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7 (7/13)

Chapter 7

고요한 회의실 안으로는 째각거리는 시계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애클랜드 사의 회의실을 차지하고 앉은 진은 바로 맞은편에 죽을상을 하고 앉은 사라와 킴, 대넌의 비서 세 명, 그리고 한쪽에 처박혀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클랜과 이 상황에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재키를 돌아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였다. 역시나 사고를 쳐도 대형으로 쳐놨다.

진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자 사라와 킴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저 두 녀석을 잡아먹든 볶아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다. 다 좋아.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모르지. 진이 알아서 해야지.”

여전히 죄책감은 전혀 없는 듯한 클랜의 반응에 진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이야기의 전개는 다음과 같았다. 플래티넘 판에 일일이 이름과 고객 넘버를 적어 만든 초대장을 엉뚱한 이름이 적힌 사람들의 초대장에 넣은 클랜과 재키는 다시 그 초대장들을 모조리 뜯어야 했고, 그 과정에 7장 가량의 초대장을 분실했다. 거기까지는 좋다. 다시 명단과 일일이 대조해 잃어버린 초대장을 다시 제작해 제대로 일을 시작하면 된다. 문제는 이 둘이 초대장을 도저히 못 찾겠다고 널브러진 건데, 나중에 3장의 초대장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초대장들을 파기해야 하는데 친절하게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고, 쓰레기통을 통해 나간 그 초대장 3장이 불행히도 파파라치의 손에 들어갔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이미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화스러움의 극치가 될 두 사람의 결혼식은 비공개로 치러지며 에이먼이 갖고 있는 채널의 웨딩쇼 「We`re married.」를 통해서만 독점 공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초저가 세트 두 놈이 파파라치에게 초대장을 내준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은 만큼, 파파라치의 수익도 대단할 것이고, 그 초호화판 결혼식 장면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일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거의 실신 직전 상태에서, 대넌과 브루스가 힘을 합쳐 클랜에게 킬러를 보내지 않을까 걱정 중이었다.

하지만 진은 클랜보다는 자신의 혈압이 더 걱정되었다. 클랜에 대한 살의가 바닥난 체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파파라치들한테 초대장을 내주고도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너, 지금 그게 할 말이냐?”

“이미 잃어버린 거잖아.”

“잃어버린 거라고? 그냥 준 거겠지! 너, 오늘 나랑 끝장을 보자! 아무래도 너랑 나랑 같이 죽는 게 낫겠다!”

진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험악한 기세로 소리치자 클랜이 어깨를 으쓱한다.

“진, 진정해. 아직 몸도 다 안 나았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

“네가 지금 그런 말할 처지냐? 날더러 어쩌라고! 너,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비공개 결혼식을 위해서 보디가드만 500명을 불렀다고! 내가 그 사람들 공수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뉴욕에 있는 모든 사설 경호업체의 사람들을 총동원해 교육까지 시키고 있다고! 그런데 뭐? 이제 와 어쩌냐고?

“미안해.”

“너 사람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만 하면 끝이야?”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채라 고함을 내지르던 진은 현기증을 느끼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재빨리 의자를 끌어다준 블리스가 진의 어깨를 잡고는 천천히 진정을 시킨다.

“진정해, 진. 우선, 카드부터 다시 제작하고 초대장부터 처리해. 그리고 에이먼한테 연락해.”

지금까지 침묵하며 듣기만 하던 블리스의 말에 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겨우 겨우 목소리를 내 묻는다.

“에이먼은 왜?”

“생방으로 날리게.”

“뭐?”

“아예 결혼식을 생방으로 중계하겠다고. 그게 낫지.”

그 말에 진이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떼고 블리스를 돌아봤다.

“……날 죽여라. 그 준비는 또 어떻게 하라고? 생방으로 날릴 거면 좌석 배치부터 전부 새로 해야 한단 말야. 결혼식이 무슨 프렌치 프라이냐? 햄버거야? 그냥 달라면 나오는 줄 알아?”

“내가 도와줄게.”

“돕긴 뭘 도와? 넌 회사에 가서 일이나 해. 에반이 과로사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어이, 우리 휴가야. 오너가 휴가를 줬는데 무슨 일이야?”

“에반이 과로사하면 귀신이 돼서 날 괴롭힐 거야. 휴가고 뭐고 취소하고 나중에 얘기하자. 우선 초대장부터 어떻게 해야지. 사라, 킴. 이제 들어가 봐요. 그리고 뒤에 비서 분들 제 지시대로 움직여주세요. 그리고, 클랜하고 재키는 내 일생일대의 소원이니 제발 돌아가라. 클랜은 사라 집까지 데려다주고, 재키는 제발! 내 소원이니 가서 네일 케어랑 스킨케어 받고, 그 머리카락부터 정리해.”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돌아보며 지시를 내린 진은 재빨리 전화기를 들고 에이먼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클랜의 결혼식을 날림공사로 치를 가능성이 점점 농후해지는 상황이었지만 블리스의 말이 맞다. 어설프게 파파라치들에게 사진을 내주느니 채널을 통해 아예 생중계를 하는 게 낫다. 어차피 초호화판이다. 보고 즐기는 결혼식이라도 돼야 한다. 

그래, 확실히 즐길 수는 있을 거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으로 봐선 결혼식 날 폭우가 내린다거나, 폭죽을 쏘는데 신부 드레스에 불이 붙는다거나 하는 사고가 벌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진짜 웃겨질 거다. 문제는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에이먼에게 전화를 건 뒤 통화음을 듣고 있던 진은 멀뚱하게 앉은 재키와 클랜을 보곤 재빨리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행동에 블리스가 턱을 들어 문을 가리키자 클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와 킴에게 다가섰다.

“사라, 집으로 가서 쉬어. 아이한테 안 좋으니까. 뒷일은 진이 알아서 할 거야.”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그 말에 진이 클랜을 노려보자 클랜이 씨익 웃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라를 에스코트하며 진에게 인사를 남긴다.

“수고해. 그리고 미안.”

“미안한 건 아냐?”

“진은 능력 있으니까. 아픈데 미안하긴 하지만, 진이 최고야. 알지? 진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 일할 때 제일 쌩쌩하잖아.”

눈을 찡긋하며 사라와 킴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서는 클랜의 뒷모습을 보던 진은 그제야 이 사건 사고의 모든 원인을 헤아릴 수 있었다. 클랜은 문장 실력은 엉망이지만 눈치만은 기가 막히게 빠른 녀석이었다. 그래, 인정한다. 사실 그렇게 길길이 날뛰면서도 자신이 클랜의 결혼식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상처 받았었다. 확실히 자신은 워커홀릭이다. 일을 하고 그 일을 완벽하게 성공하고, 그 성공에 대한 찬사를 받을 때야 겨우 안심을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은 가질 수 있게 된다.

클랜이 기차게 눈치가 빠르고 자신의 심리를 잘 눈치 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서 일을 벌인 건 알 것 같지만-아니, 사실은 그건 미안함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을 가능성이 99%지만- 그렇다고 클랜이 용서가 되는 건 아니다. 

왜 하필 이때냐…….

“클랜.”

“응?”

“결혼식 끝나고 나 좀 보자.”

진이 살짝 이를 갈 듯 말하자 클랜이 눈웃음을 치며 응수한다.

“기운 내. 진의 몸살은 육체적인 문제보다는 정신적인 문제니까.”

“……꺼져.”

「꺼지라고?」

진이 웃으며 핸드폰을 들고 클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던 순간 전화를 받은 에이먼이 묵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답해왔다.

“어, 아니. 클랜한테 한 말이야. 사고 얘기는 들었지?”

「응. 그렇지 않아도 편성 짜는 중이야. ‘We`re married.’를 앞으로 당겨서 생중계를 하는 것도 방법이지.」

역시나 형제였다. 블리스가 생각한 방법을 에이먼도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 난리에 파파라치를 일일이 골라낼 수도 없고, 진이 직접 식장 밖에 나와 손님 리스트와 이름을 일일이 대조하는 실례를 범할 수도 없다.

「편성하고 카메라 설치는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넌 나중에 나온 카메라 위치 확인하고 배치도만 다시 짜면 돼. 방송국 일은 이쪽에 맡겨.」

확실히 빠르다. 빠르고 추진력 있고 기획력도 뛰어나다. 에이먼은 그 취미만 빼면 완벽한 남자였다. 

“응, 고마워. 그럼 그쪽 디렉터한테 자리 잡은 뒤에 조감도를 나한테 팩스로 보내달라고 해. 여기도 준비해야 하니까.”

「어디로?」

“……아, 내 사무실로 부탁할게. 다시 내 사무실로 가야 하니까.”

「그래. 아 참,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너한테 접근한다고?」

“뭐, 접근이라기보다…… 꽃하고 나무를 보냈어.”

진이 에이먼과 통화 중인 사이 블리스 역시 휴대폰을 들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누구한테 전화가 온 건가 해 목을 빼고 블리스가 나가는 방향을 바라보는데 에이먼이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파리지옥을 보낸 건 아니겠지?」

“웬 파리지옥? 장미 이천 송이랑 그냥 나무였는데? 왜? 그 사람 파리지옥을 선물이라고 보내는 사람이야?”

「……나한테 보냈었거든.」

“왜?”

「초기에 일 시작할 때 선물이라고 보냈더군.」

“……같이 일하기 싫다는 뜻 같은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소문은 전해 들었었거든. 워낙에 특이한 선물을 많이 하던 사람이더군. 당뇨병 어린이 모임에 케익과 과자를 선물하고, 소아암 환자들에게 머리핀과 끈을 선물하는 남자야. 그것도 전혀 악의 없이 말야. 그거면 할 말 다 한 거지.」

뭔가 아련하게, 아주 아련하고 희미하게 세르게이 네브즐린이라는 남자의 이미지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꽃을 보냈을 때에도 느꼈지만 생긴 것과는 다르게 확실히 무식하다. 그러니까 엘레나처럼 상식이 없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은근히 무식하다. 그 사람 감성에는 좀 문제가 있다.

에이먼의 상세한 설명에 진은 드디어 그 선물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냥 그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는 거다. 어떤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이제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제 그 꽃과 나무의 의미를 알겠어. 하여간 고마워, 에이먼. 방송국 일은 그쪽에 맡길게.”

진이 마지막으로 인사의 말을 건네자 에이먼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한다.

「넌 일할 때가 제일 활기차서 좋아.」

“……그런가?”

「그래. 수고해.」

“응.”

재빨리 전화를 끊은 진은 앞에 대기 중인 대넌의 비서들을 돌아보곤 그들에게 차례차례 확인할 것들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샴페인과 와인, 그리고 당일 부를 웨이터와 보디가드들의 인원수와 교육 상황 파악 및,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한 면접 과정을 정리해 알려주고, 재클린의 드레스와 웨딩슈즈가 입고됐나를 파악하라고 지시를 내리던 중 회의실을 나갔던 블리스가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진, 나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

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비서가 내민 손님 리스트를 확인했다.

“가봐.”

“7시에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려. 저녁 같이 하자.”

“안 와도 돼.”

급한 일이면 아마 7시까지도 시간을 질질 끌게 될 거다. 블리스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진이 일부러 딱 잘라 거절하듯 말을 하자 블리스가 옆으로 다가와 앉아있던 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정확히 7시야. 다른 남자가 유혹해도 가면 안 돼.”

“누가 날 유혹해? 빨리 가. 나도 일 처리해야 돼. 아니, 대체! 왜 내가 쓰러지기 전하고 똑같은 거야? 뭔가 발전이 있어야지. 그 수많은 인원들이 사흘이 넘도록 뭘 한 거냐고!”

분명히 수요일 저녁 자신이 퇴근 전에 확인한 그대로였다. 오늘이 벌써 토요일인 걸 감안하면 지금쯤 대부분의 준비는 진행이 됐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상태냐고 진이 울분을 터트리자 문을 향해 걷던 블리스가 걸음을 멈추며 진을 부른다.

“흥분하지 마, 진. 너 흥분하면 섹시하거든? 누가 납치해 갈라.”

장난기 가득한 그 말에 진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블리스를 바라보며 싸늘한 투로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안 갔냐?”

“발걸음이 안 떨어져서 말야. 7시야. 기다려.”

진은 결혼식 하객 리스트를 쭈욱 돌아보며 표시된 7명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한 뒤 블리스에게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도 내내 축 쳐져 죽을 것 같더니 일을 손에 쥐자마자 기운이 팔팔한 진의 모습에 블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에서 빠져나갔다.

섭섭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클랜의 말대로 진은 늘어져 있는 것보다는 바쁘게 일하는 쪽이 정신 건강에 좋다. 혼자 있으면 잡념이 많아지거나 우울해지는 성격이라 늘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데, 사실 그 텔레비전이 진에게 긍정적인 효과만 부여하는 건 아니라, 차라리 바쁜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낮에는 바쁘게 일을 하고 밤에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지고, 지금의 진에게는 그런 패턴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진도 그 스스로를 보는 눈이 바뀌어갈 것이다.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자신 없어하며 위축되는 진에게 이 결혼식은 어쩌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모든 이들이 찬사를 보내며 잘했다고 칭찬한다면 진도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체력이 심하게 떨어진 게 문제이긴 하지만 자신이 주의 깊게 살피며 조절하는 수밖에는 없다. 클랜의 결혼식까지 남은 일주일이 진과 자신에게는 인생 최대의 반환점이 될 것이다.

***

진척이 없는 결혼 준비를 모두 재확인한 뒤 몰래 하객 리스트에 엘레나의 이름을 넣은 진은 새로운 카드 발급 요청한 뒤 대넌의 개인 비서들과 사라와 킴의 비서들까지 총동원해 초대장을 새로 작성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다행히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총동원된 상태에서 지휘를 하자, 준비는 순조로웠다. 자신이 직접 나가고 확인할 필요 없이 지시만 내리면 되는 상황이라 그다지 힘든 것도 느끼지 못했다.

클랜이 쳐놓은 사고를 대강 마무리하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순간 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0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해 봐도 블리스에게서의 전화는 없다. 대체 어딜 간 걸까.

블리스 성격에 아무 말 없이 바람맞힐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30분 단위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

“진, 3번 전화 받아보세요.”

회의실에 아예 전화기와 노트북까지 가져다주고 살림을 차려둔 진은 다른 비서의 말에 재빨리 전화기를 들고 3번 내선을 눌렀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아, 저……. 여기 정세희 씨 여동생인데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한국어에 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한국어로 답해주었다.

“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을 드렸는데 외출 중이라고 하셔서요. 저 기억하시죠? 서영진이라고, 사라, 아니 정세희 씨가 후원하는 한국인이요.”

또박또박 사라의 한국명을 대며 말하자 상대가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네, 기억해요. 세희 언니가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한국어를 굉장히 잘 하시네요.」

“네. 일주일에 한 번은 공부하는 중이라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언니랑은 어제 통화를 했는데요.」

“네, 저 혹시 사라, 아니 정세희 씨가 임신하신 거 아시나요?”

임신이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하면 진이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당장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그 나이에 임신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그 큰 목소리에 진은 슬쩍 다른 비서들을 돌아봤다. 하지만 다들 자기 업무를 하느라 바쁘고, 한국어라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듯했다.

“네. 3개월째에요. 그래서 조금 힘든가 봐요. 어머님이나 동생 분께서 잠시 와서 돌봐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괜찮으시다면 애클랜드 가에서 전용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자기 멋대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진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대넌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대넌은 전용기가 아니라 저택이라도 내놔야 할 판이다.

「아, 아뇨. 저희가 티켓을 준비해 갈게요. 어머니가 들으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언제 괜찮으시겠어요? 편하신 시간을 알려주시면 김포? 아니, 인천 공항으로 애클랜드 가의 전용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원래 티켓을 준비해드려야 하는 건 이쪽인 걸요. 걱정 마시고 준비 되시는 대로 알려주시면 곧장 전용기를 시간에 맞춰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제가 시간이 잡히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아, 그리고…… 사라한테는 말하지 먼저 이야기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려고 하는데요.”

「네, 그럴게요. 이번에 가면 영진 씨도 뵈었으면 좋겠네요.」

“네,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마친 뒤 전화를 끊은 진은 두근두근하며 수화기를 바라봤다. 사라와 둘이 있을 때엔 일부러 한국어를 쓰고 주말에는 최소 3시간은 잡고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빌려와 틈틈이 한국어를 익혔지만 자신이 제대로 말을 한 건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쪽에서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진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국어를 계속해서 공부한 건 언젠가 여동생을 만날 날을 위해서였다. 사라가 후원하는 여러 단체 중 한국인 입양아들의 가족 모임이 있었다. 사라는 꾸준히 그 모임에 참석하고 그을 후원하며 한국 아이들이 이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한국에 대해 잊지 않도록 문화원을 만들어 한국의 문화를 가르치는 데에 주력을 했다. 그리고 에이먼이 운영하는 채널 중 하나와 한국 채널을 연계해 친부모를 만난 아이들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진은 어린 시절부터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가슴에 맺힌 그 수많은 말들을 통역사를 통해 듣고 말하는 이들이 너무나 가엽다고, 자신은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그런 거였다. 말이나 글도 자신이 아는 언어로, 반드시 상호간의 완벽한 이해가 가능한 말로 해야만 정확한 소통이 가능하다. 아니, 그래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말을 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순데 통역이나 번역을 통한 말이나 글로는 서로를 알 수 없다. 서로가 품은 상처와 슬픔을 제대로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꾸준히 공부해왔다. 물론, 한국어를 이해하기 위한 한문 공부도 꾸준히 해왔다.

언젠가는 여동생을 만날 거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만나 안아주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알려줄 것이다. 

다시 떠오른 감상에 진이 잠시 위자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자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대넌이 들어섰다.

“진. 고생 많다.”

갑작스러운 대넌의 등장에 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대넌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렇지 않아도 뵈려고 했었어요.”

“왜? 뭐 문제 있어?”

“여기서 더 문제가 생기면 큰일 나죠. 잠깐 얘기 좀 해요.”

진이 그에게 잠시 회의실을 나가자고 말하자, 대넌이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하나 내민다.

“이거.”

“이게 뭔데요?”

“너, 잘 먹던 거. 사라도 좋아하는 가룬데……. 이름은 까먹었다. 아픈 후라 속도 안 좋을 텐데 커피나 주스는 안 좋으니 이걸 먹으라고. 기사를 검색해보니 위가 안 좋을 때 마셔도 좋다고 해서.”

“아, 미숫가루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군.”

대넌이 내민 상자를 받아든 진은 놀란 얼굴로 대넌을 바라봤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애클랜드 가에서 못 구하는 건 없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대넌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사라가 가끔 질색을 할 정도로 섬세와는 담을 쌓은 남자가 자신을 위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미숫가루를 수배해 직접 들고 왔다는 사실에 진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그의 자식들의 생일 선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비서나 사라에게 말하라고 하며 대강 처리하는 그가 이렇게 신경을 썼다는 사실에 감격해 진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할 얘기란 게 뭔데?”

“네. 사라의 어머님과 동생 분을 잠시 모셔오려고요. 연락은 해뒀고 괜찮은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거든요. 전용기 좀 보내주셨으면 해서요.”

그 말에 대넌의 눈이 번쩍 뜨인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인들은 이혼에 부정적이라지? 어머니와 동생이 와서 말리면 되겠구나.”

순식간에 환해진 안색으로 진의 어깨를 두드리는 그를 보며 진은 그의 무심함에 쓰게 웃고 말았다. 대넌은 참 좋은 사람이지만 늘 저런 식으로 말을 해 될 일도 안 되게 만든다.

“대넌, 사라 앞에서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러다 진짜 이혼 당해요.”

“주의하지.”

“제가 대넌의 지시를 받아서 연락했다고 할 테니 시간 정해지면 전용기만 보내주세요. 그리고 사라에게는 말하지 말고, 도착 시간에 맞춰서 사라와 함께 리무진으로 직접 공항으로 모시러 가보세요. 사라가 기뻐할 거예요.”

“그래. 바로 그거야! 여자들은 그런 이벤트에 약하지! 거기다 사라는 감성적이라 그럼 당장에 기뻐서 다시 집에 들어올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장에 하늘로 날아갈 듯한 대넌을 보며 진은 작게 혀를 찼다.

남자란 동물은 진짜 나이가 들어도 평생 아이인 것 같다. 대넌도 철들려면 멀었다.

“대넌, 제발 부탁인데 그 말도 절대 하지 마세요. 다 된 일에 코 빠트리지 마시라고요.”

진은 대넌을 위해 진심으로 그렇게 충고했다. 클랜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대넌을 꼭 닮았다.

“명심하마.”

“네, 꼭 그래주세요. 사라를 위해서도요.”

“그래. 아, 그럼 이만 가보마. 저녁 만찬 약속이 있어서. 참, 오랜만에 알파베타감마 형제들이 모이는데 시간 나면 함께 가겠니? 다들 널 한 번 봤으면 하던데.”

그 빌어먹을 클럽 모임에 날더러 같이 가자는 소리십니까, 라고 생각하며 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젠 진짜 알파베타감마라면 신물이 난다. 1년에 한 번은 아이비리그 전체의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선상 파티가 있고 분기마다 세계를 돌며 예일대 클럽에서의 모임이 있지만, 초대장이 올 때마다 그 초대장을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렸다. 물론, 그 클럽 출신의 선후배와 동기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일 관계일 뿐이다.

“전 예일 출신이잖아요. 유펜 모임이니 혼자 다녀오세요.”

“아니. 클럽 회원들이 널 보자는 거다.”

“절 왜요?”

“내가 소개해주고 싶어서.”

“감사하지만 일이 많아서요. 파트너가 없으신 거라면 클레어를 데려 가시죠?”

“클레어는 다들 봐서. 에이먼이랑 클랜이야 동문 클럽 직속 후배라 자주 봤고 블리스도 다들 알지만 널 보여준 적은 없어서.”

“절 왜 보여주시려고 하시는데요?”

“재키는 브루스의 딸이라 다들 아니 상관없지만 넌 얼굴 보여야지.”

재키야 그의 첫 번째 며느리가 되니 얼굴을 파는 게 당연하지만 나는 왜, 라고 생각하던 진은 뭔가 묘한 느낌에 떨떠름한 얼굴로 대넌을 바라봤다.

“저, 혹시…… 아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죠. 다녀오세요. 전 나머지 일 처리할게요. 잘 마실게요, 이거.”

“그래. 그럼 수고해라. 내가 클랜 결혼식 끝나면 근사한 저택 하나 사주마.”

“아니, 뭐 그러실 것까지야…….”

“아냐. 내가 해주고 싶어. 이 김에 차도 바꾸고, 너 경비행기 자격증 있지? 경비행기도 한 대 사주마.”

아주 한 재산 챙겨주려는 그의 말에 진은 계속해서 뭔가가 따끔따끔하고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괜찮아요. 일 보세요.”

“그래. 나중에 보자.”

어깨를 툭 치곤 다시 회의실을 나서는 대넌을 보며 진은 대넌이 가져온 상자를 안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묘했다. 대넌이야 워낙에 통이 큰 사람이고 돈이 쓸 데가 없어 고민인 사람이니 저택에 경비행기 정도는 별거 아니다. 그의 마음에 든다면 요트나 전용기도 사줄 남자였다. 문제는 자신이 그걸 받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큰 공을 세워 그의 사업에 엄청난 도움을 준 것도 아니고, 죽을 위기에 처한 그에게 간이나 신장을 떼어준 것도 아니다. 사업가 체질이라 받은 만큼 돌려주는 남자인지라 자신이 그만큼 하지 않는 이상 절대 그만큼 준다 말할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이건 무슨 조화인가. 자신에게 사라를 잡아달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사라가 기분이 좋아질 팀을 알려줘서 감사하다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머릿속을 휙하니 스쳐가는 망상에 진은 살짝 몸서리를 쳤다. 차마 구체적인 상상을 하는 것도 두려워 하얗게 굳은 얼굴로 상자를 빤히 바라본 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설마다. 대넌이 아무리 블리스와 그런 계약서를 썼다고 해도 쉽사리 그 각서 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상한데…….”

의심스러운 듯 계속해서 상자를 노려보던 진은 갑자기 울린 휴대폰의 벨소리에 놀라 재빨리 휴대폰을 받았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지금 시간 괜찮나?」

수화부에서 들려오는 나른하고 허스키한 음성에 진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네, 지금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군기가 잔뜩 들어간 진의 인사에 같이 일하던 대넌의 비서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진을 바라봤다. 진은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며 재빨리 회의실을 빠져나가 복도에 섰다.

「저번에 미룬 식사나 함께 했으면 하는데.」

부드럽고 고요하면서도 어쩐지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의 음성. 세르게이 네브즐린이라는 남자가 진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라는 건 이제 대강 눈치 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다. 목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린다. 러시아 마피아의 포스는 전화기를 통해서도 느껴지는 법인가 보다.

“아, 저……. 말씀은 감사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리고 제가 지금 클랜의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아, 그런가? 그럼 잠깐 얘기를 하고 싶은데.」

세르게이의 느긋한 말투에 진은 고개를 들어 복도 끝에 있는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40분이었다. 좀 있으면 블리스가 올 시간이다.

“제가 조금 있다 약속이라…….”

「그럼 잠깐 내려오지.」

“네?”

「지금 애클랜드 사의 정문 앞이거든. 계속 세워둘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엘레나가 알려주더군.」

엘리, 너 진짜 나 위치 추적하고 있는 거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보다. 아니 하려면 블리스를 해야지, 왜 자신을 추적하는 거냐!

“예, 잠시라면…….”

「그래. 그럼 기다리지.」

전화를 끊은 진은 다시 회의실의 문을 열고 잠시 내려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들어서며 진은 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직접 스카웃 제의를 하러 온 거라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만약 차 안에서 총구를 들이댄다면 차 밖으로 뛰어내려야 하나, 아니면 그를 진정시켜야 하나. 아니, 어쩌면 납치를 할지도 모른다. 

“미리 911에 연락을 해야 하나…….”

진심으로 911을 누르고 대기하게 할까를 고민하던 진은 어느새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냈다. 거대한 건물을 걸어 나와 막 입구에 서자 새하얀 리무진이 보였다. 차를 찾을 필요도 없이 차 밖에서 대기 중이던 운전수가 보였다. 순간 진은 어깨를 바싹 긴장시켰다.

어째서 운전수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근육을 갖고 있는 거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진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그가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어준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진이 차 안을 바라보자 안쪽 자리에 편안히 기대앉은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살 떨리도록 차갑고, 또 그만큼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오늘은 그의 근사한 은발과 잘 어울리는 진한 은색의 양복을 걸치고 보랏빛이 도는 드레스 셔츠에 연한 분홍빛의 윈저노트로 넥타이를 맨 채였다. 안쪽으로 비치는 양복보다 조금 밝은 감의 조끼가 은은한 빛을 발해 더욱 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부하를 생일 날 죽게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앉지.”

남자의 그윽한 목소리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순종적인 태도로 재빨리 리무진 안에 올라탔다.

“와인 한 잔 할 텐가?”

“아뇨. 일하는 중이라서요.”

“그래? 이 시간까지 일이라니, 힘들겠군.”

이라고 말하며 세르게이는 앞의 테이블에 놓인 베뜨뤼스(Chateau Petrus)의 병을 들어 와인글라스에 따랐다. 순간 진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와인을 마시는 건 좋은데 대체 왜 레드 와인을 화이트 와인 잔에 따르는 걸까.

“저, 보내주신 꽃과 나무는 잘 받았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받았다니 다행이군. 다들 내 선물이라면 질색을 해서 말야.,”

질색 팔색할 만하다. 누가 총이나 파리지옥 같은 선물을 받고 좋아할까.

“마음의 선물인 걸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무슨 일로…….”

“엘리가 이야기를 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이야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무슨”

“우리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올 생각 없나?”

“없습니다.”

진은 방금 전까지 세르게이를 대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정색을 하며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세르게이가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피아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죽어도 곱게 죽어야지, 공중분해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자신의 내장기관이 하늘에 흩날린다는 건 참 불쾌한 일이다. 그리고 그걸 볼 사람들에게도 못할 짓이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그야, 당신은 마피아니까, 라고 하려다 진은 가장 그럴싸한 답을 내주었다.

“지금 일이 마음에 듭니다. 적성에도 맞고요. 비서는 제 천직이거든요.”

순간 세르게이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묻는다.

“그럼, 내 비서로는 어때?”

그건 더더욱 싫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세르게이는 잔을 내려두고 담배를 찾아 들었다. 그 모습에 진은 재빨리 테이블 위에 있던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한 걸요.”

“엘리가 자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던데 거절한 걸 알면 실망하겠군.”

진은 별로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세르게이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했다. 세르게이가 자신을 정중히 대해주는 건 아무래도 엘레나 덕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아, 엘리가 전해달라던 게 있더군. 여기.”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는 그의 옆에 있던 책을 주워 진에게 건네주었다. 노먼의 책이었다. 엘레나가 이걸 자신에게 전해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이걸 전해주시러 여기까지 오시다니…….”

“그건 옵션이지. 내 선물은 따로 있어.”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는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있던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를 진에게 밀었다. 커다란 전공 서적 사이즈의 상자를 본 진은 이걸 받아도 뇌다 잠시 망설였다. 이 남자의 선물 센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라서인지 차마 그 상자를 냉큼 받아 챙길 수가 없었다.

“……감사하지만 제가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생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는 모양이니 받아도 돼. 엘레나가 자넬 꽤 좋아해. 나도 자네가 마음에 들고.”

싫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이 좋기는 하지만, 어쩐지 네브즐린 남매의 호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피아를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그들과 얽히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마피아는 괜히 마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선물을 안 받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레나가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엘레나는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아이였다.

“그럼…… 받겠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이만 올라가 봐도 될까요?”

“그래. 다음에 보지.”

“네.”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진은 차문을 열고 재빨리 리무진 안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막 문을 닫으려는데 다시 한 번 우아한 세르게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진.”

“네?”

그의 부름에 재빨리 돌아서 그를 보자 안쪽에 앉은 그가 담배를 손에 든 채 우아한 어조로 묻는다.

“동물 좋아하나?”

“네? 네. 좋아합니다.”

“다행이군. 그럼.”

“예……. 그럼 이만.”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도 모른 채 차문을 닫은 진은 운전수가 서둘러 운전석으로 돌아가 리무진을 멀리 끌고 갈 때까지 멍하니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무진의 긴 차체가 완전히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나온 상자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잠시 이걸 볼까 망설이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기로 결정 내렸다.

진한 갈색 빛의 무거운 상자를 오른팔로 안고 왼손으로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연 진은 안에 든 물건을 보고는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이걸 어쩌라는 거야?”

상자 안에 있던 건 다이아몬드였다. 그것도 일반 다이아몬드가 아닌 1캐럿에 100만 달라를 호가하는 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게다가 이건 가공도 되지 않은 원석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던 큰 문제는 그 레드 다이아몬드의 원석이 주먹만한 크기라는 사실이었다.

전체 국민의 0.001%에 달하는 최상류 층 손님들을 위한 선물을 담당하기에 진은 이게 진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가끔 아주 까다로운 셀리브리티들에게는 직접 남아공에서 사온 원석을 선물했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정도 크기의 원석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더더구나 레드 다이아몬드라니 말도 안 된다. 이 한 덩어리의 가격은 어마어마하다. 물론 세팅을 끝내고 나면 몇 캐럿 남지 않겠지만 세팅을 한 뒤엔 더욱 엄청난 가격이 될 것이다.

순간 어떤 한 마디가 진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장물이다…….”

“진, 거기서 뭐해?”

한참을 못 박힌 듯 멍청하니 서 있던 진은 자신을 부르는 그 음성에 재빨리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건물 안에서 검은색의 턱시도에 연한 은색의 보우타이를 맨 블리스가 빈틈없이 꾸민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 무슨 일이야?”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진의 얼굴에 블리스는 다시 몸이 안 좋아진 건가 해 걱정스러운 듯 다가와 진의 이마를 만졌다.

“열은 없는데? 어디 안 좋아?”

진의 양 볼을 감싸 쥔 채 열을 재던 블리스는 진짜 넋이 나간 듯한 진의 얼굴에 가까이 얼굴을 대고 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진?”

계속되는 블리스의 부름에 진은 멍한 눈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나 어떻게 해?”

“왜?”

“나 끌려가는 거야?”

“응?”

“장물소지죄로 나 경찰한테 끌려가는 거야? 아니지! 마피아면 FBI지? 나 변호사 어떻게 해? 내 고문변호사 완전 바보거든? 돈 주는 게 아까울 정도로 바본데 어떻게 해?”

정신을 잃은 듯 엉뚱한 소리를 하는 진을 바라보며 블리스가 전의 머리카락을 차분히 넘겨주며 침착하게 달래기 시작했다.

“잠깐, 진. 천천히 설명을 해봐. 장물은 뭐고 마피아는 또 뭐야?”

“그게, 세르게이가 와서 다이아몬드를 줬는데 장물인가 봐.”

“……세르게이가?”

“응. 이거 진짜 원석이거든? 확실해. 그것도 아주 순도 높은 거야.”

이제 보석과 명품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가 된 진이 그렇게 말하며 안고 있던 상자를 열어보이자, 블리스가 안에 든 물건을 보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진짜 통도 크군.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이런 게 나왔다는 말은 없었는데? 세팅만 잘하면 레드 크로스 다이아몬드(Red Cross Diamond - 카나리 옐로우(Canary Yellow) 색상의 현존하는 레드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크고, 다이아몬드 중 다섯 번째로 큰 205.07캐럿 다이아몬드. 밝은 빛을 받으면 붉은 태양처럼 반짝이고 내포물의 배열이 십자가 형태인 스퀘어형의 다이아몬드. 현재 소유주를 알 수 없음.)를 능가하겠는데.”

냉정한 눈으로 세르게이가 남긴 원석을 살피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바싹 긴장한 채 블리스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어떻게 해? 그 사람 진짜 이상해! 이걸 왜 나한테 줘? 어디에서도 이런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단 말야.”

블리스가 워튼 스쿨에 다니는 동안 진은 아예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칼스배드에 위치한 GIA(Gemological Institution of America) 스쿨에서 6개월 간 GG과정을 수료하고 마스터 자격증을 취득했다. 보석 감정을 전문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감정은 할 수 있다. 이건 눈으로 딱 보기에도 최상품(最上品)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품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거였다.

진은 대넌과 블리스, 그리고 에이먼이 쓰는 선물용 겸, 그리고 사라를 위해 진은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회사와 연계해 희귀한 팬시 컬러 다이아몬드(유색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대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특히나 블랙과 블루, 레드는 희귀한 색상이라 나오는 즉시 원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취를 취해놨는데 지금까지 이런 크기의 레드 다이아몬드의 원석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광산에서 채굴 후 빼돌렸다는 것이고, 그 말인 즉 장물이라는 의미다. 특히나 희귀한 붉은 색의, 그것도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붉은 빛의 다이아몬드다. 내포물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원석 상태임에도 눈이 부실 정도로 투명해 휘광성이 뛰어나다. 모조라면 절대 이런 빛을 띨 수가 없다.

“블리스, 이거 진짜야. 절대로 진짜라고. 남아공 산이 확실해.”

진의 보석감정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블리스는 진이 당황한 이유를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돌려줄게. 원래 크면 무조건 좋은 줄 아는 사람이야. 여차하면 내가 사면 되고.”

“이거 장물이란 말야!”

“……장물이래?”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장물이니까 나한테 준 거겠지! 그리고 이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단 말야. 이 정도 순도에 이 크기의 원석이라면 벌써 내 귀에 들어왔지! 대넌이 당장에 사라에게 선물한다고 사라고 했을 거란 말야! 하지만 남아공 광산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 어떤 경매에도 이런 물건이 나왔다는 보고는 없었어! 그러니까 당연히 장물이지!”

다른 건 몰라도 보석, 명품, 그리고 꽃에 대한 진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진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없는 거다.

“진, 일단 진정해.”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 무게감이면 400캐럿 정도야. 원석 모양도 거의 타원형이라 세공만 잘하면 300캐럿은 너끈히 나온다고. 센터너리를 능가할 거야. 게다가 레드 다이아몬드면 가격이…….”

현존하는 다이아몬드 중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고 알려진 센터너리 다이아몬드(Centenary Diamond-273.85캐럿)를 네 번째로 밀어낼 수도 있다. 거기다 레드 다이아몬드니 그 가격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다. 부르는 게 값이 아니다. 경매에 걸면 얼마까지 올라갈지 모르니 가격을 부를 수도 없다.

“이것 때문에 난 살해당할지도 몰라.”

만약 이 사실이 소문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뒤쫓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FBI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르게이가 어떤 황실에서 몰랜 숨겨둔 물건을 강제로 빼앗았을 수도 있으니 그 나라의 비밀요원들이 파견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이 정도 가치의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강도를 시작으로 자신에게 이 물건을 팔라고 협박하는 자들까지 줄줄이 나타날 것이다.

점점 창백해지는 진의 표정에 블리스는 진의 머릿속을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진의 집에 유선채널을 모조리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진의 이마를 툭툭 쳤다.

“진, 상상의 나래는 그만 펴. 가짜일 수도 있어.”

“아냐. 이건 진품 느낌이야. 내가 진품하고 모조를 구분 못할 것 같아? 품질에 대해서는 육안으로 확신할 수 없지만 절대로 모조는 아냐.”

“진,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네게 그런 물건을 줄 리가 없잖아.”

딱 잘라지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이런 물건을 이렇게 쉽게 던져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상한 게 아니라 미친 거다.

“……그렇……지?”

“그래. 그 사람이 아무리 얼이 빠졌어도 그런 짓은 안 해. 요즘 모조 제조 능력이 뛰어나니 한 번 만들어서 너한테 시험해본 걸 수도 있어.”

“……그런가?”

“그래. 나라도 그런 장난은 안 쳐. 그 정도 보석은 최고로 번성한 왕실에서 여왕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하는 선물이거나, 우리 아버지 정도 되는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영원을 맹세하며 바치는 경우뿐이야.”

“……혹시 나한테 마피아로 들어오라는 의미 아닐까? 이게 장물인데 내 손에 있으면 나도 한 패가 되는 거잖아?”

“널 마피아로 끌어들여서 뭐하게? 네가 총을 쏠 줄 알아? 마약을 제조할 줄 알아?”

“나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단 말야.”

“가정교사로겠지.”

“……그렇지…….”

“그러니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도 무섭단 말야. 이게 진짜면 어떻게 해?”

“걱정 마.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그리고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진짜라면 돌려줘야지.”

“돌려주는 건 돌려주는 건데, 너도 알잖아. 리전트(The Regent)랑 블루 호프(The Blue Hope)의 전설. 블루 호프는 아직도 그 미스테리가 파헤쳐지지 않았다고. 태양왕을 천연두로 죽게 만들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사형 당했잖아! 게다가 헨리 필립 호프는 낙마해서 죽고.”

엘레나처럼 너무 몰라도 문제지만 진처럼 너무 많이 알아도 문제라고, 블리스는 처음으로 통감했다. 진은 지나치게 많은 것들-보통 사람은 몰라도 되는 것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상상력이 이상한 데로 뻗어나가는 거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녀석이 왜 소설에는 그렇게나 재능이 없었는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진, 그거 거짓말인 거 알잖아?”

“응?”

“그 전설 모두 거짓말이야. 보석상이 보석을 팔려고 저주를 만들어낸 거야.”

“하지만…….”

“얼반 레전드(Urban Legend)랑 비슷한 거야. 사람들이 흥미로우니 그냥 소문 퍼트린 거지. 절대 진실은 아냐.”

블루 호프의 전설은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그 소문들은 모두 보석상이 블루 호프를 비싸게 팔기 위해 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을 믿고 자신만은 절대 저주에 걸리지 않는다 장담하며 블루 호프를 산 에블린은 진짜 저주를 받은 듯 불행하게 죽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그 얘기는 진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아니겠지?”

“그래. 세르게이나 엘레나에게 돌려줘. 별거 아닐 거야. 요즘 모조품 수준이 GIA전문가들도 헷갈릴 정도라고.”

그 말에 진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애초에 이런 게 존재할 리가 없어. 존재했으면 벌써 전 세계가 시끌시끌했을 거야, 그렇지?”

“그래. 맞아. 그럴 리가 없지. 아무렴.”

그제야 납득한 듯 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마음의 평화를 찾은 얼굴이었다.

“진, 그보다 식사하러 가야지.”

“어? 응.”

“다들 퇴근하라고 하고 준비하고 내려와. 난 통화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블리스가 한 걸음 물러선 채 진에게 다정하게 속삭이자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돌아서 블리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너 옷은 왜 그래? 어디 파티에 가?”

“파티는 무슨. 그냥 식사하러 가는 거지.”

“그런데 웬 보우타이야?”

“그냥. 근사해 보이려고.”

“나도 옷 갈아입어야 하잖아.”

“정장 안 입어도 돼. 편한 데니까 신경 쓰지 마.”

자신은 저렇게 빼입고 자신에게는 편한 복장으로 가도 상관없다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재빨리 어떤 건지 감을 잡았다. 

“……또 어딜 빌린 거야?”

“응. 통째로 빌렸으니까 사람들 눈 신경 쓰지 마.”

“참, 재주도 좋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가게들을 통째로 잘 빌리냐? 웬만하면 대여도 안 해주는 데를?”

“그게 내 능력이지.”

“그래, 너 잘났다.”

“왜? 새삼 반했어?”

“그래. 네 재력에 반했어.”

농담 투로 툭툭 내뱉던 진은 커다란 상자와 책을 챙겨든 채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진의 등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핸드폰을 들고 어딘 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어눌한 음성의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누구야?」

거친 그 목소리에 블리스는 순간 여전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니카 메를랜드. 예일대학 시절 알파베타감마 클럽과 가장 가까웠던 여자 기숙사에 기거하던 여자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세계 최대의 보석을 생산하고 있는 그리핀 사의 둘째 딸이자 블리스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일명 Crow Danika라고 불리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석에 둘러싸여 자란 탓인지 반짝거리는 거라면 환장을 하고, 그 보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옷은 무조건 검은색만 입는, 보석에 의한, 보석을 위한, 보석의 삶을 사는 여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남자들로부터 진한 우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였다.

졸업 후 얌전히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보석 감정과 매매를 담당하나 했지만 역시나 그 습성을 못 버리고 보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보석의 데이터를 다 갖고 있는 살아있는 보석의 메카였다. 고객을 상대할 때는 검은 정장에 보석을 휘감고 다니지만 영업이 끝나는 즉시 슬리브리스 셔츠 한 장에 카고 팬츠를 걸치고 장비가 든 배낭 하나를 들고 전 세계를 헤매며 보석 찾아 삼만 리인 까마귀가 마침 뉴욕에 돌아와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니카, 나야.”

「아, 블리스? 웬일이야?」

귀찮다는 듯 내뱉던 그녀가 금세 밝은 음성으로 답하자 블리스는 재빨리 용건을 뱉어냈다.

“다이아몬드 원석 좀 찾아줘. 뭐든지 커야 돼. 블랙마켓을 뒤져서 원석이 아니라도 무조건 큰 걸로 찾아. 블랙이나 레드, 블루, 그린 다이아몬드로 무조건 가공 상태는 300캐럿 이상. 원석은 500캐럿 이상.”

쉴 틈도 없이 줄줄이 무조건 찾아내라고 닦달하는 그 말에 상대 여자가 조금 신경질적인 투로 받아친다.

「블리스,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그건 불가능해. 그런 건 찾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고.」

“그럼 일반 다이아몬드 3000캐럿 이상을 찾아내.”

「어이, 너 다이아몬드가 무슨 공산품인 줄 알아? 돈 줄 테니 만들어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냐, 그건. 요즘 8캐럿짜리도 드문데 무슨 3000캐럿 소리를 해? 아프리카의 별(The star of Africa)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어.」

3106캐럿에 달하던 아프리카의 별은 이미 전설이 된 다이아몬드였다. 그 아프리카의 별을 잘라 만든 다이아몬드가 컬리넌(The Cullinan Diamonds)인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조각이자 현존하는 다이아몬드 중 가장 큰 컬리넌 1세(530.20캐럿)는 영국 왕실의 지팡이에 장식되어 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컬리넌 2세는(317.40캐럿)는 영국 황실 왕관을 장식되어 있다. 왕실의 지팡이와 왕관에 장식된 두 개는 영국의 국보라 어떻게 해도 살 수 없다. 그래서 블리스가 센터너리를 구입하려 무던히 애쓰던 중이었는데 세르게이에게 당했다. 진에게는 절대 진품이 아닐 거라 말했지만 블리스가 보기에도 이건 진품이다. 확실하다.

“너 세계 최고의 보석 상인이잖아. 경매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져서 찾아내. 아니면 암시장 거래를 통해도 좋아. 나 진짜 급해. 무조건 구해. 큰 게 안 된다면 블랙 다이아몬드나 알렉산드라이트 캐츠 아이, 그것도 안 되면 퍼플리쉬라도 찾아내. 그리고 혹시 블랙마켓에 레드 다이아몬드 원석 400캐럿짜리가 나왔는지 알아봐. 그리고 누구한테 팔렸는지도.”

블리스의 빠른 전언에 다니카가 담배를 빼물며 비웃는 투로 말한다.

「블리스, 너 꿈꾸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잖아?」

“있어. 있으니까 찾아내. 무조건 찾아내. 그리고 그보다 한 급 위의 물건 무조건 찾아.”

「있다고?」

블리스에게 한심하다는 듯 타박을 주던 다니카의 목소리가 금세 환해졌다. 경악과 감동에 찬 그 음성에 블리스가 차분히 답해준다.

“그래. 내가 봤어.”

「레드 다이아몬드 400캐럿짜리가 진짜 있다고? 야,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GG마스터 자격 있는 사람의 평이야. 원석이야. 400캐럿이고, 남아공 산이래. 그 녀석이 그렇다면 확실해.”

「세상에. 나도 못 들은 얘긴데. 알았어. 찾아낼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낼게. 그런데 네가 그걸 어디서 본 거야? 내가 볼 수 있어? 정확히 감정해봤으면 좋겠는데.」

“안 돼. 너도 오프 더 레코드야. 무조건 찾아내. 컬리넌보다 더 대단한 걸 찾아내보라고. 레드 크로스를 찾아냈으니 그것도 찾아낼 수 있겠지. 이번에도 찾아낸다면 네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게.”

블리스의 그 말에 다니카가 잠시 후 기분이 상한 듯 투덜거린다.

「너 진짜 짜증나는 거 알아?」

“뭐가?”

「나한테는 힘든 일만 골라서 맡기잖아? 10년 전에도 갑자기 레드 크로스를 찾아내라고 해서 5년이 걸려서 겨우 찾아줬더니 이번엔 컬리넌보다 큰 걸 찾으라고? 너 진짜 양심 없어.」

“너도 찾는 거 좋아하잖아.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맡기겠어?”

보석을 미친 듯 좋아하는 까마귀지만 다니카가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게 그 보석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힘든 미션을 맡길수록 좋아하는 그녀였다. 투덜거려도 지금쯤 내심 두근두근 하며 벌써 장비를 챙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지만 하여간 너 짜증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 못 찾으면 네가 가서 캐와.”

없으면 만들어내라는 그 말에 다니카가 빽하니 비명을 내지른다.

「블리스 애클랜드, 너 여자들한테 신사라더니 나한테는 왜 그래?」

“네가 여자였냐?”

「뭐라고?」

“넌 내가 남자로 보여?”

「미쳤냐?」

대학시절 다니카가 미친 듯 애클랜드를 드나들던 때가 있었다. 그때 묘하게 클레어와 짝이 맞아 클레어가 블리스와 결혼할 것을 적극추천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니카와 블리스 두 사람이 동시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바닥에 패대기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까마귀 다니카는 그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남성체’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니카가 연애도 안 했다는 건 아니다. 사실 다니카가 애클랜드 저택을 드나든 건 심심해서가 아니었다. 다니카는 그때 진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다니카의 연심도 진의 한 마디에 박살나 버렸다. 은근히 대쉬를 하던 다니카를 보며 진은 다른 친구들처럼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라고 무신경하게 내뱉어버린 것이다. 그 뒤로 다니카는 두 번 다시 애클랜드 저택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에이먼과 데이트를 시작했다. 다니카는 수많은 여인들 중 에이먼의 취미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애클랜드 가 사람들 모두 다니카를 좋아했기에 에이먼과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에이먼도 결국은 네 번 정도 데이트를 하고는 이별을 고했다. 이유는 다니카에게서 너무나 진한 동지애와 함께 격렬한 우정을 느껴 애인으로 만나기엔 아깝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니카를 만나며 에이먼이 내뱉은 이별의 말 역시 진과 같았다.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

그 후로 다니카는 더욱 더 보석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하여간 네 덕에 졸리다 정신 확 들었어. 알았어. 까짓 거 찾아내지, 뭐. 좋아. 1년만 기다려줘.」

“일주일.”

「응?」

“일주일이야. 그 안에 찾아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야! 그게 말이 돼? 아프리카를 통째로 파 올려도 일주일 안에는 못 찾아!」

“찾을 수 있어. 넌 유능하니까.”

「……나쁜 자식. 알았어. 해볼게. 어디에 쓸 건데 그래? 선물용이면 네가 이렇게 애를 태울 리가 없고.」

“청혼할 거야.”

「레드 크로스로 한다며?」

“안 돼. 나 솔직히 지금 자존심 굉장히 상하거든? 생각 같아서는 컬리넌 1세를 훔치러 영국에 밀입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야? 너 보석 같은 데에는 연연하지 않잖아?」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줄게.”

「잠깐…… 혹시, 그 보석 감정했다는 게 진이야? 진이 400캐럿짜리 레드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은 거야?」

역시나 감이 좋은 다니카의 질문에 블리스는 침묵했다. 다음 순간 안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니카에게 까마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가 세 개가 있는데 첫 번째가 반짝거리는 것만 보면 환장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이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이러고도 네가 여자냐?”

문득 떠오른 듯 블리스가 공격하자 뚝하니 다니카의 웃음소리가 그친다.

「……죽고 싶냐?」

“하여간 찾아내.”

「찾아내긴 내는 건데, 그걸 찾아서 뭘 하려고? 진 성격에 그걸 받고 기뻐하겠냐? 무서운 거 줬다고 벌벌 떨지?」

다니카도 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진의 그 이상한 방향으로 발달된 상상력은 대학시절부터 유명했었다. 대체 왜 저런 애가 소설을 못 쓰는 거냐고 묻던 걸 블리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100캐럿 이상 가는 다이아몬드는 그냥 장식용이야. 아니지, 솔직히 말해 장식용도 안 된다. 박물관에나 진열해놔야지 그걸 어떻게 집에 둬? 하물며 펜던트나 왕관으로 쓸 것도 아닌데 무슨 가치가 있겠냐고?」

다니카의 말대로 확실히 100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는 주얼리용이라기보다는 그냥 관상용이다. 명화나 조각상과 같이 걸어놓고 세워놓고 멀리서 보는 거지 현실상에서 걸고 달고 사용할 수는 없다. 블리스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걸 구해주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라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니카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뻔하기에 블리스는 냉정하게 그녀의 말에 받아쳤다.

“까마귀, 너 은근히 말 돌리지 마. 어차피 진에게는 필요 없으니 레드 다이아몬드 내놓으라는 소리 아냐?”

「맞아.」

“내가 벨트로 만들어서라도 진 허리에 채워놓을 테니 넌 찾아오기만 해.”

「거참, 노먼 떼어놨다 싶었더니 이번엔 너냐? 진도 참 팔자 사나워.」

“그래, 너 같은 거한테도 사랑 받았으니 아주 팔자 사납지.”

「블리스, 너 자꾸 이 따위로 굴면 안 구해주는 수가 있어?」

“네 성격에 잘도 그러겠다. 빨리 찾아내. 클랜 결혼식까지 찾아내는 거야. 널 믿어.”

싱긋 웃으며 도저히 거절 못할 말로 마무리하는 블리스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다니카가 한탄한다.

「내가 대체 왜 너랑 친해진 거지?」

“진하고 어떻게 해보려고.”

사실 블리스는 처음부터 다니카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니카와 친해진 것은 다니카에게는 전혀 경계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남자인 노만은 꽤 위험하다 감지했지만 여자인 다니카에게 연적의 느낌을 받지 못했던 건, 진이 다니카를 진심으로 ‘좋은 녀석’이라고 느끼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니까 다니카는 진에게는 이성은커녕 동성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그냥 ‘녀석’이었다. 아니, 어쩌면 ‘형님’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기숙사 시절 알파베타감마 클럽 멤버들이 다니카를 클럽의 명예 회원으로 받아들여 ‘형제’라 부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래, 그랬지. 그랬었다. 알았어. 끊어. 암시장부터 뒤져보게.」

“일주일이야.”

「끊어.」

그 말에 막 전화를 끊으려던 블리스는 은근한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니카.”

「응?」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

다니카 메를랜드, 30년 인생 최초의 실연이자 최고의 고통과 아픔을 선사한 그 대사를 그대로 내뱉어주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워낙에 재미있는 친구라 가벼운 기분으로 통화를 끝낸 블리스는 고개를 들어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회의실의 불빛이 사라진 걸 보곤 안쪽에서 기다리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는 확인한 뒤 느긋하게 건물 앞에 선 블리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진을 보며 저 멀리서 나타난 리무진에 손짓을 해보였다. 검고 긴 차체가 다가오는 것과 같이 상자를 잔뜩 든 진이 복도를 가로지른다.

토요일 오후라 텅 빈 건물의 복도를 나온 진이 문을 나서며 블리스에게 말을 건다.

“기다렸지? 가자.”

“뭐가 그렇게 많아?”

“이건 대넌이 갖다 준 거야. 그런데 차는?”

가장 큰 상자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던 진의 말과 거의 동시에 그들의 앞으로 검은 리무진이 멈춰 섰다. 손을 뻗어 진이 들고 있던 짐을 받아든 블리스는 차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

“……이건 또 뭐야? 너 또 이상한 시 읊으면 나 그냥 자리 박차고 나가버릴 거야.”

예이츠의 시를 이상한 시라고 폄하하는 예일대 영문과 졸업생을 웃는 표정으로 바라본 블리스는 안심하라는 듯 천천히 말해주었다.

“설마. 한 번 한 거 두 번 써먹지는 않아. 그것도 너한테는 먹히지도 않는 걸.”

“다행이네.”

그 말에 안심을 한 진은 조용히 리무진 안에 올라타 블리스에게 손을 뻗어 상자를 받아 안쪽의 테이블 위에 내려두곤 자신이 안쪽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뒤 블리스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에 이끌리듯 바로 옆에 올라탄 블리스는 차문을 닫았다.

“오늘은 리무진 타는 날인가 봐.”

자리를 잡고 앉은 진이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가 진을 돌아보며 묻는다.

“왜?”

“세르게이가 흰색 리무진을 타고 나타났었거든. 그 사람 진짜 이상해.”

“……리무진을?”

“응. 저녁 먹자는 거 겨우 거절했어. 원래 아무 생각 없다지만 그래도 하도 하는 행동이 이상해서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순간 블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하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세르게이에게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건 세르게이의 그 독특하고 무심한 성격 탓도 있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혀 모르는 남자가 진에게 꽃이나 나무를 보냈다면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세르게이라면 원래 그러려니 하게 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이상한 선물을 잘 보내는 걸로도 유명한 남자니까.

하지만 세르게이가 저녁 초대를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리무진을 타고 누군가를 픽업하는 경우도 드물다. 아니,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레드 다이아몬드가 마음에 걸린다. 진의 말대로 장물일 가능성이 99%이긴 하지만 그 존재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사실 돈보다는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에 가치가 있는 거다.

아무리 세르게이가 성격이 독특하다 해도 그런 걸 쉽사리 건네줄 리가 없다. 세르게이 네브즐린 역시 돈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엄청난 물건을 아무나에게 내줄 정도로 뇌가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이 농담으로 공작새라 부르긴 하지만 엘레나처럼 머리가 딸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감각의 핀트가 어긋난 것일 뿐 머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비상하게 좋아, 텔레비전 안에 계시는 신께서 케이블 보급을 위해 만들어낸 인간이라 불리는 천재적인 기획자 에이먼조차 같이 일하기 무서울 정도로 기획력이 좋다고 칭찬할 정도의 남자였다.

이게 겨우 진이 경계를 하지 않는 건 좋은데 슬슬 블리스가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게다가 그의 남색 취미는 유명하다. 물론 금발벽안의 까칠한 미소년들이 취향이긴 하지만, 그 남자라고 취향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에반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진은 진짜 이상한 인간들에게 인기가 있는 타입이었다.

“좀 경계해야겠군.”

“응?”

“아냐. 오늘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와 줘. 죽을 때까지 못 잊을 밤을 만들어줄 테니.”

“죽고 싶은 밤이나 만들지 마라.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멀쩡한 차 놔두고 리무진 끌고.”

“힌트 하나 줄까?”

“무슨 힌트?”

“네가 나랑 처음 본 영화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해?”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

“땡.”

“아…… 시스터 액트 2였나?”

“아니.”

“쥬라기 공원?”

“영화관에서 본 거 말고.”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기억해봐.”

아리송한 힌트에 눈살을 찌푸린 진은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애클랜드 가는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이었지만 딱 세 가지만은 아이들에게 절대 해선 안 된다고 제어하고 있었다. 하나가 설탕과 색소, 그리고 트랜스지방이 함유된 음료와 패스트푸드 종류였고, 둘째가 마약, 그리고 셋째가 텔레비전이었다. 현재는 에이먼이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 케이블과 지방 방송을 통틀어 20여개의 채널을 소유하고 있던 방송계의 거물인 대넌이 막상 그의 자식들에게는 절대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건 진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진도 정확히 기억을 하는데, 미국에 처음 와 영어를 배울 때 텔레비전을 통해 배웠는데 당시 대넌이 운영하던 ‘kids kids'라는 채널의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그 광고인 즉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다 못해 그 채널을 달아주자, 아이들과 소통을 하기 시작해 마침내 학교 최고의 인기 학생이 된다는 거였다. 쉽게 말해 아이가 따돌림을 당한 이유가 그 채널에서 하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해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탓이라는 내용의 광고였다. 그런 남자가 막상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못하게 했다는 건 참 웃기는 얘기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진이 애클랜드 저택에서 가장 놀랐던 게 그 집에는 텔레비전이 딱 한 대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사라의 방에만 있는 거였다. 그 외엔 1층에 영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영사실은 영화관처럼 꾸며져 납치 위험 때문에 영화관도 제대로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필름을 구해다 틀거나 사회와 문학, 역사, 언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용도로만 쓰였다. 지금도 실제 셀리브리티들 중에 가정교육을 엄하게 시키는 집안은 아예 못 보게 하는 건 아니라도 하루에 30에서 1시간 사이로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집안이 대부분이었다. 텔레비전뿐 아니라 오락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생일에 유명한 오락기를 선물하는 사람은 무식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셀리브리티의 아이들은 어드벤처 게임 대신 보디가드와 전문가들을 데리고 직접 이집트로 날아가고, 레이싱 게임 대신 정원에 소형 레이싱 장을 만들어두고 페라리에서 나오는 아동용 스포츠카를 타고 달린다. 여자 아이들은 인형 놀이를 하는 대신 개인 스타일리스트들을 데리고 다니며 명품 브랜드에서 나오는 키즈 브랜드의 드레스를 원하는 대로 사다 입을 수 있다. 삶 자체가 가상적이라 가상공간에서의 게임을 할 필요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애클랜드 저택에 게임기나 텔레비전이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집에 들어간 뒤 사라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방에만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가끔 한국의 드라마나 만화들을 녹화한 비디오를 갖다 틀어주었다. 한국어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녀의 배려였다. 문제는 그걸 눈치 챈 애클랜드 사 남매가 종종 자신의 방으로 몰래 렌탈한 비디오를 들고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비디오만 들고 온 건 아니었다. 집에서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 코카콜라나 프랜치 포테이토, 그리고 과자나 카라멜 등을 학교에서 입수해 가방에 싸 짊어지고 들어와 몰래 갖고 나타나곤 했다. 

“아…….”

순간 뭔가가 스치는 듯해 진은 블리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블리스가 싱긋 웃어 보인다.

“이제 기억났어?”

“응. 그런데 그건 왜?”

“가 보면 알아.”

“설마 이 바쁜 때에 진짜 거기로 가려는 건 아니지?”

“그러고 싶지만 오가는 시간이 낭비라 패스. 가보면 알아.”

블리스는 기억해낸 진이 대견하다는 듯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블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보면 알아.”

리무진까지 끌고 온 것에 비해 블리스가 진을 데리고 온 곳은 레스토랑이나 바가 아닌 그의 아파트였다. 차에서 내려 짐을 대신 든 블리스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진은 이건 또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그 표정을 정확히 읽어낸 블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가보면 알아.”

오늘은 카드 대신 지문인식기를 쓰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57층과 58층의 불이 동시에 들어왔다.

“뭐야? 이거 고장 난 거 아냐?”

“아냐.”

“57층도 불이 들어오는데?”

“내가 샀다니까.”

“……진짜 샀어?”

“응. 원래는 터서 2층으로 사용할까 했는데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계단 하나만 이어놨지.”

“돈이 썩었다.”

“너, 내 재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내 재력에 반했다면서?”

“재력은 재력이고 쓰는 건 쓰는 거지. 너희 집 사람들은 진짜 금전 감각이 없어.”

그 말에 블리스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이 애클랜드 저택에 온 뒤 어느 정도 속을 터놓게 된 뒤 학교에서 돌아오다 중간에 차가 고장 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블리스도 막 정식 면허를 받은 뒤라 직접 차를 몰고 다녔는데 누가 차에 장난을 쳐놨는지 엔진 과열로 차가 멈추자 그대로 견인차를 불러 차를 보내고는 자신은 택시를 타고 페라리 매장으로 가 전시된 차를 사서 끌고나온 일이 있었다. 집에도 차가 많은데 왜 사냐, 그럼 차라리 택시를 타고 집에 가지, 라고 하자 “그냥.”이라고 답을 해 진을 기함시켰다. 블리스뿐 아니라 애클랜드 가 사람들-사라를 뺀- 모두 마찬가지였다. 클레어도 외출 중에 구두나 옷에 문제가 생기면 그대로 차를 타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매장에 전화를 해 점원에게 옷과 구두를 들고 그녀가 있는 곳까지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아주 작은 흠이 난 옷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진이 몇 번인가 그 이야기를 하며 “좀 아껴라.”라고 말하자 돌아온 답은 허망했다.

『그거 아껴서 뭐하게?』

진짜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왜 아껴야 하냐고 묻는데 더는 답할 말이 없어 진은 그냥 되는 대로 살라고 해버렸다.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는 힘든 숙제처럼 아무리 쓰고 써도 돈이 쌓이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아낀다는 건 진짜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5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블리스가 정장을 입은 채 진에게 길을 내준다. 블리스의 아파트와 비슷한 구도로 내리자마자 현관문이 보이는 구조였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복도를 바라보던 진이 다시 블리스를 돌아보자 블리스가 복도에 놓인 콘솔 위에 진의 짐을 내려두곤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를 한다. 

오늘따라 유독 친절하고 부드러운 블리스의 태도에 슬쩍 그를 바라본 진은 얌전히 그를 따라 그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부를 본 순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건 뭐야?”

“영화관.”

“그건 나도 알아.”

전체적으로 어두운 내실의 내부에는 정면에 거대한 스크린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커다란 고급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이음새 하나 없이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양탄자였다. 대체 저걸 어떻게 57층까지 올려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닥에서부터 내부를 다시 돌아보자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단 두 개의 나무 의자가 있었다. 벽에는 여기저기 오래된 명화의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거기까지는 VIP를 위한 식당용 극장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스크린의 반대쪽에 있는 낡은 바가 보였다. 그 바 위에는 「Rick`s Cafe Americain」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그 팻말이었다.

순간 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거 어떻게 만든 거야?”

“똑같이 제작한 거야.”

그러고 보니 바의 모양도 비슷하다. 슬쩍 바를 돌아보던 진은 그 옆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를 보곤 진짜 놀란 얼굴로 블리스를 돌아봤다.

“저거 소리 나?”

처음에는 모형인가 했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진이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웃으며 진을 바라본다.

“응. 구하느라 애먹었어. 같은 년도 모델들은 거의 사라져서 말야.”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진을 테이블 앞으로 데리고 간 블리스가 의자를 빼며 자리를 잡아주자 진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의자도 똑같네. 대단하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구나.”

“무슨 소리야? 정성이야, 정성.”

“아무리 정성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못 사지. 이 의자는 새로 만든 것 같은데, 저 피아노는 너무 보존 상태가 좋은데?”

피아노가 탐난다는 듯 쳐다보는 그 얼굴에 블리스가 테이블 옆에 놓인 트레이에서 접시와 잔을 세팅하며 걱정되는 바를 경고했다.

“너 여기까지 와서 물건 감정하지 마. 저거 어디 선물로 보낼 생각은 꿈에도 말라고.”

“그래도 아깝잖아. 저거 경매에도 잘 나오기 힘든 물건인데. 릭 브레이먼 씨가 카사블랑카 팬이잖아.”

그 와중에도 저 피아노를 진짜 보낼 생각인 듯 눈을 반짝거리는 진을 웃으며 내려다본 블리스는 와인 병을 들고는 마개를 따며 부드러운 투로 타박을 줬다.

“누가 진 케이먼 아니랄까 봐 그래? 일은 좀 잊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클링 와인(샴페인)의 뚜껑을 연 블리스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진의 잔에 뵈브 클라코(Veuve Clicquot)를 따랐다. 테이블 위에 있는 캐비어와 스파클링 와인의 이름을 본 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 여기서 ‘그대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s.)’이런 대사 하면 상 엎어버릴 거야.”

웃음을 밝고 목소리도 유쾌한 듯 들리지만 진의 눈가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와인 세례를 한 번 받아본 경험이 있던 터라 블리스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알아. 나도 그런 쪽 팔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해.”

“네가 무슨 험프리 보가트냐? 뵈브 클리코를 땄으니 그 말도 해보지? ‘자, 독일 군이 닥치기 전에 이 샴페인들을 다 마셔버리자고. 아직도 세 병이나 남았어.’ 너, 설마 진짜 세 병을 준비한 건 아니지?”

그 말에 블리스가 웃는다.

“아직도 그 대사들을 외우고 있어?”

“대학 때 카사블랑카의 대사들을 텍스트로 바꿔 논문을 썼거든. 그런데 뵈브 클리코라면 너무 싸게 먹히는 거 아냐?”

블리스라면 절대 마시지 않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의 와인을 돌아보며 진이 타박을 하자 블리스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반박한다.

“어이, 이건 분위기야, 분위기. 난 무드를 중시한다고.”

유난히도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병을 감싼 채 우아한 동작으로 와인을 따르는 블리스를 진은 멍하니 바라봤다. 블리스가 차나 술을 따르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근사하다. 노란 빛이 도는 투명한 스파클링 와인마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천천히, 우아하게 찰랑거리며 흘러내리는 듯했다. 

진이 잠시 동안 넋이 나간 듯 블리스를 바라보고 있자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르던 블리스가 싱긋 웃는다.

“내가 그렇게 근사해?”

“술 따르는 건 멋있어. 인정.”

“분위기 없기는.”

그 말에 진은 샴페인 잔을 들며 블리스에게 이 상황에서 가장 궁금한 바를 물었다.

“그래, 좋다. 그래서 이 다음은?”

“그대 눈동자에 건배?”

블리스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한 대사를 읊으며 잔을 들자 진 역시 웃으며 잔을 마주쳤다.

“앉아.”

진이 아직도 서 있는 블리스에게 의자를 권하자 블리스가 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바 쪽으로 다가섰다. 뭘 틀려는가 싶어 턱을 괴고 있자, 희미하던 불빛이 사라지고 대형 스크린 위로 카운트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는 카사블랑카였다. 블리스는 비록 마지막 장면을 남겨둔 채 잠들어버렸지만, 그게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본 영화였다. 방 안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새벽에 몰래 불을 끄고 소리를 죽인 채 봤던 거지만, 지금까지도 진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영화는 그 영화뿐이었다.

물론, 처음의 감동은 어디에 갖다 팔아먹었는지 대학 시절 논문을 쓸 때에는 ‘바람난 여편네가 사람 여럿 잡는구나.’라는 감상뿐이었지만 여전히 카사블랑카 영화 속의 함축적인 대사들은 인상 깊게 남았다. 특히 다시 만난 릭과 일자가 일자의 남편을 앞에 두고 그저 아는 사람인 듯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던 그 대사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별을 한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미안함. 그리고 어떤 깨달음.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파리에서의 추억뿐이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접어야 하고, 후회 없이 사랑했기에 서로의 자리로 돌아가 살 힘을 얻었다.

그 영화를 곱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랑을 잊고, 아니 포기한 뒤 다시 블리스를 만났을 때 자신은 어떤 감정이 들까.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랑은 상처로 남아있을까, 추억으로 남아있을까. 사랑했던 추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도 그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다. 그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임을 알게 된 이상,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블리스의 말대로 블리스도 자신도 여전히 끝을 내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도 그게 어떤 건지, 미련인지, 진짜 사랑인지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선 채 헤매고 있는 거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사이 드디어 ‘0’이 나타난 화면 위로 새하얀 바닷가의 풍경이 펼쳐졌다. 순간 그 위로 드러난 소년의 모습에 진은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인사해 봐, 진.」

화면에 잡히는 건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음성은 블리스였다. 처음 애클랜드 저택으로 간 뒤 얼마 후 애클랜드 소유의 해변으로 나갔던 날, 찍은 비디오였다.

그리고 비디오를 찍은 건 블리스였다.

「어서. 우리 집은 대대로 매해 같은 날 비디오를 찍는 게 전통이라고. 너도 익숙해져야 돼.」

그 말에 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건 거짓말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사라는 그런 전통 따위 없다고 말했다.

「이건 성장기록이야. 나무에 키를 새기는 거랑 똑같아.」

블리스는 저때도 뻔뻔스럽게 사기를 잘 쳤었다.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며 계속해서 주변을 빙빙 도는 블리스의 카메라에 어색하게 웃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비친다. 분명 그게 자신인 줄은 알지만 동시에 아주 낯설어 보였다.

저게 언제던가, 자신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먼 과거의 일로만 느껴진다. 저 케케묵은 비디오를 찾아낸 블리스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테이블에 기대앉는데 바로 뒤에서 맑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블리스, 이건 또 무슨 수작…….”

‘무슨 수작이야?’ 라고 물으려는 순간 부드럽게 이어지던 피아노 소리 위로 블리스의 노랫소리가 겹쳐진다.

You must remember this

A kiss is still a kiss

A sigh is just a sigh

The fundamental things apply

As time goes by

“뭐야?”

턱을 괸 채 뒤를 돌아본 진은 기가 차다는 듯 그렇게 웃었다. 진의 반응에 이쪽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치는 블리스에게 진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새하얗던 화면이 바뀌며 어두운 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블리스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블리스와 찍었던 사진들이 하나씩 스쳐가기 시작했다.

And when two lovers woo 

They still say “L love you” 

On that you can rely 

No matter what the future brings 

As time goes by 

카사블랑카에 나온 곡보다 훨씬 더 느리고 감미로운 피아노 반주 위로 블리스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흐르며 화면 위로 즐거웠던 추억들이 스친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블리스가 뭘 목적으로 했든, 이 계획은 확실히 성공했다. 

잊고 있던 추억을 되살린다는 건 블리스에게 아주 유리한 고지를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저때 자신을 살린 게 블리스였다. 수십 번 포기하고 싶었던 때에도 자신을 버티게 해준 게 블리스였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추억이 스친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블리스에게 위로받았던가, 또 얼마나 사랑받았던가 하는 기억이 스치자 블리스에 대한 원망도 함께 고개를 쳐든다.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영리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기는 타고난 거다.

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친구, 동생, 형……. 그리고 연인.

미련이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사람. 어떤 미래가 다가온다 해도, 긴 세월 속에 흔적으로 남는 사람.

Moonlight and love songs 

Never out of date 

Hearts full of passion 

Jealousy and hate man needs man 

And man must have his mate 

That no one can deny 

woman이 man으로 바뀐 부분을 부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블리스의 얼굴에 작게 웃음을 토해낸 진은 화면에 스치는 두 사람의 대학 입학 축하 파티의 한 장면을 보곤 슬픈 얼굴을 해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들이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애틋하고 아름다운, 어떤 순간도 버릴 수 없는, 추억들이다.

저 추억들만은 앞으로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기억할 것이다.

It’s still the same old story 

A fight for love and glory 

A case of do or die

The world will always welcome lovers 

As time goes by 

마지막 소절이 끝난 뒤 반주마저 끝나자 그와 함께 영상이 멈춘다. 마법 같은 시간이 멈추고 다시 현실이 돌아온다.

“감동 받았어?”

멍하니 멈춰진 화면을 바라보던 진은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들려다 목가에 닿은 차가운 느낌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뭐야?”

“청혼.”

“……미쳤냐?”

짤막하고 담백한 그 말에 블리스가 작게 웃는다.

“그럼, 고백타임이라고 생각해둬.”

그 말과 함께 목에 닿은 차가운 줄이 가라앉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을 들어 체인을 들어보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플래티넘 반지가 걸려 있었다.

“이건 뭐야?”

“네 마음이 정해지면 그 반지를 끼면 돼. 그때까지 기다릴게. 평생이 걸려도.”

다정한 음성과 함께 정수리 위로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이 정도면 선수 급이다, 라고 생각하며 진은 한숨을 내뱉었다. 심플한 플래티넘으로 된 평범하고 깔끔한 링이지만 세공이 몹시 섬세하고 화려하다. 본 적 없는 작품이었다.

“누구한테 맡긴 거야?”

“닐 레인(Neil Lane).”

과연, 깔끔한 디자인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옆면에 0.2캐럿 정도의 다이아몬드가 정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는 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부리는 사치였다.

“……마음이 정해지면 말해줘. 넌 몰아치면 쓰러지는 타입이니까. 천천히 기다릴게.”

애클랜드 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을 친구의 체온을 느끼며 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

“응?”

“일주일 줄게.”

“……응?”

“일주일 뒤, 클랜의 결혼식 때 내가 이 반지를 끼고 나타난다면 네 마음을 받아들인 거지만, 아니라면 아냐. 일주일 동안 다시 내 심장을 뛰게 해봐. 능력껏.”

해보지도 않고 무서워 포기하느니 한 번쯤은 도전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 번이다. 딱 한 번만 마음이 가는 대로 한 번 해보고 싶다. 눌려있던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추억을 남기고, 후회하지 않도록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한 번쯤은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그리고 실패한다면, 아니 어차피 실패하겠지만, 그럼 깔끔하게 포기하고 도망치면 된다. 도전하지도 않고 물러서는 건 싫다. 

더 이상 남의 눈치나 보면서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살고 싶지는 않다. 

한 번은, 일생에 한 번쯤은 이런 휴가를 받아도 된다. 자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그 정도 상은 받아도 된다. 그럴 자격이 있다.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게, 죽는 그 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꿈같은 일주일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깨끗하게 잊고, 모든 미련을 버릴 것이다. 미련이 남은 건 서서히 타오른 불꽃이 제대로 타오르지도 못한 채 식어버린 탓이다. 아직도 다 타지 못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 남은 사랑을 모두 태우고 이번에야 말로 재로 만들어 저 멀리로 날려 보낼 것이다.

깊고 강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 기억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면 된다. 

후회하지 않게 사랑했노라고 말하며,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 블리스는 블리스의 자리에서, 자신은 자신의 자리에서.

“고마워.”

바로 귓가에서 블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 블리스의 팔이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아오는 느낌에 진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블리스의 팔이, 그리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완벽한 함정을 파 준비한 주제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포기했듯, 블리스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리스는 포기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블리스의 사랑이 자신의 것보다 더 독하고 질겼던 걸 수도 있다. 그러니 불안한 게 당연하다. 자신이 불안하듯 블리스도 불안해했을 것이다.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타인의 감정을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 불안이 더욱 더 서로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욱 더 안타깝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마음껏 사랑하고 상대의 애정을 확인하면 곧 마음도 편안해질 것이다. 포기도 쉬워질 것이다.

자신에게서 있어 시작은 곧 끝을 의미했다. 만남은 이별을, 사랑은 실연을. 늘 그랬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다 싸놓은 가방을 보며 언제 이곳을 떠나야 하나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방을 풀고 짐을 늘어놓고, 그 시간을 즐긴 뒤 그 휴가가 끝나면 깔끔하게 가방을 싸들고 떠날 것이다. 준비가 필요한 건 마음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이별을 두려워하기보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깔끔하게 포기하는 쪽이 현명하다

“……기회를 줘서 고마워.”

자신의 목을 꽉 안을 블리스의 팔을 잡으며 진은 고개를 숙였다.

“사랑해.”

블리스가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 그 말에 진은 블리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해봐, 샘.(Play it, Sam.)”

카사블랑카의 대사를 반복하자 블리스가 작게 웃는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은 듯 한 번 더 다정하게 속삭인다.

"사랑해.”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일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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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ain 은 불어로 미국인 남성이라는 뜻입니다. ^^;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릭의 카페 이름이 'Rick`s Cafe Americain'이라 그대로 적었습니다.

이 부분을 쓰느라 카사블랑카를 영자막으로 전부 다시 봤습니다.

대사가 빠른 부분은 놓칠 걸 각오하고 봤는데, 카사블랑카는 영자막 버전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한국어 자막에서는 "뵈보 클리코"(그 유명한 그대 눈동자게 건배를, 할 때 마시는 샴페인 이름입니다. 그래도 영자막으로는 비교적 안 웃깁니다.;) 영화 중에는 릭의 카페의 지배인이 독일 장교들에게 권하는 장면에 이름이 나오는데 한국 자막에서는 "버트리코"라고 표기해놓은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일설에 나오는 일자의 대사 "뵈브 클리코라면 남겠어요.(If it`s Veuve Clicquot I`ll say")라는 대사는 영화 중에 안 나옵니다.;; (아마 뵈브 클리코 마케팅이었던 듯.)

세 번이나 돌려본 결과 안 나옵니다.

저 대사가 나온다는 얘기에 "재규어라면 남겠어."라는 진의 대사를 쓰려고 희희낙락한 결과 참패당했습니다.;

마지막 나오는 대사 "Play it, Sam"은 우디 알랜이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잉그리트 버그만의 대사입니다. 릭이 데리고 다니는 샘이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다시 한 번 "As time goes by."를 연주해달라는 요청이었죠.

하여간, 그렇습니다. ㅠㅠ

눈이 많이 아프네요.....;

P.S : 블리스가 부른 As Time goes by 는 Jason Donovan의 버전입니다. ^^;

줄리 런던의 버전을 제일 좋아하지만, 블리스에게는 현대적인 제이슨 도노반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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