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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2 (12/13)

Chapter12

「진, 어디 있냐?」

화창한 금요일 오후,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나온 대넌의 고함소리에 블리스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수요일 아침부터 시작된 진을 찾는 전화가 금요일이 되어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전화 바꾸지 말라고 비서에게 얘기를 해뒀지만, 대넌이 상대다 보니 비서들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잠깐 여행 갔어요. 왜 그러시는데요?”

「진이 없으니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잖아! 클랜 녀석이 사고를 쳐도 뭔가 칠 것 같단 말이다! 겨우 브루스도 클랜을 사위로 인정했는데 아주 불안하다고!」

돼지 멱이라도 따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대넌의 목소리에 블리스는 아예 수화기를 멀리 떼고 느긋하게 답했다.

“그 녀석 인생이니 알아서 살라고 두세요.”

「그게 안 되니 문제지! 내가 설마 사돈에게 이렇게 벌벌 떨 줄은 몰랐다. 그래, 진은 대체 어딜 간 거냐?」

“알면 사람 보내서 불러오시게요?”

「그게 아니라도 일단 확인은 해야지. 이런 일이 없던 애가 이러니까 불안하잖아.」

“클랜을 알몸으로 내쫓고 일 년 동안 연락이 없었어도 걱정 안 하셨잖아.”

「그 녀석은 원래 그런 놈이고.」

“하여간, 저도 모릅니다. 모처럼의 휴가니 그냥 두세요.”

「그러니까 왜 갑자기 휴가냐고? 너, 바람피웠냐?」

“……끊죠.”

「그럼 그 애가 왜 갑자기 휴가를 내고 사라져? 지금 사라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진이 없으니 뭐가 일이 안 되잖아.」

“결혼식 준비는 다 끝났고, 중요 사항은 메일로 지시를 전부 내려놨어요. 행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행사가 문제가 아니라, 걔가 없으면 불안하다고.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냐?」

“잠깐 쉬러 갔으니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인데 대체?」

“진의 사생활이라 말 못합니다.”

「역시, 네가 바람피운 거냐?」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너로.」

“끊죠, 저 바쁩니다. 그리고 제발 이런 사적인 일로 전화하지 마세요. 진은 잘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네 놈 말을 어떻게 믿어?」

순간 블리스는 “그렇긴 하네요.”라고 작게 대꾸했다. 대넌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이해한다. 자신이라도 자기 같은 아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나 뒤통수를 맞고도 아들이라고 무조건 믿는다면 그건 대넌이 진짜 은퇴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행이었다, 진짜. 대넌은 아직 멀쩡하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좀 멀쩡해줘야 한다.

“저 지금 바쁩니다. 오늘 내로 일 다 처리해야 해요. 그럼 끊겠습니다.”

「블리스!」

블리스는 이번엔 답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비서를 연결해,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출장 갔다고 하라고 하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진이 사라진 지 사흘째였다. 진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다. 확인할 것도 뭐도 없이 당연히 그곳에 갔을 것이다. 그래서 사라의 부친에게 연락을 해 필요한 정보를 모두 내주라고 말해뒀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모르길 바랐다. 진이 아는 게 좋을지, 모르는 게 좋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희망이 필요한 법이니까. 

멍하니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던 블리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놀라 다시 시선을 들었다. 혹시 진이 온 건가 해 문을 바라보고 있자 쾅 하며 문이 열리곤 산발을 한 엘레나가 사무실로 달려 들어온다.

지난 사흘 내내 가장 열정적으로 진을 찾던 엘레나의 등장에 블리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화를 안 받았더니 이젠 직접 찾아왔다. 그렇다는 건 이제 곧 다른 사람들도 찾아올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골고루 한다, 진짜.

“넌, 또 뭐야?”

“진, 어디 갔어요?”

“휴가.”

“그러니까 어디로요?”

“나도 몰라. 나가라, 난 바쁘다.”

블리스가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일부러 바쁜 듯 손을 움직이자 엘레나가 바로 블리스의 앞으로 다가와 책상을 탕- 하니 내리친다.

“당신이 납치한 거죠?”

책상의 상판이 가볍게 울려댈 정도로 내리친 엘레나의 힘에 블리스는 인상을 쓰며 엘레나를 돌아봤다.

“그건 나름 창의적인 발상이군.”

“나도 다 알아요! 우리 사이를 방해해서 갈라놓으려는 거죠? 오빠도 노먼하고 데이트하라고 하고, 당신은 진을 납치하고!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 말아요!”

갑자기 여기서 노먼이 왜 나오나 했지만 블리스는 재빨리 그 생가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저 쪽이야 뭘 하든 알 바 아니다. 엘레나나 세르게이가 노먼하고 데이트를 한다 해도 상관없다. 이쪽에만 피해 안 주면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이 김에 그 민폐덩어리를 저 쪽에 넘기면 이쪽으로서는 브라보를 외칠 일이다.

“방해한 적 없어. 그리고, 진은 널 사랑하지 않아. 됐지? 이게 가.”

태연자약한 블리스의 태도에 엘레나는 조금 약이 오른 듯 불을 불렸다. 

“진짜 어디에 있어요? 걱정돼서 밥도 못 먹겠잖아요!”

그 말에 블리스가 진지한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본다.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애 치고는 혈색이 지나치게 좋다. 그러고 보니 살도 좀 찐 것 같다. 아주 볼이 터지려고 한다.

“그런 말은 네 입술에 붙은 솜사탕이나 떼어내고 해라. 모델이 웬 단 걸 그렇게 좋아해? 그리고 왜 이렇게 살이 쪘어? 너 허리 제로 사이즈 넘어갔지, 지금?”

블리스는 모델계의 잔혹한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최고의 모델이라 치켜세워줘도 내일 당장 허리 살이 살짝 보이면 살쪘다고 밀어내는 세계다. 디자이너가 총애하는 몇몇 모델 외엔 수퍼모델이라 해도 대부분이 오디션을 통과해야 하는데, 제로 사이즈 모델을 추방하자느니 어쩌니 해도 살집이 잡히면 당장에 퇴출시킬 업계다. 이 미국 안에 13-16세 사이의 제로 사이즈 모델들은 넘치고 흐른다. 전 세계에서 모델의 꿈을 품은 어린 미녀들이 미국을 향해 날아온다. 선택의 폭이 그렇게나 넓은데 굳이 한 사람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지젤 번천이라도 허리 살이 잡히면 퇴출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세계다. 어쩌면 몸이라는 것이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가장 잔혹한 곳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엘레나가 톱이라 해도 1년이나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허리 살까지 찐다면 당장에 퇴출이다. 에이전시에서도 손을 놔버릴 거다.

너 이제 어쩌려고 그러니, 라는 얼굴로 블리스가 엘레나를 바라보자 엘레나가 산발을 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당당하게 답한다.

“모델 관뒀어요. 살쪘다고 난리치길래 총 들이밀었더니 도망쳤어요. 한 번만 더 살쪘다고 먹을 거 빼앗아 가면 그 에이전시 다시는 일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했어요.”

“너 포드(ford) 소속 아니야?”

“맞아요.”

“뉴욕 패션쇼는 그쪽이 주름 잡고 있을 텐데?”

“건물에 폭탄 터트린다고 했어요.”

농담이겠지, 라고 하려던 블리스는 엘레나의 진지한 얼굴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얘는 진심이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하여간 나가. 나 일해야 돼.”

“진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가죠! 전화도 꺼져 있고, 집에도 없고, 위치 추적도 안 되잖아요!”

당당하게 불법적인 위치 추적을 하고 있다고 밝히는 엘레나를 보며 블리스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팔짱을 꼈다.

“너, 지금 네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있는 불법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 거 알고 있는 거냐? 수정 헌법 100조가 발표된 지가 언젠데 그런 짓을 하고 있어?”

블리스의 말에 엘레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뭔가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순간 블리스는 얘가 ‘침해’ ‘불법’ ‘수정 헌법’등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쉽게 설명해주었다.

“너 범죄자라고.”

가장 리스크가 큰 단어를 골라 그렇게 말하자 엘레나가 더 얼빠진 얼굴을 한다.

“그게 왜요?”

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밀매를 하고 있는 마피아 보스에, 큰 오빠 역시 쇼비지니스계에서 일을 하지만 그 아래로 러시아 여자들을 밀반출(?)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세르게이에, 셋째 오빠는 장기 매매와 마약 밀매로 형을 받은 범죄자에, 본인도 대낮에 총 들고 설치다 사회봉사 명령까지 받았는데 그게 뭐가 대수겠냐 싶어, 블리스는 역시나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래.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가. 집에 가서 책이라도 한 자 더 읽어.”

“아씨! 진 목소리만이라도 들어야죠. 불안해 죽겠단 말이에요. 우리 집에서 가정교사 하던 사람들도 막 납치되고 그랬는데……. 저번에 우리 집 다녀간 뒤로 사라졌으니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걱정 마, 진은 잘 있을 테니까.”

“역시, 당신이 납치한 거죠? 이런 소아성애자 같으니!”

“……너, 그게 무슨 말인지나 알고 쓰는 거냐?”

“나쁜 사람들한테 하는 욕이잖아요!”

순간 블리스는 마피아들한테도 소아성애자는 나쁜 놈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기와 인신매매 및 마약 밀매와 장기 매매, 거기다 대량 살상도 자행하는 러시아 마피아들이 나쁜 놈이라고 할 정도니 진짜 나쁜 놈들이긴 한가 보다.

“……하여간 나 바쁘다. 나가. 경비원 부르기 전에.”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그럼 내가 사람들 보내서 데려올 테니까.”

“휴가 간 사람을 왜 불러와?”

“그럼 그냥 알아둘 테니까 어디 있는지만 알려달라고요.”

“그만 가.”

“……사실은 당신도 모르는 거죠?”

의심스럽다는 듯한 엘레나의 질문에 블리스는 귀찮아 그냥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래, 몰라. 그러니까 네가 찾아 봐.”

“블리스, 이런 남자인 줄 몰랐어요! 진이 납치를 당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니! 역시 진은 납치당한 거야. 어떻게 해. 불쌍한 진!”

진과 엘레나가 왜 잘 맞나 했더니, 이런 점이 비슷하다. 둘 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래, 그러니까 나가라. 네 아버지나 오빠들한테 찾아달라고 해.”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한 블리스는 다시 바삐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 말을 쉽게 넘기지 않았다.

“아버지나 오빠요?”

“그래.”

그 사람들이라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금세 찾아낼 것이다. 특히나 세르게이가 하는 인력사업-사실은 인신매매에 가까운-의 네트워크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계속되는 전쟁 등으로 남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러시아 특유의 기후 덕에 여자들이 워낙에 피부가 희고 팔 다리가 길고 늘씬늘씬해 전 세계로 여자들을 팔아먹고 있으니, 그만큼 조직망도 튼튼할 것이다. 러시아 모델이나 다른 나라로 국제결혼을 알선 받아 가는 이들은 모두 세르게이를 통해야 한다.

블리스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레치카 구로바.”

순간 엘레나가 무서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건 호시탐탐 네브즐린 가를 노리는 러시아 마피아의 보스 이름이었다. 네브즐린 가가 기업형 마피아로 구 소련의 붕괴 이후 해산된 KGB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면 레치카 구로바는 러시아의 경제 발전과 함께 떠오른 신예 마피아세력이었다. 레치카 구로바는 50대 가량의 나이로 10년 전쯤 미하엘 네브즐린의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그 뒤로 절치부심의 노력으로 다시 네브즐린 가를 노리다, 5년 전엔가 네브즐린 가의 셋째인 이반 네브즐린을 장기매매 알선으로 실형을 받게 한 대가로 세르게이 네브즐린에게 잡혀 죽을 뻔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는 한 동안 조용하다 들었는데, 왜 갑자기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엘레나, 너 지금…….”

“걱정 말아요. 제가 진을 다시 찾아올게요. 레치카 구로바,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오빠가 그 사람도 없으면 너무 심심하다고 밟아만 준 게 문제예요. 알렉산드르 말대로 온 몸에 구멍을 내 죽여 버렸어야 했어요.”

엘레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나며 섬광을 발한다. 순간 블리스는 진짜 핏줄은 못 속인다는 생각을 했다. 저 집 남매들 모두 보통은 넘는다. 한 명 예외가 있기 하지만 그 남자는 워낙에 자란 환경-그 사람만 유일하게 외가에서 자랐다고 들었다.-이 좋았으니 예외로 쳐야 한다. 핏줄과 환경은 속일 수 없다. 엘레나가 마피아가 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세르게이보다 더 거물이 될 수도 있다. 

엘레나의 무식함과 무대뽀라면 가능하다.

새로운 여자 보스의 탄생인가 하며 블리스가 엘레나를 바라보는 사이, 엘레나가 결의에 찬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본다.

“제가 반드시 진을 구해올게요.”

“응?”

“그럼 전 가요.”

라며 엘레나가 순식간에 다시 문을 달려 나간다. 키가 커서 참 빠르기도 하다, 라고 생각을 하던 블리스는 잠시 후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러시아 마피아들 사이에 전쟁의 불씨를 일으킨 듯했다.

미하엘 네브즐린과 레치카 구로바라…….

“……알아서 하겠지.”

지금 남의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 내로 이 모든 사항들을 처리해야 한다. 에반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빌고 또 빌어 받아낸 시간이었다. 물론, 다녀온 뒤에 복수는 두 배로 해주겠지만 말이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화면을 바라보는데 다시 한 번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인간이 있었다.

“진, 어디 갔냐?”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고함 소리에 블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까마귀, 조용히 좀 나타나.”

까마귀라 불리면 경기를 일으키는 다니카가 이번에는 그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절실했다.

“진, 어디 갔냐고? 노먼이 난리잖아. 에이먼도 나한테 전화를 해서 혹시 아냐고 묻고! 애를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내가 세르게이냐, 라고 말하려다 블리스는 인상을 쓰며 말을 돌렸다.

“안 죽었어. 안 죽고 살아있으니 돌아가.”

“그럼 어디 있는데?”

“내가 밤에 데리러 갈 거야! 그러니까 제발 좀 나가라. 일 좀 하자. 일을 해야 끝내고 모시러 가지!”

“어디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

“내가 가야 돼. 제발, 그러니까 일 좀 하자.”

일을 몰아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계속되는 사람들의 전화에 블리스도 짜증이 극에 달했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한 시간 단위로 전화를 해서 사람을 괴롭힌다. 

“까마귀, 그만 가라. 여기 놀이터 아니거든?”

“대체 어딜 간 건데? 그건 알아야 가지.”

“그런 게 있어.”

“뭐가? 너 바람피웠냐?”

“왜 다들 얘기가 거기로 가?”

“안 그러면 진이 갑자기 휴가를 내고 뜰 리가 없잖아. 네가 데리러 간다는 것도 수상하고. 아무리 봐도 이상해. 그 꼼꼼한 녀석이 이런 거사를 앞두고 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사실대로 말해. 너 바람피웠지?”

라며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드는데 바람피웠다간 그대로 링 위에 세워두고 샌드백처럼 두들길 기세다.

“바람 안 피웠어. 그런 사정이 있어.”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뭐냐고?”

“진 사생활이라니까! 왜들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블리스가 성질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다니카가 아닌 다니카의 뒤에서 문이 열리며 느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의 사생활이 아니니까 그렇지.”

문틈으로 진한 회색빛의 로로피아나 정장을 입은 에이먼이 들어선다. 그를 보는 순간, 블리스는 아까 엘레나가 달려 들어오던 순간 예감한 것이 서서히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를 갈았다. 엘레나 왔고 까마귀 왔다. 그리고 에이먼도 왔으니 이제 클랜하고 재키, 그리고 클레어와 클레어의 약혼자인 맷, 그리고 사라가 남았다. 어쩌면 노먼도 달려올지 모른다. 거기다 브루스와 세르게이까지 온다면 더는 참지 못하고 회사 문 닫아버릴 지도 모른다.

블리스는 기본적으로 돈도 안 되는 고객들이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걸 상당히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형은 또 왜 왔어? 안 바빠?”

“바쁘지. 겨우 시간 내서 온 거야. 대니, 앉자. 블리스, 너도 이리 와.”

“나 바빠. 말했잖아. 미치게 바쁘다고.”

“좀 바쁘다고 안 미쳐. 바쁘다고 미치면 애클랜드 저택은 정신병원이냐? 와서 앉아.”

사무실 안의 놓인 소파고 가 앉은 에이먼이 그렇게 말하자 에이먼의 말에 따라 얌전히 그 옆으로 다가가 앉은 다니카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 비슷하긴 하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는 다니카를 에이먼이 슬쩍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다들 개성도 강하고 한 성격씩 하는 통에 가족들이 모두 저택에 모여 있을 때는 늘 시끌벅적하긴 했었다. 클랜은 사고치고 블리스는 그런 클랜을 더욱 부추겨 아버지를 열 받게 만들고, 클레어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은근히 동조하고, 에이먼은 혀를 차며 그들을 지켜보다 나중에 같이 걸려들면 머리에 핏대 세워가며 자긴 결백하다고 아버지와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클랜드 저택에 초대를 받은 이들의 대부분이 다시는 그 집을 찾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긴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두 애클랜드 사 남매를 부러워했다. 유산상속 문제로 사교계를 시끌시끌하게 만드는 일도 없고, 네 남매 모두 외모며 능력-본인의 바람과는 무관하게-이며 성격이며, 어디 하나 빠질 데 없이 출중했다. 재클린과 클랜의 결혼소식에 사교계 아가씨들이 모두 재키가 부러워 몸 져 누울 정도로 애클랜드 가는 사돈 맺고 싶은 가문 1위에 랭크된 집안이었다.

큰형의 명령인지라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와 앉은 블리스는 앞에 앉은 에이먼과 다니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뭔데?”

“너, 바람피웠냐?”

대넌과 다니카와 약속이라도 했는지 에이먼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자 블리스는 입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다들 내가 바람피우길 바라는 모양이군.”

블리스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하자 순식간에 다니카의 표정이 굳어진다.

“피워봐. 남아공 우리 광산에 처박고 묻어버릴 테니까.”

“그럼 왜 이렇게 난리들이야?”

“그게 아니면 그 꼼꼼한 녀석이 증발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지!”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그냥 둬.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무슨 정리냐고?”

더는 못 참겠는지 다시 고함을 내지르는 다니카를 보며 블리스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까마귀, 귀 아프다. 네 목소리 진짜 너무 데시벨이 높아.”

“그럼 말해!”

말 안했다간 멱살을 쥐고 그대로 이 사무실 창밖으로 내던질 다니카의 기세에 블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실직고 했다.

“한국에 갔어.”

순간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에이먼은 조용히 블리스를 응시했고 다니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블리스와 에이먼을 돌아보다 다시 블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거긴 왜?”

“……어머니랑 동생을 찾았어.”

“잘됐네, 그거!”

다니카는 왜 그런 좋은 소식을 안 알려주려 했냐는 듯 의아한 듯 블리스를 바라봤지만 에이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블리스에게 물었다.

“그 소식, 너도 알고 있었냐?”

“응. 형도?”

“혹시나 해서 5년 전쯤 조사해봤어. 클레어도 얼마 전에 알았다며 펑펑 울면서 전화했더라고. 아마, 클랜도 알고 있을걸.”

다른 건 몰라도 생각하는 건 비슷한 남매들이었다. 언젠가 언젠가라고 막연히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생각나는 즉시 행동하는 추진력도 비슷하다.

“내가 이겼네. 난 10년 전이니까.”

“사라도 알아?”

“응.”

“아버지는?”

“아버지만 모르실걸.”

“저런. 아버지는 여러모로 외톨이로군.”

자신의 부친에 대한 연민을 늘어놓으면서도 에이먼의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저게 진짜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얼굴인지 고소해 하는 사람의 얼굴인지 잘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언제나 그런 에이먼의 단점을 지적하던 다니카는 이번에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에이먼을 바라봤지만, 이내 블리스를 바라보며 자기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이 상황에 대해 물었다.

“뭔데? 뭘 알았는데?”

“진이 돌아오면 직접 들어. 우리가 할 말이 아니니까.”

“궁금하게 해놓고 진에게 들으라니! 너희들 자꾸 이럴래?”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다니카의 성미를 잘 알기에 에이먼이 다니카를 돌아보며 달래듯 말한다.

“대니,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가족의 아픈 구석을 함부로 말하는 게 아냐. 신나서 남의 불행을 떠들어대는 건 저열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리고 이건 특히나 우리가 함부로 말할 사항이 아냐. 진이 돌아오면 직접 들어.”

“아픈 구석이라니? 혹시 어머니랑 동생이 죽기라도 한 거야?”

“……직접 들어. 충격이 꽤 컸을 테니까, 돌아오면 너도 잘 달래주고.”

“아, 대체 뭐냐고? 나 다음 주에 출장간단 말야.”

“그럼 나중에 들어. 블리스, 넌 언제 데리러 가려고? 어디 있는지는 알아?”

“대강.”

“내 전용기 써. 그리고 잘 달래서 데려와라. 클랜이나 클레어한테는 말하지 마. 클레어 알면 또 종일 울겠다.”

“알았어.”

블리스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에이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간다.”

“가. 까마귀, 너도 좀 가.”

에이먼에게 답을 한 블리스가 다니카를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말하자 다니카 역시 신경질적으로 받아친다.

“간다, 가! 나라고 네 얼굴 쳐다보고 있는 게 기분 좋은 줄 알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다니카가 에이먼의 뒤를 따라 움직이자 블리스는 그제야 드디어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드디어 일을 끝내고 공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서는 걸 확인한 블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다. 예상했던 바라 블리스는 천천히 문을 돌아봤다.

“올 거면 한꺼번에 와. 왜 차례대로 와?”

문을 돌아본 블리스는 예상 대로 문 앞에 선 문제의 두 명을 보곤 팔짱을 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는 클랜을 보며 블리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너라면 받고 싶겠냐?”

“진 어디 갔는지 아직도 몰라?”

“몰라.”

결혼식 이틀 전에도 여전히 진을 찾아 삼만 리 헤매고 다니는 클랜에게 딱 잘라 블리스가 모른다고 말하자, 옆에 따라오 클랜의 반토막만한 재클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블리스에게 묻는다.

“우리 때문에 화나서 집 나간 거야?”

“알긴 아는구나.”

주원인은 그게 아니지만 클랜과 재키의 말썽도 한 몫한 게 분명해 블리스가 딱 잘라 말하자 재키가 시무룩해진다.

“그보다 재키 너, 다이어트 좀 하는 게 어때? 웨딩드레스가 들어가긴 해? 며칠 전보다 더 찐 것 같은데?”

아주 살이 올라 토실토실한 재키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재키가 더 시무룩해진다.

“내가 살 쪄서 휴가 간 거야?”

“응.”

“나 살 빼면 온대?”

“결혼식에는 참석할 거야. 그러니까 드레스는 들어가게 조절해. 당일 네 드레스의 옆구리가 터지면 진이 너희 둘을 폭죽에 묶어서 쏘아올려버릴 테니까.”

진이 안 하면 자신이 할 것 같아, 블리스가 진지한 투로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클랜이 재키를 돌아보더니 시비를 거는 듯 내뱉는다.

“무슨 소리야, 그게? 임산부한테.”

“너희가 한 짓들을 생각해 봐. 생각이 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어떻게 웨딩드레스가 안 들어갈 정도로 살을 찌워?”

“임산부니까 잘 먹어야지! 우리 애 잘못되면 형이 책임질 거야?”

“그런데 왜 배는 안 나오고 옆구리로 찌는데? 식장에서 드레스 입는데 헐크 나오게 하지 말고 체중 조절하고 준비나 잘해. 진은 곧 돌아올 거야. 오자마자 혼나지 말고.”

“진짜 온대?”

“올 거야. 그러니까, 그만 가. 나 바빠.”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진이 사라졌는데 아무렇지 않다니!”

버럭 고함을 내치는 클랜의 재키가 잡아끈다. 그러더니 클랜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인다. 매미가 고목나무에 매달려 소곤거리며 뭔가를 말하자 순간 클랜의 눈이 번쩍인다.

“설마…… 형, 바람피운 거야?”

오늘 하루 종일 하도 들어 이제 블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짜증이 날 뿐이다.

“……꺼져.”

“그럼 뭔데?”

“그런 사정이 있어. 진 돌아오면 직접 들어. 셋 셀 때까지 안 나가면 경비원 부른다. 하나, 둘.”

“아, 알았어! 간다, 가! 하여간 멀쩡하다 이거지?”

“그래. 그러니까, 좀 가!'

“알았어. 재키, 가자. 몸조심해.”

겨우 임신 3개월에 나이도 어려 펄펄 나는 어린 신부가 엎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데리고 나가는 클랜의 꼴에 블리스는 혀를 찼다. “썩을 것들.”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진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려 했다. 순간, 저 멀리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노크씩이나 하는 게 아무래도 노먼 같다. 사라와는 오전에 통화했으니 사라는 아니다. 노먼이 무례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깍듯이 지킨다.

“네.”

짧게 답하며 다시 화면을 보는데 끼익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블리스는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험악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진, 안 죽었어. 그러니까 꺼져.”

“……진이 다쳤나?”

묵직하고 낮은 음성에 블리스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앞을 올려다봤다.

“아, 존.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종일 불청객들이 많아서요.”

“무슨 일이라고 있나?”

“제 비서가 한국으로 휴가를 가는 바람에 다들 난리가 나서요. 워낙에 유능해야죠.”

블리스는 부드럽게 말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마주잡는 백발의 노신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는 애써 웃으며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할 일이 줄어들었음에 환호했다. 아무래도 일이 너무 잘 돌아가는 듯했다. 진이 빨리 자기 찾으러 오라고 기도라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시죠?”

“이건 뭐야?”

콘크리트를 깔고 깔끔하게 개조한 개울을 바라보며 진은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틀 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연락을 해온 고아원 선생님을 만나러 택시를 타고 안양으로 향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은 그녀와 거기서 한참 이야기를 하고, 그녀가 건네준 집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그 날로 강원도로 내려오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결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짐을 챙겨들고 호텔을 나와 안양역에서 기차를 차고 춘천으로 향했다. 표를 어떻게 사야 하는 건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결국 오후 기차를 타고 내려와 춘천역에서 또 한 바탕 헤맨 뒤에 바보 같이 지갑까지 잃어버릴 뻔하는 촌극을 연출하며 겨우 겨우 택시를 타고 홍천으로 왔다. 하지만 역시나 시간이 늦은 데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기도 힘들어 호텔에 짐을 풀고 식사를 한 뒤 메일을 확인했다.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다는 사람들의 메일을 하나 하나 확인하고 최종점검에 대한 세세한 부분을 설명해 메일을 보낸 뒤 아침 일찍 찾아온 곳에서 진은 멍하니 강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다, 이번엔 뒤돌아 낮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동네를 바라봤다.

관공서에 들러 물어보니 그 집은 이미 재개발에 들어가 집이 모두 허물어졌다고 해 집은 포기하고 왔는데, 설마 그 개울까지 이렇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하얀 자갈들도, 매미 소리가 없다. 저 멀리 보이던 산은 어디로 갔는데 그쪽에는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너무 변했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근 이틀간에 걸쳐 겨우 찾아온 곳에서 본 광경에 진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온 것인데, 충동의 결과는 이런 거였다.

뭔가 충격적인 기분에 진은 멍하니 고요히 흐르는 개울을 바라봤다.

여름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 자갈들도 시원하게 흐르던 개울물도 없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겠네.”

진짜 무작정 사고를 치고 나와 항국행 비행기에 올라타 여기까지 온 대가가 이거라니 허망하고 또 허무했다. 사실 이번에는 진짜 내 마음 가는 대로 한 번 해보자, 하고 나왔지만 비행기를 타는 순간 솔직히 이대로 가도 되나, 안 되나 내심 조마조마했었다. 클랜과 재키의 결혼식도 끝나지 않은 채 무작정 떠나와 마음이 무겁다기보다 두근두근거렸다. 회사 역시 무단 결근이니 해고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순간 이제 뭐 먹고 사나 하는 생각에 진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순간에조차 현실적인 자신이 싫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 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가볍게 며칠 오갈 생각으로 여행용 백에 간단한 옷과 현금, 그리고 여권만 챙겨 나온 채였다. 

한국의 물가가 의외로 높아 돈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어쩌면 노먼의 말대로 자신은 진짜 심하게 감성이 떨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련한 향수나 슬픔을 느낄 줄 알았는데 그냥 황당하다.

공포영환지 알고 봤는데 멜로 영화더라, 할 때의 기분 같았다.

멍하니 강을 바라보던 진은 다시 걸음을 돌려 길을 향해 나갔다. 보고 싶었던 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광경이었다. 콘크리트로 가득 찬 개울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하얀 자갈밭도 매미 소리도, 여름의 녹음도 없는 그곳은 더 이상 자신이 기억하는 그곳이 아니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길고 긴 시간이 흘러 남은 것은 추억뿐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진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 오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다. 모든 게 변화하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막이 터지며 세계가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변화하는 건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서영진이라는 이름보다 진 케이먼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고, 지금 이 자리에 선 순간에도 실직을 걱정하고 있었다.

바뀌는 건 없었다. 서영진이든 진 케이먼이든 자신은 자신이었다. 공포영화광에 소심하고 감수성 제로의 영문학도. 재능이 열정을 따라가지 못해 결국 비서가 된 불운아 같지만, 지금의 일도 나름 사랑하고 있고 누구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나 가슴 속에 한 가지 한은 품고 살아간다. 자신은 그 부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클 뿐, 잘못되지 않았다. 크냐 작냐의 차이일 뿐이다.

블리스는 열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블리스에게 물을 수는 없어 인터넷으로 이전 신문 기사들을 찾아 봤다. 아는 사서에게 부탁해 시청에 있는 신문 란에서 블리스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전후로 신문을 무작위로 카피해 보내달라고 했었는데 진이 처음에 본 것은 아주 특이한 타이틀이었다.

「죽음을 부른 사진. 기자들의 사생활 침해 이대로 괜찮은가?」

그리고 그 하단에는 둘째 아들 블리스 애클랜드의 생일 파티 준비 중 크레인을 타고 담을 넘어온 사진 기자에게서 아들을 감싸던 퍼기 애클랜드가 실수로 계단을 잘못 디뎌 목뼈 골절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당시 그녀의 옆에 있던 건 블리스뿐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블리스가 전화기를 찾으러 달려가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퍼기 애클랜드가 임신 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애클랜드 가의 대변인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본 진은 어쩌면 진짜 블리스의 다른 동생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애클랜드 사람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죽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라를 배려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너무 아팠던 기억이라 서로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꺼낼 용기가 없었던 거다. 

어쩌면 그래서 대넌이 사라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한 번 잃어본 사람은 그 아픔을 아니까, 혹시라도 같은 사건이 되풀이된다면 견디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대넌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잃어봤으니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서 늘 두려웠으니까. 또 다시 버림받을까, 다시 혼자 남겨질까, 남의 등을 보는 것도 무서워 참지 못했었으니까.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것도 아주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뒤돌아서 힘없이 팔을 늘어트린 진은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자박거리는 가벼운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무서워 차마 돌아보지도 못한 진은 그대로 멈춰선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축 늘어진 왼손에 작은 소녀의 손이 닿았다.

그 생생한 손의 감촉에 그 손을 잡으려던 진은 어느새 허전해진 손에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갈도 없었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사라졌다. 그저 방금 전 본 삭막한 광경만이 스쳐갈 뿐이었다.

하지만 손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 마치 방금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은 듯, 손바닥 안이 따뜻했다. 아주 작고 작은 소녀의 손이 스친 듯 그 손 안은 따뜻했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기억은 그곳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소녀가 있었다. 영원히 늙지 않은 채, 추억 그대로 그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자신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그들이 살아있는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멍하니 뒤를 돌아보던 진은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안녕.”

***

에반의 도움으로 간신히 시간을 빼 나온 블리스는 서둘러 JFK공항으로 향했다. 플로리다나 다른 주에 있는 별장들은 아예 활주로가 있어 오가기가 편한데, 뉴욕 근방의 저택에는 활주로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땅도 땅이지만 소음 때문에 활주로를 짓는 게 어려웠다. 아예 근방의 땅들을 모조리 사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블리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에이먼이 전용기를 준비해놓은 상태라 출발 시간은 상관없지만, 한국과의 시차를 생각해야 한다. 오후 8시가 다 되어 가는데 지금 출발하면 한국 시간으로 자정에나 도착할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을 찾는 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일단 사라의 아버지와 지인들을 통해 사람을 파견해 진의 위치를 파악하라고 해둔 상태지만 그 사람과 접선해 움직이는 데에만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한국이 작아서 다행이군.”

중국 규모였다면 아마 며칠은 참으러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한국은 차를 몰고 하루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간다니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도로망이 상당히 꼼꼼하게 잘 퍼져 있다니 진짜 다행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진을 찾아 돌아오는 게 급선무다. 사실, 진이 돌아올 거라는 건 믿고 있지만 그게 언제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진이 예약한 돌아오는 비행기가 바로 한 달 뒤라는 게 문제였다.

다른 건 몰라도 클랜의 결혼식에만은 참석해줬으면 했다. 가족으로서 꼭 와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상은 자신이 못 견딘다. 겨우 사흘 못 봤다고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항상 옆에 있었기에, 진이 없는 공간이 너무 컸다.

그리고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불청객들의 반란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사흘 안에 빼빼 말라 죽을 것이다.

들고 있던 핸드폰의 옆에 걸린 작은 장식품을 본 블리스는 싱긋 웃었다. 아마 이걸 듣는다면 당장에 달려오고 싶어질 것이다.

***

멍청했어, 라고 중얼거리며 진은 멍하니 인천 공항의 로비에 서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와 밤에 서울 관광을 잠깐 한 뒤 토요일 오전에 인천으로 와 한 달 뒤의 날짜로 예약한 항공권을 취소하고 오늘 내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을 사려는데, 없단다.

마침 휴가 기간이라 비행기 편이 석 달 전부터 모조리 예약이 된 상태라고 한다. 어떻게 자리가 안 나겠냐 해도 하루에 운행되는 비행기 편은 한계가 있고 다들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사람들인데다, 결정적으로 진 말고도 대기자 명단에 서른 명 가까이가 올라가 있다고 한다.

“돌아버리겠네.”

어쩌면 이리도 지지리 복이 없을까. 그래도 혹시나 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선불로 산 핸드폰을 든 채 공항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뉴욕과 한국의 시차는 14시간이었다. 뉴욕이 14시간 느리다. 뉴욕 직항의 경우 13시간 정도가 걸리니 여기서 일요일 오전 9시까지는 출발해야 한다. 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예식장에 도착해야 하니 반드시 9시까지는 가야 한다. 애초에 클랜 결혼식까지는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더럽게 꼬였다.

일요일 오전까지 티켓이 없으면 어쩌나 해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도 진은 안절부절 못했다. 

결혼식은 꼭 가야 한다. 클랜과 재키가 반드시 무슨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외에도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신이 지시해놓은 대로 정상적으로 업무가 돌아가고 있는지, 사라와 대넌은 진짜 화해를 했는지, 그리고 세르게이가 노먼한테 또 이상한 걸 보내지 않았는지 걱정되는 것 투성이었다.

그 동안은 자신의 소심함이 하도 버림받아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젠 그 소심함이 천성이라는 걸 알겠다. 자신은 타고나길 소인배로 타고난 인간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절대 대범해질 수는 없었을 거다.

어차피 회사는 관둘 생각이었지만 실직을 하면 당장에 뭐해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축은 꽤 있지만 그건 어지간하면 안 건드는 쪽이 좋다. 차라리 블리스의 아파트로 들어가 먹여 살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블리스에게 받은 뒤 계속해서 목에 걸고 있던 거였다. 사실은 이걸 받으면서도 자신이 이걸 끼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 반지를 낄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지를 끼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리 복잡하게 따질 거 있나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제야 저 엷은 유리막을 깨트릴 용기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좀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어중간한 채 부유하는 게 아닌, 어차피 할 거라면 확실히 해버리자라는 생각에 침대 맡에 앉아 목걸이를 풀었다. 

느린 동작으로 체인에 걸린 반지를 꺼내 왼손 약지에 끼던 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블리스……. 썩을 놈.”

***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역시나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전용기에서 내려 입국심사장에서 빠져나온 블리스는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채 선글라스 하나만 낀 채였다. 검은색의 커다란 배낭을 진 블리스는 새벽이라서인지 한산한 공항을 돌아봤다. 저 멀리 보이는 시간을 확인하니 일요일 새벽 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6시까지는 진을 찾아야 한다. 아직 뉴욕시간에 맞춰놓은 시계를 보며 다시 확인을 한 블리스는 안내원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약속장소를 찾았다. 

위성 폰으로 전화를 해 정확히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한 상대들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던 블리스는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세 명의 남자를 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블리스 애클랜드?”

조금 어려 보이는 통역사인 듯한 남자가 그렇게 묻자 블리스는 웃으며 그에게 대꾸해주었다.

“네.”

“어서 오십시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폐를 끼치게 돼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 안에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진 케이먼 씨를 찾으시죠?”

“네.”

“바로 근처에 계십니다. 혹시나 해서 알려주신 크레딧카드 번호로 추적을 하고 있었는데 몇 시간 전에 근처 공항에서 체크인을 했습니다.”

그렇게나 서로 어긋나더니 이럴 때엔 기가 차가 잘 맞는다 싶어 블리스는 그냥 웃어 버렸다. 

역시 운명의 여신이 서로를 이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내해주시겠어요?”

“네.”

언제나처럼 승리는 블리스의 것이었다.

***

“노먼, 이 망할 자식…….”

딱히 할 일도 없고 잠도 안 와 침대에 누워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한 노먼의 소설을 읽은 진은 분노를 터트렸다.

“주인공이 분열증 환자라고!”

역시 세르게이에게 팔아넘기길 잘했다고 소리치며 진은 베개를 퍽퍽 내리쳤다. 

사실 조금 감동했었다. 아니, 사실은 많이 감동했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해 완전 몰입해 울고 웃고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했는데, 알고 보니 소년이 분열증 환자였단다. 한 마디로 거울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던 정신병자였던 거다.

환상 동화인 것처럼 사람을 푹 빠지게 만들더니 막판에 사이코 호러물로 탈바꿈했다. 거기다 더 가관인 건, 소설 안의 세계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소년의 시각으로 서술해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당뇨 환자라 꼬박꼬박 시간에 맞춰 주사를 맞아야 하는 남자였고, 어머니는 창녀가 아니라 새벽조에 근무하는 간호사였다. 그리고 소년은 학대 받지 않았다. 소년이 발작을 일으킬 때 아버지가 소년을 말리려 끌어안고, 진정제를 투여하거나 발작을 막기 위해 손목을 묶어놓은 것뿐이었다. 소년이 너무나 그의 시선에서만 상황을 서술해 깜빡 넘어가버렸다.

거울을 보고 분열증이 심해지는 걸 안 아버지가 그 거울을 깨버리자 소년은 깨진 거울 조각을 들어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걸 본 어머니는 결국 소년을 정신병원에 보내고, 소년은 거울을 금지 당한다. 마지막은 유리창을 바라보며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소년의 모습으로 끝난다. 소년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나르시즘에 빠진 사이코 소년 살인마가 나오는 호러소설이었다.

“내가 정신병자냐!”

완전히 자신을 소년과 동일시했던 진은 마치 자신이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분열증 환자가 된 듯한 기분에 베개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럼 그렇지! 네가 쓸만한 짓을 할 리가 없지, 노먼 맥캐인! 세르게이한테 시집이나 가라!”

물론, 세르게이가 받아준다면 말이지만.

“역시 대학 때 저 자식을 죽였어야 했어. 살려두는 게 아니었어.”

소년을 안타깝게 여겼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듯해 아주 기분이 안 좋았다. 어쩐지 서평 중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어쩌다 해서, 당연히 소년이 겨우 유리를 깨고 넘어갔는데 그 세계가 현실보다 더 비참하다거나 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충격적 반전이라는 게 소년이 정신병자라는 거라니.

거기다 표지는 또 뭐냐. 책의 표지는 마치 환상동화집처럼 발랄하다. 여기저기가 헤지고 더러워진 누더기를 입은 작은 소년이 거울 속으로 웃으며 달려드는 그림이었다.

“이래놓고 내용은 사이코 스릴러냐? 편집자 나오라고 해! 표지 디자인 누구야?”

이걸 애들이 읽는다고 생각하니 좀 끔찍하다 생각하며 다시 표지를 보던 진은 섬뜩함에 슬쩍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표지 안에 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살벌하다.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아 보이던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에드 기인의 얼굴처럼 보였다. 게다가 소년이 입고 있는 누더기 옷에 묻은 얼룩이 지금 보니 빨간색이다. 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피 색 같다.

“……표지 잘 그렸네…….”

이 일러스트 작가는 천재야, 라고 중얼거린 진은 침대 한 가운데에 놓인 책을 보곤 슬쩍 옆을 보다, 손을 뻗으려다 휙하니 돌아앉아 다리를 뻗어 책을 툭툭 쳐 침대에서 떨어트렸다. 지금까지 제일 무섭게 본 소설이 로빈 쿡의 돌연변이(Mutation)이었는데 이번에 이 소설이 뒤집어버렸다.

오랜만에 돌연변이를 떠올린 진은 순간 몸서리를 쳤다. 어쩌면 세르게이가 그 돌연변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똑같이 생긴 동생들이 줄줄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돌연변이랑 비슷하다고 해서 바들바들 떨며 본 존 카펜터의 ‘저주받은 도시(Village of the damned)’는 솔직히 어이가 없어 비웃긴 했지만-사실 존 카펜터는 절대 취향이 아니다. 존 카펜터와 다리오 아르젠토는 왜 존경받는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조지 로메오는 찬사 받아 마땅하고 토브 후퍼와 스튜어트 고든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할 크리에이터들이지만 존 카펜터는 아동용의 선명한 화면이 점수를 반은 깎아 먹고 들어가고, 다리오 아르젠토는 항상 여자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주인공이지만, 결국은 여자들이 비명 지르는 것만 보여주다 끝난다.- 그걸 본 후라서인지 은발에 새파란 눈을 가진 세르게이 주니어들이 진짜 돌연변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존 카펜터도 그 집 아이들을 보고 그 영화를 찍은 건지도 모른다.

영화와 소설 속의 주인공 아이들은 모두 쌍둥이 같은 외모를 하고 기이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었는데, 현실 세계에서의 세르게이 주니어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기이한 취향을 가진 마피아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하엘 네브즐린은 전 세계 아이들의 얼굴을 자기 아들들 얼굴처럼 만들려고 그렇게 아들을 많이 낳은 건지도 모른다. 그 아들들이 결혼해 또 다시 그 만큼 아이를 낳고, 그 아들들이 결혼해 또 그만큼 아이들을 낳으면…….

“언젠가 뉴욕이 세르게이 주니어들로 꽉 찰지도 몰라.”

갑자기 뉴욕으로 돌아가기 싫어진 진은 서둘러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틀었다. 진짜 방 안이 조용하니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만 상상을 하게 된다.

다행히 외국 방송들이 꽤 나와 아무 데나 틀어놓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입니다.”

룸서비스를 시킨 기억이 없던 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갔다. 그리고 잠겨 있는 문을 밀어 열었다.

“룸서비스 안 시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던 진은 앞에 선 금발의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를 보곤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검지로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핸드폰을 들어 그가 늘 옆에 달고 다니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아주 작은 소형 녹음기 안에서 너무나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진, 무조건 건강히 돌아와야 된다. 마음 정리하고, 천천히 돌아와. 사랑한다.」

사라였다. 먼 거리에서 녹음을 했는지, 아니면 전화의 내용을 다시 녹음한 건지 통화감은 멀었지만 사흘 만에 듣는 영어에, 그리고 다정한 사라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진, 무조건 돌아와! 블리스가 바람을 피운 거면 내가 죽여 놓을 테니 돌아와도 된다. 건물이 싫다면 섬을 사주마!」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려는 눈치 없는 남자, 대년의 목소리가 울리자 진은 웃고 말았다. 역시나 항상 일관성이 있는 남자다.

「음…… 그래. 일단 돌아와라. 마음 정리 잘하고, 웃으면서 보자. 세르게이한테는 이상한 선물 보내지 말라고 내가 말해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무뚝뚝하고 감정이 없어 보이는 그 어조는 분명 에이먼이었다.

「진, 우리 때문에 화났지? 미안해. 그래도 빨리 돌아와 줘. 진이 없으니 어쩐지 결혼식 때 비가 내릴 것 같아. 아니면 재키의 드레스가 찢어지거나 테이블에 올라온 캐비어가 상했다거나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와. 나도 내가 불안해.」

이번엔, 이제야 내 노고를 알았냐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클랜의 음성이었다.

「어서 돌아와, 진. 사랑해.」

짤막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목소리는 클레어의 것이었다.

「진, 빨리 돌아와요. 나 영어 공부 열심히 할게요.」

라는 건 엘레나.

「어이, 형제. 내 소설 다 읽었지? 나 죽이고 싶으면 빨리 돌아와라. 단 거울을 뛰어넘을 각오는 다지고.」

라며 낄낄거리는 건 역시나 노먼이었다.

「다이아몬드 감정 끝냈어. 이거 끝내주는 상품이야. 어서 돌아와. 나도 들고 있기 무섭다. 보고 싶다.」

이번엔 다니카. 그리고 다음은…….

「진, 지금 돌아오면 다 용서할 테니 이 음성 듣는 즉시 돌아와라. 이번 주 넘기면 넌 해고야.」

화난 듯 약간 높아진 음성에 억양 역시 억세지만, 걱정스러운 듯한 그 음성은 분명 에반이었다. 에반도 역시 일관성이 있는 남자다.

“그리고 마지막.”

이라며 녹음기를 끈 블리스가 싱긋 웃어 보인다.

“나와 함께 있어줘(Here with me.).”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한 걸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보며 진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남기고 온 말은 Thank you 였다. 그리고 블리스의 인사말은 Here with me.다. 기가 막힐 정도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늘 함께 있고 싶었던 건 나였어.”

노래의 가사처럼 떨어져선 잠들 수도 떠날 수도 숨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건, 진 자신이었다.

“그럼, 돌아와 줘. 기다리다 지쳤어.”

싱긋 웃는 그 얼굴에 진은 팔을 뻗어 블리스를 끌어안았다. 그립고 그리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그리운 사람이, 지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자신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먼저 와줬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 먼 땅까지 자신을 찾으러 와줬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행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클랜의 결혼식 전에 미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전용기 타고 왔지?”

“응.”

“다행이다. 내일 아침까지 비행기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어이, 너 나보다 전용기가 반갑다는 거야? 저 먼 타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반갑고 전용기도 반갑고.”

진이 싱긋 웃으며 밝은 음성으로 그렇게 답하자 블리스가 진을 슬쩍 밀어내더니 이마를 툭 친다.

“아주 건방져졌어, 못 본 사이에.”

“결혼식엔 참석해야지.”

“좀 마른 것 같다.”

“응. 못 먹었어. 너무 더워서.”

진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블리스는 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네가 결혼식 전에 못 오면 다 날 갈아 마실 기세야.”

“널 왜?”

“다들 내가 바람피워서 네가 집 나갔는 줄 알거든.”

상상도 못했던 발상에 진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오, 그거 괜찮은데? 그렇다고 할까?”

“그랬다간 다음 날 오전 신문에 내 사체가 발견됐다고 들 거야. 그건 참아.”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블리스가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히며 삐리리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 둘뿐인 방 안에 남자 진은 슬쩍 블리스의 뒤를 돌아봤다.

“……둘뿐이네.”

“그래, 모처럼 둘뿐이다. 아무리 그것들이라도 한국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그 동안 방해를 받은 게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이를 가는 듯한 그 말에 진은 웃으며 이번엔 그가 먼저 블리스에게 키스를 했다. 가볍게 닿는 그 입술에 블리스는 진의 허리를 안으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볍게, 장난을 치듯 입을 맞추며 침대 쪽으로 간 블리스는 진을 먼저 침대에 눕게 하고는 싱긋 웃었다.

“한국까지 날아온 보람이 있는 걸?”

“이게 보람이냐? 그래도, 영어 들으니 너무 좋다.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어.”

“나보다 영어랑 전용기를 더 반가워하는구나.”

“응. 사실은 그래.”

진이 웃으며 사실대로 말하자 블리스 역시 웃으며 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뺨과 입술, 그리고 귓가와 턱에 장난치듯 키스를 남기 블리스는 진이 입고 있던 편안한 티셔츠를 밀어 올려 벗겼다. 그리고는 수월하게 바지를 끌어내렸다.

“트레이닝복이 이럴 때 이렇게 편한 줄 몰랐어. 아주 좋은데?”

“네 옷은 벗기기 힘들어.”

블리스의 셔츠 단추를 풀며 진은 웃었다. 모처럼 방해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의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을 그냥 넘긴다면 바보다.

“저번에 네가 못 했으니 이번엔 내가 하는 거야.”

블리스도 원한이 쌓인 듯 그렇게 말하며 서두른다. 사실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알아. 빨리 하기나 해. 이러고 있으면 갑자기 전화나 누가 올 것 같아.”

이젠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 되어 진이 불안한 듯 문과 전화기를 돌아보자 블리스가 전화기의 코드를 뽑아버린다.

“네 핸드폰 번호는 모르지?”

“응. 선불폰이라 급한 대로 쓰기만 하고, 사람들한테는 안 알려줬어.”

“Jackpot!”

블리스의 외침에 진은 간지러운 듯 블리스의 셔츠 단추를 다 벗겨내곤 환하게 웃었다.

“우린 왜 한 번 하기도 이렇게 힘드냐?”

“하늘이 질투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위에 올라탔다. 첫 섹스의 두근거림이나 색기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몇 번인가 웃으며 키스를 했고,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섹스라기보다는 가벼운 스킨쉽 같은 관계였다. 웃고 떠들며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고 호흡을 섞는다.

서로의 몸을 탐하기보다는 서로의 체온을 전하는 행위였다.

행복했다.

많이 기쁜 것 같았다.

달게 자던 중 삐빅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진은 침대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Hello.”

「진 케이먼씨 핸드폰인가요?」

“아, 네. 무슨 일이시죠?”

「오전 10시 30분 발 뉴욕 행 직행편의 자리가 나서요. 지금 부킹하시겠습니까?」

“아, 10시 반이요?”

그 말에 눈을 뜨고 테이블 옆에 놓인 시계를 보던 진은 눈을 번쩍 떴다.

9시 30분이었다.

“아, 저……죄송합니다. 취소해주세요. 다른 비행기 편을 구해서요.”

「네, 감사합니다.」

짤막한 답과 함께 전화를 끊은 진은 재빨리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블리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블리스, 일어나! 야, 우리 큰일 났어!”

블리스의 맨살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깨우자 블리스가 인상을 쓰며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왜? 더 자.”

“뭘 더 자? 지금 9시 30분이야! 지금부터 씻고 나가면 10시에 축구 수속하고 뭐하면 11시라고 아무리 전용기라도 뉴욕에 도착하면 거기 시간으로 오전 10시야!”

시계를 들어 보인 진이 이대로 안 일어나면 블리스의 머리통을 후려친 기세로 소리치자 시간을 확인한 블리스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린다.

“……큰일이군.”

전혀 큰일이라는 투가 아니었다. 다른 때는 빠릿빠릿한 녀석이 오늘만은 유독 흐리멍덩해 진은 조바심을 냈다.

“지금 느긋하게 그럴 때냐? 빨리 일어나. 미치겠네. 넌 나 결혼식에 맞게 데리러 와서 뭐하는 거야?”

“그보다 중요한 걸 했잖아.”

“너한테나 중요하지. 빨리 가자. 집에 들러서 옷도 갈아입고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

“대강 준비하고 나가. 전용기 안에 네 양복하고 다 준비해왔어.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식장으로 가면 돼.”

“그래도 빨리 일어나야지. 결혼식이 12시니까, 보자……. 공항에서 그 시간까지 도착할 수 있나?”

“걱정 마. 일요일이라 괜찮을 거야.”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빨리 일어나.”

“넌 그 소심증이 문제야. 시간 맞을 거라니까.”

그렇데 말하며 다시 드러눕는 블리스의 어깨를 세게 내리친 진은 자신이 먼저 벌떡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래도 빨리 일어나. 약속시간 전에는 도착하는 게 예의잖아. 식 시작하면 가차 없이 식장 문 차단해버리라고 했단 말야. 빨리 일어나.”

“알았다, 알았어.”

“나 먼저 씻는데.”

알몸인 것도 잊은 채 후다닥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는 진을 웃으며 바라보던 블리스는 전화기를 들어 이 호텔에서 쉬고 있을 전용기 파일럿을 찾았다. 11시까지 출발해야 하니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린 채 느긋하게 일어난 블리스는 기지개를 키며 이미 해가 환하게 뜬 창밖을 바라봤다.

여행은 끝났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결혼식 날의 날씨는 너무나 화창했다. 햇살이 가득한 야외 정원으로 서늘한 미풍이 불어 결혼식 날로는 최적의 날씨였다. 식장을 에워싸듯 포진한 카메라들은 교묘하게 꽃 장식으로 가려진 채였고, 테이블과 결혼식 단장을 넝쿨처럼 감싼 분홍색의 장미들은 막 피어난 듯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슬슬 입장을 시작한 손님들을 500명에 달하는 메이드들이 자리로 안내하며 샴페인과 쿠키, 초콜릿들을 서빙하고 있었다.

“진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신부 대기실에서 막 빠져나온 에반이 정신없는 식장을 돌아보며 클레어에게 묻자 클레어 역시 계속해서 입구를 돌아보며 답한다.

“어젯밤에 출발한다는 연락 받았는데, 이상하네. 위성전화로 11시까지는 올 거라고 했는데.”

이미 시간은 11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객들도 거의 반쯤은 차 있었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고급 양복과 드레스를 입은 하객들이 번쩍거리는 시계와 클러치, 목걸이들을 자랑하며 하나하나 차 입장하는 광경을 보며 에반은 한숨을 내뱉었다.

준비는 완벽하지만 진이 없으니 어쩐지 불안하다. 진의 꼼꼼한 일처리가 이렇게나 그리워질 줄 몰랐었다. 블리스가 진에게 할말을 녹음하라고 해서 하긴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해고라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동안 놀고 온다고 해도 해고는 못할 것 같다.

“클레어, 재키한테 가봐.”

“왜?”

“불안해서 그래.”

“난 클랜한테 가볼 테니, 넌 재키 확인해. 두 녀석이 무슨 사고를 쳐도 칠 것 같아.”

“두 사람도 제정신이면 오늘 같은 날 사고를 치겠어? 이게 어떻게 하는 결혼인데.”

“그래도 가봐. 에이먼은 어디에 있어?”

“지금 오고 있대. 어, 왔다.”

그 말과 동시에 입구 쪽으로 오늘만은 화사한 은빛의 정장을 입은 에이먼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뒤가 좀 묘하다. 

“웬 까마귀 떼가…….”

라며 에반이 그쪽을 가리키자 에이먼의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다섯 명의 남자들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까마귀 떼 뒤로 화사한 연분홍의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보였다. 아니, 오늘은 미녀라기보다는 미소녀 같았다. 윤기 흐르는 긴 금발을 단정하게 풀고 화사한 베이비핑크의 드레스를 입은 엘레나는 오늘만은 아주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이에 맞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얇게 바른 분홍색 립글로스, 요란한 장신구 하나 없이 드레스 위에 작은 은색의 목걸이만을 하나 하고 역시나 진한 핑크색의 구두를 긴은 엘레나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10대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에 앞선 까마귀들이었다.

“……네브즐린이네. 그런데…… 세르게이 네브즐린 쌍둥이였어?”

똑같은 체격에 얼굴까지 꼭 닮은 남자 넷과 조금 작지만 역시나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년 하나가, 똑같이 검은색 양복을 똑같이 맞춰 입은 모습에 클레어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에반이 진지한 투로 받아친다.

“그런 것 치곤 나이 차가 좀 나 보이는데?”

“……저 집 유전자가 강한가 보네.”

“그런가 봐. 아, 클레어 어서 재키한테 가봐. 난 클랜한테 가볼게.”

다시 시간을 확인한 클랜은 서둘러 클레어를 떠밀고는 자신도 결혼식장의 반대쪽에 실크 천으로 겹겹이 베일을 싸 만들어 놓은 신랑 대기실을 향해 달려갔다.

어서 진이 도착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진이 없으니, 예정대로 일이 진행되어도 어쩐지 불안하다. 문득 걸음을 멈춘 에반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고는 취소할게. 돌아오기만 해줘, 진.”

간절한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반은 한숨을 내뱉었다. 진마저 없으면 저 골칫덩어리 애클랜드 가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

결혼식장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진은 힐끔 지금 시간을 확인하곤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올버니 공항에서 내려줄 수가 있어? 응? 분명히 JFK공항이라고 말했어, 안 했어?”

“깜빡했다잖아.”

“그게 말이 돼?”

JFK공항에서라면 한 시간이면 될 거리가 올버니 공항에서 내리는 바람에 두 시간 거리가 되어버렸다. 신나게 액셀을 밟으며 진은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JFK공항이 언제부터 올버니가 됐냐고!”

“파일럿이 이혼 문제로 머리가 복잡했다잖아.”

애가 둘인데다 자기가 바람을 피운 거라 저택과 차 전부 내주고, 한 달에 양육비로 자기 월급의 반을 떼어줘야 한대, 라고 말하며 블리스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리 위자료가 무서워도 내 목숨을 담보 잡으면 안 되지! 그러게 바람을 왜 피워?”

“내 말이. 바람에 이혼에 위자료에 실직까지 하게 됐으니, 용서해줘. 에이먼이 들으면 그대로 자를 거야. 사실 기름도 아슬아슬했거든.”

블리스는 그제야 왕복용으로 가득 채웠던 기름이 막판에 가 아슬아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비행기 안에서 그 말을 했으면 진이 공황상태에 빠져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숨겨왔는데, 재수 없었으면 대서양 한복판에서 캐스트 어웨이를 찍을 뻔했다. 물론, 파일럿이 돌지 않은 이상 도중에 비행기가 떨어질 정도로 어설프게 기름 양을 계산하진 않겠지만 하여간 아슬아슬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라고 블리스는 중얼거렸지만 진은 그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사실은 올버니에 내린 게 그래서일 수도 있어.”

파일럿이 잘못 내린 게 아니라 기름이 모자라 급한 대로 올버니에 내린 걸지도 모른다는 블리스의 설명에 진은 고함을 내질렀다.

“야! 그걸 왜 지금 말해?”

“내렸으니까.”

“그대로 우리가 죽었으면!”

“설마…… 위성폰이 있는데, 무슨.,”

“너,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냐?”

“아, 시간 빡빡하네. 앞에 봐, 진. 이 속도로 달리다 충돌하면 끝장이야.”

블리스의 지적에 진은 다시 시선을 돌리곤 정면을 바라봤다.

파일럿의 개인사 덕분에 무려 한 시간이나 늦어진 데다 로이는 차를 끌고 JFK공항으로 가 있었다. 로이가 올 시간이 없어 어차피 가는 길이라 택시를 타고 JFK공항에 도착해 보니, 이번엔 로이가 문제였다. 장염이란다. 덕분에 로이를 병원으로 실려 보낸 뒤 진이 대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로이라면 절대 진처럼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밟아대진 못한다.

“너, 지금 너무 밟는 거 아냐?”

“상관없어. 벌금은 네가 내. 네 명의로 된 차니까.”

“어이, 벌점 부과 심하면 라이센스 정지야.”

“어차피 운전 잘 안 하잖아.”

“벌금까진 괜찮아도 정지 먹는 건 질색이라고.”

“벌점이나 정지나, 어차피 풀리는 건데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말하며 진이 더욱 속도를 올리는 걸 본 블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뉴욕시내에서 살면서 출퇴근을 하더니 애가 완전히 난폭해져버렸다. 저택에 있는 소형 레이싱장에서 운전을 할 때에도 조심조심 안전수칙 다 지켜가며 운전을 하던 녀석이,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급하다고 사정없이 밟아대는 걸 보니 확실히 뉴욕 사람 다 됐다.

오래 전에 쥐들을 갖고 한 실험에서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쥐들이 난폭해진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맞는 말이다. 뉴욕은 하도 수많은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살다 보니 특히나 운전자들이 난폭해진다. 그 중에서도 맨하탄은 최고였다.

한적한 시골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며 다른 운전자들을 위협하는 이들을 보면 “맨하탄 사람일 거야.”라는 말이 자연히 터질 정도로 말이다. 저 소심한 진을 이렇게 난폭하게 변화시키다니 역시나 뉴욕은 죄악의 도시다.

하긴, 원래도 진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범해지는 녀석이었다. 

“진짜 뭐가 이렇게 꼬이냐? 이거 나한테 결혼식 오지 말라는 거 아냐?”

“액땜이라고 쳐. 이러고 가면 결혼식은 잘 될지 알 게 뭐야?”

“절대 잘 될 리가 없잖아!”

클랜과 재키의 결혼식이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두 사람은 사고를 안치더라도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의 친구들도 만만치 않다. 갑자기 떠오른 바지만 클랜의 친구들도 상당히 이상하다. 몇 명은 멀쩡하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지만 클랜과 가장 친했던 친구 하나는 인디언 문화에 심취해 아예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들어가 이름까지 ‘춤추고 날뛰며.’로 개명하고 그 안에서 온갖 이상한 약초와 버섯들을 찾아 클랜에게 보내주곤 했다. 어젯밤에 총각파티 한다며 클랜에게 이상한 음식-마약성분이 있는 버섯이나, 독이 든 약초 같은-이나 안 먹였을지 상당히 걱정된다.

“너, 클랜 친구 중에 로스 기억나지?”

“아, 알아. 인디언이 된 로스. 왜?”

“걔도 결혼식에 오나?”

“아마, 올걸. 걱정 마. 머리 자르고 정장 입고 오라고 했으니까. 맨발로 치마만 입고 오면 그 즉시 갖다 버린다고 했어.”

“그 말썽쟁이가 그 말을 들을까 모르겠다. 와서 이상한 향 피우거나 노래 부르면 어떻게 해?”

“걱정 마. 약초와 향 절대 반입 금지야. 그 녀석은 특별히 한 번 더 수색하라고 했어.”

“로스도 로스지만 사람만 보면 사탄에 들렸다고 하는 친구도 있지 않았나? 저번에 뭐라더라? 잭 보고 악마의 혀와 상어의 혼을 타고 났다고 엑소시즘하자고 했었잖아.”

“아, 매니. 클랜, 그 녀석하고는 끊었을걸.”

“왜?”

“에이먼한테 오멘에 나오는 데미안이 당신 아니냐고 십자가 들고 난리치는 걸 보고 클랜이 한 대 팼거든.”

역시나 애클랜드 가 사람답다. 진짜 보기보다는 우애가 좋은 형제들이었다.

“그, 음모론에 심취한 친구는?”

“실버맨은 내가 정치인들 붙잡고 한 마디 이상 하면 잡아 끌어내오라고 보디가드들한테 사진 돌렸어. 요주의 인물로.”

“다행이다.”

진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재키의 친구들 걱정하느라 클랜의 그 말썽쟁이 친구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 썼는데 블리스가 먼저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실버맨은 좀 위험하다. 미국에서 행사 하나만 있어도 이 모든 게 정치인들의 수작이라느니, 미국 시민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려는 정부의 정책이라느니 하며, 온갖 신문과 저널들을 챙겨 보며 음모론을 펼치는 그 친구가 정치인들과 재벌들이 드글드글한 식장에 나타나 입을 여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사실 진도 정치인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 친구는 좀 말을 심하게 하는 편이라 주먹다짐이 최악의 경우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그런 것들을 칼럼으로 써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탓에 정치인들 중에 적이 많다. 그리고 그보다 무서운 건 그 음모론의 절반은 꽤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걸리면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게 네가 자리를 비우니까 그렇지. 네가 있었으면 클랜하고 재키도 다른 짓 못 하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난 휴가도 못 내?”

“못 낼 거야 없지. 하지만 다 때가 있는 거니까.”

제한속도를 훨씬 초과해 달려 두 시간 거리를 한 시간 만에 달려온 진은 결혼식장이 보이자, 그제야 조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제 주차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줄여 서서히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블리스가 옆에서 박수를 친다.

“대단해.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200까지 밟다니. 너 레이서가 꿈이었냐?”

“이런 상황에 안 달리고 배겨?”

이미 반 이상이 들어찬 주차장으로 가던 진은 앞에 선 주차요원을 보고는 차를 멈추고는 차 키를 꽂아둔 채 먼저 차에서 내렸다.

“주차 부탁해요. 블리스, 나 재키랑 클랜 보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식장 입구로 달려가자 블리스가 느긋하게 차에서 내려 진의 뒤를 따른다. 다다다 하는 걸음으로 재빨리 식장으로 들어서는 진을 바라보며 블리스는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괜찮은 것 같았다. 마음을 많이 다쳤을까 걱정했는데, 일단은 괜찮아 보였다. 아픈 건 말로 할 수 없겠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이곳이 이젠 진의 집이고, 가족들이 있는 곳이니까.

에반을 만나 인사를 한 뒤 마이크와 통신기를 받아든 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재키의 대기실이었다.

“재키, 준비는?”

“진!”

재클린의 대기실로 들어선 진을 보자마자 안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진에게 달려들었다. 결혼식을 위해 정장을 갖춰 입은 사라와 킴, 그리고 옆에 와있던 클레어와 재키의 언니인 마리아까지, 모두 울 것 같은 얼굴로 진에게 달려왔다.

“어서 와! 널 기다렸어!”

“진, 사랑해! 어서 와! 너무 기뻐!”

사라와 클레어가 소리치며 목을 끌어안으며 인사를 하자 진은 조금 멋쩍은 듯 웃고 말았다.

“걱정시켜서 미안. 그런데 준비는 잘 된 거지?”

진이 웃으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자 사라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답한다.

“괜찮아. 웬일로 아무 문제없어. 드레스도 수선한 게 딱 맞고, 구두도 잘 맞아. 그래서 더 불안해.”

그 말에 진은 미심쩍은 듯 재키를 돌아봤다. 그러자 드레스와 구두 때문에 조심조심 진에게 다가서던 재키가 억울한 얼굴로 진을 바라본다.

“그 얼굴은 뭐야? 나 얌전히 있었어. 식단 조절해서 살도 좀 뺐고 네일 케어도 얌전히 받고 스킨케어도 받았다고. 진이 화낼까 봐 머리 빈 여자애들처럼 헬멧 쓰고 앉아서 손톱에 색칠도 했다니까!”

손톱 색칠한 게 진짜 억울했는지 두 손을 번쩍 들어 곱게 칠한 손톱을 보여준다. 큐티클까지 말끔하게 정리되어 연한 핑크색의 매니큐어 위로 보석을 붙여 손톱 끝이 반짝반짝거린다.

“손톱은 합격. 화장도 잘했고, 돌아서 봐.”

“응?”

“헤어.”

진이 손끝을 까딱하며 돌아서라고 하자 5미터에 달하는 긴 드레스 자락을 무거운 듯 질질 끌며 돌아선다. 가벼운 면사포를 치운 진은 빈틈없이 하나로 깔끔하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빈틈없이 꽂힌 핀들을 확인한 뒤 다시 돌아서라고 한다. 그 말에 다시 재키가 돌아서자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 하나를 가리킨다.

“올려.”

“어, 응.”

진의 지시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당당, 그리고 헤어 담당들이 달려와 재빨리 재키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준다. 그녀를 다시 한 번 주욱 돌아본 진은 처음에 준비했던 주얼리와는 다른 치렁거리는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보고는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귀걸이 바꿔라. 너무 커. 주렁주렁해 보여. 다이아몬드 피어스로 해. 그리고 목걸이도 너무 알이 커. 목걸이도 심플한 걸로 교체. 번쩍거리는 드레스에 커다란 진주 목걸이 달고 나타나면 졸부 같아 보여. 구두굽 조심하고 입장 전에 불안하면 플랫으로 바꿔 신어. 무리하게 신고 들어왔다 엎어지지 말고.”

혹시나 해 예물로 준비한 레드, 블루, 블랙, 옐로우, 핑크 다이아몬드와 진주와 백금으로 만든 심플한 세트를 모두 들고 나오라고 지시한 진이 투명한 다이아몬드 세트로 바꾸라고 하자, 재키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다.

“이게 예쁜데.”

애클랜드 가에서 준비한 예물 세트 중 진주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재키의 항변에 진은 딱 잘라 말을 한다.

“너무 커. 바꿔.”

진의 지적에 옆에서 계속해서 진주 세트를 말렸던 클레어가 한 마디 돕는다.

“그래, 재키. 그게 훨씬 나아. 그건 사실 굉장히 촌스러워.”

가차 없는 클레어의 한 마디에 재키가 부루퉁한 얼굴로 답한다.

“알았다, 뭐.”

“클레어, 여기 처리 부탁해. 난 클랜 보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진은 들고 온 마이크와 이어폰을 꽂고 통신기를 양복바지 뒤쪽에 꽂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곤 테스트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엄청나게 큰 공간을 가로질러 클랜의 대기실을 찾아가려던 진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음성에 걸음을 멈췄다.

“진! 살아있었군요!”

상쾌 발랄한 그 목소리는 역시나 엘레나였다. 화사한 베이비 핑크의 드레스를 입은 엘레나가 다다다 달려오는 걸 본 진은 웬일로 천사 같은 그 모습에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엘레나가 말로 이미지를 말아먹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엘레나는 진짜 모델이었다. 그것도 유명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 초일류급 모델이었다. 이제야 그게 좀 실감되었다.

“오랜만이다.”

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엘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진을 끌어안는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이상하게 거창한 환대에 진은 좀 당황했지만 일단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이 좀 있어서. 걱정했다며? 고맙다.”

구두를 신자 자신보다도 큰 엘레나에게 끌어 안겨 있던 진은 엘레나가 다시 멀어지자 멀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은 화장도 하지 않아 유난히 하얀 피부가 반짝반짝거리는 듯했다. 날개만 달면 진짜 천사 같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말이다.

“너, 오늘 진짜 예쁘다.”

“그렇죠? 제가 들어오니 다들 저만 쳐다보더라고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화사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진은 진짜 감탄한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아주 예뻐.”

10대로 보이진 않지만 하여간 예쁘긴 무지 예쁘다, 하며 진이 엘레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순식간에 엘레나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진의 손을 꼭 잡는다.

“진, 많이 말랐네요.”

사흘 동안 한국과 뉴욕을 오가느라 시차에 제대로 먹지도 못해 확실히 몸이 좀 야윈 느낌이긴 했다. 충격을 받은 후라서인지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뭐…….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진이 웃으며 걱정해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자 엘레나가 결의에 찬 얼굴로 진의 손을 더욱 세게 쥔다.

“걱정 말아요. 복수는 내가 해줄게요.”

“……복수? 무슨 복수?”

“다 알아요. 불쌍한 진.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까. 이제부턴 내가 지켜줄게요. 걱정 말아요. 이반도 이번에 탈옥했으니까, 우리 집안은 든든해요.”

엘레나의 비약적인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던 진은 ‘탈옥’이라는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탈옥?”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진은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곤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탈옥이라니? 이반 네브즐린이 탈옥을 했다고?”

“네.”

“탈옥을 막 해도 돼? 아니, 그럼 숨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숨긴요. 이번에야 말로 구로바를 땅에 묻어버릴 거예요. 세르게이는 온화한 편이지만 이반은 안 그렇거든요. 알렉산드르도 아예 미국으로 왔고 니콜라이도 돌아왔으니, 이젠 나만 믿어요. 알렉세이는 별로 믿음이 안 가긴 하지만, 하여간 다른 오빠들은 모두 대단하거든요. 그간의 고초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해줄 거예요.”

구로바는 또 뭔가 하던 진은 엘레나의 말을 되새김질하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세르게이가 온화하다고 할 정도면 대체 그 이반이라는 남자는 어떤 인간인 걸까. 장기매매를 하다 복역 중이라는 건 들어 알고 있지만, 엘레나의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어쩐지 두려워졌다. 그런 남자가 미국으로 왔단다. 대체 FBI는 뭘 하는 거냐?

“그래, 하여간 축하한다. 나 지금 좀 바쁘거든. 좀 이따 보자.”

멍한 채 일단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진 진이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 하자 엘레나가 진의 팔을 잡아끈다.

“우리 오빠들 안 보고 가요?”

“……오빠, 들?”

“오늘 다 왔어요. 알렉세이가 이번에 헐리웃으로 진출하거든요. 그래서 다 왔어요. 인사하고 가요. 이반도 왔어요.”

순간 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 싫다. 세르게이의 쌍둥이들을 줄줄이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거기다 탈옥한 장기 매매범이랑 얼굴을 마주하고 싶진 않다. 얼굴 보자마자 신장 팔라고 할 것 같다. 

“엘리. 지금 내가 바빠. 곧 있으면 식 시작할 테니까 자리에 앉아 있어.”

“우리 자리가 없어요.”

“응?”

“자리가 없대요. 그래서 지금 인사 중이에요.”

라며 엘레나가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결혼식 참석을 위해 최대한 화사하게 입은 사람들 중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보였다. 전부 이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은발에 덩치가 비슷하다. 뒤만 봐도 쌍둥이다. 한 명이 좀 작긴 하지만 그 사람만 빼곤 진짜 쌍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덩치며 뒤태가 똑같았다. 

돌연변이다!

“……자리는 내가 체크할게. 엘리, 우선 오빠들한테 가 있어.”

“네. 아, 이따 나랑 춤춰요, 진!”

난 춤 못 춰, 라고 말하려다 진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재빨리 돌아서 클랜의 대기실로 가면서 서둘러 이 이상 사태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 머리를 굴렸다.

분명 네브즐린 가에서 초대된 사람은 에이먼의 동업자인 세르게이뿐이었다. 엘레나는 자신이 월권으로 하객 명단에 끼워놓은 케이스였다. 사실 진은 세르게이에게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었다. 아니 있다는 건 알았지만 원래가 러시아 마피아들은 워낙에 가족 사항을 극비에 붙이는 경향이 있어, 저렇게 줄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순간 말로 설명 못할 전율이 흘렀다. 서둘러 마이크를 눌러 켠 진은 테이블 담당들을 불렀다.

“오늘 하객이 총 몇 명이죠?”

「아, 네. 오늘 하객은 에이먼과 대넌이 추가하신 분들까지 다 해서 1032명인데요.」

태연한 담당의 말에 진은 비명을 내질렀다.

“……네?”

「예. 그래서 테이블이 250개……. 어!」

그제야 담당도 이 비상사태를 깨달은 듯 빼액하니 비명을 내질렀다. 하객들의 자리배치는 전부 진이 했다. 그리고 그 테이블 배치는 진이 최초로 작성한 하객명단을 기본으로 한 배치도였다. 기본적으로 결혼식장의 테이블에는 1000명을 기준으로 한 테이블 당 네 명이 앉도록 되어있었다. 예외적으로 애클랜드 가와 교류가 있는 집안의 경우만 가족들끼리 앉도록 의자 세 개, 다섯 개를 놓긴 했지만 이건 지정좌석제였다. 진이 최종적으로 확인한 테이블은 정확히 1002명을 기준으로 한 250개였다. 

“테이블하고 의자, 여분 있어요?”

「네. 네. 혹시나 해서 테이블은 10개, 의자는 맞춰서 40개 더 추가해놨습니다.」

“빨리 옮겨요. 재빨리 옮겨서 배치하고 장식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브즐린 가 분들 그 테이블로 안내해드리세요.”

「네.」

이럴 줄 알았다. 자신이 잠시 없는 사이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다. 그러고 보니 사라의 어머니와 언니도 추가했어야 하는데 자신이 깜빡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에이먼하고 대넌도 그렇지, 손님을 추가할 거면 테이블도 추가하라고 지시를 했어야지, 무작정 초대장만 돌리면 어쩌란 거냐? 초대장 발송자와 배치도를 담당하는 사람이 다르나 보니, 하객 명단을 확인하고 개인적인 손님들을 추가하는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했던 거다. 결혼식을 이주일 만에 준비를 하다보니 이런 사단이 나는 거다. 그래도 혹시나 해 여분을 준비해둔 게 다행이었다. 뭐든 급하게 준비하면 한 군데는 꼭 구멍이 난다.

“어이, 형제! 돌아왔네?”

막 클랜의 대기실로 들어서려는데 자신을 부르는 끔찍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진은,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선 노먼을 보곤 눈을 부릅떴다.

“넌 여기 왜 왔냐?”

“신랑 들러리.”

“……네가 왜?”

“클랜이 날 좋아하잖아. 돌아왔다니 축하한다.”

라며 옆으로 다가온 노먼이 고생했다는 듯 어깨를 툭 두드린다. 하지만 그 말에도 진은 웃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젯밤 읽은 소설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다.

“너 그 책 뭐야?”

“아, 다 봤어? 감동적이지?”

너무 감동적이라 저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말하려다 진은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내저었다.

“넌, 나중에 얘기하자. 식 끝나고 보자고.”

“아, 그런데……요즘 이상한 카드가 자꾸 와. 너 혹시 아는 거 있어?”

“카드?”

“영어인 것 같기는 한데, 이상한 글씨가 써진 카드랑 꽃 더미랑 보석이 자꾸 와. 뭐지? 하도 악필이라 잘 읽지는 못 하겠는데, 네 이름이 써진 것 같던데?”

세르게이다. 

순간 진은 그 정체불명의 카드와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지만 애써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노먼의 전적을 생각하면 노먼도 좀 당해봐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노먼이 세르게이에게 시집가는 게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세르게이가 받아준다면 말이다.

“난 모르겠는데? 너랑 원수진 사람들 중 하나인가 보지.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그런가? 어쩐지 선물들에 조금 악의가 섞인 거 같기는 했어.”

라며 중얼거리는 노먼을 두고 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안했는데, 솔직히 지금은 안 미안하다. 세르게이가 노먼을 납치한대도 두 손 들어 환영해줄 거다. 

다 노먼의 악업이 만들어낸 결과야, 라고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진은 겹겹이 천이 둘러진 신랑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그 안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클랜을 보곤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랜.”

원수 같은 녀석이지만 결혼 전에는 나름 진과 가장 잘 맞았던 녀석이라 반가운 듯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클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진에게 다가온다.

“진, 돌아왔구나?”

“그래, 왔다. 준비는 어때? 말썽 부릴 거면 지금 부려, 빨리. 대책 세울 수 있을 때 쳐.”

그렇게 말하며 진은 슬쩍 클랜의 뒤에 있는 그 친구들을 돌아봤다. 다행히 머리를 치렁치렁 풀어헤치고 치마를 입고 온 ‘춤추고 날뛰며’는 없었다. 일단 다들 겉은 멀쩡하다. 하긴, 노먼도 신랑 친구로 멀쩡하니 턱시도 입고 등장했으니, 다른 친구들도 멀쩡해 보이는 건 당연하다. 다만 그 속이 노먼과 클랜 같은 것들일 뿐이다.

“진, 너무하는 거 아냐? 나도 내 결혼식 망치기는 싫다고.”

클랜은 진을 안고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 있게 소리쳤지만 진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망치기 싫은 녀석이 결혼식 10분 전에 타이 다 풀어헤치고 있냐? 재킷은 어디 있어?”

“아, 저기.”

“타이 똑바로 묶어. 그리고 재킷 입고, 머리카락 정돈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알았어. 에반도 지금 잔소리 한바탕 하고 갔다고.”

“잔소리 듣기 싫으면 미리 미리 알아서 하라고. 응? 난 신자는 아니지만 오늘만은 하느님, 부처님, 알라, 총 동원해서 제발 2시간만 조용하게 지나가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야.”

“하하하, 걱정 말라니까. 진이 왔으니 다 잘 될 거야.”

“내가 너희 사고 뒤처리 하러 돌아온 줄 알아? 시간 다 됐다. 어서 준비해. 난 자리로 돌아간다.”

“응. 진, 잘 돌아왔어!”

다시 한 번 어깨를 툭 치는 클랜의 인사에 진은 뭐 씹은 얼굴로 클랜을 바라봤다.

“널 보니 잘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이제 10분 남았어. 지금 모인 손님들 모두 중요한 사람들이야. 시간 지체하는 건 안 돼. 저 사람들의 시간은 돈이라고. 그리고 시간을 맞추는 건 곧 신뢰의 문제야. 네 신뢰도를 높이라고.”

“알아, 안다고. 딱 맞춰서 입장할게.”

“그래, 스탠바이한다.”

정확히 10분이 남은 걸 확인한 진은 영상 팀과 마이크 팀의 테스트 결과를 확인한 뒤 결혼식 하객 중 현재까지 들어온 이들의 숫자를 체크했다. 대넌과 에이먼이 불려놓은 40명을 포함해 970명가량이 입장했다. 나머지 70명도 지금 빠른 속도로 입장 중이었다. 주차장 쪽을 확인하니 하객들 대부분이 도착한 듯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12시 정각되면 입구 봉쇄 시작합니다. 그 이후로 오시는 손님들은 저한테 알려주세요.”

「네.」

경비 팀을 호출해 지시를 마친 진은 대기실에 있던 거울로 못 매무새를 다시 확인한 뒤 대기실을 빠져나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맨 앞 테이블에 놓인 가족들의 자리로 가니 먼저 돌아온 클레어와 사라가 웃으며 맞이한다.

“블리스는?”

“에이먼하고 블리스랑 아버지는 지금 손님 접대 중. 곧 올 거야.”

“그래.”

이제야 한 시름 놓은 듯 진은 양복을 바로 하고 앉았다. 그러자 곧 블리스와 에이먼이 함께 이쪽 테이블로 다가온다. 찬란한 햇살 아래 금발을 나부끼며 다가서는 블리스를 본 진은 환하게 웃었다. 그런 진에게 역시 웃어 보인 블리스는 우아한 태도로 진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진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세기의 결혼식의 막이 열리고 있었다.

결혼식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무서울 정도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클랜의 친구-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가 사회를 맡아 시작된 결혼식은 곧 신랑과 신부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재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조금의 흔들림 없이 12센치 힐을 소화해냈다. 다른 것보다 재키가 힐을 신고 5미터에 달하는 드레스를 끌고 무사히 주례대 앞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진은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도 자신의 정성을 알아준 모양이었다.

곧 이어 재키의 대학 교수님의 주례가 이어졌고, 감동적인 주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쏟아질 때마다 저쪽 테이블에 앉은 브루스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신부 측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태연한데 아버지가 유난을 떠는 건 또 처음이라, 진은 옆에 있던 블리스를 쿡 지르며 그쪽을 보지 않은 채 작게 말을 걸었다.

“브루스, 왜 저래? 아직도 이 결혼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

“아니. 그냥 막내딸 보내려니 그런가 보지. 사실 딸한테 잘한 것도 없잖아.”

불독 같은 브루스지만 역시나 막내를 먼저 보내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저 어린 아이가 임신까지 한 채 결혼을 하니 마음에 좋을 리가 없을 거다. 게다가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클랜이다. 하다못해 에이먼이라도 된다면 브루스도 처음부터 그 난리는 안 쳤을 텐데, 하필 고르고 골라 클랜이니 뒤로 넘어갈 만도 하다.

자신이라도 자신의 딸이, 아니 하다못해 클레어나 엘레나가 클랜 같은 거랑 결혼하겠다고 나타난다면 클랜을 두 조각내서 던져버릴 거다. 능력도 있고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고 외모까지 좋은 녀석이긴 하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 미래가 그다지 밝지는 않다. 사랑하는 딸이 아무리 재벌가의 아들이라도 나이 차도 많이 나는, 순 날건달 같은 백수와 결혼을 한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브루스도 이젠 늙어 마음을 금세 접은 모양이지만 앞으로 브루스의 태도는 클랜 하기 나름이다.

애클랜드 가의 아들이니 또 마음을 잡으면 잘하겠지만, 그걸 실천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다른 결혼식에 비해 그다지 길지 않은, 현실적이고도 간결한 주례사가 끝나고 반지 교환이 시작되자 진의 왼손을 꽉 잡고 있던 블리스가 진의 손을 보더니 진을 쿡 찌른다.

“너, 반지 왜 안 꼈어?”

잠시 잊고 있던 반지 이야기에 진은 ‘그래, 너 잘 걸렸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지만 결혼식 도중이라 겨우 겨우 화를 참으며, 블리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답해주었다.

“……아무래도 너랑 사귀는 거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서.”

“뭐야? 너, 내 몸만 강탈하고 끝이라는 거야? 할 거 다 했으니 이제 볼 일 없다고?”

이게 웬 헛소리인가 했지만 진은 중요한 순간이라 블리스의 말을 대강 얼버무렸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왜?”

“귀찮아. 조용히 해.”

먼저 클랜이 재키의 손에 반지를 껴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재키도 반지를 클랜의 손가락에 껴주었다. 반지 교환 이후 드디어 신랑에게 신부에게 키스하라는 말이 나오자 진은 마이크를 눌러 뒤에 식장 멀리에 있는 폭죽을 쏘아 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두 사람이 키스를 시작하자 저 멀리서 노랗고 빨간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소음과 함께 새파란 하늘에서 터지는 색색의 불꽃에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일본의 장인에게서 특별히 부탁해 만들어온 최고급의 불꽃들이었다. 원형을 그리며 3중으로 터지는 불꽃과 하나의 불꽃에서 동시에 4개지 색이 터지며 연꽃 모양을 그리는 것까지,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 광경에 하객들 모두 신랑과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며 박수를 쳤다.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지금까지는 더없이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웬일로 잘 넘어가네.”

진은 신이 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블리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진을 이상하게 여긴 블리스는 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 아까부터 왜 여길 안 봐?”

“……사정이 있어.”

“왜? 나만 보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져서?”

“사정이 있다니까.”

네가 앉은 자리 너머로 네브즐린 가가 있어,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진은 대강 말을 끊어냈다. 너무 무서워서 그쪽으로는 고개를 돌리기도 싫었다. 은발의 돌연변이들을 보는 건 영화만으로도 충분하다.

“진, 이쪽 좀 봐.”

“싫다니까.”

“왜 그러는데?”

“다 사정이 있어.”

진의 마지막 말과 함께 결혼식 순서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재키와 클랜은 식장에서 직접 혼인 신고서에 사인을 했고, 두 사람의 사인이 끝나자 다시 한 번 하객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두 사람은 오늘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커플이었다. 

“쟤네는 진짜 잘 살 거야.”

진이 박수를 치며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도 박수를 치며 받아친다.

“그렇겠지. 주변 사람들만 괴로울 뿐이지. 애는 대체 어떻게 키우려고.”

블리스는 이제야 겨우 저 애들이 애를 낳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떠올리며 한숨을 뱉어냈다. 클랜도 클랜이지만 재키는 이제 겨우 대학 1년생이었다. 휴학을 하긴 했지만 아이를 낳은 뒤엔 공부 욕심이 많아 반드시 학업을 마치려 할 테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블리스 개인적으로 재키 같은 인재가 결혼 때문에 학업도 못 마치는 건 원치 않는다. 문제는 그럼 애는 누가 기르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클랜 같은 애가 하나 더 태어난다면 난 진짜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진 역시 클랜과 재키의 아이를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에 원한이 가득해 블리스는 싱긋 웃으며 진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걱정 마. 애가 클랜을 빼닮았으면 세 녀석 다 브루스 네로 갖다버릴 테니까. 처가살이 좀 하라고 하지, 뭐.”

“그거 괜찮네. 이 김에 클랜도 성격 좀 고치고.”

“클랜 성격 고치기 전에 브루스가 먼저 세상 하직할걸.”

내가 생각해도 그쪽이 확률이 높아, 라고 말하던 진은 사라의 옆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고령출산도 힘든데, 잘하면 사라가 클랜과 재키의 아이까지 떠맡게 생겼다. 물론, 재키가 키우는 것보다야 사라가 키우는 쪽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는 좋겠지만…… 심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보모를 잔뜩 구해야 한 듯했다. 어쩌다 보니 삼촌과 조카가 비슷한 때에 태어나게 생겼다.

정상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라 팔짱을 낀 채 마지막으로 식장을 걷는 모습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가족들 역시 웃으며 두 사람의 미래를 축하해주었다. 

두 사람의 행진 시작과 함께 다시 멀리서 불꽃이 터졌다. 온 세상을 화려하게 수놓는 그 불꽃을 올려다보며 진은 행복한 듯 웃었다. 두 사람의 새 삶의 시작과 함께, 자신에게도 새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늘도 두 사람과 함께 자신을 축복해주는 듯했다. 

진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진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퍼엉- 하며 하늘로 날아오른 불꽃이 다른 불꽃들의 반도 올라가지 못해 피시식 터졌다. 불량인가 하며 진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다 타지 못한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으악!”

다른 불꽃보다 낮다고는 하지만 꽤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 사방으로 튄 불꽃 덕에 결혼식장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진 역시 놀라 몸을 숙이는데 블리스가 재빨리 진을 옆에서 끌어안아주었다. 위에서 감싸듯 진을 품에 끌어안아 숙이게 한 블리스가 따가운 듯 인상을 쓰며 험악한 투로 중얼거린다.

“뭐야? 왜 터지다 말아?”

“그러게……. 어? 어어!”

몸을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은 순간 새하얀 신부의 드레스 자락의 끝이 타들어가는 걸 보고 말았다.

“소화기!”

긴 웨딩드레스의 끝자락에 붙은 작은 불씨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진의 외침에 신부의 드레스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내지르며 소화기를 찾기 시작했다. 진은 진짜 입이 문제라고 한탄하며 이마를 짚었다. 농담으로 드레스 자락에 불이 붙을 것 같다고 했더니 진짜 불이 붙었다. 이제 비만 내리면 다 된다.

진짜 돌아버리겠다.

혹시나 해서 꽃으로 만든 기둥 아래쪽에 소화기를 모두 배치해둔 채라, 서둘러 소화기를 찾으려 진이 고개를 돌리는데 저쪽 테이블에 있던 엘레나가 소화기를 찾아들고 달려왔다.

“진! 소화기요!”

아주 빠르게 재난에 대비하는 신속한 엘레나의 모습에 진은 엘레나에게 재키를 가리켰다.

“불 꺼!”

그러자 엘레나가 비장한 얼굴로 소화기를 들어올린다. 천만 다행이라 여기며 진이 엘레나를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엘레나는 왜 두 손으로 소화기를 번쩍 들어올리는 걸까. 당장에 재키에게 소화기를 집어던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진은 서둘러 엘레나를 불렀다.

“엘리, 너 뭐하는 거야?”

“이거 던지면 터지는 거 아니에요?”

“소화기가 수류탄이냐?”

“그럼요?”

“핀 뽑아서 호스를 저리 대고 누르라고.”

“어? 핀?”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듯 엘레나가 소화기를 내려두고 핀을 찾는다. 사람 살리려다 사람 죽일 뻔했다. 더 소화기를 재키가 맞았으면 그대로 즉사다. 

어쩐지 결혼식이 너무 평화롭다 싶었다. 저 불만 끄면 끝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나치게 맑은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우비다.”

진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였다. 그리고 진의 말과 동시에 사회자가 테이블 아래에 우산이 있다는 알림을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럴 것 같아 각 테이블 아래쪽에 우산을 준비해뒀었다. 하객들이 재빨리 우산을 꺼내 쓰는 모습을 보며 진은 이번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다. 자기가 말로 해놓고도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나 아무래도 자리 깔아야 할까 봐. 신이라도 내렸나. 어쩌면 이렇게 딱딱 맞추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이는 진의 위로 투명한 비닐이 막을 치며 비를 가려준다.

“그러게 말이다. 너한테 예언력이 생긴 거냐, 아니면 네 저주가 통한 거야?”

“저주는 무슨. 이건 당연한 결과야. 저 두 녀석 결혼식이 무사히 지나간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갑자기 내린 비 덕에 신부의 드레스 자락에 붙은 불은 꺼진 후였다. 다들 조금은 당황했지만 재빨리 우산을 쓴 덕에 값비싼 드레스와 클러치들을 모두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테이블은 젖었고 샴페인 잔에는 빗물이 떨어졌지만 모두들 이 기가 막힌 상황을 즐기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특히나 가장 신이 난 건 신랑과 신부였다.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두 사람은 웃으며 빗속을 뛰어놀고 있었다. 값비싼 드레스가 젖고 빗물에 젖고 비단 천으로 만든 웨딩 슈즈에 빗물이 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신이 나 두 손을 펼치고 비를 맞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전역에 보도되고 있었다. 물론, 신랑 신부의 친구들 역시 신이 나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중에 “내가 기우제 지냈다니까!”라고 떠들어대는 건 분명 춤추며 날뛰고 였다.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수염 밀고 머리 자르고 정장까지 입은 채라 못 알아봤다.

참 어떻게 보면 대책 없이 낙천적이고,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커플이었다.

“기가 막혀서.”

진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자 블리스가 진의 어깨를 안으며 웃는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우산을 든 사람을 만났으니까. 원래도 겁이 없는 녀석들이니 이제 더 무서운 게 없겠지.”

“……글쎄, 그 상대가 가진 우산이 찢어진 우산일지 알 게 뭐야?”

“수선하면 되지. 잘못된 부분은 고쳐주고 찢어진 부분은 기워주는 게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의 기본 요건이잖아.”

“넌 진짜 말은 잘해.”

“블리스사의 캠페인을 그걸로 할까?”

“마음대로 해라.”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비가 그쳐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태양이 도 다시 대지를 비춘다.

하지만 좀 더 비가 내려도 좋지 않았나 싶어 진은 아쉬운 듯 우산을 올려다봤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는 삶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자신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우산을 들고 역 앞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며 조용히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아마 이제 겨우 그 사람을 찾은 것 같았다. 한쪽 어깨가 젖어도 다른 쪽 어깨로 전해지는 온기에 기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그렇게 말하며 슬쩍 블리스를 돌아본 진은 기분 좋은 얼굴로 블리스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하지만 역시 반지를 끼는 건 좀 보류해야겠다. 아니, 보류하는 게 아니라 낄 수가 없다.

이 입만 산 바람둥이가 반지를 여자 사이즈로 맞춰오는 바람에 새끼손가락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걸 지금까지 모른 자신도 대단하지만, 그런 반지를 당당하게 건넨 블리스도 블리스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반지가 안 맞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버틸 셈이었다. 블리스에겐 그 정도의 페널티가 필요하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져 진은 피식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진이 화를 내며 날뛸 거라 생각하던 블리스는 진이 신이 난 듯 웃자 얘가 너무 여 받아서 미쳤나 하는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블리스도 그냥 웃고 말았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다.

뭐든 웃으며 넘어가도 된다.

비가 완전히 그친 하늘 위로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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