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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8/13)

Chapter 8

몸이 나른하면서도 가볍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잠에 분명히 평소 기상 시간을 훨씬 넘겼다는 걸 알면서도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밍기적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벌써 환한 햇살이 발치에 닿고 있었다. 평일이라면 사무실에 도착해 막 블라인드를 올릴 때 느껴질 법한 정도의 햇살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니 마음껏 자도 된다. 무의식중에서도 요일을 계산한 진은 그러다 문득 자신의 침실에는 늘 블라인드가 쳐져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늦은 시간에 들어와 늦게 잠들어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침실 안은 1년 365일, 청소를 할 때 외엔 늘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비가 올 때도 블라인드를 살짝 밀고 밖을 확인할 뿐 블라인드를 걷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햇살이 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에 눈을 번쩍 뜨자 새하얀 베갯잇 위에 놓인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파트와는 달리 주변의 다른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 풍경. 환하게 트인 창밖으로 파란 구름이 보였다. 하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마치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이제 좀 일어나지? 아무리 휴가라도 너무 자는 것 같은데?”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자 흰색 셔츠에 검은 면바지를 입은 블리스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진의 뺨에 키스를 한다.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들려하자 부드러운 실크 셔츠 자락이 뺨을 간질인다.

“어…… 일어나야지. 그런데 아침부터 뭘 그렇게 차려 입고 있어? 어디 나가?”

“너야말로 어제 고백 받고 너무한 거 아냐? 나랑 한 침대에서 자면서 잠 못 이루며 들척거리지는 못할망정  시체처럼 자더라? 거기다 눈도 팅팅 부어서.”

괘씸하다는 듯 퉁명스러운 블리스의 말투에 진은 기지개를 키며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받아친다.

“너랑 나랑 하루 이틀 알아? 이제 와 새삼 못 잘 건 또 뭐야? 기숙사도 한 방을 썼는데.”

진은 태연하게 기숙사 이야기를 꺼냈지만 블리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래, 그때는 죽는 줄 알았지…….”

“왜?”

“너랑 한 방 쓰느라 죽을 뻔했다고. 몸은 뜨겁지, 넌 자각도 없지. 노먼은 자꾸 찝쩍거리지.”

“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경계령 1호 발령.”

“응? 그게 나 때문이었어?”

“몰랐냐?”

“알 리가 없지.”

“그래도 눈치 좀 채주지. 하여간 네 덕에 별 짓을 다 했어. 내 노고를 알아줘. 덕분에 학내의 동성애 단체로부터 협박 편지도 받았었다고.”

분명히 블리스의 그 특이한 경고성 발언으로 인해 학내뿐 아니라 실제 사회 내에서도, 애클랜드 사에 대한 반발도 거셌었다. 하지만 블리스도 대넌도 그 정도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너희 취향이면 내 취향도 있다며 셀리브리티들도 사생활과 취향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그때 진은 진심으로 저 집안 사람들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뻔뻔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블리스의 주변에는 수많은 호모와 바이가 있었기에 그 이상의 반발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대단하긴 했었다. 일단 사회 유명 인사의 아들이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셔널했다. 그런 의미에서 애클랜드 가 사람들은 참 남의 눈치는 보지 않는다. 뻔뻔스럽다고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잠깐…… 너, 그거 진짜 나 때문이었어?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었다고?”

“말도 안 되다니. 피 끓는 20대에게 그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는지 알아? 덕분에 1학년 때는 미친 듯이 공부만 했지. 그건 감사해. 그렇게 질색을 하던 accounting(회계학)을 A+ 로 패스했으니까. 모르는 걸 배운다는 거, 참 신기한 일이더군. 색다른 기분이었어.”

“……다른 건 다 알았다는 거냐?”

“응용 법을 몰랐을 뿐이지, 어지간한 이론은 열 살 전에 패스했었어. 원래 열두 살 때 대학 입학을 하려다, 그건 좀 재미없을 것 같아서 그냥 다닌 거지. 클레어도 차라리 대학에 입학할까 하더니, 대학 졸업하면 자기 인생은 서류더미에 묻혀 먼 훗날에 유적으로 남을 거라면서 쉬엄쉬엄한다고 일반 과정을 택했던 거니까.”

다들 뛰어나긴 하지만 특히나 클레어는 사 남매 중 가장 욕심도 많고 야망도 있던 아이였다. 막내라 치이긴 했지만 사회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것도 그녀였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아이다.

“클레어는 진짜 서른 되면 자서전 쓸 것 같아.”

“쓸 거 많을걸.”

“너희 가족 얘기만 써도 시리즈물로 나올 수 있을 거다.”

“좋네, 그거. 자서전 시리즈.”

그렇게 말하며 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블리스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일어나. 식사해야지.”

“응……. 그런데 그거 진짜야?”

“뭐가?”

“나 때문에 1미터 경계령 내렸다는 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서던 진이 진짜 궁금하다는 듯 묻자 블리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며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말한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욕먹을 짓을 사서 하냐?”

“넌 하잖아.”

물론, 일반적으로는,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남에게 욕 먹을 짓은 하지 않는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이목과 평에 예민하다.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한 사람의 명예가 그 사람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가문의 이름과 그의 사업과 온 가족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블리스가 그러냐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답이 나간다. 대넌은 물론 남의 이목에 예민한 사람이지만 진이 알기로 애클랜드 사 남매는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원래 그들의 모친인 퍼기 애클랜드는 70년대를 주름잡던 수퍼모델이었다. 깡마른 몸매에 시스루룩을 유행시켰던 그녀는 백만장자인 대넌과 결혼하면서 온갖 가쉽에 시달려야 했고, 몇몇 타블로이드에서는 대놓고 그들이 일 년 안에 이혼할 거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에이먼이 태어났고,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은 블리스와 클랜, 클레어까지 네 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이 언제 이혼할까 하는 관심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클랜이 대넌의 아이가 아니라는 날조 기사까지 퍼졌었다. 다들 어렸을 때지만 사교계와 언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사람들의 관심에 적당히 반응하면서도 때때로 그들을 엿 먹이는 걸 아주 좋아했다. 물론, 그 중에 최고는 클랜이었고 그 다음에 블리스였다. 클레어는 그나마 얌전한 편이지만 에이먼은 아예 케이블 공화국의 황제가 되어 그들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진은 나중에야 에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확실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블리스라면 욕먹을 짓을 사서 할 수도 있다. 나중에 언론사를 상대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진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블리스가 잠시 머뭇하더니 시선을 돌리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안 해. 내가 클랜이냐?”

“클랜은 우주 생물까지도 위아 더 유니버스야. 그런 놈이 남 엿 먹이려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

“아니라니까.”

“그럼 기사대로 넌 호모 퍼그가 맞다는 거야?”

진이 예리하게 논점을 꼬집자 블리스가 진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기사 꽤 예리하긴 했어.”

블리스의 말에 진 역시 동의했다.

“그렇지? 확실히 예리하지. 아마 그 기사도 노먼이 쓴 것…….”

거기까지 말하던 진은 순간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블리스의 눈이 번뜩인다.

“뭐?”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실언이었어.”

진이 재빨리 말을 바꾸려하자 블리스가 진의 옆으로 척척 걸어오며 말을 건다.

“너 사실대로 말해. 노먼이라고?”

“아니, 분명히 사진은 노먼이 찍었는데…….”

그 말에 블리스가 불같이 화를 낸다.

“역시 그 자식이었어!”

클리샤 사건 이후로 블리스가 열 받으면 어떻게 하는지 익히 봐왔기에 진은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블리스를 진정시키려 했다. 블리스는 대부분의 일에 뒤끝이 없는 편이지만, 한 번 원한을 가지면 진짜 쫌팽이처럼 죽는 날까지 갖고 가는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보통은 가쉽이고 뭐고 아주 관대한 편이라 대부분은 웃으며 넘기지만, 그 허용선을 넘길 경우는 가차 없다. 그리고 진이 알기로 그 허용선을 넘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인간이 노먼 맥캐인이었다.

“블리스 진정해. 나한테 화낼 건 없잖아.”

“뭐하자는 거야? 클리샤부터 시작해서! 너, 그 자식하고 어디까지 갔어?”

“가긴 어딜 가?”

“내가 치사하게 굴기 싫어서 엘레나가 보낸 사진은 그냥 넘어갔는데, 그 자식이 왜 그 시간에 너희 집에 있었냐고?”

“어…… 선물 주러 왔다 자고 갔지.”

“너희 집에서 잤다고!”

“응.”

“나도 잔 적 없잖아!”

“오늘 가서 자면 되지.”

“그런 문제가 아냐!”

원한이 드글드글한 얼굴로 화를 내던 블리스는 문득 진의 앞으로 다가오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좋아. 내가 노먼과 결판을 내지. 노먼과는 한 번 담판을 지어야 하긴 했으니까.”

블리스가 그렇게 말한 뒤 휙 돌아서자 진은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블리스는 이대로 달려가 노먼을 죽일 기세였다.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한바탕 난리를 칠 것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내일 아침 타블로이드 1면에 사진과 타이틀이 스쳐갔다.

<애클랜드 가의 몰락. 블리스 애클랜드, 치정살인. 상대는 신진작가 노먼 맥캐인>이라며 두 손에 수갑을 찬 블리스가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장면이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참고인으로 따라 나오는 자신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문제의 비서>라는 타이틀이 자신의 이름 뒤에 따를 걸 생각하니 더욱 머리가 아득해졌다. 거기다 점점 상상이 확장되더니 법원에 선 채 검사 측 증인으로 출두되어 블리스와 자신의 과거를 줄줄이 내뱉으면서 증언을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으로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그건 안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따위로 살다 그런 개망신까지 당할 수는 없다. 게다가 조국의 이름에 먹칠까지 할 수는 없다.

“블리스!”

“왜?”

“클리샤 사건…… 에 대해 말할 게 있어.”

“설마 그 사진 찍은 게 노먼이 아니라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아냐. 그건 걔가 찍은 거 맞아.”

“그럼?”

싸늘한 블리스의 시선에 움찔한 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히고 사실대로 모든 진실을 고백했다.

“그 호텔하고 약속 시간, 내가 노먼한테 알려줬어.”

“뭐?”

“내가, 알려줬다고.”

“……너!”

갑자기 빽하니 내질러진 그 음성에 진은 서둘러 침실 한구석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따라 달리며 블리스가 소리친다.

“너 거기 안 서?”

진짜 안 서면 죽일 것 같은 그 기세에 진은 침실 안에 놓인 조각상 뒤로 가 숨으며 소리쳤다.

“아씨! 너, 나 사랑한다며?”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고 그건 다른 문제지!”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그 사건 때문에 얼마나 곤경에 처했는 줄 알아?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 일어나서도 이를 갈 정도야!”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도 이를 으드득 간다. 자신에 대해서만은 한없이 관대하고 어지간해서는 절대 화내지 않는 블리스가 저 정도로 화를 낼 정도라니 그 분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고백한 뒤가 아니면 진짜 자신을 갈아마셨을 기세다.

“그래도 클리샤 나이 20살이라고 밝혀줬잖아!”

“그래서 감사하라는 거냐? 애초에 그런 사진을 찍지 말았어야지!”

“하여간 경찰 조사는 안 받았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야! 클리샤는 존 에스터의 사생아라고!”

갑자기 나온 그 이야기에 조각상 뒤에 숨어 빼꼼히 눈만 내밀고 있던 진이 슬쩍 목을 빼고 블리스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존한테 정보 좀 빼내려고 겨우 겨우 클리샤 잡아서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진 찍혀서 도는 바람에 혹시나 하고 의심하던 에스터 부인이 존을 잡았어! 그리고 클리샤도 모델 인생 파토 났고. 존이 그 뒤로 나한테 원한 품은 거 알아?”

존 에스터는 거물 사업가 중에 유일하게 블리스를 못마땅해 하던 남자였다. 얼마 전 쓰러진 그에게 자신이 보낸 카드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블리스에게 자신을 데리고 오라며 그의 별장에 초대를 했다는 말에 드디어 두 사람의 관계가 나아지나 했는데, 설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었다.

“진짜야?”

“그래.”

“……그럼 왜 말 안 했어?”

“남의 사생활을 어떻게 말해?”

“그래도 나한테는 말을 했어야지!”

“다른 거면 말하지! 그래도 그런 사생활을 어떻게 까? 아무리 너라도 그건 안 돼!”

“난 너한테 다 말하는데 넌 나한테 속였어!”

“속인 게 아니라 물은 적이 없잖아! 그리고 너야 말로 지금까지 노먼한테 네가 말했다는 거 속였잖아!”

블리스가 그 스케줄 알린 게 누구냐며 길길이 날뛸 진은 슬쩍 뒤로 빠져 모른 척했다. 그 스케줄은 사실 극비였던지라 비서들도 알지 못한 것이었기에 다행히 누명을 쓴 사람은 없었지만, 진도 그 당시엔 간이 콩알만해졌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그때 걸렸으면 제대로 한바탕 퍼부었을 것이다.

“미안해, 그건. 진짜 사고였어. 술 마시다 훽 가서 걸려든 거야. 이제와 노먼에게 따져봐야 소용없어. 노먼이 날 끌고 들어갈 테니까.”

오래된 일이기도 했지만 일의 인과관계를 밝히자면 술 마시다 홧김에 블리스의 일정을 다 불어버린 진의 잘못이었다. 사실 노먼도 그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을 거다. 그냥 진이 얘기하는 걸 듣고 흥미가 생겨 찍으러 갔을 것이다. 노먼의 말로는 블리스를 엿 먹이려고 한 거라지만 반은 블리스에게 하는 복수였고, 절반은 잭 맥캐인의 혈압을 올리려 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잭은 한동안 대넌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를 못했었다. 워낙에 친한 친구였기에 더 했을 것이다.

블리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서 있자 진이 슬쩍 조각상 뒤에서 나오며 말을 이어간다.

“그런데 나도 할 말은 있어.”

“무슨 할 말?”

“너, 그 여자랑 호텔 간 건 사실이잖아. 아무리 과거 일이라 해도 그 일을 당당하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난 존을 만나러 간 거라니까.”

“대넌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존 에스터는 오메가 클럽 출신이야! 아버지랑은 상극이라고.”

순간 진은 복잡하게 꼬인 사교계의 관계를 풀어내곤 “아.”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 클럽은 알파베타감마와는 이미 100년 가까이 원수를 진 라이벌 클럽이었다. 알파베타감마의 회원들이 정재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과는 달리 오메가 회원들은 문화와 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알파베타감마가 상류층 자제들을 주로 받아들이며 그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서로의 힘을 합치는 것과는 달리 오메가 클럽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존 에스터는 재계의 명사지만 스스로 알파베타감마가 아닌 오메가 클럽에 지원해 알파베타감마 회원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산 채였다. 성향도 성향이지만 지지하는 정당과 정책도 늘 반대다 보니 알파베타감마와 오메가는 말 그대로 물과 불, 즉 상극이었다. 그러니 대넌이 존을 소개해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존 에스터가 워낙에 별종이긴 하지만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회원들 자체가 좀 문제가 있긴 하다. 뭐랄까, 모두들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남자들이지만 좀 애 같은 경향이 있었다. 풀어 말하자면 편 갈라 싸우는 걸 무지 좋아하고, 상대방은 무조건 배척한다.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싫어한다. 그러고 보니 클랜이 유펜에 입학할 때 오메가 클럽에 들겠다고 했다가 대넌이 화를 내 영국으로 쫓겨 간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에 오메가 클럽의 회원이 생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미친 듯 날뛰던 대넌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클랜조차도 결국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오메가를 포기했을 정도니 오메가 클럽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그건 그렇지만, 하여간 네가 그 여자 꼬신 건 사실이잖아. 난 과거는 묻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그래도 내 앞에서 자랑할 일은 아니지.”

“……그건 맞아. 하여간, 그건 그거고…… 너 이리 와. 한 대만 맞아라.”

그렇게 말하며 다시 슬금슬금 움직이는 블리스를 보며 진이 타임신호를 걸었다.

“잠깐! 잠깐만!”

“잠깐이 어디 있어?”

“그래도 이제 존하고 풀렸잖아! 별장에 초대했다며?”

“그건 나한테 풀린 게 아니라, 너한테 풀린 거지!”

“하여간 내 덕에 풀렸으면 된 거잖아.”

그러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진의 말에 블리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건 맞는 말이야. 인정해. 하지만 노먼한테 내 일정 알린 건 그냥 못 넘어가.”

“미안하다니까.”

“미안하다면 다야?”

“술에 취해서 그랬다니까! 그건 그냥 사고야, 사고. 너, 나 사랑한다며?”

진이 최후의 무기를 꺼내들었지만 블리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순간 진은 괜히 말했다는 후회를 하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블리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재빨리 돌아서 도망치려던 진의 팔이 블리스의 손에 먼저 잡혔다. 블리스에게 잡혀 강제로 되돌려진 진은 이번엔 진짜 한 대 맞는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찔했다. 블리스와는 그 긴 시간을 알아오면서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투닥거림은 있었지만 진짜 몸싸움을 벌인다거나 소리를 내지른다거나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두 번 블리스에게 맞은 적이 있지만, 그건 태권도 대련 중에서였다. 한국인이면 태권도를 당연히 해야 한다는 사라의 독특한 사고방식-사라는 미국 생활이 길어서인지 사고방식 자체가 미국인이었다. 미국인들은 징병제인 한국의 군법 때문인지 한국인이면 무조건 태권도를 잘한다고 알고 있다.- 덕에 한국인 태권도 강사를 초빙해 1년 간 배웠었는데 그때 블리스도 자기도 배우겠다고 우겨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딱 두 번 정도 대련을 했는데 한 번은 이단옆차기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앞돌려차기로 얻어맞고 KO패 당했었다. 그때는 자신이 더 많이 공격했으니 할 말은 없다. 사실 주먹으로 친 건 자신이 더 많이 쳤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멍만 들지 말아라, 하고 기다리는데 얼굴에 닿은 건 주먹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한 번이니까 넘어가주는 거야.”

라며 뺨에 입을 맞춘 블리스가 곧 다시 진의 입술에 깊이 키스를 해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에 진은 살며시 눈을 감고 블리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잠깐 동안의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운 키스가 끝나자 블리스가 진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물러선다.

“다시는 노먼 만나지 마.”

“그건 안 되지. 내 친군데.”

“그런 놈이 친구라고? 만나면 당장 나한테 끌고 오겠다며?”

분명 일주일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건 일주일 전 얘기다.

“내가 노먼한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알아?”

“책 받은 건 알아.”

“그거 말고.”

“그럼?”

“기다려봐.”

다시 슬며시 블리스의 목을 놓은 진은 침대 옆으로 달려가 노먼의 책을 들고 와 블리스의 눈앞에 첫 장을 펼쳐보였다.

“봐봐. 근사하지?”

책이 나왔다는 소식만 들었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은 블리스는 진이 펼쳐 보여준 첫 장에 남은 글귀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이게 뭐야? 겨우 이런 걸 갖고 그래?”

“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몰라? 미국 전 서점에 깔린 이 책 안에 내 이름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이 소설, 어제 자기 전에 잠깐 봤는데 재미있어. 베스트셀러가 될 거야. 노먼이 그러는데 다른 나라에 판권이 팔려도 내 이름이 들어가는 거야. 이 원고는 영원히 남는 거라고.”

눈을 반짝거리며 신이 나 떠드는 진의 얼굴에 블리스는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게 며칠 전인데 겨우 이 정도에 넘어간 진에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너희 집 사람들은 진짜 예술하고는 담 쌓았잖아.”

블리스의 약점을 콕 찌르는 그 말에 블리스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심술이 서렸다. 진은 조금 불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전국에 깔리는 타블로이드 지에 네 이름 실어줄까?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원한다면 주간 잡지의 모든 표지에도 네 얼굴하고 이름 실어줄 수 있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거야, 그거야말로. 유명인이 되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블리스의 말인 즉 신문과 잡지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만한 스캔들을 터트려주겠다는 의미였다. 잡지와 타블로이드지에 얼굴 나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기에 진은 뚱해진 얼굴로 책을 옆구리에 끼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것만은 절대 사양하마.”

“왜?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블리스 애클랜드의 동성연인, 드디어 베일을 벗다’ 내지 ‘그들은 신혼 중’ ‘블리스 애클랜드, 동성혼 허가를 위해 로비 중?’이런 타이틀은 어때?”

상당히 구체적인 블리스의 말에 진은 작게 혀를 찼다. 매도 맞아본 놈이 잘 팬다고 하도 가쉽란에 들락거리더니 기자들의 머릿속까지 훤히 들여다보며 타이틀까지 정하고 있다. 얼마 후에는 자기가 기사를 만들어 투고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했다만 봐. 확 한국으로 도망쳐버릴 테니까. 망신당할 거면 혼자 당해.”

“그럼 노먼 만나지 마.”

“그건 안 돼.”

“왜?”

“나 지금 얘한테 매력 느끼는 중이거든. 상당히 매력 있어.”

“뭐?”

“전 세계에서 책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것도 이렇게 책 첫 장에.”

“그럼 네가 써.”

“내가 쓴 소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뭐 어때? 출판해서 월드와이드로 배포해줄 테니 쓰기만 해.”

“책이 영화냐? 월드와이드는 뭐야?”

“하여간, 출판해줄 테니 무조건 써. 전 지역 서점하고 도서관에 쫙 풀고, 교양도서로 이름 올려줄게. 지역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 때리면 그만이야. 케이블 채널에서도 한 시간 단위로 광고 올려줄게.”

“장난하냐?”

“그럼 회사 이름 바꿔줄까? Bliss&Jin 사 어때? 이 김에 파트너로 승진도 시켜 줘?”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에 진은 불쾌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그랬다간 에반이 죽을 때까지 날 저주할 거다.”

“그럼 JIN이라는 메이커 하나 만들어줘? 회사 이름이 싫으면 브랜드는 어때? JIN이라는 이름으로 이동 통신 단말기 브랜드 만들어줄까? 아니면 백화점 지어줘? 아니지, 월드와이드로 배포할 거면 잡지는 어때? 패션잡지 JIN. 아니면 케이블 채널 하나 만들어줄게. JIN채널이라고 공포영화 전문 채널. 뭣하면 전 세계를 도는 전용기랑 요트에 네 이름 새겨줄게. 원한다면 네 이름 붙인 차를 생산해줄 수도 있어.”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진짜 딱 자기 같은 말만 골라하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팔짱을 끼었다.

“너는 무슨 상상력이 그 모양이냐?”

“그럼 넌 뭘 원하는데? 이제 와서 내가 소설을 쓸 수도 없고.”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클랜도 참 재능이 없다 했지만, 문학 쪽에 재능 없는 건 애클랜드 가 전체의 특징이었다. 심지어 사라조차도 글 쓰는 재능은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가장 믿을만하다 할 정도니 할 말 다 한 거다.

잠시 썩어 들어가는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던 진은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네 이마에 진이라고 쓰고 다녀봐.”

진은 어차피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순간 블리스 역시 씨익 웃는다. 감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못할 것도 없지. 매직 어디 있어?”

“야! 진짜 하려고?”

“못할 거 뭐야? 이마네 네 이름 적고 브로드웨이를 누비고 다니지, 뭐. 파파라치들 다 달려들게. 그럼 다음주 신문 잡지에 네 이름이 진짜 대문짝만하게 실릴 거야. 소원 성취하겠네.”

“야!”

“매직 찾자.”

“블리스!”

“난 한다면 해! 네가 원한다는 게 그 정도도 못할까 봐?”

“안 돼! 하지 마! 내 조국과 내 명예와 있는지도 모를 내 가족을 쪽팔리게 만들지 마!”

“알 게 뭐야?”

“야!”

블리스라면 한다. 그냥 말만이 아니라 진짜 하고도 남는다. 그가 대넌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분명히 한다.

순간 내일 아침 타블로이드를 장식할 블리스의 사진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이마에 진 케이먼이라고 쓴 블리스의 얼굴은 엽기다. 블리스도 자신이 그럴 만한 배짱이 없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거다. 하여간 시간이 원수다. 너무 오래 알아 온 게 죄다.

“야, 타임! 노먼 안 만난다고는 못 하겠지만, 하여간 미안해. 그만!”

블리스는 분명 진이 이렇게 나올 건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노먼을 만나겠다고 우길 줄은 몰랐던 터라 버럭 화를 냈다.

“너, 그렇게까지 해서 그 녀석을 꼭 만나야겠어?”

“어떻게 해? 하나밖에 없는 친군데!”

“네가 왜 친구가 걔 하나야? 대니, 맷, 로니, 제니스, 그리고 에이먼하고 클랜, 클레어는 또 뭐야? 우리 형제들도 전부 네 친구 아냐?”

“그건 그렇지만…… 걔는 좀 특별한 친구란 말야.”

슬슬 기어들어가는 진의 음성에 블리스가 진을 내려다보며 살짝 이를 드러내며 살기를 발한다.

“특별히 죽여 버리고 싶은 친구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네가 소개해준 친구지만 노먼은 처음으로 내가 직접 사귄 친구란 말야.”

그건 분명히 맞다. 진이 하도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 학창 시절부터 진의 사교 관계는 블리스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단지 외관뿐이 아니라 성격과 인품까지 모두 본 후 진짜 괜찮은 인간들만 진에게 소개를 해주었고, 조금이라도 불순한 의도로 접근을 하거나 사생활이 문란하거나 진에게 상처 줄만 발언을 할법한 인종 차별주의자 내지 계급차별주의자는 블리스도 전부 친구 목록에서 쳐냈다. 진이 유일하게 블리스가 같이 다니지 말라는 데도 같이 다녔던 건 노먼뿐이었다. 사실 노먼 자체는 나쁘지 않다. 성품도 좋고 집안도 좋고, 사상이나 종교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발상들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건 클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스가 노먼에게 적대감을 보인 건, 노먼이 진심으로 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 역시 노먼의 재능을 높이 사며 존경하고 있었기에 위험해서, 떼어놓으려던 거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들 네 친구야. 노먼만 네 친구라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나는? 나는 뭔데?”

“너야 지금은 친구가 아니지.”

“그럼?”

“애인?”

그 말에 순간 블리스의 살벌하게 굳었던 얼굴이 화사하게 풀려간다. ‘애인’이라는 한 마디가 이렇게나 기분이 좋을지 몰랐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겠다, 이거지?”

“사실이니까. 하여간 일주일 간은 애인이잖아.”

“거기 일주일이 왜 붙어?”

“일주일 뒤에 생각해본다니까. 너,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일주일 뒤에 생각해본다고 했다?”

아직 확실히 답을 내린 건 아니라는 진의 말에 블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얄미운 자식.”

“누가 할 소리를.”

일단 휴전 상태로 들어서자 진은 책을 들고 다시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로 가 책을 내려뒀다. 그러다 그 옆에 놓인 커다란 갈색 상자를 보곤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슬쩍 상자의 뚜껑을 열어봤다.

“아무리 봐도 진품 같은데…….”

라며 진이 상자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블리스가 재빨리 달려와 손을 뻗어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모조야. 절대 모조야. 신경 쓰지 마.”

블리스의 강한 부정에 진이 눈을 들어 블리스를 바라보며 묻는다.

“……대니, 뉴욕 왔어?”

갑자기 나온 다니카의 애칭에 블리스는 상자 뚜껑을 세게 내리누르며 재빨리 답해주었다.

“아니, 아직 폴란드에 있어. 왜?”

“감정 좀 부탁하게. 걔라면 뭔가 알 거 아냐. 폴란드 숙소 전화번호 알아?”

블리스도 진이 다니카를 찾을 줄 알았다. 진이 거래하는 보석상은 꽤 많지만, 그렇다고 저 소심한 진이 저걸 들고 보석상에 차 감정을 의뢰할 리 없으니, 분명 까마귀를 찾을 거라 여겼었다.

“내가 어제 통화했어. 그런데 오늘 다른 데로 옮긴대. 파볼 데가 의외로 많은가 봐.”

“그래?”

“응. 걔야 반짝이는 거 있는 데는 어디든 날아가는 까마귀잖아. 그냥 세르게이에게 돌려주고 말아. 아니면 내가 돌려줄까?”

은근슬쩍 그러기를 바라는 블리스의 청에 진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지. 내가 받았는데 널 통해서 돌려주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럼 에이먼한테 부탁해.”

“그것도 예의가 아니지. 나중에 엘리 만나면 주지, 뭐. 밥이나 먹자.”

진이 세르게이를 만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엘레나를 만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속을 알 수 없는 세르게이보다는 속이 훤히 보이는 엘레나가 낫다.

“……그래.”

상자에서 관심을 옮긴 진은 먼저 나서서 침실을 나서기 위해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블리스를 돌아봤다.

“아, 그리고 너 하나 약속해.”

“뭐?”

“오늘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기.”

“나야 늘 네가 시키는 대로 했지.”

“언제?”

“언제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싱긋 웃으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섹시한 미소를 짓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감동하기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타고난 바람둥이야.”

“사랑이야, 사랑.”

더는 반박하기도 지겨워져 진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유난히도 화창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블리스의 집은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클랜의 결혼문제와 사라와 대넌의 이혼문제로 투닥거렸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진은 블리스의 집에 있던 옷을 대강 걸친 채였고, 블리스는 진의 청대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진의 강력한 요청으로 진이 운전을 해 차를 몰고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진의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을 일단 차를 주차한 뒤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러다 문득 진이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진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알았다니까.”

“좋아. 그럼 지갑 줘.”

“지갑?”

“줘.”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순간 잠시 머뭇거리던 블리스는 결국 진이 하라는 대로 얌전히 바지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내주었다. 그러자 지갑을 받아든 진이 그대로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지갑은 왜?”

“어차피 쓸모없어. 너 카드밖에 안 갖고 다니잖아.”

“카드 못 쓰는 데로 가는 거야?”

“응.”

“어딘데?”

“그냥 얌전히 따라 와.”

귀찮다는 듯 그렇게 내뱉은 진은 그대로 복도를 걸어 자신의 아파트를 향해갔다. 열쇠를 찾아 들고 문을 연 진은 좁은 투 룸의 아파트로 들어와 블리스의 손에서 받아든 책과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방으로 들어섰다. 모처럼 느긋하게 진의 방을 돌아보고 있던 블리스는 티셔츠 한 장과 모자 하나를 들고 방에서 나온 진을 보곤 주방에서 시선을 떼고 진을 돌아봤다.

“옷 갈아입으려고?”

이미 샤워를 하고 새 옷을 입고 나와서는 뭘 또 갈아 입냐는 듯 묻자 진이 블리스의 앞으로 다가와 블리스에게 말한다.

“벗어.”

“응?”

“옷 벗으라고.”

딱 잘라지는 그 말에 블리스가 싱긋 웃는다.

“뭐야? 대낮부터. 그렇게 급했어?”

“무슨 개소리야?”

“난 어디서라도 상관없어. 네가 적극적으로 나오니 기쁜데?”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안아오려는 블리스의 팔을 툭 치며 진이 들고 온 셔츠를 내민다.

“더위 먹었냐? 빨리 벗고 이거 입어.”

더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진이 들고 있던 티셔츠를 건네자 블리스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하여간 갈아입어. 그리고 이거 써.”

그러면서 진이 옆에 들고 온 모자를 블리스의 머리 위에 씌운다.

“모자까지? 왜? 선글라스도 씌우고 마스크도 하게 하지. 이 여름에 이게 뭐야? 내가 범죄자야?”

“네 얼굴 사람들이 알아보잖아. 그리고 시계도 풀어. 벨트도. 평범하게 하고 나가.”

“평범하잖아.”

“너무 비싸 보이잖아. 싸보이게 하고 다녀. 눈에 안 띄게 하라고.”

어쩐지 자신을 감추려고 하는 듯한 그 행동에 블리스는 장난처럼 진에게 물었다.

“뭐야? 너 내가 창피해?”

“응.”

“뭐야?”

너무 빠른 답에 블리스가 조금 기분이 상한 투로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쏘자 진이 싱긋 웃는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도 못 알아보게 하고 공원에서 데이트하자. 프리즐도 사먹고 커피 사마시고 길거리에서 파는 햄버거도 사먹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말하며 진이 셔츠 아래에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흔든다. 살짝 눈웃음을 치며 웃는 그 모습에 블리스가 불안한 듯한 얼굴로 진을 내려다본다.

“뭐야? 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뭐가?”

“나긋나긋하잖아. 너야말로 더위 먹었어?”

이번엔 블리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공격을 하자 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간다.

“너, 이러면서 나랑 연애를 하자는 거냐?”

“넌 튕기는 게 특긴데, 그렇게 나오니 이상하잖아? 무슨 생각이야? 너, 무슨 꿍꿍이 있지?”

“싫어? 싫으면 관둬.”

“그건 아니지.”

“그럼 닥치고 빨리 갈아입어.”

셔츠를 강제로 떠넘긴 진은 주방으로 가 커피를 찾았다. 약속한 바가 있기에 먼저 시계와 벨트를 풀어둔 블리스는 핸드폰만 청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은 채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진이 건넨 티셔츠를 막 목에 끼워 넣는데 벨소리가 울려왔다. 팔을 끼우며 블리스가 문을 돌아보자 진이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붓고는 재빨리 문으로 달려간다.

“누구세요?”

“배달 왔습니다.”

일요일 오전에 무슨 일인가 싶어 문 앞으로 달려간 진은 밖을 한 번 내다보고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누구시죠?”

“진 케이먼 씨인가요?”

노록색의 옷을 입은 네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진에게 그렇게 물었다. 남자들의 뒤에는 검은색의 천이 씌워진 커다란 상자가 하나 있었다.

“네, 제가 진 케이먼인데요.”

“네, 여기 사인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슬쩍 집안을 들여다본다. 뭔가 관찰하는 듯한 그 시선에 진은 불길한 예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병실에서 받은 선물들은 자신의 집에 옮겨두기는 너무 많아 우선 블리스의 아파트로 옮겨둔 채였다. 물론, 블리스의 일방적인 독단이었지만, 자신의 아파트로 옮겼다가 침대까지 점령당할 게 뻔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따로 온 배달이라면 아주 예감이 좋지 않다.

우선 수령확인서를 받아들긴 했지만 사인은 하지 않은 채 진이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보내신 거죠?”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입니다.”

역시나란 생각에 진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어제 받은 레드 다이아몬드-모조지만-의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또 뭔가를 보낸 모양이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남자들의 뒤를 살피자 이상하게도 큰 상자가 보였다. 그 위를 검은색의 천으로 덮어놓긴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가 너무 크다.

“배달 온 게 뭔데요?”

“……직접 보십시오.”

“아뇨. 먼저 얘기해주세요. 이번엔 또 뭐요?”

세 번쯤 당하고 나니 진도 이젠 여유가 생겼다. 사실 놀랄 건 어제 다 놀란 상태라 더는 놀랄 것도 없었다. 그 남자의 악의 없지만 악취미적인 선물에는 어느 정도 적응되어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뱀입니다.”

“……네?”

“보아 뱀입니다. 2미터 정도의 길이인데, 파충류를 키워본 적이 있으신가요?”

“네에?”

남자의 자세한 설명에 진이 기겁을 하자 진의 뒤에 서 있던 블리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남자들을 지나쳐가 상자를 뒤집어 씌워둔 검은 천을 거둬 올렸다. 순간 상자가 아닌 정 사각형의 대형 철창 안에 있던 노란색의 거대한 뱀이 쉬익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진은 재빨리 블리스의 등에 달라붙었다.

“……대단하군.”

블리스는 마치 남의 일인 듯 중얼거렸지만 진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냥 왔구나, 너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뱀의 존재 자체는 공포였다. 보통 크기도 아니다. 어젯밤에 동물을 좋아하냐고 묻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뱀을 보내냐…….

“아나콘다…….”

기가 질려 중얼거리는 그 말을 블리스가 수정해준다.

“보아 뱀이라잖아.”

“하여간! 저게 나중에 크면 어떻게 될지 알 게 뭐야? 나 잡아먹으면 어떻게 해? 커다란 소도 통째로 삼킨단 말야! 그리고 뱀 새끼 낳는 거 너 본 적 없지? 배에서 새끼 뱀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막 우수수수 떨어져! 새끼를 치면 15마리는 낳을 거고 그럼 걔들이 철창 밖으로 우르르 나와서 식사 대신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

“안 잡아먹어.”

“어떻게 알아?”

“보아 뱀은 순한 편이야.”

“순해봐야 뱀이지!”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이걸 아파트에서 키우라고? 굉장히 손이 많이 갈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또 다시 상상 모드로 돌아가 지금까지 본 모든 크리처물들을 끄집어내는 진을 바라보며 블리스는 혀를 찼다. 어차피 영화는 영화지만 문제인 게 그 크리처물이나 괴수물들의 대부분이 얼번 레전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었다. 집에서 키우던 악어나 뱀을 버렸더니 환경오염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생장을 해 인간들을 잡아먹는다는 류의 엘리게이터 같은 영화의 저반은 얼반 레전드였다. 그 외에도 블러디 메리나 캔디 케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진이 그런 영화를 아주 많이 보면서 또 그런 기담까지 미친 듯 듣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아파트에서 키울 수 있는 동물은 아니라서요.”

블리스가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부드럽게 거절의 말을 건네자 그들 역시 

“네, 그렇긴 하네요. 주소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남자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크기의 보아 뱀을 택배기사들이 들고 왔을 리는 없으니, 남자도 아마 뱀에 대해서라면 전문가일 것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블리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어서 그 흉물스러운 걸 들고 꺼지라는 듯 말을 걸었다.

“세르게이 씨께는 진이 직접 말씀드릴 테니 가져가 주시겠어요? 동물보호 단체에서 감시 나오기 전에 같은 층 분들께 고소당할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남자들도 상황을 납득한 듯 다시 검은 천을 씌운 철창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진이 미친 듯 그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거 혹시 나한테 쇼에 나오라는 거 아닐까?”

“무슨 쇼?”

“목에 뱀 감고, 피리 불면서…….”

하얗게 질린 진을 돌아보며 블리스가 그 상상을 확 끌어내린다.

“그건 코브라지.”

“보아 뱀도 할지 알 게 뭐야?”

“거기서 끝. 이제 뇌 좀 닫아. 나가자.”

더 두다간 안도로메다까지 갈 것 같아 블리스가 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진이 뒤를 따르며 블리스의 팔을 잡아끈다.

“내가 지금 뇌를 닫게 생겼어? 대체 뭐냐고? 저 사람, 왜 저래?”

“내가 알겠냐?”

“저런 걸 왜 나한테 보내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너 그 사람 잘 안다며? 난 그 사람 지금까지 딱 두 번 봤거든?”

진의 정보력은 상당하지만 러시아 마피아란 존재가 하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터라 세르게이 네브즐린에 대해서까지는 아직 자세히 캐내지 못한 채였다. 애초에 블리스의 고객이 아닌 사람이니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저 남자랑 엮였는지 모르겠다. 진짜 걸려도 더럽게 걸렸다.

“……하여간 들어가자. 나중에 얘기 좀 해봐야지.”

“제발 어떻게 좀 해! 너 지금 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뱀?”

“아니! 저 뱀을 보고도 납득하는 내 자신이야!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어. 뱀은 무섭지만 그걸 보낸 사람이 세르게이라는 말을 그냥 납득해버렸단 말야!”

진은 진짜 아주 큰일이라도 생긴 듯한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블리스 역시 납득했다.

“……큰일이군.”

“너 지금 남의 말하냐?”

“……일단 내 일은 아니지.”

“블리스,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아니.”

“뭐야? 나 좋아한다며?”

“사랑하지.”

능글맞게 웃으며 블리스가 말을 자르는 사이 진의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진이 어깨를 잔뜩 경직시킨다.

“전화 받아.”

아무래도 세르게이일 것 같다는 예감에 블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꺼내 든다.

“세르게이야.”

“받아. 그리고 정확히 얘기해. 다시는 선물 보내지 말라고. 그 사람 선물은 민폐야.”

“그래도 성의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블리스를 타박하며 핸드폰을 꺼내든 진은 길게 심호흡을 한 뒤 폴더를 열었다.

“네.”

「선물은 마음에 드나?」

“……네, 저기 그런데요. 감사하긴 한데 제 아파트에서 키울 만한 동물이 아니라,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집에 있는 시간도 거의 없고, 이렇게 좁은 데서 키울 녀석이 아니라서요.”

진이 애써 상냥한 어조로 고사를 하는데 세르게이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집이 문제인 건가?」

“집도 문제지만, 돌봐줄 사람도 문제죠.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규모면 되지?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내가 보내주지. 아파트보다는 저택이 낫겠지만…… 그럼 출근이 힘들겠지? 아니지. 이 김에 그냥 우리 저택에 들어오는 건 어때?」

역시나 그의 결론은 하나였다. 이러려고 뱀을 보낸 거 아닌가 하는 의심에 진은 재빨리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역시 전 하던 일이 좋습니다. 그리고 집을 옮길 생각도 없고요.”

「그래?」

“네.”

이미 스카웃 제의 거절했잖아, 이 이간아! 라고 소리치는 걸 겨우 참으며 진이 부드럽게 답을 하자 잠시 후 세르게이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네. 호의는 감사합니다.”

「그럼, 청혼을 하지.」

“네?”

「결혼은 안 될 테니, 일단 동거부터 시작하지.」

“네?”

「짐은 언제 옮길 텐가?」

“아니, 그게…… 제가 왜 당신하고 동거를 해요?”

「싫은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저 지금 당신 두 번 얼굴 봤거든요? 만난 게 아니라, 딱 두 번 얼굴 봤다고요!”

「그래? 그럼 데이트부터 하지. 어디가 좋은가? 시간이 날 때를 알려주면 스케줄을 맞춰보지.」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무서웠다. 이 남자가 무서워서 이상한 선물을 줘도 제대로 거절도 못하고 전부 받아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 남자가 전혀 무섭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미친 남자다.

“저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용기를 얻은 진이 있는 힘껏 소리치자 세르게이가 느긋하게 답한다.

「그래? 누구지?」

“그건 사생활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알아내지.」

“알아내서 뭐하게요?”라는 질문이 진의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뭐라고 답할까 무서워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물어보면 “죽이려고.”라는 답이 나올 것 같았다.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어 잠시 기다리자 수화부 저편에서 여전히 말귀 못 알아들은 남자가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언제가 좋지? 데이트를 하려면 저녁때가 좋으니, 퇴근 후에 만날까?」

“저, 애인 있다니까요!”

「양다리 쯤 걸쳐도 돼.」

“전 싫어요.”

「내 쪽이 훨씬 괜찮을 텐데?」

“전혀! 그런 생각 안 듭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한 뒤 세르게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순간 진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이 몸을 떨었다.

“뭐래?”

블리스가 옆에 서 있다 이젠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진의 얼굴에 블리스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순간 진이 블리스의 멱살을 쥐었다.

“너, 말해봐!”

갑작스러운 진의 공격에 블리스는 멀뚱히 진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뭘?”

“내가 그렇게 매력적이야? 나 그렇게 매력 있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손을 들어 진의 이마를 짚었다.

“또 열 나냐? 왜 그래?”

“세르게이가 나한테 청혼을 했다고!”

“응?”

“결혼, 아니 동거하쟤!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글쎄…….”

“너 지금 남의 얘기하는 거 아니라니까!”

“……일단 진정해. 내가 잘 얘기해볼 테니.”

“지금 문제가 뭔지 알아? 저 사람이 어떤 목적이든 날 마피아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거라고! 알겠어? 나 마피아가 될지도 몰라! 내가 마피아 되면 너라고 좋을 것 같아?”

“걱정 마. 그럴 일 없으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 사람, 진짜 이상해!”

히스테리 직전에 몰린 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블리스는 그대로 진을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조금 진정이 된 듯 눈빛이 누그러진다.

“걱정 마. 걱정 말고 나가자. 데이트하자면서 이게 뭐야?”

“하지만, 그 사람 진짜 이상해. 무슨 청혼을 그따위로 해? 청혼을 하려면 뭐든 있어야 할 거 아냐?”

“원래 이상하다니까. 하여간 진정하고 나가자.”

블리스는 계속 진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진은 이번만은 진짜 충격이 큰 듯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혹시, 저 원석 덩어리가 예물인 거 아냐?”

“……모조라니까.”

블리스가 딱 잘라 말하며 슬쩍 테이블 위의 상자를 돌아보곤 그대로 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가자. 너, 안 되겠다. 일단 나가서 머리 좀 식혀.”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 블리스는 일단 진의 팔을 잡아끌고 모자를 뒤집어쓴 채 집을 나섰다. 멍한 얼굴로 블리스의 팔에 끌려 따라 나오는 진을 돌아보며 블리스는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지금은 노먼이 아니라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문제인 듯했다. 

“일반인이 된 것 같아.”

근처의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대강 점심을 때우고 공원의 산책로를 걷던 중 블리스가 그렇게 말을 던져왔다. 아파트를 나선 후까지 한 동안 패닉 상태였던 진은 블리스가 커피를 사서 안겨주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라 블리스는 열심히 그런 진을 현실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냥 뒀다간 그 뱀의 32대손의 탄생 후에 아나콘다 버전까지 상상할 진이었다.

“일반인은 무슨? 네가 왕족이냐?”

“왕족 비슷하지. 귀족은 되잖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진은 입술을 툭하니 내밀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시대였다. 예전처럼 왕, 귀족, 평민, 노예라고 딱 잘라 나누는 건 아니지만 대신 재벌, 상류층, 중산층, 서민, 최하층민이라는 계급이 존재한다. 거기서 굳이 따지자면 블리스는 왕족에 가깝다. 엄청난 부와 명예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이 나라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왕족들은 원래 왕족들하고만 친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옛날 얘기고.”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은근히 손을 잡아왔다. 크고 따뜻한, 그 손의 감촉에 진은 놀라 조금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진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블리스가 손을 세게 잡아 쥐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산책로를 걷는다.

“그러고 보니, 에이먼이나 너나 클랜도 친구는 다양한데…… 클레어는 집에 친구 데려온 적이 거의 없다?”

“뭐, 우리 친구들이 다 클레어 친구니까. 걔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아버지 사업 잇겠다고 여자애들하고는 안 놀았어든. 여자들 정보통이 얼마나 빠른지를 몰라. 내가 퍼트린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오는 속도를 봤을 때, 여자들은 하루 동안 거의 200명을 거쳐 오는데 남자들은 그래봐야 10명 정도거든.”

“걔는 성격이 그러니까, 뭐.”

진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블리스가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 집처럼 남자들만 드나드는 집은 없을 걸?”

“다니카 있잖아.”

“걔는 남자고.”

딱 잘라지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잠시 뭔가를 떠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하긴, 작년에 봤을 때 보니 더 멋있어졌더라. 팔 근육이 우람해졌어. 점점 남자다워져.”

대학 시절 친구들이 붙여준 ‘안기고 싶은 가슴’ ‘매달리고 싶은 어깨’ ‘기대고 싶은 팔’이라는 다니카의 별명을 떠올리며 진은 진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아주 우락부락한 건 아니지만 여자치고는 팔과 다리의 근육이 유별난 친구였다. 거의 마돈나 급의 근육을 자랑하니 할 말 다 한 거다. 

“걔는 남자라니까.”

“응, 걔는 진짜 멋져. 에이먼하고 다시 만나면 좋을 텐데.”

“그건 무리일 걸.”

“왜? 에이먼, 대니 좋아했잖아.”

진은 지금까지도 에이먼이 다시 대니를 만났으면 하고 있었다. 대니는 워낙에 와일드한 형님인지라 세심하고 신경질적인 에이먼을 잘 보살펴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니 정도의 대인배라면 에이먼의 사소한 취미 정도는 아주 너그럽게 포용해줄 것이다. 대니 본인이 보석에 열을 올리는 취미가 있는 만큼, 에이먼의 인형에 대한 열정을 받아들이고 장려해줄 것이다. 둘이 결혼을 하면 아마 인형들의 옷이나 악세사리에 진짜 보석들을 박아 온 집안에 진열해두고 행복해할 것이다. 아마 잘 때에도 대니는 보석을 끌어안고, 에이먼은 인형을 끌어안고 잘지도 모른다.

그렇게 완벽하게 아귀가 들어맞는 커플도 또 보기 힘든지라 진이 진심으로 다시 만났으면 하고 소원하자 블리스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그게…… 형이 맏아들이잖아.”

“그렇지.”

“안 그래보여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 첫째라는 게 워낙에 그렇잖아. 나랑 클랜, 클레어는 한 살 차이지만 에이먼은 나랑 세살 차이라, 나이 차도 좀 있었으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동생들은 자기가 다 돌봐줘야 한다고 여겼던 모양이야. 혹시라도 우리가 엇나갈까 봐 자기가 모범을 보여야하니 숨통이 막혔겠지.”

“……에이먼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가끔 보면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성격이지만 에이먼은 기본적으로 그의 가족들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었다. 거기다 은근히 고지식하기까지 해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린 시절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동생은 블리스와 클랜이었다. 노먼 정도만 돼도 그다지 동정이 가지 않았겠지만, 블리스와 클랜을 세트로 동생으로 뒀으니 스트레스 받을 만하다. 그가 이상한 데로 빠지지 않고 제대로 자라준 게 대견할 뿐이다.

“아버지는 좋은 분이지만 워낙에 바쁘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로 고만고만한 동생들 챙기느라 자기 생활은 거의 없었거든. 거기다 우린 말썽만 부리고 말은 더럽게 안 들고 하니, 다니카를 만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아.”

“대니가 성격이 좋지.”

푸근하면서도 대범하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해주고 충고를 할 때에는 가차 없지만 위로를 할 때에는 더없이 다정한 대니는 에이먼에게는 최상의 짝이었다. 에이먼처럼 완벽한 남자에겐 대니처럼 한없이 푸근히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에이먼의 동생인 블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그보다는…….”

“그보다는?”

“……대니를 친형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어. 원래 첫째들이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약하잖아.”

그 말에 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니가 상대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길을 걷던 중 블리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한참 좋은 분위기라 진이 뭔가 해 고개를 들자 블리스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서둘러 시선을 돌린다.

“진, 저기 숲으로 들어가 보자.”

“숲은 왜?”

“좋은 공기를 맞아야지. 우리에겐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강제로 진의 어깨를 안은 채 방향을 돌려 산책로가 아닌 산책로 한쪽의 나무가 그득한 곳으로 들어서려 하자 진이 고개를 갸웃한다.

“여기도 공기 좋은데?”

“숲 안쪽이 더 좋을 거야.”

억지로 웃으며 진을 끌고 그 안에 들어가려는 블리스의 행동에 진은 걸음을 멈추곤 미심쩍은 듯 미간을 좁혔다.

“……너 거기서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이라니?”

“SVU보면 항상 저런 으슥한 데서 사건이 나던데.”

“……내가 범죄자냐?”

“처음부터 범죄자인 사람이 어디 있어?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자 되는 거지. 뭘 하려고?”

“아무 것도 안 할 테니 가자. 빨리.”

“갑자기 왜 그래?”

진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려하자 블리스가 강제로 진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고정시킨다. 그 행동이 더 이상해 진이 블리스를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어? 어어? 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에 진이 자신의 목을 고정시킨 블리스를 밀어내고 그쪽 방향을 돌아보자 블리스가 낭패라는 얼굴을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 엘리?”

진이 놀란 듯 그쪽을 바라보자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있던 엘레나가 상인에게서 핫도그를 받아들더니 핫도그를 입에 물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보고 달려오듯 긴 금발을 휘날리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를 하는 엘레나를 보고 진은 기겁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강아지는 강아진데 대형견이었다. 길이가 장난이 아니다. 180이 넘어가는 장신의 황금분할의 몸매를 가진 수퍼모델이 달리는 모습은 근사하긴 하지만 어쩐지 무서웠다.

물론, 엘레나는 오늘도 근사했다. 오늘은 긴 금발을 풀어 내리고 앞머리를 뒤로 넘기려 삔 하나만 꽂고 분홍색의 티셔츠에 청치마를 입고 플랫슈즈를 신은 모습은 말 그대로 인생이 화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근사했지만, 볼이 터져라 핫도그를 물고 한손에는 아이스크림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엘리, 먹는 거 물고 뛰지 마!”

엎어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진이 만류했지만, 이쪽이 도망이라도 칠까 엘레나는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다리가 기니 속도도 빠르다. 기가 질린 얼굴을 하고 진이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자 후다닥 달려온 엘레나가 진의 앞에 서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내민다. 받아달라는 뜻인 것 같아 진이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받아들자 그제야 입에 문 핫도그를 빼고 눈을 반짝거린다.

“우와~ 오빠가 이 근처에 있을 거라더니 진짜 있었네요.”

“응?”

“오빠가 진 위치 추적해준다고 했거든요.”

“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음 이어진 엘레나의 말에 진은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왜 자신의 위치를 추적한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이 허락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옆에 남자 누구예요? 또 바람 피워요?”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며 엘레나가 또릿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린다.

“……타조, 나 못 알아보냐?”

한 달에 걸쳐 스토킹을 하며 쫓아다니던 상대를 보고 모자 하나 썼다고 “누구예요?”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 블리스가 툭하니 묻자 핫도그를 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레나가 이내 블리스를 알아보곤 탄성을 내뱉는다.

“아! 블리스?”

“그래.”

“와우, 잘 어울리네요.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어.”

보는 눈이 있는 애가 그렇게 간절히 사랑하던 남자를 못 알아보냐, 라고 하려다 블리스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세르게이가 왜 진의 위치를 추적해?”

“왜긴요? 청혼할 거라던데요?”

“응?”

“스카웃 제의 거절했다면서요? 그래서 청혼한대요.”

진짜 당연하다는 듯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블리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잠깐,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는데 왜 청혼을 하지?”

“왜긴요. 어떻게든 우리 집에 데리고 오려고 하는 거죠. 나랑 같이 백화점 가요.”

그렇게 말하며 핫도그를 입에 물고 있던 엘레나를 바라본 진은 서서히 흘러내리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쳐다봤다. 더운 날이었다. 바람이 불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오래 들고 다닐 날씨는 아닌지라, 차라리 아이스크림을 먼저 먹지 라는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보자 엘레나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곤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진과 아이스크림을 번갈아보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한다.

“그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요.”

작게 웅얼거리는 듯한 그 말에 진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그거, 먹어도 된다고요. 먹고 싶어 했잖아요. 대신, 나랑 백화점 가요. 그거 뇌물이에요.”

아주 큰 선심이라도 쓰듯 어깨를 쭈욱 펴는 엘레나를 보며 진은 진심으로 엘레나의 어휘력에 감탄했다. 타조도 모르는 애가 어떻게 뇌물이라는 단어를 안 걸까?

“너, 뇌물이 뭔지 알아?”

“그럼요.”

“……책 많이 읽었구나? 많이 늘었네.”

“집에서 늘상 쓰는 단언데요? 아빠랑 오빠들이랑 자주 뇌물 얘기해요. 상원의원들에게 찔러줘야 한다고요.”

어깨를 으쓱하는 그 말에 진은 역시 사람에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건가를 통감했다. 대체 그 남자들, 이 어린애 앞에서 무슨 말들을 하는 걸까.

이상한 신세계를 본 기분에 진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나, 차가운 거 안 좋아해. 아이스크림 녹길래 이것부터 먹으라고 쳐다본 거야. 먹어.”

저렇게나 먹는 걸 좋아하는 애한테서 먹을 걸 빼앗을 수는 없기에 진이 아이스크림을 내밀자 기뻐할 줄 알았던 엘레나가 순식간에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진을 바라본다.

“나랑 백화점 가기 싫어요?”

아무래도 엘레나는 먹는 것보다 쇼핑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엘레나와 백화점에 갈 이유도 없고, 아이스크림도 안 좋아하기에 진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망설이자 블리스가 진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엘레나에게 건넸다.

“미안하지만,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이야. 그러니까 백화점은 너 혼자 가.”

“어! 그럼 저도 같이 데이트해요.”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손을 번쩍 든 엘레나의 말에 블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날카롭게 일침을 가한다.

“데이트를 누가 셋이서 해?”

“하면 안 돼요?”

“그래.”

“……전 했는데요?”

“누구랑?”

“체이스 사귈 때, 걔가 원래 데이트는 셋이 하는 거라고 매일 여자 데리고 나왔어요.”

순간 진과 블리스는 동시에 경악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 체이스란 인간이 아무래도 7개월 전 백화점 총기 미수 사건의 상대 남자인 모양인데, 애한테 그렇게 가르쳐줬나 보다. 기도 안 찬다.

“너 그걸 그냥 뒀냐?”

진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그렇게 묻자 엘레나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뭐예요? 원래 셋이 하는 게 아니었어요?”

“너 텔레비전 안 봐? 데이트를 누가 셋이 해?”

“그건 텔레비전이니까 그렇죠. 원래는 셋이 하는 거라고, 체이스가…….”

거기까지 말하던 엘레나는 앞에 서 있던 블리스와 진의 경악한 얼굴을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콘을 우두둑 일그러트렸다.

“체이스…… 이 개새끼를 그냥…….”

순식간에 순해 보이던 엘레나의 새파란 눈동자 위로 번들거리는 빛이 스쳤다. 첫 만남 외엔 늘 순해 보이는 엘레나만 봐왔기에 진은 그 놀라운 변화에 탄성을 내뱉었다. 괜히 마피아 딸이 아니었다. 얘도 한다면 하는 애다.

“참아. 이미 끝난 놈한테 뭘 미련을 가져? 그보다 백화점은 혼자 가. 데이트는 둘이 하는 거니까.”

진이 잠시 얼어있는 사이 블리스가 엘레나를 내쫓으려 말을 자르자 엘레나가 재빨리 진의 옆으로 붙는다.

“나도 같이 가요.”

자신은 상대하기 힘드니 재빨리 진에게 붙은 게 분명해, 블리스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리 데이트 중이라니까?”

“같이 해요. 사람 많으면 재미있잖아요!”

“우리가 피크닉 나왔는 줄 알아? 넌 네 친구들하고 쇼핑해.”

블리스가 다소 가혹한 투로 사납게 소리치자 진의 옆에 붙은 엘레나가 순식간에 풀이 죽어 고개를 푹 떨군다.

“애들이 같이 쇼핑하자고 해서 나왔는데…….”

“그럼 걔들하고 가.”

블리스는 가차 없었다. 일주일 전에 엘레나 무섭다고 자기에게 개망신을 준 인간이 맞다 싶어 진이 ‘너, 뭐야?’라는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는 사이 진의 옆에 있던 엘레나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애들이, 걔들이…… 우리 학교 치어리더팀 애들인데, 그저께부터 갑자기 말 걸고 같이 밥 먹자 하고 하더니, 오늘 쇼핑하자고 해서 나왔는데 이상한 거예요. 새벽같이 네일 케어하고 머리도 다 하고 파티 복장으로 나왔길래 뭔가 했더니 나와서는 계속 두리번두리번. 파파라치 왜 안 따라오냐고 하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저랑 다니면 파파라치에 찍힐 것 같아서 나왔대요. 그러면서 파파라치 없으면 가방 들라고…….”

훌쩍거리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중얼거리는 엘레나를 본 진은 진심으로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졌다.

“……걔들한테 문자 보냈어?”

“네.”

순간 진은 상황을 전부 납득해버렸다. 문자 몇 번 오가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엘레나가 보기와는 달리 먹통에 착하고 순한, 정이 굶주린 애라는 사실을 파악한 치어리더들이 얘를 봉으로 알았나 보다. 데리고 다니면 예쁘고 근사하니 악세사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고, 거기다 의외로 순해 빠져서 자기한테 잘해주면 다해줄 것 같으니, 파파라치도 찍힐 겸 자랑도 할 겸 데리고 나온 거다.

요즘 아이들이 아이들 같지 않게 영악하고 계산속이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수퍼모델 엘레나 네브즐린에게 가방을 들게 하곤 얼마나 희희낙락했을까. 자기 일은 아니지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엘리, 그런 애들하고 친구 하지 마. 왜 그런 애들하고 만나? 지들이 킴 카다시안이야? 찍히려면 지가 연예인하지. 왜 너한테 들러붙어? 아니지, 킴은 양심이 있어서 떠보려고 패리스 하녀 노릇이라도 했지. 걔들은 뭐야?”

본 적은 없지만, 그 애들은 연예계 데뷔를 위해 패리스 힐튼의 가방을 들어주던 킴 카다시안보다도 더 악질적인 애들이었다. 킴은 차라리 원하는 바가 분명했고, 그래서 하녀 소리까지 들어가며 패리스 힐튼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다 카다시안 쇼까지 하면서 연예계에서 꽤 성공을 거뒀지만, 그 애들은 엘레나를 노골적으로 이용하며 무시하기까지 했다. 악질을 넘어서 저질인 애들이다.

진이 훈계하듯 말하며 화를 내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엘레나가 방긋 웃으며 진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방긋 웃으며 경악할 만한 사실을 전해준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쇼핑하는데 다이아몬드 목걸이 훔쳐서 걔네 가방에 넣어두고 왔어요.”

“……뭐?”

“꽤 비싼 거니까 아마 지금쯤 경찰서로 넘겨졌을걸요. 거기 제가 단골이라서 해보는 척하다 애들 가방에 전부 넣어뒀어요. 잘했죠?”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엘레나의 얼굴에 진은 잠시 그럴 만했다고 말해줘야 하나, 어른답게 그래선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를 해야 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잘했어. 그 정도는 해도 돼.”

“그쵸? 오빠가 그런 애들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어요. 나쁜 애들이라고.”

세르게이는 대체 여동생을 어떻게 가르친 걸까. 애클랜드 가의 가정교육도 특이하지만 네브즐린 가의 가정교육은 그보다 더 특이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복수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함무라비법전을 숭상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나름 일리는 있다.

“그러니까 같이 쇼핑해요. 진, 나온 김에 양복도 사요. 결혼식 생방으로 방송한다면서요? 근사하게 하고 가야죠.”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엘레나가 콘까지 다 먹은 뒤 이번에는 솜사탕을 조금 떼어 진의 입에 넣어줬다. 엘레나가 먹을 걸 주다니, 뭔가 참 신기한 기분에 빠진 진은 하객 명단에 엘레나의 이름을 추가한 걸 백 번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천천히 답해주었다.

“난 그날 행사 진행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어? 그럼 안 되죠! 나랑 같이 들어가야죠! 사진 찍어야죠, 사진!”

같이 들어가자는 말도 좀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진은 설마, 설마 하는 기분으로 옆에 바싹 붙은 엘레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너 결혼식에 레드카펫을 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안 깔죠. 그래도 포토존은 있을 거 아니에요.”

역시나였다. 레드 카펫까지는 안 가서 다행이지만-사실 백색의 카펫을 깔기는 한다.- 그래도 역시 엘레나는 결혼식에 대해 제대로 잘못 알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옷에 신경을 쓰더라니…….

“엘리, 포토존 같은 건 없어.”

“에에? 왜요? 왜 없어요?”

“왜는 결혼식이니까 없지.”

“뭐예요! 말도 안 돼! 포토존 만들어요! 만들어내요!”

“……영화제가 아니라니까.”

“그래도 원래 다 사진 찍혀 나오고 하잖아요!”

“……그건 파파라치의 일종이지. 그리고, 클랜하고 재키는 연예인이 아냐.”

“연예인들 많이 오잖아요.”

“안 와.”

하객 명단을 만든 진이 장담하건대 연예인은 엘레나 네브즐린 하나뿐이었다. 셀리브리티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은 대부분이 신랑신부와 친분이 있는-신랑신부가 엄청난 팬이거나, 함께 마약하던 사이라든가 하는- 연예인들인데, 재키와 클랜은 연예인들과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 그러니 하객은 자연히 정재계의 인사들과 클랜과 재키의 대학 동기, 그리고 블리스와 에이먼, 클레어의 동료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대넌과 친한 감독 두세 명이 초대받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오천 명이 넘어가는 하객 명단을 진이 줄이고 줄여 천 명으로 압축한 만큼, 엑기스들만 모이는 자리다. 말 그대로 최상류층의 명사들만 오는 곳이니 연예인들이 낄 자리가 없다. 사실 엘레나를 하객 명단에 추가한 것도 진의 월권이었다. 그리고 진은 자신이 그 정도 월권은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개고생을 시키면서 그것도 못하게 하면 양심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다행히 애클랜드 가의 사람들은 양심은 있는 편이었다.

“그래도 파파라치는 오는 거죠?”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엘레나의 무음에 진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사진에 목숨 걸었냐?”

“예쁘게 하고 갈 건데 썩히긴 아깝잖아요.”

“그래.”

진이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블리스가 진을 바라보며 심각한 어조로 묻는다.

“잠깐…… 엘레나가 왜 클랜 결혼식에 온다는 거지?”

“아, 내가 초대했어.”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진이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블리스를 바라보자 블리스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한숨을 내쉬고 만다. 블리스도 양심은 있었다.

“하여간, 타조, 넌 집에 가든지 너희 오빠들하고 쇼핑하든지 해. 우린 우리끼리 데이트할 거야.”

“에에? 블리스, 너무하잖아요!”

“너무한 건 네 머리가 더 너무해.”

블리스의 폭언에 진이 놀라 말을 막으려는데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블리스를 쳐다본다. 

“제 머리 안 어울려요? 아빠가 본 중에 최고로 예쁘다고 했는데?”

“그 머리 말고, 네 뇌.”

“제 뇌가 왜요?”

“데이트 중인 사람들한테 끼어드는 건 무슨 매너야?”

“같이 하면 되잖아요? 나랑 진이 하고, 블리스랑 진이 하고, 또 블리스랑 나랑 하고. 세르게이가 그렇지 않아도 진이랑 데이트 해보라고 했어요.”

갑자기 나온 세르게이의 이름에 진이 화들짝 놀라 엘레나에게 물었다.

“나랑 왜?”

“몰라요. 그냥 데이트해 보래요.”

“그러니까, 왜?”

“모르죠.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우리 아빠도 몰라요.”

확실히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들도 그 속을 모를 정도라니……. 진은 진심으로 네브즐린 남매와 연결된 자신의 박복함에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그 집안하고 연결이 됐을까.

“같이 쇼핑할 거죠?”

진이 고뇌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한 엘레나가 진의 왼쪽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을 하자 진의 오른쪽에 선 블리스가 엘레나의 머리통을 밀어낸다. 그 손길에 엘레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블리스를 올려다본다. 새파란 눈동자가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걸 본 진은 놀라 재빨리 블리스의 손을 잡으며 블리스를 달랬다.

“한 시간만, 응?”

“……너…….”

“한 시간만 하자. 나도 뭐 살 거 있고. 응?”

안 하던 재롱까지 피우며 블리스를 달랜 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가는 블리스를 보며 웃어 보였다.

진짜 한 시간만 쇼핑할 셈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진은 자신이 얼마나 안이했나 하는 생각에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많이 사도 보통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 진이었기에 여자들의 쇼핑 시간이 기본 3시간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여자 중에서도 엘레나는 아주 특별한 인종이었다. 

결국 화창한 일요일 오후에 진과 블리스는 엘레나의 쇼핑백을 들고 5시간 동안 백화점을 배회해야 했다.

“내가 뭐랬어?”

“……미안.”

엘레나를 마중 나온 차를 보낸 뒤 블리스가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자 진은 풀이 죽은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원피스 하나 사는 데에 1시간, 티셔츠 두 장 사는 데에 1시간, 그리고 구두 두 켤레 사는 데 한 시간, 그리고 가방과 기타 악세서리를 고르는데 두 시간이 추가로 걸릴 줄은 몰랐었다. 클레어나 사라의 경우는 대부분 집으로 사람들을 부르거나, 매장에 나와도 30분 안에 물건을 고르는 일이 대부분이었던지라 그렇게 오랫동안 옷을 고를 줄은 몰랐었다.

워낙에 타고난 옷걸이가 있어 뭘 입어도 예쁘던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는 걸까. 이럴 때는 차라리 매장을 통째로 쓸고 다니는 쪽이 낫다.

“모델이라 뭘 입어도 근사하던데 뭘 그렇게 고를까.”

안 어울리거나 몸의 약점이 여실히 드러나 고른다면 이해하지만 거의 완벽한 몸매에 얼굴을 가진 엘레나는 쓰레기봉투를 씌워나도 폼이 나 놀라울 정도였다. 마네킹에 걸어둔 옷이나 매장 벽에 있는 모델들보다도 훨씬 더 어울리고 근사함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옷감의 질과 색감, 길이, 자신의 피부색과의 조화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따지며 하나하나 까다롭게 옷을 골랐다. 본인의 수입도 수입이지만 마피아 집안이라 돈도 많을 텐데 왜 저러나 싶을 정도였다.

전문가의 눈은 달라도 뭔가 다른 건가 싶어 진이 멍한 얼굴로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블리스가 진의 셔츠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험악한 음성으로 말을 건다.

“……어쩔 거야?”

“뭘?”

“오늘 데이트. 내가 왜 타조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돌아야 하냐고? 너, 내가 짐 안 드는 거 알아, 몰라? 난 태어나서 내 쇼핑백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야.”

분명 그렇긴 하다. 블리스가 남의 짐을 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이트 중인 여자에게 줄 꽃조차도 자기 손으로 들지 않던 녀석이었으니까. 요 며칠 자신의 짐을 들어주긴 하지만, 그건 예의적인 일이었다.

“이미 한 걸 갖고 뭘 쪼잔하게 그래?”

“쪼잔한 게 아니잖아? 짐도 짐이지만 이 하루가 어떤 하룬데? 내가 하루 시간 빼기가 쉬운 줄 알아?”

“그냥 하루 쇼핑 잘 했다고 생각해.”

“내가 쇼핑한 게 아니잖아.”

“그럼 어쩌라고?”

“키스.”

주차장 내로 들어서던 블리스가 걸음을 멈추며 그렇게 말하자 진 역시 걸음을 멈추며 블리스를 돌아봤다.

“여기서?”

“그래.”

“야…….”

“빨리.”

“안 돼.”

“안 되면 여기서 안 움직인다, 나?”

“……집에 가서 해줄게.”

“안 돼. 여기서.”

“무슨 억지야? 사람들 많이 오는 주차장에서.”

“모자 썼잖아. 이 더운 날 네가 쓰고 다니래서 하루 종일 모자도 쓰고 다녔고, 엘레나랑 어울려서 쇼핑도 하고, 짐도 들어줬어. 그러니까 너도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그 말에 진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맞는 말이긴 하다. 어쨌든 블리스는 오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고, 그 귀찮은 쇼핑백까지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돌려줘야 한다.

“좋아. 대신 그냥 가볍게 한다.”

“상관없어.”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주변을 돌아본 진은 폐장 시간이 지나 한산한 주차장을 돌아본 뒤 재빨리 블리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됐지?”

“좋아. 그리고 다음은 손 잡고.”

“……차 바로 앞에 있거든?”

진이 불과 열 걸음 앞에 있는 차를 가리키자 블리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게 뭐?”

“……알았다. 모르겠다, 나도 이젠.”

어차피 하기로 한 연애 알 게 뭐냐는 생각에 블리스의 손을 잡은 진은 그대로 블리스와 함께 주차장을 가로질러 자신의 차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내일 상상도 못한 폭풍이 닥칠 걸 상상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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