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6/13)

Chapter 6

“정확히 언제까지 되는데요? 진짜 급해서 그래요.”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차를 세워둔 채 커피를 사들고 막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진은 클랜의 결혼식 전부를 위해 통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주 만에 결혼식 준비를 다 하라니,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다. 대체 무슨 깡으로 자신이 다 하겠다고 장담한 건지, 자신의 입술을 쥐어뜯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무리 애클랜드라도 당장 존롭(Jhon Lobb)에서 기성제품도 아닌 수제 웨딩슈즈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해주기는 했지만 신부까지 지각을 하는 바람에 괜히 준비를 맡은 진만 죽어나고 있었다.

“진짜 미안해요. 다음 주까지는 되는 거죠?”

「진, 정말……. 당신 부탁이니 들어주는 거예요. 아무리 애클랜드라도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 안 되죠.」

“미안해요. 부탁할게요.”

「제발 신부나 좀 데리고 나와 봐요. 맞춘다고 하고 가서는 통 무소식이니. 웨딩드레스는 가봉된 거예요?」

“네, 다행이도요.”

「신부 빨리 보내주세요. 그리고 신랑도요.」

웨딩슈즈를 부탁한 존롭의 매니저와 통화를 마친 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이번엔 주세페 파피니의 담당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진, 자꾸 재촉하지 말아요.」

“죄송해요. 그런데 가봉은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거의 되어가긴 하는데……. 진짜 괜찮겠어요, 이걸로? 한 달만 여유가 있어도 맞춰서 입을 수 있는데.」

“사정이 그렇게 돼서요.”

「이탈리아에서 오늘쯤 다시 연락을 준다고 했어요. 그쪽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봉을 마치려고 노력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 정말 미안해요.”

「블리스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지금 통화하는 주세페 파피니의 담당자는 블리스와 약 2주간 데이트를 했던 여자였다. 덕분에 살았다. 블리스의 전화 한 통에 최고급 웨딩 드레스를 간신히 건졌다. 원래는 겨우 2주 만에 끝날 일이 아닌데, 그쪽도 신경을 써서 이탈리아 본사로 가봉을 맡겨줄 정도였다.

막 전화를 끊은 진이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 하는데 사무실에 있던 에반이 문을 열고 나서다 진을 보곤 손짓한다.

“잘됐다. 들어와. 할 얘기가 있어.”

갑작스러운 에반의 등장에 시간을 확인한 진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에반에게 물었다.

“에반, 대체 언제 퇴근하고 언제 출근하는 거야? 설마 사무실에서 사는 건 아니겠지?”

이른 시간이었다. 오전 중에 할 일이 많아 일부러 다른 때보다도 한 시간이나 빨리 출근을 한 진은 자신보다도 일찍 출근한 에반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에반은 단 한 번도 진보다 일찍 퇴근하거나, 늦게 출근하는 일이 없었다. 과연 집에 들어가기나 하나 싶을 정도였다.

“집에는 잘 들어가고 있으니 걱정 마. 들어오기나 해.”

“무슨 일 있어?”

핸드폰을 일단 주머니에 넣고 커피를 든 채 에반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에반이 사무실 안쪽의 소파를 권한다.

“아, 에반, 다음 주 일요일 시간 괜찮지? 클랜 결혼식.”

“진짜 하는 거냐? 브루스 병원에 입원 중인데?”

그 날 브루스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현기증을 일으켜 진짜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리고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 선언한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블리스가 심했다.

“배불러오기 전에 해야 하니까. 참, 아주머니한테 한국인 요리사 한 명 부탁했는데. 전문 요리사보다 가정식 잘하시는 분으로.”

진이 소파에 앉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반이 진에게 메모지를 한 장 건넨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처 주셨어. 사라 때문이지?”

메모지를 받아 그 안에 적힌 이름과 나이, 그리고 연락처를 확인한 진은 곧장 그 번호를 휴대폰에 등록했다.

“임신하니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은가 봐. 매일 주문할 수는 없으니 아예 요리사를 상주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네가 애쓴다. 대넌은 아직도 몰라?”

“몰라. 지금 열심히 보석만 사다 바치고 있나 봐. 사라는 그것 때문에 더 열받아가는 중이고. 오늘 맨하탄에 있는 빌라로 나온대. 브렛한테 갈 수는 없으니 친구가 하는 병원 근처에 빌라를 하나 렌탈했나 봐. 대넌 또 기절하게 생겼어.”

“진짜 어지간들 하다. 이제 슬슬 말하지?”

“내 말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진짜 나중에 그런 자식들 낳을까 봐 겁난다니까.”

번호 입력을 끝낸 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에반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인터뷰 보고 곧장 일할 수 있는 거야, 이 사람은?”

“응. 곧장 가능하대. 미국에 온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이민 온 뒤 남편하고 이혼을 한 모양이야. 다행히 아이들은 없고, 한식 자격증을 가지고 있대. 중식도 좀 하고. 어머니 말로는 조용하대. 사람은 괜찮다고 하더라.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소문 새나갈 염려도 없고.”

“다행이네. 더 할 말은?”

진이 할 말 없으면 나가보겠다는 투로 묻자 에반이 빈 소파에 있던 신문을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걸 본 진은 작게 “아…….”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봤어. 오는 길에. 이게 왜?”

“여기 나도 같이 있었어. 오해하지 말라고.”

“무슨 오해?”

“그런 오해.”

그 말에 진은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커피를 사러 가던 중 가판대에 진열된 이 신문을 보곤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신문 1면에는 진한 갈색 머리의 미녀와 블리스가 난간에 서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타이틀은 역시나 「돌아온 블리스」였다.

“신경 쓰지 마.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그래? 새삼.”

“새삼은 아니지. 아침에 신문 보고 블리스가 길길이 날뛰면서 전화를 했더라고. 요즘 바빠서 짜증나 죽겠는데 신문사까지 이런다고. 당장 신문사 상대로 고소하라던대.”

“1면인데 왜 고소를 해?”

비웃음이 가득한 진의 말에 에반이 조금 놀란 얼굴로 진을 바라보자 진이 별거 아니라는 듯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간다.

“그냥 둬. 별것도 아닌 일로 뭘 그래?”

“……네 그 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그럼? 블리스가 타블로이드 1면에 스캔들 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했었잖아? 새삼 뭘 그래? 이 김에 게이 설 싹 들어갈 테니 다행이지. 대신 타조는 좀 설치겠지만.”

그렇게 말한 진은 그제야 근본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타조였다. 당장에 자기 속였다고 총 들고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엘레나가 문제가 아니야. 블리스 진짜 화났어. GATH사 인수 문제로 존을 만나기로 했는데 존이 딸까지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저렇게 된 거야. 알잖아? 일하다보면 고객 딸에게도 기어야 하는 거.”

에반의 장황한 설명에 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 나도 이젠 여기 돌아가는 구조 파악했어.”

“나랑 케인도 함께였어. 존도 있었고.”

“왜 나한테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

“나도 알아.”

“뭘?”

“블리스가 너한테 정착하고 싶어 한다는 거.”

그새 블리스가 에반에게 불었나 보다. 어쩐지 잔소리장이 에반이 요 며칠 조용하다 싶었다.

“바람이 정착을 할 수 있나? 여기저기 맴돌아야 바람이지.”

“진.”

“됐어. 나도 지금 너무 바쁘다. 정신없어. 블리스한테 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해. 2주 만에 결혼 준비를 하라니, 진짜 미친 거지.”

피곤한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컵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순간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사흘 째 이어진 모닝콜이었다. 정확히 사흘 째 이 시간만 되면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에반, 나 일어설게.”

“그래.”

에반에게 인사를 고한 뒤 신문을 옆구리에 낀 진은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그래, 알아.”

생각 같아서는 ‘나 죽도록 바쁘거든?’ 하고 끊어버리고 싶지만 엘레나의 오빠를 만난 뒤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화를 내고 전화를 끊으면 울면서 오빠한테 ‘오빠, 진 좀 죽여줘!’라고 말할 것 같아 아무리 바빠 죽을 것 같아도 이 전화만은 받고 있었다.

「신문 봤어요.」

그래, 봤겠지. 읽은 게 아니라, 봤겠지.

“그럼 본 김에 읽어 봐. 사전 펴놓고.”

사진만 보지 말고 기사를 좀 읽어라, 라는 투로 진이 말하자 엘레나가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 여자 뭐예요?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그 말에 진은 휴대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끼곤 신문을 펼쳐 봤다. 사진 속의 여자는 미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인이다.

“왜? 미인인데.”

「웃기지 말아요. 코 세우고, 눈 찢고, 보톡스도 맞았어요. 웃는 거 보세요. 표정이 부자연스럽잖아요. 저번에 태닝할 때 한 번 봤는데 등에 살 장난 아니에요. 거기다 어찌나 까다롭게 굴던지. 제가 점원이었으면 기계 잠가버렸을 거예요.」

어쩐지 엘레나라면 점원이 아니라도 잠갔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진은 억지로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러냐?”

「그렇다니까요. 거기다 옷은 뭐 이래? 저거 3년 전 드레스라고요. 촌스럽게 3년 전 드레스를 입고 디너에 가다니 완전 미친 여자에요. 거기다 저 백은 뭐래요? 아무리 리미티드라도 4년 전 거라고요. 검은 칵테일 드레스에 저 번쩍거리는 주얼리에 검은 가방이라니. 미친 거 아니에요, 이 여자? 천박하고 촌스러워요. 지루하다고요. 분명히 자기가 골라 입은 거예요. 내가 스타일리스트라면 저 여자 그냥 죽여 버렸을 거예요.」

사진 속 여자의 패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엘레나의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사무실로 들어선 진은 곧장 책상으로 가 가방과 신문, 그리고 컵을 내려둔 채 양복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엘레나, 옷 못 입는다고 죽이면 안 되지. 그럼 큰일 나.”

「아씨! 당신은 패션을 너무 몰라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요! 다 뜯어 고치고 화장을 덕지덕지 했는데도 못 생겼잖아요! 거기다 패션도 문제에요! 진짜 무슨 옷을 저 따위로 입어요? 거기다 머리도 촌스럽긴. 구두도 분명히 5-6년 된 디자인 신었을 거예요. 블리스 원래 저렇게 눈이 낮아요?」

“그런가 보지.”

아무리 봐도 흠잡을 데 없는 미녀인지라 진은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입이 딱 벌어지는 미녀는 아니라도 나름 개성 있는 미녀였다. 그리고 옷이나 장신구도 딱히 거슬리진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인 엘레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전문가의 시선에서인지 아니면 그냥 비틀린 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블리스를 죽이겠다 설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진, 저 여자 그냥 둬도 괜찮은 거예요?」

“그냥 안 두면?”

벗은 재킷을 옷걸이에 건 뒤 책상으로 가 앉은 진은 끈끈한 공기에 에어컨을 틀고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스케줄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순간, 엘레나가 진짜 큰일 날 소리를 내뱉었다.

「저 여자, 내가 죽여줄까요?」

“……저기, 너 말이다…… 죽인다는 소리를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돼.”

진 본인도 그런 말을 자주 하는 편-특히 노먼에게-이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농담으로 들리는 말이, 엘레나가 하면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아가씨는 죽인다면 진짜 죽일 것 같다.

「진은 남자니까 그렇다 쳐도 저런 못생긴 여자가 블리스 옆에 있는 거, 난 못 참아요!」

“참아.”

「아씨, 그럼 어쩌라고요?」

“어쩌긴 뭘 어째? 자기가 좋아서 만나는 건데.”

「바람피운 남자를 그냥 두겠다는 거예요?」

막말로 네 애인도 아니잖아, 라고 말하려다 진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지난 며칠간 쉴 새 없이 문자가 오간 덕에 이젠 남 같지가 않다. 한 10년은 알고 지낸 친구 같았다.

“원래 바람 같은 녀석인데 뭘 어떻게 해?”

「내가 블리스 만날까요? 아니, 오빠한테 얘기해서 블리스 혼 좀 내주라고 할까요?」

진짜 이 아가씨를 어째야 하나 하는 생각에 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엘리, 그보다 너 학교 갈 준비해야 하지 않아?”

「지금 제가 학교 가게 생겼어요? 오크한테 블리스를 뺏기게 생겼는데?」

“일단 학교 가. 학교 가서 수업 다 받고 나중에 전화해서 얘기하자. 알았지?”

「……당신은 괜찮아요? 이런 거?」

“하루 이틀 일인가?”

「전 블리스가 이런 남자일 줄 몰랐어요.」

“원래 그런 놈이야. 그러니까 너도 어서 좋은 남자 찾아라. 네 또래에 맞는 착한 남자 친구 만나.”

「……몰라요. 끊을게요. 이따 학교 끝나고 사무실 가면 안 돼요? 아니면 따로 만나거나.」

“너랑 따로 만났다간 네 오빠가 내 머리통에 대포를 쏠 거야.”

「아니에요. 세르게이가 진 마음에 든대요.」

“응?”

「가정교사 부탁하고 싶다고 하던데요?」

“……응?”

「오빠가 어지간하면 그런 말 안 하는데, 당신은 진짜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귀엽대요.」

“뭐!?”

귀엽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대체 그 남자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귀엽다고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끼친다. 

「뭘 그렇게 놀라요? 저 아침 먹고 학교 갈 준비할게요. 나중에 전화해요.」

“……그래라, 일단.”

에어컨을 틀어놔서인지 세르게이가 자신을 귀엽다고 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갑자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등골이 오싹한 게 오한이 끼쳐 온다.

“진짜 미치겠네…….”

일은 바빠 죽겠지, 블리스는 전화도 없지, 마음이 어지러워서 잠은 제대로 못자지, 툭하면 대넌이 전화해서 사라 좀 말리라고 난리를 치지, 클랜은 전화해서 얼빠진 소리나 하고 앉아있지, 엘레나는 30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지. 진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난 진짜 휴가가 필요해.”

스케줄첩을 보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진은 곧 죽을 것 같은 음성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신적으로도 그렇지만 육체적으로도 한계다. 블리스랑 에반만 힘든 게 아니다. 이것도 진짜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영문과를 나와 영어 교사나 될 걸,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드는 요즘이었다.

사람이 말라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대로 엎어져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아 침착한 음성을 내뱉었다.

“네, 들어오세요.”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엄청난 꽃다발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진짜 꽃다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키만 한 꽃다발이었다.

“진 케이먼 씨 맞으시죠?”

꽃이 말을 한다.

“……네. 맞는데요…….”

진이 얼어붙은 채 그렇게 답하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꽃다발이 떠억 하니 책상 앞에 멈춰 선다.

“꽃 배달입니다. 사인해주세요.”

진이 질린 얼굴로 꽃을 바라보는 사이 꽃의 뒤에서 하얀 손이 불쑥 나와 영수증을 내민다.

“아……. 저 이게 뭐죠?”

“안에 카드가 있습니다. 저흰 배달만 부탁 받아서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진은 재빨리 영수증을 받아 사인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장미 더미 앞으로 다가갔다. 프린세스 드 모나코와 에스메랄다, 그리고 오델로가 색색별로 섞인 장미 더미였다.

“으아…… 이천 송이는 되겠다.”

이걸 대체 어떻게 옮겨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로지 장미로만 장식된 꽃다발을 보던 진은 위쪽에 꽂힌 연한 분홍색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열어 보았다. 혹시나 블리스가 보낸 게 아닐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물론, 블리스의 취향치고는 좀 무식하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신에게 이런 꽃을 보낼 사람은 솔직히 블리스밖에 없다.

심장이 두근두근 기분 좋게 울렁거렸다. 방금 전까지 죽을 듯 지쳐 있던 게 거짓말인 듯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생기가 돌던 진의 얼굴은 카드를 여는 순간 다시 이상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어느 나라 말이지?”

카드를 아무리 뜯어 봐도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악필이 문제가 아니라, 진이 아는 나라의 문자가 아니었다. 꼭 상형문자 같은 것이…….

“뭐지? 러시아언가? 아닌데……. 맞나?”

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은 도저히 그 문자를 읽을 수가 없어 책상으로 가 잘 쓰지 않는 안경까지 꺼내 쓰곤 다시 카드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 불명이다.

“……이집트 문잔가?”

내가 이집트 사람을 알던가, 하며 진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에서 고객명단을 열었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고객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씩 명단을 살피던 진은 울리는 벨소리에 기계적으로 휴대폰의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서 떼지 않은 채 말하자, 안에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네. 누구시죠?”

「저번에 인사했었지? 세르게이라고 하는데…….」

바이올린 소리처럼 청아하고 섹시한 그 음성에 진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 안녕하십니까?”

「꽃은 잘 받았나?」

“아…… 당신이 보내신 건가요?”

「응.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순간 진은 자신의 키만 한 꽃다발을 바라봤다. 생긴 거답지 않게 사람이 좀 무식하다. 

“……네.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꽃은 왜…….”

「감사의 뜻이야. 엘레나의 몸무게가 3파운드나 늘었어.」

“……예?”

「그리고 학교도 열심히 나가더군.」

“아, 그건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하필 꽃을…….”

「아, 보석이 좋은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진은 몸서리를 쳤다. 어디선가 장물을 들고 와 건넬 것 같아 무서웠다. 철창 행은 싫다. 사실 저 꽃도 어디 장례식에서 갖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뇨. 전 꽃이 좋습니다.”

「다행이군. 그보다 시간을 좀 내줬으면 하는데?」

“……저 제가 요즘 좀…….”

어지간하면 그가 만나자는데 무조건 나가겠지만, 지금은 죽을 시간도 없었다. 농담 아니라, 진짜 목 매달 시간도 없다.

「내가 내일 저녁에 시간이 나는데…… 저녁 식사나 함께 했으면 하는데?」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에 진은 뭐라 할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그러시죠. 그럼 어디서?”

「내일 저녁 때 사무실 앞으로 리무진을 보내지. 7시쯤 괜찮나?」

사실 전혀 안 괜찮다. 리무진도 싫지만 내일 7시에 퇴근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청이다.

어쩌면 지금 저 장미더미 안에 폭탄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거절하면 저기서 폭탄이 터질 거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보지.」

“예……. 그럼.”

다소곳하게 인사를 한 진은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카드를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러시아어는 아닌데…….”

그렇다고 분명히 영어도 아니다. 아니, 영어 비슷하긴 한데, 이렇게 생긴 게 영어일 리가 없다. 아무리 봐도 이집트나 중동 쪽의 상형 문자 같은데…….

언어학자라도 찾아가 물어볼까 하는 사이 다시 전화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순간 진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 잡아 죽여라.”

***

“애클랜드 가 사 남매는 전생에 내 원수였을 거야.”

오늘 오후 겨우 겨우 웨딩웨어 세트를 확보했다는 전화를 받고 안심하던 중, 아주 경사스럽게도 클랜이 재키와 웨딩웨어를 고르러 나가 200세트를 전부 각각 다른 걸로 골랐다는 전화를 받은 진은 혈압이 오를 대로 올라 매장으로 달려 나온 채였다. 다된 밥에 재 뿌린 두 녀석을 잡으러 간 진은 모든 건 예정대로 한다며 직원들을 안심시킨 뒤 말썽쟁이 두 사람을 이끌고 나오며 피곤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테이블웨어를 꼭 통일할 이유 있어? 너무 촌스럽잖아.”

“그래서, 제조사도 다 다른 백 달라부터 십만 달라 사이를 오가는 식기들을 골고루 고른 거냐, 이 얼간이들아!”

옆에서 따라오며 투덜거리는 재키와 클랜을 보며 진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클랜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시선을 돌리고 재키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진을 바라본다.

“진, 꼭 그렇게 비싼 걸로 통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 색색별로 가격별로 얼마나 좋아?”

“클랜이 그러면 재키, 너라도 말려야지. 너까지 같이 이러면 어떻게 해? 백 달라 짜리 세트가 놓인 테이블에 앉는 손님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러니까 아무 거나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게 하라고.”

“……너희 결혼식에 오는 손님이 몇 명인지 알아?”

“천 명 정도?”

“그 사람들을 우르르 몰려오게 한 뒤 아무데나 앉으라고 한다고? 재키, 너 파티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가본 적도 없고, 내가 해본 적도 없는걸.”

확실히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레너드 가는 셀레브리티들 중에서 가장 검소하고 소박한 가정이었다. 그 점만은 브루스를 존경한다. 어릴 때엔 유모군단과 보디가드들에게 둘러싸여 자라고 다섯 살부터 주식과 투자, 그리고 프랑스어와 일어, 독일어 등의 고급 과외교육을 받고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한도 무한대의 신용카드를 들고 다니는 일반 셀레브리티들의 자녀들과 달리, 재키는 아주 검소하고 차분한 아가씨였다. 스타일리스트나 디자이너와도 연이 없고, 파티에 참석하거나 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패션 센스나 파티에 대한 감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사실, 진은 그런 재키를 무척 좋아했지만 막상 셀레브리티들의 사회에서 이 아가씨를 공주님으로 만들어야 할 걸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하다. 파티장에 화장도 거의 안한 채 목부터 무릎까지 가리는 검은 드레스에 흰 단화를 신고 나타난 아가씨에게 뭐라고 할까. 물론, 그 집 여자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재키의 어머니인 킴은 센스가 있는 편이었는데, 재키는 그쪽으로는 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예의 바르고 똑 부러지는 재원이지만, 기본적으로 재키도 클랜 과였다. 보석이나 구두보다 책을 좋아하고 명품 브랜드의 신상 가방보다 커다란 백팩을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하나도 힘든데 둘이나 생겨버렸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미치겠네……. 대체 브루스는 그것도 안 가르치고 뭘 한 거야? 너, 어쩔래? 이제 애클랜드 가에서 하는 작은 파티는 네가 주최해야 하는데?”

사라가 고령 임신 중이라 결혼 직후부터 사소한 티파티는 이제부터 재키가 관리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다 눈앞이 막막하다.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부인과 아가씨들을 불러놓고 프렌치 프라이와 토스트에 머그잔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를 내줄까 걱정돼 죽겠다.

“너, 차 종류는 아는 거야? 홍차 종류 아는 대로 대 봐.”

“……립톤?”

순간 진은 이 아가씨보다는 타조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타조는 명품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물론, 차 종류를 알지는 의문이지만…….

“미치겠다. 너, 내일부터 집안에 앉아서 과외 받아. 내가 전문가를 붙여줄 테니까, 과외 받아. 그리고 스타일리스트랑 헤어 디자이너 붙여줄게. 손톱 관리는 받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주차장으로 가던 진은 재빨리 팜을 꺼내 그 안에 있는 명단을 확인했다. 과외교사부터 시작해 붙여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진, 꼭 그런 것까지 해야 돼? 나더러 머리 빈 애들처럼 멍청하게 앉아서 머리에 바가지 뒤집어쓰고 손톱에 색칠하라고?”

“해야 돼. 안 그러면 내가 명목이 안 서. 결혼식까지만이라도 해. 그 뒤는 무조건 파티 강의야.”

“파티 준비야 진이 해주면 되지. 내가 어떻게 그런 걸 해?”

애클랜드 사람들-재키 포함-은 뭔가를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 원래 이 일은 사라의 영역이었다. 사라가 임신 중인데다 지금 대넌과 전쟁을 치르느라 자신이 대신해주는 것뿐이지, 엄밀히 말해 이건 자신의 일이 아니다. 사라가 못한다면 원래 대넌의 비서들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은 블리스 사의 블리스의 사교담당 비서이지, 애클랜드 부동산 홍보과에서 일하는 직원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블리스 사는 애클랜드 사의 지점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건 절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다.

“이 참에 내가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난 블리스 사교 비서야. 사실은 이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이 바보들아. 제발 내가 해둔대로만 놔다오, 응?”

그 말에 옆에서 걷던 클랜이 재빨리 받아친다.

“그럼, 청첩장은 우리가 만들게 해줘.”

“안 돼.”

“왜?”

“미안하지만 이미 준비 들어갔어. 청첩장이 아니라 플래티넘 카드야. 일일이 수공예로 손님들 이름과 초대 번호를 새겨서 보내는 거라고.”

대넌으로부터 무조건 화려하게, 남들이 그 호사스러움에 질려 뒷말 못하도록 최고로 준비하라는 명을 받은 뒤라 진은 말 그대로 최고로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다. 청첩장은 종이가 아니라 손님들 이름이 새겨진 플래티넘으로 만든 카드였고,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이탈리아의 명품 가구 브랜드인 플루에서 공수하기로 했다. 야외 식장에 꾸미는 꽃값 예산만 벌써 10만 달라가 넘어간 상태다. 테이블 웨어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웨딩웨어로 써 유명해진 엘리자베스 웨어를 200세트 주문했고, 경호요원만 500명에,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의 옷까지 디자이너에게 부탁해 격에 맞는 디자인으로 단체 주문해둔 채였다. 신부의 들러리를 설 어린 친구들을 위해서는 스타일리스트 5명이 붙어 그녀들의 드레스와 구두뿐 아니라 주얼리와 헤어까지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병원에서 골골대는 상태인데다 킴 역시 남편이 무서워 현재 애클랜드 저택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신부 쪽의 부담까지 애클랜드가 떠맡은 덕에 진은 죽어날 판이었다. 총 경비만 대략 삼천만 달라를 예상 중인 초호화판 결혼식이었다. 그 금액을 전부 계산하고 정리하고 지불하는 것도 진이 할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는데 너희는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 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데, 막상 결혼을 하는 당사자인 클랜은 이게 상당히 못마땅한 듯했다.

“돈이 썩었어? 무슨 청첩장을 플래티넘으로 만들어? 거기다 수공예로 이름을 새겨? 안 돼, 취소해. 우리가 디자인 도안 세워서 만들게.”

순간 진은 진심으로 클랜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무 사치스러운 것도 안 좋지만 클랜이나 재키처럼 지나치게 소박한 것도 죄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죄다. 

“안 돼. 대넌과 브루스 얼굴도 있으니 무조건 나한테 맡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야. 너무 심하잖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아나 비 결혼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치러주고 싶으시다지만, 시간이 빡빡해서 이 정도인 줄 알아.”

“이건 진짜 낭비다. 차라리 돈을 뿌리는 게 낫지.”

“대넌 입장도 생각해줘. 하여간 내가 준비한 대로 둬. 안 그러면 내가 대넌한테 혼나.”

“아버지는 진짜 못 말린다니까. 이게 바로 낭비라고.”

“너희도 진짜 못 말리겠다. 정상적으로 하는 결혼도 아닌데, 결혼 준비는 부모님들이 원하시는 대로 둬. 허락하신 것만도 다행이니까.”

생각 같아서는 애클랜드 사람들-사라만 빼고- 전부 저택 해안가에 파묻어버리고 싶었지만 화를 꾹꾹 참으며 진은 자신의 차 앞에 도착해 경보를 껐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차 문을 연 진은 앞에 멈춰선 원 플러스 원 초특가 할인 세트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나 죽을 시간도 없거든? 제발 일 좀 치지 마. 이러다 나 진짜 말라 죽는다.”

“알았다니까, 미안해.”

“알았으면 재빨리 돌아가. 난 더 들를 데가 있으니까.”

“또 어딜 가는데?”

“내가 어딜 가겠냐? 너희 결혼식 때 쓸 샴페인하고 포도주 고르러 가지.”

“그건 우리가 할게.”

“됐어. 그랬다가 또 30달라짜리 골라 올라.”

“진, 싼 것도 맛있는 거 많아. 꼭 비싸야 맛있는 건 아냐.”

“클랜, 너도 일을 시작할 거면 그건 알아둬. 셀레브리티들은 포도주의 맛을 음미하려고 마시는 게 아냐, 그 상표와 희소성을 마시는 거라고. 옷도, 구두도, 가방도 마찬가지야. 질 좋고 근사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만 입을 수 있고 들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을 원하는 거야. 그걸 알아야 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지.”

“……그 말 들으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네.”

“하여간 들어가 봐. 늦겠다.”

“알았어. 오늘 미안해. 그런데 진 너무 피곤해 보여. 그래서 우리가 좀 도우려고 한 거지.”

그 말에 순간 불타오르던 전의가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클랜과 재키 나름은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 거였나 보다. 물론,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쓸데없는 일까지 늘려줬지만 그래도 자신을 도우려 한 그 마음만은 가상해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미안한 줄 알면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둬. 너희 둘 결혼식에 가족도 아닌 내가 이렇게 나서는 거 나도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하는 대로 뒀다간 애클랜드고 레너드고 망신만 당할 거야. 부모님 체면도 좀 생각해줘. 너희 착하고 검소한 커플인 건 아는데, 부모님들 생각해서 그냥 눈 딱 감고 하루만 참으라고.”

“진짜 미안해. 그런데 그 말은 좀 그렇다. 진이 왜 가족이 아냐? 우리 형들보다 훨씬 형 같은데. 아니, 누난가?”

클랜다운 재치에 진은 결국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저런 것들이 진짜 가족이라면 다들 골방에 처넣고 정신교육을 시켜야겠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은 말이었다. 물론, 뒤에 누나라는 말은 좀 그렇지만, 지금은 더 화낼 기운이 없다.

“나 먼저 간다. 너희도 어서 들어가. 그리고 맞아 죽더라도 브루스한테 들러서 제대로 인사해. 너희 형이 심했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자존심을 박박 긁어 앓아눕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당했으니 브루스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재키를 없는 딸 셈 치겠다 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런 게 사돈이 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브루스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블리스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다. 

“찾아뵐게. 아, 그리고 오늘…….”

막 클랜이 뭔가 얘기를 꺼낼 것 같은 분위기에 진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블리스 1면에 얼굴 난 거면 말하지 마라.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아?”

“괜찮아. 너희도 빨리 돌아가. 그리고, 재키 너는 내일부터 내가 붙인 사람들한테 열심히 배워. 머리 좋으니까 넌 빨리 배울 거야.”

만약 상대가 타조라면 그냥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가 투신했겠지만 그나마 재키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진이 마지막으로 재키에게 당부를 하자 재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알았어. 오늘 미안해, 진. 그리고 수고했어.”

“아니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진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안전벨트를 한 뒤 곧장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상하게 심난하고 시끄럽고 피곤한 하루였다.

초특가 세트 둘을 떨쳐낸 뒤 포도주와 샴페인을 골라둔 진은 마지막으로 사라의 집에서 상주할 한국 여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뒤 곧장 사라고 이사 나온 빌라로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켰다. 당장 내일 오전 중에 입주하겠다는 그 말에 진은 웃으며 그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대넌까지 전화해서 제발 사라 좀 설득해달라고 매달리는 통에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사라가 편안해 보여서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된 채 집으로 돌아오자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은 결혼식 업체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과 함께 자세한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내일도 한 시간 빨리 출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터벅터벅 아파트 복도를 걷던 진은 문득 생각난 듯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재 중 전화는 없었다.

“이번엔 진짜 손가락을 다쳤나…….”

에반과는 전화도 잘하고 자주 얼굴도 보는 것 같은데 자신은 벌써 사흘이 넘도록 블리스를 보지 못했다. 출장이라도 간 건가 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점점 더 기운이 빠지는 느낌에 자신의 집을 향해 걷는데 집 앞에 동그랗게 앉아있는 물체가 보였다.

“블…….”

블리스인가 해 진이 서둘러 이름을 부르려는데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진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진을 반긴다.

“어이.”

블리스가 아니라 노먼이었다. 순간 반가웠던 마음이 가셨다.

“아……. 노먼. 웬일이야, 이 시간에?”

“식사하자더니 통 소식이 없어서. 이 시간에 퇴근하는 거야?”

“클랜 결혼 문제 때문에.”

“그걸 왜 네가 준비해?”

“그럴 사정이 있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 앞에 선 진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어서 침대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먼이 자리에서 일어서 진을 따라 들어선다.

“노먼, 나 좀 피곤한데…….”

너랑 말싸움 할 기운 없다는 말을 돌려 말하자 노먼이 진의 어깨를 밀며 안으로 들어선다.

“그래 보인다. 전해줄 게 있어서 온 거야.”

“뭔데?”

“일단 가방 내리고 재킷 벗고 앉아 봐.”

그 말에 진은 소파에 가방을 내려두고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건 채 노먼의 말대로 얌전히 소파에 가 앉았다. 그러자 바로 옆으로 다가와 앉은 노먼이 그가 읽고 있던 책을 건넨다.

“선물.”

“응?”

“생일 선물이라고.”

“웬 생일? 내 생일 지난지가 언젠데?”

“원래 그 생일 음력이라며? 확인해보니 한국 음력 날짜로 오늘이 네 생일이더라고.”

“아…….”

순간 진은 멍하니 노먼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래 전에 한 번, 그것도 스쳐가듯 한 말이었는데……. 생일을 챙겨주겠다던 노먼의 말에 질려 내 생일은 원래 음력이라고 거절하려고 했던 그 말을 노먼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놀랍고, 또 그 생일을 챙기러 늦은 밤까지 기다려준 그에게 감동해 눈물이 시큰해졌다. 힘든 상황이라서인지 더욱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노먼, 너 되게 매력 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응. 너 진짜 매력 있다. 내가 여자였다면 진짜 감동해서 당장에 결혼하자고 했을 것 같아.”

“으하하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네가 진짜 힘들긴 한가 보다. 마음이 약해진 걸 보니.”

“응, 힘들어. 애클랜드 사 남매들 쓸어서 다들 어디 갖다 버리고 싶어.”

진의 그 말에 노먼이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책을 손으로 가리킨다.

“책이나 봐.”

“무슨 책이야?”

“봐.”

책의 표지에는 「In the Mirror」라고 써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노먼 맥캐인? 네가 쓴 거야?”

“응. 6개월 전에 출판 결정 나고 사흘 뒤에 전국에 뿌릴 거야. 마침 네 생일 생각도 나고 해서 막 인쇄 마치고 나온 따끈따끈한 책 들고 온 거야. 네가 첫 독자야. 신랄한 평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노먼은 진의 이마를 툭 쳤다. 그 손길에도 진은 어색한 듯 웃으며 책의 표지를 빤히 내려다봤다. 너무나 기다려오던 책이었다. 노먼이 언제 정신을 차릴까 걱정하며, 그가 그의 이름으로 그가 만들어낸 세계를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길 기다렸다. 

“나, 지금 진짜 감동했어. 고마워. 사인도 좀 해주지?”

“……안에 봐.”

“벌써 해놓은 거냐?”라고 웃으며 받아친 진은 천천히 책의 표지를 넘겼다. 그리고 맨 앞장에 써진 문구를 보곤 눈시울을 붉혔다. 

어떤 선물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노먼이 그의 이름으로 낸 첫 번째 책의 첫 장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주었다. 영원히 남을 그의 세계 안에 자신을 새겨주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날 기다려준 한 사람, 언제나 나를 믿고 기다려준 사랑하는 친구, 진 케이먼을 위해. 하하, 이거 되게 기분 좋다. 나 지금 진짜 감동 받은 것 같아.”

진이 진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노먼이 진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준다.

“그렇지? 기분 좀 좋아졌어?”

“응. 최고로 좋아졌어.”

“다행이다. 오늘은 그만 쉬어라.”

“네 책 볼래.”

“그러지 말고 자. 너 지금 죽을 것 같아. 너무 피곤한 상태야.”

딱 보기에도 진은 지쳐 보였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말에 진은 어깨에 힘을 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아. 나 진짜 피곤해.”

“옆에 있어줄까?”

“……그럴래?”

“그래. 너 외로움 많이 타는 녀석이니까 특별히 옆에 있어주마. 대신, 오늘 밤에 무슨 일 일어나도 난 모른다?”

“하하.”

진은 맥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노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와 함께 다정한 손길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슬슬 잠이 쏟아진다.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지치고 슬픈 기분이었다.

***

탕탕탕-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소파에 누워 잠을 자던 노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내다봤다. 시계를 보니 아직 6시 30분이었다. 이 이른 시간에 뭐야, 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노먼은 옆에서 기절하듯 잠든 진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곤 천천히 문을 향해 나갔다. 그리고 삼중으로 잠긴 열쇠를 열고 문을 여는 순간 앞에 선 금발의 미인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레나 네브즐린?”

얼마 전 사고를 치고 1년간 모델 활동 정지를 먹었지만 그 포스만은 대단해 뉴욕 디자이너들의 몸을 달게 만든 슈퍼모델 엘레나 네브즐린을 정면에서 본 노먼은 다시 한 번 눈을 비비며 그녀를 바라봤다. 런웨이나 파티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긴 금발을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은 채였다. 구두도 단화였지만 노먼과 비슷할 정도로 큰 키였다.

헐리웃에는 린제이 로한, 셀레브리티에는 패리스 힐든 있다면 슈퍼모델계에는 엘레나 네브즐린이 있다고 할 정도로 지독한 파티걸에 온갖 말썽을 다 피우고 다니는 러시아 마피마의 막내딸이 여긴 웬일인가 싶어 노먼이 인상을 쓰자 엘레나가 커다란 봉투를 든 채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 진 케이먼씨 댁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나 진 애인인데?”

순간 엘레나의 손에 있던 봉투가 툭하니 떨어지는 걸 노먼이 재빨리 잡아들었다. 봉투가 따뜻한 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서 음식이었다. 마치 배가 고파오려던 차라 노먼이 봉투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자 엘레나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다.

“진 애인이요?”

“응. 왜?”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난 10년 사귄 애인인데?”

“뭐라고요?”

엘레나가 당장에 한 대라도 칠 기세로 달려들자 그녀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노먼은 재빨리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순간 잠에서 깬 진이 노먼의 뒤로 다가와 머리통을 툭 친다.

“무슨 개소리야? 엘리,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진, 양다리 걸친 거예요?”

퉁퉁 부운 두 눈으로 나온 진을 보자마자 엘레나는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 그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진은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누르며 작게 답해주었다.

“속지 마. 내 친구야. 대학 동기, 노먼 맥캐인.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제야 엘레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아침 사왔는데요.”

“왜?”

“일찍 나와서 아침 사왔어요. 같이 먹어도 돼요?”

일찍이라도 너무 심하다. 이제 겨우 6시 30분이었다. 이 아가씨가 원래 이렇게 부지런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진은 복도를 돌아봤다.

“이 시간에 너 혼자 온 거야?”

“당연히 보디가드들도 있죠. 밖에서 차 기다려요. 오빠한테 허락받고 왔어요.”

세르게이가 허락했다면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진은 쉽사리 길을 터주었다. 어차피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먼도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새벽같이 아침까지 사들고 온 엘레나를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들어와.”

진이 돌아서 안으로 들어서며 말하자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선 엘레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진 목소리 이상해요. 왜 그래요?”

“진짜 너 목소리 너무 심하게 갈라졌다. 누가 들으면 너랑 나랑 뜨거운 밤을 보낸 줄 알겠다.”

“노먼, 헛소리 그만해. 그냥 목이 좀 부은 거야.”

안쪽의 주방으로 들어선 진이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내리려하자 엘레나가 재빨리 따라 들어와 진의 옆에 선다.

“아픈 거 아니에요?”

“괜찮아. 목소리만 좀 이상한 거야. 요즘 좀 무리를 해서 그래. 앉아라. 커피는 그렇고 주스 마실래?”

“네.”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붓고 냉장고로 간 진이 주수병을 찾아들자 먹음직한 베이글과 샐러드를 식탁에 늘어놓은 노먼이 진의 옆으로 다가와 진의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너 열 있어.”

“그런 것 같아. 몸이 무겁고 나른하더라고.”

“오늘은 쉬어. 목도 부었어.”

“일단 출근해 보고.”

“안 돼. 쉬어. 큰일 나. 너 어제도 밤새 끙끙거렸어. 내가 있길래 망정이지.”

진에게서 주스병을 빼앗아든 노먼이 컵을 꺼내 주스를 따라 진에게 먼저 주자 진이 잔을 받아들고 식탁 의자에 앉는다. 그런 진의 뒤를 따라온 노먼은 엘레나의 앞에는 컵만 달랑 내려두곤 주스병을 옆에 내려둔 채 진의 목을 만졌다.

“목 많이 뜨겁다.”

“그래?”

“응. 몸살인가 본데, 내가 회사에 연락해둘 테니 좀 쉬어. 병원 갈래?”

“나가는 길에 들르지, 뭐. 오늘도 할 일이 많아. 하루 쉬면 내일 감당 안 돼.”

“그 회사에 일하는 사람 너뿐이라냐? 쉬어.”

그렇게 말하며 노먼은 부드럽게 진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그 손길에 진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주스를 따르던 엘레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잠깐만요. 그대로 있어요.”

하며 재빨리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엘레나가 빠르게 버튼을 눌러댄다.

“너, 뭐하는 거야?”

“블리스에게 전송하는 중이에요.”

“왜?”

“아, 블리스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실려서 진이 보는데 진 사진은 블리스가 못 보잖아요! 이건 불공평해요! 두 사람 다 봐야죠.”

“뭘?”

“바람피우는 거요.”

“누가 바람을 피웠…….”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진은 콜록거렸다. 목이 뜨거웠다. 거기다 잔뜩 말라 말도 한 마디 하기가 힘들 정도엿다.

“그 봐라. 너 하루 종일 통화하느라 그런 거야. 오늘은 쉬어.”

“사교 담당은 나 하나라서 안 돼. 그리고 에반하고 블리스는 집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뭘.”

“그 사람들은 연봉이라도 수백만 달라지. 넌 뭐야?”

“내 능력이 모자란 탓이지. 나 준비해야겠다. 늦겠다.”

“아냐, 진, 너 오늘은 집에서 쉬어. 그대로 나가면 큰일 나.”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갑자기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노먼 덕에 진은 움찔해버렸다. 순간 진이 다른 사람이 소리 지르는 걸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노먼은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큰소리 내서 미안. 하여간 너 오늘 쉬어야 돼. 집에 해열제 없어?”

“있어. 저기 거실 상자에.”

“내가 찾아올게. 입맛 없어도 뭐 좀 먹어둬. 그리고 약 먹고 쉬어.”

“우리 집 치의사 불러올까요?”

엘레나도 걱정이 된 듯 그렇게 말했지만 진은 순간 한숨을 내뱉었다.

“주치의면 주치의고 의사면 의사지, 치의사는 뭐야?”

“하여간요! 제가 전화하면 당장 들려와요.”

“그렇겠지.”

안 그러면 총 맞을 테니까.

“역시 난 좀 쉬어야겠다. 에반한테 전화해두고 좀 자야겠어.”

“그래. 나도 아침 일찍 출판사에 나가야 하니까, 나갔다 들어올게. 11시쯤 끝날 테니 오는 대로 병원 가자. 아니면 브렛 불러줄까?”

노먼은 진의 옆자리에 앉아 진에게 포크를 챙겨주며 음식들을 모조리 진의 앞으로 몰아주었다. 진의 앞으로 모든 음식이 나열되자 엘레나가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음식들을 바라본다. 먹는 데에 한이 맺혔다는 세르게이의 말이 떠올라 진은 베이글을 엘레나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순간 엘레나의 얼굴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이상하게 귀여운 애라고 생각하며 진이 샐러드를 쑤시며 그쪽 사정을 전한다.

“브렛 요즘 바빠. 대넌도 혈압 간당간당하고 브루스는 쓰러지고.”

“그쪽은 또 왜 그래?”

“클랜하고 재키 결혼 문제 때문에.”

“아, 대강 얘기는 들었다. 브렛하고 우리아버지랑 대넌, 브루스 모두 유펜 알파베타감마 클럽 출신이지?”

순간 진은 먹으려던 샐러드를 떨어트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알파베타감마 클럽은 아이비리그 내에 모든 대학 안에 있는 클럽이었는데, 대넌을 비롯한 그들 모두 같은 클럽 출신으로 스스로를 ‘형제’라 부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부…….

“그 놈의 알파베타감마. 내가 언젠가 그 기숙사에 불 싸질러 버릴 거야.”

모든 악의 근원인 클럽을 아예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진이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먹기 시작하자 옆에 앉은 노먼이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며 궁금한 듯 묻는다.

“그런데 누구 결혼해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거 모르냐? 블리스 동생 클랜하고 레너드 가의 재클린이 결혼한다고.”

“……신문은 봤는데…….”

“보지 말고 읽으라니까.”

아마 사진만 보고 그냥 스캐들이라고 여겼을 게 분명해 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엘레나가 입을 삐죽 내민다.

“하여간, 결혼한다 이거죠? 언제예요?”

“다음 주 일요일.”

그 말에 엘레나가 놀라 소리친다.

“그렇게 빨리요?”

“응. 왜?”

“구두랑 드레스 사야 하잖아요!”

“응?”

“아, 파티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칵테일 드레스면 되죠? 구두는 뭘 신지?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썸씽 블루 새틴 구두 예쁜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는 좀 노티 나죠? 바바라 부이(Barbara Bui)도 예쁘긴 한데, 그보다는 크리스찬 르부탱(Christian Louboutin) 핍토 펌프스가 낫겠죠? 로에베(Loewe) 금색 스트랩도 예쁜데! 뭘 신죠? 살베토르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새틴 스트랩도 진짜 예쁜데. 드레스는 어디 걸로 할까요?”

결혼식이라니 신이 나 떠드는 엘레나를 보며 진은 엘레나에게 압도당해 얼결에 눈을 껌뻑거렸다.

“어, 아무 거나…….”

“어디 디자인 좋아해요? 입생로랑이 좋아요? 아니면 샤넬? 아니면 프라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도 예쁘죠? 아니에요. 그런 결혼식에 그런 기성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어요. 오트구튀르를 입어야겠어요. 파리에 당장 오더 넣어야겠어요.”

환상에 젖어 꿈을 꾸는 엘레나를 보며 진은 “네가 결혼하는 거 아니거든?”이라고 현실을 일깨워주려다 말았다.

“그래, 너야 뭘 입어도 예쁘니까…….”

물론 엘레나를 뭘 입어도 예쁜 거다. 슈퍼모델이니 모델 핏 사이즈를 어떻게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입으면 그만이다. 아마 제대로 꾸미도 나오면 신부를 압도할 정도로 예쁜 거다. 문제는 불행히도 엘레나 네브즐린은 결혼식 초대객 명단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클러치랑 목걸이랑 다 새로 사야겠다. 세르게이한테 카드 돌려달라고 해야지∼.”

혼자 신이 나 떠드는 엘레나를 보며 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 타조가 브랜드명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말하고 있었다. 진짜 명품에 대해서만은 천재였다.

“색은 결혼식이니 베이비 핑크가 좋겠죠?”

“어, 응……. 네 마음대로…….”

“아 신나. 오늘부터 쇼핑해야겠다. 진은 무슨 옷 입을 거예요? 내가 한 벌 선물해도 돼요? 피부도 하얗고 체형도 가느니까 저랑 같이 베이비핑크로 입으면 잘 어울릴 거예요.”

순간 진은 머리가 아찔해옴을 느꼈다. 클랜과 재키의 결혼식에 엘레나 네브즐린과 옷을 세트로 맞춰 입고 등장한다니……. 말도 안 된다. 거기다 베이비 핑크 양복이라니, 입느니 죽겠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라는 게 있다.

“엘리, 너 학교 안 가니?”

“학교 따위가 뭐가 중요해요? 진 나랑 옷 고르러 가요.”

“……저기 난 말이지…….”

죽어도 그 옷만은 못 입어, 라고 하려는데 순간 의식이 아득해졌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그대로 암전 상태였다.

**20편 완결 예정이었던 글이 이상하게 늘어나 중간 과정을 잘라먹으려다.... 결국 포기했습니다. ㅠㅠ

** 언젠가..... 끝나겠죠.....

어두운 밤이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던 겨울의 어느 날, 새해가 막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대넌과 사라는 클럽 회원들과의 모임을 위해 전용기를 타고 지중해로 날아갔고, 에이먼은 친구들과 함께 왜인지 모를 아프리카 여행을 간 상태였다. 그리고 클랜과 클레어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외가인 영국을 방문하러 간 덕에 저택 안에는 고용인들과 블리스, 그리고 진뿐이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거대한 저택은 이상하게도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낮부터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나른다가 느끼던 진은 우울한 기분에 옷장정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을 때엔 늘 옷 정리를 하는 게 버릇이라 옷을 전부 꺼내놓은 진은 커다란 트렁크를 꺼내둔 채 그 안에 차곡차곡 옷가지들을 정리해 넣고 있었다.

한국에서 자신이 입고 왔던 옷가지들과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속옷들을 챙겨 넣던 진은 문득 가방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 있던 사진을 꺼내 멍하니 그 안을 바라보았다.

낡은 사진 안에는 어린 자신과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나란히 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뒤로 펼쳐진 새하얀 자갈밭과 파란 강물.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그 광경에 진은 그리운 듯 사진 속의 어린 소녀의 뺨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영은이었다. 자신의 이름은 희미하지만 여동생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서영은. 작고 예쁜 아이. 늘 자신의 뒤를 따라와 작고 앙증맞은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마주 잡고 자갈길을 걷던 작은 아이. 아버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도 느낌도 목소리도, 심지어는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다시 만난다 해도 못 알아볼 것이다. 기억나는 건 어린 여동생뿐이다.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네 사람들 말로는 엄마가 여동생을 데리고 떠났다고 했으니 어딘가에서 엄마와 함께 잘 살고 있을 거라 기대할 뿐이다. 이 아이는 행복하길 바란다. 자신이 불행했던 만큼 이 아이는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진, 뭐해?」

두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블리스가 들어섰다. 그 소리에 놀라 서둘러 사진을 이불 속에 감추자, 컵 두 개를 들고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오던 블리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려간다.

「그거 뭐야?」

「어? 어…… 그게…….」

어쩐지 그 사진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진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을 돌리려는데 블리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 쪽으로 다가와 컵을 내려두곤 침대 위에 있던 가방 안을 쳐다보며 진에게 묻는다.

「왜 짐을 싸? 입양 결정된 거야?」

그 말에 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블리스가 갑자기 화를 내 뭔가 실수를 했나 싶었는데 트렁크의 짐 때문이었나 보다.

「아, 이거. 원래 여기에 정리를 하는 게 버릇이라서.」

「왜?」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짐을 다 풀면 다시 쌀 때 힘들잖아.」

아직까지 재입양 이야기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진은 생각했다. 입양을 하기엔 자신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다. 게다가 한 번의 파양은 부모와 상성이 안 맞았다 할 수 하지만 두 번의 파양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두 번이나 파양당한 동양인 아이를, 그것도 이제 열여섯이나 되는 아이를 입양할 가정은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복지사들 역시 재입양은 거의 불가능하다 얘기했다. 하지만 애클랜드 가에서 너의 후원을 맡았으니 넌 진짜 운이 좋은 아이라고 반복해 말했었다. 자신 역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집이 자신의 집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습관처럼 옷을 늘 이 집에 갖고 들어온 커다란 트렁크에 하게 되었다. 언제 이 집을 떠나게 될지 모르니까 늘 짐을 싸두었다. 이 천국을 떠나게 되는 날이 다가왔을 때 다시 짐을 싸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짐을 싸는 내내 울어 눈이 부은 채로 떠나야 할 것 같아서, 이 집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되는 오늘까지도 몰래 옷들을 트렁크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하고 다정한 블리스와 헤어지는 건 진짜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진의 설명을 들은 블리스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뭐야? 난 또. 그럼 여기다 싸지 마.」

「왜?」

「앞으로 우리 집에서 살 거잖아. 이제 짐 풀어. 가방도 버리고.」

블리스는 확신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진은 그렇다 말할 수 없었다.

「글쎄.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지.」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저번 집에서도 다시는 파양은 없을 테니 짐을 풀라고 했는데, 짐을 풀자마자 양부모님들이 이혼하셨거든.」

씁쓸한 진의 말에 블리스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멋대로 가방을 뒤져 안에 있던 옷들을 꺼내 침대 위에 집어던졌다. 거친 그 손길에 진이 그를 만류하려 하자 블리스가 그 손을 뿌리치고 안에 있던 짐들을 모조리 꺼낸 뒤 트렁크를 끌고 나간다.

「블리스, 왜 그래?」

「이거 버릴 거야. 그리고 앞으로 너한테 트렁크는 안 줘. 네 집은 여기야. 앞으로 영원히 여기야.」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야.」

「내가 장담해.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다시는 짐 싸지 마!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가방을 끌고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진짜 그 가방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진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서 블리스의 뒤를 따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블리스! 그거 줘!」

「안 돼. 넌 이제 우리 집 가족이야. 이런 거 필요 없어.」

「알았어. 이제 안 쌀 테니까 줘.」

「안 돼.」

「야!」

「안 되는 건 안 돼.」

매섭게 진의 팔을 뿌리친 블리스는 평소답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돌아서 그대로 진의 방을 빠져나갔다. 블리스의 차가운 태도에 차마 방을 나서는 그를 더 이상은 잡지 못한 채 진은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블리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조용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진은 새벽녘에 조용히 열리는 방문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누구냐고 물을 기운도 없었다. 낮부터 계속해서 몸이 좋지 않았는데, 블리스가 화를 내고 방을 나간 뒤 더욱 안 좋아졌다. 온몸이 떨리고 피부가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너무 아파서 계속해서 눈물만 나오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진, 자?」

침대 바로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리스였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도 아프고 온몸이 무겁고 나른해 꿈쩍할 기운이 없다.

입을 꾹 다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블리스가 천천히 침대 맡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까는 미안.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음성이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몸이 떨려올 뿐이다.

「화났어?」

블리스가 조심스러운 투로 그렇게 물어왔다.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놀랐을 뿐이라고 말을 해주려는데 입술을 뗄 수가 없다.

「진? 울어?」

이번엔 조금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리는 자신의 몸에 블리스가 놀란 듯했다.

「진?」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이불이 끌어내려졌다. 아프다는 말도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 블리스는 놀라 그대로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너, 왜 이래? 열이 나잖아? 언제부터 그랬어?」

「…….」

「진!」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그 이름에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아파. 너무 아파…….」

입을 열자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열이 심해서인지 눈물이 조절이 되질 않았다.

「의사 불러올게. 기다려.」

불덩어리 같은 몸을 만진 블리스가 방안을 뛰어나가려는 순간 진은 자기도 모르게 블리스의 옷소매를 잡고 말았다.

「가지 마…….」

「의사 불러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두려움에 찬,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진의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였던 블리스가 움직임을 멈추고 진을 바라보며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끌어내린 이불을 잡고 진을 꽁꽁 싸맨 뒤 진을 뒤에서 꼭 끌어안아주었다.

「이렇게 아프도록 왜 말을 안 했어? 바보야.」

이불 너머에서 울 듯한 블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와 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아플 줄 몰랐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

눈물을 쏟아내며 진이 계속해서 몸을 떨자 블리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진에게 속삭인다.

「자. 진. 어서. 쉿.」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고 다정한 그 음성에 겨우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흐르자, 블리스가 더 세게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조용한 노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Don’t cry, baby don’t cry.

There’s a sun behind the clouds you know

Don’t cry baby, don’t cry

`cause I hate to hear you cry

It hurts me deep inside

You know the way I feel,

you know I love you so.

낮고 조용한, 부드러운 노랫소리. 블리스가 가끔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러주셨다며 흥얼거리던 그 노래였다.

울지 마, 아가. 울지 마. 구름 너머로 곧 해가 뜬다는 걸 알잖니.

울지 마, 아라. 울지 마. 네가 우는 건 싫어.

네가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걸 알잖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알잖아.

사랑하는 걸 알잖아…….

“……모르겠어…….”

펄펄 끓는 물속에서 산 채로 끓여지는 느낌에 부들부들 몸을 떨던 진은 이마에 올라오는 차가운 느낌에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열이 높아서인지 눈앞이 흐리고 의식이 몽롱한 채였다. 아직도 귓가에 블리스가 부르던 『Don`t cry, baby.』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낮고 조용한 그의 음성과 자신의 뜨거운 몸을 감싸 안았던 팔의 감촉, 나른하게 울리는 그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자신의 주변을 감싼 듯 포근하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진은 앞에 선 남자를 보곤 살짝 표정을 굳혔다.

“정신 들어?”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의 얼굴은 낯이 익은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그를 바라본 뒤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 진은 순식간에 꿈에서 현실로 내팽개쳐진 듯 멍한 눈으로 노먼을 바라봤다.

“네가…… 왜…….”

“너 쓰러졌어. 에반한테는 내가 전화해놨으니 쉬고 있어. 출판사에 들렀다 다시 올 테니까 병원 가자.”

그제야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몸이 아픈 건 그때와 똑같다. 그 날 이후로 3-4년에 한 번 꼴로 이렇게 된통 몸살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열다섯 소년이 아니었다. 참 많은 시간이 흘러, 자신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옆에는 자신이 아플 때면 귀신처럼 알아채고 언제든 달려와 주는 블리스가 없다.

긴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복잡하게 바뀌어 있었다.

“노먼, 그냥 가봐. 나 좀 쉴래. 그런데…… 엘리는?”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학교에 보냈어. 눈을 부릅뜨고 러시아어로 뭐라고 하는데 살 떨리더라.”

진력이 났다는 듯한 노먼의 말을 진이 힘겹게 웃으며 재빨리 부정한다.

“걔 러시아어 못해. 아마 급해서 이상한 말이 나갔을 거야.”

“……그러냐?”

“응.”

“이상한 애네. 하여간 쉬어라. 핸드폰 꺼놨으니까 푹 자. 11시 쯤 들를게.”

“됐어. 볼일 봐. 책 발간하는데 기념 사인회나 뭐 그런 것도 안 해?”

“그런 거 할 처지냐? 하여간 다녀올게. 쉬고 있어.”

“응.”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진다. 노먼의 친절에 감동한 진이 순순히 답하자 노먼이 진의 이마를 쓸어 넘겨주곤 방에서 나간다. 노먼의 등을 보면서도 진은 편안함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돌아서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노먼은 괜찮다. 아마 이골이 난 탓일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스트레스 주고 다시 사라지지만 결국 또 다시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나줄 테니까. 노먼에겐 그런 믿음이 있었다. 이 녀석은 어디 갖다놔도 절대 죽지도 않고, 전쟁 한복판에서 혼자 유유히 살아 오토바이 타고 돌아와 전리품이라며 해골을 선물해줄 것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그래서 편했던 것 같다. 언제,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친구, 그리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도 얼굴 본 순간 간지러운 인사말보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싸우고 화를 내도 좋을 것 같은 편안한 친구다.

그래서 노먼이 돌아서는 건 무섭지 않다. 하지만 블리스가 저렇게 돌아서면 자신은 상처 받을 것이다. 긴 시간을 함께 했던 만큼, 늘 자신에게 친절한 모습만 보여줬던 그인 만큼, 그가 냉랭하게 등을 돌리고 돌아서면 자신은 크게 상처 받을 것이다. 너무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노먼과 블리스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게 우정과 사랑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그게 블리스의 진심에 마냥 기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은 아직도 그 트렁크를 완전히 풀지 않았다. 마음속 한 켠에는 늘 커다란 트렁크에 짐을 싸두고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언제 떠나지 아프지 않게, 미련스레 뒤를 돌아보지 않게, 아파하지 않도록 마음을 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블리스를 떠난다면, 그리고 블리스가 떠난다면 많이 슬플 것 같았다. 사랑보다도 그 긴 시간의 정이 남아서,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준 깊은 애정과 상냥함에 목이 말라, 가슴이 아파 많이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짐을 완전히 풀어둘 수는 없었다. 

진에게 있어 만남이란 곧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

이불을 덮고 모처럼 숙면을 취하던 중 진은 쿵쿵거리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누군가 못을 박고 있는지 벽이 울려댈 정도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뭐야…….”

어지간하면 그냥 자고 싶은데, 소리가 너무 커서 겨우 몸을 일으킨 진은 몽롱한 눈동자로 방 안을 돌아봤다. 순간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소음이 울려왔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어…….”

강도라도 들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진은 현기증을 느끼곤 잠시 비틀거렸다.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몸이 뜨끈뜨끈하고 눈앞이 핑핑 도는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하도 시끄러워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진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겨우 방을 나와 소음의 근원지인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막 다가가 문을 여는 순간 쾅 하고 문을 밀고 들어오는 남자에게 밀려 진은 뒤로 두 걸음 정도 밀려나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노먼 어디 있어?”

이 김에 이 아파트를 부술 생각인지 사자후 같은 고함을 내지르는 블리스를 보며 진이 머리를 부여잡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소리 지르지 마. 멀리 울려.”

다크서클이 볼까지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진의 얼굴과 잔뜩 갈라져 팍팍해진 음성을 듣고 있던 블리스는 순식간에 험악하던 표정을 지우고 걱정스레 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 왜 그래?”

“왜 그러는지 몰라서 그래? 시끄러워. 꺼져. 잘 거야.”

“왜 그래?”

“왜 그러긴? 온 몸이 다 아파 죽겠어. 팔도 아프고 다리고 아프고 머리고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다 아파!”

그답지 않게 고함을 내지르는 진을 바라본 블리스는 진의 팔을 잡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흠칫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이렇게 열이 나?”

“너 때문에 그러잖아! 너랑 클랜이랑 다 갖다 쓸어버릴 거야! 아파 죽겠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내지르던 진은 다음 순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열이 나니 자꾸 눈물이 나고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약해져 제어가 되질 않았다.

“왜? 아픈 거야? 병원부터 가야지, 그럼.”

“나가. 잘 거야.”

“병원부터 가야지.”

팔을 강하게 잡아끄는 블리스의 팔에 진은 결국 참고 있던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사흘 동안 연락도 안 하고! 얼굴도 안 보이고! 이상한 여자랑 사진이나 찍히고! 내가 얼마나 아픈 줄 알아? 진짜 아파 죽겠어! 아파서 죽겠단 말야.”

거기까지 말한 진은 기어이 엉엉거리며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 머리는 흔들리고 앞도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열이 오른 채였다. 거기다 온몸이 다 아파 꼼짝도 하기 싫은데 갑자기 나타나 문까지 열게 만든 블리스가 원망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손가락 끝까지 저릴 정도로 아픈데, 진짜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치더니 아픈 사람한테 소리까지 내지른 블리스에게 살심이 들 정도였다.

엉엉거리고 우는 진을 내려다본 블리스는 불덩이 같은 진의 몸을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말로만 미안하다면 다야? 사흘이야! 사흘 동안 연락도 안 했어! 손가락이 부러졌어? 아니면 이빨이라도 몽창 빠졌어? 타조도 보내는 메시지를 넌 왜 못 보내? 세르게이도 꽃을 보냈는데 왜 넌 꽃도 없어? 노먼은 책까지 내줬는데 왜 넌 아무 것도 없어? 메모 한 장, 메시지 하나 보낼 시간도 없어? 난 바빠 죽겠는데……. 아파 죽겠는데도 일하는데……. 넌 전화도 없고 여자랑 놀러 다니다 사진이나 찍히고! 클랜은 사람 속 박박 긁고 사고나 치고! 대넌은 시간마다 전화해서 괴롭히고! 이 주일 안에 결혼 준비를 하라는 게 말이나 돼? 내가 터미네이터냐? 내가 개조인간이야? 수퍼맨이야? 배트맨도 그건 못해! 그냥 타조랑 동물원이나 갈래! 빌어먹을 알파베타감마 클럽 다 불 싸질러 버릴 거야! 애클랜드 저택에도 내가 폭탄 터트릴 거야!”

두서가 없는 말을 내뱉으며 엉엉거리며 우는 진을 끌어안은 블리스는 안타까운 듯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네 목소리 들으면 당장에 달려오고 싶을 것 같아서 그랬어.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미친 듯이 바쁘고……. 네 이름이라도 들으면 달려오고 싶어질 것 같아서 참았어. 전화도 못 했어. 미안해.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그러니까 네가 나쁜 놈이야.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으면서 전화 한 통 못해? 어젯밤에 와인을 서른 잔이나 마셨단 말야. 이제 샴페인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고! 또 그 놈의 구두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거기다 왜 플루에서는 연락이 없냐고! 재키는 왜 살이 쪄서 드레스 가봉도 오래 걸리게 하는 건데!”

진짜 쌓인 게 많았는지 엉엉거리고 울면서도 줄줄이 원망의 말을 내뱉는 진을 꼭 끌어안은 블리스는 그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미안해.”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제일 나빠. 왜 전화 안 했어? 전화만 해줬어도 힘내서 일했을 텐데. 네가 전화도 안 하니까 힘이 빠져서 못 하겠잖아! 너 때문에 일하는 건데……. 네가 부탁한 거 아니면 절대로 안 하는데…….”

“그래,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 진. 쉿, 이제 좀 쉬어. 휴가 줄게. 한 달, 아니, 일 년이라도 휴가 줄게. 쉬어.”

블리스가 조용히 달래며 진을 꼭 끌어안고 상냥하게 속삭이자 조금씩 울음소리가 그쳐든 진이 블리스의 목을 꽉 끌어안고 중얼거린다.

“휴가 필요 없어. 네 재규어랑 람보르기니 줘.”

“……그래, 줄게. 다 가져.”

“영화관도 만들어줘.”

“그래, 57층 샀어. 곧 공사 들어갈 거야.”

“그리고 나 사라랑 한국에 갈 거야. 전용기로 보내줘. 한국 가서 내 동생 찾을래. 엘리 때문에 동생 보고 싶어 죽겠어. 살아있는지 보고 싶단 말야.”

“그래, 알았어. 다 해줄게. 전부 다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네가 우니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두바이에도 갈 거야! 나도 두바이 7성급 호텔에서 쉬면서 놀고 싶어.”

“그래, 가자. 내가 회사 때려치우고라도 데려가줄게.”

“클랜 만나면 한 대 때려줘. 내가 겨우 겨우 다 해놨는데 다 망치려고 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진이 클랜의 괘씸한 행동을 고해 받치자 블리스가 이를 으드득 간다.

“알았어. 죽도록 패줄게.”

“나, 아파. 너무 아파.”

“그래. 쉬어.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러다 바쁘면 갈 거잖아.”

“안 가. 까짓 거 몇 천만 달라 손해 본다고 안 죽어.”

까짓 몇 천만 달라라니 진짜 돈에 대해서만은 스케일이 큰 블리스였다. 다른 때라면 놀라며 어서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만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너무 아파서, 블리스가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네가 박아. 너 돈 많잖아. 나 잘래. 어디 가지 마. 옆에 있어줘.”

가끔, 아주 가끔씩 열이 나 아프거나 할 때 늘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은 블리스였다. 내색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약을 챙겨주고 병원에 데려가주고, 열이 내릴 때까지 손을 잡아주고.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고.

항상 그랬었기에, 몸이 아프니 블리스가 더욱 보고 싶었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어주었던 건 블리스뿐이었다.

그래서 더 서러웠던 것 같다. 이렇게 아픈데 블리스가 나타나지 않아서 화가 났던 것 같다.

스르르 진의 몸에서 힘이 빠지자 블리스는 축 처진 진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눈물로 얼룩진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쉬어.”

마치 조건 반사처럼 블리스의 그 말에 진은 의식이 멀어짐을 느꼈다.

***

“……제발, 사라.”

“병실이에요. 조용히 하세요.”

“대체 뭐가 문제인데? 뭐가 불만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돌아와 줄 테요?”

한참을 달게 자다 정신을 차린 진은 간절한 대넌의 목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봤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눈이 완전히 떠지지를 않는다. 뭔가가 눈꺼풀을 세게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이미 끝난 얘기예요. 아픈 애 앞에서 그만하세요.”

“진을 입양하지 않아서 그래? 하지만 그건 나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고.”

눈을 반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사라와 대넌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봤지만 두 사람은 진이 눈을 뜬 걸 전혀 모른 채 대화를 이어갔다.

“사정은 무슨 사정? 망할 놈의 백인 우월주의.”

빈정거리는 것도 아닌, 비난의 색이 역력한 사라의 말에 대넌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다. 하도 조용한 성격이라 잊고 있었는데, 사라도 한 성격 한다. 사라는 백 마디 잔소리가 아니라 조용하게 내뱉는 한 마디가 독한 타입이었다.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당신도 그건 알잖아.”

“그럼 뭐가 문제였는데요? 진이 당신 아이들보다 뭐가 부족해서요? 성적도 좋았고, 능력도 더 뛰어난 애였어요. 그런 애를 겨우 비서로 부려먹으면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요? 아니면, 진 이름을 당신 유언장에 올리는 게 싫었어요? 진이 그런 걸 바랄 애예요?”

“아니라니까! 그렇지 않아도 진에게도 재산은 충분히 물려줄 생각이었어. 솔직히 말해서 내 아들들만큼은 아니라도, 내 조카들만큼은 진을 아낀다고. 아니, 당신하고 내 애들 다음으로 소중한 아이야.”

내 아들들하고 똑같아, 라고 말하지 않고 그 다음으로 소중하다는 솔직하기 짝이 없는 대넌의 말에 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너무나 그다운 말이었다. 그가 블리스나 다른 아이들만큼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면 웃겼을 텐데, 솔직하게 그에게 자신이 여섯 번째로 소중하다고 말하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그게 얼마냐 싶다.

“그럼 왜 죽어도 진을 입양할 수 없다고 한 건데요?”

“그게…… 당신은 모르겠지만, 내가 블리스랑 약속한 게 있어. 10년 전에 블리스가 누굴 데려오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계약을 했다고.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진인 것 같은데, 내가 진을 양자로 들일 수는 없잖아? 우디 알랜 사건도 아직도 그렇게 비난을 받는데 블리스와 진까지 그 꼴 나면 곤란하잖아.”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라며 두 사람은 여전히 진이 눈을 뜬 걸 모른 채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진짜요?”

대넌의 대략적인 상황 설명이 끝나자 사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진 역시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불행히도 눈이 너무 심하게 부어서 여전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채였다. 블리스를 끌어안고 울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너무 운 모양이다.

“그래. 내가 그래서 얼마 전에 그 각서를 찾아 불태우려고 방을 다 뒤졌는데도 안 나오더라고. 아무래도 은행 금고에 넣어둔 것 같아.”

순간 사라의 얼굴이 더 엄하게 굳어졌다. 대넌은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더니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솔직하게 내뱉어버렸다. 

“한 번 약속을 했으면 끝이지, 그걸 왜 태워요?”

“아니……. 난 그냥…….”

“진짜 상종 못할 사람이군요. 자식과 한 약속도 지키지 않으려 하다니, 진짜 실망했어요, 대넌. 이혼을 더 확실하게 생각해봐야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라의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조금 화가 식는 듯했다. 

“사라, 그러지 말고 제발 좀…….”

“됐어요.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사라, 제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변덕인가 보죠.”

“사라!”

“시끄러워요. 애 깨요. 저 눈 부은 것 좀 보세요. 애를 얼마나 부려먹었으면 애가 얼굴이 저 모양이 돼요? 얼굴은 살이 쪽 빠지고 다크서클은 턱에 걸리고, 눈은 붕어처럼 팅팅 붓고. 그 예쁘던 애가 순식간에 개구리상이 됐잖아요.”

라며 사라가 항의하듯 진을 손으로 가리키자 진은 그냥 자는 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어차피 눈을 뜨나 감으나 비슷한 상태라 입만 다물고 있으면 다들 잔다고 여길 듯했다.

“내가 블리스 불러서 야단칠게. 그보다 사라, 대체 무슨 일인데? 응? 이유를 알아야 고칠 것 아니야?”

대넌 애클랜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대넌 애클랜드가 ‘제발’이라고 애원하며 저렇게 설설 기다니, 진짜 사랑의 힘은 놀랍다. 하지만 사라가 그런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다. 사라의 고집도 남부럽지 않다.

“병실에서 할 얘기는 아니네요. 그만 나가주세요. 전 진이 깨어나는 거 보고 돌아갈 테니, 가서 일보시죠. 불쌍한 진. 얼굴이 저 꼴이 되다니.”

눈 멀쩡하게 뜬 자신의 앞에서 개구리라고 소리치며 불쌍하다니……. 뭔가 묘한 기분에 진은 그냥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넌의 어택은 끊이지 않았다.

“사라, 잠시 한국에 다녀올까? 가서 좀 쉬고 올래? 나랑 같이 한국 들러서 친구랑 가족들도 만나고, 일본하고 홍콩으로 돌아오는 건 어때?”

“당신하곤 여행 안 가요.”

“사라, 왜 이러는데 진짜?”

“시끄럽다니까요.”

사라가 조용하고 명확한 어조로 대넌에게 닥치라는 말을 하는 사이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이게 뭐야? 이게 누구야? 진, 세상에…….”

엘레나였다. 넌 또 왜 왔냐, 라는 생각에 진은 치를 떨었다.

“세상에, 이 팅팅 부운 눈. 이 까무잡잡한 피부! 피부만은 좋다고 인정했는데 꼬라지가 이게 뭐예요? 안 되겠어! 당장 마사지 담당자 불러야겠어요! 세상에,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이건 119보다 더한 비극이야! 어떻게 얼굴 꼴이 이렇게 되냐고요?”

엘레나의 비통한 외침에 진은 그냥 자는 척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근질거려 결국 말을 내뱉고 말았다.

“……911이야.”

진이 본능을 참지 못하고 엘레나의 말을 정정해주자 사라와 대넌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진, 일어난 거니?”

사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뒤로 엘레나가 바로 이어서 중얼거린다.

“아, 911……. 911, 맞다. 911. 하여간 일어났어요? 눈 떠 봐요! 왜 눈을 못 떠요? 눈알 빠진 거 아니에요?”

엘레나와 사라, 그리고 대넌이 동시에 내려다보는 게 선명히 보이는데 그들은 누구도 진이 눈 멀쩡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은 번거롭게도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눈 뜬 거야.”

“네?”

“눈 뜨고 있다고.”

그 말에 갑자기 엘레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려 한다.

“어떻게 해! 불쌍한 진! 눈알이 빠졌나 봐!”

분명히 눈은 멀쩡히 제 자리에 있다. 엘레나는 자신의 눈알이 빠졌으면 하고 바랐던 모양이다.

“엘리, 그냥 눈이 부은 거야.”

침착한 진의 말에 엘레나는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며 진의 눈가를 살짝 찌른다.

“어떻게 눈이 이렇게까지 부어요? 눈에 보톡스 맞았어요?”

“……내가 너니?”

“아, 여기 주름살 있다. 요기도 있고. 좀 맞아야겠는데요? 제가 잘 아는 데 있는데 소개해줄까요? 필러도 잘해요. 저 입술에 필러 넣으려고요. 아, 진도 아래쪽만 조금 넣으면 섹시할 것 같은데요? 퇴원하면 나랑 병원 갈래요? 아, 진짜 섹시하겠다.”

눈가와 입가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성형수술을 권하는 엘레나에게 진이 퉁명스레 내뱉는다.

“시끄러워. 넌 왜 온 거야?”

“왜는요? 문병 왔죠.”

“문병은 보통 조용히 오는 거 아니냐?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블리스 위치 조작했어요.”

“……추적.”

“아, 추적.”

“그런데 블리스가 여기 있어?”

방 안에서 보이는 건 대넌과 사라, 그리고 엘레나뿐이었다. 아무리 돌아봐도 블리스가 보이지 않아 진이 그렇게 묻자 엘레나가 옆에 앉으며 답해준다.

“밖에서 비슷한 남자랑 싸우고 있던데요?”

비슷한 남자 누구? 라고 물으려는데 다행히도 뇌 상태 좋은 사라가 엘레나의 말에 추가설명을 해주었다.

“블리스가 클랜하고 한바탕 하러 나갔어. 진, 정신이 드니?”

“괜찮아요, 이제. 푹 잤어요.”

“세상에……. 가엾어라. 눈이 안 보이다니…….”

이 사람들은 아무래도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사라, 눈은 잘 보여요. 그냥 부은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부은 적은 없었는데.”

“아파서 울었나 봐요. 울다 자서 많이 부은 것 같아요.”

열이 나면 진은 우는 체질이었다. 그것도 아주 목 놓아 통곡을 한다. 보통 화는 잘 내지만 감정의 기복이 없는 편인데-노먼이 ‘네가 그 환경에서도 삐뚤어지지 않은 건 네 감수성이 바닥이라서야.’라고 할 정도로- 3, 4년에 한 번 오는 몸살에 걸려 열이 오르면 미친 듯이 울고 만다. 그리고 한 번 그러고 나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려서인지 또 다시 담담해진다. 그러니까, 이 몸살은 일종의 스트레스 풀이 겸 감정을 폭발시키는 기회였다. 몇 년 간 고이고이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하면 열이 나며 끙끙 앓고 실컷 울고 만다. 아프지 않는 이상, 자신은 절대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쌓이고 쌓인 게 한 번에 터지는 거다.

가만히 이번 몸살의 원인을 캐던 진은 이게 다 블리스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부 블리스가 쓸데없는 고민을 늘려줘 자신을 현실 위에 묵직하게 내리누른 탓이다. 역시 람보르기니랑 재규어 정도로 끝내면 안 되겠다고 다짐하던 사이 사라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정한 투로 말을 한다.

“과로래. 일주일 휴가 내놨으니 푹 쉬어.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사라, 하지만…….”

“아냐. 내가 해야지. 난 당연히 웨딩 전문 업체에 부탁했을 줄 알고 그냥 놔뒀는데, 널 이렇게 부려먹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말하며 사라가 찌릿하니 대넌을 노려보자 대넌이 어깨를 움츠리고 진의 눈치를 슬슬 살핀다.

“그래, 진.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결혼 준비가 그렇게 복잡할 줄 몰랐지. 나머지는 킴하고 사라가 의논해서 해결할 테니, 넌 당분간 푹 쉬어라. 클랜하고 재키는 내가 한 번 혼내마. 그렇지 않아도 말썽을 부렸더라고.”

‘말썽’이라는 대넌의 말에 진은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대넌에게 침착한 투로 물었다.

“무슨 말썽이요?”

“별거 아니다. 이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걱정 말고 그냥 쉬어.”

대넌이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진도 그냥 귀찮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푹 자고 열도 내리긴 했지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몸이 나른하고 무겁다. 잠도 쏟아진다. 블리스도 블리스지만 과로도 이 몸살에 한 몫 한 건 분명하다. 너무 피곤하다. 진짜 죽을 만큼 피곤하다.

다시 스르르 감기는 눈에 졸음이 쏟아져 의식을 놓으려는데 청천벽력 같은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진. 퇴원하면 우리 집으로 가요. 세르게이가 진 데리고 와도 된대요.”

“……응?”

“간병인이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집 사람들이 잘 간호해줄 거예요.”

순간 잠이 확 깬 진은 검은 양복을 쭈욱 빼입고 기관총을 든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신을 간호해주는 장면을 상상하곤 몸서리를 쳤다. 아니, 간병이고 양복이고 기관총이고 다 좋은데, 지금 자신더러 마피아가 되란 소리인가?

“고맙지만, 사양할게. 세르게이한테도 아주 미치도록 고맙지만 정중하게 사양하겠다고 전해줘.”

“왜요?”

너흰 마피아니까, 라고 하려다 진은 대강 말을 돌렸다.

“……두바이로 갈 거야.”

“두바이! 좋죠! 나도 같이 가요.”

이 타조가 아무래도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아 진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엘레나는 귀엽고 마음에 들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건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박복한 생을 마피아와 한 패로 몰려 총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

“엘리, 말은 고맙지만…… 난 좀 쉬고 싶거든?”

“그럼 우리 집으로 와요. 오빠가 이 김에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앉힌대요. 지금 받는 연봉 3배로 준다는데요?”

그 말에 진은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세 배?”

“네. 진이 적임자라고요.”

“어…… 보험은?”

“원한다면 들어줄게요. 생명보험하고 사고 보험. 유괴보험도 들어줄걸요.”

마피아가 되는 건 싫지만, 진짜 절대로 싫지만 슬슬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연봉 세 배에 보험까지. 격하게 끌린다.

“……위험수당은?”

“위험수당은 그만큼 쳐주죠. 저번에 우리 집 폭발할 뻔했었거든요. 뒤에 보트장에서 폭탄이 터져서 그 뒤로 위험수당 많이 줘요! 진짜 보트가 하늘로 떠올랐다니까요! 푸하하하.”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아주 화통하게 웃는 엘레나를 진뿐 아니라 대넌과 사라도 기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타조가 될 수밖에 없긴 하겠다, 라고 진은 순간 엘레나를 이해하고 말았다.

“그게 웃을 일이냐?”

“그래도 저택은 안 터졌는데요, 뭐. 정원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진 적도 있어요. 아, 저 런던 쇼에 나가는데 비행기에 폭탄 설치된 적도 있었고요.”

너무나 해맑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공중에서 사지가 분해될 뻔한 이야기를 하는 엘레나를 보며 진은 전직에 대한 미련을 접기로 했다. 

“……아무래도 난 비서가 천직인 것 같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요. 오빠도 당신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다고 침 흘리고 있어요.”

“내가 왜 적임잔데?”

“비서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그게…….”

엘레나가 막 뭐라고 설명을 하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블리스가 엘레나를 보곤 인상을 확 찡그린다. 그리고는 느긋한 투로 내뱉는다.

“어이, 새대가리! 병원은 조류 출입 금지야!”

그 말에 엘레나가 병실을 휙휙 돌아본다.

“여기 새 있어요?”

전혀 못 알아듣는 엘레나를 바라보며 블리스는 아주 친절하게도 그가 말하는 조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너 말야, 타조. 나가.”

“……타조라고요? 내가 타조요? 진, 내가 타조 같아요?”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는 블리스의 손가락에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진에게 되묻자 진은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엘레나를 타조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자신이었다. 게다가, 엘레나는 진짜 타조를 닮았다.

“……솔직히 아니라곤 말 못하겠는데…….”

“내가 어디가요?”

“키 크고 팔 다리 길고 마르고 얼굴 작은 게…….”

괜히 미안해져 진이 말을 흐리자 침대 옆으로 다가선 블리스가 엘레나를 밀어내며 진이 차마 다 못한 말을 대신 한다.

“어딜 봐도 타조지. 특히 뇌가.”

블리스는 그 말을 끝낸 뒤 만족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양복 재킷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셔츠에 넥타이도 반쯤 풀어 내린 채 소매 역시 걷어 올린 채라 진이 “재킷은?” 라고 묻자 블리스가 “세탁.”이라고 말하며 진의 퉁퉁 부운 눈가에 입을 맞춘다.

그 사이 머리 정리를 끝낸 엘레나는 다시 진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타조가 그렇게 생겼어요?”

순간 진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설마, 아무리 엘레나라도 타조를 모를까. 직접 본 적은 없어도 텔레비전으로 사진으로 수없이 봤을 그 타조를, 설마 본 적이 없을까, 라고 자신에게 묻다, 문득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엘레나라면 타조를 봤어도 기억 못할 수도 있다. 애초에 타조-Ostrich-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을 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Austria)는 알아도 오스트리치는 모를 애다. 아니, 어쩌면 오스트리아도 모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스트렐리아(Australia)도 모를지도 모른다.

대체 아는 게 뭘까.

“타조 본 적 없어? 오스트리아 말고, 오스트리치.”

“……다 아는 거예요?”

아마 엘레나 빼고 전 세계인이 다 알 것이다.

“대부분이 알걸?”

“유명한 거예요?”

순간 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유명하다면 유명하지만, 타조를 유명하냐고 묻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던 터라 뭐라 답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유명하긴 하지.”

“그래요? 난 또. 뭐, 그럼 괜찮아요.”

금세 새대가리의 충격을 떨쳐낸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새대가리에 조류, 타조라는 폭언을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엘레나의 대범함에 대넌과 사라가 입을 쩌억 벌린다. 하지만 그들의 경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병실에 있던 이들에게 연타로 그녀의 순결한 뇌를 자랑했다.

“그런데 조로가 뭐예요?”

비꼬는 것도 상대가 어지간해야 먹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엘레나는 진짜 최강이었다. 자신은 박복해 박명하겠지만 엘레나는 진짜 복이 터져 아주 오래 살 애다.

“……엘레나 늦겠다. 집에 가봐라.”

“에? 방금 왔는데요? 아, 나 구두 샀어요. 루부탱 매장 통째로 털었거든요. 자랑하고 싶어서 왔는데.”

그 말에 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어쩐지 엘레나가 털었다니 진짜 오빠랑 기관총 들고 매장에 들어가서 돈이 아니라 구두를 모조리 쓸어 담아 왔을 것 같다. 진열대를 통째로 옮겨놓고 자랑할 것 같은 엘레나의 기세에 블리스가 재빨리 말을 자른다.

“그만 가. 아픈 사람 앞에서 무슨 자랑을 해?”

야박할 정도로 냉랭한 블리스의 말투에 결국 엘레나도 버티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어요. 갈게요. 진, 빨리 나아요. 나랑 같이 양복 맞추러 가요. 제가 아주 예쁜 베이비 핑크 드레스를 봤거든요? 진이 같은 색 양복 입으면 진짜 예쁠 거예요.”

절대 입고 싶지 않았던 옷인지라 진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쓰게 웃으며 답하지 않고 버티자,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던 엘레나가 한 번 더 돌아보곤 결정차를 날린다.

“아, 그리고 퇴원하면 나랑 필러 맞으러 가요.”

“……어서 가라.”

“거기 필러 잘해요. 브리트니가 맞은 필러랑은 수준이 달라요. 진짜 안젤리나 졸리 입술처럼 해줄 거예요.”

진은 순간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뭔가 자신의 얼굴에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이 오버랩되자 괴물이 연상된다. 

절대 싫다.

“어서 가.”

“갈게요. 나중에 봐요~.”

정신없이 쳐들어와 발랄한 인사말을 남긴 엘레나는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병실을 나서 복도를 걸어간다. 엘레나가 떠나자 비로소 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싫은 건 아닌데, 이상하게 엘레나랑 있으면 정신이 없다.

아주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입을 다물고 있던 대넌이 겨우 그 침묵을 깬다.

“엘레나 네브즐린 맞지?”

“네.”

“참…… 독특한 아이구나. 파티에서 봤을 때는 상당히 도도하던데…….”

“매니저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을걸요. 말하면 산통 다 깨지니.”

“그럴 만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대넌은 작게 “나도 압도당했어.”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만 들어가 보세요. 사라도 쉬어야죠. 제가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가세요.”

블리스의 선언에 사라가 걱정스러운 듯 블리스를 돌아본다.

“바쁘지 않아?”

“일정 취소했어요. 진하고 저랑 일주일 휴가 받았습니다.”

휴가를 그렇게 맘대로 내도 되냐고 진이 물으려하자, 그 전에 대넌이 먼저 묻는다.

“너, GATH사는 어쩌고?”

“될 대로 되라고 하세요. 이제 와서 변덕 부리는 영감 비위 일일이 맞추기도 힘드니까요.”

“……그 친구도 참……. 그쪽은 내가 손써 보마. 사라, 우린 이만 나가보지.”

“그래, 갈게. 진, 저녁 때 식사 준비해올게.”

“그건 걱정 마시고 가세요. 클랜과 재키가 사고를 대량으로 쳐놔서 처리하기 좀 힘드실 겁니다.”

“왜?”

“……가보시면 알아요.”

“어느 정도길래?”

“파리지엔이니 뭐니 하며 거지처럼 떠돌며 살라고 맨몸으로 프랑스 상공에다 던져버리고 싶던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블리스는 진짜 화가 나 있었다. 그게 확연하게 느껴져 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대체 클랜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클랜이 친 사고의 뒤처리를 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참으로 걱정되기 그지없었다. 클랜의 비서들이 누가 될지 진짜 불쌍하다 못해 염불을 외워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일 더 커지기 전에 가봐야겠다. 진, 나중에 보자.”

사라가 불안한 듯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병실을 빠져나가자 대넌 역시 손을 흔들며 사라를 따라 조르르 병실을 나선다. 여전히 눈이 반도 떠지지 않은 채 진은 블리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대체, 클랜하고 재키가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넌 신경 쓰지 마.”

“궁금하잖아. 대체 무슨 사고를 쳐놨는데?”

진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옷을 잡아끌자 블리스가 진의 붕어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녀석이 너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리에 초대장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카드를 받아다 봉투에 넣었나봐.”

“그런데?”

“그런데, 이 머저리들이 초대장이 너무 많으니 아예 다 봉투에 넣어두고 순서대로 붙인다고 했는데 중간에 뭐가 하나 꼬여서 다들 엉뚱한 주소에 가 붙은 모양이야.”

차분한 블리스의 설명에 진은 비명을 내질렀다.

“뭐?”

“그래서 지금 비상이야. 멍청한 것들이 또 손은 빨라서 천 장을 다 붙였대. 마지막 장은 확인하겠다며 카드와 주소를 확인하다 안 맞으니 부랴부랴 뜯어봤나 봐. 그래서 전부 도루아미타불. 그 중에 또 카드 몇 개를 잃어버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확인해야 되게 생겼어.”

진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기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저도면 대형 사고다. 결혼식은 다음 주다. 최소한 모레까지는 초대장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러다 큰일 나게 생겼다. 왜 하필 눈을 떠도 이렇게 더러운 때 눈을 뜬 걸까 싶어 진은 자신의 박복함을 다시 한 번 저주했다.

그 일처리라도 누가 한 뒤에 일어날걸. 어쩌면 이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을까.

“진짜 그 녀석들은 가만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건데…….”

“내버려둬. 자기들이 친 사고니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클랜이 그런 능력 없는 녀석도 아니고. 친구들 모아서 알아서 하라고 했어.”

“그런데 카드가 다 나왔을 정도면 나 얼마나 잔 거야?”

“하루 꼬박. 이제 금요일이야.”

그 말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뭐?”

“내일까지는 입원해야 돼. 아무 생각 말고 쉬어. 네가 몸살이 낫다는 건 정신도 극한에 치달았다는 거야. 아무 생각 말고 쉬어.”

맞는 말이었다. 아니, 사실은 몸보다 정신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누구한테 터놓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대는 게, 자신의 가장 안 좋은 버릇이었다.

“……그래. 알아서 하겠지. 나도 모르겠다. 너무 피곤해.”

진도 이젠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한 채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어지간해야 걱정을 하지, 도무지 대책이 안 서니 알아서 하라는 말밖에는 안 나온다. 어쨌든 사라와 킴, 그리고 전문가들이 대규모로 붙으면 잘 해결될 것이다.

일단 자신은 쉬어야 한다. 쉰 뒤에 뭔가를 생각하든 결정을 내리든 해야 한다. 이대로는 주변 사람들에 치어 쓰러져버릴 것이다.

진이 피곤한 듯 숨을 내뱉으며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침대 옆에 기대앉은 블리스가 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용히 속삭인다.

“퇴원하면 우리 집으로 가 지내.”

갑작스러운 그 말에 진은 눈을 뜨나 감으나 별 차이 없는 눈을 겨우 뜨곤 블리스를 바라보며 무뚝뚝한 투로 되물었다.

“내가 왜?”

“혼자 지낼 수는 없잖아. 이렇게 아픈데.”

“됐어. 아픈데 넓고 어색한 남의 집은 불편하기만 해.”

“우리 집으로 가. 잠깐 눈을 떼면 아프니 떼어둘 수가 없잖아.”

안타까운 듯 그럴 듯한 말을 내뱉는 블리스의 손을 피해 휙 돌아누운 진은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슨 헛소리냐는 듯 퉁명하게 받아쳤다.

“나 너 없는 3년 동안 잘 살았거든?”

“많이 아팠잖아, 그때도.”

블리스가 워튼 스쿨에 다니던 3년 간 열다섯 살 때부터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 달 이상을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그때 진은 꽤 자주 시름시름 앓았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러다 병을 쌓아 한 번 죽도록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딱 지금처럼 아팠었다. 그때 블리스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던 때라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연락을 하면 당장에 달려올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블리스는 그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클랜이 말을 안 했을 리가 없다.

“누가 그래?”

“클랜한테 들었어.”

“……그런 놈이 전화도 한 통 안 하냐?”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올라 진이 울화통을 터트리자 블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왔었어.”

“언제?”

“새벽에 와서 너 자는 것만 보고 갔어. 너 눈 뜬 거 보면 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

“거짓말.”

또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라고 중얼거리며 진이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자 블리스가 침대 위로 누우며 이불 속의 진을 그대로 폭삭 끌어안는다.

15년 전의 그 날처럼, 다정한 체온이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울컥해져 진은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진짜야. 너무 아파하길래 옆에 있다 열 내리는 것만 보고 돌아갔어. 나도 참 무던히 노력했거든. 10년만 기다리자. 10년 동안 버텨보자. 10년 동안 안 되면 운명이다, 이러고. 독한 척 굴려고 해도 그게 안 되더라.”

진 역시 이미 대넌과 클랜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그 10년이 어떻게 된 10년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으로서는 그게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만약, 블리스가 흔들리던 그때 말을 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때 말을 했다면, 그리고 기다려달라고 했다면, 그 정도의 각오였다면…… 기다려달라는 한 마디면 됐는데. 그럼 그렇게 마음고생하며 포기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놈의 10년…….”

억울함에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블리스는 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인정해. 널 떨쳐내려고 그랬어. 사실은 자신이 없었거든. 10년 뒤의 내가, 그때도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 스무 살의 애송이가 어떻게 서른 살을 기약할 수 있었겠어? 그 감정의 깊이도 알지 못한 채 어설픈 고백으로 널 상처 주는 건 싫었으니까. 장담할 수 없는 내 미래를 네게 약속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넌 그런 놈이야.”

철저한 완벽주의자. 100%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일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 안전제일 주의에, 조금의 틈도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녀석. 이가 갈리도록 지독하고 완벽한 녀석.

그래, 그게 블리스 애클랜드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웃고 떠들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친구로 인식된 블리스가 사실은 어떤 야망을 품고 있는지, 그 야망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 건지, 그리고 블리스 자신이 본인에 대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다.

가끔씩 비치는 그의 오만하기까지 한 자신감은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블리스 애클랜드니까, 그는 모든 걸 다 갖고, 모든 이들의 우위에 서는 게 당연한 인간이었다.

그런 거리감이 싫었다. 그리고 블리스가 돌아서는 순간 자신을 타인 대하듯 할까, 너무 무섭다. 항상 가까운 곳에서, 너무 친밀하게 붙어 있던 탓에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와 자신의 격차는 너무 크다. 그 간극을 메울 수가 없다.

“그래, 난 그런 놈이야. 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특히나 너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넌 몰라. 넌 날 포기했다고 했지? 하지만 난 포기하지 못했어. 10년 아니라 100년을 노력해도 안 될 거야. 너는 날 포기해도 난 널 포기할 수가 없어. 너는 날 잊어도, 난 널 못 잊어. 네가 날 떠나도, 난 기다릴 거야, 아마. 네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고 말거야.”

작고 낮은 속삭임에 진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실컷 떠들라는 듯 이불 속으로 파고들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블리스가 계속해서 부드럽게 말을 이어간다.

“만약 네가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걸 보면서 기다렸을 거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만약에 10년 뒤에 네가 결혼했다면, 다른 연인이 있다면 다시 10년을 기다리자고 했어. 그리고 그 후에도 다른 사람이 있다면 또 다시 10년, 그리고 또 10년.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으니까……. 네가 행복하다면 기다릴 테니까……. 불행해지면 나한테 돌아오면 된다고. 그때는 내가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달콤한 그 속삭임에 진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작은 진동에 블리스는 더 세게 진을 품에 끌어안았다. 

“노트북의 라이언 고슬링처럼, 평생을 너와 함께 하고 싶었어. 네가 내 옆에 없더라도 네 모든 것을 기억하며, 네 침대 맡에 장미 한 송이를 놔주는 꿈을 꾸며 매일을 기다렸을 거야. 그리고 어느 날 함께 손을 잡고 최후를 맞이하는 거지. 매일 매일을 다시 기억하면서, 다시 사랑하면서, 네가 날 잊어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조용하고 상냥한 속삭임에 진은 지끈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참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었다.

“……뻔뻔하긴. 라이언 고슬링을 어디다 갖다 대?”

“끝난 게 아니었어. 지금도 끝난 게 아냐.”

라이언 고슬링의 대사를 그대로 읊조리는 블리스의 음성에 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일부러 퉁명스러운 투로 받아쳤다.

“끝나는 사람도 있어.”

“난 끝나지 않았어. 10년이 아니라 20년, 3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거야. 이제는 확신할 수 있어. 이 사랑이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나쁜 자식.”

“미안.”

한동안 진은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불 속에 틀어박힌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고요함에 블리스는 진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안타까운 듯 속삭였다.

“울지 마.”

“안 울어.”

“……그럼 뭐야?”

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 고요함이 마음에 걸린 듯 블리스가 이불 위로 진의 몸을 쓰다듬으며 머리에 입을 맞췄다.

“울어?”

“안 울어.”

“그럼 얼굴 보여줘.”

“귀찮아. 잘 거야.”

“우는 거네.”

끈질긴 블리스의 눈물 타령에 결국 이불을 재치고 일어난 진은 퉁퉁 부은 얼굴로 블리스에게 사납게 소리쳤다.

“봐! 안 울지? 그러니까 좀 비켜. 자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슬슬 잠이 오는 듯해 진은 블리스를 침대 위에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블리스는 침대에서 내려갈 생각은 없는 듯 그 자리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큰일 났다.”

“또 뭐가?”

“눈이 아예 안보여. 어디 잘못 된 거 아냐? 이건 너무 심한데. 하치 이야기 봤을 때보다 더 심해.”

4년 전, 진은 블리스의 집에 앉아 같이 본 일본 영화에서 하치라는 개의 주인이 죽은 뒤부터 시작해 거의 한 시간 동안을 엉엉거리며 울다, 하치가 주인을 기다리며 죽는 장면에서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었었다. 보통 최루성 신파는 비웃는 진이지만 유독 개 이야기나 버려진 아이 이야기에는 약해 그런 영화는 시작 전부터 티슈 두 박스를 놓고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나 그 영화는 심각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진은 결국 울다 잠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음 날 눈 상태는 대단했다. 거의 눈을 뜨지 못했던 그때보다 더 심하다, 라고 블리스가 말하자 진이 놀라 되묻는다.

“……그 정도야?”

“응.”

“거울 좀.”

진이 손을 뻗자 침대 옆의 테이블 서랍에 있던 서랍을 꺼낸 블리스는 그 거울을 들어 진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작은 거울 위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진은 히익- 하며 조금 뒤로 물러나 앉았다.

“으아……. 심하다……. 웬 외계인이…….”

이러니 사라와 대넌이 눈을 뜬 줄도 모르지.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하긴 해 진이 뚫어져라 거울을 들여다보자, 블리스가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눈이 잘못된 거 아냐?”

“아냐. 눈은 멀쩡해. 아프지도 않고 아주 잘 보여. 그래도 너무 심하긴 하다. 이게 개구리야, 사람이야?”

눈알 빠졌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어떻게 아면 눈이 이렇게 붓나 싶어 빤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가를 살피자 블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서 냉장고로 다가간다.

“얼음 좀 올려놔 봐.”

“아, 내버려둬. 그냥 잘래.”

“안 돼. 그대로 자면 더 부어.”

여기서 더 부으면 진짜 붕어다. 큰일 난다.

“……그건 안 되지.”

“얼음 팩 올려놓고 좀 자. 볼 살이 다 눈에 가서 붙었냐? 그 꼴이 뭐야?”

조금 로맨틱한가 싶더니 평소의 블리스로 돌아왔다. 짓궂고 장난스러운 그 말에 진은 거울을 내려놓으며 블리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너 진짜 패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거 알아?”

“그래도 날 사랑하잖아.”

밉살맞은 그 답에 다시 거울을 들어 얼굴을 살피던 진은 퉁퉁 부운 눈을 보다 슬쩍 시선을 내려 입술을 바라봤다. 핏기가 가셔 파리한 그 입술을 손끝으로 쓰다듬던 진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필러 맞아볼까…….”

“뭐?”

“……아냐.”

얼음 팩을 들고 진의 옆으로 다가온 블리스는 진이 침대에 눕자 눈가 위에 얼음 팩을 올려놨다.

“좀 가라앉아야 사람 같은 텐데.”

“……너 자꾸 시비 걸어라.”

이게 진짜 나 사랑한다는 놈 맞나 싶어 진이 이를 갈며 응수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옆에 놓인 긴 의자에 앉은 블리스가 “네.”라고 답하자 진도 눈가에서 얼음 팩을 치우고 문 쪽을 돌아봤다. 그 사이 문이 열리며 이번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진짜 나무였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화분에 있는 아주 커다란 나무였다. 순간 진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광경이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진 케이먼 씨 병실 맞나요?”

“네, 맞는데…… 그게 뭐죠?”

“편백나무입니다.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가 배달시키신 겁니다.”

그렇데 말하면서도 화분을 옮기는 남자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대체 이건 뭐야, 라는 얼굴이었다. 진이 보기에도 이게 뭔가 싶었다. 2미터가 조금 넘을 것 같은 나무를 낑낑대며 병실 안에 옮기는 남자들을 보며 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브나 난 같은 작은 화분은 병실에 자주 보내지만, 저렇게 큰 나무를 병실에 보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게다가 저건 아무리 봐도 정원이나 공원에 심어야 할 나무였다.

“저기, 그런데…… 네브즐린 씨가 저 나무를 왜…….”

처음 세르게이 네브즐린을 만났을 때 느꼈었던 그 기묘한 오싹함을 다시 느끼며 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남자가 진까지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한다.

“저희도 모릅니다. 그냥 이 나무를 보시더니 통째로 뽑아서 이 병실로 배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뽑아서’라는 건 분명히 저게 화분에 심는 나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죄송한데 그게 어디 있던 나문데요?”

“센트럴 파크에요.”

순간 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이유로 멀쩡한 센트럴파크에 멀쩡하게 심어졌던 나무를 뽑아 자신에게 보낸 걸까.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말 안 들으면 너도 이 나무처럼 뿌리 채 뽑힌다는 뜻일까? 아니면 러시아식 협박의 한 방법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권리로 공원에 있는 나무를 뽑는단 말인가?

“그거 위법 아닌가요?”

“돈은 지불하셨습니다. 하여간 사인 부탁드립니다.”

뭐 씹은 얼굴로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본다는 듯한 남자가 내민 영수증에 진이 사인을 하자 남자가 다른 일꾼과 함께 병실에서 나간다.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나무를 돌아보고, 그리고 이번엔 블리스를 바라본 진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블리스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인상을 쓰며 그 나무를 바라볼 뿐 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세르게이…….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

블리스의 중얼거림에 진은 서둘러 블리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저 사람이 왜 저러는데?”

“……그런 게 있어.”

“뭐가 그런데? 나 무서워!”

“……널 스카웃하고 싶어 했어. 예전부터.”

“날 왜?”

“가정교사로 쓰고 싶다고.”

“타조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죽을란다.”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좀 가르쳐도 괜찮을지도, 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전 병실에 나타나 “조로가 뭐예요?”라고 묻는 순간, 포기해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엘레나를 가르칠 수는 없다.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아마 엘레나를 가르치다가는 수명이 반으로 줄어들 게 뻔하다.

불안함이 가득한 진의 얼굴에 블리스가 뭐라고 중얼거리다 말을 끊는다.

“……타조가 아니라…….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세르게이랑은 내가 얘기할 테니.”

“어떻게?”

“내가 말할게. 넌 걱정 말고 쉬어. 그리고 눈 좀 어떻게 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제발 빨리 전화해서 저 나무 좀 다시 뽑아가라고 해. 무서워 죽겠어. 저 나무에서 밤중에 귀신 나타날 것 같아. 예전에 그 영화 있었잖아, 가디언(The Guardian). 나무껍질 뒤집어쓴 여자가 사람 죽이는 거. 나무 자르니까 막 피가 터지고, 아이들의 시체가 나무 아래 묻혀있고. 저 나무 아래에도 아기들 시체가 묻혀 있는 거 아냐?”

순간 블리스는 진심으로 진의 집에 있는 텔레비전을 부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애써 웃으며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좀 쉬어.”

“나 진짜 그 사람 무서워.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단 말야.”

진의 그 말에 블리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얼굴로 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의 예감은 아주 정확했다. 

“……어쩌면 너한테는 진짜 무서울 수도 있겠다.”

“너, 뭐 알지? 아는 거지? 뭐야?”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니 제발 눈부터 어떻게 해. 웃겨 죽겠어.”

그렇게 말한 뒤 블리스는 진짜 피식 피식 웃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진은 그 웃음에 약이 바싹 올랐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사흘 못 봤다고 그렇게 엉엉거리며 울다니. 진짜 큰일이다.”

“너 보고 싶어서 운 거 아니거든? 나 열나면 우는 거 알잖아?”

“거짓말 안 해도 돼. 이제 하루도 안 떨어져 있을게. 매일 꼭 붙어 있을 테니 울지 마, 아가.”

블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야!”

“What can I do to make you happy?”

가볍게 시작한 멜로디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블리스의 낮고 상냥한 음성에 맞춰 부드럽게, 꿈처럼 이어진다.

What kind of clown thing can I do?

Wiggle my ears, and make them flappy?

My humor is sappy, won’t you sit on my lappy.

and don’t cry baby, boo hoo.

“치사한 자식…….”

계속해서 이어지는 노랫소리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15살의 그 날 이후 저 노래를 들으면 진은 자기도 모르게 약해지고 말았다. 특히나 블리스가 저 노래를 부르면 뭐든 다 용서해버리고 만다. 블리스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울화가 치민다.

“내가 애냐? 이제 그런 노래 안 통해.”

“좋아하잖아, 이 노래? 내가 노래 부르는 건 더더욱 좋아하고.”

모두 사실인지라 진은 더는 말하지 않고 다시 침대에 누워 얼음 팩을 눈가에 댔다. 진을 바라보고 앉은 블리스는 진의 손을 꼭 쥔 채 남은 곡을 마저 불러주었다.

감미롭고 부드럽게, 상냥하게 다정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은 슬슬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이, 괜찮…….”

진이 입원한 지 사흘 째, 진이 퇴원하기 전에 겨우 시간을 내 병실을 찾은 에반은 방을 한 가득 채운 꽃과 선물, 그리고 병실 안에 우뚝 선 정체불명의 나무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이건 뭐야?”

멍한 얼굴로 묻는 에반을 돌아본 진 역시 창가에 서서 한숨을 푸욱 내뱉는다.

“위문품들. 좀 이따 퇴원해야 하는데 이걸 어쩌라고.”

“와우……. 대단한데. 존 에스터에, 매니 플락, 조지 메이든. 루크 스틸러. 너 인맥 끝내준다.”

꽃을 시작으로 고급 크리스털로 만든 조각품과 만년필, 그리고 쾌유를 비는 의미에서 보낸 메시지들이 가득 찬 방을 돌아본 에반은 카드에 쓰인 거물들의 이름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블리스가 입원해도 이보다는 못할 걸. 대단한데?”

“나도 놀랐어. 이제 다들 내가 보내는 선물들인 줄 알았나 봐.”

어차피 자신이 블리스를 대신해 모든 선물과 카드, 메시지 등을 감당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 듯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자신의 입원 소식에 이렇게 줄줄이 선물과 꽃을 보낼 줄은 몰랐던 터라, 진은 솔직히 당황하고 있었다. 기분은 좋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건 사실이다.

차근차근 선물과 꽃 위에 걸린 카드를 돌아보던 에반은 병실 안으로 한 걸음씩 들어서다 문득 생뚱맞게 놓인 거대한 나무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이 나무는 뭐야?”

그렇게 말하며 혹시나 모형인가 해 나무를 두드린 에반은 맑고 묵직한 소리에 “진짜네.”라고 중얼거렸다. 지금 진이 가장 걱정하던 것 역시 그 애물단지인지라 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해주었다.

“몰라. 나도 지금 저게 제일 문제야. 대체 저걸 어쩌라고…….”

“누군지 몰라도 무식하네. 나무를 통째로 보내다니. 그것도 이런 나무를. 이거 가로수로 쓰는 거 아냐? 누군지 대단하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야.”

“……뭐?”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보낸 거라고.”

“아…….”

순간 납득한 듯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에반을 노려본다.

“말해봐, 그 사람 대체 뭐야? 날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스카웃 얘기는 모르겠고, 이 나무는 세르게이다워. 이거 어디서 온 거야?”

“센트럴 파크.”

“아하~.”

순식간에 혼자 납득한 듯한 에반의 태도에 진이 얼굴을 굳히고 에반을 닦달한다.

“뭐야? 대체 뭔데? 그 사람 무슨 생각인 거야?”

“대강 알 것 같아서. 센트럴 파크 지나가다 차 안에서 너 입원했다는 소리 듣고는 그냥 보이는 나무 뽑아다 보낸 모양이네.”

“뭐?”

“원래 그래. 자기 비서들도 명단 뽑아두고 펜 굴리기 해서 뽑는 사람이야. 엘레나 모델 데뷔시킨 것도 지젤 번천, 브리트니 스피어스, 안젤리나 졸리 사진 찢어서 종이비행기 날려서 지젤 번천이 제일 멀리 날아가니 시켰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아끼던 부하 생일 선물로 데저트 이글(Desert Eagle)을 선물한 모양이야. 얘기 듣기로는 무기를 고르러 갔을 때 그 부하의 생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앞에 있던 권총을 아무거나 선물을 한 것 같은데, 그때 막 그 부하가 횡령 사건에 휘말렸을 때거든. 세르게이는 별 생각 없이 한 선물이지만 그 부하는 그게 자결하라는 뜻인지 알고 자기 생일 날 그 총으로 자기 머리통을 쐈다고 하더라고.”

에반의 길고 자세한 설명을 듣던 진은 순간 자기가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응?”

“그냥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 무관심이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인 예지.”

그렇게 말하며 선물 지뢰를 헤집고 들어선 에반은 테이블 위에 신문을 하나 집어던지곤 의자에 앉았다. 진 역시 선물과 꽃을 피해 테이블에 가 자리 잡고 앉았다.

“그게 진짜야? 그 사람 아무 생각 없는 거야?”

“진짜야. 자기 살 집도 다트 판에 지도 걸어두고 찾는다는 말도 있어.”

타조의 오빠니 평범한 인류는 아닐 거라 여기긴 했지만, 지나치게 평범의 범주를 초월한 그의 기행이 진은 인상을 썼다. 일단 밀어붙이기의 대가 블리스에, 능글뻔뻔 천상천하 유아독존 노먼에, 포스작렬 새대가리 엘레나에, 돌아온 탕아 클랜에, 무심함으로 사람까지 죽이는 세르게이를 자신의 인맥에 포함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세르게이 네브즐린 입장에서는 호의라 여길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진의 입장에서는 호의보다는 악의에 가까운 행위였다. 무엇보다 저 커다란 나무를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경찰을 비롯한 FBI나 다른 세력들이 자신이 네브즐린 가의 사람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라 여긴다면 자신의 인생을 끝장이다.

진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하는 사이, 에반이 팔짱을 끼며 무심한 투로 내뱉는다.

“그나저나 너희 둘이 잘 논다? 난 바빠 죽겠는데, 죽도록 부려먹으면서 두 놈이 손잡고 이런 때에 휴가나 내고.”

“왜? 휴가 내면 안 돼?”

“바빠. 미치도록 바빠. 거기다 손실도 커. 뭐, 오너가 포기하겠다니 할 말은 없지만. 지금 블리스의 행동은 아주 곤란하다고.”

“왜?”

“J&K사가 갑자기 GATH합병을 없던 일로 돌리자고 나오더라고. 블리스가 사흘 동안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어제 오전에 오찬하면서 잘 마무리되나 싶더니,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백지화.”

한숨을 푸욱 내쉬는 에반의 설명에 진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거 나 때문이야?”

“그럴걸.”

“내가 잘못한 거야?”

“응. 하필 그 타이밍에 메시지가 왔으니까.”

“……미안해해야 돼?”

“아니. 애초에 문제는 그 영감이야. 블리스를 자기 딸이랑 짝지어 주려고 수 쓴 거야. 뻔히 알면서도 블리스가 나름대로 비위 맞춰줬는데 산통 깨진 거지, 뭐. 차라리 잘 됐어. 그런 사람하고 일하면 이쪽만 피곤해. 블리스에게는 오점이 남는 거지만, 뭐…… 그 놈이야 그런 걸로 별로 타격 입을 놈도 아니고.”

“……큰일 난 거야?”

“큰일이긴 한데, 어차피 한두 번 정도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엎어지는 거 순식간이니까.”

분명히 큰일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에반의 표정이나 말투는 너무 태연했다. 

“그 사람은 딸을 왜 블리스랑 결혼시키려는데?”

“딸을 애클랜드 부동산의 사모님으로 만들고 싶었겠지. 지금은 저러고 있지만 결국 애클랜드 부동산을 맡을 건 블리스니까. 그쪽도 괜히 머리 쓰다 된통 당한 거야. 블리스가 열 받아서 그 회사랑 일 안 한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큰일 난 거야?”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에반을 진은 참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지금만은 싫었다. 도대체 큰일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큰일은 큰일이지만……. 네가 걱정해봐야 소용없으니 신경 쓰지 마. 엎어진 건 엎어진 거야. 공 들인 게 아깝긴 해도 GATH사도 눈독 들이는 회사가 제법 있으니 다른 데로 팔아넘길 거야. 당장은 항의 전화를 좀 받긴 하겠지만.”

“항의 전화는 왜?”

“블리스 믿고 그쪽에 투자한 사람들이 있거든. 한 동안은 좀 그렇겠지만, 알아서 마무리 잘 할 거야.”

“…….”

“네가 걱정해봐야 소용없으니 넌 그냥 쉬어. 늙으면 적당히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늙어 아집만 생겨서 자기 딸 결혼을 그런 데에 이용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말로는 걱정 말라면서 대체 그 얘기를 하는 저의가 뭐냐는 눈으로 진이 에반을 바라보자 에반이 “그냥 알고 있으라고.”라며 말을 돌린다. 그걸 알면서 걱정을 안 할 수 있냐고 반박하려하자, 에반이 결국 먼저 입을 연다.

“월요일부터는 정상출근 해줘.”

“……그게 목적이었어?”

“그래. 블리스도 블리스지만 네 손이 더 급해. 로이에게 맡겨두다간 일주일 안에 고객들 항의전화가 빗발칠 분위기야. 주말까지 쉬고, 복귀해주길 간절히 요청한다.”

“그것 때문에 온 거구나?”

“응.”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나도 뒤처리도 안 하고 쉬는 거 달갑지 않으니까.”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테이블을 내려다본 진은 신문 위에 대문짝만하게 난 사진을 보곤 재빨리 그 신문을 들어올렸다. 1면은 아니지만 연예면에 꽤 크게 실렸다.

“……왜 엘레나랑 노만하고 엮인 거지?”

사진은 별거 아니었다. 이틀 전 오전 엘레나가 자신의 아파트를 나서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타이틀이 너무 거창하다. 

“「런웨이의 무법자 엘레나를 변화시킨 건 전직 파파라치 노먼 맥캐인. 스타와 파파라치의 사랑?」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사진을 잘 봐.”

에반의 말에 자세히 자신을 들여다본 진은 엘레나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보곤 눈을 껌뻑였다. 신문은 아주 친절하게도 그 부분을 확대해 설명까지 붙여놓았다. 아직 발간도 되지 않은 노먼 맥캐인의 첫 신간이라고. 그리고 어떻게 엘레나 네브즐린이 그 책을 손에 넣었나 하는 의문문이 꼬리에 달려 있었다.

혹시나 해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출판사 측에서는 저자인 노먼 맥캐인이 그저께 오후 특별히 선물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 한 권을 받아갔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아침 일찍 나온 아파트가 노먼 맥캐인의 집으로 추정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 노먼이 나한테 준 거라고!”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 홍보는 확실히 됐다. 책 풀리자마자 저 책 사서 안고 다니겠다는 애들이 수두룩해. 뉴욕 내의 전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화장 하나도 안 하고 머리 하나로 묶고 마크 제이콥스 티셔츠에 수비 진 입고 저 책 들고 도시를 배회하는 진풍경을 보게 될 거야. 벌써 저 청바지 모델 뭐냐고 난린가 봐. 저 티셔츠는 매장에서 이미 동났어.”

뜻밖의 말에 열심히 사진을 들여다보던 진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얘, 그렇게 대단한 애야?”

“10대 패션 아이콘이잖아. 성질도 대단한데다 명품만 걸치지, 거기다 수퍼모델이지. 그런데 파티걸 명성에 비해 술도 안 마시고 마약도 안 하고 성인 남자들이랑 스캔들도 없고. 총 들고 설치는 것만 아니면 나름 바람직한 애거든. 그리고 되게 도도해 보이잖아.”

에반의 설명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본 진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엘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미인에 스타일 좋고, 센스도 좋은 데다 나이까지 어리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도도한 고양이 같은 스타일에 포스만은 누구 못지않다. 거기다 러시아 마피아 딸이니 함부로 건들 사람도 없어 주변도 깨끗한 편이다. 물론, 7개월 전 총을 쏘게 한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같은 모델이라 문란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남자 친구와 1년 넘게 교제를 했었으니 바람둥이 느낌은 아니다.

이렇게 완벽한 애가 ‘there’ 철자도 제대로 모른다면 누가 믿을까.

“그나저나 얘가 이 책은 왜 들고 간 거야? 이거 노먼이 나한테 선물해준 건데!”

순간 그 책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 기억난 진은 재빨리 핸드폰을 찾아들고 엘레나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재빨리 통화가 이어졌다.

「웬일이에요? 먼저 전화를 다 해주고?」

꺄악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온 엘레나의 말에 순간 진은 뜨끔했다. 엘레나가 한 전화를 받은 적은 많지만 자신이 직접 전화를 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웬일은? 너, 그제 내 아파트에서 노먼 책 들고 갔어?”

「아, 이거요? 인 더 미로?」

이제는 말로 오타를 내는 엘레나의 음성에 진은 아예 다 포기한 심정으로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미로가 아니라, 미러야. 그거 노먼이 내 생일 선물로 준 거야. 그걸 마음대로 가져가면 어떻게 해?”

「어, 쪽지 적어놨는데 못 봤어요?」

“내가 봤겠냐? 그대로 기절해서 병원으로 왔는데?”

진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엘레나의 메모를 봤다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이틀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가 그제 코디가 완벽했는데 뭐가 하나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잘 생각해보니 책이 좋겠다 싶어서 하나 들고 갔어요.」

“……너한테는 책이 코디용이냐?”

「그럼요. 스타벅스 컵하고 생수 병, 책이나 잡지도 코디용이에요.」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네 책은? 너 그날 학교 가는 길이었잖아.”

「에이, 책을 왜 들고 다녀요, 무겁게. 그리고 학교에서 쓰는 책은 분위기 안 나요. 크고 무겁고 스타일 안 산다고요. 오늘 나 나온 파파라치 사진 봤어요? 되게 지적이죠? 교과서 들면 저 분위기가 안 난다니까요.」

분명 우아하고 지적이고 아름답긴 하다. 그래, 인정한다. 그 책 한 권이 순식간에 엘레나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시켜놓았다. 문제는, 그 책 한권이 야기한 스캔들에 대해서, 엘레나가 전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 그런데 사진만 보고 기사는 안 읽었냐?”

「읽어야 돼요?」

“……읽어야지. 네 기사잖아.”

「사진 예쁘게 나왔으면 됐어요. 오빠가 가쉽 따위는 자세히 볼 필요 없다고 했어요.」

물론, 맞는 말이긴 했다. 줄리아 로버츠의 말대로 자신들의 기사가 어느 면에 났는지, 사진만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건 헐리웃 스타로서는 아주 현명한 태도이다. 하지만 적어도 타이틀은 읽으란 말이다!

“너, 노먼이랑 스캔들 났어.”

「노먼이 누군데요?」

“……내 친구. 어제 봤잖아.”

「아, 그 잘 생긴 남자요? 그 사람하고 제가 왜요?」

“왜긴? 그 책 내일 풀릴 책이야. 노먼이 먼저 나한테 가져다준 거라고. 시중에 풀리지도 않은 신간을, 그것도 유명 작가도 아닌 신인 작가가 쓴 책을 네가 들고 다니니 다들 너랑 노먼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지. 게다가 내 아파트에서 나가는 사진이 찍혀서, 그 집이 노먼 아파트가 아니냐고 하잖아. 오빠가 아무 말 안 해?”

「별로요. 아, 어쩐지 아빠가 아침에 누구 뒷조사 한다고 하더라니, 그게 그 사람인 모양이네요.」

“엘리, 이거 비상사태야. 너 미성년자라고.”

「괜찮아요.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요?」

“……그래, 너야 괜찮겠지. 책이나 가져와. 아니다, 나 지금 퇴원해야 하니까 오후에 좀 보자.”

「아, 잘 됐다. 저 오늘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에 가서 새틴 슈즈 샀어요. 보여줄게요.」

또 구두로 튀었다. 이 아가씨와는 무슨 대화를 해도 명품으로 나아간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거기다 사방팔방으로 튀는 주제보다 더 문제인 건, 이 타조가 진짜 자신을 그녀의 조류 친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쯤해서 난 네 친구가 아냐, 라고 사실을 인지시켜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진은 차마 이 순결한 아가씨에게 그런 말은 할 수 없어 참았다. 달갑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지만 나름 이것저것 신경써주는 애한테 할 말은 아니다.

“……그래. 거기 구두 예쁘던데 잘됐네. 어울리겠다.”

「지금 건 초록색이고 결혼식에 신고 갈 건 핑크로 샀어요. 드레스도 베이비 핑크의 칵테일 드레스에요. 너무 너무 예쁜 거 있죠? 제가 그거 입고 가면 제가 신분 줄 알 거예요, 다들.」

엘레나는 이미 그 결혼식장에 들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휘어감은 채 파티를 즐기고 있는 상태였다. 

초대 안 했다간 진짜 큰일 나겠다.

“예쁘겠네…….” 

「당연하죠. 그럼 어디서 볼까요?」

“이따 전화할게. 우선 퇴원하고 나서.”

「알았어요. 빨리 전화 줘요.」

“그래.”

아무래도 오늘 밤 플래티넘 판을 구해다 직접 엘레나의 이름을 파야할 것 같았다. 초대 안 했다간 미하엘 네브즐린이 결혼식장을 날려 보낼지도 모른다.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는 진을 보며 에반이 궁금한 듯 묻는다.

“뭐래?”

“뭐라긴. 아무 생각 없어. 기사도 안 봤나 봐. 그 책 제목도 제대로 못 읽는 애한테 뭘 바라겠어?”

“그 애도 진짜 물건은 물건이다. 에이먼이 걔 얘기 듣더니 걔를 메인으로 한 리얼리티 쇼를 하고 싶어 하던데?”

“리얼리티 쇼?”

진이 그건 또 무슨 장난이냐는 듯 에반에게 묻는 순간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들어선 블리스가 대신 답해준다.

“일명 타조 쇼라고 부르지.”

오늘은 정장이 아닌 진한 먹색의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흰색 재킷을 걸친 블리스가 열쇠를 한 번 집었다 던지며 이쪽으로 다가선다.

“타조 쇼?”

“아버지가 어제 엘레나를 보고 감동받으셨나 봐. 엘레나를 메인으로 해서 비슷한 급의 새 대가리들 세 마리 더 모아 쇼를 준비한대. 아직 구체적인 타이틀은 안 정해졌는데 가제로 타조 쇼라고 부르고 있지.”

어쩐지 어제 대넌이 뭔가 대단히 놀라는 듯하더니 기어이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었다. 타조 네 마리를 모아두고 쇼라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쇼 담당 프로듀서들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엘레나랑 비슷한 애들을 찾는 게 가능해? 아니, 그런 애들이 실제로 있어? 한 마리가 아니라 네 마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바닥을 가득 채운 선물과 꽃들을 피해 겨우 진과 에반의 옆으로 온 블리스는 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곤 느긋하게 답을 해주었다.

“나도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아버지 말로는 충분히 가능하대.”

“설마. 이 지구상에 그런 생물이 하나 더 있다곤 생각할 수 없는데?”

“엘레나가 무식을 아무렇지 않게 티낼 수 있는 굉장히 독특한 대인배긴 하지만 그 비슷한 지적 수준의 애들은 의외로 많대. 걔처럼 대놓고 티를 안 내는 것뿐이지.”

“그거, 잘됐다고 해야 하냐, 불행이라고 해야 하냐?”

“아버지에겐 잘된 일이고, 이 세계를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지.”

“그래서 진짜 기획하는 거야? 엘레나가 한대?”

대넌의 기획력과 추진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당장에 다음 시즌 프라임 타임을 잡아 방영할 수도 있다. 

어쩐지 걱정이 돼 진이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아직 컨택은 시작하지 않았어. 지금 형이 준비 중인데. 아주 신났어. 그런 애들 넷을 붙여놓고 걔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음악, 역사, 문학에 대해 가르치는 방식으로 나갈 건가 봐. 그때 그 애들의 반응은 어진간한 코미디 저리 가라할 정도일 테니, 시청률은 장담할 수 있잖아. 내가 봐도 그건 절대 성공할 거야.”

블리스뿐 아니라 진도, 에반도 그 쇼의 성공을 장담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그 쇼는 성공한다. 엘레나 같은 수퍼모델이 브라운관에 나와 그 천사 같은 얼굴로 텅텅 빈 뇌를 자랑한다면 누구든 좋아할 거다. 원래 예쁜 여자들 중에서도 클레어처럼 똑똑하고 야심 강한 귀족 스타일은 시기와 질투를 받아도 엘레나처럼 아예 뇌가 표백된 애들은 귀여움을 받는다. 거기다 엘레나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기까지 하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래, 다 좋다. 좋아. 그건 방송국 일이니까. 그런데 그 애들 가르치는 사람들은 무슨 죄야?”

“돈 벌잖아. 혈압계를 보너스로 지급하지, 뭐. 그리고 상시 의사도 대기시키고.”

그거야 말로 코미디다. 외형상 학습 형 쇼에 의사와 혈압계라……. 나중에 그게 기사에 실려도 센세이셔널할 거다. 엘레나가 끼면 뭐든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네브즐린 가에서 그걸 시킬까? 걔 일단 미성년자인데.”

진이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자 신문을 들어 그 안의 사진과 기사를 본 블리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할걸. 세르게이 네브즐린도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자기 동생 백치인 건 자기도 알 테니 그걸 팔아먹는 것도 좋다고 여기겠지.”

블리스는 말미에 “노먼과 엘레나라,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 묘하게 어울리는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이면서,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예일대 영문과 출신의 재원이자 재능 있는 신진 작가인 노먼과 수퍼모델 엘레나는 정반대의 느낌이지만 아버지가 글 쓰는 걸 반대한다고 학교 내의 최고 또라이 짓을 하고 졸업 후에는 집을 뛰쳐나가 파파라치 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피를 말리던 노먼은 남자 친구의 변심에 대낮의 백화점에서 총 들고 설친 엘레나와 비슷하다. 차이라면 노먼은 철저히 계산한 채 반항적으로 행동하는 거고, 엘레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그건 좀 그런데? 애를 팔아먹는 거잖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걔가 바보라는 걸 알 텐데, 너무한 거 아냐? 얘도 체면이 있지. 보그지 표지를 장식하는 수퍼모델인데.”

“그 타조가 그런 거 신경 쓸 것 같아?”

블리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엘레나 이콜 무뇌아로 인식이 된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엘레나도 일단 사람이다. 거기다 액면가는 20대 중반이라도 일단 예민한 청소년이다.

“걔도 사람인데, 자존심도 없을까 봐.”

“걔는 자기 정도로 예쁘면 무식해도 된다고 할 걸. 물론, 그 쇼에 나오면 모델 생명은 끝장이겠지. 걔가 런웨이에 서면 다들 웃겨서 쇼에 집중을 못할 테니까.”

분명 그럴 수도 있지만, 하여간 그 백치미와는 달리 엘레나의 포스는 진짜 위대할 정도였다. 파파라치 사진만 봐도 자신의 앞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표정을 굳히고 걸어가면 감히 말을 붙이기도 힘든 여왕 같은 이미지다. 물론,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이지만.

“굳이 걔 모델 생명을 끝내야겠냐?”

“카리스마 있는 수퍼모델인 척하면서 입 다물고 먹지도 못하고 사느니 먹고 싶은 거 먹고 마음대로 떠들고 사랑받는 백치가 되는 게 좋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그렇긴 하다. 하루에 물과 샐러드 200그람으로 연명하는 삶이라는 건, 솔직히 좀 끔찍하다. 게다가 세르게이가 종이비행기 날려서 선택된 직업이니 어쩌면 엘레나도 별 미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좀 아깝긴 하다.

“……어떻게 보면 그런데, 너무 아깝잖아. 사진으로 보니 대단한 모델인 것 같던데. 모델들 많이 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존재감 있는 모델은 드물잖아.”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깝다고 해도 자기가 행복한 게 먼저잖아.”

“뭐,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새대가리 문제는 그만 고민하고, 옷 갈아입어. 퇴원 준비해야지. 사라 빌라로 들어오신 한국인 아주머니가 아파트로 오셔서 식사 준비 다 해주셨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사라가 뭘 잔뜩 준비해서 보냈던데?”

“누가 너희 집에 간대?”

“그럼?”

“우리 집에 가서 좀 쉴래. 휴가 내내 잠이나 자야겠다.”

“음식들은? 난 한국 음식 안 맞아.”

“우리 집으로 보내. 진짜 좀 쉬고 싶어.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잠이나 잘 테니 전화도 하지 마.”

진은 말 그대로 진짜 잠만 잘 생각이었다. 책과 비디오를 잔뜩 쌓아두고 보다 질리면 자고, 자다가 깨면 다시 보고, 그리고 또 자고. 핸드폰도 꺼둔 채 진짜 잠만 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휴가를 내지 못했다. 막 고객이 늘고 전체적인 규모가 확장되기 시작한 때라 진뿐 아니라 에반과 블리스도 휴가를 쓰지 못했다. 에반에겐 좀 미안하지만 아픈 김에 푹 쉴 생각이었다. 그 뒤의 문제는 나중에 생각할 생각이었다.

블리스가 보기에도 여전히 진은 지친 상태라 결국 블리스 역시 진의 말에 동의하기로 결정내렸다.

“그럼, 이거.”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를 던져주었다. 그걸 두 손을 받은 진은 디지털 키 위에 새겨진 람보르기니의 문양을 보곤 떨떠름한 얼굴을 해보였다.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로드스터야. 오늘은 이걸로 타.”

자신이 가장 탐내던 차 명에 진은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블리스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거 진짜 나 주는 거야?”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곧 죽을 것 같이 창백한 안색에 눈만 팅팅 부어 진짜 개구리 같던 진이 갑자기 활짝 갠 얼굴로 방긋 방긋 웃자 블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저렇게 갖고 싶었을까.

“그럼 가짜로 주겠냐? 저택 차고에 있는 차들까지 키 박스 통째로 줄 테니, 네가 다 가져. 차야 별로 필요도 없고, 난 리무진 취향이니까.”

“진짜? 진짜? 진짜로?”

“나 차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네가 하도 눈 반짝거리면서 갖고 싶다고 해서 사놓은 거야. 가끔 와서 타라고 해도 네가 안 탔잖아.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저번에 본 재규어 XJ super V8 모델도 이번 달 내로 출고될 거야.”

“그것도 나 주는 거야?”

“그래. 그렇게 갖고 싶으면 말을 하지? 그 동안 어떻게 참았냐?”

굳이 블리스가 아니라도 애클랜드 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이 원하는 차 한두 대 정도는 당연한 듯 선물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진 본인이 고사하는 통에 생일 선물로도 줄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에이먼이나 블리스가 물려주겠다고 한 차도 거절하곤 자신이 직접 중고로 차를 구입했다.

블리스는 사실 차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이 여자는 가방, 남자는 자동차가 최고의 사치품이라며 피를 토하며 성토하는 친구들이 있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블리스는 진짜 차 자체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운전하는 것 역시 블리스에겐 귀찮고 번거로운 시간 낭비였다. 차는 안 좋아하면서 차를 모으는 게 신기했는지, 몇몇 친구들은 돈이 넘치니 모형 자동차 모으듯 운전하지도 않는 차를 모으는 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블리스가 사 모은 차들은 대부분 진이 갖고 싶다고 한 차들이었다. 진이 타라고 사둔 거지, 그 차들 자체에는 별 애착이 없었다. 그래서 컬렉션도 28대에서 멈춘 거다. 진이 타고 싶다는 모델만 골라놓다 보니 그렇게 됐다. 어차피 람보르기니고 재규어고 페라리고, 차는 차다. 사실, 블리스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차는 리무진이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고 자신의 개인공간이 분리되고 그 안에서 뭐든 할 수 있으니 이상적인 차였다.

클레어도 블리스와 비슷한 타입이었다. 사실 클레어도 가방과 구두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남매 중 에이먼과 클랜이 닮고, 블리스와 클레어가 가장 닮았는데, 귀찮고 번거로운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건 블리스와 클레어 둘이 똑같았다. 클레어의 가방과 구두 수집 역시 그냥 보여주기 위한 수집이었다. 일종의 과시다. 어차피 돈은 썩을 정도로 남아돌고,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내가 이 정도의 컬렉션을 유지할 정도의 재력이 된다고 과시하기 위한, 진이 가끔 하는 말처럼 그냥 돈지랄이었다. 클랜 역시 그나마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보관 방법이 엉망이다. 클랜은 다만 활자 중독일 뿐 책 자체는 그다지 아끼는 편은 아니었다. 사 남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컬렉션에 애착을 갖고 있는 게 에이먼인데,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취미라 에이먼은 취미도 없이 그냥 일벌레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다. 

“키 박스는 필요 없고 이건 받아둘게. 보너스라고 생각하지, 뭐.”

블리스가 잠시 이 웃긴 상황을 개탄하는 사이 진은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나치게 거절하는 것도 좋지 않다. 블리스에게는 자동차 모형에 불과한 람보르기니 한 대 정도는 지난 생일 선물로 받아도 괜찮다. 무엇보다 자신이 입에서 내뱉어놓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우습다. 사실은 전부 잊고 싶지만, 진짜 싸그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수치스러운 기억이지만 블리스에게 매달려 했던 말들이 너무 생생히 기억난다.

특히 재키가 살쪘다고 타박하던 것이 가장 선명했다. 

죽고 싶다.

“퇴원 전에 이 방을 먼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저 나무는 진짜 처치곤란이군.”

블리스가 세르게이가 보낸 나무를 보고 그렇게 중얼거리자 진 역시 난감한 듯 그 나무를 멍하니 바라봤다.

“저걸 진짜 어쩌냐?”

“일단 들고 나가서 아무 데나 심어놔야겠지. 무식한 건 알아줘야 돼. 뭐든 큰 거면 좋은 건 줄 아는 사람이라.”

블리스의 중얼거림에 진이 슬쩍 블리스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대체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러시아 마피아 대부의 아들. 러시아 쇼비지니스 계의 대제. 그리고…… 공작새.”

“공작새?”

“……나중에 보면 알 거야.”

“공작새라니? 뭐야? 타조 오빠라 공작새야?”

“그렇다고 해두지.”

“뭔데? 나 그 사람 무섭다니까!”

“알려주면 뭐해줄 건데?”

“뭐?”

“세르게이가 왜 공작새인지 알려주면 뭐해줄 거냐고? 진한 한 방이 있어야 나도 뭘 말해주지. 그거 러시아 국방 기밀 수준인데.”

살짝 입술 끝을 올려 웃으며 은밀한 뭔가를 요구하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그냥 블리스에게서 알아내길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게 블리스의 신념이듯 진은 공짜가 아니면 자신이 알아서 하자라는 게 신념이었다.

“됐다. 내가 알아보고 만다.”

진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존재 자체가 잊혀졌던 에반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도 사무실 나가봐야겠다.”

“어? 그런데 에반 아무 것도 없어? 위문품은?”

진의 말에 에반이 방 안을 쭈욱 돌아보더니 시니컬하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받고 더 바라냐? 너 이거 열어보는 데에만 하루 종일 걸릴 거다.”

“그래도.”

람보르기니 키를 든 채 얌전히 두 손을 내밀며 뭐라도 달라고 요청하는 진의 얼굴에 에반은 결국 웃으며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한국에서 홍삼 공수해 와서 아파트에 보내놨어. 어머니가 어렵게 구해오신 거니 꼬박꼬박 잘 먹어야 돼. 하루에 두 개씩, 아침저녁으로.”

“어? 아, 고마워라.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데.”

“어머니가 너 걱정하더라. 몸 좀 좋아지면 한 번 인사드려.”

“전화할게.”

“그래. 난 또 몸이 부서져라 일하러 간다. 블리스, 휴가라도 휴대폰 켜 놔. 갑자기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까.”

선물 더미를 해치고 가던 에반이 휴가 중이라도 필요하면 호출하겠다는 그 말에 블리스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쓴다.

“어지간한 건 당신이 알아서 해. 그리고 휴가 끝나고 곧장 인사 정리 있을 거야. 파트너가 된 걸 축하해.”

“어? 드디어? 에반 승진 축하해!”

진은 마치 자기 일인 냥 기뻐하며 축하의 말을 남겼지만 드디어 지뢰밭을 헤쳐나간 에반은 별로 신통치 않은 표정으로 블리스를 돌아봤다.

“뭐야? 이제 대놓고 부려먹겠다는 거야?”

“기뻐해. 파트너라고. 연봉도 나랑 같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거야.”

“하나도 안 고맙고 하나도 안 기뻐. 나도 결혼은 해야 할 거 아냐? 너희 뒤치다꺼리 하다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죽으라는 소리냐?”

그 동안 쌓인 한이 많은 듯 에반이 절대 파트너 따윈 하지 않겠다고 소리치자 블리스가 기분 좋은 듯 웃는다. 하지만 그 표정에 진은 불안해졌다. 블리스가 저렇게 웃을 때엔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다. 그것도 아주 짓궂은 장난을 치기 직전의 얼굴인지라 또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진이 블리스와 에반을 돌아보는 사이 블리스가 에반에게 그린마일을 펼쳐주었다.

“지금 이 기쁨을 누리는 게 좋을 거야. 잘하면 내가 애클랜드 부동산으로 들어가고 내 자리에 클랜이 올 수도 있으니까.”

“뭐?”

“일단 그런 얘기 중이야. 당장 애클랜드 사로 들어오기엔 너무 모르는 게 많으니 당신한테 교육 좀 받아야지.”

“미쳤어? 차라리 날더러 죽으라고 해!”

“클랜도 똑똑해.”

“똑똑한 게 문제가 아니잖아.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폭탄을 끼고 살란 소리냐? 차라리 진을 붙여줘!”

에반이 진을 가리키며 그렇게 소리치자 진이 질색을 한다.

“클랜이 쳐놓은 사고 처리하느니 차라리 타조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클랜은 분명히 능력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거물이 될 자질도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투자에 있어서는 과감하며, 일을 기획하고 처리하는 데에 있어 재치 있고 기발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와 함께 일하는 것만은 절대 싫다. 다른 건 몰라도 클랜은, 그의 과감하고 대범한 성미로 아주 획기적인 대형 사고를 수시로 쳐주며 뒤처리는 하지 않는 최악의 생물체다. 클랜을 따라다니며 일처리를 하다가는 딱 한 달 만에 뇌졸중을 일으켜 이 박복한 인생을 끝내게 될 것이다.

“블리스, 나 클랜한테 보내면 진짜 너랑 끝장이야. 내가 에이먼이나 클레어랑은 일해도 걔랑은 일 안 해. 못 해.”

“걱정 마. 넌 안 보낼 테니까. 하여간 그건 나중 일이니, 나중에 말하자고. 나도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에반, 가서 일봐. 그리고 진 너는 빨리 옷 갈아입어.”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며 블리스가 다시 자리에 앉자 에반이 이를 으드득 간다.

“블리스, 너 두고 봐. 휴가 끝나고 돌아와 보라고.”

“기대하지.”

“실컷 기대해 봐. 이렇게 된 거 아예 내가 블리스 사를 장악해 버리겠어.”

“그것도 좋지. 해봐.”

신문을 들고 연예 면을 휙휙 넘기며 뒤에 나온 사회면을 읽기 시작한 블리스를 보며 에반은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 병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얄미운 자식.”

에반이 떠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던 진은 다시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서둘러 핸드폰을 들었다.

“내, 진 케이먼입니다.”

밝은 음성으로 대꾸하자 안에서 맥없는 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난데…….」

사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거기다 머뭇거리는 기색도 완연하다.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해 진은 서둘러 답했다.

“아, 사라? 왜?”

「저기, 진짜 미안한데…….」

“왜? 무슨 일인데?”

「나 좀 살려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랜 하나가 아니라 재키까지 합세했다면 버거운 게 당연하다. 

“알았어. 내가 갈게. 어디야?”

「애클랜드 사 회의실. 나, 진짜 이런 말 하기 싫었는데……. 계모라서 그런다고 할까 봐,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안 해도 돼.”

「아니, 하고 싶어. 나 지금 클랜을 로켓에 달아서 우주로 보내버리고 싶어.」

순간 진은 안도했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이 아닌 게 얼마냐.

“충분히 이해해. 곧장 나갈게.”

「미안.」

“아냐.”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은 진은 한숨을 내쉬며 블리스를 바라봤다. 블리스는 통화 내용은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휴가잖아. 그냥 무시해.”

“……어떻게 무시하냐?”

“그냥 두라니까? 지금 붙은 인력이 몇인데 그거 하나 처리를 못해?”

“초대장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사라가 클랜을 우주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걸 보니 다른 사고를 친 거야. 옷 갈아입을게. 나가있어. 나 지금 너랑 말싸움할 시간 없다.”

진이 지친 듯 손을 휘휘 내저어 내쫓자 블리스도 더는 어쩔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신문을 손에 든 채 병실을 빠져나간다. 어제 오후에 사라가 챙겨 보내준 옷을 찾아들던 진은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작게 신세타령을 했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