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2/15)

[2장]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에셀은 황녀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가 궁 안으로 들어서자 다들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궁 전체에 퍼져 있는 분위기를 눈치 못 챌 에셀이 아니었다.

낮에 황녀가 황제를 찾아갔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제 오라비를 끔찍이 여기는 황녀이니 의식 없는 황제를 보고 한바탕 난리를 쳤을 것이리라. 아마 자신을 보며 며칠 전 궁 출입을 막았던 것을 원망할지도 몰랐다.

그때 그에게 황녀궁의 시녀장이 다가왔다. 그녀는 에셀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에게 더 다가올지 말지 고민하는 시녀장을 본 에셀이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러자 시녀장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붙였다.

“저, 전하께서…….”

“혼절이라도 하셨나?”

에셀은 시녀장의 말을 끊고 다시 질문했다. 빠르게 답하라는 신호였다. 시녀장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 황녀 전하께서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다치셨는데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시고…….”

“알렉스 그자는 뭐 하고 있지?”

“페테 경은 연금되셨다고만…….”

에셀은 황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과 알렉스가 연금되었다는 시녀장의 말에 눈썹을 올렸다. 오라비의 일에 충격을 받을 줄은 알았지만 평소 조용한 황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건데 고함을 지르고 제정신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알렉스의 연금으로 그러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페루스가 상황을 정리했다는 부하의 보고가 생각났다.

“중앙궁 말고도 어디를 가셨나?”

“전하께서 혼절하셔서 르온 공작님께서 근처 장미궁으로 모셔 갔다 들었습니다.”

에셀은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그의 표정을 본 시녀장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보였다.

“개새끼가.”

에셀은 평소라면 떠올리지도 않을 단어를 뱉었다. 장미궁은 엘리자벳에게 있어서 금역이나 다름없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괜찮아졌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장미궁이라는 단어에도 벌벌 떨고는 했다.

에셀이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시녀장이 뭐라 말하려고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황녀의 방을 향해 곧장 뛰었다.

황녀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고함을 치고 있다는 시녀장의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에셀은 불안한 생각에 재빨리 황녀 방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있던 시녀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안녕?”

황녀의 침실에는 예상 밖의 인물이 있었다. 그를 본 에셀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객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누워 있는 엘리자벳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누가 부탁하더라고. 게다가 우리 황녀님 일인데 내가 안 와 볼 수 없잖아?”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공작께서는 이번 주에 황녀궁에 들어올 수 없을 텐데요.”

“아아 까다롭긴. 이건 돌발 상황이잖아? 그리고 난 오늘 궁의 대표로 황녀님을 치료하러 온 거라고.”

타티카는 에셀의 말을 침착하게 받으며 몸을 의자에 기댔다. 엘리자벳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핏기 없는 얼굴은 볼만 빨갛게 부어 있었고, 이불 밖으로 나온 손에는 자상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에셀의 눈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흐음. 기사님은 소식에 늦네?”

그런 에셀을 본 타티카가 그에게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셀이 타티카를 노려봤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몸의 상처는 별거 아니야. 내가 깔끔하게 치료했다고. 발목 때문에 당분간 걷는 건 조심은 해야겠지만. 그보다 문제는 여기이려나?”

타티카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 거 같습니까?”

“글쎄……. 이번에는 페루스가 작정하고 데리고 간 거 같은데. 황녀님이 페루스의 심기를 어떻게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저번하고 다르게 약 몇 번 먹는 걸로는 안 끝날걸. 그놈은 왜 조용하다가 그러는지 몰라. 이러다가 우리 황녀님 안 고쳐지면 어쩌려고. 아, 혹시 그걸 노리는 건가?”

타티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에셀은 그 또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말과 행동은 평소와 같았지만 자색 눈은 어딘가 심각한 구석이 있었다.

“어찌 됐던 기사님이 왔으니 난 빠져야겠지. 황녀님 다음에 봐.”

페루스가 엘리자벳의 이마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는 일어섰다. 그러고는 에셀에게 뭔가를 던졌다. 투명한 병에 정체 모를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일어나면 마시게 해. 아마 일어나자마자 난리 칠 테니 직접 먹여. 그리고 계속 옆에 있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큰일 날지도 모르니깐 말이야.”

에셀은 타티카가 준 병을 쳐다봤다. 분홍색 액체가 기분 나쁜 색을 띠고 있었다.

“……이거 혹시 이상한 거 아닙니까?”

에셀이 의심스럽게 타티카를 쳐다봤다. 타티카는 에셀의 의심에 슬프다는 듯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 설마 내가 아픈 황녀님한테 이상한 거 먹이려고? 이래 봬도 의사라니깐? 참 의심 많은 기사님일세. 쯧쯧.”

에셀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일단 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못 미덥고 부도덕한 인간이었지만 본인의 말처럼 궁에서 약으로 그를 따를 자는 없었다.

에셀이 병을 챙겨 넣는 것을 보고 타티카가 손을 흔들며 방을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타티카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에셀은 곧장 시녀를 불렀다. 시녀는 그의 명대로 물에 젖은 천을 가져왔다.

에셀은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고 황녀 옆에 앉았다. 엘리자벳은 죽은 듯이 미동조차 없었다. 하지만 간간이 인상을 찌푸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에셀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밤이 깊어지자 에셀은 시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은은한 불빛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에셀은 엘리자벳을 조용히 응시했다. 빨간 볼이 안쓰러웠다. 동시에 페루스에게 생각이 미쳤다. 페루스를 생각하니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리고 그의 계획에 참여한 자신에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때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셀은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불쌍한 벨은……. 그 불쌍한 아이에게 갚지 못할 죄를 짓는 것이었다.

벨에게 생각이 닿자 에셀의 눈동자가 다시 차가워졌다. 눈앞의 여자와 황제는 그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모든 것을 바쳤지만 자신에게 벨마저 앗아 간 존재들이었다.

‘난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에셀.’

‘엘리엇! 내가 엘자에게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가지 말아요. 엘리엇. 제발 엘리엇!’

벨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벨은 죽어 가면서도 한 남자만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남자는 벨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남자를 본 벨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 갔다.

“으……음.”

그가 벨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누워 있는 엘리자벳의 얼굴에 녹색이 언뜻언뜻 비쳤다.

“…….”

에셀은 아무 말 없이 엘리자벳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지러운지 제 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휘청이는 엘리자벳을 본 에셀이 그녀를 돕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자신을 잡는 손길에 그녀의 눈이 완전히 열렸다. 그리고 순간 찢어지는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다가오지 마. 아아아! 제발, 제발 다가오지 마. 잘못했어……. 우욱, 잘못했어요. 공작님. 제발…….”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사람의 소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입을 통해 방 안을 채웠다.

에셀은 순간 당황하며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던지기 시작했다. 구석으로 베개가 날아갔다.

에셀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고 침대에 눕혔다.

“놔! 놓으란 말이야. 놔!”

에셀에게 잡힌 엘리자벳이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손톱을 세웠다.

하지만 기사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 그녀는 곧 남자에게 제압당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몸부림이 그쳤다.

에셀은 진정된 듯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몸부림이 그치자 이번에는 여자가 떨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서 시작된 떨림이 에셀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놔 주세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 페루스…… 아니, 공작님. 아니…… 그러니깐 제발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울며 놔 달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간간이 들리는 페루스란 말에 에셀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에셀이 입술을 물며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작은 병이 잡혔다. 그는 병을 열고 바르작거리는 엘리자벳의 입에 병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자신의 입에 닿는 느낌에 여자가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제길, 엘자. 가만히 있어.”

에셀은 어떻게든 엘리자벳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다시 시작된 몸부림은 전보다 거셌다.

“엘자! 제발.”

그가 한 팔로 엘리자벳의 몸을 눌렀다. 그러고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을 고정시켰다.

턱이 잡힌 엘리자벳은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 도리질을 쳤다. 결국 병에 있던 액체가 살짝 쏟아졌다. 쏟아진 액체를 본 에셀이 병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곧 그의 입에 달콤한 향이 가득 찼다.

그는 액체를 머금은 채 한 손으로 엘리자벳의 두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고정했다. 손아귀의 힘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에셀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엘리자벳의 입을 틀어막았다. 액체가 엘리자벳의 입으로 들어찼다. 에셀은 그녀가 액체를 다 삼킬 때까지 계속해서 입을 막았다.

마침내 그녀의 목으로 마지막 액체가 넘어갔다. 에셀이 입을 뗐다. 황녀는 여전히 그의 밑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에셀은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를 제압했다.

밑에서 버둥대던 힘이 점차 약해졌다. 엘리자벳의 움직임이 멈추자 에셀은 침대를 내려왔다. 방 안에는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으…… 으응.”

얼마간의 정적 후 에셀의 귀에 엘리자벳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황녀를 쳐다봤다. 다시 발작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뇌리에 닿았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엘리자벳은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달뜬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소리와 붉어진 얼굴을 본 에셀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으, 하아…….”

엘리자벳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지며 더운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얼굴뿐 아니라 온몸 전체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셀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역시 믿지 못할 놈은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 옆에 있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큰일 날지도 모르니깐 말이야.’

타티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일부러 이런 약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에 에셀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그러나 순간 에셀은 자신의 몸에도 이상한 느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셀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한 미약이 틀림없었다. 건강한 자신이 잠시 머금은 것만으로 약효가 올라오는 미약이니 그것을 마신 엘리자벳은 어떨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가 재빨리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 했다. 일단 궁의를 불러오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손목에 무언가 감겼다.

“하아……. 아, 제발 누가…… 하아.”

엘리자벳은 그가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손목을 잡고 있었다. 달뜬 얼굴에서 나온 숨이 그에게도 느껴졌다. 그녀에게 잡힌 손목이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으응……. 제발, 제발 나 좀……. 으응, 어떻게…… 응, 에셀?”

엘리자벳이 몸을 비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초점 없는 눈이 제정신이 아님을 보여 줬다.

에셀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신음 소리와 온도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에셀.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와 그의 귀에 울렸다.

“아…… 에셀.”

엘리자벳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에셀이라는 이름이 다시 그의 귀에 박히는 순간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 *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찌르르한 감각이 지나갔다. 입안에 향긋한 무언가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머릿속을 날려 버렸다. 숨을 쉴 때마다 자극이 밀려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검은 머리가 언뜻 비쳤다.

잡아야 해. 엘리자벳은 그렇게 되뇌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순식간에 그녀의 사정거리에서 멀어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대로 혼자 남겨진다면 아마 자신은 미쳐 버리리라. 그건 싫었다. 눈앞의 사내가 등을 돌려 걸어가려 하는 것이 보였다. 엘리자벳은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길에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엘리자벳은 사내를 똑바로 바라봤다. 눈앞이 녹아내렸지만 엘리자벳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친우이자 기사였던 에셀이었다. 에셀은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하는 듯했지만 차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엘리자벳은 내심 안도했다. 지금의 에셀이라면 그녀를 안아 주고 위로해 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안도감에 엘리자벳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엘리자벳은 용기를 내어 에셀을 불렀다.

“으응……. 제발, 제발 나 좀……. 으응, 어떻게…… 응, 에셀?”

엘리자벳은 예전 에셀에게 하듯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항상 친절했던 그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왈칵 구겨진 그의 미간이 보였다. 화가 났나?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에셀이 이대로 가 버릴 거야. 나를 두고 가 버릴 거야. 다시 두려움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가 울먹이며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아…… 에셀.”

시야에 천장이 보였다 금방 사라졌다. 대신 눈앞에 에셀의 검은 머리가 놓였다. 엘리자벳은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말았다.

다시 시야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방 안의 모든 색들이 뒤섞여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신기한 건 그 와중에도 에셀의 얼굴은 또렷하다는 것이었다. 팔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에셀이 움찔거리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 엘리자벳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도 그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찬찬히 그의 얼굴을 훑었다.

이 눈도, 코도, 입도 그리고 뺨도 모두 그녀가 아는 다정한 에셀이었다.

* * *

자극이 가시자 에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페루스나 타티카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약에 취한 여인을 안다니. 짐승조차 안 할 일이었다. 엘리자벳이 일어나면 분명 얼굴조차 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약을 준 타티카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올라왔다. 그는 속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타티카에게 퍼부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진 후였고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에셀이 고개를 돌려 엘리자벳을 봤다. 그녀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추운지 몸을 말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에셀은 빠르게 이불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때 엘리자벳의 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남긴 흔적이 눈에 선명히 잡혔다. 에셀의 얼굴이 저절로 붉어졌다.

에셀은 빨갛게 타오른 얼굴로 침대 옆에 올려 두었던 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까 시녀가 들여온 것이었다.

그는 천에 물을 적셔 엘리자벳의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차가운 천의 감촉에 엘리자벳이 움찔거렸다.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의 흔적을 닦아 냈다. 어찌나 조심하며 천천히 닦는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엘리자벳은 완전히 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그녀는 따스함이 좋은지 이불을 둘둘 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에셀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며 기뻐하고 말았다.

* * *

창문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엘리자벳은 환한 느낌에 눈을 떴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몸에서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이 보였다.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눈앞에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페루스? 에셀? 분명 무언가 머릿속을 스쳤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몸 여기저기 오른 꽃이 어제의 일을 말해 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안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기억이 없다니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똑똑똑.

그녀가 홀로 한참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엘리자벳은 빠르게 이불을 몸 위로 올렸다.

“좋은 아침. 황녀님!”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왜?’

이번 주는 분명 에셀이 궁에 있어야 할 텐데. 그녀는 다가오는 타티카를 경계하며 머리를 굴렸다.

“황녀님은 내가 안 보고 싶었던 거야? 섭섭한걸.”

타티카가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어쩐 일이세요?”

“황녀님 기억 안 나? 어제 황제 폐하 보고 기절했잖아.”

엘리엇!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어제 엘리엇을 보러 궁에 갔고 엘리엇을 보고 그 후에 페루스를 봤던 거 같……. 아니야, 에셀과 함께 이 방에서…….’

다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타티카가 살며시 입술 끝을 올렸다. 다행히 약이 제대로 들은 모양이었다.

성공적인 약효에 타티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장기말로 쓰인 기사님은 화를 내겠지만 타티카는 기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눈앞의 황녀님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는 어제 엘리자벳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강수를 뒀다.

‘강한 자극은 강한 자극으로 잊게 해야지.’

정확히는 자극을 다른 자극 안에 넣어 두는 임시방편이지만 어쨌든 그의 계획은 성공했다. 엘리자벳은 당분간 장미궁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몸은 어때? 발목은 괜찮아?”

“발목? 아, 공작이……. 고마워요.”

엘리자벳이 전혀 감사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타티카는 상관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어제 기사님하고는 좋았어?”

“…….”

엘리자벳의 머릿속이 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에셀에게 안겨서 몸을 흔들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에게 안겨 계속해 달라고 조르며 음란하게 교성을 지른 것이 생각나자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그런데 왜 에셀이?’

그에게 안긴 것은 떠올랐지만 왜 안겼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 에셀의 성격으로 볼 때 그가 그녀를 안을 리가 없었다.

계약 이후 1년이 지났지만 그는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때 타티카가 방금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에셀이 그녀를 안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제 에셀에게 안긴 자신의 모습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제정신으로 에셀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순간 향긋한 액체가 떠올랐다. 범인을 유추해 낸 그녀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공작의 짓이군요.”

타티카는 그녀의 차가운 말에 그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휘어진 눈 밑 점이 야살스럽게 빛났다.

“자자, 그럼 치료 시간입니다!”

엘리자벳은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잡는 타티카의 손짓에 놀라 쥐고 있던 이불을 떨어뜨렸다. 이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뽀얀 가슴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타티카의 눈이 한층 반짝이며 빛났다.

“흐응, 황녀님 나랑은 안 놀고 싶어?”

타티카는 빨간 입술을 핥으며 엘리자벳의 손목을 더 강하게 쥐었다. 엘리자벳은 그런 그를 보고 빠르게 이불을 다시 올렸다.

“치, 치료는 필요 없어요. 나가 주세요.”

하지만 엘리자벳의 단호한 대답에도 타티카는 그녀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술의 감촉에 기겁한 엘리자벳이 손목을 강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타티카에게 잡힌 손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타티카에게 범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돌아가십시오. 공작. 당장.”

그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는 그가 검집에 손을 올리며 타티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타티카가 황녀의 손을 놓고 항복하며 물러났다. 에셀은 턱으로 방 밖을 가리켰다.

손까지 들고 나가는 타티카를 에셀은 끝까지 노려봤다. 에셀은 타티카가 나가자말자 방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엘리자벳을 봤다.

그러나 그는 엘리자벳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엘리자벳도 마찬가지였다.

“…….”

“…….”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곧 에셀의 몸이 방문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쉬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에셀의 모습이 엘리자벳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데는 수 초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 * *

마들렌 라세르, 그녀는 누구인가. 불타는 빨간 머리를 가진 이 여인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지만 그보다 남자 기사들 못지않은 검 솜씨로 제국 전체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북부 야만인들을 토벌하는 데 항상 앞장섰으며 가문의 장녀로서 명예와 북부를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의 외모에 반한 어떤 백작의 희롱에 그의 팔을 베어 버린 일은 수도 사교계에서도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툴란에 철혈의 여인이 나타났다며 수군거리고는 했다.

하지만 툴란의 정치계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는 라세르가의 가주 자리를 두고 이복 남동생 에셀 라세르와 경쟁 중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심지어 라세르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여인이 라세르가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이미 수도 정치계에 쫙 퍼져 있었다.

“누님.”

에셀은 머리가 아팠다. 갑작스럽게 의붓누이가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누이가 타고 온 말이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거품을 물더니 죽어 나자빠졌다.

게다가 누이의 표정을 보니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의 누이는 그에게 여과 없는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뽑아 든 검을 보니 그와 한바탕 싸울 것이 분명했다.

에셀은 세상 그 누구와도 싸우는 것이 두렵지 않았지만 눈앞의 누이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마들렌과 대련하는 날이면 피를 보지 않는 일이 드물었다.

자존심 강한 그녀는 승리에 매우 집작했으며 자신이 이길 때까지 도전하는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실력도 그와 비등해 봐줄 수도 없는 상대였다.

“검을 뽑아. 에셀 라세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에셀은 팔짱을 끼고 누이를 향해 물었다. 사실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모르는 체하지 마라. 네가 오로르 계집의 방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계집이라니요. 황녀님이십니다. 말조심하십시오. 여긴 북부가 아닙니다. 누님.”

갑자기 차가워진 에셀의 말투에 마들렌이 이를 갈았다. 반응을 보건대 저 배신자가 오로르 계집의 방에 드나든다는 것은 사실이리라.

‘벨을 잃고 제정신을 차린 줄 알았더니! 멍청한 놈!’

마들렌의 눈이 한층 불타올랐다. 지금 당장 저놈을 베고 그 계집도 요절을 내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마들렌이 뽑아 든 검을 에셀의 목에 들이댔다. 남매의 싸움을 지켜보던 황궁 기사들이 빠르게 검을 뽑아 마들렌 쪽으로 가져다 됐다. 그 모습에 마들렌의 뒤에 있던 기사들 또한 검을 뽑았다. 팽팽한 대치가 시작되었다.

“그만, 전부 물러나라.”

“하지만! 단장님.”

“브륄. 물러나라. 다시 말하지 않는다.”

대치를 멈춘 것은 에셀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주변을 물렸다. 마들렌 또한 부하들에게 눈치를 줬다. 나가 있으라는 신호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지고 넓은 방에는 남매만이 남았다. 마들렌은 에셀에게 더욱 가까이 검을 가져다 대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목 바로 밑까지 닿았다.

목에서 피가 스르륵 흘렀다. 하지만 에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누이를 봤다. 마들렌이 손을 내렸다.

“설명해라. 에셀 라세르.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지금 당장 네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마들렌은 에셀이 안내하는 자리를 무시하고 당당히 에셀의 단장 자리에 앉았다.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늘씬한 다리가 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검을 잡고 있었다. 에셀은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에 앉는 그녀가 조금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지극히 자신의 누이답기도 했다. 에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소문을 듣고 오신 겁니까?”

“네가 황녀의 방에 밤마다 드나든다는 소문이 북부에 퍼졌다. 사실이냐?”

에셀은 누이의 질문에 살짝 고민했다. 마들렌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엘리자벳과 몸을 섞은 일은 단 한 번. 그것도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어찌 되었건 마들렌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입니다.”

갑자기 쿠당탕, 소리와 함께 마들렌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의 팔에서 쏟아져 나온 기세가 에셀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챙―

에셀은 검집을 통째로 들어 누이의 검을 막았다. 다시 옆구리로 검이 날아왔다. 그가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그 후로도 마들렌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숨을 노리며 사방에서 날아왔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기사들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매의 살벌한 싸움에 그들은 어정쩡하게 검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서 있었다.

“이 망할 배신자 놈! 버러지 같은 놈!”

마들렌은 욕설과 함께 에셀의 턱을 걷어찼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에셀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마들렌은 눈앞에 주저앉아 있는 의붓 남동생을 노려봤다.

분명 일부러 맞아 준 것이었다. 그녀는 칼을 뒤로 집어 던졌다. 죽일 수는 없으니 두들겨 패서라도 이 화를 풀어야 했다.

그녀의 구둣발이 사정없이 에셀에게 날아갔다. 계속해서 발길질이 이어지자 기사들이 다가와 남매를 떼 놓기 시작했다.

마들렌은 부하들의 만류에 물러나라 소리쳤다.

한바탕 소란이 가신 후 방에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한참을 서 있던 그녀가 다시 에셀의 자리로 가 앉았다.

“설명해라. 에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에셀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팔을 들어 얼굴에 난 피를 닦았다. 누이에게 얻어맞은 것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가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가져다 놨다. 마들렌의 고갯짓이 기사들을 향했다. 기사들이 다시 우르르 나갔다.

“지금은 설명 못 드립니다.”

마들렌의 이마에 다시 힘줄이 솟았다. 마들렌이 주먹을 쥐어 내지르기 전 에셀의 목소리가 그녀를 막았다.

“르온과 우세리가 관계된 일입니다.”

마들렌은 그 말에 쥐었던 주먹을 폈다. 의붓 남동생이 황녀의 궁에 드나드는 일에 르온과 우세리가 끼어 있다니? 그녀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뭔지는 몰라도 그 두 가문이 낀 이상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마들렌은 에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남동생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네놈이 무슨 일을 벌이든 나를 이길 일은 없어. 승리는 내 것이다.”

마들렌이 말하는 승리는 가주 자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에셀은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들렌은 아무 말도 없는 에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무언이란 자신도 가주 자리를 놓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가주 자리에 관심도 없던 놈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 라세르가의 원로들이 지지하는 후계자는 에셀이었다. 지금은 북부의 기사들로 그녀가 조금 더 큰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 에셀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에셀은 북부에서만 활동하는 자신과 다르게 수도에서도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놈이 다시 오로르에 붙는다면 용서치 않아.”

에셀은 차갑게 말하며 돌아서는 마들렌을 봤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르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다.

에셀은 누이의 증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의붓누이는 황가로 인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은 사람이었다.

마들렌의 증오에 생각이 미치자 죽은 남동생이 떠올랐다. 자신의 의붓 남동생은 마차 사고 당시 제 친누이인 마들렌의 검에 찔려 죽었다. 당연히 사고였다.

그러나 마들렌은 그 일로 한동안 엄청난 트라우마 속에 살았다. 당시 새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되는 마들렌의 자해를 막느라 한시도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새어머니마저도 결국 오로르로 인해 죽었으니 마들렌이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렇지, 당연한 것인가. 나 또한 마찬가지인 것을…….’

에셀은 문뜩 자신의 행적을 되새겨 봤다. 분명 자신도 마들렌과 같았다. 마들렌이 복수를 원하듯 자신 또한 오로르에 복수의 칼을 들이대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엘리자벳에게만은 칼을 들이대기를 주저했다. 엘리자벳은 분명 오로르의 핏줄이었다. 본인은 죄가 없다 하더라도 오로르의 이름을 짊어지고 영광을 누린 이상 그녀는 오로르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검이 들어왔다. 라세르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어릴 적 검에 대고 맹세했었다. 가문과 가족 그리고 북부에 위해를 가하는 적은 가차 없이 베겠다고.

하지만 지금 그 숭고한 맹세를 지키고 있는가?

에셀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 * *

밖을 보니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옅은 선을 그으며 내려오는 비는 불쾌함보다는 차분함을 가져왔다. 엘리자벳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조용히 밖을 응시했다. 관목 위로 떨어지는 비 냄새가 싱그러웠다. 이렇게 편한 날은 오랜만이었다.

침대 위의 엘리엇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엘리자벳은 감사했다.

엘리자벳은 조용히 오라비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엘리엇…….’

하루에도 몇 번 그녀는 이렇게 오라비를 만져 보곤 했다.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처럼 오라비도 사라질지 몰랐다.

중앙궁에 위치한 황제의 침실은 매우 화려했다. 바닥부터 벽까지 금박이 입혀져 있었으며 강렬한 붉은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벽도 귀하다는 장미목으로 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이곳이 항상 불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엘리자벳의 조모가 황제일 적 사용하던 방으로 조모는 이 방에서 아끼던 애첩의 손에 죽었다.

“엘리엇. 언제 일어날 거야?”

엘리자벳은 오라비에게 어리광을 피워 봤다. 어리광을 피우면 오라비가 일어나 자신을 안아 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는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문득 오라비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같은 색의 머리가 길게 자라 있었다. 어째 방치된 느낌이라 엘리자벳은 새삼 서글퍼졌다. 화려한 방이 마치 오라비의 관처럼 느껴졌다.

한번 가라앉은 기분은 그녀에게 다른 서글픔을 보게 했다. 오라비가 좋아해 항상 끼고 다니던 책은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그가 항상 걸고 다니던 펜던트는 침대 옆에 놓인 채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엘리자벳은 펜던트를 들어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렀다. 먼지가 걷히며 반짝거리는 광채가 빛을 발했다. 짤각 소리와 함께 열린 펜던트 안에는 남매가 그려져 있었다. 작은 금속 위에 그려진 어린 남매는 밝게 웃고 있었다.

똑똑.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벳은 조용한 목소리로 들어오란 말을 전했다.

문이 열리자 환한 백금발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알렉스의 등장은 오라비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엘리엇. 내일 올게. 잘 자.”

그녀는 누워 있는 오라비의 이마에 몸을 숙여 입을 맞췄다.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별말 없이 알렉스가 그녀를 따랐다.

며칠 전 그녀는 알렉스가 연금된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로 인해 페루스에게 불복종했다는 이유였다.

다행히 그는 금방 풀려나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 또한 다시 중앙궁에 출입할 수 있었다. 엘리자벳은 이런 조치에 에셀의 도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감사를 전하기 위해 에셀을 찾았지만 그는 그날 이후 그녀 앞에 머리카락 한 올 보여 주지 않았다.

페루스와 타티카도 바쁜지 딱히 마주친 적이 없어 그녀는 며칠 동안 그 누구에게도 시달리지 않고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평화도 끝이었다. 오늘은 그녀의 궁에서 다시 만찬이 열리는 날이었다.

궁에 가까워질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에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몸이 떨려 왔다.

그녀가 몸을 떨자 알렉스가 빠르게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작게 말했다.

“오늘은 만찬을 물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엘리자벳은 그녀를 걱정하는 기사에게 고개를 저었다. 만찬은 그녀가 견뎌야 할 과제이자 엘리엇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결정해. 네 선택에 그 잘난 오라비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신중해야겠지.’

파란 눈의 사내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한 가지 길만을 던져 주곤 꼭 선택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귓가에서 울렸다.

그는 엘리엇의 목숨을 쥐고 그녀에게 구걸할 것을 명했다. 자비에 고마운 줄 알라며 그녀에게 창녀가 될 것을 요구하던 목소리.

한때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던 그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그의 발밑에 무릎 꿇고 발에 입 맞추며 그의 원대로 창녀가 되었다.

마침내 발걸음이 목적지에서 멈췄다. 아름다운 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지금의 궁은 지옥보다 가기 싫은 곳이었다.

궁 앞에는 시녀들이 나열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깊이 숙인 허리와 밑으로 떨군 눈, 주인에게 하는 완벽한 예였지만 그 안에 그녀를 향한 충정은 없었다.

그녀는 저절로 숙여지는 목에 빳빳하게 힘을 줬다. 허리를 곧게 펴고 시선을 앞으로 바로 했다.

비록 껍데기뿐일지라도 이 궁의 주인은 그녀였다. 며칠 동안 엘리엇을 보며 그녀는 무너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하나뿐인 그녀의 오라비, 마지막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안이 설령 진짜 지옥이라도 견뎌야 했다.

* * *

엘리자벳은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하며 들어선 궁에는 한 명의 손님만이 있었다. 유일한 손님인 그는 시녀의 목에 이를 세우며 가슴을 희롱하고 있었다. 반쯤 벗겨진 가슴이 그의 손 밑에서 찰흙처럼 이지러졌다. 엘리자벳 뒤에 있던 알렉스가 그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아, 안녕. 황녀님.”

타티카는 들어오는 엘리자벳에게 정답게 인사했다. 그의 입에는 빨간 연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타티카의 무릎에 앉아 있던 시녀가 천천히 일어났다. 하얀 다리가 드레스 밑으로 사라졌다.

옷차림을 정돈한 시녀는 힐끗 엘리자벳을 보더니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물러났다. 주인을 대하는 자세라기에는 지나치게 거만했다.

“괜찮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

엘리자벳은 뭐라 고함치려 하는 알렉스를 막아섰다. 알렉스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지 계속해서 입을 뻐금거렸지만 그녀는 단호히 그를 물렸다.

알렉스를 내보낸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애피타이저 맛있었어, 황녀님. 황녀님의 궁이라 뭐든 맛있네.”

“오늘은 공작뿐인가요?”

엘리자벳은 그의 말에 딱히 반응하지 않고 물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 타티카가 흐흠,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싱긋 웃은 그가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줬다.

“페루스는 남부 영지로 갔어. 거기 홍수가 크게 났거든. 아마 좀 있다 돌아올 거야. 그리고 기사님은 나도 모르겠네?”

“…….”

엘리자벳은 페루스가 없다는 말에 긴장을 조금이나마 내려놓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한 주를 더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시종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앞으로 여러 개의 접시가 놓였다.

“그래서 이번 주는 내가 있을 거야. 논의된 사항이니 걱정 마, 황녀님. 페루스가 황녀님 아랫도리 간수 잘 시키고 있으래.”

그녀가 손에 포크를 쥐었을 때 조용히 있던 타티카가 툭 던지듯 통보를 했다.

모멸 어린 말에 엘리자벳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포크가 파르르 떨렸다. 페루스도 싫었지만 타티카도 싫었다. 아니, 사실 그녀의 궁에 머무르는 저들 모두가 싫었다. 엘리자벳은 이를 악물었다.

“……제가 싫다면요?”

타티카는 눈앞의 황녀를 봤다. 황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총기가 가득한 눈이 평소와는 달랐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그는 저런 엘리자벳도 좋았다. 가엽게 우는 꼴도 좋았지만 주제도 모르고 그에게 화를 내며 대드는 꼴도 제법 귀여웠다.

타티카는 손가락을 부르르 떨었다. 몸 끝에서 전해지는 쾌락에 그의 바지 앞섶이 부풀어 올랐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 그가 엘리자벳을 봤다. 아껴 놓은 선물을 꺼낼 때가 된 것 같았다. 마침 이번 주 안으로 쓸지 몰라 챙겨 온 것이 궁 안에 있었다. 하지만 선물을 안기기 전에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 줄 필요가 있었다.

“황녀님. 황녀님한테 선택권이 있었나?”

푹, 소리와 함께 포크가 날아가 식탁 한가운데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닭의 옆구리에 박혔다. 엘리자벳이 몸을 움찔했다.

타티카가 엘리자벳을 비웃으며 손짓을 하자 시종이 다가왔다.

“아아아아― 악.”

닭고기에 꽂혀 있던 포크가 시종의 손에 박혔다. 갑작스럽게 손을 찍힌 시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깊게 박혔는지 포크의 날 반 이상이 시종의 손등에 들어가 있었다. 시종의 손에서 나온 피가 타티카의 얼굴에 튀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뜨뜻한 감각에 그는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았다. 피비린내가 손수건에 묻어났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던져 버렸다.

엘리자벳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토기가 올라왔다. 바닥을 구르며 손을 쥐고 꺽꺽거리는 시종이 눈에 들었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궁 전체를 울리는 시종의 비명에 알렉스가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알렉스가 그녀의 옆에서 검을 빼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티카는 어느새 접시 위에 올려진 고기를 썰고 있었다. 빨간 육즙이 그의 칼 밑에서 흘렀다.

“아…… 포크가 없네.”

타티카가 다른 시종에게 신호를 줬다. 굳은 채 서 있던 시종은 벌벌 떨며 다가오더니 그에게 포크를 건넸다. 포크를 건네는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렸다.

“무슨 짓입니까!”

알렉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황녀를 대신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타티카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고기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게 무슨!”

알렉스가 다시 한번 그에게 일갈했다. 그제야 타티카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황녀를 볼 때와는 다른 무감한 눈이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를 본 황녀가 알렉스에게 재빨리 말을 걸었다.

“알, 알렉스 물…… 물러나세요. 일단 데려가 치료하면…….”

타티카는 눈치 빠른 황녀님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줬다. 아끼는 애완동물을 살리려는 정성이 갸륵했다. 짓는 소리가 시끄럽긴 했지만 엘리자벳이 아끼는 것이니 한 번쯤은 봐줄 만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준비한 선물도 애완동물에 가까웠다. 아직 포장을 하지 않아 선물로는 부족했지만 포장이야 저녁 이후에 해도 될 터였다.

“어떤 색이 좋아 황녀님은? 빨간색? 초록색?”

포장을 고민하던 그가 엘리자벳의 가슴을 바라봤다. 검은색 리본이 가지런히 가슴께에 묶여 있었다.

하얀 피부 덕에 검은 리본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하얀색과 검은색이라. 타티카는 배덕감이 느껴지는 색 조합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검은색은 그가 준비한 선물에도 딱 어울렸다. 고민을 끝낸 그의 이마가 반듯하게 펴졌다.

“황녀님. 선물, 기대해도 좋아.”

희게 질린 황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혼이 난 것 같으니 선물을 줄 시간이었다.

* * *

남자는 언젠가부터 무엇도 볼 수 없었다. 남자의 주변은 항상 새카만 색으로 덮여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는 무언가 본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는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발 위에서 부드러운 무언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사그락거리는 털 소리가 들렸다. 쥐였다. 발 위 촉감에 피부가 가려워졌다.

남자는 털이 있는 이 작은 생명체를 좋아했다. 한때 그와 가까운 친구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꼼지락거리며 발을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갑자기 슬퍼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그의 주인님은 그를 여기에 던져 놓고는 유유히 떠났다. 혼자 있는 건 너무 심심했다. 특히 이렇게 팔다리가 다 묶여 있을 때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돌로 만든 바닥에서 찬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의 눈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감각에 그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눈을 감으나 뜨나 보이는 건 까만색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그리운 냄새가 묻어나는 싱그러운 바람이었다. 그의 귀가 다시 쫑긋 섰다. 코는 바람이 불어온 곳을 향해 저절로 벌름거렸다.

바람은 금세 그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긴 머리카락에는 먼 옛날의 향기를 묻혔다.

“아으…….”

앞을 보지 못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몇 달, 몇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옛 시절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라졌다.

남자는 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눈물이었다.

그의 주인님은 그가 우는 것을 질색했다. 울었다는 것을 들키면 그 방에 갈 것이다. 그 방은 그에게 너무 괴로운 곳이었다.

목소리도 그 방에서 잃은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눈에서 나오는 액체는 계속해서 그의 뺨을 지나쳤다. 액체를 닦아 보려 했지만 묶여 있는 팔은 꼼짝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남자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주인님이 오시면 다시 그 방으로 끌려갈 것이다. 겁에 질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때 머릿속에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쿵, 쿵, 쿵.

공간 전체에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의 머리에서 눈에서 나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질척한 액체는 그의 얼굴 전체를 타고 내려 머리카락까지 흘렀다. 축축한 감촉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안도로 가득했다. 눈물을 지웠으니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허락 없이 피를 흘렸으니 벌이 내려질 수는 있겠지만 눈물을 흘렸을 때 받는 벌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끝이 살짝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주인님이 분명했다.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까 맡았던 향이 그의 코로 몰아쳤다.

순식간에 눈에서 다시 액체가 흘렀다.

“이런 씨발!”

퍽― 타티카는 순간 올라오는 분노에 황녀에게 줄 선물을 걷어차고 말았다. 망가진 선물이 컥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 꼴을 본 타티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황녀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러 급히 내려왔더니 선물은 저 스스로 망가져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묶어 놓고 갔던 것인데 아무래도 상자에 넣어 놨어야 했나 보다. 저 꼴이니 당분간 선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구석에 박힌 것이 부들거리며 기어 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기어 오는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남았다. 타티카는 붉은 자국을 보며 불쾌함에 휩싸였다.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노예였다. 그의 앞까지 기어 온 것이 연신 꿈틀거리며 머리를 조아리려 애썼다.

타티카의 눈에 그와 똑같은 보라색 눈이 들어왔다. 그러자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멍청한 노예 놈이…….”

타티카가 발을 들어 남자의 머리를 밟았다. 밑에서 억지로 뱉어 낸 것 같은 어아어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색을 잃고 붉어진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질척한 느낌에 불쾌해진 그가 발을 뗐다.

일단 고쳐 쓰려면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가 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후다닥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들어와 피투성이 남자를 들고 나갔다.

“후.”

타티카는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한번 쏟아져 나온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딘가 풀 곳이 필요했다. 그가 구두에 묻은 피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닦아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위에 있을 황녀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이 기분 나쁜 상황은 황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황녀가 아니었다면 저것을 힘들게 여기로 가져올 일도 없었고 자신이 기분 나쁠 일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그는 스스로의 생각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내가 좀 즐겨야지. 스트레스는 건강에 좋지 않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타티카는 필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다른 놀이가 생각났다.

귀하게 자란 황녀는 충격받겠지만 알 게 뭔가. 남의 팔이 잘리든 말든 그에게는 가시에 찔린 자신의 손가락이 더 안쓰러웠다.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는 그의 입이 잔인하게 올라갔다. 오늘 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지는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황녀의 방이었다.

* * *

엘리자벳은 선물을 주겠다며 방에서 기다리라던 타티카의 말에 주변을 물리고 홀로 방에 남았다. 오늘은 또 뭔가 싶었지만 그가 말하는 선물은 항상 비슷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타티카는 그녀에게 자신이 만든 미약을 먹인 후 항상 선물이라 말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의 입장에서 그런 선물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몸을 여는 약은 그녀에게 큰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특히 타티카의 경우 약에 취한 그녀에게 온갖 말을 시키고 그녀 스스로 그를 즐겁게 할 것을 명했기에 그와의 교접은 항상 그녀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냈다.

“황녀님 기다렸어?”

괴로운 기억에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을 때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보기 싫은 얼굴이 있었다.

엘리자벳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다시 그를 봤다.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를 둘러싼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짠! 선물은 음…… 문제가 생겨서 이걸 가져왔어.”

엘리자벳의 시선이 그가 들고 있는 수상한 검은 주머니에 닿았다. 타티카는 주머니를 유심히 살피는 엘리자벳을 보다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곧 엘리자벳의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타티카가 들고 온 물건들은 한눈에 봐도 기이한 것이었다.

뻣뻣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본 타티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리자벳은 다가오는 그를 피해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부드러운 소파 등받이는 그녀의 도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지척까지 온 사내가 그녀의 어깨 너머 소파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 앞쪽 퇴로마저 막았다.

타티카는 자신을 보고 얼어붙은 엘리자벳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겁에 질려 바들대는 꼴이 딱 그녀의 위치에 맞았다.

최근 그는 제법 엘리자벳의 비위를 맞춰 줬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꽤 아끼는 장난감이었고 다른 것들처럼 금방 망가뜨리기에는 아쉬운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분도 좋지 않았고 원래 그의 본성은 ‘이쪽에’ 가까웠다.

떨고 있는 황녀의 가슴에 있는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만찬 자리에서 본 검은 리본은 여전히 예쁘게 묶여 있었다. 리본을 향해 손을 뻗자 황녀가 손을 가슴께로 올려 그의 행동을 막았다.

타티카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황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여린 몸이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러고는 반항할 새도 없이 가슴의 리본이 풀어졌다.

리본이 풀리며 가슴 앞쪽 천이 살짝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그녀가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소파 위로 내던져졌다. 얼얼한 아픔과 동시에 그녀의 위로 타티카가 올라왔다.

그는 그녀의 양손을 잡아챈 후 가슴에서 풀어낸 리본으로 그녀의 손목을 묶었다.

“어차피 끝까지 반항도 못 하는 몸이잖아? 애초에 가만히 있는 게 편할 텐데. 황녀님?”

엘리자벳이 버둥거리자 타티카가 입술을 핥더니 말했다. 엘리자벳은 그의 말을 절망스럽다는 듯이 듣다 체념한 듯 고개를 모로 돌렸다. 비참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곧 타티카의 손에 작고 아담한 은색의 링 한 쌍이 들렸다. 링을 든 타티카가 그녀의 가슴을 풀어 헤쳤다. 쉽게 벌어진 천 밑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운 감촉에 엘리자벳이 몸을 떨었다.

타티카는 몸을 떠는 엘리자벳을 보다 그녀의 가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얀 가슴은 보기에도 말랑해 보였다. 흔들리는 가슴에 입이 마른 타티카가 혀로 입술을 핥고는 손가락으로 가슴 가운데 젖꼭지를 튕겼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엘리자벳이 상체를 비틀었다. 타티카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고정시킨 후 꺼내 놓은 링 중 하나를 살짝 벌리더니 그대로 그녀의 젖꼭지에 끼웠다. 꽉 조이는 감각이 아찔했다.

수치심을 느낀 엘리자벳이 다시 한번 상체를 비틀었다. 그 모습에 타티카는 쿡쿡거리며 나머지 링을 손에 들었다. 곧 엘리자벳의 양 가슴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링 두 개가 빛났다.

“흐음, 황녀님. 이렇게 해 놓으니깐 정말 내 성노 같은걸? 이런 거 툴란에서는 귀족은커녕 창부들도 잘 안 해서 말이야. 그래도 걱정 마. 내가 만족할 때쯤 풀어 줄게.”

엘리자벳의 양쪽 가슴 가운데서 한 쌍의 링이 반짝거렸다. 모멸감에 울기 시작한 그녀는 애처로웠으나 어딘가 이국적이고 고혹적이었다.

홀린 듯 링을 만지작거리며 당기던 타티카가 다시 꺼내 둔 물건들 중 하나를 고르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은 절망적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마침내 타티카의 손이 두 번째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색의 부드러운 천이었다. 실크로 만들어졌는지 검은 천은 빛 아래서 반질거렸다.

“아직 이런 놀이는 익숙지 않으니깐. 천천히 길들이는 게 좋겠지.”

타티카가 그녀의 얼굴 쪽으로 팔을 뻗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눈을 덮더니 시야를 앗아 갔다.

타티카는 무기력해지는 엘리자벳의 모습에 흥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자신만을 위한 인형 같았다.

할짝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혀가 엘리자벳의 귀로 다가갔다. 축축한 혀가 하얀 귀를 몇 바퀴고 핥았다. 귓가의 더운 숨이 엘리자벳에게 여과 없이 전해졌다.

마침내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늘어졌을 때 타티카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기대할게. 야하게 울어 줘. 황녀님.”

* * *

타티카는 눈앞에 누워 있는 엘리자벳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녀는 그날 밤 이후 내리 이틀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원래부터 하얀 얼굴은 아예 창백해져 만지면 차가울 것만 같았다.

“아, 고작 놀이 좀 한 것 가지고 말이야. 그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콕콕 타티카는 손가락을 뻗어 엘리자벳의 뺨을 찔러 봤다. 보기와는 다르게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뜨거웠다.

엘리자벳이 이틀째 눈을 못 뜨자 타티카는 자신의 행동에 스리슬쩍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와 보내는 일주일은 항상 짧아 아쉬웠는데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 왠지 손해를 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 궁은 지나치게 심심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수도 저택처럼 장난감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같이 놀 만한 인물도 없었다.

“각하.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뒤를 보니 엘리자벳의 애완견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처럼 예쁘장한 얼굴에는 표정이라곤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고 있는 칼보다 날카로운 시선을 받을 줄 알았는데 저런 무감한 표정이라니. 제가 알기로 저 애완견은 제 주인을 연모하고 있기로 유명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눕힌 사내를 보는 표정이 저럴 수 있나? 흐음…….’

평소의 저자 표정은 멍청할 정도로 다양했다. 그런데 저런 가면 같은 얼굴이라니. 일부러 저러나? 며칠 전 만찬 자리에서 온갖 인상을 쓰며 그에게 고함치던 때와 너무도 달랐다. 차라리 어제 그에게 난리를 치고 간 에셀 쪽이 더 개새끼에 가까워 보였다.

‘페루스?’

저 가면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비슷한 표정의 페루스가 생각났다. 페루스는 공식적으로는 홍수로 난리가 난 남부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자는 그가 남부 길목에서 방향을 틀어 동부로 향했다고 전해 왔다. 재미있는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던데 황녀가 앓아눕는 바람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그에게 알렉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표정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름이…… 알렉스 페테였나?’

타티카는 궁금증에 가느스름해지려는 눈을 정리했다. 평소처럼 표정을 갈무리한 타티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완전히 돌아섰다.

“아 그렇지. 일어나지.”

알렉스가 말없이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터 줬다. 타티카는 빙긋 웃으며 알렉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 타티카를 쳐다보는 알렉스의 금안은 여전히 무감했다.

“황녀님을 부탁해. 멍멍아.”

문밖을 나서며 그는 일부러 알렉스를 도발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반응 없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짧지만 절도 있는 동작이 완벽했다. 그 모습에 타티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방문 앞에서 시작된 웃음은 복도를 지나 황녀궁을 나서며 결국 폭소로 변했다. 웃음에 떨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그는 눈을 훔쳤다. 너무 웃었더니 배가 아팠다.

저런 걸 모르고 있었다니. 자신도 참 바보였다. 페루스가 일일이 저놈한테 신경 쓰며 황녀에게서 떨어뜨리려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공작님 놀이를 하며 자신도 많이 둔해진 모양이었다.

‘아…… 불쌍한 황녀님.’

누워 있던 엘리자벳이 생각났다. 그녀는 바로 옆에서 저런 괴물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너무나 가녀리고 멍청한 존재이니.

저 완벽한 연기에 넘어갔겠지. 몇 번이고 배신을 당했건만 아직도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나의 황녀님. 제 조모를 닮았으면 지금쯤 우리를 다 쳐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외모는 그리 닮았건만.”

타티카는 혼자 중얼거리며 언젠가 본 적 있는 엘라르 황제의 젊었을 적 초상화를 떠올렸다. 딱 지금 황녀의 나이쯤에 그려진 초상화는 여자의 아름다움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눈부신 은발에 총기 가득한 녹색 눈은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만했다. 실제로 엘라르 황제는 젊은 시절 뭇 남성의 구혼을 한 몸에 받았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여인의 끝을 본 그의 입장에서 초상화 속 여인은 추함의 결정체였다. 그에 비하면 똑 닮았건만 지금 저의 황녀님은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아이작 영애. 궁의를 불러 주시겠습니까? 우세리 공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황녀님을 돌봐 드릴 사람이 없군요.”

“네, 알겠어요. 경.”

“이제 그만 알렉스라고 불러 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스텔라 양.”

스텔라는 자신에게 웃어 주는 얼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게다가 스텔라라니. 알렉스라고 불러 달라니. 혹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먼저 거절하던 알렉스가 아닌가. 그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다시 미성이 들렸다.

“아 혹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이작 영애.”

깊이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손에 가볍게 입 맞추는 그녀의 기사님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 저도 알렉스라고 부를게요.”

스텔라는 당혹감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볼에 빨갛게 물이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자신의 기사님을 쳐다봤다.

알렉스는 여전히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이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궁의는 오고 계실 거예요……. 알렉스.”

“아 벌써. 일 처리가 꼼꼼하시군요. 스텔라.”

몸이 저절로 배배 꼬이며 발끝이 괜스레 바닥을 쳤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스텔라.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드디어!’

스텔라는 지금까지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황녀만을 바라보던 그녀의 기사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다니. 다른 시녀들은 알렉스만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바보 같다고 했지만 이렇듯 자신은 성공했다. 고작 이름을 서로 허용한 것뿐이었건만 스텔라의 머릿속에는 이미 알렉스와 함께 웨딩 아치를 통과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스텔라.”

그녀가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알렉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스텔라가 다시 알렉스를 쳐다봤다.

“네, 네……. 뭐든 물어보세요. 알렉스.”

“사실 제가 며칠 전 만찬 자리에서 안 좋은 장면을 봤습니다만. 고민이 되어…….”

“만찬…… 자리요? 아 혹시 로즈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우세리 공작님과 식당에서…….”

“맞습니다. 불편한 일이었지요. 역시 그 영애분의 이름이 로즈였군요.”

스텔라는 순간 알렉스가 로즈에게 마음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눈앞의 기사님은 연모하는 영애를 빼앗긴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즈에 대해서는 왜 물으시나요?”

“제 밑에 후임 기사 녀석이 어제 우세리 공에게 연인을 잃었다고 울더군요. 연인의 이름이 로즈고 황녀궁에서 일한다고 말하기에 혹시 만찬 자리의 시녀가 아닌가 싶어 여쭤봤습니다.”

“아…… 저런. 세상에. 어쩌면 좋아요.”

‘지저분한 계집애.’

스텔라는 속으로 욕을 했다. 로즈가 여러 기사들을 후리고 다니는 것을 옆에서 몇 번 보기는 했다. 적당히 반반한 얼굴과 풍만한 가슴은 황궁 기사들에게 꽤 잘 먹히는 수단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일하는 궁에서 공작과 그런 일을 벌이다니. 자신의 낯이 다 뜨뜻했다.

시녀들도 로즈의 일로 다들 말이 많았다. 공작이야 워낙 시녀들과 불장난하는 걸 좋아하니 그가 시녀와 잔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뒤에서 숨어서 하곤 했지 대놓고 궁의 주인 앞에서 그런 일을 벌인 적은 없었다.

“제가 다 부끄러워요……. 그래도 모든 시녀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스텔라는 다소곳하게 알렉스에게 자신은 깨끗하다는 것을 알렸다. 망할 로즈 때문에 겨우 가까워진 기사님을 잃을 순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로즈를 요절내 버리고 말리라.

“물론입니다. 궁에 들어온 영애분들은 숙녀의 모범이시죠. 특히 스텔라 양은. 그래서 말인데……. 종종 궁 생활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네……. 물론이죠. 언제든 물어보세요. 뭐든 말씀드릴게요!”

스텔라는 심장이 뛰어 미칠 지경이었다. 역시 기사님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인 호감의 표시라니. 스텔라는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우물거렸다.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궁의가 도착을 알렸다.

“궁의가 왔나 보군요.”

알렉스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궁의를 맞이했다. 허리를 굽힌 궁의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피곤한 듯 다크서클이 눈 밑 깊숙이 내려와 있었다.

알렉스가 서둘러 궁의를 침실로 안내했다. 알렉스의 모습이 금세 침실 너머로 사라졌다.

스텔라는 괜스레 섭섭한 감정에 입을 삐죽였다. 몸 약한 황녀가 앓아눕는 건 별 특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기사님은 항상 유난스럽게 굴었다.

‘역시…….’

아직까지 그녀의 기사님은 황녀를 연모하는 모양이었다. 스텔라는 잠시 보여 준 알렉스의 다정한 모습에 기대를 한 자신을 책망했다.

한참 혼자 투덜거리고 있으니 침실에서 궁의가 천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았지만 침실 안에 있을 알렉스를 생각하며 스텔라는 천을 챙기러 밖을 나섰다.

* * *

로즈는 최근 기분이 매우 좋았다. 화장대 속 예쁜 자신의 장밋빛 머리색이 오늘따라 유달리 돋보였다.

이렇게 늦장을 부리다가는 지각을 하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자신은 곧 황궁을 떠나게 될 텐데. 황궁을 떠나 공작저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미소 짓자 거울 속 여자도 마찬가지로 예쁜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은 언제 오시려나.’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향하며 로즈는 생각했다. 지금 그녀는 황궁의 수군거림 한가운데 있었다.

썩 좋은 소리들은 아니었지만 로즈는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이 공작 부인이 되면 다 사라질 소리였다.

그녀의 손에 빨간 허리띠가 잡혔다. 공작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했던 색이었다. 공작저로 가면 이런 싸구려 허리띠가 아닌 장인이 짠 레이스 허리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자잘한 금박을 수놓은 공단 드레스 위에 귀한 레이스 허리띠를 두르고 한껏 멋을 낸 모자를 올릴 자신을 생각하자 로즈의 기분이 한껏 들떴다.

로즈는 작위조차 잇지 못하는 하급 기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런 그녀에게 황궁의 시녀 자리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부푼 기대를 안고 들어온 궁의 생활은 좋지 못했다. 시녀들 사이에서도 부모의 작위로 서열을 나누었고 로즈는 언제나 그중 제일 아래였다. 자존심 강한 로즈는 자신을 무시하는 다른 시녀들과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

하지만 제법 예쁜 얼굴은 기사들이나 시종들에게 먹혀 많은 편의를 받을 수 있었다. 로즈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많은 기사들과 연애를 즐겼고 나름대로 삶에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녀궁에 머무르는 손님 중 하나인 우세리 공작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주인과 공작의 관계를 아는 로즈는 망설였지만 결국 그가 내민 보석에 넘어갔다. 그는 야살스러운 얼굴로 로즈를 꾀어냈고 황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로즈가 답을 잘할 때마다 공작은 그녀에게 비싼 보석을 안겨 주기 시작했다. 로즈는 비싼 보석도 좋았지만 그보다 공작과의 잠자리가 좋았다. 공작이 내미는 ‘선물’을 받고 그와 잠자리를 가지면 세상 무엇보다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 얼마 전에는 황녀 앞에서 공작과의 관계를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무런 힘 없는 황녀 따위 공작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녀는 식당에서 공작과 함께 있던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로즈는 공작이 연인인 자신을 데려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즐거운 생각에 드레스를 들고 방 안을 춤추듯 뱅글뱅글 돌던 로즈가 다시 거울 앞에 멈췄다.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거울 속에 있었다. 로즈는 거울 앞 연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때 거울에 이상한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로즈가 거울을 더 자세히 바라봤다.

“으윽!”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거울 속 여자의 목에 빨간 선이 생겼다. 커진 로즈의 눈이 거울 속 범인을 바라봤다.

거울 속 그녀는 그새 목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곧 거울을 가릴 만큼 피가 튀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로즈는 다시 거울을 볼 수 없었다.

* * *

황녀의 궁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잔인하게 죽은 시녀의 시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시녀의 목에서 나왔을 피는 온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잡혔다.

그는 죽은 시녀의 전 연인으로 시골에서 황궁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기사였다. 황궁에서 일어난 잔인한 치정극에 온 궁이 시끄럽게 들썩였다.

“단장님. 전 정말 아닙니다.”

에셀은 눈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사를 바라봤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한 기사는 취조실에서 구타를 당했는지 여기저기 멍들어 있었다. 한쪽 눈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시녀의 시체 옆에 경의 반지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그 시각 경은 어디에도 없었다더군. 본래 연무장에 가 있을 시각이 아닌가.”

“그, 그건 로즈와 헤어지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숙소에서 자고 있었을 뿐입니다.”

“경이 술자리에서 죽은 시녀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 걸 들은 중인이 있다.”

“술이 과해서 그만…… 헛소리를 한 것뿐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단장님!”

에셀은 절박하게 호소하는 젊은 기사를 바라봤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이 순박한 시골 청년은 성격이 순하기로 유명해 선배 기사들에게 자주 놀림을 받던 친구였다.

하지만 시녀의 옆에서 발견된 그의 소지품, 피 묻은 칼을 숨기던 모습까지 증거는 명확하게 기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반. 솔직하게 말해. 그게 네 신변에 더 도움이 될 거다.”

에셀은 젊은 기사의 이름을 부르며 자백할 것을 권유했다. 비록 살인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였지만 그 죗값으로 그의 삶도 끝날 것이다.

앞길 창창한 젊은이가 한순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그에게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눈앞의 기사는 이제 답변조차 하지 않고 엉엉 울기만 했다. 에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취조실을 나섰다.

음습한 취조실의 복도 끝까지 기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젊은 기사에게는 교수형이 내려질 것이다.

기사가 칼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는 것은 어디에도 없을 수치였다. 에셀의 발걸음이 씁쓸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부르며 급하게 찾았다.

“단장님! 단장님!”

“무슨 일인가. 경.”

에셀은 급박하게 뛰어오는 부하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 황녀님이 일어나셨는데 일어나시자마자 중앙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에셀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제까지 정신도 못 차리던 황녀가 중앙궁으로 갔다면 어떤 모습일지 뻔했다.

도대체 황녀궁에 배치해 놓은 기사들은 뭘 하는지. 왜 그 연약한 여자 하나 제대로 못 막는단 말인가.

페루스 놈이 왜 저번에 알렉스를 징계했는지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무능한 놈들!’

에셀은 한숨을 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쭈뼛거리던 부하가 급하게 그 뒤를 따랐다.

* * *

엘리자벳은 황제의 침실에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숨만 몰아쉬는 그녀를 보고 주변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황녀의 모습은 좋게 보더라도 제정신 같지는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하얀 잠옷을 입은 그녀는 맨발이었다. 여기저기 난 발의 생채기에서는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사들이 어찌해야 하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하얗게 질린 입술이 열렸다.

“물러가.”

“하지만……. 황녀님, 돌아가셔야 합니다.”

“모두 물러가라 했어. 물러가!”

생각 외로 잠잠한 그녀의 목소리에 가장 선배 격인 기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일갈이 튀어나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뒤로 주춤거렸다.

“하……. 제발 물러나. 부탁이야.”

황녀는 이제 애원하고 있었다. 그 물기 어린 목소리에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 입을 열었던 기사가 먼저 몸을 돌려 침실 밖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그를 따라 우르르 몰려 나갔다.

엘리자벳은 기사들 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말아 쥔 채 한곳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는 기사들이 나가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발이 조용히 침대 쪽을 향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엇.”

엘리자벳은 침대 옆에서 조용히 오라비를 불렀다. 오라비는 계속해서 아무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조용히 오라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몇 번을 그러고 있었을까. 그녀의 손이 오라비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엘리엇.”

그녀는 다시 오라비를 불렀다. 창백한 얼굴 위 입술은 빨갛게 생기를 간직하고 있건만 그녀의 오라비는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엘리엇, 엘리엇, 엘리엇, 엘리엇.

그녀는 계속해서 오라비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입에서 수십 번이나 오라비의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오라비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

엘리자벳은 이름 부르기를 그만두고 가만히 오라비를 쳐다봤다. 생기를 잃었던 눈동자가 서서히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내가 이제는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아? 나보고 성…… 노예 같대. 내가 하는 짓은 이 나라 창부들도 잘 안 하는 짓이래.”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녹색 눈동자가 여러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오라비가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사부작거리는 침대 시트 위에는 그녀의 발에서 나온 피가 묻어났다. 침대는 부드럽고 푹신했다. 그녀가 두 손을 뻗어 오라비의 목 위로 가져갔다. 두근거리는 혈관이 손 위로 느껴졌다.

“엘리엇. 제발…….”

그녀는 이제 울고 있었다.

제발 일어나 줘 엘리엇. 그래서 나를 구해 줘. 구해 줄 수 없다면 함께라도 해 줘. 아냐, 지금과 같아도 좋으니 제발 일어나기만 해 줘. 혼자는 너무 두렵고 외로워.

제발, 제발. 목 안에서 튀어나오지 못한 말들이 울음과 함께 뭉쳤다. 그녀가 눈물로 흐려진 눈을 감았다. 눈에 잔뜩 맺혀 있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툭툭 소리와 함께 그녀의 잠옷이 액체로 젖어 들어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오라비의 목숨을 쥐고 종이를 내밀던 그때 그걸 찢어 버렸어야 했나.

아니면 애초에 그를 믿고 사랑했던 자신이 문제였나. 그것도 아니라면 모두가 말하는 내 피에 죄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뜨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의 상황이 끔찍하다는 것은, 지옥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리 사느니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원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더는 싫었다.

오라비의 목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얗고 작은 손이 있는 힘껏 목을 눌렀다. 손 밑에서 뛰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엘리엇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리라.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그녀의 결심은 확고해졌다.

“무슨 짓이야!”

누군가 그녀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녀의 몸이 순간 공중에 떴다 침대 옆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아픔은 없었다. 그녀를 낚아챈 사람은 추락하는 그녀를 몸으로 받쳤다. 눈앞에 검은 머리가 보였다.

“미쳤어?”

잔뜩 찡그린 얼굴이 그녀에게 고함을 쳤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엘리자벳은 멍하니 에셀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위 검은 눈은 상처받은 자의 눈이었다. 그는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왜? 네가 왜? 네가 왜 상처받은 눈을 하나. 너는 내 절망을 바라던 자 중 하나가 아니었나. 엘리엇의 목숨을 쥐고 나를 범하는 데 동의했던 네가 아니었나. 너는 나를 상처 준 자 중 하나인데 왜 네가 그런 눈을 하고 있나. 왜 끝까지 피해자인 척 나를 비참하게 만드나.

에셀은 멍한 엘리자벳의 눈을 봤다. 생기 없는 눈에는 절망과 체념만이 가득했다. 문뜩 여자의 목에 난 울긋불긋한 자국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철저한 착취의 흔적이었다. 에셀은 속에서 올라오는 욕을 삼켰다.

눈앞의 엘리자벳은 빠르게 바스라지고 있었다. 분명 1년 전 그 망할 계약에 동의를 하고 수십 번 범해졌을 때도 엘리자벳은 부서지지 않았다. 아니 부서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서히 빠르게 부서져 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제 1년…….’

에셀은 입술을 세게 물었다. 입안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다. 자신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리자벳이 절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와 몸을 섞은 이후 이상하게 마음이 계속 흔들렸다.

“엘자.”

에셀은 조용히 엘리자벳의 애칭을 불렀다.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작고 여린 여체가 그의 품 안에서 느껴졌다.

언젠가 이렇게 엘리자벳을 안아 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껏 울음을 터뜨렸다.

에셀은 차라리 엘리자벳이 그때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어 줬으면 했다. 그러면 이런 이상한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울지 못하는 엘리자벳의 표정은 그에게 칼로 가슴을 헤집는 듯한 고통을 줬다. 그녀는 가만히 그에게 안겨 눈을 깜빡였다.

옅은 숨소리가 에셀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듣지 않으면 그 숨소리가 사라질 것 같았다.

* * *

알렉스는 엘리자벳을 안아 든 에셀의 모습을 조용히 쳐다봤다. 에셀이 그를 노려봤다. 죽일 듯한 표정에 알렉스의 고개가 밑으로 내려갔다. 공중에 뜬 하얀 발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경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에셀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의 일로 잠시 취조실에 잡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셀은 고개를 깊숙이 숙인 남자를 바라봤다. 에반의 일을 증언한 사람이 황녀궁의 기사라더니, 이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렉스에게 엘리자벳을 넘겼다.

“당장 모셔 가도록. 궁의가 바로 찾아가도록 조치하겠다.”

조심히 엘리자벳을 받아 든 사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고는 등을 돌렸다. 에셀은 조금씩 작아지는 인영을 보다 다시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시녀들이 분주히 방을 치우고 있었다. 그의 눈에 침대 위 황제가 들어왔다. 한때 친우였던 황제는 분주한 주변에도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건만 그는 몇 년은 누워 있던 사람 같았다.

여자의 오라비, 옛 친우이자 주군, 벨이 사랑하던 남자, 벨을 죽인 사내. 남자는 그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목을 바라봤다. 황제의 목에는 엘리자벳의 빨간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엘리엇.”

그가 조용히 옛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하게도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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