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4/13)

Chapter 4

진은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었다. 분명히 꿈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기억이었다.

작은 마당이 있던 허름한 집에서 어머니가 갑자기 진의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댁에 가야 한다며 옷가지들을 커다란 배낭에 채워 넣은 그녀는 책도 가져가자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교과서며 공책이며 하나도 넣지 않았다. 대신 사진 한 장을 가방 앞주머니에 넣고는 그대로 자신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막 낮잠에서 자다 깬 여동생이 자신도 가겠다며 울자, 넌 집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며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는 그 집을 나섰다.

여름이었다.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을 자갈길을 걷자 저 멀리서 오는 작은 버스가 보였다. 버스 위에 올라타 잔돈을 낸 어머니는 자신을 꼭 끌어안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수다스럽고 밝고 활기차던 그녀가 그 날만은 유독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가끔 숨을 멈췄다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엄마 왜 그러냐고 물어도 그녀는 자신의 손을 꽉 쥘 뿐 사정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시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곤 다시 버스를 갈아탔던 것 같다. 거기가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잠이 들어 한참을 자다 깨도 산만 보여 다시 잠을 자고, 또 눈을 떠도 산이라 다시 산을 잤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지루한 버스 여행이 끝났을 때 어머니는 자신을 버스 정류장 한 귀퉁이에 내려두곤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에 따라 얌전히 기다렸다.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속해서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버스의 출발과 도착이 끝나고 정류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꼼짝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왔는데 자신이 없으면 화를 낼 테니까, 다시는 어머니를 못 볼지도 모르니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다리가 붓고 배가 고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갈 즈음에야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손을 잡고 근처의 경찰서로 자신을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이름으로 겨우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때 어머니와 동생은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았다. 멀리, 아주 멀리로 떠났다고만 들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건 사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머니는 자신을 버린 거였다. 오래된 사진 한 장 뒤에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만 남긴 채 자신을 버린 거다.

“아…….”

삐리릭거리는 전자음에 눈을 뜬 진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누구냐는 말도 없이 대뜸 나온 그 말에 진은 서둘러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블리스였다.

“어…… 내가 너무 오래 잤나? 지금 데리러 갈까?”

아파트에 들른다는 블리스를 혼자 내려두고 자신 역시 집으로 돌아와 잠깐 낮잠을 자던 진은 서둘러 사이드 테이블의 시계를 찾았다. 5시 20분이었다. 6시까지 가기로 했으니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상체를 드는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운 목소리잖아. 왜 그래?」

“아냐. 꿈꿨어.”

「무슨 꿈?」

엄마가 자신을 버릴 때의 꿈을 꿨다고는 할 수가 없어 진은 눈물을 닦으며 대강 말을 돌렸다.

“네가 내 치즈 뺏어먹는 꿈.”

「……내가 주면 줬지, 뺏어먹은 기억은 없는데?」

“그러니까 꿈이지. 지금 나갈게. 집이지?”

「아냐. 병원이야.」

병원이라는 말에 진은 벌떡 일어나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왜? 머리에 이상 있대?”

「……넌 내 머리에 이상 있었으면 좋겠냐?」

“그런 건 아니지만……. 병원은 왜?”

「기브스 풀러 왔어. 여기로 오지 말고 기다려. 갈 테니까.」

“골절이라면서 벌써 기브스를 풀어?”

「……그런 사정이 있어. 기다려, 하여간. 도착 전에 전화할 테니까.」

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벌써 기브스를 푼다는 건가 싶어 진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골절이면 못해도 1달인데, 엑스레이 필름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싶었다.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해줄게. 6시 30분쯤에 도착할 거야.」

“그래, 그럼.”

짤막한 통화를 끝내며 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질 때 그렇게 헤어져서 걱정했었는데, 블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전과 같은 태도로 자신을 대해주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아서, 그와 자신이 이전과 같아서 다행이었다.

버림받는 것보다 더 아픈 게 사랑하고 믿던 사람의 등을 봐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블리스를 친구로 두자고 맹세했던 건 그와는 평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블리스는 모르지만 이미 종신계약서는 자신이 작성해두었다. 편안한 친구로, 슬픈 일이 있을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친구, 형제 같은 존재. 그렇게 남겨두고 싶었다.

사랑을 하다 사랑이 끝나면 뒤돌아서서 '안녕.'한 마디로 끝내는 건 싫었다.

아마, 에반이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알아서 포기했을 것이다.

이대로가 좋으니까, 지금이 너무 좋으니까. 어색한 얼굴로 만나 안부나 묻고 웃으며 헤어지는 사이는 싫으니까. 언제까지나, 언제 어디서 만나도 웃으며 같이 이야기하고 다시 웃고 떠들고, 평생을 그렇게 웃으며 지내고 싶었다.

블리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블리스가 자신을 데리고 장난을 칠 정도로 막나가는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서려는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대체 무슨 생각인지가 궁금한 거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려는 저의를, 그리고 대체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의도인지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아니, 어떤 의도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의 이런 좋은 관계를 무너뜨려가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 7년 전이라면, 가슴 떨려하며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너무 편안하고 행복하다. 이 행복을 깨트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힘들었다. 한순간에 마음을 잘라내고 온 것이 아니다. 지난 7년 간 익숙해지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이제 겨우 아무렇지 않은 듯 블리스를 대하게 되었다. 그 시간과 자신의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블리스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건 바로 이 상태였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대로 이길 바랄 뿐이다.

***

“운거야…….”

기브스를 풀고 손의 상태를 확인하던 블리스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블리스의 오른손 손목 관절 상태를 확인한 브렛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블리스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브렛에게 묻는다.

“다 된 거죠?”

“응. 그래도 겨우 하루 만에 풀다니 별일이다.”

“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요. 그럼 갈게요.”

“그래. 아, 클랜 돌아왔다며?”

돌아온 지 이제 겨우 5시간인데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벌써 브렛의 귀에까지 그의 귀향소식이 들어간 건가 싶어 블리스는 쓰게 웃으며 브렛을 돌아봤다.

“그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하하, 무슨 짓은. 그냥 안부 전화했던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점잖아졌던데.”

“그 녀석이 점잖아질 리가 없죠.”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까. 네가 게이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게 말하며 브렛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갖고 던진 그의 농담에 블리스는 ‘그거 사실인데요?’라고 반박하려다 그냥 참기로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저녁식사 같이 하시죠. 클랜도 함께.”

“그래. 사라에게도 안부 전하고.”

“네.”

자신의 주치의이자 부친의 오래된 친구이기도 한 브렛에게 깍듯한 인사를 마친 블리스는 겨우 이틀 만에 자유로워진 오른손의 손목을 움직이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분명 울던 목소리였다. 진 자신은 잘 모르지만 기숙사에서 간혹 울다 깨던 진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보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울거나 하지 않지만, 아주 가끔 어릴 때의 꿈을 꾸면 우는 듯했다. 

또 어릴 때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어서 가서 끌어안고 위로해줘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 울지 말라고, 절대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줘야 한다.

아프지 않게, 다시는 울지 않게 꼭 끌어안아줘야 한다.

***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만진 뒤 구겨진 셔츠를 갈아입고 다시 블리스의 스케줄을 확인하던 진은 다음 장소를 확인한 뒤 시계를 돌아봤다. 6시 25분이었다. 시간이라면 칼 같은 녀석이니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된 듯해 작은 스케줄용 팜(palm-PDA)을 가방에 넣고 양복재킷을 걸쳤다. 넥타이와 양복을 걸치며 다시 거울을 보자 살짝 부은 눈이 보였다.

“뭐 이렇게 부은 거야…….”

낮잠을 자서인지 울어서인지 눈이 살짝 부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가라앉겠지만 블리스라면 기차게 알아볼 것 이다. 팩이라도 해야 하나 하는 중에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려왔다.

양복 재킷 안쪽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폴더를 열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경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약속 기억하지?」

노먼이었다.

“응?”

「내일 데이트 말야. 어떤 스타일이 좋아? 캐주얼? 아니면 정장? 아니면 유러피언? 극장 들러서 움직일 거니 턱시도는 좀 그렇고, 넌 뭐 입을 거야?」

“어…… 내일이 토요일이었냐?”

「응. 몰랐어?」

“어라? 아, 그렇네. 아, 맞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어. 내일 안 된다.”

「뭐?」

“클랜이 돌아왔대. 내일 모여서 식사하기로 했나 봐. 아, 내일! 큰일이다. 찾아올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야, 끊자. 나 시간 없다.”

「어이, 첫 데이트를 그딴 식으로 취소하면서 무조건 끊자니? 이건 무슨 예의야?」

“데이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말이 데이트지 그냥 놀러 나가는 거잖아. 야, 나 진짜 바빠. 블리스 내려주고 미친 듯이 뛰어 다녀야겠다.”

「……그럼 그렇지.」

한숨 섞인 노먼의 음성과 함께 뭔가 탕-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때와 달리 기분이 상한 듯한 그 목소리에 진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통화에 열중했다.

“미안하다. 클랜이 갑자기 돌아올 줄 몰랐지.”

「네가 그 놈 돌아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전해줄 것도 있고, 또 오랜만이잖아. 얼굴 봐야지.”

「……그래, 뭐. 어쩌겠냐. 그래도 나 진짜 지금 많이 실망했어. 아버지한테 미친 놈 소리 들어가면서 깨지고 메이시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잔뜩 쇼핑해왔는데.」

“쇼핑을 왜 해?”

「너랑 하는 첫 데이트잖아. 근사하게 보이려고 아버지 카드 훔쳐 들고 가서 미친 듯이 사재꼈다고.」

“미친 놈. 나랑 만나는 게 뭐라고 아버지 카드까지 훔쳐?”

「첫 데이트야.」

“그게 뭐?”

「……첫 데이트라고. 진 케이먼. 너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겠어?」

“무슨 의미?”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너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내 데이트 신청 받아들였구나.」

“다른 의미가 있어야 돼?”

「어이, 친구. 첫 데이트라는 건 말야. 첫 데이트야. 너랑 나랑 정식으로 연애한다는 의미라고.」

순간 진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아무리 이용할 생각이었다지만 그 데이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연애는 안 해봤어도 데이트는 몇 번 해봤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한 데이트는 지금까지 주변의 압박이 못 이겨 한, 애초에 거절하기 위한 데이트였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먼도 그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첫 데이트를 거창하게 생각할 정도로 어린 나이도 아니고, 어차피 첫 번째 데이트란 건 다들 탐색용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마음에는 드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피기 위한 것이지, 진짜 사랑해서 데이트를 하는 일은 드물다.

“너, 나이가 몇 개냐? 무슨 첫 데이트 타령이야? 데이트 안 해봤어?”

「그래, 첫 번째 데이트야 탐색전이지, 나도 알아. 그런데 너랑 나랑 서로 탐색할 때는 지났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너와의 첫 데이트는 정식 교제의 의미라고. 알겠어?」

“모르겠는데…….”

「너, 진짜 내가 장난으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냐?」

“장난이 아니면? 어떤 병신이 네 고백을 믿냐?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내가 그렇게 너한테 못할 짓을 했냐?」

그 말에 진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양심이 있으면 생각을 해봐.”

진의 한숨에 노먼 역시 한숨을 내쉰다.

「지금부터라도 잘해야겠군.」

“잘하지 마. 네가 잘한다니 무섭다.”

진심으로 거절하고 싶은 마음에 툭하니 내뱉은 진은 다시 가방을 챙기러 침실로 향했다. 시간을 슬쩍 보니 6시 27분이었다. 슬슬 블리스가 도착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딱히 올 사람이 없어, 세탁 배달을 왔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든 진은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가 소리쳤다.

“누구세요?”

“나.”

“네?”

“나라고. 블리스 애클랜드.”

핸드폰을 들고 통화 중이던 진은 블리스의 목소리가 확실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전화를 끊고 문을 열었다. 이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블리스는 보통 그의 집으로 부르면 불렀지, 자신의 아파트를 찾는 일은 드물었다. 뭐 딱히 이 집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럴 시간이 없었던 탓이다. 말 그대로 시간이 금인 직업이었다. 한 시간 상담료만 삼천 달라이고, 식사를 하고 정보를 얻는 데에 오천 달라다. 그리고 직접 블리스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십만 달라를 깔고 들어간다. 블리스의 하루 24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자면 자신의 연봉급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시간을 내 자신의 아파트를 들를 여유가 없던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집에도 서너 달에 한 번 간신히 휴가를 내 돌아가는 블리스였다.

그가 직접 오겠다고는 했지만 집에 들를 줄은 몰랐던 터라 진은 놀라 재빨리 열쇠를 따고 문을 열었다.

“전화하지? 그냥 내가 내려가면 되…….”

뭐 하러 귀찮게 올라왔냐고 말하려던 진은 문을 열자 보인 블리스의 얼굴이 아닌 블리스의 가슴팍이 보였다. 순식간에 그에게 끌어안긴 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울었잖아.”

순간 ‘귀신같은 놈’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겨우 몇 초 잠깐 통화한 걸로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까지 알다니, 진짜 너무 오래 알아온 것 같다. 징글징글하게 오래 알았다.

“……누가 울었다고 그래?”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여. 또 안 좋은 꿈을 꾼 거지? 울 것 같아서 달려왔어.”

머리카락 위로 블리스의 호흡과 함께 입술이 닿았다. 걱정스러운 듯 등을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그의 행위에 진은 마음을 놓고 그의 품에 안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뛰어 와주는 게 블리스였다. 한 동안 서로가 바빠 무심해졌다고 생각하던 때에조차, 블리스는 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컨디션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쉬라고 먼저 말해주었다. 상사로서도 좋았지만, 친구로서는 더없이 좋은 녀석이었다.

이 품을 잃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지금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일 정도로, 그의 품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어릴 때 꿈을 꾼 거야. 그냥, 그런 거야. 너, 안 늦었어? 안 가 봐도 돼?”

“……조금만 더 있다.”

머리카락 위로 닿는 블리스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리고 귀에 닿은 그의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퍼진다. 등을 쓰다듬어주던 상냥하던 손길도 어쩐지 점점 끈적끈적해지는 느낌이었다.

“블리스, 또 열 오르는 거 아냐?”

걱정이 돼 진이 고개를 들여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쓰게 웃는다.

“……어쩔 수 없어.”

“왜? 감기야? 어제부터 이상하더니, 진짜 몸살이라도 걸린 거 아냐? 너무 무리했어, 그 동안.”

“몸살도 감기도 아냐. 이건 지병이야.”

그 말에 진이 놀라 블리스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그의 옆에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블리스가 지병이 있다는 건 몰랐었다.

“지병? 그럼 병원 가야지?”

“소용없어.”

“왜?”

“이 병은 죽어도 못 고칠 거야, 아마.”

“무슨 병인데?”

“……너 말해도 몰라.”

“나 하우스랑 그레이스 아나토미 열심히 봤어. 어지간한 병명은 다 알아.”

마치 자기가 의사라도 된다는 듯 진지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진의 눈빛에 블리스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진의 이마를 툭 내리쳤다.

“텔레비전 좀 그만 봐.”

“도움이 되는 걸. 21세기의 신은 TV 안에 있어.”

“마릴린 맨슨도 좀 끊고.”

“요즘은 안 들어. 그런데 너 진짜 괜찮은 거야?”

“글쎄……. 별로 괜찮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지. 중요한 스케줄이 있으니.”

“아, 그래. 빨리 움직여야지. 나가자. 가방 갖고 올게.”

“그래.”

블리스는 문턱에 기대선 채 진이 가방을 들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말끔하게 양복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진이 천천히 왼쪽에 있는 침실의 문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천천히 아파트 내부를 돌아봤다. 몇 번인가 들른 적은 있지만 들어간 적은 없던 공간이었다. 한달 렌탈비가 1800달라에 달하지만 내부는 허름하다. 처음 진이 이 아파트를 빌렸을 때 당장에 그냥 내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스치기만 해도 이 정도인데 매일 아침과 밤마다 집에서 부딪치면 곧 사고를 칠 게 뻔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사고를 쳐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끌다가는 이도저도 안 된다. 

“다 됐어. 나가자.”

가방을 들고 나오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뻗었다. 그제야 진은 블리스의 손에 기브스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너 진짜 푼 거야? 골절이라며?”

“거짓말이었어.”

“응?”

“그냥 두면 네가 죽어도 일을 안 바꿀 것 같길래.”

“응?”

“멀쩡한 손에 기브스 했었다고. 이제 일도 바꿨으니 풀어야지. 겨우 이틀 묶어놨다고 뻣뻣하네.”

아주 뻔뻔스럽게 사기를 쳤다고 고백하는 블리스의 태도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블리스!”

“사정이 그렇게 됐어. 가방 줘.”

“가방은 왜?”

“무겁잖아.”

“그러니까 왜?”

“들어준다고.”

“난 팔 멀쩡하거든? 그리고 너처럼 부러졌다고 사기도 안 쳤거든? 이게 뭐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 가방 줘.”

말은 달라면서 블리스는 그대로 진이 들고 있던 검은색의 서류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에 진은 놀라 재빨리 문을 닫아 잠근 뒤 블리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가방 줘. 내 가방을 왜 네가 들어?”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을 연 블리스가 문을 막아선 채 먼저 타라는 신호를 보낸다. 누굴 기다리는 법 없이 재깍재깍 자기가 먼저 타야 직성이 풀리는 블리스의 과도한 친절에 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빨리 타기나 해. 시간 없어.”

진의 의심에는 이제 이골이 난 듯 블리스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섰다. 그 뒤로 곧장 블리스가 들어서 1층의 버튼을 누르자 곧장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진은 불편한 듯 자신의 가방과 블리스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하지만 블리스는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 봐? 내가 그렇게 근사해?”

“좀 미친 것 같아서.”

노골적인 진의 표현에 블리스는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말을 해도 꼭…….”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너 진짜 귀신이라고 들른 거 아냐?”

“너까지 액소시즘하자고 설치지 마. 새대가리 하나로 충분해.”

“그럼 굿할래?”

“……작두 타는 광대 보러 가자고? 관둬.”

순간 문이 열리자 블리스가 문을 손으로 밀며 진에게 길을 터주었다. 연이어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진은 찝찝한 얼굴로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앞에 서 있는 검은색의 재규어를 본 진은 블리스에게 돌아서 손을 뻗었다.

“열쇠 줘.”

“내가 운전할 거야.”

“너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너랑 있을 때는 좋아해.”

삐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락이 풀리자 동시에 차의 시동이 걸렸다. 더는 말하는 것도 귀찮아 진이 그대로 조수석으로 향해 걷자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온 블리스가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준다. 그 행위에 진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 블리스를 돌아봤다.

“너, 진짜 귀신 들린 거 아냐? 너 블리스 아니지? 노먼이 블리스 가면 쓰고 온 거지?”

“……여기서 노먼이 왜 나와?”

“그럼 뭐냐고? 사라랑 클레어한테도 차 문을 안 열어주는 네가 차문을 열어주다니! 이게 말이 돼?”

데이트하는 여자들은 물로, 사라와 클레어에게도 절대 차 문을 열어주는 일이 없어-물론, 대부분 보디가드나 비서들이 열어주니 상관없지만.- 한때 ‘문 열지 않는 블리스’라는 별명까지 달았던 인간이 먼저 문을 열어주니 진이 경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뭘 그렇게 놀라? 타.”

“너, 진짜 이상해.”

“진짜 마귀에라도 쓰였나 보지.”

더는 화내기도 지친 블리스가 순순히 인정하자 진은 불길하다는 눈빛으로 블리스를 바라보며 일단 차에 올라탔다. 진이 좌석에 앉자 차 문을 닫은 블리스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 진의 가방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타 안전벨트를 맸다.

“출발한다.”

“해. 시간 아슬아슬하겠다. 슬슬 러시아워 때야.”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진이 중얼거리자 블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에반이 오늘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채였다. 그러데 굳이 진에게 알리지 않고 움직인 건 오늘 내로 사단을 내겠다는 굳건한 의지 때문이었다. 

진이 그래도 모르는 척한다면 이번에는 정면 돌파다. 행동으로 보여주기보다 제대로 고백해줄 셈이었다.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느니 확실하게 말로 하는 쪽이 좋다. 그래서, 도망간다면 잡아오면 된다. 10년을 침묵하고 기다렸다. 내뱉고 난다면, 차라리 터트려버린다면 눈치 볼 것도 없이 밀고 당기기를 시작하면 된다. 도망치면 쫓아가고, 밀어내면 다시 다가서고, 돌아서면 뒤에서 끌어안아 버리면 그만이다.

애초에 끙끙대며 어설픈 수를 쓰는 게 아니었다. 무조건 정면 돌파다.

센트럴파크의 동쪽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한 차 안에서 진은 이건 또 뭔가, 하는 눈으로 블리스를 돌아봤다. 오늘 일정은 7시에 딜런 메이츠의 저택에서 있는 가벼운 만찬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레스토랑을 찾자 진은 자기도 모르는 새 스케줄이 바뀐 건가 하는 얼굴로 블리스를 돌아봤다.

“약속 장소 바뀐 거야?”

“응.”

“그럼 나한테 말을 해주지.”

“그렇게 됐어.”

시동을 켜둔 채 먼저 운전석에서 내린 블리스는 그를 마중 나온 매니저를 보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주차 관리인이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열자 진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려 했다.

“가방은 두고 내려.”

“관련 서류는?”

“식사하면서 재미없는 얘기는 안 해.”

그럼 대체 뭐 하러 만나러 거야? 라고 물으려다 진은 순순히 뒷좌석을 열기를 포기하고 핸드폰만 챙긴 채 매니저와 이야기를 끝내고 다가서는 블리스의 뒤에 섰다.

“어서 오십시오.”

레스토랑의 매니저라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유럽 저택의 집사 같은 분위기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밀어 열자 블리스가 느긋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진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블리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레스토랑 안은 한산했다. 보통은 이 시간이면 반 정도는 꽉 차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한산했다. 아무리 이 레스토랑이 소수의 몇 명 외에는 좌석 예약도 불가능하고, 일주일 전 예약이 아니면 들어오기도 힘든 까다로운 곳이라 해도 이건 너무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블리스야 당연히 뉴욕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전부에 지정좌석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텅 빈 곳에 들어서는 건 처음이라 진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블리스가 돌아보며 눈웃음을 친다.

“왜? 무서워?”

“아니, 그보다 이 시간이면 항상 꽉 차 있었는데 이상하잖아.”

“오늘 휴일이야.

“응?”

“갑작스러운 휴업으로 종업원들도 없어. 메인 쉐프 서브 쉐프 둘, 테이블 담당 세 명, 그리고 매니저와 주차 담당 두 명만 남아있어. 그리고…….”

블리스가 잠시 말을 끊고 그들을 안내하던 매니저가 외부로 통하는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커다란 호수가 펼쳐진 정경 위로 준비된 테이블이 보였다. 새하얀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그 주변을 수많은 촛불들이 감싸고 있었다. 

로맨틱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어쩐지 진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간간히 켜진 가로등밖에 없는 호수를 낀 정원에 촛불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사람도 없다. 너무 고요하다.

“앉아.”

진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블리스가 먼저 테이블로 가 의자를 빼고 기다린다. 어느새 매니저는 사라져 있었다.

“너, 뭐하는 거야?”

“뭐긴? 앉아. 식사해야지.”

대체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위쪽에서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위층을 올려다보자 건물 2층의 활짝 열린 유리문 너머로 라탄 파티션이 늘어서 있었다. 음악 소리는 그 너머에서 울려왔다.

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금요일 밤에 불려나와 라탄을 앞에 두고 생뚱맞게 연주를 하는 건가 싶어 진은 그냥 다 포기해버리기로 했다. 나름 예술인이라 자부하며 음악 공부를 했을 텐데 나이 들어 이 방중에 불려나와, 그것도 손님 앞이 아닌 라탄 뒤에 가려진 채 영문도 모르고 연주를 하는 이들도 있는데 자신 정도면 진짜 양반이다. 그리고 나름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블리스의 의도는 알 것 같아 더는 잔소리를 하기도 미안해졌다.

“……그래, 나도 이젠 모르겠다.”

지친 듯 숨을 토해내며 진이 의자에 앉자 블리스가 의자를 밀어 자리를 잡아준다. 그리곤 그의 자리에 가 앉지 않은 채 옆에 놓인 트레이에 있던 와인을 손에 들었다.

“와인부터.”

“네가?”

“물론.”

싱긋 웃으며 와인의 마개를 딴 블리스는 잔 두개를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와인을 따랐다. 물 흐르는 듯한 그 움직임에 진은 멍한 눈으로 블리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블리스가 커피나 와인을 따르는 모습은 지나치게 섹시하다. 누구나 매일 반복하는 행위임에도 진의 몸이 만든 균형과 당당하고 섬세한 손동작 하나하나가 몹시도 부드러우면서 섹시하다.

해가 진 밤하늘과 수백 개의 촛불들, 그리고 와인과 음악. 보는 이들이 하나도 없는 고요한 공간 안에서 진은 멍해져가는 의식을 느꼈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어, 그냥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른 블리스는 와인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진 역시 잔을 들어 부딪치자 바로 진의 앞에 선 블리스가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예이츠였다. 이 녀석이 이런 시도 알고 있는 건가 해 진은 웃으며 블리스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웬 예이츠야?”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그 말에 진은 웃고 말았다. 간지러운 듯, 그냥 웃었다.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부드러운 선율과 어울리는 블리스의 낮은 음성에 진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면서도 와인 잔을 기울여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움직임에 맞춰 블리스가 고개를 숙여 진과 시선을 맞춘다. 순간 진은 두근두근 떨려오는 심장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바로 눈앞에서 새파란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사로잡힌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진의 시선에 블리스는 천천히 진의 뺨을 쥐었다. 그리고 진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I look at you, and I sigh.”

“푸웁!”

블리스의 기가 막힌 낭독과 가슴 시린 듯한 한숨 소리와 함께 진은 머금고 있던 와인을 뿜어버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웃어재끼기 시작했다.

“으악, 미치겠다. 닭살 봐. 나 닭살 돋았어! 어떻게 해?”

깔깔거리고 웃으며 눈물까지 흘리는 진의 얼굴에 분위기 잡다 와인세례를 받은 블리스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한 표정으로 냅킨을 찾아 얼굴을 닦았다. 대강 예상은 했었지만, 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었다.

“네가 이런 걸 못 참는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아, 미안. 미안해. 그러니까 왜 웃겨? 나 오늘부터 예이츠 안 좋아할래. 그 시 볼 때마다 너 생각날 것 같아. 대체 프러포즈할 때 그런 낯간지러운 시를 읊는 수치도 모르는 인간들이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순식간에 블리스 나름대로 필살기였던 고백이 ‘수치도 모르는 짓’이 되어버렸다. 하긴, 애초에 여자들에게나 먹힐 수법을 진에게 써보려고 한 게 잘못이었다. 물론, 다른 여자들에게는 절대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한 적이 없지만, 나름 연구하고 조언을 얻어 준비한 이벤트인데 역시나 진은 역겨워한다.

원래도 이런 건 질색을 하는 성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서 진은 절반 정도는 욕을 했던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로 나오는 감동적인 고백 장면에서 진은 늘 ‘어떻게 저런 말을 두 눈 뜨고 할 수 있지?’ 내지 ‘저 사람들은 아예 버터로 온 몸을 바르고 다니나 봐.’ 내지 ‘나라면 죽겠다, 차라리.’라고 하던 게 대부분이었다. 왜 욕하면서 굳이 로맨틱 코미디를 보냐고 했더니 ‘코미디 부분은 재미있거든. 설정이 웃겨.’라고 했었다. 슬랩스틱 코미디나 미국식 개그는 맞지 않는 체질인지라 진이 볼만한 코미디는 로맨틱 코미디가 전부라고 했던 게 이제야 기억났다. 그래, 로맨틱 코미디에서 로맨틱은 빼고 코미디만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애초에 로맨틱하게 접근하려 했던 1차 계획을 수정해 블리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프러포즈라는 건 알았나 보네.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블리스가 얼굴에 남은 와인을 닦아내고 자신의 자리에 가 앉으며 그렇게 말하자, 진이 순간 아차 싶은 얼굴로 블리스를 돌아봤다. 걸려들었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모르는 척하더니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 답은?”

“……무슨 답?”

“내 프러포즈의 답 말야. 어때?”

“거절할게.”

진은 지체 없이 명백한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블리스 역시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한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왜 물어봐?”

“혹시나 해서. 식사하자. 식사하고 술이나 마시자.”

“그걸로 끝?”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아무리 현대판 귀족이라지만 21세기는 평등사회야. 내 프러포즈를 거절했다고 잡아다 가두고 고문할 수도 없고, 납치해 강제로 앉혀놓을 수도 없잖아? 위법이니까.”

위법만 아니라면 할 의향이 있다는 듯한 블리스의 말에 진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럴 생각은 있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최대한 네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으니 당분간은 지켜봐줄게.”

“내가 끝까지 버티면?”

“내가 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블리스가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어 마시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진은 서서히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어이, 이보세요. 이 나라는 법치 국가거든요?”

“섬을 하나 살 계획이야. 나중에 책자 보여줄게, 골라 봐. 두바이에 있는 월드 프로젝트 중 하난데, 한반도는 아직 안 팔렸다고 하더군. 인공 섬이지만 환경은 이상적이야. 건물을 짓고 계획을 세워야겠지만, 그 섬 자체는 내 영지가 되는 셈이니까 뭐든 할 수 있지. 너도 원하는 도시 계획을 세워봐.”

두바이의 월드 프로젝트는 낙힐(Nakheel)사에서 주도하는 사업으로 300여 개국의 나라 모양을 본떠 만든 인공 섬을 분양하는 정책이었다. 한 마디로 보통 사람들은 게임으로 하는 심시티(simcity)를 시뮬레이션이 아닌 직접 실행하는 것이다.

얼마 전 대넌이 낙힐 사의 메일을 받고 독일을 분양 받을까 고민하던 게 떠올라 진은 재빨리 블리스의 자산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아직 팔리지 않았지만 2500만 달라에서 4000만 달러 사이로 추정되고 있었다. 블리스가 증여받은 재산과 그의 증권과 부동산,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블리스 소유의 저택들을 모두 합치면 10억 달라 가까이 된다. 충분히 살 수 있다. 주식까지 갈 것도 없이 3년 전 대넌에게 받아낸 니스의 별장 하나만 팔아도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그가 가진 현금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블리스라면 진짜 그 섬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진은 창백한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답해주었다.

“블리스, 내가 보기엔 그건 낭비인 것 같아.”

“낭비라니, 그건 투자야. 나중에 관광지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고, 대여를 해도 좋지. 헐리웃 스타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빌려달라고 할걸. 파파라치 없는 지상 낙원일 테니.”

“그럼 그냥 투자만 해. 난 섬 안 좋아해.”

“난 좋아해.”

“나 비행기 무서워.”

“배 타고 들어가면 돼.”

어쩐지 이미 그 섬을 구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진은 애절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블리스…….”

“그런 목소리는 침대에서나 내. 네가 그렇게 바라보면서 애원하면 또 지병이 도진다고.”

“……뭐?”

“식사하자.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고. 식사 후에 오랜만에 펍에 가서 술 한 잔 어때? 아, 그러기엔 너무 정장이네. 아파트로 가서 술 마시자. 영화도 보고. 어때?”

“섬 안 산 거지?”

“아직은.”

“사지 마. 돈 아까워.”

“난 안 아까워.”

그야 당연한 일이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돈을 아까워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섬을 살 거면 그 돈을 날 줘.”

진의 의도는 그런 섬을 사느니 차라리 돈을 공중에서 뿌려라 라는 의미였지만 블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줄까? 지참금으로?”

“……됐어. 식사나 하자.”

“현금이 싫으면 전용기나 저택은 어때? 아니면 빌딩을 하나 사줄까?”

“블리스, 내 앞에서 돈 자랑 하냐? 네 자산이 얼만지는 나도 잘 알아.”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해주고 싶은 거야. 뭐든 해주고 싶어. 집이든, 차든, 섬이든, 요트든. 전부 다 주고 싶어. 그게 내 마음이야.”

“그건 부모님의 마음 아니냐, 보통?”

“네가 내 아들이면 큰일 나지. 근친상간이 될 테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침대에서 섹스하다 걸리는 건 좀 그렇잖아."

블리스는 전술을 완전히 바꿔 빙빙 돌리며 다가서는 것보다 일단 들이받기로 결정내린 후였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그의 말투와 행동에 진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블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도가 지나치다.

진짜 미친 것 같았다.

“너, 내일 나랑 LA 좀 가자.”

“LA는 왜? 뭐 좋은 거 있어?”

“저번에 에반 어머니가 얘기해주셨는데 한국에서 알아주는 무당이 이민을 왔대. 굿을 기차게 잘하나 봐. 가서 한판 하고 오자.”

그 말에 블리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 진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라고 내버려둘 셈이었다. 저렇게까지 현실도피를 하고 싶다는데 굳이 잡아끌고 현실에 내려놓은 필요는 없으니까. 이젠 병원에 뇌 사진을 찍자고 끌고 가든, 엑소시즘을 하자고 성당에 끌고 가든, 굿을 하자고 한국으로 끌고 가든 상관없었다. 하자는 대로 뭐든 해줄 셈이었다. 그래서 진이 납득을 한다면 상관없다. 영리한 녀석이니 현실도피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 역시 금세 알아챌 것이다.

아니, 싫어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이제 곧 2단계 작전으로 돌입할 테니까.

“식사부터 하자.”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식으로 고백하기가 끝났으니 이제 밀어부치기 2단계다.

데이트는-블리스의 입장에서만- 아주 순조로웠다. 진의 신랄한 비웃음 덕에 다소 민망하고 당황스럽고 열 받긴 했지만 그 정도는 무념무상으로 저 멀리로 집어던지고 식사를 마치고 드라이브를 한 뒤 아파트로 돌아와 술을 마시자 분위기는 점점 더 느슨하게 풀려갔다. 블리스는 부드럽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갔고 진은 그 화술에 말려 즐겁게 웃으며 떠들어댔다. 저택에서 있었던 소소한 사건들-클랜의 이유 없던 반항과 에이먼이 성인이 되자 처음으로 그의 비밀스러운 취향을 털어놓았을 때의 사건-부터 시작해 학창시절 이야기까지. 한 번 나오자 줄줄이 쏟아지는 추억들에 진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과거를 추억하고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웃으며 대학 시절 옆 기숙사의 벤와 노먼이 터트린 사건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나 그때 진짜 놀랐어. 설마 에이먼의 취미가 그런 걸 줄이야.”

술을 마시던 진이 킥킥거리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진짜 상상도 못했던 그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삐져나온다. 아마 블리스가 클랜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황당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에이먼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경악한 사건이었다.

“나도 놀랐어. 설마, 우리 형이 그런 취미일 줄이야. 어쩐지, 우리 가족 다들 수집벽이 있는데 형만 얌전하더라니.”

그러니까 13년 전의 일이었다. 에이먼은 성인이 되자 자기도 모을 게 있다며 가족들을 모아두고 근엄한 얼굴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가 파충류나 희귀곤충, 혹은 각 나라에 있는 고성이나 섬을 수집한다고 했어도 모두가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여자 속옷을 수집하고 싶다고 해도 그냥 납득했을 것이다.

“인형이라니……. 액션피겨도 아니고 프라모델도 아니고 레이스와 리본이 치렁치렁하니 달린 인형이라니.”

블리스는 아직도 아찔한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한 갈색 가죽 상자를 들고 나타나 가족들을 바싹 긴장시켰던 에이먼이 상자를 열고 보여준 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던 파충류도 여자 속옷도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보다 심했다. 그가 당당하게 나도 이제 콜렉션을 갖겠다 선언한 건 구체관절 인형이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고가의 인형이었다.

“그거 눈도 사다 넣고 화장도 시키고 그러는 거라며? 가발도 바꾸고.”

“응. 진짜 신기하다니까.”

하다못해 수작업으로 만드는 사기 인형이라면 당당하게 모을 수 있지만-물론, 소아성애자 취급을 받을 위험은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돌피는 아니었다. 그가 하도 단호한 얼굴로 선언을 하는 덕에 모두가 결국 수긍하고, 대신 그 인형은 사라가 모으는 걸로 하기로 하고 3층에 컬렉션방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아직도 그 방에 적응이 안 된다. 애클랜드 가의 장남이, 지역 케이블 포함 30개국의 방송국을 총괄하며 쇼비지니스계의 혜성이라 불리는 에이먼 애클랜드가 돌피를 모은다니. 그것도 가끔 집에 들를 때마다 작업실에 박혀 옷을 만들어 입히고 화장을 시키고, 머리까지 만져준다니.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차마 그의 이름으로는 구입할 수 없어 에이먼의 인형 구입을 총괄 담당해주는 진이지만 그가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귀족 청년 같은 에이먼이 인형을 안고 다니다니…… 너무 안 어울린다.

“재미있다니까, 너희 형제들은? 그나마 제일 나은 게 클랜이지. 그 녀석은 고서적만 수집하니까.”

“에이먼도 큰일이지. 그 취미를 이해해 줄만한 여자가 있을까, 과연?”

18년 간 욕망을 참아온 에이먼은 절대 그의 은밀한 취미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그의 은밀한 취미를 이해해 줄만한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넌이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내긴 했지만, 섣부르게 교제를 하다 상대 여성이 에이먼의 취향을 사교계에 소문낼까 두려워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고 포기한 채였다. 그런데 과연 돌피를 모으는 남편을 납득할 만한 여자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같은 취미를 가진 여자와 결혼하면 되지 않냐 싶기도 하지만 이 뉴욕에서, 그것도 애클랜드 가와 사돈을 맺을만한 가문의 아가씨들은 가방과 보석은 모아도 인형은 모으지 않는다. 

“다들 제 짝이 있는 법이잖아. 곧 나타나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예술계통 사람도 괜찮고. 저번에 신진 디자이너랑 교제한다고 하지 않았어?”

“뭐, 그쪽도 잘 안 되는 모양이야. 에이먼이 패션 센스가 뛰어나잖아. 그 여자의 여름 콜렉션을 신랄하게 씹어준 모양이야. 그랬더니 당분간 연락하지 말랬대.”

“에이먼은 디자이너가 됐어야 했나? 인형도 보면 옷 만들고 입히고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방송 일도 좋아해.”

“하긴, 싫어하면 그렇게 못 하지.”

방송사를 맡은 뒤 리얼리티 쇼와 시트콤, 그리고 법정 드마라를 제작해 그가 제작한 쇼와 드라마 중 80% 이상을 월드와이드로 배급하고, 매 시즌마다 그가 제작한 드라마들이 드라마 시청률 10위 안에 두 개 이상은 오르는 기염을 토해낸 에이먼의 실적을 돌아봤을 때, 분명 싫은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싫어한다면 그렇게 뛰어난 성적을 거두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특이하다니까, 진짜. 그렇다고 여장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책이나 가방 모으는 거랑 똑같은 거지, 뭐. 그래도 역시 에이먼이 인형을 안은 건 안 어울려.”

클레어까지 포함해 전원이 덩치가 유달리 좋은 애클랜드 가의 남자가 인형을 안고 있는 건 진짜 고목나무에 매미다. 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빈 테이블을 돌아본 블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안주 가져올게.”

“그럼, 그만하지?”

“이제 겨우 11시야. 이런 자리 오랜만이잖아.”

센트럴 파크뿐 아니라 저 멀리 해변가의 풍경까지 한 눈에 보이는 블리스의 침실 창가에 앉은 진이 잠시 기다리자, 안주를 가지러 나간 블리스가 새 술병을 들고 와 테이블에 올려두고 진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잔을 받아들며 진은 조금 무리라는 얼굴을 했다.

“또?”

“내일은 어차피 주말이고, 오후에 집으로 가야 하니 여유 있어.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마셔?”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블리스의 행동이 조금 미심쩍기는 했지만 진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받아 들었다. 지금도 슬쩍 취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그리고 취하면 잠이 드니 괜찮을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술버릇은 조용히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자는 거였다.

그러니 별 문제는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무슨 꿈을 꾼 거야?”

진의 표정을 살피던 블리스는 막 가져온 캐비어 샐러드와 치즈를 테이블에 올려든 뒤 연이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두는 건 상당히 매너 없는 행동이었다. 블리스라면 절대 하지 않을 그 행동에도 진은 블리스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채지 못한 듯 몽롱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날 버릴 때 꿈.”

블리스는 순간 “왔다!”라는 생각을 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슬슬 진이 본심을 터놓기 시작했다.

“기억나?”

“응. 희미하게 기억이 나. 저기 지방에서 날 데리고 서울까지 와서 버리고 갔어. 나중에 학교 이름으로 겨우겨우 찾아가 보니 이사 갔더라고. 아주 멀리 갔대. 여동생만 데리고.”

진을 15년이나 알아왔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진은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술에 취하면 자는 체질이었다. 그 요란한 대학 신입생 신고식에서도 다들 술을 마시다 지쳐 토하고 주사를 부리고 기숙사에 불을 지르려하고-노먼의 경우-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폭약제조-벤의 경우-를 하며 난리를 쳤을 때에도 진은 자신이 사뿐히 지려 밟은 노먼을 교내 경찰에 신고해 살려놓고 얌전히 자신의 방으로 가 조용히 잠을 잤다. 하지만 취한 시점과 잠든 시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사이의 진은 아주 솔직해진다. 그걸 아는 건, 블리스 자신뿐이었다. 적어도 블리스는 그렇게 믿었다.

“너희 엄마는 왜 너만 두고 간 거야?”

“내가 나쁜 애였나 봐.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쁜 애였던 것 같아. 그러니까 거기까지 데리고 가서 날 버렸지. 아주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데, 우리 동네에 어떤 아줌마는 홍수 때 아들이 죽었다고 미쳐서 자살했었거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그럴 텐데, 버릴 정도였으면 진짜 내가 나쁜 애여서 그랬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려?”

“……뭔가 다른 사정이 있겠지.”

“아냐. 맞을 거야. 그러니까 두 번이나 파양을 당했지. 내가 나쁜 애라서 그래.”

어렴풋이 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진의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듣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주 보통의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처럼 해맑고 유쾌한 성격이었지만 진에게는 뿌리 깊게 박힌 자기비하와 혐오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자신의 탓이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늘 안타까웠다. 다른 사람에게 흠 하나 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까 실망시킬까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남들이 하는 무리한 부탁까지 모두 수용하고야 마는 그 점이 늘 가슴 아팠었다.

진이 풀이 죽을 때마다, 실수를 해 의기소침해 있을 때마다 늘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어깨를 두드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정도에서 끝났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 어차피 사고 치기로 작정한 이상 거리낄 게 없다.

“넌 나쁘지 않아. 아주 착한 사람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블리스는 진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진의 머리를 잡아 품에 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다정하고 상냥한 그 음성에 진이 희미하게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넌 진짜 좋은 친구야. 너랑은 평생 이렇게 있고 싶어.”

“평생 이렇게 있을 거야.”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노먼은 어떻게 된 거야?”

슬슬 그 막간의 타이밍이 닿은 듯해 블리스가 묻자 역시나 진이 순순히 답해준다.

“데이트하쟤.”

“왜?”

“날 사랑한대.”

그건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 노먼이 진만 유독 물고 늘어질 때부터 알아봤다.

역시나 다시 만나면 갈아 마셔 버려야겠다.

“그래? 그래서 넌 왜 하기로 한 건데?”

“네가 자꾸 작업 거니까 부담스러워서. 노먼이랑 데이트하면 이상한 짓 안 할 거 아냐. 넌 노먼 진짜 싫어하니까.”

순간 블리스는 “얼씨구?”하며 슬슬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자꾸 진심을 보이니 그게 무서워서 노먼에게로 도망치려 했던 모양이다. 뭐, 진짜 노먼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좋지 않다. 지금까지는 진의 친구이기도 하고, 또 진이 노먼의 소설을 하도 좋아해 두고 보자고만 했지만, 노먼을 우선 고소한 뒤 뒷일을 도모해야 할 듯싶다. 잭 맥캐인과의 관계를 끝장낼 각오를 하고라도 그 자식을 일단 감방에 처넣어야 한다.

“그래서 노먼하고는 어디까지 갔어? 키스했어?”

그 물음에 진이 환하게 웃는다.

“미쳤냐? 그 놈은 그냥 친구야. 이번에 소설 투고한대. 잘됐어. 그 녀석은 진짜 재능이 있으니까 잘될 거야.”

“그 녀석하고 자고 싶은 건 아니고?”

“으하하하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걔는 내 친구인 동시에 철천지원수야. 그 재능만 아니었으면 내가 벌써 죽여서 묻어버렸을걸.”

“그럼 누구랑 자고 싶은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블리스는 희망을 담아 그렇게 물었다. 진이 연애는 하지 않는 주의라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진에게 마음에 품은 상대가 있는지 확인해둬야 한다. 물론 최고의 상황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진의 입에서 ‘블리스 애클랜드’의 이름이 나온다면 심장이 떨려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다지 가능성이 없으니, 최선의 답은 ‘아무도 없어.’다.

하지만 진은 어쩐지 아무 답이 없었다. 혹시 잠이 든 건가 싶어 내려다보자 아직은 눈을 뜬 채였다. 눈동자가 풀려있긴 하지만 아직 아웃 상태는 아니었다.

“진, 말해봐? 누구야? 그런 사람 있어?”

아이를 달래듯 등을 살짝 두드리며 그렇게 묻자 진이 웃으며 답한다.

“너.”

짤막하고 솔직한 그 답에 블리스의 얼굴에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피로 몰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혹시 자신이 너무나 바라던 바라 잘못 들은 건가 해 블리스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왼손으로 내리누르며 다시 물었다.

“……누구? 나라고?”

“응.”

이 말은 진심이다. 취했을 때의 진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 번 술에 취한 진에게 한국이 그립지 않냐고 했던 사실은 미치게 가고 싶다고 하더니 그대로 공항으로 달려가 티켓을 끊은 적도 있었다. 평소에는 “뭐, 언젠가는 가겠지.”라고 하던 진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었다. 물론, 진은 중간 과정을 싸그리 잊었기에 자신이 갑자기 술을 마시고 달려가 한국에 보내달라고 난동을 피운 걸로 알고 있다. 티켓을 끊고 비행기를 타려는 진을 말리느라 난동을 피운 건 자신이었지만, 하여간 진은 그가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린 걸로 알고 있다. 

어지간하면 취하지 않지만 살짝 취기가 오르면 지나치게 솔직해지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다.

예상대로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나랑 자고 싶다면…… 언제부터 그런 거야?”

“옛날에. 아주 옛날부터.”

“언제?”

“대학교 때쯤?”

“미치겠네…….”

자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은 통했던 모양이다. 그걸 놓쳤다고 생각하니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미리 알았다면 그냥 들이 받아버리는 건데, 괜히 시간만 버렸다. 

왜 미리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진이 취하면 아주 솔직해진다는 걸 안 건 5년 전인데, 왜 그때라도 미리 물어보지 않았을까. 이렇게 쉬운 걸, 이렇게 솔직하게 듣고 나면 편했을 걸.

블리스가 속으로 지난 5년간의 세월을 한탄하는 사이 진은 반쯤 남은 잔을 비우며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한때는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너랑 그냥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더 좋으니까. 사랑하다 헤어져서 아무렇지 않게 친구로 지낼 정도로 난 대범하지 못하거든. 아마, 계속 생각나고 슬플 거야. 그러니까 친구가 좋아.”

부드러운 어조로 칭얼거리듯 말을 마친 진은 빈 잔을 내려두고 블리스의 품을 밀어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야겠다. 좀 이따 쓰러질 것 같아.”

정확히 자신이 기절할 타이밍을 알아챈 진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뒤진다. 잘 공간을 찾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진을 잡아끌고 침대에 앉혀줘야 하는데 심장이 너무 심하게 두근거려 블리스는 의자 팔걸이에 기대앉은 채 멍하니 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블리스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핸드폰 걸이에 달린 은색의 지포 라이터 모형을 찾아 뚜껑을 열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 안에서 선명한 진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블리스는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두고 욕실로 들어가려는 진을 따라가 그 팔을 잡아 침대로 잡아끌었다. 

“여기서 자.”

“여기 네 침실이잖아. 난 옆방에서 잘게.”

“거기 욕실이야.”

투명한 문 앞에 선 채 멍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본 진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 그런가? 그런데 왜 이렇게 넓지? 저기 침대도 있는데?”

“욕조야. 여기서 자.”

“응.”

눈도 풀리고 혀도 살짝 꼬였지만 아주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그렇게 답한 진은 얌전히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리고는 곧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잠든 진을 내려다본 블리스는 손을 뻗어 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채 고개를 숙여 진을 내려다보자 꼬냑 특유의 달짝지근하면서도 독한 향이 흐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뱉어지는 숨결은 더없이 달콤하다. 지독한 알콜 냄새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핥은 뒤 입술을 겹쳐도 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푹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슬슬 자신감이 나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녀석이다.

사랑스러운 진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살짝 입술을 핥고는 슬쩍 진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미안……. 하지만 일단 사고는 치고 보는 거야.”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속삭인 블리스는 진의 위에 올라타 목가에 입을 맞췄다. 

일단 침을 발라두고 보는 거다.

***

“응?”

한창 달게 자던 중 갑자기 가슴을 후려치는 느낌에 눈을 뜬 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어쩐지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야?”

술을 너무 마셨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돌아보던 진은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짙은 금발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어제 블리스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시던 기억을 떠올리곤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술을 꽤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기절하듯 잔 걸 보니, 허용량을 초과한 게 분명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진은 머리를 안고 스윽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이상할 정도로 허전하다는 느낌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내 옷…….”

분명히 옷을 입고 잔 것 같은데, 좀 이상하다. 블리스야 원래 다 벗고 자는 녀석이라지만 자신은 옷을 입지 않으면 자지를 못하는 성격이었다. 뭐 하나라도 걸쳐야 편안한 느낌인데 이상하게 몸이 허전해 허리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기도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허벅지 사이에 이상한, 아이스크림이 말라붙은 듯한 자국도 하나…… 가 아니라 두 개, 아니 세 개.

“응?”

그러고 보니 뺨도 찝찝하다. 자다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손등으로 닦으려는데 이상하다. 이상하게 뻣뻣하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이상 사태에 다시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본 진은 허벅지 안쪽에 남은 이상한 멍 자국을 발견했다. 아니, 멍이라기보다는 약간 불그스름한 자국이다. 마치 모기에 물린 것 같은, 하지만 부어오르지는 않은 이상한 흔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은 놀라 옆에서 잠든 블리스를 돌아봤다. 블리스는 역시나 알몸이었다. 블리스야 다 벗고 자는 게 새로울 게 없으니 상관없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아주 이상하다.

“블리스. 일어나 봐.”

도저히 더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블리스의 어깨를 흔들자 블리스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골반 위에 입을 맞춘다. 그 느낌에 진은 “히익!”하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일어나 봐! 블리스 애클랜드! 눈 떠!”

대체 어젯밤에 술을 마시고 무슨 짓을 했나 싶어 진이 사정없이 블리스의 어깨를 흔들자 블리스가 부스스 눈을 뜬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진의 배에 입을 맞춘다.

“……왜?”

“왜는 뭐가 왜야?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봐! 내가 왜 홀딱 벗고 너랑 누워 있냐고?”

“거참, 보면 몰라?”

“모르겠으니까 널 깨웠지!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진은 창백한 얼굴로 블리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금까지 딱 다섯 번 정도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좋았던 적이 없었다. 처음 퓨즈가 나갔을 때, 인류의 적 노먼 맥캐인을 살려놨고, 두 번째로 퓨즈가 나갔을 때는 노먼을 붙잡고 블리스에 대한 감정을 하소연하는 바람에 약점을 잡혀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술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가 공항에 가 한국행 티켓을 끊어 놓고 집에 가겠다고 난동을 부렸었고, 네 번째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클리샤와 블리스의 일정을 전부 노먼에게 불어버렸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워튼 스쿨에 다니던 블리스가 보고 싶다며 비행기를 타고 가 블리스의 아파트 앞에 누워 동사할 뻔했었다.

그리고 이게 여섯 번째다. 어젠 또 어딜 가서 무슨 사고를 친 건가. 옷을 벗겨둔 걸로 봐선 풀장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찝찝한 자국들은 뭐란 말인가.

“너,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내가 또 한국 간다고 했어? 아니면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했어?”

“무슨 소리야? 너, 어제 아주 뜨거웠어. 너 할 때는 하더라?”

도대체가 따라갈 수 없는 대화의 비약에 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내가 뭘 해?”

전혀 모르겠다는 듯 진이 되묻자 그제야 블리스가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일어나 앉는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나랑 자고 싶다고 내 침대로 기어들어왔잖아. 그리고 입으로 해줬던 거 기억 안 나?”

“응?”

“이것 봐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블리스는 그대로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은색의 지포 라이터 모양의 핸드폰 줄을 잡고 버튼을 누르자 그 안에서 생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럼 누구랑 자고 싶은데? 진, 말해봐? 누구야? 그런 사람 있어?』

『너.』

『응.』

『나랑 자고 싶다면…… 언제부터 그런 거야?』

『옛날에. 아주 옛날부터.』

살짝 혀가 꼬인 자신의 음성에 진은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거짓말이야! 그거 작업한 거지? 내가 그랬을 리가 없어!”

진이 기겁을 하며 부정하자 블리스가 핸드폰을 흔들며 싱긋 웃는다.

“어이,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두고 거짓말을 해?”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네가 해주고 싶다면서 먼저 내 바지 벗기던 거 진짜 기억 안 나? 동영상으로 찍어둘 걸 그랬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난 절대 그런 짓 안 해!”

“확신할 수 있어?”

“그래!”

“진짜? 절대로 안 했다고 보장할 수 있어?”

“물론이지!”

“잘 생각해 봐. 진짜 그래? 장담할 수 있어?”

블리스의 연이은 질문에 진은 점점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는 건 없다. 에이먼의 돌피 이야기를 하다 술을 더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장담……할 수 있……을 거야…… 아마.”

“진짜로? 절대 아니라고?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 아니면 보안 테이프라도 돌려볼까? 침실에는 없지만 복도에는 있어. 네가 접시를 치우려고 나가는 내 뒤에 따라 나와 끌어안은 건 보일 걸?”

복도로 난 문을 손으로 가리키던 블리스의 말에 진은 기겁을 했다. 보고 싶지 않다. 절대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기억이 없다면 없는 대로 두는 쪽이 낫다. 확인을 하면 인정해야 한다. 그건 싫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세상에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일이란 아무도 모른다. 특히나 공항으로 달려가 한국행 티켓을 끊고 당장에 비행기를 타겠다고 난동을 부렸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봤을 때 술 취한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있어. 네가 먼저 덤벼들었어. 내 정액까지 마신 거 기억 안 나? 내가 그만두라는데도 마셨잖아?”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자신의 임가를 톡톡 손끝으로 두드리자 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입가를 만졌다. 뭔가 마른 것이 붙은 듯한 그 느낌에 진은 서서히 질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다고?”

“그래.”

“말도 안 돼…….”

“나도 놀랐어. 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다니.”

“잠깐! 그만! 제발 그만해! 그만하자. 나 좀 씻고 나올 테니까, 좀 이따 얘기하자.”

진은 우선 화장실로 피신하기로 했다. 이대로 두면 난투가 벌어진다. 먼저 전열을 가다듬고 머리를 정리한 뒤 다시 맞서야 한다. 지금은 블리스의 페이스다. 말려들면 끝장이다. 진이 먼저 백기를 들자 블리스가 침대에서 여유 있게 웃으며 손끝으로 욕실을 가리킨다.

“욕실은 저기야. 그리고 거기 있는 건 욕조고. 침대 아냐.”

“……응?”

“아, 네가 어제 거기 들어가서 욕조에서 자겠다고 하더라고.”

“내가?”

“그래.”

“맙소사…….”

할 수 있는 뻘짓은 다 했다는 생각에 진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차피 욕실 안이라도 유리문이라 밖에서 안쪽의 움직임을 훤히 보는 곳이긴 하지만 지금 진은 그런 걸 고려할 정신이 없었다.

“미치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지 않으니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블리스의 말을 믿을 수도 없다. 삽입을 한 건 아니다. 다리랑 엉덩이 쪽은 멀쩡하다. 그러니까 아마 진짜 오럴만…….

“말도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그랬을 리가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욕실 전면 거울을 본 진은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이상한 흔적을 품은 자신의 몸을 보곤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위와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맞으며 몸을 씻어내던 진은 그러다 문득 자신이 블리스의 정액을 마셨다고 한 말이 떠올라 그대로 다시 세면대로 달려와 칫솔을 들고 전투적인 칫솔질을 시작했다.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 그래, 그랬을 리는 없다. 하지만 혹시나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잇몸에 피가 나도록 이를 닦고 입안을 헹궈내던 진은, 문득 이 모든 문제들의 근원을 찾아냈다. 지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블리스와 했냐 안 했느냐가 아니다. 자신이 블리스에게 먼저 달려 들었느냐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도 자신이 블리스에게 미련을 갖고 있느냐 하는 사실이었다.

블리스가 워튼 스쿨에 입학했을 때 겨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런 결정에 섭섭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던 시간 덕에 마음도 많이 안정되었고, 또 미련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정리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에반이든, 노먼이든, 누가 물어도 확실히 끝냈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완전히 잊었다 믿었다.

그런데 만약, 진짜 만에 하나라도, 혹시라도 자신이 진짜 어젯밤 블리스에게 먼저 수작을 건 거라면…… 아직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가장 문제는 자신의 미련이다. 미련이 남았다면 그를 잘라낼 수 없다. 또 다시 같은 과정의 반복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블리스까지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있다. 이런 때에 마음이 흔들리면 아마 블리스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체면이나 평판 같은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걸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뭐해?”

세면대에 기대 선 채 숨을 몰아쉬던 진은 욕실 안에서 울려대는 목소리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뭘 그렇게 놀라? 하도 안 나와서 같이 씻으려고 온 건데. 점심은 나가서 먹자. 샤워해야지.”

세면대에 서 있던 진의 팔을 잡아끈 블리스가 샤워룸 안으로 들어서려하자 진은 몸서리를 쳤다.

“너 먼저 해.”

“뭘 따로 해? 볼 거 다 본 사이에.”

“난 못 봤거든?”

“지금 보고 있잖아.”

얼결에 샤워룸에 끌려들어간 진은 그제야 두 사람 모두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워낙에 기숙사에서 자주 봤던 거라 별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아무렇지도 않다. 어릴 때엔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괜찮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나 지금 네 알몸 봐도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런데 내가 먼저 달려들었다는 건 말도 안 돼.”

블리스가 샤워버튼을 누르자 미지근한 물이 사방에서 타져 나왔다. 진의 말에 블리스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듯 물줄기를 맞으며 진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곤 젖은 듯 촉촉한 푸른 눈동자로 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속삭인다.

“네 입속 아주 뜨거웠어. 그리고 몸도 아주 뜨거웠어.”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인 블리스가 진의 귀를 살짝 물어뜯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자 진은 소름끼치는 감각에 어깨를 살짝 떨었다. 생경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각이었다. 어쩐지 다리가 떨리며 아랫배 쪽이 울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다 싶어진 진은 블리스를 밀어내고 옆으로 돌아서려 했지만 블리스는 무작정 진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기억 안 나? 네가 먼저 다가와서 내 바지를 내리고 혀로 내 성기를 핥았잖아.”

물은 적당한 온수였다. 그런데 진은 어쩐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그랬다고?”

“그랬어.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의 손이 슬쩍 엉덩이에 닿아왔다. 

“나랑은 여기로 해도 좋다면서 벗고 들이댔잖아?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 내가 거절했지만…….”

블리스가 느긋하게, 마치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의 턱을 핥는다. 관능적이고 농밀한 그 행위에 진은 슬슬 아래 있는 물건이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블리스가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알아챈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나아질 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진, 난 해도 상관없어. 너라면 좋아. 네 안에 들어가면 미쳐서 그대로 싸버릴지도 몰라.”

“……음담패설은 나중에 하고……. 좀 비켜라.”

슬슬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성기의 느낌에 진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다 반쯤 발기한 블리스의 성기를 보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이 그에게 오랄을 해줬다는 건 절대 거짓말이다. 아직 다 커지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면 완전 발기했을 때 자신의 입에 들어갈 리가 없다.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진의 얼굴에 블리스가 간지러운 듯 웃음을 흘린다.

“그럼 그것도 기억 안 나겠네.”

또 뭐가 남은 거냐, 라는 얼굴로 진이 블리스를 올려다보자 블리스가 싱긋 웃으며 진의 엉덩이를 잡아끌어 바싹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너무 커서 힘들다고 울었던 거.”

“……농담이지?”

“진짜야. 녹음한 거 들려줘?”

“……거짓말이지?”

“녹음한 거 들려줄게. 어제 넌 진짜 섹시했어.”

순간 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58층 벽을 허물고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진짜 그랬다고?”

“응. 사랑스러웠어. 오늘 밤이라도 준비만 된다면 난 OK야.”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진의 엉덩이를 세게 틀어쥐었다. 아무래도 블리스는 진짜 할 의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블리스라면 한다. 블리스의 지난 연인 리스트에는 남자도 열두 명이 껴 있었다. 블리스는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할 수도 있다. 

순간적인 두려움에 진은 블리스를 바라봤다. 설마, 설마 하는 진의 시선에 블리스가 아주 달콤하고 섹시한 음성으로 진의 귓가에 속삭인다.

“끝내주게 해줄게.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슬쩍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바로 입구에 닿는 손끝의 노골적인 애무에 진은 성인들의 격언을 몸소 실천하기로 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너, 너무한 거 아냐? 두 달 만에 집에 가는데 멍을 달고 가라고?”

“네가 잘못 했잖아.”

오른쪽 관자놀이를 제대로 얻어맞아 시퍼런 멍이 든 블리스는 툴툴거리며 선글라스를 낀 채 차 문을 열었다. 오늘은 모처럼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라 먹색의 티셔츠에 흰색 면 재킷, 그리고 청바지를 입은 채였다.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캐주얼한 옷을 입은 블리스는 오늘은 애널리스트보다는 근사한 영화배우 같았다. 그것도 성인 비디오 전문 배우 말이다.

“가기 전에 들를 데가 있어.”

가벼운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진은 툴툴거리며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 안에 올라탔다. 블리스 역시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타며 잔뜩 약이 오른 투로 묻는다.

“어딜 들르는데?”

“43번가.”

안전벨트를 매던 블리스는 에이먼을 대신해 진이 돌피를 주문해 나르는 가게가 43번가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형 대신에 인형 사러?”

“응. 신제품 나오는 게 있어서 부탁해놨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바꾼 블리스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잔뜩 비틀린 어조로 묻는다.

“너는 안 쪽팔리냐?”

“안 쪽팔려. 네가 모으는 거라고 소문냈으니까.”

“하여간……. 이제 에이먼 부탁 들어주지 마. 네가 왜 에이먼 심부름을 해줘?”

“친구니까.”

“친구라도 그렇지.”

“운전이나 잘해.”

아직 쌓인 게 겹겹이라 진이 툭 내쏘듯 말하자 블리스는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진의 입에서 더 이상 병원가자, 굿 하자라는 말이 안 나온다는 건 진이 슬슬 이 상황을 현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진은 현실도피가 특기이긴 하지만 한 번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녀석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더 쉬웠을 거다.

“그래서 내 프로포즈에 대한 답은?”

“어제 말했잖아. 거절한다고.”

“날 덮치고도?”

“그 얘기하지 말랬지!”

듣기 싫은 그 말에 진이 으드득 이를 갈자 블리스가 진을 흘깃 쳐다보며 얄미운 투로 받아친다.

“어제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내고 오늘은 모르는 척 구는 거 너무 매너 없는 짓 아냐?”

“누가 매너가 없어? 그리고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녹음한 자료가 있다니까.”

“제발! 지금 그 얘기는 하지 말자. 나도 머리 정리 좀 하자고.”

“정리할 게 뭐 있어? 이미 질렀어. 선을 뛰어 넘었다고. 오늘부터 넌 내 애인이야.”

“난 넘은 기억 없거든?”

“왜 이러시나. 날 사랑하신다면서.”

“그건…….”

진이 막 그 사실에 대해 반박하려는 순간 청바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노먼인가 해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자 난생 처음 보는 번호였다. 거래처나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모두 저장되어 있는 터라 누가 전화를 한 건가 해 진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엘리에요.」

대뜸 엘리라고 하는 그 말에 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 누구시죠?”

「……엘레나요.」

순간 진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아무리 싫어도 그건 아가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너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당신 번호 따는 건 식은 죽 먹기죠. 블리스 번호도 알아냈는데.」

그래, 이 아가씨 마피아의 딸이었다. 깜빡했다.

“내 전화번호는 왜?”

「연적의 전화번호 정도는 알아둬야죠.」

“알아서 뭐하게?”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블리스 위치도 알죠! 난 위치 조작도 할 수 있어요.」

무슨 의미인지는 대강 알 것 같은데, 말이 틀렸다. 아니, 정확히는 단어가 틀렸다.

“……내 위치를 왜 조작해?”

「아, 그것도 몰라요? 핸드폰으로 위치 알아낼 수 있다고요.」

“조작이 아니라 추적이겠지.”

진이 정확하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자 엘레나가 침묵한다. 그리고 휘리릭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잡지에서 뭘 또 봤나 보다. 문제는 그걸 제대로 읽지 못하는 엘레나의 영어 실력이었다.

「조작이든, 추적이든, 하여간 각오해요. 당신들이 어디에 있든지 난 알 수 있어요. 당신이 있는 곳에 블리스가 있다 이거죠,」

엘레나는 득의양양하게 자기가 이렇게 능력이 있다고 말했지만 진은 순간 이 아가씨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뇌구조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거야 상관없지만…… 블리스 번호 알면 그냥 블리스 위치를 추적하지, 왜 날 추적해?”

뭘 그리 복잡하게 돌아가냐고 묻는 그 말에 엘레나가 침묵한다. 대신 옆에서 운전을 하던 블리스가 진에게 “타조야?”라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답을 한 진은 진심으로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전화를 끊어달라고 요청했다.

“더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아, 잠깐만요!」

“또 왜?”

「질투 스펠링이 뭐예요?」

“……j-e-a-l-o-u-s.”

「알았어요. 기다려요.」

“뭘?”

「협박문자요.」

“……협박 문자를 원래 이렇게 통보하고 보내는 거냐?”

「내일 편지로도 갈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신문 오려내느라 죽을 뻔 했어요. 제 성전인 보그랑 마리끌레르도 다 오렸다고요.」

“……저기, 엘레나. 아니, 엘리. 신문을 왜 오렸는데? 그냥 손으로 쓰지.”

「그럼 제 필테가 남잖아요.」

역시나 가능한 건 일반 수준의 대화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의 뇌는 고급 영어를 하기엔 무리가 있는 모양이다.

“필테가 아니라 필체야. 하여간 필체를 남기면 안 되는 편지를 보내면서 왜 미리 알려주는데?”

「원래 협박문은 그런 거잖아요.」

“너도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블리스가 자신에게 텔레비전 좀 그만 보라고 할 때의 기분이 이랬던 걸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터졌다. 과도한 매스미디어로의 노출은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따라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신문 오릴 생각 말고 읽어라.”

「하여간, 기다려요.」

“기다리는 건 기다리는데…… 너 파닉스(phonics)부터 다시 공부해. 서면 인터뷰하면 큰일 나겠다.”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세르게이가 책 잔뜩 사다줬어요.」

순간 진은 자신이 들은 이름이 맞는가 하는 생각에 엘레나에게 되물었다.

“……세르게이? 세르게이 네브즐린?”

「네. 우리 큰오빠요.」

미하엘 네브즐린의 장남이자 현재 러시아의 상권을 휘어잡고 있는 세르게이 네브즐린의 이름에 진은 경악했다. 미하엘 네브즐린이야 워낙에 나이가 있고 또 나름 원칙이 있는 사람이지만 세르게이 네브즐린은 다르다. 그가 현재 매춘과 총기 밀매, 그리고 마약에까지 손을 뻗어 가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합법적인 인력 사업에 몸담고 있지만 그의 실상은 진짜 마피아였다. 마피아 그 자체였다. 

사회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은발의 도도한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낸 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외모야 기가 막히게 잘 생겼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살 떨리는 남자였다. 사진을 보면서 이 사람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올지도 몰라, 라는 생각까지 했던 그 남자가 철부지 막내동생을 위해 기초 영어교제인 파닉스를 사다니. 뭔가 안 어울린다.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책도 사다주는구나……. 그것도 파닉스를…….”

「물론이죠. 오빠들이랑 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줘요.」

과연 그럴 듯하다. 세르게이에게 아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서른 중반의 남자가 서점에서 파닉스를 고른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여길 텐데-워낙에 유명인이라- 동생을 위해 그 쪽팔림을 감수하다니. 이 타조양은 가족들에게 진짜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네가 그 모양이구나?”

진이 이제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전화기 저편의 엘레나가 자신 있게 말한다.

「제가 그래서 예쁘죠. 전 러시아 공주에요.」

“공주치고는 너무 무식한 것 같은데……?”

「글 못 읽는다고 무식한 건 아니잖아요?」

“현재 러시아 대통령은?”

「……볼셰비키?」

“……너, 대체 몇 세기에 사는 거냐? 그리고 볼셰비키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다수당’이라는 뜻이야. 너, 너희 나라 말도 몰라?”

「그럴 수도 있죠. 우리 오빠들도 모를걸요.」

“……너희 나라 수도가 어딘지는 알아?”

「……모스키토?」

“너희 나라 수도는 모기의 본거지냐?”

「무스크……. 아니, 마스크…….」

모기에 이어 나온 무스크에 마스크까지. 더는 머리가 아파와 말할 기운이 없었다.

“……관두자. 내 머리까지 새하얘지는 것 같다. 공부해, 응? 다음에 전화할 때는 제발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알고 있길 바란다. 끊어.”

거기까지 말한 뒤 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블리스에 엘레나에 노먼까지, 아주 뒷골이 지끈지끈거린다.

“엘레나가 왜? 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블리스 역시 진이 궁금해 하던 바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그 말에 답해주기보다는 바로 떠오르는 바를 내뱉었다.

“엘레나. 얘 피부가 왜 좋은지 알겠어.”

“왜?”

“뇌가 깨끗하면 피부도 깨끗해지나 봐. 고민할 게 있어야 트러블이 나지.”

얼굴 예뻐, 몸매 죽여, 아버지는 러시아 마피아 대부에 큰오빠는 러시아의 대제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남자. 거기다 타고난 순백의 뇌덕에 스트레스도 안 받으니 피부가 백옥 같을 수밖에. 

진이 자신의 피부는 아주 썩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한탄을 하자 블리스가 환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너도 아직은 탱탱해.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때문에 하룻밤에 3년은 늙은 것 같아.”

“3년 늙었어도 동양인은 어려 보이니 괜찮아. 너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보여.”

블리스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 진의 머릿속은 터질 것 같은데, 블리스는 오히려 터트리고 나니 편한 모양이다. 

자신의 상황 따윈 상관없다는 듯한 블리스의 태도에 열 받고, 겨우 마음 정리하니 들이대는 블리스의 기가 막힌 타이밍에 더 열 받고, 아직도 마음을 정리 못 한 듯 망설이는 자신에게 또 열 받아, 머리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제 더는 피해나갈 구석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핑계를 댈 것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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