서 체취가 묻은 곳에서 나를 안아 줘. 그리고 나와 같은 비참함을 당신도 느껴.

가슴을 펴고 옷깃을 내리려 하자 그가 다가와 팔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있는 힘껏 잡힌 팔이 아팠다.

그가 옷깃에서 손을 떼어 내곤 미쳤냐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마주 보며 한껏 비웃어 주었다.

그가 끔찍한 것을 보는 듯이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사라진 공간에는 언제나처럼 초라한 내 울음소리만 남았다.

* * *

“결정했어요. 내가 할게요.”

“실패하면 네가 뒤집어쓰는 거야. 난 상관없어. 끌어들이려 해도 소용없을 테고.”

“알았어요. 다만 전하……. 엘리엇은 괜찮은 거죠? 죽는 건 폐하뿐이죠?”

“그래. 누워 지내는 신세는 면치 못하겠지만……. 너는 그걸 원하지 않나?”

“……그래요. 이걸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황궁에 별도의 심사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건 너뿐일 테니까.”

사내가 말을 마치며 두 개의 병의 꺼냈다.

“오른쪽은 네가 마셔. 일이 끝나고 해독제를 주지.”

나는 병을 집어 들고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찬란한 금발 아래 파란 눈에는 평소와 같은 다정함 따위 없었다.

요 몇 달 엘리자벳의 옆에서 그녀의 연인인 그를 봐 왔지만 이런 표정은 생소했다.

역시나.

‘엘자. 네 연인은…….’

병을 든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내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작은 병은 어둠 속에서도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병의 마개를 열자 쓴 냄새가 순식간에 코를 타고 올라왔다.

병 안의 액체는 진득한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 액체를 바라보다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는 그 냄새만큼이나 썼다.

“그럼 그날 보지.”

나는 홀로 남아 탁자 위에 올려 둔 다른 병을 봤다. 이 병을 전해 주기만 한다면 엘리엇은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나는 엘리엇의 냉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나와 함께했고, 내가 원할 때 나를 안아 주었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나를 멀리했다. 나와 식사 한번, 차 한번 하지 않았으며 둘만의 산책 따위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전하께서 불안한 황가의 입지를 위해 라세르가 여식을 이용한다더라는 소문을 불러왔다. 나는 사교계에서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내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여동생에게 보여 주는 친절과 사랑이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의 눈은 항상 한곳으로 향했다.

공식 석상에 함께 손을 잡고 입장할 때도, 춤을 추는 그 순간에도 항상 그의 눈은 나를 비켜서 있었다. 내 가슴은 그럴 때마다 썩어 문드러져 갔다.

그러던 중 친우의 연인인 르온 공작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며 속살거렸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버려질 테지. 그거 아나? 황태자가 근친혼이 허용되었던 역사서를 살펴보고 있는 것을?’

나는 그 말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여동생과의 결합을 원해도 나라 전체가 반대할 것이다.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그의 소망은 절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이처럼 황가의 입지가 약할 때는 황제를 갈아 치울 사유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해내는 그의 집념을, 그를 사랑하는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언젠가 그가 황제가 되어 정말로 엘리자벳과 결혼하려 든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불안감으로 미쳐 버린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끔 나를 몰아세웠다. 결국 나는 뱀의 속살거림에 넘어가고 말았다.

* * *

엘리자벳의 생일 연회는 지금껏 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열렸다. 매년 그녀의 생일 연회가 그러했지만 이번에는 황가의 하나뿐인 황녀가 성년이 되는 날이기에 더욱 특별하게 열렸다.

주인공인 엘리자벳은 이제는 약혼자가 된 르온 공작과 입장했다. 나는 그 뒤로 엘리엇과 함께 입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앞에만 박혀 있었다. 여동생의 손을 꼭 잡은 손을 그는 끊어 낼 듯 보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 아닌가요?”

“…….”

내 비웃음 가득한 말에도 그는 오로지 앞만을 봤다. 최근 그는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받은 상처는 수도 없이 많았건만 왜 항상 더 아픈 것일까.

내가 비참함에 떨고 있을 때 그가 손을 잡아 왔다. 시종이 입장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밑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온 후에도 한참을 내 곁에 있었다. 연인으로서 충실한 모습이었다.

첫 춤이 시작되었다. 그는 자연스레 나를 홀 가운데로 이끌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그가 어딘가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녀를 향한 시선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엇.”

“…….”

“엘리엇 나를 사랑하나요?”

“…….”

그는 내 말에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가 멀어졌다 원을 그리며 돌아왔다. 맞잡은 장갑의 감촉이 차가웠다. 나는 끝까지 말하기를 거부하는 그를 보며 마지막 부탁이자 기회를 그에게 던졌다.

“그렇다고 한 번만 말해 주면 안 되나요?”

“…….”

역시 끝까지 잔인한 사람이었다.

춤이 끝나자 그가 내 곁에서 멀어졌다. 연인으로서 그의 역할을 다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를 보다 등을 돌렸다. 멀리서 친우가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벨! 저 영애 이름이 뭐라고?”

“음, 프론 자작 영애야. 내가 알기로는 이번에 르온가 사업에 프론 자작이 참여했다는데 그 덕에 공작 각하하고도 아는 사이일걸.”

엘리자벳은 고작 연인과 인사를 나누는 자작 영애를 질투하고 있었다. 저따위 것으로 질투를 하다니, 참 편하게도 사랑받으며 산다 싶어 웃음만 나왔다.

다행히 공작은 친우의 인내심이 다하기 전 프론 영애를 떼어 내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나는 곧 일이 터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멍청한 엘리자벳은 저에게 비수를 꽂을 연인의 귓속말에 귀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래서 죽고 못 사는 연인들 옆에는 있는 게 아니라니깐.”

“잠, 잠깐 벨! 가지 마!”

저 멀리서 엘리엇이 여동생을 찾는 것이 보였다. 끝까지 제 여동생만을 보는 모습에 나는 마음을 굳혔다. 영원히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면 나만 보게끔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엘리엇도 나를…….

달이 환하게 창가에 비칠 때쯤 축배를 드는 자리가 열렸다. 가지각색의 술이 사람들 머리 위로 올라갔다. 엘리엇이 기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나 또한 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홍색 액체가 엘리엇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몇 초 후 그가 새빨간 피를 토했다. 그는 눈에 핏발이 선 상태에서도 탁자에 손을 짚고 여동생을 향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여동생을 찾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엘리자벳은 주저앉아 신음만 내지르고 있었다.

홀 사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어디선가 달려 나온 기사들이 사람들을 도륙하고 다녔다. 홀이 비명 소리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그리고 엘리자벳은 르온 공작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배신당한 그녀를 보는 모습은 어쩐지 통쾌했다.

살육은 계속됐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나는 끝까지 엘리엇을 바라봤다. 탁자 위로 떨어진 고개는 더 이상 엘리자벳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 * *

나는 가만히 누워 있는 엘리엇의 얼굴을 쓰다듬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서늘한 그의 입술이 뜨거운 내 입술을 식혀 줬다.

그는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 방문하는 궁의는 차차 회복되고 있으니 곧 깨어날 거라 날 안심시켰다. 그러나 나는 별로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르온 공작을 통해 전해 받은 우세리 공작의 약은 궁의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게 엘리엇을 유지시켜 주고 있었다.

홀 안에서 학살이 벌어지던 날 황제는 즉사했다. 그 덕에 황태자였던 엘리엇은 황제가 되었다.

비록 본인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관식도 열렸다. 황제가 없는 대관식이라니. 웃음만 나오는 자리였다.

하지만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관식 후 나는 엘리엇의 약혼녀로서 자리했다. 이제 곧 나는 정식으로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터였다.

북부 산맥 너머 야만인들을 토벌하러 갔던 에셀은 홀 안에서 학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급히 온 것이 분명한지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나와 엘리엇이 있는 중앙궁으로 곧장 달려왔다. 그러나 막아서는 기사들로 인해 그는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중앙궁에 출입이 허용되는 자는 몇몇의 시중인들과 나 그리고 한 명의 궁의였다. 에셀은 중앙궁 출입이 저지되자 당장 중앙 원로원을 찾아갔다. 이건 반역이라 항의하러 갔을 테지.

하지만 그날 홀 안에서 살육을 주도했던 기사들 중에는 마들렌 언니 휘하의 북부 기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라세르가의 문양이 박힌 검으로 황제의 측근들을 도륙했다. 라세르가의 이름을 단 이상, 라세르가의 문양이 박힌 검을 든 이상 에셀도 그가 말하는 반역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중인이 전해 온 쪽지에 따르면 에셀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잡아 둘 인질로서 내가 중앙궁에 엘리엇과 함께 감금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너무도 착한 내 오라비는 내가 그들의 계획에 참여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터였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더라도 믿지 않고 있는 것이겠지. 에셀은 그런 오라비였다.

내 친우, 엘리자벳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름어름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그녀는 장미궁에 감금되었다 했다.

황제가 죽고 엘리엇이 쓰러진 이상 남은 황족이라고는 그녀뿐이니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세웠지만, 글쎄. 그날 그녀를 끌고 가던 르온 공작의 얼굴을 본 나는 친우의 처지가 썩 좋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벳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비와 오라비가 쓰러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녀는 얼어붙은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꼴사나운지 방금 전까지 행복에 겨워 웃고 있었던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진 모습이었다.

나라면 검을 뽑아 들거나 제 편이라도 찾았을 텐데. 그도 아니라면 비명이라도 질렀겠지. 하지만 멍청한 그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다 제 연인의 손에 개처럼 끌려갔다. 끌려가는 친우의 노란 드레스 자락에는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그날을 생각하던 중 방 안에 있는 유리관이 눈에 들었다. 유리관 안에는 황제의 관이 있었다. 온갖 보석들과 금으로 치장된 관은 화려했다.

빛이 비칠 때마다 관에 박힌 보석들이 제각각의 색을 띠며 보는 이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엘리엇의 조모인 선선대 황제가 자신의 가문인 오로르를 유일한 황가로 올리면서 만들었다는 이 관은 위엄 있는 황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황가의 위엄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 전 황가는 정식으로 황제의 인장이 박힌 칙령을 내려 선선대 황제가 황권을 잡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는 황가 스스로 본인들의 당위성을 깎아내리는 행동이었다. 물론 황가의 일원 누구도 이런 칙령을 작성한 일은 없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허수아비 황제, 그 황제가 쓰는 관의 존재는 더 이상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엘리엇, 불쌍한 나의 왕자님.”

나는 엘리엇의 옆으로 가 누워 있는 그에게 파고들었다. 이리 붙어 있으니 그와 하나가 된 느낌이 들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손 밑으로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규칙적인 소리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이 감겨 왔다.

* * *

“엘리엇. 더 드셔야 해요.”

엘리엇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접시만을 바라봤다. 벌써 며칠째 수저조차 들지 않는 그가 나는 걱정되었다. 누워 있을 때보다야 나았지만 그는 여전히 말라 있었다.

그는 어느 새벽 말없이 눈을 떴다. 이후 그는 눈을 깜박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도 내지 못해 뻐금거리던 그를 발견한 나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리 완벽했던 그가 이리되다니. 비록 내가 한 짓이긴 했지만 안타깝고 가여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옆에서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는 눈빛으로 나를 거부했지만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10개월이 다 되어 가자 그는 서서히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엘자는?”

엘자, 엘자, 엘자, 엘자. 그는 말을 할 수 있는 순간부터 그 이름만을 불러 댔다. 여동생이 안전한지, 뭘 하는지 그에게 관심사는 그뿐이라는 듯이. 엘자라는 단어는 이제 나에게 있어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다.

“에셀이 황녀궁에 가 있어요.”

나는 소리 나게 접시를 내려놓고는 간략하게 친우의 안전을 확인해 줬다. 실제로 최근 에셀은 장미궁에 감금되다시피 한 엘리자벳을 다시 황녀궁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사들로 하여금 황녀궁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 원래 황궁의 기사들을 통솔하는 것은 그였으니 조만간 중앙궁도 에셀이 다시 맡게 되리라.

페루스는 도대체 뭘 하는지! 나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에셀이 돌아온다면 지금처럼 엘리엇의 곁에 있기란 힘들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벳 또한 제 오라비를 만나러 오겠지. 그것만은 끔찍이 싫었다.

“에셀은 알고 있나?”

“무엇을요.”

“네가 미쳤다는 사실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엘리엇.”

“에셀 밑에 너 같은 동생이 있다니.”

“…….”

“이만 물러가. 꼴도 보기 싫으니.”

“시중들 사람이 없어요.”

“필요 없으니 물러가. 너와 같이 있는 게 더 고역이야.”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등을 보이며 이불을 덮는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등을 쳐다보고 있는 내 귀에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난 한 번도 네게 이름을 허한 적이 없어. 앞으로는 지켜 줬으면 좋겠군.”

이름을 부르지 말라니. 그는 이제 나에게 마지막 선까지 거둬 가고 있었다. 아, 그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한테 잔인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나는 그를 계속해서 돌봐 왔건만 나와 그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왜일까, 왜, 왜, 왜, 왜.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만이 계속해서 가슴을 쳐 왔다.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서?’

가슴 깊은 곳에서 답이 떠올랐다. 그래.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서, 여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나에게 줄 자리가 없는 게 분명했다.

나도 이미 엘리엇에게 모든 것을 줘 버려 다른 이는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 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나의 왕자님. 엘리엇의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는 대상을 비워 버리면 될 터였다.

* * *

나는 오랜만에 엘리자벳을 찾았다. 한동안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그녀였다.

사실 볼 수 있어도 방문할 생각 따위 없었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감금되어 있을 때 미쳤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꽤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의 멀쩡한 모습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가녀렸다.

저 하얀 피부를, 저 물처럼 흐르는 머리채를, 저 녹음 같은 눈동자를, 저 가느다란 팔다리를 그는 사랑하겠지.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 엘자.”

“아냐……. 오고 싶어도…… 못 왔을…… 흑.”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눈이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멀쩡한 건 껍데기뿐인가. 궁에 들어서기 전 엘자의 몸이 좋지 않다고 알려 온 에셀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장미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어딘가 망가진 것이 분명했다.

허나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줬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다. 울음소리가 지겨워질 무렵 그녀는 눈물을 닦고 내 손을 잡아 왔다.

“벨. 넌 엘리엇을 볼 수 있다 들었어. 엘리엇은 괜찮아?”

“폐하는 잘 지내고 계셔.”

너만 아니면 말이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에셀이 곧 엘리엇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데. 가능할까?”

나는 그녀의 물음에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을 본 그녀가 다행이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에셀은 역시 그녀와 엘리엇을 만나게 해 줄 모양이었다. 내 오라비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녀를 보니 다시 속에게 불이 치밀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녀 주변에는 항상 그녀를 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진창 속에서도 연꽃처럼 고고할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나는 엘리엇과 그녀를 만나게 할 생각 따위 없었다.

엘리엇의 안전을 확인한 후 그녀는 나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 나와 에셀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듣고 있자 지겨움에 슬슬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히 그녀의 말을 끊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올게.”

“응. 벨 내일 봐.”

그 후 나는 한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황녀궁을 방문했다. 다른 이에게는 철통같은 황녀궁이 나에게는 항상 열려 있었다.

그리고 내가 황녀궁을 방문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던 어느 날, 친우는 극독을 마시고 쓰러졌다.

* * *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책과 잡기들이 떨어졌다. 그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검을 뽑아 든 그는 검의 무게에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나는 그가 쓰러질까 염려되었다.

“너지?”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추궁했다. 엘리자벳이 쓰러진 지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가 어찌 알았을까? 중앙궁은 드나드는 사람조차 별로 없는데.

에셀인가? 오늘 드디어 그가 중앙궁에 들었다던 소식이 생각났다. 하지만 오라비인 에셀은 환자인 친우에게 그런 소식을 전할 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폐하.”

“엘자! 내 동생. 그 아이가 독에 쓰러졌다던데, 네가 모른다고?”

“저는 모르는 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 옆으로 책이 날아들었다. 책을 던진 그가 쿨럭거리며 피를 토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검을 앞으로 내밀어 내 접근을 막았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증오가 가득한 눈에 한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제가 엘자에게 왜 그러겠어요. 저는 그 아이의 친우예요. 폐하를 안 시간만큼 엘자와도 알고 지낸 친우라고요!”

“친우? 하, 네가 그 아이의 친우라고? 넌 그날 이후 엘자를 원수 보듯 했어! 너와 함께 다니는 그 아이를 보며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기나 해?”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그날, 그가 친우의 이름을 부르며 욕정하는 것을 본 이후 내가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음을.

허나 그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 또한 여동생의 연인을 질투하지 않았나.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안 하겠어요. 하지만 그녀에게 독을 먹인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녀는 적이 많을 뿐이에요. 오로르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폐하도 알고 계시잖아요!”

“거울로 네 표정을 봐라!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지. 진작 너 같은 건 끊어 냈어야 했는데.”

그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이를 갈았다. 끊어 낸다. 그의 말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이성이 날아갔다.

“에셀! 제 오라비 덕에 목숨을 부지하시고 계시면서……. 제가 없으면 에셀이! 폐하와 엘자를 지켜 줄 듯싶으세요? 제 오라비가 없었다면! 제가 없었다면! 폐하는 이미 죽은 목숨이겠죠. 물론 그 잘난 폐하의 여동생도 마찬가지고요. 아, 그녀는 아름다우니 어디론가 팔려 갈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녀를 노리는 사내가 적지 않은 것쯤은 알고 계시지요? 아니면 산 채로 황궁에 박제되어 멸문한 황가의 전리품으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굴려지겠죠.”

나는 비틀거리는 그를 비웃으며 소리쳤다. 내 말에 그가 검을 위로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사실 에셀은 내가 없어도 엘리엇과 엘자를 지켜 줄 터였다. 내 오라비는 착하고 착해서 친우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이니.

하지만 여동생의 일로 미쳐 버린 엘리엇에게 내 말은 기폭제로 작용했다.

“역시 그날 널 죽여 버렸어야 했어! 네가 미친 건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검이 목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검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찬찬히 그를 살펴봤다.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에는 나를 향한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했다. 그의 얼굴에 그것 말고 다른 감정 따위 한 줄기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할 일 따위 없겠구나. 그는 나를 사랑한 적도, 앞으로 사랑할 일도 없을 사내구나. 두 눈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엘리엇. 전 그저 당신을…… 폐하를 사랑했어요! 좋아할 뿐이었어요! 그뿐이었어요!”

“지독하군! 역겨워 숨이 막힐 지경이야.”

나는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건만 그의 목소리는 아까에 비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과 목소리에 새겨진 증오와 미움의 감정은 전혀 깎이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은 그가 검을 내려 내 앞에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휘청거리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옷깃이 내 팔을 스쳤다.

“폐하. 정말 제가 아니에요.”

나는 등을 돌려 그를 붙잡았다.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음을 안 이 순간에도 나는 그의 미움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 없었다. 정확히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나를 저렇게 바라본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을 쉴 수가 없는데, 계속해서 저런 시선뿐이라면? 영원히 그에게 미움받는다면?

그는 옷을 잡은 내 손을 뿌리쳤다.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흐려진 시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셀, 내 오라비는 나와 엘리엇을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에셀의 앞이라면 친우의 앞이라면 엘리엇도…….

나는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멀리서 에셀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에셀의 표정을 본 것인지 엘리엇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그래 그렇게 나를 돌아봐 줘. 제발.

허나 그 바람도 잠시. 엘리엇은 다시 등을 보였다. 한순간 희망으로 날아올랐던 나는 다시 추락했다.

아, 끝까지 잔인한 사람. 끔찍이도 미운 사람. 당신을 증오해.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그 아이를 증오해. 당신을 사랑한 나를 증오해.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당신에게 기회를 줄게.

“난…… 난 정말 아니에요. 폐하. 믿어 주세요. 제발…….”

난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짜내 그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검을 복부로 가져갔다.

그는 한 번도 내가 준 기회를 잡지 않았다. 내가 준 많은 기회는 그에게는 항상 보잘것없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나도 더는 그를 위할 필요가 없지.

멀리서 달려오는 에셀이 보였다. 날카로운 검이 복부에 박혔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살을 뚫는 소리가 생생히 귀를 울렸다.

“벨!”

에셀이 쓰러지는 나를 안는 것이 느껴졌다.

에셀. 내 착한 오라버니. 나를 사랑하는 나의 오라버니, 미안하지만 마지막으로 나를 도와줘. 엘리엇과 그녀에게 복수해 줘. 나는 그들이 미워서 견딜 수 없어,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난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에셀…….”

에셀이 뭐라 말하며 내 복부에 박힌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쿨럭하는 소리와 함께 내 입에서 피가 흘렀다. 문 앞에서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엘리엇이 보였다. 마지막 오기가 생겼다.

“엘리엇! 내가 엘자에게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가지 말아요. 엘리엇. 제발 엘리엇!”

나는 엘리엇에게 마지막으로 외치고는 에셀을 바라봤다. 에셀은 일부러 외친 내 말에 엘리엇의 등을 증오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한 번도 친우에게 보인 적 없는 눈이었다. 강렬한 쾌감이 느껴졌다.

아 되었다. 이로써 당신과 그녀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가 사라졌다.

마지막 방패가 사라진 당신은 곧 내 곁으로 오겠지. 슬며시 웃음 짓고 있을 때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속으로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엘리엇. 내가 사랑하는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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