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애클랜드가의 블리스 왕자님의 게이 발언으로 전 미국이 뜨겁습니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어젯밤 있었던 J&K사의 창립 기념 파티에서 어떤 금발의 미녀의 유혹에 ‘미안하지만 나는 게이입니다.’라고 발언해 화젠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맥? 그가 진짜 게이라면 이건 911을 버금가는 비극인데요.」
「여자들에겐 그렇겠죠. 하지만 남자들은 대환영입니다. 이로써 미국 여자들의 눈높이가 확 낮아졌을 테니까요.」
「글쎄요. 어쩌면 소수의 여성들도 열광할지 모르죠. 왕자님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까요. 어쨌든, 이게 올해를 대표할 사건이 될 것 같죠?」
「그렇죠. 블리스 애클랜드가 게이라니. 와우,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대학 시절 남성 혐오증으로 유명했잖아요. 덕분에 한동안 애클랜드 계열 기업들이 인권 협회들의 집중 포화를 받은 적이 있었죠. 하여간 지금 뉴욕은 떠들썩합니다. 지금 다들 반신반의 중인데, 그 연인이라는 사람이 직접 나타날 때까지는 계속 이 상태겠죠.」
「그러게요. 대체 그 상대가 누굴까요? 사실, 그가 직접 커밍아웃을 했다고는 해도 다들 믿지 않는 분위기거든요. 다른 사람도 아닌 블리스라니, 일주일에 한 번은 가쉽란에 헐리웃 여자 연예인과 함께 식사를 한 장면이 포착되는 그 블리스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잖아요. 사적인 자리에서 남성 1미터 접근금지로 유명한 사람이 말이죠. 거기다 이런 대형 사고에도 스스로 블리스의 연인이라 나타나는 남자가 없단 말이죠. 보통, 이런 사건은 그와 밤을 보낸 남자가 나타나 타블로이드와 인터뷰를 하는 걸로 시작하지 않나요?」
「그렇죠. 얼마 전 애크 하일렌의 아우팅 역시 그와 한때 연인 관계였던 모델로부터 터져 나왔죠? 그 인터뷰 비용이 무려 백만 달라였다니, 블리스의 연인이라면 천만 달라는 받지 않을까요? 한 재산 챙길 기회입니다. 어서 나타나주세요. 원하신다면 독점 인터뷰를 해드리겠습니다.」
“지랄하네…….”
요란한 웃음소리가 울려대는 라디오 방송을 듣던 진은 재빨리 다른 채널로 주파수를 돌리곤 긴 한숨을 내뱉었다.
“미친 새끼.”
오늘 오전 전국의 타블로이드지 판매량을 무려 10배나 뛰게 한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애클랜드 가의 귀공자, 인권 협회의 제1차 척결 대상, 남성 1미터 금족령으로 유명한 살아있는 미국의 왕자 블리스 애클랜드의 커밍아웃이 타블로이드지의 1면을 장식한 덕이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게이? 다들 뇌가 썩었냐? 그런 놈이 한 달에 여자친구를 다섯 번을 바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진은 신호에 걸려 길이 막히자 이를 으득으득 갈며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풀었다.
미국 부동산과 언론 재발, 그리고 동시에 쇼비지니스계를 평정한 애클랜드 가의 둘째 아들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뉴욕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과 쿼터백을 지낸 뒤 졸업, 그 후 예일대 경제학과 수석 입학, 수석 졸업 후 유펜(Upenn/University Of Pennsylvania약자)의 워튼 대학원에서 MBA를 수료한 재원에,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큰 키와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모델이었던 모친을 그대로 빼닮은 빼어난 미모, 금발벽안의 왕자님. 살아있는 신화, 헐리웃 여배우와 가수, 그리고 슈퍼모델들과 끊임없는 염문설을 뿌리던 카사노바의 재림, 블리스 애클랜드.
그 블리스 애클랜드가 게이라니 미국이 발칵 뒤집힐 만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원인은 그 기사의 익명의 제보자였다.
그러니까, 그건 어젯밤 J&K사의 창립 30주년 파티에서였다.
뉴욕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 J&K의 창립 기념 파티에 초대를 받은 블리스는 파티 초반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동유럽권의 모델과 배우들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러시아 마피아의 대부, 미하엘 네브즐린의 어린 딸 엘레나 네브즐린 때문이었다.
“미치겠군.”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내뱉은 블리스의 말에 진은 쓰게 웃고 말았다. 엘레나는 182센티미터의 키에 풍성하고 화사한 금발과 요즘 잘 먹히는 베이비페이스에 늘씬한 몸매 덕에 이미 열세 살 때부터 모델로 활약 중이었고, 곧 시트콤 데뷔와 앨범 발표를 앞둔 채였다. 그 정도 몸매와 얼굴이라면 러시아 마피아의 딸이라 해도 블리스가 거절할 리가 없다. 어차피 쇼 비즈니스계는 현재 러시아 마피아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니 정리만 잘한다면 엘레나와 관계를 갖는다 해도 나쁠 건 없었다.
다만, 문제는…….
“도대체 서양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저 얼굴이 열다섯 살이라고 하는 거냐?”
열두 살 때까지 한국에서 자란 진은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서양인들의 무지막지한 성장 속도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스물대여섯 쯤 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저렇게 대쉬하는데 사귀어보라고 했던 진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열다섯 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함하고 말았다.
진이 아는 열다섯 살 소녀라 함은 교복을 입고 짧은 단발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는 상큼발랄한 귀여운 여학생의 이미지이지, 자신과 비슷한 키에 D컵의 가슴을 휘두르며 비키니를 입고 런웨이를 걷는 이미지는 아니다. 거기다 하물며 그녀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를 스토킹하는 이미지는 더더구나 아니다. 거기에 더해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런웨이 최고의 악동 이미지를 구가한 막나가는 아가씨의 이미지도 아니다.
아무리 블리스 애클랜드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해한다.
“얼굴 진짜 작다.”
9등신 정도로 보일 정도로 작은 엘레나의 얼굴을 보며 진은 놀라운 듯 중얼거렸다. 얼굴이 워낙에 입체적이고 오모조목해서인지 더 작아 보였다. 과연 저 속에 뇌나 들어있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옆으로 스쳐가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잔을 두 잔 받아든 블리스는 한 잔을 손에 들고는 다른 잔을 진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이에도 서너 명의 여자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 블리스는 슬쩍 진의 옆에 붙어 작게 속삭였다.
“저 스토커를 어쩐다. 미하엘 네브즐린의 딸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건드렸다면 미하엘이 내 머리통을 날릴 거고. 거절하면 저 여자가 내 머리통을 날릴 거 같고. 성격이 보통이어야 말이지.”
바로 7개월 전 전 남자친구였던 시트콤 배우 출신의 맥 애벌린이 그녀의 동료인 샤샤라는 모델과 눈이 맞아 그녀를 찼다고 대낮의 백화점에서 총을 휘두른 아가씨다. 총은 장전돼있었고 그녀는 쏘려고도 했지만, 다행히도 안전장치가 풀리지 않아 살해 의도는 없이 위협 의도만 있었다는 점-사실 엘레나는 총에 안전장치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과 함께 미하엘 네브즐린의 아래에 있는 실력 좋은 상어떼들이 지나친 다이어트로 인한 순간적 정신착란증이라는 변명으로 사회봉사 100시간과 2개월간의 갱생원 치료를 명령받은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 그녀는 갱생원 치료가 끝나자마자 블리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진짜 열정적이며 포기를 모르고 늘 사랑에 불타는 아가씨였다. 거기다 아버지가 러시아 마피아다 보니 무서운 것도 없다. 천하무적이었다. 한 마디로 대책이 안 선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딸 교육 좀 시키라고 하는 건 어때?”
아직 미성년자니 차라리 부모와 상담을 하라고 권하는 진의 말에 블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러시아 마피아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나 미하엘 네브즐린은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야. 그게 지나쳐서 그의 자식들이나 부인들에 대한 험담이 나오면 그대로 대가리에 총을 쏴 갈긴다고. 너, 설마 내 뇌 조각들을 구경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블리스의 낮은 음성에 진은 슬쩍 그를 올려다보며 진심을 토해냈다.
“사실 좀 보고 싶기는 한데…….”
“뭐라고?”
“그냥 그렇다고. 네 뇌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거든. 그보다, 나는 왜 데려온 거야? 설마 나한테 엘레나를 꼬시라는 건 아니겠지?”
분명 진은 그의 개인비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지만, 진이 다루는 분야가 그의 사교 쪽이기 때문에 가끔 간소한 티파티에는 참석한 적이 있어도, 이런 대규모 파티에 함께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처음 엘레나의 이야기를 하며 함께 파티에 참석하자고 했을 때는 이 녀석이 미쳤나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꿍꿍이는 아무래도 엘레나와 관련된 것 같으니, 나온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진이 불안한 듯 속을 캐려는 눈빛으로 블리스를 바라보고 있자, 블리스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진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음성으로 진의 귓가에 속삭인다.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지만……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군. 하지만 그러기엔 네 능력이 너무 딸리니 패스.”
딱 잘라지는 그 말에 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감싼 블리스의 손을 툭 쳐냈다.
“미하엘 네브즐린 어디 있어? 가서 얼굴 보고 딸 얘기 좀 해야겠다.”
은근히 네 얘기를 다 까발리겠다고 협박하는 진의 말에 블리스가 웃으며 진의 팔을 잡아끈다.
“어이,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너 죽고 나 죽는 일이야.”
“그러니까, 난 왜…….”
“아, 제이크!”
진이 다시 한 번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블리스가 재빨리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진의 팔을 잡아끈다. 그가 바라보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게 내뱉고 말았다.
“켄터키 할아버지…….”
근사한 백발에 덩치가 좋은 노인의 등장에 진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블리스가 재빨리 진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제이크, 건강해 보이시네요. 오랜만입니다.”
“그쪽도 여전하군.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자네가 파티에 남자를 대동하고 오다니, 별일이군.”
켄터키 할아버지의 말에 진은 쓰게 웃고 말았다. 이미 오래된, 대학 시절의 이야기지만 블리스 애클랜드의 남성 혐오증은 아직도 사교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덕분에 애클랜드 계열사 전체가 크리스찬들의 열렬한 지지와 함께 인권협회의 항의를 받긴 했지만, 사실 블리스 자체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전혀 혐오감이 없었다. 그와 가까운 이들 중 절반이 동성애자들이었고, 절반은 양성애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남성들이 그의 근처 1미터 내에 접근하는 걸 싫어했다. 그리고 그 남성 1미터 접근금지령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아, 제 비섭니다. 인사해, 진. 이쪽은 제이크 서덜랜드 회장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진은 서둘러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진 케이먼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영진이지만 친구들은 편하게 진이라고 부릅니다.”
“오, 그 유려한 필체의 친구로군. 매번 가족 생일과 기념일마다 근사한 선물과 카드를 보내줘서 고맙다고 한 번 인사라도 할 셈이었지.”
순간 진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늘 선물과 함께 보낸 카드의 하단에는 블리스 애클랜드라는 이름으로 서명을 했었는데, 이 켄터키 할아버지는 예리하게도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난감한 상황에 그와 손을 잡은 채 진이 블리스의 눈치를 살피자 블리스가 환하게 웃으며 진의 어깨를 끌어안아 툭툭 친다.
“필체가 유려하고 고상하죠?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들의 글씨체가 단아하면서도 정갈한 멋이 있더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아, 한국인인가?”
“네.”
사실은 이러저러한 상황이라 그리 되었다는 변명도 없이 대놓고 이 녀석이 선물 담당이야, 라고 답하는 뻔뻔스러운 블리스의 얼굴에 진은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어차피 시간이 돈, 시간 당 삼천 달라라는 어마어마한 상담료를 자랑하는 주식계의 거물이 일일이 손님들의 기념일마다 손으로 쓴 카드를 보낼 리가 없다는 건 이 세상 사람 전부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하긴, 애초에 그 뻔한 사실을 지적하는 이들도 이 할아버지 외엔 없을 거다라는 생각에 진은 웃으며 분위기에 맞춰주었다.
“블리스의 사교는 제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물은 늘 블리스가 고르고 전 카드만 쓰고 있습니다.”
“하하, 굳이 그렇게 상사를 위한 변명은 하지 않아도 되네. 블리스 애클랜드가 쇼핑할 시간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참, 그런데 블리스.”
“네?”
“요즘 무슨 일이 있나? 미하엘 네브즐린이 자네 뒤를 캐고 다닌다는데…….”
“저와 거래를 하고 싶으신가 보죠.”
“딸 이야기라던데……. 그 어린 딸이 자네에게 열을 올리고 있다지?”
“설마요. 이 나이에 미성년자와의 관계로 영창 신세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마피아 손에 유명을 달리하고 싶지도 않고요.”
“자네 생각이야 그렇다지만, 헐리웃의 십대를 십대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몸조심하게.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걸 앗아갈 수도 있으니까.”
의미심장한 제이크의 말에 진이 인상을 쓰며 블리스를 바라보자 블리스는 어깨만 으쓱할 뿐 더 이상 엘레나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아무리 서덜랜드 회장이라 해도 저 정도 할아버지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간 거면 아무래도 일이 좀 커진 모양이라는 생각에 진은 진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열다섯 살부터 블리스의 옆에서 15년 가까이 그의 여성관계를 모두 보아왔지만, 이번만큼 난감한 일은 없었다. 블리스는 맺고 끊음이 정확한 성격이라, 사귈 때는 마치 여왕님처럼 대접하고 헤어질 때는 진짜 깔끔하게 친구로 돌아가는 성격이었다. 거기다 여자를 보는 눈이 탁월해 애초에 말썽이 생길 여지가 보이는 여자에게는 틈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도 딱히 더러운 꼴은 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떻게든 엘레나의 관심을 돌리려 하고 있지만, 이번은 좀 힘든 듯했다.
상대가 보통은 넘는 게 분명하다. 분명히 보통이 넘는다. 처음 파티장에 들어선 이후부터 진짜 갈아 마실 듯 블리스를 노려보고 있는 게 자신에게도 느껴질 정도이니 그 원한의 깊이와 애증이 얼마나 강한지 알 것 같았다.
켄터키 할아버지와 블리스의 근처로 슬슬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던 진은 슬쩍 엘레나가 서 있는 쪽을 돌아봤다. 새빨간 지방시의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샤넬의 신상 금색 클러치와 루부탱의 빨간 힐을 신고, 긴 금발을 고전적인 분위기의 웨이브를 넣어 단정하게 고정시킨 모습은 지금 막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했지만, 유난히도 빨간 입술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진은 슬쩍 블리스의 옆에서 벗어나 그의 팔을 툭 쳤다.
“나 잠깐만.”
“왜?”
웬일로 블리스의 음성이 다정했다. 보통 때는 틱틱거리며 말하는 타입인데 오늘따라 유달리 다정하다는 생각에 진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에 블리스의 팔을 잡아끌며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9시 방향에서 스토커 출현. 네가 처리해. 나까지 머리에 구멍 나긴 싫어.”
용건만 간단히 말한 뒤 진이 재빨리 도망치려하자 블리스가 팔을 잡아 말린다.
“그렇다고 나만 두고 가면 안 되지. 내가 널 왜 데려왔는데?”
“날더러 네 보디가드를 하라고?”
“네가 몸으로 막아봐.”
“그러다 내 머리통에 총 쏘면? 저 클러치 너무 크단 말야!”
“샤넬은 뭐 저따위로 큰 클러치를 만든 거야?”라는 토를 달며 진은 투덜거렸다. 보통 클러치라함은 담뱃갑 하나, 핸드폰 하나 들어가는 크기가 일반적이다. 저걸 왜 들고 다니다 싶을 정도로 장식품의 가치 외엔 없는 화려한 파티용 클러치가 일반적인데 최근 클러치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오늘 엘레나가 든 건 샤넬 클래식 미듐 사이즈와 맞먹는 크기의 골드앤드실버 클러치였다. 아무래도 저 번쩍거리는 클러치 안에는 총이 하나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가고 싶다. 블리스 역시 보통은 동전지갑만한 클러치를 들고 다니는 엘레나가 아무리 트랜드라 해도 커다란 크기의 클러치를 들고 휘적거리니 불안한 듯했다.
“저 안에 총이 있으면 네가 날 보호해줘야지. 너 태권소년이잖아.”
“웃기고 있네. 날 이단 옆차기로 기절시킨 녀석이 나한테 보호해달라고?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진이 강제로 블리스를 떼어내고 도망치려하자 진과 쑥덕거리던 블리스가 재빨리 일행들에게 웃으며 말을 돌린다.
“진이 좀 속이 안 좋은 모양이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죽을 거면 같이 죽겠다는 듯 블리스가 끈질기게 뒤를 따르자 진은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하며 블리스의 팔을 떼어내려 애를 쓰며 속삭였다.
“너, 진짜 날 꼭 네 저승동반자로 데리고 가야겠냐?”
“나 혼자 죽을 순 없지.”
“야…….”
“가자. 가서 얘기하자. 먼저 대책을 세워야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자기가 먼저 성큼성큼 휴게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저택의 정원과 이어진 베란다의 밀실로 진을 끌고 나온 블리스는 진의 손에서 샴페인 잔을 빼앗아 작은 테이블에 올려두곤 난간 쪽에 기대섰다. 그 모습에 진 역시 그의 옆으로 가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려했다. 그러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블리스는 여유 있게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난간에 대고 기대 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어 꼬았지만 자신은 엉덩이를 대가 그대로 직립 상태가 된다. 꽤 열 받는다.
“진짜 짧군.”
엉덩이를 대고 서려하자 그대로 우뚝하니 서게 된 모습을 지적하는 블리스를 힐끔 노려본 진은 그대로 난간을 양 손으로 짚고 올라가 아예 걸터앉아 버렸다.
“엘레나는 어쩔 거야? 저러고 두다 진짜 사고 치면 어쩌게?”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아가씨라서 말야.”
끝내주는 명품 몸매와 인형 같은 미모, 거기다 아버지는 러시아 마피아의 보스, 거기다 뇌까지 없는 엘레나는 무식하게 용감한 아가씨의 요건을 모두 갖춘 상태였다. 열 받아 사람 한둘 쯤 죽인다 해도 최고의 상어떼(Shark-변호사)들이 알아서 잔뼈를 처리해줄 것이고, 자기가 죽이기 뭣하면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그만이다. 그녀가 죽이고 싶은 상대가 블리스 애클랜드라도 마찬가지다. 무식한 사람에게 이길 장사 없다.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아무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듯해 진은 은근슬쩍 블리스를 떠봤다.
“차라리 네가 결혼발표를 하면 어때?”
“미쳤냐?”
“그러니까, 결혼 말고 발표만.”
“누굴 상대로?”
“아무나. 소설 보면 많이 나오잖아. 계약결혼, 뭐, 그런 거.”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러다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당하라고? 나중에 떼어내는 거 골치 아파. 그러다 무서운 상대한테 걸리면 진짜 식장까지 걸어 들어가는 수가 있다고. 결혼식장에 입장할 거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뇌를 쏴버리겠어.”
그도 그렇긴 하다고 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블리스의 결혼 상대라면 못해도 글로벌 기업의 딸, 혹은 세계가 다 아는 유명 연예인이나 모델일 텐데, 괜스레 결혼발표 잘못했다 발목 잡히는 수가 있다. 일반인을 꼬셔서 대역이라도 해달라고 했다간 차라리 엄청난 액수의 돈이 오갈 것이다. 아니, 차라리 천문학적 액수의 위자료를 요구하면 다행이지만, 상대가 나중에 그 기사를 타블로이드지에 팔아먹는 수가 있다. 그랬다간 아마 그 무서운 러시아 마피아가 자기 딸을 농락했다며 권총이 아니라 기관총을 들고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미국인들은 불륜이나 마약복용 등의 사고는 전부 용서하고 받아들여도 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건 용서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었다. 블리스야 어차피 연예인이 아니니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왕족이나 귀족이 없고, 역사가 짧다는 게 최대의 콤플렉스인 미국에서 현존하는 왕자님이라 불리는 그의 이미지는 꽤 중요하다. 그러니까 괜히 어설픈 사기극을 벌이는 건, 한국 속담대로 여우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뛰어드는 격이다.
“프리티 우먼 보면 그러다 사랑에도 빠지고 그러던데……. 한 번 해봐. 혹시 알아? 이번에야 말로 진실한 사랑에 빠져들지.”
호러 영화와 로맨스 영화광인 진의 말에 블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너, 이상한 영화 좀 그만 봐.”
“……남의 영화 취향 탓하지 말고 네 성생활에 대한 반성이나 해라.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야? 얼마나 만만해 보이면 저 어린애가 달라 붙냐?”
“그냥 운이 없었던 거지. 나라고 설마 저런 젖비…….”
거기까지 말하던 블리스는 문득 말을 멈추곤 억지로 웃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블리스를 돌아본 진 역시 블리스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 순간 베란다 창 바로 앞에 선 금발의 바비 인형을 보곤 놀라 숨을 멈췄다.
링의 사다코보다, 주온의 가네코보다 무서운 엘레나 네브즐린이었다.
“왜, 전화 안 받아요?”
음침한 베란다 쪽으로 그녀가 한 걸음 내딛자 진은 반사적으로 난간에서 내려서 똑바로 섰다. 적당히 분위기를 봐 블리스를 두고 혼자 도망칠 셈이었다. 어차피 블리스가 벌인, 아니 블리스에게 생긴 일이니 감당도 그 혼자 해야 한다.
“블리스, 난 이만 들어가 볼게.”
런웨이를 걷듯 1미터가 넘는 긴 다리로 워킹을 하는 엘레나의 옆으로 슬쩍 지나 도망치려는데 블리스가 팔을 잡아왔다.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듯 세게 팔을 잡은 그 악력에 진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블리스를 돌아봤다. 하지만 블리스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앞에 선 20대의 몸과 얼굴을 가진 10대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화했었어? 내가 최근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말야. 새 걸로 바꿨는데, 아직 전의 번호로 하고 있던 모양이군.”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일 리가. 내가 널 피할 이유가 없잖아. 참, 아버님은 잘 계시지?”
“말 돌리지 말아요. 왜 날 피해요?”
아주 직접적인 그 질문에 진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았다. 입이 근질근질해 미칠 것 같았다. “이 바보 아가씨야, 왜 피하긴 왜 피하겠냐. 네가 미성년자에 마피아의 딸이니까 그렇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엘레나가 당장에 파우치를 열고 권총을 꺼내들 것 같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말을 밀어 넣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난 널 내 여동생처럼 생각해. 널 피할 리가 없잖아.”
“누가 오빠 필요하대요? 나도 오빠는 지긋지긋하게 많아요. 한 번만 만나달라고 했잖아요.”
“네 아버지와 오빠들과 함께라면 생각해보지.”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아세요?”
“열다섯이면 아직 가족들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야. 그리고 너랑 난 안 돼.”
“왜요? 열다섯 살이지만 알 건 다 알아요.”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법이 무서워요? 걱정 마세요. 비밀 지킬게요. 우리 둘만의 비밀로 간직해요.”
바로 옆에 내가 있는데 비밀은 무슨 비밀이냐라고 생각하던 진은 순간 팔을 잡은 블리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느낌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런 문제가 아냐, 엘레나.”
그래, 법이 문제가 아니라 네 아버지가 문제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진은 그 다음 이어진 블리스의 말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난 게이야.”
이게 미쳤나, 라는 눈으로 진이 블리스를 바라보는 순간 블리스가 그대로 진의 몸을 끌어당겨 목을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더 개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내 애인이야.”
“……지금 나한테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어. 난 이 녀석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너처럼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소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 난 게이야.”
계속해서 이어지는 블리스의 헛소리에 진은 거의 기절 직전 상태까지 몰렸다.
블리스의 생각은 알 것 같았다. 사귀자니 미성년자에다 마피아의 딸이라 건드렸다간 죽을 것 같지,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본인이 권총 들고 설칠 것 같은 변태 스토커지. 그러니 적당한 핑계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다 게이론을 펼칠 생각을 한 건 잘 이해한다. 어떻게 보면 지금 블리스의 언행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다. 지금 이 안에는 딱 세 사람뿐이고, 그녀도 자신이 좋아서 따라다니던 남자가 게이라는 소문은 창피해서 못 퍼트릴 테고 퍼트린다 해도 여자 좋아하기로는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블리스 애클랜드가 게이라는 말은 이 세상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 뇌 없는 아가씨만 잘 설득해서 포기시키면 된다 여겼을 것이다. 설마 내가 쫓아다니던 남자가 게이래요, 아빠 죽여주세요, 라고는 못할 것 아닌가. 설마 한다 해도 그쪽에서는 블리스가 일단 그의 딸을 건든 건 아니니 죽이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생명은 건진다.
다 좋다. 다 이해한다. 문제는 멀쩡한 자신까지 얼결에 게이로 만드는 블리스의 행동이었다. 아니, 자신은 게이가 맞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왜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남의 성정체성을 자기가 결정지어버리냐는 말이다!
진이 너 좀 이따 보자라고 이를 가는 사이, 등 뒤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리스…… 이건 말도 안 돼요. 지금 당신 거짓말하는 거죠? 당신처럼 유명한 남성혐오증 환자가 그럴 리가 없어요.”
악과 오기와 경악에 떠는 엘레나의 음성 뒤로 아주 진지하고 애절한 블리스의 음성이 들려온다.
“엘레나, 진심이야. 그러니 날 포기해줘. 난 10년 전부터 이 녀석뿐이었어.”
원래도 거짓말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블리스의 연기력은 끝내줬다. 진도 순간 블리스가 자길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닌가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믿겠어?”
“어떻게 해도 안 믿어요. 못 믿어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엘레나의 말에 블리스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달콤하도 아픈 한숨이었다. 그 숨소리에 진이 설마 진짜 이게 날 좋아하는 건가 하고 다시 한 번 착각의 늪 속을 헤매던 중 블리스가 부드러운 투로 다시 엘레나에게 물었다.
“……이래도?”
그리고 다음 순간은…….
“언젠가 죽여 버리겠어, 블리스 애클랜드…….”
다시 떠올리자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 진은 핸들을 잡지 않은 왼손의 손등으로 입술을 북북 문질렀다.
그 녀석을 만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아니, 이 미국 땅으로 건너온 게 천추의 한이다.
「자~ 지금 전 미국이 들썩거립니다. 오늘 아침 신문 다 보셨죠? US위클리에도 방금 기사가 실렸는데요. 블리스 애클랜드의 연인은 누구? 라는 제목이네요. 진짜 누굴까요?」
“병신들아, 너흰 그 말을 믿냐?”
발랄한 컨츄리송이 끝난 뒤 이어진 디제이의 멘트에 진은 홧김에 소리를 내지르곤 그대로 라디오를 끄고 CD 플레이어를 켰다.
사실, 사람들이 저 기사를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이라도 믿지 않는다. 그냥 그저 그런 가쉽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게 재미있는 거다. 재벌가의 왕자가, 증권계의 거물이, 남성혐오증으로 유명한, 그들이 선망하는 미녀 스타들과 가쉽지를 장식하던 블리스가 게이라는 기사가 재밌어 죽겠는 것뿐이다.
문제는 그 화살이 언제 자신에게 날아올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그 새대가리가 몇 명이랑 인터뷰를 한 거야…….”
그래, 이건 블리스와 자신의 실수다. 설마 엘레나가 그 쪽팔리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릴 거라고는 예상 못했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다행히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일단 기자들에게 떡밥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담배를 빼문 진은 불을 붙이곤 차창을 내렸다. 평일 출근시간의 뉴욕은 전쟁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던 진은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블리스의 수행비서 직을 맡고 있는 에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에반 브루넙니다.」
스페인 억양이 강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진은 아예 사이드 브레이크를 반쯤 건 채 핸들에서 손을 뗐다.
“에반, 나.”
「아, 지금쯤 전화 올 줄 알았어. 아침 기사 때문이지?」
“응. 벌써 출근한 거야?”
「뭐, 그렇지. 새벽에 기사 보자마자 다들 불려나온 채니까. 긴급 소집이야. 넌 어디야?」
기사가 난 일간지는 애클랜드 가의 소유가 아닌 소규모의 지방 신문사였다. 그러니 대담하게도 그 기사를 실었을 것이다.
“지금 가는 길인데 길이 막혀서 좀 늦을 것 같아. 블리스는?”
「아직. 5분 후에 도착한다더군. 그런데 대체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아무리 이 신문사가 막 나가는 데라고 해도 블리스 기사를 멋대로 실을 리는 없으니 뭔가 있다는 건데……. 넌 어떻게 된 건지 알지?」
진이 애클랜드 가의 후원을 받아 블리스와 15년 지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과 스페인계 미국인 사이의 혼혈인 에반은 블리스의 부친인 대런 애클랜드가 10년 전 그의 아들을 위해 직접 뽑아 그의 아래에서 일을 가르친 주식과 투자 전문가였다. 3년 전부터 애널리스트 일을 하고 있는 블리스의 비서 역을 담당하며 갖가지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그만큼 블리스와 진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바늘 가는 데에 실 가듯 블리스가 가는 곳엔 진이 있고, 블리스가 사고치는 곳에도 늘 진이 있다는 사실을, 에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에반, 그 문제는 블리스 오거든 물어봐.”
「설마, 여기에 실린 미지의 연인이 너는 아니겠지?」
예리하기 짝이 없는 에반의 지적에 진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어릴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에반은 어설픈 거짓말로 속여 넘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엔 블리스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맞군. 블리스가 사고를 쳤는데 네가 연관이 안 됐을 리가 없지. 너흰 세트니까.」
“……본의는 아니었어.”
「알아. 그래도 이런 건 내게 미리미리 알렸어야지. 그래야 막든 어떻게 하든 할 거 아냐.」
“나도 이렇게 터질 줄은 몰랐지. 설마 그 타조 머리가…….”
거기까지 말하던 진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에반이 그걸 놓칠 리가 없다.
「타조 머리? 엘레나 말하는 거냐?」
“말하자면 사정이 길어. 이따 가서 얘기할게.」
「그래, 그게 낫겠다. 너, 당분간 블리스와 함께 다니지 마. 파파라치들이 악착같이 블리스를 따라다닐 테니, 넌 따로 움직여.」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나도 지금 곤란해, 에반. 러시아 마피아에게 총 맞아 죽긴 싫다고. 그리고 그 타조 머리 진짜 무서워. 어제는 엄청난 파우치를 들고 나타났는데, 그 안에 권총이 있을지 알 게 뭐야?”
「나도 지금 아주 곤란하다. 내가 말했지? 난 블리스 만큼 너도 아껴. 네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쯤 있었던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일어나지도 않았던 어떤 사건 때문에 에반은 아직도 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같은 한국계라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불쌍해서인지 늘 자신을 걱정하고 보듬어주는 에반을 잘 알기에 진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그래. 전 이제 마음 완전히 접었어. 안 그러면 어떻게 그놈하고 일을 해? 그 자식 애인들한테 주는 선물에 꽃에 카드에, 가는 호텔 예약까지 하는 게 난데. 정리 안 했으면 같이 일 못 하지.”
무엇보다 한창 잘 지내던 대학 시절 같은 기숙사 방을 쓰던 중에 자신에게까지 1미터 금지령을 내린 녀석 덕에 더욱 상처 받았었다. 자신이 아무리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진짜 친구 같고 형제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자기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때에도 다른 형제나 아버지, 그리고 에반에게는 금지령을 내리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블리스가 먼저 알아채고 자신을 멀리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도 마음을 접기 쉬웠던 걸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다.
「난 네가 걱정이야. 블리스는 걱정 안 돼. 그 자식이야 미국 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순수 백인 남성이야. 거기다 재벌이고. 문제는 너야.」
맞는 말이었다. 인종 시장이자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곳은 없다. 이 나라의 집권층은 순수 백인의 남성들이다. 다른 인종은 끼어들 틈이 없다.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살지만 결혼도 연애도 모두 같은 인종들끼리 한다는 게 이 나라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황인은 황인끼리. 결국 끼리끼리 모여 사는 거다. 에반이 자신에게 더 신경을 쓰고 안타까워하는 건, 자신과 그의 피가 반은 같기 때문이다.
“걱정 말라니까. 나 이제 진짜 마음 깨끗이 접었어. 그런 바람둥이를 사랑하다간 심장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고. 지금은 진짜 친구 같고 형제 같은 거야. 그렇게 버림 받고 또 버림 받는 거 싫어.”
「……그럼 다행이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30분 정도. 아, 역시 사고 났나 봐. 경찰 오토바이가 왔다 갔다 하네. 처리 되면 좀 뚫릴 것 같아.”
「그래, 운전 조심하고 도착할 때 전화해. 오늘 다른 스캐줄은 없지?」
“오늘 나갈 선물들은 모두 준비됐으니 딱히 문제는 없을 거야. 아, 그리고 블리스에게 존 에스터 씨에게 안부 인사 전화하라고 전해줘. 그쪽 비서가 문자를 보냈는데 에스터 회장이 오늘 새벽에 집에서 쓰러졌다고 하더라고. 내가 화분이랑 메모는 보냈으니 오전 11시쯤 전화해서 잘 받으셨냐고 확인만 하라고 해.”
「그래.」
“아, 뚫리네. 그럼 이따 봐.”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앞 차를 본 진은 재빨리 핸드폰을 끊은 뒤 담배를 끄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 안에서 진은 자신의 첫 이름을 기억해냈다.
자신의 첫 번째 이름은 서영진이었다.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마당이 있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작은 마당에는 빨간 열매가 달리는 나무들이 있었고, 계절 별로 파란 야채들이 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정문이 아닌 작은 문을 열고 조금 나가면 바로 뒤에 개울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그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것과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은 버려졌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커다란 가방을 맨 채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간 복잡한 역에 홀로 남겨진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러다 어떤 아줌마의 손에 끌려 고아원으로 갔고 그 안에서 많은 아이들과 지냈던 것만 기억난다. 그러다 우연히 파란 눈을 가진 아줌마와 아저씨를 만났다. 그들은 자신에게 두 번째 이름을 주었다. 두 번째 이름은 진 메이어였다. 그때가 아마 아홉 살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지사에서 근무 중이던 그들은 자신을 입양해 직접 한국에서 키웠고, 자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메이어 부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진 그녀는 임신 우울증을 겪으며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메이어 씨는 결국 자신을 파양하기로 결정 내렸고, 자신은 일단 아동 보호소에 맡겨졌다. 지금이야 뉴욕 어딜 가든 한국인들이 드글거리지만 당시에만 해도 LA도 아닌 뉴욕에서 한국인을 보긴 어려웠다. 낯선 땅에, 문화에도 적응하지 못한 상태로 아동보호소에 있다 열세 살 때 친절한 은행가 부부를 만나 재입양되었다. 그때 다시 진 에클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두 부부는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에클린 씨의 외도로 에클린 부부는 이혼하게 되었고, 서로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던 그들 때문에 결국 자신은 다시 아동 보호소로 돌려보내졌다. 친자식들은 에클린 부인이 맡기로 했지만 입양아였던 자신까지 맡기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클린 씨가 자신의 양육비까지 대길 꺼려했다.
다시 돌아간 아동보호소에서 더는 희망이 없다 여기고 있었던 때 인생 최고의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게 애클랜드 부인인 사라 애클랜드와의 만남이었다.
사라 애클랜드는 한국인이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얼리니스트였던 그녀는 우연히 대넌 애클랜드를 만났고, 당시 상처한 대넌과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을 해 애클랜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연히 아동보호소에 한국인 소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직접 그 보호소를 찾아와 자신을 만났고, 의탁 가정 신청을 해 자신을 데려가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어차피 직접 낳은 자식이 없던 그녀는 자신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자신을 입양하려 했지만 대넌 애클랜드의 반대로 입양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대넌의 다른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고 또 그만큼 아껴주며 정규 교육을 모두 마친 뒤 예일대의 졸업장까지 따게 해주었다. 졸업을 하면서 자신은 네 번째로 이름을 바꿨다.
이번엔 영진 케이먼이었다. ‘서’라는 성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메이어도 에클린도 싫었다. 어떤 이유든지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성을 따르기 싫어 이름을 영진 케이먼으로 바꾼 뒤 블리스가 NBA를 수료하는 동안 사라에게서 상류층 서회에서 필요한 에티켓과 상류층들이 애용하는 각종 브랜드명과 그 특징부터 시작해 꽃을 고르는 법과 카드를 쓰는 방법 등등, 사교에 필요한 것들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블리스가 자리를 잡는 것과 즉시 그의 아래서 사교 담당 비서 역을 시작했다.
블리스는 좋아한다. 열다섯 살 때부터 이미 형제처럼 자란 사이이고, 또 블리스는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이었다. 낯선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고, 학교를 다닐 때에도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이유 없는 차별을 받을 때에도 먼저 나서 자신을 친구라 인정하고 감싸주었다. 덕분에 아주 편안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 감정은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자각을 한 건 열일곱 살 때쯤이었다. 당시 쿼터백이었던 블리스가 치어리더이자 메이퀸이었던 캐서린 페이지와 데이트를 하던 걸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서운함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그가 멀어지는 것에 대한 서운함인 줄 알았는데, 가면 갈수록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뒤에 거의 7년 가까이 자신의 성정체성과 블리스에 대한 감정으로 엄청 마음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그와의 편안한 관계가 너무 좋았고, 자신을 아껴준 사라에게 면목이 없어 차마 고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앓던 중 그 감정을 에반에게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에반은 뭐라고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너 자신을 위해 포기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어차피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포기할 생각이긴 했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 같은 남자라서가 아니다. 그가 극도의 남성혐오증을 가져서도 아니다. 그리고 사라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상처 받기 싫은 거였다. 친부모님께 버림 받은 것을 포함해 세 번이나 버림을 받다 보니, 누군가에게 기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공포증이 생겼다. 이러다 또 이 사람에게 버림 받으면 어쩌나, 내가 귀찮게 군다고 화를 내면 어쩌나, 이 사람이 이러다 갑자기 떠나버리면 난 또 어떻게 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라의 정성으로 애정결핍은 많이 나아졌지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이 모든 일들이 내 탓이라는 자기혐오만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덕에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채 여기까지 왔다. 사랑하다 버림받을까 봐, 마음을 줬는데 그 사람이 떠나버릴까 봐, 아예 마음을 닫고 빗장까지 걸어 잠근 뒤 감정을 꽁꽁 묶어 가둬버렸다. 가족도 연인도 원치 않는다. 버림받을 거라면 애초에 없는 쪽이 낫다.
원하는 건 친구들뿐이었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 와도자신을 버리지 않을, 그리고 몇 년 만에 만나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믿을 수 있고 편안한 친구들뿐이었다.
사랑은 싫다. 사랑을 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랑을 하면서 언제 버림받을까 두려워해야 하니까 싫다. 그리고 헤어진 뒤에 아파하는 것도 싫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영원히 이대로이길 바란다.
그래서 블리스를 포기했다. 다정하고 즐거운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에게서 버림받거나 경멸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를 포기했다.
누군가 태어나 자신에게 가장 잘한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블리스 애클랜드를 친구로 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