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왜 이렇게 늦었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떡하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퉁명스러운 투로 말을 하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다지 늦지 않았다. 겨우 30분 정도 늦었을 뿐이다.
“에반에게 전언 못 받았어?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혔어. 자리 좀 비켜줄래? 오늘도 난 바쁘거든?”
당당하게 자신의 의자에 기대앉아 멋대로 스케줄첩을 보고 있는 블리스에게서 스케줄첩을 빼앗은 진은 양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와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어서 비켜달라고 다시 한 번 요청하려는데 블리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침에 엘레나가 울면서 전화를 했어.”
“뭐라고?”
“내가 마귀에 씌웠으니 엑소시즘을 하자던대?”
순간 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사탄의 꾐에 빠진 거니 회개하면 낫는대. 주기도문까지 읊어주더군. 걔 주기도문 중의 다섯 단어 중 세 단어를 못 읽는 거 알아? 진짜 놀랐어. 내가 지금까지 그 애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더라고. 거의 문맹수준이야.”
“……농담이겠지.”
“아니, 진짜야. 자기 이름은 영어로 쓰나 몰라. 아니, 러시아어는 제대로 하나? 미국에서 태어난 걸로 아는데…….”
“그거 말고, 엑소시즘 말야. 농담이지?”
설마 이 21세기에 동성애는 사탄의 저주, 악귀 들린 행위, 죽어 지옥에 떨어져 화염에 싸여 죽을 마귀의 저주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진이 가방을 책상 위에 두며 설마하는 얼굴로 묻자 블리스가 심각한 얼굴로 책상 위에 팔을 괴며 답해준다.
“진심인 것 같았어. 이걸 한국 속담으로 뭐라고 하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라고 하지. 그나저나 그 아가씨 크리스천도 아닌 것 같던데……. 뭐지? 갑자기 개종하셨나?”
“어디서 뭘 주어들은 거겠지. 어제 퀴어 영화를 다섯 편이나 봤다나 뭐라나.”
“보통 퀴어 영화를 봤다면…… 그쪽을 이해하게 되지 않나? 소수 성애자들의 애환이라든가,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든가, 그들도 보통 사람과 같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야.”
“말은 퀴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크리스천들이 제작한 동성애자 계몽 비디오를 본 모양이야. 신을 믿지 않던 자들이 육욕에 젖어 동성간의 성교를 하다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아 이성애자로 돌아왔다던데? 그 뒤로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됐다는 게 전체 내용이었대.”
기가 막힌 소리에 막 책상 위에 놓인 스케줄 표를 확인하던 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퉁명스레 받아쳤다.
“흑인이 회개하고 구원 받으면 피부가 희어진다디?”
그 말에 블리스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뜨며 진에게 묻는다.
“너 성정체성은 타고났다는 쪽이었냐?”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만큼 설득력 없는 소리잖아. 동성애자가 갑자기 이성애자가 된다는 건, 마치 황인종이 염색하고 렌즈 끼면 백인 된다는 소리랑 비슷하게 들려.”
“웃기긴 하지.”
“웃긴 정도가 아니지.”
“하긴, 그게 회개해서 없어질 감정이었다면 난 이미 10년 전에 나았을걸.”
블리스의 진지한 어조에 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늘 날짜의 기념일들을 확인하곤 죽어도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를 무시하며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신호음이 가는 동안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동성애가 회개해서 낫는 병이라면 네 그 바람기는 10년도 전에 나았겠지. 바람기는 사실 노력으로도 고쳐지는 건데 말야. 아…… 클레인, 저 진인데요. 저번에 얘기한 와인 말이에요. 오늘 입고되는 거 맞나요?”
금세 전화로 신경을 돌린 채 오늘 중에 발송해야 할 선물들의 입고를 확인하는 진의 모습에 블리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네, 그럼 오전 중에 보내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은 블리스를 보며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나저나 좀 일어나줄래? 나도 일해야 하거든? 너 긴급회의라면서 안 가 봐도 돼?”
“미뤘어. 당분간 필요한 거니 그냥 두라고 했어. 내가 직접 인터뷰하지 않는 이상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떠돌다 사라질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부모님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건데?”
“침묵해서 잘못될 일은 없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빨리 내 자리나 내줘. 오늘 쓸 카드만 열다섯 장이야.”
“에반한테 맡기지 그래?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나 보러갈까? 아니면 뮤지컬? 오페라? 어때?”
“네 한 시간이 삼천 달라야. 미안하지만 난 갑부가 아니라 너한테 쓸 돈 없어.”
“내가 데이트하자는 건데?”
“너 혼자 하세요.”
마치 꽉 짜놓은 대본을 읽듯 블리스가 하는 말에 한 치의 틈도 두지 않고 재빨리 거절의 말을 반복하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뚱한 얼굴로 책상에서 몸을 떼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리고는 느긋한 어조로 다시 묻는다.
“너, 날 마피아의 손에 죽게 할 셈이냐?”
막 호텔에 전화를 걸려던 진은 엉뚱한 블리스의 말에 인상을 쓰며 단축번호를 누르려다 말았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어젯밤에 그런 말을 해놓고 오늘 나 혼자 돌아다니면 엘레나가 오해하고 거짓말했다고 난리를 칠 수도 있잖아. 그럼 난 그날로 죽는다고.”
“그보다는 널 회개시키려고 교회에 끌고 갈 것 같은데? 그 뇌 없는 아가씨는 네 말을 진짜 믿는 눈치던데.”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의심은 할 걸.”
“바보 맞던데?”
“그렇게 머리가 나쁜 애는 아냐. 다만 다른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거지. 한 예로, 그 애는 샤넬과 루이비통 백의 생산 년도와 한정품들 색상과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어. 그쪽으로는 끝내주게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샤넬과 루이비통 가방은 보기만 해도 몇 년도 무슨 모델인지 다 나와. 아마 가격도 다 외우고 있을걸.”
“샤넬 매장에서 일하면 되겠네. 매장에서 스카웃 안 한다니? 내가 소개해줘?”
“농담은 그만하고. 그런 이유로, 오늘부터 당분간 로이드와 네 일을 좀 바꿔줘야겠어?”
“뭐?”
“로이와는 얘기 끝냈어.”
“무슨 소리야? 수행비서인 로이랑 내 일을 바꾼다니? 그게 말이 돼?”
“로이도 꽤 달필이거든. 그리고 은근히 이쪽 일을 하고 싶어 하길래 당분간 바꿔서 해보라고 했지.”
“미쳤냐? 이거 보통 일 아냐. 그리고 로이 일도 보통이 아니고. 분야를 바꿀 거면 최소한 두 달 간은 인수인계를 해야지.”
“지금부터 해.”
“지금부터 어떻게 하라고?”
“이쪽 일은 네 메모랑 사라의 도움으로 어떻게 될 거고, 그쪽 일은 에반이 도와줄 거야.”
“장난해? 이거 보통 일인 줄 알아? 아, 됐어. 더 말하기도 귀찮다. 빨리 비켜. 웨이팅 걸어둔 상품들 확인해야 돼. 그리고 사라 생일 파티 준비도 해야 하고. 손님 명단도 하나씩 다 만들어야 하니 좀 비켜라.”
“……안 한다고? 너, 진짜 날 마피아의 총에 죽게 하고 싶은 거야?”
또 다시 먹히지도 않을 협박을 하는 블리스를 쳐다보며 진은 한숨과 함께 사실을 내뱉었다.
“에반이 너랑 같이 다니지 말래.”
“……에반이? 왜?”
“같이 다니면 여기저기 소문날 거라고. 너랑 나 유난한 거 다들 알잖아. 그러니까 조심하래.”
에반은 쓰레기 같은 가십을 신경 쓸 사람이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건 괜히 그런 소문이 났다 자신이 또 주제넘게 황홀경을 헤맬까 하는 걱정이었지만,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할 수는 없기에, 진은 가장 무난한 답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블리스 역시 에반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에반이 그런 걱정을 한다는 걸 믿으라고? 에반은 아버지 밑에서만 7년을 일했어. 가십 따위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거 알 만큼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것도 너랑 내 사이를 뻔히 알면서?”
“에반은 네가 아니라, 날 걱정하는 거야. 괜히 너랑 엮여서 피 보지 말라고.”
진이 수화기를 든 채 딱 잘라 말하며 다시 단축 다이얼을 누르자 블리스가 의자에 기대앉은 채 팔짱을 끼며 중얼거린다.
“결론은 하나네.”
“……뭐? 레이첼, 저 진인데요. 슈피겔라우 보르도 레드 와인 글라스들 수량 파악됐나 해서요. 다음 달 파티에 500개가량이 필요한데요. 아, 화이트 와인 잔은 300개요. 전부 비버리 힐즈 시리즈로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레이첼의 답에 다시 스케줄첩을 체크하던 진을 바라보던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반이 언제부터 날 사랑하기 시작한 거지?”
타앙하는 소리가 나며 진이 들고 있던 수화기가 책상에 부딪쳐 아래에 떨어져 흔들거린다. 그 수화기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블리스의 얼굴을 바라본 진은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재빨리 잡아들었다.
“너, 에반 앞에서 그대로 말해봐. 엘레나가 아니라 에반이 네 머리통에 기관총을 갈길걸. 아니다, 전기톱 들고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날 사랑하니 널 질투하는 거 아냐? 그런 시시껄렁한 가십에 휘둘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에반답지 않아.”
“……그러니까 직접 물어보라니까……. 네, 다 준비된 건가요? 그럼 당일까지 보관 부탁드릴게요. 다른 식기들도 모두 체크된 거죠? 그럼, 내일쯤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짤막한 통화를 마친 진은 이번에야 말로 블리스를 밀어내겠다는 듯 의자 뒤로 가 블리스의 어깨를 잡아 밀기 시작했다.
“제발, 네 사무실로 가. 응? 여기 내 사무실이거든?”
“비서 주제에 개인 사무실까지 갖는다는 게 말이 돼? 여긴 내가 쉬려고 너한테 준 거야.”
“웃기지 말고 가. 좀 가라. 나 지금 30분 딜레이 돼서 겁나게 바쁘거든?”
“그러니까 이쪽 일은 로이한테 맡기고 내 차 운전이나 하라고.”
또 다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블리스를 무시하며 진은 이번엔 진짜 화가 난 듯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너 진짜 안 비킬 거야?”
“같이 나가. 난 이 젊은 나이에 죽기는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죽어도 일어서지 않겠다면 그 의자를 아예 사무실에서 밀어낼 셈이었다. 팔을 걷어 부친 진은 미련 없이 의자를 밀어 사무실 문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블리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롤러코스터 같은데?”
“닥쳐.”
“더 빨리, 더 세게!”
문일 밀어 연 뒤 복도를 달리자 블리스의 주문이 많아졌다. 임원진의 사무실이 있는 복도를 달리던 진은 이것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저택 안에서 이러고 참 많이 놀았었다.
“너 진짜 저 끝까지 간다?”
“더 빨리! 달려!”
아직도 아이처럼 장난을 치는 블리스를 보자 진도 절로 기분이 좋아져 자기도 모르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그 느낌에 진이 헛소리를 시작했다.
“디즈니랜드 갈까?”
“그럴까? 가서 미키 마우스 머리띠 하고 한 바퀴 돌아볼까?”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의자의 발에 다리를 올린 진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떠들며 몸의 균형을 잡았다. 임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긴 복도를 지나면 저 끝에는 일반 직원들이 상담을 하는 커다란 사무실이 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를 듣던 진은 그제야 아차 싶은 마음에 의자를 멈추려 다리를 내렸다. 하지만 브레이크는 진의 다리가 아니라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에반였다.
“너희 뭐하는 거야?”
신나게 달리던 의자가 에반의 손에 잡혀 타악- 하니 멈췄다. 순간 달려온 속력 덕에 핑글거리는 의자가 돌며 에반의 방향으로 돌아가자 블리스가 곧장 다리를 꼬고 근엄한 자세를 잡고 앉는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앞에 선 에반에게 말을 건다.
“에반, 나랑 얘기 좀 하지.”
“좀 이따 봐. 진, 너 내 사무실로 와.”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에 유난히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지만 얼굴의 전체적인 느낌은 동양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에반의 선언에 진은 조금 억울한 눈으로 에반을 바라봤다.
“왜 나만?”
“그럼 내가 상사를 혼내랴? 들어와. 그리고, 블리스 넌 사무실로 돌아가서 내가 올려둔 서류부터 봐.”
Bliss사의 오너는 블리스지만 기본적인 애널리스트 일은 그 아래에 있는 비서 격인 에반이 대부분 하고 있었다. 블리스가 하는 일은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이용해 투자자들을 유치하고 돈을 불리는 일이었다. 곧 에반이 블리스의 파트너로 올라서 Bliss&Seth사로 이름을 바꿀 예정이기도 했다. 사무실 하나에서 사원 10명으로 시작한 Bliss 사는 어느새 애널리스트 일곱 명과 평직원만 오십 명 가량이 되는 컨설팅 업체로 발전해 있었다.
3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물론, 그건 블리스의 자본력과 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자 갖다 놔.”
억울하지만 일단 매니저 격인 에반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진은 의자를 한 번 툭 찬 뒤 에반을 따라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 서서 문을 열고 있던 에반이 그런 진을 보곤 블리스에게 턱짓을 한 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양복 재킷을 벗어둔 지 오래고 셔츠 소매까지 걷어 부친 진을 본 에반은 먼저 다가와 진의 넥타이부터 만져주었다.
“꼴이 그게 뭐야? 너희 둘은 언제 철들래?”
“잔소리 할 거면 좀 나중에 해주면 안 돼? 나 바쁜데.”
“바쁜 녀석이 의자 갖고 복도를 주행해? 앉아.”
자신의 책상 안으로 들어가 앉은 에반이 책상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진은 얌전히 그가 권한 자리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의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 무섭게 에반은 예상했던 대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 행동 조심, 말조심하라고. 지금 그렇지 않아도 기사 때문에 사무실이 술렁거리는데 너희 둘이 그러고 놀면 어쩌자는 거야? 아까 보니 다들 네가 그 애인 아니냐고 수군거리는 분위긴데.”
“남의 말 사흘이야. 실컷 떠들다 말겠지. 애초에 블리스가 게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그 말 믿는 사람 아무도 없을걸.”
“헛소문이 왜 무서운 줄 알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지만, 혹시나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기사가 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조심할게.”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냐. 이미 사고는 쳐놓고 이제 와서 조심한다면 다야? 벌써 주식이 떨어지고 있어. 어쩔 거야? 오늘 온 전화 중 30%가 그 소문이 진짜냐고 묻는 전화였어. 여기가 너희 장난하는 데야? 블리스야 그렇다쳐도 너까지 그러면 어쩌자고?”
블리스는 상사라서가 아니라 워낙에 막무가내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에반은 역시나 자신을 잡고 뜯어말릴 셈이었다. 그의 기분은 잘 알겠지만 솔직히 아주 억울하고 기가 막힌다.
“에반, 그런데 나도 진짜 억울하거든?”
“억울해도 소용없어. 하여간 당분간 행동 조심해. 사라가 나한테 확인 전화했더라.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저거 너 때문에 기사 난 거 아니냐고. 블리스가 지 입으로 그런 소리를 했을 리는 없으니, 누가 날조한 건데 그럼 그 상대가 너밖에 더 있어?”
“그건 아니지. 블리스한테 나보다 더 오래 붙어 있는 로이 있잖아. 그리고 에반도 나보다는 더 오래 같이 다니고.”
“바보냐? 로이랑 내가 블리스 옆에 1미터 이상 붙는 거 봤어? 블리스는 남자들은 자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녀석이야.”
확실히 블리스의 남성 혐오증은 유명하지만, 그것도 이미 옛날 얘기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블리스의 병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거 다 났어. 아직도 1미터 떨어져서 다니는 거야?”
블리스도 딱히 에반에겐 1미터 금지령을 걸지 않았지만, 에반은 그의 뜻에 따라 정확히 1미터 간격을 유지하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다 나은 병을 뭘 그리 걱정을 하냐 싶어 말하자, 에반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누가 그래? 다 나았다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이제 1미터 금지령 안 지켜도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지키라던데?”
“……응?”
“나랑 로이한테는 여전히 1미터 간격 유지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왜?”
“그걸 내가 알아? 너만 풀어준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에반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끊었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 갖고 심각해한다는 생각에 진은 셔츠 소매를 내리며 다시 단추를 잠갔다.
“그러고 보니…… 너, 그 녀석이랑 같은 기숙사였지?”
“룸메이트였지.”
“대학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자기 저택 팽개치고 죽어도 기숙사에 들어가겠다고 우기더니, 나중에는 자기가 못 살겠다고 난리였단 말이지…….”
“어? 그랬었어?”
“그래. 1학년 중간에 기숙사에서 나오고 싶다고 난리쳐서 대넌하고 한바탕 싸웠었는데……. 넌 몰랐어?”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물론, 2학년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룸메이트를 바꾸고 싶다고 해서 좀 상처 받긴 했지만 기숙사에서 나가려고 했다는 건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조금 상처 받는 기분도 들었다.
자신과 함께 다니려고 기숙사에까지 들어와 준 걸 보고 꽤 기뻐했는데 중간에 도망치려 했다니, 좀 쓰리긴 하다.
“그거 지금 들으니 좀 상처 받는 것 같아. 혹시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았나?”
“……그건 아닐걸. 나도 너 보고 혹시나 해서 떠본 거니까.”
갑작스러운 에반의 발언에 진의 눈이 커졌다. 7년 전 졸업 직전에 에반이 “너, 블리스 사랑하냐?”라고 물어 혼비백산했던 기억이 있기에, 더욱 놀랐다.
“뭐야? 그때 떠본 거였어?”
“그래. 너 워낙에 사귀는 애도 없고 해서 이상하다 싶어 물어본 거야. 그 흔한 여자친구도 없었잖아.”
“그건 내가 연애가 무서운 거고.”
“그래. 나도 그때 알았다. 하여간, 그래도 조심해. 넌 진짜 조심해야 돼. 정주기는 힘들어도 한 번 정주면 잘 못 떼는 타입이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정리했다고. 지금 이렇게 너무 좋은데 그걸 깨긴 아깝잖아. 난 지금이 너무 좋아. 지금 이 상태가 좋아. 일하는 것도 좋고, 블리스랑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아. 친구도 그 녀석 하나뿐이잖아.”
“그 노먼이라는 친구는? 한동안 붙어 다니더니.”
대학시절 같은 영문학과에 다니던 친구의 이름에 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러고 보니 한 놈 더 있었다. 자신의 치부를 아는 인간이. 그 인간은 언제고 조용히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야 하는 놈이었다.
“노먼의 노자도 내 앞에서 꺼내지 마. 그 자식,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파파라치 한다며?”
“그래. 그 자식이 날 두 번이나 물 먹였어. 한 번만 더 그러면 그때는 진짜 죽여 버릴 거야.”
“클리샤 사건 그 친구 작품이었지? 거기 알려준 게 너냐?”
클리샤 허드슨이라는 3년 전쯤 상당히 잘 나가던 슈퍼모델과 블리스의 염문설을 떠올리며 진은 다시 한 번 그 자식을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오랜만에 나타나 술을 마시자길래 미친 척하고 술을 퍼붓다 블리스가 지금 클리샤와 연애 중이고, 내일 무슨 호텔에서 만난다까지 떠벌려 호텔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있는 사진이 신문 1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식사 장면이나 데이트 장면은 여과 없이 드러내던 블리스였지만 호텔 앞에서 사진이 찍힌 건 처음이라 당시 블리스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클리샤는 열여섯으로 나이를 속이고 있었다. 그나마 그 기사와 함께 클리샤의 실제 나이가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밝혀준 노먼에게 감사해야 할지 저주해야 할지 아직도 헷갈리는 상태였다.
“술 마시다 말려들었지, 뭐. 블리스한테는 말하지 마. 그건 나도 아직 블리스한테 말 안 했어. 말하면 나 죽일 것 같아.”
“그러게 말조심을 했어야지.”
“나도 그때 많이 후회했어.”
“후회만 한다고 될 일이야? 셀리브리티들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입조심해야 돼. 그걸 새기고 또 새겨.”
“……그거 말고.”
그건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서 진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날 진이 후회했던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뭘 후회했는데?”
“노먼 자식을 알파베타감마 신고식 때 죽여 버렸어야 했어. 술 마시고 토해 기절한 놈을 밟고 그냥 지나갔어야 했는데, 밟은 게 미안해서 신고한 게 천추의 한이야.”
노먼 맥캐인이라고 알파베타감마 클럽 중에서도 또라이 중의 또라이로 소문난 진의 친구에 대해 잘 들어 알고 있던 에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그 클럽 출신이었기에 노먼 맥캐인의 전설은 들어 알고 있었다. 알파베타감마 역사 상 최고의 또라이라 칭해지는 걸 보니 보통은 아닌 듯했다.
“……이번에 만나면 진짜 죽이겠구나.”
“죽여서 뼈까지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야. 내가 그 자식 때문에 대학교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러고선 또 친구라도 나타나서 날 물 먹였다고.”
서슬 퍼런 진의 기세에 에반은 컴퓨터를 켜며 서둘러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래, 알았다. 이제 나가봐.”
진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해 가는데 에반이 막 생각난 듯 진에게 말을 건다.
“아, 사라한테는 네가 먼저 전화해서 이런저런 상황이었다고 설명해. 많이 놀란 모양이던데.”
“알았어.”
문을 밀어 열고 에반의 사무실에서 나온 진은 문을 닫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는 전부 정리했다, 이제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조금은 흔들린다. 완벽하게 미련을 끊어낸 건 아니다. 아니, 사실은 아직 좀 헷갈린다.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녀석이기에, 오히려 그에 대한 감정이 미련인지 애정인지 혼란스럽다. 물론 후자이길 바라지만 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전에는 몰랐었다. 사람이 마음이 정리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었다.
고개를 숙인 채 길게 숨을 내뱉은 진은 마음을 다진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에반한테 깨졌어?”
“으악!”
갑자기 바로 옆에서 들려온 음성에 놀라 진은 심장을 내리누르며 비명을 내지르자 벽에 기대 서 있던 블리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뭘 그렇게 놀라? 죄지은 거 있어?”
“야, 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 놀랐잖아.”
“그러니까 왜 놀라냐고?”
갑자기 표정이 무거워진 블리스를 슬쩍 돌아본 진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맥 빠진 음성으로 답했다.
“갑자기 말 걸면 놀라지.”
“에반이 화냈어?”
“아냐, 그런 건.”
괜히 이런저런 말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 뒤라서인지 블리스를 정면에서 볼 수가 없어 진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블리스가 제대로 허리를 펴고 선 채 진을 바라본다.
“그럼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
“일이 많아서. 들어가 봐.”
진이 블리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옆으로 비켜나가려는데 블리스가 진의 팔을 세게 잡아끈다.
“……얼굴이 왜 그래?”
“뭐가?”
“안 좋아 보이잖아.”
“안 좋긴 뭐가. 갑자기 일 터져서 그렇지. 에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이따 보자.”
블리스의 팔을 떨쳐내고 사무실로 가려는데 이번엔 강제로 블리스가 강제로 얼굴을 잡아 들어올린다.
“나한테 뭐 죄 지은 거 있어?”
순간 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혹시라도 방금 전 에반과 한 대화를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거 없는데.”
클리샤 사건은 블리스가 아직도 자다 깨 이를 갈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블리스야 클리샤가 스무 살이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열여섯의 미소녀로 알고 있었으니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기사는 읽지 않고 사진만 본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장난도 아니었다. 워낙에 깔끔한 성격인지라 자신의 경력에 오점이 남는 건 질색을 하는 블리스에게 그 사건은 영원히 기억에서 묻어버리고 싶은 것과 동시에, 노먼 맥캐인은 언젠가 잡아 죽일 역적 리스트에 올라갔다.
만약 그 사건의 전말을 블리스가 안다면 진짜 자신을 해고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은 치를 떨었다.
“……진짜 아무 것도 없어.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일 봐.”
재빨리 표정을 풀고 진이 어깨를 으쓱하자 블리스가 그제야 진의 얼굴을 놓고 물러선다.
“그럼 됐어. 점심 같이 하자.”
“어……. 나 약속 있어.”
“없는 거 알아. 스케줄첩 봤어.”
“개인적인 약속이야. 아, 나 진짜 시간 없다. 오전 중에 처리할 일이 태산이야. 간다.”
먼저 블리스의 어깨를 툭 친 진은 먼저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가만히 진의 등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에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네.”
짤막한 에반의 답에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선 블리스는 문을 밀어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서 에반의 책상 위에 서류를 집어던졌다.
“이대로 해. 책임은 확실히 지고.”
그제야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뗀 에반이 앞에 선 블리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는다.
“너, 제대로 보기는 한 거야?”
“대강. 어차피 나도 생각했던 거니 괜찮아. 그대로 진행시켜.”
그렇게 말하며 책상 앞을 떠난 블리스는 사무실 안에 놓인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쪽으로 오라는 무언의 행동에 에반은 노트북을 켜둔 채 블리스가 앉아있는 소파의 반대편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왜?”
“진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별말 안 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축 쳐졌어? 우울해 보이던데.”
“그냥 잔소리 좀 한 거야. 오늘 같은 일이 있으면 미리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너는 그렇다쳐도 같이 있던 진까지 그러면 안 되니까.”
“쓸데없는 일로 기죽이지 마. 그래보여도 남한테 안 좋은 소리 들으면 금세 풀꺾이는 성격이야. 알잖아, 은근히 소심한 거.”
“잘 알지. 그러니까 걱정이라고. 너까지 더해주지 마.”
딱 잘라지는 에반의 말에 블리스는 더 이상의 추궁은 그만두기로 하고 진짜 그를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그것보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팔짱을 끼며 블리스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에반도 진지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말해. 뭔데?”
“당신, 날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진한테나 먹힐 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 블리스에게 에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단박에 답을 내려주었다. 블리스가 가끔 화가 나면 이상한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건다는 걸 잘 알기에 에반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진은 놀라 당황하지만 에반은 놀라지 않는다. 그래서 블리스는 에반을 별로 안 좋아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하고 날 떼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뭔데?”
“네가 아니라 진을 위해서야. 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걔는 맞아 죽어.”
딱 잘라지는 에반의 말에 블리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이야?”
“너니까 하는 소리야. 너한테야 가쉽란 장식하는 게 우습겠지만 진은 아냐. 넌 공인이고 진은 아냐.”
“셀레브리티가 공인이라고? 그런 헛소리는 또 처음 듣는데?”
“그럼 공인이 아니면? 매스미디어에 고개 들이밀고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영향력을 떨치는 순간 공인이야. 네가 갖고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대가로 넌 사생활을 팔고 얼굴을 파는 거지만, 진은 아무 것도 없어. 그 녀석이 자기 사생활과 얼굴을 노출시킬 이유가 없다고.”
블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은 암초였다. 항상 그랬었다. 모든 일에 제동을 거는 게 그였다. 그래서 블리스는 그가 참 싫었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의 사고가 가끔은 버겁다.
“당신 말은 알겠는데……. 그게 당신이 나랑 진 사이에 끼어들 이유가 된다는 거야?”
“돼. 난 진을 친동생처럼 생각하니까.”
“친동생은 아니잖아.”
“아니니까 더 애틋해. 장난은 이쯤 끝내.”
이미 모든 사정을 파악한 듯한 에반의 선언에 블리스는 차갑게 식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에반을 응시했다.
“장난이 아니라면?”
“장난이 아니면, 갑자기 진 케이먼이 재미있어지기라고 한 거야? 그렇다면 더더구나 네가 끝내. 형제 같고 친구 같다는 녀석한테 그게 할 짓이야?”
“누가 장난이라고 했어?”
“그럼 뭔데? 네 그 잘난 연애 리스트에 진 이름 하나 더 추가하려는 거 아냐? 네가 뭔데? 넌 웃으면서 굿바이 할 수 있지만 진은 아냐.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연애도 못하겠다는 녀석을 그렇게 만들고 싶어? 진짜 어지간한 각오 아니면 건들지도 마. 친부모한테 버림받고 두 번이나 파양 당했어. 걔 인생 불쌍하지도 않아? 혼자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왔어. 그 환경에서 저렇게 잘 자라기도 쉽지 않아. 그리고 그만큼 진이 노력했다는 거고. 그 평생의 노력을 네가 무슨 권리를 깨는데? 그냥 내버려둬. 편하게 혼자 살게 놔둬.”
에반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블리스도 그 동안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해오던 바였다. 하지만 솔직히 이젠 그런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생각만 하다 끝나는 건 질색이다.
“그럼, 각오만 다졌으면 된다는 거지?”
의미심장한 블리스의 말에 에반은 순간 그의 진심을 알아채고 말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걸, 알고 말았다.
“……너…….”
뭔가 더 말을 하려 에반이 입을 열려는 순간 블리스는 더 듣기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처리 잘해. 난 미팅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블리스!”
그답지 않은 에반의 고함소리에 막 두 걸음 정도를 옮겼던 블리스는 걸음을 멈추곤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에반, 내 사생활에 간섭하라는 권리 준 적 없어. 당신은 내가 시키는 일이나 하고, 내 뒤처리만 깨끗하게 해주면 돼. 그럼 그만한 대가는 돌려줄 테니까. 그 이상의 어줍지 않은 참견은 그만둬. 난 블리스 애클랜드야. 당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못해.”
“그래서 기어이 하겠다는 거야? 엘레나는 대강 처리하면 되잖아? 애초에 네가 그 어린애 하나 처리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안 되지. 미안하지만 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내가 결심을 했다면 아무도 못 말리는 거 알지?”
“블리스…….”
“이만 가볼게.”
다시 돌아서선 손을 들어 보인 블리스는 그대로 바쁜 듯 에반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에반은 의자에 기대앉아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자신이 뭔가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 진이 블리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진을 위해 어떻게든 뜯어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블리스가 절대 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일은 없을 거라 여겨서였다. 왜냐하면 둘은 너무나 가까웠다. 진의 말대로 진짜 형제 같고 친구 같은 관계였다. 첫눈에 반한 연인도 2년이 지나면 밍숭맹숭해진다. 결국 정만 남는 게 일반적이라, 그렇게 오래 알아온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날 리 없다 여기곤 진을 포기시켰는데, 아무래도 모르는 사이에 블리스도 타올랐던 모양이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서로 차마 말도 못하고, 그냥 친구로 남자고 한 건데, 진은 그게 됐는데…… 블리스는 그게 안 된 모양이다.
진은 괜찮다. 진은 소심한 성격이라 포기시키기도 쉽고, 또 절대 고백할 용기도 없는 녀석이니까 문제가 없다. 하지만 블리스는 다르다.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사실 예일대 입학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기어이 해낸 녀석이었다. 그것도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까지 했다. 어릴 때엔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청소년기에 이미 투자와 여자 쪽으로만 온 신경이 쏠려 녀석의 수학 성적은 거의 낙제점에 가까웠지만, 쿼터백과 학생회장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AP를 따고, 에세이에는 다섯 살 때부터 교육받은 투자와 주식에 대한 소신과 그가 아는 투자 원칙을 논문으로 써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터뷰에서 그가 절대 예일대 경제학부에 입학해야 하는 이유를 열정적으로 역설해 결국 예일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회계 관련 수업까지 완벽하게 A+를 받아 졸업을 했다.
그러고 보니 블리스가 아이비리그에서 유펜(Upenn-펜실베니아대학)의 경영학부나 경제학부 부동의 1위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부를 포기하고 예일대 경제학부를 선택한 것도 의외였다. MBA는 결국 유펜의 워튼 경영대학원에서 땄지만 이상한 일이긴 했다. 왜 굳이 기를 쓰고 예일대에 가려고 한 건가 했더니…… 이제 알 것 같았다.
“큰일이군.”
어쩐지 파란이 예상되는 미래에 에반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겨우 네 살 차이지만 저 어린 것들의 뒤처리는 결국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돌겠군.”
***
자주 가는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을 때운 진은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씨가 선선해진 채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막 가게를 나서려던 순간 재킷 안쪽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나.」
“응. 왜?”
수화기 멀리에서 선명하게 울리는 음성에 진은 무심히 답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회사 건물을 향해 걸음을 돌리는 순간 안에서 블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원에 좀 와줘.」
“병원? 병원은 왜?”
「사고가 났어.」
“무슨 사고?”
「교통사고.」
태연한 블리스의 답에 진은 걸음을 멈추고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브렛한테 와 있어. 이쪽으로 와.」
“무슨 일이야? 얼마나 다친 건데? 상대는?”
「와서 봐.」
“얼마나 다친 거냐고?”
「일단 와봐. 끊는다.」
진은 속이 타 대체 얼마나 다친 거냐고 물었지만 블리스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뚝 끊긴 핸드폰을 보며 진은 눈을 부릅떴다.
“손하고 입은 멀쩡한가 보네. 망할 자식!”
회사로 돌아갈 틈도 없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온 진은 브렛의 사무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블리스!”
병실을 찾을 생각도 못한 채 무작정 브렛의 사무실을 열고 소리를 친 진은 소파에 멀쩡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블리스의 모습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너, 뭐야?”
교통사고라더니 너무 멀쩡한 꼴에 진이 고함을 내지르자 왼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있던 블리스가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하얀 석고붕대가 감겨 있었다. 기브스였다.
“오른손 다친 거야?”
“응. 급정거하다 손목이 차문에 부딪쳤어.”
어쩐지 손하고 입은 멀쩡한 거 같더라니…… 역시나였다. 오는 내내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멀쩡한 꼴을 보니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염좌야, 타박상이야, 골절이야?”
“골절.”
골절이라니 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교통사고라는 말에 별별 상상을 다 했던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닌지라 진은 문 앞에 선 채 그대로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라니? 뼈가 부러졌잖아.”
“너 럭비 할 때 종종 다쳤잖아! 난 또 큰 사고라고…….”
맥이 탁 풀려 그대로 몸에 힘을 빼고 바로 서자 블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느긋하게 묻는다.
“놀랐어?”
“그럼, 안 놀라냐? 교통사고라는데? 차는? 차는 안 다쳤어?”
“넌 나보다 차가 걱정이냐?”
“당연하지. 걔가 얼마나 비싼 몸인데!”
“멀쩡해. 급정거라니까. 브렛, 이만 가볼게요. 운전기사 왔으니.”
그제야 브렛의 존재를 눈치 챈 진은 서둘러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백발이 성성한 의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 됐어. 저 녀석이나 데려다줘.”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아, 저번에 보낸 와인 잘 마셨다. 구하느라 힘들었겠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얼마 전 그의 생일에 블리스의 이름으로 보낸 와인에 대한 인사말에 진은 이젠 아주 대놓고 자기가 보냈다 말하며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 모습에 옆으로 다가선 블리스가 작게 웃는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둘이라는 걸 이젠 다 아는 모양이네. 가자.”
“네가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는 게 다 들통 난 거지.”
다시 한 번 브렛에게 인사를 한 진은 사무실에 제대로 들어서지도 않은 채 다시 뒤돌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블리스가 바지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 건넨다.
“네가 운전해. 차 안 갖고 왔지?”
“그래.”
열쇠를 받아들며 진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듯 퉁명스럽게 답했다. 정신이 수습되고 나니 사람을 헐레벌떡 뛰어오게 한 블리스에게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별거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지, 거창하게 교통사고라는 말만 하고는 끊어버린 블리스의 행동이 괘씸해 미칠 것 같았다. 아예 작정을 하고 사기를 친 거다.
“오후부터 로이랑 직무 바꿔.”
속도 모르고 되지도 않을 말을 반복하는 블리스를 슬쩍 뒤를 돌아본 진은 짜증스러운 듯 내뱉었다.
“또 그 소리냐?”
“오른손을 다쳤어. 당분간 행동하기 불편해.”
“그래서 나한테 네 수발 들으라고? 차라리 간병인을 돈 주고 사. 아니면 집으로 들어가든가.”
“간병인은 불편해. 그럴 정도도 아니고. 생활에 자잘한 불편이 있는 건데, 내 마음대로 운전도 못하고 다니잖아. 그렇다고 번번이 로이 불러내는 것도 불편하고. 집으로 들어가자니 잔소리가 시끄럽겠고.”
말은 길게 해도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나한테 수발 들으라는 소리잖아?”
“맞아. 다른 사람은 불편해.”
“너……. 아니다, 가서 얘기하자. 골치 아프다, 진짜.”
“만약에 내가 진짜 많이 다쳐서 간병인이 필요해도 네가 해야 돼. 여자들을 쓸 수는 없고 남자들은 싫어. 그렇다고 우리 가족들이 헌신적으로 내 수발 들 사람들도 아니고. 너밖에 없잖아?”
“내가 병 걸리면 넌 수발 들어줄 거냐?”
“물론이지. 이 세상에 나밖에 네 수발 들어줄 사람이 또 있겠어?”
펄펄 끓던 화가 그 답에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블리스에게는 강한 편이지만, 이런 말에는 약해진다. 천애고아에 국제미아였던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라와 블리스 정도였다. 블리스의 부친과 형, 그리고 동생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좀 달랐다. 그들은 단지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충실히 실천하며 자신을 후원한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얻던 이들이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건 사라와 블리스뿐이었다. 태어나서 자신에게서 먼저 등을 돌리지 않은 이들도 그들뿐이었다.
가끔 블리스가 자신의 그런 약점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불쾌할 때도 있었지만, 블리스가 그 약속을 지킬 걸 알기에 또 기뻐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 일 생각보다 복잡해. 로이 일도 어려울 것 같고.”
“로이 일은 간단해. 내 스케줄 확인하고 그대로 따라 움직이면 돼. 네가 훨씬 더 잘할 거야.”
“그래, 거의 운전사지. 결국 내 자리는 네 운전사구나.”
진의 푸념 섞인 말에 블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진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네가 운전하면 조수석에 타줄게.”
“됐네. 회사로 갈 거야, 아니면 집으로 갈 거야?”
“일단 회사로. 아직 할 일 많아. 점심은 먹었어?”
“먹고 나오다 네 전화 받은 거야.”
“또 샌드위치로 때웠군.”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선 진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단아한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안타까운 듯 숨을 내쉬며 서둘러 정면을 바라봤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여기가 어디든 상관 않고 진을 끌어안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블리스의 인생 속에 진이라는 인간이 뛰어든 건 15년 전 가을이었다. 새학기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새어머니였던 사라가 한 소년을 데리고 왔다. 그녀가 뉴욕에 있는 아동 보호시설에 한국인 국제 미아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뒤로 빈번하게 그 쪽을 드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기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같은 핏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대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그 아이에게 신경을 쓰던 것은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놀랐던 건 그녀가 어느새 위탁가정을 신청해 과정을 수료하고 그 아이를 애클랜드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동보호 담당 직원과 사회복지사, 두 명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넓은 정원 앞에 선 채 멍한 시선으로 정원을 돌아보는 소년의 모습에 굉장히 놀랐던 걸로 기억한다. 첫 번째로 그 아이가 분명 자신과 동갑이라 여겼는데 너무 작고 연약해 보여서였고, 두 번째는 멀뚱하니 선 소년의 얼굴이 소녀처럼 하얗고 가련한 느낌이라서였다.
사라 덕에 동양인들을 많이 봐왔지만 모두 생김새가 오밀조밀하고 평면적이라 딱히 인상에 남던 이는 없었다. 모두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고, 체형이 가늘고 어려 보이는 얼굴에 딱히 눈에 띌 만한 개성은 갖추지 못했던 터라 다들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이 강했었다. 사라만이 외꺼풀에 길고 가느다란 눈을 가져 인상에 남았을 뿐 대부분이 어떤 개성이라는 걸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소년 자체도 그렇지만 그 주변에 품고 있는 서늘하고 물기와도 같은 공기가 그랬었다.
「사라가 동양 원숭이를 데리고 왔어.」
수영장 쪽에서 선탠을 하던 바로 아래 동생인 클랜이 킥킥거리며 먼저 말을 꺼내자 막 수영장에서 나온 클레어가 정원과 이어진 창을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남자애라고 들었는데?」
「그러게. 너보다 어린 여자애로 보이는데?」
당시 열두 살이지만 키는 이미 160센티를 넘어가던 클레어를 보며 클랜이 장난을 치자 클레어가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신기한 듯 창가로 다가가 그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인형 같아.」
「인디안 인형?」
「아니. 진짜 인형 같아. 와, 말을 하네. 되게 작다.」
「네가 너무 큰 거겠지.」
클레어와 클랜이 말장난을 하는 사이 흥미가 생겨 그쪽으로 다가서 보자 서서히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소년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가을의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굳어졌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헐렁거리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이는 잠시 놀란 듯 이쪽을 바라보다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지친 듯 슬퍼 보이는 그 미소에 심장이 지끈하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아이가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끌렸던 것 같다. 딱히 인상에 남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그냥 그 시선이 너무 애달파 친절하게 대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 아이를 데리고 곧장 수영장 쪽으로 나온 사라가 그 아이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서며 인사를 시켜주었다.
「인사해야지. 블리스, 클랜, 클레어.」
사라의 말에 클랜과 클레어가 손만 들어 흔들자 아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여기는 진이야. 앞으로 우리 집에서 위탁을 하게 될 거야. 친하게 지내.」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누워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 아이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난 블리스, 그리고 저기 누워있는 녀석이 내 아래 동생 클랜이고, 여자애가 막내 클레어.」
「아, 누나가 아니었어?」
그 말에 클레어가 자지러질 듯 웃음을 터트리자 클랜이 뚱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모두가 유난히 발육이 좋은데 셋째인 클랜만이 발육 상태가 여동생인 클레어보다 못해 늘 불만이었다.
「저 녀석이 막내야. 만나서 반가워. 나랑 동갑이라고 했지?」
그 말에 진은 고개를 돌려 사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사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같은 학교로 들어갈 거니까 친하게 지내. 힘든 게 있으면 블리스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블리스는 아주 친절하고 근사하니까.」
사라의 말에 진은 살며시 손을 마주잡아왔다. 가늘고 작은 손이 닿는 순간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진의 손은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보고 천천히 눈을 들자 순간 진이 그다지 작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멀리서는 그렇게나 작아보였는데 가까이 보자 클레어와 비슷한 정도였다. 좀더 선이 가늘고 연약해보이는 탓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 때문이기도 했다.
「사라, 내가 방을 안내해줘도 돼?」
「그래줄래?」
「그래. 가자. 2층에 있는 그 방이지?」
얼마 전부터 사라가 이것저것 꾸미고 있던 2층 안쪽의 끝방을 떠올리곤 그렇게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모습에 꼭 잡고 있던 손을 잡고 그대로 저택 안으로 진을 끌고 갔다.
어서 둘만 있고 싶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 그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하얗고 작고 가늘고 슬픈 눈을 가진 생물체에 대한 호기심인지, 혹은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인지 잘은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와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그때는 그 감정이 뭔지 몰랐었다. 둘 다 너무 어려서, 그리고 첫만남이었기에 그게 어떤 건지 감히 상상도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