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5)

ㅡ다신 이 지랄하게 만들지 마! 너까지 싸잡아서 묻어버리기 전에!

영하로 하강한 기온에 맞추어 남자가 내딛는 돌담길은 칼날 같은 얼음이 돋아있었다. 햇살 반듯한 오후엔 눈요기로 딱 좋을 예쁜 정원이었지만 지금은 천옥이 따로 없었다. 전날 끔찍했던 폭우로 인해 지금의 오르막길은 뒤뚱거리며 걷는 남자에겐 너무도 버거운 빙판길이 되었고 더욱이 비는 오전에만 잠시 멈추었을 뿐 저녁이 되자 거센 물안개를 일으키며 다시 한창 쏟아지는 중이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철퍼덕하고 빗물에 미끄러져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남자는 아파할 기색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신발이 한 짝 없는 발바닥은 살을 에는 빙판과 물이 맞닿아 쩍쩍 갈라질 양 소리부터 섬뜩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얼음에 살점이 들러붙어버릴 듯 했다. 그러나 어딘지 부족하게 종종 걷는 남자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지 무거운 다리에 매질을 하느라 바빴다. 그는 앞길을 허우적대고 잠시 울기도 하면서 미친 듯이 두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 후, 빗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웅장한 아파트단지 정문에 들어서자 그는 가까스로 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질질 끌었다. 물보라가 낀 어두운 밤길을 이용해 그렇게 중앙 경비실의 눈 어두운 관리인들을 피한 남자는 잘 닦인 정원바닥을 광막히 내달렸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ㅡ

진한 원두커피를 따르던 도중 정석재는 초인종 소리에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크게 놀랐다. 괜히 과장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지금은 새벽 3시였고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도, 찾아온다는 사람도 없었다. 저렇게 요란하게 벨을 울려댈 정도면 제집 구분도 못하는 취객이일 확률이 높으니 그것도 아니라면 정신과 종사자들이 한 번씩 겪는다는 ‘강제적 방문에 의한 시간 외 환자상담’인가 싶어 정석재는 긴장했다.

환자 중 집주소를 아는 사람이 있던가 중얼거리며 그는 불이 들어온 인터폰 화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형식적이지만 방문자는 집주인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건물 내로 진입할 수 있었고, 방범시스템이란 것이 이럴 땐 의외로 요긴하여 정석재는 방문객의 신원을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세요.”

상대는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상 적절치 않은 짐작이었다. 온전히 사고할 줄 아는 성인이라면 무언가 급한 용무가 있으니 한밤중에 찾아왔을 터인데, 상대는 얼굴을 가린 채 요란한 빗소리만 들려주었다. 작살처럼 땅에 꽂히는 빗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절절히 흘러들어왔다.

설마 시스템 오작동인가. 어두운 밤의 고독에 미쳐버린 환자가 직접 내방이라도 한 줄 알고 굳었던 정석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전율하고야 말았다.

[…ㅡ불, 곰……. 나… 나야…….]

처음엔 빗소리에 섞여 환청을 들었거니 했다. 그러나 들릴듯 말듯 한 얇은 음성은 쉬지 않고 그를 불러댔다. 정석재는 망설임 없이 오픈도어 버튼을 누르고는 파자마 위에 코트를 대충 걸친 채 번개 같이 튀어나갔다.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못하고 6층에서 1층까지 시한폭탄을 맨 것처럼 계단을 뛰어넘었다. 

건물 중앙현관 앞에 툭 쓰러져있는 확인되지 않은 인영. 야객은 자동문이 열리자 몇 걸음 옮기고 바로 주저 않은 모양이었다.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과 원래 한 몸이었던 것같이 서늘하게 식은 몸뚱이가 찬 바닥에 조각처럼 붙어 굳어있었다. 석재는 빠르게 다가가 남자의 어깨를 들어올렸다.

그가 맞았다.

4년 전 근사한 송별회를 마치고 떠났던 그 녀석이 맞았다. 숫기가 없어 터놓는 친구가 얼마 없는 본인을 ‘불곰’이란 애칭으로 부를만한 인물은 주변에 몇 없었다. 사람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버리는 음성을 지닌 인물도…… 몇 없었다. 정석재는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저를 찾아온 오랜 친구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남자는 폭우에 휩쓸리는 사시나무보다 더 크게 떨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긴소매 티셔츠 한 장에 젖은 점퍼, 트레이닝복 바지, 그나마 신발은 제대로 챙겨 신지도 못한 채였다. 얼굴도 어딘지 울긋불긋한 것이 몹시도 아파 보였다. 일단은 119에 신고를 해 병원으로 옮겨야했지만 핸드폰도 두고 내려왔고 추운 복도에서 마냥 기다릴 순 없어 젖은 몸을 코트로 꽁꽁 싸매고 등에 업었다. 남자를 업자마자 온몸으로 한기가 옮겨 붙었지만 계단을 가쁘게 오르는 사이 그것도 잊어버렸다. 

비밀번호를 찍고 더운 집안으로 들어와 열이 가득한 바닥에 그를 눕혔다. 정석재는 급하게 119버튼을 누른 뒤 연결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일사분란하게 젖은 옷가지를 벗겼다.

“네, 119입니다.”

“위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구급차 좀 보내주세요. 반포 9동 신가목 아파트 701동 6백…”

“701동, 몇 호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십시오.”

“반포 9동… 신…”

텅!

정석재는 수화기를 떨어트렸다. 무선 전화기는 묵직한 파편을 튀기며 바닥을 굴렀다. 그래도 기능을 상실하지는 않았는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실 한편에서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부르는 수신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렸다. 집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전화를 연결했던 발신자는 말을 잃고 저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대신 혼자 중얼거렸고, 잠시 후 수신을 포기한 수화기 너머는 잠잠해졌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지……?”

완전히 의식을 잃었는지 긴 속눈썹만 잘게 떨고 있는 친구는 대답이 없었다. 하염없이 막막해 이름 석 자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역시 없었다. 

정석재는 주저앉고 말았다. 한동안 호흡한다는 것도 잊었다. 그는 몹시도 거칠게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기더니 자신의 뺨을 세게 두들겼다. 그러나 때리면 때릴수록 머리만 윙윙 울릴 뿐, 이성적인 판단은 저 멀리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친구의 배에 손을 짚었다. 

적어도 배잉(胚孕) 7개월은 족히 되었을 허연 배를 쓸어내리며 이 웃기지도 않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몸속에 또 하나의 생명체가 약동하고 있을 불룩한 배를, 믿지 못하는 눈으로 자꾸자꾸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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