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똥벌레 (1/1)

개똥벌레

 옛날이라고 하지만 따져 보면 14~15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어느 학생 기숙사에 있었다. 나는 그 무렵 열 여덟살로,대학에 갓 들어간

참이었다. 도쿄의 지리는 어느 곳 하나 아는 데가 없었고,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혼

자 살아 본 경험도 없었다. 해서 부모님이 염려하며 그 기숙사의 방을 얻어 주었다.

물론 비용 문제도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독신 생활의 그것에 비해 마음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지만 입학금이며, 수업료며 다달이 보내오는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런 불평

을 할 수가 없었다. 기숙사는 전망이 좋은 분쿄구의 높은 지대에 있었다. 택지는 넓

고, 주위는 높다란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기숙사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

면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솟구쳐 있었다. 수령은 150년, 혹은 좀 더 나이를 먹었는

지 모른다. 밑둥에 서서 위를 쳐다보면, 하늘은 그 초록색 가지에 몽땅 덮여버려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콘크리트 길은 그 느티나무 거목을  우회하듯 돌아나가 다시 

기다란 직선이 되어 가운데 뜰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가운데 뜰 양쪽에는  철근 콘

크리트 3층 건물의 용마루가 두 채, 평행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커다란 건물의 열어제친 창문으로는 라디오의 DJ소리가 울려 나왔다. 창문의 커튼

은 어느 방이나 똑같은 크림빛 -햇살에 바랜, 제일 눈에 띄지않는 색깔- 이었다. 포

장도로의 정면에는 2층짜리 본부건물이 있었다. 1층에는 식당과 공중 목욕탕, 2층에

는 강당과 집회실, 그리고 귀빈실도 있었다. 본부 건물과 나란히 세 번째 기숙사 동

(棟)이 있었는데, 그 역시 3층 짜리였다. 가운데  뜰은 넓었고, 초록 잔디밭 속에는 

스프링클러가 태양의 햇살을 받아 빙글 빙글 돌고 있었다. 본부 건물 뒤쪽에는 야구

와 축구  겸용 그라운드와 테니스 코트가 6개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을 볼 때, 학생

들을 위한 기숙사치고는 이를데 없는 곳이었다.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 -그것

을  문제점이라 할 것인가 어떤가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그것이 어떤 우익 

인물을 중심으로한 정체 불명의 재단 법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입사(入舍) 안내의 팜플렛 및 기숙생 규칙을 읽으면 그 대강을 짐작 할 수 있다.

[교육의 근간을 추구하며 국가에 있어서 유용한 인재를 양성함.]  이것이 이 기숙사

창설의 정신이었다.그리고 [그 정신에 찬성하는 많은 재계인이 사유 재산을 들여..]

라는 것이 표면적인 얼굴인 샘인데, 그 이면적인 것은 늘 애매모호한 것이었다.정확

한 진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자도 있었고, 기숙

사 설립을 명목 삼아 사기나 다름없는 수법으로 토지를 입수했다고 말하는 자도  있

었다. 그리고 단순히 매명 행위라고 단정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어떻든 1967년의 봄부터 이듬해 가을에 걸쳐,나는 그 기숙사에서 지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일상 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익이건 좌익이건, 위선이

건 위악이건간에, 별로 대단한 차이는 없었다.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국가도 흘러 나왔다. 국기 게양과 국가는 끊을래야 끊을  수

가 없다.  이것은 스포츠 뉴스와  행진곡의 관계라고나 할까. 국기 게양대는 가운데 

뜰의 한복판에 있어서 어느 동(棟) 창문에서도 보이게끔 되어 있었다.

  국기를 게양하는 건 동동(東棟) -내가 들어 있는 동이었다.- 의 동장(棟長)이  해

야할 역할이었다. 동장, 그는 키가 크고 눈초리가  날카로운 쉰 살 안팎의 사내였다.

머리칼은 억세고 어느 정도 흰 털이 섞여 있었으며, 목덜미에 길쭉한 상처가 있었다.

이 인물은 육군 나카노 학교(2차대전 때의 스파이 양성 학교) 출신이라고들 했다.그 

옆에는 국기 게양을 돕는 조수 같은 학생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학생에  대해선 아

무도 알지 못했다. 빡빡 깎은 머리에  언제나 학생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며,  어느 방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식당에서도 목욕탕에서도 한 번도 

누구와 얼굴을 맞댄적이 없었다. 그러나 학생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역시 학생일테

지,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카노 학교 출신과는 반대로 학생복을 입은 

사람은 키가 작고, 통통하고 피부 색깔이 하얬다. 이 2인조가 매일 아침 6시 기숙사 

가운데뜰에 히노마루(일장기)를 올리는 셈이었다. 나는 기숙사에 갓 들어갔을  당시,

곧잘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아침 6시  시보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그 두사람은 가운데  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학생복이 오동나무의 얄팍한 상자를 들

고 있었다.  

  나카노학교는 소니의 포터플 테이프 리코더를  갖고 있었다. 그 나카노 학교가 테

이프  리코더를 게양대의 밑둥에다 내려 놓았다. 학생복이  오동나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단정하게 접힌 국기가 들어 있었다. 학생복이 나카노 학교에게 기를 내

밀면, 나카노학교가 로프에 기를 매달았다. 학생복이 테이프 리코더의  스위치를 눌

렀다.

  '기미가요(일본國歌이름).'

그리곤 국기가 스스로 깃봉을 기어 올라갔다. [사자레이시노-]하는 대목에서 국기는

깃봉의 한복판 언저리에 오게 되고, [마데-]하는 대목에서 정상에 다 올라가게 되었

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등줄기를 쭉 펴고선 '차렷' 자세를 취하고, 국기를 똑바로 올

려다보았다. 하늘이 맑고  제법 바람이 불면, 이는 꽤나 멋들어진 광경이었다. 저녁 

의식도 형식은 대체로 아침과 비슷했다. 다만 순서가  아침과는 정반대였다. 국기는 

스르르 아래로 내려와  오동나무 상자 속에 수납되었다. 밤에는 국기가 펄럭이지 않

았다. 어째서 밤에는 국기가 거둬들여지는지, 나로선 잘 알수 없었다. 밤에도  국가

는 확고히 존속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일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국기의 비

호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대단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아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는 건 나 같은 사람 뿐인 듯했다.  게다가 나만 하더라도,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을 뿐, 심각한 의미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숙사의 방 할당은 원칙적으

로 1~2학년생은 한 방에 두 명씩, 3~4학년생은 독방, 그런 식으로 돼 있었다. 두 명

씩 쓰는 방은 육조방(다다미6장,곧 3평 넓이의 방)을 세로로 길게 펼쳐 놓은 형태였

다. 막다른 쪽 벽에 커다란 알루미늄 틀의 창문이 박혀 있었다. 가구는 극히 간결하

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모두가 탄탄한 것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두 개씩, 2단 침대,

로커가 두개,  그리고 만들어 붙인  선반이 있었다. 대개의 방 선반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헤어드라이어, 전기 포트와 인스턴트 커피, 설탕, 인스턴트 라면을 끓이기 

위한 냄비, 그리고 식가기 몇 개 비치돼 있었다. 대개의 경우 석회칠 한 벽에는 <플

레이 보이>지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책상 위 책꽂이에는 교과서와 최근 

유행하는  소설책이 몇 권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자들만의 방이라 

대체적으로  아주지저분 했다.

  쓰레기통 바닥엔 곰팡이 낀 귤 껍질이 달라 붙어있었고,재떨이  대용의 빈 깡통에

는 담배 꽁초가 10센티미터나 쌓여 있었다. 컵에는 커피 앙금이 말라 붙어있는가 하

면 바다에는 인스턴트 라면의 셀로판 종이랑 빈 맥주 깡통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바람이 불면  바닥에서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지독한 냄새도 났다. 모두들 

세탁물을 침대 밑에 쑤셔 넣어 놓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이불을 말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어느 이불이고 간에 땀과 온갖 체취를 흠뻑 빨아들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내 방은 청결, 바로 그 자체였다. 바닥엔 티끌  하나 없었고,

재떨이는 늘 씻겨져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이불을 햇볕에 말렸으며, 연필은 차

곡차곡 연필 꽂이에 꽂혀 있었다. 벽에는 핀업 대신에 암스테르담의 운하 사진이 붙

어 있었다. 

  이런 모든 결과는 동거인이 병적일 만큼 청결을 따지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부 청

소를 해주었다. 세탁마저 해주는 판이어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

다. 내가  캔맥주를 마시고 나서 빈  깡통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 다음 순간 그것은 

내 동거인의 손에 의해 쓰레기 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식이었다.

"난 지,지,지도 공부를 하고 있단다"하고 그는 맨 처음 나에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하니?"

"응, 앞으로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야, 지,지도를 만들겠어."

  세상엔 실로 갖가지 종류의 희망도 있고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때까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해서 지도를 만들고 있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

었다. 뿐더러, '지도'란 어휘를 입에 담을 때마다 더듬어 버리곤 하는  인간이 국토 

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어째 기묘하게 여겨졌다. 경우에 따라 말을  더

듬기도하고 더듬지 않기도 했는데, '지도'란 어휘가 나오는 한,  그는 백 퍼센트 확

실히 더듬었다.

"자네는 무엇을 전공하고 있지?" 하고 그가 물었다.

"연극" 하고 나는 대답했다.

"연극이란 무대에서 하는 그거겠지?"

"아니야, 무대에서 하는 건 아니야.희곡을 읽고 연구하는것 뿐이지. 라신느라든지,

 이오네스코라든지,세익스피어 그런 거지."

"세익스피어 이외 다른 사람의 이름은 들은 적이 없어."하고 그는 말했다. 

나도 거의들은 적이 없었다.강의 요강에 그렇게 씌여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떻든 그런 거 좋아하나 보군" 하고 그가 말했다.

"별로 좋아하진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혼란을 일으켰다.혼란을 일으키자 말 더듬이 심해졌다.나는 아주 나쁜짓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러면 어때? 상관 없었다구.인도 철학이건 동양사 건 말이야.무엇인지 별로 상

 관 없는거야.다만 어쩌다가 연극이었던 거지.그것뿐이야"라고 나는 설명했다.

 "모르겠는걸,나,나,나의 경우는 지,지도가 좋길래 지,지,지도 공부를 하고 있넌 셈

 이거든.그러기 위해 도쿄 대학에 입학한 거고,그 때문에 부모님께 무리를  해서라

 도 돈을 내게 하고 있단 말이야.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고 말이야...."

그가 하는 말이 정론(正論)이었다.나는 설명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들은 제비를 뽑아 2단 침대의 위아래를 결정했다. 그가 상단을 잡았다.그는  언제나

흰 셔츠에 검정 바지 차림새였다. 머리는 빡빡 깎았고,귀가 컸으며,광대뼈가 불거져

있었다. 학교에 갈 때엔 학생복을 입었다. 구두도, 가방도 시커먼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우익 학생 꼴이고, 주위 학생의 대부분은 실제로 그렇게 간주하고 있었지만,사

실을 말하자면 그는 정치에 대해서는 백 퍼센트 무관심했다. 무엇을 입을지  선택하

는게 귀찮아서 언제나 그런 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관심은 해안선의 변화라

던지, 새 철도터널의 완성이라던지, 하는 종류의 사건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일

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이쪽이 

비명을 지르든지 잠들어 버리든지 상관없이 떠들어댔다.

  매일 아침 그는 6시 정각에 맞춰 일어났다.'기미가요'가 자명종 시계를 대신했다.

이걸 보면 국기 게양도 전혀 쓸모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옷을 입고

세면장에 가서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는 데에는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다. 이빨을

하나하나 뽑아 내서 닦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방으로 돌아오면 타월의 주름을

하나 하나 펴가지고 옷걸이에 걸고, 칫솔과 비누를 선반에 올려 놓았다. 그  다음에

라디오를 켜고, 아침 체조를 시작했다.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밤이 꽤 깊어서야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푹 자는

쪽이라서, 라디오 체조 프로그램이 시작되어도 쿨쿨 잠들어 있는 수가 있었다. 그러

나 그런 때에도 '도약'부분이 되면 반드시 뛰어 일어나게끔 되었다. 아무튼 그가 도

약할 때마다 -그는 실제로 높이 도약했다- 나의 머리는 베개 위에서 5센티미터나 오

르락 내리락 해야 했다. 그러니 잠들어 있을 수가 있냐 말이다.

"미안하지만 말야,체조는 옥상 같은 데서 해줄 수 없겠니? 잠이 깨고 마는걸" 하고

나는 사흘째 되는 날 말했다.

"안돼.옥상에서 하면 3층에 있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거든,여기는 1층이라 그럴  염

 려는 없잖아"하고 그는 잘라 말했다.

"그럼 가운데뜰에서 하면...."

"그것도 안되지,너나 나나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없으니까 음악을 들을 수가  없어.

 음악이 없으면 잘되질 않아."

분명 그의 라디오는 전원식(電源式)이었으며, 내 라디오는 트랜지스터였으나 FM 밖

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미안하지만 소리를 작게 하고 도약을 그만둬 줄 수 없겠니? 굉장히 울리니까

 말이야."

"도약? 도,도약이란 것이 뭐야?" 하고 그는 놀란 듯이 말했다.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것 있잖아."

"그런 게 어딨어?"

나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이제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일

단 꺼냈으면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나는 NHK라디오 제 1 체

조의 멜로디를 부르면서 방바닥 위에서 껑충 껑충 뛰었다.

"보라구,이거야, 있잖아, 이런 거?"

"그,그렇군.분명 있지. 주의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 부분만을 생략해 주면 좋겠단 말이야. 다른 부분은 참아줄 테

 니까."

"안되겠는걸. 하나만 빼고 넘어갈 수는 없다구. 10년이자 줄창 해온거니까, 하기 시

 작하면, 무,무의식중에 전부 해버린단 말야. 하나를 빼먹으면 말야, 전, 전부를 할 

 수 없게 되거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럼,전부를 안하면 되잖아."

"그런 말투는 좋지 않다구.남에게 명령하거나 하는 건 말야."

"보라구, 난 뭐 명령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적어도  8시까진 잠자고 싶고, 좀 더 일

 찍 일어난다 하더라도 아주 자연스레 눈을 뜨고 싶단 말이야. 빵 먹기 경주를 하는 

 것 같은 기상을 하긴 싫단 말이다.그것뿐이야.알겠어?"

"그래,어떡하면 좋을까? 함께 일어나 체조하면 좋지 않을까?"

나는 단념을 하고 잤다.

그는 그후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라디오 체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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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나의 동거인과 그의 라디오 체조 이야기를 하니까, 그녀는 킬킬 웃었다.우스

갯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었지만, 결국은 나도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

-그건 아주 짧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나와 그녀는  

요츠야 역에서 전차를 내려, 선로 옆 둑을 걸어 이치가야 방향으로 갔다. 5월의  어

느 일요일 호우였다. 아침에 내리던 비도 낮이 되기 전에 개고, 나직이 가라 앉았던  

울적한 잿빛 구름은 남풍에 쫓기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선명한 초록빛 벗나무  잎사

귀가 바람에 흔들려 반짝이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 끝에서는 벌써 싱그러운 초 여

름 향기가 풍겼다.  엇갈려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웃옷이랑 스웨터를 벗어서 어깨

에 걸치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에선 젊은 남자가 쇼트 팬티 바람으로 라켓을 휘두르

고 있었다. 가끔씩 라켓의 금속 테가 오후의 태양을 받아 번뜩이곤 했다. 벤치에 나

란히 앉아 있는 수녀 두 사람만이 검은색 겨울 제모을 단정하게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래도 두사람은 아주 즐거운 듯이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으므로,그녀들의 모습을 보

고 있노라면, 여름은 아직도 훨씬 멀리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15분 걸어가자 등에서 땀이 배었다. 나는 두터운 무명 셔츠를 벗고  티셔츠 바

람이 되었다. 그녀는 엷은 희색  트레이너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잦은 세탁으로 색이 바랜 낡은 트레이너 셔츠였다.  훨씬 전에 그녀

가 그것을 입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느

낌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저런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곤 했다. 모든것이

굉장히 먼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같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거 즐거워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는걸, 아직 그다지 오래 산 게 아니니까."

그녀는 수돗가 앞에 멈춰 서서, 한 모금 물을 마시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그리고 테니스화의 끈을 고쳐 매었다.

"그런 데에 어울리나 봐요?"

"공동 생활이라는 거?"

"예."

"글쎄, 생각하는 것보단 제법 성가신 일이 많아.자잘한 규칙이라든지 라디오  체조

 라든지 말야."

"그렇군요." 하고 그녀는 얼마 동안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투명해  보였다. 그녀

가 이토록 투명한 눈을 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때까지 미처 알지 못했다. 좀 불가사

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투명감이었다. 마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끔씩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즉...."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나의 눈을 들여다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

깔고는 덧붙였다.

"모르겠어요.됐어요."

그것이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그녀와 만난 건 반년 

만이었다. 반년 동안에 그녀는 몰라볼 만큼 야위어 있었다. 특징적이었던 볼의 탐스

런 살도 빠졌고, 목선도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골격이 두드러진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뻐졌다. 나는 그 점

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을지를 몰라 그만 두었다.

우리들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요츠야에 온 건 아니었다. 나와 그녀는 중앙선 전차칸

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별다른 예정은 없었다. "내려요"하고  그

녀가 말했고,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다.그것이 공교롭게 요츠야 역이었을 뿐이다.

둘이서만 있게 되자, 우리 사이엔  딱히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그녀가 왜 나에게 전

차에서 내리자고 했는지, 나로선 알수가 없었다. 애당초 이야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

었던 것이다. 역에서 내리자, 그녀는 아무 말 않고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나는 그  

뒤를 쫓기라도 하듯이 걸었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언제나 1미터 가량의 거리가  있

었다. 나는 줄곧 그녀의 아담하고 작은 등을 보면서 걸었다. 가끔씩 그녀는 뒤를 돌

아다보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적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대

답하면  좋을지 몰라 곤란한 적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건 별 상관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하

고 싶은 말을 하고 나서 다시 앞을 향해 잠자코 걷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이다

번지에서 오른쪽으로 진보쵸 교차점을 넘었다. 거기서 오차노미즈 고개를 올라,그대

로 홍고로 빠졌다. 그리고 됴코로 전차를 따라 고마고메까지 걸어갔다. 어지간히 먼  

거리였다. 고마고메에 닿을 때엔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여긴 어디죠?"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고마고메야.한바퀴 돌아온 거야."

"어째서 이런 델 왔지요?"

"네가 온 거야.난 뒤를 따라온 것뿐이고."

우리는 역 근처의 국수집에 들어가 가벼운 식사를 했다. 우리는 주문하고서 다 먹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걷는 데 지쳐서 몹시 피곤했고,그녀는 줄곧  무

엇인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퍽도 몸이 튼튼한가 보군"하고 나는 국수를 다 먹고 나서 말했다.

"놀랐어요?"

"응."

"이래뵈도 중학교 시절엔 장거리 선수였다구요. 게다가 아버지께서 산을 좋아하셨기

 때문에,어릴 적부터 일요일이면 등산을 가곤 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다리,허리만

 은 튼튼하죠."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그녀는 웃었다.

"집까지 바래다 줄게."

"괜찮아요.혼자서 갈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신경 쓰지 마세요."

"난 전혀 상관 없는걸."

"정말 괜찮다니까요.혼자서 집에 가는 데 익숙해 있으니까."

사실을 말하면,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어서 나는 적이 안심했다. 그녀의 아파트까지

는 전차로 가는 것만 해도 한 시간 이상 걸렸으며, 그러는 동안 둘이서 잠자코 좌석

에 앉아 있으면 어색해질 게 분명했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돌아가기로 하고, 그 대

신 내가 저녁을 샀다.

"어때요, 만약 괜찮다면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또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이

 런말, 도리가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하고 헤어질 무렵 그녀가 말했다.

"도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내가 놀란 것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는걸요."하고 그녀가 변명했다.

그녀는 트레이너 셔츠의 양쪽 소매를 팔꿈치께까지 끌어 올리고,그리곤 다시  제자

리로 끌어 내렸다. 전등 불빛이 그 솜털을 예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도리'란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좀 더 다른 식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양쪽 눈을 깔고는, 합당한 말을 찾으려고 했다.하지

만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아."하고 나는 말했다.

"잘 말할 수가 없어요. .......요즈음 줄곧 그런 상태에요. 정말 잘 말할 수가 없어

 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언제나 얼토당토않은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 걸요.  얼

 토당토 않거나,  전혀 반대되거나 하죠. 그래서, 그걸 고쳐 보려고 하면 더더욱 헷

 갈려서 엉망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러면 처음에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조차도 모르게 되는거예요.  마치 내 몸이 둘로 갈라져서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한복판에 굉장히 굵은 기둥이 서있고, 그 둘레를 빙글빙글 돌

 면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느낌 말이에요. 그래서 제대로 된 말을 또 하나의 내가 

 늘안고 있고, 다른 나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놓고, 나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알겠어요?"

"누구나 많든 적든 그런 느낌이란 있는 법이야.모두가 자신을 정확히 표현하진  못

 해.그래서 초조해 하기도 하는 거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그녀는 좀 낙담한 것 같았다.

"그것과는 또 틀려요."하고 그녀가 말했으나,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만나는 건 전혀 상관 없다구.어짜피 언제나 놀고 있고,혼자서 빈둥 거리며 있느니

 걸어 다니는 쪽이 건강에도 좋을 것 같고......"

우리는 역에서 헤어졌다. 내가 "안녕"하고 말하자, 그녀도 "안녕"하고 말했다.

  ++++++++++++++++++++++++++++++++++++++++++++++++++++++++++++++++++++++++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건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나이로, 미션

계통의 명문 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를 소개해 준 이는 나와 사이 좋은  친구로,

그와 그녀는 연인 사이였다. 두 사람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친구 사이로, 집도 2백미

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부분 어린 시절 친구가 그렇듯이 그들에겐 두 사람

끼리 있고 싶어하는 소망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노상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가족

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었다. 나하고 더블 데이트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쪽의 하찮은 연애는 별로 그럴싸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새

나와 친구와 그녀, 그렇게 셋이서만 놀게 되었다.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

로 마음이 제일 편했다. 역할로는 내가 게스트고, 내 친구가 유능한 호스트, 그녀는

인상이 좋은 어시스턴트이자 동시에 주역이었다.

그는 그러한 역할에 아주 뛰어났다. 얼마간 냉소적인 경향은 있었으나, 본성은 친절

하고 공정한 사내였다. 그는 나에 대해서나 그녀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농담을  하

고 놀려댔다. 어느 쪽이건 잠자코 있으면, 이내 그쪽에 말을 걸어서  교묘히 상대방

의 이야기를 끌어내곤 했었다. 그에겐 순간적으로 상황을 살피고, 그에 대응하는 능

력이 있었다. 그는 또 그다지 재미도 없는  상대방의 이야기 중에서  재미난 부분을 

이것저것 찾아내는 보기드문 재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노라

면,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이 아주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한번 그가 자리를 비우면, 나와 그녀는 제대로 이야기할수가 없었다. 두사람 

사이에  공통되는 화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대개 아무 말도 없이 탁자 위의 

재떨이를 만지작거리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면서 그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장례식이 끝난 3개월쯤 후에, 나와 그녀는 꼭 한 번 얼굴을 마주쳤다.  대수롭

지 않은 용건이 있어서 다방에 만났는데, 용건이 끝난 다음에 아무 할말이  없었다.

나는 몇 번인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았으나, 이야기는 그때마다 도중에  끊어지고

말았다 .뿐더러 그녀의 어투에는 어딘지 모르게 모난 데가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지

나로선 알지 못할 일로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와 헤

어졌다.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낸 건 어쩌면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자기가 아니고 나였기때

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상황을  바꾸었으면 싶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한번 일어난 일은 제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고

또 변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해 5월의 오후, 나와 그는 하교길에 -하교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면 등교 도중에 돌아왔던 셈이다 - 당구장에 들러서 네 게임 가량  당구

를 쳤다. 첫 게임을 내가 이기고, 나중의 세 게임을 그가 이겼다. 약속대로 내가 게

임요금을 물었다. 그는  그날 밤 차고 안에서 죽었다. N360의 배기 파이프에 고무호

스를 연결해 차 안으로 끌어들이고, 창문 틈을 고무 테이프로 막아 버리고서는 엔진

을 걸었던 것이다. 죽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친척의 

병문안을 갔던 양친이 귀가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카 라디오가 켜진 채였

다.  유서도 없었거니와 짚이는 동기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와  만났던 탓에, 

경찰에 불려 가서 심문을 받았다.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여느 때와 똑같았습니다."

도대체 자살하겠다고 마음먹은 인간이 당구에서 세 게임이나 계속 이길 까닭이 없단 

말이다. 경찰은 나에 대해서나 그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당구장에 가는  그런 인간이라면 자살했다 한들 

별로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신문에 작은 기사가 실리고, 그걸로 사건

이 끝났다. 빨간  N360은 처분되었다. 그가 앉았던 교실의 책상에는 한동안 하얀 꽃

이 장식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도쿄로 나왔을 때,내가 해야 할 일은  한가

지 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그것뿐이엇다.나는 녹

색 펠트를 발라 놓은 당구대랑, 빨간 N360이랑, 책상 위의 하얀 꽃이랑,그런 것들은

죄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랑,경찰의 취조실

에 놓여있던 종이가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펑퍼짐한 문진이랑, 그런 모든것들을  말

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렇게 잘되어 갈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무엇인지 어렴풋한 

공기 비슷한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공기는 뚜렷이 단순

한 형상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놓고 보면 역겨우리만큼 평범하다. 완전한 일반론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로서 몸 속에 느꼈던 것이다. 문진 속에도,당구대

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네개의 공속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

을  마치 자잘한 티끌처럼  허파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죽음이란 것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독립된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포착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죽

음이 우리들을 포착하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그

것은 나로선  지극히 정당하고도 논리적인 사고 방식인 것으로 여겨졌다. 삶은 이쪽

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 있다. 그러나 나의 친구가 죽어 버린 그날 밤을  경계로 해

서 나로선 이미  그렇게 단순하게 죽음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

극적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로선 그것을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저 열일곱 살의 5월 밤에 나의 친구를 포착한 죽음은,그날 밤 나

를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명백히 그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에 관해서 심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

었다. 왜냐하면 나는 열여덟 살이고, 사물의 중간점을 찾기에는 너무나 어렸기 때문

이다.

  +++++++++++++++++++++++++++++++++++++++++++++++++++++++++++++++++++++++

  

나는 그  후로도 한달에 한번인가 두번, 그녀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다분히 데이트

라 불러도 좋을 것이라 믿는다. 그 외에 마땅한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그녀는  도쿄

의 교외에 있는 여자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평판이 좋은 아담한 여자 대학이었다.

그녀의 아파트로부터 대학까지는 걸어서 10분정도 걸리지 않았다. 길가에는  깨끗한

용수(用水)가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은 그 언저리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녀에게

는 친구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띄엄 띄엄 밖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특별히 이야기할 것도 없었으므로, 나도 그다지 말하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면,우리

는 그저 걷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런 진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곁에서 걷게 되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고개를 오르고 고개를 내려오고, 다리를 건너고, 거리를 가로질러 걷고 또 

걸었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었고,  무엇을 하리라는 목적도 없었다. 한바탕 걷

고 나면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또 걸었다. 슬라이드 필

름이 갈아 끼워지는 것처럼,  계절만이 지나갔다.

가을이 와서, 기숙사 가운데 뜰이 느티나무 낙엽으로 뒤덮였다. 스웨터를 입으니 새

로운 계절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새 스웨이드 구두를 샀다. 가을이 끝나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녀는 가끔씩 나의 팔에 몸을 기대었다.더플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 나는  그녀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는 코트의 

포켓에 손을 밀어 넣은 채 언제나 다름없이 걷기만 했다. 나도 그녀도 러버 소울 구

두를 신고 있었기에,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플라타너스의 구깃 구깃한 마른 잎을 

밟을 때에만 마른 잎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찾고 있는건 내 팔이 아니

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건 나의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

이었다.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여겨졌다. 그녀의 눈은 전보다도 더욱 투명하게 느껴

졌다.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투명함이었다. 가끔씩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

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럴때마다 나는 슬퍼졌다.

기숙사 동료들은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거나 일요일 아침에 내가 외출하려고 하

거나 하면, 언제나 나를 놀려댔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다들 나에게 연인이  생

긴줄 알았다. 설명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할이유도 없어서,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

다. 데이트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누군가와 섹스는 어떻더냐고 질문했다.  그러면 나

는 고만고만하더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열여덟 살은 지나갔다. 해가 뜨고 지고, 국기가 올라갔다  내려갔

다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죽은 친구의 연인과 데이트를 했다. 도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나로선 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한 심정을  그녀에게 몇 번인가 말하려 했다. 그녀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정확하게 알아주리라 여겼다. 그러나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맨 처음 나에

게 말한것처럼, 정확한 말을 찾으려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내 손이 닿지 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곤 했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가 있는  로비의 의자에  앉아

서 그녀로 부터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는 3주일 동안 걸려오지 않는 수도  있었고,

2주일 동안 연거푸 걸려 오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는 로비의 의자에 앉

아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에는 태반의 학생들이 놀러 나갔으므로, 로

비는 대개 조용했다. 나는 언제나 그런 침묵의 공간에 떠오르는 빛깔의 입자를 응시

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누구나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구

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앞의 것은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내민 그 바로 앞에, 막연하기만 한 공기의 벽이 있었다.

겨울 동안 나는 신주쿠의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크리스마스에

는 그녀가 좋아하는 <디어 하트>가 들어있는 헨리 맨시니의 레코드를 선물 했다. 나

는 직접 포장을 하고, 핑크색 리본을 매었다. 전나무 무늬의 크리스마스용 포장지였

다. 그녀는 나에게 털실 장갑을 짜주었다. 엄지손가락 부분이 좀 짧았으나,  따스하

기만 했다. 그녀는 겨울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나는 1월 한달 동안 

그녀의 아파트에서 식사를  대접 받았다. 그 겨울에는 갖가지 일이 벌어졌었다. 1월  

말에 나의  동거인이 40도 가까운 고열이 나서  이틀동안 드러누웠다. 그 탓에 나는  

그녀와 데이트를 망치고 말았다. 금세 죽어 버릴것처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내

버려둔 채 외출할 수는 없었다.  나말고 병간호를 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얼음을 사다가 비닐봉지로 얼음주머니를 만들고, 타월을 식혀서 땀을 닦아  주

고, 한 시간마다 열을 쟀다. 열은 꼬박 하루동안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째  아

침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체온은 36도 2부까지 내려 있었

다.

"이상하군. 여지껏 열 같은 게 난 적이 없는데" 하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나았잖아?"하고 나는 말했다.그리곤 그 때문에 쓸모없이 되어버린 두 장의

콘서트 초대권을 내보였다.

"하지만 뭐 초대권이니 다행이잖아"하고 그는 말했다.

2월에는 몇번인가 눈이 내렸다. 2월이 끝날 무렵에 나는  하찮은 일로 싸움을  하고

기숙사의 같은 층에 사는 상급생을 때렸다. 상대방은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혔

다. 다행히 대단한 부상은 아니었으나, 나는 사감에게 불려가 주의를 받았다.  덕분

에 기숙사 생활이 몹시 불편해졌다. 나는 열아홉 살이 되었고, 이윽고 2학년이 되었

다. 나는 몇몇  강의를 빼먹었다. 성적은 거의 C아니면 D였고, B가 아주 약간  있을 

뿐이었다. 그녀 쪽은 무난히 모든 학점을 따서  2학년이 되었다. 계절이 반 바퀴 돈 

셈이다. 6월에 그녀는 갓 스무 살이 되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된다는 건 어쩐지 불

가사의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나로서나 그녀로서나 실상은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 사

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쪽이 옳지 않은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열여덟 다음이 열아

홉이고, 열아홉 다음이 열여덟이라면,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도 다음 

겨울에는 스무 살이 된다. 죽은 자만이 언제까지나 열일곱 살이었다.

그녀의 생일날에는 비가 내렸다. 나는 신쥬쿠에서 케이크를 사들고 전차를 타고, 그

녀의 아파트로 갔다. 전차는 붐볐고, 게다가 자주 흔들렸다. 때문에 저녁 무렵 그녀

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케이크는 로마의 유적 같은 형상으로 뭉개져 있었다.  그

런대로  일단 스무 자루의 양초를 꽂아 성냥불을 켰다. 창문의 커튼을  치고 전등을  

끄자, 그럭저럭 생일다워졌다. 그녀가 와인을 땄다. 그런 다음에 케이크를  먹고 간

단한  식사를 했다.

"스무살이 된다는건,어째 바보 같네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식사가 끝나자 둘이서 함께 그릇을 치우고, 방바닥에 앉아서 와인의 나머지를  마셨

다. 내가 한 잔을 마시는 동안에 그녀는 두 잔을 마셨다. 그날 그녀는 드물게  잘도

지껄여댔다. 어릴적의 일이랑 학교 일이랑 집안일 따위를 이야기했다.  어느 것이나

아주 긴 이야기였다. 긴데다가 이상하리만큼 세세한 이야기였다. A이야기가 어느 틈

엔가 거기에 포함되는 B의 이야기가 되고, 이윽고 B에 포함되는 C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계속되었다. 끝이 없었다.

나는 처음 얼마동안은 적당하게 맞장구 쳐주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그만 두었다. 나

는 레코드를 걸고, 그것이 끝나면 바늘을 올리고 다음 레코드를 걸었다. 한 바퀴 전

부 돌아 끝이 나면, 다시 처음의 레코드를 걸었다.  창 밖에선 비가 계속 내리고 있

었다.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그녀는 혼자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시계가  11시를 가

리켰을때, 나는 아닌게 아니라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벌써 4시간이나  지껄

여대고 있었다.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전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로선 알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지껄이고 싶은 만큼 지껄이게 하는 쪽이 좋

을 것  같기도했고,  시간을 보아서 어디선가 그만두게 하는 쪽이 좋을 성도 싶었다.  

나는 꽤나 망설이다가 결국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너무 

지껄여댔던 것이다.

"너무 늦어져도 미안하니까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어.며칠 뒤에 또 만나자구"  하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한 말이 그녀에게 전해졌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을 뿐, 이내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단념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

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녀가 지껄이고 싶은 만큼 지껄이게 하는 편이 좋을 성 싶었

다. 뒷일은 되어가는 대로 내맡길 수 밖에.

그러나 이번엔 그녀의 이야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그

때엔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말의 끊어진 조각들이 잡아 찢기기나  한

것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어디

선가 갑자기 꺼지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지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으나, 거

기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인가 깨지고 만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벙긋이 연

채, 멍하게 내 눈을 보고 있었다. 마치 불투명한 막(膜)을 통한 것 같은, 그런 시선

이었다. 나는 아주 몹쓸 짓을 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훼방 놓을 생각은 없었어.하지만 이젠 시간도 많이 늦었고,뿐더러........."

하고  나는 한마디 한마디를 확인하듯 천천히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

린 눈물이 뺨을 지나 레코드 쟈켓 위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첫 눈물이  흘러내리

자, 다음엔 그칠줄  모르고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두 손을 방바닥에 짚고, 마치  토

하는 듯한 자세로 울었다.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의

어깨는 잔잔히 요동치고 있었다. 그 다음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

안았다.그녀는 나의 가슴속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나의 셔츠는 뜨거운 입김

과 눈물에 젖었다.  그녀의 열 손가락이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듯이 나의 등뒤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몸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머

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대로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

러나 그녀는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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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그녀와 잤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는지  어떤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밖에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자아이와 자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

다. 그녀 쪽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어째서 '그'와 자지 않았었느냐고  물

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건 묻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창 밖의,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

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아침이 되니  비는 그쳐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나는 

줄창 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안개처럼 뒤덮고 있었다.나는 한

참 동안 그대로 그녀의 하얀 잔등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단념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에는 레코드 자켓이 어젯밤 모습대로 흩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는 형태가 망가진 케이크가 절반쯤 남아 있었다. 갑자기 거기에서 시간의 흐름이 멈

춰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상 위에는 사전과 프랑스어 동사표(動詞表)가  얹혀 

있었다. 책상 앞 벽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사진도 그림도 아무것도 없이 숫자만

이 달려 있었다. 달력은 새하얬다. 써놓은 것도 없었고, 달리 표시해 놓은것도 없었

다. 나는 침대 다리 밑에 떨어져 있는 옷을 집이서 입었다. 셔츠의 가슴 부분은  아

직도 차갑고 축축했다. 얼굴을 가까이 하니 그녀의 머리 냄새가 났다. 나는 책상 위

의  메모 용지에다, 가까운 시일안에 전화를 해달라고 썼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살

며시 문을 닫았다.

1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기에,

난 긴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것들을 되도록 솔직하게 썼다. 나로선 여

러가지를 잘 알 수 없었으며, 알려고 애쓰고는 있으나, 그러자면 시간이 걸린다. 그

리고 시간이 자나고 난  다음에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을지 나로선 짐작도 할 수 없

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 심각하게 사물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심각하게 생각

하기엔 세계는 너무 불확실하며, 아마 그 결과로 주위의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강

요하게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타인에게 무엇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정말 너

와 만나고 싶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옳은 것인지 어떤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런 내용의 편지였다.

7월 초순경에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다. 짧은 편지였다.

우선 대학을  1년간 휴학하기로 했어요. 우선이라고 했지만, 이젠 아마  되돌아가지 

않을거에요. 휴학은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일입니다. 아파트는 내일 퇴거하기로 했어

요. 갑작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

에요. 당신에게 몇 번인가  의논할까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할 수가 없었어요. 입에 

담는 게 매우 두려웠던 거예요. 이런저런  일에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렇게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이런 말투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는지도 

모르겠군요. 만약에 그렇다면 사과할게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의 일로 해

서 당신이 자기 자신을 책망하거나 다른 누군가를 탓하지는 말라는 거에요. 이건 정

말이지  제가 전적으로 떠맡아야 하는 일이에요. 1년 남짓 저는 그것을 연기하고 또 

연기해 왔답니다. 그 탓으로 당신에게 퍽이나 폐를 끼친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한계겠지요. 교토의 산중에 좋은 요양소가 있다고 하니 우선은 그곳에 정착

할 겁니다. 병원은 아니고, 훨씬 자유로운 시설이래요.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에 쓰

겠어요. 지금은 잘 써지지 않는군요. 이 편지도 벌써 열 번 가량 고쳐 썼 답니다.당

신이  1 년간 제 곁에 있어 준 데 대해,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해  하

고 있어요. 그점만은 믿어 주세요. 그 이상의 것은 저로선 아무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주신 레코드는 언제나 소중히 듣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불확실

한 세계의  어딘가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때엔 좀더 여러가지  일들을 확실

히 이야기 할수 있겠 돼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안녕히..

 나는 몇백 번이나 그녀의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되풀이해서 읽을 때마

다 견딜 수 없이 슬퍼지곤 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볼때 느끼는 것과 같은 호소할 데 없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어디로  가져

갈 수도, 어디다 챙겨 놓을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형체도 없고, 무게도 없었

다. 나는 그것을 몸에 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서서히 지나갔다. 나의 

귀에는 그들이 하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의  의

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 올 데는 없었으나,그 이외에 도대체  무엇

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텔레비전의 야구 중계를 켜고,그것을  보

는척 했다. 그리곤 나와서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응시했다. 나는 

그 공간을 둘로 가르고, 그 갈라진 공간을 다시 둘로 갈랐다.그리고 그것을  몇번이

고 몇 번이고 계속해, 마지막엔 손바닥에 얹힐 만큼의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10시가 되면 나는 텔레비젼을 끄고 방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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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달의 끝 무렵에 나의 동거인이 인스턴트 커피 병에 넣은 개똥벌레를 주었다.  병

속에는 개똥벌레 한 마리와  풀잎과 물이 조금  들어 있었다. 뚜껑에는 공기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사방은 아직도 밝았으므로 그것은 그저 그런 냇가의 검은  벌레

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분명 그것은 개똥벌레였다. 그 벌레는

미끌미끌한 유리의 벽을 기어오르려다가 그때마다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다.

개똥불을 본건 오래간만이었다.

"마당에 있더라구.  근처 호텔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풀어놓은 것들이  이리로 잘못

 들어왔나봐"하고 그는 보스턴 백에다 의류며 노트를 밀어넣으면서 말했다.

벌써 여름 방학이 시작된 지 몇주일인가 지나 있었다.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건  우리

들 정도였다. 내 쪽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쪽은 실습이 있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실습도 끝나고,그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여자아이한테 주면 좋을 거야.정말 좋아할 테니"하고 그는 말했다.

"고마워"하고 나는 말했다.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조용하기만 했다. 국기가 깃봉에서 내려지고, 식당 창문에 전

등불이 켜졌다. 학생이 적어진 탓으로, 식당 불은 여느때의 절반밖에 켜져 있지  않

았다. 오른쪽 절반이 꺼지고, 왼쪽 절반만이 켜져 있었다. 그런대로  희미하게 저녁 

식사 냄새가 났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나는 개똥벌레가 들어있는 인스턴트  커피 

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 갔다. 옥상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었다. 누군가 거둬들이

는  걸 잊어버린 흰 셔츠가 빨랫줄에 걸려, 무슨 곤충의 껍데기처럼 저녁 바람에 흔

들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의 구석 쪽에 있는 녹슨 철제 다리에 올라가  급수탑 위로  

나섰다. 원통형의 급수 탱크는 낮 동안에 듬뿍 빨아들인 열로 해서,  아직도 따스했

다.비좁은 공간에 걸터앉아 난간에 기대고 있노라니, 아주 약간 일그러진 하얀 달이 

눈앞에 가까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신쥬쿠 거리가, 왼쪽으로는 이케

부쿠로  거리가 보였다.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선명한 빛깔의 냇물이 되어, 거리

에서  거리로 흐르고 있었다. 갖가지  소리가 뒤섞인 부드러운 소음이 마치  구름인 

양 거리  위에 떠 있었다. 개똥불은 병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그러나 그 

빛깔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색깔조차 너무 엷었다. 내 기억 속의 개똥불은 좀 더 뚜

렷이  선명한 빛깔을 여름의 어둠 속에 발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개똥벌레는 힘이 빠져 죽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병의  목을 잡고 몇 번인가 흔

들어 보았다. 반디는 유리 벽에 몸을 부딪히고, 아주 조금 날았다.그러나 그 빛깔은

여전히 희미하기만 했다. 다분히 내 기억이 잘못되어 있나 보다.개똥불은 실제로 그

다지 선명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저 그렇게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혹

은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너무나도 깊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나로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개똥불을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가 기억하고 있는 건 밤의 어두운 목소리 뿐이었다. 벽돌 구조의 낡은 수문도  있었

다. 그건 핸들을  빙글빙글 돌려서 여닫는 수문이었다. 강가의 수초가  수면을 거의 

다덮어 버린 것 같은 조그마한 사내였다. 사방은 아주 캄캄했고, 수문의 물  웅덩이  

위를 몇백 마리나 되는 반딧불들이 날아다녔다. 그 노오란 빛깔의 덩어리가,마치 마

구 불타오르는 불똥처럼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언제 일이더라? 그리고 도대체 어디였더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와선 이런 저런 일들이 앞뒤가 맞지 않게 뒤섞여  버

렸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몇 번인간 심호흡을 해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노라면, 몸이 금세라도 여름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

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날이 저물고 나서 급수탑에 오른 건 처음이었다.여느때보

다 바람 소리가 두드러지게 들려왔다. 그다지 센 바람도 아닐텐데,그것은  불가사의

할 만큼 선명한 행적을 남기고 내 곁을 휘몰아쳐 나갔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고  밤

이 지표를 뒤덮어 갔다. 도시의 불빛이 강하게 그 존재를 돋보이려 해도 밤은 제 몫

을 확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나는 병의 뚜껑을 열고 개똥벌레를 꺼내어,3센티미터쯤

내민 급수탑 가장자리에 놓았다. 개똥벌레는 자신이 놓여진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

는 모양이었다. 개똥벌레는 주위를 비실거리면서 한바튀 돌기도 하고,부스럼 딱지처

럼 말라 있는 페인트 자국에다 발을 걸기도 했다. 잠시동안 오른쪽으로 나가 거기가

막바지임을 확인하고서는 다시 왼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시간을 들여 볼트의 꼭

대기로 기어올라가, 거기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았다.  개똥벌레는 마치 숨이 끊어진

듯,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선 채,그런 개똥벌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동안,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만이 우리 사이를, 냇

물처럼 흘러갔다. 느티나무가 어둠속에서 무수한 잎사귀들을 비벼댔다.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었다.

개똥벌레가 날아오른 건 훨씬 뒤였다. 개똥벌레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문득 날개를 펴, 

그 다음 순간에는 난간을 넘어 엷은 어둠 속에 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잃어버린 시

간을 되찾으려는 듯 급수탑 옆에서 잽싸게 활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이 

바람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 보듯 잠시 동안 거기에 멈췄다가, 이윽고  동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개똥불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나의 가슴에 오래 머

물러  있었다. 눈을 감은 두터운 어둠 속을 그 조그마한 빛은, 마치 갈곳을 잃은 넋

인 양 언제까지나 헤매 다니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어둠 속으로 살며시 손을 뻗쳐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가는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의 아주 조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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