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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3/13)

Epilogue

「화창한 월요일 오전입니다. 오늘의 타블로이드들은 모두 어제 있었던 재클린 레너드와 클랜 애클랜드의 결혼식이 장식을 하고 있네요.」

「과연 세기의 결혼식다웠죠.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화려한 결혼식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늘에서 내린 비까지. 아주 대단했죠?」

「야외결혼식에 폭우라니 진짜 엄청난 해프닝이었죠. 그래도 신랑신부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너무 기뻐하더군요.」

「NY Daily의 타이틀을 전하자면 ‘유쾌한 커플의 웨딩 해프닝’이라고 써져 있네요. 세기의 결혼식을 향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지대했던 모양입니다. 하하, 저도 그 장면만 돌려봤는데 진짜 유쾌하더군요. 호화찬란한 결혼식이라 빈축을 살 수도 있었지만, 신부가 어머니의 드레스를 물려받은 데다 그 우아하면서도 심플한 센스라니, 모두가 이 낙천적인 커플들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습니다.」

「상류층들의 돈지랄 결혼식에 이 정도의 호의적인 반응이 올라온 적이 또 있던가요? 진짜 신기한 일이네요. 오우, 여기 작게 엘레나 네브즐린의 사진도 올라와 있네요. 최고의 스타일, 사랑스러운 엘레나라니. 7개월 전 총기를 들고 설치던 아가씨라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네요. 엘레나, 개과천선 축하드려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낄낄거리는 남자의 웃음소리를 듣던 진은 언제나처럼 퉁명스레 내뱉었다.

“블리스, 어쩌냐? 클랜한테 일면을 빼앗겼네?”

핸들을 쥔 채 진이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가 웃고 만다.

“좋은 소식이니까. 이걸로 애클랜드 사의 이미지도 아주 좋아졌다고.”

「그런데 이렇게 보니, 클랜 애클랜드 너무 아깝네요. 블리스 만큼이나 멋진 남자가 유부남이 되다니, 가슴이 찢어지네요.」

여자의 장난스러운 말에 남자가 받아친다.

「이런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대환영입니다. 드디어 공공의 적이 하나가 줄었네요. 이제 블리스 애클랜드와 에이먼 애클랜드, 그리고 조지 클루니만 결혼에 골인해주시면 바야흐로 우리들의 세상이 올 겁니다. 멋진 남자들은 전부 유부남이 되는 근사한 상황이 닥치는 거죠.」

「그건 안 되죠. 블리스, 에이먼, 그리고 조지, 당신들만은 영원히 독신으로 남아주세요. 이렇게 멋진 남자를 한 여자가 독차지한다는 건 인류의 비극이에요.」

「이런, 당신 일부다처제를 지지하는 건가요? 그래요?」

「브래드와 애쉬튼이 유부남이 되어버렸으니 남은 남자들이라도 지켜야죠.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유전자는 널리널리 퍼져야 한다고요.」

「여성단체에서 우리 방송의 광고를 모두 끊어버리겠군요. 항의전화가 빗발치겠는데요?」

「그러니까 독신으로 남아달라고요. 대신, 정자 기증하세요. 당신들의 유전자를 널리널리 보급해달라고요. 블리스, 당신의 유전자라면 10만 달라라도 사겠어요.」

「하하, 당신 진짜 미쳤군요.」

자기들끼리 만담을 하는 사회자들의 말을 뒤로 하고 진은 라디오를 꺼버렸다.

“흐응, 정자로 장사를 해도 되겠는 걸? 정자 하나에 십만 달라라면,한 번에 얼마야?”

“하기만 해봐. 너 닮은 애들이 줄줄이 나타나면 다 네 과거의 과오로 돌릴 테니까.”

블리스의 장난에 진이 진지하게 받아치자 블리스가 큰소리로 웃고 만다. 그 웃음소리가 상당히 얄미웠지만, 진은 참아주기로 했다. 

“클랜은 오늘부터 출근하는 거야?”

재키가 임신 중인데도 결혼식 준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라 허니문은 일단 미룬 채였다. 대신 재키와 사라, 그리고 킴과 사라의 언니와 어머니는 하루 쉰 뒤 내일 오전에 플로리다에 있는 별장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클랜은 대넌의 명령대로 오늘 오전부터 애클랜드 본사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자마자 출근을 시키는 걸 보니 대넌도 클랜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클랜이 클레어 직속으로 들어갔어. 아마 클레어가 신나게 굴려줄걸.”

“둘이 잘 맞으니 잘 됐네.”

“그렇지. 클레어는 섬세하고 꼼꼼하지만 대범하지 못한 면이 조금 있거든. 대신 클랜은 끈기와 섬세함과는 담을 쌓았지만 아주 기발하고 대범하지. 둘이 잘 맞을 거야.”

그렇긴 하다. 서로의 장단점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데다 클랜과 클레어라는 이름처럼 마치 쌍둥이처럼 자라나 죽이 맞을 때는 기가 막히게 또 잘 맞는다.

하지만 진은 클랜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클레어가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무슨 죄냐?”

“걱정 마. 클랜의 천적은 클레어니까. 브루스 잡는 블리스, 클랜 잡는 클레어. 몰라?”

“그래, 제발 클레어가 클랜에게 말려들지 않기만을 바란다.”

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저 멀리로 보이는 호텔을 향해 깜빡이를 켜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블리스가 뭔가 생각난 듯 진에게 말을 건다.

“참, 너 결혼식 준비 또 해야 돼.”

그 말에 순간 진은 핸들을 반대로 꺾을 뻔했다.

“뭐라고? 나한테 또 결혼 준비를 하라고?”

“아, 릴렉스, 릴렉스. 이번엔 석 달 정도 시간이 있어.”

“누구 결혼식인데?”

“클레어.”

짤막한 그 답에 진은 놀란 얼굴로 블리스를 슬쩍 돌아왔다.

“어? 드디어 하는 거야? 그 욕심쟁이가 웬일로? 평생 약혼 상태로 갈 것 같더니?”

“응. 클레어가 어릴 때부터 묘하게 클랜하고 경쟁의식이 있었잖아. 그 동안 말은 안 했는데 클랜이 먼저 결혼해 애까지 낳는다는 소리를 듣더니 부러웠던 모양이야. 나랑 에이먼은 차치하고, 두 녀석이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서로 경쟁을 했었거든. 키며, 성적이며, 친구 숫자며 하는 걸로 말야.”

분명히 그랬었다. 에이먼은 워낙에 따로 노는 타입이었고, 블리스는 애초에 비교 상대가 아니었던 탓에 한 살 터울인 클랜과 클레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비교대상이며, 동시에 라이벌이기도 했다. 유난히 발육이 좋았던 클레어와 남매 중 발육상태가 가장 더뎠던 클랜이기에 어릴 때부터 클레어가 누나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유독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그래도 설마 이런 문제에까지 그런 걸 끌어들일 줄은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도 참 어지간하다. 에이먼과 블리스는 분야가 다르니 그렇다쳐도 클랜에게 지는 것만은 죽어도 싫은 모양이다.

“뭐, 나름 축하할 일이네.”

“축하해야지. 내년에 남동생 하나에 조카 둘이 생길 것 같으니까.”

“응?”

“클랜이 재키 임신 시켰다는 말을 듣자마자 클레어도 사고를 친 모양이야. 뭐, 자기 말로는 먼저 손자를 안겨드리는 쪽이 후계자로 유력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클랜한테 지기 싫었던 것 같아.”

“그렇겠지. 왜냐하면 대넌에겐 내년에 손자보다 아들이 먼저 생길 거거든.”

“그렇지. 손자보다야 아들이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 유언장에는 그 애 이름 하나만 올라갈 가능성이 제일 커. 사라, 너, 그리고 그 애한테 전 재산을 다 물려주실걸.”

“나는 왜?”

“아버지가 어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언장에 이름 올린다고 하셨거든. 우리들 다 필요 없으니 꺼지라고 하면서 너랑 사라만 있으면 된대.”

그럴 만도 하다. 자식들이 원수 짓을 하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자신이 대넌의 입장이라도 저것들이 자식들이라면 알몸으로 내쫓고 말 것이다. 자식들이라고 넷이나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말썽들이다, 이 집은. 그러니까 마약중독이나 알콜중독 같은 게 아닌, 사람 속을 박박 긁는 쪽으로 열 받게 한다.

“그나저나 내년이면 갑자기 집안에 애가 셋이나 생기겠네.”

“그렇지.”

“환장하겠네. 그 애들은 누가 봐?”

“사실 클레어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어제 와서 생리가 늦어지는 것 같다고 좋아하더라고.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내가 보기엔 확실해. 클레어 성격에 실수를 할 리도 없으니, 아마 거의 임신이 확실하고. 아니라면 다음에라도 성공시킬걸.”

“그러니까 내 말이…… 클레어 성격에 한다면 인공수정이라고 할 거 아냐? 그럼 고만고만한 그 세쌍둥이들은 누가 보냐고?”

“알아서들 하겠지. 아버지가 보디가드에 유모부대에 줄줄이 붙여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할 거 아냐? 사라는 무슨 죄야?”

“걱정 마. 클레어는 자기 일은 확실히 알아서 하니 잘하는데다 맷이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해, 나 만날 때마다 애는 자기가 키울 테니 제발 클레어한테 결혼해서 애만 낳게 해달라고 사정했어. 그 순댕이는 클레어가 애 키우라면 직장 때려치우고 들어앉아서 애 키워줄 거야. 그리고 맷의 부모님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거고. 어머니가 이번에 정년퇴임하셨거든. 그리고 재키는 일단 좀 쉬다 온 뒤에 맨하탄 쪽에 아파트 알아본다고 했으니까 킴이 와서 잘 돌봐줄 거야. 사라는 자기 몸만 잘 돌보면 돼.”

확실히 맷이라면 그럴 만하다. 클레어의 약혼자인 맷은 블리스의 예일대 동창으로 같은 알파베타감마 클럽 출신인데 대재벌은 아니라도 정치와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집안의 장남이었다. 상류층에 속하는 집안에 부모님과 형제들 모두 사회적으로 훌륭히 제몫을 해내고 있고, 워낙에 인품이 좋다. 맷은 날개 없는 천사 수준이었다. 진이 늘 알파베타감마를 갈아 마신다고 하지만 그 멤버 중에서 맷은 아주 좋아했다. 순박하고 착하고 성실하며, 완벽한 남자였다. 슬슬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와 벌써 나오기 시작한 배가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그 성격으로 전부 덮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저 휘황찬란한 오빠들을 보고 자란 깍쟁이 클레어가 데이트 두 번 만에 침 발라놓는다고 약혼을 서둘렀을 정도로, 맷은 완벽한 남자였다.

클레어는 진짜 시집 잘 가는 거다. 약혼식 때 봤는데 그 집안 부모님이나 형제, 인척들 누구 하나 불쾌한 사람이 없었다. 다들 너무나 너그럽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타블로이드에서는 미합중국의 공주님이 마구간지기를 간택해 약혼하는 것 같다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조던 브래트먼-사실 조던 브래트먼과 맷은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았다. 외모부터 시작해 꽤 성공한 남자이고 아주 참한 성격이라는 점까지 말이다.-의 예를 들어가며 ‘금발의 공주님에게 필요한 건 왕자님이 아닌, 시종?’이라는 타이틀로 결혼에서조차도 주도권을 잡아 휘두르려는 공주님들의 행태라며 상대 남자가 기대 이하라는 사실을 비아냥거렸다.(그 보도 직후, 쓸모없는 파파라치 노먼은 아주 애매한 사진을 찍어 그 타블로이드지에 팔았고, 그 애매한 사진으로 인해 그 신문은 천문학적 액수의 소송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 신문사는 결국 대넌의 손에 의해 도산했다. 알파베타감마 회원을 건드린 자들의 최후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클레어가 아니라 맷이 아깝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날조된 소문들과 달리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호사가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말든 두 사람만은 진실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클레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르니까 맷에게 신데렐라 맨이니 뭐니 지껄이는 거다. 구원을 받은 건 맷이 아니라 클레어였다.

“이거고 저거고 다 좋은데, 그 애들이 내 몫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너 하기 나름이지.”

“내가 왜?”

“네가 일일이 다 참견하고 다니잖아. 문제는 너야. 넌 너무 꼼꼼하고 완벽해서 남이 네 일 하는 꼴을 못 보니, 먼저 간섭하다 뒤집어쓰잖아. 그 애들은 쳐다도 보지 마. 구르든 엎어지든 그냥 둬.”

과연 자신이 그럴 수 있을까 했지만 진은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 미뤘다. 그 이야기를 지금 했다간 블리스의 오찬 약속에 늦을 것이다. 어제 오전에 병원에 실려 간 로이는 결국 장염 진단을 받고 일주일간 휴가를 받은 채였다. 어젯밤 블리스의 아파트로 돌아가 둘 다 잠만 자다 일어나 부랴부랴 약속에 맞춰 나온 참이었다.

“다 왔다. 난 회사로 간다. 래먼에게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가라고 할게.”

호텔 정문 앞에 도착한 진이 앞으로의 스케줄을 알려주자 블리스가 뒷좌석에 있던 가방을 꺼내들곤 진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래. 그럼, 이따 보자.”

옷을 정리하고 조수석에서 내려서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다시 한 번 블리스를 불렀다.

“블리스.”

“응?”

“사인 꼭 받아내. 파이팅!”

“물론이지. 승리의 블리스라니까.”

씨익 웃으며 돌아서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진심으로 이 계약이 어서 성사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블리스가 앞으로도 더욱 더 성공해나가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야, 실직 뒤에 비빌 언덕이 생길 테니까.

블리스를 내려준 뒤 여느 때와 같이 오전 8시 30분 기준으로 출근을 한 진은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들어와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에반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체 언제 집에 가는지도 모르게 사무실에서 사는 에반이라 오늘도 당연히 먼저 와 있을 거라 생각한 진은 에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네.”라고 나온 답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진은 에반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커피를 하나 내려놓았다.

“에반, 당신 집에 들어가기는 하는 거야? 저 캐비넷 안에 침낭하고 옷이랑 다 있는 거 아냐? 아니지? 사실은 이 안에 비밀 방 만들어뒀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간이 회사에 없을 때가 없냐 싶어 진이 그렇게 묻자 에반이 살짝 이마를 찌푸린다.

“무슨 헛소리야?”

“그거 있잖아.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거기서 캐비넷 뒤에 비밀 문이 있잖아.”

물론, 그건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문이었지만, 이라고 덧붙인 진을 보며 에반은 작게 혀를 찼다.

“너, 영화 좀 그만 봐. 나도 방금 출근했어. 그런데 넌 왜 혼자야? 블리스는?”

“아침 약속 있어서, 나 혼자 왔지. 마셔.”

그렇게 말하며 진이 커피를 권하자 에반이 불안한 듯 진을 바라본다.

“커피까지 사들고 왜 온 건데? 할 말 있어?”

“응.”

“뭔데?”

“나 회사 관두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하는 진을 바라보며 컵을 들려던 에반은 그대로 멈춰 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컵을 내려두곤 의자에 기대앉았다. 움직임은 태연했지만, 에반은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블리스랑 잘 안 되냐?”

“아니.”

“그럼?”

“그냥.”

어깨를 으쓱하는 진의 태연한 얼굴에 에반은 다시 허리를 세우고 앉아 진에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진……. 그래, 내가 실수했다. 해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 심했어. 미안하다.”

순간 진은 블리스가 들려준 녹음 중에 에반이 해고 어쩌고 했다는 걸 기억해내곤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사실 그런 말을 했었나 하는 것도 방금 전까지 까먹고 있었다.

“그럼 왜? 연봉이 적어? 하긴, 팔만 달라는 너무했지. 그렇게 혹사시키면서. 10만 달라로 올려줄게.”

“그것도 아냐. 돈이야, 뭐……. 이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어이, 너 블링스랑 사귀더니 통이 커졌다?”

그 말에 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를 사정없이 던져주는 네브즐린 가 사람들에, 평생을 벌어도 한 대 사기 힘든 고급차 키를 박스 채로 준다는 블리스에, 전용기에 별장에 빌딩도 사주겠다는 대넌까지, 주변에서 하도 준다 준다 하니 대범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들은 말만 하면 진짜 섬이라도 사줄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블리스가 아니라도 애클랜드 가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걸 무시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섬이나 빌딩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보이는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는 쪽이 낫다.

“뭐, 그런 것도 아주 없진 않겠지만 이젠 굳이 돈 벌려고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어졌거든.”

“왜?”

“내 기억에 우리 집이 가주 가난했었거든. 그래서 엄마랑 동생 만나면 돈을 많이 주고 싶었어. 돈 잔뜩 벌어서 여동생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하려고 했거든.”

“하면 되잖아?”

“이젠 못해. 죽었거든.”

“응?”

“엄마랑 동생 다 죽었대.”

진은 조금 슬픈 눈으로 애써 웃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곧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그 눈에 비해 진의 표정은 해맑았다. 그제야 에반은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다.

“……너, 그래서…….”

“응. 그래서 마음 정리하고 왔어. 심리학과 다니던 친구가 그러더라고. 상처는 자꾸 드러내는 게 좋다고. 싸고 싸고 돌면 자신의 안에서 그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계속 곪아들어 가니까, 사람들에게 터놓고 위로 받을 건 받고, 동정 받을 건 받고, 치유해 가라고. 사람이 해주는 ‘괜찮아.’ ‘안됐다.’ ‘힘내.’ ‘곧 괜찮아질 거야.’라는 한 마디들은 그 당시엔 별 효력이 없는 것 같아도 그게 차츰차츰 머릿속에 저장이 돼 나중엔 진짜 괜찮아진대. 상처는 숨기기만 할 게 아니라 드러내고 아프다고 호소하고 소독하고 치료받아야 빨리 낫는 거니까. 바보처럼 지금까지 꽁꽁 싸매기만 했는데, 이젠 안 그러려고.”

“……잘 생각했어. 다행이다. 그리고, 안 됐어. 동생 꼭 만났으면 했는데.”

에반은 진심으로 진을 위로해주었다. 따뜻한 말이나 위로, 감동적인 말 한 마디 같은 건 서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한 한 마디로 마음을 전했다. 에반을 잘 알기에 진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고마워.”

진 역시 진심으로 에반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조금 목이 멘 듯 콜록거리고 기침을 하더니 조금 갈라진 음성으로 말을 돌린다.

“참, 나 퇴직은 다음 달에 할 테니 후임자는 내가 지명할게. 한 달 정도 인수인계하고 가야지.”

“그런데 왜 관둔다는 거야? 설마 한국으로 가려고?”

“설마. 그건 내 자리가 아냐.”

“그럼?”

“……문학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응?”

“나 글재주는 없잖아. 진짜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쪽에는 영 재능이 없으니 문학 가르치고 싶어서. 프렙스쿨(prep school-기숙사제를 적용하는 고급 사립학교)로 갈지, 차터스쿨(Charter school-주의 지원을 받는 사립학교)로 갈지, 공립으로 갈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라이센스를 따보려고. 처음엔 수학과 선생들이 많이 부족하니 수학과 교사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은데, 결국은 영문학을 가르치고 싶거든.”

“갑자기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게. 당분간은 국제 입양아들이나 이민 온 애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발룬티어로 참여해서 영어를 가르치다 라이센스를 딴 뒤에 이력서 돌리려고. 한국인이라 수학교사로 들어가면 유리할 거야.”

뉴욕 자체가 다른 주에 비해 교사 자격이 까다롭긴 하지만 자격증이나 전공과목에 있어서는 한국에 비하면 상당히 자유롭다. 영문학 전공자들이 수학과 미술을 가르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현재 교사 수는 넘쳐나지만 수학 교사들이 심하게 모자라 다은 영미권 나라에서 교사 수입을 해올 정도이니, 진은 일단 수학과로 시작해볼 셈이었다. 그러다 경력이 좀 쌓이면 영문학 쪽으로 바꾸면 된다. 굳이 라이센스를 딸 필요 없이 일단 임시 교사로 들어가 정교사 시험을 준비해도 좋겠지만,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라이센스부터 따고 시작할 셈이었다.

최근 엘레나를 보며, 진은 자신에게는 아무래도 교사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한테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지금의 일이 불만인 건 아니지만 좀 더 여유를 갖고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잠깐, 진……. 진심이야?”

“응.”

진이 산뜻하게 의사를 전달하자 에반이 그다운 현실적인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교사 초봉이 얼만지나 알아?”

“알아. 지금 내 연봉 반도 안 되지. 반이 뭐야? 1/3이지.”

“그런데 괜찮겠어? 네 한 달 집세가 얼만데?”

일반적으로 교사의 첫 연봉은 2만3천 달라 정도였다. 물론, 프렙스쿨로 들어간다면 조금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교사의 초봉을 생각했을 때 연봉 23000달라라면 한 달에 약 1800달라 정도를 받게 된다. 문제는 진이 대여한 투 룸 아파트의 한 달 렌트료가 1500달라에 달한다는 점이었다. 진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아, 집 정리하고 애클랜드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

“뭐?”

“아무래도 집세나 생활비가 부담되니까. 그리고 사라도 걱정되고.”

“출퇴근은 어쩌게?”

“대넌 따라서 오가지, 뭐. 그리고 센터도 그 근처니까.”

“그럼 블리스는?”

“가끔 데이트 해야지.”

심플한 진의 답에 에반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르며 진에게 되물었다.

“너희 사귀기로 한 거 맞아?”

“사귄다고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당장 같이 사는 것도 좀 그렇고. 블리스 바쁠 텐데 나 혼자 그 집에서 뭐하라고? 백수 되면 당분간 심심할 텐데. 시간 나면 오가고 데이트 하는 쪽이 좋잖아. 내가 시간 여유가 있으니 공원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도 데이트도 하고. 이제 시작인데 그런 두근거림 정도는 있어야지.”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지 않냐? 사랑 안 해?”

“우린 그럴 때는 지났지. 그리고 난 성공한 남자가 좋아. 사랑 하나에 목매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집 안에 앉아 같이 텔레비전이나 들여다보는 남자는 재미없어서 싫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진짜 데이트부터 하나씩 해보게. 우리 너무 붙어 지냈잖아. 억지로 시간 내서 만나고, 막 보고 싶어서 피곤해도 달려오고 하는 것도 해보게. 밤중에 전화해서 악몽 꿨다고 깨우기도 할 거야.”

지금까지 사양하며 못했던 일들을 이 김에 모조리 다 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진을 보며 에반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기가 한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진의 능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그의 일을 결정하는 건 그 본인이 할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나설 일이 아니다. 하물며 미성년자도 아닌 서른이나 먹은 성인이니 어쩔 수 없다.

“모르겠다. 네가 그렇다는데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대신, 최종 결정은 블리스가 하는 거니까, 블리스한테는 네가 말해.”

“알았어. 그럼 수고.”

가뿐하게 의자에서 일어선 진은 자신의 컵을 들고 그대로 에반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걸음이 가벼웠다. 

사무실에 앉아 오늘 일정을 정리하던 진은 문득 울려대는 벨소리에 본능적으로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블리스사입니다.”

「진, 너 이거 뭐야?」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노먼의 음성에 진은 서둘러 목소리를 좀 높고 상냥하게 바꿨다.

“진 케이먼 씨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좀 이따 다시 걸어주세요.”

「야!」

“그럼, 이만.”

일방적으로 다시 전화를 끊은 진은 다시 울리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노먼도 이제 슬슬 그를 팔아먹은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던 진은 끈질기게 이어지는 벨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진, 세르게이 네브즐린 뭐냐고?」

“지금 거신 전화는 착신이 금지된 번호입니다.”

일부러 기계적인 목소리를 내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은 진은 또 다시 울려대는 전화벨을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사무실 전화를 받지 않자, 이번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카드를 쓰던 펜을 던지고 핸드폰을 든 진은 위에 뜨는 사라의 번호에 서둘러 폴더를 열었다.

“응, 나.”

「진, 대넌이 기쁘대. 너무 너무 행복하대!」

어린 소녀처럼 활달한 사라의 목소리에 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드디어 임신 사실을 밝힌 모양이었다.

“잘됐네. 그 봐,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출근 전에 들렀길래 사실대로 말했더니 무릎 꿇고 울면서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했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줬대.」

“그럴 거라니까. 그러게 왜 지금까지 숨겼어? 빨리 말해주지.”

「말하기 곤란했잖아, 사실.」

대넌과 사라의 혼전 계약서 내용을 떠올린 진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라니까.”

「퍼기가 죽었을 때 아이를 잃어서 무서웠대. 하지만 진짜 기쁘다고 울면서, 아들이라니까 대넌 주니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대. 나도 기뻐.」

대넌 주니어라면 대넌처럼 눈치 없는 아이가 또 태어나는 걸까 싶었지만 진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잘됐어. 축하해.”

「오늘은 빌라에서 쉬고 내일 중에 플로리다로 떠나는데 대넌도 스캐줄 조정해서 같이 가기로 했어. 브루스도 당분간 쉴 예정이라 같이 동행해.」

“잘됐네. 가서 즐겁게 보내고 와.”

「응, 그래. 고맙다. 여러모로 고마워.」

“뭘, 새삼.”

「너도 휴가 내고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하하, 사흘 무단휴가 써서 할 일이 태산이야. 몸조심하고, 꼭 예쁘고 건강한 아이를 낳아, 사라. 나한테도 동생 같은 아이니까.”

「그래. 그럼 떠나기 전에 보자. 엄마랑 언니도 너 꼭 보고 싶대.」

“응. 나도 뵙고 싶다고 전해줘.”

「그래. 아, 나 병원 갈 시간이다. 대넌이 같이 산부인과에 가기로 했거든.」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는 임산부들을 보며 부러워했을 사라의 외로운 모습이 떠올라 진은 진심으로 잘되었다고 안도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봐. 초음파 사진 찍으면 나 먼저 보여줘야 돼?”

「대넌보다 너한테 먼저 보여줄게.」

“그래. 그럼 끊을게.”

「그래.」

언제나 우아하고 침착한 사라가 오늘은 아주 발랄한 소녀 같았다. 이렇게 좋은 걸 왜 그 동안 고집을 부렸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진은 다시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카드를 끝까지 적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안으로 노먼이 뛰어 들어왔다.

“진 케이먼!”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에 진은 인상을 썼다. 전화를 안 받으니 직접 올라온 모양이었다. 검은 라이더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검은 헬멧을 팔에 안은 걸로 봐선 진짜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노먼, 나 업무 중이야. 약속 잡으려면 미리 전화하고 와.”

“웃기네! 세르게이 네브즐린,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러시아 마피아 두목.”

진은 정확하게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실체를 밝혀줬지만, 노먼은 그에 만족하지 못한 듯 진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헬멧으로 거칠게 상판을 내리쳤다.

“그 러시아 마피아가 왜 나한테 자꾸 이상한 걸 보내냐고!”

장가, 혹은 시집오라고. 라고 말하려다 진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나야 모르지.”

“네가 소개해줬다며?”

“아니? 난 잘 모르겠는데? 전혀 모르는 사실이야.”

한 번 오리발을 내밀었으니 끝까지 내밀 셈이었다. 언젠가 노먼의 아버지인 잭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유능한 변호사 잭 왈, 죄가 있을 때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시치미를 떼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동요해 말실수를 하면 끝장이니, 피의자가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절대 무죄를 주장하는 게 모든 변론의 최초 과정이라고 했다. 아무리 증거물이 확실하고 증인이 있다 해도, 배심원들도 인간들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는 태도로 당당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잭이 수많은 범죄자들을 무죄로 만들어준 비결이었다.

“진 케이먼, 시치미 떼지 마! 오늘 갑자기 집 앞까지 찾아와선 나더러 엘레나랑 약혼을 하라잖아!”

분통이 터지는 듯 고함을 내지르는 노먼을 보며 진은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세르게이는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 그래, 세르게이랑 노먼은 안 어울린다. 그래서 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팔아먹으려고 한 모양이다.

“엘레나 얘기만 해?”

“그럼?”

“배우 알렉세이, 탈옥범 이반, 집나간 니콜라이, 세르게이랑 붕어빵 알렉산드르 얘기는 안 했어?”

“그것들은 또 뭐야?”

“……아직까지는 엘레나까지만 간 모양이니, 기운 내라. 그 형제들 선 사진까지 보면 기절할 테니까.”

나름 일관성 있는 태도로 진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충고를 하자 노먼이 그답지 않게 파랗게 질린다. 아무리 노먼 맥캐인이라도 러시아 마피아 두목은 좀 무서운 모양이다.

“야, 대체 뭐야? 탈옥범은 또 뭐냐고?”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 네 팔자려니 해. 아니면 지금까지 네가 한 짓들의 업보거나.”

“야!”

“네브즐린 가 꽤 괜찮아. 미하엘 네브즐린은 전직 KGB 출신으로 세계 최대의 무기 밀매상으로 아랍 테러리스트들한테도 미사일을 파는 사람이고, 세르게이 네브즐린은 인신매매, 아니 쇼비지니스계의 황제잖아. 그리고 그 동생 알렉세이 끝내주게 잘 생겼어. 세르게이랑 똑같은 얼굴인데 헐리웃 진출도 한대. 그리고 이반은 장기매매범이래. 거기다 성질도 죽인대. 그리고 추가로 어제 탈옥도 했어. 니콜라이는 집 나가는 전적을 보니 너랑 잘 맞을 것 같고, 알렉산드르는 아주 미소년이야.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뻐. 그리고 엘레나는…… 나름 매력 있어. 미성년자지만.”

진이 하나 하나, 그 남매들에 대한 평을 하자, 노먼이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친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더러 러시아 마피아 집안 데릴사위로 들어가라고?”

“데릴사위로 들어오랄 때 들어가. 좀 있으면 시집오라고 할 거야.”

“뭐?”

“어쩔 수 없어. 너도 시집보다는 장가가는 게 낫잖아.”

“대체 무슨 소리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대처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오전에 집 앞에서 와서 강제로 차에 태우더니 세르게이가 이번 주에 당장 약혼식을 하자고 하잖아!”

역시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엘레나와 노먼은 딱 한 번 얼굴을 봤는데 그새 약혼식 준비까지 하다니.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세르게이에게 자신 대신 노먼을 팔아먹은 건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들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노먼, 친구로서의 충고인데…… 하라면 그냥 해. 오래 살려면 해.”

“진 케이먼!”

“진심으로 네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그냥 해. 그게 좋아. 엘레나 진짜 매력 있어.”

“나더러 타조랑 결혼을 하라는 거냐?”

“그렇게 머리가 나쁜 애는 아냐. 차분히 가르치면 될 거야.”

“지금이 무슨 18세기야? 솜털도 안 난 여자애를 데려다 키워 결혼하게? 장난해? 조혼제도 폐지된 지가 언젠데? 여기가 이슬람이냐? 네팔이야?”

여성인권에도 꽤 관심이 많은 노먼의 외침에 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하라는 거잖아. 엘레나 지금 열다섯이야. 성인되기 전에 파혼하면 되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넌 엘레나 취향이 아냐.”

진은 슬슬 노먼을 응원하기 위해 그의 자존심을 건들기 시작했다. 노먼이 잘 걸려드는 분야에 대해서는 진도 박사급이었다. 

“엘레나는 얼굴 무지 밝혀. 넌 진짜 취향 아닐 거야.”

“내 얼굴이 어때서?”

“솔직히 블리스에 비하면 좀…….”

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노먼의 자존심을 자극하자 노먼이 순식간에 살기 어린 얼굴로 진을 내려다본다. 언제나 노먼이 놀리고 도망치고 진이 열 받아 뒤따라가는 게 순서였는데, 오늘만은 그 반대였다.

“오냐, 너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좋아. 그럼 엘레나가 나한테 반하면 내가 블리스보다 잘 생겼다는 거지?”

“그건 또 아니지.”

“그럼 뭐야?”

“걔는 발차기 잘하는 남자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잘해.”

“글쎄…….”

“뺀질거리긴. 하여간 그래서 뭐야, 세르게이의 목적은 날 엘레나랑 진짜 결혼시키는 거라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너, 뭐야? 사실대로 말해! 전부 말해! 그래야 나도 대처를 하지!”

“그 사람의 의외성은 대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냐. 그냥 포기하는 게 속 편할걸.”

“미쳤냐? 나도 한 성질 해.”

한 성질뿐 아니라 한 말썽도 부린다. 그러고 보니 세르게이랑 노먼이랑 붙으면 누가 이길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농담 아니라 진짜 에일리언 대 프리데터, 프래디 대 제이슨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지하다. 그러고 보니 사다코 대 가네코 영화는 안 만드나?

“그럼, 한 번 해봐. 대신, 그쪽은 강적이다. 세르게이도 문제지만 엘레나도 만만치 않아.”

“웃기지 마! 대체 뭐야? 나랑 얼굴을 언제 봤다고 지금 결혼 얘기를 꺼내냐고?”

나는 얼굴 두 번, 그것도 총 합해 2분도 제대로 못 보고 청혼 받았다, 라고 말하려다 그 말까지 꺼냈다간 진짜 자신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밝혀질 듯해 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나가주면 좋겠는데? 난 지금 좀 바쁘거든?”

진이 카드를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노먼도 더는 진에게서 캐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헬멧을 들고 쿵쿵거리며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의 걸음을 뒤에서 지켜보던 진은 이내 노먼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거짓말은 체질에 안 맞아…….”

그래도 하여간 넘어갔으니 된 거다. 적다만 카드를 마저 쓰려 펜을 들던 진은 노먼의 등장으로 글씨가 조금 흔들린 걸 보곤 카드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막 새 카드를 꺼내려다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들고 에이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 정도 신호음이 간 뒤 이어진 통화에 진은 재빨리 용건을 입에 담았다.

“에이먼, 저번에 새로 도착한 인형 옷 말인데, 내가 어제 깜빡하고 안 갖다 줬거든. 어떻게 할까? 내가 오후에 들러서 줄까, 아니면 애클랜드 가로 갖다놓을까?”

쉴 새 없이 이어진 진의 말에 상대가 침묵한다. 전화가 끊겼나 했지만 이제 보니 통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에이먼, 안 들려?”

감이 먼가 해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묻자 잠시 후 우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인형 옷이라니, 그건 또 뭐지?」

처음에는 누군가 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세련된 발음. 그리고 어투. 너무나 매력적인 그 목소리에 잠시 에이먼이 감기 걸렸나, 라는 생각을 하던 진은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세르게이?”

「그래. 인형 옷은 뭐지? 에이먼이 인형을 좋아하나?」

“어, 저 왜…… 에이먼 전화를 당신이 받죠?”

에이먼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대로, 다른 이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무조건 질색을 하는 성미였다. 특히나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매체인 편지와 이메일, 그리고 핸드폰은 누가 손만 대도 경기를 일으켰다. 그건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사생활 보호, 그게 에이먼의 수칙이었다. 그런 에이먼의 개인 핸드폰을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말이다.

「에이먼은 잠깐 샤워를 하러 갔는데…….」

“샤워요!?”

은밀하고 어딘지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세르게이의 어조에 진은 빼액 비명을 내질렀다. 매일을 하루처럼 짜 맞춘 일정 속에서 살아가는 에이먼이 왜 이 대낮에 샤워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한창 근무시간에 말이다. 거기다 왜 세르게이가 에이먼이 샤워를 하는데 핸드폰을 대신 받아주는 거냐?

대체 당신들, 방금 뭘 한 건데?

라고 묻고 싶은 걸 꾸욱 참으며 패닉 상태에 빠진 진은 눈을 부릅뜬 채 머리를 굴렸다.

세르게이 에이먼의 동업자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이 같이 만든 쇼도 꽤 많고, 러시아로 수출되는 에이먼의 프로들은 대부분 세르게이의 채널로 수출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한 지가 벌써 5년이 넘었다고 하니, 가까운 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왜 에이먼이 세르게이에게 핸드폰을 맡겨두고 샤워를 하는 걸까?

대낮이라지만 어쩐지 ‘샤워’라는 어감에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무엇보다 세르게이의 어투가 상당히 미심쩍었다.

에이먼, 당신 인형으로는 모자라 살아있는 인형을 구한 거야? 그것도 하필 세르게이 네브즐린을?

「무슨 헛소리야, 당신? 왜 남의 핸드폰을 받아? 진, 왜?」

다행히 진이 더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기 전에 에이먼이 나타났다.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진은 천천히 에이먼에게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왜 당신 핸드폰을 받아?”

「샤워하는 사이에 자기 마음대로 받은 거야. 왜?」

샤워했단다. 당당하게 샤워를 했단다!

“……에이먼은 왜 샤워를 한 건데?”

어쩐지 돌아올 답이 무서워 진은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물었다. 사실은 그 답을 듣기도 무섭지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에이먼의 답을 기다리는데 에이먼이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생뚱맞은 목소리로 답한다.

「아, 잠깐 수영하러 왔어. 몸이 무거워서. 그게 왜…… 아, 또 세르게이가 헛소리한 거야?」

헛소리한 건 없다.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물론, 잔뜩 이상한 어조로 말이지만.

“아, 아니. 이 시간에 샤워를 한다니 이상해서. 저번에 주문한 옷이 도착했거든. 언제 갖다 줄까 해서.”

진의 그 말에 에이먼의 목소리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 그럼 오늘 갖다 줄 수 있어?」

“응. 차에 있어. 퇴근할 때 갖다 줄까?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계속 사무실에 있을 거야.」

“그럼 7시쯤 들를게.”

「그래. 고마워. 수고.」

“응.”

핸드폰을 끊으며 다시 의자에 앉은 진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수영이야 같이 다닐 수도 있다지만, 세르게이의 말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거기다 에이먼이 세르게이가 헛소리를 했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건 그 헛소리가 아무래도 세르게이의 어조를 의미하는 말 같은데…….

“대체 무슨 사이야?”

세르게이와 에이먼이라니 절대 안 어울린다. 뭔가 안 맞는다. 세르게이의 취향이 금발벽안에 깐깐한 타입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에이먼은 진짜 아니다. 둘 다 상당한 거구에 성격도 만만치 않다.

“케이블 공화국의 황제와 인신매매 비즈니스계의 황제라…….”

혼자서 작게 중얼거리던 진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세르게이야 워낙에 이상한 사람이니 그 사람의 어조 같은 거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걱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오히려 간섭하면 에이먼이 싫어할 거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제 자신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나날들이었다. 안정되고 편안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에이먼에게 들르기 위해 막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쾅- 하며 문이 열렸다. 막 재킷을 입으려던 진은 인상을 쓰며 문 쪽을 돌아봤다.

“너, 노크도 할 줄 모르냐?”

갑작스러운 블리스의 난입이 불쾌한 듯 진이 퉁명스레 내쏘자 블리스가 다시 쾅- 하고 문을 닫으며 진에게 다가선다.

“너 무슨 소리야?”

“노크 좀 하라고.”

“회사 관둔다며?”

“응. 아, 맞다. 너한테 미리 말해야 하는 걸 깜빡했다.”

그제야 그 일이 떠오른 듯 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블리스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진을 바라본다.

“뭐하자는 거야? 연봉 올려줘?”

에반이 한 것과 똑같은 질문에 진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나 싶어 귀찮다는 듯 툭하니 내뱉었다.

“에반한테 얘기 못 들었어?”

“그냥 관둔다고 했다며?”

“연봉이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 될 거라니까. 문학 선생님.”

재킷을 다 걸치고 셔츠 깃과 소매부리를 재킷 밖으로 꺼내 정돈을 하던 진이 태연하게 답하자 블리스가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을 해 보인다.

“갑자기 문학 선생님은 왜?”

“그냥. 글에는 소질이 없지만 문학은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하자는 거지.”

“난 진짜 글에는 재능이 없거든.”이라고 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클랜보다야 낫지만, 사실 자신이 글을 쓴다고 덤비는 건 작가들에게 너무 모욕적인 일이기에 일찌감치 노선을 비서직으로 바꿨는데 지금은 애들에게라도 문학을 가르치고 싶었다. 재능은 없지만 아는 건 많이 안다.

“다 좋아. 다 좋은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나도 최근에 안 건데, 난 아무래도 교사의 피가 끓어 넘치는 것 같아. 막 가르치고 싶어.”

엘레나와 클랜, 재키의 경우만 봐도 진은 자신은 아무래도 말썽쟁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천성에 맞는 것 같았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자신의 한 마디가 그들의 사소한 습관 하나, 의식 하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상당히 기뻤다. 그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들 하나하나를 신경 쓰고 가르치는 과정은 꽤 즐거웠다. 무엇보다 재키가 12센치 힐을 신고 안 엎어졌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채였다. 그리고 엘레나도 영어 공부에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나 안 보려고 퇴직하는 건 아니고?”

“무슨 소리야? 너랑 나랑 어떻게 안 보고 살아? 줄줄이 아는 인간들이 몇인데. 이제라도 하고 싶었던 일 하려고 하는 거야.”

진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항상 움츠리며 숨어들던 소극적인 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주장하려는 그 작은 몸짓에 블리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뭐, 네 결정이라면 존중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나한테 먼저 말해줬어야지.”

에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게 영 섭섭하다는 듯한 블리스의 말에 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결정을 했거든. 이런 문제는 다른 사람하고 의논해봐야 머리만 복잡해지더라고. 어차피 한 달 정도 기간을 두고 인수인계 다 하고 나갈 거야.”

“……어쩔 수 없지. 그럼 아파트는?”

“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 지금 에이먼한테 가봐야 돼. 너 저녁에 약속 있잖아.”

“어이, 지금도 이런데 너 퇴직하면 우린 언제 보자는 거야?”

“이젠 내가 시간이 날 테니 널 기다리면 되지. 시간 정해서 데이트도 해보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신비감이 없잖아. 얼굴 보기 힘들어야 데이트할 때 헤어지기도 싫지.”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의 앞에 선 진은 블리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돈 벌어, 블리스.”

“응?”

“나 당분간 거지 될 거거든. 많이 벌어.”

이미 벌지 않아도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의 재산은 있지만 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의 노후를 생각해서라도 블리스가 성공하는 쪽이 좋다. 자신은 어차피 평생 박봉 선생으로 살아갈 테니까.

“나더러 널 벌어 먹이라는 소리냐?”

“응.”

“뭐, 그야 더없이 바라는 바지만……. 앞으로 너무 보기 힘들잖아.”

“매일 데이트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진은 블리스의 입술에 슬쩍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떤 것이든 자신에게 최선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로, 무조건 향해갈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후회 없이 살도록, 이 짧은 생을 행복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만은 위해 살기로 결정을 내리자, 어깨가 가벼워졌다.

더없이 날아갈 듯 마음이 가벼웠다.

슬픔은 여전히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 그런 아픔 하나는 품고 살아간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자는 생각뿐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된 이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닥칠 노먼의 납치 사건과 탈옥한 이반, 그리고 무서운 십대 알렉산드르와의 조우를 상상도 못한 채, 진은 행복하게 웃었다.

어차피 그건 한참 후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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