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5/13)

Chapter 5

『I`m zealous. I must has you go away.』

완벽하게 문법을 무시한, 게다가 단어도 틀린 문자를 받은 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난 열정이다. 당신을 멀리 가게 만들 거예요. 그래, 네 이름이 원래 질러스였구나.”

j와 z 하나 차이로 뜻이 심하게 갈린다는 걸 이 아가씨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분명히 낮에는 자신에게 철자를 묻고는 제대로 보냈던 걸 5시간 지났다고 또 틀리는 것도 문제지만, 이 아가씨는 아무래도 zealous가 질투라고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한숨을 내쉰 진은 문자의 송신 번호를 확인하고 답 문자를 보내주었다.

『z가 아니라 j. 그리고 형용사는 뒤에 y 붙여야 돼. 그리고 must 다음에는 have다.』

오랜만에 애클랜드 저택에 돌아와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고 클랜이 대넌과 일대일 면담을 하는 시간을 이용해 수영장에 나와 있던 진은 send 버튼을 누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영과 썬탠을 좋아하는 클랜이 돌아와서인지 오랜만에 애클랜드 저택의 수영장이 가득 차 있었다. 어두운 밤에 일렁거리는 반짝거린다. 처음에 왔을 때엔 온 가족들이 툭하면 옷 벗어재끼고 일광욕을 하길래 이 집은 왜 이렇게 벗고 다니는 걸 좋아하나 했더니 백인들은 뼈가 약해 일광욕을 자주 해줘야 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홀라당 벗고-물론, 저택 안 에서만- 썬탠을 하는 게 익숙한 가족들이라 덕분에 초기엔 적응이 안돼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래봐야 다들 자택을 갖고 집을 나간 뒤로는 대넌은 늘 바쁘고 사라는 수영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청소만 해주더니 클랜 덕에 드디어 물이 가득 찬 수영장을 보자 신기하게도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생각도 나고,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도 떠올라 감회가 남다르다.

사실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지 바싹 긴장한 채였다. 물론, 다들 기사만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라 생각은 했지만 어젯밤에 쳐둔 사고가 있는 터라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내쫓기면 어쩌나, 아니면 다들 자신을 잡아 죽일 듯 노려보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었는데, 막상 저택에 들어서자 모두가 평소와 똑같이 자신을 대해주었다. 에이먼은 자신이 들고 온 선물을 들고 “앞으로도 블리스랑 잘 지내.”라는 정체불명의 말을 남긴 뒤 3층으로 올라갔고, 클랜은 “고생했어.”라는 의미심장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사라와 클레어는 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다음 시즌에 나올 가방들을 웨이팅 걸어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일 문제였던 대넌 역시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주었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이걸 좋은 징조로 봐야 할지, 나쁜 징조로 봐야 할지 애매한 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안사람들은 독특하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튀어갈지 알 수 없다.

조용한 수영장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 잠시 후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그 문자를 본 순간 진짜 머리통이 깨진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낮부터 거의 5시간 동안 문자를 백 개가량을 주고받았는데. 이 아가씨가 제대로 쓴 단어라곤 I, you 밖에 없다. 이번에도 틀린 철자를 고쳐 답문을 주었다.

아무래도 이번 달 핸드폰 요금은 네브즐린 가에 청구해야할 것 같다.

“또 문자야? 그 타조 더럽게 할 일 없나 보다.”

저녁 식사 중에도 계속해서 울려대는 문자에 내용을 궁금해 하던 블리스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왼쪽 눈가에 시퍼런 멍을 달고 따라 나왔다.

저녁 식사 후 에이먼은 역시나 3층 방에 박혀 나오지를 않는 채였고, 클레어와 사라는 응접실로 가 사교계 소문들을 정보로 교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클랜은 역시나 대넌의 호출을 받고 서재에 감금당한 채다.

“얘, 아무래도 내가 자기 친구인 줄 아나 봐. 자꾸 문자를 보내.”

한 번 답 문자를 주자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는 걸 보니, 이 아가씨에게 필요한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또래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문자 통이 꽉 차 번거롭게 지워야 했지만,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답 문자를 주는 중이었다. 이렇게 매달리는 상대를 뿌리칠 만큼 자신은 독하지 못하다.

“네가 자꾸 상대해주니 그렇잖아. 그런 애들은 상대해주면 끈덕지게 달라붙어. 귀찮게 뭐 하러 일일이 문자를 보내주고 있어?”

“그러게. 나도 오지랖도 넓지. 5시간 동안 100통이 넘게 오간 것 같아.”

그 말에 블리스가 경악한다. 

“100통? 둘이 연애해?”

진짜 큰일 날 소리를 하는 블리스에게 진은 맥 빠진 음성으로 그보다 더 큰일을 말해주기로 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보다 무서운 게 어디 있어?”

“그 백 통 중에 얘가 문법이나 철자 실수 없이 문자를 보낸 건 단 한 통도 없다는 사실이야.”

그 말에 블리스가 한숨을 내뱉는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상대하고 있냐고. 머리 나쁜 것들은 상대해주면 좋아서 상대해주는 줄 알고 더 들러붙는다니까.”

속 모르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진지한 얼굴로 핸드폰을 열어 블리스에게 문자를 보여줬다.

“너라면 이 철자를 보고 답 문자를 안 보낼 수 있겠냐?”

단호한 진의 말에 블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이걸 일일이 지적해주고 있는 거야? 네가 걔 가정교사냐?”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며 진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사실 차라리 이 김에 블리스 비서 때려치우고 타조 가정교사로 들어앉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블리스와 좀 거리를 둬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아가씨 영어 실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다. 꼭 잡아 앉혀두고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애가 차라리 못되기라도 하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은근히 귀여운데다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아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계속 문자를 보낼 기센데, 이 형편없는 영어 실력은 참아줄 수가 없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집으로 쳐들어가 노트랑 책 펼쳐두고 패가며 과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 딸이니 아무래도 페이도 세지 싶다. 위험수당이 어마어마하게 첨부될 거다. 생명보험하고 사고보험도 엄청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점점 마음이 기운다. 

예일대 영문과 졸업생이면 가정교사로서는 최곤데…….

“걔도 참 어지간하다. 그쯤 했으면 알아먹어야지.”

블리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 사이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진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지친 듯한 음성으로 블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절대 포기 안 할 기세야. 이젠 전술을 바꿔서 자기 성년 될 때까지 4년 동안 문자 보내서 나 혈압 올라 죽게 하려는 것 같아. 연적이니 뭐니 하는 거 보니, 날 먼저 해치우려나 봐.”

엘레나의 문자가 무서운 건 그 협박문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무서운 건 엘레나의 무시무시한 영어 실력이었다. 어쩌면 이게 엘레나의 고도의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문자 받다 열 받아 자신이 혈압으로 쓰러지길 바라는 거라면, 엘레나는 진짜 천재다.

7살짜리가 보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라고 중얼거리던 진이 또 다시 틀린 철자를 지적해 문자를 보내주자 블리스가 휴대폰을 빼앗아 옆 의자에 던지며 진지한 어조로 말을 건다.

“엘레나보다 나랑 할 얘기가 있잖아. 얘기 좀 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난 아직 정리가 덜 됐는데.”

오늘 하루 종일 고민하고 정리하고 대책 세우고 또 다시 고민해봤지만 여전히 결론은 나지 않은 채였다. 아니, 사실을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엘레나한테 문자 보내느라 블리스와의 일을 살짝 까먹고 있었다.

“진, 날 믿지 못하는 거 알아. 믿을 수 없겠지.”

그래도 네 주제는 아는구나 싶어, 진은 블리스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알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우리 가족을 걱정하는 거야?”

“걱정 안 되면 거짓말이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지. 사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럼?”

“내가 너한테 마음이 없어.”

진이 딱 잘라 말을 내뱉자 블리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다 이내 겨우 마음을 수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거짓말하지 마.”

“녹음 핑계 대지 마. 내 마음은 지금 안 그래. 내가 널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정리했어. 다시 혼란스럽기 싫어. 난 내 일을 좋아하고, 너랑 지금 이대로 일하는 게 편해. 진창으로 얽히는 거 싫어.”

“……왜?”

“여러모로. 버림받는 게 무섭다거나 하는 건 문제가 아냐. 그래, 뭐 사귀다 헤어진다고 죽기야 하겠니?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별로 안 흔들린다. 그리고 사실 그런 생각도 들어.”

“무슨 생각?”

“난 몇 주짜리인가…… 하는 거.”

블리스의 연애는 주 단위였다. 달도 아니라, 주 단위다. 보통 길면 3주, 짧으면 1주다. 사실 일주일을 만난 여자를 진짜 사귀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데이트는 탐색전이고 두 번째는 확인 작업이다. 그리고 세 번째에야 비로소 굳히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루에 18시간을 일하던 블리스가 그 여자들과 일주일에 일곱 번을 만난 것도 아니고, 두세 번 데이트 후에 굿바이였으니 어떻게 보면 ‘교제’의 개념에 들어가는 이들은 몇 안 될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진지하게 사귀었다 하는 상대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타블로이드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나니 그냥 사귀나보다 했던 거다. 따지고 보면 매스미디어의 세뇌 기능에 걸려들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의문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조금은 그런 식으로 블리스에게 보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블리스는 정확히 걸려들었다.

“……진…… 그건…….”

당황한 얼굴로 뭔가 반론을 펼치려는 블리스를 진이 막는다.

“내 말부터 들어. 그래, 연애한다 치자. 네가 나한테 장난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너 그럴 사람은 아냐. 그건 믿어. 지금까지 네가 만난 사람들 전부 네가 진심으로 대했다는 거 알아. 연애 감정이든 우정이든, 넌 언제나 진심으로 성의 있게 사람들을 대해줘. 그래서 내가 널 사랑했던 거고.”

“그래. 그러니까……”

“네 옛 연인들의 절반은 지금 네 우수 고객들이고, 절반은 네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거 알고 있어. 너한테는 필요한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너와 헤어지고도 그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네가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도 그 사람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를 만났었다는 뜻이기도 해. 몇 번 만나 식사하고 섹스하고, 정보를 주고받고 어쩌면 연애보다는 사업에 더 가까웠던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을 거야. 그리고 즐거웠던 추억이 남아있으니까 너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겠지. 그런데 말야…….”

거기까지 말하던 진이 말을 잠시 끌자 블리스가 재촉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못 하겠어. 그리고 헤어지면, 널 보고 어떻게 일해? 난 촌스러워서 헤어진 상대랑 웃으면서 같이 일 못해. 아마 계속 생각날 거야. 좋은 추억이 떠오르고, 그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아파서 널 제대로 못 볼 것 같아. 그리고, 내가 실연 당하면 난 누구한테 위로 받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누가 나한테 위로를 해줘?”

시작도 전에 헤어지길 걱정하는 진의 태도에 블리스는 화가 치민다는 듯 큰 소리를 냈다.

“안 헤어지면 되잖아? 내가 그런 각오도 없이 네 종신 보험에 서명하겠다고 나섰는 줄 알아?”

“종신보험 쓰레기 되는 거 순식간이야.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도 이렇게 식었는데, 너라고 식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

“있어!”

“그렇게 쉽게 답하지 마. 나도 내가 이렇게 편하게 널 대할 줄 몰랐어. 그런데 그게 별거 아니더라. 시간 지나니 편해지더라.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너 혼자 결론내리지 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마음이 동하니 지금 너한테 이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해? 그 정도로 내 진심이 우스워 보여? 확신이 서지 않으면 난 움직이질 않아. 너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난 절대 확신할 수 없는 서류에는 사인하지 않아.”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그 서류에 사인하고 네 마음 식으면 어떻게 할래? 그래도 사인했으니 약속은 지키자고 의무적으로 날 대하는 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데?”

“그럴 일 없다니까!”

“넌 널 믿지? 그런데 난 널 믿을 수가 없어. 솔직히 나 자신도 믿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좀 더 생각해 볼래. 아직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이르다.”

거기까지 말한 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 핸드폰을 들고는 돌아섰다.

“일어설게. 쉬어라.”

오늘따라 유난히 지친 듯한 기색으로 돌아서는 진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언젠가 꼭 우아한 분위기에서 감동적으로 고백하려 준비했던 그 말을 내뱉어버렸다.

“난 널 사랑해. 10년 전부터 계속 그랬어. 나는…….”

하지만 그 고백에도 진은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뒤를 돌아보며 블리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럼 10년 전에 말하지 그랬니?”

“You win!”

2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클랜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는다. 어릴 때에는 가장 작았지만 지금은 형들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자란 유쾌한 청년의 인사에 진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들었어?”

“응. 분위기가 묘하길래 몰래 엿들었지. 하여간 축하해.”

“뭘?”

“우리 형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 끌어낸 거. 그리고 고생길 열린 거.”

아무리 클랜이 반골기질이 강한 애클랜드가의 문제아라고는 하지만, 이 상황을 반기는 건 아무래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랜, 너 너무 재미있어 하는 거 아냐? 설마 너 이 일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니겠지?”

“설마. 나도 형을 본받아볼까 하고 온 거지.”

“블리스를 본받아서 뉴욕 여자들 씨를 말리려고?”

블리스 애클랜드에게서 본받을 거라곤 그 바람둥이 기질과 사기꾼 기질밖에 없는지라, 진이 제발 그것만은 본받지 말라는 투로 말을 걸자 클랜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린다.

“설마. 난 형처럼 기운이 넘치지 않아.”

“그럼 뭔데?”

“정면 돌파.”

“뭐야? 너도 사고 쳤어?”

애클랜드 가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절반이상이 클랜이 치던 사고였다. 맥캐인 가에 노먼이 있다면 애클랜드 가에는 클랜이 있다, 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돌 정도로 클랜은 노먼과는 다른 의미의 말썽꾸러기였다. 이 악동이 정면 돌파를 하겠다는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 듯해, 진이 불길하다는 얼굴로 클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묻자 클랜이 씨익 웃으며 그의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들어가서 얘기해. 진한테만 몰래 해주는 얘기니까, 대신 비밀 지켜줘야 돼.”

이 놈의 집안사람들은 비밀이라면서 왜 그렇게 자신에게 털어놓나 싶어 진은 살짝 진저리를 쳤다. 

“그 비밀, 그냥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으면 안 되겠냐? 너희 집 사람들 비밀 너무 좋아해. 그리고 그 비밀 나한테 말해주는 것도 너무 좋아해.”

“그거야 진이 믿을 만하니까지.”라고 웃으며 답을 한 클랜이 먼저 걸어 그의 방문을 열고는 진을 기다린다.

“들어와. 나랑 맥주 한 잔 해.”

***

“진, 그거 형한테 사기당한 거야.”

맥주를 마시던 중 클랜의 마수에 걸려 그간 블리스와 있던 일을 전부 터놓아버린 진은 지난 밤 일을 들은 뒤 단숨에 답을 내려주는 클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진이 그럴 성격도 아니거니와, 우리 형이라면 그랬으면 당장에 끝까지 갔을걸. 참긴 뭘 참아? 그 호색한이.”

클랜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단언했다. 그리고 그제야 진은 “아.”라며 멍청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형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리스라면 분명히 끝까지 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형이 진짜 급하긴 했나 보네. 그런 편법을 다 쓰고.”

시원스러운 클랜의 답에 진은 슬슬 블리스에 대한 살심이 일기 시작했다. 역시 주먹 한 대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 

“역시 몇 대 더 패줬어야 했어. 나쁜 자식.”

“어쩔 수 없지. 우리 형이 사기 치는 실력이 끝내주잖아. 우리 아버지도 여러 번 당했는데, 뭐. 애클랜드 가에서 안 태어났으면 지금쯤 어디서 엄청난 게이트 하나 일으키고 연방교도소에 갇혀 있을걸. 거기다 통은 좀 커.”

분명 그렇다. 그 미모에 그 성격에, 그 머리에, 그 뛰어난 언변과 화술에, 사기 실력까지. 절대 범죄자다. 범죄자 아니면 사이비 교주다.

“……입이 찢어져도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니까, 진이 형을 못 믿는 것도 난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너무 괴롭히지는 마. 적당히 애태우다 넘어가줘. 진도 형 사랑하잖아.”

클랜은 의외로 이 사태를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진도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클랜은 걱정하지 않았다. 클랜은 에이먼이 대형 구체관절 인형을 들고 와 결혼하겠다고 해도 손뼉 치며 축하해줄 성격이다. 어쩌면 할까 말까 망설이는 에이먼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그래, 클랜 애클랜드는 그런 인간이었다. 노먼과 붙으면 아주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다. 두 사람이 붙으면 지구 멸망이다.

노먼과 클랜 둘이 손잡고 있는 것만 생각해도 아찔해졌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이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대는 클랜뿐이라,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기로 했다. 새삼 이 시기에 돌아와 준 클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사실은 그게 문제야.”

“뭐가?”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단 말이지.”

“왜?”

“나도 확신이 안 서. 블리스는 확신한다고 설치는데, 뭐랄까……. 나 그 녀석 좋아했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오래된 친구 사이에 남은 정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또 가족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사랑이 남은 것도 같고. 내가 확신이 안 서. 사실은 그래서 그래.”

그게 제일 문제였던 것 같다. 블리스가 이렇게 나오는 게 당혹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쁜 것도 사실이다. 아예 싫은 건 아니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복잡한 거지, 진짜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싫은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인 거다. 차라리 싫으면 아예 작정을 하고 끝장을 보면 되겠지만, 그러기엔 아직도 아리까리하다. 자신의 감정이 진짜 정리가 된 건지, 아니면 아직 미련이 남은 건지, 잘 모르겠다.

“진, 너무 초조해 하지 마. 그거야 천천히 확인하면 되지. 10년 기다렸으니 10년 더 못 기다리겠어?”

“……10년은 또 뭐야?”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거기서부터는 노 코멘트. 거기까지 내가 말하는 건 페어플레이가 아니니까 형한테 직접 들어.”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말을 자르는 클랜의 태도에 진도 더는 그 문제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진짜 궁금하던 바를 물었다.

“그런데 넌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사고는 아냐.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 어쩌면 이 상황에서는 아버지가 반기실지도 모르지. 어쩌면, 날 잡아 죽일지도 모르지만.”

잡아 죽인다는 그 말에 진은 진심으로 클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넌은 절대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기에, 자식들과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가정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그 덕에 애클랜드 가의 사 남매들의 관계도 돈독했다. 그런 그가 아들을 잡아 죽일 정도라니,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걸까.

“대체 뭔데? 빨리 말해. 심장 떨린다.”

“별거 아냐. 그냥, 결혼하려고.”

순간 진은 눈을 크게 뜨고 클랜을 바라봤다. 이 시대 최후의 반항아인 클랜 애클랜드가 결혼이라니. 

“……결혼?”

“응.”

“그건 축하할 일이잖아.”

“그게…… 좀 문제가 있어.”

클랜이 망설이는 걸 보니 걱정은 되지만, 이 상황이라면 대넌은 어지간한 상대라면 다 받아줄 거라고, 진은 생각했다. 첫째인 에이먼은 그 놈의 수집벽 때문에 결혼이 어려운 상태고, 블리스는 온갖 염문만 뿌려대다 결국 게이 설까지 나도는 채이고, 막내인 클레어는 일 욕심이 많아 약혼자를 독수공방시키며 결혼을 미루고 있다. 빨리 자식들을 결혼시켜 손자를 보고 싶다고 하던 대넌이라면 클랜이 결혼한다고 하면 어지간한 상대가 아닌 이상은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다.

“결혼 소리 하는 거 보니, 상대가 남자인 건 아니고……. 애 딸린 과부야? 아니면 미성년자?”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레너드? 그 재키?”

“응.”

“와! 그거 축하할 일이잖아. 걔 석 달 전에 성인 됐잖아. 문제될 거 전혀 없네.”

재클린은 대넌의 절친한 친구인 브루스 레너드의 딸이었다. 엄청난 미녀는 아니지만 성격 좋고 싹싹하고 하버드에 입학한 수재에 얌전하고 예의 바른 아가씨였다. 무엇보다 대넌이 친딸처럼 아끼는 아이였다. 친우의 딸이기도 하지만 애교 없는 클레어와는 달리 재클린은 아주 상냥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재클린이 상대인 게 그게 뭐가 문제냐 싶어 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넌 엄청 좋아하겠는 걸? 너, 그렇게 속 썩이더니 막판에 효도하는구나. 그래서 돌아온 거야?”

“응, 일도 시작하고. 그쪽은 내가 백수인 게 영 못마땅한 모양이니까.”

“진짜 사랑은 위대하구나. 죽어도 목 조르는 넥타이 매고 매일 출근은 못 하겠으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한 네가 일을 하겠다니.”

“뭐, 사실 슬슬 내 재능의 한계가 보여서 말야. 파리에서도 글 쓰는 것보다 투자 상담으로 돈을 더 벌었거든. 열심히 주식해서 먹고 살았지.”

“하하, 너희 집 특성인가 보다, 그건. 진짜 돈은 잘 벌어.”

“그러니까. 희망과 재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진짜 슬픈 일이더라고.”

“그 기분은 내가 잘 알지.”

진 본인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클랜을 백 배 이해했다. 사실 암울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자면 자신은 원래 아주 감성적이고 문학적이어야 하는데, 어떤 경험도 없는 재능을 살려주지는 않는다는 걸, 진은 자신을 통해 처참하리만치 깨우쳤다. 교수님들조차 너는 글을 쓰기보다 평론이나 편집으로 나가는 쪽이 백배는 나을 거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글쓰기 재능은 제로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보다 더 재능이 없는 게 클랜이었다. 

사실 대넌은 꽤 문학에 소양이 있는 남자였다. 문학가들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해주던 대넌은 자식이 넷인데다 다들 제 몫을 확실히 하다 보니 가문에 한 명쯤 작가가 있어도 괜찮을 거라고 하며 클랜을 지지해줬다. 하지만 그런 대넌조차 클랜의 무재능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6년 전엔가, 클랜이 쓴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은 대넌은 당장에 때려치우라고 그 소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만약 클랜이 애클랜드 이름을 걸고 소설을 낸다면 그건 가문의 수치이니, 전량 회수에 불태워버린다고 할 정도로, 클랜은 진짜 재능이 없었다. 그 대신 클랜은 돈을 버는 데에 비상했다. 애클랜드 가 남매들 모두가 예술이나 교양 쪽으로는 젬병이지만 사업 쪽으로의 감은 타고났다. 진짜 환경은 되는데 꿈과 재능이 완벽하게 불일치한다는 건 다행 중의 불행이었다.

“그런데, 진이 좀 도와줘야 돼.”

“왜?”

“진이 블리스 옆을 꿰차야 아버지가 날 안 죽이실 것 같아서.”

“뭐가 문제야? 다른 상대도 아니고 재클린인데.”

거기다 마음잡고 일까지 한다니 대넌으로서는 가문의 수치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아도 되니 당장에 대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거였다.

“그게, 재키가 임신을 했거든.”

“……응?”

“생일 지났다고 프랑스에 와서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하길래 그냥 질러버렸지. 임신 3개월이야.”

그 말에 진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클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확인했다.

“저기, 레너드 독실한 청교도 집안 아냐?”

“맞아.”

“그리고 재키는 열여섯 생일날에 혼전 순결선언을 했었지, 아마?”

“응. 그래서 재키랑 나랑 둘이 꼭 끌어안고 벌벌 떨다가 내가 먼저 총대 메고 나선 거야.”

처음 본 순간 불독을 닮아 브루스인가, 하던 브루스 레너드의 얼굴을 떠올린 진은 진심으로 클랜에게 조의를 표했다.

“……브루스가 너 죽일지도 모르겠다.”

레너드 가는 크리스찬도 아닌 아주 독실한 청교도 집안이었다. 심지어는 자식 이름도 첫째 딸이 마리아, 둘째 아들은 요셉, 셋째 아들은 요한이었다. 재클린이 재클린이 된 건, 단순히 재클린의 임신 중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 재클린이 된 것뿐이다. 그 정도로 레너드 가는 독실한 청교도 집안이었다. 그 집 자식들은 딸들뿐 아니라 아들들까지 열여섯이 되면 무조건 혼전순결 선언을 해야 하고, 특히나 딸들은 혼전까지는 절대 아버지가 허락한 남자가 아니면 교제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브루스 자체도 워낙에 고지식하고 깐깐한 사람이라 파티에서조차 딸들이 등과 허벅지를 드러내는 옷도 못 입게 할 정도였다. 블리스가 한 번은 사석에서 시대착오적인 가풍이라고 브루스를 비난하자 그대로 테이블을 뒤엎을 정도로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다.-그러니까, 두 사람의 혼인에는 블리스도 하나의 암초였다. 브루스는 블리스를 죽도록 싫어했다. 게이 설까지 난 상태니 지금은 더 싫어할 거다.- 그런데 클랜이 그의 어린 딸을 임신까지 시킨 걸 안다면 진짜 킬러를 고용할지도 모른다.

“진, 그렇게 아픈 데를 찌르지 마. 그래서 지금 협조를 구하는 거잖아. 그쪽은 지금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 상황인데 재키가 임신까지 했으니 진짜 날 죽일지도 몰라.”

확실히 그럴 거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의, 그것도 애클랜드 가의 아들이라지만 무재능의 백수 작가 지망생에게 딸을 내주고 싶을 리가 없다. 에이먼이나 블리스라면 몰라도 클랜은 진짜 결혼상대로는 빵점이다. 거기다 임신까지 시켰다면, 클랜도 클랜이지만 재키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몇 번인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브루스는 여기가 중동이라고 생각하는지 부인과 자식들에게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딸들을 막 대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재키가 아버지에게 혼나고 애클랜드 저택으로 도망 왔을 때 얼굴에 멍이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가정 폭력이 절대 없을 것 같은 미국이지만 실상은 아주 심하다. 특히나 남자가 돈이 많을 경우엔 누구도 손댈 수 없다. 어쩌면 이 일은 재키에게는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애클랜드 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는 아주 상냥하다.

“내가 아니라 사라나 클레어한테 협조를 구하는 게 좋지 않아? 에이먼이랑 블리스야 네 인생 네가 살라고 하겠지만, 두 사람은 도와주지 않을까?”

“두 사람이 나 대신 죽어주진 않을 거잖아. 그러니까 당분간 아버지 혼을 좀 빼달라고. 형이 친 사고에 비하면 난 양반이지. 형이 진하고 진짜 같이 살겠다고 하면 날 끌어안아주실 거야.”

“너, 그래서 돌아온 거야? 이 김에 치려고? 너 살고 우리 죽으라고?”

“응.”

쉽게 말해 클랜의 계획은 대넌이 블리스 때문에 정신없는 사이, 치고 빠지겠다는 의미였다. 순간 진은 그냥 자기가 먼저 이 자식을 한 대 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은근히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래, 좋다. 나랑 블리스가 대넌의 혼을 빼놓는다 치자. 그런데 그쪽에서는 널 반기겠냐? 블리스가 게이인데, 그 청교도 집안에서 이 집이랑 사돈을 맺으려고 하겠냐고. 그렇지 않아도 블리스한테 쌓인 게 많을  걸? 저번에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들겠다고 자금 모으는데, 블리스가 F진단 내려서 무산됐잖아.”

“형이 문제긴 하지. 하지만 재키가 임신했잖아. 그쪽은 빼도 박도 못해. 유산시키려고 하면 내가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낼 거야.”

“블리스가 대넌 무덤 파놓으니 넌 묻어주려고 왔구나. 조만간에 대넌, 병원에 실려 갈지도 모르겠다.”

“하하. 고생도 한 번에 하는 게 좋잖아. 아버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소식 듣는 순간 이때다 싶더라고. 그래서 서로 서로 좋자고 형 지원사격 해주러 온 거지. 형도 살고, 나도 살고, 재키도 살고. 재키도 기사 보더니 눈이 확 떠지던데? 일단 우리 아버지 설득은 쉽겠다고.”

순간 진은 저런 걸 자식이라고 둔 대넌이 진심으로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저런 자식들 때문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럼 그쪽은?”

“내가 맞으러 가야지. 양쪽에서 맞는 것보다는 한쪽에서 맞는 게 좋잖아.”

누구 부럽지 않게 성공한 사업과 외모와 지성 교양에 성격까지 좋은 자식들, 그리고 아름답고 헌신적인 부인까지. 대넌 애클랜드의 인생은 완벽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모두가 찬양하는 이상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아무래도 앞으로는 그다지 평탄치 않을 것 같다. 알콜 중독자나 마약중독자 하나 없이 청소년기를 무난하게 보내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그의 장성한 아들들이 이제 와 돌아가면서 속을 썩이고, 어쩌면 평생을 사귀어온 친구에게 절연 당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대넌에 대한 연민이 들기 시작했다.

자식들이 웬수다.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내가 뭐라고 하겠냐.”

“그러니까 아버지 좀 당분간 정신없게 만들어줘. 그리고 형한테 너무 그러지 마. 우리 형도 고생했어. 정 못 믿겠거든, 은행 금고에 숨겨둔 각서 보여 달라고 해봐. 아버지가 그거 찾으려고 한바탕 난리치신 것 같으니까.”

“각서? 무슨 각서?”

“형한테 물어봐. 난 노코멘트.”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아?”

“지원사격만 한다니까, 나는. 본 사격은 형이 해야지. 아버지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 김에 같이 사고 쳐서 허락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진도 어지간하면 우리 형 그만 봐줘.”

“봐주고 말고 할 게 없다니까. 네 형한테 화난 거 아냐. 그냥, 내가 복잡한 거야. 정신도 없고.”

이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하든가 말든가 하지, 라고 중얼거리던 진은 갑자기 울린 핸드폰 벨소리에 폴더를 열고 재빨리 답을 했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답이 없다. 혹시나 해 번호를 확인하니, 엘레나였다. 하루 종일 문자를 보냈더니 번호도 외워버렸다.

“엘리, 왜?”

「……왜 답 문자 없어요?」

“아, 지금 누구랑 얘기 좀 하느라. 왜?”

「내가 귀찮게 해서 화났어요?」

나 열 받으라고 문자 보낸 거 아니었냐? 라고 하려다 진은 무난하게 말을 돌렸다.

“좀 귀찮긴 했지만 화날 정도는 아니었어. 지금 애클랜드 저택에 와있거든. 클랜이 돌아와서 얘기 좀 하던 중이야.”

「그래요? 그럼 문자 더 보내도 돼요?」

듣던 중 무서운 말이었다. 백 통을 보내고 또 보내겠다니……. 물론 핸드폰 요금 값 걱정할 아가씨는 아니지만, 자신은 걱정된다. 그리고 솔직히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다.

“엘리, 너 지금 나랑 문자 친구 하자는 거냐?”

「누가 늙은 아저씨랑 문자 친구 한대요? 그냥…… 그냥…….」

“그래. 너 내 나이 반토막이지. 그런데 지금은 서로 문자 보내고 통화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잘 시간 아냐?”

벌써 11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엘레나는 잘 시간이다.

「잘 거예요, 이제.」

“그래. 그럼 자. 나도 좀 쉬어야겠다. 오늘 많이 지쳤어.”

「……알았어요. 저…… 나한테 화난 거 아니죠?」

슬슬 눈치를 살피는 듯한 음성에 진은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화 안 났어.”

「……다행이다. 답 문자 없어서 화내는 줄 알았는데.」

순간, 진은 이 아가씨가 자신을 열 받게 해 죽일 정도로 고난이도의 작전을 쓸 만한 뇌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 나쁜 아이는 아니다. 그냥 모자란 것뿐이다.

“그럼 자. 끊는다.”

「네.」

엘레나가 웬일로 얌전히 답을 하며 전화를 끊어주었다. 뭐랄까, 하루 사이에 진짜 더럽게 말 안 듣고 머리 나쁜 여동생이 하나 생긴 것 같은 기분이라 묘했다.

“누구야? 엘리라니?”

“아, 있어. 타조 양. 나 가서 잘게. 오늘 너무 피곤하다. 아침부터 놀라서 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래. 아, 나 도와줘야 돼? 그럼 나도 도울 테니.”

“난 솔직히 지금 네가 누굴 돕는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진이랑 형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나 막 방문을 열려던 진은 그 말에 클랜을 돌아봤다. 그리고는 클랜을 보며 싱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너나 잘하세요. 장담하건대, 브루스가 너 골프채로 팰 거야. 재키는 임산부니 저택에 숨겨두고 가. 그리고 한 가지 더하자면 당장 사교계에 소문 퍼트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 아저씨가 재키 얼굴 보면 당장에 두드려 팰 것 같아서 파리에 두고 왔어. 내가 먼저 허락받고 돌아오는 대로 빨리 결혼해서 우리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어. 그 집하고는 완전 다르잖아, 우리 집은.”

“그래, 행운을 빈다.”

“아, 성감별 했더니 아들이래. 블리스 짐 좀 덜어줬으니 도와줘.”

시답잖은 그 말에 진은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가 2층 복도 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절대 현실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던 클랜이 결혼을 하고, 결혼하기 위해 죽어도 입지 않겠다 선언한 양복을 입고, 게다가 그 결혼 상대가 그 어리던 재키라니. 역시 인생은 의외성의 총집합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넌도 이 사실을 안다고 같은 기분일 것이다. 얼마 전 잡지 인터뷰에 ‘아이들이 나의 가장 큰 재산’이라며 아이들이 곧 국력이니 여성들에게 출산을 권장하는 말을 했지만 아마 다음 인터뷰에는 ‘자식들은 평생 원수니, 절대 애 낳지 마시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상사태에도, 클랜은 아주 행복해보였다. 맞아 죽어도 좋다는 듯 행복한 그 얼굴을 보니,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지금 상태를 즐기면 행복해질까. 그냥 가는 대로 흘러가면 마음이 편해질까.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느니 그냥 내키는 대로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평생을 다른 사람들 눈치만 보며,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으니 한 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용기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의 소심함을 한탄하며 막 자신의 방으로 가 문을 열려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려댄다. 엘레나인가 해 번호를 보니 이번엔 노먼이었다.

“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던 진이 퉁명스레 전화를 받자 노먼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뭐 또 그렇게 화가 났어?」

“화가 난 게 아니라, 피곤해서 그래. 만사가 귀찮다.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 줄래? 아니, 날 잊어라.”

「지금 어디야?」

“방.”

「그럼 창문 내다 봐.」

“왜?”

「하여간 봐.」

스크림 가면이라도 쓰고 무단침입을 했나 해 진은 부루퉁한 얼굴로 창가로 다가섰다.

“보고 있어. 왜?”

「우리 저택 보이지?」

“응.”

맥캐인 저택은 애클랜드 저택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자 노먼이 “그럼 기다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뭔가 치적거리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야, 너 뭐야? 너희 집에 불내려는 거야?”

기숙사도 태워먹는 녀석이 집은 못 태워먹을 게 뭐냐 싶어 걱정스레 묻는 순간 갑자기 밤하늘 위로 색색의 불꽃이 터져나간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불꽃에 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마음에 들어?」

드디어 노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쉴 사이 없이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고요한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빛의 향연에 진은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노먼…….”

「왜? 감격했어?」

“……너, 이거 허가 받았어?”

「분위기 없는 놈. 그게 지금 할 소리냐?」

할 소리다. 노먼은 몰라도 진은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너희 저택이긴 해도 밤중에 불꽃 막 쏴도 되냐고? 허가 받아야 하잖아.”

당장 경찰이 달려올걸, 이라는 진의 말에 노먼이 웃고 만다.

「너무 너다워서 화도 안 난다. 까짓 거 유치장 신세 좀 지지, 뭐.」

“진짜 더럽게 할 일 없구나? 웬 불꽃이야?”

「말하는 거 하고는. 넌 진짜 감성 제로야. 그러니 글이 그 모양이지. 소설을 쓰라는데 기사를 쓰면 어떻게 해?」

“너를 대할 때는 감성보다는 법이 필요해. 갑자기 뭐야?”

「감동적인 이벤트 좀 해본 거야. 어때? 내가 좀 달라 보여?」

“아니. 너무 너다운데?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진의 딱 잘라지는 말에 전화기 저편의 노먼이 긴 한숨을 내쉰다.

「너 진짜…….」

“농담이야, 농담. 왜? 무슨 용건이야?”

「용건이 있어야만 전화를 해?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한 거야.」

“난 네 목소리 들으니 피로가 몰려온다. 나 좀 쉬자. 오늘 좀 많이 피곤하다.”

「왜? 블리스가 드디어 고백했냐?」

그 말에 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굳어졌다. 노먼은 마치 눈앞에서 진의 얼굴을 본 듯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것 같더라고.」

“무슨 소리야? 너, 뭐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너 같은 바보인 줄 알아? 그 자식 기숙사 시절부터 너만 보면 어떻게 잡아먹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어. 그래서 그 놈 성질 긁으려고 나도 일부러 짓궂게 굴긴 했지만.」

상상도 못한 그 말에 진은 놀란 얼굴로 창밖을 노려봤다. 클랜이 자꾸 10년 어쩌고 하던 것도 이상한데 노먼까지 이렇게 나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0년이라고 한다. 진짜 블리스가 10년이나 자신을 좋아했던 게 사실이라면…… 한 대 패줘야 한다. 아니, 열 대는 패줘야 한다. 솔직히 그게 사실이라면 기쁘다기보다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그 무수한 고뇌의 날들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 동안 아무 말 안 한 블리스는 또 뭐란 말인가.

“진짜, 걔가 날 대학 때부터 좋아했다고? 넌 알고 있었고?”

「모르면 바보지.」

“야! 그럼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말했으면 뭐? 너처럼 겁 많은 녀석이 너도 나도 서로 좋아하니 그냥 한 번 연애하자, 이러고 달려들었을까 봐? 아서라. 진 케이먼은 그렇게 못해. 블리스가 먼저 행동하기 전엔 넌 절대 어떤 리액션도 안 보였을 거야. 말해봐야 소용없는 걸 내가 뭐 하러 말을 해? 알았어도 넌 그냥 넘어갔을 거야. 포기하기만 더 힘들어졌겠지.」

분명 노먼의 말대로였다. 그 상황에서는 블리스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 노먼의 말대로 포기하기만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남을 통해 들으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야? 그럼 블리스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야? 나는 그렇다 쳐도 블리스가 그런 걸 속일 성격은 아니잖아.”

「너랑 비슷한 거지, 뭐. 괜히 시작했다 어설프게 피만 볼까 하는 거. 진심이 담긴 사랑은 너만 두려운 게 아냐. 평생을 걸 사랑에는 누구나 신중해질 수밖에.」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지금까지 입 꽉 닫고 블리스 따라다니면서 사진이나 찍어댄 거야?”

「사실은 좀 괘씸해서 그랬지. 마음은 너한테 있으면서 이 여자 저 여자 하도 만나고 다니길래 엿 먹어봐라, 이 기분?」

“네가 왜 괘씸해?”

「그냥 같잖은 질투 같은 거지. 그리고 블리스보다는 내가 훨씬 괜찮은 남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좀 이상한 말이었다. 아니, 많이 이상한 말이었다. 노먼이야 워낙에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폭탄 같은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왜 그렇게까지 블리스를 괴롭혔던 걸까.

“노먼…… 너 진짜 나 좋아해?”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묻자 노먼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가짠 줄 알았냐?」

“응.”

「거참……. 내 나름대로는 필사적인 고백이었는데 넌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거지?」

“밥 먹듯이 무성의하게 사랑한다고 하는 놈을 어떻게 믿어?”

「하긴. 그래서 진심인 내 고백에 대한 답은?」

“난 너랑 연애할 생각 없어.”

「너 너무 답이 빠른 거 아니냐?」

“그게 진심인 걸. 너랑은 지금 이 상태가 좋아.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 너한테는 조금도 연애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조금도?」

“응, 미안.”

「미안할 일은 아니지.」

“아니, 거절이 미안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몰라서 미안해. 진작 알았으면 확실히 거절하는 건데. 미안하다.”

혹시나 하면서도 사실은 노먼이 절대 진심일 리 없다고 단정 짓고 그를 이용할 생각까지 했던 터라,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 노먼의 고백을 믿는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블리스만은 못하지만 노먼도 만만치 않은 바람둥이였다. 신문에만 안 났을 뿐 노먼의 화려한 여성편력은 동창생을 통해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블리스가 가볍게 자주 여자를 바꾸는 편이라면, 노먼은 아주 가끔이지만 진짜 진지하게 오랫동안 여자들을 사귀었다. 노먼이 누군가를 사귈 때마다 이번에야 말로 결혼까지 갈 것 같다는 소문이 퍼졌었으니 그 만큼 감정이 깊었던 거다. 그런 놈이 가끔 나타나 사람 열 받게 하고 사라지니,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보면 블리스보다 더 질이 나쁘다.

그러니까 자신이 노먼의 고백을 믿지 못했던 건 절대 노먼의 잘못이었다.

「……재미없는 놈.」

“하여간 미안.”

「됐어. 그런 일로 사과 받는 거 기분 더러워. 아닌 건 아닌 거지. 그래도 난 너 포기 안 해.」

“……그냥 포기해주면 안 될까?”

「미안하다면서?」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나 좀 포기 해줘라, 제발……. 지금 블리스만으로도 너무 벅차다.”

「싫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끈덕지게 붙어 다닐래. 데이트나 하자. 언제 만날래?」

“내가 이 상황에서 너랑 어떻게 데이트를 해? 몰랐으면 몰라도.”

「그럼 그냥 영화 보자. 아니면, 식사를 하든가. 친구끼리 하는 식사라면 괜찮지? 너한테 상담할 것도 있고. 어때?」

참 껄끄럽고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로서의 부탁도 거절하긴 애매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친구라고 할 만한 인간은 블리스를 제외하곤 노먼뿐이었다. 

“그래. 주중에 보자.”

「그래. 잘 자.」

“응, 너도. 그리고 진짜 미안.”

「싱거운 놈.」

마지막으로 인사를 마친 노먼은 깔끔하게 먼저 통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본 진은 멍하니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마음도 요란한 하루였다.

“10년…….”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진은 새벽 4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한 채 침대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블리스가 자신을 10년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아주 복잡하다. 어쩌면 블리스와 자신의 시작은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그렇다. 

블리스가 10년 어쩌고 할 때는 자신과 함께 보낸 기억들을 통틀어 우정까지 사랑으로 치환하려 드는 태도에 열 받아 그럼 그때 말하지 그랬냐고 다그쳤는데, 클랜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탓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클랜의 말이 사실이라면…… 블리스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아니, 말 안 한 건 서로 마찬가지니 블리스만 탓할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어떻게 단념했는데, 자기가 어떤 마음으로 그 녀석을 포기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진은 그대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궁금해서 못 참겠어…….”

블리스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아침까지 꼴딱 샐 것 같다는 생각에 진은 망설임 없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긴 복도를 지나 빠른 걸음으로 반대쪽 끝에 있는 블리스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막 방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이었다.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비명 같은 대넌의 고함 소리에 진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그 소리에 쾅하고 문이 열리며 블리스 역시 서둘러 얇은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야?”

블리스의 등장과 동시에 3층 난간에서 에이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간에 기대 선 진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자 인형을 안고 나온 에이먼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무슨 일이야, 대넌 목소리 맞지?”

어지간해서는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는 대넌의 고함에 3층에 있던 클레어 역시 가운을 걸치며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려온다.

“진, 무슨 일이야?”

뛰어나온 건 거의 비슷한데 막간의 차이로 자신이 먼저 나왔다고 다들 자신에게 이유를 묻자 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모른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2층을 돌아보자 클랜이 안 보였다. 1층은 전부 홀과 응접실, 그리고 의료실과 트레이닝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서재와 대넌과 사라의 방, 그리고 반대쪽에는 블리스의 방과 미궁이라 불리는 클랜의 방이 있다. 그리고 3층에는 클레어와 에이먼의 방이 있다. 열여섯 살이 되자마자 각자의 방을 워하는 위치로 옮겨 마음대로 꾸몄는데, 에이먼은 성격 그대로 고지식한 앤틱풍으로-성인이 된 후로는 아끼는 인형 몇 개가 추가되었지만- 블리스의 방은 아주 심플하고 현대적인 느낌으로 꾸며놓았다. 클레어는 여자라 방에 들어가 본 적은 몇 번 없지만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방이었다. 그리고 클랜의 방은 말 그대로 미궁이었다. 블리스가 몇 번이나 “저 쓰레기장을 빨리 파내야 하는데. 내 방까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아.”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로 클랜의 방은 고서적과 이상한 폐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진이 농담으로 저기를 발굴하면 황금광이 나올 것 같아, 라고 할 정도였다. 아마 황금은 안 나와도 경매가가 몇 만 달라에 달하는 고서적들은 나올 것이다.

하여간 이 시끄러운 소리에도 클랜이 2층 복도로 안 나온 걸로 봐서 저 정체불명의 ‘이 녀석’은 아무래도 클랜인 듯했다.

“아…….”

진이 뭔가 감이 잡힌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자 옆에 있던 블리스가 진을 흘깃 본다.

“뭐야? 너, 뭐 알아?”

“……불독이 온 모양인데…….”

“불독? 브루스?”

이 집안에서 브루스의 코드명은 불독이었다. 진이 지어놓은 그 별명을 모든 형제들-특히 브루스를 싫어하는 블리스가-이 애용했다.

“브루스가 왜?”

“……클랜이 재키를 임신시켰거든.”

아무래도 애클랜드 저택이 새벽에 이렇게 떠들썩한 일로는 그 일밖에 없을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리자 3층에서 내려온 클레어와 에이먼이 동시에 소리친다.

“뭐야?”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그 합주 옆에서 블리스가 랩을 피처링한다.

“그 봐. 뭘 몰라? 알고 있었으면서.”

“……그 일일 줄 몰랐지.”

진이 괜히 민망해져 작게 중얼거리자 옆으로 다가선 에이먼이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브루스가 온 거면 저 정도로 끝날 리가 없어. 벌써 총성이 울렸을걸.”

그도 그렇다. 아마 그가 사슴 사냥에 애용하는 장총을 들고 와 정원에서부터 활극을 펼쳤을 것이다.

그 사이 어디선가 뛰어나온 클랜과 대넌이 홀 한 가운데에 서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다행히 브루스는 보이지 않았다. 진이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하는 사이 옆에 선 블리스가 냉정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브루스는 안 온 모양이네. 왔으면 한바탕 해주려고 했더니.”

“……뭐라고?”

“그렇게 자식 교육 자랑하더니 딸 교육 그 모양으로 시켰다고.”

브루스에게 쌓인 게 많은 블리스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 비상사태에도 블리스는 불독을 열 받게 할 고민만 하고 있었다. 클랜 같은 자식도 질색이지만 이런 자식도 별로 달갑지는 않다.

“활화산에 핵폭탄을 던져라.”

진이 어이없다는 듯 블리스를 보며 답해주자 옆에 있던 에이먼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선다.

“그래. 그러니까 다들 들어가서 자자.”

“에이먼, 안 말려도 돼?”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나의 집 귀한 딸을 임신시켰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쩐지 웬일로 조용히 귀향했다 했더니.”

에이먼이 아주 냉정한 평을 내리며 혀를 차더니 그대로 다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딘다. 그와 함께 아래층 홀을 빙빙 돌던 대넌이 위를 쳐다보곤 고함을 내지른다.

“너희들, 다들 꼼짝 말고 거기 있어!”

대넌의 노성에 난간에 선 세 사람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넌에게 묻는다.

“저흰 왜요?”

“너희들도 다 똑같아! 진, 너도 그대로 있어!”

갑자기 불똥이 자신한테 튀자 진은 화들짝 놀라 옆에 있던 블리스의 팔을 잡았다.

“전 왜요?”

“너도 똑같아! 이 놈의 자식들! 너희 넷, 당장 이리 내려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대넌은 버럭버럭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진은 나름 지은 죄가 있는지라 어깨를 늘어뜨리며 블리스의 팔을 더 세게 잡았지만 블리스와 에이먼, 그리고 클레어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린 채 그들의 형제와 아버지를 내려다봤다.

“우리를 클랜과 비교하다니……. 상당히 불쾌합니다.”

에이먼이 진짜 자존심 상한다는 듯 낮은 음성으로 내뱉자 대넌이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지른다.

“당장 안 내려와!?”

“네, 갑니다. 가요. 내려가자. 하여간, 클랜 저 녀석 한 번도 조용하게 넘어가질 않는다니까. 우리까지 이게 뭐야?”

에이먼이 큰형답게 앞장 서 걷자 그 뒤로 클레어와 블리스가 따른다. 진도 얼결에 블리스의 팔을 잡은 채 계단을 내려가며 에이먼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내가 보기엔, 대넌도 참고 참다 터진 것 같은데…….”

진의 중얼거림에 클레어가 기가 차다는 듯 돌아서 말한다.

“뭘 참아? 우리 집 같은 자식들이 어디 있다고? 클랜 빼고.”

“그건 아니지. 에이먼은 쪽팔리게 인형 수집에, 넌 결혼도 안 하고 버티고, 블리스는 게이라고 설치고. 대넌이 열 받을 만하지. 지금까지 참을 것도 대단해.”

진의 말에 애클랜드 가 삼남매가 동시에 너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로 진을 돌아본다. 그리고는 동시에 외친다.

“그건 우리 프라이버시야.”

그래, 잊고 있었다. 이 집 남매들이 사이가 좋았던 이유를. 다들 빼어나게 잘나고 개성도 강하고 특이하지만 한 가지만은 네쌍둥이처럼 꼭 닮은 남매들이었다. 프라이버시 존중, 이라는 테마에서만 말이다. 그래, 그래서 사이가 좋을 수 있었던 거다. 가끔 이 남매들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애매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절대로 터치하지 않았다.

“……그래, 너희 남매 맞다.”

“애초에, 이렇게 완벽한 아이들의 사소한 취향 정도는 참아줄 줄도 알아야지. 아버지는 너무 많은 걸 바란다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마약을 해, 알콜중독자이길 해? 아니면 사고를 쳐서 신문지상을 시끄럽게 만들기를 해? 재산을 말아먹기를 해? 우리 같은 자식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주 당당하게 우린 잘났어, 라고 외치는 클레어를 보자 진은 힘이 쭈욱 빠져버렸다.

“그래……. 누가 뭐라겠냐.”

잘난 사람들은 한 가지 단점쯤 가져도 된다는, 진짜 잘난 사람들의 철학을 고수하는 클레어의 태도에 진이 더는 할 말이 없어 옆에 있던 블리스에게 바싹 붙자 블리스가 이마를 툭 치며 진을 밀어낸다.

“붙지 마. 나, 화났어.”

“어? 왜?”

“……왜? 그걸 말이라고 해? 나 진짜 화났어.”

그 말에 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블리스의 팔을 세게 잡아끌었다.

“내가 화를 내야지, 네가 왜 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생각에 진이 블리스에게 항의하자, 블리스가 진을 휙 돌아보더니 인상을 팍 찌푸린다.

“너……. 좀 이따 얘기하자.”

“나도 화났거든?”

“나도 화났어!”

계단을 내려가던 두 사람이 서로 화났다며 목대에 피를 세우자 앞서 가던 에이먼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며 소리친다.

“시끄러워. 사랑싸움은 나중에 해.”

갑자기 튀어나온 ‘사랑싸움’이라는 말에 진이 방금 전보다 더 핏대를 세웠다.

“사랑싸움이라니? 그런 거 아냐!”

“아니면 말고. 새벽에 이게 뭐야?”

신새벽에 깬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듯 부스스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선 에이먼이 먼저 홀을 돌아 응접실로 들어가자 대넌의 고함소리에 깬 메이드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이쪽을 구경한다. 그들의 눈빛에 블리스가 손을 들더니 이 저택에서 30년 가까이 일한 에나에게 말을 건다.

“에나, 나 커피 좀. 약하게.”

블리스의 청에 앞서 가든 클레어도 한 마디 한다.

“어, 나도 따뜻한 우유 한 잔 부탁해.”

“나도, 우유.”

복도로 들어서던 에이먼 역시 한 마디 거들자 진도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며 에나에게 말을 건넸다.

“저도 커피 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블리스의 손이 탁하며 진의 뒤통수를 때렸다.

“넌, 안돼. 잠도 못 잔 얼굴이잖아. 에나, 따뜻한 우유 네 잔하고, 커피 세 잔. 그리고 시럽도 부탁해.”

“왜 우유야?”

“눈 팅팅 부어서 다니려고? 우유나 마셔.”

진짜 화가 나긴 한 건지 무뚝뚝한 투로 그렇게 말한 블리스가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서자, 진 역시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블리스를 따라 응접실 내부로 발을 디뎠다.

바로크 시대의 가구들을 경매에서 사들여 꾸며놓은 응접실은 진짜 베르사이유 궁전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고풍스럽고 호화로웠다. 들어올 때마다 “역시 돈이 좋아.”라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만큼 호화스러운 응접실에는 먼저 들어온 대넌이 이마를 짚은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사라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그리고 사라의 옆으로 클레어가 앉아 있었고, 사라의 맞은편 자리에는 에이먼이, 그리고 그 옆에는 블리스가 있었다. 그리고 클랜은 대넌에게서 가장 멀찌감치 떨어진 반대편 자리에 가 앉아 있다.

진은 잠시 어디에 앉아야 하나 망설이다 결국 블리스의 옆자리로 가 털썩 내려앉았다. 진까지 자리를 잡고 앉자 비로소 대넌이 고개를 들고는 앞에 앉은 사람들을 주욱 돌아본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다 빼고 딱 본론만 말을 한다.

“클랜이, 재키를 임신시켰다.”

하지만 이미 진을 통해 사정을 들은 에이먼, 블리스, 클레어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채 대넌을 바라보며 단순한 답을 내려주었다.

“결혼해야겠네요.”

“그게 문제가 아냐! 지금 파리에서 킴이 당장에 전화를 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던 말이다!”

다행히 아직 브루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파리에 여행을 간 딸이 돌아오지 않자, 궁금해 하던 킴이 직접 찾아갔다 소식을 듣고는 먼저 대넌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이번엔 재키와 킴이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임신은 한 거고, 했으면 결혼해야죠. 딱히 문제 될 거 없잖아요? 재키도 성인이고 클랜도 성인이니까요.”

블리스가 별것도 아닌 일로 시끄럽게 군다는 듯 말을 하자, 대넌의 눈이 순간 번쩍한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냐! 남의 집 귀한 아가씨를 임신시켰다고! 그것도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아이다! 그리고 재키는 나한테도 딸 같은 애야!”

“하여간, 근친상간은 아니잖아요.”

막 잔이 가득 찬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에나에게서 커피 잔을 받아든 블리스가 태연하게 중얼거리자 블리스보다 먼저 잔을 받아든 대넌이 그 잔을 블리스에게 집어던지려 잔을 치켜들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 행동에 머리를 다 묶은 사라가 대넌을 만류한다.

“여보, 손 내려요.”

대넌도 사라의 말에는 어쩔 수 없었던 듯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잔을 내려놓자 블리스가 아주 얄밉게 피식 웃는다. 옆에서 보던 진도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얼굴이었다.

“진, 우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나가 진에게 따뜻한 우유 잔을 건네자 블리스가 먼저 받아 진의 앞에 두곤 에나에게 시럽을 달라고 한다. 향이 강한 모카 시럽을 손에 든 블리스는 진의 잔에 시럽을 듬뿍 넣어주었다. 단 거라면 질색을 하는 진이 블리스를 보며 입을 부루퉁 내밀었다.

“나 단 거 싫어.”

“마셔. 좀 자야지.”

“……너무 많이 넣었는데.”

“그래도 마셔. 다크서클 생길라.”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손을 뻗어 진의 앞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겨우 겨우 화를 식히고 있던 대넌이 주먹을 꽉 쥐며 그의 둘째 아들을 향해 조용한 분노를 퍼부었다.

“블리스…….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설마요.”

“에나, 그만 나가봐. 그리고 오늘 일은…….”

대넌이 뭐라고 말을 하려하자 에나가 부드러운 투로 그에게 말을 건다.

“입단속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인사를 마친 에나가 다시 트레이를 끌고 사라지자, 응접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대넌은 몇 번인가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클랜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결혼한다니까요. 일도 시작할 거고요. 그러니까, 에반 저 주세요.”

“에반이 문제가 아니잖아! 브루스가 이 일을 알면 당장에 전투기를 몰고 우리 저택을 폭격할 거야! 아니 이미 오고 있을지도 몰라!”

대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에 블리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간단히 그 고민을 정리해준다.

“여기가 중동인 줄 아세요? 무슨 명예 살인도 아니고. 적당히 하세요, 아버지. 정 마음에 걸리시면 러시아에 연락해 스페츠나츠(Spetsnaz) 베타 부대를 부르시던가요. 정원에 텐트 치고 주둔시키면 되겠네요."

구 소련 KGB와의 합동작전으로 유명한 현 알파 부대의 전신인 스페츠나츠를 부르자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그들에게 할 청구 금액을 계산해봤다. 스페츠나츠는 현재 알파 부대로 불리지만 알파 부대는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고 그 뒤에 숨어 활동하는 베타 부대가 존재한다. 그 베타 부대의 잔악함은 감히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현재 가장 강력하다 칭할만한 이집트의 777부대가 단순히 인해전술로 죽고 터트리고 하는 막가파식 군대라면 스페츠나츠는 개인 한 명 한 명이 초일류급의 실력을 자랑하는, 인간 살상무기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존재에 대해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들의 활동 내역은 분명 존재한다. 구 소련 시절, 이란의 테러리스트들이 인질극을 벌이자, 스페츠나츠가 출동해 KGB의 정보력을 동원해 테러리스트들의 가족을 찾아 가족들의 사지를 잘라 인질범들에게 배달 보낸 뒤 인질을 풀어줄 때까지 하나씩 자르겠다 협박한 건 지금도 유명한 일화였다. 그러고 보면 그 인질범들 더럽게 재수도 없다. 역사상 테러범들이 전 세계인의 동정을 받은 건 딱 그 사건뿐일 것이다.

그런 스페츠나츠가 저택 정원에 주둔한다면 아무리 불독이라도 어쩔 수 없을 거다.

“한 달에 천만 달라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계산을 마친 진이 슬쩍 블리스를 찌르며 그들의 용역비용을 알려주자 대넌이 다시 주먹을 꽉 쥔다.

“지금 그거 계산할 때야?”

대넌이 다시 흥분할 기세가 보이자 우유 잔을 든 에이먼이 느긋한 투로 말한다.

“이미 임신한 거 낙태를 할 수도 없고, 결국 결혼밖에 수가 없잖아요. 시키실 거면 여러 말 말고 그냥 시키세요.”

“시키는 건 시키는 거고, 브루스는 어쩔 거냔 말이냐?”

브루스 레너드라면 아마 길길이 날뛰며 불을 내뿜을 게 뻔한지라 그의 오랜 친구인 대넌도 미치겠는 모양이었다. 진은 그런 대넌을 진심으로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친자식들은 냉정했다. 특히 블리스가 가장 냉정했다.

“어쩌긴요. 날뛰다 말겠죠. 여차하면 집 앞에 「미친 불독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시든가.”

“뭐라고?”

“……브루스 출입 금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희들, 다 필요 없어! 다들 나가! 당장 나가! 사라, 당장 잭에게 연락해서 유언장 다시 쓴다고 해! 너희들 전부 내 유언장에 이름도 못 올릴 줄 알아!”

대넌은 진짜 화가 났는지 최후의 수단을 썼다. 그가 ‘유언장’을 갖고 난리를 치는 건 이게 처음인지라 진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옆에 있던 블리스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그러시든가.”

“뭐라고!”

“아버지 재산이니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에이먼 역시 초연했다. 하긴 이미 신탁으로 받은 재산도 꽤 되고, 물려받을 건 대부분 물려받았다. 그래봐야 실제 대넌의 재산의 20% 가량만 증여받은 채였지만, 다들 능력이 있다보니 아버지의 재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클레어만 빼고 말이다.

“전 왜요? 말도 안 돼요, 아버지! 애클랜드 사는 제 거잖아요!”

“누가 네 거래? 내가 그렇게 애원하는데도 결혼도 안 하는 자식들 따위 필요 없어!”

“그건 말이 안 되죠! 결혼은 우리 프라이버시에요! 제가 왜 벌써 결혼을 해야 하냐고요? 위로 똥차가 세 대나 있는데!”

순식간에 ‘똥차’가 된 에이먼과 블리스가 순간 잡아 죽일 듯한 얼굴로 클레어를 노려보자 클레어 역시 화가 난 듯 금발을 뒤로 넘기며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말썽인 건 오빠들이지, 전 아니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제가 아버지 속 썩여 드린 적 있어요? 왜 저만 먼저 결혼해야 하냐고요!”

“내가 무슨 말썽을 부려?”

에이먼이 클레어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대꾸하자 클레어가 그의 약점을 사정없이 쥐어뜯기 시작했다.

“막말로 오빠가 결혼 못하는 건 그 취미 탓이잖아! 난 그딴 수치스러운 취미 없다고!”

“너, 남의 취향을 수치스럽다고? 너, 지금 내 자존심을 건드는 거냐?”

“남한테 떳떳한 취향은 아니잖아? 그렇게 떳떳하면 저택으로 컬렉션 옮겨가고 결혼도 해! 왜 못해?”

“그래. 내가 못할 것 같아? 좋아, 한다! 너 후회하지 마!”

“해봐! 누가 눈 하나 깜짝 할 줄 알아? 하여간, 아버지 전 아니에요. 전 말썽부린 적 없어요. 전 진짜 억울하다고요! 에이먼은 변태취향이고 블리스는 게이지만 전 떳떳하다고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아요! 애클랜드 부동산은 제 거예요!”

강한 어조로 후계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는 클레어의 말에 지금까지 죄 짓고도 당당하게 앉아있던 클랜이 딱 잘라 말한다.

“아냐, 내 거야.”

“뭐?”

“아버지, 애클랜드 제게 주세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뭐야?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거야? 블리스 오빠 떨쳐냈다고 좋아했더니, 클랜 오빠는 왜 굴러들어와? 지금까지 나 몰라라 놀다 이제 와서 애클랜드 사를 달라고? 뭐 이런 파렴치한이 다 있어?”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클레어도 슬슬 자기 성질 기어 나오는 걸 제어 못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난장이 된 응접실에서 진은 느긋하게 달디 단 우유를 한 모금 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아예 블리스는 애클랜드 가의 상속자 명단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진이 남은 우유를 한 번에 마시려 쏟아 부으려는데 자식들의 상속 다툼에 보다 못한 대넌이 소리를 내지른다.

“다들 그만두지 못해? 누가 너희들한테 물려준대?”

“그럼 누굴 물려주시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디 아버지가 멀쩡히 눈 뜨고 살아있는데 재산 싸움을 해?”

날더러 죽으라고 관 짜놓고 비는 거냐고 대넌이 고함을 내지르자 블리스가 이 모든 상황의 출발점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유언장 얘기 먼저 꺼내신 건 아버지세요.”

진짜 나라도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에 진은 블리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곤 작게 속삭였다.

“너, 그러다 진짜 맞는다?”

“괜찮아. 아버지는 자식들한테는 손 안 대. 유언장에서 제외는 하시겠지만.”

태연자약한 그 답은 당연히 대넌의 귀에도 들어갔다. 막 잔을 들려던 대넌은 결국 들고 있던 잔을 차받침 위로 내동댕이쳤다.

“블리스, 당장 나가! 네 놈이 제일 나빠!”

“제가 왜요?”

“너 때문이야, 이게 모두! 네 놈은 T&G사의 놀이공원 부지까지 빼앗아 가고 나한테 사기를 치고! 네가 문제야, 항상!”

꽤 오래된 그 사건이 아주 한이 된 듯 대넌은 울화가 치민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니까, 6년 전 쯤 T&G사가 거대한 강 근처에 대규모 놀이공원을 짓겠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물론, 주식시장에도 빠지지 않은 따끈따끈한 소식을 먼저 접한 대넌은 그들이 확보하려는 부지를 대량 매입했고, 막 그쪽에서 부동산을 팔아 달라 요청하자 가격을 올리려 은근히 한 발 빼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때쯤 그 하류지역에 땅을 사둔 블리스는 마침 대넌이 산 땅 근처가 야생동물 보호구역과 인접하다는 점을 이용해 클랜과 짜고 환경운동가들과 야성동물 보호협회들을 우르르 불러 들여 농성을 시작했고, T&G사는 마침 환경 운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터라 재빨리 대넌에게 한 제의를 취소하고 그대로 그보다 하류에 있는 블리스의 땅을 매입하겠다 연락을 해왔다. 딱히 손해를 본 건 없지만, 당신 투자금의 100배가량의 돈을 회수할 수 있었던 대넌은 그 사건으로 한 동안 블리스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리고 블리스와 손잡고 희희낙락하며 인터뷰를 나온 기자에게 “아버지는 경제적 이익보다 환경을 우선시하시는 분입니다. 야생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매입한 이 땅을 절대 T&G사에 팔지 않으실 겁니다.”라는 말을 지껄인 클랜은 그대로 집에서 쫓겨났다.

진짜 무자식이 상팔자다.

“아버지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제가 빼앗은 건 아니죠. 그들이 제 땅을 선택한 겁니다.”

“네 녀석이 클랜과 짜고 사기를 친 거잖아!”

“클랜은 자기의 신념을 그대로 실천한 것뿐입니다. 아버지도 늘 그러셨잖아요. 사업을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건 이익에 눈이 멀지 않도록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의지라고요. 지금도 이렇게 부자인데 거기서 더 욕심내는 건 안 되죠.”

“그러는 넌?”

“유언장에 제 이름을 안 올리실 것 같으니 전 좀 벌어야죠.”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저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블리스의 친절한 답에 겨우 진정된 대넌이 다시 고함을 내쳤다.

“당장 나가! 다들 나가! 내 저택에서 싸그리 사라져!”

저러다 대넌이 뇌졸중이라고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넌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연민도 열 받은 대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다들 귀가 막혔어? 다들 나가라니까!”

그답지 않은 화에 애클랜드 사 남매를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계속해서 침묵하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앉아. 다들 모였으니 지금 말하죠.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대넌.”

차분하고 조용한 그녀의 음성에 자리에서 일어섰던 이들이 다시 조용히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대넌이 골치 아프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사라에게 애원한다.

“사라, 당신은 좀 나중에 해주면 안 될까?”

“아뇨.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에 정리하죠.”

‘정리’라는 말에 다들 방금 전과는 달리 긴장하는 얼굴로 사라를 바라봤다. 사라는 늘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었다. 순종적이라기보다는 애초에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 탓에 그녀가 한 번 내뱉는 말은 대넌이 백 번 하는 잔소리보다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다들 바싹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자 대넌이 심호흡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며 묻는다.

“도대체 뭔데?”

“우리, 이혼해요.”

짤막한 그 말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모두가 미동도 없이 움직임을 멈춘 채 몇 초, 드디어 블리스가 그 침묵을 깼다.

“진, 브렛 불러.”

***

새벽 5시에 애클랜드 저택으로 달려온 브렛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대넌을 1층 가장 안쪽에 있는 의료실로 옮겨 이것저것 상태를 확인한 뒤 방을 나와 잠옷 차림 채로 대기 중인 애클랜드 사람들을 돌아봤다.

“너무 놀라 잠시 혼절한 거야. 혈압도 이젠 정상이고, 몸 상태도 괜찮아. 일주일 전에 정기검진을 받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브렛의 진단에 전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걱정하던 일이 괜찮다 확인되자 첫째인 에이먼이 먼저 나서 브렛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 이른 시간에 왕진을 부탁드려서.”

“하하, 대넌하고 나야 오래된 친구 아니냐.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대넌이 기절을 다 하고.”

브렛의 순수한 질문에 에이먼이 이 자리에 없는 사라를 대신해 태연하게 답해준다.

“사라가 이혼 선언을 했거든요.”

“뭐?”

“갑자기 그랬어요. 저희도 놀랐어요.”

“……별일이네.”

“그러니까요.”

남의 결혼이 파탄 지경이 이르렀는데도 느긋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집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도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진, 아는 거 있지?”

대넌의 혈압을 단숨에 상승시킨 문제의 클랜이 슬쩍 진에게 이유를 묻는다. 이 집 인간들은 진짜 비밀을 좋아하고, 그 비밀을 자신에게 터놓는 것도 무지 좋아하고, 또 남의 비밀을 묻는 것도 너무 좋아한다.

“나도 몰라. 진짜 놀랐어.”

“진짜 몰라?”

이번엔 클레어가 묻는다.

“진짜 모른다니까. 나라고 이 집 일이라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건 아냐.”

“다 알고 있잖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는 듯한 애클랜드가의 원수 같은 사 남매의 얼굴에 진은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물어볼게. 물어볼 테니까, 대넌 옆에 있어줘.”

또 다시 총대를 짊어지고 돌아선 진이 사라가 있는 응접실을 향해 걸어가자, 클랜이 말을 보탠다.

“빨리 물어봐줘. 아버지가 혹시 바람이라도 피운 거면 우리가 가만 안 둘 테니 사실대로 전부 말해도 된다고 해.”

“알았어.”

“아, 사라가 바람 피운 거라도 우린 절대 이해한다고 해! 괜찮으니까, 그냥 왜인지만 말해달라고 해.”

꼭 자기 같은 말만 골라하는 클랜을 돌아본 진은 인상을 확 쓰며 그에게 받아쳤다.

“뒷말은 빼지 그랬냐.”

“가능성의 여지를 두는 거지.”

더 말할 기운도 없어 진은 터벅터벅 걸어 응접실로 가 노크를 했다. 두 번 정도 토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라가 답한다.

“들어와, 진.”

자신의 이름까지 정확히 부른 사라의 음성에 진은 사라가 이제 투시도 하나 하며 문을 밀어 열고 다시 조용해진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잔들은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진 채였다. 그리고 사라는 우유가 가득 잠긴 잔을 들고 있었다.

“네가 올 줄 알았어.”

“그렇지? 앉아도 돼?”

“응.”

사라의 부드러운 태도에 진은 사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조심스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화장을 하지 않아서인지 사라는 유독 창백해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식사를 거의 못하는 것 같았다.

“사라, 왜 이혼하려는 거야?”

“……글쎄.”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되잖아.”

진이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걸자, 사라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래도 되겠지. 나한테는 네가 아들이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나한테도 엄마는 사라뿐이야.”

“……진, 항상 난 진짜 네가 내 아들 같았어. 진심이야, 이건.”

“알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 뒤를 봐줬지.”

그 말에 사라가 슬픈 얼굴로 미소 짓는다. 사라가 자신을 애클랜드 가로 데려와 몇 번이나 정식 입양을 하기 위해 애썼다는 건 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대넌이 반대해 결국 자신은 애클랜드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라가 늘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넌은 진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진의 능력과 쾌활한 성품을 아주 좋아했고, 진을 위해 무던히 애써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진에게 애클랜드라는 성을 주는 건 꺼려했다. 다름 아닌, 진이 동양인인 탓이었다. 대넌은 딱히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클랜드 가문에 동양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환영할 정도의 박애주의자도 아니었다. 진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대넌의 결정에 화를 내거나 섭섭해 하지 않았다. 

“사라,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지?”

“하하, 아냐. 설마.”

“나랑 블리스 문제로 대넌하고 싸운 거 아냐?”

“아냐, 그런 거. 그 문제는 깨끗해. 블리스가 해결해둔 모양이니까.”

“블리스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블리스랑 약속한 게 있으니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네 탓이 아냐.”

“하지만…….”

“진,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 이혼을 원하는 건 내가 원하기 때문이지, 너 때문이 아냐. 절대 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냐.”

사라가 애달픈 얼굴로 웃으며 진을 바라본다.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자신의 탓을 하는 진이 그녀는 안쓰러웠다. 꼭 품에 끼고 보살펴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진을 안타까워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기에 진도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자기 비하와 혐오는 어느 정도 벗어난 채였다. 물론, 가끔 정신을 놓으면 그대로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굴하지는 않다.

“그럼 왜 갑자기 그러는데?”

진의 진지한 질문에 사라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작게 답한다.

“나, 임신했어.”

짤막한 그 답에 진은 그제야 “아…….”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의 나이가 있어 걱정은 되지만 임신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진이 차마 축하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사라와 대넌의 혼전 계약서에 대해 알고 있는 탓이었다.

사라와 재혼 전에 이미 네 명의 아이를 둔 대넌은 사라에게 아이는 낳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당신은 사랑하지만 애클랜드 가에 핏줄에 동양인 피가 섞이는 건 싫다고도 말했다. 사라는 진심으로 대넌을 사랑했기에 그 조건을 수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녀를 닮은, 그녀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혼하자고 한 거야? 대넌은 알아?”

“몰라. 구질구질하게 말할 필요 없으니까. 이혼하고 아이는 내가 낳아 키울 거야. 위자료는 혼전 계약서대로 오천만 달라에서 정리할 거고.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 중이야.”

“사라……. 그냥 그 전에 대넌한테 말하지 그래?”

“싫어.”

“그건 벌써 17년 전 일이잖아. 대넌도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을 거야.”

“얼마 전에도 지금이라도 널 양자로 들이면 어떨까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 그 사람은 여전해. 쓸데없는 데에 희망은 걸고 싶지 않아. 그리고, 만약 유산하라는 말을 들으면 진짜 비참해질 것 같아.”

그 말에 진은 더 이상 그녀에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라의 기분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의 말을 듣는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자신이 차마 블리스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던 것처럼, 그러다 포기한 것처럼, 사라도 그냥 조용히 침묵한 채 포기하려 하는 거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가 무서워서, 그리고 거절당한 순간이 너무 비참하고 아플 것 같아서, 무조건 도망치려는 거다.

말 한 마디 꺼낼 용기도 낼 수 없는 그 기분을 잘 알기에 진은 손을 뻗어 사라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속삭인다.

“방에서 쉬어. 좀 자야지. 임산부잖아.”

“그래. 그래야겠다.”

“애 꼭 낳아야 돼, 사라. 꼭 낳아. 아주 예쁘고 착한 아이가 태어날 거야.”

“그래.”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진짜 형 노릇해줄게. 이젠 내가 당신과 아이를 보호해줄게.”

진의 진심어린 말에 사라가 겨우 해맑게 웃는다.

“고마워. 너라도 있어줘서. 네가 옆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고 기쁜지 몰라.”

“나도 늘 그랬어.”

그렇게 말하며 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라가 그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이제는 자신보다도 훌쩍 커버린 진을 바라보며 사라는 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부축하며 진은 천천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대넌 자서전에 오늘이 인생 최악의 날로 기록될 듯싶다.

***

“무슨 일이야?”

“사라가 뭐래?”

사라를 방에 데려다주고 나오자마자 벌 떼처럼 달려드는 애클랜드 형제를 본 진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입술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다들 입을 꾹 다문다.

“3층으로 가자.”

대넌의 옆에 클레어를 남겨두고 우르르 몰려든 형제들을 이끈 진은 먼저 계단으로 올라서며 그들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일단 사정을 아는 건 진뿐인 터라 다들 조용히 진의 뒤를 졸졸졸 따라 3층에 있는 에이먼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해안 쪽으로 난 테라스로 나간 세 사람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사이 에이먼은 방안에 있는 바에서 생수 병을 꺼내들고 다가왔다.

“그래서 뭐야? 누가 바람 피운 거야?”

이미 이혼의 이유를 바람이라고 결정내린 클랜이 조급한 듯 묻자 에이먼이 클랜을 한 번 노려본다. 저걸 어디다 써먹냐, 하는 감정이 그대로 담긴 에이먼의 시선에도 클랜은 꿈쩍하지 않았다.

“뭐야, 진? 빨리 말해.”

“……임신했대.”

“응?”

“사라가 임신했대. 3개월 정도 됐나 봐.”

진의 딸 잘라지는 설명에 클랜이 심각한 얼굴로 되묻는다.

“누구 애야?”

“……너 그냥 여기서 떨어질래? 내가 밀어줄까? 불독에게 물려 죽느니 내가 깨끗하게 죽여주마.”

원한다면 기꺼이 집어던져줄 수도 있다는 진의 호의에 클랜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버지 아이면 왜 이혼을 해? 축하할 일이지.”

“그게,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그러니까…….”

그렇게 진은 대넌과 사라 사이에 오간 혼전 계약서부터 자신의 입양거부 사건까지, 천천히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아니라고 봐.”

진의 설명이 끝난 뒤, 블리스가 딱 잘라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에이먼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아니라고 봐.”

“그건 내가 봐도 아냐.”

에이먼의 뒤를 이은 클랜까지, 세 형제의 부정에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버지는 사라의 아이라면 좋아하실 거야. 특히나, 지금 같은 때라면 유언장에서 우리 이름 싹 지우고 그 애 이름 하나 적어 넣으실걸.”

가장 현실적이고 가능성 있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먼저 증여한 재산 뺏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블리스도 그 말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그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대넌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안 돼.”

“왜? 낳지 말라고 할까 봐?”

“아니, 지금 아버지 상태라면 열이라도 낳아달라고 할걸.”

“그럼 왜?”

“이렇게 큰 건을 그냥 놓칠 수는 없지.”

“응?”

“아버지의 약점을 잡았는데 그냥 놓칠 수는 없잖아. 사라가 좀 더 버텨주면 좋겠는데…….”

“어이, 너 뭐야? 이걸 이용하겠다는 거야?”

진이 경악한 얼굴로 블리스에게 묻자 옆에 있던 클랜 역시 블리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중얼거린다.

“블리스 말이 맞아. 아버지한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어.”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나 싶어, 진이 그나마 상식적인 에이먼을 바라보며 구원요청을 하자 에이먼은 고개를 내젓는다.

“……그건 부모님 일이야. 아무리 자식들이라고 해도 그런 프라이버시에 간섭하는 건 안 되지.”

“옆집 아저씨랑 아줌마가 아니라, 너희 부모님이 이혼하신다는 거야! 그런데 남의 프라이버시라고?”

너무나 태연한 세 형제의 반응에 진이 열변을 토하자 블리스가 별걸 다 갖고 시끄럽게 군다는 듯 말을 돌린다.

“어차피 이혼 안 하실걸, 뭐. 아버지가 그렇게 쉽사리 이혼에 합의해줄 사람도 아니고. 아마, 뉴욕에 있는 로우펌 전체를 사서라도 이혼 못하게 할걸.”

“그래도 미리 막아야지. 쉽게 갈 수 있는데 왜 그걸 꽈?”

“진,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너 진짜…….”

“사라한테는 걱정 푹 놓고 있으라고 해. 내가 장담하건대 아버지는 사라가 임신했다면 당장에 성이라고 하나 지어주실 분이야. 성이 뭐야? 나라도 하나 사주실 걸.”

“하지만…….”

“아냐, 그 영감도 늙었어.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야. 걱정할 것 없어. 애클랜드의 실세는 이제 우리야.”

자신의 아버지를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칭하는 블리스의 지독함에 진은 넌덜머리가 나는 기분이었다. 블리스가 간혹 대넌에게 이제 늙었으니 은퇴하라고 할 때마다 나름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블리스는 진짜 대넌의 정년이 다 했다고 결정내린 채였다.

“진짜 너희 같은 자식 낳을까 봐 결혼하기 싫어진다.”

“어차피 넌 못해.”

“내가 왜 못해?”

“휴전. 너랑 내 일은 조금 뒤에 얘기하자. 사라랑 아버지 일 정리될 때까지만 휴전.”

“우리가 언제 전쟁했어?”

“사랑은 원래 전쟁이야.”

“뭐……?”

진이 헛소리 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블리스가 강제로 진의 입을 틀어막고는 이 모든 비극의 원점이었던 클랜의 결혼 문제를 재확인한다.

“그나저나 넌 어쩔 셈이야? 슬슬 브루스도 알게 될 것 같은데.”

“몇 대 맞아야지, 뭐.”

클랜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미 각오했다는 듯 말하자 옆에 있던 에이먼이 고개를 내젓는다.

“몇 대 맞는 걸로 끝날까? 내가 보기엔 당장 탱크 몰고 널 깔아뭉갤 것 같은데. 알잖아? 돈 많고 권력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속이 더러운지. 재키 임신 사실을 알면 마피아에 몰래 의뢰해 네 목을 따버리라고 할 수도 있어.”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급한 대로 네비이씰이라고 부를까?”

점점 허황된 얘기로 빠지는 대화에 진은 그냥 차라리 SAS를 불러라, 라고 하며 이마를 짚고 돌아서 앉았다. 하지만 이 형제들은 진지했다.

“네이비씰은 안 돼. 돈으로 미국 군대를 불렀다간 우리가 언론으로부터 공격받아.”

“그럼?”

“차라리 777 부대를 불러. 접근 즉시 다 부숴버리게. 프랑스 외인부대도 있고. 앞 정원과 뒤의 해안가 양쪽으로 주둔시키면 될 것 같은데?”

놔두니 진짜 안드로메다로 가는 세 형제의 대화에 진이 참지 못하고 다시 끼어들고 말았다.

“야, 제발 현실 가능성 있는 말을 해라.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오늘 당장 달려와 주겠냐? 자기들 얼굴에 먹칠하는 건데?”

“돈이면 다 할 걸?”

“진짜 부르려고?”

“못 부를 것도 없지. 연예인들도 하는 짓을 우리가 왜 못해?”

얼마 전 출산 후 아이가 유괴당할까 저택 정원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예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기가 차다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게 부러웠냐?”

“못할 건 없다는 거지.”

어깨를 으쓱하는 블리스의 반응에 진이 시선을 돌리자 의자에 기대앉은 에이먼이 클랜에게 아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그보다, 여차하면 블리스랑 같이 만나. 블리스가 네 장인어른 뇌혈관 터트려서 병원으로 실려 보내줄 테니.”

“……형, 내 결혼을 아예 말아먹고 싶은 거야?”

“그게 네가 제일 덜 맞는 일이야.”

에이먼의 차가운 답에 클랜이 한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하지만 블리스는 클랜의 고뇌 따윈 상관없다는 듯 어느새 의자에 기대 잠든 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길로 진을 바라보며 에이먼에게 묻는다.

“형, 잠 다 잤지?”

“응? 아, 뭐. 잠은 다 깼어.”

“그럼, 방 좀 비워줄래? 진이 좀 자야겠는데?”

그 말에 잠든 진을 돌아본 에이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의 동생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바를 물었다.

“그나저나, 너도 문제는 문제다. 진짜야, 그 기사?”

“아마.”

“이건 또 무슨 수작인데?”

“수작 아냐.”

“그럼?”

“나도 종착역에 닿았거든.”

“……뭐,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그렇게 말하며 에이먼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나이트가운의 허리띠를 풀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 그를 따라 클랜 역시 “새벽부터 뭔 일이래, 이게.”라고 중얼거리며 테라스를 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의자에 기대 세상모르고 자는 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블리스는 고개를 내려 진의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이번에는 이마에 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를 드러내 살짝 살결을 물어뜯으며 세게 빨아들인다.

낯선 감촉에 진이 귀찮다는 듯 밀어내자 입술을 뗀 블리스는 진의 목덜미에 남은 흔적에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마킹은 시간이 날 때마다, 라는 게 블리스의 모토였다.

***

“이게 뭐야?”

에이먼의 방에서 한참을 자다 겨우 눈을 뜬 진은 샤워 중 목덜미에 남은 키스마크에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어제는 그래도 몸 안쪽에 남겨 괜찮았지만, 오늘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목덜미였다. 셔츠로도 가리기 힘든 그 위치에 진은 “죽여버리겠어!”라고 소리치며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샤워룸을 나와 일단 대강 옷을 갖춰 입은 뒤 당장에 블리스의 방으로 뛰어간 진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블리스 애클랜드!”

2층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진이 달려들자 드레스룸과 이어진 거울 앞에 선 채 은색의 정장을 다 갖춰 입고 커프스를 하던 블리스가 싱긋 웃으며 진을 반긴다.

“너무 애절하게 부르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웃기네! 너, 이거 뭐야? 네가 이랬지?”

진이 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가리키며 묻자 블리스가 아주 태연하게 답한다.

“응.”

“죽고 싶냐? 이 여름에 나더러 어쩌라고 이런 걸 남겨?”

“마킹.”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거울 옆에 놓인 콘솔에서 향수병을 들어 진에게 뿌린다. 치익- 하며 익숙한 Bliss Bless Kiss의 진한 향이 확 돌자 진은 진저리를 쳤다.

“이건 또 뭐야?”

“마킹이라니까.”

“네 향수를 왜 나한테 뿌려?”

오로지 블리스를 위해 만든, 블리스만이 쓸 수 있는 시원하면서도 향기로운 이 지상 위에 단 하나뿐인 향수 냄새에 진이 손을 휙휙 내젓자 블리스가 눈꼬리를 휘며 눈웃음을 친다.

“내 냄새니까 너한테 배야지. Bliss Bless Kiss.”

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향수 이름을 번복한 블리스는 한 걸음 내딛어 진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 행동에 진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며 방어 자세를 취한다.

“나, 너한테 화났어!”

“나도 화났어. 하지만 지금은 정신없으니 일단 휴전. 마침 잘 일어났어. 그렇지 않아도 깨우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어서 준비해.”

“왜?”

“나랑 갈 데가 있어.”

“어딜 가는데?”

“불독 병원에 실려 보내러.”

“너, 클랜 혼사에 아주 제대로 깽판을 치려고 그러냐?”

“아니, 도와주려는 거야. 형으로서 먼저 나서서 브루스를 병원에 보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어줘야지.”

“넌, 이게 재미있냐?”

“뭐, 재미없을 것도 없지.”

그 답에 진은 확신했다. 블리스는 단지, 이 김에 브루스를 아주 제대로 보내고 싶어 하는 것뿐이다, 라고. 사실 브루스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사실은 아주 싫어하지만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클랜은 동의했어?”

“응.”

“너희 형제는 진짜 이상해…….”

“뭘 새삼.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어서 준비해.”

“나도 꼭 가야 돼?”

“응.”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블리스가 진짜 사고치기 전에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진은 돌아서 다시 블리스의 방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진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껌뻑거렸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던 건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중에 생각나겠지, 뭐.”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 기억이 아슬아슬한 채였다. 일단 외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진은 바지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메시지 음에 흠칫 놀라 멈춰 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 보자, 역시나 엘레나였다.

순간 진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너, 적당히 해. 대넌에 이어서 브루스까지 기절하게 하지 말고.”

애클랜드 저택이 있는 뉴햄튼을 벗어나는 차 안에서 진이 미리 블리스에게 주의를 주자 운전대를 잡은 블리스가 뭘 그따위 일을 걱정하냐는 듯 받아친다.

“걱정 마. 클랜과 재키 결혼 문제만 깔끔하게 매듭지을 테니까.”

“어떻게?”

“어떻게는? 그냥 밀어붙이는 거지.”

블리스와 브루스라……. 사실 아주 걱정된다. 따라가면서도 사실 그냥 중간에 새버릴까 할 정도로 아주 걱정된다.

“블리스, 레스토랑 어디로 예약했어?”

“왜?”

“인도 음식점으로 예약하지. 브루스가 스테이크 썰다가 칼 집어던질라.”

“그러고 보니 그렇군. 인도음식점이면 기껏해야 그릇이나 내던질 텐데.”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장소 옮기면 안 될까?”

“안 돼. 시간이 빡빡해.”

“……분위기 이상해지면 나 먼저 뜬다?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걱정 마. 혈압 오르게 해서 정신없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사교계에서 ‘브루스 잡는 블리스’라는 말이 돌 정도로 브루스 약 올리는 데에는 통달한 블리스가 직접 하는 말이니 진은 어쩔 수 없다는 팔짱을 끼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소리친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걱정 마. 만나서 간단히 식사하면서 얘기 끝낼 거니까. 그리고 나서 데이트 하자.”

“휴전이라며?”

“브루스 만나고 정리되면 전쟁 재개해야지.”

“사라는?”

“그쪽은 좀 시간을 두고 볼 거야. 사라한테 안심하라고 해. 아버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대체 뭘 할 건데?”

“두고 보면 알아.”

“그래, 너희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은 없기에 맥없이 대답한 진은 삐빅거리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엘레나 덕에 이젠 핸드폰 소리만 들어도 기가 질린다.

“타조야?”

블리스가 슬쩍 눈으로 돌아보며 묻자 진은 진짜 무서운 듯 부들거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배심원들 앞에서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이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의 액정을 본 진은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 공포영화 one missed call을 봤을 때보다 더 핸드폰이 무서운 요즘이었다.

“에반. 왜?”

「어디야?」

“애클랜드 저택에서 맨하탄으로 빠지는 중인데, 왜?”

「블리스는?」

“같이 있어.”

「좀 바꿔줘.」

그 말에 흘깃 블리스를 돌아본 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운전 중이라 그런데, 왜?”

「그럼 이따 나한테 전화하라고 해.」

“무슨 일 있어? 나한테 말해. 전해줄게.”

「그래, 그게 낫겠다. J&K 사에서 갑자기 GATH사 인수를 철회하겠다고 나섰어. 아직 발표는 안 했는데 무슨 일인가 모르겠다.」

그 말에 진이 눈을 껌뻑거리며 블리스 대신 답해주었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별 타격 없잖아. 어차피 M&A가능성만 타진하는 게 일인데.”

「우리가 GATH사 주식을 상당수 사 모았거든. 이 인수 문제가 백지화되면 이쪽 손해가 커.」

“그럼 큰일이네. 알았어. 내가 전해줄게.”

「그리고 블리스에게 이것도 전해. 난 어제부터 오늘까지 두 시간 잤다고. 돌아오면 당분간 휴일도 없을 줄 알라고 해. 아무리 그 녀석이 오너라고 해도 너무 심하잖아?」

피로와 원한이 덕지덕지 묻은 에반의 음성에 진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널리스트들의 하루는 빡빡하고 고단하다. 블리스만 해도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 20시간을 일했다. 올해 들어서야 간신히 16-18시간 사이로 근무시간을 줄일 정도로 시간이 금인 직업이었다. 그 와중에도 할 짓은 다한 블리스의 체력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알았어. 내가 잡아서 끌고 갈게. 수고해.”

「응.」

짤막한 통화를 끝낸 진은 에반에게 들은 바를 블리스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J&K사에서 갑자기 GATH사 합병을 백지화하겠다고 했다는데? 아직 정식으로 발표한 건 아닌데, 그럴 기미가 보이나 봐.”

“……뭐?”

“에반이 그렇게 전해달래.”

“갑자기 왜?”

“난 모르지. 그리고 너 이틀 뺀 덕에 당분간 휴일 없을 거라고도 전해달래. 에반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두 시간 잤대. 너 만나면 잡아먹을 기세다.”

그 말에 블리스가 “깐깐하긴.”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찬다.

“어제 저녁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빨리 준비해달라고 하던데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된 거지?”

“글쎄. 하여간 잘 됐다. 넌 좀 바빠야 돼. 바빠야 다른 데 신경 안 쓰지.”

슬쩍 이 김에 나 좀 포기해라라고 말하는 진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블리스는 그대로 진에게 반박했다.

“그래도 연애할 시간은 있어.”

“그래, 있겠지. 너야 괴물이니.”

그 사이 다시 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짧은 메시지 음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어깨를 굳히고 다시 핸드폰을 확인한 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블리스, 내 일생일대의 소원인데…… 그냥 얘 만나라. 만나서 4년 동안 기다린다고 해. 얘가 아무래도 내 피를 말려 죽일 모양이다.”

“네가 감당해. 나 같이 근사한 남자를 얻는데 그 정도야 별것도 아니지.”

“누가 너 갖고 싶대?”

“사실은 열렬히 날 원하잖아?”

“누가 그래?”

“내가. 넌 날 사랑해.”

“꿈보다 해몽이 좋다.”

혀를 차며 폴더를 연 진은 순간 화면에 뜨는 정체불명의 문자에 헉- 하는 신음을 토해냈다.

「Were art you?」

“블리스. 이건 대체 무슨 소리냐? 아트가 너였니?”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조합에 진이 블리스에게 문자를 보여주자 블리스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타조 대단한데?”

“웃을 일이 아냐.”

“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단하네, 그 아가씨.”

“돌겠다, 진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진이 답 문자를 보내자 한참 뒤에 엘레나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의미 불명이었다.

「I`m going dare.」

“제발……. 나 좀 살려라.”

이번 말은 그래도 어떻게 해석이 될 것 같아 ‘절대 오지 마.’라고 문자를 보내자 곧 다시 답 문자가 온다.

「you wona peace of me?」

무슨 말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사전 옆에 두고 쓰라고 했더니 화가 나서 ‘나한테 시비 거는 거예요?’라고 하는 말 같은데…… wona도 문제지만 peace는 대체…….

“그래, 나한테는 지금 평화가 필요해……. 나 휴가 좀 줘, 블리스. 너희 가족이랑 타조 때문에 말라죽겠다.”

진이 고개를 뒤러 젖히고 눈을 가리며 진심으로 애원하자 블리스가 웃으며 되묻는다.

“또 뭐라고 보냈는데?”

“네 눈으로 봐.”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썩어 들어갈 것 같아, 블리스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자 그걸 받아 액정을 본 블리스가 죽을 듯 숨을 헉헉거린다.

“진, 나한테 얘 문자 보여주지 마. 이러다 사고 내겠다.”

“진짜 나 좀 휴가 보내줘! 아무도 없는 데 가서 나 혼자 쉬고 싶다. 노먼도 타조도 너도 없는 데로!”

“두바이 섬 살까? 가서 혼자 지낼래?”

“너나 가. 아니, 너랑 노먼이랑 타조랑 거기 가서 나오지 마!”

“내가 미쳤어? 그것들이랑 같이 섬에 들어가게?”

“그럼 나는 미쳤냐? 이것들이랑 같이 뉴욕에서 살게?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야…….”

“참아. 이게 다 나를 얻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해.”

“너 필요 없으니 그냥 시련도 같이 가져가. 나 이러다 진짜 내 명에 못 죽는다.”

“참아.”

“못 참아!”

“스트레스 받지 마. 그냥 너도 엘레나처럼 머리를 비워.”

“그게 쉬운 줄 아냐?”

그것도 타고나는 거다. 아무나 엘레나처럼 깨끗한 뇌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무 피곤해.”

“좀 쉬어. 도착하면 깨워줄게.”

“너무 피곤하니 잠도 안 온다.”

어느새 블리스와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후였다. 하도 여기저기서 죽자고 달려드니 블리스의 10년이고 나발이고 이젠 다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딱 일주일만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다. 그 동안 너무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자신에게는 절대 휴식이 필요하다.

“진짜 나한테는 평화가 필요해.”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윈 진의 옆얼굴을 흘깃 본 블리스는 진에게 지금 필요한 건 휴가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이러다 연애 시작도 전에 진이 쓰러져버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진은 지친 상태였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였다.

사무실에 나가는 대로 진에게 일주일 정도 휴가를 줘야겠다 생각하며 블리스는 액셀을 세게 밟았다. 물론, 그 휴가는 자신의 집에서 보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

브루스와 약속한 레스토랑 앞에 도착한 블리스는 차 키를 맡긴 뒤 안으로 들어서다 갑자기 온 전화를 받고는 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먼저 들어가라는 듯한 그 동작이 아무래도 일 관계인 듯해 진은 “휴게실에서 기다릴게.”라고 하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브루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불독과 잠시라도 단 둘이 마주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동양인들을 아주 좋아했지만-그와 함께 일했던 한국인들이 대부분이 빠릿하고 영리하고 성실한 덕에.- 블리스 때문인지 그는 자신만은 싫어했다.

블리스의 이름을 대고는 우선 휴게실로 안내해 달라고 요청한 진은 레스토랑 한쪽에 외부로 난 작은 수목원 같은 휴게실로 들어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뒤 비장한 얼굴로 폴더를 열었다.

순간 진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아직 엘레나의 문자는 없었다. 

그래, 걔도 밥은 먹겠지.

뻣뻣한 목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전환하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 사이를 스쳐 불어온 바람이 목을 스치자 순간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익숙한 블리스의 향이었다. 블리스가 왔나 고개를 돌리던 진은 그 향이 자신에게서 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오싹한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자신의 몸에서 타인의 향이 난다는 건 진짜 묘한 기분이었다. 보통 향수라면 흔한 냄새니 상관없지만, 블리스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된 Bliss Bless Kiss의 향이 자신의 피부에서 퍼진다는 사실에 진은 문득 손을 뻗어 블리스가 흔적을 남긴 목을 손으로 가렸다.

“아…… 맞다……. 내가 이거 따지려고…….”

그제야 블리스에게 쳐들어갔던 이유가 떠올라 주먹을 꽉 쥐는데 바로 뒤에서 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케이먼?”

낯설지만 낮고 허스키한, 섹시한 그 음성에 본능적으로 진은 뒤를 돌아봤다.

“네, 진 케이먼…….”

입니다, 라고 말하려던 진은 순간 눈앞에 선 장신의 남자를 보곤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햇살이 남자의 은발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은발에 얼어붙은 듯 차가운 파란 눈동자. 진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그 눈빛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엄청난 포스를 발하는 남자였다.

미파아다, 진짜 마피아였다.

러시아의 대제라 불리는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지금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블리스 애클랜드의 냄새군. 진 케이먼 맞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진은 자기도 모르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엘리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어. 생각보다 어린 것 같은데…….”

남자의 말투는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러시아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 실력에 유난히 발음이 부드러워 듣는 순간 녹아들어갈 것 같은 어조였다. 하지만 진은 녹아들기보다 부서져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무서운 남자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고 투명해 보이는 남자였다.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서른……입니다.”

석상처럼 하얗게 굳은 채 진이 겨우 그렇게 답을 하자, 앞에 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확실히 동양인이라 그런지 동안이군. 그렇지 않아도 인사를 한 번 할 생각이었는데 잘 됐어. 엘리가 어제부터 폭식을 시작했어.”

“……네?”

“마치 음식이랑 원수진 것처럼 먹어대더군. 돼지처럼 꾸역꾸역. 스테이크 삼인분이랑 아이스크림 2겔론을 먹어치웠어. 자네가 잘 먹으라고 했다지?”

순간 세르게이의 눈이 번뜩였다. 당장에 레이저 빔을 쏠 것 같은 그 눈빛에 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뭐 사과할 것까진 없어. 거기다 답지 않게 밤새 사전까지 들춰보고 말야. 러시아 수도가 어디냐고 묻더군. 자네가 비웃었다지?”

사람이 말 한 마디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진은 처절하게 깨닫고 말았다. 과연 러시아의 대제라 불리는 남자는 그 포스부터가 달랐다. 

대제다. 황제도 아니라, 대제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힌 듯 얼어붙은 채 세르게이의 눈을 바라보던 진은 뻣뻣하게 굳어 선 채 천천히 그에게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진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세요…….”

이렇게 죽기엔 너무 불쌍한 인생입니다, 라고 말하려던 순간, 세르게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친구군. 내 명함이…… 아, 지금은 없네. 핸드폰 주겠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을 뻗는 세르게이의 움직임에 진은 재빨리 두 손으로, 아주 공손하게, 핸드폰을 세르게이에게 넙죽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진의 핸드폰을 받아든 세르게이는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버튼을 누른 뒤 다시 폴더를 덮어 진에게 건네주었다.

“내 개인 직통 번호야. 시간 나면 연락하도록.”

진은 꿈을 꿀꺽 삼켰다. 연락 안 하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진짜 기관총 들고 와, 아니 그냥 갑자기 나타나 눈으로 광선을 쏴 죽일 것 같은 남자였다.

“……시간 없어도 연락하겠습니다.”

하얗게 질린 채 답하는 진을 바라본 세르게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유쾌한 미소였지만 진은 세르게이가 자신을 노려본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며 웃는 세르게이의 얼굴 위로 꼭 사자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 포식할 꿈을 꾸며 웃는 표정이 겹치는 듯해 오한이 끼쳐왔다.

애클랜드 가 사람들의 포스도 대단하지만, 이 사람은 다른 느낌의 포스가 있었다.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꿈에도 다시 만나기 싫은 남자였다.

“그럼, 연락 기다리지.”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돌아서는 순간 휴게실 문 쪽으로 블리스가 들어섰다.

“진……? 아, 세르게이?”

자연스럽게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이름을 부르는 블리스를 보면 진은 순간 블리스의 옆으로 다다다 뛰어가 그 뒤에 숨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블리스가 놀란 얼굴로 진을 쳐다본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진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선 세르게이가 블리스에게 악수를 권한다.

“블리스. 오랜만이군.”

눈에서 광선이 나올 듯한 무시무시한 마수의 손을 블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마주잡았다.

“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당신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뵈었으면 했는데…… 여기서는 좀 그렇고. 나중에 연락드리죠.”

아주 자연스럽게, 평소 그의 고객들을 대하듯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태도로 세르게이를 대하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블리스를 만난 뒤 처음으로 “너, 진짜 멋지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태어나 처음으로 블리스가 근사해보였다. 아니, 근사하긴 늘 근사했지만, 평소보다 대단히 근사해 보였다.

저 무서운 남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다니……. 진짜 블리스는 대단했다.

“그래, 조만간 얼굴 봐야겠지. 이왕이면 네 비서에게 연락하라고 해. 네 냄새가 흠뻑 뱄는걸. 아주 마음에 들어.”

노골적인 그 말에 진은 블리스의 뒤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도 블리스 냄새 어쩌라고 중얼거렸었다. 블리스의 향수 냄새가 더 묻을까 진은 한 걸음 더 블리스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진을 슬쩍 못마땅한 듯 돌아보던 블리스가 앞에 선 세르게이에게 웃으며 받아친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마킹해둔 겁니다. 넘보지 마세요.”

그 말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다. 뭔지는 몰라도 저 무서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싫었다. 노먼에 블리스에 타조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더 이상의 관심은 필요 없다. 사실 지금도 다 집어던지고 혼자 한국으로 떠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저 남자까지 문자 보내면 돌아버릴 거다.

“글쎄…….”

의미심장한 세르게이의 답에 블리스가 표정을 굳힌다.

“세르게이, 뉴욕에서 저와 적이 되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물론, 그건 나도 사양이야. 하지만 재미있다면 또 모르지. 진이라고 했지?”

블리스와 대화를 하던 세르게이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자 진은 순간 어깨를 잔뜩 굳히고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예!”

“그렇게 긴장할 건 없어. 연락 기다리지.”

“예, 꼭 연락하겠습니다. 휴가 내서라도 연락하겠습니다.”

그 말에 세르게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 웃음소리가 하도 묘해 진이 다시 블리스의 옆에 붙어 팔을 잡아끌자 블리스가 쓰게 웃는다.

“그만 놀리세요. 진은 소심해서 겁이 많습니다.”

“그래?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겉보기엔 안 그래도 아주 겁이 많아요.”

“잘 보호해줘야겠군. 그럼, 이만.”

“다음에 뵙죠.”

블리스의 가벼운 인사에 진 역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마치자 그가 먼저 휴게실을 빠져나간다. 세르게이가 나가고도 한참을 그대로 선 채 블리스의 팔을 잡고 있던 진은 그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숨을 내쉬며 블리스의 팔을 잡은 손을 놨다. 손바닥 안에는 땀이 고여 있었다. 

블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데, 자신은 그가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나 사나운 눈빛도 그렇지만, 불길한 뭔가가 있는 남자였다.

그게 아직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불길하다.

진이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는 사이 블리스가 진의 이마를 툭 친다.

“저 사람한테 연락하지 마.”

“어?”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만, 안 하면 나 죽일지도 몰라. 내 아파트에 폭탄을 터트리면 어떻게 해? 아니면 회사에 기관총 들고 나타나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대부 찍을 일 있냐? 지금이 몇 년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그래도…….”

“걱정 마. 그런 짓 안 해. 그나저나,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무슨 일로 움직이는 거지?”

“왜?”

“……그런 게 있어. 그보다…….”

그렇게 말하며 슬쩍 문을 돌아본 블리스가 무방비한 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진은 이번엔 놀라지도 않고 그냥 미간만 찌푸렸다.

“뭐야?”

“도장 찍기. 들어가자. 불독 배고파서 화내겠다. 먹이 주러 가야지.”

“너, 그러다 불독이 진짜 사돈 되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불독한테야 영광이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애클랜드를 거부할 사람은 없어.”

블리스가 워낙에 털털하고 재미있는 성격이라 돈 쓸 때 외엔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이럴 때엔 블리스가 진짜 오만한 귀족계층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애클랜드를 거부할 사람이 없다니, 이건 무슨 중세 시대 왕의 발언도 아니고, 아주 가끔씩 이럴 때마다 비위가 틀린다.

“누가 없대? 있어.”

“누구?”

“나.”

한 마디로 난 너 싫어, 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자 블리스가 입술 끝을 올려 유쾌하게 웃는다.

“귀엽긴.”

“……지금 휴전 상태지만 나 진짜 많이 화났어. 휴전 끝나는 대로 너랑 담판을 지을 거거든?”

“어차피 쉽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네가 받아들일 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줄 테니까.”

“진짜 그러면 스토커로 고소할 수도 있어.”

“걱정 마. 잭이 알아서 잘 변호해줄 테니.”

“너, 진짜 끝까지 가볼 생각이야?”

“그런 각오도 없이 시작했을까 봐?”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무 생각 없어. 널 갖고 싶다는 것 외엔.”

부드럽고 나긋한, 하지만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블리스의 선언에 진은 우두두 돋는 닭살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

“사랑하면 그렇게 돼.”

이번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어 진은 자기가 먼저 휴게실을 나서 웨이터를 찾았다. 웨이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냥한 태도로 두 사람을 블리스의 지정석에 앉아 기다리는 남자에게로 안내했다.

“적당히 해.”

“걱정 마.”

진은 진심으로 블리스가 걱정되었다. 그러니까 브루스가 블리스에게 해를 끼칠까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블리스가 브루스를 열 받아 죽게 하지나 않을까가 걱정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자신의 지정석에 미리 와 앉아있던 브루스를 본 블리스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말에 브루스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블리스를 쳐다본다.

“약속 시간을 칼이라고 자랑하더니, 3분이나 늦었군.”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전화가 걸려와서요.”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진의 앞에 있던 의자를 빼 진에게 권했다. 블리스의 그런 태도에 일일이 놀라워하는 것도 피곤해 진이 조용히 의자에 앉자 블리스 역시 웨이터가 빼주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브루스에게 묻는다.

“주문부터 하시죠.”

“주문은 조금 나중에 하지.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지?”

블리스와는 앉아 식사도 하기 싫다는 듯한 그 태도에 블리스가 웨이터에게 조금 뒤에 주문하겠다는 말을 하곤 브루스를 바라보며 말을 써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던가?”

“재키가 임신했습니다.”

짤막한 그 말에 진은 턱을 빼고 블리스를 쳐다봤다. 그래도 좀 부드럽게 이야기를 돌릴 줄 알았더니, 아주 대놓고 시작한다. 그것도 가장 충격적인 일부터 말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진이 앞을 돌아보자 브루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본다.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재키가 임신을 했고, 애 아버지는 클랜입니다. 이주일 뒤 결혼시킬 예정입니다. 임산부가 있으니 우선 저택에서 지내게 할 거고요.”

“잠깐……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거냐? 무슨 말이 그따위야? 누가 임신을 해?”

“재클린 레너드요. 당신의 딸 말입니다.”

분명히 브루스가 잘못 들은 건 아니다.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의 질문은 감탄사였을 뿐, 진짜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얄밉게도 그 말에 정확히 답해주었다. 

그 덕에 불독이 화났다.

“뭐라고!”

식당 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내지른 브루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블리스가 살짝 인상을 쓰며 그에게 다시 앉기를 권한다.

“앉으세요. 여긴 제 지정석입니다. 이 레스토랑 고객 명단에서 삭제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잖아?”

이미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절대 앉지 않을 것 같은 브루스의 태도에 블리스는 “이 레스토랑 다시는 못 오겠군.”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침착하게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재키가 임신을 했고 클랜과 2주 후에 결혼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장소와 시간은 정해지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결혼식 준비 일체를 이쪽에서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재키는 10일 후쯤 돌아와 저희 저택에서 지내게 할 예정이고요.”

“누구 마음대로! 지금 네가 어른을 놀리는 거냐?”

“이미 저희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결혼식은 2주 후입니다.”

진도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2주 후에 결혼식이라니, 너무한다. 결혼식도 보통 화려하게 하는 게 아닐 텐데 어떻게 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그 결혼식에 초대되는 이들의 스캐줄은 어쩌라고…….

“너랑은 말이 안 돼. 대넌, 대넌은 어디 있어?”

“아버지는 지금 기절하셨습니다.”

“웃기지 마! 내가 대넌을 만나 직접 얘기하지! 아니, 그 전에 클랜, 내 이 자식을 그냥!”

당장에 탱크를 몰고 갈 듯한 그의 기세에 블리스 역시 가드를 올린다. 

“아버지도 클랜도 저택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택에는 안 가시는 쪽이 좋으십니다. 당신이 집안으로 들어서면 그대로 경찰들이 출동할 테니까요.”

“뭐라고?”

“내일 신문 지상에 ‘상처 입은 레너드, 셀레브리티들의 가정은 법의 사각지대?’ 이런 타이틀의 기사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저희 쪽에서 제시하는 대로 따라오시는 쪽이 좋을 겁니다. 애클랜드 가와의 혼인은 레너드에겐 절대 손해 볼 일이 아니니까요.”

아니, 방어가 아니다. 블리스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듯 브루스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의 자존심을 슬슬 건드려가면서 말이다.

“사실, 전 레너드 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규모는 크지만 당신이 꽤 말아먹었죠? 클랜의 상대로는 작지만 내실 있는 가문의 딸을 원했는데, 두 녀석이 벌써 눈이 맞았는데 어쩌겠습니까? 덕분에 레너드도 기사회생하겠죠. 제가 관리할 급은 아니지만, 원하신다면 특별히 고객 명단에 넣어드리겠습니다.”

순간 진은 블리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손 안 대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블리스는 아주 훌륭하게 터득한 후였다.

“네가 감히……. 너 같은 애송이가 감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당신들의 시대는 같습니다. 이제 고물차는 폐차되어야 하는 때죠. 아무리 애정이 있어도 망가진 차는 운전자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레너드의 재정 상태가 엉망이라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주가를 조금이라도 올리고 싶으시다면 조용히 이 결혼을 받아들이십시오.”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블리스를 쳐다본 진은 차갑게 얼어붙은 블리스의 푸른 눈동자에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과 있을 때엔 늘 편하고 유쾌하지만 일을 할 때의 모습은 자신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블리스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자신이 아는 그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소외감도 느껴지고 쓸쓸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 제일 두려웠던 건 그거다. 

“너, 감히……. 이 결혼은 안 돼! 절대로 안 돼!”

“재키가 열다섯 살 때 당신에게 맞고 우리 집으로 왔을 때 찍어둔 사진이 있습니다. 의사들의 소견서도 있고요. 그 후로도 종종 있었죠. 재키의 멍든 얼굴을 타블로이드 일면에서 보고 싶지 않으시면 제 제의를 받아들이는 게 좋으실 겁니다. 이거야 말로 윈윈 전략이죠. 전 제 동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에이먼 형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클레어도, 클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 동생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든다면, 그 순간 당신의 인생도 끝장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재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 가족이니, 재키에게도 손끝 하나 대지 마십시오. 우리 가족을 건든다면 우리뿐 아니라 아버지도 가만 계시진 않을 테니까요.”

계속해서 블리스의 차가운 음성이 계속 됐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정도로 냉랭한 그 음성에 진은 침착한 자세로 앉은 채 일부러 테이블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협박하는 게냐?”

“협박이라뇨?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새로 시작하시는 유전 사업에 F등급을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잘 알아서 해주실 걸로 압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한 뒤 블리스는 우아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 진의 의자를 빼주었다. 때마침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도 않았던 진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굳어버린 브루스에게 인사를 하곤 블리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레스토랑을 나오며 매니저에게 사과를 한 블리스는 나서자마자 이미 앞에 도착해 있는 차의 조수석으로 가 문을 열어주었다.

“타.”

짤막한 그 말에 진은 먼저 조수석에 올라타 블리스를 기다렸다. 본네트를 돌아 다시 운전석에 탄 블리스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메고 시동을 걸며 진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미안. 좀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얘기를 끝내야 했어. 아파트 앞에 내려줄게, 들어가 있어.”

“그래도 너무했어, 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뻔히 아는 사람들이 가득 찬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망신을 주다니.”

빠른 속도로 도로로 진입하는 차 안에서 진이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걸자 블리스가 웃으며 사과를 한다.

“미안해. 아파트에서 먼저 식사하고 있어. 메이드에게 식사 준비 해놓으라고 했으니까.”

“집으로 갈래. 내일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집에서 기다려. 최대한 빨리 얘기 끝나고 돌아올 테니까. 응?”

다시 상냥해진 블리스의 태도에 진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네가…….”

“응?”

“……아냐. 집에, 아니. 아무데서나 내려줘. 바쁜 것 같은데 일 봐야지. 나도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 그리고, 로이랑 일 다시 바꿀게. 아무래도 너랑 나랑 같이 다니면 일이 제대로 안 될 것 같아. 앞으로 사라도 신경써줘야 하고, 클랜 일도 있고.”

겨우 이틀간이었지만 완전히 스케줄이 틀어진 채였다. 운전하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블리스가 계속 운전을 하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GATH사의 인수 문제가 틀어진 것 같은데 이렇게 놀 시간은 없다. 블리스도 그건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 그럼 당분간 그렇게 하자. 나도 얼마간은 꽤 바쁠 것 같아. 대신, 클랜 결혼식 준비 부탁할게.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사라가 하기엔 좀 벅찰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 왜 안 나오나 했다. 2주 후면 당장 내일 식장부터 잡아야겠다. 여차하면 저택 정원에서 올리는 것도 괜찮을 거고. 웨딩웨어나 일정들은 내가 잡을 테니, 대넌한테는 네가 얘기해. 그리고 재키는 내일쯤이라도 돌아오라고 해. 웨딩드레스 준비해야 하니까. 최고로 준비해줄게.”

애클랜드의 이름의 걸맞게, 단 2주 만에라도 최고의 결혼식을 준비할 셈이었다. 화려하고 고상하고 품위 있게, 누구라도 혀를 내두르며 최고라고 칭할만한 결혼식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게 자신의 일이었다.

“고마워. 귀찮은 일만 떠맡겨서 미안하다.”

“괜찮아. 내가 할 일인데, 뭐.”

섭섭해 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다. 지난 며칠간이 비정상적이었던 거다. 블리스는 늘 바빴다. 항상 그랬다. 대넌의 말대로 이 미국에서 한가한 자들은 실패한 자들뿐이다. 얼마나 바쁜가가 그의 성공을 의미한다.

어쩐지 기운이 빠진 진이 멍하니 앉아 있자 블리스가 불안한 듯 말을 건다.

“그렇게 축 쳐져있지 마. 날 무서워하는 것 같잖아.”

무서워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사실 진은 블리스가 무서웠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랬던 것 같다.

“무서워, 사실은.”

“하하, 네가 날 왜 무서워해?”

“그런 게 있어. 넌 죽어도 모를 거야, 아마.”

“왜?”

“……그런 게 있어.”

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짧은 브루스와의 만남으로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아버렸다.

블리스는 이런 말을 하면 웃겠지만, 낯선 블리스를 보고 있으면 그가 너무나 멀고 무섭게 느껴진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블리스는 함께 있을 때엔 더없이 재미있고 유쾌한 친구이지만,  어느 순간 돌아서 자신에게 저런 얼굴을 보일까 두려웠었다.

블리스가 낯선 얼굴, 낯선 음성으로 고압적인 투로 말을 내뱉고, 자신을 지겨워할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친구의 자리마저 잃은 채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블리스의 등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건 너무 싫다.

돌아보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다리가 부르트도록,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아파트 앞에 도착해 안전벨트를 풀던 진은 버튼을 눌러 차문을 열려했다. 조용히 운전석에 앉아 진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그런 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분간, 좀 바쁠 것 같아.”

“알아.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당분간은 미뤄야겠다.”

하고 싶은 말보다는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들 때문에 잠시 휴전이라 했지만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난 며칠간이 이상했던 거다. 

“우리 사이에 뭘. 어서 가봐.”

“전화할게.”

“괜찮아. 난 걱정하지 마.”

서둘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진은 문을 닫으려 돌아섰다. 그 순간 블리스가 진을 부른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그 음성에 진은 차문을 연 채 서 블리스를 바라봤다.

“왜?”

“……사랑해.”

너무나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면 어쩌면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련한 감각만 남아있다. 안타깝고 쓸쓸한 마음뿐이었다.

“가.”

“전화할게.”

“그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차문을 닫은 진은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블리스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본 기분이 들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덕분에 지금까지 불확실하던 사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단지 친구로서의 감정인지, 아니면 미련인지 헷갈렸는데…… 지금 확실히 알아채고 말았다.

자신이 아직도 그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 버렸다. 그가 멀어질까 두려웠던 건,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슬퍼했던 건, 아직도 그에게 미련이 남은 탓이었다. 

지금도 자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없이 우정에 가깝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로, 그 감정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일단 자각하고 나니 머리가 또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진은 돌아서 아파트 건물을 향해 걸었다. 블리스도 블리스지만 자신 역시 바빠질 것이다. 당분간 정신없이 일을 해야 한다. 겨우 2주 만에 결혼식 준비도 해야 하고, 다음 달에 있을 사라의 생일 준비도 해야 하고, 매일 하는 고객들의 기념일 체크와 선물 보내기, 카드 쓰기, 그리고 임신 중인 사라도 잘 보살펴야 한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말 그대로 휴전이다. 

그냥 가끔 사무실에서 블리스의 얼굴을 보고,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그날 아무리 기다려도 블리스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서도 블리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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