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Vendetta
“연백진 씨, 수천의 자본이 백람의 비공개 단체 하나에 집중적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기관이 무엇을 하는 기관이며 왜 갑자기 자금의 행방이 묘연해졌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답해드릴 건 없습니다.”
“국민들에게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백람이 투자했던 단체는 무엇이며 왜 지금은 아무 언급도 없는 겁니까!”
“옆에 동행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연백진 씨 대신이라도 대답해주십시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백람의 지분이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지 알고 계십니까!”
국민의 알 권리라. 연백진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 치며 주춤거리는 서인표의 팔을 잡아끌었다. 건수 하나 잡을까봐서 집요하게 자택까지 찾아내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보다는 그들이 요구할 때마다 붙이는 사족이 더 재미있었다. 국민의 권리 따위를 들이대면 자신이 겁이라도 나서 ‘백람이 기여했던 곳은 인공자궁을 연구하는 EEC라는 연구단체이고 지금은 임시해체되었습니다.’라고, 따듯한 차라도 내어주며 이야기해줄 줄 아는가? 그들의 우매함이 우습다 못해 흥미로웠다. 그러나 흥미롭다는 사람치고 연백진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은 그 수가 아직은 적었지만 조만간 냄새를 맡으면 일파만파 몰려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연백진은 쫓아오는 경호원들에게 결국 사인을 보냈다.
“쓸어버려.”
초거대기업의 넷째아들이란 자가 기자들을 상대로 내뱉은 말치고는 극단적이고 상스러웠다. 잠시 멍해있던 기자들의 분위기가 곧바로 거칠게 뒤바뀌었지만 연백진을 둘러싸 제재하는 경호진의 수가 족히 스무명은 되었다. 과단성이 드러나는 주인이나, 그의 말을 따라 철벽을 형성한 검은 슈트의 사나이들이나, 기자들이 뚫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철저하게 막힌 벽 앞에서, 아니 오히려 저희들을 거칠게 밀어내는 벽 앞에서 그들은 4중으로 된 보안문을 뚫고 성큼성큼 사라지는 연백진과 의문의 사내ㅡ서인표ㅡ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소극적이게나마 불평을 터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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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로 들어선 서인표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럴 만도 했다. 연백진이 백람의 넷째아들이란 사실은 MIU 의대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수더분한 연백진은 도통 과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량을 실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와 인표는 파도처럼 실감했다.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기업의 핏줄이란 사실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영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식의 현관은 중산층 가정집의 실평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바깥에서 보이는 빌라의 크기도 상당했지만 속 안도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문짝도 몇 개나 달려있었고 내부에 복도가 있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도중에 커다란 욕조를 두 번이나 발견했다.
하지만 넓은 집안은 어쩐지 암울했다. 서인표는 연백진의 뒤를 졸졸 따라 걸으며 사람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 창백한 집안을 훔쳐보았다. 백진은 가끔 인표가 잘 쫓아오는지만 확인할 뿐 별말이 없었다. 그는 쭈욱 걸어 들어가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 섰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인표가 물었다.
“백진아.”
“응.”
“네가 이렇게 사치스러운 줄 몰랐다?”
평소 하던 대로 조금 꼰 것인데도ㅡ이 정도 사치는 일도 아니라며 농담으로 받아칠 줄 알았던ㅡ백진은 잠잠했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급하게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뛰어나온 서인표는 연백진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생전 그런 적이 없는 놈이 얼굴이 어찌나 매섭고 차갑던지. 순간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었나 진지하게 되돌아볼 정도였다. 그 무거운 공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인표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이 없어서.”
“보안이?”
“그래, ……도저히……”
백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고개를 젓더니 문을 열었다.
“꼬맹아.”
컴컴한 침실에는 지나치게 큰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어둠과 공백이 맞물린 그곳에 작은 인영이 있었다. 백진은 가까운 곳의 스탠드를 켜고 침대 맡으로 다가갔다. 쭈그려 누워있는 자는 미동도 없었다. 요새 들어 깊은 잠에 속절없이 빠져드는 녀석이 속삭이듯 부른 소리를 들었을 리 만무했다. 백진은 조심히 손을 뻗어 두꺼운 이불을 거두어냈다. 이불안은 따듯했다. 파리한 얼굴의 선담이 고치 속의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백진은 옆에서 인표가 보던 말던 개의치 않고 아이를 끌어안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인표는 조금 당황했으나 수선떨지 않았다. 백진의 넓은 품에서 아이가 잠시 눈을 떴다. 그 눈동자는 이 사람에게 안기는 일에 익숙한 듯 편안해 보였다. 안긴 자에게 보내는 그 키스가 굉장히 애틋하여 인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봐줘.”
의식이 달랑달랑한 선담을 쓰다듬던 백진이 인표에게 말했다. 딴청을 부리며 휴대장비를 꺼내던 인표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백진이 물러선 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선담의 이마를 짚었다.
“오랜만이구나.”
낮선 목소리 때문일까? 선담이 눈을 잠시 떠 인표를 보았다. 그러나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인표는 혀를 찼다. ‘그때’보다는 나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좋아보이진 않았다.
백진은 선담의 몸 이곳저곳을 짚어보는 인표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부만 알려줘.”
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1/10 확률도 임신이 가능하다고 알려준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짧은 말만으로도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럴 확률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뱉은 말이었는데, 실현가능성이 닥친 것이다. 인표는 대체 누가 이랬느냐고, 아니 그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입을 다물었다.
백진은 인표를 거의 감시하듯 지켜보았다.
“……….”
“……….”
그날 이후로 최은협은 찾을 수 없었다. 도망갔다는 느낌보다는 육식을 끝낸 포식자가 찌꺼기에 실컷 영역표식을 하고 자리를 뜬 느낌이었다. 그만큼이나 선담은 버려진 헝겊조각이 다 되어있었다. 취임식에 모였던 멤버는 강제로 해산되었지만 어쨌든 위원장에 연백진의 이름 석 자가 올라가면서 EEC는 잠정적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 사실 EEC의 활동중단은 연백진이 손을 썼다기 보다 그가 의욕을 잃어 손을 놨기 때문에 벌어졌다. 어찌되었든 EEC에 몸담았던 인물들은 실상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불만이 대단했지만ㅡ기자들에게 그러하듯ㅡ연백진은 모든 걸 무시했다. 그 또한 빈껍데기 같았다. 지켜보는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도너가 말을 안 들어 연구원에게 혼쭐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도너가 이유 없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순리를 거스르는 짓이라 결국 도너가 죽지 않겠느냐는 허튼소리도 떠돌았다. 처음 홍선담을 발견한 연백진은 누구에게도 그 현장을 보여주지 않았고, 다리사이의 깊은 상흔도 공개할 수 없었기에 뜬구름 잡는 소문이 파다했다. 안타깝게도 그 누구 하나 홍선담의 안위를 걱정하진 않았다.
선담은 외과의를 전공으로 한 백진의 친구에게 맡겨져 비밀리에 치료를 받게 되었다. 혀가 찢어지고 항문에도 깊은 열상을 입었다. 다행히 맞은 복부는 내상을 입지 않았지만 저항이 거셌는지 선담의 몸 여기저기가 세게 쥐어 잡힌 손자국투성이었다. 손목과 목덜미, 허리, 발목, 그리고 직장에 가득 차있던 분출물. 그것들만 보아도 선담이 어떤 고통과 맞닥뜨렸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며칠 내내 연백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릴없이 자신을 힐난했다. 아무리 멍청하대도 정도란 게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무른 인간인 줄은 몰랐다. 세상모르는 대기업의 강아지라는 딱지가 싫었기 때문도 있지만, 자신은 천성적으로 혁신적인 활동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객기라고도 불리는 그런 성향 탓에 여러 일을 겪었다. 부정한 자들을 고발하고 온몸을 다 바쳐 굴렀다. 반대하는 여파가 극심해도 소신을 다하곤 했다. 그리고 그만큼 눈과 몸이 뜨여져있다고 여겼는데도……. 선담을 만난 이후로 대처하는 능력은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수준이었다.
선담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을 집을 급하게 알아본 뒤 연백진은 최은협을 고소했다. 제 아무리 백람이라도 동성강간으로 법원에 출두한다면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며 변호진은 반발했다. 연백진은 그럼 다른 걸 가져다 붙이라고 했다.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 새끼를 끌고 와서 피로 떡칠을 시켜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최은협을 폭행혐의로 지명수배 붙이려는 중요한 와중에 연지애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동생을 불러놓고 제대로 설명하려는 차에 지애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평소라면 동생을 달래주었을 법한 백진도 선담 때문에 온신경이 곤두선 차에 수면부족까지 겹쳐 분노가 터졌다.
‘그렇게 말하지 마! 전상목 팀장님이 도너가 그냥 쓰러져있던 거라고 했었어!’
‘연지애! 모자란 것처럼 굴지 좀 마라! 애가 지금 어떤 꼴이 됐는지 네가 알아!’
‘오빠야말로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람 모함하지 마! 도너는 오빠 소관이라고 꽁꽁 싸매놓고서 아빠하고 나 불러서 갑자기 고소한다는 둥 하는 이유가 뭔데!’
‘도너를 폭행했다고! 정신 못 차리겠냐! 네가 지금 어떤 놈한테 빠져서 바보처럼 구는지!’
‘그래, 그래서 오빠 뜻대로 EEC는 무너졌고 우리오빠도 없어졌어! 애당초 오빠가 도너를 EEC로 안 돌려보내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따위 도너 갈아 치워버려! 처신도 못하고 책임감도 없고 꾀병이나 부리고!’
더는 말이 안 통하겠다 싶어서 백진은 아버지를 보았다. 연의범은 누구 말이 옳은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그는 씩씩대는 막내와 한숨 돌리는 넷째아들 사이에서 갈등하더니 지애가 ‘짜증나 죽겠어! 거지같아!’라고 소리치는 순간 그녀를 내보냈다. 오빠에게는 성질을 버럭버럭 내도 아버지 앞은 다른지라 지애는 불만 가득한 눈초리를 지어보일지언정 시키는 대로 자리를 떠야했다.
‘백진아, 도너가 많이 다쳤냐?’
‘……그렇습니다.’
‘얼마나? 정말 그날 우리가 미팅에 들어갔을 때 다친 거냐? 그래서 네가 계속 데리고 있을 거냐?’
‘영원히 제가 데리고 있을 겁니다.’
연의범은 아들의 ‘영원히’라는 말에 숨어있는 연정의 뜻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저번부터 도너를 감쌌던 놈인데다 평소에도 이런 일에ㅡ그러니까 연의범은 하찮게 느끼는 인권문제 따위에ㅡ혈안일 때가 있는 놈이라 여상하게 여겨 흘려들었다. 어찌되었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말이다. 연의범은 잠시 미간을 짚었다 되물었다.
‘그럼 EEC는 정말 사라지게 되는 거구나. 다시 단체를 세우더라도 시간이 걸릴 텐데 그렇다면 우리 지애는…’
‘아버지, 지애의 장애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희생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EEC는 그동안 너무 멀리 왔습니다. 비공개 단체라는 이름하에 너무 무자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도너가 죽어가고 있잖습니까.’
‘……….’
연의범은 입을 다물었다. 연백진은 아버지의 침묵이 끝을 보이길 기다렸다. 어쩌면 막내에게 ‘장애’라는 단어 따위를 붙여서 그가 진노할지도 몰랐다. 허나 멈출 수는 없었다. 최은협이란 인간은…… 맨 정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단 자신의 발목을 옭아매는 가정사부터 처리해야 했다. 연지애의 등살에 휘둘리고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그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간단히 생각했다가 지금까지도 매 쥐어터지지 않았는가. 백진은 선담을 만난 후로 당하기도 참 많이 당했지만 아버지께도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일이 늘었다고 한숨지으며 그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제발, 아버지, 막내 좀 묶어두시고 인공자궁에 대해서는 여유를 갖고 생각해주십시오.’
‘……….’
‘아버지…… 부탁드립니다.’
연의범의 침묵은 길었다. 허나 아주 부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워낙에 아이에 욕심이 많고 대가족을 원하는 연의범으로서는, 아니, 그 전에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침묵이었다. 셋째누님이 불임판정을 받았을 때도 매형보다 더 나서서 그녀의 상태를 부정했던 아버지였다. 그는 막내마저 포기할 수 없어 필사적으로 EEC의 후원회 기금을 사들였을 것이다.
백진은 초조했다. 부디 아버지가 너그러운 처사를 내려주길 원했다. 그의 한마디면 연지애도 끽소리 못할 테고, 이미 집을 구해놓은 자신은 선담을 보살피며 최은협을 쫓을 수 있었다. 마음은 이렇게나 급한데 상대가 뜸을 들이자 백진은 맥이 빠져서 더는 부탁한다는 말도 접어버리고 처결을 기다렸다. 한참 고민하던 연의범은 결국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네 깃발을 뽑아들마. 대신에 너 쏙 빼닮은 토끼 같은 손주나 보여줘. 약속이다.’
“……….”
방안은 조용했다. 백진은 간이초음파기로 선담을 진찰하는 인표를 지켜보며 요새 들어 점점 병든 닭처럼 픽픽 쓰러져 깊게 잠드는 선담을 떠올렸다. 그렇게 침대에 누우면 열도 펄펄 끓고 헛소리까지 했다. 그리고 이틀 전…… 갑작스럽게 토악질을 하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고 서인표를 불렀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유 없는 구역질은 입덧일 확률이 높았다. 어쩐지 결과가 눈에 보였다.
때마침 서인표가 허리를 일으켰다. 생각에 잠겨있던 백진은 반사적으로 “어때.”하고 물었다. 서인표는 고개를 저었다.
“토기는 어제부터?”
“엊그제.”
“왜 그런지를 모르겠네.”
“……뭐?”
인표는 대답 없이 차곡차곡 기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망설이더니 그것을 사이드테이블 옆에 밀어두었다.
“앞으로 종종 들려야할 것 같으니까 짐은 여기다 둘게. 서비스다.”
“제대로 설명해봐.”
“뱃속에 작은 씨앗 같은 게 있는데 자라지를 않는 것 같아.”
“씨앗…….”
“그래, 씨앗. 아무래도 수란관에 붙어있는 난소에서 정자를 만난 것 같은데,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멈추어 있거든. 수정을 해서 자라기 직전에 정폐되거나, 그런 거지. 종종 있어, 이런 경우가. 모체의 몸에서 수정을 거부하는 거지. 심적으로든 물적으로든.”
ㅡ모체의 몸에서 수정을 거부하는 거지.
백진의 얼굴이 얼룩졌다.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하지만 굳이 따져보면 웃음에 좀 더 가까운 그런 이상한 얼굴이었다. 인표는 아까부터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저 되다만 씨앗이 백진의 아이인건지, 그래서 기뻐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그게 아니면 도너로서 수정에 실패한 건지, 그럼 또 슬퍼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백진의 저 미묘한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건지. 원래 호탕하고 시원하던 사람이 침묵하면 그게 또 어려우니 말이다. 인표는 백진의 눈치를 살피다 내뱉었다.
“저러고 있는지 7주쯤 됐다. ‘착상이폐정지(着床而廢停止 implanta-tion interrupt)’이라고 하는 현상이야. 조만간 완벽하게 수정이 되거나 수정란이 파열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 거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인표는 자기 판단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번엔 보호자도 있고 원인도 아는 상태이지 않나.
“음, 1/10 확률이니만큼 고생 많았겠네. 어떤 종류의 수정이든 간에 수고했어. 그간 연락이 뜸해서 잘 몰랐는데 연구단체 도너 맞구나? 아까 기자들 얘기 들어보니까 연구가 잠깐 중단되었나본데 자세한 사정은 다음에 듣고,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도너가 건강하다. 체력이 좀 떨어져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지만. 음, 일단 OPC를 주입해서 임신을 촉진시키거나 해야겠어. 그게 아니면 소멸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OPC는 해외에서 주문해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리는데 내가 도와주지.”
“……….”
“그간 의리가 있으니 내가 자주 와서 봐줄게. 다만 이 애가 먹고 싶다는 건 네가 조달해라? 필요한 것도 슬슬 챙겨야 할 테고, 바빠지겠네.”
백진은 친근하게 말하는 인표를 멍하니 바라보다 얼결에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머문 자리엔 지친 듯 잠들어있는 홍선담이 있었다. 서인표의 말인즉, 간신히 홍선담의 뜻에 의해서 수정을 막아내고 있단 소리였다.
녀석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평온한 얼굴 저편에 강대한 의지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놈의 정자가 홍선담의 몸을 단 한번에 꿰뚫고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헌데 그것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약해빠져서 만날 울어대기만 하던 녀석이 말이다.
홍선담이, 다른 놈의 아이를 배기 직전이다. 헌데 그걸 녀석이 거부하고 있다. 억지로 벌어진 몸안에 쏟아 부운 맹렬한 씨앗과 한사코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서인표에게서 떨어질 결과에 대비해 수없이 각오했지만 역시 기분이 묘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걸 감격이라고 외쳐야 할지, 안쓰럽다고 울어야 할지, 도저히 다음 행동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서인표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마도 굳은 각오 이면에는 설마설마 하는 간절한 마음이 숨어있었으리라. 그래서 긴장이 탁 풀리니 이리도 묘한 것이다. 몹시도 걱정했는데. 다시는 웃는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될까봐 얼마나ㅡ….
“그렇군…….”
백진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다행이다.’라고 붙이려던 걸 그만 두고 그는 허리를 굽혀 선담의 이마에 입술을 부딪쳤다.
“지워줘.”
백진의 행동을 멍청하게 지켜보던 인표가 인상을 썼다.
“뭐?”
“당장 떼 달라고.”
“백진아!”
“제대로 자라지 못할 때 지워야 녀석 몸에도 좋을,”
“연백진!”
거의 명령 가까이 하던 백진이 고개를 들자 인표는 몹시 당황스런 얼굴로 그를 질타했다.
“야 임마! 너 갑자기 왜 그래?! 다짜고짜 애를 떼어놓으라니! 이 아이 의사는 확인한 거야? 생명의 소중함 어쩌고 하던 새끼가 이래도 되는 거야?”
“형이야말로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녀석도 바라지 않는 일이라 저렇게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거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무리 씨앗이라도 소중한 생……!”
앞뒤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인표가 백진을 크게 나무라던 도중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백진의 눈동자가 지독하리만치 사납게 치켜 뜨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 허파가 목구멍으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갑갑한 분위기였다.
“배, 백진……”
인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자신이 옳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다만, 백진 또한 누구보다도 아이를 좋아하는데다 이런 인권문제에 관심이 지대했고, 건방지긴 했어도 위아래를 구분할 줄 아는 놈이었는데 반응이 너무 살벌해서 잠시 말을 멈춘 것이었다. 작년 겨울, 멀쩡한 사내애의 장기를 죄다 밀어내고 짓누른 자궁을 갈라냈던 인표에게도 그날의 기억은 쓰디썼다. 때문에 아이를 지워내라는 말에 지레 놀라 소리쳤을 뿐인데도 백진의 태도에는 배려라는 게 없었다.
자신보다 연배가 낮은 후배 앞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는 선배를 한참동안 겨눠보던 백진은 문득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미안.”
“……….”
“요즘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 맘에 두지 마, 인표 형.”
“아니, 나는, 그러니까 백진…”
“형 말대로 이 녀석 의사도 물어보고 연락 줄게. 그래봤자 중절일 테지만. 약 마련해줘, 최상급으로. 몸에 조금이라도 무리 안 가게.”
뭐가 네 정신을 쏙 빼갔냐고 물으려던 차에 말이 뚝 잘린 인표는 차라리 백진과 저 아이가 둘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앞섰다. 한두 살짜리 어린애들도 아니니 말이다. 그는 손을 어디에 둘 줄 몰라 허둥거리며 물었다.
“그럼,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궁금하다거나…”
“저 씨앗이 자연 소멸할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그렇지. 착상만 한 상태로 멈춰있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자랄 수도 있고. 약물로 지울 수도 있고, 성장 시킬 수도 있고. 물론 힘이 좀 들겠지만.”
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사이드테이블의 수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삑ㅡ
“모셔다드려.”
인표는 얼떨떨한 상태로 빌라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호원들은 정중하게 그를 모셨다. 인표는 세단에 올라탔지만 머리는 온통 그 방안에 있었다. 정황을 알려주지 않으니 까닭은 몰라도 백진의 반응이 영 평소답지 못했다. 당장에 자궁을 닫아버리라니. 하긴ㅡ저 아이가 이제 도너가 아니라면ㅡ사내애가 임신을 한 것이니 어처구니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런 막연한 생각 쪽으로 완벽하게 마음이 기울지 않는 이유는, 백진이 그 아이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도 애틋했기 때문이었다. 꼭 아픈 제 임자를 돌보는 손길이었다. 인표는 묘한 기분이 들어 묵묵히 창밖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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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길호문은 하루에 10년씩 늙은 기분이었다. EEC는 잠정적으로 박살났고, 연백진은 언론은 물론이고 저희들에게조차 도너의 상태를 보고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싹 닫고 모든 걸 무시하자 별다른 힘이 없는 투자자들도 함구하는 분위기였다. 그 사이 백람의 지분은 60%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홍선담에게 수정시키겠다고 장담했던 최은협에게마저 도무지 연락이 닿질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을 벌인 지 벌써 2달이 넘었다. 동시에 최은협이 자취를 감춘 것도 그쯤 됐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도대체 홍선담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자신은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물론 문틈으로 얼핏 볼 수 있었던 낌새로는, 아니 그 이전부터 최은협이 풍겼던 위협적인 분위기로는 충분히 감 잡을 수 있었다. 그가 홍선담의 몸을 직접 열어서 그대로 수정을 감행했을 것이란 사실을. 물론 그것엔 자신도 찬성하는 바였고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최은협이 강경하게 홍선담을 잡아가두고 미친 짓을 해줘서 감사했다. 그가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뱃속에 싹이 트였을 텐데, 그런 도너를 생각하니 뛸 듯이 기뻤다. 다만 그 상황을 자신이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어서 아쉬울 뿐이었다.
[뚜, 뚜, 뚜, 뚜ㅡ]
길호문은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집밖의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다. 연백진에게는 먼저 연락하기 겸연쩍었고 연의범에게서도 연락이 없으니 먼저 하기가 꺼려졌다. 그나마 전상목이 간간히 안부를 전했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슬슬 죄책감을 느끼는 듯해서 통화를 하고 있으면 자기마저 괜스레 불편해졌다. 그럴 때마다 길호문은 마음을 추슬렀다.
저희들은 할 일은 한 것이라고. 애당초 PTA사의 수주를 받은 EEC에게는 잘못은 없잖은가? 도너도 그렇다. 언제 참여해달라고 사정했는가? 자신이 쫄래쫄래 쫓아와 실험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최은협과 특별한 관계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다만 그것이 구체화되기에는 연구가 고됐고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헌데 그렇게 계약까지 맺어놓고선 이제와 아프다 어쩐다 하면서 커다란 권력 뒤에 숨다니. 혼쭐이 나도 쌌다. 아니, 오히려 몸 안에 무가치하게 버려져있던 자궁에 새 씨앗을 뿌려주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일테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옳은 소리라고 자화자찬하며 길호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일까.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면서도 불안한 듯 몇번이나 자신을 다잡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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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사지가 꽁꽁 묶인 채였다. 옷은 끔찍하게 찢어져 있어서 자신의 치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리사이로 시리도록 찬바람이 들어왔다. 어떻게 해서든 이 불안정한 자세를 고치고 싶었으니 손발을 옥죈 매듭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홍선담, 약한 자는 섭취되고 강한 자는 포식한다는 말 기억하지.’
자신이 좋아했던 낮고 초솔한 목소리. 은협은 그렇게 속삭였다.
‘선배, 우리 이러지 말자.’
자신은 힘이 쭉 빠진 모습으로 애절하게 부탁했다. 얼마간 죽도록 반복된 이 상황이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묶여있을 때마다 부탁했다. 이러지 말자고. 그러면 은협은 그저 웃었다.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음성만 있을 뿐 실체는 없었다. 자신이 몇 번이나 부탁한 후에는 어김없이 침묵이 찾아왔다. 사방은 온통 어두웠다. 그렇게 검은 침묵을 참고 기다리면, 허벅지와 배에, 가슴께와 목덜미에, 그리고 회음 아래의 작은 틈으로 불쏘시개가 침투해 들어왔다.
너무도…… 너무도, 생생하게 아팠다…….
뱃속이 찢어지고 그 안으로 독액이 그득 차는 것 같았다. 멀쩡한 사람도 단번에 미치게 만들 고통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이 부릅뜬 눈이 시뻘겋게 광역됐다. 그 불쏘시개는 뾰족했다. 내장을 남김없이 파괴하고 다리사이를 자꾸 쑤시고 들었다. 조만간 입 밖으로 꼬챙이의 끝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찌나 깊게 들어오는지 창자가 뒤틀렸다. 고문같이 이어지는 삽입질에 선담은 사지가 찢겨 죽어가는 짐승마냥 온몸을 꼬고 흔들었다. 살려달라고 하면 그는 웃었고,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면 더 아프게 꼬챙이를 놀렸다. 그 고통은 선담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실신할 지경이 되면 점점 아득해졌다. 뱃속에 찬 독을 흘려보내려고 발악했지만 힘이 부족해서인지 소용없었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독액은 무언가를 만들었다.
핏덩이 같은 갓난아기를 말이다.
그러면 자신은, 그 새빨간 어린것을 제 뱃속에서 갈가리 뜯어냈다.
“……….”
선담은 잠들어있는 자신을 깨웠다. 아까부터 의식은 있었지만 꿈의 마지막 자락을 보기 위해 수면을 이어온 느낌이었다. 혹여나 꿈의 결말이 달라지기라도 했을까봐. 허나 눈을 뜨면 곧바로 느껴지는 무거운 몸뚱이는 꿈의 결말이 그대로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증명해주었다. 선담은 팔 한짝도 들 힘이 없어서 눈 안으로 들어오는 식은땀을 닦지 못했다. 그는 한참동안 심호흡을 해야 했다. 색종이처럼 잘린 네모난 햇빛이 침대 위 천정에 비치고 있었다. 손끝부터 꿈틀,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씩 어렵게 눈을 뜰 때면, 자신이 식물인간이 되어있진 않을까 몹시도 두려웠다. 고통에 저미고 저며서 육체가 드디어 운동을 정지하는 그런 것 말이다. 가뜩이나 쓸 만한 구석이 없는 자신이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면 그때는 은협은 말할 것도 없이 백진마저도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 일어날 리 없는 망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몹시 두려웠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낡은 침대에서, 번식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덩어리와 함께 서서히 말라죽는 것이다. 선담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힘주어 참았다.
지난겨울, 강제로 아이를 떼어냈을 때는 결국 혼자가 되었던 것이고 처음 당해보는 일에 소스라쳐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에는 자칫 잘못했다간 뱃속에 무언가가 들어앉아서 순식간에 한몸에 두 사람이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현실을 외면하기에는 자신을 바로 잡아주려는 백진의 힘이 강했다. 자신은 여러 의미로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그가 애석했고, 동시에 큰 힘이 됐다.
얼마간 숨을 고르자 차츰 몸에 힘이 돌아왔다. 선담은 옆자리를 보았다. 평소에 자신이 끙끙거리면 여상하게 백진이 흔들어 깨워주곤 했는데 많이 피곤한지 지금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집안 꼴이 엉망이었다. 분명 잠들 때만 해도 모든 물건이 잘 정리되어있었는데 거울도 깨져있고 테이블과 의자도 엎어져있었다. 가끔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풍경이 이렇게 되어있었다. 백진이 화를 주체 못하고 죄다 엎은 것이다. 선담은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백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 누구, 왔다 갔어요……?”
그제야 백진이 깊게 한숨을 뱉으며 팔베개를 해주었다.
“학교 선배. 너 보고 갔어.”
백진의 손등은 엉망이었다. 거울을 깰 때 다쳤는지 붉은 피딱지가 말라붙어있었다. 선담은 그런 백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렇게 맘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키스 한번 해주지 않았지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때 자신은 몸을 강탈당한 뒤 10분도 채 안 되서 발견됐었다. 다른 이의 흔적이 흥건한 채로. 그런 자신에게 선뜻 입을 맞추기에는 그가 입은 상처 또한 컸을 테다. 최은협의 광기를 당해내기엔 저희들은 너무 순진했다. 아니, 약해빠졌었다.
“나…… 아프대요……?”
백진은 “별것 아니래.”라고만 대꾸했다. 허나 별것 아닌 걸 이야기하는 사람표정이 좋지 않았다. 백진은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춰주었지만 메마르게 갈라졌을 그의 가슴을 충족시킬 순 없는 듯했다.
“네 뱃속에 자라지 않는 수정란이 있다고 하더라. 이유는 몰라도 착상을 않고 있대. 그래서 네가 마음만 정하면 약물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더라.”
마른 나무껍질처럼 굵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선담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백진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언젠가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은 알 수 있었다. 미묘하게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역시 그게 이거였구나.
“아저씨…….”
“응.”
선담은 백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별로 충격적인 이야기도 아니었다. 수정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관건은 오로지 그것이었으리라. 그래도 설마 그 한번에 덜컥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뱃속에 수정란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고 해도 존재하게 될 줄이야. 그때 삼켰던 알약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백진의 아이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삽입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뱃속에 튼 씨앗은 은협의 것이 확실했다. 울고 싶었다. 그때는 그토록이나 바랐던 아기였지만 지금은…….
선담은 힘없이 놓인 백진의 팔을 자신에게 두르게 했다. 임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제는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백진이 자신에게 질려하더라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화를 모면하고 싶었지만 그것에 실패했고 더욱이 뱃속에 들여선 안 될 것까지 들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백진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마냥 오냐오냐 예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무작정 그렇게 바라는 건 몹시 뻔뻔스럽다고 느껴졌다. 백진과 만나기 이전에 수정을 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남이 먹다 뱉은 걸 누가 반가워하며 주워가겠나……. 선담은 제 눈망울이 눈물로 출렁거린다는 사실도 잊고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아저씨. 제가 다 약해… 제가 다 약해서, 그래서…”
“네 잘못이 아니야.”
조용히 선담의 이야기를 들으려던 백진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말을 잘라버렸다. 겉으로는 약해보일지언정 숨어있는 의지는 엄청난 녀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몸의 뿌리부터 강한 녀석이라고. 강한 녀석이니까 다 완성된 수정란을 가지고서도 자신을 슬프게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거무죽죽해진 선담의 팔목과 목줄기를 쓰다듬었다.
“이런 상처를 달아놓고 약했다는 말은 말도 안 되지. 넌 잘못 없어.”
“하지만 아저씨… 저ㅡ…”
“미련스러운 생각하지 마. 이 정도로 흔들리는 일 없으니까.”
선담은 백진의 당부가 자신을 위한 것이기 전에,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서로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고.
백진은 선담에게 줄달아 키스하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델라 도나휴라는 여자 알아?”
“아뇨.”
“미국의 국회의원이야. 지금은 죽었지만. 고등학생 시절에 또래에게 윤간을 당했지. 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성장해서 결국 공화당의 국회의원석을 쟁취했어.”
“……대단해요.”
줄여 말하면 삶에 큰 화를 당했어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선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자신에게 베푸는 여러 위안 중 가장 현실감이 없었다.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은 위로였다. 어쩐지 마음이 휑해져서 선담은 주먹을 쥐었다. 허나 백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번은 공화당 국회의원끼리 모여 만찬을 벌였는데 그 중 어느 몰상식한 남자와 그녀가 논쟁을 벌이게 된 거지. 한참 국회를 주름잡는 그녀에겐 적이 많았고, 그래서 그녀가 어린 날에 겪은 상처가 몰래 뒷담화 거리로 돌아다니던 때였어. 약이 바짝 오른 남자의원은 사람들 앞에서 삿대질하며 소리친 거야. ‘윤간이나 당한 창녀 같은 계집년이 국회의원이나 한답시고 설쳐대니 나라꼴이 이런 거라고.’”
선담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 미약한 떨림이 백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백진은 선담의 삐죽 뻗친 머리칼을 쭉쭉 잡아당겼다.
“여기서 그녀가 공화당에 무성하게 떠돌던 소문을 단숨에 잠재운 명언을 내뱉지. 궁금해?”
“……네.”
선담은 망설임 없이 백진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주변이 잠잠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꽂혀들었어.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보수적이어서 그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지. 그런 관중 앞에서 델라 도나휴는 빙그레 웃었어. 그리고 말했대.”
“뭐라고요…?”
“Nothing can impair the dignity of a human being. The mortal existence is valuable just as it is.”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매끄럽게 속삭여주는 음성에서 선담은 안식을 읽을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강해져라, 꼬맹아. 여기서 무너지지 말고. 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돼.”
속눈썹에 맺혀있던 눈물이 한차례 뚝, 떨어졌다. 그러더니 방울지며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었다. 선담은 그것을 빠르게 닦아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기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울지 않는다.
아직은 뱃속의 아기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정해지지 않았다. 아직은 순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백진이 자신의 곁에 영원토록 머물러줄 것이라는 과한 욕심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에게 맡길 일이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도 알 수 없었다. 허나 그것들도 앞으로 천천히 정해나갈 일이었다.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토록 험한 일을 당해도 끝끝내 살아남았고, 그러니 행복해질 권리도 있었다. 어떤 결과가 자신을 덮치더라도 두 번 다시는 울지 않기로 했다.
백진은 품에 안겨 끙끙거리며 눈물을 숨기는 선담의 주먹을 폈다. 꼬옥 말고 있던 주먹은 처음엔 고집스러웠지만 백진이 자꾸 펼쳐보라고 부탁하자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백진은 반듯하게 접은 종이쪽지를 쥐어주었다. 선담은 빨개진 눈을 비비며 조용히 쪽지를 펴보았다. 매끄럽게 흘려 쓴 글자가 보였다. 글을 잘 읽지 못했지만 선담은 꿋꿋이 그것을 읊어 내려갔다.
『 The sexual assault is like a car accident.
Even though I've never wanted it to happen to me, it has. And it has no right to kill me. It was just an accident. I am alive like this and I haven't been frustrated in spite of the accident.
Nothing can impair the dignity of a human being.
Moreover, although I've had an accident, there is no reason what I become a scorn.
The mortal existence is valuable just as it is.
강간은 여느 교통사고와 같아요.
그것은 내게 일어난 일이지만 절대 내가 원해서 일어난 일도, 나를 죽일만한 일도 아니죠.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 뿐이에요. 난 이렇게 살아있고 사고를 당했다고 좌절하지 않았어요.
세상의 어떤 불행도 사람의 존엄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내가 멸시 받을 이유도 없어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겁니다. 』
ㅡ세상의 어떤 불행도 사람의 존엄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고작 스물둘의 나이에 다시 태어나야 하는 자신을, 그 비참한 기로에 서 있는 자신을, 조금이나마 위안해주는 마지막 문구였다. 오로지 그저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꿈꾸던 자신을 무참히 짓밟고 벼랑 끝에 세워버린 자들에게 향해야 할 마지막 문구.
아무리 각박한 삶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는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가장 큰 죄인이었다. 순진한 무지(無知)가 죄를 지은 것이다. 세상은 행복하게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시금 불타오르기를 기다리는 잔해뿐이었다.
선담은 눈을 감음으로써 세상과 자신을 차단했다. 그 소담한 모습을 백진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는 선담은 눈을 깊이 감은 채 조용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풍경 속에서도 선담만은 환하게 빛나 오르는 것 같다고, 백진은 그리 생각했다.
이윽고 선담은 눈을 감은 채로 그에게 속삭였다.
“아저씨.”
“응.”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겠다고 한 말, 아직도 유효해요?”
“물론.”
“그럼…… 부탁이 있어요.”
“말해 봐.”“……백람은 사람을 죽여도 그 죄를 무마할 수 있나요.”
백진은 침묵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으나, 그러나 선담은 까만 눈동자로 어느샌가 자신을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원죄(怨罪)를 무마시킬 순 없어도, 그 죄를 은폐할 수는 있지.”
선담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정연한 모습이었다.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홍선담 본연의 모습 같으면서도, 어쩐지 차분한 바람이 맴도는 모습이었다. 보는 이까지 묘해지는 그 모습에 백진이 눈을 떼지 못할 때, 선담은 한번 더 중얼거렸다.
“아저씨.”
“그래.”
“저요…… 조금 뻔뻔해져도 괜찮을까요…….”
백진은 웃었다.
“많이 뻔뻔해져도 돼. 이제 그만 참아라. 하고 싶은 대로 해. 넌 충분히 그래도 돼.”
선담은 깊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신중하게 끄덕였다. 잠시 눈가를 문지르다가 턱을 손으로 받치기도 하고 아주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백진은 선담이 시간을 끄는 만큼 어딘가 달라진 이야기가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맞아떨어졌다.
“사람들한테 EEC가 아닌 다른 곳에서 아저씨의 정자로 수정에 성공했다고 해주세요. 크게, 크게 퍼뜨려주세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요.”
- - - -
연백진이 집을 옮긴지 네 달이 되었다. 처음부터 5층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왔던 그인지라 빠져나갔다고 그 구멍이 크게 보인 것도 아니지만 연지애에겐 몹시도 거슬리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웬일로 자신의 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장 EEC로 도너를 옮기고 다시 실험을 재개하게 대달라고 사정사정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는 이야기만 받았다. 넷째오빠가 아버지를 꼬신 게 분명했다. 철없는 자식놈이 집을 나가산다는 둥, 손자도 안보여주는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둥해도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애정이 각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딸들에게 지극한 것과 아들들에게 믿음을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리라. 아들과 아버지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제 뜻대로 아버지가 움직여주지 않자 연지애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도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실험의 일환인데 왜 큰돈 들여가며 연구를 중단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자궁 따위엔 관심도 없었던 그녀이지만 EEC의 폐쇄 때문에 최은협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드니 속이 뒤틀렸다. 이게 다 아버지가 넷째오빠에게 손을 들어준 탓이었다. 그리고 넷째오빠는 그 어쭙잖은 도너가 꼬리를 쳤을 테다. 사내애 주제에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대충 감은 잡혔다. 코엑스에서만 보아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떠가지고서는 잠시 마주친 것만으로도 무슨 큰 피해자라도 되는 양 빌빌거리던 놈이었다. 분명 아픈 척이란 척은 혼자 다해가며 아이들에게 마음 약한 넷째오빠의 동정표를 샀을 테다. EEC 사람들이 실험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은혜도 모르고 남의 오라비를 꾀어내나 싶었다.
게다가 세달 전쯤에는 넷째오빠에 의해 백람의 비서진에 대대적인 물갈이가 행해져서 그간 정들었던 비서 몇이 그대로 딸려 사라졌다. 일개 민간인한테 밀리는 요원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자질을 엄중히 따지고 아닌 놈들은 걸러냈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 까놓고 말해서 ‘도너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물갈이가 이루어진 것이다. 새로 선출된 비서진은 소수였다. 넷째오빠는 예전처럼 비서직과 경호직을 겸비하는 무리는 필요 없다고 했다. 비서는 필요한 만큼만, 그 후에는 아예 전문적인 경호부대로 서열을 완전히 정립해놓았다. 지금까지는 비서가 곧 경호원이었는데. 적응이 안됐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언가?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인지 자다가도 분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
“짜증나.”
연지애는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사람을 풀어 최은협에 대해 수소문해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없었다. 하긴, 언제는 그 속을 알 수 있었나. 까딱하면 줄담배에 말도 얼마 없던 사람. 이런 상황이 오자 도대체 그 목석같은 남자의 어디에 반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실험군이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게다가 늘상 묘하게 도너의 편만 들어주던 남자였다. 도너란 이유만으로 최은협에게는 물론이고 연백진에게까지 권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질투심 이전의 묘한 흥분상태가 그녀를 덮쳤다. 지애는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실내복을 벗고 옷장에서 가장 아끼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긴 웨이브 머리는 그대로 어깨까지 흘러내린 뒤 기초화장부터 색조화장까지 세심하게 끝마쳤다. 그 후에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완벽했다. 형제가 그러하듯 그녀 또한 상당한 장신에 제대로 된 미녀였다. 선담을 단번에 제압했던 태생의 품격이 최상의 모습으로 자르르 흘렀다.
“짜증나….”
그녀가 단축번호를 꾸욱 누르자 곧바로 원하는 사람에게 연결됐다.
-
백진은 갑작스런 동생의 방문에 탐탁찮은 얼굴이었다. 보안문을 열어주고 얼마 뒤 또각또각 들어오는 그녀의 하이힐 굽 소리가 워낙에 당당하여 괜한 신경질이 일 정도였다.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는 007가방을 들고선 단정한 모습으로 현관에 서있었다. 일전에 아버지 앞에서 크게 다툰 적이 있으니 감정이 좋지만은 못하여 백진은 팔짱을 꼈다.
“웬일이냐.”
“왜? 나는 뭐, 여기 오면 안 돼?”
“괜한 트집 잡을 거면 나가. 짜증나.”
“오빠!”
“시끄러워.”
집안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지애는 백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입장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고급형 빌라는 그렇다 쳐도 제 오라비가ㅡ아마도 도너를 위해ㅡ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뭐하는 거야?”
“닭도리탕.”
“오빠가 요리도 할 줄 알아?”
“당연하지.”
“내 말은, 남을 위해서 할 줄 아느냐는 거야.”
“보면 몰라?”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심하게 다툰 뒤에 한동안 연락도 안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늘 서글서글한 넷째오빠가 이런 적이 없어서 지애는 심보가 좋지 못했다. 그녀는 007가방을 옆에 낀 채 테이블을 두드렸다.
“은협오빠한테서 연락 없었어?”
“나한테 연락을 왜 해. 너 아직도 그놈 기다려?”
“당연하지.”
“미쳤구나.”
“뭐?”
“나잇값 좀 해라.”
발끈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녀 성격에 쉽지 않았다.
“오빠, 나도 스물여섯이야. 내 나잇값 내가 알아서 매겨. 오빠야말로 아빠 대신 위원장 자리 받았으면 제대로 운영할 줄 알아야지. 오빠 나잇값은 얼만데 이러고 있어? 서른둘 아니야?”
결국 백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입 아프게 더는 잔소리 안한다. 연지애, 네 말대로 네가 스물여섯이라 제구실 할 줄 알면 어디 한번 그놈 기다려봐. 그놈이 널 사랑하는지부터 똑바로 보라고. 사랑한다는 여자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4달간 소식이 없어? 그놈이 애당초 널 사랑이나 했을 것 같냐?”
“말 막하지 마.”
“막말 듣기 싫으면 나가. 생각이라도 바뀐 줄 알고 오라고 했더니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 미친놈 어디 있는지 묻는 게 다냐?”
“오빠! 정말 왜 그래!”
“시끄럽다고 했다.”
대화가 원만하지 않자 방 안에서 태평스럽게 제 안부나 챙기고 있을 도너에게 괜한 화가 부풀었다. 그저 말문을 트여보려고 꺼냈던 안부인데 여기서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도너부터 봐야했다. 도대체 뭘 얼마나 다쳐서 연백진이 이렇게 감싸고도는지부터 확인하고, 할 말도 있었다.
지애는 백진이 손에 얇은 붕대를 감은 것을 보고서도 무시했다.
“도너는 어딨어?”
“도너라고 부르지 마. 예쁜 이름 있다.”
날카로워진 신경 탓에 백진의 모든 말이 죄다 거슬렸다. 그녀는 비아냥거리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백진이 그녀를 주시했다.
“뭐하게.”
“애당초 홍선담 보려고 왔어.”
“기다려. 같이 들어가.”
“오빠, 진짜 미쳤어?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서 그래?”
백진은 지애의 째지는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제멋대로고 어린 동생이지만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도 몹시 피곤했기에 백진은 한숨을 쉬었다. 애당초 부르지 말걸 그랬다.
“네가 무슨 짓을 한다기보다는 애가 많이 약해져 있으니 무심코 뱉은 말에 상처라도 받을까봐 한 소리다. 녀석 앞에서 말조심해.”
“어련하시겠어. 짜증나.”
“연지애.”
“아, 알았다고!”
백진은 저게 스물여섯이라니 참 안됐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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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잠에서 깬 선담은 침대 위에 어질러져 있는 그림책을 습관적으로 펼쳤다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주의했다. 격양된 여자의 목소리.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백진의 목소리가 함께 들리고 있으니 걱정되지 않았다. 선담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때였다.
달칵ㅡ
“안에 있니?”
웅성웅성한 소리가 아닌 단독된 목소리를 또렷이 들으니 그것이 연지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담은 부스스한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대조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화려했다. 선담은 그녀를 보고 똑바로 앉아 꾸벅, 목인사를 했다. 지애도 반달같이 곱게 휜 눈으로 웃음을 치며 다가와 의자를 빼들고 앉았다. 그녀는 환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많이 두들겨 맞았다고 해서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하긴, 벌써 4달이나 지난 일이니.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괜찮아요.”
“으응… 별로 걱정한 건 아니고.”
지애의 이런 말투는 옛적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담도 별 반응은 없었다. 예전부터 그녀가 자신을 탐탁찮게 여겼다는 것쯤을 알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남자가 이렇게 배가 불러있으니까 진짜 신기하네?’
그리고 자신을 인간이 아닌 실험체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선담이 씁쓸히 웃기만 하자 지애는 서둘러 챙겨온 007가방을 그의 무릎에 올려주었다.
“열어봐.”
“뭐죠.”
연백진은 물론이고 홍선담의 말투도 하나하나가 죄다 거슬릴 그녀는 재깍 열어보지 않고 되묻는 그에게 신경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저 미소만 지어 보냈다. 예전의 홍선담 같으면 넙쭉 받아서 서둘러 시키는 대로 열어보았을 거란 자각 따위도 없었다.
“열어봐. 네가 본 다음에 얘기 할게.”
달칵, 달칵, 달칵ㅡ
자물쇠를 하나하나 신중하게 해체한 선담은 눈앞에 드러난 두툼한 오만원권 지폐다발에 눈을 떼지 못했다. 1만원도 아닌 5만원권 지폐가 중형크기의 007가방에 빼곡히 자리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보지도 못할 액수의 현금. 지애는 잠시 멍해진 선담을 보고 살갑게 웃었다.
“몸 아픈 것도 추스르고 슬슬 독립하려면 이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마련해봤어. 너 때문에 나 적금 깼다?”
“……….”
“이제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은데. 네가 EEC가 들어가 있어야 은협오빠도 정신 차리고 연구에 매진할 테고, 우리 백진오빠도 자기 일상 되찾을 거 아니니? 우리오빠 소아과 의사였던 거 알지? 옛날에 한번 사고가 있었는데…… 그래도 백람병원에 다시 들어오려면 들어올 수 있어. 근데 지금 너 때문에 복귀 못하고 있는 거야. 알고 있어?”
“……….”
선담의 침묵에 그녀는 숫접게 웃었다.
“이러니까 꼭 드라마 같다. 왜, 못된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들 떼어놓을 때 이렇게 하잖아. 내가 그런 심보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지? 어서 챙겨 넣어. 그간 고생 좀 한 거 같으니까 내가 직접 보여주는 성의야. 너 때문에 우리 은협오빠도 열성적이었던 것 같아서.”
“……….”
“너한텐 놀랄 액수여도 나한텐 별 거 아니니까 마음 쓸 필요 없어. 어서 네가 EEC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치?”
선담은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그녀가 기대했던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황송한 처사에 감사한 기미도 없었고 놀라는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필요 없습니다. 도로 가져가세요.”
선담은 자물쇠를 열었던 과정을 그대로 되밟아 그녀에게 007가방을 다소 거칠게 안겨주었다.
“EEC로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차피 해산을 앞둔 조직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딱딱하고 건성인 말투. 지애는 그만 선담의 뺨을 날릴 뻔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선담의 눈초리가 볼썽사납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도, 남자도, 지금껏 자신의 기세에 눌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실험체나 하다가 골골거리는 불쌍한 것한테 목돈을 쥐어주는데도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잔뜩 담아놓았던 지애가 점점 격양된 목소리로 그에게 따져 물었다.
“너 지금 내가 하는 말 잘 못 알아듣겠나 본데, 나 부탁하는 거 아니야. 명령하는 건데 그간 정도 있고 하니까 좋은 것 좀 딸려 보내주는 거거든?”
선담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돈다발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는데 제가 왜요?”
“뭐? 더 좋은 사람, 뭐라고?”
“최은협 선배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EEC로 복귀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나본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괜한 고생마세요.”
지애는 말을 잃었다. 그녀가 성북동의 본가에서 빠져나와 이곳까지 차로 달려오면서 계획했던 전개와는 180도 어긋나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대항을 맞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겐 지독하게 낮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유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애가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선담은 절대 그녀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어쩐지 무시당하는 것도 같아 입 한쪽이 경련했다.
“그 사이에 무슨 결심을 했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닌데 주제 좀 알지? 너 내가 이대로 아버지한테 가서 얘기하면 지금 한 말 금방 후회할 걸. 너 때문에 지금 피해 입는 사람들 좀 생각해줄래? 은협오빠는 나가버리고, 우리오빠도 네 시중이나 들고 있고, EEC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너 때문에 바닥에 나앉아야 되는데?”
“……….”
“보자보자 하니까, 너 처음 본 날부터 애가 좀 뺀질대더라. 팀장님 앞에서 갑자기 아프다고 엄살 부리더니 그 다음엔 기형아도 못 지우겠다고 하도 난리를 부려서 실험은 차질 빚고, 그게 뭐야? 그래놓고서 수정 한번 성공했었다고 지금 유세해? 지 때문에 EEC 해체되게 생겼는데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어떻게 인격체로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저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선담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동시에 전의를 상실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절대 울지 않고 아프지도 않겠다고 한 다짐과, 스스로를 지켜나가겠다고 맺은 맹세가 독사 같은 말에 금세 녹아내리려고 한 순간이었다.
선담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이깟 돈 때문에 남자한테 이용이나 당한 주제면 자각이라도 있어야지. 당신도 뻔뻔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뻐억!!!
007가방의 널찍한 면이 그대로 선담의 옆통수를 날렸다. 선담은 그대로 엎어졌다. 순식간에 코피가 터져 하얀 시트를 적셨다.
“너 지금 우리오빠가 돌봐주고 EEC도 해체될 거 같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 누가 이용을 당해? 이게 도너라고 유세떨면서 억지 부리는 것도 하루이… 꺄악!!!”
짜악ㅡ!!!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선담이 그대로 지애의 뺨을 격타했다. 아무리 부드러운 손바닥이여도 일단 완력은 그녀보다 매웠다. 고개가 확 돌아간 지애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을 때 선담이 조소했다.
“저도 남자거든요. 서로 때려서 손해 보는 건 당신이고요.”
“뭐, 이런 거지같은 게 다 있,”
선담은 빠르게 날아오는 손을 휘어잡았다. 그리고는 서슬 퍼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주먹 피하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손 안 놔? 나 뺨 부은 거 보면 너 우리오빠가 가만 안둘 거야!”
어이없다는 얼굴로 선담이 대꾸했다.
“아저씨가 내 코피 보면 당신이야 말로 곤란할 테니까 된통 혼나기 전에 조용히 나가시죠.”
“뭐?”
“아저씨가 날 얼마나 위해주는데. 당신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될걸요.”
지애가 넋을 놓자 선담은 조용히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그녀의 미려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허나 선담의 눈에는 그녀가 흉측하게 보였다. 미간을 한껏 찡그리고 눈을 저렇게 부라리면 경국지색의 미녀도 다 똑같이 흉한 것이다.
“……너 뭐야, 너 동성애자구나?”
“……….”
선담이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상에…… 더러운 호모새끼. 우리오빠를……? 야, 너 자궁붙이니까 네가 여잔 줄 알아? 네가 여자냐고! 세상에…… 더러워 죽겠어. 이게 지금 보니까 완전 더럽다 못해 쓰레기네?”
선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신은 그 더러운 호모한테 사랑도 못 받아서 괜한 데 화풀이하는 주제에 뭐가 잘났어!”
“뭐라는 거야! 누가 호모야! 미친 거 아…”
“무슨 짓들이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연백진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제야 지애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서운 얼굴을 한 그를 보자마자 결코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너무 당혹한 마음에 연지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 오빠……”
동생의 머리가 엉망이 된 것을 보고 백진은 선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선담의 코주변에 새카만 피가 덮인 것을 보고 벽력같이 고함쳤다.
“연지애!!!”
백진은 성큼성큼 걸어와 선담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들고 온 007가방을 곧바로 열었다. 백진이 열었을 때에도 5만원권들은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대번 파악되는 상황이었다. 백진은 기가 막혀 그녀를 노려보았다.
“연지애, 이 가방 뭐야. 네가 얘한테 돈을 왜 주는데.”
“오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 도너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 완전 헤픈 여자 취급했다고!”
“무슨 소리를 했어도 애를 때리는 게 말이 돼! 너보다 4살이나 어린 애다! 멍청아!”
“나도 맞았잖아! 오빠는 동생이 맞은 건 안보이냐고!!!”
선담은 아무 말 않고 코피를 손등으로 슥 닦아냈다. 정면으로 세게 맞기는 했다. 피가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백진은 악을 쓰며 울먹거리는 동생을 쳐다보다가 선담의 고개를 들게 했다.
“철이 없어도 약은 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연지애, 너 진짜 더럽게 놀 거냐? 지금 저 돈 가지고 무슨 소리 했어?”
“EEC로 돌아가라고 했어! 그게 뭐가 더러워! 오빠 미쳤어?! 지금 은협오빠 안 돌아온 것도, 오빠 나한테 이러는 것도, 다 얘 탓이잖아! 아빠는 오빠편만 들고! 나 진짜 요즘 죽을 거 같다고!”
“할 말이 없다. 추하게 굴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오빠!”
“말 들어!!!”
백진의 고함이 얼마나 큰지 덤벼들려던 지애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백진은 선담의 이마를 짚어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요새 너 정신줄 놓고 다니는 건 알겠는데 제발 철 좀 들어라. 애꿎은 데다 왜 네가 성질인데? 누가 너 이러라고 문 열어준 줄 알아? 애 때리고 돈 던지라고 문 열어준 줄 아느냐고.”
“오빠, 정신 좀 차려! 내가 괜히 때렸겠어? 뭐가 그렇게 중해서 여동생한테까지 이래? 나는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쟤가 얼마나 재수 없게 굴었는지 알아?! 왜 내 탓만 하냐고!”
백진은 거의 들은척 만척하며 선담의 얼굴을 물티슈로 닦아내었다.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딱해 보여 선담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저렇게 역정을 내고 펄펄 뛰는 게 이해는 갔다. 얼마나 약이 오르고 분통이 터지겠는가. 좋아 죽는다고 쫓아다니는 남자는 행방불명에 EEC가 문을 열면 임자가 돌아올 것 같긴 한데 그 도너가 뇌물은 거들떠도 안보니. 게다가 혈육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가.
“이 녀석이 먼저 그랬을 리는 없어. 어쨌든 가만히 있는 애한테 네가 찾아온 거고 먼저 때린 것도 너일 테니까 빨리 퇴장해.”
“오빠, 지금 바보같이 이용당하는 거잖아! 저거 호모인 건 알아?!”
백진의 세심한 손길이 뚝 멈췄다. 선담은 백진의 팔을 꽉 잡았다. 이제는 이런데서 멍청하게 당하고 있기 싫었다. 더군다나 전혀 그런 맘이 아닌데 타인의 망발로 오해를 받기는 더더욱 사양이었다.
“아저씨, 저 아저씨 이용한 적 없어요. 그럴 생각도 없어요.”
지애는 선담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선담의 일련의 행동이 죄다 눈엣가시로 보일 것이었다. 허나 이미 늦었다. 선담은 오해 받는 것도, 고통 받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하나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불여우같이 보일지라도 자신만 떳떳하면 되었다. 백진 또한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되었다.
선담이 간절하게 올려다보며 이야기하자 백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피곤이 묻어난 얼굴로 동생에게 말했다.
“이유가 뭐든 간에 너 억울한 건 알겠는데 그냥 가라.”
“오빠 정말……! 아빠한테 다 말할 거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애써 그걸 감추고 말했다가, 지애는 되돌아오는 백진의 대꾸에 더 크게 놀랐다.
“이제 나에게 1등은 무조건 이 녀석이야. 깍듯이 해라. 싸가지 없게 굴지 말고.”
“……뭐?”
“또 이러면 다신 안 봐준다고. 똑같이 맞을 줄 알아.”
“뭐?”
“됐다, 가서 머리나 식혀.”
백진은 지애의 007가방을 챙겨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대 쥐어박아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이미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듯한 그녀에게 굳이 더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자기편이 없는 상황이야말로 그녀에겐 놀라 기절할 일이었을 테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지애를 지켜보던 선담이 곧바로 그녀를 쫓아갔다. 그는 백진까지 뒤로 물러서게 하고 그녀를 쫓아 현관까지 나갔다.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그녀는 독기품은 눈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오빠가 잠깐 네편 좀 들어줬다고 나대다가 크게 다칠 거야. 호모새끼… 나가죽어 버려.”
마지막 할 말이 있어 쫓아왔던 선담은 그녀의 머리칼을 인정사정없이 확 잡아당겼다. 지애가 거칠게 기우뚱거리며 그에게 딸려갔다.
“악!”
“당신이야말로 나 우습게 알고 까불다간 다쳐요.”
“……! 뭐, 뭐 이런 게……!”
“전 당신 같은 것들은 견디지도 못했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인간이에요. 더는 무서울 게 없어요. 솔직히 당신 따위는 우습습니다.”
“이거 안 놔, 이거……!”
선담은 버둥거리는 그녀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혹시 최은협한테 연락 오면 제가 아저씨 애기 품었다고 말해요. 알아듣겠어요?”
선담이 지애의 머리를 툭 놔주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까만 눈동자가 무서우리만치 퍼렇게 빛나며 자신을 겨누어보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제 열을 삭히지도 못하고 다시 덤비지도 못한 채 비서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문이 쾅 닫히자마자 백진이 다가왔다. 선담은 그제야 자신의 양 손을 맞잡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남에게 거짓말을 해본 적도, 이렇게 표독스럽게 굴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끝이 차가웠고 심장이 뛰었다. 아까 맞았던 머리도 어찔어찔한 것 같았다. 폭행은 당하는 사람에게도 충격이지만 저지르는 인간에게도 충격이란 걸 문득 깨달았다. 각자 닥쳐오는 충격을 누가 더 빠르게 완화시키느냐가 승리의 관건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에겐 아직 그런 요령이 없었기 때문에 몸이 쉽게 더 떨어오는 듯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잔인하게 후벼 파려는 그녀가 추해보였다. 그녀에게 모질게 대항한 것은, 더는 숨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도 있었다.
“꼬맹아.”
그래도 역시 심적으로 좋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지만 아직 자신에겐 익숙지 않은 구호 같았다. 미묘하게 진동하듯 떠는 선담을 지켜보던 백진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미안. 동생이 철이 없다.”
“괜찮아요. 저도 똑같이 때렸으니까. ……아저씨야말로 곤란한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혼날 일은 혼나야 되는 거고. 우리 형들도 죄다 형수님 편들어. 자기 사람 챙겨야지.”
혼날 일은 혼나야 한다. 백진의 대답은 그것이었다. 선담은 자신의 홀쭉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뱃속에 고여 있는 핏덩어리는 16주 내내 움직임이 없었다. 거짓의 상징이 되었을지언정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서인표라는 남자는 엊그제도 방문해서 여전히 수정란이 살아는 있으나 착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약물로 없앨 수 있으니 결정하려면 빨리 하라고, 이게 남아있으면 다시 수정하기가 힘든데 왜 그리 시간을 끄냐고. 또한 이런 씨앗은 생명으로 보기 어려우니 죄책감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백진도 제대로 된 결단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자신은 제대로 마음을 정하지 못해 심란한 문제였다. 과정과 계기를 따지자면 당장에 뜯어내야 할 덩어리여도 몸에 붙어있는 걸 함부로 잡아 뜯기엔 두려움이 남았다.
허나 분명한 건, 전처럼 뱃속의 존재가 마냥 사랑스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겐 애정을 샘솟게 하는 기능이 없었다. 아니,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 뱃속의 아이를 보고 싶다는 욕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글픈 일이었다.
“얼굴 엉망이다. 가서 세수하자.”
선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진을 따라 연지애의 분냄새가 남아있는 현관에서 벗어났다.
-
“정말이냐?!”
백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아버지의 물음에 답했다. 연의범은 금방이라도 소파에서 뛰어오를 듯이 대소하며 손뼉을 쳤다.
“인석아! 나는 네가 할 때는 할 줄 알았다! 그동안 애비 무시하고 멋대로 굴더니 이제 좀 철이 들었구나. 그래, 몇 개월이라고?”
백진은 묵묵히 7주라고 대답했다. 물론 거짓이었다. 하지만 연의범은 칭찬 받은 물개마냥 몹시도 기뻐했다. 그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퍽 안쓰러운 마음을 느꼈다. 남성모체와 인공자궁에 의한 태아가 정말 특별한 이유도 있겠지마는 어쩜 저렇게 자식욕심이 많은가 싶어서였다. 하긴, 백람이 인공자궁 센터를 인계하면서 빛을 봤다고 하면 학계 등에 좋은 이미지 거리가 될 것이니 여러모로 득이 많기는 많았다.
“내가 가서 좀 볼 수 있겠냐?”
“녀석이 낯을 많이 가려서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안정을 취해야 좋지. 난중에 애가 좋아하는 것 좀 적어서 보내라. 미리 점수를 따놔야겠어.”
남성에게서 난 태아라서 막상 수정에 성공했다고 하면 탐탁찮게 여길 줄 알았던 연의범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저것이 오로지 곧 손자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아이를 빌미로 주목을 받을 미래를 기대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백진은 아버지가 한참 신나하게 내버려두었다가 본래 목적을 전하기로 했다.
“EEC가 아닌 다른 단체를 설립하는 대로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릴 계획입니다. 저보다는 아버지 입김이 훨씬 세니 먼저 나서주십시오. 그 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움직이겠습니다.”
“그 전에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다. EEC가 한동안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수정이 가능했던 거냐?”
당연한 질문. 백진은 준비해온 대로 대답했다.
“……예전에 EEC에서 녀석을 데리고 나오기 바로 직전에 사실 수정이 임박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다만 착상에 성공하지 못한 채 몸안에 머물러 있었던 거고요. 연줄을 통해 진료를 받았는데 착상이폐정침이라고, 간혹 가다 있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7주전에 착상에도 성공했다고 합니다.”
말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홍선담을 EEC에서 빼내온 것이 벌써 언제적인데. 아무리 이폐정침이니 뭐니 해도 그 긴 시간동안 방치되어있던 덩어리가 착상을 성공 지었을 리는 만무했다. 약물의 힘이 아니면 모를까. 허나 구체적인 변명이 제외되었어도 연의범은 이 방면엔 문외한이라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예전에도 유산을 한 전적이 있으니 태아의 상태를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앞일은 아무도 예상 못한다, 녀석아.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
백진은 고개를 저었다. 선담의 뱃속에 아이가 있든 말든 자신은 선담의 뜻대로 언론에 태아의 존재를 노출시켜야할 의무가 있었다. 뭐든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쯤은 당연했다. 녀석의 몸에 해롭다면 강제로라도 떼어내야 했지만, 어쩐지 점점 변모할 것 같은 녀석은 분명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뭐든 다 하게끔 도와주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깊은 쾌감을 충족할 수 있으리라. 백진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준비가 되면 제가 신호하겠습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공영방송국의 헤드라인으로 남성모체의 태아수정을 알려주십시오. 그 뒤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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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이 선담을 옮겨놓은 부촌의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신입비서는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가 아끼다 못해 아주 업고 다니는 홍선담이라는 아이가 자기도 차를 직접 운전해보고 싶다며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 보이는 얼굴로 어찌나 고집을 부리는지 하다못해 도련님이 오시걸랑 움직이자고 뜯어말려도 속수무책이었다. 자기는 무조건 운전을 해보고 싶단다. 핸들을 잡아보기 위해 태어났단다. 늘 조용하니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아이가 이렇게 매달리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끈질긴 20분. 결국 신입비서는 조심조심 선담을 끼고나와 공터로 향했다. 사실 면허가 없어도 배우면 또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이동수단이 승용차이기도 했다.
기왕 여기까지 나오게 된 거, 신입비서는 나중에 연백진에게 혼나게 되더라도 그때 되면 이 아이가 자기를 조금이라도 변호해주겠거니 하는 마음에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아이는 생각보다 운전을 빨리 익혔다.
“후진을 하시려면 기어를…”
“알아요. 이렇게요.”
“네, 맞습니다. 나중에는 기어는 안보고도 다루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하루에 2시간씩 저랑 여기 나와서 가르쳐주시면 안 되나요.”
예상치 못한 부탁에 신입비서가 몸을 뒤로 뺐다.
“예?”
그가 크게 당황하자 선담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ㅡ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운전면허증을 따려면 시험을 봐야한대요. 근데 전 글을 읽고 쓸 줄 잘 몰라서요.”
“하지만 면허 없이 운전하는 건 불법인데다 위험합니다. 도련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고요. 오늘 제가 이렇고 있는 것도 알면 큰일,”
“제가 잘 말씀해드릴게요.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하고 답답해서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차운전 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선담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바람에 비서는 절망했다. 왜 하필 오늘 당번이 걸려서 이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이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물세례를 받을 것 같았고, 운전을 계속 가르쳐주다가 아이가 실수라도 하는 날엔 불세례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 아저씨다.”
비서가 차창 밖을 보기도 전에 선담이 안전벨트를 풀고 달려 나갔다. 운동장 끝 놀이터에 정말로 연백진이 서 있었다.
“아저씨!”
비서는 곧 떨어질 불호령을 각오해 맘을 단단히 먹고 차에서 내렸다. 예전에 저 아이를 혼자 방치하는 실수를 저지른 선임비서 둘은 다시는 비서직에 손도 못 대는 형편으로 쫓겨났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소송에 휘말렸으나ㅡ당연하게도ㅡ최소금액으로 합의를 봤다고.
신입비서는 백진의 눈치를 살피다 문득 선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첫인상은 늘 침대에만 숨어있는 새하얀 아이였다. 평범한 또래보다 좀 더 연약해보이고, 뛰어난 미모는 아니어도 어쩐지 청완하고 소박한 느낌. 동시에 피죽 한그릇 못 얻어먹는 느낌이 다분했는데 요즘 들어서 다시 보니 한결 밝아지고 있었다. 비서들 소문으로는 어디 실험군에 있다가 넷째 도련님의 호의로 신세를 지는 아이라고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몰라도 어쨌든 연백진이 아이에게 각별한 것은 확실했다.
누구든 상대가 애지중지 아껴주면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그것도 저렇게 한창 어린 나이라면 더욱 더. 생판 처음 보는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애정을 받아 꽃을 피우는 모습이었다. 쭉 지켜보고 있으면 아이는 조용히 있다가도 종종 잘 웃었다. 특히 백진이 건네는 농담에는 늘 까르르 웃었다. 늦은 밤시간에 잠깐 방문해 서류 따위를 정리할 때에도 방안에서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언제부턴가는 연백진이 새로이 선택한 저희들 다섯 명의 비서에게도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기가 묻어나는 아이와 일상을 지내다보면 불현듯이 그들은 무언가를 느끼고 말았다. 아이의 눈에 깊게 녹아있는ㅡ…
광기(狂氣)를.
도저히 저 나이의 아이가 띄울 수 없는 어마어마한 흉포함이 눈동자 이면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불특정한 주변인에게 뻗어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속에서 다스려지는 또 하나의 성질 같은 것으로,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단단하게 굳어진 암석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모르고 지내다가도 아이와 자주 마주치다보면 느낄 수 있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겪어보지 못한 밑바닥을 경험한 냄새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빚어진 그 광기를 말이다. 가끔씩 밤하늘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서슬 퍼렇다는 묘사로는 부족한 기질이 도사렸고, 웬만한 성인도 위축하게 만들 어둠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아도 엄청나게 단단했고 거대했다.
“홍꼬맹, 설마 지금 네가 운전한 거냐?”
“아, 그러니까, 저도 운전 같은 거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음, 부탁드려봤어요. 심심해서….”
신입비서는 연백진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 홍선담을 주시했다.
아이가 간혹 보여주는 살기 띤 눈동자는 연백진 앞에서는 감쪽같이 사그라졌다. 연백진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거나 안아주면 히히 웃으며 그의 목덜미에 매달리는 아이였다. 언제 그랬냐싶게 사랑받는 한 사람의 연인으로 행복한 얼굴을 보였다. 저 어린 나이에 얼마나 모진 일을 겪었으면 저렇게 행복해하면서도 가끔씩 그런 눈을 뜰까 싶어서, 지켜보는 사람까지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아저씨, 저 여기서 운전연습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돼요?”
그제야 퍼뜩 신입비서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진의 시선도 함께 느껴져서 그는 사달 나겠다란 심정으로 그 앞에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누가 이 녀석 네 맘대로 데리고 나와도 좋다고 했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녀?”
“죄송합니다. 그게,”
“아저씨, 그냥 해보면 안돼요? 제가 졸라서 나온 건데.”
“안 돼, 위험해.”
“아저씨!”
“안 돼, 안 돼. 들어가자.”
선담은 신입비서에게 부렸던 황소고집을 백진에게도 여과 없이 발휘했다. 결국 손을 잡혀 질질 끌려가는 통에도 아랫입술이 대폭 튀어나와 있으니 백진이 한숨을 쉬었다.
“운전은 배워서 어디다 쓸려고. 내가 다 실어다 줄 텐데. 정 그러면 시험을 치자.”
“시험 치려면 저는 글부터 다시 배워야 돼요. 어느 세월에 따요.”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가장 낮다는 국가의 이십대가 뱉을만한 발언이 아니었다. 허나 초등학생 때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아직도 글을 더듬거리는 선담을 부정할 순 없었다. 녀석의 생활이 안정되면 일단 검정고시라도 치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백진은 혀를 찼다. 선담은 백진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며 자꾸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백진은 선담에게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선담이 팔짝팔짝 뛰었다.
“저 정말 잘해요! 조금만 연습하면 돼요!”
“한번 보고 판단하자. 일단 공터에서 몇 바퀴 도는 것만 전재로. 이게 무슨 범버카인줄 알아?”
“진짜 잘한다니까요. 옆에서 구경해 봐요.”
자신의 실력을 어필하기 위해 쫑알대는 선담을 향해 백진은 알겠다고 대꾸하며 신입비서 옆을 지나쳤다.
“내일까지 시말서 준비해. 아님 옷 벗던가.”
신입비서는 좌절했다.
- - - -
…ㅡ그로부터 2개월이 지났다.
겨울이 찾아오고, 세상은 새해를 맞을 준비로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홍선담이 뱃속에 움직임 없는 수정란을 품은 뒤, 반년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다.
- - - -
원두커피를 진하게 받고 짬을 내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석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선담아. 잘 지냈어? 응, 난 좀 바쁘네. 어?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너 만날 시간은 충분하지.”
선담이 처음 EEC에서 도망쳐 나왔던 것이 작년겨울. 그렇게 시간은 돌고 돌아 석재가 선담을 다시 만나게 된지 딱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수백일간 이루어진 부조리한 현실이 말짱 거짓말 같게도 지금의 현실은 잠잠했다. 그것은 최은협의 부재에도 이유가 있었고, 연백진의 철저한 관리에도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계절은 다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석재는 백진과 틈틈이 연락을 취했지만, 자신도 생활이 몹시 바빠서 간간히 선담의 안부만 묻던 차였다. 백진은 EEC를 대체할 기관을 만드느라 몸이 동강날 지경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석재도 그가 저렇게 분주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나 가상의 단체라도 만들어야 할 일이 있었나 싶었다.
선담의 배에 수정란이 앉았다는 이야기는 백진의 집에 방문했을 때 때마침 찾아온 서인표를 통해 들었다. 인표는 도대체가 ‘그걸’ 뱃속에 넣어놓고 있어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저 아이가 대답을 미루는지 모르겠다고 역정 냈다. 얼른 약물로 빼낼 수도 있는 걸 키우지도 않는다고 그러고, 그렇다고 죽이지도 않겠단다. 인표는 산과전문의로서 탄생 없는 수정란의 존재를 참지 못하는 듯했다. 석재는 엄한 표정으로 선담을 설득했으나 돌아오는 건 단호한 부정이었다. 인표는 저러다간 몸이 안 좋아질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렇게 겨울바람이 찾아와 앙상한 나뭇가지가 드문드문 눈에 띠는 12월, 오랜만에 선담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놀러나가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얼굴을 본지도 거의 한달 반이 다 되어가서, 갑작스러운 부탁임에도 석재는 빠듯한 일정을 캔슬해 기꺼이 시간을 냈다. 몸이 피곤하긴 했으나 ‘아저씨가 요즘엔 통 바빠서 심심하다’라고 징징거리는 녀석을 무시할 정도로 피곤치는 않았다.
[차 타고 나가고 싶어.]
웬일로 저가 먼저 주문을 하나 싶어 석재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럼 백진이한테 우리 집으로 데려다달라고 해. 63빌딩 갈래? 오늘 저녁에 비 온댔으니까 거기서 놀자.”
[63빌딩에 뭐 있는데?]
“볼 건 많아. 미술관도 있고 수족관도 있고 맛있는 레스토랑도 많지.”
[금방 갈게.]
말대로 선담은 금세 도착했다. 백진이 (무장한) 경호원 둘을 붙여놓으려고 하자 선담은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이러면 제대로 놀 수 없다고 투덜거렸고, 석재 또한 자신이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서 겨우 백진을 내보냈다. 정말이지 그는 업무가 피곤해 보였다. 선담은 오랜만인 석재의 집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돌아다녔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면서 석재는 그저 흐뭇하게 선담을 지켜보았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검정색 재킷을 걸친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신입생 같아서 괜스레 자기가 더 들떴다.
“선담아, 너 공부는 마저 안 할 거야?”
부엌을 뒤지던 선담이 차분히 대꾸했다.
“지금은 무리고…… 나중에는 꼭 할 거야. 대학까지는 바라지 않아서 고등학교라도 졸업하고 싶은데, 아저씨가 검정고시 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대.”
또리방또리방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있었다. 석재는 원두커피를 한잔만 더 마시고 출발하자고 한 뒤 테이블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선담이 어딘지 변한 것 같아서 그로서는 차분히 관찰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담은 부엌의 수납장을 한번씩 열어보더니 물었다.
“불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사람 기절 시키려면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돼?”
“응?”
석재가 되물었지만 선담은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석재는 애가 기운을 차리니 점점 궁금한 것도 많아지고 활기차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잘 모르지만 일단 중요한 급소는 피해야 하지 않을까? 가령 정수리나 인중이나 목젖? 그리고 뒷목 정도? 이쪽은 백진이가 더 잘 알거야. 전경들이 시민들 급소 피해서 때리도록 교육받는다는데 그거 알아?”
“몰랐어.”
“응, 나도 몰랐어.”
석재는 선담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그때 커피포트의 불이 반짝였다. 석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물을 부으려는 참이었다. 뒤에서 선담이 그의 허리춤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불곰, 고마워.”
석재는 뭐가 그리 고맙냐며 허허 웃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진지했다.
“고마워. 늘 고마워. 어렸을 때, 말도 안 통하는 나한테 밥 사주고 말 걸어줘서 고마워. 만날 내 걱정해줘서 고맙고, 내가 바보같이 굴어도 내 탓 안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저씨랑 만나게 해준 것도 정말정말 고마워.”
석재는 괜히 눈가가 뜨거워져서 너털웃음을 떨었다.
“아니야, 너야말로 그간 고생도 많고 힘들었을 텐데 나 잊지 않고 불곰불곰 불러줘서 얼마나 고마운데. 웃음도 잃지 않고. 하도 지독한 일을 겪어서 네 특유의 해맑음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정말 걱정했어. 그런데 내 괜한 걱정이었던 거 같다.”
“응.”
“백진이가 옆에 있어줘서 그럴지도 몰라. 그 녀석이 처음엔 까칠하게 굴어도 내 사람이다 싶은 사람한텐 끔찍하게 잘해줘. 원래 튕기는 것들이 더 그렇잖아. 내가 그랬듯이 너도 그럴 거야. 그놈 옆에 있다 보면 점점 행복하게 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그게 그놈 힘이거든. 보니까 너 위해서 새 센터도 만들고 여러모로 힘내는 거 같은데 네가 예쁜짓 좀 많이 해줘.”
“그럴게.”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건강에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니까 어서 수정란도 지웠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백진이네 아버님이 애들 욕심이 많으신 분이라, 네가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나쁜 말씀 안하실거야. 무엇보다 아버님이 백진이한테 껌벅 죽거든. 그러니까 일단 나쁜 씨는 지우고, 선담이 네가,”
퍽!!!
석재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선담은 무너지는 석재를 받아들려고 했지만 무게가 무게인지라 거의 함께 쓰러지듯 넘어졌다. 선담은 들고 있던 밀대를 내팽개치고 자신이 석재를 다치지 않게 제대로 가격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쓰러진 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대었다. 고른 숨을 쉬었다. 선담은 저도 모르게 “다행이다…”하고 내뱉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석재를 끌고 가 거실에 누였다. 그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진 석재의 안경을 밟아버렸다.
“미안, 불곰. 좋은 말 해주는 도중에 이렇게 때려서……. 혹 생기겠다. 정말 미안해. 근데 어쩔 수 없어. 오늘밖에 날이 없을 거 같아서. 그러니까 나 잠깐 차 좀 빌려서 나갔다 올게.”
선담은 급히 테이블 위에 있는 석재의 차키를 챙겼다. 그리고는 분리수거를 위해 모아놓은 비닐봉투를 엮어 그의 손과 발을 꽉 조여 묶었다. 망설이다가 재갈도 채웠다. 선담은 떨리는 손으로 꿋꿋이 매듭을 지으며 기도하듯 속삭였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핸드폰도 잠깐 빌릴게. 아저씨가 만약 전화하면 내가 받아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해야 될 거 같아. 이해해줄거지……? 내가, 내가 이렇게 때리고 속여서 마음대로 차 빌려 타고 나가는 거…… 이해해줘. 나한텐 이 방법밖에 없잖아.”
의식을 잃어버린 석재는 당연히 말이 없었다. 선담은 매듭을 한번 더 확인하고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생각했어. 불곰, 그 사람들에겐 법 같은 점잖은 방법은 안 돼. 어차피 벌금이나 물거나 잠깐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게 다일 거야. 나도 그쯤은 알아. 아저씨한테 그런 수고까지 끼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직접, 내가 납득할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어. 그들은 내가 청춘을 바쳐가며 겪었던 고통을 제대로 알아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쿠르르르르르르ㅡ
어느새 하늘에는 회색빛 구름이 잔뜩 뭉쳐 끼어있었다. 지상으로 하강할 듯 무거워 보이는 먹구름은 비가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를 울렸다.
곧 칠흑 같은 어둠이 대지에 내려앉으리라.
선담은 거실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이미 석재가 아껴마지 않던 그 홍선담은 자리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연백진과 정석재, 두 남자의 권애를 불러일으켰던 여린 홍선담은 그림자 뒤로 숨어버렸다.
“용서할 수 있게…… 부디 도와주세요.”
선담은 누군가에게로 향하는지 모를 속삭임을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석재 혼자 잠든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
뒷좌석은 두 아이로 소란스러웠다. 어느새 하늘은 새카맣게 번져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상목은 앞유리에 와이퍼를 켰다.
“이 녀석들아, 얌전히 앉아있어.”
그러자 한명은 그를 ‘아빠’라고 부르고, 또 한명은 그를 ‘작은외삼촌’라고 부르며 투정을 부렸다.
“언제까지 가야돼요? 얼마나 남았어요?”
“지루하다. 아빠, 우리 휴게실 들르면 안 돼요?”
전상목은 아버지 팔순잔치를 때문에 어젯밤 미리 내려간 누이와 아내를 쫓아 아이들을 데리고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아이들 수업이야 토요일인데 한번 빼자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학원까지 파하고 돌아오거든 챙겨 내려오라고 지시했고, 덕분에 두 사내 녀석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그였다.
“내 팔자야….”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EEC가 폐쇄위기에 처하자 수입원이 사라진 전상목은 그야말로 찬밥신세였다. 대단한 연구랍시고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떠났던 영국 지사발령이었는데 이제 와서 연구가 무기한 중단되었다고 하니 집사람의 속도 말이 아니었을 테다.
저희들이 얼마나 고생을 해서 인공자궁을 앉히고 도너를 먹여 살렸는데. 갑자기 건강이 어쩌고 하면서 도너를 빼가는 건 너무한다 싶었다. 실험 중엔 도너가 조금 힘들 수도 있고 그런 거다. 연구원들이라고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주었는데도 그 은혜도 모르고 EEC를 파괴시킨 저쪽이 몹시도 얄미웠다. 홍선담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챙겨주고 베풀어주었던가.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홍선담을 위해서면 못하는 것이 없는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는 이쪽에서 다 입지 않았던가. 이건 막말로 배반이었다.
막판에 길 소장보다도 더 믿음직하던 최은협이 반 년째 깜깜무소식이 되자 EEC의 간부들은 남몰래 백람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널리고 널린ㅡ그래서 별 설득력도 없는ㅡ도너의 건강관리 따위를 핑계로 거대기업에서 도너를 끌고 가 기관의 임직원이 실업상태라고 언론에 크게 터트리면서 뒤통수를 칠 계획이었다. 백람은 크게 당해도 쌌다. EEC가 이익을 챙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간 EEC가 감내한 피와 땀의 양으로 봐서는 적어도 수억은 뜯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인공자궁과 도너를 돌려받지 못한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워야 할 것이 아닌가. 처음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던 직원들도 백람의 침묵이 길어지자 공개데모라도 해보겠다는 식이었다. 모두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성사시키기만을 바랐다.
“비가 꽤 오겠는데?”
저수지를 옆에 끼고 길게 이어진 2차선 도로는 한적했다. 잔칫집에서 잔치밥이나 실컷 먹을 생각에 전상목의 가는 길은 가벼웠다. 그때, 뒤에서 아이들이 크게 외쳤다.
“우와! 아빠, 저 차 엄청 빨라요!”
아이들이 하도 호들갑을 떨어 전상목은 백미러로 뒤쫓아 오는 차를 힐끗 보았다. 그때였다.
콰앙!!!
전상목의 차체가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갔다. 끼이이이이익ㅡ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터지고 전상목은 핸들을 움켜쥐었다. 사고인가? 그러나 진정할 새도 없이 뒤의 세단이 타이어에서 엄청난 공회전소리를 냈다. 부우우우우웅ㅡ 엄청난 굉음과 함께 다시 한번,
쾅ㅡㅡㅡㅡ!!!
전상목은 그만 혀를 와그작 깨물었다. 몸이 앞으로 붕 들리는 느낌이었다. 피할 수 없는 엄청난 반동에 온몸이 난폭하게 덜컹거렸다. 그가 의지한 것은 오로지 핸들이었다. 그나마 시선만 아이들에게 두었다. 뒤가 많이 찌부러졌지만 아이들이 좌석에 끼일 정도는 아니었다. 전상목은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고의적으로 차를 박아대고 있다는 사실을.
“아빠, 아빠!”
“헉……!”
그러나 늦었다. 옆으로 바짝 쫓아온 세단은 그대로 그들의 차를 저수지로 밀어버렸다. 안전펜스가 박살나고 차체가 저수지를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전상목은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만은 정신을 잃어선 안 됐다. 저쪽에선 끼이이익 하고 급정지하는 소리가 들렸고 전상목의 차는 세 번인가를 구르더니 간신히 저수지 물가에서 멈춰 섰다.
“허억, 허억…! 배호야, 배호야! 괜찮, 쿨럭…! 괜찮아?!”
차가 뒤집힌 채라서 전상목은 천정에 거꾸로박혀있었고 겨우겨우 안전벨트를 풀자 몸이 쿵 떨어졌다. 전상목은 엄청난 신음을 뱉었다. 제대로 자세를 잡고 보니 시야가 새빨갰던 탓이었다. 구를 때 어딘가에 심히 부딪쳤나보았다.
그는 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바로 뒷좌석을 들여다보았다.
“아……빠…….”
아들과 조카는 무사한 것 같았다. 크게 피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둘 다 신음을 할지언정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이었다. 전상목은 일단 아들에게 손을 뻗었다.
“배호야, 여기, 아빠 어깨 잡아봐.”
“아빠, 아파….”
“조금만 참고, 자, 하나둘셋 하면…”
“아드님께 지극정성이시군요.”
등 뒤가 싸해졌다. 전상목은 아들을 꺼내는 것도 잊고 새파래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쏴아아아아ㅡ
저수지에 물안개가 일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익숙한 인영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상목은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고개를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상목 팀장님, 저예요.”
저편의 인영이 빙긋이 웃을 때, 전상목은 비명을 질렀다.
“서, 선담아!!!”
그 사이 저쪽 차문으로 조카애가 기어 나왔다. 비가 내리니 차가 폭발할 일은 없었지만 일단은 아이를 빼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전상목은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두 팔로는 아들을 꺼내냈다. 이미 홍선담은 뒤집힌 차체 가까이 다가온 후였다. 전상목은 피로 뿌예진 눈가를 닦으며 당황해 소리쳤다.
“선담아, 설마 네가 지금 우리를……!”
선담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꼈다. 사용해본 적 없는 가죽에 손가락이 깊이 자리하며 우드득, 하는 특유의 천소리가 빗소리 사이에서도 명확하게 울렸다. 전상목은 알 수 없는 기류에 질겁한 얼굴이었다. 선담은 한발 한발 신중하게 떨어트리며 두 아이와 한 아버지가 있는 자리까지 다가왔다.
“선담아, 대체, 대체 왜 이런 거야! 애가 다쳤잖니! 이게 대체……!”
“잘 지내셨나요, 전 팀장님.”
가까이에서 홍선담을 본 전상목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을 지릅떴다. 빗줄기를 가르고 자신을 향해 꽂혀드는 동공이 헤아릴 수 없는 살기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에 쓰게 웃고 있는 입술은 차분했지만 입안에 담은 독기는 광분해 있었다. 선담은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을 집는 듯, 그의 손아귀에 무게감이 실렸다. 본능적으로, 즉 생존의 직감으로 단번에 전상목은 위협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서, 선, 선담아!”
“아드님이…… 의젓하네요.”
“선담아! 미안해! 미안하다! 잘못했어!”
전상목은 곧바로 땅에 바짝 엎드렸다. 두 아이는 저희들의 아빠가 왜 그러는지 몰라 홍선담과 전상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담은 팀장의 행동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겁도 많으신 분께서…… 왜 그러셨어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왜…….”
그날, 그때, 보았다. 최은협과 길호문 사이에 서 있던 그를. 자신이 문을 열자마자 후다닥 도망치던 그를. 그가 그 후에 벌어진 끔찍한 시간에 일조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 많고 자상한 어른이라고. EEC의 일부가 자신에게 가혹하게 대해도 전상목 팀장님 같은 사람은 안 그러리라고. 하지만…… 더는 회상할 가치도 없었다. 선담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팀장님을 용서할 겁니다.”
선담의 손에 잡힌 묵직한 형체는 칼이었다. 어디서 구했을지 모를 군용나이프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나왔다. 크기는 크지 않아도 사람 하나는 거뜬히 잡을 수 있는 모양새. 전상목은 곧 범람할 것 같은 저수지의 흙탕물에 머리를 처박고 그저 선담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차도 박살난 채로는 칼을 든 성인을 당해낼 용기가 없었다. 아니, 만약 상황이 이보다 나았을지라도 자신은 기세에서 참패했을 것이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겁에 질린 아이들이 크게 울어대기 시작했고, 잘못했다고 목이 찢어져라 비는 전상목도 마침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담아, 우리 영국에서부터 같이 살았잖아!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했니! 네 토사물도 내가 다 받아내고 늘 은협이에게서 네 편 들어주고, EEC가 너한테 부당한 대우를 할 때도 난 그러지 않았어! 잘 알잖아! 그땐 말이야, 나도 그때는 정신이…!”
“팀장님, 저는 용서한다고 했어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선담아…!”
“말씀대로 늘 잘해주셨으니까요. 마지막에 한 짓은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당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뺏지 않겠습니다.”
“선담아! 너 왜 이러니! EEC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게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우린 PTA사에서 수주 받은 일을 했을 뿐이야! 아무도 널 작정하고 괴롭히려고 든,”
“팀장님, 실험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제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 아니, 제가 선택한 4년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은협이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아는 상황에 저를 몰아넣어선 안됐어요.”
“선담아, 그렇지 않아! 결코……!”
선담은 그가 애걸복걸하며 자신의 바지자락을 잡고 매달릴 때, 그의 뒤에서 흑흑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이미 발목까지 넘친 저수지물에 고대로 서서는 영문도 모른 채 질려 울고 있었다. 둘 다 자식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 중 하나는 이 자의 아들이겠지. 선담은 자신의 발치에서 구르며 잘못했다고 사정사정하는 전상목을 바라보았다. 빗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계속되었다.
“손가락 여덟 개를 자르겠습니다.”
“뭐라……고?”
“제가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당해온 아픔에 비하면 정말 싼값이에요.”
“선담아!!!”
전상목의 고함소리가 펑 터지자 아이들이 더욱 빽빽 울어 젖혔다. 홍선담은 이미 무릎까지 차오른 저수지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그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저수지에 팀장님의 주검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참는 겁니다.”
그제야 전상목은 자신의 아들을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올라온 물살에 꼿꼿이 서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은, 아직 여덟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상황이 어떤 위기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선담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드님이 이 자리에 안 계셨으면 팀장님은 벌써 죽었어요. 아드님 덕분에 산 줄 아세요. 빠른 시일로 이 땅을 떠나세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만약 EEC의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아서 도망치려 한다면 그땐 아드님도 위험하게 될 겁니다.”
“선담아, 진정해. 이건, 너 이러면 후회한다!”
그 말을 끝으로 선담이 전상목의 멱을 잡아 올렸다. 그러나 그의 힘이 엄청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상목은 결국 반은 제 발로 움직여야했다.
타깃을 거칠게 끌고 가면서 선담은 점점 광포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숨이 목끝까지 차오르고 눈앞이 새카매졌다. 차를 몰기 직전까지는 자신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 절대 확신하지 못했다. 분명히 전상목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는 핸들을 다시 돌리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뱃속에 든 핏덩이가 자신의 증오를 불태우는 장작이라도 되는지, 전상목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속에 도사리는 또 다른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너무 오래 힘들었고, 너무 오래 참았다. 너무너무 아픈데 그들은 그저 ‘도너’란 이유 하나만으로 내 앞에서 애정이란 탈을 뒤집어 쓴 채 행동했다. 하루하루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그저 최은협 하나와 EEC 식구들을 믿고 살아왔던 자신이었다. 이제 어떠한 고통도 두렵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시달린 고통과, 마지막 뿌리까지 강탈당한 자신의 존엄에 대해서, 선담은 이렇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끝임 없이 갈구했다.
쾅!
그는 전상목을 뒤집힌 차에 집어던졌다. 아이들은 물살을 가르며 쫓아왔지만 더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선담은 아이들을 가리키며 어서 도로 위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조금 큰 아이는 두려워하면서도 금방 선담의 말을 따랐지만 나머지 하나는 제 아비의 곁을 떠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선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배려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시킬 때 말을 듣지 않아 제 아비의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는 걸 직접 목격해도 그건 이제 저 아이의 팔자다. 아이는 선담에게 동정을 구하는 눈으로 아비를 대신해 빌고 있었다. 선담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전상목의 팔을 잡았다.
“네 아버지는 예전에 내 자식을 죽였단다. 직접 죽이진 않았지만 나와 내 애기의 존재를 무시해버림으로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였어. 물론 네 아버지도 EEC라는 기관의 일원으로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지. 그때 나는 멍청해서 화를 내야하는 지도 몰랐고.”
아이는 선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것이다. 허나 선담은 혼잣말에 가까운 이야기를 조분조분 계속했다.
“따지고 보면 첫번째 유산은 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두번째는 달랐어. 내가 원하지 않는 애기를 갖는 일에 일조했단다. 정말…… 고통스럽고, 무서웠거든. 난 원치 않는 남자에게 다리가 찢어지고 혀가 잘렸었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마저 몹시 아프게 만들었지. 그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네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 도와주었으면 그 지경이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네 아버지의 손가락을 자르는 건, 죄가 될지언정 아주 엉뚱한 일은 아니야.”
전상목은 손가락을 내주지 않으면 선담이 자신의 창자를 후빌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선택권도 없었다. 제발 다 장난이라고, 지금이라도 선담이 옛날같이 웃으며 자신을 놓아주기를 기도했다. 어떻게 해도 도망갈 방도가 없었다. 사지가 경련하듯 떨리고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는 아들을 향해 고함쳤다.
“배호야! 올라가! 올라가서 귀 막고 있어! 형아하고 가서 귀 막고… 으아아아아악!”
전상목의 거품을 문 비명을 시발점으로 아이는 도로를 향해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까무러치는 전상목을 있는 힘껏 누르려고 버티며 선담은 생각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고. 아무리 팀장이 좋은 사람이었어도 시간을 더 주는 건 평등치 못하지 않느냐고.
과거의 자신에겐 고통 앞에서 단 일초의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오른손의 엄지가 저수지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날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는 뼛소리가 선담을 멈칫하게 만들었지만 그도 남자인지라 힘을 주니 손가락 하나가 정말 잘려나갔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전상목은 말하는 도중 뎅강 잘린 손끝을 쥐어 잡았다. 그는 앞뒤 없이 울부짖었다. 엄청난 고통이었다. 혀를 물고 죽고 싶을 정도였다. 손끝에서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으아아아아아ㅡ!”
전상목은 허리까지 차오른 물에서 버둥거리며 홍선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피하려고 했으나 물의 저항으로 인해 움직이기 어려워 허리를 잡혔다. 푸르르르르르! 선담은 그대로 물속에 처박혔다. 혼신을 다한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목을 잡힌 것이다. 혈관에 손톱이라도 박힐 것 같은 굉장한 힘이었다. 결국 목줄이 틀어 막힌 선담은 죽을힘을 다해 그의 팔뚝에 칼을 박아 넣었다. 몸이 단숨에 물밖으로 다시 튀어나왔다. 괴성을 지르는 전상목의 주변이 붉은 색으로 흥건했다. 저쪽에선 아이들이 전상목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선담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렇게 아픈 게 두려우면서 어떻게 남에겐 그보다 더한 걸 강요했어요! 그저 성공이라는 이유 하나면 뭐든 게 용서될 줄 알았던 겁니까!”
“왜 나한테만 와서 이러는데! 난 그저 최은협을 거든 이유밖에 없어! 제발 이러지 마! 길 소장도 있고 최은협도 있고 다른 EEC 직원도 많은데 왜 나만…!”
“당신이 처음일 뿐입니다.”
선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나머지들도 가만 두지 않아요.”
그때였다. 저수지 물살이 단숨에 거세어지더니 선담의 옆에 있던 찌그러진 차체가 둥실 들렸다. 물살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선담은 가까스로 쓸려 내려가려는 차체를 피하고 두렁으로 몸을 피했다. 손가락이 잘린 데다 팔까지 부상 입은 전상목은 오뚝이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선담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전 팀장님!”
아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전상목은 망설임 없이 선담의 손을 잡았다. 물살이 엄청 거세져서 전상목의 몸이 엿가락처럼 꺾였다. 온전히 지상으로 올라간 선담은 나뭇가지를 단단히 잡았다. 그 모습에 전상목은 희망을 품었다. ‘아, 홍선담이 그래도 나를 살려주려고 하는구나. 그래, 역시 거짓말이었어. 살았다, 난 살았다.’ 허나 다음 말에 그의 뇌리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머지 일곱 개를 얌전히 잘리시던가, 아니면 여기서 놓겠습니다. 아드님껜 죄송하지만 저도 더는 봐줄 수가 없네요.”
두 아이는 힘없는 어린애들. 자신은 겨우 매달려 있는 상태. 흔들림 없는 눈동자의 홍선담. 자신을 구해줄 것은 없었다. 고통을 대신해줄 것 또한 없었다. 전상목은 이미 결론 난 선택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백진은 비가 쏟아지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잎을 우려내어 진하게 탄 녹차는 반쯤 식어있었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마주 본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제대로 본 거야?”
서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봤으니까 너 불렀지. 너도 확인 했잖아. 그 애는 어딨어?”
“석재랑 63빌딩 구경한다고 놀러갔어.”
“그렇구나…….”
인표의 찻잔도 식어있었다. 그는 갈증을 식히기 위해 미지근한 녹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어서 애 데리고 와서 주사 맞히자. 투약도 있지만 미국에 있는 지인한테 알아봤는데 주사가 더 좋대. 오히려 더 빠르고 안전하다더라. 하혈이 조금 있을 테지만 심하지 않을 거야. 수란관 깨끗하게 비울 수 있다. 내가 금방 알아볼게.”
“그래…….”
“……저기, 그때 네가 지워달라고 했을 때 내가 괜한 설레발을 친 게 아닌가 싶어. 차라리 애가 의식이 없을 때 얼른 지웠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백진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땐 약도 없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자기 몸 상태, 녀석도 알고 있었을 거야. 만에 하나 그 녀석 몰래 지웠다면 결국엔 노심초사하다가 밝혀야 할 날이 왔을 테고. 녀석한테 뭘 숨기고 속이고, 그런 건 싫어.”
인표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너무 오래 품었어. 왜 애가 고집을 부리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리 네가 그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더라도 몸을 생각하면 마냥 그럴 수도 없지. 연백진, 넌 너무 물러. 특히 애들한테는 더 그래. 그땐 그랬다고 해도 이제는 강제로라도 주사는 맞아야 해. 이대로는 위험하잖아. 그치?”
선담의 자궁주변을 떠도는 수정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인표는 백진의 안색을 살펴가며 그를 부추겼다. 이번만은 그가 완고하지 못할 거란 확신도 있었다. 인표는 아까부터 백진이 뚫어져라 들여다보다 내려놓은 사진 한장을 다시 그 앞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선담의 뱃속을 촬영한 사진.
두 남자는 그 사진 안의 작은 얼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정란이 제 구실은 못하더라도 뱃속에 자리를 꽉 잡고 앉아있으니까 아래에 피가 제대로 흐르질 못하잖아. 여기 이 부분. 봐봐, 막혀있지? 너도 볼 줄 아니까 당연히 알겠지만 혈관이 원활하게 활동하지 못하면ㅡ”
“그래, 괴사 가능성이 있지.”
은표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아, 잘못하면 곧 썩을 거야.”
“……….”
백진은 인표의 말에 입술을 지그시 악물었다. 선담의 뜻대로 뱃속에 든 수정란을 방치해두었더니…… 그것이 아예 몸을 갉아먹으며 썩을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에게 자궁을 내주지 않으면 모조리 끌어안고 자폭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조그마한 얼룩은 확연했다. 차가워진 손마디를 깍지 끼고 앉아있던 백진은 결국 얼굴을 감싸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지독한 새끼. 악마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지독할 수가 있는가.
차갑게 미소 짓는 최은협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목표하는 바가 있으면 제 내장을 도려내서라도 몸을 사리지 않는 인간. 목표하는 것이 눈앞에 있으면 제 사지가 다 뜯어져 나가도 감각조차 느끼지 못하는 맹렬한 인간. 그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이었다. 짐승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캐치할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몸을 움츠리는 것이다. 그러나 최은협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본능적인 반응마저도 철저하게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너무도 확실한 ‘인간’이었다.
“꼬맹아…….”
난생처음,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친놈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취한 건 고작해야 법적대응이었다. 그나마도 연지애 때문에 보류되었고, 자신은 기껏해야 다친 선담을 끌어안고 정신 차리라며 소리 지르거나, 그가 회복하는 내내 혹처럼 찰싹 붙어있는 일이 다였다. 그랬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어쩌면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영화도 아니고 어떻게 되갚아 주겠는가. 자신이 취한 행동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일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를 찾아가 총이라도 갈기겠는가? 그게 아니면 다리에 시멘트를 달아서 강바닥에 처박아 버리겠는가? 물론 백람을 등에 업은 자신이라면 어느 정도, 아니 사실 100%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곳이 영화가 아닌 현실인 이상에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없는데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백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몇 번이고 얼굴을 덮었다. 홍선담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한 탓이었다. 몸속의 피가 온통 새카매져서 속이 다 타버리는 것 같이 뜨거웠다. 홍선담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붕괴시켜서라도 갚아주고 싶었다. 32년간 길러온 이성으로 간신히 누르던 증오가 파편으로 갈라져 자신의 전신에 내리꽂혔다. 자신도 그간 많이 버틴 것이었다. 폭주나 다름없는 폭발이 그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홍선담의 몸이 썩어간다.
ㅡ녀석은 죽어서도 내거라는 것부터 기억해놔.
ㅡ아저씨가 좋아요.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백진은 통제할 수 없게 된 자신에게서 쓰디쓴 패배감을 느낌과 동시에 눈가가 뜨거워질 정도의 각오를 떠올렸다.
ㅡ아저씨가 원하면 아저씨 애기도 낳고 싶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아저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
그래, 이제부터는 현실이 아니다. 그놈은 현실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지 오래다. 홍선담에게는 이제 자기밖에 없는데 언제까지 현실과 이성을 따지며 한심한 타령이나 하고 앉아있을 텐가. 상대가 미쳐버린 도가니 속에서는 아무리 이성을 차려봤자 자기만 씹혀 먹힐 뿐이다. 그뿐이다. 호되게 겪지 않았던가. 더욱이 나 혼자서 먹히는 거야 상관없지만 이제 자신은 홍선담이라는 돌봐야 할 녀석도 있었다.
백진은 사진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연락할게. 주사고 약이고 다 구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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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는 뿌연 눈을 끔뻑였다. 시야를 확보하려고 했으나 머리를 울리는 묵직한 두통에 그만 눈썹을 찡그리고 말았다. 비스듬히 들어오는 공간은 익숙한 거실이었다. 달빛이 들어오는 집안은 훤했다. 왜 자기가 여기 이러고 있나를 찬찬히 되짚어보던 석재는 별안간 몸을 곤두세웠다. 집안에 도둑이 들었던 것 같았다. 자신은 말하는 도중에 둔탁한 것에 분명 머리를 맞았다.
“으, 우웁……!”
선담을 부르려고 악을 썼지만 단단한 재갈이 물려 있었다. 석재는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알을 움직였다. 일단 거실과 부엌에는 없었다. 혹시, 혹시나 최은협이, 그 자가 찾아왔나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이 주저앉았다. 석재는 미친 듯이 발광했다. 그놈이 만약 선담을 끌고 간 것이라면.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았다. 미루어 보건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 있었다. 순식간에 백진이 떠오르고, 정말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는 필사로 몸을 굴려 소파 옆 테이블을 무릎으로 마구 찼다. 그가 원한대로 전화기가 떨어졌다. 제 얼굴 위로 떨어져 충격이 상당했으나 석재는 정신없이 수화기를 귓바퀴에 깔고 턱으로 번호를 누르려고 했다. 헌데 통화대기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전화선이 뽑혀있는 걸 발견했다.
“으으으으읍!!!”
자신이 기절한 새에 선담이 어딘가로 끌려갔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석재는 꽁꽁 묶인 몸을 일단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였다.
“불곰, 쉿, 조용히 해. 괜찮아”
석재가 뒤를 돌아보려고 발버둥 치자 선담이 서둘러 재갈을 풀었다.
“선담아!”
“응….”
“선담아, 어떻게 된, 난 네가 어디 끌려가기라도…!”
“아니야, 아니야.”
“어디 다친 덴 없어? 이게 도대체…!”
선담은 눈이 새빨개진 석재에게 안심하라는 듯 시선을 마주하다가 재빠르게 나머지 매듭도 풀어주었다. 그가 이렇게 크게 반응하는 것이 저 또한 이해가 가서 마음이 썼다. 팔을 뒤로 묶은 마지막 매듭이 풀리자마자 석재가 선담을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그는 깜짝 놀라 선담을 도로 떼어내며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젖었어?!”
“그…… 불곰…….”
선담이 선뜻 대답을 못하자 석재는 의혹에 싸인 얼굴로 선담을 쭉 훑어보았다. 문득 수상함을 느낀 석재는 그대로 거실에 불을 켰다. 선담은 온몸이 흙탕물에 젖은 채로 앉아 있었다. 석재가 그런 선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선담아, 무슨 일 당한 거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젖어서는 너 이게…!”
석재는 눈을 부릅떴다. 선담의 허벅지가 붉은 피로 가득한 걸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선담에게서 흘러나오는 혈흔이 아니었다. 둘 사이를 진공이 덮은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선담아.”
구체적으로 짚어내지는 못해도 바보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석재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 선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선담아, 선담…… 이러면 안 돼! 너 이러다가 큰일 나! 도대체가, 설마 내게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길 바라. 선담아, 그런, 위험한 짓 하고 다니면 안 돼! 위험하잖아! 큰일 나!”
선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일 안 나.”
“선담아!”
“난 괜찮은걸.”
석재는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담아, 제발 나한테 제대로 말해봐.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이거 무슨 얼룩이야? 응? 선담아, 나 봐봐. 선담아!”
선담은 대답대신 자신을 다그치는 석재의 끌어안으려고 했다. 덩치차가 상당해서 자신이 거의 파고드는 꼴이었지만 그는 부득부득 석재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진정하라는 듯이 석재에게 자그맣게 속삭였다.
“나…… 두렵지 않아.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불곰, 걱정 하지 마. 이 방법밖엔 내가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난 괜찮아.”
석재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선담의 몸이 고요하기 그지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았다. 이 흥건한 피를 보건데, 분명 큰 사고를 저질렀을 것임에도 선담은 떨지 않았다. 그래도 선담이 하염없이 걱정 되서 석재는 터지려는 눈물보를 참느라 애썼다.
“경솔하게 결정한 일 아니야. 정말 많이 고민해서 나 스스로 정한 거야.”
“선담아…….”
“아저씨한테 말하려면 말해도 돼. 하지만 난 멈추지 않을 거야. 안 멈출 거야. 여기서 멈추면, 하늘은 나를 용서할지라도 난 평생 나 자신을 믿지 못하면서 살 거야.”
쏴아아아아아ㅡ
창밖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결국 석재는 선담의 젖은 몸을 말없이 끌어당겼다. 비에 흠뻑 젖었으면서도 특유의 향내가 가득했다. 선담의 냄새였다.
한번 이야기해보면 알 수 있었다. 백번 말린다고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다만, 홍선담같이 선천적으로 순한 아이가 이렇게 독한 마음을 품으면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니, 이미 얼마나 다쳤으면 이렇게나 처절해졌을까.
어떻게 해야 옳은 선택이 될까. 혼쭐을 내면서 절대 안 된다고 다그쳐야 할까?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네가 참으라고? 이미 다 끝난 일 아니냐고?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들이 편히 발 뻗고 잘 자는 모습도 너그럽게 이해하라고? 그러니 어서 약을 먹고 행복하게 살 궁리만 하라고? 그게 참된 승자의 모습이니까? 아니,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뱃속을 비우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에게 벌을 가할 수 있다면 그 처벌자는 홍선담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겠으면 벌할 수 있는 사람은 홍선담이었다.
“선담아, 괜찮아……?”
선담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석재는 아리는 마음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된 이상 선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필요가 절실해졌다. 처벌의 도를 넘어서서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조만간, 아니 내일이라도 당장 백진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했다. 자기 혼자서 고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선담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석재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홍선담. 앞으로는 나한테 꼭 와서 말해. 두 번 다시는 나 기절시키고 몰래 빠져나갈 생각 마.”
“……불곰….”
“알았지? 나 따돌릴 생각하면 안 돼. 네가 도저히 용서 못하겠으면 그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해. 그게 다소, 아니 완벽하게 범법이라도…… 네 뜻을 무시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그래, 네가 얼마나 고생했어. 내가 생각이 얕았다. 그래…… 사실 아직도 너를 완벽하게 응원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네가 생각을 바꿨으면 하는 마음이 좀 더 크지만 뭐든 말해, 뭐든. 어려워하지 말고.”
그러자 잠시 침묵 뒤에 선담이 고백했다.
“부, 불곰 차가 많이 찌그러졌어.”
“그딴 건 상관없어.”
선담은 헐레벌떡 덧붙였다.
“안경도 밟아서 찌그러졌어.”
“상관없다고. 이 나쁜 녀석아.”
석재는 저도 모르게 선담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백진이 알면 노발대발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어차피 이성애자니 문제될 건 없잖은가. 도저히 입을 맞추지 않으면 못 참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설마 누군가를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쨌든 많은 피를 보았을진대 선담은 차분해보였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때문에 이러면 안 되는데도 그런 모습이 여러 의미로 대단해보였고, 또 마음을 찢어지도록 아프게 만들었다. 힘든 과거가 그를 지독하게 단련시키고만 것이다. 그럼 그 자들은 홍선담을 고통에 떨게 하는 동시에 강하게 훈육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결국 거대해진 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일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석재는 마지막으로 선담을 얼싸안으며 다부지게 대꾸했다.
“네 향기가 사라지지 않게 해. 아무리 힘들어도 너 자신을 버리면 안 돼. 너만의 이 향이 사라지면, 그때는 주저 없이 너부터 혼내줄 거야.”
선담은 조금 웃는 듯했다. 고맙다는 속삼임을 잊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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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ㅡ사이즈가 훨씬 큰ㅡ옷을 빌려 입어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중간중간에 노란 스탠드불이 들어온 것만 제외하면 어두컴컴했다. 선담은 거실부터 시작해 부엌과 복도를 살폈다. 분명 백진이 들어온 흔적이 있었지만 집안은 조용했다. 요즘 일이 피곤해서 귀가하자마자 곧장 잠에 빠져들곤 하는 그였다. 선담은 마침 잘되었다며 침실 옆 옷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끼이익ㅡ
백진은 침대에 있었다. 예상대로 잠들어 있었다. 얇은 이불을 허리까지 덮고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아저씨…….”
선담은 침대 끝에 우두커니 서서 백진을 불러보았다. 가뜩이나 작은 목소리로 멀찍이 서서 불렀으니 반응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선담은 침대에 올라 엉금엉금 기어 백진의 넓은 등짝에 자신의 가슴을 포갰다. 그의 옆통수에 옆통수를 붙이고 끌어안아 잠시 숨결을 맞추었다. 백진이 잠에 잠긴 신음을 흘렸다.
“……재밌게 놀다 왔냐, 꼬맹이.”
“네.”
“뭐 먹었어.”
“맛있는 거요.”
“나만 놓고 다녀오니까 좋냐.”
“완전 좋았어요.”
그가 웃자 마주 닿은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백진은 잠시 조용하더니 “흐으…”하고 신음하며 몸을 뒤집었다. 그 바람에 선담이 뚝 떨어졌다.
“어르신 등짝에 올라탈 생각을 하다니.”
“꼭 올라타라는 것처럼 보여서요.”
“올라타는 게 좋냐?”
백진이 떨어진 자신을 도로 끌어 당겨 배에 올려주자 선담이 히히 웃으며 얼굴을 파묻었다. 백진은 꼭 영역확인이라도 하듯 선담의 가르마에 코를 묻었다. 그러다 문득, 선담이 몸을 크게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말없이 선담을 더욱 꽉 껴안았다. 선담 또한 갑작스럽게 전율하듯 떨리는 제 사지를 추스르지 못해 당혹했다. 아무리 의연한 척 해보려 해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당연했다. 오늘은 참 힘든 하루였다.
“꼬맹아. 너 떤다.”
“괜찮아요.”
“추운 건 아닌 것 같고, 어디 아프…”
“아니에요, 그런 거.”
“근데 왜 그래.”
자신이 왜 이러는지는 뻔했다. 가혹한 일정을 가까스로 마치고 백진의 품에 무사히 들어오니 안심이 되어서 그런다. 너무 좋아서 그런다. 석재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손끝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던 순간까지 모두 마치고 돌아와, 드디어 백진의 품에서 일단락되어 그런다. 허나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어서 선담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진은 더없이 자상한 얼굴로 그에 응해주었다. 허나 그 시선이 곧 새카맣게 그을렸다.
“꼬맹아, 네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걱정이다.”
“제가요…?”
“그래, 오늘 인표선배한테 다녀왔어. 너, 뱃속에 있는 게 몸에 정말 안 좋다더라. 그래서 나는 그거 얼른 끄집어냈으면 좋겠다. 네 결정을 기다리려고 했지만 그것도 4개월이나 지났고. 그러니까 이제 고집 그만부리고 정리하자.”
“하, 하지만,”
“아버지께는 이미 부탁드려놨어. 네가 실제로 임신을 하든 안하든 그건 상관없이 나와 수정에 성공했다고 이슈를 타게 될 거야. 놈도 그걸 보겠지. 그러니 네가 굳이 그걸 품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어.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이 정말 안 좋다. 그딴 거 빨리 떼어버리자.”
“아저씨.”
“제발, 꼬맹아, 없애자. 부탁할게.”
선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돼요.”
백진은 선담을 안은 채 바로 일어나 침대 장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왜.”
“……….”
“왜 안 돼.”
“……….”
“어서 말해봐.”
그것이 네 몸을 썩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선담이 쓸데없이 놀라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어차피 없앨 건데 굳이 겁을 줄 필요는 없잖은가. 백진은 언제나 그랬듯 선담이 대답을 들려주길 기다리며 그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선담은 백진의 허벅지에 올라앉아 그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러나 불현듯ㅡ선담이 마땅한 대답을 찾기도 전에ㅡ백진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스탠드 조명을 더욱 밝게 켰다. 그는 선담의 목주변을 손끝으로 훑었다.
“뭐야.”
선담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가 목이 졸린 상처를 발견한 것이었다. 손톱이 박힌 상처가 꽤 깊긴 했는데 단박에 걸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선담은 당혹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진의 눈빛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 아저…”
“이게 무슨 상처냐고. 어?”
“아저씨…….”
그제야 선담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백진을 끌어안았다.
“아저씨,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저씨가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뗄 수 없어요. 절대 애기로 만들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제가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해해주세요…….”
백진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 네가 그걸 뱃속에 달고 다녀야 되는데! 그게 네 몸을 갉아먹고 있다고 해도 그럴 거냐!”
“……갉아 먹다니, 뭐가……”
“복잡해서 넌 설명해도 몰라. 어쨌든 그 수정란이 썩는 게 시간문제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떼어놓고 얘기해야 돼!”
“……싫어요.”
“선담아!”
순식간에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는 걸로 봐서는 저도 충분히 겁이 나는 모양인데 자꾸 고집부리는 이유를 알지 못해, 백진은 속 타는 마음을 참다참다 결국 윽박질렀다. 목소릴 높이긴 싫었지만 녀석이 자꾸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니 답답해서 그랬다. 어째 몸의 주인이라는 녀석이 남들보다 자각이 더 없나 싶었다. 움찔 놀란 선담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오래 안 걸려요.”
“그러다 임신하거나 썩으면 어쩔 건데.”
“괜찮아요. 이 일이 끝날 땐 이 씨앗도 없을 테니까요. 이 불쌍한 걸 낳아서 기를 순 없으니까요.”
선담은 전처럼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 몸이 죽을 수도 있다는데도 이렇게나 완고하니 백진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진은 생각했다. 정 그렇다면 끌고 가는 수밖에.
이 녀석이 황소고집이란 건 진작 알았다. 지난 반년동안 그 수정란 좀 어떻게 해보겠다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꺼내보았지만 씨알이나 먹혔나. 자신은 물론이고 인표도, 하물며 석재도 녀석의 맘을 뒤집지 못했다. 어린 게 하도 고집을 피우니 일단은 따라주었지만 지금부터는 얘기가 달랐다.
연백진은 녀석의 아픈 뱃속 사진을 보며 자신이 흘린 피눈물을 기억하기로 했다.
인간의 탈을 쓴 그놈에게 더 이상 물렁하게 대해줄 수 없다는 결의를, 악마가 되어서라도 홍선담의 존엄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그 결심을, 잊어선 안됐다.
백진은 선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홍꼬맹.”
화를 내다가도 이렇게 금방 풀어주려는 그를 알기 때문에 선담은 살풋 웃었다. 가슴 한쪽이 쓸려나갈 것처럼 아팠지만 백진은 그 표현을 이마에 입 맞추는 걸로 대신했다.
“어서 털어놔. 이 상처가 뭐고, 대체 네가 왜 주사를 거부하는 건지.”
이미 자신은 마음을 정확히 하고 묻는 건데도, 그래도 선담은 침묵을 고수했다.
“목에 상처와 네가 몸을 아끼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이유, 둘 다 알아야겠어.”
선담은 백진의 깊게 패인 훌륭한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늘 응연하고 듬직한 이 사람은 어느샌가 자신에게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홀로 세상에 맞서겠다는 비현실적인 포부를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파할 테니까. 자신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석재와 백진이 걱정하고 가슴 아파할 테니까. 그러니 그들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들에겐 착하고 어여쁜 홍선담의 모습으로 남고 싶었다. 그리고 이 일이 모두 끝나면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백진이 이렇게까지 걱정하니 자신으로서도 더는 독하게 마음먹을 수가 없었다. 독기를 품어야 할 쪽은 따로 있지 않은가.
독을 품어야 할 방향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진심을 꺼내면 백진이 크게 실망하고 자신을 매몰차게 무시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주저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반년동안은 아예 키스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그 또한 혼란한 상태일 텐데 여기서 이런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자신이 없었다. 그는 석재와는 달랐다. 석재야 마음이 약하고 자신에게 큰 동정심을 품고 있으니 무슨 짓을 벌이든지 돕겠다고ㅡ말만이라도ㅡ그리 했다지만, 백진은 그보다 훨씬 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아닌 건 아닌 사람이었다. 겁이 났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두렵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그에게만은 예외인 것 같았다.
“아저씨.”
선담이 가까스로 입을 열자 백진이 선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 말해.”
“그러니까……”
쓰라린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전상목 팀장님의…… 손가락을 잘랐어요. 여덟 개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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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 나 정말, 이 일을 어째……!“
한적한 응급실이 어느 여성의 울부짖음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 옆에는 열댓에 가까운 식구가 붙어있었고 어린 자식도 둘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사지에 피갑칠을 한 채 수술실로 이동 중이었다.
“언니! 정신 좀 차려요! 언니가 이러면 배호는 누가 돌봐! 언니! 언니!”
남자가 발견된 건 30분 전. 고속도로 옆에 난 지름길로 향하던 어느 가족이 피투성이의 남자와 울고 있는 아이 둘을 발견해 신고했다. 남자는 마디를 포함한 손가락 여덟 개가 절단된 상태였고 오른쪽 팔에는 50cm가 넘는 깊은 자상을 입었다. 절단된 손가락도 찾지 못한데다 대처가 늦어 오른팔의 신경이 많이 훼손됐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재활운동은 해봐야겠지만 아마 제구실을 못하게 될 확률이 더 높다고. 아니, 그 전에 출혈이 극심해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부모님 생신잔치라고 모인 자리에서 사람 하나가 죽어난 판이었다.
수술을 위해 준비 중이던 남자는 짐승처럼 우짖는 자신의 아내에게 핸드폰을 갖다 귀에다 대달라고 했다. 그녀는 이 양반이 정신 들어서 한다는 소리가 웬 핸드폰이냐고 미친 여자처럼 날뛰었다. 그는 그런 아내에게 어서 길호문 소장에게 연락을 취해달라고 되레 고함을 질렀다. 그가 흥분할 때마다 잘린 뼈마디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고통에 겨워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그는 반드시 길호문하고 통화해야 한다고 악을 썼다.
[여보세요.]
“소장님, 저, 전상목입니다.”
전상목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목소리를 쥐어짜느라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오늘 고향 내려간다지 않았어?]
“예, 급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 헉, 연락드렸습니다.”
[찬찬히 말하게, 이 사람아. 뭔데 그래?]
“아무래도 소송에서 저는 빠질까 합니다.”
[뭐야?]
“아들 녀석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예,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거고요. 근데 기러기, 헉, 기러기 아빠가 되기는 싫고 해서 같이 떠날 생각입니다.”
수화기를 대주는 아내의 표정이 어그러졌다.
[자네 이러기야,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가 좀 바쁘니 다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마 한동안 연락이 안 될 겁니다.”
[뭐야?!]
“……건강하세요.”
[이봐, 전상목이! 전상목이!]
아내에 의해서 전화는 툭 끊어졌다. 소란 후 찾아온 것은 정적이었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여보,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런 거지? 난 몰라… 이이가 정말, 미쳤나봐….”
“내 걱정 말고 빨리 항공편이나 알아봐. 여기서 떠야 돼. 그리고 모두 입 다물어야 돼. 우리, 우리는 오늘 일 전혀 모르는 거야. 알았어?”
“오빠, 괜찮은 거야? 세상에….”
“당신 미쳤어?!”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쿨럭! 헉…!”
“여보!!”
전상목은 아예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그들과의 소통을 차단시켰다. 옆에서 아내와 그의 식구들이 무어라 따지고 들어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윽고 수술실이 개방되자 그는 새카만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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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힘들게 고백했다.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고 좀 더 주장하고 싶었지만 이미 주저리주저리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해서 차분히 돌아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탁상에 놓인 자명종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초침은 평소와 똑같은 속도로 움직였지만 어쩐지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느릿느릿한 시간에는 백진의 침묵도 일조하고 있었다.
나쁜 짓인 걸 알지만 도저히 저들을 하늘의 심판, 혹은 이 나랏법의 심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죽인 어린새끼, 그들이 쓰레기처럼 다룬 존엄성, 그들이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 작은 소망, 그런 것들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비관적인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자들이 결백한척하며 잘 사는 모습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말할 줄 알고 생각할 줄도 알고 움직인다고는 하나, 결국 자신은 도너로써 그들에게 소비 당했다. 그 당시엔 참 멍청해서 그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무지를 빌미로 그들은 발버둥치는 자신을 가르고 또 갈랐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얼마나…… 얼마나 혹독했던가. 그렇게나 아파서 살려달라고 했는데도, 너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며 그들은 별의별짓을 다했다.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는데. 누가 가족을 실험의 희생양으로 삼겠는가……. 애초에, 가족은 없었다.
그렇게 하늘로 가버린 첫 애기.
함께 숨 쉬고, 함께 고동치며, 행복하게 살아갈 날을 얼마나 오래 꿈꿔왔던가. 이 애기를 낳아서 날 사랑해주는 남자와 날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울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선담은 눈물을 참았다. 어서 백진이 침묵을 끝내주길 바랐다. 조용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 이해해주세요…….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안돼요. 못하겠어요. 그 사람들도 저만큼 아파야 돼요. 저는, 저는 그 사람들에게 고통만 받은 게 아니라…… 버려지고 방치되었잖아요. 그냥 아프게만 한 게 아니라 저를……”
계속 침묵을 유지하는 백진 때문에 선담은 애가 달아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기서 백진이 그만두라고 다그치면 자신은 아마 움직일 힘마저 잃어버릴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묻는다면 창피해서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입에서 부정의 말들이 쏟아져 나올까봐 식은땀이 흘렀다.
“뭐로?”
마른 풀줄기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선담이 고개를 들었다.
“네?”
“손가락. 뭐로 잘랐는데.”
“………. 칼…….”
백진은 선담을 세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끊길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러나 확고하게 선담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너 그러다 걸리면 정말 빼도 박도 못 해.”
선담은 덜컥 놀라 품에서 빠져나왔다. 옷깃을 부여잡은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저씨…….”
그의 눈동자는 초월한 것같이 고요했다.
“물론 내가 막아주겠지만 그래도 너, 똑같은 인간 되고 싶어? EEC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 가뜩이나 아픈 네가 왜 가당치도 않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그 사람 손가락을 자르려고 한 건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다시는 그러지 마.”
선담은 감정이 격해져 백진의 뺨을 후려칠 뻔했다. 허나 그러지 못한 이유는, 백진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은 자신의 탓이 컸기 때문이었다. 석재는 일단 다 덮어놓고 오냐오냐 해주었다손 쳐도 백진에게서는 이런 대답이 날아올 걸 짐작했지 않았나. 어차피 석재도 백진에게 이 일을 전달할 요량으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백진은 자신의 실질적인 보호자였다. 선담은 그동안 자신이 그런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숨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
“그래.”
“저 그럴 자격 있어요.”
백진이 미간을 그었다.
“홍선담.”
“제가 그날 그 방으로 끌려간 거…… 선배 혼자서 저지른 일 아니에요.”
“……ㅡ?”
“아저씨가 회의에 들어갔을 때, 길호문 소장님하고 전상목 팀장님이……”
그 순간 백진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하나를 떠올렸다.
청테이프.
“그 사람한테 저를…… 넘겼어요.”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길호문의 수염에 더덕더덕 붙어있던 청테이프. 그것은 창고에서 발견한 자신의 비서들을 묶어놓았던 그것이었다. 사고 후에 EEC를 뒤집어놓고 선담을 돌보며 새 기관을 대체하고 아버지를 설득함과 동시에 최은협까지 쫓는 등, 여러 일에 휩쓸리면서 잊고 있었던 것. 그 청테이프는 길호문이 남겼던 결정적인 증거였다. 선담이 백진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일축해놓았다.
“원치도 않는 새끼를 만들라고 저를 홀로 가둬놨어요. 도와달라고 울고 매달렸는데도 웃으면서 이해해달라고 했어요. 문을 걸어 잠그고 내 몸에 함부로 들락거리는 사람한테 저를 혼자 남겨두…”
“선담아, 진정해. 선담아.”
백진은 쉬지 않고 털어 놓는 선담을 끌어안았다.
반대로 선담은 길게 말한 걸 후회했다. 그렇잖아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싶었다. 석재가 말하든 말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뚝 잡아 떼버리면 될 걸. 백진의 노곤한 마음에 더한 불길을 심어놓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미칠 것만 같아서 선담은 백진의 옷가지를 꽉 잡고 심호흡했다. 그러나 대답은 쉴 틈도 없이 금세 다가왔다.
“다음부터 손쓰는 건 내가 한다.”
의미를 몰라 선담은 “네…?”하고 되물었다. 백진의 넓은 손바닥이 뺨을 감쌌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지. 미안해.”
“아, 아니…… 괜찮아요.”
“그들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거, 왜 더 일찍 나한테 왜 말 안했어?”
선담은 난감해 했다. 그러자 백진이 번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참 병신이지…… 그런 걸 잊고 있었다니…….”
“아저씨……”
“앞으로는 내가 움직인다. 넌 얌전히 내 입에나 들어가 있어. 괜한 손에 피 묻히지 말고.”
믿을 수가 없었다. 선담은 멍하게 입을 벌리고 백진에게 붙들려 있었다.
“꼬맹아, 믿어줘라. 널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 그럴 능력도 된다. 네가 아픈 건 이제 지겨워. 네가 고생하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기죽어있는 꼴은 못 보겠다.”
“아저씨, 아저씨는 유명한 회사 사장님 아들이니까 그러지 말아요. 전 괜찮아요.”
백진은 웃었다. 자신에게는 고갈되지 않는 힘이 있으니까 그 때문에라도 움직여야 한다고 다짐했던 그였다.
“너한테 예뻐 보이려고 이러는 거 아니니까 괜찮다는 말도 하지 마. 필요 없어.”
“아저씨 정말,”
“오늘 나도 나와 약속한 게 있으니까.”
백진은 선담의 머리를 한번 헝클여놓고서는 비 내리는 창밖을 노려보았다. 우뚝 선 콧날과 수려한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은 고요했으며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선담조차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감히 거절할 수 없는 공기가 침실을 묵직하게 메웠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이 남자만의 강고한 분위기 어딘가가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칼자루를 대신 쥐어주겠다는, 아니, 함께 쥐어주겠다는 뜻인가. 선담은 눈물이 핑 돌아 애써 꾹꾹 눌렀다. 덕분에 이는 악물고 눈은 꾹 감고 미간은 있는 대로 찡그리는 우스운 얼굴이 되었다. 질타가 날아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동여매고 있었는데 백진이 이렇게나 너그럽게 받아주니 날아오를 듯 기뻤다. 벌써부터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두 사람은 결코 옳지만은 않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몰랐다. 잠시의 시간이고 그것이 정당한 일일지라도 결국엔 마음에 큰 흔적으로 남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좋단다.
“………. 아저씨가…… 저 미워할 줄 알았어요.”
조용하던 선담이 속삭였고 백진은 기가 막혀 물었다.
“내가 왜.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알잖아.”
“그건 알지만, 하지만 요 근래에도…… 계속 피하셨잖아요.”
“언제.”
원래는 신경 쓰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갑갑했던 마음이 한결 풀어지면서 선담은 입이 가벼워졌다. 뒤늦게 너무 많이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백진의 의아한 시선이 면전에 떨어진 후였다.
“전상목 팀장한테 왜 그랬냐고 물은 거? 그건, 내가 네 보호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어. 난 그 인간이 네게 그랬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
“그게 아니라…”
선담은 더듬더듬 말을 더듬어나갔다.
“……도 한번도 안 해주셔서…… 저는 당연히 아저씨가, 어…”
“크게 말해봐. 하나도 안 들려.”
“그, 그날 이후로는…”
처음에야 험한 일을 겪었으니 그도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더러워진 제 몸뚱이에 관심이 없어져서라고 몰래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연인같이 입술에 키스하는 일이 없어졌으니까. 더욱이 그렇게 지낸지 반년이나 됐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하도 안하다보니까 타성이 되어버린 걸까? 가끔 정말 필요할 때 이마 따위에 해주는 입맞춤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선담은 백진과 유지한 사이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싶었다. ‘연고 없는 보호자’와 ‘애인’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총애를 받더라도 연인으로서는 지낼 수 없는 게 아니겠냐고. 보호는 해주겠지만 애인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답답하게 왜 자꾸 끌어? 크게 말해.”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어서 선담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백진이 꽁꽁 가둬둔 선담의 속내를 눈치챘다. 정숙하던 분위기를 깨트리며 그가 크게 웃었다.
“우리 꼬맹이가 아저씨 뽀뽀 받고 싶었구나.”
“아……!”
선담은 그대로 몸이 번쩍 들려 시트위에 벌러덩 자빠졌다. 식겁해 비명 치려는 입술이 백진의 두툼한 혀에 콱 막혔다. 입안이 가득 찼다. 볼 안으로 들어찬 혀가 입천장을 누볐다. 치아를 순식간에 훑고 혀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인 만큼 거칠었다. 숨이 부족해 선담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어푸어푸 거렸다. 백진이 잠시 쉴 틈을 주자 두 사람의 입술이 타액으로 구름다리를 형성했다. 당혹한 선담은 백진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 말아요. 장난치지 말,”
장난이 아니라는 듯 커다란 손바닥이 선담의 두 눈을 덮었다. 백진은 벌게져 반쯤 벌어진 입술을 다시금 탐했다. 시야가 어두워진 선담은 대답도 못하고 호흡을 챙기느라 헐떡거렸다. 키스가 멎자 이윽고 뜨거운 호흡이 다가왔다.
“내가 못난데다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 널 지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잘해주지도 못하는 거 같아서 감히…… 자신이 없었어. 내가 못난 탓이야. 신경 쓰지 마라. 이제부터라도 만회하기로 했으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는 선담의 마음을 요동치게끔 만들었다. 이대로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울지 않겠다는 각오가 작심삼일이 되어버릴 테다. 선담은 눈을 덮은 손을 치워주지 않고 목덜미와 귀에 입 맞추는 그에게 혀를 내밀었다. 분홍색 혀는 그를 유혹하는 색으로 젖어있었다. 백진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것이라 직감하여, 선담은 그의 어깨를 꼬옥 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저씨가 해주는 키스가 좋아요. 아저씨…….”
“나도. 너한테 하는 키스가 좋다.”
“다시는 아저씨한테 숨기지 않고, 숨지도 않을 게요. 미안해요. 아저씨를 아프게 한 것도, 순간이라도 날 믿지 못한다고 맘속으로 울컥한 것도…… 모두 미안해요. 아저씨.”
백진은 말없이 선담의 입술을 핥아주었다.
“아저씨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도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 미안하다는 말, 다시는 안 할 거예요.”
선담은 태동을 느꼈을 당시보다 더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백진에게 속삭였다.
“다시는…… 다시는 안 할 거예요…….”
-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몸 특유의 얇은 허리가 동그랗게 꺾여서 낭창낭창 흔들렸다. 자꾸 휘어 흔들리는 허리 아래는, 매우 부끄러운 곳임에도 상대에게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얀 허벅지가 맞물리는 자리, 회음의 뒤쪽 깊은 골짜기에는 부드러운 틈이 숨어있었다.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여리고 여린 성역. 자신의 일부가 그 좁은 틈을 벌리고 들어가 있었다. 어느새 그 틈은 녀석의 피부결만큼이나 하얀 체액에 범벅되어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뜨거웠다. 헐떡이는 좁은 가슴을 쓸어주었다. 돌기를 건드리면 녀석은 바짝 긴장했다. 여러 여자를 겪어보았음에도 한번도 본 적 없는 예쁜 유두였다. 남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진분홍색. 볼록 선 돌기도 윤기가 흘렀지만 그 주변에 퍼진 젖꽃판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것은 유두둘레에서 분홍색으로 퍼져나가다가 피부결에 섞여 사라졌다. 그 면적이 꽤나 넓어서 무진장 색스러웠다. 그걸 빨아주면 금세 아래를 세우고 녀석은 울먹거렸다.
‘홍당아, 왜 울어? 아파서 울어?’
처음엔 아마도 아파서 울었을 테다. 남자가 남자를 받아들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인가. 운을 떼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프다고 도망치려는 어린것을 강제로 품에 담아서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진다고 몇 번이나 달랬다. 욕망을 참지 못했던 게 잘못이었다. 아프다는 것에 자신은 개념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녀석은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달려들 때마다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가 다리사이가 쓰리면 어쩔 줄 몰라 했다. 가끔씩 피도 났는데, 그 피를 보면 녀석은 입이 땅콩모양처럼 되어서 울먹울먹 거렸다. 지켜보는 상대한테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저 원망스런 눈으로 울며 쳐다보는데, 약을 발라주고 미안하다고 얼싸안아 몇 번이나 소리 내서 뽀뽀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울음을 뚝 그쳤다.
헌데 웃겼다. 싫다는 사람 건드리는 취미도 없었는데 녀석이 그러면 정말 죽도록 좋았다. 점점 여자들을 멀리하게 되고 녀석에게만 집착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하나하나가 다 귀엽기만 하던 녀석이었는데 몸을 섞고 나니 그게 더 강해졌다. 녀석이 남자라는 자각도 없었다. 내가 키운 녀석 내가 잠식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아무도 자신을 재제하지 못했다. 아니, 재제할 사람도,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공식이 성립했다.
녀석은 그저 내 것이라고.
이미 내 것이니까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고.
그 날은 처음으로 선담이 쾌감에 운 날이기도 했다. 여느 때처럼 잘 달래서 좋은 냄새가 나는 몸을 실컷 애무하고 앞부분만 조금 밀어 넣었다. 헌데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을 몰아내고 싶어 할퀴었을 녀석이 시트를 부여잡고 온몸을 꼬았다. 사실 신음도 흘렸다. 꿀이 녹는 듯한 신음이었다. 그때의 감격은 겪어본 자가 아니면 절대 모른다. 울음소리에 흥분해 조금 거칠게 움직였다. 처음엔 겁을 먹었는지 몸을 굳혔지만 곧 녀석은 잇달아 신음했다. 처음이었다. 어딘가를 쿡 찌르면 허리를 들고 짜르르 울다가 쑥 빼면 허리를 흔들었다. 서툴렀지만 녀석은 한껏 느꼈다. 길게 패인 배꼽에 타액을 가득 담고서 녀석은 자신을 불렀다.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걸 자꾸 여기저기 쿡쿡 쑤셔서 방해하자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가뜩이나 물기가 많은 눈동자가 어찌나 촉촉하던지,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녀석에게서 저 또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녀석과 자신은 그렇게 눈으로 이야기하며 밤새도록 비희했다.
‘선배, 사랑해요……. 많이요. 많이, 사랑해요.’
홍선담이 열다섯, 자신이 스물셋이었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생각했으리라. 녀석과 애를 가지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RRRRRR
밤새 커튼을 치지 않아 침대 위로 햇빛이 내리 쬐였다.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던 최은협은 방금 전까지 꾼 꿈이 기억나지 않아 침대에 누운 채 그대로 있었다. 분명 꿈을 꾼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손끝하나 움직이기 어려운 전율상태였다.
RRRRRRㅡ
“……여보세요.”
[신재우 고객님, 모닝콜입니다.]
은협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침마다 누군지도 모를 이름을 들으며 깨어나는 게 싫었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적어도 연지애에게만은 잡히고 싶지 않았다. 막말로 쓸모없어진 그녀를 마주보고 신파를 찍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연백진이 제 여동생을 뜯어말리고 있을 것이다. 부잣집에서 공주대접 받으며 자란 여자니 남자의 무시는 절대 참지 못할 테고, 저가 먼저 질려서 떨어져 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미 반년이나 지났으니 벌써 딴 남자를 꿰찼을지도 모르지.
그날 선담을 혼자 남겨놓고 자리를 뜬 건 무차별적으로 떨어질 처벌을 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헌데 그나마도 수배가 안 된 것으로 보아 분명 길호문이나 연지애 중 하나가 말렸을 것이다. 만약 수배가 된다 해도 절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반대로 요즘 들어 연백진에게는 발각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PC는 강한 약물이기 때문이었다. 별탈이 없었다면 99% 수정했을 홍선담이 보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배가 남산만 할지도 모르는데. 사실은 가까이에서 한번 보고 싶었다.
바라지 않은 일이었대도 배에 들어차기 시작하면 그 정 많은 녀석이 새끼를 떼어낼 리는 만무했다. 새끼에게서 증오를 느낄지언정 절대로, 절대로 지워내지는 못한다. 절대 못 지울 것이다. 남들은 다 지우는 기형아 때문에 두들겨 맞는 봉변을 당했는데도 폭우를 뚫고 도망쳐서 새끼를 지키려고 했던 녀석이다. OPC가 제 역할만 했으면 자신의 씨앗은 녀석의 뱃속에서 크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은협은 대충 룸서비스를 시키고 소파에 앉았다. 이곳으로 이동한 지 열흘이 됐지만 아직도 자리가 불편했다. 결국 은협은 뉴스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하고 소파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ㅡ당신 절대 가만 두지 않아.
이제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반년이면 녀석도 화가 많이 수그러들었겠지. 태동도 쉼 없이 느낄 테니 더 이상은 연백진이라는 놈에게 기대고 있을 수만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남의 새끼를 키워줄 아량까지는 없을 테니. 사랑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에 그놈은 녀석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상처받을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애가 들어섰을 테니 별수 있나.
은협은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리고 쓰게 웃었다.
“멍청이…….”
그때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기업 백람에서 지원하던 비공식 연구단체가 세계최초로 인공자궁에 수정을 성공시켰습니다. 작년 9월, 미국의 PTA사의 자본분할 공황 당시 한국으로 귀환한 인공자궁 연구팀은, 해체된 후에 새로운 기관으로 정비되며 비공식적으로 연구를 꾸준히 진행시켜왔습니다.]
은협은 고개를 들어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정된 정자로 진행한 연구는 피험자의 건강에도 이상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번 일로 의학계의 관심이 한국의 작은 단체에 집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연구가 주목을 받게 될 이유는, 수정에 성공한 기부정자가 백람의 초대회장 연의범 회장의 소개로 도입된 정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생활보호를 위해 기증인의 정보는 밝히지 않았으나…]
은협은 메모지를 꺼내들어 TV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이에 백람은 차후 탄생할 첫 태아를 입양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방안은 조용했다. 방에 하나 있는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당연한 일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방은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던 것이다.
- - - -
선담은 푸른색 보석이 박힌 커프스단추를 차곡차곡 잠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아침볕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 오후, 처음으로 학계에 모습을 드러낼 EEC의 대체기관 공식창설식에 참여해야 하는 백진은 아침 8시부터 채비를 했다. 선담은 졸린 눈을 연신 비비며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셔츠깃을 세우고 전신거울에 서서 타이를 매는 백진에게는 근사하단 표현 말고 따로 붙일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선담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자신의 검은 재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담아! 미안해! 미안하다! 잘못했어!’
선담은 눈을 꾹 감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후회하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역시 웬만한 담력으로 덤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잠도 뒤척였다. 사실 거의 못 잤다고 하는 게 맞았다. 설마 전상목이 죽은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고 생생하게 남아있는 감촉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그날을 회상할수록 남는 것은 위화감뿐이었다. 자신을 지켜보던 두 아이의 눈만 생각하면 역시, 역시 무서웠다.
“꼬맹이, 무슨 생각해?”
타이 한쪽을 길게 빼며 백진이 물었다.
“……전상목 팀장님 생각이요.”
“너무 걱정 마라. 낌새 보이면 바로 막아줄 테니까.”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뿐이에요.”
능숙하게 매듭을 지으며 백진은 웃었다.
“그런데 뱃속은 언제 비울 거냐?”
“……….”
“그거 계속 품고 있을 거야?”
이 주제를 꺼낼 때는 백진의 눈이 꼭 그의 눈 같지가 않았다. 정말 사나웠다. 선담은 어깨가 까라졌다.
“이 일이 끝나면 이것도 제 뱃속에 남아있지 않아요. 말 했잖아요…….”
“그 전에 네가 죽으면?”
선담은 흠칫 놀라 백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의복을 갖춘 그가 손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은 평소처럼 묵묵히 다물려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참혹하리만치 차가웠다. 심상찮은 기운에 선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저…”
“네 몸이 상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어.”
백진은 품에서 중화된 에테르를 꺼내 손수건에 묻혔다. 그때 침실문이 벌컥 열리면서 익숙한 남자가 들어왔다. 서인표였다. 상황을 파악한 선담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저씨……?”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주사 한번에 네 몸 상할 일 없이 빠르게 떼어낼 수 있으니까.”
“……ㅡ!!!”
백진은 통에 들어있던 액체를 손수건에 죄다 쏟아 부었다. 그와 동시에 선담이 질겁해 소리쳤다.
“싫어요! 아저씨, 하지 말아요!”
달려드는 그를 피할 자신도 없는데다 저 손수건이 닿으면 자신은 금세 쓰러질 것이란 걸 선담은 알아챘다. 백진은 자신을 잠재우고 서인표가 안전하게 주사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 창설식에 참여하려고 아침부터 서두른 것이다. 어쩐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다고 전할 때 그가 초연해 보였다. 강제로라도 떼어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토록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러는 게 어딨어요!”
“이런 문제에 상의가 필요해? 이건 당연한 거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네가 피하고 있는 거잖아!”
“싫다고 했잖아요! 제가 서두를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그럼 죽거나 하는 일 없을 거라고요!”
“안 돼, 괴사는 순간이야. 복수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네 삶도 버릴 생각이냐?”
선담이 할 말을 잃었을 때 인표가 백진을 재촉했다.
“백진아, 서둘러. 시간 끌지 말고. 어서 해야지.”
선담이 벽력을 쳤다.
“절대 안 돼! 싫어ㅡ!!!”
그러나 순식간이었다. 백진의 긴 팔을 뻗어 선담의 팔을 덥썩 잡아당겼다. 선담은 저도 모르게 백진의 골반 옆을 뻐억 소리 나게 차버렸다. 문제는 그가 흔들리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안쓰럽게 웃었다.
“이렇게 요령도 없으면서 어떻게 서둘러 복수한다는 거냐. 이번만 내 말 들어. 그럼 그 다음부터는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그는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선담은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평생 단 한번도 이런 각오를 해본 적이 없는데ㅡ그것이 잘못된 아집이라 해도ㅡ그게 막혀버리자 억울했던 탓이다. 울음으로 목이 콱 막혔다. 손목을 잡힌 채 백진을 몇 번이나 차고 때리던 선담은 사력을 다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진도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 앉아 선담의 코를 손수건으로 덮으려 했다. 선담은 그를 향해 애절하게 부탁했다.
“아저씨, 제발요. 제가 이 애를 지우기는 죽어도 싫어요, 제가 죽이는 건 안돼요……!”
문득, 백진의 손이 멈췄다.
“제가 죽이는 건 싫어요. 아저씨가 죽이는 건 더 싫어요! 이걸 죽여서 울어야 할 인간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죽여요……! 내가 두 번이나 죽일 수는 없어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에 기분이 좋지 못했던 백진이 답답함에 소리쳤다.
“홍선담, 정신 못 차려?! 네 몸 아껴가면서 복수를 해야 그게 진짜 복수야! 그놈들 다 죽이고 너도 죽으면 그게 무슨 복수야!”
“안 죽을게요, 저 절대 안 죽을게요! 그 사람들도 안 죽여요! 그러니까 지우지 말아요! 내가, 내가 또 죽이는 건 안돼요! 아직 안돼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인표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어린것이 얼마나 독기를 지독하게 품었는지 눈물을 쏟아버릴 것 같은 얼굴로도 눈물 한 방울 허락 않고 완고하게 발버둥 쳤다. 살기위해 발악하는 것보다 더 처절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허나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필사적이라 보는 사람이 다 가엾다고 여겨졌다. 이러니 연백진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백진이 멈칫하자 선담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 인간이 봐야 돼요! 그 인간이 자기 새끼 죽는 꼴을 봐야 된다고요! 내가 멍청해서 애기를 잃어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해야 된다고요……! 그렇게 안 해주시면 다시는 아저씨한테 오지 않아요!”
“뭐?”
“내가 이걸 죽일 수는 없어요! 아저씨, 제발요……!”
“홍선담!!!”
“싫어요! 절대 싫어요! 아저씨도 평생 안 볼 거예요!!”
백진은 손수건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손에 집히는 건 죄다 부셔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분노로 내뱉는 숨이 엄청나게 거칠어서 백진의 큰 몸이 들썩였다. 선담은 그런 백진의 손을 꼭 잡고 간청하고 또 간청했다. 제발 내 부탁 좀 들어달라고, 내 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선담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여갔지만 백진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닥을 쏘아볼 뿐이었다. 오히려 인표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결국 안 된다고 반복하는 선담의 목소리만 허공을 떠돌고 주변은 죄다 침묵했다. 그 고요한 시간이 길었다.
“아저씨… 제발… 아저씨…….”
이윽고 온힘을 쥐어짜 폭발을 막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백진이 간신히 중얼거렸다.
“인표 형, 조금 미루자.”
이 상황이 겁나긴 했지만 의사로서의 본분을 단단히 안고 온 인표가 더 크게 고함쳤다.
“백진아! 너 미쳤어?! 빨리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너도 알잖아!”
“그렇다고 이 녀석 말을 무시할 순 없어!”
“여, 연백진!”
“이 녀석이 싫다는 거 내 맘대로는 못해! 그게 뭐든 강제로는 안 돼!!!”
“너……!!”
인표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백진의 표정이 무엇보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주먹을 파고든 손톱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백진은 그런 아픔도 잊고 격분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못마땅한 일이라도 홍선담이 이토록이나 바라는데 자신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싫다는 걸 억지로 묶어서 진행하면, 홍선담에게는 EEC나 자신이나 결국 다를 바 없이 느껴질 것이었다. 백진은 반복해서 숨을 골랐다. 녀석이 몹시 걱정되었다. 자신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으니 온몸의 혈관을 통해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화를 넘어선 증오가 눈앞을 시커멓게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빨리 끝내주어야 한다.
역시 자신은 이 녀석에게 약했다. 녀석이 하지 말아달라는 건 정말로 하기 싫었다. 반면에 녀석이 해달라는 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녀석이 못난 짓을 해도 도저히 자신은 이길 방도가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한가지였다.
…ㅡ하루라도 빨리, 복수를 끝내주는 것.
더는 제 손으로 자궁을 붕괴시키고 싶지 않다며 매달리는 녀석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것. 그리고 녀석을 무가치하게 다루었던 자들에게 혈육마저 외면할 고통을 심어주는 것.
백진은 저 못지않게 세게 호흡하는 선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도 악을 써서 힘이 풀려버린 선담은 그대로 백진의 가슴팍에 기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백진은 자그만 가르마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애정이 담겨 있다기보다는, 조급하고 급박하고 애타는 심정이 묻어나왔다. 선담의 눈가가 빨개지는 만큼 백진의 눈가도 붉어졌다. 인표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선담아…….”
낮게 흔들리는 괴로운 목소리에 선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저씨, 아저씨까지 이렇게 아프게 해서……”
백진은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ㅡ”
ㅡ그래도 이 일이 다 끝나면, 우리 둘이 행복해지자.
선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은 얇은 천 아래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바닥이 길게 패인 흉터를 녹여버릴 듯 뜨겁게 덮었다. 죽음을 오갔던 고통의 표상이자 두 사람의 삶에 지표가 될 커다란 자국을. 선담은 눈을 감았다. 백진은 그런 선담을 잠시 바라보다가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한참 동안 두 남자는 그렇게 앉아있었다.
이윽고 백진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누른 버튼은 백람 본사의 회장실을 지키고 서 있는 어느 남자에게로 연결되었다. 형제 중에 가장 장신인 연백진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달리고 목이 굵은 남자는 우직한 목소리로 핸드폰을 받았다. “네.” 잠시 후 남자는 의아한 눈빛을 했다. 저편의 목소리는 분명 연의범의 넷째아들임에도 낯설었다.
[손 실장, EEC 임직원들 싹 쓸어서 호주에 있는 백람 경공업 단지로 보내. EEC 재설립 해주겠다고 핑계대고 휴가 겸 견학으로 해서. 손 실장도 심부름 하나 하고 같이 가서 나 기다려. 그리고 홍선담이란 이름으로 비자 만들어. 오늘 밤까지 가져와. 위조금액 따지지 말고.]
- - - -
“길 소장님, 오랜만입니다. 좋아 뵈시네요. 근데, 전직원이 다 모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최은협 씨하고 전상목 팀장님은 안 보이네요.”
“음, 두 사람 다 자기 일로 바쁜가보이.”
길호문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최은협은 애초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고, 전상목도 한번 전화를 주는 것을 끝으로 소식이 없었다. 몇 번 연락을 시도해보았지만 집전화는 받지 않았고 핸드폰은 항시 꺼져있었다. 어차피 크게 상관없었다.
길호문 외 스물일곱명의 간부와 연구원들은 이제 막 소송을 코앞에 둔 참이었다. 헌데 그간 무책임하다시피 저희들에게 관심이 없던 백람에서 웬일로 호출을 하여 EEC의 임직원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미 소송준비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EEC가 백람을 상대로 역대 최고의 팽팽할 맞불을 놓는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그 때문에 겁이라도 먹었나? 좋은 일이니 일단 모여보라는 말에 대부분이 참석했다. 아니, 최은협과 전상목만 빼면 한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였다는 게 옳았다. 약 일흔명의 일원들로 EEC 본사건물이 오랜만에 북적거렸다. 하지만 오랜 시간 버려둔 장소인지라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소장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제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죠.”
미간을 문지르며 안경을 벗어놓는 길호문에게 팀장 하나가 다가와서 물었다.
“무얼 말인가?”
“백람 말입니다. 저희들은 음지에 묻어놓고 다른 기관을 창설했다느니, 수정에 성공했다느니. 그간 저희의 노고는 무시하고 수급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전 뉴스보고 며칠 밥도 못 먹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지금 소송을 준비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이길 걸세. 그간 피땀 흘린 걸 보상받자구. 크게 보상받을 게야.”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에요. 막말로 임직원들은 죄다 깡통 차게 생겼는데 입 닦고 모른척이라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소장님께서 선담이를 얼마나 아끼셨습니까? 정이 있으면 그래선 안 되지요.”
“됐네, 됐어. 법이 알아서 해줄 걸세.”
지난 일을 생각하면 심사가 꼬였다. 길호문은 불만을 털어놓아 성질을 부추기는 팀장을 외면했다. 그들이 모여 있는 로비는 온갖 루머와 불평으로 터져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위원장이란 애송이가 도너를 빼돌렸다, 인공수정을 대체 어디서 했나, 위원장이 바뀌더니 연구가 중지됐다, 급료는 받을 수나 있는가, 소송에서 이길 것인가, 언론을 잘 이끌어야 한다 등등, 시끄러웠다. 아까부터 관자놀이가 묵직해 길호문은 소파에 늘어져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어느 순간 로비 안으로 수십의 발자국소리가 진입했다. 끼리끼리 모여 떠들던 EEC 직원 전부가 조용해졌다. 유리로 된 정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은 온통 새카만 양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그 수가 족히 서른은 되었는데, 직원들의 반도 안 되는 숫자였지만 어쩐지 숨 막히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선글라스를 착용해 시선을 차단하고 있었다. EEC는 백람의 정중한 해명을 기대하고 찾아왔던지라 이들의 방문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뭐, 뭡니까?”
검은 무리 중 선방에 선 남자는 묵묵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내일 정오에 EEC 임직원 여러분의 비행 일정이 있습니다.”
“뭐라구요?”
“중국에 EEC 센터를 재설립 할 계획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위원장님께 듣는 걸로 하시고, 제가 지금부터 절차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저쪽에서 길호문의 여비서가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비자도 없는데 갑자기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죠? 게다가 저희는 가족도 있는 몸입니다. 이렇게 난데없이 재설립 어쩌구 하셔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러자 손 실장은 피식 웃었다.
“원치 않으면 빠지셔도 저흰 상관없습니다. 널리고 널린 게 인력이죠. 다만 이것 하나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백람에서는 재탄생하는 EEC에 연간 6백만 달러의 지급율을 보장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비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PTA사에서 처음 인공자궁과 함께 넘겼던 금액을 웃도는 액수였다. 또한 PTA사에서도 쉽게 제시 못했던 금액이었다. 갑자기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도인이 아니고서야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실장은 항의를 담았던 여비서를 포함한 모두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저들끼리 수군거리기는 하나 벌써 입이 반쯤 찢어져 있었다. 그럴 것이다. 그간 고생한 게 헛물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직장도 다시 찾게 된데다 수입도 몇 배로 뛰어올라 짭짤해지지 않겠는가? 내키지 않다던 인간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손 실장은 손목시계를 다시금 확인했다.
“비자 걱정은 마십시오. 백람의 비공식 전용기를 이용하실 계획입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이 자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닷새간의 일정이니 짐은 알아서 꾸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돌리는 명함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위원장님께서도 이틀 뒤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오늘하루 신중히 생각해보십시오.”
일원들은 전용기에 휴가라는 말에 이미 손 실장의 공지는 뒷전이었다. 손 실장은 예전 EEC 입사원서에서 추려낸 명단을 꺼내들었다. 그곳엔 임직원 전체의 실명과 연락처,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는 펜을 들어 백진에게 전해들은 대로 전상목과 최은협의 이름에는 빨간줄을 쫙 그었다.
“공지가 빠짐없이 돌아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치하지만 출석이란 걸 부르도록 하죠.”
그는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을 품는 몇몇 직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웃자 마치 짐승의 이빨처럼 크게 번뜩이는 이가 사납게 드러났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원치 않으면 빠지셔도 저흰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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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에 도착한다고 공지했지만 사실 가장 먼저 호주로 출발한 쪽은 연백진과 홍선담이었다. 백진은 EEC에서 대체된 기관을 등록하고 후원회의 명의 아래에 두었다. 이미 그 전에 뉴스가 나갔던지라 위원회 멤버들은 이제야 제대로 된 기관을 후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했다. 더는 홍선담을 상대로 실험할 일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도너에게 관심이 쏠리기 전에 잠시 자리를 뜨겠다는 명목도 있었고, 호주에는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백진은 일정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비행길에 올랐다.
그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속을 미리 밟아 놓은 비서진과 함께 선담을 옆구리에 끼고 익숙한 통로로 들어갔다. 퍼스트 클래스에는 승객이 얼마 없었다. 대부분의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비즈니스석 맨 앞줄ㅡ퍼스트 클래스에서 가장 가까운 줄ㅡ에는 비서들이 자리했다. 지정된 자리를 받은 선담은 예상한 대로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의, 의자가 침대로……!”
사실 백진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음에도 녀석이 좋다고 콩콩 뛰어다니자 절로 웃음이 났다. 허나 마음속 한자락에는 저 녀석의 몸을 콱 막고 있는 수정란을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입으로는 웃고 있어도 마음이 결코 편치 못했다. 얼른 처리하고 주사를 놓으면 된다고 몇 번이나 자신을 다독여보아도 한번 끓기 시작해 당최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 때문인지 마음만은 울민했다. 온갖 사념으로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앉아있자, 편의를 묻는 신입비서에게 무어라 종알종알 떠들던 선담이 백진 옆에 다가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사이 승무원이 곧 이륙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거기까지는 몇 시간 걸려요?”
“열 시간 넘게 걸려.”
선담은 흠칫 놀라더니 되물었다.
“그럼…… 저기, 여기서는 밥 어떻게 먹어요?”
백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선담의 어깨를 두르고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걱정 마. 기내식 말하는 거지? 여기서도 맛있는 거 실컷 먹을 수 있으니까. 뭐든 주문해.”
퍼스트 클래스가 처음인 녀석은ㅡ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ㅡ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은 좋은 냄새가 나는 하얀 목덜미에 입을 묻었다. 신입비서가 알아서 전면과 후면에 모두 커튼을 쳤다. 그 공간에는 두 사람의 좌석밖에 남지 않았다.
“이 일 끝나면 말 들어야 된다.”
“그럴게요…….”
백진은 선담의 고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위험한 짓도 하지 말고…… 절대 아프거나 하면 안 돼.”
“네…….”
아프지 말라는 뜻은 두 사람 모두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프지 말라는 말.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선담은 백진이 말하는 ‘괴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백진이 필사적으로 자신에게서 위험한 것을 잘라내 주려한다는 것만 알았다. 어차피 자세히 알지 못해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선담은 조심스럽게 백진의 무릎에 올라타 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아저씨, 고마워요.”
선담은 백진의 목덜미를 꽈악 끌어안았고, 그는 등을 보듬어주었다. 언제나처럼 선담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유취가 맴돌았다. 백진은 향에 취했다. 그때 커튼을 슬쩍 젖히고 승무원이 안을 확인했다. 백진은 그녀를 향해 쉿ㅡ하고 사인을 보냈다. 그녀 또한 미소 지으며 안전벨트를 착용해달라고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백진은 선담을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을 함께 묶듯 벨트를 당겼다. 비행기가 진동하고 이륙함과 동시에 두 사람도 같은 끈 안에서 함께 떠올랐다.
-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길호문은 자네같은 비서가 없으면 곤란하다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이제 곧 입시를 치러야 하는 막내아들을 두고 해외까지 날아갈 용기가 없었다. 물론 EEC가 재설립되는 것은 바라마지않던 일이지만 왜 굳이 중국까지 가야하는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덕분에 어제 EEC 건물에서 해산한 뒤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연간 6백만 달러면 한화로 6십억이다. 아무리 날고기는 백람이라도 그 액수를 연구목적 단체에 제시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임직원 개개인에게 떨어지는 액수 또한 지금까지와는 막대한 차이가 있을 테다. 그 생각만 하면 곧바로 짐을 싸서 달려가야 했다. 하지만만 영국에 파견을 다녀왔던 팀원들의 고생담을 들어보면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짐은 다 챙겨 두었지만 9시 종이 치도록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곧 출발해야 하는 시간인데 이를 어쩔까 갈등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 여행은 답사에 가까운 일정이라고 했으니 일행들을 먼저 보내보고 들려오는 조건이 좋으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손태주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EEC의 안금미라고 합니다. 어제 모였던 일원 중 하나고요. 아, 저는 연구원이 아니라 비서입니다.”
[그러십니까.]
“예, 저… 이번에 가는 답사에 전 직원이 모두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없습니다.]
그녀는 대답하는 사람이 참 건성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개인사정으로 이번 일정에는 빠져야 할 것 같아서요. 아직 가족에게 말하지도 못했고 또 저희 집 막내가 내년이면 고…”
[잘 알겠습니다.]
뚝.
상당히 무례한 전화였다. 안금미는 불쾌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쳐다보았다가 쾅 내려놓았다. 비서실장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자가 이렇게나 몰상식한 전화예절을 가지고 있다니.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챙겼던 짐을 풀었다. 옷가지를 꺼내 옷장에 다시 걸고 세면도구를 욕실에 정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를 닦는 그녀에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아들, 이제 왔어?”
그녀는 고개를 빼 현관을 보았다. 분명 문소리가 나는 걸 들었는데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들ㅡ?”
아들의 장난인 줄 알고 그녀가 고무장갑을 벗으려던 차에, 터억! 무언가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며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 앞에 대항하려고 몸부림쳤다. 순간적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몸이니만큼 오만가지 공포가 덮쳤다. 그녀는 필사로 허둥거렸지만 허사였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한 수마가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시야로 들어오는 검은 구둣발이 도합 넷이라는 사실만 겨우 확인하고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귓전에는 누군가 뱉은 마지막 말만 떠돌았다.
“안금미 씨,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재워서라도 끌고 갈 거니까요.”
-
손 실장은 먼지 자욱한 EEC 본사건물로 들어갔다. 피서라도 떠나는 차림으로ㅡ명목상 피서가 맞기도 했다ㅡ짐가방을 들고 도착한 연구원들을 차례로 셔틀버스 두 대에 태워 보내고 홀로 남은 그였다. 그는 거리낌 없이 주인 없는 EEC 내로 진입했다. 정문은 방범시스템으로 관리가 되었기 때문에 비번을 누르고 들어가야 했다. 그가 찾는 곳은 5층의 관리실이었다. 전개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손 실장은 5층의 어느 방에 연백진이 찾는 ‘그것’이 정리되어 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자금줄도 끊기고 후원회도 죽어버린 연구단체의 본사건물이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중요한 샘플은 모두 파기되었다고 했고 그나마 남은 결과물은 후원회에 임시로 보내졌거나 금고와 맞먹는 냉동실에 들어가 있다고 들었다. 손 실장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마침내 501호에 닿았다.
덜컹!
철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여분의 키를 꺼내들었다. 연백진의 명령을 받고 이것을 구하느라 엊그제 새벽에 열쇠공을 불러냈다. 일을 완료하면 호주로 바로 날아가야 하는 그에게 연이은 철야였다. 미리 문을 열어놓을 수도 있었지만 혹여 EEC의 누군가가 오랜만에 들린 건물을 돌아다니다가 흔적을 발견하면 큰일이 될 것 같아서 끝끝내 열쇠 본을 떴다. 밤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열쇠는 매끄럽게 틈을 채웠다.
끼이이익ㅡ
검은 박스가 한가득 쌓여있는 방은 오랫동안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자금에 의지하는 기관의 몰락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쳇바퀴를 굴러 전기만 뽑아낼 줄 알지 쳇바퀴를 제작하는 능력은 없었다. 손 실장은 굵직한 기침을 한번 뱉어내고 뒤적뒤적 쪽지를 꺼냈다. 연백진에게서 받아 적은 메모였다.
[2월달에 촬영된 분량 모두 가지고 올 것]
-
“도련님, 제가 업어드리는 것이…”
“됐어. 치워.”
“예, 그럼 짐이라도…”
이륙 후 호텔에 들어서는 문턱까지, 백진은 잠든 선담을 직접 업은 채 조심스럽게 걸었다. 이번에 동행한 세 명의 비서는 지난번에 선별한 자들이었다. 새로 들어온 그들은ㅡ백진의 스타일을 따라가지 못해 주춤거릴망정ㅡ타성처럼 움직이던 예전 비서진보다 훨씬 빠릿빠릿하고 날카로웠다. 어쨌든 자신에게서 홍선담을 떼어내는 것만은 이유가 어찌되었든 무조건 싫어서 백진은 눈치 없이 손 내미는 비서들을 뒷발로 찼다.
스카이라운지가 훤히 보이는 최상층에 들어선 그는 일단 침대에 선담을 눕히고 인표에게서 가져온 가방을 찾았다. 휴대용 주사세트와 약이 들어있었다. 깊이 잠들어있는 선담의 팔을 거둬내고 주사기를 톡톡 친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네게 도움이 될 거다, 꼬맹아.”
혈액순환을 도와 괴사를 방지시키는 약물이었다. 인체에 해가 없는 최상급으로 들여오느라 수십이 깨졌다. 백진은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선담의 몸에 정성스럽게 채워 넣었다. 순하게 잠들어 있는 녀석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반면에 녀석이 품은 씨앗은 눈이 돌아갈 지경으로 자신을 분노에 밀어붙였지만 겨우겨우 자제했다. 요즘엔 조금만 거슬리는 일이 생겨도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심사가 뒤틀렸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잘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저씨…….”
주사바늘을 조심스럽게 빼낼 때 선담이 슬며시 눈을 떴다.
“깼구나.”
“방금… 뭐에요…?”
“네 몸에 좋은 거.”
백진은 선담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새 주사를 꺼내 다른 약을 짰다.
“이건 수면제. 너 요새 잠 설치는 거 같아서. 좀 자둬.”
“저 계속 자면 아저씨 심심하잖아요.”
“너 자는 거 보고 있으면 되지.”
“많이 잤는데….”
“착륙하기 바로 전에 겨우 잠들어서는 내가 깨워도 못 일어난 주제에.”
선담은 히히 웃었다. 그리고는 백진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EEC 사람들 만나게 해줄 거죠…?”
“일단 한숨 푹 쉬고 나면.”
“비행기는 오랜만이라 긴장했나 봐요. 예, 옛날에 탔던 거하고 달라서…”
“너 촌스러운 거 잘 아니까 따로 고백 안 해도 돼.”
“못됐다.”
주사기를 톡톡 턴 백진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바늘에서부터 천천히 퍼지는 약기운에 선담이 미간을 모으고 숨을 고를 때, 그가 물었다.
“EEC 연구원들하고 무슨 얘기 하게?”
“……….”
“비밀이야?”
“………. 용서하겠다고 할 거예요. 지금으로써는 전상목 팀장님 때 같이는…… 솔직히 못할 것 같아서요.”
더는 백진 앞에서 패악을 부릴 수 없어 다듬은 마음이었다.
“그래.”
“용서하고, 나도 편해지겠다고요. 그리고 아저씨, 그래도 그 사람들한테 제가 심한 짓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보고 있다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말려주세요.”
“알았어.”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선담은 노론해지는 의식을 끄트머리를 잡았다. 자신의 이마와 뺨, 목주변을 훑어지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왜 하필 8개였어?”
“……네…?”
“손가락.”
선담은 축 늘어지는 손끝에 힘을 주어 백진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제가…… 수정하기 위해서 거쳤던 과정이 총…… 8단계였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백진은 잠들지 못해 까맣게 물든 선담의 눈밑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점점 수면 아래로 빠져드는지 선담은 아무 말도 못했다. 백진은 그런 녀석의 손을 꽉 쥐었다.
“속여서 미안해. 말은 다 전해줄게.”
어느새 방안에는 손 실장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침대머리맡에서 쉬 떠나지 못하는 연백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 실장도 ‘도너’라는 이 아이는 처음 보았다. 분명 배가 남산만큼 불러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이의 배는 납작했다. 의문을 품어선 안 되는 입장임에도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들었다. 단순하게 왜 아이의 배가 불러있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손 실장은 연백진이 먼저 인기척을 느낌으로서 제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이야, 손 실장.”
“예, 연백진님”
손 실장은 허리를 숙였다. 지난번에 이루어진 비서팀 물갈이에서 자신의 팀이 완벽하게 제외된 이유는 아마도 ‘해결사’라고 불리는 자신을 필요로 할 때가 많아서일 거라 판단했다. 경호와 ‘뒷일처리’에 저희들만큼 특출한 그룹도 없었다. 손 실장은 연백진이 무엇을 물어올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움직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직감 같은 것이었다. 짐작대로 연백진은 짧게 물었다.
“놈들은.”
“단지 내에서도 가장 낙후한 곳에 모아두었습니다. 연백진님의 경호원은 문밖에 둘 세워놓았고 복도에는 저희 팀 놈들 일곱을 숨겨놓았습니다. 한명은 아예 비서들과 같이 방에 대기시켜놓았습니다. 나머지들은 양 옆방에 두었습니다만 항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저 작은 도련님의 신변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선담을 도저히 한국에 홀로 둘 수 없어서 끌고 왔으니 이 정도 안전은 기해야 했다. 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파일은 책갈피로 인해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었다. 백진은 천천히 파일을 훑었다. 처음은 EEC에 종사한 70여명의 인적사항이 담긴 파일이었다.
두 번째 파일에는 전혀 처음 보는 인물목록이 빽빽이 차 있었다. 아랍, 동남아 출신의 눈이 부리부리한 자들이 수두룩했다. 족히 100명은 되었다. 그리고 함께 복사된 목록에는 만기된 여권이 수백 장이 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호주에서 지정한 날짜를 넘긴지 7, 8년째인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손 실장이 모아놓은 자들의 여권사본이었다. 그들이 불법체류 중이고, 목에 간신히 풀칠이나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붉은 빗금까지 정확히 새겨져 있었다. 백진은 비슷비슷하게만 느껴지는 그들의 얼굴을 한차례 쭉 훑어보고 소감을 떠올렸다.
이들은 아마도…… 고향이 상당히 그리워 무슨 짓이라도 할 자들이리라.
- - - -
길호문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몇 번 눈을 껌벅거리며 의식을 차리려고 했다. 아직 비행기 안인가? 꽤 오랜 시간 잠들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비행이라니 갑자기 지루함이 밀려들었다. 그는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기지개를 켰다. 하품을 쩍 하던 그는,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올수록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희들은 비행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둡고 축축한 어느 공간에 나란히 줄지어 의자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 이게……!”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메아리를 만들며 허공에 사라졌다. 그가 어둠에 완벽하게 눈을 떴을 즈음, 이쪽저쪽에서 신음이 쏟아졌다. 대다수가 비슷한 시간대에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처음엔 여상하게 행동하다가 어느 순간 놀라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다른 이들까지 똑같은 반응을 보이자 길호문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어디선가 째지는 비명소리가 터졌다. 그 소리를 시발점으로 고함을 포함한 웅성거리는 소음이 공간 안에 꽉 차올랐다. 그제야 길호문은 제 한쪽 발목에 쇠사슬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침착하자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모든 일원이 각자 1미터의 간격을 두고 철제의자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의자는 바닥에 딱 붙어있었다. 그렇게 가로로 10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뒤쪽은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인원수를 보건데 약 7줄이 더 있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자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첫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화이트보드 하나가 허옇게 떠올라 있었다. 백람이 급한 공지를 알리기 위해 저희들을 곧바로 강의실로 데리고 왔다고 보기에는 억지스러웠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에 길호문은 말을 잃었다. 사방은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길 소장님! 소장니임ㅡ!”
“여, 여기 있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네, 모르겠어!”
그때였다.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소장님, 소장님.”
“누구야, 안금미? 안금미인가?! 자네 일정에 언제 합류했나?!”
그녀는 대답을 건너뛰고 침을 꿀꺽 삼켰다.
“소장님, 큰일 난 것 같아요.”
“이 아수라장만 봐도 큰일은 이미 났네!”
“소장님, 잘 들으세요. 보통일이 아닌 것 같아요. 저, 저는 납치당해서 여기 왔어요…!”
“나, 납치라고?!”
그녀는 거의 흐느끼는 소리로 털어놓았다.
“집에 출장소식을 알리기 못해서 이번 견학은 미루겠다고 그 실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에게 연락했는데, 그 다음에 누군가 저희 집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눈을 떠보니까 여기에요…! 분명 뭔가 제 입을 막고 잠재웠어요. 에테르 같았는데 눈을 감기 직전에 검은 구둣발을… 커다란 구둣발을 4명이나 봤어요…!”
길호문이 그녀에게 집중하는 와중에 주변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 깨보니 다리 한쪽을 저당 잡혀있는 그들이었다. 점점 어둠이 익어가면서 저희들이 자리한 곳이 사방이 콱 막힌 상자 같은 공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통풍도 되지 않고 습기가 엄청나다는 사실도 말이다. 기분 탓인지 고약한 냄새가 맴돌았다. 발악하는 자들은 땀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제는 웅성거리는 말소리보다 고함치는 소리가 더 컸다.
끼이이이이익ㅡ
순간, 방 안으로 한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뜨는 시점부터 어둠에만 갇혀있던 지라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문밖의 세상을 보려고 악을 쓴 자가 있는지 누군가가 외쳤다.
“여, 연백진!!!”
그 고함과 동시에 육중한 쇠문이 활짝 열렸다. 방이 어느 정도 밝아지려는 찰나, 형광등빛도 들어왔다. 그들은 한참동안 시야를 확보 못해 헤매다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절초풍했다.
문을 연 자는 저희들도 익숙한 손 실장이란 자였고, 그 옆에 서 있는 자는 연백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놀란 것은 그 두 남자의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수십명의 검은 무리였다. 산짐승처럼 새카만 자들이었다. 청결을 유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본래 피부색이 검은자들이었다. 그들의 섬광 같은 눈동자가 휘번뜩 빛나는 순간 강렬한 살의가 느껴졌다. 더욱이 그들은 맞춘 것처럼 몽둥이를 들고 서있었다. 어느 자는 망치 따위의 연장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검은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무리가 문밖을 버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임직원은 이제 고함을 지르기 보다는 넋을 놓았다.
손 실장은 연백진이 입장하자 철문을 닫아 시커먼 무리와 공간을 단절시켰다. 임직원은 벌벌 떨었다. 찰나에 본 것이지만 저 자들이 그렇게나 두려울 수가 없었다. 손 실장은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천정에서 불빛이 반짝 하더니 무리들 앞에 있는 넓은 화이트보드로 빛이 비춰졌다.
“EEC 임직원 여러분, 놀라셨습니까.”
연백진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높디높은 천정에 환기구 5개, 각 바닥에 하수구가 둘씩 있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회색 시멘트가 벗겨져 타일이 보이고 육중한 기체가 드문드문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이지만 지하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메케할 수 없을 테니.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분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아무도 백진의 인사에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손 실장은 묵묵히 백진에게 리모컨을 건넸다.
“무리를 해서라도 여러분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것은 EEC 관계자 여러분과 함께 감상하고자 하는 영상이 있어서입니다.”
그제야 저쪽에서 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친새끼야!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야!!!”
순식간에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은 ‘감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은 공간에 몸을 붙이고 앉아있어야 했다. 발아래는 물기가 많아 축축했으며 강제적인 수면으로 인해 머리가 웅웅 울렸다. 저희들이 챙겨온 짐도 온데간데없었고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그들을 내리눌렀다. 연백진은 그들이 쌍욕을 하고 발광을 하는 동안에도 표정 없는 얼굴로 느긋이 정적을 기다렸다.
“마음껏 떠드십시오. 당신들이 조용해지기 전까진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테니.”
연백진의 충고야 삽시에 묻혔다. 그들은 사방팔방 고갯짓하며 저희들끼리 현 사태에 대해 묻고 답했다. 연백진은 그 사이 리모컨을 천정에 대고 작동시켰다. 흰빛만 받아내던 화이트보드에 어느 순간 물결이 치더니 정지된 화면이 나타났다. 인간들의 입은 그칠 줄을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백진은 화이트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의자를 빼 앉았다. 손 실장은 그의 뒤편에 조용히 서 있었다. 못해도 백 명은 대기하고 있는 밖도 조용했다.
그 침묵은 공간을 물들여갔다. 미친 듯이 떠들어대던 입들이 무언갈 느꼈는지 점차로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한곳에서 고요가 전이되자 하나 둘씩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잔물결처럼 흔들리며 파도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다. 어느새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마침내 연백진은 재생버튼을 눌렀다.
-
혼자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회장실이 오늘따라 연의범의 음울한 콧노래로 서늘한 기운에 꽉 차있었다. 훌륭하게 마감된 기다란 소파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동년배의 늙은이가 커다란 박스를 끼고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깍듯한 자세의 젊은 남자가 하나 앉아있었다. 젊은이는 긴장해 있는 반면, 일전에 연의범이 막내딸을 위해 방문했던 시골 병원의 노의원은 보이차를 꼴깍꼴깍 따라 마시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회장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당연히 모시고 와야지요. 이참에 서울구경도 하시고요. 지난번에 지어주신 약은 우리 지애가 잘 챙겨먹었습니다. 애가 혈색도 좋아지고, 집사람에게 들은 말로는 월경도 일정해졌다기에 감사드리고 있어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노의원은 손을 내저으며 슬쩍 옆 사람을 보았다. 유명한 조간의 기자라고 방문한 이 남자는 벌써부터 기삿감이 어디 없을까 먹이를 찾는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노인네도 뉴스는 보는지라 금세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인공자궁 때문일 것이리라. 백람에서 진행한 인공자궁 실험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지금은 많이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여론은 틈틈이 백람과 남성모체의 수정성공에 대해 떠들어댔다. 노의원은 왜 백람에서 인공자궁에 이름을 내걸었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일전의 당부대로 입은 다물어야 했다. 어쨌든 이래저래 언론을 피해 보호하고 있다고는 하나, 기자까지 회장실에 드나들 정도니 과연 백람의 파워가 하늘을 찌른다고 생각하던 노의원이었다.
연의범이 눈웃음을 치자 기자는 허둥지둥 작은 노트북을 꺼내고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연의범은 그런 젊은이에게 몇 가지를 주의시켰다.
“지레짐작, 살붙이기, 동의 없는 생략. 이런 것은 용납지 않네. 자네 같은 햇병아리를 내 방까지 들어오게 한 것은 오로지 자네가 신입이기 때문에 기사를 비틀고 꾸미는 야비한 재주가 다른 놈들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이야.”
“예, 회장님. 만족하실만한 기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취재가 아닌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질문 던지는 것을 싫어하네. 도전은 좋아하지만 틀에 얽매이는 건 질색이야. 이건 뭐 기자양반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것도 알아. 어쨌든 자네는 내게 질문하지 못해. 내가 말을 줄줄이 하걸랑 그 다음에 자네가 질문을 만들어서 알아서 잘 끼워 맞추시게.”
“예,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소문대로 회장님은 정말 재치 있는 분이십니다.”
“칭찬 고맙네만 내가 날짜를 착각하는 바람에 손님도 오셨으니 간결하게 끝내기로 하지.”
노의원은 어차피 약만 전해주고 가려던 차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송구스러워졌다. 허나 그 또한 호기심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고 구경이나 좀 해볼까 싶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연의범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번에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회장님. 인공자궁 말입니다.”
“선생님도 보셨습니까? 네, 인공자궁이 착상을 성공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아, 자네는 대충 이런 걸 받아 적어도 되네.”
“대단하고말고요. 그, 저… 이런 것까지 여쭈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의사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럽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듣고 싶어요. 정말로 남성에게 인공자궁을 앉혀서 성공한 겁니까? 저는 좀 놀라서 말입니다. 게다가 TV에서는 남성모체라고만 명시하고 기관이나 사진, 어떤 자료도 공개하지 않아서요. 실례가 될까요?”
“하하! 선생님께서 오히려 기자양반 같으십니다. 괜찮습니다. 음… 녀석들도 사생활이 있으니 제가 보호해주는 것뿐, 정말로 모체는 남자아이입니다. 제가 직접 보기까지 했지요. 남자든 여자든 핏줄 욕심이 많은 저한테는 경사로운 일이고요. 원래는 인공자궁을 초반부터 연구하던 EEC라는 기관이 있습니다만 수정에 성공하는 동시에 지금은 해체되었고요, 제 아들 녀석이 관련 기관을 또 하나 새로이 설립했습니다. 제 기억으로 수정한지는 4달쯤 되었습니다만, 인석이 워낙에 도너를 싸고돌아서 말입니다. 저조차도 아직 부른 배를 보지 못했습니다.”
“회장님도요?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제 머리꼭대기에 앉은 놈이 넷째아들입니다. 이놈은 못 말리죠.”
노의원은 진지한 눈빛으로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럼 그 EEC라는 기관은 공중에 붕 뜬 셈일 텐데……. 저도 젊은 시절에, 그러니까 우리나라 연구기관이 체계적이지 않을 당시에 몇번 팀이 깨져서 이래저래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 가라앉으면 좀체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게 또 실험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간 정이 있으니 다들 퇴직금을 쥐어주고 보내거나 다른 수주를 받게 하라고 당부하긴 했습니다만 요새는 제가 아들놈에게 다 맡기는 처지라서 손 놓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언제 한번 단합을 한다고는 했지만 지금은 이래저래 바빠서 말입니다. 언론에서도 EEC에 관심을 두지 않는 만큼, 저도 그다지…….”
연의범은 정말로 전(前)기관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궁금한 걸 잡아내자면 한도 끝도 없었지만, 옆에 기자도 앉아있는데다 자신이 일개 의원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더 묻기가 꺼려졌다. 그가 더는 말을 않자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트기 시작했다.
“그럼 애당초 왜 실험을 EEC에 맡기고 계신 겁니까, 회장님? 탐탁지 않았더라면 한국으로 EEC가 들어온 기점부터 기관을 교체했으면 되었는데요.”
“나는 아무 불만 없었어. 다만 아들놈이 EEC를 맘에 들어 하지 않은 것 같아. EEC가 도너에게 조금 가혹했던 것 같더군. 인권문제라도 논란이 되면 곤란하니까 손을 쓴 거 같은데. 나야 누구네가 연구하든 상관없으니까. 사실 언론에 인공수정 성공사실을 흘린 것도 아들놈 생각이야.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녀석도 한다면 하는 놈이니까.”
“그렇다면 아이는 정말 백람에서 입양하는지, 괜히 이런 것들이 궁금하군요. 묻는다면 실례일까요, 회장님?”
“아직은 실례되지 않는군. 아이는 내 아들이 입양하는 거지 내가 입양하는 게 아닐세. 백람이 입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EEC나, 인공자궁이나, 남성모체나, 그런 것들 모두가 지금은 내 아들 손안에 있다는 걸 각인해줬으면 좋겠어. 다음부터는 이런 인터뷰도 우리 아들 허락 맡아야 할 거고, 인터뷰 대상도 그놈이 되어야 할 거야.”
기자는 잽싸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백람은 거대하고 수많은 주주를 가졌음에도 실질적으로는 회장님과 그 직계 가족에 의해 돌아가는 기업이란 생각이 듭니다. 모두 나눠가지니까요. 아니, 나눠가지지 않더라도 백람의 실세는 결국 그 둥지 안에서만 숨 쉬는 기분이 듭니다.”
그다지 좋은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흘려들어도 금방 그 진의를 꿰뚫릴만한 내용에 연의범은 오히려 껄껄 웃었다. 그 사이 노의원은 연의범이 주문한 약재를 꺼내놓았다. 막내딸이 먹고 괜찮아졌다는 한약을 그대로 다시 달여 온 것이었다. 연의범은 꺽꺽 웃어대더니 기자를 또렷하게 마주보았다. 그 눈빛은 늙은이의 저물어가는 노기 따위를 보여주지 않았다. 불굴의 수령이라는 칭호가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그런 눈이었다.
“새파란 기자양반, 내 자식들만큼 백람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놈들은 없어. 놈들은 내가 백람이란 이름의 소기업을 세우던 시절부터 아비 등을 보고 자란 놈들이거든. 물론 놈들 중에서도 다소 멍청한 놈이 있고 수완이 떨어지는 놈도 있고 정에 약하거나 샛길로 자주 새는 놈도 있겠지마는 이거 하나만은 분명해. 놈들은 남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근성을 숨겨놓기 때문에 내 자식놈들 인거다. 이걸 잊지 마.”
기자는 단숨에 압도되어 눈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그는 식은땀이 흠뻑 올라오는 손바닥을 키보드에 올려놓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렇군요. 그렇다면 회장님,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근성이란 것은…”
“역시 햇병아리는 담력이 약하군. 이 정도 겁 좀 주었다고 바로 빌빌 거리면 쓰나. 연백진이 앞에서는 기도 못 세우겠군.”
연의범은 바짝 졸아 버린 기자를 보고 코웃음 쳤다.
“‘당한 만큼 반드시 되갚아 줘라.’ 이런 헝그리 정신이 없으면 백람의 자식이 아니지. 가끔 무른 놈도 있지만 결국에 피는 못 속인다고. 내 자식들은 죄다 그래.”
- - - -
홍선담은 민망하리만치 홀딱 벗겨져 있었다. 실험용 쥐처럼 하얀 배를 까뒤집은 채 침상에 누워있었다. 얇은 천을 둘러 간신히 중요한 부위만 가리고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많음에도 묵묵하기만 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는 듯했다. 결국 네모난 실험실을 울리는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오래 걱정하셨죠……? 죄송합니다. 정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홍선담은 지지 않고 사과했다.
[저 찾느라 다들 힘드셨다고 들었어요. 허락도 없이 사라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 사실 정식으로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소장님이 바로 들어가자고 해서 다른 분들께는 따로 사과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저도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 ㅡ…!]
무언가 해명하려던 홍선담은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에탄올로 그의 배를 문지르던 연구원 중 하나가 장대만한 바늘을 쭈욱 꽃아 넣었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바늘이었다. 홍선담이 꿈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켜보던 일원들이 그의 팔다리를 잡았다. 홍선담은 미간을 일그러트릴지언정 몸을 진정하려고 애썼다. 허나 연이어 들어오는 약물의 흐름이 급류처럼 빨라지자 사지가 펄펄 떨리는 듯했다. 그 사이 선담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에서 검붉은 피가 쑥쑥 뽑혀나갔다.
[흑ㅡ……!!]
갑자기 선담의 몸이 덜컹거렸다. 그 바람에 몸의 일부를 가려놓았던 천조각이 떨어졌다. 여자 연구원이 그것을 집어 다시 가려주었지만 발광하는 몸을 가려주는 게 쉽지가 않았다. 여자 연구원이 그걸 자꾸 신경 쓰며 올려주려고 하자 다른 연구원이 신경질을 내며 그 천조각을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홍선담은 그들에게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사지를 붙들려 크게 앓았다. 간간히 연구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특정한 누군가를 향하는 것이 아닌 씨발, 젠장 같은 것이었지만 도너를 향하는 분위기는 험악해져가기만 했다. 이내 푸들푸들 떨던 모가지가 축 늘어졌다.
암전된 화면이 밝아지자 사무실이 나타났다. 두 연구원은 서류가 쌓인 책상에 앉아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배변을 제대로 못 가리더라고.]
[내 참. 집에도 들어가 봐야 하는데. 요새 피곤해 죽겠어. 예전엔 이렇지는 않았잖아.]
[무리가 간 게 아닐까 싶어. 모르지. 아무튼 이번엔 1기부터 실패인가 봐.]
[하여간. 도대체 누가 걔한테 따로 집을 만들어준 거야? 그렇게 도망칠 줄 알았으면 이 헛고생 안 하잖아.]
[길 소장님이 그간 수고했다고 잡아준 거라던데.]
그러자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앞날 깜깜하다. 그래서 똥오줌은 누가 가려줄 거래? 미치겠다. 대체 그걸 왜 못 가려?]
[똥오줌은 고사하고 곧 죽을 것 같이 약해졌어. 나는 그냥 빨리 성공이나 했으면 좋겠어. 막말로 죽든 어떻든 간에 벌여놓은 일은 수습해야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지 아랫도리 하나 관리 못하는 건 좀 심했네.]
[누가 아니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다들 피곤한 눈치고.]
[……….]
잠시 맞춘 것처럼 조용해졌으나 곧 푸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우석 씨 얘기 들었어?]
[아, 그거. 실험 중에 똥 싸길래 들어 올려 안아서 볼일 보게 해줬다는 거? 변기에 대고? 막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는데. 뒤까지 닦아줬다나 뭐라나.]
[급하게 하느라 변기에 조준을 못했댄다. 설마만 죽죽 싸대니 그거 청소하는데 죽음이었다고 하더라고. 처음엔 듣고 더러워서 짜증났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왜 이리 웃기냐.]
[그거 텐신약물 과정 때문에 괄약근 조절 잘 못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근데 막상 정말 그렇게 됐다니까 좀 웃겨서.]
남자는 인중에 볼펜을 올려놓으며 그리 말했다. 마치 연예인의 수치스런 스캔들이라도 듣고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남은 한 남자는 그를 보며 꾸짖는 시늉을 했다.
[사람이 참 악랄해요.]
그러자 부루퉁한 대꾸가 돌아왔다.
[나만 이런 소리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암전 후, 다시 실험실 안이었다. 가운을 입은 홍선담이 엎드려 있었다. 머리맡이 구멍 뚫린 침상은 홍선담이 고개를 처박고 편히 누워있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허나 그는 등에 수십개의 집개바늘이 꽉꽉 집혀있어서 곳곳이 시뻘건 게 그다지 편해 보이지 못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면 가늘게 떨리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흐… 흐윽… 자, 잠깐만요…]
울음소리가 실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과정이기에 저리 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번 의식하자 울음소리는 명확히 들리기 시작했다. 바늘을 빼고 다시 꽂고, 연결된 기체를 이리저리 건드리던 일원 중 하나가 침상 아래를 들여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피 흘리는데.]
[뭐? 어디에?]
[잇몸을 물었나봐. 선담아, 그러지 마. 끝나려면 멀었어.]
홍선담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꾸 입술을 씹는듯했다.
[……어쩌지?]
푸른색으로 온몸을 감싼 자 중 하나가 물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는지 움직임도 없고 말도 없었다. 곧 선혈을 확인했던 여자 연구원이 팔짱을 꼈다.
[샘플 내일까지 넘겨야 돼. 뭐라도 좀 물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 뭐라도 물고 있으면 좀 나을 테니까. 그렇지?]
[괜……찮겠지?]
누군가 끼어들었다.
[전상목 팀장이 또 알면 어떡해? 최은협 씨까지 알면 난리 날 텐데.]
[아, 그때 정말 피곤했어. 시끄러우니까 물렸지 그냥 물렸어? 이번엔 문 잠그고 하면 되지 뭐.]
이윽고 가운을 입은 무리는 선담의 고개를 들게 하여 뒤통수에 매듭을 지어 놨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눈알만 굴리던 홍선담은 그들이 자신의 입을 막아버리자 그만 펑펑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에서 토끼똥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무어라 웅얼웅얼거리며 자꾸 풀어달라고 하는 듯했다. 어디가 아프다고 가리키는 것도 같았다. 어찌나 도와달라고 사정사정하는지 악마가 보더라도 동정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난처한 듯 서로 눈을 마주치기만 할뿐, 결코 그것을 풀러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선담의 머리를 다시 침상에 끼워 넣고 혈액을 채취했다. 선담의 울음소리가 점차로 커졌다. 하지만 면역이라도 생겼는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암전 후, 검은 모니터가 나타났다. 그곳은 동굴 같은 어딘가를 비추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걸친 남자 넷이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이 꽉 막힌 채 화면만 떠 있는 방이었다. 화면을 지켜보던 자 중 하나가 어딘가에 대고 말했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화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상을 계속 내보냈다. 물론 모니터에 뜨는 부위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것뿐, 그것이 사람의 내장의 어딘가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집중해 화면을 쳐다보던 한명이 말했다.
[저게 뭐지?]
[뭐가?]
[봐봐,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 거 아니야…? 직장 하부 같은데?]
[설마.]
[아니야, 자세히 봐봐. 저기, 붙어있지 않아?]
[직장이 아니라 돌기 아니야?]
[돌기보다는 그냥 부은 것 같은데?]
씨름이 계속되자 가장 끝에 서 있던 한명이 모니터를 꺼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가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한숨 쉬었다.
[피곤하니까 헛것이라도 보여? 나가자고. 모처럼 토요일인데 요 앞에서 내가 한잔 살게.]
[잘못 본 것 같지 않은데. 잠깐 켜서 다시 보는 게 어떻겠어?]
[나가자. 나도 지치네. 이번 주 내리 야근이었어. 그냥 임 팀장 말대로 하자고.]
그러자 다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크게 하며 가운을 벗는 추세가 되었다. 무언가 주장하려던 자도 곧 입을 다물었다. 허나 그대로 묵묵히 나갔으면 좋았을 걸, 그 중 하나가 농담조로 떠들었다.
[시무룩하기는. 자꾸 그럼 나중에 해부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자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장난이라도 그렇지 그런 말이 어딨어? 농담이 심하잖아.]
[그치만 자네도 궁금하긴 하잖아.]
[하하하하.]
탁ㅡ
그들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화면은 완전히 암전되었다.
“……….”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이했다. 긴긴 영상을 관망하던 무수한 시선은 어느새 현실로 하나 둘씩 빠져나와 그들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두 주먹을 마주 쥔 채 얼굴을 묻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EEC의 일원 대부분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했다. 저 자가 왜 이런 비디오를 틀어놓고 메마른 석상처럼 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 이 영상을 틀어놓은 저의가 무엇인지.
화면에 나타난 상황은 다소 강제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실험의 일부였다. 무엇보다 그 당시 저희들은 일상처럼 행동했다. 누구나 남의 흉을 보고, 농담도 하고 살지 않나? 그러나 희한하게도 화면으로 보이는 저희들은 마치 간단한 동물실험이나 치루는 그런 싸구려 연구센터의 구성원으로 보였다. 알 수 없는 수치심에 낯이 붉어졌다.
“……평생 믿고 사는 게 있었습니다.”
모두가 황망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백진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허리를 구부려 앉아있었다.
“천벌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요. 인간이 지은 죄는 결국 하늘에서 벌해줄 것이라고. 그래서 그 죄를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해 저는…… 제가 죽인 아이의 부모에게 제발 용서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고, 흰 가운도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하늘이 벌을 내릴까봐 두려웠습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수술 중 어린아이를 살리지 못했고 그렇기에 벌을 받을 거라 믿었으니까요.”
길호문은 연백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았다. 백람병원에서 근무하던 연의범의 넷째아들이 의료사고를 내 가운을 벗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연백진은 무리한 시술을 집도했다는 질타를 면치 못하고 거의 매장당하는 수준까지 몰렸었다. 스스로 가운을 벗고, 스스로 그 바닥을 떠남으로서 일을 마무리 지었었다. 그리고 아이의 유가족은 연백진에게서 많은 보상을 받았다. 사실 의료사고란 게 흔한 일이라 대수롭잖게 여겨 잊고 지냈던 일화였는데, 연백진이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연백진은 뜨겁게 웃었다.
‘연백진 씨, 당신은 의사가 소중히 가져야 할 기본이 빠진, 그저 객기에 찬 인간입니다.’
‘살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살았나요?’
‘……….’
‘살리지 못할 환자에겐 손대지 마라. 저희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천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가 저를 기꺼이 용서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고통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아이의 부모가 용서했더라도 전 인간으로서 최악의 죄를 저질렀는데도 하늘이 왜 잠잠했는지? 왜인지 아십니까? 하늘은 인간사의 천벌 따위엔 관심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스멀스멀 드러나는 연백진의 광포한 음성 때문일 수도 있었고, 그가 하는 말이 어느 정점을 향해 치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윽고 연백진은 고개를 들었다. 지켜보던 자들은 그의 새빨간 눈에 도사리는 살의에 할 말을 잃었다. 물기가 가득 찬 눈은 무시무시한 광기를 지님과 동시에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힌 원수를 보는 듯했다. 그 깊고도 잔혹한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연백진이 자리에 일어났다.
“당신들의 업적은 위대합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냈죠.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누군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우릴 죽이기라도 하겠단 거냐!!!”
백진은 다시금 얼굴을 감쌌다. 그는 방금 전 영상에 극심한 후유증을 앓는 인간 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늘은 당신들의 죄에 대해서 벌하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인과응보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니까, 하늘 따위에 기대서는 제가 당신들에게 품은 증오 따위 세월 속에 마모되어 버릴 겁니다. 그러니 당신들을 믿고 사랑한 홍선담을 기만한 EEC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에게 가족을 흉내 내며 짐승에게도 못할 짓을 저지른 당신들에게는…… 아니, 당신들이 저지른 죄의 벌은…… 제가 내려주겠습니다.”
철문이 끼이익 열렸다. 아까 보았던 백명의 무리는 각자 커다란 통을 들고 있었다. 분위기가 기묘하다 못해 흉포해졌다. 점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임직원은 연백진과 그 무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도 제가 지나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도저히 당신들을 잊을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사라지지 않으면 홍선담이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냥ㅡ…”
연백진은 손짓했다.
촤아아아아아아ㅡ 촤아아아아ㅡㅡㅡㅡ!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거대한 통을 든 무리가 우르르 들어오더니 통에 든 것을 끼얹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그들은 오물이라도 뒤집어써서 까무러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였다. 검붉다 못해 새카만, 비린내가 구역질나도록 지독한 피였다. 백 명이 들고 와 뿌린 피의 폭포는 금세 목표물은 물론이고 벽고 바닥, 사방으로 튀고 고이기 시작했다. 무리들은 마지막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들에게 피를 뒤집어 씌웠다. 그것은 멀찍이 서 있는 연백진과 손 실장에게도 튀겼다. 인간들은 도망가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수갑에서 자신의 발목을 빼내기 위해 다리를 도려낼 것처럼 몸을 흔드는 자가 있었고 바닥에서 의자를 떼어내기 위해 발광했다. 천옥불길 속에서도 이렇게 필사적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썩은내와 비린내가 가득찬 방에서 연백진은 그들을 보고 서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
“유가족에겐 백람에서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습니다. 물론 EEC에 몸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알아두십시오. ‘방관’도 죄라는 걸.”
그때 포효하던 길호문과 연백진이 눈이 마주쳤다.
“유감입니다.”
“연백진!!! 자네 정말 미친 건가!!! 뭘 어쩌려고 이러나!!! 이러고서도 무사할 줄 알아ㅡ!!!”
“여긴 당신들이 생각하는 중국이 아닙니다. 호주에서 건설되다 만 백람의 경공업 단지입니다. 환경파괴 문제로 개발이 중단된 지 몇년 되었죠.”
“연백진ㅡㅡㅡㅡ!!!”
그는 웃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수일에 걸쳐 여기서 죽습니다.”
-
선담은 짓무른 눈을 떴다. 눈가가 축축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지만 매 밤마다 내내 이랬다. 밤새 꾼 꿈이 기억나지는 않아도 눈물딱지가 달라붙어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면서 울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미리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전상목에 대한 터무니없는 사죄도 아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은 자들에게 저 또한 사람으로 대해줄 필요는 없었다. 간단한 문제는 결코 아니었으리라.
다만, 언제부턴가 선담은 스스로를 동정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실험체가 된 순간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사랑도 받지 못하고, 결국엔 가족도 없이 홀로 떠돌며 악심만 품어 스스로 내장을 썩여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그런 쓸쓸한 자기위로가 가슴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과거를 곱씹는 과정에서 마음이 약해질지언정 심장 한쪽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 거대한 분격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불꽃을 잠재워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불꽃을 잠재우려면 내게서 내 새끼를 뺏고 다시 주입하며 치욕보다 더한 걸 준 그들에게 더한 벌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 거대한 불길을 품고 있으면 몸이 견디지 못할 거란 사실도. 언제 자신이 이렇게나 잔인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사람구실을 하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헌데, 막상 전상목을 해치고 나니 앞날이 무섭고 불투명해졌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데 직접 움직일 수도 없는 묘한 처지. 차라리 미쳐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잠결에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잔인하게 굴 용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는데 죽이고픈 놈들은 계속 살아있기에, 그 사실이 분해서일지도 몰랐다.
“……아저씨….”
선담은 콱 메이는 목소리를 힘겹게 흘렸다. 커다란 침대와 풍성한 커튼으로 아늑하게 꾸며진 넓은 방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잠시 멍하게 있자 회색슈트를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연백진님께서는 잠시 용무가 있어 외출하셨습니다.”
“네?”
“그동안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시장하십니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백진이 바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선담은 그보다 이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사내는 속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말했다.
“회장실 전용경호팀의 차석비서입니다. 손태주 실장 아래로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호주에서는 연백진님과 홍선담님의 신변을 맡고 있습니다.”
“비, 비서라면 비행기에서 같이 왔는데….”
“저희는 독립된 비서팀입니다. 보통의 비서팀보다 임무나 능력 면에서 조금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모든 대기업의 그림자 비서진이 그러하듯, 그들은 교화된 전과자 출신이 많았다. 바로 몇 십년 전인 20세기 후반 당시만 해도 기업가는 음지에서 나온 밑천으로 회사를 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 전통이 이어지고 이어져ㅡ자본간 교류를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해ㅡ조직의 해결사들이 대기업으로 넘어와 잡업을 처리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흙탕물 청탁이 사라졌다지만 해결사들은 워낙에 유용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기업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림자 비서진의 크기도 비례했다. 연백진은 큰일이 아니면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는 그 그림자들을 이번 일에 끌어다 쓴 것뿐이었다.
전후사정을 전혀 짐작치 못하는 선담은 이해를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넉넉하게 웃으며 얼른 응접실로 나가 식사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바로 편히 드실 수 있도록 무난한 한식을 준비했습니다.”
“아…….”
“연백진님은 조금 늦으실 지도 모르니 원하신다면 저희와 가까운 곳에 관광을 가셔도 좋습니다.”
선담이야 자각이 없어서 몰랐지만, 손태주 아래의 우수한 경호원들은 알아주는 싸움패이라도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해내지 못할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백진이 이번에야말로 선담을 아예 맡겨놓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선담은 반가운 소식에 그저 얼굴빛이 환해져서는 차석비서를 쫓아 테이블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분이라 놀랐어요.”
선담은 숟가락을 집으며 말했다.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차석비서가 웃음 지었다.
“저희는 회장실 직속입니다. 연백진님 소유의 비서팀, 경호팀과는 별개입니다.”
“별개요…?”
“백람에는 여러 팀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 중에서도 최고라도 자부하는 그룹이죠.”
“머, 멋있어요.”
선담은 동경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멋있다는 말을 바랐던 게 아닌 차석비서는 당혹한 빛으로 “감사합니다.”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는 소문의 ‘도너’가 이 작은 도련님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배가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백람의 사칙이 그러하듯, 손 실장과 팀을 이룬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 모든 것을 함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빵빵하게 부푼 선담의 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백진이 가기 전에 분명 한식을 좋아할 것이라고 따듯한 상태로 보관해 놓으라고 당부한 것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역시나 아이는 우물우물 잘 먹고 있었다.
선담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에서도 가장 초라한 어묵볶음과 계란말이만 골라먹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보면 백진과 가까운 비서들은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이 사람은 ‘연백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선담은 국을 한술 떠먹으며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는 꽃병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꽃병 아래에 반듯이 놓여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선담은 차석비서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는 연락을 받았는지 잠시 뒤돌아서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담은 조심히 손을 뻗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예쁜 꽃 아래에 놓인 쪽지를 집어 들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락ㅡ… 그곳엔 익숙한 필체가 남아있었다.
인공빛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지만 그 시간이 짧고,
자연빛은 고요하지만 그 선연한 빛이 오래 남는다.
마지막 잔상조차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 꼬맹아, 네 빛을 오래도록 잃지 마라.
네가 진짜 다이아다.
선담은 자그마한 쪽지에 입을 맞췄다. 어서 빨리 백진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오롯했다. 석재도 같은 말을 했었다. 향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어디에 향기가 있고 빛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 느껴진다니 더는 의심 따위 하지 않기로 했다. 백진이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해준다면 자신은 꿋꿋할 자신이 있었다.
무전을 끊은 비서는 쪽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는 아이와 쪽지내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감별사들이 말하길, 진품을 골라내고 싶으면 가장 빛이 덜한 걸 고르라고 하더군요. 보석이 품어내는 빛의 진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고.”
선담은 그를 한번 돌아보고는 글귀를 다시 읽었다. 석재도, 백진도, 자신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별 볼일 없는 자신 때문에 아파했고 괴로워했고 지금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많이 사랑해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담은 자신의 뱃속에 은협의 씨앗이 들어앉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결심한 것이 있었다. 두렵고 두려워서, 도저히 행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들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반드시 각오한대로 하고 싶었다. 그랬다. 꿋꿋하게…… 원하는 길을 걸어갈 자신이 있었다.
-
괴성은 더욱 심해졌다. 지옥보다 더한 곳이었다. 모두가 살기위해 발목을 끊을 기세였다. 허나 그들이 사지를 끊어낸다 한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약을 한 검은 무리의 자들이 이탈자를 그냥 둘 리 없었다.
길호문은 목에 핏대를 세워 연백진을 향해 불같이 노성했다. 만약 그의 손발이 자유로웠다면 연백진을 갈가리 찢어 갈겨버렸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하나뿐인 인공자궁으로 실험을 한 게 잘못이냐!!! 홍선담이 아픈 것이 우리의 잘못이냔 말이다!!! 우린 우리의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갈 곳 없는 천애고아에게 가족이란 이름으로 희망고문을 한 당신들은 이미 인간의 탈을 벗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신들이 사라지면 최은협도 저 나름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이게 제 방식입니다.”
“우리한테 피를 끼얹어놓고 굶어죽으라는 게 네가, 네가 홍선담을 위해 행하는 복수라는 거냐!!! 이런 개 같은 자식!!! 천벌을 왜 안 받아!!! 네놈도 똑같이 천벌을 받을 거다!!!”
“두고 보죠.”
“이런 개자식!!! 살인마 같으니라고!!! 우리가 여기서 그렇게 쉽게 굶어죽을 줄 알아!!!”
백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굶어 죽여? 웃기는 소리군요. 조만간 당신들이 쓴 피냄새를 맡고 고기에 환장한 쥐떼가 몰려들 겁니다. 피냄새를 좋아하는 건 하이에나만이 아니죠.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이 지대의 놈들은 당신들이 하루빨리 허기져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놈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시신을 알아보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산채로 잔치밥이 되는 겁니다.”
“뭐!!!”
“걱정 마십시오. 당신들은 중국의 외딴 경화공업 단지에서 사고를 당한 채로 발견될 겁니다. 수만마리의 들쥐에게 뜯어 먹혔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도록 해드리죠.”
인간들은 날뛰었다. 개중에 뼈가 얇은 여자들은 수갑에서 다리를 빼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거대한 몽둥이가 그들의 다리를 무참하게 박살냈다. 그들은 넘어지고 뒹굴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살려달라고 울며 고함쳤다. 그들을 둘러싼 검은 무리는 미동도 않았다. 손 실장도 뒷짐을 지고 서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연백진은 미감을 찌푸렸다. 모두가 무죄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유죄라고도 할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극심한 광경이었다. 허나 그는 응연했다.
‘똥오줌을 제대로 못 가리더라고.’
‘막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는데. 뒤까지 닦아줬다나 뭐라나?’
‘급하게 하느라 변기에 조준을 못했댄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왜이리 웃기냐.’
‘시끄러우니까 물렸지 그냥 물렸어? 이번엔 문 잠그고 하면 되지 뭐.’
‘나중에 해부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자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탈을 자신이 바꿔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 공간은 절대 개방하지 않으리라.
더욱이 이 자들의 인권을 지켜주겠답시고 홍선담에게서 강제로 뱃속을 긁어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리 한다면 고통에 몸이 절어버린 홍선담은 미련 없이 자신을 떠날지도 몰랐다. 보호의 손길이 없는 녀석은 그 ‘씨앗’이 점차로 갉아먹으며 죽음에 이르게 하겠지. 그렇기에 다른 길이 없었다. 녀석에게서 그놈의 씨앗을 떼어내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홍선담이 전상목의 손가락을 잘라다함은 그야말로 시발점이었다. EEC 전체에게 자신이 복수하는 데에 아무런 위화감도 형성되지 않게 만든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보일러를 지피겠습니다. 시체 부식이 빠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들의 사체를 모두 옮기고 나면, 이 자들도 고향으로 돌려보내집니다.”
내게는 가족이 있다고 울부짖는 소리,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자들, 고래고래 악을 쓰며 발목을 부여잡은 자들. 지옥이 아마도 딱 이럴 것이다. 온갖 짐승의 피를 짜내어 쏟아 부은 방은 역겨운 냄새가 등천했다. 보통 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나락이었지만 EEC 일원은 물론이고 연백진마저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피와 핏줄을 뒤집어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여자가 연백진을 향해 우짖었다.
“살려주세요!!! 가족이 있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임상연구원도 아니고 도너가 누군지도 잘 모릅니다!!!”
연백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이 당신들에게 또 모진 소리를 듣고 밤새 우는 꼴을 보느니 제가 그냥 여기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느 쪽 연구원이든 무슨 소용입니까. EEC 자체를 없애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고함이 거세지자 참다못한 검은 무리가 인간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짐승의 피에 사람의 피가 섞이고 가죽 패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아비규환이었던 방이 맞아 쓰러지는 인간들로 인해 반쯤 조용해졌다. 손 실장은 검은 무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인간들을 제재하기 위해 날뛰던 그들은 손 실장의 말에는 순한 집짐승처럼 움직였다. 그들이 나가고, 연백진은 이제 신음으로 가득찬 방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길호문은 핏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마지막 말을 쥐어짜냈다.
“이 많은 인원이 사라지면…… 반드시 백람은 표적이 될 거다. 우리가 죄다 EEC출신인 게 알려지면 자연스럽게 연루될 거다…….”
“글쎄요. 여기는 지하 6층에 위치한 폐기물 처리장입니다.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외진 바닥에 작은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곳입니다. 관계자가 아니면 여기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은 쇠로 녹여 밖에서 잠가드리겠습니다.”
“연백진…!!! 자네 정말 미친겐가!!! 난 연의범의 오랜 친구야!!! 우리가 여기까지 이동한 기록이 남아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길 소장님, 전 바보가 아닙니다.”
“뭐라고?!”
“당신들이 타고 온 비행편은 백람의 사적인 전용기입니다. 비행흔적이 남아있다고는 하나 손 실장을 포함한 비서들도 타고 왔었기 때문에 당신들의 존재는 묻어버리는 건 문제도 아닙니다. 반면에 같은 시간에 제가 대여한 전용기는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길호문이 거의 나뒹굴며 흐느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라!!!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차분해진 후에 얘기하자! 네놈도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다고! 완전히 미친놈 같다고!!! 이래놓고서 네가 두 다리 편하게 뻗고 잠들 수 있을 것 같나!!! 제발 이러지 마라!!! 연백진ㅡ!!!”
“한국으로 돌아가면 당신들 EEC가 과연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백람을 상대로 소송까지 준비하는 당신들이 멀쩡한 계약서를 가지고 있는 싸움에 얌전히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계약을 핑계로 녀석을 언제 데려갈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여, 연백……”
허물어지는 노인네의 얼굴에 연백진은 분노를 삼켰다. 뒤에서 몰래 소송을 준비해 백람을 위협하려한 주제에 물질에 눈이 멀어 다시금 백람의 뒤를 쫓아온 자들. 이렇게나 가볍게 미끼에 걸려들었으면 당신들도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ㅡ……
열여덟살에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몸 안에 유기체를 집어넣고 새끼를 품었던 녀석이 홍선담이었다. 세상없는 고아로 태어나 그 흔한 가족이란 걸 한번 가져보지 못해서 자신을 도너로 삼는 자들을 따르고 사랑했던 아이. EEC는 그런 아이에게 첫 새끼를 떼어내도록 몰아붙이고, 몇 번이나 도망가도록 만들고, 눈물을 뽑아내고, 새하얀 피부가 나무껍질이 될 때까지 일정을 감행하며 가족은커녕 기르던 개만도 못한 대접을 했다. 고통으로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아이를 손가락질 하고, 안주거리로 삼고, 그렇게나 서럽게 우는 아이에게 재갈을 물려버린 자들. 벌거벗은 아이가 잡고 버둥거리며 매달리는 마지막 지푸라기까지 깨끗이 뽑아간 자들. 집단이란 그늘 아래에서 그들은 홍선담에게서 많은 것을 발라먹어왔다. 그럼에도 인간된 도리 때문에 차마 불법적인 해를 가할 수는 없어서 최대한 곱게 보내줄랬더니, 기어코 두 번째 새끼까지 만들도록 폭행을 주도한 인간이 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백진은 홀로 속삭였다.
“당신들은 놓아주어 봤자……. 그냥 조용히 사라지시죠.”
형광빛이 하나둘씩 빠르게 멸등하면서 삽시에 공간이 새카매지고 두터운 철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아직 깨어있는 인간들은 마지막 남은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빛줄기를 차단하는 연백진은 아무 감흥도 없는 듯했다. 마침내, 피웅덩이에 빠진 인간들을 내버려두고ㅡ…
쿵!
사방은 조용해졌다. 아까의 경고 때문일까. 어디선가 점차 작은 짐승이 떼로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피냄새는 좀체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했다. 이 독한 냄새에 현혹된 것들이 점차로 방을 향해 달려오는 듯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으아아아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자 참상이 시작되었다. 너도나도 살겠다고 발버둥 쳤으나 이미 철문 밖은 용접이 시작되는 듯했다. 의자는 바닥에 붙어있었다. 그 의자에는 저희들의 다리가 한짝씩 매달려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인간들은 기어서 하수구 뚜껑을 열었으나 끝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곳은 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비좁았다. 정말로 쥐떼만 드나들 수 있는 넓이였다. 용접된 철문을 부술 수도, 벽을 뚫을 수도 없는 그들에겐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끼이이이이이이익ㅡ
다시 철문이 열렸다. 참혹하던 비명소리가 단번에 꺼졌다. 모두가 환희에 찬 얼굴로 쏟아지는 빛줄기를 보았다. 다시 문이 열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통곡하고 울고 불며 생난리를 치던 인간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참회의 눈물 같은 것을 마구 흘렸다. 연백진은 그들을 차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때 길호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미안하다! 백진아! 그 어린아이를 인간취급도 못해줘서 미안하다! 하지만 우린 방법이 없었어! 다소 비인간적이었다고는 하나 우리도 가야 할 길이 있었어! 왜 우리를 이해 못하는 거냐! 그 인공자궁에서 새 생명이 잉태된다는 게, 그게 인류의 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과시하는 실험이기 이전에 멸종되어가는 수만 가지의 종속을 굳건히 지키는 일인지, 네가 모르지 않잖냐! 유전적 질병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인류가 기여해야하는 필수적이고 선두적인 혁신이다! 과정은 힘들어도 그것만 견디면 홍선담은 전 세계의 유산이 되었을 거다! 그때가 왔다면 과거의 고통 따위는 일도 아니었을 거다! 백람은 정말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거고! 이 멍청한 녀석아! 왜 몰라주는 거냐! 네놈도 ‘그때 그 어린애’가 죽을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더 나은 방법이 없어 수술을 집도했던 거 아니냐! 이 바닥에 몸담은 자라면 누구에게나 반대되는 가능성은 있어! 우리도 그것을 체험한 것뿐이다!”
길호문은 절절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노인네의 설득을 지켜보았다. 허나 연백진의 머릿속을 맴도는 물음은 이제 단 하나, ‘그래서 녀석을 최은협에게 넘겨 원치 않는 씨앗을 주었습니까……’였다. 그 씨앗이 제 뱃속에서 탄생하는 일을 막기 위해 녀석은 의식을 잃은 힘든 시간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렸고 신음했으며, 지금은 뱃속이 썩어들기 직전이라고. 허나 백진은 구구절절이 읊어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문을 연 목적만 생각했다.
“깜박 잊고 홍선담이 당신들에게 한 말을 전해주지 못했습니다. 그 녀석이 그러더군요. ‘당신들을 용서한다’고. ……당신들을 용서하겠답니다.”
피바다에 빠진 인간들은 너도나도 서로를 얼싸안을 분위기였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허나 그들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ㅡ
연백진은 홍선담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붉은 눈으로 쓸쓸히 웃었다.
“그런데, 저는 못하겠습니다.”
끼이이이이이이익ㅡ
콰앙ㅡ……!
- - - -
최은협이 인적 많은 공원벤치에 등을 기댄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진득하게 자신을 쫓는 낌새를 눈치 챈 직후였다. 둘, 넷, 여섯. 짐작하건데 족히 여덟은 되어보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었다. 예전에 EEC 후원위원장 취임식에서 잠재웠던 그런 잔챙이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엊그제 뉴스보도에 휴가차 떠난 비공개 단체가 행방불명된 지 만하루가 지났다는 속보가 올랐다. 한데 이상하게도 자세한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연구단체가 답사를 위해 길을 떠났고 중국의 경화공업 단지를 견학하던 차에 약 70명의 인원이 사라졌다고 했다. 사기업이 관리하고 있는 그곳은 가동이 중단된 지 오래라 소유주를 가리기도 어려워 공개를 꺼리고 있고, 왜 연구단체가 경화단지를 시찰했는지는 의문이라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보도는 없었다. 그 단체의 소속도, 예측 가능한 가정도, 아무것도 제시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에 백람전자의 노조가 파업을 하면서 백람과 노조 간의 분쟁이 오고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상 최고의 노조협상이 오고갈 것이라는 뉴스였다.
소식을 접한 수많은 군중 가운데 최은협만은 일련의 사고가 힘을 가진 막강한 뿌리의 의도로 일어난 연결고리라는 걸 짐작했다. 그 후에 곧바로 자신에게 여덟이나 되는 무리가 따라붙은 것이다.
그는 움직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간 열망한 고지가 앞에 있었다. 자신은 이런 인간이었다. 여덟이나 되는 수가 자신을 쫓는다고 해도, 이제 홍선담을 봐야 할 때가 왔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주변의 장애물은 더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여덟이라…….”
자신감으로 충만하진 않았다. 십년 전이었다면 이깟 무리야 가뿐했겠지만 제 몸도 이런 일엔 녹슨 지 오래였다. 은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수 뒤에, 상가 옆에, 인파 사이사이에, 훈련받은 짐승이 포진해 있었다. 이제 대놓고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저들도 시간이 촉박한 듯싶었다. 기회만 된다면 정수리를 쪼개서라도 데려갈 기세였다. 그는 공원에서 산길로 올라가는 오솔길로 걸음을 옮겼다. 철제계단을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공원에서 찍어놓았던 그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특유의 기운은 숨길 수는 없었다.
최은협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워낙에 주의를 들은 터라 신중하게 움직이려던 무리는 그대로 박차를 가해 타깃을 쫓아 달리며 흩어졌다. 그 중 몇명이 계단을 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쫓는 수가 둘로 줄자 최은협이 뒤를 돌았다. 그를 제압하기 위해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오던 남자가 덩달아 멈추었을 때 다리를 날렸다. 타격음이 터졌다. 그러나 역시 예전과 달랐다. 몸이 뒤뚱거려 거의 굴러 넘어질 뻔했으나 상대는 은협의 발길질을 손수 막아냈다. 보통 훈련으로 단련된 놈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발목을 붙들릴 뻔 한 걸 은협이 벗어났다. 이쯤 되자 확실해졌다.
뻐억ㅡ!
최은협은 통로가 좁은 계단을 이용해 상대의 머리를 내리쳤다. 상대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충격을 받았는지 휘청거렸다. 그대로 멱살을 잡아 아랫배를 내리치는 순간, 난간을 뛰어넘은 또 다른 사내가 그를 덮쳤다. 덩치가 산만한 주제에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최은협은 그대로 엎어지면서 난간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보통 같으면 그대로 기절했겠지만 그 또한 만만찮게 발을 쳐올렸다. 상대의 무게가 엄청나서 무릎이 휠 것 같았다.
“크윽…!”
아무리 좁은 난간이어도 두 놈을 상대하기엔 벅찼다. 이런 격투가 굳은살처럼 박힌 놈들이었다. 은협은 난간에 몸을 의지하고는 한 놈을 걷어차 굴러 떨어트렸다. 그때였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뒤통수를 직격당한 것이다. 그대로 무릎이 허물어지며 자신도 똑같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려는 찰나, 거의 죽을힘을 쥐어짜 최은협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놈을 난간으로 되밀었다. 필사를 다한 힘이었기에 사내는 난간에 그만 허리를 부딪쳤고, 잠시 움찔하는 사이 은협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좁히고 있을 나머지 여섯은 아무래도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자신이 유리하도록 통로가 좁은 계단을 선택했는데도 저들은 버거웠다. 오른쪽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무엇으로 찍어 내렸는지는 몰라도 출혈이 상당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생포해 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게 틀림없었다. 역시 연백진인가? 확실하지 않으면 쉽게 잡혀줄 수 없었다.
숨이 턱까지 닿을 즈음 최은협은 두 갈래로 된 내리막길에 이르렀다. 곧바로 시내가 보이는 바깥쪽 길을 선택했다. 그 후부터는 습격이 없었다. 산길을 따라 걷던 행인이 그를 보고 단발마를 질렀다. 병원에 가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지랖 넓게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최은협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된 이상 정석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자신이 홍선담을 연백진에게 넘겨놓은 것에는, 녀석이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보신을 하길 바랐던 탓이 컸다. 헌데 언론에서 영 딴소리를 하니 진의를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그는 주의를 살피며 시내로 들어갔다. 출혈은 점점 심해졌다. 보는 사람마다 그를 슬슬 피하거나 못내 그냥 지나치지 못해 말을 걸었다. 최은협은 그런 자들을 죄다 뿌리치며 시내의 한복판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얼굴은 피투성인데 걸음걸이가 워낙에 정확하고 단호해 마치 분장을 한 사람 같았다.
“ㅡ…! ……!”
피 때문인지 금방 숨이 찼다. 시내광장의 중간엔 일방통행로가 있었고 최은협은 그곳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머리가 좋은데?”
턱! 무언가 목덜미를 잡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재킷을 벗어냈다. 무릎을 구부리는 순간 온몸이 휘청했지만 그는 다시 뛰었다. 사람 많은 광장에서 관심을 끌만한 상황이었지만 누구하나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아니, 의문을 품을 시간조차 없었다. 쫓고 쫓기는 남자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오래 쳐다볼 짬도 없었다. 그렇게 건물의 골목골목을 돌아 사냥을 피하는 순간, 그러니까 코너를 도는 순간이었다. 쫓아오는 수가 다시 반으로 줄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찰나에 나머지 무리들이 막다른 길을 만들었다.
“손 실장님한테 다들 죽고 싶어?! 빨리 잠재워!”
빠드득ㅡ!
팔이 가차 없이 꺾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복부에 무릎이 파고들었다. 등짝이 들썩였지만 최은협은 절대 의식을 놓지 않았다. 눈꺼풀이 감기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됐다.
“대단하군.”
“우리가 오랜만에 움직인 탓도 있지만 이렇게 잡기 어려운 놈은 처음이다. 칭찬해줄만해.”
은협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확인해야했다.
“누가 사주했어?”
당당하게 묻는 말에 사내들은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은협은 질문의 폭을 좀 더 줄였다.
“EEC는 아닐 테고. 연지애야, 연백진이야?”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 사이 은협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만약 연지애였으면 이렇게 위협해가면서까지 끌고 오라고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럴 배짱도 없는 여자였고.
“……연백진이군.”
“끌고 가!”
맞춘 것 같았다. 은협은 너희 말대로 끌고 가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웃겼다. 자신은 어차피 선담을 찾을 생각이었다. 굳이 어렵게 돌아갈 것이 어디 있는가.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자신을 이렇게 죽기살기로 맹렬히 추격할 자는 얼마 없었다. 이 길로 그대로 가면, 그 길에 홍선담이 서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잠깐, 끌고 가기 전에 편하게 재우자고.”
누군가의 말에 앞에 선 자가 번개처럼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최은협이 그들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는 다리를 들어 올려 내리치는 주먹을 거세게 튕겨내 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허공을 휘청거렸다. 그는 차갑게 웃었다.
“난동 안 부릴 테니까 눈 가리고 데려가기나 해.”
- - - -
새벽 3시.
선담은 꽃병 아래에서 발견한 쪽지를 꼬옥 쥐고 잠들어 있었다. 마이를 벗고 셔츠를 반쯤 풀며 들어온 백진은 선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욕실로 들어갔다. 장시간 이동하고 폐기물이나 처리하는 지하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던 그는 너무도 피곤했다. 짐승의 피로 얼룩진 정장을 벗어던지자 손 실장이 그것을 받아들고 나갔다. 경공업 단지에 들어갔던 자들의 옷가지는 모두 다 태울 예정이었다. 연백진은 몇 번이나 제 몸을 닦아낸 뒤 세찬 물줄기를 떨어트리는 샤워부스 안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가족이 있어요! 저는 임상연구원도 아니고 도너가 누군지도 잘 모릅니다!’
극히 소수겠지만 개중에는 분명 홍선담에게 패악을 부리지 않은 인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절박했던 것만큼이나 자신도 절박했다. 절박하고 절박해서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로 그들을 창고에 처박아두고 나올 수 있을지 그것이 내내 의문이었지만, 손 실장이 가져온 테이프를 트는 순간 자신은 마음을 정했다. 그 자들은 홍선담을 유린했다. 그러고도 끝끝내 잘못에 대해서는 고하지 않았다.
그 자들이 살아있으면 홍선담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해 싸울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다가는ㅡ… 제 고집대로 뱃속이 썩어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고작 씨앗 하나로 그 어린것이 몸이 썩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신에게도 방법이 없었다.
후회도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백진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타월로 문지르며 잠든 선담을 지켜보다가 녀석이 쥔 쪽지를 슬쩍 빼들었다. 자신이 녀석을 위해 써둔 필체가 얼룩져 있었다. 백진은 선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둔 가방을 열어 떠나기 전에 주사했던 약물을 한차례 더 주입했다. 네 고집이 정 그렇다면 부디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처음 녀석을 만난 겨울, 혹독한 일을 치룬 직후임에도 녀석의 눈동자는 어떤 표독스러움도, 울분도 없었다. 그저 연민을 자극하는 가여운 눈망울만 있었을 뿐이었다. 겁 잘 먹고, 약하고, 그저 착하기만 한 그런 눈동자. 그렇게 순하고 순했기 때문에 분명 자신도 그에게 끌렸으리라. 동시에 그렇게 순했기 때문에 최은협의 흉악에 몸을 벌벌 떨며 이리저리 휘둘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간간히 보이는 독기는 이제 홍선담도 살의를 품게 되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은 애달파져만 갔다. 녀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까봐. 결국엔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 선택을 해 버릴까봐. 더는 두려운 게 없는 홍선담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온통 어둡고 슬픈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만 하면 어린것이 불쌍하고, 너무도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조바심을 통제할 수 없어서 피웅덩이에 인간들을 처박은 걸지도 몰랐다. 일종의 화풀이였을지도.
백진은 침대로 들어가 선담을 끌어안았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뺨에도 입 맞추었다. 잠시 깬 선담도 백진의 품으로 파고들었지만 숨소리는 금세 일정해졌다. 백진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선담을 안고서 평생 잠들지 않았음 했다. 그래야만 녀석이 위험하지 않도록 늘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녀석에게 도대체 네 속마음이 무엇이냐고, 정말로 행복해질 생각이 있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끼익ㅡ
저편에서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진은 여전히 선담만 응시하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어둠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백진님, 최은협이란 자를 잡았습니다.”
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발자국 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그는 선담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살내를 맡았다. 아기들에게서 나는 젖내가 났다. 후각에 약한 남자인지라, 백진은 더더욱 녀석의 목덜미에 파고들며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결국 선담이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아저씨….”
“응.”
“일… 다 끝난 거예요…?”
“그래.”
“피곤해보여요.”
백진은 쓰게 미소 지었다. 사람 안색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하는 녀석이었다. 선담은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그럼, 저 EEC 사람들이랑은 언제 봐요…?”
역시나 일어나자마자 묻는 것이 그놈의 EEC였다. 얼마간은 녀석의 이런 집착을 지울 수는 없을 테다. 백진은 한숨을 쉬었다. 녀석이 전상목의 손을 잘랐다는 고백을 한 것처럼 자신도 똑같이 고백을 해야 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쭙잖은 배려 때문은 아니었다. 혹여 홍선담이 그 이야기를 듣고 놈들을 살려달라고 떼를 쓸까봐서였다.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순간적인 동정심으로 녀석이 다시 고생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놈들은 죽어 마땅하다. 하늘에서는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영영 사라져야 할 놈들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선담의 안전은 물론이고 녀석에게 남겨진 오랜 상처가 절대로 아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문에 놈들이 밀폐실 안에서 먼지가루로 부스러지기까지는 홍선담에게 비밀로 부쳐두기로 작정한지 오래였다.
백진은 선담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왜요?”
“비밀이야.”
선담이 미간을 그으며 “네?”하고 되묻자 백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편히 대답했다.
“서른살 미만 꼬맹이한테는 비밀.”
선담이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왜.”
“언제까지 꼬맹이라고 부를 거예요?”
백진은 그야말로 피식 웃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 한쪽이 쾨쾨했건만 선담과 있으려니 매캐하게 막혀있던 덩어리가 삭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스물둘, 서른둘. 꼬맹이 맞지?”
“아저씨는 아저씨 맞지만 저는 꼬맹이 아니에요.”
“젖내 폴폴 나는 꼬마대장. 홍꼬맹.”
“아저씨!”
선담이 이렇게 밝은 목소릴 내는 것에는 피곤해 보이는 백진을 위로해주려는 심산이 컸다. 백진은 자신을 침대에서 떨어트리려는 선담을 도로 눕혔다. 씩씩대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일단 물어야 할 게 있었다. 백진은 조용히 속삭였다.
“최은협이 잡혔다.”
“……….”
예상대로 따듯하던 선담의 몸이 차갑게 식으며 딱딱해졌다. 백진은 그런 선담을 들어다가 응접실로 데려가 앉혔다. 침대에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할 사항이 아니었다. 적어도 얼굴은 똑바로 보아야 했다. 테이블 스탠드를 켜자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잠시 비쳤지만 그것은 눈치껏 룸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 앉은 선담은 멍한 표정이었다. 백진은 각인시켜주듯 한번 더 말했다.
“잡았어.”
“……어, 어떻게……”
“실전으로 움직이는 경호팀 일부를 보냈어.”
선담은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 말아 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때가 온 것이다. 어째서 여기 호주까지 왔음에도 EEC를 만나지 못하는지, 만약 만난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은 이제 안중에 없었다. 전상목도 아니고 길호문도 아니고 EEC는 더욱 아니다. 그들은 과정일 뿐, 최후에 선 자는 바로 최은협이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
그가 자신의 몸에 핏줄을 심어놓은 지 반년……
드디어 최은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백진은 이를 꾹 다물고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내는 선담을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갈래?”
대답을 기다릴 시간 따윈 필요치 않았다.
- - - -
촤아아아아!
잠시 눈을 붙였던 은협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세례에 정신을 회복했다. 누군가 그의 재갈을 떼어내고 호스 같은 것을 물렸다.
“마셔. 아사해버리면 곤란해.”
무시하자 그대로 철썩! 하고 고개가 확 돌아갔다. 내리치는 주먹에는 품위도, 배려도 없었다. 입안에서 단박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은협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누군지 모를 놈에게 말했다.
“이틀 굶는다고 안 죽으니 걱정 말고 꺼져.”
남자는 “그러시겠지.”하고 소리 내 웃더니 호스를 입에 대충 물렸다. 잠에서 완전히 깬 은협은 다시금 청각에 의지했다.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로 추론하건데 이곳은 철벽같은 밀폐공간이었다. 그렇다면 가동 중단된 공장이거나 연구실, 지하실 따위일 테다. 그들은 자신에게 자꾸 무언가를 먹으라 하며 쓰러지기를 방지했다. 그들의 목적은 납치였고, 동시에 대기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협은 극도로 숨을 죽이고 소리를 주시했다. 닫히지 않은 문밖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도착하신다고 연락이라도?”
“없었어. 하지만 금방이겠지.”
“거기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거고? 실장님도 대동 한 걸로 아는데.”
“모르지. 이봐, 우린 여태껏처럼 시키는 일만 하면 돼. 궁금한 게 있어?”
“별로. 하지만 회장님이면 몰라도 연백진님이 우릴 부르는 건 처음이니까.”
연백진.
최은협은 씨익 웃었다. 자신은 의자에 앉아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 상황이 반갑다고만은 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홍선담이 곧 가까이 올 것이란 사실을.
내 것인지, 아니면 다른 놈의 것인지 모를 씨를 배고.
- - - -
익숙한 공간. 익숙한 풍경.
선담은 알몸으로 끝없이 새카만 공간에 서 있었다. 은협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친 후에 꾸었던 꿈속. 그곳에서 자신은 아기를 찾지 못해 쉴 새 없이 이 공간을 헤매었었다. 선담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 보았다. 역시나. 예전처럼 아프거나 배가 불룩하지는 않았으나 긴 핏줄이 자신의 몸 어디에선가부터 주욱 뻗어나가 있었다. 예전에 그랬듯이 아마도 그것은 탯줄이리라. 허나 분명한 건, 태몽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담은 탯줄을 거둬내며 그것이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의 끝에 자신이 바라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여기며. 그 당시에 자신이 가장 바랐던 것은 아기였고, 검은 언덕 위에서 자신은 아기를 보았었다.
길은 끝이 없었다. 그곳은 진공의 사막이었다. 온통 까맸다. 그마나 색이 있는 것은 자신의 몸뚱이와 탯줄뿐, 아무것도 없었다. 선담은 탯줄을 거둬내고 또 거둬내며 걸었다. 이번에도 검은 언덕 끝에 애기가 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선담은 탯줄을 모두 거둬낸 후에야 가까스로 언덕 위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나 예전처럼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의문에 휩싸였다.
저것이 내가 그토록이나 원했던 아기일까. 그것이 아니면……
괴물일까.
-
“꼬맹아.”
선담은 차창에 기댔던 불편한 자세를 바꿔 앉다가 잠에서 깼다. 급작스런 비행 이착륙으로 시차적응도 안 되는 와중에 백진은 남은 절차가 있다며 손 실장이라는 자와 자꾸 어딘가를 들렀다. 처음엔 선담도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으나 왜인지 몸이 너무도 피곤해서 아예 엎어져 자지 않는 게 최선이 되었다. 그마저도 비행편이니 경공업 단지니 수습이니 하는 소리만 나오자 그만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 백진이 찬찬히 어깨를 흔들어 깨웠고 선담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 졸려요…….”
백진은 선담을 끌어안아 차에서 내렸다. 결코 가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괴사란 것은 그랬다. 약물로 어느 정도 방지가 가능하다가도, 아니, 느리게 진행되다 싶다가도 순식간에 세포를 썩히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장이 썩기 시작하면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는 삽시에 죽고 만다. 선담의 손발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백진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녀석이 미동도 않는 덩어리를 뱃속에 품은 지 반년이 지났으니, 괴사 증상이 최근에 보였다고는 하나 정말로 시간이 없는 것이었다.
“꼬맹아…… 제발 아프지 마라. 제발…….”
백진은 선담을 안아든 채 집으로 들어가는 복도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따져볼 수도 없었다. 역시 서인표 말대로 강제로라도 수정란을 떼어냈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홍선담은 죽어도 제 뜻대로 하겠다고 발악을 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녀석에게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EEC와 다를 바 없었다. 최은협 그놈과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허나 선담의 몸이 버텨주지 못할 것 같으니 어서 빨리 녀석의 뜻대로 최은협을 데려다 놓아야 했다. 비서들은 복도 끝에서 백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진은 선담에게 속삭였다.
“네가 바라는 게 뭔지 궁금해.”
“제가…… 바라는 거요……?”
“그래,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 건지 듣고 싶어.”
“EEC요…?”
“뭐든.”
잠시 간 고요했다.
“……….”
“……….”
“다 죽어버렸으면…”
선담은 대답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백진은 애가 타서 그런 선담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런 생각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
“꼬맹아, 네가 걱정된다. 네가 어디론가 떠나 버릴까봐, 네가 아파서 쓰러질까봐 두려워. 이런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놈을 잡아놓지도 않았을 거다. 그냥 그놈이 너를 찾지 못할 곳으로, 우리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니까.”
“알아요, 아저씨. 알아요…….”
“그러니 말해봐. 네가 정말 바라는 걸.”
그러나 선담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포기하는 쪽은 연백진이었다. 그래, 조급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최은협도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백진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지금 보러갈 거냐.”
그러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던 선담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어떤 시비가 오갈지 몰라도 일단 선담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도와주고 주사를 맞힐 생각뿐이던 백진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선담은 느릿느릿 집으로 올라가 간단히 짐을 풀고 자리에 누웠다. 한숨 푹 자고난 후인데도 기운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래서는 은협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버릴 것 같았다. 그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수마에 빠져들었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선담이 쓰러지듯 잠든 바로 다음이었다. 멀리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숨 가쁜 차림으로 석재가 비서의 안내를 받고 들어왔다.
“백진아!”
“조용.”
백진은 선담을 이불안에 잘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재는 그를 따라 거실로 나오자마자 거의 윽박지르며 따졌다.
“도대체 며칠간 연락도 안 되고 이게 뭐야? 너랑 선담이 여기 없었다는 거 알아. 선담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는 거야? 큰일 났어, 아무래도 선담이가 EEC에ㅡ”
“이제 EEC는 없어, 정석재.”
“뭐?”
“내가 묻어놨어.”
“뭐?!!”
“조용히 해.”
석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는 실망감과 당혹감, 그리고 미약한 환희 같은 게 섞여있었다.
“EEC를…… 정말 어떻게 해버린 거야? 어떻게?”
“자세히는 몰라도 돼. 하지만 문제되는 일은 없을 거다. 녀석도 안전할 거고. 약속해.”
“백진아.”
“정석재, 너 예전에 나랑 한 약속 기억나?”
백진과 내기를 하거나 약속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석재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자 백진이 턱으로 선담이 있는 방 쪽을 가리켰다.
“저 녀석 나한테 맡긴 날. 내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던 거.”
그제야 석재가 “당연히 기억하지.”라고 대꾸했다. 백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기다려줘.”
“그, 그럼 하나만 물을 게. 백진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선담이가 위험한 건 아니지?”
“절대. 이제 다 끝나가. 이제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다.”
“백진…”
“소원이다. 네가 가만히 있어주는 거.”
석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백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놈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백진은 한꺼풀 허물을 벗은 것처럼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늘 거짓 없던 눈동자가 흉포해보였다. 선담도 걱정되었고 백진도 걱정되었다. 석재는 백진의 등을 쓰다듬으며 찬찬히 물었다.
“알았어, 너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거지? 선담이가 위험하거나 아플 일 없는 거지? 너 약속한 거다.”
“당연하지. 너 또 오지랖 피우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돼. 미안하다.”
“됐어, 이놈아.”
백진은 담배 생각이 절실했으나 석재 앞에서는 피울 수가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말했다.
“최은협을 잡아놨어.”
“뭐? 어디에?!”
“EEC 본사에. 지하실에 묶인 지 3일쯤 됐을 거다.”
“어쩌려고? 너 설마…”
“아니, 그놈만은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할 거야. 죽이든 말든 상관없지만.”
석재는 잠시 놀랐지만 뒷말은 그저 사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동의하듯, 그리고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은 그가 선선히 동감하는 빛을 띄우자 그나마 맘이 좀 편한지 소파에 앉았다.
“석재야, 내가 그런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거 네가 이해못하면 안 돼.”
“……노력할 거야.”
“저 녀석 뱃속에 수정란이…… 썩기 시작했으니까.”
석재는 순간 쓰러질 뻔했다. 머리가 핑 돌고 발밑이 어두워졌다. 석재는 간신히 테이블을 짚었다. 백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도 처음 인표에게서 소식을 접했을 때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석재는 백진을 뒤로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발치에는 자신이 선물해준 곰인형이 앉아있었다. 어쩐 일인지 잠든 줄 알았던 선담이 눈을 뜨고 있었다.
“선담아.”
“불곰 왔어…?”
“언제 일어났어? 방금 잠든 거 아니었어? 내가 깨운 거야?”
“아니야, 조금 더워서 방금 깼어. 아저씨가 또 난방 엄청 올렸나 보다.”
“그렇구나.”
석재는 의자를 빼 앉았다. 괴사에 관한 이야기를 방금 들어서 그런지 선담의 하얀 얼굴이 예전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다. 석재는 어지러웠다. 의자에서도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어머니가 암을 진단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선담이 저를 보고 환히 웃는 얼굴에 감정이 복받쳤다. 아직 제대로 누리지 못했는데 삶을 버리기 시작한 녀석이 불쌍해 미칠 것 같았다. 결국 석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간 선담에게 무슨 일이라고 생길까봐 노심초사 참고 눌러왔던 울분이 터진 것이었다. 선담은 당황했다.
“부, 불… 석재 형.”
“선담아, 네 몸 챙기자. 제발, 백진이가 하자는 대로 주사 맞고…… 이제는 행복해질 생각만 하자. 응? 선담아……”
석재가 흐느끼는 소리가 거실까지 조용조용 흘러들어왔다. 백진은 소파에 앉은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어렸을 때 보여줬던 그런 웃음이 보고 싶어. 내가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너 코가 빨개가지고서는 열네살이라고 하면서 웃었었잖아. 내가 햄버거라도 하나 사다주면 좋아서 폴짝폴짝 뛰었었잖아. 영국에 가기 전까지는 그런 모습 많이 봤는데, 잘 웃었었는데…… 난 그게 너무너무 그립다.”
선담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석재의 손을 잡았다.
“주사 맞을게. 불곰, 나 주사 맞을게. 그럼 되잖아.”
석재의 눈물에 숙연해졌던 백진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인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인표가 전화를 받자마자 여기로 올 수 있냐고 거의 따지듯 물은 백진은 오늘은 중요한 예약수술이 있다는 말에 최대한 빨리 와달라고 했다. 선담이 주사를 허락한 것이다. 당장에 달려가 석재를 저쪽으로 밀어내고 녀석을 얼싸안고 싶었지만 우는 놈 앞에 서봤자 서로 민망할 것 같아서 말았다. 석재는 주사를 맞겠다는 말에 감격해서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고 오히려 선담이 그걸 달래느라 애먹었다.
시간은 저녁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백진은 석재에게 늦었는데 돌아가지 말고 자고가란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석재가 선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나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선담은 눈이 빨개져서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혼자 달래주는 것도 자신 있었지만 석재를 보내버리면 어쩐지 선담이 아쉬워 할 것 같았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라도 있는지 녀석은 좀체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곤 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백진은 석재를 툭 쳤다. 석재는 레지던트 마지막 과정을 2주 앞둔 입장이었지만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는 얼른ㅡ원래는 백진이 누워야 할ㅡ자리를 차지했다. 바닥에서 자라는 의미였던 백진은 어처구니 없어하며 침대로 올라왔다. 어차피 셋이 누워도 충분할 크기였다. 몇 번이나 엎치락뒤치락 한 후에야 선담이 가운데에서 자기로 했다. 그 다음부터는 또 이불 싸움이 시작됐다. 어느 쪽이 이불을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난방은 펄펄 끓는데 서로 춥다고들 난리였다. 결국 선담이 기어 내려가서 이불을 하나 더 가지고 올라왔다. 그러고 나니까 이번엔 누가 선담과 이불을 함께 덮느냐가 문제되었다. 백진은 내가 왜 저놈을 침대로 불러들였는지 모르겠다며 애꿎은 불곰인형을 발로 툭 차 떨어트리고 궁시랑거렸다.
-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보자. 네가 그렇게나 바라는 그 행복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고.’
선담은 대답했다.
‘행복해. 선배, 나 말야, 정말 행복해. 선배와의 시간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행복해서 무서울 정도로……. 두 사람은 날 아껴주고 사랑해줘. EEC에서의 생활이 무조건 불행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행복했어도 그때는 고통에 늘 노출되어있었고, 그래서인지 난 정말…… 이제와 비로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은협의 눈은 슬퍼보였다.
‘너와 난 서로 없이 행복할 수 없어. 적어도 난 그래. 네가 내 이런 마음을 몰라준다는 것에 화가 나 미칠 것 같다.’
은협의 얼굴이 몹시도 슬퍼보였다. 언제나처럼 표정도 없고 생기도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 뚝뚝한 이면 아래에서 선담은 늘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ㅡ너와 난 서로 없이 행복할 수 없어.
익숙한 말. 사실은 자신이 은협에게 먼저 했던 말이다.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은협은 가끔 놀렸었다. 어린 나이에 한 고백이 진부하기 짝이 없다고. 자기가 생각해도 어린애가 쓰기에는 어려운 표현이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 말을 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늘 모르는 척 했다. 지옥 같은 보육원에서 도망치자기에 간절하게 내뱉었던 말. 늘상 은협에게 놀림이 된 말이었지만 사실 두 사람에겐 고리처럼 연결된, 그런 말이었다.
“……….”
선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백진과 이불을 덮고 자게 되었는데 여느 때처럼 참 따듯했다. 선담은 왼편의 석재를 보았다. 울었던 탓에 그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얼굴에 삐딱하게 쓰인 안경을 벗겨주고 선담은 백진을 보았다.
이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가장 사랑했던 사람 또한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애정이나 애증이란 단어보다는 이별이란 단어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이별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증오가 숨 쉬고 있었다.
“아저씨…….”
선담은 허리를 숙였다. 그가 자신에게 늘 해주었던 것처럼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옅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그의 콧대에도 입 맞췄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와 곤히 잠든 이 사람을 깨울 것 같았다. 선담은 백진의 뺨을 감쌌다. 훤칠하게 잘생기고 자상하기까지 한 이 남자가 자신의 박복한 인생에 함께 꼬여버려 크게 다치고, 상심했다. 이렇게나 좋은 남자에게 더는 그런 상처 주기 싫었다.
선담은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움직이면 백진이 깰 것 같아 겁났지만 그간의 일정이 그에게 큰 수마를 안겨주었는지 백진은 얌전했다. 그는 자신이 키스해준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정되지 않아 방안을 다 울리는 듯했다. 전상목을 보러 가기 위해 섰을 때와는 달랐다. 왜 그런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심장이 이토록이나 작렬하는 이유를.
선담은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생일날 이들과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백진이 주었던 쪽지 두 장을 모두 소중히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이 깃든 침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간 정말 고마웠어. 불곰, 정말 고마워. 그리고 아저씨……”
눈앞의 세상이 뿌예졌다.
“사랑해요.”
- - - -
밀폐실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들은 깜짝 놀랐다. 폐쇄된 EEC 건물 지하에 위치한 이곳을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도 없을뿐더러 사전에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옷더미를 태우고 돌아와 이제 막 밀폐실의 문을 열어보려던 손 실장은 얼이 빠졌다.
“작은 도련님? 이 시간에…”
“아, 안녕하세요.”
“연백진님과 함께 오셨습니까?”
“아, 아뇨… 혼자…”
그러자 손 실장의 인상이 어두워졌다.
“도련님,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몰래 빠져나온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선담은 남자의 철벽같은 염량에 당혹했다. 손 실장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연백진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자, 잠깐만요!”
선담은 필사적으로 손 실장에게 달려들었다. 저보다 머리가 네 개는 더 달린 남자에게 악바리처럼 대드니 지켜보는 경호원 모두가 당황했다. 그러나 잠시 후, 오히려 선담이 손 실장에게 양쪽 팔뚝을 잡혀 붕 들린 채 말을 지어냈다.
“아저씨 지금 주무세요. 제, 제가 억지로 깨워서 허락받고 나온 거예요. 그, 그게 아니면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겠어요. 지금 전화하면 아저씨 화 많이 낼지도 몰라요. 가, 가뜩이나 피곤해 보이던데…… 지금 막 잠드셨어요.”
선담을 도로 내려놓고 폴더를 연 손 실장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정확히 짚어 말하자면 어쩔 때는 연백진보다도 이 아이의 말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에 하나 이 아이의 마음을 상하는 일을 만들었다간 연백진에게 사달이 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손 실장은 몇 번 주저하다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최……은협이란 사람이 여기 있다고 했어요.”
“이 방에 있습니다.”
“만나고 싶어요.”
“그럼 잠시 문을 열어드리죠. 그 자와 지인이십니까?”
“잘 아는 사이에요.”
손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어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요.”
손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경호진은 의아한 눈을 했다. 손 실장은 수하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럼 결박은 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간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의자에 꽁꽁 묶어둔 놈인데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해를 가하지는 못한다. 손 실장은 수하 둘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신호하고 열쇠를 끼워 넣었다.
덜컹!
정사각형의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형광등 하나가 전부이고 그 방의 중앙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3일이나 묶여있었다고 해서 축 늘어져 있을 줄 알았던 최은협은, 마치 목각인형처럼 곧게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은 뒤로 모아져있었고, 눈이 가려져 있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더니 문득 고개를 들었다.
“홍당이가 왔군.”
손 실장은 은협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네놈이 뭘 알아?”
은협 또한 똑같이 그를 비웃었다.
“녀석이 가까이 오면 유취가 돌거든. 네놈들은 모르는.”
선담은 손 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손 실장은 놈의 지치지 않는 살기를 강제로라도 잠재워 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선담은 그에게 이제 그만 가봐도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어렵사리 문을 열어두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려는 찰나 철컥, 하고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손 실장은 그 길로 핸드폰을 뽑아들었다. 일단 아이의 뜻대로 움직여 준 뒤 연백진에게 바로 보고하고자 한 게 그가 최대한으로 양보한 방법이었다.
-
백진과 석재의 대화에서 얼핏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다. 정말 EEC 건물지하에 최은협이 있으리라곤. 그가 잡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그곳이 EEC 본사라니. 백진이 이런 면에서는 참 짓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협은 여전히 눈이 가려진 채 차분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가 앉은 의자는 시멘트 바닥에 솟은 쇠고리와 연결되어 단단히 고정돼있었다. 그의 두 손은 의자와 묶여있었다. 선담은 조심스럽게 은협의 눈을 풀어주었다. 은협은 빛이 익숙하지 않는지 잠시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홍당.”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정말 죽이러 왔어?”
선담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몇 번 고개를 흔들던 은협은 드디어 선담을 바로 보았다. 그랬다. 배가 부르지 않은 모습을 본 것이다. 은협은 눈을 크게 떴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수정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했어.”
“……그런데 배는 그대로군.”
선담은 홀쭉한 자신의 배를 별일 아니라는 양 쓰다듬었다.
“잠깐 정지해 있어. 하지만 수정란은 그대로거든. 조만간 성공할 거야.”
“난 TV에서 하는 소리 다 믿지 않아. 정말 다른 놈의 아이인지 궁금해.”
“대답하기 전에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당신, 내가 당신 새끼를 내 몸에 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깟 알약 하나면 될 줄 알고……?”
은협의 눈동자가 꿈틀,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TV를 다 믿지 않는다며. 그럼 정말 당신 정자로 수정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애당초 안됐을 거라고 체념하고 떠보는 거야?”
의자가 한번 덜컹! 하고 흔들렸다. 선담은 깜짝 놀라 벽에 등을 딱 붙였다. 은협은 몇 번 팔을 빼보려고 움직이더니 이내 포기하고 물었다.
“설마…… 죽인 거냐.”
“……….”
“죽인 거냐고!”
선담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ㅡ 높은 음으로 울리는 소리가 은협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당신 씨가 죽었으니 아저씨랑 수정에 성공한 거겠지.”
“……ㅡ!”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협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팔을 잘라낼 기세였다. 선담은 바짝 긴장한 채로 밀폐실의 모서리에 등을 붙이고 서서 으르렁거리는 은협을 지켜보았다. 언제 사슬을 끓을지 모르는 굶주린 사자와 한 우리에 갇힌 기분이었다. 최은협은 홍선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팔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되지 않자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담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홍선담.”
“……….”
“위험한 약까지 써가며 겨우겨우 만들어 놓았더니 죽였다고……. 내 아이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 내가 평생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던 거 잊었어?”
“………기억해.”
“그런데 왜 자꾸 힘들게 만들어.”
선담은 막연히 기억을 되살폈다.
그래, 당신은 내 곁에 있어준다고 했다. 연인도 아니고 한 아이의 아버지도 아닌, 실험자로서.
은협은 무릎사이에 고개를 처박을 듯 숙이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장난이라면 여기까지만 하자.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충격에 이성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뉴스보도를 100%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선담을 만나면 진실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보라고, 나를 유인하기 위해 그런 낡은 수법을 쓴 건 아니냐고. 혹은 OPC 복용에도 불구하고 수정에 실패한 것이냐고. 헌데 전혀 예상 못한 답변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것이다. 3일 내내 녀석을 기다렸기 때문에 결박을 풀려는 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이런 결과가 통보될 줄 알았으면 꾸준히 움직여 느슨하게라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차마 표현하지 못할 화기가 순식간에 뻗쳐올랐다.
은협은 결국 힘을 풀고, 제 앞에 황망히 서 있는 선담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죽인 거면 너 가만 안 둔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진심에 가까운 듯하고, 그만큼 무서운 한마디에 선담은 가볍게 웃었다.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입을 쭉 벌리고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 웃고 있는데도 얼굴이 괴상망측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분명 입가에 힘을 주고 입꼬리를 들어 올렸는데 뺨이 경련하고 눈가가 떨렸다. 결국 선담은, 자신이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더니 뺨을 축축하게 적셨다.
“ㅡ개새끼…….”
“……….”
“최은협, 넌…… 살인자야.”
은협은 실소했다.
“살인자는 따로 있겠지.”
“아니, 세상에서 너 같은 살인자도 없을 거야.”
“그만해.”
“당신이 한 짓이 기억 안나?”
선담은 품 안에 있던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순간이지만 은협의 눈이 굳어졌다.
“당신도 똑같이 죽어야 돼. 당신이 내게 한 짓들이, 평생토록 용서가 될 것 같지가 않아.”
은협은 묶여있었고, 선담은 칼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서로의 자리를 뒤바꿔 놓은 듯했다. 묶인 사람은 은협이었지만,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선담 같았다.
“죽어서도 잊지 마.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고생만 한 내게, 당신이 한 짓을.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애원한 새끼를 죽이고……”
“그만해.”
“뭘 그만해!”
선담은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난 정말로 당신만 사랑했어. 그런데 당신은……”
은협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자신의 씨앗이 뽑혀나갔다고 하자 마치 정신이 다른 데로 날아간 사람 같았다. 선담은 어린 아이들 앞에서 그들의 아버지를 해쳤던 주제에도, 지금은 그런 모습을 티끌만큼도 보여주지 못했다. 의자에 묶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남자를 상대로 무기까지 쥐고 있는 입장에 무엇이 그리도 무섭고 서러운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은협은 선담을, 정확히는 그의 눈물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내 차례라는 건가.”
은협은 이 상황을 똑바로 지켜보고 있음에도 웃었다. 그의 웃음에도 힘은 없었다.
“그래, 다 좋으니까 이것만 대답해줘.”
“……….”
“정말로, 내 아이가 죽은 거냐…? 수정을 했는데도, 그런데도 네가 죽였어……?”
선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이지 않았지만 곧 죽게 될 것이다. 당신 때문에 멀쩡한 새끼 하나가 다시금 어미의 뱃속에서 잘려나갈 것이다. 악마 같은 당신. 아니, 더는 악마라고 불러주기도 어려울 지경까지 와버린 당신 때문에.
목이 메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선담은 한걸음 한걸음 떼어 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는 광포해진 눈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선담은 은협을 잡아놓은 매듭에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풀어줄 테니, 당신 맘대로 한번 해봐.”
“지금 풀면 정말 위험할 텐데.”
그가 내는 숨소리는 짐승의 속삭임 같았다. 손이 떨려왔다. 방향 없는 분노로 온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바라던 바거든.”
툭ㅡㅡㅡㅡ
단숨에 은협을 옭아매던 매듭이 떨어져나갔다. 날이 스쳤는지 그의 손목에서 선혈이 흘렀다. 곧바로 주먹을 뻗을 줄 알았던 은협은 낮게 신음하며 뒤로 젖혀있었던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난 한번 뱉은 말은 지켜. 특히 네게 했던 말은.”
“누구보다도 잘 알아. 어디 한번 해봐.”
선담은 칼자루를 꽉 쥐었다.
-
드르르르르르륵ㅡ 드르르르르륵ㅡ
백진은 실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한번 자리에 눕자 온몸이 까라져 일어나기가 여간하지 않았다. 진동소리는 잠시 그치는 듯하더니 다시 울렸다. 백진은 옆자리를 더듬으며 한손으론 선담을 찾았고, 또 한손으로는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찾았다. 곧 핸드폰은 손에 들어왔지만 같이 잡혀야 할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백진은 스탠드를 켜고 자리에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폴더를 열었다.
“네.”
옆에서 석재도 부스스한 얼굴을 들었다.
[연백진님, 손태주입니다.]
“그래, 잠깐 기다려. 꼬맹아, 어딨냐ㅡ”
[연백진님.]
“홍꼬맹ㅡ”
[연백진님, 작은 도련님 여기 와 계십니다.]
순간 백진이 입을 딱 다물었다.
“뭐라고?”
[막무가내라서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최은협이 갇혀있는 방에 단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혼자 들여보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들어가야 한다기에… 걱정 마십시오. 그놈이 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때문에 작은 도련님 들어가자마자 바로 연락드린 겁니다.]
“당장 문 열어놔. 녀석 빼놓고.”
연백진은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입었다. 어느새 석재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옷을 찾았다. 백진은 무어라 추가로 보고하는 손 실장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차키를 찾았다. 자기도 이기지 못하는 그 고집이 어디 가겠나. 손 실장도 맘이 약해졌을 것이다. 녀석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도 사람을 묘하게 동요시키는 신기한 구석이 있으니까.
백진은 같이 가자며 허둥지둥 옷을 챙기는 석재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최은협이 의자에 묶여있든 어떻든 간에 홍선담이 그놈이 있는 위험한 곳으로 혼자 움직였다는 사실만 인식됐다. 또 얼마나 고집을 부렸으면 손 실장이 최후의 수단을 발동했겠는가. 백진은 석재가 코트를 걸치자마자 그대로 밖을 뛰쳐나왔다.
-
선담은 잡힌 팔을 이리저리 흔들려고 했다. 아니, 잡힌 칼날을 빼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상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칼날에 썰려 나갈 것 같은 위기에도 그는 물러섬이 없었다. 이깟 나이프 한자루로 최은협을 이겨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대응 또한 예상 밖이었다. 손안에 가해지는 고통 때문에 힘을 온전히 낼 수 없는 은협은 선담에게 말했다.
“아프다. 그만 놔라.”
“물러나.”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왔다. 선담이 마음만 먹으면 그의 배에 날을 박아 넣을 수 있을 거리였다. 은협은 물었다.
“왜 울어?”
“……….”
“지금 울고 싶은 건 난데.”
선담은 아직도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줄은 몰랐다. 팽팽한 완력대결에서 눈물을 훔칠 수는 없어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렵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앞으로 걷게 될 길보다도, 자신이 그 길을 걷도록 만든 이 자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당신이라도 죽을 때는 울고 싶지 않겠어?”
“네가 날 죽이겠다고 했으니 나야 울어도 되겠지만, 너는 왜 그러는데.”
선담은 검붉은 핏방울이 고인 밀폐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점차로 한 남자의 발끝에 집중되었다. 천천히, 천천히 올라간 시선이 마지막 그의 눈동자에 맺혔다.
선담은 지난 날, 열심히 살겠다고 발버둥 쳤던 자신의 모든 날갯짓이 허망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흐윽……! 흑……!”
연백진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자신은 행복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더 오래 살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괴로운 일만 켜켜이 쌓여 자신을 지켜주려는 이들을 망가트릴 게 뻔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게 행복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자신은 행복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수년간 자신에게 냄새를 배겨놓아 아직까지도 발목을 놓지 않는 이 남자와 함께 끝내버리고 싶었다.
선담은 칼날에 손을 계속 다치는 은협을 보면 볼수록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도저히 이 남자에게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남자를 무시하며 살아갈 수도 없었다. 더는 연백진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폐란 폐는 다 끼쳐놓고 행복해야 할 그에게 무거운 사슬을 옭아매놓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최은협에게 내릴 수 있는 형벌은 그의 새끼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를 죽이고 자신도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승리하고 싶었다. 지금은 두려워 미칠 것 같아도 막상 최은협의 심장이 멈추면 자신도 함께 갈 수 있으리라.
선담은 얼룩진 얼굴로 은협에게 내뱉었다.
“당신 혼자 쓸쓸히 보내진 않아. 나도 금방 따라 갈 거니까…….”
그렇게 당신은, 당신의 새끼와 함께
영원히 당신의 것이라던 모체마저 죽이게 되는 거다.
그때였다. 선담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 은협이 나머지 한 손으로 선담의 손목을 낚아채 나이프를 뺏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대로 칼을 뺏긴 선담은 은협의 품속으로 팔이 꺾이며 들어가 안겼다.
“윽ㅡ…!”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은협은 나이프를 뒤춤에 꽂았다. 선담의 팔을 꺾어 안은 채로 그는 밀폐실 밖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밀폐실 안에서 모든 걸 끝내려고 했던 선담은 당혹했다. 밖으로 나가면 아까 보았던 경호원들이 있을 것이고, 만약 은협이 공격받아 자신이 그들의 보호 하에 들어가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뜻을 방해받을 것이었다. 선담은 악을 썼다. 흉악에 가까운 발악이었다. 선담은 인정사정없이 몸을 뒤흔들었다. 은협이 다쳤던 부위라도 찌르기 위해 난동을 부렸다.
“놔! 더는 다른 사람들 다치게 하지 말고 여기서 우리 둘이 해결해!”
“아니, 죽더라도 네 뱃속에 든 다른 놈의 새끼는 내 손으로 없애주지.”
“이 미친 새끼야!”
“그리고 너하고 나, 죽지 않는다. 누구 맘대로 죽는다는 거냐. 잊었어? 너, 내 옆에서 살겠다고 했던 거.”
“ㅡㅡㅡㅡ!!”
은협은 저항하는 선담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철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콰앙!
무언갈 알아챈 은협이 거칠게 문을 찼다. 그러자 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누군가 이 방으로 들어오려다가 은협에게 걸린 것이었다.
“같잖은 수 쓰지 말고 물러서.”
은협은 선담을 끌어안은 채 밀폐실에서 나왔다. 그의 공격이 적중했는지 경호원 하나가 코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손 실장과 나머지 한명은 철문 주변을 포진하고 있었다. 손 실장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잽싸게 동태를 살폈다. 움직일 때마다 최은협 주변에 흐르는 선혈이 점차 멎어드는 것을 봐서 급소가 아닌 어딘가를 베인 모양인데 저 새끼가 도대체 어디에 흉기를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밀폐실에 가둘 때 온몸을 뒤져놓았는데. 어쨌든 그 잠깐 사이에 결박이 풀렸고, 더욱이 저희는 한발 늦어서 홍선담이 인질로 잡힌 상황이었다.
“제기랄…!”
손 실장은 입새로 작게 지껄였다. 저 홍선담이라는 아이가 들어와 풀어줬다는 가정 말고는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딱 하나 있는 그 가정이 최악이었다. 손 실장은 몸을 낮게 구부려 최은협을 진정시키기 위해 빈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작은 도련님부터 내려놔.”
최은협은 웃었다.
“너희는 내가 한걸음 움직일 때 뒤로 한걸음씩 물러난다.”
협상에 익숙한 놈이 아닌 듯했다. 아니, 협상이란 말 자체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손 실장 옆에 선 경호원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실장을 바라보았다. 손태주는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은협이 쐐기를 박았다.
“이 녀석 목 부러지는 꼴 보기 싫으면 말대로 해.”
최은협은 목뼈를 부러트리려고 했으면 진작에 부러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경호진은 오로지 홍선담의 안전에 금이 가서는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점차로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되면 수세는 기울기 마련이었다. 선담은 팔이 꺾이고 턱이 잡힌 채라 은협의 보폭을 따라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니 말로 설명하기도 무리였다.
“최은협, 험한 꼴 보기 전에 놓아줘. 연백진님께 잘 말씀드려 네 신변은 보장해주겠다.”
“이 녀석 신변도 보장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은협은 조소하며 선담을 앞세운 채 뒷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 실장은 애가 타다 못해 쓰러질 것 같았다. 저놈이 탈출이 목적이라면 혼자 탈출해야 할 텐데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홍선담까지 끌고 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자라면 연백진에게 죽어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후자가 된다면 정말로 생사가 위협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은협은 이중으로 압박받는 경호원들의 심리를 눈치챘다. 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이대로 홍선담을 어깨에 짊어지고 달릴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손 실장은 선담의 몸수색을 해보지 않은 것에 땅을 치며 후회했다. 연백진이 고이고이 아끼는 녀석이라는 얘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무엇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것은 고용주의 사생활을 묻지 않는 방침 때문에 더욱 그러했지만, 어쨌든 일이 벌어진 이상 저희들에게 큰 책임이 있었다. 시내에서 사냥할 때도 최은협의 기량을 가늠했음에도 홍선담을 들여보내준 저희들의 실수가 컸다. 아무리 연백진에게 연락을 취했다한들 따르는 벌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다. 저 아이가 결박을 풀어줬다는 증언을 해봐야 변명이었다. 더 큰 화를 자초할 것이었다.
뾰족한 수가 없어 셋이나 되는 경호원이 주변을 둥글게 포위한 채 최은협을 따라 이동할 때였다. 은협은 여기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릴 때 등뒤를 뺏기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7층은 예전 보안문제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걸어두었었다. 그게 해제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계단은 개방되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6층에서 다시 계단으로 이동하는 수고를 덜어야 했다. 은협은 아예 처음부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선담이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팔에 힘을 줘 팔꿈치가 부스러지도록 고통을 가했다. 날이 퍼렇게 선 나이프를 들고 찾아온 주제에도 그 통증이 대단한지 녀석의 어깨가 쉬지 않고 수축했다.
그렇게 최은협은 홍선담을 품에 가두고 손 실장 외 경호원 둘을 마주한 채 7층까지 올랐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목줄과 팔을 틀어쥔 손마디에 땀이 흥건했다. 선담은 몇 번이나 신음하고 힘들어 고꾸라졌다. 그럴 때마다 은협은 그를 독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들을 쫓는 무리보다 그들을 경계하고 주시하는 최은협, 그리고 그에 끌려가는 홍선담이 더욱 힘겨웠다.
드디어 7층에 당도했을 때, 선담은 은협의 속내를 꿰뚫었다. 7층은 EEC의 모든 연구실이 집결되어있는 가장 중요한 층이었다. 최은협은 여기서 뱃속에 앉은 핏덩이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 도구가 주사바늘이든, 수술용 메스든, 그의 폭행이든 궁금하지 않았다. 선담은 몸에 힘을 뺐다. 자신을 옮기는 은협이 힘겹지 않도록. 굳이 반항해서 고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 몸이 어떤 해를 입더라도, 핏덩이를 떼어내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피눈물 흘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고, 그 마음만 절실했다. 진실을 안 그가 광기에 휩쓸려 자신을 산 채로 도려내도 괜찮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굳이 스스로 죽을 필요가 없겠다란 예감이 들자 온몸이 평온해졌다.
손 실장은 난감했다. 백람에 입사한 이례로 이렇게나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우르르 달려들어 홍선담을 빼내기에 셋이란 숫자는 부족했고,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 독이 오른 저놈이 선담의 목덜미를 물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무엇보다, 곧바로 로비를 빠져나가 탈출할 줄 알았던 놈이 굳이 7층까지 올라오자 그것에도 의문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이렇게나 결정하기 어려운 난관은 없었다. 어서 연백진이 오기를 기다리기에는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가만히 저희를 내려다보던 최은협은 단언했다.
“7층은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는다. 그리고 계단은 여기서 문을 잠글 거다. 못 열리란 법도 없지만 힘들겠지.”
콰앙!
닫힌 문 저편으로 욕설과 함께 쾅쾅대는 소음이 진동했다. 그렇게 손 실장을 따돌린 은협은 선담의 손을 잡아끌었다. 선담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은협은 선담이 그저 사기를 잃은 것이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 선담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웃었다. 이제 자신은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림자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은협의 잔해를 치울 자신도 없었다. 백진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행복하면 할수록 은협은 어딘지 흐릿하게 잊혀지는 것 같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심장에 자상처럼 깊게 남아있을 영원한 그림자였다. 선담은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자신을 몇 번이고 각성했다.
와장창ㅡ!
“큭……!”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 선담은 침상 옆에 주저앉으며 신음했다. 반년 이상이나 연구에 손을 놓았던 사람답지 않게 은협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필요한 서랍만 열고 필요한 물건만 꺼내는 듯했다. 선담은ㅡ고정대에 팔이 묶인 탓도 있지만ㅡ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은협은 곧 어느 큰 통을 찾았다. 투명한 액체가 담겨있었다.
“선배, 나 사랑하기는 했어?”
은협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커다란 주사기에 필요한 만큼의 약물을 담았다.
“……언제나.”
대답 따위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홍선담에게 다가왔고, 때문에 묘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나.
언제나 사랑했다고.
이제는 눈물도, 미소도 없었다. 이렇게나 메마른 가슴을 가지게 된 자신. 이 남자에 대한 것이라면 점점 지쳐만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선담은 그 말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거짓말로라도 확인하고 싶었고, 그 욕망을 참지 못했다.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 아저씨랑 있으면 행복하다고. 아저씨랑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고……. 선배, 선배가 정말로 나를 사랑했다면 여기서 조용히 놓아줘. 뱃속의 수정란도 곱게 보내주고, 선배도 어디론가 떠나서 행복하게 살아. 나랑 선배는 너무 멀리까지 온 것 같아. 그러니까 이제 서로를 잊는 건 어떨까. 그건 안 되는 걸까……?”
행복하고 싶었다. 연백진과.
반년전의 자신은 꼭 그랬다. 이대로 최은협도 행복해지고 자신도 행복을 찾아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나 바라왔던 마지막 소망이 이 건물 안에서 산산이 부셔졌다. 연백진이 바로 건넛방에서 자신을 위해 애써 권력을 인수받고 있는데,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둘씩이나 있는데, 그런데도 그 작은 바람 하나 이루지 못하고 자신은 여기까지 치달았다. 이제는 최은협의 존재를 애써 무시해가며 연백진 앞에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용기가 바닥났다. 최은협의 광기는 자신에게 옮겨져 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상목이 튀기는 핏물을 손안에 가득 받아가며 복수라는 이름의 명패를 올려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건 자신의 존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훼손된 존엄이 그나마 가장 깨끗하게 닦여졌을 때, 사라지고 싶었다.
더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주지 않고, 나 또한 상처받지 않는 곳으로.
“정말로 나를 사랑했다면, 그냥 여기서 헤어져서 행복하게 살자.”
마지막 선택권을 주었다. 그나마도 당신이 당신 손으로 직접 새끼를 죽이는 사실은 모르고 가버리라고. 그렇게 죽으면 그나마도 다행이지 않겠냐고. 볼품없는 나를 16년이나 돌봐준 당신에게 주는 최선의 성의라고.
은협은 대답했다.
“미안.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네가 다른 놈의 새끼를 품는 건 싫다.”
지친 줄 알았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쏟아졌다. 선담은 한쪽 팔이 묶인 채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은협은 그런 선담에게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수정란이 정지해 있다면, 착상이폐정지일 가능성이 높겠군. 다시 수정할 가능성도 있으니…… 없앤다. 이해해라.”
은협은 선담의 동공이 풀려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파심에 말했다.
“누차 말하지만 아프지 않게 가만히 있어. 주사바늘 들어간 상태에서 움직이면 정말 위험하다. 힘쓰게 하지 마.”
무얼 그리 위해준다고 헛소린지. 선담은 웃으며 물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 방금 내가 한 말, 당신을 위한 말이었어.”
차분해진 선담의 목소리 때문일까. 인내심이 폭발할 줄 알았던 은협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담은 이를 꽉 악물었다. 어느 순간 배꼽주변이 화해지더니 무언가 지독하게 쓰라린 물살이 뱃속을 헤엄쳐 들어왔다. 안쪽이 천천히 불타는 기분이었다. 주사과정이 건강에는 좋아도 약물이 퍼지는 과정은 조금 고되다고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아파야 하는 자신의 몸뚱이도 더는 불쌍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팔자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주사기는 천천히 공간을 좁혀가면서 투명한 약물을 자신의 몸으로 죄다 밀어 넣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지만 정말로 핏덩이를 죽이는 일이 실감났다. 이제 백진과 석재의 걱정대로 자신이 괴사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언가 더 치료가 필요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이런 슬픈 짓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심장을 가르고, 자신도 죽는다. 함께 죽는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그를 용서할 자신은 없었기에. 다만, 죽기 전에 가르쳐 주는 거다.
선담의 입이 찢어져라 웃기 시작했다.
“당신 애야.”
그 순간에 은협은 마지막 한 줄기까지 모두다 선담의 뱃속에 털어 넣었다. 묵묵히 선담의 배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ㅡ뭐……?”
선담은 더 대답해주지 않았다. 충분히 스스로 알아들을 일이었다. 은협은 느릿느릿,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너 방금…… 뭐라고……”
선담은 대답을 요하는 그에게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당신이 만들어준 새끼라고.”
“홍선……”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최은협은 말을 잇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암석처럼 굳은 채 홍선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16년간 함께 한 홍선담조차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얼굴. 자신이 최은협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몰려들 정도로…… 그런 얼굴이었다. 옛날이라면 자신은 최은협의 그런 얼굴에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최은협에게 아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부탁했을 것이다. 간절하게. 행복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최은협은 이마를 짚었다.
“……홍선담.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이 아닌 걸 어떻, 흑!”
선담의 마른 모가지가 커다란 손에 한번에 잡혀 들어갔다. 숨을 쉴 수 없어 힘들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최은협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왜…… 왜ㅡ!!! 홍선담! 왜 그랬어!!!”
“큭, 왜, 그랬냐……고……?”
선담은 죽을힘을 짜내어 은협의 뒤춤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 은협이 선담의 팔을 풀어주더니 거칠게 끌어안았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자신의 얼굴을 처절한 가린 것이었다. 마주 닿은 은협의 가슴이 척박하게 호흡했다. 선담은 이 모든 게 우스워 죽을 맛이었다.
“이제 놔줘…… 당신은ㅡ”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널 때려서, 강제로…… 그래서 그런 거냐? 그래서 몇 번이나 경고했잖아! 얌전히 있으라고……! 아프게 하지 말자고! 네게서 기형아를 낳을 수도, 그렇다고 널 영원히 포기할 수도 없는데, 내 사정을 왜 이렇게 이해 못해! 홍선담! 왜 내 마음을 왜 이렇게 몰라줘!!!”
“……….”
“네게서 내 아이를 보고 싶었던 나를, 그렇게나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냐……! 내 손으로 내 아이를 지우게 할 만큼! 내가 네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거냐! 난 네가 왜 날 이해 못하는지 모르겠어. 난 분명히……!”
쾅ㅡㅡㅡㅡ!
은협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연백진이었다. 난폭한 소리와 함께 선담이 눈을 크게 떴다.
“선담아!”
백진은 쫓아온 경호진과 석재를 강제로 물러서게 하더니 이내 문을 잠가버렸다. 놀란 손 실장과 석재의 고함소리가 빗발쳤다. 은협은 번개같이 몸을 틀었다. 하지만 선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반응이 늦었다. 그는 자신을 내려치려는 백진을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큭…!”
백진은 은협과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침상이 넘어지면서 다시 한번 사나운 소리가 터졌다. 백진이 주먹을 들어 은협의 관자놀이를 적중했다. 3일간 감금되어 있었던 데다 잡혀 들어올 때 머리에 부상을 입었던 은협의 움직임은 예전 같지 못했다.
“ㅡ……!”
백진은 은협의 둔한 움직임을 의심할 여유가 없었다. 언제 또 일어설지 모르는 놈이니 그대로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은협이 피를 뱉어냈다.
“EEC, 네가 한 짓이지? 다 죽었나?”
“닥쳐라. 네놈도 똑같이 보내주마. 홍선담한테 무슨 짓했어!”
……홍선담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은협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백진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물어오니,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가 떠올랐던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홍선담을 강제로 묶고 그 안에 자신의 모든 걸 털어놓았건만, 그 씨앗을 스스로 죽인 자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은협은 대답 대신 백진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백진은 신음하며 허리를 굽힐지언정 그대로 팔꿈치를 들어 은협의 명치를 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급소를 찍었다. 넘어질 때도 절대 혼자 넘어지지 않았다. 물건에 부딪치고, 주먹과 발길질이 격해졌다. 더는 몸이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자 둘 모두 힘에 겨워 몸을 떨었다. 말은 않지만 조만간 누구 하나가 죽어나갈 것 같았다.
“아저씨!”
끝이 보이지 않는 두 남자의 몸싸움에 선담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선담의 개입을 반기지 않았다. 어느 순간 백진이 은협의 위에 올라타면서 은협의 머리가 바닥에 쾅! 소리 나도록 떨어졌다. 은협의 입가와 이마에서 검붉은 선혈이 흘렀다. 두 남자는 격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곧 은협이 굵은 기침을 토해내더니 그를 비웃었다.
“너같이 다 가지고 태어난 새끼들이 싫다. 가질 수 있는 건 모두 손에 넣을 수 있고 배고픔이나 고독 따위는 알지도 못할 너희들이……!”
“네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난 홍선담 같은 녀석을 폭행하고 버려가면서까지 연구를 성공시키려고 발악하진 않아!”
“밥 한숟갈도 챙겨 먹을 수 없는 고아원에서 태어나서 삶에 단 하나 목표가 생겼을 때도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보자! 연구의 성공이라고? 네놈 눈에는 그렇게 보이냐? 내가 홍선담을 연구의 성공 때문에 버려왔다고? 너 같은 새끼는 절대 이해 못해!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으니까! 무언가를 위해 처절하게 발버둥친 적이 없을 테니까!”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다고? 웃기지마! 난 사람 마음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이다! 홍선담 저 녀석이 네 씨앗을 품고서 지우지 않겠다고 떼쓸 때마다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기나 해! 네놈은 가져놓고서도 행복한 줄 모르는 놈이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든, 네가 어떤 배고픔을 겼었던 간에 넌 그런 놈이야! 사랑해주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라… 헉……!”
순간 지켜보던 선담의 눈앞이 점멸했다.
붉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그것이 검은 핏덩어리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백진은 천천히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옆구리가 새카맣게 젖어 내리고 있었다. 그 검붉은 피가 백진의 입에서까지 왈칵 쏟아졌다.
“아저씨ㅡㅡㅡㅡ!!!”
“너 같은 도련님들은 이해 못한다고 했잖아.”
뒤춤에서 뽑은 칼이었다. 백진을 밀어내고 일어난 은협은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백진은 주저앉지 않았지만 충격이 굉장한 듯싶었다.
“급소는 피했다. 바로 의사에게 보이면 살 수 있…”
챙강ㅡ…!
다음 순간, 은협의 손에 들려있던 나이프가 떨어졌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는 옆구리를 짚고 간신히 서 있는 연백진과, 자신을 바라보는 홍선담이 있었다.
선담은 은협의 날갯죽지에 꽂은 메스를 뽑지 않았다. 더욱 힘을 주어 그대로 허리 아래까지 멈추지 않고 내려버렸다.
“나쁜 새끼! 죽어버려……!!!”
“크…흑……!
은협은 가까스로 다리를 디뎠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카디건이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졌다. 옷이 쇠붙이처럼 무겁게 느껴져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믿지 못하는 눈으로 선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은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흥분해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던 석재와 손 실장은 은협을 제압하려고 달려들기 직전에 백진부터 발견했다.
“배, 백진아!!!”
손 실장은 물론이고 다른 경호원들과 석재가 백진의 옆구리에 뚫린 커다란 상흔을 보고 은협을 지나쳤다. 최은협 또한 엄청난 부상을 입은 채였다. 그러나 그는 바람처럼 움직여 곧 실험실 밖을 빠져나갔다. 선담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뿌리치는 백진을 지켜보다 외쳤다.
“불곰, 아저씨 좀 병원에 데려다 줘!”
그리고 최은협의 핏자국을 쫓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피를 그렇게나 흘리면서도 걸음이 엄청나게 빨랐다. 뒤에서 백진이 자신을 불렀지만 선담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도 반드시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최은협의 숨이 끊어지고, 자신도 함께 연백진의 곁을 떠나는 것이었다.
연백진에게 더는 상처주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연백진은 자신과 있어서 행복해하는 모습보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 넝마처럼 맞고, 피곤한 일을 떠맡고, 무엇하나 뜻대로 하지 못해 조심스럽게 애원하고…… 그런데도 자신은 제 욕심 때문에 그를 아프게만 했다. 그는 나와 함께해서는 행복할 수 없었다. 선담의 머릿속엔 어느새 그렇게만 각인되어 있었다.
어느새 로비에 다다랐다. 은협은 주차 되어 있는 세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가 이동한 자리까지 선혈이 떨어져 있었다. 어디를 가려는 걸까. 선담은 그를 끝까지 추격할 의무가 있었다. 출발하는 그를 따라 자신도 쫓으려 할 때였다.
“홍선담!”
턱! 하고 백진이 차문을 잡았다. 선담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여기까지 언제 쫓아내려왔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 백진은 막무가내로 선담을 조수석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아저…!”
짝!
백진이 선담의 뺨을 때렸다. 순간 차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다지 세진 않았지만 선담을 향한 실망이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백진은 뺨을 감싸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선담을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아…저씨……”
백진은 선담의 시선을 무시하고 엑셀을 밟아 앞서가는 세단을 빠르게 쫓기 시작했다. 백진은 선담을 향한 분풀이를 핸들에다 대고 했다. 운전이 난폭했다. 선담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저히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날린 따귀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한번에 느낄 수 있었다. 고개가 무거웠다. 그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도망쳐 나왔건만, 지금은 자신의 이런 모습이 더욱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한심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런 생각을 한 사실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모든 걸 꿰뚫린 것에 수치스러웠다. 선담은 얼얼한 한쪽 뺨을 감싸고 눈물을 참았다.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을 뿐이었다.
은협이 모는 세단은 엄청난 속도로 새벽공기를 갈랐다. 뚜렷하게 정해놓은 어딘가로 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진은 핸들을 꽉 잡았다. 지금은 그저 저놈을 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최후의 무대가 어떻게 장식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나, 막연한 본능이 말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고.
-
자신은 익숙한 뜰에 서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낡은 건축물, 그리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또래별 아이들. 그곳은 어느 겨울날의 파주 보육원이었다. 홍선담은 그곳에서 다 자라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 점심시간에 나누어준 빵 한조각을 쭈그려 앉아 먹는 홍선담, 자신이었다. 추운 날임에도 뜰 앞 스탠드에 나와 빵을 뜯어먹는 이유는 아마도 먹을 것을 뺏기는 게 싫었기 때문이리라. 고사리 같은 손은 씻지 못해 허옇게 부르터 피부가 일어나 있었고 통통한 볼 또한 뻘개서는 콧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자신은 그런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빵 한조각에 목숨을 걸고 먹었다.
아마도 여덟살 때일 테다. 은협이 이틀 연속으로 연합고사를 치르러 갔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고학년들의 손찌검을 당해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눈에 거슬리면 작은애들은 큰애들에게 두들겨 맞고, 먹을 것을 뺏기고, 심한 경우엔 발가벗겨져서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은협의 부재 시에는 그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정석이었다. 딱딱하게 말라버린 빵조각을 겨우 하나 먹으면서도 눈치란 눈치는 죄다 보아야 했다.
지켜보는 홍선담의 눈동자가 뜨거움에 일렁거렸다.
저런 시절이 있었다. 수용인원이 80명이 넘는 보육원에 제대로 된 교사라곤 원장과 지도교사 셋이 다였다. 깡시골의 보육원은 시설은 물론이고 의식수준도, 치안수준도 바닥이었다. 여선생 4명으로는 머리가 큰 사내애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 지도와 제재는 늘상 수박 겉핥기였다. 종종 생리가 시작한 여자아이들은 임신을 했다. 가끔은 사라지기도 했던 것 같다. 시골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보육원은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했고, 교사들은 늘 열성적이었으나 아이들은 난폭하기만 했다. 성실한 아이들도 더러 있어서 작은애들을 돌봐주었지만, 어디서나 그렇듯 나쁜놈들이 더 튀었다. 소수도 아닐뿐더러 그 무리가 다수였기 때문에 부조리함에도 지배력은 넓었던 것이다.
그런 무리 속에서 최은협은 독특한 취급을 받았다. 그는 서늘한 눈매에 날카롭게 잘생긴 얼굴을 소유한 탓에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더욱이 말이 적고, 속도 알 수 없어서 교사고 또래고 할 것 없이 언제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는 겉멋만 부리고 까부는 또래들과는 어딘지 달랐다. 하늘 일 없이 빈둥빈둥해보여도 성적이 기가 막히게 잘 나왔고 어른스러웠다. 큰애들과 어울리면서도 작은애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덕분에 불량하게 돌아다녀도 교사들의 감시망에선 늘 벗어났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동성또래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적개심을 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꼭 최은협을 찾게 되었었다. 철모르는 여섯살에 이유도 모른 채 보육원으로 들어왔던 자신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고깃덩어리였다. 화장실이 어디있는지도 몰라 늘 오줌보를 붙들고 헤매고 돌아다녔고, 우리 엄마아빠는 어디 있느냐고 교사의 치맛단을 잡고 물어보곤 했다. 큰애들이 제 밥을 다 뺏어먹어도 반항할 줄을 몰라서, 허기가 지고 배가 홀쭉해질 때면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건지 궁금해 했다. 아파도 아픈 줄 몰랐고 다쳐도 도와주는 사람 하나도 없이…… 마냥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최은협이 늘 옆을 맴돌면서 돌봐주었다. 자신의 제대로 된 기억은 은협과 함께 하면서부터 형성되었다.
은협은 선담의 밥그릇에 손대는 동급생의 손모가지를 비틀어주거나 고학년들의 소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수업시간에 조는 선담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그래봐야 똑같이 의무교육을 받는 수준이라 크게 도움 되지는 않았지만, 선담이 사람의 온정의 느끼는 계기는 충분히 되었다. 장난감을 뺏어가려는 사소한 분쟁에도 고학년인 은협이 꼭 끼어들어 선담의 편을 들었다.
지금에 와서 떠올리는 것이지만, 그는 주가연 선생님 때문에 널 돌봐준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꼬옥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곤 했다. 또래에 비해 키가 컸던 은협은 가끔씩 허리를 푹 수그려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추었었다. 그 입술이 멋있고 따듯해서 가슴을 두근거렸다. 같은 남자끼리는 그래선 안 된다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너는 꽃 같아.’
은협은 가끔씩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주가연 선생님과 은협은 사이가 좋았다. 그녀는 늘 잔소리를 달고 다니며 은협을 괴롭혔다. 거기에는 애들 좀 잘 돌봐달라는 부탁이 많았고, 가끔은 선담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꼭 이곳에서 벗어나 살아가라는 이야기나, 강해져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그때마다 은협은 귀찮은 여선생이라고 그녀를 따돌렸지만 선담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특정 선생의 애정을 독차지 한다는 소문과 함께, 보육원에서 가장 예뻤던 여자아이가 은협에게 고백한다는 소문이 퍼질 때쯤 다수의 또래가 폭발했다. 두세 명이서는 덤비지 못하겠으니 떼를 지으며 은협을 제압히려고 들었다. 은협은 별다른 경계를 취하지 않았으나 고학년 무리가 별안간 은협에게 가시눈을 하자 되레 선담이 겁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가연 선생님이 혼사가 이루어져 보육원을 벗어났다. 더 들어오는 교사도 없이 정직원은 3명이 되었고, 그때부터 은협도 시비를 걸어오는 무리를 일일이 상대하게 되었다. 시비에는 별의별 이유가 다 붙었다. 그들은 보육원에서 여학생들을 강간하고 다니는 게 최은협이라며 큰소리로 떠들기도 했고, 은협을 낳은 창녀의 시체가 음부를 내놓은 채로 옥상에 늘어져있다고 소란을 피우며 뛰어다녔다. 어쩌다 은협이 다수에 밀리기라도 하면 기회다 싶어 개떼처럼 덤벼들어 구타에 참여했다. 그런 날이 점차로 많아지면서 선담은 구석에 숨어 그가 그만 맞게 해달라고 수없이 기도하며 벌벌 떨어야 했다. 은협이 손발이 다 까지고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돌아올 때면 선담은 그의 광기어린 눈동자 너머의 거대한 살의를 느껴야 했다. 그가 괴물 같은 눈을 하고 돌아오면 피범벅이 된 채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고학년들이 꼭 생겨났다. 그들은 다시 돌아와도 예전처럼 생활하지 못했다. 어딘가를 절거나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광기는 광기를 낳았고 보육원은 점점 더 고립되었다.
‘홍당아, 우리 도망칠래?’
새벽녘이 푸르게 도는 복도에서 은협은 선담을 안은 채 바닥에 기대어 앉아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담은 이유도 없이 그가 그렇게 하겠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은 은협이 정말 많이 맞고 돌아와서 선담이 결국 엉엉 울어버린 날이기도 했다.
은협은 꼬질꼬질한 선담의 얼굴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너도 데려간다는 전재 하에 너 내꺼 할래?’
선담은 그저 오뚝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래요.’
‘정말 나랑 같이 도망간다고?’
그 말을 하면서 은협의 찢어진 입술로 피가 뚝 떨어졌었다. 선담은 깜짝 놀랐다. 허나 은협은 그런 그를 보며 그저 웃고 있었다. 오랜 고생 때문에 언제부턴가 무섭게 변해버린 사람. 그러나 그의 눈동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선담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말할 때마다 하얀 김이 풀풀 흩어졌다.
‘같이 도망갈래요.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하면서 살게요. 나, 나 선배 없이는 못살아요.’
분명 어디 드라마에서나 보았을 대사였지만 은협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아니, 사랑했던 때도 있겠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사랑이란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사랑이란 말은 그에게 너무 낯간지러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가혹해야 했는지.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는 없었던 건지.
자신은 몰랐다.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이 그의 광기와 살기를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을 줄은. 어느새 최은협이 몸속 어딘가까지 무감하게 굳어지고, 그 고통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도. 그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 아무나라도 잡고 묻고 싶었다. 최은협이 왜 그렇게 변해야 했는지를.
살아오면서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종종 그의 광기를 목격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향해진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선담은 사랑이란 면사포 하나로 그를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얇디얇은 면사포 한장으로도 모든 걸 견뎌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
상처의 끝에 꽂혀있던 메스를 어렵게 뽑아낸 은협은 차에서 내렸다. 서해의 작은 해안을 돌아 올라가는 도로에 숨겨진 벼랑이었다. 펜스와 나무에 가려져 있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넓은 평지가 보였다. 무작정 EEC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체력이 바닥을 보이자 이곳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피는 어느 정도 멎었지만 역시 출혈은 상당했다. 상식적으로 메스를 뽑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바로 치료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쩐지 그럴 의욕도 솟아나지 않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나 만사가 귀찮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낯설었다.
ㅡ나쁜 새끼! 죽어버려……!
주변이 밝아지고 있었다. 평지를 찬찬히 내딛으며 은협은 웃었다. 다 컸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다른 남자를 위해 메스를 집어들 정도로 자란지는 몰랐다. 하긴, 열여덟 이후로는 녀석을 제대로 바라본 것 같지는 않았다. 기억이 까마득했다. 고작 열한살 먹은 녀석을 데리고 도망쳤을 때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당시였다. MIU 대학에 합격통지를 받은 직후였고, 유년시절 내내 자라온 둥지에서 도망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겠다 싶을 때 녀석을 업고 파주 보육원에서 달아났다. 그 이후부터는 굉장히 행복했던 것 같은데, 그 시간이 왜 이다지도 짧게만 느껴지는지.
분명히 녀석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니까 녀석에게서 내 아이도 보고 싶은 거고 녀석을 내 곁에 두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녀석이 자꾸 아니라고 거부하니까 자신의 모든 것이 의문에 휩싸였다.
월세로 사는 좁은 방에서 24시간 365일을 같이 지내다보니 녀석이 늘 어린아이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지내다 문득 녀석이 좀 컸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작은 발견과 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체득하지 못해 당황하기도 했다. 녀석을 보면 웃음이 나왔고, 그런 녀석과 도저히 떨어질 수 없어 영국까지 끌고 왔다. 녀석에게서 아이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 시작할 즈음엔, 자신이 이렇게나 열성적인 인간이 될 수 있었나 스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함께 살면서 그 삶이 지겨웠던 적도 없었고, 무섭다고 앵앵거리는 녀석을 품에 안으면서도 늘 행복하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정말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사랑이 아닌가? 꼭 말로 해야 그것이 성립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은 결코 혼자 영국에 갈 수 없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홍선담을 한국에 두고 연구가 다라며 떠날 수 없었다. 결국 대책으로 내놓은 묘안이 바로 홍선담을 도너로서라도 데리고 가자는 것이었는데, 처음엔 기겁할지언정 결국에 녀석도 자신의 뜻을 받아주었다. 그걸로 충분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타국에서의 시간동안 자신의 바람이 너무 커져버린 건가. 왜 녀석이 자신을 보면 기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홍선담은 뱃속의 첫 아이가 염색체 변이를 일으키기 이전까지는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첫 수정을 위한 주사시술도 녀석이 길호문에게 부탁해서 자신에게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뒤늦게나마 들었다. 그렇다면 녀석도 분명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는 건데 그것이 실패작이어도 괜찮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왜 그 후부터의 수정을 허락하지 않은 걸까. 아이를 그렇게나 갖고 싶어 했으면서. 왜 내게서 마음이 떠난 걸까. 왜 내가 품은 뜻이 전해지지 않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도 필요했지만 홍선담도 필요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자신은 그것밖에 보지 못했다. 일부러 안본 게 아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어쩌면 자신의 방법이 변질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결국에 원하는 건 하나였는데.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후우……”
은협은 평지 가운데 섰다. 아무리 고통에 무감한 몸이라도 심신이 지쳐있을 때 받은 큰 자상은 이겨내기 어려웠다. 피를 많이 흘려 시야가 어지러웠다. 옆구리가 패인 연백진이 쫓아와 덮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등을 보인 것이었는데 홍선담이 더한 칼질을 하다니. 자신이 그어놓은 연백진의 상처보다 족히 5배는 더 긴 것 같았다. 은협은 아까부터 허부하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바다가 쾌청했다. 은협은 그곳에 앉았다. 무릎에 두 팔을 걸쳐놓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의욕도 없었다. 홍선담에게 자신의 씨를 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지난 몇 년동안, 쓸 수 있는 모든 체력과 정신력을 소진한 것 같았다. 목적을 잃은 몸은 축 늘어지기만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이대로 그냥……
“최은협.”
낯익은 목소리에 은협은 뒤를 돌아보았다. 수풀을 헤치고 연백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찔린 옆구리 때문인지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은협은 무릎을 짚어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죽고 싶어서 쫓아왔어?”
“그 반대로 하려고 쫓아왔지.”
“넌 나한테 안 돼. 목숨부지하고 돌아가.”
그러자 백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맞받아쳤다.
“네가 다시는 녀석을 보지 않겠다는 약속 없이는 안 가.”
“그런 거 없어. 난 녀석밖에 없으니까.”
“……….”
“홍선담은 안 왔나? 쫓아왔을 텐데.”
“쓰러진 것 같다.”
“……….”
아마도 뱃속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한 약물 때문일 것이다. 최은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군.”
“이제는 여동생한테도 함부로 안 보여줄 거다. 녀석이 원치 않는 놈에겐 절대 내놓지 않을 거야.”
두 남자는 쓰게 웃었다. 저희들이 말해놓고서도 참 재밌는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일 때마다 말라붙은 피딱지에서 핏물이 줄줄이 새나오는 실정이었고, 누구랄 것 없이 빨리 의사에게 상처를 보여야했다. 헌데도 저희들 고집 때문에 이런 절벽에서 다시 말싸움을 시작 중이었다.
“피곤해서 지금 한번 봐주는 거다, 연백진. 돌아가. 내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은 네가 녀석을 데리고 있게 되잖아. 정말 죽기 전에 그냥 가.”
“그리고 네가 나타나면 녀석을 다시 빼간다고? 웃기는 소리 좀 작작해. 너흰 끝났어. 녀석은 더 이상 네게 돌아가지 않는다. 왜 그걸 모르는 거냐?”
은협은 담배를 튕겨내고 백진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순식간에 주먹을 뻗었다.
“입 닥쳐!”
“크윽!”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백진이 나뒹굴었다. 찢어진 옆구리에서 창자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상처를 부여잡고 쓰게 신음을 내뱉었다.
“최은협, 넌 끝났어!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러놓고 그 녀석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나!”
“뭐가 잔인해! 내겐 방법이 없었어. 그리고 그 녀석도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는 걸 알아!”
“애를 갖고 싶었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그 이유 하나로 네가 녀석을 도너로, 아니, 도너로 만든 것까지도 이해한다해도 그 이후의 행동은 그저 광기로 돌변한 네 집착이었을 뿐이다! 선택의 여지니 그런 건 핑계에 불가해!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네놈에게는 핑계겠지! 넌 내가 되어본 적도 없으니!”
은협이 무릎을 굽혀 앉아 백진의 상처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백진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쏟았다. 최은협의 말대로 자신은 기술로 놈에게 이길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인정할 문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놈이 얼마나 거친 환경에서 자랐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고, 자신이 거기에 완벽하게 대항할 능력까지는 갖추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녀석을 놓아줘! 네놈에게 얼마나 많은 걸 바쳤는데, 그런 녀석한테 네가 한 짓이 뭐야! 옛날에는 어땠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녀석을 만난 지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난 녀석이 제대로 웃는 걸 본적이 단 한번밖에 없어! 네가 녀석의 웃음을 다 뺏어간 거다!”
뻐억!
백진은 이를 악물고 은협의 어깨를 쳤다. 그런데 바로 반격해 들어올 줄 알았던 놈의 얼굴이 이상했다. 그는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그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부정하는 은협을 향해 백진은 조소했다.
“뭐가 아니야. 네놈이 제일 크게 느끼고 있잖아.”
은협은 백진의 멱을 잡았다. 힘을 줄 때마다 등을 가른 상처에서 더운 피가 치솟는 듯했다. 상처가 찢어지는 것 같은데도 그는 끝끝내 백진을 끌어냈다. 두 남자의 위치가 점차 벼랑 끝에 가까워졌다. 은협은 바로 등 뒤에서 거칠게 울어대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자신이나 연백진, 둘 중 하나를 집어삼킬 듯한.
그리고, 홍선담을 떠올렸다.
잔잔한 물결 같은 녀석을. 즐거울 때면 곧잘 크게 웃었던 녀석. 어쩌다 한번씩 보여주는 소리 없는 미소가 아름답고, 잠자는 모습이 마치 인형 같았던 녀석을. 자신의 소년기를 온통 지배해 어느 순간부턴가는 이성조차 차릴 수 없게 만들었던 어린아이. 언제고 좋은 향이 나서 옆에 꼭 붙여놓고 싶었던. 언제부터 녀석이 자신을 혐오하게 됐는지 까마득하지만 역시나 포기할 수 없었다. 늦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녀석을 붙들고 천천히 얘기해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어떻게 해서든…… 녀석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ㅡ최은협, 넌 살인자야.
은협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정말로, 다…… 끝난 건가.”
은협의 입모양이 달싹거릴 때 백진이 그에게 내뱉었다.
“그래, 그만 정신 차려. 네놈의 사랑은 끝났어, 최은협.”
“아저씨…!”
백진이 주먹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수풀이 버스럭거리더니 선담이 뛰어나왔다. 그는 두 팔로 아무렇게나 자란 관목을 밀어내며 두 사람을 급히 찾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온 얼굴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움직이는 것도 힘든 듯 마냥 기우뚱댔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던 선담은 한계에 다다랐는지 간신히 다리만 딛고 선 자세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숨 쉬기에도 벅찬 입에서 무거운 기침이 수차례 튀어나오더니 그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선배, 아저씨는 그냥 놔줘. 그리고…… 사라져.”
“……홍선담.”
선담은 은협이 대답을 잇기 전에 체념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는 이렇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연백진이 보고 있는 앞에서 최은협을 죽이겠다고 달려들지언정 자신마저 죽어버리겠다는 그런 추접스러운 짓을 벌일 수 없었다. 선담은 두 손을 간절히 모았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자신의 뱃속이 찢어지듯 아픈 이 와중에 백진까지 지켜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발. 적어도 내가 마음을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선배도 머리 좀 식혀, 제발!”
“싫다. 이제는 내가 시간이 없어.”
은협은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잡아끄는 대로 끌려갈 순 없어서 백진도 버텼고, 그러니 두 남자의 접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아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피를 뿜어낸 입가가 마른 핏자국으로 더러워지고 부상이 원체 커서 숨이 모자랐다. 피가 많이 흘러 두 사람 모두 어지러웠고,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은 의식은 겨우 붙잡은 수준이었다. 힘을 주는 신체부위가 후들후들 떨렸다. 서로 버티는 싸움이 싸움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연백진이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붙들고 최은협과 마주 섰을 때였다.
그는 이 남자를 알게 된지 수일 만에, 처음으로 보고 말았다.
최은협의 울고 있는 눈동자를.
백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거짓말 같게도, 최은협은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애처로운 눈을 뜨고 있었다. 이놈은 죽어야 할 놈이 맞는데도, 맞아 죽어야 할 놈임에도, 한 순간이나마 같은 수컷으로서 이놈이 얼마나 큰 것을 상실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새끼’에 대한 상실을 뜻하는지, ‘홍선담’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저씨! 아저씨ㅡ!”
“선담아, 움직이지 마!”
“선배, 아저씨는 안 돼! 하지 마!”
선담은 벼랑 끝으로 다가오려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배가 많이 아픈지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저씨는 가만 내버려둬ㅡ!”
선담은 손끝까지 덜덜 떨 만큼 고통스러움에도 제 몸보다는 백진의 안부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백진은 깨달았다. 선담의 그런 모습이 최은협의 눈동자를 점차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홍선담을 사랑하는 같은 남자로서, 저 또한 최은협에게서 느꼈던 것이다. 막판으로 치달으니 동정을 느낄 정도로 불쌍하면서도 끝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이중적인 감정을.
그토록이나 최은협은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문득, 백진은 자신의 몸이 기울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은협이 그의 어깨를 잡아 벼랑에 위태위태하게 세워놓았다. 백진도 팔을 뻗어 은협의 어깨를 잡았다. 두 팔이 엇갈려 서로의 어깨를 봉했다. 이대로 완력싸움을 겨눈다면 둘 중 누구 하나는 반드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만큼은 은협의 눈동자도, 백진의 눈동자도 흔들림은 없었다. 각자의 각오를 품고서 드디어 벼락 끝에 선 것이었다.
바위가 드문드문 올라온 수면 위로 파도가 일렁였다. 바다는 깊었다. 저 멀리에 작은 해안이 보였지만 어쨌든 이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자살행위였다. 멀쩡한 몸이라면 몰라도 부상을 입은 상태니 말이다. 벼랑 끝에 서자 칼처럼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백진은 난생처음 죽음을 체감했다. 칼에 찔렸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그런 두려움이었다.
이대로 떨어져 바닷물에 처박히면 어쩌면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자신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번질거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자신을 마주보는 놈의 눈에는 그런 두려움 따윈 지워진지 오래였다. 적어도 홍선담이 이런 절망감을 맛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백진은 은협의 옷가지를 더욱 세게 잡으며 경고했다.
“선담아, 가까이 오지 마.”
은협은 동의하듯 말이 없었다. 선담은 먼지 자욱한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이것은 자신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었기에. 막아야 했다.
“선배…… 제발. 제발, 그만 해. 아저씨는 아무 잘못 없잖아. 아저씨한테는 그러지…”
“나 죽이겠다고 덤비던 모습과는 딴판이구나. 홍선담, 이 남자가 네게 그렇게 중하냐?”
선담은 대화의 기회가 생긴 것에 희망을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협은 선담의 고갯짓에 맞추어 희미하게 수긍하며 입가를 올려 웃었다.
“어디, 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볼까.”
다음 순간, 선담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익숙한 모양의 무언가가 백진의 손목을 그어버렸다.
“크흣ㅡ……!”
백진이 은협을 제압하던 손목을 부여잡았다. 상흔을 가리는 손가락 사이로 검은 피가 분수처럼 피어올랐다. 선담이 은협을 해했던 메스였다. 순식간에 백진은 균형을 잃었다. 선담은 수정란이 타들어가는 고통이란 것도 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상의 모든 것이 속도를 잃고 천천히,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은협의 눈동자는 검붉었다. 그의 암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쓸쓸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은협은 백진에게 속삭였다.
“여기까지도 대단했다, 일개 도련님이.”
그는 당연한 수순을 밟듯 백진을 벼랑 바깥쪽으로 툭 쳤다. 그러나 실족의 순간, 백진이 팔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은협은 본능적으로 몸에 힘을 실었지만 추락하기 시작한 백진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이제는 두번 다시……! 이 세상에 녀석을 네놈과 둘만 두지 않아!”
두 남자가 벼랑 밑으로 허공을 갈랐다.
-
‘들어가 봤자 입니다. 왜 안 되는 일에 혈안입니까, 연백진 씨! 그냥 내버려둬도 죽을 걸, 수술 중에 죽으면 병원 측 과실로 인정된단 말입니다!’
‘살 수 있는 확률도 보셨잖습니다. 저 아이의 부모가 바로 밖에 있습니다. 죽지도 않은 아이한테 아무 조치도 없이 기다리라고 하란 말입니까?’
그러자 저쪽 어딘가에서 누군가 불평했다.
‘미치겠군. 이래서 낙하산이 싫어. 씨발, 저 낙하산이 또 좀 커야 말이지.’
남자는 잠시 침묵했지만 끝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일반의에 신입 주제에도 그는 서울 백람병원에서 원장 이상의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백람병원이 백람의 계열사에 놓여 운영되고 있는 한, 실질적인 파워로는 남자를 이길 자가 거의 없었다. 소아과로 찾아온 아이를 내과로 돌리고 수술동의서를 받아내는 짧은 절차에는 더욱더. 남자는 자신의 권력도 곧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46%도 귀한 가능성입니다. 여기 다 능력 좋은 분들만 모였지 않습니까.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살릴 수도 있습니다.’
남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어느 전문의를 필두로 결국 의료진이 움직였다. 그러나 수술실이 점등된 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아이는 숨을 거두었다.
수술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아이는 배가 벌어진 상태로 죽었다. 남자는 직접 아이의 시신을 덮어주었다. 다음으로 부모가 기다리는 대기실을 향해 길고 긴 복도를 홀로 걸었다. 그런 남자의 등에 대고 누군가 말했다.
‘연백진 씨, 당신은 의사가 소중히 가져야 할 기본이 빠진, 그저 객기에 찬 인간입니다.’
‘살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살았나요?’
‘……….’
‘살리지 못할 환자에겐 손대지 마라. 저희의 기본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무릎을 꿇고 스스로 흰 가운을 벗었다. 그간 불만이 많았던 자들은 이때다 싶어 그를 힐난하고 나섰다. 잘 알지도 못하는 햇병아리 때문에 저희들만 욕을 먹었다며, 옷을 벗는 것으론 모자르다는 질타를 수도 없이 날렸다. 유가족은 그의 간절한 사죄를 받아들였건만 오히려 병원 측에서 난리였다. 남자는 부친의 도움도 거절하고 사비를 들여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마음을 표했다. 합의금이라기엔 정말 큰돈이었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무엇으로 대신하겠냐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숙하기를 각오했다.
남자의 외형적인 삶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초거대기업의 자식이었고 맞선자리가 줄줄이 들어와 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가서 즐길 수 있었다. 일을 관두니 어서 장가를 들라는 압박이 심해졌을 뿐. 어느 순간이 지나자 악몽에서 헤매는 일도 줄었다. 그는 그날의 사고를 서서히 잊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허탈했다.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없이 수치스러워질 때쯤이었다.
밤중에 전화가 울렸다.
‘백진아, 나 석잰데, 너 빨리 우리 집으로 와. 너 바로 안 오면 절교다. 알았지?’
협박에 가까운 통화내용은 바로 끊어졌다. 밖은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고 있었다. 남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옷을 챙겨 입으며 친구를 향해 상욕을 지껄였다.
그때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어느 꼬마와의 만남을 전혀 직감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친구를 찾아가고 환자를 보살피게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불평을 토로했다.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한 자신의 가슴은 느끼지 못한 채.
그 기간은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다.
- - - -
선담은 미친 듯이 달렸지만 한 발 늦었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파도에 잠긴 후였다. 온몸이 두려움으로 전율했다. 순식간이었다. 정말 손쓸 틈도 없었다.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었다. 그렇게나 사랑했던 최은협은 오래전에 사라져버렸고, 이제 더는 수정란도 뱃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나마 잃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연백진이었다. 이제 그의 삶은 곧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 최은협을 쫓아 죽겠다는 각오를 할지언정 절대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었다. 결코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런 연백진마저도 벼랑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선담은 망설임 없이 푸른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떨어지는 시간은 삽시였다. 온몸이 갈라지는 고통과 함께 선담은 푸른 진공 속에 갇혔다. 수영에는 요령이 없었다. 그래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연백진만은 반드시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뜨자 푸른 초원이 드넓게 펼쳐졌다. 일출이 시작된 바다 속은 빗줄기가 수평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진공의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추위에 휩싸인 몸은 점차 굳어져갔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슬픈…… 그런 시간이었다.
선담은 뿌옇게 차오르는 혈흔을 쫓아 발을 굴렸다. 어쩐지 바다 속이 눈부시도록 밝았다. 그는 차가운 바닷물에 자신의 눈물이 섞여드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 떨어지는 백진을 향해 쉼 없이 움직였다. 광막하게 펼쳐진 고독의 진공 안에서도, 그저 저 사람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선담은 그렇게 은협을 지나쳐갔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야말로 은협은 두 눈동자에 선담을 똑바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세상에는 오로지 홍선담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이 깊은 겨울 바다에 빠졌으니 절벽을 짚고 올라가지 않는 한은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천천히 가라앉는 은협의 눈은 초탈해보였고, 선담 또한 그런 눈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갑자기 안타까우면서도 분하고, 미련 가득한 마음만 앞섰다. 말로는 표현 못할 감정이 뒤섞여 거품처럼 일어 올랐다.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사랑했던 나를 떠나게 만든 사람. 그렇게나 절실히 사랑하게 만들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변해버린 사람. 내게 새 삶은 선물해주고, 몇 번이나 죽였던 사람. 늘 외로웠던 사람. 그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었던 사람. 나쁜 사람. 이기적인 사람. 하지만 끝끝내 속을 알 수 없었던 사람. 슬픈 사람. 그래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순수한 시절에 만나 함께 자라면서 사랑한 만큼, 앞으로 이 사람보다 더한 사랑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어차피 다시 눈을 뜰 기회도 없을 테니 이제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백진 하나면 충분했다.
ㅡ그래도 당신에게선 묻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선담은 다시금 은협을 바라보았다. 그는 움직일 기운이 없는 듯 보였다. 점차로 가라앉으니 수압에 상처가 벌어지면서 그의 주변이 붉은 연기로 피어올랐다. 그 순간, 선담은 은협의 입가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만족할 때 흐르는 특유의 미소는 아니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은협은 선담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무어라 입모양으로 말했다.
하지만…… 선담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숨이 모자랐다. 선담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백진에게 다가갔다. 그 또한 상처가 터져 주변이 온통 붉었다. 선담은 그를 끌어안았다. 주인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백진을 자꾸자꾸 끌어안으며 그를 자신의 가슴에 품었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곧게 사랑해주는 사람. 나 같은 걸 사랑해서 바보같이 고생만 한 사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끝내 사랑한다는 이야기 한번 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 너무도 미안했다. 선담은 백진을 안고 힘닿는 데까지 헤엄쳐 살아남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도 전에 무기력해졌다. 끝이 없는 진공 속에 모든 힘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헤엄쳐나가기 위해 팔다리를 움직여보았지만 발아래는 점점 깜깜해지기만 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던 그날, 은협에게 버림받았던 자신은 이미 한번 죽었으니까.
선담은 가라앉는 백진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이제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결코 이런 결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에 이렇게 되었으니 자신은 죄인의 가면을 벗을 수 없었다. 점차 숨이 가빠졌다. 폐가 조이는 기분. 선담은 팔을 뻗어 백진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과 감긴 눈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은 이 얼굴을 기억하고 싶었다.
‘아저씨…….’
선담은 그의 품으로 들어가 안긴 채 눈을 감았다. 이제는 호흡도, 고민도, 살기위한 발버둥도, 모든 게 필요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니 증오 따위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추위도 사라졌다. 죽음의 시간이 이렇게나 편안할 수 없었다. 숨이 차오르고 점차 눈앞이 어두워졌다.
‘아저씨…….’
자신의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진공에 빠졌다. 선담은 생각했다.
드디어, 행복이 영원할 수 있겠노라고.
비로소 행복하다고ㅡ….
어느 순간, 목덜미에 따듯한 기운이 닿았다. 붉은 거품과 함께, 어딘가로 끌어당기는 듯한. 그러나 선담은 백진의 품에서 깨고 싶지 않아 그만을 더욱 끌어안았다.
- - - -
‘너는 꽃 같아.’
‘홍선담, 너 아기 가져볼래?’
‘옛날과 완전히 같을 순 없어도 나는 늘 네 옆에 있을 거다. 하지만 어렸을 때처럼 들개같이 뛰놀거나 구르거나 할 순 없어.’
‘이젠 고집대로만 살 수 있는 나이는 지났어.’
‘그때는 막연히 네가 도너로 있으면 떨어질 일도 없고 행복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점점 귀중한 유산이 되어가고 나는 점점……’
‘용서해줘.’
‘꼬맹아. 네 애기가 보고 싶냐. 그래서 하루하루가 그렇게 고단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런 거냐.’
‘네 자궁, 온존하다.’
‘자궁의 주인은 죽었지만 그래도 그 궁전은 유효해. 아직도 네 뱃속에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니까 아이를 잃어서 슬픈 거라면 울지 마라.’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울면 속상하다고.’
‘괜찮아, 꼬맹아. 이젠 아프지 않을 거다. 괜찮아…….’
‘너한테서 나는 체취도 좋고, 쫄아서 토끼같이 뜨는 눈도 좋고… 무엇보다 네가 하루하루 회복해가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네가 정말로 좋아서 그런다. 꼬맹이 네가 좋거든. 많이 좋거든. 그래서 네가 어서 빨리 나아서 내 맘도 받아주고 무럭무럭 자랐으면 좋겠다.’
‘나랑 아기 낳고 같이 살자. 평생 입에 담고 다니면서 잘해줄게.’
‘당신, 나 사랑하기는 했어?’
‘……언제나.’
‘이제는 두번 다시……! 이 세상에 녀석을 네놈과 둘만 두지 않아!’
‘홍선담, 널 많이……’
-
촤아아아아
촤아아아아
허연 안개가 장막을 쳤다. 선담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그것이 안개가 아닌 자신의 입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지가 무거워 축 늘어졌지만 선담은 본능적으로 천근같은 머리를 바닥에서 뗐다.
구름에 가린 태양이 빛줄기를 내리쬐고 있었다. 추운 겨울바람도 여전했다. 자신은 잔잔하게 밀려들어오는 파도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자갈밭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가 몹시 아파서 다시 정신을 잃기에 충분할 것 같았지만 모든 고통을 눌러 담고 급하게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아저씨……!”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연백진이 있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선담은 아픈 것도 다 잊고 그곳으로 기어갔다. 물에 쓸려 피는 보이지 않았지만 백진이 입은 상처는 대단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미약하게 이루어지는 호흡이 아직 숨이 붙어있음을 보여주었다. 선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파도에 실려 왔다기엔 무리가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선담은 마지막으로 다른 한명을 찾았다.
“선배…… 은협선배……”
촤아아아아
촤아아아아
파도소리만 되돌아올 뿐, 주변은 고요했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수풀이 이따금씩 풀소리를 들려주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 위. 푸른 하늘. 그러나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다른 한 남자의 행방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았다.
“은협……”
선담이 조용히 읊조렸을 때,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선담은 그대로 백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 위로 쓰러졌다. 희미하지만 정확하게 박동하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칠흑 같은 새벽이 거치고 아침이 찾아오자 지금까지의 시간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아침을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자신은 지금 백진의 품에서 함께 숨 쉬고 있었다. 백진이 무사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지금이 비참하지 않았다.
다만, 이유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주체 못해 선담은 홀로 울었다.
갑자기 눈물이 왜 흐르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바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슴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선담은 깨달았다. 이 눈물의 이유는 죽는 날까지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으니까.
- - - -
[아프리카 난민촌을 상대로 한 불법약물실험이 폭로되며 미국시장에 큰 타격을 입혔던 PTA사가 자본분할 후 1년 6개월 만에 다시 한번 공식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1차적으로 이루어졌던 자본분할을 확대해 사기업으로 계열사를 나눌 계획이며, 이로서 실질적인 PTA사는 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는 제작년 9월경 EEC 임상실험 연구팀이 귀환하였으며, 백람사는 2차 자본분할에서 PTA사의 일부는 사들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저것 말고도 지금 나라 안이 떠들썩한데 큰일이구나.”
정석재는 백부가 따라주는 커피를 받아 마시며 선선히 동의했다.
“그런데 백람에서 PTA의 무얼 사들인다는 건지 모르겠어. 백람이 원래 제약회사에 관심이 있었나?”
“인공자궁에 대한 소유권만 사들이는 거예요.”
석재의 말에 백부가 그를 돌아보았다. 석재는 그가 묻기 전에 미리 대답했다.
“제 친구가 백람에…”
“아아, 그래. 넷째아들인가 그렇다고 했지. 의대시절부터 자주 어울렸었지, 너희? 그 친구가 그러든? 백람이 그 소유권을 사들인다…”
“정명환 선생님. 예약 환자가 도착하셨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래요, 금방 갈게요.”
궁금한 것을 물으려던 백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석재는 그런 백부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레지던트 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도와준 그에게는 감사한 일이 많았다. 정명환은 시원털털하게 웃으며 응접실에서 빠져나갔다.
[다음 소식입니다. 중국의 경화제조단지의 수사권이 허가된 지 열흘이 된 오늘, EEC의 유가족이 검찰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경화단지가 산중에 개발되었던 공업단지인 만큼 산짐승으로 인한 시신훼손이 심각해 일일이 DNA 검사와 부검과정을 밟아야 하며, 이에 검찰은 장기간 수사를 돌린 상태입니다.]
석재는 컵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커피를 삼켰다.
EEC에 대한 보도는 언제나 저런 식으로, 뉴스의 중간부분에 어영부영 끼어있거나 보도내용이 짧아 제대로 된 소식을 전해주지 못했다. 자료화면도 얼마 뜨지 않았고 검찰의 발표에 따라 대부분 공중파에서 ‘비공개 연구팀이 중국에 새로운 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견학하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단정 지어 말했다. 중국의 사기업은 저희의 공업단지를 타국의 수사망에 노출시키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때문에 EEC가 행방불명되고 2달 후에야 가까스로 현장을 찾을 수 있었고, 사체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비록 사고를 당한 것은 겨울이지만 중국의 다양한 기후 탓에 부패가 빨랐다고. 또한 근방이 산짐승으로 드글드글했기에 사건은 급물살을 타고 정리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도 수사기간을 단 2주밖에 양보치 않아 그야말로 쾌속이었다. EEC가 행방불명됐을 때만 해도 언론은 활발했지만, 그것도 2달이나 지나간 뒤에 현장을 확인하게 되자 다 잊혀진 옛날 일이 된 분위기였다.
석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서의 배웅을 받으며 상담실에서 나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겨울이 한창이라 날은 몹시 추웠다. 석재는 라디오를 켜고 엔진을 예열했다.
[재강건설이 중화신도시를 건설하며 저질렀던 만행이 폭로되어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4대 공중파로 부친 비디오파일은 재강건설이 중화동의 판자촌 철거 당시 저질렀던 온갖 폭력행위 편집 없이 담고 있었고, 이에 차례대로 화면이 공개되면서 그간 건설회사가 품고 있던 범법행위가 물위로 드러났습니다. 재강건설은 폭력조직단체와 손을 잡아 부동산을 확보해 나가는 한편…]
EEC의 관심이 대중에게서 저만치 떨어져버린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실종된 당시에도 백람의 노조가 파업을 해 뒤늦게 화제가 되었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진척 없는 수사상황에 지쳐 네티즌과 TV언론이 잠잠해질 때쯤, 서민들의 터전을 불도저로 갈아엎어내는 영상이 공개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낡은 둥지를 불태워버린 대기업의 횡포. 국민의 무시무시한 분노를 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곧바로 촛불집회가 이루어지고 재강건설은 재기불능의 위기에 몰렸다. 인터넷에는 하루 수백 개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파일을 받은 방송국 중, 하나라도 재강건설과 흥정을 선택했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석재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사실 익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재강건설보다 더한 액수를 부를 수 있는, 엄청난 파워의 다른 기업체였을 것이었다. 그 기업체가 보도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EEC가 아닌 판자촌 철거현장에 몰려들게끔. 이 나라에서 그 정도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업이라면 하나뿐이었다. 정부만큼이나 거대한 권력이 최선을 다해 서민을 밀어주니 비공개 연구팀의 안위는 온데간데없이 묻혀가는 게 당연했다. TV채널 어딜 틀어도 중화동 서민들의 인터뷰와 사건전말을 설명하는 프로가 쏟아졌다.
차 안이 어느 정도 따듯해졌을 때 석재는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서울은 새하얀 설원이 따로 없었다. 교통체증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하얀 눈이 쌓인 도시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서른셋의 눈을 녹일 봄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바람이 무척 사나운 것 같았다. 이렇게 매서운 바람만 몰아쳐도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어 석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2개월 전의 서해안.
EEC 본사건물에서 백진과 선담의 뒤를 쫓으려던 석재는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음을 깨닫고 손 실장의 부하직원이 다른 차를 몰고 올 때까지 가슴을 졸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나마도 추격하는데 시간을 허비해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텅빈 두 대의 세단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벼랑만 남아있었다. 119에 미리 신고를 해두고 부근을 뒤지던 찰나, 손 실장이 까마득한 아래에서 쓰러져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백진의 상처는 참혹했다. 왼쪽 옆구리가 뚫리고 늑골이 4대나 나간 데다 손목도 헐렁해져있었다. 중요혈관을 겨우 피했다는 말에는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수도 없는 타박상과 찰과상, 게다가 지혈을 하지 못하고 상처가 수차례 찢어지는 바람에 병원에서도 확실한 결과를 예측 못했다. 서해안의 작은 병원에 연의범이 들이닥치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 탓에 백진은 수술실에서 7시간을 갇혀있다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다행히 선담은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뱃속이 문제였다. 깡시골의 의사들이 인공자궁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선담은 서울의 백람병원으로 옮겨져 연의범의 보호 하에 진료를 받았다. 괴사 직전의 세포가 죽어 있는 것까지는 안전했지만 사후처리가 문제되는 듯했다.
당시 석재는 며칠간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진척된 상황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도 연의범의 손안에 있는 두 사람의 안부를 함부로 물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선담은 어떻게 되는 건지, 백진은 제대로 회복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경호진이 빼곡한 틈 사이를 왔다갔다 거리며 근근이 손 실장을 찾아가 직접 상황을 물었다. 늘 튼튼하기만 하던 연백진이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의식을 차리지 못해 지켜보는 사람 속이 새카매졌다. 더욱이 선담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들을 수가 없어 석재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23층 좀 눌러주세요.”
주말의 백람병원은 무척 붐볐다. 석재는 인파에 떠밀려 미처 버튼을 누르지 못해 가까운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한층, 한층을 지나면서 엘리베이터가 한산해졌다. 20층을 지나자 엘리베이터에는 석재만 남게 되었다. 23층은 로열클래스였다.
지잉ㅡ 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석재는 몸을 틀어 익숙한 입원실로 향했다. 코너를 돌자 경호진이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줄지어 대기해 있었다. 병실 하나하나가 보통 병실보다 몇 배는 커서 문이 드문드문 달려있었다. 석재가 꾸벅 인사를 하자 그쪽에서도 허리를 숙였다.
“백진이 있습니까?”
“네, 방금 일어나셨습니다.”
석재는 경호원이 열어주는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한 면이 아예 유리창인 넓은 방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아이보리색으로 덮인 방은 거의 가정집 수준으로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었다. 장기간 입원하는 환자를 위한 특실이었다.
“백진아.”
석재가 문을 똑똑 두드리자 창가 쪽 침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연백진이 고개를 돌렸다.
“또 왔냐.”
석재는 배시시 웃으며 병실로 들어왔다. 안쪽의 침대는 비어있었다. 석재는 빈 침대를 바라보다 백진에게 다가갔다. 가슴까지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백진이 허리를 일으켜 베개에 등을 기댔다.
“오늘은 빈손이네. 너 이제부터 빈손이면 안 들인다.”
“어제 사온 바구니 그대로 있구만 뭘 그러냐? 그냥 저거 먹어. 저 과일 비싼 것들이야.”
백진은 석재의 노성에 피식 웃었다.
“몸은 어때, 괜찮아?”
“지겹다.”
“응?”
“너 그거 물어보는 거 지겹다고. 괜찮지 그럼, 죽냐?”
연백진다운 대답이었다. 어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더니 역시 두번 묻는 건 거슬렸나보다. 석재는 멋쩍어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병원에선 뭐래? 퇴원은 아직 멀었다고 하지?”
“이제 정말 나이걱정 좀 해야 되는지 빗장뼈가 안 붙어서 고생이지.”
“다발성 골절인데 전치 13주 뗀 걸로 만족해. 등신아.”
백진은 석재의 농담을 웃어넘기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믿지 못할 정도로 평안한 나날이었다.
자신이 의식을 차렸을 때는 7일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벼랑 아래로 추락한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후부터는 악몽과 길몽의 반복과, 이따금씩 들리다 끊기는 주변 소음뿐이었다. 의식을 잃은 채 보냈던 일주일은 꼭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것처럼 짧게 느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보는 지난 일주일은 긴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불행과 환희가 엇갈리는 꿈속에서 자신은 한 사람을 쫓아 달렸다. 의식을 되찾는 짧은 순간에도 홍선담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하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눈을 뜬 건 오롯 녀석을 향한 의지 때문이었으리라.
언론은 이미 EEC의 행방에 열을 올리던 참이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언론은ㅡEEC를 책임지던ㅡ백람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연백진 스스로는 짐짓 놀라는 감도 있었다. 물론 선담을 옆에 두고 EEC 실종속보를 실시간 방송으로 들을 정도로 허술하진 않았다. 그는 손 실장에게서 정황을 파악했다. 또한, 경공업 단지로 따라와 묵과된 살인에 동참했던 무리를 10명씩 차례로 돈을 쥐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백람의 사선을 이용하는 일정이라 피곤하겠지만 그들은 10년 가까이 호주에 숨어살며 더한 고통을 겪었던 자들이니 문제될 건 없었다.
“……이제 선담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
석재는 노골적으로 백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 시선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백진은 응해주지 않았다. 그저 서울의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분명 바다에 빠진 것은 세 명이었으나, 살아남은 것은 두 명으로 기록되었다. 최은협은 족적도, 그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다.
그놈이 제 평생에 가장 소중했던 것을 모조리 잃었기 때문에 그토록 쉽게 떠나갔다는 확신이 가슴 속 어딘가를 떠다녔다. 백진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죗값을 치루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누굴 위한 명령인지 알 수 없었다. 최은협은 오래도록 계속된 짙은 고독과 황폐함에 지쳐 보였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백진은 같은 남자로서 연민을 가졌던 자신을 발견했다. 그토록이나 증오했으면서 막상 그가 사라지자 그의 모순됨이 불쌍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입장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경찰헬기까지 동원된 수사는 미해결로 남았고, 바닷가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단언하건데, 아마도 평생 찾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생사에 상관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담이 말이야. 수술 받을 거지?”
죽은 수정란이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소멸된 게 아니라서 선담은 결국 배를 한번 더 드러내야 할 상황에 처했다. 간단하지도 않은 시술에다가, 수술 후엔 임신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 오래 혹사 시킨 데다 수정란이 자궁입구를 너무 오래 막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연의범은 어이없어했다. 그가 아들의 거짓말을 눈치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쓰러진 새에 아버지가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던 탓에 백진은 처벌을 각오했다. 문제는 그 처벌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는데, 그게 따귀 한 대로 끝났다. 선담 앞에서 때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어쨌든 연의범은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더니 의료진이 물러나자마자 환자의 뺨을 날렸다. 그렇지만 홍선담을 어디론가 빼가거나 방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 언론에 인공자궁의 아이가 유산되었다고만 밝혔을 뿐이었다.
“깨끗하게 제거하려면 수술 받아야지.”
“그러니까, 녀석이 받는다고 제 입으로 말한 거지?”
“……….”
“불임이 된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정말이야?”
대답이 없던 백진은 영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석재야, 내가 녀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냐?”
석재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백진이 얼마나 진지하게 묻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슴없이 확답했다.
“당연하지.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 너희 아버지도 아시잖아.”
“그래?”
“그래. 그걸 누가 몰라.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다 누구 때문인데. 왜 괜히 그런 걸 물어?”
백진은 수긍했다.
“맞아. 나 정말로 녀석이 좋다.”
“알아.”
“처음엔 짐짝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빠져버렸어. 이제 홍선담 아니면 아무하고도 살고 싶지 않다. 녀석의 입속만 탐하고 싶고, 녀석에게만 내가 한 밥을 먹이고 싶고. 녀석이 해사하게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지금 힘든 시간 어서 지나가고, 상처도 아물었을 때는…… 녀석 닮은 아기도 안아보고 싶고. 녀석하고 아기 끼고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서 살고 싶어.”
긴 시간이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이제는 일년하고도 반년이 더 지나간 이야기. 한 평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를 두 번이나 품었다 지우며 16년간 사랑했다는 사람을 지우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 백진은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나자 찾아오는 선담에게 향한 애틋함에 갈증이 났다. 그 험한 일을 겪은 녀석이 부디 잘 회복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의 웃음을 찾을 수 있을까.
녀석을 따라, 녀석을 위해,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으면서도, 한걸음 물러나서 뒤돌아보니 자신도 참 사람답지 않은 짓을 해가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자신과 녀석은 누구도 제대로 용서하지 못했고 벌하지 못했으며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남았다는 자각을 했다.
복수의 끝에는 결국 침묵이 남았다.
하지만 침묵이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복수의 뒤에 찾아오는 당연한 것임을 인지하고, 남은 두 사람은 서로를 북돋아주며 새 삶을 살아나가야 했다. 복수는 죽음과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짐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복수란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행복ㅡ그것이었다. 절대 잊지 말아야할 한 가지. 선담이 그토록 바랐던 행복이었다.
“백진아,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흉터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도, 선담이와 함께 하면 행복할 거다. 선담이가 다시는 아프지 않도록 네가 잘하면 되는 거고.”
“정말 잘할 거다. 다시는 혼자 가버리겠다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 못하게.”
석재는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다짐해?”하고 농담했다. 그러자 백진이 빙긋이 웃었다.
“네가 주선자니까.”
“중매쟁이 취급하지 마라. 아직 내 임자도 못 만났으니까.”
“빗장뼈만 붙으면 동물원에 데려다 줄 테니까 맘에 드는 암컷 하나 골라라.”
석재는ㅡ진심으로ㅡ백진의 다친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완강하게 쳐내는 백진을 도발하다가 다시 한번 선담의 빈 침상을 돌아보았다.
“선담이는……?”
선담은 최은협을 죽이고 저도 죽을 각오를 하고 떠났었다. 손 실장 덕에 저희들이 빨리 도착해서 망정이었지, 그때의 선담이었다면 저지르고도 남았을 발상이었다. 결국 백진과 살아남아 여기까지 잘 왔다지만 그것은 잠시잠깐 버려졌던 두 남자에게 묘한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석재는 무의식중에도 선담의 위치를 꼭 확인하려고 들었다. 들어올 때 본 선담의 빈 침대가 마음에 계속 걸렸던 석재는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담의 안부를 물었다.
“어디 갔어?”
백진은 등에 기댔던 베개를 눕히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백진아, 선담이 어디 갔냐니까.”
백진은 아예 이불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무언가 촉, 하고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석재는 그제야 안심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속에서 빠져나온 백진은 이불을 들춰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에 찰싹 붙어있는 녀석을 보여주었다.
고륵고륵 깊게 잠든 선담이었다.
무척 편안한 듯 눈을 꼭 붙이고 누워서 따듯한 잠자리를 찾아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백진의 품안이 가장 따듯했나 보았다. 머리 쪽에는 백진에게 선물 받았다던 배냇저고리가 놓여있었다. 백진은 자신이 몇 번이나 움직여도 깨지 않고 잘 자는 녀석이 사랑스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닭살 좀 떨어도 돼냐?”
“안 돼.”
“녀석이 나한테 행복을 받아가는 만큼 내 안의 행복도 자라나보다. 그치.”
“와, 제발 닭살 좀 그만 떨어라. 나 진짜 많이 참는 거야.”
“그만 삐쳐. 동물원 데려간다니까.”
“너 요즘 시집 읽어? 방금 한 말 뭐야? 으, 안 어울려.”
가끔씩 웃음소리가 툭툭 터지는 병실은 따듯했다. 마주 안은 두 남자의 몸도, 그것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몸도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백진은 석재와 농담을 주고받다가 가끔 꼬물거리는 선담에게 키스했다. 가볍게도 했다가 진하게도 했다. 모두 애정이 넘쳐나는 입맞춤이었다. 낯간지러운 장면이었지만 석재는 너그럽게 응해주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 저토록이나 간절하게 표현하는 모습은 살면서 얼마 볼 수 없는 귀한 장면이었다. 힘들게 얻은 사람에게서 누가 떨어지고 싶겠나. 어찌 보면 백진이 자신을 상대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게 기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석재는 제 앞의 두 연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
바람에는 아직 쌀쌀한 감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완연하게 숨 쉬는 봄의 기운도 함께 느껴졌다. 한낮에도 노란 조명으로 알록달록 빛나는 곳 한복판에서 선담은 날아가는 형형색색의 풍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얌마, 사람도 많은 데 한눈 파냐?”
선담은 곧 우직한 손에 이끌려 거의 뜀박질을 해 일행에 합류했다. 일행이라 봐야 세명이었지만. 다가올 선담의 생일날 석재가 전문의 국가고시 준비를 해야 한다기에 세 사람은 약속을 앞당겨 가까운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학생들 시험기간이라는 이야기를 접하기는 했지만 놀이동산은 놀랍도록 가족단위였다. 평일 오후의 놀이동산은 세 남자가 적당히 즐기기엔 최적이었다.
“백진아, 옆구리도 제대로 안 붙었으면서 무리하는 거 아니야? 네 나이가 이제…”
“동갑주제에 지랄하지 말자.”
백진은 선담에게 핫도그를 쥐어주고 석재에게는 대충 던져주며 대꾸했다. 세 사람은 노란색 파라솔이 펼쳐진 테라스에 앉아서 호수를 떠다니는 오리배를 구경했다. 핫도그의 케첩을 낼름낼름 핥아보는 선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석재가 백진에게 물었다.
“선담이는 놀이기구 못 탄다는데 넌 왜 여길 와가지고 그러냐?”
“다음엔 너 빼고 둘만 올 거거든. 사전답사에 한번 끼워졌더니 기고만장한 거 아니냐?”
“선담아, 너 정말 저놈하고 여기 또 올 거야? 나만 두고?”
“배에 상처 괜찮아지면 나도 놀이기구 탈 수 있어. 올 거야.”
백진이 “거봐라!”하고 석재를 툭 밀어냈다. 석재에게 불리한 대답이 될 줄 모르고 대답했던 선담은 당황해 눈이 둥그레졌다.
“부, 불곰도 같이 와. 셋이 같이 타고 놀자.”
“셋이 타는 놀이기구는 극히 드물어….”
“그럼 불곰도 여자친구 데리고 와.”
“선담아… 나 평생 애인 없었어….”
“아…”
놀이기구 타자는 말에 현혹돼 얼렁뚱땅 대답했던 선담은 점차 당혹해 땀을 뻘뻘 흘렸다. 그 사이 백진이 선담의 볼에 묻은 케첩을 핥아먹었다. 그리고 약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식후 30분 됐다. 핫도그 먹기 전에 이것도 먹고.”
선담은 백진이 까놓은 알약을 받았다. 이제 이 약도 내일까지만 먹으면 끝이었다. 두 달 내내 끼니에 맞춰 약을 먹다보니 식욕이 늘어서 선담은 곧잘 먹어댔다. 방금 전에도 떡볶이를 먹은 주제에 또 핫도그를 찾은 것이었다.
죽은 수정란을 비워내고 자궁을 재점검하는 수술을 마친지 딱 두달이 되었다. 이제는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되었지만 크게 벌어졌던 살가죽을 꿰맨 상처는 아직도 따끔따끔했다. 생각보다 뱃속은 많이 상해있었고, 결국 선담은 수란관 한쪽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거쳤다. 그나마 주사를 맞은 시기도 아슬아슬해 괴사가 진행되기 바로 직전이었단다.
수술 후의 시간은 백진이 지극하게 돌보아주지 않았으면 겪기 어려운 고비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아픈 거라고 생각하며 이를 물고 참았다. 백진은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늘 다독여 주었다. 죽겠다고 뛰쳐나갔던 병신 같은 자신을 아직도 많이많이 사랑한다며. 백진의 지극한 사랑이 새삼스럽게 통감돼 선담은 아픈 만큼 원 없이 울었다.
스스로 죽어서 편안해지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백진과 석재가 그 사실에 상처를 받았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서,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항상 후회스러웠다.
선담은 눈물이 고이려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풍선대신 하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이따금씩 최은협이 떠올랐다. 시간이 묻어주겠지만 모든 걸 무시하기엔 자신이 겪은 폭풍은 거대하기만 했다. 그저, 우리들은 이렇게 살아있는데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었다. 최은협은 그 바람 또한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그는 그에 대한 것은 어떤 것도 흘리지 않았다. 단 한조각도.
죽었으면 죽었다고, 살았으면 살았다고 표현해주는 것마저도 그에겐 사치였을까.
비는 당신을 떠올렸다. 비의 냄새를 가졌던 당신.
그렇기에 더는 비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에 하나 비를 맞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당신에게 향하는 마지막 복수가 되리니.
선담은 주머니를 뒤져 쪽지를 펴보았다. 예전에 백진이 자신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해주었던 문구는 바닷물에 번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선담은 항시 쪽지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자신을 진짜 보석에 비유해주었던 그와 늘 함께이고 싶어서. 실제로도 늘 함께지만 그가 자신에게 건넸던 종이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있었다.
‘그러니, 꼬맹아, 네 빛을 오래도록 잃지 마라.’
글자는 지워져도 괜찮다. 그 글자가 뜻했던 바를 잊지 않고, 새로이 다시 쓰면 되니까.
“다 먹었으면 이동 할까?”
“홍꼬맹, 아무래도 몸에 무리 안가는 회전목마밖에는 네가 탈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다. 이래서 애기들은 귀찮다니까.”
선담은 백진의 어깻죽지를 확 꼬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백진과 석재의 웃음소리도 섞여 들어갔다. 두 남자가 지도를 보며 회전목마를 찾을 때, 문득 선담은 목덜미에 따듯한 기운이 닿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익숙하고 어딘지 그립지만 잊혀가는 듯한. 그런 느낌의 따듯함이었다.
‘너는 꽃 같아.’
선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호수와 숲, 그리고 하늘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선담은 그것을 봄바람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아니라면 더 이상 무엇이겠는가. 결국 자신에게는 흘러가는 봄바람으로만 기억에 남을 것이다.
푸른 진공에서 자신을 끌어올려주었던 잠시의 온도는 점차로…… 잊혀 갈 것이다.
“아저씨, 같이 가요ㅡ”
앞서가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며 선담은 백진의 손을 잡았다. 선담은 자연스럽게 석재의 손도 잡고 맑은 해처럼 웃었다. 백진은 허리를 숙였다. 사람이 많은 곳이든 연인의 은밀한 공간이든 그에겐 상관없었다. 사랑을 느낄 때는 그것을 표현하고, 주고받는 것에도 감정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홍선담을 보며 다짐했던 한가지였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킬 한가지였다.
그렇게 백진이 선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석재는 당황해하며 백진의 등짝을 때렸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 속삭임과 같은 세례는 봄바람이 섞여 진정 길었다.
기나긴 겨울이 거치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은 알지 못하더라도 겨울의 끝자락에 서면 누구나 느낄 수 있으리라. 그토록 오래간 기다려온 봄도 구름 저편에 숨어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선담은 그의 입술에 입술로 보답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