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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10/10)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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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시마쿠라 미즈키지?”

방과 후 연극부 동아리실에 가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니 거기에는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미사키가 있었다. 마른 체형과는 다르게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박력 있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내가 물어보자 유리코 미사키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저기, 내가 불러 세우려고 할 때 그녀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유리코 님, 야사카 유리코 님이 널 부르셔.”

그녀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리코가 부른다면 가는 수밖에 없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불러내다니 무슨 일이지?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연결 복도를 지나 특별동으로. 계단을 올라 4층에 도착했다. 특별동 4층이라고 하면…….

“여기야, 유리코 님은 여기에 계셔.”

생각했던 대로 유리코 미사키는 흰 백합 모임의 동아리실 앞까지 나를 데려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저, 흰 백합 모임은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을 엄중히 제한하고 있지 않나요?”

“이제 상관없어. 유리도 다카미자와 선생님도 없고 나만 남았으니까.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오랫동안 이어온 규칙인데 그렇게 간단한 걸까? 문득 유리코 미사키의 옆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을 고쳤다. 그녀의 옆모습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분명 유리와 다카미자와라는 동지를 잃고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녀는 원래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고 했다. 친구나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유리코와 나를 불러 상심한 마음을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화학 준비실답게 방 안에는 좌우에 약품이 들어 있는 병과 실험 도구가 정돈된 선반이 있었다. 안에는 흰색 가운이 걸려 있고 약품 냄새가 살짝 코를 찔렀다.

하지만 유리코는 거기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열려 있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커튼이 펄럭펄럭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유리코는…….”

뒤돌아서 물어보자 유리코 미사키는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좀 전까지 계셨는데. 화장실에 가셨나?”

그런 말을 하면서 그녀는 어디선가 주전자를 꺼내 종이컵에 홍차를 부었다. 약품 냄새 사이로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한 청량제처럼 향기로운 홍차 향이 떠돌았다.

“뭐, 이거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오실 테니까.”

종이컵을 건네받았다. 향이 좋았지만 주위의 약품 냄새가 거슬렸다. 티타임에 이렇게 안 어울리는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애써 준비해준 걸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의자에 앉아 약품 냄새를 참으며 홍차를 마셨다. 기분 탓인지 약품의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유리코 님의 일은 정말 잘됐어.”

유리코 미사키가 마른 뺨을 부드럽게 풀며 미소 지었다. 야사카 유리코가 유리코 님이 된 걸 축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잘된 일일까요? 많은 사람이 상처 입고 그중에는 목숨을 잃은 사람도 나왔는데요. 제게는 그렇게 기쁜 일이 아니에요.”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거기서 유리코 미사키는 갑자기 웃음을 거뒀다.

“그럴까? 야사카가 유리코 님이 되어서 가장 기쁜 사람은 시마쿠라, 너일 것 같은데.”

살짝 뺨이 떨렸다. 순간 어쩌면, 하는 직감이 움직였다.

“제가 기뻐한다고요?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럴까? 잘 생각해보면 네 행동은 이상한 부분이 있어.”

유리코 미사키는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나를 노려봤다.

“유리코 님 전설을 와해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해놓고 축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리코 님 전설을 연극으로 보여줘서 강한 인상을 남겼어. 그래서는 유리코 님 전설이 오히려 강고해지는 것도 당연해. 게다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 유리의 동기에 대해서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유리코 님의 인상이 강한 부분만 소문으로 흘려보냈어. 다카미자와 선생님의 일에 대해서도 결국은 설명하지 않았지. 정말로 유리코 님 전설의 와해를 노렸다면 모든 것을 축제 무대 위에서 이야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긴장감이 높아졌다. 직감은 더욱 확실해졌다.

“게다가 결국 네가 쓰쓰미를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렸지? 다투던 도중에 일어난 사고라는 형태로 무마한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밀어 떨어뜨린 거 아냐?”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등에서 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땀이다.

유리코가 나를 불렀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도 참, 단순한 덫에 걸리다니. 모든 것을 끝내고 방심했다고는 해도 경솔했다. 초조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두뇌를 최대한 회전시켜 말을 골랐다.

“그럴까요? 가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런 일을 할 동기가 있나요? 유리코 님 전설을 강고하게 만들고 쓰쓰미 선배를 밀어 떨어뜨린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이유가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지는 모르겠지 싶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유리코 미사키는 바로 대답했다.

“네가 뒤에서 야사카 유리코를 조종해 자신이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지배하기 위해서야.”

생각이 순간 정지했다. 동기까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언제나 민첩하게 대처했던 내가 말문이 막히고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그런 나를 곁눈질하며 유리코 미사키는 창가에 있는 선반 쪽을 향했다. 그녀는 거기에서 역대 유리코 님 후보자 정보가 기록된 파일을 꺼냈다.

“시마쿠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시마쿠라, 네 어머니는 18년 전 유리코 님 후보 중 한 명이었지?”

그 말을 듣고 전신이 떨렸다. 그것만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시마쿠라 유리코(嶋倉優梨子). 18년 전에 유리코 님 후보였지만 도중에 퇴학, 마지막까지 유리코 님 자리를 두고 싸웠지만 결국은 패배했어.”

유리코 님이 되는 길에서 좌절한 어머니는 전학 간 학교에서 알게 된 남학생과 친해져서 졸업 후에 바로 임신했다. 그게 나였다.

“어머니 이름이 유리코이니 딸 이름을 유리코라고 붙이는 건 어려웠을 거야. 분명 어머니는 무리해서라도 그 이름을 붙이려고 했겠지만 아버지나 친척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어. 그래서 어머니가 생각한 것이 자신의 딸과 유리코라는 소녀를 친하게 지내게 해서 그 유리코를 뒤에서 조종해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딸에게는 뒤에서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지배시키는 계획을 세운 거야.”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한층 더 나아가 유리코 님 전설에 집착해온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숨은 유리코 님이 되라며 잠들기 전에 전설을 계속 들려준 어머니.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진다면 함께 죽자고 할 정도로 집착했던 어머니. 입시 합격을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어머니.

어머니에게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아이가 숨은 유리코 님의 자리를 탐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딸이 불행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상한 발상이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유리코 님에 대한 동경이 지나쳐 정상적인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분명 넌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를 찾았어. 그리고 야사카 유리코에게 접근해 친해졌지. 모든 것은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유리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어. 그 작전이 성공해 야사카 유리코는 네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어. 그렇게 된 이상 넌 유리코에게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시험을 볼 거라는 말만 하면 돼. 야사카 유리코는 널 따라와서 자연스럽게 유리코 님 자리 쟁탈전에 참여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었을 때 네가 그녀를 지켜주면 모든 것은 잘 풀리리란 계획이었겠지.”

머리가 멍해졌다. 10여 년에 걸쳐 쌓아온 계획을 간파당하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이 쫓아가지 못했다.

“정신이 아찔해질 법한 방대한 계획이야. 하지만 너는 훌륭하게 성공해냈어. 어쩌면 유리나 다카미자와 선생님에 대해서도 사전에 알아챘을지 모르겠네. 알면서도 범행을 저지르도록 그냥 뒀다가 마지막에 범죄를 폭로했어. 야사카 유리코가 유리코 님이 되었을 때 특히 다카미자와 선생님은 야사카 유리코를 이해해주는 좋은 사람으로 사이가 가까워질 위험이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야사카 유리코를 외톨이로 만들어두고 거기에 네가 손을 뻗어 뒤에서 컨트롤할 계획이었던 거 아니야?”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부분이 없었다. 말 그대로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유리코 미사키의 얼굴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뭔가 약을 넣은 걸까. 그러자 좀 전에 마신 홍차에 생각이 미쳤다. 실제로 약품의 쓴맛이 났던 것이다. 홍차 안에 수면제를…….

그대로 힘을 잃고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괜찮아. 곧 모든 것이 끝날 거니까.”

유리코 미사키는 의미 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내 몸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 옥상까지 끌려와 있었다. 나는 펜스에 걸쳐져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겨우 들어보니 눈앞에는 땀투성이가 된 유리코 미사키가 있었다.

“어머, 정신이 들었어? 고통 없이 죽여주려고 했더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법한 말이었다. 나를 죽일 생각이었던 건가. 문득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니 나는 펜스가 부서진 부분 바로 옆에 있었다.

여기로 나를 밀어 떨어뜨릴 생각이구나. 멍한 머릿속에 긴박한 느낌이 가득 찼다.

“왜 나를…… 죽이려는 거야?”

“신성한 유리코 님을 뒤에서 조종하고, 유리코 님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했기 때문이지.”

유리코 미사키는 눈알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내가 경애하는 유리코 님을 우습게 만들다니…… 용서할 수 없어. 죽어줘야겠어.”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눈 아래에 펼쳐진 곳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이었다. 이런 곳에서 떨어지면 분명히 죽을 것이다.

유리코 미사키가 내 몸을 어깨에 걸치고 펜스가 부서진 쪽으로 끌고 갔다. 이렇게 마른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의 괴력으로 그녀는 나를 펜스가 부서진 곳 앞에 앉혔다. 등을 밀면 거꾸로 추락할 것이다.

“아, 유리코 님. 저는 당신을 위해 이 무례한 여자를 죽입니다. 그리고 경찰에 자수하여 이 학교를 떠날 테지만 당신은 저를 계속 기억해주시겠죠.”

황홀해하는 유리코 미사키의 얼굴을 본 다음 순간이었다. 등이 툭 밀리며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나는 허공에 던져졌다. 중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온몸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많은 것에서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의 가르침, 유리코와의 관계, 유리코 님이라는 저주. 더 이상 뭔가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시시한 규칙도, 논리도, 도덕도.

생각해보면 나는 다양한 것에 얽매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억압해 없애고 저주를 위해 살아왔다. 그것이 괴로웠다. 슬펐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죽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얽매여 있던 인생은 이제 끝난다.

나는 자유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이, 내 가슴에 밀어닥쳤다.

하지만 이런 꿈같은 시간도 결국엔 끝을 맞이했다. 갑자기 시야가 또렷해지고 풍경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돌아 지면이 커지면서 눈앞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구경꾼들의 비명이, 바람 소리가, 귀 끝에서 높은 음으로 재생되었다. 내 고막이 불쾌하게 떨리며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 죽는구나. 기묘한 체념과 함께 나는 각오를 다졌다. 눈을 감고 덮쳐오는 충격에 몸을 굳혔다.

아주 잠깐, 잠깐만 참으면 된다.

온몸에 힘을 넣었다. 주먹을 꽉 쥐고 다리에 힘을 줬다.

갑자기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몸속 뼈가 가루가 되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더니 입안에서 따뜻한 뭔가가 흘러나왔다. 쇠 맛, 피였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뇌가 비명을 질렀다. 전신은 경련하듯 떨리고 목구멍에서는 의미도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의식은 희미해져갔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째서인지 유리코의 불안한 얼굴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내 목적만을 위해 이용해온 유리코.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모두 과연 계획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까?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는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짧은 순간 함께 즐겁게 웃고 서로를 인정했던 건 아닐까.

갑자기 유리코가 가엾게 느껴졌다. 내가 사라지면 유리코는 외톨이가 된다. 그렇게 마음 약한 울보 유리코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

유…….

유리…….

나는 외치고 싶어졌다. 내게 소중한 존재. 그 이름을 어떻게라도 불러보고 싶어졌다.

나는 피를 토하면서 신음하듯 말을 뱉었다.

……유리코!

문득 미즈키가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라켓으로 떨어져 있는 공을 모으던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미즈키는 없었다.

기분 탓일까? 나는 다시 라켓으로 공을 튀겼다. 방과 후 미즈키와 맛있는 크레이프를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런 환청이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석양을 바라보며 나는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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