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야.”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떡- 하니 앞을 막아선 에반을 보자마자 블리스는 귀찮다는 듯 툭하니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멀뚱하니 그의 뒤를 따르던 진은 또 자기만 남겨두고 튀어버린 블리스를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너, 나 좀 보자.”
“……그만 좀 보지. 오늘 하루 동안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냐, 우리? 그러다 정분날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슬쩍 빠져나가려는데 에반이 진의 팔을 확 잡아끈다.
“까불지 말고 들어와.”
“왜 또 나한테만 그래?”
“저 녀석은 말이 안 통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무식한 사람이 최고다. 상식 있고 개념 있는 사람들만 손해 보는 세태를 저주하며 에반의 사무실로 끌려들어간 진은 그의 사무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이건 내 잘못 아냐.”
“너 새대가리냐? 아침에 내가 한 말을 그새 까먹고 억지 쓴다고 오냐 하고 달라붙어?”
“……손 다쳤잖아.”
“오른쪽 손목 기브스한 게 뭐? 그 정도로 안 죽어. 일하는 데도 지장 없고.”
“그렇긴 한데, 워낙에 까다롭잖아. 로이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다고 해서.”
“너 넘어간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뭐가?”
“그 손이 진짜 다친 건지 알게 뭐야?”
오늘 하루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그 일만 생각하던 에단은 악에 받친 듯 중얼거리다 아차 했지만, 진은 그 말의 의미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기브스까지 했잖아. 브렛이 그냥 기브스를 했겠어? 다쳤으니 했겠지.”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너 회계학 들었었지?”
“응. 블리스가 수학이 하도 꽝이라 같이 들었었는데?”
“너 CPA(Certified public accountant-공인회계사) 딸 생각 없어?”
“갑자기 웬 CPA?”
“문득 생각난 건데, 실력 썩히기 아깝잖아. 사교 관리도 중요하지만, 너도 그 동안 발 꽤 넓혀뒀고 우선 CPA로 시작해서 MBA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떨까 해서. 경력도 있고 너도 돈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채니까.”
에반이 오늘 하루 종일 앉아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어떻게든 진을 위해 블리스에게서 떼어놓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일단 블리스가 쉽사리 그렇게 두질 않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자신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로이와 진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원래는 매니저인 자신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멋대로 인사를 처리한 블리스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런다고 쪼르르 따라다니는 진도 문제는 있다.
그러니까, 합리적인 이유를 걸어 둘을 떼어놔야 한다. CPA를 준비하고 따는데 최소 3년에서 5년이고 MBA까지 따면 앞으로 못해도 7년가량은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다. 진은 아직 젊고 경력도 있으니 해볼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블리스도 반대할 수 없을 거다.
“난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데…….”
“잘 생각해봐. 언제까지 블리스 비서 노릇만 할 건데? 네 일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네 쪽에서 일할 전문가들은 많아. 회계학 성적도 좋았던 걸로 아는데 아깝잖아. 난 애초에 네가 영문과보다는 경제학부 쪽에 더 맞을 것 같았거든. 진지하게 생각해봐. 공부 더 하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너 정도 재원을 썩히는 것도 아깝고.”
딱 잘라지는 에반의 설명에 진은 조금 기가 죽은 듯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진의 연봉이 팔만 달라였다. 사교 담당 비서라는 게, 의외로 그 조건에 부합할만한 능력과 노하우를 가진 이들이 드문데다 사교계의 거물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꽤 고급 전문 직종이라 여겼는데 에반의 눈에는 그게 한심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선물과 카드를 고르고 기념을 맞추는 섬세한 작업이라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 이상 출신의 여성들이 하는 일이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에널리스트라는 지위를 갖고 하루에만 몇 억 달라의 돈을 이리저리 돌리는 에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우스울 만도 하다.
하지만 진은 나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블리스에게 필요한 인맥을 연결하는 건 결국 자신이었고, 그들과 블리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게 자신의 일이었던 지라, 정보가 가장 중요한 블리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여겨왔었다. 지금 에반의 말은 그 자부심을 산산이 깨부수는 말이었다. 그게 조금 섭섭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별거 아닌 거야?”
“그런 건 아냐. 네가 하는 일은 진짜 중요해. 하지만 네가 마흔이 돼서도 그 일을 할 거는 아니잖아. 그리고 블리스가 결혼을 하면 그건 부인의 몫이 될 거야. 네가 하는 일 중 절반 이상이 부인의 몫으로 돌아갈 일이라고. 물론, 내조만 하는 부인의 경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의 어깨가 축 쳐졌다.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다. 파티 관리나 중요한 손님들의 기념일이나 선물을 챙기는 건 그의 부인이 할 일이었다. 지금은 대신 할 사람이 없어 자신이 챙기는 것뿐이다. 대넌의 사교 관리를 하는 것도 결국 사라였다.
“……알았어. 생각해볼게. 난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봐서…….”
“평생 블리스 뒤치다꺼리만 하다 끝낼 생각이 아니면 너도 네 길 찾아. 지금 상태 좋지. 하지만 블리스가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할 건 아니잖아. 부동산 쪽은 블리스가 맡게 될 거야. 클레어는 역부족이야.”
블리스의 형인 애이먼은 현재 결혼 후 언론 쪽의 일을 하고 있었고, 블리스의 바로 아래 동생인 클랜은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는 딱히 사업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작가가 될 생각이라고 한 터라, 부동산 쪽은 클레어가 돕고 있었다. 하지만 대넌이 늘 블리스가 부동산 쪽을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Bliss사도 제법 규모가 있지만, 애클랜드 가 소유의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전국 지사부터 시작해 하루에 오가는 금액만 해도 천문학적이다. 그곳에 가면 블리스에게 따라붙은 전문 비서만 7명가량이다. 더는 자신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그래. 하여간 너 자꾸 블리스에게 놀아나지 마. 그 자식은 재미로 그러는 거야.”
“알아. 그래도 친구인 걸.”
“그래, 그 놈의 친구……. 그게 문제지.”
두 녀석이 동시에 친구타령을 해대는 통에 에반은 이제 ‘친구’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에반이 말을 끊은 사이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린 뒤 벌컥 하니 문이 열렸다.
“둘이 무슨 역적모의를 하는 거야? 날 회사에서 내쫓으려고?”
에반의 사무실에 저렇게 예의 없이 들어올 인간은 블리스밖에 없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쪽을 돌아봤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쳐들어온 블리스에게, 에반이 툭하니 말을 내쏜다.
“그래. 일은 안 하고 도망 다니는 오너 쫓아내자고 작당하던 중이야. 난 새벽 3시에야 집에 들어가는데 넌 벌써 퇴근한다고?”
원성이 가득 담긴 에반의 말에 블리스가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환자잖아.”
“겨우 그 정도 갖고 엄살이야?”
“겨우 그 정도라니. 골절이라고. 진, 가자.”
문 앞에 선 블리스가 먼저 돌아서자 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며 양복자락을 정리한다.
“알았어. 그럼, 갈게. 에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해.”
“그래. 내가 말한 거 잘 생각해보고.”
“알았어.”
에반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자 뚱하니 복도에 선 블리스가 사무실 안쪽을 슬쩍 보더니 진에게 묻는다.
“무슨 얘긴데? 뭘 생각해?”
“별거 아냐.”
“별거 아니면 말해도 되잖아. 뭔데?”
“CPA 따볼 생각 없냐고 해서.”
블리스의 말에 답하던 진은 그제야 가방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블리스가 왼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내밀며 묻는다.
“CPA?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뭐……. 비서 일만 하다 끝낼 수는 없고, 또 나 회계학 좋아했거든. 애널리스트 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너랑 에반이 가르쳐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서류가방을 받아든 채 블리스의 옆에서 복도를 걷기 시작한 진은 지나가는 직원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해보였다. 블리스 역시 인사를 건네는 사원에게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하곤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안 돼. 힘들어. 신경 쓸 일도 많고.”
“왜 안 돼? 너도 하는데.”
“나는 나고, 넌 아냐.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살아야 돼. 고객 관리도 그렇고, 보통 일이 아냐.”
“그 정도는 나도 해. 못할 거 없어. 그리고 고객관리는 너보다 내가 잘할걸.”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선 채 진이 툭하니 말을 던지자 블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을 내려다본다.
“뭐야? 진짜 애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어?”
“그건 아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잖아.”
“미래를 생각한다면 내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아. 너 주식으로 꽤 불렸잖아.”
처음 입사한 뒤 1년 간 모은 돈을 자기에게 맡기라는 그 말에 순순히 삼만 달라를 건네자 블리스는 그 돈을 일 년 만에 열 배로 불려주었다. 그리고 그 돈에 사만 달라를 더해 맡기자 다시 일 간 열 배로 불려줬다. 보통 만 단위는 돈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블리스였지만 자신만은 특별히 맡아 자산 관리를 해준 덕에 지금 자산은 상당하다. 문제는 그게 블리스의 능력이지 자신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거랑은 다르지. 그건 네 능력이고. 평생 너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잖아.”
“나 같은 친구를 둔 것도 능력이야. 너, 인맥이라는 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아직도 몰라?”
“그건 능력이라기보다는 운이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운 같은 건 없어. 블리스 애클랜드가 널 선택한 건 운이 아니라, 네 능력이야. 네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해주지도 않았어.”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먼저 들어서며 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블리스의 말대로였다. 블리스는 고객과 친구 사이를 정확히 구별 짓는 성격이었다. 고객들을 친구처럼 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친구가 되진 않는다. 그가 아는 대학 친구들이나 사적으로 친한 친구들의 경우는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돈을 버린 셈 치고 빌려주기는 할망정, 투자 관리나 자산관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었기에 블리스가 자산관리까지 해주는 거다.
그건 인정한다. 블리스에게 자신은 진짜 특별한 친구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역시 블리스는 특별하다.
“그런데 벌써 퇴근해도 돼? 너무 이른 거 아냐? 일 없어?”
막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진이 묻자 블리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환자잖아.”
“겨우 손목 부러진 걸로 환자 행세하려고?”
“교통사고라고. 교통사고 후유증이 얼마나 큰데. 특히 나처럼 쉴 시간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특히 더해. 푹 쉬어줘야 돼.”
“급정거가 교통사고면 파리도 새다.”
주차해놓은 차 앞으로 걸어간 진은 락을 풀고 차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자 조수석에 올라탄 블리스가 그의 가방을 뒷좌석에 던지며 웃는다.
“내 차가 재규어가 아니라 1970년 산 캐딜락이었다면 대형 사고 났어. 제동거리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급정거한 순간 차가 코앞에 있었어.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닿는 시간)이 5.3초밖에 안 되는 차를 끌고 막 액셀을 밟는 순간 앞에서 차가 멈췄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대형사고야.”
“그래, 라이언스경(윌리엄 라이언스-재규어의 전신인 더 스왈로우&카우치 빌딩 컴퍼니의 창시자 겸 디자이너)에게 감사해라.”
이미 시동이 걸린 차의 핸들을 쥐고 부드럽게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 뒤 기어를 바꾸자 춤을 추듯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실 블리스의 억지를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이 재규어 때문이었다. 블리스의 차는 스물여덟 대였는데 그 중 다섯 대가 재규어였고, 블리스가 가장 애용하는 차 역시 재규어였다. 그리고 진은 블리스의 재규어를 아주 좋아했다.
“내가 차를 갖고 가긴 그러니까 너 먼저 집에 내려주고 택시 타고 집에 가야겠다.”
“집에 가게?”
“응. 몇 블락 안 되니까 걸어가도 되겠네. 날도 좋으니 산책이나 해야겠다.”
다른 때보다도 이른 퇴근이라 진은 집에 돌아가 뭘 할까 고민 중이었다. 보통 사무실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8시에서 9시 사이에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럼 곧장 세탁물을 맡기고 샤워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저녁 식사도 하지 않은 채 6시 퇴근이라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선 맡겨놓은 세탁물을 먼저 찾아다두고, 그 뒤에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 시간이 많으니 영화라도 보러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은 다음 이어진 블리스의 말에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환자 혼자 두고 집에 가겠다고?”
“……뭐라고?”
“말이 그렇잖아. 내 손이 이 모양인데 날 혼자 두고 집에 돌아간다고? 저녁은 어떻게 하라고?”
“배달 시켜.”
“샤워는?”
그 질문에 차를 몰고 막 지상으로 빠져나가던 진은 자기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나한테 샤워까지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냐, 너?”
“그럼?”
“오른손이 부러진 거지, 너 병신된 거 아니거든?”
“오른손이 이래서 머리를 어떻게 감아?”
“왼손으로 감으면 되지.”
“찝찝해.”
“참아. 그러게 누가 급정거를 하래? 나도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 많아.”
“뭘 할 건데?”
“이것저것.”
“청소하고 세탁물 찾고 텔레비전 보고 앉아 있으려고?”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지적하자 진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오래된 친구는 좋지 않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세세히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네가 집에 가봐야 할 일이 집안일밖에 더 있냐는 듯한 그 말투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조금 오기를 부렸다.
“……나갈 거야.”
“어딜?”
“……영화 보러.”
“누구랑?”
“친구랑.”
“친구 누구?”
“친구 누구라면 네가 알아?”
“너한테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라 칭해지는 이들은 모두 블리스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그와 항상 딱 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을 사귀기를 꺼려하는 성격이다 보니 블리스를 통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니까 블리스는 자신의 방어선이었다. 블리스가 이 사람은 괜찮아, 라고 하면 사귀어도 된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안 돼, 라고 하면 사귀어선 안 된다. 처음으로 블리스의 조언을 무시하고 사귄 게 노먼 맥캐인이라는 녀석이었는데 그 뒤로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절대 블리스가 저 녀석은 안 돼, 라고 하면 사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친구들은 모두 블리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블리스가 모르는 친구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오기가 생겼다. 없어도 있다고 우겨야 할 것 같았다.
“있어. 네가 모르는 친구.”
“누군데?”
“……하여간 있어.”
“노먼 맥캐인?”
갑자기 나온 그 이름이 그렇지 않아도 오늘따라 노먼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던 진은 진짜 놀라 핸들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먼을 떠올리자 다시 퍼지는 살심과 블리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 자식은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릴 놈이야. 왜 기분 더럽게 걔 얘기를 꺼내?”
“아직 연락하나 해서.”
“연락 오면 당장 너한테 갖다 바칠 테니 걱정 마. 네가 죽여주면 나야 고맙지.”
“……진심이야?”
“진심이지, 그럼.”
“그럼 다행이고.”
노먼에 대한 이야기가 이 이상 나올까 진은 침묵한 채 조용히 차를 운전해갔다. 아직 러시아워에는 들지 않는 시간이라 꽤 수월하게 차가 나갔다. 몇 번 신호에 걸리기는 했지만 얼마 걸리지 않아 블리스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진은 차 문을 열어주는 어턴던트를 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사이 블리스는 안전벨트를 풀곤 뒷좌석에 있는 가방을 찾아들었다. 어턴던트가 차문을 열자 진은 내일 일정에 대해 물었다.
“그럼, 나 주차해놓고 갈게. 내일 아침 8시 30분까지 오면 되지?”
“그래. 아…….”
막 차에서 내리려던 블리스의 몸이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차 문을 잡고 기대며 힘겨운 듯 몸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턴던트가 그를 부축하자 진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블리스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좀 현기증이 나서…….”
“병원 갈까? 머리 다친 거 아냐?”
“그건 아냐. 그냥 좀 현기증이 나서 그래.”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블리스라면 분명 병원에 간 김에 전신 엑스레이를 찍고 MRI검사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골절상을 입었는데 병원에서 그냥 내보냈을 리가 없다.
“진짜야? 진짜 괜찮아?”
“응. 나 부축 좀.”
“그래.”
서둘러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 든 진은 차 열쇠를 주차 요원에게 맡긴 뒤 블리스의 가방까지 받아들고 그를 부축해 아파트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아파트지 블리스가 사는 아파트는 센트럴파크 남서쪽에 위치한 60층짜리 빌딩으로 한 층이 240평가량이 되는 넓이의 초호화 아파트다. 일반 매매 거래가가 삼천만 달라에 이르는 고급 주택인 만큼 경비와 보안이 엄격했다.
진짜 피곤한 듯 옆에 기대선 블리스를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가 서자 블리스가 카드 키를 하나 꺼내 건넨다. 키를 들어 엘리베이터 버튼 옆의 카드 슬롯을 긁자 멈춰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축 쳐진 블리스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서서 다시 한 번 카드 키를 긁자 자동적으로 58층에 불이 들어온다.
“진짜 괜찮아? 숨소리가 거칠다.”
“가서 쉬면 좀 좋아질 거야.”
말은 그렇게 하는데 블리스답지 않게 얼굴색도 유난히 붉고 몸이 뜨거운 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어깨에 걸친 팔에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블리스는 평생 감기도 모르고 살던 건강체였다. 지금까지 그를 15년이나 알아왔지만 호흡이 이렇게 거칠어지거나 몸에 열이 나는 일은 우동 후가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아니 대학 시절에는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때도 거의 하룻밤 앓고 가볍게 넘어간 정도였다.
“너, 열나는 것 같아. 몸이 뜨거워. 감기 걸린 거 아냐?”
진이 걱정이 되는 듯 그의 이마를 짚어주며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이젠 아예 진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그런가 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했는데 지금 블리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높고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진은 진심으로 블리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야, 너 진짜 이상해. 왜 이렇게 숨소리가 거칠어?”
그 사이 어느새 5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워낙에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문과 현관문이 아예 이어진 터라 블리스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은 그대로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가 보안 장치를 끄고 그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물 가져올게.”
유럽풍으로 시원하게 꾸민 하얀 응접실 안의 소파에 블리스를 앉혀둔 진은 가방을 먼저 내려두고 서둘러 주방을 향해갔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생수 병을 꺼내들고 막 응접실로 달려오는데 블리스가 보이지 않았다.
“블리스?”
이상하게 고요한 응접실을 돌아봤지만 그 안에는 블리스가 없었다. 침실로 간 건가 해 그쪽으로도 가봤지만 역시나 침실 역시 텅 빈 채였다.
“야, 어디 있어?”
말이 240평이지 이 안을 뒤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어차피 몸도 좋지 않은데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재나 다른 방들을 확인하기 위해 막 침실을 나서려는데 침실과 연결된 욕실 쪽에서 샤워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반투명으로 바뀌는 욕실 문 너머로 우뚝 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색감을 보니 아무래도 양복을 입은 채 달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블리스, 열나는데 목욕하면 안 돼!”
하지만 저 불투명 유리 안쪽에서는 아무런 답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어디가 심하게 아픈 건가 해 진은 우선 양복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푼 채 구두까지 벗어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욕실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는 안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블리스,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예상대로 블리스는 양복을 입은 채 샤워기 앞에 서 있었다. 위에서뿐 아니라 샤워 바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블리스는 이미 흠뻑 젖은 채였다.
블리스의 나쁜 버릇 중 하나가 아주 가끔씩이지만 몇 만 달라에 달하는 고급 양복을 입고 몸에 열이 나면 그대로 샤워기로 돌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대학 졸업 후에 없어졌다 했는데 아직도 못 고친 모양이다. 그것도 꼭 찬 물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너, 감기 든다니까.”
옷이 젖은 건 질색이기에 조심조심 안을 살피며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가 그제야 이쪽을 돌아본다. 물줄기 아래에 선 그는 지독하리만치 섹시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진은 화보 같은 광경에 매혹당하기보다 그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블리스, 어서 나와.”
“……몸이 뜨거워.”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쏟아졌다. 목이 잠긴 듯, 그리고 피로에 절은 듯한 음성이지만 동시에 열기가 느껴지는 음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픈 건가 싶기도 하고, 또 아픈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기도 해 진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나와. 너 지금 몸이 안 좋은 거야. 기브스까지 하고 그게 뭐야?”
샤워 룸 한쪽에 비치된 바스 가운을 들고 진이 블리스에게 다가가며 그렇게 말을 걸었지만 블리스는 샤워기를 끌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어차피 샤워는 해야 하는 거고, 또 이미 젖은 채인지라 진은 바스 가운을 다시 걸어두고 샤워기 옆으로 다가갔다. 순간 얼음물처럼 내리꽂히는 찬물의 한기에 몸을 떨며 진은 서둘러 센서 버튼을 눌러 온수로 바꿨다. 진은 한여름에도 반드시 온수로 샤워를 하는 타입이었다. 찬물은 질색이다.
“옷부터 벗어. 그리고 씻은 뒤에 식사하자. 왜 그래? 애들처럼.”
열이 난다고 무작정 찬물 속으로 뛰어드는 게 너무 아이 같은 발상이라 진은 물에 젖은 블리스의 양복 재킷을 벗겨주려 손을 뻗었다. 아마 오른손의 기브스 때문에 옷을 벗기 번거로워 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오른손을 못 써서라기보다 기브스에 소매부분이 걸려 잘 벗겨지지 않은 듯했다.
“팔 들어. 벗겨줄게.”
진은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지만 서서히 온수의 온기가 차 습도로 울리기 시작한 욕실 안에서 그 말이 상당히 묘한 의미로 들린 듯 블리스가 웃으며 농담을 한다.
“너, 욕실에서 그런 말 하면 얼마나 섹시한 줄 알아?”
“섹시 같은 소리 하네. 너랑 나랑 그럴 섹시 찾을 사이냐? 물 좀 꺼. 벗기기 힘들다.”
“……너, 이렇게 근사한 남자를 욕실에서 보고도 아무 생각도 안 들어? 달려들고 싶다거나 안기고 싶다거나?”
“네 입으로 근사하다는 말 하지 마. 넌 수치도 모르냐?”
블리스의 양복 재킷을 먼저 벗긴 뒤 한 팔에 건 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블리스의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 손길을 바라보며 블리스는 젖은 금발을 뒤러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젖은 넥타이를 다 푼 진은 “실크라 다신 못 쓰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이번엔 블리스의 셔츠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 손길에 블리스는 조바심이 나는 듯 한 걸음 앞으로 가 진을 샤워룸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진이 인상을 쓰며 뒷걸음질치다 고개를 든다.
“뭐야?”
진의 검은 머리카락이 습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진도 물을 맞아 온몸이 젖은 채였다. 물에 흠뻑 젖은 그 모습에 블리스는 아찔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진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그리고는 조금 들뜬 음성으로 진에게 묻는다.
“나, 남자들한테도 꽤 어필하는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날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갑작스레 뺨을 감싸 쥔 블리스의 손길에 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해주었다.
“좋은 친구지. 근사하고 다정하고. 넌 멋있어. 누구나 널 사랑할 거야. 그건 장담해.”
“너는?”
“나도 널 사랑하지, 당연히. 뒤로 돌아봐. 셔츠 벗어야지.”
귀찮다는 듯 무성의하게 답하며 블리스를 재촉하는 진의 말투에 블리스는 돌아서지 않고 진지한 눈으로 진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그에게 밀려 얼결에 벽에 등을 대고 선 진은 이건 또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다 순간 열에 들뜬 듯 뜨겁고 강렬한 시선에 숨을 멈췄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못되었다. 알 듯 말 듯 묘한 상황에 진은 일부러 그 눈빛을 외면하고 돌아서려했다. 하지만 이번엔 블리스의 두 팔이 진이 기대고 서 있던 벽을 짚고 가로막는다.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
무거운 음성이었다. 언제나의 그답지 않은 어조와 이상한 대사. 욕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서서히 선명하게 그려지려하자 진은 재빨리 웃으며 블리스를 바라봤다.
“널 사랑하면 이 아파트에서 떨어지라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네 대신 엘레나의 총을 맞아달라거나?”
억지로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블리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언제나 파란 하늘처럼 맑게 빛나던 눈동자가 무거운 바다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진은 그런 눈이 싫었다.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친구,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가끔은 형 같고, 또 가끔은 귀여운 동생 같은 친구. 그게 블리스 애클랜드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는 자신이 아는 블리스가 아니다.
“샤워하고 나와. 식사 준비해줄게. 머리 감을 수 있어?”
“…….”
“나 먼저 나갈게. 양복은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넥타이는 버려야겠다. 그러게 왜 비싼 옷을 입고 이런 짓을 해?”
진이 다시 시선을 돌리며 돌아서려하자 블리스의 손이 진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손의 움직임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기에 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불과 10분 전 만해도 즐거운 하루였다. 에반에게 욕 좀 먹고 타조 머리가 사고를 쳐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타블로이드판 날조 기사 따위야 늘 있었던 일이고, 기면 기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히 문제될 게 없는 하루였다. 블리스가 조금 다쳤고 또 아주 조금 복잡한 인수인계 문제가 있다는 것 외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지금 순간은 태어나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블리스, 너 왜 이래?”
진이 조금 놀란 듯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묻자 이번엔 블리스가 싱긋 웃는다. 억지로 웃는 얼굴이었다. 눈가와 입매가 잔뜩 굳어 있다.
“……내가 원하면 뭐든 해줄 수 있어?”
“같이 죽자는 거 빼곤 다 해줄 수 있어.”
사실은 같이 죽자고 해도 죽어줄 의향이 있었다. 블리스의 부탁이라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일부러 농담처럼 그렇게 말을 자르자 블리스가 강제로 턱을 들어올린다.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진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뜨겁고 애절해 두려울 정도였다.
방금 전부터 시끄럽던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댄다. 여기서 더는 안 된다. 이 이상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도망쳐야 한다. 서둘러 이 안에서 저 밖으로 도망쳐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달리 몸은 잘 움직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거세게 쏘아대는 물줄기에 금세 욕실 안은 뿌옇게 흐려졌다. 전신 저울도 샤워룸 안의 불투명한 유리문도 전부 뿌옇게 흐려진 채였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널 안고 싶다면 내게 안겨줄 수 있어?”
쿵하며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전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었기에,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읽힌 듯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이 말이 진담일 가능성은 단 0%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장난이고, 농담일 것이다. 아주 가끔, 진짜 아주 가끔씩 블리스는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자신이 놀라 심각하게 반응하면 블리스는 곧 웃으며 얼굴을 풀고 그걸 믿었냐는 듯 놀려댄다.
그러니까 넘어가면 안 된다. 언제나와 같은 질 나쁜 장난이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되새기며 진은 자신을 달래도 또 달랬다. 넘어가면 자신만 손해다. 자신만 상처 받는다. 늘 그랬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진은 정면으로 블리스의 눈을 바라보며 드물게도 진지한 투로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블리스, 네가 원하면 난 너랑 잘 수 있어. 하지만 넌 안 그럴 거야. 사라와 넌 내겐 유일한 가족이니까.”
딱 잘라지는 그 말에 블리스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을 가로 막고 있던 팔이 툭하니 떨어지자 진은 재빨리 젖은 블리스의 옷을 들고 샤워룸을 나가 욕실문 앞에 놓인 바스켓에 블리스의 옷을 집어던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요란하다. 너무 요란해서 귀청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다시 혼자 남은 샤워룸에서 블리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이 초조해 밀어붙인 게 화근이다.
“멍청하긴…….”
진이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고 있다. 아닌 척하지만 진의 마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버림받을까, 또 다시 언제 혼자 남겨질까, 늘 그런 생각을 하고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었다. 깔끔하고 영리하고 성격 좋고, 세심하며 섬세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진은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서툴고, 남에게 어리광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선물 하나를 건네도 그 선물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치를까 전전긍긍하며, 기분 나쁜 기색만 보여도 그가 잘못한 게 아닐까, 뭔가 실수를 해 상대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애를 태우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에게 갑자기 다가서면 무서워 도망칠 게 뻔했다. 그래서 천천히 시작해볼 생각이었다. 아주 천천히, 확신이 생겼을 때 물처럼, 공기처럼 스며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초조해진다.
10년이었다. 딱 10년이라고 자신에게 유예기간을 주었다. 만약 이 감정이 10년 뒤에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확신을 갖고 대쉬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었다. 만약 진짜 10년 동안 자신이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게 영원할 테니, 그때는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서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다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변덕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기에,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와 진에게 한 맹세였다.
그러니까 그건 막 대학에 입학했던 첫 해의 일이었다.
「노먼 저 자식 좀 누가 내쫓아줘!」
샤워를 마친 진이 짧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투덜거리며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유난히 높고 화가 난 듯한 진의 태도에 옆을 돌아보자 진이 온몸이 새빨개진 채 화를 내고 있었다. 옷도 조금 젖은 채였다. 샤워를 한다고 가서는 젖은 채로 나온 그 꼴에 심장이 떨려 모른 척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
「왜 또?」
「샤워 중에 쳐들어와서 장난을 치잖아. 갑자기 온수를 최고로 트는 바람에 화상 입을 뻔했어.」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기숙사에는 또라이 둘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먼 맥캐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진 케이먼이었다. 두 번째 또라이는 무시무시한 수학능력을 자랑하며 영문과에 있던 탓에 또라이보다는 괴짜로 알려져 있었지만, 첫 번째 또라이는 케이블 방송의 유명 프로 ‘Loosers(머저리들)’에나 나올 법한 또라이 중의 또라이라 모든 이들로부터 경외시 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또라이가 아무래도 진에게 관심이 지대한 듯했다. 기숙사 입소 첫날 있었던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신고식 때 기숙사에 불을 낼 뻔하다 술독에 빠져-진짜 커다란 술통에 녀석을 집어넣고 술을 들이부었다.- 죽을 뻔했던 녀석을 진이 살려놓자, 그 뒤로 노먼은 진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간섭을 하고 챙겨주고, 또 가끔씩 욕실에까지 쳐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다. 진은 그게 단지 괴롭힘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자신이 보기엔 아니었다. 그건 또 다른 관심의 표명이었다.
또라이 중의 상 또라이지만 거대 로우펌 Jack&Clide의 파트너인 잭 맥캐인의 아들이자 지방 판사와 검사보만 일곱 명을 배출한 법조계의 명문가 맥캐인 가의 장남인 까닭에 그를 이 기숙사에서 쫓아낼 사람은 없었다. 또라이 클럽이라 불리지만 알파베타감마 기숙사는 기본적으로 정재계뿐 아니라 법률과 언론, 방송계의 거물들의 아들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이었다. 진이 처음 이 기숙사로 들어올 때는 자신이 하인까지 데리고 입소한다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모두들 나름 진의 실력과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자신의 장래 보좌로 보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노먼 맥캐인이었다.
「무시해. 네가 상대해주니 더 난리잖아.」
책을 슬쩍 내리고 옷장을 열고 옷을 꺼내는 진의 다리를 힐끔 훔쳐봤다. 탄력있고 긴 다리가 쭉 뻗은 채 아른거리자 또 다시 숨이 가빠왔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둘만 살면 좋겠다 싶어 들어왔지만 하루하루가 고문이었다. 차마 건들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보고만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특히나 저렇게 무방비하게 옷을 벗고 설칠 때는 차라리 다 포기하고 일을 저질러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 바라보다가는 진짜 사고를 칠 것 같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자꾸만 진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언젠가 날 잡아서 한 번 죽여놓을 거야. 장난도 한두 번이라야 참지.」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원래 그런 녀석이면 내가 안 이러지. 그 녀석이 쓴 소설을 보고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데. 그거 그 자식이 쓴 거 맞기나 해? 어디서 사온 거 아냐?」
진이 노먼 맥캐인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영문학 수업 중에 그가 제출한 단편 소설 때문이었다. 처음 그 소설을 낸 게 노먼 맥캐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던 진은 외로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흐르는 듯 부드럽고 은유적인 문장들이 최고라며, 이런 녀석이 같은 학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몸부림을 쳤었다. 하지만 곧 그 소설을 낸 학생이 노먼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그 소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곧 다시 찾아가 소설을 다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노먼과 진의 사이에는 통하는 게 있었다. 그렇게나 사람을 싫어하는 진이 저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노먼을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 받아줄 정도로, 말이다.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노먼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게 우정인지 존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진의 감정은 어떤지, 혹은 노먼이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툭하니 미끼를 던졌다.
「그 자식이 널 사랑하나 보지.」
젖은 옷을 벗어두고 청바지와 흰 티셔츠로 갈아입은 진이 그 말에 대경실색한 얼굴로 받아친다.
「돌았냐? 무슨 사랑이 그 따위야?」
「그러지 않고는 너무 끈질기잖아.」
「아서라. 그런 사랑 줘도 하나도 안 고마워. 그딴 장난에 휘둘릴까 봐?」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면?」
「지나가던 개나 주라고 그래. 난 연애는 안 할 거야.」
뜻밖의 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두고 진을 바라보자 진이 그의 책상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이쪽을 바라본다. 언제나와 같은 태연한 얼굴이지만 그 표정 안에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진심으로 연애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기쁜 반면, 또 불안해졌다. 아무와도 연애를 안 한다니 건들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자신에게는 횡재인 셈이지만, 그렇다는 건 자신과도 연애는 안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돌진해버린다 해도 진은 받아줄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혹시 진짜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연애를 안 하다니? 왜?」
「그냥 적당한 나이 되고 자리 잡히면 에반의 어머님이 소개해주시는 한국 여자랑 결혼할 거야. 연애는 안 해. 연애 같은 거 하면 헤어지잖아.」
무슨 순결 선언도 아니고, 조신한 귀족가문의 아가씨 같은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이 터졌다. 대체 몇 세기에 살고 있는 거냐, 이 녀석은?
「너, 결혼해도 이혼이 성립한다는 걸 모르냐?」
「그래도 싫어. 종신계약 아니면 난 안 해.」
「어이, 잠깐. 연애가 무슨 보험이냐? 너, 연애를 무슨 생명보험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한테는 비슷해. 헤어질 거면 연애도 사랑도 안 해. 사랑하다 버림 받으면 어떻게 살아?」
「그건 무슨 헛소리야? 사람이 만나다 헤어질 수도 있지. 연인과 이별한다고 죽는 사람은 없어.」
어쩐지 그 동안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잘 버틴다 했더니-덕분에 진이 게이라는 소문이 고교시절 내내 따라다녔지만- 그런 이유였다니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연인에게 버림 받았다고 죽었다는 사람은 지금까지 못 봤다. 아니, 적어도 자신은 들어보지 못했다. 언젠가, 혹시라도 자신이 그에게 고백할 때를 대비해 베이스를 깔기 시작하자 진이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팔짱을 끼고 앉으며 말한다.
「넌 버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몰라. 버림 받지 않고 버리기만 하던 사람은, 그 기분이 어떤 건지 몰라.」
「진, 너…….」
「하여간 그래. 버림 받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돼.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런가, 내가 잘못해서 그런가, 내가 뭘 잘못 했을까,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인가.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이제 그런 생각하기 싫어. 지금까지 지겹도록 해왔어. 떠나는 사람 등 쳐다보고 있는 것도 싫고, 나 싫다고 버린 사람 생각하며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것도 싫어. 한 번 더 버림 받으면 난 진짜 죽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5년을 진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살아왔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그늘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던 진이다. 늘 웃으며, 파양당한 아이 특유의 비굴함이나 어색함을 보이지 않아 가족들 모두 그의 낙천적인 성품을 칭찬하고 좋아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었다. 상대가 과한 호의를 보이면 반드시 그에 대한 인사를 하고 어떻게 답례를 할까 늘 고민하며, 그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척했다. 그게 단지 진이 워낙에 원리원칙에 강하고 보수적인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를 하고 학교 생활 중에서도 흠 잡힐 것 하나 없이 완벽한 모범생이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틈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와 조금이라도 실망을 시키면 누군가 그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던 거다.
「한국 속담 중에 참을 인(忍)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어. 세 번은 참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보통 사람도 세 번이상은 안 건들지. 두 번, 세 번까지는 건드려도 네 번째는 포기하니까 세 번만 참으면 어지간한 고난은 지나간다는 뜻이야. 나도 세 번을 참았어. 세 번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네 번째는 아냐. 네 번째는 못 겨딜 거야.」
「……그래서 연애를 안 한다고?」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던 진은 그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런 거지.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블리스, 넌 다 가지고 있으니까 모르겠지만……. 난 네가 갖고 태어난 모든 걸 내 스스로 얻어야 돼. 애초에 없는 가족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성취하고 얻어내야 돼. 돈도 직장도 가정도 모두 마찬가지야.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막막하고 기가 차는 일인지 넌 몰라. 너는 리무진을 타고 라스베가스를 달리겠지만, 난 맨발로 물길을 뚫어 나무를 심고 황무지를 일궈야 돼.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연애 같은 거 할 여유가 없어. 넌 달릴 때 난 걸어가야 돼. 감정의 소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그리고 난…… 아마 사랑을 하면 그걸로 끝일 거야. 딱 한 번만 할 거야. 내가 날 알아. 난 두 번 사랑은 못해. 무서워서. 그러니까 내 인생의 사랑은 한 번뿐이어야 돼. 종신보험밖에 없어.」
「네가 그런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난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네가 될 수 없어. 그리고 너도 내가 될 수 없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날 알겠어? 나도 아직 널 모르겠는데.」
진의 말대로 자신은 그를 모른다. 하지만 분명 진도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지금 그 말로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벽을 두껍게 쌓고 그 벽을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선언을 하는 순간,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따라 달려오겠다는 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단 한 번의 영원한 사랑을 원한다는 진을 위해 모든 감정들을 꾹꾹 노르고 참아야 했다. 섣부른 혈기로, 순간적인 충동으로 진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어설픈 감정으로 시작했다가는 진도 자신도 끝장이었다.
그래서 10년을 자신에게 주었다. 10년 간 만약, 10년 뒤에도 자신의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도 여전히 진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사정없이 들이받겠다고. 그때까지 자신의 감정이 유효하다면 그건 영원한 것이니, 그때는 제대로 고백을 하고 그를 자신의 리무진에 태워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사흘 전 정확히 그 날로부터 10년이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과는 별개로 진은 여전히 자신을 친구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초조했다. 15년 간이나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친구의 자리를 지키며 바라보던 진을 설득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한 것이다.
인정한다. 자신은 진을 지나치게 만만하게 생각했었다. 열정적으로 대쉬하고 다가서면 진의 성격에 곧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의 가슴 속 깊이 박힌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을 치구로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사회적 지위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자신의 미래도 아니었다. 진짜 가장 큰 문제는 진 케이먼의 마음을 여는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블리스는 축 쳐진 채 샤워를 마치고 나와 드레스룸으로 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진이라도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멀쩡한 팔에 기브스까지 하곤 조급함에 시작하자마자 일을 망쳐버렸다. 처음 병원으로 쳐들어가 멀쩡한 팔을 기브스해달라고 했을 때 브렛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거의 “너 미쳤냐?”라는 얼굴을 하는 그에게 좀 쉬어야겠다며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 겨우 오른손에 석고를 바를 수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반드시 떼겠다는 약속을 한 뒤 진을 부르고 겨우 집에까지 끌고 왔는데, 그걸 참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
애초에 부축을 해달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쉽사리 집까지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아 머리를 쓴 건 좋은데, 진이 가까이 다가서면 흥분한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동안 이골이 날대로 나 이젠 괜찮다 여겼지만, 진의 피부가 닿고, 그의 체취가 느껴지자 미칠 것 같았다.
어떤 남자가 10년이나 참고 참으며 지켜만 보던 상대가 바로 눈앞에서 무방비한 채로 있는데 참을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진도 그 점만은 인정해줘야 한다. 평생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 녀석은 모르겠지만, 그와 한 방을 쓰고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그리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꼭 알아야 한다. 거기다 스스로에게 맹세한 대로 10년이나 참았으니, 그 점도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진과 연인 관계가 된 후의 일이지만.
“어떻게 냉장고가 텅텅 비었냐?”
한숨을 내쉬며 응접실로 가는데 주방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놀라 주방 쪽을 들여다보자 냉장고를 뒤지던 진이 툴툴거리며 계란과 베이컨을 꺼내든다.
그새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채였다. 그리고 옷도 이 아파트에 가져다놓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너, 뭘 먹고 사는 거야? 아무리 집에서 아침만 먹는다고 해도 심하잖아. 메이드는?”
분명히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이 멀쩡한 얼굴로 요리를 하고 있자 블리스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막 프라이팬을 꺼내던 진이 이상하다는 듯 블리스를 쳐다본다.
“귀신 봤어? 얼굴이 왜 그래?”
“아니……. 그냥 주문하지?”
“오래 걸리잖아. 가볍게 먹자. 약은?”
진이 블리스의 오른쪽 손목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는 대강 “뭐, 약은 안 좋으니까.”라고 얼버무렸다. 멀쩡한 팔에 기브스를 하고 진통제까지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부러진 거면 고통이 상당할 텐데, 괜찮아? 진통제나 소염제 처방 안 해줬어?”
“주사 맞았어. 커피는 내가 내릴게.”
서둘러 말을 돌린 블리스는 넓은 아일랜드식 주방의 한쪽 구석으로 가 커피 메이커 앞에 섰다. 그리고 커피 메이커가 있는 위쪽 선반을 뒤져 일회분이 포장이 돼있는 원두커피를 찾아 들었다. 어설픈 동작으로 물을 받고 커피를 넣다, 블리스는 어떻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아, 존 에스터가 굉장히 좋아하던데. 뭘 보낸 거야?”
“그냥 화분.”
“화분을 좋아하던가? 원예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냥. 그런데 왜?”
“존이 날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런데 오늘 그 까다로운 존이 주말에 사냥을 하러 가자고 하더라고. 퇴원하는 대로 자기 별장으로 초대하겠다고. 너도 데리고 오라던데.”
이제 블리스가 보내는 선물과 카드는 블리스가 아니라 진이 처리한다는 건 사교계 내의 모든 이들이 아는 비밀이 되어버렸다. 서덜랜드 회장도 그렇지만 존 에스터라는 거물까지 대놓고 그렇게 나오자 블리스도 더는 속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차피 블리스는 그들을 형식적이나마 챙겨주는 것뿐이고, 그들 역시 블리스가 보내는 선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니까. 사실 그런 것들을 못마땅해 하던 거물들-특히 존 에스터-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도 이젠 블리스의 아래에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부하 직원이 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듯했다.
“대체 뭐라고 한 거야? 존 에스터가 친절하게 주말 초대까지 하고 말야.”
“그냥, 시를 보내줬지.”
“뭐라고?”
“Nine hundred and ninety-nine can`t bide the shame or mocking or laughter. Nut the thousandth man will stand by your side. To the gallows-foot- and after.”
진이 읊어준 시의 한 구절에 블리스는 커피 메이커의 버튼을 누르곤 팔짱을 끼며 돌아섰다.
“키플링?”
“응.”
“그거 너무한 아부 아냐?”
“아부?”
“그래. 내가 평생 당신 편이 되어주겠소, 이런 거 아니냐고? 존이 아부에 약한 줄은 몰랐는데?”
순간 베이컨을 굽고 막 계란을 깨넣으려던 진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네 얘기 하냐.”
“그럼?”
“지금 에스터 그룹 동반 창시자인 그렉 위블리의 철강 산업 부실 경영 문제로 난리잖아. 대주주인 존은 입장 상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워낙에 친한 친구이고, 또 에스터 그룹을 같이 일군 사람이라 난감해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그것 때문에 쓰러진 것 같길래, 시를 보내준 거야.”
그제야 알겠다는 듯 블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렉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야?”
“그건 그 사람이 판단할 몫이지. 하단에 간단하게 썼거든. 당신의 인생 끝에 무엇이 가장 큰 재산으로 남았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할 거냐고.”
“그건 너무 건방진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죽는 최후의 순간 떠오르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 너밖에 없더라고. 그리고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자 최대의 자산이니까. 돈이나 명예를 죽어서 갖고 갈 건 아니잖아.”
진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지금 블리스에겐 그 말이 곱게 들리질 않았다. 방금 전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고도 너무나 멀쩡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친구 운운하는 진이 어쩐지 야속하고 또 뭔가 알아채고 미리 방어막을 치려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너 뭘 알고 이러는 거야?”
“뭐가?”
“내가…….”
“네가 뭐?”
“……내가…….”
“엘레나랑 자주 만나더니 너까지 문맹이 됐냐? 왜 말을 더듬어?”
접시 두 개를 꺼내 반숙으로 익힌 계란과 베이컨을 담고 튕겨져 나온 토스트 두 개씩을 담은 진은 옆에 있던 트레이 위에 접시 두 개를 내려두고 냉장고를 열어 그 안에 있던 개별 포장이 된 치즈와 버터를 꺼내 올렸다.
“커피는?”
진의 물음에 뒤에 있던 커피 메이커를 돌아본 블리스는 딱 두 잔 분량 정도가 내려진 포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어.”
“잔 꺼내줄게.”
수납장을 뒤지던 진은 하얀색의 평범한 머그 잔 두 개를 꺼냈다. 하지만 그걸 본 블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응접실에 있는 잔을 써.”
“어, 그건 아니잖아.”
“상관없어.”
블리스는 짤막하게 그렇게 답한 뒤 포트만 들어 트레이 위에 올린 뒤 트레이를 밀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진은 멀뚱한 얼굴로 그런 블리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라 함은 애클랜드가에서 특별 제작한 식기 중 하나로, 독일의 명인이 블리스를 위해 제작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부부 찻잔 세트였다. 셀레브리티들이라면 응당 에르메스, 라리끄, 로얄코펜하겐을 쓸 거라 여기지만 진짜 셀레브리티들은 브랜드가 아닌 개인에게 테이블 웨어를 주문한다.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명인의 손으로 만든,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테이블웨어를 원하는 거다. 로얄코펜하겐 급은 파티에나 가볍게 내놓는 제품들이다.
블리스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가구를 비롯한 가방과 식기들, 그리고 옷과 향수까지-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최고의 명인들이 만들어낸 이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들이었다. 갑부들은 향수조차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이 아닌 프랑스의 향수 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다는 걸 열여덟 살 때 처음 알았다. 블리스 역시 사각형의 긴 병에 ‘Bliss Bless kiss’라는 이름이 새겨진 향수를 사용한다. 물론, 그 향수는 이 세상에 오로지 그 한 병뿐이고, 블리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일과 샤워코롱 역시 수작업으로 제작된 천연제품만 사용한다.
보통은 명인이 제작한 수공예품이라도 고유넘버를 적기 마련인데, 블리스가 쓰는 것들은 모두 그 아래 명인의 이름과 함께 블리스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다른 식별 코드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그 부부 찻잔은 찻잔 아래 백금으로 블리스의 이름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탐낼 정도로 가치가 있는 상품이었다. 블리스의 말로는 그 장인이 만든 마지막이자 최고라 칭해지는 찻잔이었던 탓에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라고 한다. 경매에 내놓으면 백 만 달라 이상은 너끈히 받을 거라 자신의 앞에서 자랑을 하며 유난히 아껴 늘 응접실의 장식장 안에만 놓아두던 그 찻잔을 쓴다니, 이상하다기보다 충격적이었다.
혹시나 설마 하는 것들이 자꾸만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친다. 블리스의 태도가 너무 이상하다. 그가 하는 행동들, 그리고 말투 모든 것들이 이상하다. 다른 건 따지지 않더라도 당장에 그가 트레이를 끌고 간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하다 칭할만하다. 물건을 떨어트려도 절대 스스로 먼저 줍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다. 처음 블리스를 만나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과 타인에게 하는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저택 안에 있는 가정교사 중 자세를 교정해주는 이들의 교육 방법을 듣고는 기절할 뻔한 기억도 난다.
인사를 해도 절대 허리를 숙이지 않고 고개만 15도 정도로 숙일 것,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절대 시선을 피하지 말 것, 의자에 앉을 때에도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등을 편 채 목을 곧게 세울 것. 시선을 움직일 때 역시 목이 아닌 눈동자로 부드럽게 움직일 것. 절대 먼저 상대에게 악수를 청하지 말 것. 물건을 떨어트려도 먼저 줍지 말고 상대가 주어주길 기다릴 것. 상대가 아무리 짐이 많아도 짐을 들어주지 말 것. 아무리 귀한 선물이나 연인에게 선물할 꽃이라 해도 손에 짐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지 말 것. 스스로 문을 열지 말 것.
일반적인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 교육 방법에 진은 기함했다. 물론, 아이를 대할 때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다거나 여자를 에스코트할 때는 절대 먼저 앉지 말 것과 같은 상식적인 것들도 있었지만, 과반수이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과는 다른 것들이었다. 그리고 블리스는 배운 대로 행했다. 자신의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가벼운 티파티에서도 상대를 대할 때엔 늘 압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에이먼이나 클랜, 클레어도 마찬가지였지만 체구나 분위기나 블리스만큼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런 블리스가 트레이를 끌고 갔다는 사실을 진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블리스는 다른 건 몰라도 뭔가를 들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짐이 흘러넘쳐도 도와주는 일이 없었다. 책이나 짐을 들어준 건 오히려 노먼이었지, 블리스는 절대 자신의 짐을 나눠들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블리스는 그의 가방과 식판 외엔 절대 손에 뭔가를 드는 일이 없었다. 교제중인 여성을 아무리 여왕처럼 대해준다 해도 그녀의 작은 클러치 한 번 들어준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줄 선물도 전부 배달시켰고, 꽃조차도 수행비서인 로이에게 들게 했다. 데이트 시에도 늘 비서를 함께 데리고 다녔기에 데이트 중인 여자에게 차 문을 열어주는 것도 비서의 몫이었다.
그래, 블리스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블리스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린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해?”
트레이를 끌고 나간 블리스를 따라 나온 진이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담아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뭐 그리 대수냐는 듯 슬쩍 진을 바라보곤 트레이를 끌고 응접실로 향한다.
“안 하던 짓이라니?”
“네가 트레이 끌고 다니니까 진짜 이상해.”
“난 원래 친절한 남자야. 와인 한 잔 할래?”
“커피 끓여 나와서 와인 얘기를 하냐? 그리고 토스트랑 베이컨에 웬 와인이야? 냉장고 좀 채워 놔. 우유랑 계란뿐이잖아. 샐러드도 없고.”
“채워둘게. 집에서 식사할 일이 거의 없어서 비워둔 거야.”
식당이 아닌 응접실로 트레이를 밀고 온 블리스가 접시를 옮겨놓는 걸 보며 진은 어쩔 수 없이 테이블 앞의 하얀색의 의자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긴, 그렇긴 하다. 네가 집에서 식사할 일은 거의 없지.”
“그래도 채워둘게. 네가 자주 와.”
“내 집 놔두고 왜 너희 집엘 와?”
“너희 집이라니? 너랑 나랑 집 구분할 사이냐?”
당연히 그럴 사이다. 사적으로는 친구라 해도 공적으로는 오너와 고용인의 관계다. 아니, 그런 건 차치하더라도 그와 자신은 네 거 내 거 구분 안하는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정서적인 거리는 가깝더라도 물리적인 거리는 멀다. 아니, 그렇게 유지해야 한다.
“찻잔 꺼내올까?”
“내가 꺼낼게.”
어차피 메이드가 매일 조심스럽게 꺼내 닦아 넣어두는 것이기에 딱히 세척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블리스가 직접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상했다.
“그럼 내 잔 가져올게. 깜빡하고 내 걸 안 가져왔다.”
“여기 있잖아.”
“됐어. 한 벌에 오십 만 달라씩 하는 거 불안해서 어떻게 써?”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난 칠칠치 못해서 잘 깨먹는다고. 커피 잔 하나에 내 6년 치 연봉을 날릴 생각은 없어.”
찻잔뿐 아니라 식기와 가구, 그리고 작은 장식품 하나하나까지 전부 수공예품들이었다. 이 집은 두고 내부만 털어도 수백만 달라는 나올 거다, 라는 생각에 진은 문득 ‘돈 급하면 이 녀석 집이나 털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블리스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시계와 넥타이 몇 개만 집어가도 몇 만 달라 어치다. 할 만한 짓이다. 물론, 소심한 자신의 성격 상 진짜 행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자기가 지금 앉아있는 의자는 얼마짜리일까 상상하는 사이 블리스는 어느새 진열장으로 다가서 있었다.
“내 거면 네 거기도 해. 자기 걸 깨는데 누가 뭐래?”
유리 장 안쪽에 진열된 찻잔을 꺼내 들고 오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불안한 듯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블리스도 자신의 태도와 어제와 오늘 확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진이 보기에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10년 간 참아오던 것들을 터트리자 제어가 되질 않는다. 지난 10년 간 일부러 진에게 더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건 사실이다. 그렇게라도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수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온갖 여자들을 다 만나봤고-사실은 남자도 만났었다.- 대학 졸업 후엔 거리를 두기 위해 일부러 필라델피아까지 날아가 워튼 스쿨에 입학했다. 진이 그런 자신의 태도에 섭섭해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나름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래도 잊지 못하는지 두고 보자고, 이렇게 해서도 안 되면 할 말 없는 거다, 라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준 10년 동안 진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잊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건 운명이라고 여기고 순응하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결국 포기가 안 되었으니 그간 못해준 걸 다 해주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진은 그에 응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애초에 남이 주는 건 사탕 하나라도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두 개의 잔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 그 위에 내려둔 블리스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포트를 들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를 따르는 모습조차 완벽한 자세로 교정 받고 자란 이가 하면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블리스가 하니까 근사한 건지도 모르겠다. 손의 움직임이나 팔을 드는 각도라든가, 그 사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시선의 중심이나, 모두 우아하고 품위 있다. 오른손에 기브스를 한 채인데도 물 흐르듯 부드럽고 유연하다.
문득 기브스를 한 블리스의 팔을 바라본 진은 진짜 진지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블리스, 병원 가보자.”
막 진의 찻잔에 커피를 따르던 블리스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진의 눈을 바라봤다.
“뭐?”
“너, 아무래도 오른손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것 같아.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진짜 크대. 다친 순간에는 몰라도 나중에 보면 점점 이상한 짓을 한다잖아. 병원 가자.”
진은 진심이었다. 아주 진지했다. 그렇지 않고는 블리스가 저럴 리가 없다.
하지만 블리스는 진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진의 반응이 참 참신하고 재미있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걸 보니 도저히 웃을 기분이 되지 않는다.
“……머리는 안 다쳤어. 걱정 마.”
“아냐. 내가 보기엔 너 많이 다친 것 같아.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보면 다쳤을 거야. MRI도 다 잡아내는 거 아니다, 너? House M.D를 보니까 아주 작은 종양은 못 잡아낸대.”
교통사고에 이어 이젠 자신을 뇌종양 환자로 모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너, 집에서 텔레비전 좀 그만 봐. 넌 지나치게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어.”
호러 영화에 로맨스 영화에, 시즌마다 드라마들을 줄줄이 챙겨보는 진의 생활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현실이 싫어 가상 세계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하여간. 가보자, 응?”
“머리엔 전혀 이상 없어. 그만하고 식사나 해.”
“아냐. 난 정말 걱정 돼.”
오전에는 엘레나가 교회에 하자더니 오후엔 진이 병원을 가잔다. 이러다간 진까지 엑소시즘하자고 난리칠 것 같아 블리스는 베이컨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진의 입 안에다 넣어주었다.
“먹어.”
“……먹긴 하겠는데…….”
“일단 먹자.”
포크를 내려두고 왼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마시며 블리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진과의 사이가 더 이상 어색해지지 않은 건 좋은데, 아무래도 이 관계를 한 번쯤은 전복시킬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
10년 간 절제를 위해 정해놓은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긴 시간의 극간을 뛰어넘는 게 얼마나 힘들지를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게 문제였다. 시간의 강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몰랐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식기를 세척기에 넣은 진은 당연한 듯 자신의 가방을 찾아들었다.
“나 갈게. 혹시 안 좋아지면 전화해.”
양복과 구두는 아예 두고 가기로 했다. 내일 오전에 메이드가 와서 정리해줄 테니, 블리스의 집에 갖다 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진은 그 차림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검은색의 서류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블리스는 그게 불만스러운 듯 툴툴거리며 진의 뒤를 따랐다.
“진짜 가려고?”
“그럼 가야지. 가서 세탁물도 찾아야 하고, 집 정리도 좀 해야지. 밤에는 나가봐야 하고.”
“어딜?”
“영화 보러 간다니까.”
“혼자서 무슨 재미로 영화를 봐?”
역시나 블리스는 진이 혼자 영화를 보러갈 거라는 사실을 눈치 챈 듯했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필름을 받아와 집에서 보면 될 거 아니냐고 말하는 블리스에게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혼자라도 영화관을 찾는 행위를 납득시키긴 어렵다.
“……혼자 보는 재미야.”
“무슨 영환데?”
“무슨 영화라고 하면 필름 사다 틀어주려고?”
블리스는 아파트 안에 100㎡에 달하는 룸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진이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할 때마다 번번이 배급사를 알려주면 필름을 받아다 틀어주겠다고 해 진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 전화 한 통만 하면 배급사에서 필름을 들고 달려 와주는 거야 고맙지만 진은 겨우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짓을 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지금 전화하면 필름 가져올 거야. 여기서 봐. 그리고 내일 같이 출근하면 되잖아.”
“싫어.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지.”
“57층이 매물로 나왔던데 사서 거길 통째로 영화관으로 만들까?”
다른 사람이 했다면 어디 해보라고 말하며 웃고 말았겠지만 블리스가 하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영화관을 통째로라도 사고도 남을 녀석이라, 진짜 조금도 비웃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헛소리 그만해. 너 영화 좋아하지도 않잖아.”
“헛소리가 아냐. 뭐 하러 멀리까지 나가서 영화를 봐?”
“됐어. 난 그냥 혼자 나가서 팝콘 사들고 빽빽거리는 애들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나 볼래. 갈게. 내일 여덟 시 반이다. 시간 지켜.”
진은 금세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마지막으로 약속 시간을 주지시켰다. 블리스가 약속 시간을 어길리야 없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진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블리스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현관 옆에 있던 키 박스에서 차 키를 하나 꺼내 건넸다.
“……차 갖고 가.”
“됐어. 그냥 걸어가도 돼.”
“갖고 가. 어차피 주차장에서 노는 차야.”
“두 다리 멀쩡한데, 뭐. 쉬어. 도착 전에 전화할게. 정 몸 안 좋으면 브렛한테 전화하고. 간다.”
1층 버튼을 누른 진은 그대로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문이 닫히자 천천히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마음이 너무 시끄럽다.
탕-- 탕탕탕-
시끄럽게 울리는 노크소리에 침대에서 늘어져자던 진은 겨우 눈을 뜨고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 20분이었다. 블라인드 밖으로 희미한 햇살은 보이지만 완전히 해가 뜬 시간은 아니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결국 보고 싶던 영화도 못 보고, 집안에 틀어박혀 끙끙 대다 새벽 3시에나 겨우 잠이 든 터라 진은 칭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가 현관 앞에 섰다.
“누구세요?”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진이 묻자 밖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야.”
에반이었다. 에반이 이 시간이 무슨 일인가 싶어 삼중으로 걸어둔 열쇠를 열고 문을 밀어 열자 어두운 복도 안에 우뚝 선 에반의 눈이 순식간에 커진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잠도 안 자?”
“……넌 눈이 왜 그래?”
“응?”
“눈이 안 보인다.”
그 말에 눈을 제대로 뜨려 애를 쓰던 진은 퉁퉁 부어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댔다.
“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난 아예 못 잤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팔자 늘어졌구나.”
말투에 칼이 박혀 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듯한 에반의 목소리에 진은 겨우 눈을 제대로 뜨며 그에게 물었다.
“또 왜 그래?”
“눈 번쩍 뜨이게 해주랴?”
“냉동실에 팩 있어.”
진은 잠을 조금만 못 자도 붕어 눈처럼 눈꺼풀이 탱탱 붓는 체질이라 냉동실에는 늘 아이스팩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차피 깬 거 얼음찜질이라도 할 셈으로 진이 먼저 돌아서려는데 여전히 복도에 우뚝 선 에반이 진의 눈앞에 신문을 들이민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반밖에 떠지지 않았던 진의 눈이 순식간에 번쩍 뜨였다.
“잠이 확 깨지?”
에반의 말에 신문을 받아든 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신문 1면에 실린 커다란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확실히 눈은 확 떠졌다. 경악은 붓기도 이긴다. 그리고 에반의 잔소리에 대한 공포감은 수마도 몰아낸다.
“들어가자.”
한바탕 잔소리를 할 기세의 에반을 슬쩍 보며 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만은 저 잔소리를 피할 방법이 없을 듯했다.
“……들어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얌전히 주방 겸 식당으로 들어선 진은 뒤 따라오는 에반의 걸음 소리를 들으며 불을 켜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시선은 신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 위에 실린 타이틀을 보며 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Secret Secretary」
뭐라고 해야 할지, 참 묘한 기분이었다.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붓고 막 커피를 부으려던 진은 제법 정신이 들자 다시 한 번 사진을 자세히 살피고는 쓴 웃음을 흘렸다.
“사진 잘 찍었네. 광학 렌즈 쓴 거지? 어떻게 주변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안 나왔냐?”
그 사진은 분명 블리스의 아파트 앞에서 그를 부축하는 자신과 그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아파트 건물이나 큰 도로는 작게 처리되고 자신과 블리스만 아주 선명하고 크게 나와 마치 좁고 읍침한 골목길 안에서 둘이 포옹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더 재미있는 건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진만 보자면 사진의 왼쪽 끝에 차문 앞에서 자신에게 기댄 블리스와 자신이 은밀한 골목길 안에서 끌어안고 있는 듯 보인다. 거기다 블리스의 얼굴 각도가 절묘하다. 자신의 목가에 얼굴을 묻은 듯 보인다.
“포토샵으로 작업해준 거지. 밍밍한 사진은 재미 없어서 못 쓰니까.”
“하긴 브리트니 스피어스 보니 파파라치 사진하고 영상에 나오는 거랑 몸매가 다르더라고. 왜 이렇게 고무줄인가 해서 보니 사진이 고무줄이더만.”
싱크대 쪽에 기대선 진은 천천히 아래의 기사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사의 내용인 즉, 블리스의 오래된 연인이 사실은 그의 비서였더라, 저렇게 친밀하게 붙어 지낸다, 사실 블리스 애클랜드는 호모 퍼그였더라, 그런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진짜 꿈보다 해몽이 좋네. 커피 마시지?”
진이 거의 다 내려온 커피를 머그 잔에 따라 한 잔을 먼저 테이블에 앉은 에반에게 건네자 에반이 잔을 받아들며 신경질적인 얼굴로 진을 돌아본다.
“넌 뭘 믿고 그렇게 태연해?”
“재밌잖아. 그냥 다들 재미로 그러는 거야. 일일이 반응하면 이쪽만 우스워져. 여차하면 블리스한테 오늘 중에 다른 여자랑 데이트 한 번 하라고 하지,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블리스가 누구든 만나면 금세 사그라지겠지.”
문제는 블리스가 그런 각오를 다진 뒤에 다른 여자를 만날까 하는 것이었지만 에반은 굳이 그 문제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두 번째 토픽을 터트릴 준비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온 거야? 블리스가 타블로이드 1면에 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닌데, 뭐.”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알려줄 것도 있고.”
“뭐?”
다른 잔에 자신의 커피를 따르며 진이 무심히 묻자 에반이 두 번째 문젯거리를 터트렸다. 첫 번째는 태연했지만 두 번째는 아무리 진이라도 그다지 태연하진 못할 것이다.
“그 사진을 누가 찍은 건지 알아?”
“파파라치겠지.”
“그래, 파파라치지. 그런데 누군지 아냐고.”
“브래스먼? 아니면 캐니?”
진이 다 따른 잔을 들며 헬리콥터와 온갖 장비들을 다 동원해 사진을 찍어대는, 한 번 걸리면 절대로 못 빠져나간다는 악명 높은 헐리웃의 유명 파파라치의 이름을 대자, 에반이 침묵한다. 그 이상한 적막감에 진은 안 좋은 예감을 받은 듯 등을 굳혔다. 그리고는 커피잔을 들고 돌아서며 에반을 바라봤다. 진의 얼굴은 웃을 듯 말 듯 아주 이상한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
“설마…… 노먼 맥캐인이라는 얘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맞아.”
혹시나 하던 게 역시나가 되자 진은 순간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타일 바닥 위로 두꺼운 머그컵의 잔해들이 구르며 막 내린 뜨거운 커피라 슬슬 흐르는 걸 본 에반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대체, 너 그 녀석이랑 무슨 원수를 진 거야?”
“내가 무슨 원수를 져? 아니 원수를 져도 원한을 가진 건 나지!”
“그럼 블리스야?”
“그렇겠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니까! 노먼 맥캐인, 이번엔 진짜 죽여버리겠어!”
“맥캐인 가의 장남을 어떻게 죽여? 그보다, 너한테 연락 없었어? 항상 사고친 전후로 네게 연락하는 것 같던데.”
“아직 연락 없어. 오기만 해봐! 당장에 목을 매달아서 처형해버릴 테니까!”
“맥캐인 가 장남이라니까. 하여간 연락 오면 나한테도 알려줘. 내가 그 친구 한 번 만나봐야겠으니까.”
“만나서 말할 것도 없어! 그냥 죽여버려야돼, 그런 놈은!”
불을 뿜을 듯 화를 내는 진을 보며 에반은 대강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혹시나 혹시나 했었다. 노먼이라는 친구가 유난히 진에게만 짓궂게 굴었던 점이나 블리스의 결정적인 약점만 잡아 노리는 거나, 좀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어제 블리스의 태도와 지금 진의 태도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노먼 맥캐인과 블리스 애클랜드는 학창 시절부터 연적이었던 모양이다. 서로 말은 안 하고 눈치만 살폈지만 연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애클랜드 가의 고문 변호사가 잭 맥캐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한 관계여야 하지만 서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이유는 진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사람 사이의 연계점은 진뿐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런 둘의 관계가 틀어진 게 대학 시절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진이다. 두 사람 다 애정 표현 방법이 삐뚤어진 편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쉽게 결론이 도출된다.
“하여간 너 오늘은 출근하지 마. 파파라치들이 우굴거릴 거야.”
“피하면 더 티나잖아.”
“그건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출근할거야. 그리고 블리스 일정 조정해서 데이트 시켜 버릴 거야!”
“각오는 좋다만……. 저 사진은 어쩌다 찍힌 거야?”
에반은 그제야 가장 궁금하던 바를 물었다. 블리스야 그렇다치고 진은 함부로 사람의 옆에 붙는 법이 없는 성격이다. 어릴 때에도 필요 이상의 접촉은 피하던 녀석이 저렇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면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체 블리스가 무슨 사기를 쳤길래 진이 저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나 궁금해 묻자 바닥에 떨어진 컵 조각을 줍던 진이 퉁명스레 답한다.
“블리스, 머리를 다친 것 같아.”
“응?”
“급정거 해서 오른손이 부러졌다는데 내가 보기엔 머리를 다친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오늘 병원에 데려가 보려고 했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더니 열이 펄펄 나더라고. 숨소리도 거칠고.”
불행히도, 에반은 그 설명만으로도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이해하는 자신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여간 이해는 됐다.
“……네가 부축한 뒤에 열이 났지?”
“응.”
“……알겠다. 병원에 데려가 봐라.”
“오전 스케줄 좀 비우고 데려가 봐야지.”
진짜 진지한 얼굴로 그 사이비 환자의 뇌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는 진을 보며, 에반은 진심으로 블리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아무래도 두 녀석의 타이밍이 기차게 어긋나버린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블리스의 그간 행적 덕에 진은 블리스의 태도 변화를 뇌 이상으로 인지하는 듯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지만, 블리스의 입장에서는 진짜 자기가 판 구덩이에 파묻히는 꼴이니 얼마나 비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도 결국 자기 잘못이니 남 탓할 건 없다. 자기 무덤을 포크레인 갖다 파놨으니 그저 고이 눕는 수밖에.
그리고 사실, 조금은 그 얄미운 왕자님이 당황하는 꼴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녀석이 진이 병원에 끌고 가는 순간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니 재미있어 죽을 것 같았다.
“그래, 꼭 데리고 가봐.”
“응.”
“준비해라. 나랑 같이 나가자.”
그 말에 다시 벽시계를 본 진은 이제 겨우 5시 40분이 될까 말까 할 시간임을 확인하곤 인상을 썼다.
“너무 이르지 않아?”
“이르긴. 아침 시간을 빼느니 차라리 아침 일찍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낫지. 내가 브렛한테 전화해놓을게. 식사하고 준비하고 나가면 6시니까 7시까지 도착한다고 해둘게.”
“아, 그럼 되겠다. 부탁할게. 스케줄 조정하느니 일찍 가는 게 낫겠다.”
“그래.”
진이 부지런히 바닥에 흐른 커피를 닦고 욕실로 향하는 걸 보며 에반은 아주 드물게도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었다.
너, 한 번 당해봐라.
진이 샤워하는 사이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다시 신문을 훑어보던 에반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알림인가 해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거실이 아니라 침실인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으로 보이는 침실로 간 에반은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끄려 그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막 알람을 끄려는데 알람이 아니라 전화였다. 블리스였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에반은 이대로 두면 진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할 것 같아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막 진은 샤워 중이라고 하려는데 안에서 나직한 블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The moment I wake up.」
에반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아니 블리스가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음성은 분명 블리스의 목소리가 맞았다.
「Before I put on my makeup. I say a little prayer for you…….」
생전 처음 듣는 거지만 분명히 블리스의 목소리가 맞다. 기가 막힌 상황에 에반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용쓴다.”
비웃음이 역력한 그 말에 갑자기 블리스의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에반?」
블리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벼르고 벼르다 딱 진이 일어날 법한 시간에 맞춰 알람 대신 노래를 불러주겠다는 노력과 정성은 가상하지만 오늘은 때를 잘못 맞췄다.
「당신이 왜 이 시간에 진의 핸드폰을 받아? 진은?」
“샤워 중.”
「뭐?」
“출근 준비 중이라고. 왜 그렇게 놀…….”
뭘 그렇게 놀라냐고 하려던 에반은 문득 이 인간이 자신과 진이 그런 사이라고 오해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보통 사람의 가치 기준은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눈에 예쁘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예뻐한다 생각한다. 특히나 블리스처럼 취향이 아주 빼어나다 자부하는 인간들은 그의 기준이 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보는 경향이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블리스의 눈에 진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해도 자신의 눈에는 그냥 불쌍하고 순해 보이는 동료이자 동생일 뿐이다. 문제는 지금 블리스에게 개인적 견해와 취향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왜 진하고 이 시간에 같이 있어? 뭐야? 거기서 자기라도 한 거야?」
“……방금 왔어. 네가 신문에 진 얼굴 드러내준 덕에 눈뜨자마자 신문 사들고 달려왔다.”
「아, 떴어? 1면이야, 2면이야?」
뭐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1면 2면을 찾냐, 욕해주고 싶은 마음은 한이 없지만 화를 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기에 에반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1면이야. NY daily.”
「당연히 그래야지.」
“1면에 실리니까 좋냐?”
「2면보다야 1면이 낫지. 2면에 실었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거야.」
“그래, 좋겠다.”
대체 셀레브리티들의 머리통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라고, 에반은 생각했다. 보통 이런 추문이 일면 짜증을 내기 마련인데 자신의 기사가 몇 면에 실렸는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종들의 뇌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나중에 해부해 보고 싶을 정도다.
“하여간 잘 됐다. 일어났으니 준비하고 기다려. 진이 곧 데리러 갈 거야.”
「이 시간에?」
“7시쯤 도착할 테니 준비하고 있어. 같이 아침이나 먹자.”
「이건 또 무슨 파격 서비스지?」
네 뇌 사진 기념 서비스, 라고 말하려다 에반은 말을 돌렸다.
“어차피 진이 너랑 다녀야 할 거고, 둘만 다니면 입방아들 찧을 테니 내가 직접 껴서 같이 얼굴 팔아주겠다는 거야. 그렇다고 당장 너랑 진이 떨어지면 다들 더 의심할 거 아냐.”
「그것뿐이야? 당신이 겨우 그 정도로 이런 상황에 진하고 날 붙여두겠다고?」
“나도 함께야.”
반드시, 기어이, 병원에 끌려가 뇌 사진을 찍는 블리스를 보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힘을 주어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가 여전히 시큰둥한 투로 중얼거린다.
「알았어. 7시 도착이야?」
“그래.”
「진 예쁘게 해서 데려와.」
“뭘 해도 안 예뻐. 내가 리차드 테일러(반지의 제왕과 킹콩의 특수효과 담당)가 아닌 이상 걔를 예쁘게 만들기는 힘들어. 아니, 그 사람이라도 힘들걸.”
단아하고 부드러운 미모기는 하지만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외모였다. 굳이 beasutiful하다는 표현을 쓰자면 나름대로의 개성과 분위기가 있으니 고개를 끄덕거리겠지만 pretty나 gorgeous하다고 묻는다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7시에 도착할 테니 정확히 기다려. 애먹이지 말고.”
「걱정 마. 끊어.」
딱 잘라지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기자 에반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다시 사이드 테이블 위에 두곤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에반이 방에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진 역시 바스 가운을 입은 채 욕실에서 나왔다. 진을 보자마자 에반은 블리스의 전언을 전했다.
“블리스한테 전화 왔어. 7시까지 기다린대. 같이 아침 먹자고 했어.”
“그래? 잘 됐네.”
“준비하고 나와. 아, 그런데 I say a little prayer for you 좋아해?”
“갑자기 웬 노래 타령이야?”
“그냥 떠올라서.”
블리스가 무작정 그 노래를 부르진 않았을 거다. 오래 알아온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니, 어쩌면 진이 흘러가는 투로라도 아침에 그런 노래로 깨워주는 사람이 좋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들어 묻자 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좋아해. 예전에 My best freind`s wedding 볼 때 그 노래 나오는 장면을 계속 돌려봤거든. 있잖아, 루퍼트 애버렛이 모임 자리에서 줄리아 로버츠 옆에서 노래 불러주는 부분.”
“너 줄리아 로버츠 영화를 몇 번이나 본 거야?”
“아, 그 영화는 한 다섯 번? 재밌잖아.”
“오래된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깽판 놓는 인지부조화증 여자 얘기가?”
“인지부조화? 푸하하하, 그거 말 되네.”
진이 웃으며 막 그의 방으로 들어서려는 모습을 보며 다시 주방으로 가려던 에반은 생각이 난 김에 못을 박아두기로 했다.
“넌 그러지 마라.”
“응?”
“인지부조화.”
막 방문을 열려던 진이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에반을 돌아본다.
“……에반, 요즘 너무 예민한 거 아냐?”
“예민할 수밖에. 너랑 블리스랑 잘 지내는 건 좋지만 그 이상은 좋지 않으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안 된다 생각하면 인정하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블리스는 그런 걸 할 줄 모르니까 너한테 말하는 거야.”
아마 뭔가 안 좋은 상황이 닥쳤을 때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건 진이 아니라 블리스일 것이다. 진은 늘 조심스럽고 이성적인 편이니 그럴 염려가 없지만, 블리스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사고를 가지고 자란 이는 실패나 실연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블리스의 그 성격에 한 번 하겠다 결심하고 달려든다면 그걸로 끝이다. 문제는 진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인데, 진은 아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블리스는 말 그대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엔 진이 그를 현실로 이끄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바닥을 깔아주는 거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아마 아주 나중에는 진도 그 의미를 알아챌 것이다.
“준비하고 나와. 커피 준비해줄게.”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에반이 화제를 돌리자 진이 순순히 그의 방으로 들어선다.
주방 구석으로 가 커피포트에 물을 받으며 에반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에반도 좋아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기를 쓰는 게 아니다. 그냥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블리스는 모르겠지만 진에게는 너무 좋지 않다. 진짜 블리스가 평생을 책임질 각오를 했다 해도 아무리 봐도 진이 너무 손해다. 성격이라도 대범하다면 모를까 겉으로는 단순하고 밝아 보여도 속은 여리고 소심하기 그지없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고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니만큼 블리스와의 관계는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진이었고, 진을 위해 에반은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밖에 없다. 결국 최후에 만신창이가 되는 건 진일 테니까.
***
“이건 또 무슨 짓이지?”
아침 일찍 브렛의 병원으로 끌려온 블리스는 짜증스럽다는 투로 그렇게 말을 던졌다.
아침부터 에반과 진 둘이 뭔가를 작정을 한 듯 함께 와 덤벼들더니 최종 도착지는 병원이었다. 다행히 에반은 차를 갖고 와 따로 움직였지만 바로 뒤에 차를 주차한 채였다. 확실히 둘이 짠 거다. 이건, 엘레나보다 더 질이 나쁘다.
“일단 MRI 한 번만 찍어보자. 아무래도 너 이상해.”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며 진이 진짜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말을 걸자, 블리스는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도 못한 채 가만히 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도 어이가 없었던 건가 하면 비참한 반면 또 오기가 든다. 너 내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이 따위로 나오냐?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돌아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평소에 어땠길래?”
“너 원래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체질이잖아. 열이 난 것도 그렇고 호흡도 너무 거칠었단 말야.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잖아.”
“예를 들어?”
“네가 직접 커피를 내린다거나 트레이를 민다거나, 아니면 그 아끼던 잔을 꺼낸다거나 하는 거 말야.”
“커피 정도는 보통 내가 내려 마시고, 트레이는 내가 밀고 싶어서 민 거야. 그리고 커피 잔은 진열만 해놓기 아까웠던 거고. 그게 내가 병원에 와서 MRI를 찍을 이유가 된다고?”
“하우스에서 보면…….”
“그 놈의 드라마 타령 좀 그만해!”
짜증이 나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진이 순식간에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제야 블리스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진이 평소에는 바락바락 말대답도 잘하고 농담도 잘하지만 누가 큰소리를 내면 금방 주눅이 든다는 걸 깜빡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한테 화내는 게 아니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급정거했다며? 진짜 머리라도 다쳤으면 어쩌려고 해? 한 번만 하자. 응? 걱정돼서 그래.”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는 게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진짜 감정을 가졌을까 봐 걱정된다는 듯 들려 블리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로 병원에 끌고 올 정도라면 진짜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간 당장에 정신병원에 감금시킬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물론, 아직까지 자신의 태도가 미적지근하긴 하지만 진의 저런 태도로 보아 세게 나갈 수도 없다.
진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칼을 뽑았으니 휘두르긴 해야겠는데,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는데 못해줄 건 없지. 대신 넌 뭘 해줄 건데?”
“응?”
“내가 네 말에 따르면 너도 뭔가를 해줘야 할 거 아냐?”
주고받는 건 뭐든 명확히 하는 진의 성격을 알기에 슬쩍 떠보자 진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뭘 해줄까?”
“주말 데이트.”
“응?”
“주말에 시간 내. 내 스케줄도 비우고. 데이트 하자.”
그 말에 순간 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데이트’라는 말이 아주 거슬린 얼굴이었다. 그 속내가 훤히 보여 블리스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데이트라는 말에 저 정도인 걸 보니 섹스하자고 하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나랑?”
“응.”
“안 바빠?”
“바쁘지만 시간 낼 테니까, 너도 시간 내.”
“내가 왜 너랑 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으니까.”
“……꼭 해야 돼?”
“물론.”
“너랑 다니는 거 싫은데…….”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하는 진의 얼굴에 블리스는 심장이 지끈하는 느낌을 받았다. 겨우 하루, 아니 이틀 간 함께 데이트를 하자는데 저런 얼굴을 하다니, 아무리 블리스 애클랜드라도 상처 받을 수밖에 없다. 이쪽은 몸이 달아 죽겠는데,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고, 더 다가가고 싶고, 옆에 있으면 안고 싶어 미치겠다는데 상대는 데이트 신청에도 시큰둥하다. 이 이상 비참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비참하다.
“너, 데이트하자는 상대에게 그렇게 대놓고 같이 다니기 싫다고 하는 거 너무 무례한 거 아냐? 나 상처 받았어.”
“너랑 다니면 사람들이 자꾸 따라다니고 쳐다보잖아.”
그도 그렇긴 하다. 어차피 블리스도 진과 함께 브로드웨이를 누빌 생각은 없었다.
“좋아. 그럼 집에서 보내자. 영화 보고, 식사하고, 얘기하고. 어때?”
주말에 함께 앉아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떠는 건 대학시절까지 늘 하던 일이었기에 진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답을 내주었다. 블리스가 워튼 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종종 함께 주말을 보냈었다. 물론, 그때는 클랜이나 클레어가 끼어 있긴 했지만 둘만 있다고 다를 건 없다. 데이트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별것도 아니었다.
“뭐, 좋아. 그런 거라면.”
“좋아. 내리자.”
“응.”
블리스가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창가의 버튼을 누르자 차 문이 열린다. 먼저 나서는 블리스를 따라 진 역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바로 뒤에 차를 주차한 에반이 문을 열고 내리며 묻는다.
“결정내린 거야?”
에반은 여전히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의 톤은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이게 재미있어 죽겠는 모양이다. 그런 에반을 잠시 바라보던 블리스는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병원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진을 돌아본다.
“그래. 올라가. 아, 진. 커피 좀 사다줄래? 검사하고 곧장 마시게.”
“알았어. 에반은?”
“나도 부탁해.”
어차피 검사 후 아침을 먹으러 갈 테지만 식사를 할 식당은 병원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기에 진은 얌전히 돌아서 찻길 건너편에 있는 테이크아웃 점을 향해 걸었다. 진이 멀어지자 병원 건물 내로 들어서며 블리스는 옆에 선 에반을 잡아먹을 듯 돌아봤다.
“당신, 뭐하자는 거야?”
“뭐는? 잘 알아두라는 거지.”
“뭘?”
“네가 진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무슨 헛소리야?”
“진의 행동이 설명해주잖아. 네가 진을 사랑한다는 건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행동이라고. 당사자인 진이 저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 것 같아?”
아픈 데를 사정없이 찌르는 에반의 말에 블리스는 지끈하는 심장의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 겨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아직 날 믿지 못하는 것뿐이야.”
“믿지 못하니 이 정도지, 네가 진심인 걸 알면 저 녀석은 신발 벗어들고 도망칠 거야. 내가 장담해.”
블리스도 그럴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다. 진이 이게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자신이 그를 갖고 노는 거라 여기며 상처 받을 것이고, 또 진심이라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한국으로 내뺄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아마 조만간에 자신의 진심도 알아챌지 모른다. 눈치는 기차게 빠른 녀석이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무슨 대책이라도 있어?”
“대책이야 하나뿐이지.”
그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에반은 4층 버튼을 누른 뒤 문이 닫히자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처럼 살아. 늘 그래왔듯이 주마다 애인을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에 타블로이드 1면에 실려야 만족하는 골 빈 재벌로 살라고. 와인 한 잔 마시러 전용기 타고 프랑스로 날아가고, 스시가 먹고 싶으면 요트를 타고 일본 항으로 가서 먹고, 보고 싶은 뮤지컬이 있으면 극단을 통째로 사들여서 연기하게 하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다이아몬드를 받쳐서 같이 자고, 그냥 그렇게 살라고. 너는 너대로 진은 진대로. 너는 네 세계에서 진은 진이 사는 세계에서.”
“내가 겨우 그런 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럼 무슨 답을 원했는데? 내가 당장 너희 둘 잘 살라고 꽃잎을 뿌려줄 줄 알았어? 가는 길이 뻔한데, 어떻게 될지 훤한데 내가 약 먹었어?”
“당신한테 이해 구한 적 없어.”
“난 어차피 죽어도 이해 못해. 그냥 충고하는 거야.”
그 사이 4층에 닿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내리며 블리스가 한숨을 내쉰다.
“어제는 엘레나가 엑소시즘을 하자더니 오늘은 병원? MRI? 기가 차서.”
“나도 진짜 신부님이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느긋하게 뒤를 따르는 에반의 말에 블리스는 시선을 돌려 에반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답지 않은 무겁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내뱉는다.
“뇌 촬영이 아니라 뇌수술을 하고 신부님, 부처님, 알라신이 다 와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내가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한 줄 알아? 10년이야. 10년 동안 포기하려고 별 짓을 다 해봤어. 진하고 떨어져도 살아봤고, 일부러 정 떼려 매정하게 대하기도 하고, 다른 여자도 수없이 사귀고, 할 수 있는 건 다해봤어. 그런데도 안 됐어. 아무리 해도 지독하게도 그 감정이 변하질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관두라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10년에 대한 대가는 돌려받을 자격이 있어. 내가 10년 동안 어떻게 참고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당신은 몰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몰라. 그러니까 간섭하지 마. 간섭하고 싶으면 당신이 10년 동안 겪어보고 나서 해. 그럼 들어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블리스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멀리 보이는 원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악에 받친 듯한 블리스의 말투와 표정에 에반은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그냥 한 때 지나가는 연정이나, 가벼운 호기심 정도로 치부했지, 블리스가 저렇게까지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이미 각오를 다졌다는 그의 말에도 설마, 설마 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잘못 짚은 듯했다. 생각보다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문제가 진짜 복잡해질 듯했다.
***
“빌어먹을…….”
MRI 촬영을 하자마자 내려선 블리스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그거였다. 멍하니 의사들 뒤에 서서 아무 이상 없다는 설명을 들은 진은 톨 사이즈의 컵을 든 채 블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부터 기분이 별로인 것 같더니, 지금은 더욱 별로였다. 설상가상으로 에반도 기분이 최악인 듯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했는지 분위기가 험악하다.
“이상 없다잖아. 다행이야.”
MRI 촬영실을 나오며 풀어놓은 넥타이핀과 커프스, 그리고 시계를 차는 블리스의 옆에 선 진은 재빨리 블리스에게 컵은 건네주었다.
“마셔. 아침 먹으러 가자.”
그 말에 블리스가 아무 말 없이 컵만 빼앗아 든다. 진짜 화가 난 모양이었다.
“화났어?”
“당연하지.”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날 걱정은 해?”
“당연하지. 너라면 내가 이상한 짓 하는데 걱정 안 하겠어?”
순식간에 블리스의 애정과 헌신이 어린 행동들을 ‘이상한 짓’으로 폄하한 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블리스의 넥타이핀을 만져주었다.
“됐다. 가자. 그런데 에반은 왜 저래? 싸웠어?”
“……뭐.”
“뭐라고 싸웠길래 그래?
에반과 블리스의 사이가 좋냐고 묻는다면 아주 좋다고 답할 수는 없겠지만, 나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는 있었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훌륭한 파트너 관계였다. 정서적인 면보다는 공적인 면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감정이 깃든 싸움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가끔 회사 관리에 있어서 의견 마찰을 일으키는 일은 있었어도 그때마다 서로 의견을 조율해 한쪽이 한 발 물러서거나 타협해 금세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런 두 사람이 싸움이라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블리스, 뭐야?”
아무리 봐도 이상해 진이 재차 묻자 막 MRI촬영실을 나오던 블리스가 뒤에 따라 나오던 에반을 슬쩍 돌아본다. 그 시선에 에반이 무표정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자 왼손으로 컵을 들고 있던 블리스가 진에게 컵을 건넨다. 오른손엔 자신의 컵을 그리고 왼손에는 블리스의 컵을 든 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블리스를 쳐다보자 블리스가 왼손을 들어 진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한다.
“왜?”
그 손길에 이끌리듯 진이 다가서자 블리스가 슬쩍 에반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입술 끝을 올려 환하게 미소 짓는다. 순간 에반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아까부터 화가 난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블리스가 저렇게 표정을 풀고 웃는다는 게 아무래도 조짐이 좋질 않았다.
“어이, 블리…….”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에반이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양손에 컵을 든 진은 멍청하니 그 자세로 서 있었고 그런 진의 머리통을 잡아끈 블리스는 망설임 없이 진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아주 잡아먹을 듯 농염한 키스를 시작했다.
첫 키스도 아직이라는 진을 붙잡고 입안 깊숙이 혀를 넣고 타액을 빨아들이며 고난이도의 키스를 하는 그 모습에 에반은 그대로 선 채 얼어버렸다. 비록 아직 병원 영업 개시 전이고, 지금 그들이 있는 층은 모두 검사실만 있어 텅 비어있고, 다른 의사들은 검사 결과를 저장하는 중이라 아무도 없는 복도라 해도, 이건 분명 자신에게 하는 선전포고였다.
블리스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없는 병원 복도가 아니라 센트럴 파크 광장 한복판에서라도 진과 키스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자꾸 건들면 피 볼 거라는 경고이자 선전포고였다.
“……미친 놈.”
평생 하지 않는 욕설을 입에 담으며 에반은 드디어 비극이 시작되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에반도 당분간 편히 살긴 그른 듯했다.
에반이 그의 암담한 미래에 슬퍼하는 사이, 진은 그대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선 채로 기절을 한 모양이었다.
“코로 음식을 먹은 건지도 몰라. 샌드위치를 코로 먹고, 커피는 눈으로 마신 거야.”
분명히 먹은 기억이 없음에도 식당에 가서 앉아 접시를 비웠다는 사실에 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날씨는 미치도록 화창했다. 아침을 먹고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한 뒤 미팅을 마친 블리스는 30분 정도 여기저기 전화통화를 하더니 곧 사무실을 나서 맨하탄 한복판에 위치한 GATH사로 향했다. 현재 J&K사가 합병을 진행 중인 회사의 재무 구조와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조금 시간이 났다. 원래는 블리스를 내내 쫓아다녀야 하지만 에반도 함께 나온 데다 오늘 자신이 좀비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블리스는 회의에는 참석하지 말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해주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물론 이게 그 블리스 탓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여간 시간을 줘 다행이다. 지금 자신을 고민에 빠트린 상대가 상사라는 건 상사가 영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운이라 칭할 만하다.
“사내 성희롱으로 고소할까…….”
일단 블리스는 분명 자신의 직속상사이기도 하니 성희롱으로 인한 고소가 가능하다. 에반도 바로 눈앞에서 보았고, 아마 보안 카메라에도 남아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자신이 그럴 배짱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치겠네…….”
사내 성희롱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설마 설마 하며 절대 아닐 거라 부정하고 있던 것을 눈앞에서 확인해버린 게 문제였다.
사실은 어제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눈치를 챘기에 블리스를 어떻게 해보려고 그 발악을 한 거다. 오늘 병원까지 데리고 간 건 사실 블리스가 진짜 걱정되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미친 것 같으니 그만두라는, 아주 우회적인 의사 표현 방법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블리스도 그걸 눈치 챘는지 아주 대놓고 적극적으로 나왔고, 덕분에 자신은 좀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진짜 이러려고 한 건 아니다. 블리스가 어떤 의도로 갑자기 자신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든, 무시할 셈이었다. 그럼 곧 블리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의사를 알아챌 거고, 받아들여줄 거라 믿었으니까, 무작정 버틸 셈이었다.
그냥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고, 아는 체도 안 할 셈이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밀어붙였다.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과부하 상태였다.
“상사한테 꾸중이라도 들은 거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왜 이럴 때 자신은 기절도 안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옆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버터에 오일을 쏟아 부은 듯한, 그 음성…….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자 벤취 바로 옆자리에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얼굴이 앉아 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햇살을 받아 투명해 보이는 파란 눈동자. 거칠어 보이지만 은근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외모. 그리고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눈웃음.
“오랜만이지? 이런,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씨익 웃으며 사람 비위를 긁는 그 얼굴에 순식간에 정체불명의 존 도우(John Doe-신원미상 남자) 얼굴 위로 한 이름이 매치되었다.
“노먼 맥캐인!?”
“여전히 열렬하군. 나도 그리웠어, honey.”
“개새끼!”
진은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노먼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노먼은 잽싸게 옆으로 피해 그 주먹을 피해 일어서며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하시네.”
“너, 잘 만났다!”
“오우, 주먹도 여전하셔. 너의 그 화끈한 이단옆차기도 여전하지? 그 폭력성에 반했다니까.”
능글능글 슬슬 신경을 건드리는 그 말에 대학 시절 식당 안에서의 활극이 떠올랐다. 만나기만 하면 Sweetie 타령을 반복하는 녀석 덕에 1학년 초기에 녀석과 커플로 묶여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어차피 남의 소문은 사흘이라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노먼은 아주 끈질겼다. 기어이 식당 안에서 “지난 밤 아주 뜨거웠지?”라고 하는 바람에-그 전날 밤 노먼이 샤워 중인 욕실로 찾아와 온수를 최고로 올려 틀어준 바람에 화상을 입을 뻔 했었다.- 쌓이고 쌓인 게 한꺼번에 터져 그대로 녀석을 이단옆차기로 쓰러트린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고소하면 너도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식판을 내던지고 나간 뒤로, 노먼의 sweetie 타령은 줄었다.
대신, honey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낯으로 날 찾아와?”
“보고 싶으니까.”
“미쳤냐? 꺼져! 당장에 꺼져버려!”
“밥 먹자.”
진이 아무리 화를 내도 태연하게 자기 할 말만 하는 건 여전하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사람 열 받게 하곤 헛소리를 찍찍 하다 사라진다. 그리고는 잊을만하면 또 나타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곤 사라진다.
진은 진심으로 자신의 시체에서 사리가 나오면 다 노먼 맥캐인 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찍 죽어도 노먼 덕이다. 진짜 상종을 못할 인간이었다.
더 이상 말도 섞고 싶지 않아 휙하니 돌아서 걷자 노먼이 태연한 걸음으로 뒤를 따라온다.
“어이, 어딜 가?”
“총기 사용 허가 받으러.”
“어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인사도 안 해?”
“인사 대신 네 뇌를 갈겨버릴 거야.”
“험악한 말 하지 마시고.”
노먼 맥캐인이 가장 무서운 건 그 녀석과는 절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듣는다, 라는 게 노먼의 인생철학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로변을 걷자 노먼의 걸음 역시 빨라진다.
“밥 먹자.”
“내가 미쳤냐? 너 같은 거랑 밥을 먹게?”
“어차피 블리스는 지금 회의 중이잖아. 한참 지나야 나올 테니 나랑 밥 먹자.”
“네가 블리스 비서야? 어떻게 알아?”
“뻔하지. 그나저나 사교계에 입문해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겨우 운전기사냐? 예일대 수재가 운전기사라니, 동문으로서 쪽팔리다.”
슬슬 아픈 부분을 찔러대는 노먼에게 진은 시선도 돌리지 않게 답해주었다.
“예일대 영문과 수석이 파파라치 하는 것보다야 낫지.”
“뭐 그런가? 하여간 밥 먹으러 가자. 너 잘하는 데 알지?”
친근하게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으려는 노먼의 손을 진이 뿌리치며 사납게 소리친다.
“꺼져!”
“왜 이러시나……. 아, 리무진 타고 꽃 들고 나타난 게 아니라서 그래? 지금이라도 가서 턱시도 입고 리무진 끌고 올까?”
“남의 사생활 사진 찍어 팔아먹은 돈으로 리무진? 웃기고 있네.”
“파파라치도 하나의 직업이야. 그리고 난 대중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위시 메이커일 뿐이라고.”
“파파라치가 위시 메이커면 청부살인자는 위시 마스터냐? 파파라치들 하는 짓이 청부살인자들이랑 뭐가 달라?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뿐이잖아!”
“난 사람은 안 죽인다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쏴야만 사람 죽이는 거야? 말로도 사람 죽여! 말로 죽이는 게 더 잔인하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난 복수의 여지는 주잖아. 숨통을 끊어 죽여 버리진 않는다고.”
그 말에 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돌아서 노먼의 멱살을 쥐었다.
“대체 너 나랑 무슨 원수를 진 거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길래 이래?”
진짜 화가 난 듯 격한 진의 반응에 노먼은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원수는 무슨. 사랑이지.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몰랐어? 수없이 고백했잖아? 그때마다 넌 거절했고.”
그 말에 진은 기운이 빠진 듯 노먼의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분명 그랬었다. 블리스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노먼은 수 천 번도 더 사랑 고백을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번번이 거절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고백이라고 하기도 모호했다. 예일대 역사상 최악의 또라이라 불리는 녀석이 실실 웃으면서 장난치듯 고백을 하는데 어떤 병신이 그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까?
“그날, 널 살려두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대체 무슨 영광 보겠다고 너 같은 걸 살려서 이런 봉변을 당하는 거지? 세계 평화를 위해 그날 널 밟고 그냥 지나갔어야 했어.”
아직도 떠오르는 10년 전 알파베타감마 신고식 때 사건을 떠올리며 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앞에 선 노먼이 환하게 웃는다.
“하하, 성질 여전하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럼 울까?”
“……관두자. 너랑 대화를 하려던 내가 잘못이지. 관두자. 관둬. 빨리 꺼지기나 해. 블리스가 널 보면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기운이 쭉 빠진 채로 진은 노먼을 무시한 채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노먼의 말이 발목을 잡아챈다.
“클리샤 사건, 블리스 알아?”
“……너, 뭐하자는 거야?”
“아니. 그냥 블리스가 아나 해서. 그게 너랑 내 합작품이라는 걸.”
“죽고 싶냐? 블리스가 그걸 알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그럼 그것도 아직 모르겠네?”
“또 뭐?”
“너 술 마시면 묻는 대로 다 대답해준다는 거. 아주 착해지잖아.”
“……너 진짜 죽고 싶냐? 클리샤 사건만으로도 나 너한테 무지 쌓였거든? 진짜 너 만나는 순간 죽여 버리려고 했거든?”
“왜 이래? 난 사랑하는 널 위해 그런 건데.”
“뭐가 날 위해서야?”
“네가 이도저도 아닌 채로 못된 바람둥이 놈한테 휘둘리니 널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거야. 그리고 그 놈은 그런 벌 받아도 싸잖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널 두고 바람이나 피우다니 말야.”
느끼한 말을 아주 상쾌하고 터프하게 하는 노먼을 진이 진짜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본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입에서 나가는 거니 말이지. 난 사랑하는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놈하곤 다르거든.”
“그 놈의 사랑 두 번만 하다간 너 아예 내 목을 졸라 죽이겠다?”
“난 널 사랑해. 알잖아? 그냥 모른 체하고 싶은 거지, 너도 이미 알고 있어. 맞지?”
“……관두자. 나 피곤해. 가야겠어. 너랑 더 말 섞고 싶지도 않아.”
“점심 먹자니까.”
“아 좀 가!”
“잡지사에 소설을 투고할 생각이야. 다섯 편정도 써놨는데 좀 골라줘.”
그 말에 짜증을 내던 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온순해졌다. 재빠르게 변하는 그 표정 변화에 노먼은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쳤다. 진의 약점은 잘 알고 있다. 진은 자신의 소설이나 에세이가 걸리면 약해지고 만다. 그게 또 아주 귀여웠다.
“……갑자기 왜?”
진이 의심스러운 듯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진의, 노먼의 소설에 대한 애정과는 별도로 노먼 맥캐인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이었다.
노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는 무슨. 그 동안 계속 준비해온 거야. 파파라치는 취미고.”
“……진짜야?”
“물론이지. 그러니까 시간 좀 내줘.”
“…….”
“응?”
“좋아. 대신 멀리 가. 블리스가 나오다 너랑 있는 걸 보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좋아.”
그렇게 말하며 노먼이 상쾌하게 오토바이 키를 빙글빙글 돌렸다. 죽이니 살리니 해도 진은 노먼 맥캐인이라는 인간한테 약했다. 그리고 노먼 맥캐인의 소설에는 더더욱 약했다.
그러니까, 그게 비극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Gath사의 건물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가게로 와 샌드위치를 반쯤 먹고 난 뒤 진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노먼이 “아.”라는 감탄사를 흘리며 재빨리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진은 눈을 반짝거리며 노먼이 꺼내줄 소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시절 노먼이 낸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들은 모두 좋았다. 글 솜씨에는 재능이 없던 진은 진짜 재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거구나 라는 걸 노먼을 보며 느꼈었다. 진이 끝끝내 노먼을 버리지 못한 이유도 그 재능 때문이었다. 영문학과에 다니면서도 회계학과 통계학에 더 강한 면모를 보이며 전공과목은 간신히 낙제점을 면했던 자신과는 달리 노먼은 특출 난 재능을 보여 그 과감한 또라이 행각에도 불구하고 영문과 수석 졸업생이 되었다. 그런 노먼이 파파라치가 되어 나타났을 때엔 뭔가 노먼답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화가 났었다. 왜 그런 재능을 가진 녀석이 저러고 있나 싶어 더 표독스럽게 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다니 다행이다. 아니,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다. 노먼은 단 한 번도 글쓰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 자유분방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물론, 남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타고난 짓궂음도 말이다.
두근두근하며 기다리던 진은 소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라온 영화 티켓 두 장을 보곤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토요일 오후 3시. 너,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분명 영화 티켓에 써진 영화의 제목은 자신이 어제 혼자라도 보러 가겠다고 결심했던 그 영화였다. 문제는 왜 소설이 아니라, 이게 테이블 위에 올라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소설은?”
“토요일 한 시에 너희 집으로 찾아갈게.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우리 집으로 가서 보여줄게.”
식사하고 영화 보고 집이라……. 그건 마치 데이트 같았다.
“……관두자.”
“어이, 블리스한테 클리샤 얘기해도 돼?”
“너 왜 자꾸 나하고의 문제에 블리스를 걸고 넘어져? 그렇게 치사하게까지 네 소설 안 봐도 돼. 나도 바쁜 사람이야.”
“네 인생의 중심은 블리스 애클랜드 아니었어?”
“웃기네.”
“……그 말은 마음 정리했다는 거야?”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진짜 정리했냐?”
“그래.”
“……그럼 더 잘 됐네. 데이트하자.”
비약적인 대화의 전환에 진은 현기증을 느꼈다. 늘 노먼과 얘기하고 있으면 이렇게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화제의 전환이 하도 빠른 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장단을 맞추기도 힘들다.
“내가 미쳤다고 너랑 데이트를 하냐? 그리고 그날은 블리스랑 약속 있어.”
“취소해.”
“너 진짜 뻔뻔하다.”
“클리샤.”
“야!”
“어차피 포기한 거면 상관없잖아. 나랑 데이트하자.”
“너 진짜 왜 이래?”
“사랑하니까.”
관두라고 타박을 하려던 진은 순간 휙하니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노먼에겐 미안하지만, 어쩌면 이 녀석을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 사실 노먼에게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 아무리 노먼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동안 노먼이 자신에게 행한 만행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좀 이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양해만 구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데이트 하자.”
결심을 굳힌 진이 재빨리 말을 바꾸자 노먼이 팍 인상을 쓴다.
“뭐야? 너 날 죽이려고?”
“……데이트 신청한 거 너거든?”
“이렇게 쉽게 승낙할지 몰랐지. 너 10년 동안 거절했잖아. 오늘도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런 사정이 있어. 사정은 토요일에 설명해줄게.”
“뭐……. 좀 찝찝하긴 하지만 나야 좋지. 그럼 토요일 데이트 하는 거지?”
“물론.”
“몇 시에 데리러 갈까?”
“너, 우리 집 알아?”
“파파라치를 뭘로 보는 거야?”
“파파라치가 왜 내 주소를 알고 있는데?”
“사랑하니까.”
무슨 질문을 해도 답은 ‘사랑하니까.’다. 이러니까 진이 노먼의 고백을 믿지 못하는 거다. 진짜 사랑고백이라면 아주 간절한 사랑이 아니라도 저렇게까지 건성으로는 못한다. 최소한의 진심은 비치게 되어 있는데 노먼에게는 조금의 진정성도 보이지 않는다. ‘밥 먹자.’라는 말처럼 ‘사랑한다.’라는 말을 매일 반복하는 녀석을 어떻게 믿을까.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
“넌 바보는 아냐. 바보 비슷하긴 하지만.”
언제나 진을 바보 취급하는 노먼의 태도에 진이 찌릿하고 노먼을 노려보자 노먼이 환하게 웃고 만다. 또라이라곤 하지만 노먼은 생긴 건 아주 멀쩡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학 시절에 그 엽기적 행각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대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고 잘 생겼다. 블리스가 전형적인 귀족가문의 도련님 스타일이라면 노먼은 터프하고 거친 쾌남형이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콜린 패럴 스타일이었다.
“생긴 건 멀쩡해서는…….”
얼굴과 그 재능이 아깝다는 듯 진이 고개를 내젓자 노먼이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듣기 좋은 유쾌한 웃음이지만 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썼다. 그 사이 노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아버지다.”
번호를 확인한 노먼은 전화를 받지 않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노먼이 아직도 가족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커피 잔을 들었다.
“잭? 잭이 아직도 널 자식으로 취급하냐?”
졸업 후 파파라치를 하겠다면 달려 나간 노먼은 맥캐인 가의 처치곤란 산업 폐기물이었다. 맥캐인 가와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거물들과 고객들의 사진까지 맘대로 찍어내 팔아내는 통에 잭 맥캐인이 한 동안 노먼을 찾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었다는 건 유명한 일이다. 한 번은 고객의 불륜 장면을 찍어 팔아넘긴 그의 아들과 법정 싸움까지 갈 뻔한 잭 맥캐인은 그 후로 정키는 용서해도 파파라치는 용서 못한다는 특이한 철칙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노먼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니 놀랄 일이다.
“당연하지. 이래봬도 우리집 자식들 중 가장 뛰어나니까. 간다. 오늘 아침 사진 때문에 애클랜드가 클레임 걸었을 거야. 잔소리 듣고 올게.”
“그래, 가라.”
“토요일 데이트 잊지 마.”
“걱정 마.”
드디어 저 거머리를 떨쳐내게 됐다는 사실에 진은 마음이 느긋해졌다. 아침식사는 어디로 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나는 상태라 남은 샌드 위치에 손을 대는 진을 보며 노먼은 사랑스럽다는 듯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후 1시야.”
“내가 시간 안 지키는 거 봤냐? 너나 약속 지켜.”
“알았어.”
오토바이의 헬멧을 손에 든 노먼은 잠시 진을 내려다보다 허리를 숙여 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오늘 오전에 당한 게 있는지라 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노먼이 손끝이 진의 입술을 스쳐간다.
“네 첫 키스, 내가 가져도 되지?”
미안하지만 이미 첫 키스는 물 건너갔다, 라고 말하려다 진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손사래를 쳤다.
“꺼져.”
“갈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노먼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진은 안도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평화의 시간이 도래했다. 노먼 덕에, 아니 덕인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리스 때문에 놀란 건 많이 가셨다. 그러고 보니 노먼은 늘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블리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때는 늘 노먼이 나타났고 노먼과 이렇게 싸우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눈이 맑아진다. 그래서 냉정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오늘만 해도 노먼을 만나기 전까지는 진짜 무서워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두려움이 가셨다. 정신이 차분해졌다. 그런 점은 감사한다. 늘 감정에 억눌려 터지기 직전까지 가는데, 노먼은 그 감정을 확실하게 터트리게 해준다.
마음껏 소리 지르고 싸우고 화내고, 그러다 웃고. 크게 한 번 소리치는 게 사람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노먼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 저 녀석을 미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상한 성격만 아니라면 진짜 좋아했을 것이다.
“블리스를 두고 저 남자랑 데이트를 해요?”
커피를 마시려 손을 뻗는데 아주 위쪽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분명히 바로 이틀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인 것 같았다.
오한이 끼친 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리고 앞에서 흩날리는 골드 블론드의 긴 생머리를 보는 순간 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겨우 블리스의 키스에서 충격이 가셨다고 생각했다. 노먼과 다시 엮이는 건 질색이지만, 지금은 이용할 만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겨우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채였다. 그런데 키스 끝나고 노먼 가니 엘레나가 나타났다.
사다코의 저주에서 벗어나 들어간 집이 가네코의 집이라든가, 프레디를 피해 겨우 잠에서 깼더니 눈앞에 제이슨이 있어 신나게 도망쳐 들어간 집이 에드 기인의 도축장이라든가 할 때의 기분이 딱 이럴 것 같았다.
“나랑 얘기 좀 해요.”
“나랑 할 얘기가 있던가? 난 좀 바쁜데…….”
라고 말하려다 문득 오늘따라 타조의 가방이 유난히 크다는 사실에 시선이 갔다. 오늘은 그나마 저렴한 에르메스(Hermes)의 에블린 블루진을 들었는데, 문제는 에블린은 에르메스의 문양 그대로 가죽에 구멍을 뽕뽕 내놨다는 사실이다. 그 구멍들 사이로 은색의 물체가 비치자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바쁘지만 앉아. 잠깐 시간은 있어.”
파티에서와는 달리 마크 제이콥스의 티셔츠에 트루 릴리전 데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엘레나는 20대 초반 정도로는 봐줄만했다. 문제는 그 아래 신은 어그 부츠지만, 진짜 양털로 만든 어그야 여름에 시원하다니 잘 어울린다 싶었다. 그 와중에도 샤넬의 진주 체인 목걸이는 잊지 않을 걸 보니 어지간히도 샤넬을 좋아하는 처자다 싶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엘레나는 멋대로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노먼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뚱한 얼굴로 진을 바라본다.
“……가방 예쁘네.”
딱히 할 말이 없어 진이 에블린을 칭찬하자 새초롬한 표정의 엘레나가 뭘 그런 걸 칭찬하냐는 얼굴을 한다.
“오늘은 학생 같아 보여서.”
“내가 늙어 보인다고 하려는 거예요?”
자각은 있었나 보다.
“아니, 그냥 헐리웃 10대 같다고. 그런데 안 바빠? F/W 준비 안 하나?”
“모델 활동 정지 먹었어요. 1년 간.”
“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며 진은 계속해서 테이블에 올려둔 엘레나의 에블린을 훔쳐봤다. 저 은색은 뭘까. 저거 진짜 총인가, 총이면 어떻게 하지? 접시로 막으면 뚫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힐끔거리자 엘레나가 슬쩍 그녀의 가방을 보더니 묻는다.
“에르메스 좋아해요?”
“뭐.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야 자주 접해야 하니까.”
“저번에 에르메스 크로커다일 블루로얄 채간 거 당신이죠?”
“아, 클레어가 부탁해서.”
“내가 그거 아침에 눈 뜨자마자 사려고 달려갔는데 당신이 채갔다는 얘기 듣고 진짜 열 받았던 거 알아요?”
“내가 쓰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너한테 벌킨은 좀 그렇지 않아? 에블린이나 샤넬 볼륨 백 정도가 어울리는 나인데…….”
“그래도 들어야 한다고요! 클레어는 잘 들고 다니지도 않잖아요!”
“클레어는 그냥 수집용이야. 블루 색상을 좋아하는데 드물잖아. 화이트 룸이랑 블랙, 레드 룸은 꽉 찼는데 블루 룸은 좀 허전해서 나오자마자 내가 다 사들이는데.”
클레어 애클랜드는 딱히 눈에 띄게 치장을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구두와 가방이라면 환장을 하는 편이었다. 잘 들고 다니지도 않는 걸 왜 사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저택에 있는 쇼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진짜 쇼룸이었다. 커다란 원형의 2층을 레드룸 화이트룸 블루룸 블랙룸 그리고 핑크룸으로 섹션을 구분한 뒤, 각 브랜드의 가방과 구두들을 색깔별로 사서 진열해둔다. 그러니까, 클레어는 가방이나 구두 자체보다는 그 콜렉션에 집착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상도 신상이지만 리미티드나 프리 시즌(Pre-season), 그리고 런웨이 제품들은 무조건 사서 진열해둔다. 가방 하나에 10만 달라가 넘어가는 제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할 뻔했지만 어차피 계산은 블리스나 클레어가 직접 하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열심히 클레어의 가방 콜렉션을 돕는 중이었다.
“클레어는 모으기만 하는 거예요?”
“거의. 가끔 한번씩 생각나면 들지.”
“저번에 에르메스에서 서류가방 제작했다면서요? 그것만 들고 다니던데.”
“일을 하니까. 그리고 워낙에 번거로운 걸 귀찮아해서.”
엘레나는 뭐 그따위 재미없는 가방을 들고 다니냐는 듯 말했지만, 그 에르메스에게 특별 제작한 서류가방이 십만 달라였다. 다이아몬드 칠이라도 했나 싶어 보니 가방을 닫는 부분에 진짜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그나저나 사회봉사는 마친 거야? 막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그 총기 사건 이후의 일이 궁금해 묻자 엘레나가 툭하니 내뱉는다.
“하고 있어요. 아버지한테 혼나서 빠져나가지도 못해요.”
“너, 아버지한테 혼도 나?”
“사람 없는 데서 쏴야지, 사람 많은 데서 쐈다고요.”
“…….”
“내 얘기는 이제 됐고, 이 말하려고 왔어요. 하루라도 빨리 블리스의 옆에서 떨어져주세요. 당신 때문에 블리스가 손해를 보잖아요.”
맹랑한 엘레나의 말에 진은 잠시 번민했다. 그냥 사실대로 다 터놓고 이 아가씨를 설득할까, 아니면 그냥 사실인 척 블리스의 장단에 맞춰줄까? 전자를 택하자니 아가씨의 뇌 용량이 너무 의심스럽고, 후자를 택하자니 블리스에게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 다 선택 않고 버틸 수는 없으니, 결국 블리스에게 말리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블리스를 설득하는 건 쉽지만, 엘레나의 뇌 용량은 인력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니까.
“나 때문에는 손해를 보지만 너 때문에는 죽을 것 같은데?”
“이제 안 죽여요!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총에 손대면 가만 안 둔다고 하셨어요.”
“너 말고 너희 아버지 말야. 아니면 너희 오빠들이나.”
“우리 아버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방금 전엔 으슥한 데서 죽이라고 했다며?”
“그건 그거고.”
“그거랑 이거랑 똑같아. 하여간, 네가 먼저 포기해.”
그 말만은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저 타조머리였다. 저 타조만 포기하면 간단해진다. 자신이 더 이상 블리스의 장단에 맞춰줄 이유가 없으니 사실대로 다 말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 문제를 그렇게 쉽게 해결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싫어요.”
“그럼 어쩌게?”
“4년만 기다려달라고 할 거예요.”
4년이라.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니, 엘레나로서는 참 많이 양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있긴 하구나.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요?”
“너, 학교는 언제 가? 지금 한창 수업 중일 시간 아닌가?”
“시간 나면 가요.”
“……그럼 한 가지만 더 궁금해 해도 될까?”
“뭔데요?”
“너, 이름은 쓸 줄 알아?”
“알아요! 날 뭘로 보고!”
“그럼 써 봐.”
라고 말하며 진은 넵킨과 함께 펜을 건넸다. 그러자 펜을 잡고 그 위에 Ellena까진 쓴 타조는 이내 N에서 손을 멈췄다.
블리스의 말이 사실이었다. 문맹인가 보다. 아니, 일단 알파벳은 아니 문맹은 아니지만, 문맹 수준인 건 맞는 듯했다.
“문맹 맞구나…….”
“그냥 까먹은 거예요! 보통 사인은 엘레나까지만 한다고요!”
“그래. 알았다.”
고개를 내저은 진은 엘레나의 손에서 펜을 받아들고 다시 양복 재킷 안에 넣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진짜 신기했을 때 미국에 의외로 글자를 쓰고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나이가 많으신 노인 분들을 제외하곤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의외로 미국은 문맹률이 높다.
진짜 이상한 나라였다. 진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려 컵을 들자 엘레나가 눈을 부릅뜨고 재차 답을 촉구한다.
“왜 대답을 안 해요? 헤어질 거예요, 말 거예요?”
“너 하는 거 봐서.”
“뭘요?”
“네가 어떻게 나오나 봐서 헤어져줄게. 됐지?”
그렇게 말하며 앞에 있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자 엘레나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키는데…….
“배고파?”
“……네.”
“뭐 시켜. 사줄게.”
“내가 돈이 없어서 못 먹는 줄 알아요?”
“그럼 왜?”
“……전 숨만 쉬어도 살 쪄요. 물만 먹고 산다고요.”
“응?”
“물하고 과일 샐러드 200그람이 하루 식사 전부에요. 그런 제 앞에서 먹고 싶어요?”
“……왜 그러고 사는데? 어차피 활동 안 한다며?”
“영원히 안 할 거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러고도 사람이 살 수 있냐?”
“저 살아 있잖아요. 아 다른 데 가서 먹어요!”
그 말에 진은 슬쩍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왼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엘레나의 파란 눈동자가 그 접시를 따라 움직인다. 조금 재미있었다. 그리고 다시 접시를 오른쪽으로 옮기자 엘레나의 얼굴이 휙하니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마치 테니스 관람을 하는 고양이 같았다.
“……이거 좀 먹을래?”
하도 안 돼보여 그냥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엘레나는 침을 꿀떡 삼키더니 의외로 순순히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럼, 한 입만…….”
손을 부들부들 떨며 샌드위치를 손에 드는 엘레나는 딱 그 또래 다이어트 중인 여학생 같아 보였다.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 먹으면 친구들하고 어떻게 다녀?”
“친구 없어요. 모델 친구들은 있지만, 다들 안 먹어요. 물 먹어도 욕해요. 배 나온다고.”
“학교 친구들은?”
“없어요. 러시아 마피아 딸이잖아요.”
“……그게 왜?”
“다들 무서워해요. 아닌 애들은 뭐…… 나한테 붙어서 뭐 하나 얻어 보려는 애들이고. 다들 나보다 한참은 작아서 같이 다니려고도 안 하고.”
“아, 하긴. 너보다 한참 작겠구나.”
엘레나는 열다섯 살 소녀의 평균 신장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또래 친구들과 다닌다면 아마 언니와 동생쯤으로- 심하면 엄마와 딸로- 보일 것이다. 그걸 이제 알았다는 듯 진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엘레나다 딱 한 입만 먹은 샌드위치를 다시 내려두고 진을 노려본다.
“당신, 되게 예의 없네요.”
“사실이니까.”
그럼 네가 짧으냐? 라고 묻는 듯한 진의 시선에 엘레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았다. 하얀 냅킨 위에 새빨간 입스틱 자국이 찍혀나오는 걸 본 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네가 왜 나이 들어 보이나 했더니 화장 때문이구나. 왜 화장을 하고 다녀?”
“모델이니까요. 그리고 다들 해요. 학교에서도 화장 안 하는 애들은 구질구질한 왕따들밖에 없어요.”
“왜? 제일 예쁠 나인데? 너는 화장 안 하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나이 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감추고 다녀?”
“내가 예쁜 거 이제 알았어요?”
“응.”
진은 진짜 솔직하게 그렇게 답해주었다. 블리스와 함께 다니다 보니 모델이나 배우, 가수들을 많이 봤는데 헐리웃의 화장능력은 화장이라기보다는 거의 분장에 가까웠다. 아마 특수효과 바로 아래급이 여배우들의 화장일 것이다. 쳐진 살을 탱탱하게 올려붙이는 해파리 테이프를 본 순간 이미 얘기 끝난 거다. 헐리웃에서 원판불변의 법칙은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은 여자들의 화장한 얼굴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는 나이가 어려서인지 피부도 좋고 예쁜 것 같았다. 화장을 안 하면 귀여울 얼굴이었다.
“……당신, 진짜 예의 없네요.”
“화장 덕지덕지한 사진만 봤으니까. 그런데 지금처럼 머리 풀고 화장 안 하면 더 예쁠 것 같아. 열다섯 살은 그냥 서있기만 해도 예쁘잖아.”
“뭐, 저야 당연히 화장 안 해도 예쁘긴 하죠.”
“일도 좋고, 다 좋은데, 열다섯에는 열다섯에 맞는 게 있잖아. 나중에 나이 들면 열다섯처럼 하고 싶어도 못해. 열다섯에는 그때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지.”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래. 아, 나 일어나야겠다. 이 샌드위치 다 먹을래?”
“……살찌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엘레나는 샌드위치를 받아들었다. 진짜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순간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겨우 열다섯인데 물과 샐러드로 연명한다니.
“먹고 싶으면 먹어. 넌 살쪄도 예쁠 거야. 꼭 모델 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모델 안 하면요? 나 머리 나빠서 공부 못해요.”
“샤넬과 루비이통은 역사서 편찬해도 된다며? 나중에 그런 데 들어가서 일하면 되잖아. 옷도 잘 입는데 디자인 공부해도 되고. 얼굴 예쁘니 배우 해도 되고. 잡지 에디터 같은 것도 있고. 나처럼 사교담당 비서 노릇해도 되고.”
“대사 못 외워요. 그리고 글 잘 못 읽어요.”
“그거야 지금부터 배우면 되지. 열다섯 살이잖아, 겨우.”
“창피하단 말이에요. 아직도 글 못 읽는 거.”
“난 열두 살 때 미국에 건너와서 사전 없이 기사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게 열다섯 살 때였어.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해서 예일대도 들어갔는데?”
“한국인들은 머리 좋잖아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네 뇌가 좀 심하게 작긴 하지만, 주름이 많길 기대해볼 수밖에.”
‘주름’이란 말에 순간 엘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진이 어깨를 경직시키자 엘레나의 손이 재빨리 가방으로 향한다. 뇌가 작다는 말에 화가 났나 해 진은 재빨리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접시를 꽉 쥐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손이 막 가방에서 나오려는 순간 진은 본능적으로 접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엘레나가 찾아든 건 총이 아니라 커다란 거울이었다.
“저 주름살 보여요? 보톡스 맞아야 하나? 주름살 어디 있어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눈가와 입가를 돌아보는 그 모습에 진은 어깨에 힘을 빼고 접시를 내려놨다. 그 은색의 번쩍거리던 게 거울이었나 보다. 얘는 아무래도 뇌도 작고 주름도 적은 모양이다.
큰일이다.
“주름살 없어. 있으면 내가 있지. 거기 주름 말고, 사람 뇌에는 주름이 있거든, 구불구불.”
“네? 머리통에 주름이 있다고요? 거기도 보톡스 맞을 수 있어요?”
“……그건 있어야 돼. 펴면 큰일 나.”
지금보다 더 머리가 나빠지면 큰일 일 것 같아, 진이 서둘러 설명을 해주자 그제야 엘레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장이 꼬인 것처럼 말이죠?”
“……장이 꼬이면 큰일나지. 장도 구불구불한 거야, 그냥.”
“하여간요.”
새초롬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먹는 엘레나를 보며 “진짜 애구나.”라고 탄식하던 진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리자 재빨리 번화를 확인했다. 블리스였다.
“응. 나.”
「어디야?」
“어? 벌써 회의 끝났어?”
진의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번뜩인다.
“블리스예요?”
「자료 준비가 덜 돼서 그만하고 나가는 길이야. 그따위 자료를 제시하면서 뭘 하라는 거야? 다음 주에 다시 미팅 잡기로 하고 나가는 길인데, 어디야?」
“어, 여기가……. 어, 나 회의 길어질 줄 알고 점심 먹으러 나왔는데. 지금 들어갈게.”
블리스에게 할 말도 있었던 터라 마침 잘 됐다 싶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엘레나가 따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도 같이 가요!”
「뭐야? 그 멍청한 목소리는. 엘레나랑 같이 있어?」
기가 차게 엘레나의 음성을 알아들은 블리스의 질문에 진은 엘레나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응,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어. 지금 갈…….”
“블리스, 이 남자 다른 남자랑 데이트한대요! 이런 남자는 잊고 나한테 와요!”
갑작스러운 엘레나의 폭탄선언에 진은 혼비백산했다. 말을 해도 자신이 해야지, 엘레나가 하는 건 안 좋다. 역효과다.
「무슨 소리야? 데이트라니?」
“야, 헛소리야, 헛소리. 나 지금 갈게. 끊는다.”
더 이상 얘기를 하면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재빨리 전화를 끊은 진은 앞에 서 있는 엘레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자 엘레나 역시 할 말 있다는 태도로 받아친다.
“블리스 두고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는 건 맞잖아요?”
“그건 내 사정이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애인이 다른 남자랑 데이트 한다는데 두고 보라고요?”
“너한테는 좋은 거 아냐?”
“나한테 블리스 포기하라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야, 가봐야겠다. 넌 할 일 없으면 학교 가서 공부나 해. 아니면 봉사활동 마저 하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진은 더 이상 말하길 포기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돌아서 가려하자 엘레나가 재빨리 샌드위치를 들고 일어나 따라붙는다.
“나도 같이 간다니까요.”
“블리스 애클랜드 게이설에 미성년자 폭행설까지 더해주고 싶어? 더 이상 추문 뿌리게 하고 싶지 않으면 근처로 다가오지 마. 클리샤 사건 때문에라도 블리스는 미성년자라면 질색을 해.”
“미성년자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늦게 태어난 게 무슨 죄에요?”
“죄 맞아.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4년 뒤에 얘기하자. 난 간다.”
막 가게를 나와 잡은 택시 안에 올라타며 진은 엘레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물론, 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돌아갔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진과 통화를 하던 블리스는 다시 험악해진 얼굴로 핸드폰 액정 화면을 노려봤다. 그 무식한 키스와 진의 스타벅스 캠페인-고급 양복을 입고 양손에 스타벅스 컵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진의 모습은 진짜 스타벅스 캠페인 같았다.-이후로 날아갈 듯 방긋방긋 웃고 다니더니 순식간에 살벌해진 블리스의 기색에 옆에 선 에반은 혀를 차며 블리스를 돌아봤다.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렇게 날 사랑해? 하루 종일 보고 또 보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GATH사의 회계 내역이 개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다음 주까지 제대로 만들어 놓으라고 하더니, 진과 통화를 한 뒤로 갑자기 저기압이다. 데이트 어쩌고 한 걸로 봐선 아무래도 진이 반격에 나선 모양이다, 라는 생각에 에반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두 녀석의 관계를 꼬아놓은 데에 자신이 일조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마 블리스도 그런 생각에 자신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듯했다.
“진, 얼마나 걸린데?”
“곤 온대.”
“그럼, 내 차에서 얘기 좀 하자. 할 말이 있어.”
“잔소리 할 거면 관둬.”
“잔소리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일단 내 입장 정리는 하고 가야겠다.”
“당신 입장이 어떤 거든 내가 알 게 뭔데?”
“심술 부리지 마. 자꾸 이 따위로 나오면 내가 대놓고 방해하는 수가 있으니까.”
“뭐?”
“진이 날 친형처럼 따르는 거 알지?”
“……해고 당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해. 그럼 노먼 맥캐인이랑 손 잡고 고소할 테니까.”
에반이 대체 무슨 깡으로 저러나 싶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블리스는 막 울린 핸드폰 벨 소리에 액정을 보더니 전화를 받았다.
“응, 왜?”
「기사 봤어. 역시 형은 의외성의 인간이라니까.」
시원하게 터지는 클랜의 음성에 블리스는 핸드폰을 살짝 귓가에서 떼었다.
“석 달만에 전화해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열린 문을 통해 엘리베이터에서 나서며 블리스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안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터진다.
「그럼 그 동안 잘 지냈냐? 몸은 건강하냐? 뭐 그런 인사를 바란 거야? 파리에서도 형 소식은 지겹도록 들었어. 뭐 하루도 안 나오는 날이 있어야지. 그것도 꼭 연예면에.」
“1면이냐?”
「아니, 파리에서는 별로 그렇게 크게 다루진 않아. 연예면 한 귀퉁이에 나던데?」
“고소해야겠군.”
「으하하하, 여전하네. 진하고 에반은 잘 지내?」
“잘 지내.”
「나 지금 공항이야. 곧장 집으로 갈 건데, 오늘 들를래?」
이 시대의 반항아, 애클랜드 가의 골칫덩이 클랜 애클랜드. 셀레브리티의 삶을 거부하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작가가 되겠다며 프랑스로 날아가 추수 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카드로 생존신고를 대신하던 클랜의 갑작스러운 귀향 소식에 블리스는 걸음을 옮기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왜?”
「왜긴, 사랑하는 형님 지원사격하러 왔지. 여전한가 봐?」
“갑자기 무슨 뚱딴지야?”
「하하,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여간 난 무조건 형 편이야. 형은 에이먼이랑은 달리 늘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니까.」
“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이라 돕겠다는 거야?”
「물론이지. 형은 재밌거든. 에이먼이나 클레어랑은 달라. 백미터 달리기보다는 마라톤을 즐기는 성격이니까. 일단 집에서 보자고.」
“왜 돌아온 건데?”
「말했잖아. 형 도우러 왔다고. 그리고 이제 슬슬 백수 생활 접고 일이나 해볼까 하고.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오늘 안 되면 주말에 진이랑 같이 들러.」
이런 상황에 진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라니, 대체 클랜은 무슨 정신이가 싶어 블리스는 혀를 찼다.
“너, 난장판이 구경하고 싶은 거야?”
「설마. 난 형하고 아버지 사이에 오간 거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뭐?”
「하여간 얼굴 보고 얘기하자. 진도 보고 싶네. 아, 그리고 에반 나 빌려줘.」
“무슨 소리야?”
「아, 택시 타야겠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이코노미석이 이렇게 미어터지는 줄 몰랐네. 다리도 제대로 펴기가 힘들어. 우리 궁전으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어.」
“올 거면 연락을 하지. 그럼 비행기 보내주잖아.”
「으하하하, 그런 것도 여전해. 전용기는 나중에 유용하게 빌려쓸게. 그럼 끊는다.」
전세기 얘기만 하면 질색을 하는 클랜이 웃으며 빌려쓴다는 말을 하자 블리스는 이건 또 웬 심경의 변환가 하는 생각에 에반과 함께 차로 가다 멈춰 섰다.
“너, 뭐야?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세상을 좀 안 거지. 우리 궁전이 그리워지더라고.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하여간 나중에 봐.」
짤막하게 나 살아서 돌아왔소라는 말만 전한 클랜이 그대로 전화를 끊자 블리스는 한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본 채 멈춰 서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 싶었다. 돈도 명예도 다 싫다고 뛰쳐나간 녀석이 갑자기 그 삶이 그리워졌다니, 어떤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돈 없다고 채이기라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클레어나 에이먼이라면 몰라도 클랜은 수중에 한 푼 없어도 어디서든 잘 살아갈 녀석이었다. 성격 좋고 명석하고, 또 너그러우면서도 여유로운 성격이다. 워낙에 부족한 거 없이 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 와 궁전으로 돌아오겠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선 채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자 차 문을 연 에반이 이쪽을 돌아본다.
“뭐야? 클랜?”
“응.”
여전히 에반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퉁명스레 답한 블리스가 뒷 좌석의 문을 열고 타자 에반이 작게 혀를 찬다. 얘기를 하자는데 뒷좌석에 타는 건 또 무슨 심보인가 싶어서였다. 하긴, 블리스는 진이 운전하는 차가 아니면 절대로 조수석에 타지 않는다. 조수석에 타는 것뿐 아니라 운전하는 것도 싫어했다. 보통 정신 면허 허가를 받게 되면 다들 자기 차 들고 뛰쳐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블리스는 면허를 받고도 운전에 시큰둥했다. 차를 좋아해 모으기는 하지만 그다지 운전은 즐기지 않는다. 한 번은 왜 그러냐 물었더니 운전석에 앉은 시간이 아깝다고 답했다. 차 안에서도 수백 가지 계획을 짜고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할 이유는 없다고 하는 걸 보고, 독한 놈이라고 여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는 왜 모으냐고 했더니 취미란다. 애클랜드 가의 사 남매는 모두 이상하게 수집벽이 있었는데 블리스는 차를, 클레어는 가방과 구두를, 그리고 클랜은 책을 모은다. 그리고 에이먼도 비밀스러운 수집벽이 있었다. 다만, 에이먼의 경우는 그걸 드러낼 수가 없다는 차이뿐이다. 그들 모두 저택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갈 때 유일하게 컬렉션을 들고 가지 못한 게 에이먼이었다.
하여간 이상한 남매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에반은 순순히 뒷좌석으로 가 블리스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내 입장 정리를 하기 전에, 너희 가족은 어떻게 할 건지부터 말해봐.”
블리스가 진짜 작정을 하고 달려든 거라면 뭔가 생각이 있었을 거다. 에반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는 저렇게 돌진할 녀석이 아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너만 15년 동안 진 보고 산 거 아냐. 사라랑 네 형제들도 진한테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야. 그리고 제일 문제인 대넌도 있고.”1
“에이먼은 남의 일에 상관없는 성격이야. 그냥 웃으면서 '미친놈' 그러고 말걸. 클랜이야 내가 사고 치면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녀석이고, 클레어는 좋아하겠지. 애클랜드 사를 자기가 이어받을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
분명히 그렇긴 하다. 애클랜드 가의 4남매는 사교계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아주 드물게 사이가 좋은 형제들이었다. 에이먼이 다소 따로 노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건 그의 개성이기에 모두가 존중해주었고 그 역시 가족들에게는 다정한 장남이었다. 게다가 워낙에 사리분별 확실하고 블리스를 절대적으로 믿기에 블리스가 뭘 하든 그러라고 할 성격이었다. 그리고 클랜은 분쟁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고지식하고 내성적인 에이먼에 반해 블리스를 특히나 잘 따르고 좋아했던 터라-둘 다 반골들이라- 아마 블리스의 결정이라면 뭐든 두 손 들고 환영한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클랜은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옛날에, 집 가출 직전까지 종종 '패리스 힐튼 같은 게 형수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진이 나아.'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었던 걸 보니 예상은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클레어는, 블리스의 말대로 대환영일지도 모른다. 블리스의 대학 동기였던 맷 클리블랜드와 약혼을 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일 욕심이 많아 결혼하길 꺼려하던 그녀다. 유달리 야망이 강한 그녀라면 이 일로 블리스가 애클랜드 가의 상속 명단에서 제외될지도 모르니 엄청 기뻐할 것이다. 물론, 그녀는 블리스를 아주 좋아하긴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애클랜드 사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블리스가 블리스 사를 차렸을 때 가장 환영하던 것도 그녀였다. 에이먼이 맡은 방송사야 어쩔 수 없지만 부동산 회사만이라도 그녀가 차지하고 싶어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능력도 있다.
“좋아, 에이먼, 클랜, 클레어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사라는?”
“사라야, 잘 설득하면 되겠지.”
“그럼 대넌은?”
마지막으로 에반은 가장 막강한 적이 될 대넌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블리스가 피식 웃는다.
“걱정 마. 아버지는.”
“걱정 안 할 수가 없잖아. 대넌 무서운 사람이야. 사실 지금까지 아무 연락 없는 게 더 무섭다고.”
“걱정 마. 아버지도 어떻게 못 해.”
“왜?”
“나랑 10년 전에 계약한 게 있거든.”
“계약?”
“응.”
그러니까 그게 언제더라, 라며 블리스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여름이었다. 학기 중 주말에 저택으로 돌아와 썬탠을 하고 시간을 보낸 뒤 지중해로 날아갔던 대넌이 돌아오자 재빨리 대넌의 서재로 쳐들어가 용건을 말했다.
「레이든 제약 회사 주식 저 주세요.」
인사 한 마디 없이 나온 그 말에 대넌은 이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은 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기숙사에서 나오겠다고 해 한바탕 싸운 후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거긴 왜?」
「그럴 일이 있어요.」
「내가 왜 레이든의 주식에 네게 줘야 하지? 지금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데?」
얼마 전 레이든 사에서 획기적인 에이즈 신약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들은 대넌은 있는 대로 레이든 사의 주식을 사들였고, 그 일주일 후 기적의 약이라는 타이틀로 레이든 사의 신약 발표가 나자 레이든의 주식이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연이어 2주간 최고치를 경신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주식에 대넌인 연신 싱글벙글한 채였다.
「제게 주시면 알아요. 전부 주세요.」
「그러니까 왜?」
「내일 오후면 쓰레기가 될 테니까요.」
짤막한 그 말에 대넌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넌은 어린 시절부터 가끔 이상한 핑계를 대며 그를 혼란에 빠트리게 한 자신을 믿지 않는 성향이 있었다. 몇 번인가 자신에게 사기를 당한 뒤엔 더욱 그랬다.
「내가 왜 널 믿어야 하지?」
「뭐, 굳이 손해를 보시겠다면 안 말릴게요. 어차피 아버지가 손해 보는 거니까. 대넌 애클랜드의 운도 이제 한 물 갔다고 하겠죠, 다들.」
대넌이 일주일 만에 레이든 사의 대주주가 되긴 했지만 그 정도 금액을 손해 보는 건 대넌에게는 그냥 모기에 물린 정도의 타격일 뿐이다. 몇 억불 정도는 그냥 재수 없었다 생각하고 포기할 정도로 대넌은 통이 큰 남자였다. 문제는 그의 자존심이었다. 만약 혹시라도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문을 듣자마자 주식을 사 모은 그의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다. 더더구나 부동산 재벌이라 불리는 그가 투자에서 손해를 봤다면 애클랜드 사에 타격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대넌 애클랜드도 한 물 갔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마 신문 지상에서 「황혼의 애클랜드」라는 타이틀을 본다면 그는 아마 혈압으로 쓰러질 것이다. 그의 운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대넌이 몇 번이나 자신에게 사기를 당해 열 받아 방방 뛰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주식에서 피해를 본다면 그는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그 부분을 강조했더니 대넌은 쉽게 넘어왔다.
「뭐가 있는 거냐?」
「글쎄요…….」
「날 상대로 사기 칠 생각 말고 사실 대로 말해.」
「싫습니다.」
「블리스!」
어쩐지 초조해진 대넌의 음성에 자연스레 미소가 흘렀다. 대넌이 아주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럼 뭘 주실 건데요?」
「뭐?」
「제가 어떤 정보를 드린다면 아버지는 뭘 주실 건데요?」
「무슨 소리냐?」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죠.」
「요트를 주마. 아니면 전세기? 그것도 아니면 니스의 별장?」
「어차피 제 건데요, 그것들은.」
「누가 너한테 준다고 하더냐?」
「형은 이미 생일 선물로 다 받은 것들이고, 클랜은 준다고 하면 짜증낼 거고, 클레어는 귀찮다고 할 테니, 저한테 주셔야죠. 이런 생활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건 저뿐이니까요.」
「그럼 뭘 원하는데?」
그 말에 들고 있던 종이 한 장과 펜을 건네자 대넌이 인상을 쓴다.
「이건 또 뭐야?」
「각서요.」
「무슨 각서?」
「10년 뒤에, 제가 누굴 선택하든 절대 방해도 간섭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각서요.」
「……내가 왜 이걸 써야 하는데?」
「제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게 10년 간 유예 기간을 줄 생각입니다. 만약 그때까지 그 상대를 잊지 못한다면 무조건 돌진하려고요. 그때 가서 성가시게 굴지 말고 깨끗하게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달라는 겁니다.」
그 말에 순간 대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성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영리하고 대범한 둘째 아들이 이런 거래를 청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뭔가 상당히 껄끄러운 얼굴이기도 했다.
「대체 상대가 누구길래 네가 이런 각서를 받는다는 거지? 거기다 10년?」
「아버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그 말에 대넌의 얼굴이 순간 경악으로 굳어진다.
「……사라냐?」
「……사라를 좋아하긴 하지만 전 늙은 여자는 취미 없습니다.」
「그럼, 재클린?」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절친한 친구의 딸 이름을 거론하는 대넌을 보자 절로 짜증이 일었다.
「제가 처음 몽정을 했을 때 낳았으면 제 자식뻘입니다.」
「10년을 기다린다며?」
「저 자신에게 주는 유예 기간이지, 재클린 클 때가지 기다린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성인입니다.」
「누군데?」
「그냥 모르는 채로 계세요.」
블리스가 계속해서 답을 회피하자 대넌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묵직한 음성을 낸다.
「설마…… 에반이냐?」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진짜 테이블을 뒤엎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블리스는 그의 말에 천천히 답해주었다.
「아버지도 감이 많이 가셨군요. 슬슬 은퇴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그 말에 대넌은 “망할 자식”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누군데?」
「말 안 합니다.」
「……말 못할 이유가 있는 거냐?」
「아직은 아니니까요. 말씀드렸다 시피, 전 제 자신에게 10년간 유예 기간을 주겠다 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그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할 거라 장담할 수 있으니까요. 그 사이 미친 듯이 노력해보겠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웃음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 그리고 애클랜드 사까지 진창에 빠트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노력 중입니다. 진짜 죽을 각오로, 그 사람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10년 뒤에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으니, 아버지도 협력해주셔야겠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상대냐?」
「아버지가 사라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요. 물론, 그런 분이 메리지 호텔에서 성매매를 하셨다는 건 믿을 수 없지만…….」
상세한 장소까지 담긴 그 말에 대넌이 고함을 내지른다.
「블리스!」
「이미 옛날 일이니 저도 입 닫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진짜 놀랐습니다. 설마, 그 명단에 아버지 이름이 있을 줄이야.」
「내 이름이 있을 리가 없어!」
「그렇죠. 제임스 맨슨 씨.」
블리스가 히죽 웃으며 대넌이 가명으로 쓴 이름을 대자 대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임스 딘의 제임스와 찰리 맨슨의 맨슨을 따다 붙인, 그 장난 같은 가명을 블리스가 정확히 알아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건 어떻게 알아낸 거냐?」
「마담 베르니가 알려주더군요. 저번에 같이 술을 마셨거든요. 서로의 비밀 하나씩을 공유하기로 했는데, 너무 대단한 걸 알려줘서 놀랐습니다.」
마담 베르니는 뉴욕에서 유명한 사교계의 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가 하는 일은 불법적인 매춘 행위였다. 그것도 고급 호텔 하나와 연계해 잘 교육받은 미모의 재원들을 상류층 남자들에게 빌려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겉으로는 그냥 시간 많고 돈 많은 사교계의 꽃이었지만, 시간 당 천 달라에서 이천 달라의 화대를 받는 고급 매춘 알선업이 그녀의 본업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사교계에서도 친한 클럽의 몇몇 남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여자…… 절대 비밀을 지킨다더니…….」
「사라와 재혼 전이었으니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니 굳이 가명을 쓰고 호텔을 찾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왜 그러신 거죠?」
「잭에게 말린 거야. 그래서 네가 그녀와 공유한 비밀은 뭔데?」
「그건 말 못합니다. 비밀은 어디까지나 비밀이니까요.」
마담 베르니와 술을 마시며 처음으로 타인에게 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진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사정만 설명을 하자, 그녀가 웃으며 요긴하게 써먹으라고 알려준 게 ‘제임스 맨슨’이었다.
「아무리 불륜은 아니라지만 아버지처럼 명망 있는 분이 매춘을 했다는 건 큰 불명예죠. 비록 7년 전 일이지만 말입니다.」
슬슬 약을 올리는 듯한 블리스의 말에 대넌이 그를 노려보며 협상안을 통보하라 재촉한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냐?」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각서만 써주시면 됩니다.」
「싫다면?」
「사라한테 말해야죠.」
「블리스 애클랜드!」
「인생은 원래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각서 써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한테 너무 불리한데? 네가 누굴 데려올 줄 알고?」
「그러니까 제가 그 큰 건을 던진 거 아닙니까?」
「……좋다. 단, 너도 지킬 조항이 있다.」
「무슨 조항이요?」
「첫째로 졸업 후 워튼 스쿨에 입학할 것.」
전통적으로 애클랜드 가의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중 유펜 출신들이었다. 에이먼도 클랜도 클레어도 모두 유펜에 입학했지만 블리스만 유독 고집을 부려 예일로 들어갔다. 네 남매들 모두 유펜 경영학부에 입학시키는 게 대넌의 꿈이었는데, 블리스가 그 꿈을 깬 것이다. 그러니 최후의 선택으로 유펜의 워튼 스쿨을 권하는 거다. 어차피 블리스도 당분간 진과 떨어져 있어볼까 하던 터라 그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요?」
「MBA 수료 후엔 애클랜드 사가 아니라 자기 회사를 세워 자산 십억 불 규모로 키울 것. 그리고 그때까지 최소한 백 명의 여자들을 만날 것.」
두 번째는 분명히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세 번째 조건을 듣는 순간 블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최소 백 명이야.」
「그건 뭡니까?」
「네가 사랑하는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성격에 10년 간 기를 쓰고 잊어보겠다고 했으니, 진짜 죽을 각오로 잊어 봐. 그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여자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지. 그리고 만약 그 백 명 중에도 네 마음을 끄는 여자가 없다면 내가 포기하마. 그리고 10년 뒤에도 네 마음이 그대로라면 인정해주지. 그렇게까지 죽을 각오를 하고 잊으려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 할 때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 하는 거다. 네가 10년 뒤에 당당하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해봐. 진짜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다소 어이없는 조건이긴 하지만 블리스는 그도 그럴 듯하다 생각했다. 백 명을 만나봤는데 그 백 명 중에서 설마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자가 없을까. 있다면 이 혼란이 순식간에 종식되고 진도 살고 자신도 사는 거니 괜찮다. 그리고 없다면 자신은 진짜 진에게 눈이 먼 거니 어쩔 수 없다. 최선을 다 해보자 했으면 진짜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다 해보는 거다.
단 마약만 빼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다시 써와. 그럼 사인하지.」
자신이 건 조건이 만족스러운 듯 대넌이 웃어 보이자 블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밀었던 종이를 찢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서를 다시 작성해 오겠습니다.」
블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자 대넌이 블리스를 부른다.
「그 전에 레이든은 뭐지?」
진짜 초조한 듯한 그의 태도에 블리스는 싱긋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사인하시면 얘기하죠.」
“그래서 사인하셨다고?”
블리스의 설명을 들은 에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물론이지. 설마, 아버지도 내가 진짜 10년 간 그 녀석을 사랑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긴…….”
보통 10년이면 끓어 넘치던 연정도 식게 마련이다. 게다가 블리스처럼 온갖 종류의 여자들을 다 만나고 다닌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다. 아마 대넌도 그 점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블리스의 바람기가 상상을 초월한 상태라 아무 마음을 푸욱- 놓고 있었을 거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으니 너무 열 받아서 전화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들과 한 약속만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대넌이니, 이제 와 뭐라 말도 못하고, 혹시나 해서 만류하려 들면 그대로 블리스가 그 각서를 들이밀고 고소 운운할 게 뻔하니 속만 썩고 있는 거다. 조만간에 병원에 실려 갈지도 모르겠다.
“그래, 좋다. 하여간 워튼 스쿨은 졸업했고 자산 십억 불도 채웠고, 여자 100명은 만난 거야?”
에반은 진심으로 그게 궁금했다. 블리스의 염문설이야 하도 화려해 알고 있지만 설마 백 명이 될까 싶어서였다.
“정확히 182명.”
“……네 바람기가 각서 조항 때문은 아니었구나.”
블리스의 그 화려한 여성 편력이 대넌과의 약속 때문인가 감동 받았던 에반은 블리스의 입에서 숫자가 나온 순간 절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저건 타고난 거다. 절대로, 타고난 거다.
“하여간 뭐 그렇지. 그래서 당신의 입장은?”
“사실은 네가 장난으로 작업 거는 걸까 봐 걱정했는데, 진심이라면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 사실대로 말해 난 네 가족도 아니고 더더구나 친구도 아니니까. 문제는 진이야. 진을 어떻게 설득할래?”
“나도 그게 고민이야. 사실은…… 좀 쉽게 생각했었어. 어차피 연애는 안 한다 했으니 다른 애인 생길 일은 없을 거고, 내가 고백하면 금방 넘어올 줄 알았거든.”
“너 아직도 진을 모르는구나. 그 녀석이 네가 고백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라붙을 줄 알았냐? 도망가지.”
“나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지.”
“너니까 특히 더 그래. 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기니까. 친구가 자기한테 그런 감정 갖고 있다는 거 꽤 배신감 느껴질 수도 있어.”
그 말에 타격이 된 듯 지금까지 무표정하던 블리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에반도 이이상은 말릴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실은 진이 널 좋아했는데 내가 그걸 7년 전에 뜯어말려 포기시켰다, 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다. 남의 감정을 자신이 토로한다는 것도 웃기고, 또 자신이 말린 걸 알면 블리스가 자신을 죽일 것 같아서였다.
“하여간 난 이제 백기 들었어. 여기서부터는 알아서 해. 고생 좀 하겠지만…….”
“백기 든 김에 좀 도와주지?”
“난 진 편이라 그 짓만은 못 하겠다.”
어차피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걸 아는데 가라고 진의 등을 떠밀 수는 없어 에반이 작게 중얼거리자 블리스도 더 이상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지하 주차장 안에 뭐 볼 게 있냐 싶었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게 많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던 에반은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블리스를 불렀다.
“그런데 레이든은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네가 그 에이즈 신약 실험이 사기인 걸 어떻게 알았는데?”
“아…… 뭐. 옆 기숙사에 괴짜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벤이라고 알지? 지금 시스본 제약 회사에 있는 녀석.”
“아, 알아. 그 이상한 친구.”
에반이 가끔 블리스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천재 소년 이야기를 떠올리며 답하자 블리스가 말을 이어간다.
“그 녀석이 그 얘기를 하더라고. 레이든 사의 에이즈 신약 보고 기사를 보고 이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당시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그 녀석이 그때 마침 같은 아이디어로 논문을 준비 중이었거든. 단 실효성의 문제로 인해 실험은 시작도 못해봤지만, 그게 확실히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교수들과 팀을 짜서 반박 논문을 준비한 거지. 그게 딱 그 다음 날 터졌어. 터트리기 전에 미리 알려주더라고.”
“아…….”
“그 기적의 약은 지금 벤이 준비 중이야. 10년 전엔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괴짜지만 진짜 머리는 비상한 녀석이거든.”
블리스의 말에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리스가 정치 경제 분야뿐 아니라 명망 높은 과학자나 의사, 그리고 문화계 거물들과도 계속해서 교제를 하는 이유가 그런 거였던 모양이다. 정보는 언제 어디서든, 뜻밖의 곳에서도 날아드는 법이니까.
“그럼, 얘기 끝난 거지?”
“뭐…….”
짤막한 답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진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블리스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아무래도 아까 데이트 어쩌고 하더니,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에반은 안됐다는 얼굴로 이쪽을 향해 오는 진을 바라봤다. 블리스의 기분이 개떡이니 아무래도 뭔가 일이 나도 나지 싶었다.
“오늘 내 남은 스케줄 전부 취소해줘.”
“응?”
“이대로 아파트로 돌아갈 테니, 취소해줘.”
반대하지 않겠다 했더니 이젠 아예 부리는 블리스의 꼴에 에반은 조금 비위가 틀렸지만 두 사람의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어긋나게 한 것이 자신이었던지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대신, 애 너무 잡지 마라. 데이트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 날 잡고 있어. 지금 아주 미치겠다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못 알아먹는 바보가 어디 있어?”라고 말하며 블리스는 거친 손길로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에반 역시 운전석으로 가기 위해 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을 본 진의 걸음이 빨라진다.
“미안, 늦었지?”
“어딜 다녀온 거야?”
진을 맞이한 블리스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진짜 화가 난 듯해 에반은 진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재빨리 자신의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어, 점심.”
“엘레나랑 같이?”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어. 모델 활동 정지 먹어서 시간이 남아도나 봐.”
“데이트는 또 뭐야?”
주차장에 선 채 쥐 잡듯 자신을 몰아치는 블리스를 슬쩍 본 진은 여기서는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에반의 차 바로 옆에 주차해놓은 블리스의 차 쪽으로 다가섰다.
“타. 타고 얘기하자.”
“뭔데? 데이트를 누구랑 하는 건데?”
“가면서 얘기하자니까.”
“엘레나는 왜 만난 거야?”
“우연히 만났어.”
락을 풀고 진이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자, 블리스가 인상을 확 찡그린 채 조수석에 올라탄다.
“우연히 만난 건 만나 거라 쳐도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그냥, 뭐……. 시시한 얘기. 생각보다 귀엽더라. 아주 청순하고…….”
핸들을 잡은 진이 기어를 바꾸자 안전벨트를 맨 블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받아친다.
“그 얼굴 어디가?”
“아니, 얼굴 말고 뇌가.”
“……깨끗하긴 하지. 순백이지.”
“응. 놀랐어. 이름 써보라니까 영문으로 자기 이름만 쓰는데 ellena라고 쓰더라고. 생각해 보니 걔 러시아 애잖아. 엘레나면 Ejieha아니던가?”
“……그렇지.”
“역시 러시아어도 못하나 봐. 큰일이다.”
영어를 못 하길래 혹시나 러시아어라도 잘하나 희망을 걸었던 진은 모국어도 모르는 엘레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블리스는 엘레나가 문맹이건 장님이건 관심 없는 일이었다.
“지금 엘레나가 문맹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누구랑 데이트를 한다는 거야?”
겨우 말을 돌렸다 싶어 마음을 놓았던 진은 말하기 껄끄러운 화제를 꺼내는 블리스를 보며 엑셀을 밟아 서둘러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날씨 좋네. 해안가 가면 좋겠다. 너 썬탠 좀 해야지? 백인들은 귀찮겠어.”
“말 돌리지 마.”
“……어디로 갈까? 회사로 갈래? 점심 먹을래?”
“집으로. 그래서 누구랑 데이트를 한다는 거야?”
“……누군지는 아직 말 못해.”
“왜?”
“사정이 있어. 첫 데이트니까 해보고, 경과 좋으면 말할게.”
아주 당당하게 데이트 뒤에 사후 보고까지 하겠다는 진의 말에 블리스는 혈압이 올라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눈치도 빠른 녀석이 자신의 직접적인 대쉬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눈치 채고 이해하고 고민하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걸 뻔히 아는데 끝까지 모르는 척하려는 진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너, 나랑 장난해?”
“시간이 남아 도냐? 왜 그런 장난을 해? 너도 바쁘지만 나도 바빠.”
“그럼 뭐하자는 거야?”
“뭘 하긴. 나도 연애 좀 해보겠다는 거지.”
“연애는 안 한다며?”
“그건 그때 얘기고!”
“진, 너…….”
“어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 연애에는 간섭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내가 너 여자 만나는데 뭐라고 하는 거 봤어?”
“그거랑은 사정이 다르잖아! 너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야? 그렇게 표현하는데도 못 알아먹어?”
“네가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
진을 일부러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모르는 척하겠다고 했으니 끝까지 모르는 척할 셈이었다. 아는 척하면 끝장이다. 자신이 아는 기색을 하는 순간, 블리스는 무작정 달려들 것이다. 블리스를 좋아하지만, 그리고 사랑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그를 믿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그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없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싫고, 상처받는 것도 싫다. 블리스는 순간의 호기심이나 장난이겠지만, 아니,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 해도 결국 상처 받는 건 자신이다.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남겨지는 건 자신뿐이다.
“진, 너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뭘?”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네가 무슨 소리하는지 진짜 모르겠다. 집에 데려다줄게. 3시간 정도 비니 좀 쉬어.”
“……데이트는 언제야?”
“아, 그렇지 않아도 그 말 하려고 했어. 토요일이야. 아무래도 주말 약속은 일요일로만 잡아야겠다.”
“뭐?”
“그렇게 됐어. 미안.”
“내가 약속할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
“……뭐……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대신 일요일에 하루 종일 같이 있자. 데이트 보고도 할 겸. 네가 이것저것 어드바이스도 해주면 좋고.”
당당하게 토요일은 미지의 그놈과 그리고 일요일은 자신과 데이트를 하겠다는 진의 발언에 블리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도 안 찬다. 자신도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다. 그런데 진은 아주 당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겠다 말하고 있었다. 진이 자신의 의도를 모를 리 없으니 이건 분명 양다리였다. 거기다 분명 자신과 선약을 하곤 그 놈과 약속을 위해 자신과의 약속을 미룬다는 것 역시 충격이었다. 진에게 늘 일 순위는 자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약속을 노먼과의 약속 뒤로 미룬다는 건, 진에게 있어 자신의 순위가 밀린다는 의미 같아 더 짜증이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이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겨우 자신에게 걸어둔 마법을 풀었는데 이번엔 진이 마법을 걸려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나 어긋날 수가 있을까?
생각 같아서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냐고 따지고 확 일을 저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진짜 도망칠 것 같아 일단은 참기로 했다. 참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토요일 날 데이트 못 해. 취소해.”
“안 돼. 이미 약속했어.”
“클랜이 돌아왔어. 집에 가봐야 돼.”
블리스의 말에 진이 놀라 그를 돌아봤다.
“클랜이?”
“주말에 가족들끼리 모여서 식사할 거야. 너도 같이 가는 거야.”
“웬일로? 당분간 안 돌아올 것 같더니?”
“얼굴 보고 얘기한대. 그러니까 토요일 데이트 취소해.”
어지간하면 노먼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그렇다고 클랜이 돌아왔다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5년 전 집을 뛰쳐나간 뒤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더더욱 그랬다.
“드디어 작가를 포기했나?”
“모르지.”
“잘 됐네. 나도 그렇지만 클랜도 진짜 소설에는 재능이 없어.”
“……노먼 맥캐인은 재능이 넘치고?”
갑자기 나온 그 이름에 진은 놀라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그 반응에 블리스는 대강 알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앉아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노먼 맥캐인이 또 나타난 거군. 그래서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귀신이다. 하긴, 자신처럼 낯을 가리는 사람이 난데없이 데이트라니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상대가 노먼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래서 너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는 질색이다.
“……미안. 말하려고 했어.”
“노먼 맥캐인하고 데이트를 한다고?”
“노먼이 계속 고백했었어. 지금까지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좀 달라. 진지하게 나오더라. 그래서 생각해보기로 했어.”
“그 녀석은 네 종신보험이 되어준대?”
“모르지. 하지만 10년 간 날 기다려준 건 그 녀석뿐이야. 그러니까 그냥 믿어보고 싶어.”
진의 진지한 말에 블리스는 허탈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10년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표현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였을 뿐, 10년을 인내한 건 마찬가지다. 아니, 자신이 더 안 좋다. 말도 못하고 끙끙대며 가까이 다가오면 호흡이 거칠어질까 마음에도 없는 1미터 경계령까지 내렸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진이 얼마나 상처 받은 얼굴을 했는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진만 상처 받은 게 아니다. 자신도 상처 받았었다. 그래도 끊어내자고 생각했다. 서로 아프더라도 만약을 위해 감정을 정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은 혈기에 객기를 부리다간 두 사람 모두 상처 받을 테니까,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그 인내의 대가를 돌려받자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거렸다.
설마 그 인내의 대가가 이렇게 돌아올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이렇게 잔인하게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도 진은 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이 막막한 기분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가야할지 머리가 다 아프다.
조수석에 앉아 슬쩍 옆을 돌아보자 조금의 동요도 없는 차분한 진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은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웠다.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 자신의 평판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10년 간 자신은 진짜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었다고 하지만, 주변의 압박이 사라지면, 다 잘될 줄만 알았다. 고백하는 순간 진은 조금 망설이면서도 결국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여겼다. 근거도 없이 그렇게 자신했었다.
그게 틀렸다는 걸 이제야 겨우 알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에반도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진 케이먼,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보다 진을 공략하는 게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