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0)

6월 말 화창하게 갠 어느 날.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축제를 중단하는 걸 고려했지만 학생회와 교사들의 협의 결과 관계자 한정으로 초대하여 실시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이어서 3학년 3반의 일본 무용을 보시겠습니다.”

전교생과 교사, 학교 관계자들만 객석에 앉은 체육관에서 공연이 진행되었다. 현재 무대에 있는 3학년 3반 다음은 우리 1학년 4반과 5반 순서다. 나는 대사가 한마디밖에 없는 단역이지만 그래도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을지 긴장되었다.

반면 각본 담당인 미즈키는 무대 위에 나갈 순서도 없이 한쪽에서 지켜볼 뿐이었지만 나와는 다른 이유로 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첩 같은 걸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사도 없을 텐데 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 3학년 3반의 일본 무용을 보셨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앞 순서인 3학년의 무대가 끝났다. 상기된 얼굴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상급생을 배웅하고 나자 드디어 우리 차례라는 흥분이 끓어올랐다.

“다음은 1학년 4반과 5반의 합동 연극입니다. 제목은 ‘유리코 님 전설의 탄생’입니다.”

방송이 흐르자 체육관이 술렁거렸다. 설마 이 상황에서 유리코 님을 다루는 연극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우리 연극은 시작되었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내레이션을 담당한 여학생이 혼자 서서 연극의 도입부를 이야기했다.

“여러분, 유리코 님 전설을 알고 계신가요? 우리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대대로 전해지는 전설로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에게 신비한 힘이 생긴다는 전설입니다.”

술렁거림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여학생은 간결하게 유리코 님 전설을 설명했다. 이미 알고 있는 학생들은 무서워하면서도 흥미를 보이고, 모르는 관계자들은 놀란 듯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하여 매년 전교생 중 한 명, 유리코 님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 유리코 님 전설은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여기서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암전되었다. 여학생은 무대 옆으로 내려가면서 마지막 말을 했다.

“이야기는 48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한 소녀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이 전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무대 위에는 책상과 의자를 몇 개 놓아 교실을 연출했다. 여학생 몇 명이 그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학교 끝나고 어디 갈래?”

“역 앞에 새로 생긴 카페에 가자. 케이크가 맛있다고 하더라.”

“와, 케이크 좋아. 나도 가고 싶어.”

특별할 것 없는 대화가 잠시 이어졌다. 하지만 그 평온한 분위기를 깨듯이 한 여학생이 교실로 들어왔다. 순간 담소를 나누던 그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 유리코가 왔어.”

“기분 나빠.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유리코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기 자리로 갔다.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어쩐지 피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유리코 같은 애는 우리 반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모여 있던 여학생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리코에게도 분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유리코는 더욱더 아래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무대가 암전되었다가 곧 조명이 켜졌다. 이런 식으로 시간의 경과를 표현한 것이다.

“어제 카페에서 먹은 케이크 맛있었어.”

“다음에 또 가자.”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여학생들, 하지만 어제와 비교해서 한 명이 적다. 아직 등교하지 않은 여학생이 있는 모양이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차츰 여학생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유미가 늦네. 지각인가?”

“별일이네.”

아침, 교실에 함께 다니던 친구 한 명이 아직 오지 않은 설정이다. 유리코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한 여학생이다. 학생들이 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 역을 맡은 여학생이 등장했다.

“선생님, 마유미가 아직 오지 않았어요.”

한 여학생이 선생님께 다가가자 선생님 역을 맡은 여학생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유미는 도서관 옥상에서 누군가에게 밀려 떨어졌어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도망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여학생들이 술렁거렸다. 괜찮은 거야? 모두가 속닥속닥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갑자기 조명이 작아지면서 자리에 앉아 있는 유리코만을 비추었다. 유리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쿡쿡 웃고 있다.

이것이 미즈키의 해석. 유리코 자신이 불행한 일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후에도 불행이 차례차례 일어나고 같은 반 여학생들은 유리코에게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평온을 얻은 유리코는 안심하지만 거기서 일기에도 나온 와타베 선생님이 등장한다. 남학생이 연기하는 와타베는 유리코와 연애 관계에 빠지지만 그 사실이 들켜 전근을 가게 된다. 비운의 이별을 슬퍼하는 유리코는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그때 내가 “자살 같은 건 그만둬”라고 한마디 외친다.

“나는 죽을 거야. 하지만 나는 이 학교에서 계속 살아갈 거야. 유리코라는 이름의 학생과 함께 언제까지고 전설이 되어 살아남을 거야.”

유리코가 마지막 대사를 뱉었다. 그리고 옥상에서 떨어져 내리는 연기를 하면서 무대는 암전되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관중의 박수와 함께 유리코 님 전설의 이야기는 마지막을 맞이했다.

역시 미즈키의 각본은 대단했다. 지금까지 나는 연습을 계속 빠졌기 때문에 몰랐지만 정말로 좋은 각본이었다. 견고한 구성에 과감한 연출이 들어가 안정감과 동시에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수준 높은 각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학교에서는 미즈키뿐일 것이다.

감탄하여 나도 박수를 쳤다. 불행의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끝났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정말로 뛰어난 각본이었다.

“여러분, 이걸로 괜찮으신가요?”

그런데 갑자기 마이크를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미즈키였다.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결말로 끝나도 정말 괜찮으십니까?”

무대가 암전된 상태에서 미즈키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다.

“유리코 님 전설의 탄생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싶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귀를 막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객석이 술렁거렸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교사와 관계자도 모두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사건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유리코 님 전설이 탄생한 진상을 아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미즈키가 이어서 한 말에 떠들썩한 소리가 일렁였다.

“알고 싶으십니까? 알고 싶으시다면 이야기해드리죠. 하지만 알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 채 팽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돼!”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쓰쓰미가 객석에서 일어나 외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초대 유리코 님이 화를 내실 거야!”

쓰쓰미는 새된 목소리로 호소했다.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유리코 님 전설을 무대에 올린 것만으로도 큰일인데 그 정체를 밝힌다니, 네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비탄이 담긴 말투였다. 하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쓰쓰미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다른 학생 대부분도 쓰쓰미와 비슷하게 두려운 표정이었다. 미즈키는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저는…… 알고 싶어요.”

그러던 중에 1학년 학생이 앉아 있는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몸집이 작은 한 여학생이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손을 들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그 여학생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저는 처음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마쓰자와 유리코의 친구예요. 친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계속 알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에서는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 있어서 계속 말하지 못하고 참아왔어요. 하지만 이제 한계예요. 유리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요. 어째서 유리코가 죽어야만 했는지, 친구로서 알고 싶어요.”

정적이 찾아왔다.

“나도 알고 싶어.”

또 다른 자리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오며 정적을 깼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또 다른 자리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결국 커다란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체육관 안을 가득 채웠다.

“사실은 슬프고 분해.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어.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침묵하고 싶지 않아. 이젠 싫어. 진실을 알려줘.”

커다란 술렁임 속에서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들이 날아왔다. 쓰쓰미는 할 말을 잃고 주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미즈키는 그 광경을 곱씹는 듯한 말투로 정리했다.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진상을 명확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갑자기 조명이 켜졌다. 조명을 받으면서 단상 위에 주연 배우처럼 당당하게 미즈키가 서 있었다. 조명 담당과는 사전에 이야기를 맞춰둔 모양이었다.

“안 돼!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쓰쓰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알고 싶어. 이제 유리코 님의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하며 떠는 건 지겨워.”

“유리코 님 전설 같은 건 이제 끝내.”

다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창백하게 질린 모습으로 쓰쓰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부 밝혀줘. 유리코 님의 정체를 알고 싶어.”

여러 학생의 목소리가 신음이 되어 체육관 안으로 퍼져갔다. 거기에 압도된 듯 쓰쓰미의 목소리는 차츰 작아졌다.

“아, 안 돼. 그런 짓을 했다간 모두에게 불행, 이…….”

쓰쓰미 선배의 몸이 흔들 하고 기울어졌다. 의자에 손을 대고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유리코 님에 대해서 파헤쳐서는 안 돼! 안 된다고.”

마지막으로 단말마의 소리를 외치고 쓰쓰미는 그대로 눈이 뒤집히며 뒤로 쓰러져버렸다.

“들것, 들것을 가지고 와.”

선생님이 허둥지둥 지시를 내렸다. 체육관 안은 혼란스러워졌고 흥분이 끓어오르며 속이 안 좋아진 학생도 생겼다.

“중지, 중지. 발표는 여기서 끝내.”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미즈키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요, 계속하겠습니다. 이 학교를 옭아매고 있는 유리코 님이라는 악한 전설을 끝내지 않는 한 우리 학교에 평화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뭐?” 하고 분노를 담아 소리쳤지만 학생들 대부분이 일어서서 거기에 항의했다.

“계속하게 해줘요.”

“나는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은 입 다물고 있어.”

다양한 말이 쏟아지자 선생님은 꼬리를 내렸다. 체육관 안이 하나의 생물이 된 것 같은 소란은 선생님들도 저지하지 못했다.

“저기, 발표회 시간은 이미 초과했는데요.”

사회를 보는 학생이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마이크 너머로 한마디 하자 모두 일제히 노려봤다. 그 학생은 바로 움츠러들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쓰미가 들것에 실려 나가고 속이 안 좋아진 학생들을 내보낸 후에도 체육관은 진정되지 않았다. 술렁거리는 소란 속에서 미즈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한 일기의 복사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일기는 초대 유리코 님, 말하자면 유리코 님 전설의 시작이 된 학생이 써서 남긴 것입니다. 이번 연극의 각본을 쓰는 데 참고 자료가 되었던 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모두가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단상 스크린이 내려왔다. 그리고 거기에 프로젝터로 문자가 비쳤다. 미즈키는 프로젝터 조작 담당자와도 사전에 준비를 해둔 모양이었다.

“이것이 초대 유리코 님이 쓴 일기의 첫 문장입니다.”

스크린에는 나도 본 적이 있는 문장이 크게 비쳤다. 이렇게 마음대로 공개해도 되는 것인가 싶어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1970년 유리코 일기

6월 1일 월

나는 유리코.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1학년이다.

오늘부터 짧은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이지만 적어도 일기를 쓸 때만큼은 행복을 찾고 싶다. 그래서 행복했던 일은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기록할 생각이다.

“사실 지금 보시는 문장에는 중대한 거짓이 두 가지 있습니다.”

미즈키가 갑자기 지적으로 시작했다.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객석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 거짓이 나중에 커다란 오해를 낳게 됩니다. 일기를 쓴 당사자가 속일 의도로 쓴 거짓이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반칙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속 들어봐야 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튼 이 거짓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죠. 우선은 다음 문장을 봐주십시오.”

스크린의 영상이 바뀌며 다음 문장이 비쳤다.

6월 2일 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름다운 수국을 발견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한참을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었다. 그렇게 웃지 않아도 될 텐데.

“이 문장을 보고 여러분은 위화감을 못 느끼셨습니까?”

미즈키가 묘한 질문을 던졌다. 특별히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일기를 쓴 사람은 유리코입니다. 여고생이 길가에 핀 수국을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웃는 사람이 있을까요? 보통은 흐뭇한 광경일 텐데요.”

그렇기는 하지만 일기를 쓴 유리코가 실제로 들은 말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너무 열중해서 보는 바람에 몸을 앞으로 많이 기울이고 있었다면 자세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다음 문장입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그다음 날의 일기다.

6월 3일 수

같은 반 여자애가 머리를 귀엽게 묶고 있어서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기분 나빠 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걸까?

“이번에는 기분 나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귀엽게 묶은 걸 같은 반 여학생이 본다고 기분 나빠 할까요? 예쁘게 봐주면 오히려 기쁘지 않을까요?”

그 말은 그럴 것도 같았지만 상대가 평소에 불쾌하게 여겼던 학생이라면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다. 특별히 이상한 표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음 문장을 보겠습니다.”

화면이 또 바뀌었다.

6월 4일 목

나는 예쁜 여자아이가 되고 싶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산들바람 같은 미소를 짓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사실이 슬프다.

“이날의 일기는 의미가 깊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자신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미즈키는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미즈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날짜를 조금 더 넘겨보겠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6월 8일의 일기가 나왔다.

6월 8일 월

쉬는 시간에 몰래 『빨강머리 앤』을 읽고 있었는데 반 친구에게 들켰다. 같은 반 아이들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괴로워서 조금 눈물이 흘렀다. 모두가 울보라며 비웃었다.

“『빨강머리 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지적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앤은 원래 수수한 외모로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여자아이입니다. 예쁘지 않은 여학생을 향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어딘가 해석이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도 역시 미즈키가 말하는 위화감인 것일까.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은 이틀분을 동시에 보겠습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6월 9일 화

어제의 분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것도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하여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이 알려진 이상 더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일은 모두가 입을 다물 정도로 앤같이 예쁜 모습으로 학교에 가야지.

6월 10일 수

정성을 다해 꾸미고 학교에 갔다. 앤을 모티브로 한 귀엽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모두의 비웃음을 사고 선생님에게도 몸단장을 제대로 하라며 야단맞았다. 예쁘고 싶었을 뿐인데. 슬프다.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예쁘게 꾸며서 선생님께 주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화려한 차림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앤은 작품 속에서 그렇게 화려한 모습은 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따라 한 정도의 차림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몸단장을 똑바로 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다만 교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요.”

당연히 교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교칙이 엄한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다. 사복으로 등교한다니 히가시다가 보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격노할 것이다.

“또 조금 더 날짜를 넘겨보겠습니다.”

내 생각이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는 사이에 영상이 바뀌었다.

6월 19일 금

결국 괴롭힘이 다시 시작되었다. 반에서 기가 센 여자애가 『빨강머리 앤』을 여자 화장실 변기에 버린 것이다. 나는 당황하며 주우러 갔지만 불결하다며 여자애들이 비웃었다. 『빨강머리 앤』은 말려서 괜찮아졌지만 나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변기에 떨어져 있던 책을 주웠기 때문에 ‘불결’하다, 이런 해석도 할 수 있겠죠. 다만 ‘불결’이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지 않을까요?”

불결의 의미? 너무나 세세한 부분이라 사건의 진상과 관계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미즈키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음도 조금 넘겨보겠습니다.”

또 영상이 바뀌었다.

6월 25일 목

나를 괴롭히는 그 여자애의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오늘은 발밑에 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교복이 흠뻑 젖어서 고생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미운 걸까?

“발밑에 물을 뒤집어썼다, 그래서 교복이 흠뻑 젖었다. 이것도 잘 생각해보면 아주 위화감이 느껴지죠.”

어디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걸까? 나는 역시나 모르겠다.

“그다음도 날짜를 건너뛰겠습니다. 이번에는 이틀분을 한 번에 보시죠.”

7월 7일 화

와타베 선생님이 나를 유혹의 눈빛으로 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여학생들은 징그럽다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나와 선생님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나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7월 8일 수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 손이 스쳤다. 재빨리 피했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올려다본 선생님의 얼굴도 붉어져 있었다. 어쩌면 선생님도…… 기대하게 된다. 주위 사람들은 기분 나쁘다고 말하겠지만 점점 끌리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부분은 교사와 금단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만, 뭔가 이상하죠? 학생 시점에서 교사와의 연애가 ‘징그럽다’고 느낀다? 나이 차이가 나는 걸 징그럽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뿐일까요? 저는 어딘가 의미가 어긋난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뭘까? 이 일기의 해석에 의미가 있는 걸까? 단어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지적하기만 하고 전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 느낌이다.

“그럼 이 정도만 보면 충분하겠죠. 이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대전제부터 틀리지 않았습니까? 그 전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기의 문장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미즈키가 한 말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일기를 쓴 사람이 정말로 여학생일까요?”

객석이 술렁거렸다. 나도 어안이 벙벙하고 한순간 세계가 반전된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러면 일기를 쓴 사람이 남자라는 건가요?”

객석에 앉은 한 여학생이 말하자 미즈키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늘 느낀 것 중 가장 큰 충격을 느꼈다. 설마 그럴 리가.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그럴 리 있나요? 일기를 쓴 사람은 유리코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잖아요?”

다른 여학생이 외쳤지만 미즈키는 냉정하게 화면을 바꿔 일기의 제일 처음 문장을 보여줬다.

“‘나는 유리코’. 제가 앞에서 말했던 ‘거짓’의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남녀 성별 판단을 잘못 인식시키기 위한 이 가명은 말하자면 반칙입니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최초이자 최대의 덫입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라도 여자라고 생각해버린다. 미즈키가 반칙이라고 말하듯 이 이름은 절대적인 효과가 있다.

“일기를 쓴 유리코는 몸은 남자지만 마음은 여자였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유리코라고 해서 자신을 여자라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읽는 사람이 오해를 하게 만들기 위한 속임수입니다.”

이중 덫이었다. 우리는 보기 좋게 그 덫에 걸려버렸다.

“이 두 가지는 솔직히 일기를 읽은 사람을 향한 반칙에 가까운 속임수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여자인 유리코는 분명 남자가 아닌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이런 반칙을 만들어냈겠죠. 다만 반칙은 반칙이므로 그 이외의 부분을 자세히 본다면 그 거짓도 쉽게 간파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미즈키는 다시 스크린의 문장을 바꿨다.

“예를 들어 수국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비웃음을 사거나 다른 여학생의 헤어스타일을 바라보다 기분 나쁘다는 말을 듣는 장면, 이는 이 글을 쓴 사람이 남자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입니다. 남자 고등학생이 수국을 한참 바라보거나 여학생의 머리를 계속 바라보는 광경은 안타깝지만 아직도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나는 예쁜 여자아이가 되고 싶다’, 조금 뒤에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표현에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예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아이가 아니다’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빨강머리 앤』을 읽는 모습을 보고 반 아이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도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빨강머리 앤』은 아직 일반적으로는 여자아이들이 읽는 책이라는 인상이 있으니까요. 『빨강머리 앤』이 여자 화장실 변기에 버려져서 그것을 가지러 간 것에 ‘불결’하다는 말을 듣는 장면도 한번 보시죠. 여기서 말하는 ‘불결’이라는 것은 단순히 변기에 닿아서 불결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걸 비난하여 ‘기분 나쁘다’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 ‘불결’인 것입니다.”

세세한 표현. 하지만 거기에 깃든 위화감을 놓치지 않은 미즈키가 대단했다.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발밑에 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교복이 흠뻑 젖었다, 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스커트 길이라면 ‘발밑에’ 물을 뒤집어쓴다고 해도 젖는 부분은 스커트 끝부분과 양말, 실내화 정도일 것입니다. ‘교복이 흠뻑 젖었다’는 표현을 할 리 없습니다. 이것은 교복이 남학생용인 바지이고 길이가 발목까지 오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입니다.”

이것 또한 세세한 표현에 힌트가 숨겨져 있었다. 미즈키는 내 설명과 아주 잠깐 일기를 본 것만으로 여기까지 꿰뚫어보았다. 훌륭한 관찰안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금단의 사랑을 ‘징그럽다’고 말하는 주위 사람들이나 그 후에 나오는 ‘금단의 사랑’과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에도 위화감이 있습니다. 보통은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라거나 ‘부도덕하다’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맞을 겁니다. 이것은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성 이전에 남자와 남자라는 관계성이 클로즈업된 결과였던 것입니다. 물론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동성 간에 연애를 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남성 간의 연애를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일기가 쓰인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많았을 테니까요.”

그렇구나, 와타베 선생님과 자칭 유리코의 관계는 남자와 남자의 연애였다. 일기를 처음 읽었을 때와 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여기까지 제 설명을 듣고, 여러분은 분명 한 가지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애초에 남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가, 라고.”

앗,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남학생이 있다는 건 이상하다.

“유리코 님이 탄생한 48년 전, 우리 학교는 여학교였습니다.”

객석의 여학생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여학교에 남학생이 있을 리 없다.

“그렇습니다. 이 또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7월 20일 일기를 살펴볼까요?”

미즈키가 지시를 하자 화면이 변했다.

7월 20일 월

오늘은 휴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다. 선생님과 만나지 못하는 만큼 감정이 깊어진다. 하지만 내일 학교에 갔을 때 모든 것이 들통 나 있으면 어떻게 하지. 선생님은 해고, 나는 퇴학당하는 걸까?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휴일’이란 대체 무슨 날일까요?”

갑자기 문제가 나오자 체육관이 술렁거렸다. 한동안 왁자지껄한 후 객석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여학생이다.

“7월의 세 번째 월요일이기 때문에 바다의 날이에요.”

“그렇습니다. 바다의 날. 그렇다면 바다의 날은 언제 생겼을까요? 아시는 분?”

다시 체육관이 술렁거렸지만 이번에는 금방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관계자석이었다. 쉰 살 정도의 품위 있는 느낌을 풍기는 여성이었다.

“바다의 날이 제정된 것은 1995년으로 다음 해인 1996년부터 시행되었어요.”

“정답입니다.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뭐, 그러면 일기를 쓴 때가 1996년 이후라는 건가요?”

객석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내용의 발언이었다.

“그렇습니다. 더욱 자세히 따져보면 이 일기를 쓴 때는 우리 학교가 남녀 공학으로 바뀐 20년 전인 1998년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의외로 최근이잖아. 아주 옛날을 상상하던 나는 마음이 어두워졌다.

“공학이 된 후라면 남학생이 있어도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아주 옛날엔 여학교였으니까 남학생은 없다는 색안경을 벗으면 진실은 쉽게 보입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일기에 같은 반 친구를 여학생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어색하죠. 여학생이라는 표현은 남학생이 있을 때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여학생만 있는 여학교라면 굳이 일일이 여학생이라고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4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선입견이 이렇게 무섭다.

다만 나는 커다란 의문을 안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기의 제일 처음에…….

“하지만 여기서 커다란 벽에 부딪힙니다. 일기 표지와 첫 부분에 ‘1970년’이라고 분명하게 연도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48년 전이라는 시간축이 설정되어 있음에도 이런 어긋남이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뿐입니다.”

미즈키는 연기하는 것 같은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들어 올려 객석 쪽을 가리켰다.

“바로 그 ‘1970년’이라는 기술 또한 쓴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유리코라고 한 것과 함께 허위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객석이 놀란 듯이 술렁거렸다. 유리코라는 이름이 거짓이었던 것에 이어 다시 이렇게 대담한 거짓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이것이 제가 말한 중대한 거짓 중 두 번째 내용입니다. 아마도 의도적이었겠죠. 남자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쓴 사람은 유리가하라 고등학교가 여고였던 시대를 설정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다만 유리코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일기를 읽고 찬찬히 해석했다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일기에는 남녀 공학이 된 후인데도 여학생만 등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가 지금도 여전히 여학생이 강한 풍조인 것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묘사로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공학이 된 후 그다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므로 그 풍조는 더욱 강했겠죠.”

여학생이 강한 풍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문장에 직면합니다. 토요일에 대한 일기입니다. 전부 보시겠습니다.”

미즈키가 프로젝터를 조작하는 학생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화면이 차례차례 바뀌었다.

6월 6일 토

이래서는 안 된다. 일기 내용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좀 더 행복한 일을 찾아 밝은 내용으로 채워야지. 그래,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던 일이라든가. 무척 아름다웠다.

6월 13일 토

계속 일기 내용을 원망과 괴로움으로 채우게 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좀 더 밝은 것을 찾아야지. 소각로에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보고 웃던 여자애와 오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수확이었다. 말다툼이 벌어지긴 했지만 분명 내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6월 20일 토

『빨강머리 앤』을 화장실에 버린 기가 센 여자애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보기 흉하게 고함을 치고 말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을 것이다.

6월 27일 토

나를 괴롭히는 여자애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말다툼을 했지만 서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 기대된다.

7월 4일 토

와타베 선생님이 나를 편애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슬픈 일이다. 그중에 세 건의 사건은 나를 동정한 선생님이 벌인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현장에서 도망친 사람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라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문에 너무 화가 났다.

7월 11일 토

행복하다. 이런 일이 생겨도 괜찮은 걸까? 와타베 선생님께 고백받았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그 자리에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기분 나쁘게 느껴지냐고 선생님이 물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나도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전하자 바로 안아주셨다. 선생님의 마른 몸. 하지만 따뜻했다.

학교에는 비밀로 하고 사귀기로 했다. 들키면 난리가 날 테니까. 감추는 건 속상했지만 선생님이 바란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선생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니까.

7월 18일 토

큰일이다. 어제 키스 장면을 역시나 들킨 모양이다. 모두 겉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소문이 퍼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선생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까. 불안하다.

7월 25일 토

목격한 여학생과 얘기를 나눴지만 평행선이다. 의견이 잘 맞지 않았다. 슬픈 기분이 점점 격해지고 있을 때 선생님한테서 같은 재단의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 측이 그냥 선생님을 놔두지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당연히 선생님이 나를 어디든 데려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태도는 미적지근했다. 나는 버림받는 걸까.

“1998년 이후 주5일제가 도입되어 아무리 못해도 둘째 넷째 토요일은 휴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토요일은 마치 매주 학교 수업이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설마 논리가 깨지는 것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것도 쓴 사람이 읽는 사람을 속이기 위한 장치입니다.” 미즈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단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6월 6일, 6월 20일, 7월 4일, 7월 18일은 문제가 없습니다. 1998년 무렵 주5일제 도입 단계라면 첫째, 셋째 토요일은 수업이 있었을 테니까요. 학교에 간 묘사가 있다고 해도 문제없습니다.”

미즈키가 말한 대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외의 날이다.

“그렇다면 그 외의 날은 어떨까요? 자세히 읽어보면 학교에 갔다는 기술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동급생이나 선생님이라는 학교 관계자와 만났다고 했을 뿐입니다. 단지 만나기만 했다면 굳이 학교 안이 아닌 밖에서 만났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쉬는 날이라도 상관없고요.”

그랬다. 나도 모르게 동급생이나 선생님과는 학교 안에서만 만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일기 내용의 둘째, 넷째 토요일은 휴일이었다고 해도 모순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미즈키가 단언했다. “그리고 둘째, 넷째 토요일의 일기에서 중대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무엇일까? 무대 위에 온 신경이 집중되자 미즈키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애초에 일기를 쓴 유리코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 학생이 쉬는 날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반 친구와 굳이 만난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설마, 나는 지금 느낀 어떤 예감에 몸이 떨렸다. 그렇다면 자칭 유리코는…….

“토요일에 유리코가 만났던 동급생은 휴일이 지날 때마다 부상을 입습니다. 옥상에서 떨어지거나 계단에서 구르거나. 그리고 현장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도망치는 모습이 목격되었죠.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드러나는 진상은 한 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던 남자 고등학생, 그 존재가 겨우 이해되는 부분까지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연이어 발생한 사건의 범인은 유리코 본인이었던 겁니다. 그는 토요일에 자신을 괴롭힌 여학생과 만나 화해하려고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여학생의 뒤를 따라가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유리코를 범인으로 적발하지는 못했겠죠.”

겨우 이해가 되었다. 피해자들은 유리코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 문장도 유리코가 범인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줍니다. 6월 15일, 최초의 사건이 발각된 부분을 보시죠.”

미즈키의 지시로 화면이 바뀌다.

6월 15일 월

소각로 앞에서 나를 보고 비웃었던 여자애가 다쳐서 입원했다고 한다. 동네 도서관의 옥상에 있다가 누군가에게 밀려 떨어졌다는 듯했다. 범인은 젊은 남자로 고등학생으로 보였다고 한다. 다만 얼굴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안심했다.

“여기 마지막에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이라는 표현은 다친 사람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범인이라는 게 들킨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안심했다’는 부분도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안도했기 때문이죠.”

사소한 부분이지만 힌트는 있었다. 거듭 말하는 것 같지만 미즈키는 이런 부분을 정말 잘도 발견했구나 싶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피해자와 이야기를 했고 같은 또래에 비슷한 모습을 한 인물이 도망치는 것이 목격된 후 의심받지 않았을까 신기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쪽을 보십시오.”

미즈키가 손을 들자 이틀분의 일기가 화면에 나왔다.

6월 23일 화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하자 모두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나와 얽히면 다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덕분에 나를 향한 괴롭힘은 거의 사라졌다. 그저 기쁠 따름이다.

6월 24일 수

그런데도 괴롭히는 아이가 있다. 두 번의 사건이 내 탓이라고 여긴 여자애가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며 나를 괴롭힌다. 들으라는 듯이 욕을 하거나 물건을 숨긴다. 내게 평온한 날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나와 얽히면 다친다고 생각한다’, ‘두 번의 사건이 내 탓이라고 여긴다’ 이 말은 유리코가 의심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손을 대면 저주를 받는다는 종류의 의심이 아니라 좀 더 직접적인 내용으로 그를 건드리면 다친다는 의심이었습니다.”

주위 학생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유리코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이런 부분에서도 알아챌 수 있었다.

“다음은 7월 말의 일기입니다.”

미즈키의 목소리를 따라 이번에는 사흘분의 일기가 나왔다.

7월 25일 토

목격한 여학생과 얘기를 나눴지만 평행선이다. 의견이 잘 맞지 않았다. 슬픈 기분이 점점 격해지고 있을 때 선생님한테서 같은 재단의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 측이 그냥 선생님을 놔두지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당연히 선생님이 나를 어디든 데려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태도는 미적지근했다. 나는 버림받는 걸까.

7월 27일 월

충격이다.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의 주선으로 선을 본다고 한다. 선생님도 거절할 수 없는 듯했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까. 우리를 목격한 여학생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것 같지만 솔직히 어찌되든 상관없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는 정보도 내 알 바 아니다. 선생님의 전근과 맞선만이 마음에 걸린다.

7월 28일 화

이제 곧 여름방학이다. 방학이 시작되면 더더욱 선생님과 만나기 힘들어진다. 그전에 이야기를 나눠서 확실히 해둬야 하는데. 하지만 선생님은 요즘 나를 피하신다. 쑥스러워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피한다. 이건 중대한 사태다.

“7월 25일부터 7월 31일까지 살펴보면 마치 학교 수업이 아직 있는 것처럼 쓰고 있지만 이 무렵은 이미 여름방학에 들어간 때입니다. 고등학교의 여름방학은 보통 7월 마지막 주 전에 시작합니다. 마지막 주인 7월 25일 이후에 아직 여름방학이 시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런 허위 내용을 쓴 것은 분명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음에도 7월 25일에 동급생과 만난 걸 얼버무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름방학 기간 중에 사이가 좋지도 않은 동급생과 만나는 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죠. 그 동급생은 직후에 유리코의 계획에 따라 다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여름방학 기간. 그런 부분을 나는 전혀 생각 못 했다.

“참고로 일기 이외의 유리코 님에 관련된 자료 중 20년 전보다 오래된 건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도 당연한 일이겠죠. 공학이 된 20년 전보다 더 옛날에 유리코 님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래된 자료가 없었던 것인가. 공학이 되면서 오래된 자료는 버려졌다는 건 단순히 흰 백합 모임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또 이 일기의 원본은 상당히 낡아서 꽤 오랜 세월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햇볕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기의 원본은 창가 선반에 놓여 있었습니다만,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다른 곳보다 빠르게 색이 변할 겁니다.”

햇볕이 잘 드는 장소에 둔 것은 일기가 오래된 경전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색을 바래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흰 백합 모임에 대대로 전해지는 트릭이었던 것이다. 물론 20년 가까이 지난 후의 멤버인 유리코나 유리는 그런 목적 같은 건 몰랐겠지만.

“여기까지 이야기했지만,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초대 유리코 님은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초대 유리코 님은 괴롭힘을 당한 요인을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하려고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불행’을 내렸습니다. 이건 이번에 일어난 세 건의 사망 사건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화제가 바뀌었다. 그렇다, 분명 유리코 님 탄생도 중요했지만 지금 일어난 사건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번 사건에서 제가 신경 쓰였던 부분은 불에 탄 교복과 셔츠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사건에서는 현장 근처에서 불에 탄 교복과 셔츠가 발견되었습니다. 탈출할 때 로프 대신 사용한 것과 혈흔이 묻은 것 때문에 처리할 수밖에 없어서였습니다.”

여기서 미즈키는 교복 로프와 혈흔에 대한 것, 그리고 붉은 셔츠의 의미에 대해 비로소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청중도 쉽게 이해하는 표정으로 들었다.

“이런 이유로 범인은 옷을 태웠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옷을 태우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입을 옷이 없어집니다.”

모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즈키의 이야기는 서서히 열기를 띠었다.

“하지만 범인은 실제 성공적으로 도망을 칩니다. 대체 어떻게 입을 옷도 없이 도망칠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저는 겨우 찾아냈습니다.” 미즈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중한 모습으로 그 답을 말했다. “범인은 애초에 태운 옷 안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저기, 범인은 사전에 옷을 못 입게 될 걸 예상하지 못했잖아. 그러면 미리 안에 다른 옷을 입어두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질문을 했다. 미즈키가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 범인이 안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건 블라우스, 스커트, 셔츠를 애초에 바로 벗으려고 했기 때문이야.”

객석에 앉은 모든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미즈키에게 항의했다.

“범인은 사실 처음부터 태워버린 옷은 바로 벗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우게 될 걸 미리 알았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벗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복을 바로 벗으려고 했다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객석에서 여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미즈키는 그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변장입니다. 블라우스와 스커트와 붉은 셔츠. 이것을 입고 변장했다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미즈키의 질문에 문득 깨달았다. 그렇구나, 범인이 변장하고 싶었던 모습은…….

“유리코 님이잖아. 범인은 유리코 님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범행을 저지른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미즈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건에서는 현장에서 사라지는 양 갈래로 땋은 머리, 붉은 셔츠,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은 모습의 인물이 목격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리코 님으로 변장한 범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리코 님 모습을 따라 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이 사실이 실마리가 되어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범인은 유리코 님이 직접 벌을 내리는 것처럼 위장하여 천벌 혹은 저주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변장을 했습니다.”

이해가 될 것 같았지만 의문이 생겼다.

“응? 하지만 붉은 셔츠 말고는 교복이니까 입고 있던 그대로로 충분하지 않아? 교복 안에 또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이런 의문을 말해보았지만 미즈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범인은 반드시 안에 옷을 입어야만 했어.” 미즈키는 묵직한 말투로 답했다. “지금까지 일기를 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해왔는지 떠올려봐. 그러면 자연스럽게 범인이 안에 옷을 입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초대 유리코 님이 남자였다는 것……? 그, 그러면 이번 사건도?”

내가 말을 채 끝내지 못하자 미즈키가 이어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도 범인은 남자입니다.”

객석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졌다. 드디어 진상에 가까워진 것이다.

“남자가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는 것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상하게 봅니다. 축제를 위해 변장한 것으로 꾸민다고 해도 누군가가 본다면 강한 인상이 남겠죠. 그래서 범인은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일 때 사람의 기척을 느끼면 바로 벗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래에 바지를 걷어 올려 입는 등 남자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블라우스와 스커트, 셔츠를 태울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없었던 것이다. 범인은 여학생 교복과 붉은 셔츠를 벗어도 안에는 바지와 남성 셔츠를 입고 있으니까.

“안에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은 블라우스 등을 사용하여 로프를 만들거나 피가 묻은 옷을 쉽게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안에 남성용 옷을 입고 있었던 덕분에 나온 대담한 발상이었습니다.”

안에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범인은 그 우연을 잘 이용했다.

“교복을 태운 것도 첫 번째 범행에서는 로프로 묶은 부분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서는 첫 번째 범행에서 옷을 태웠던 것에 대해 수상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공작이었습니다. 두 번 연달아 태운다면 로프 대신이라는 발상에서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혈흔 같은 흔적이나 모발 같은 증거를 태워버려 소유자를 특정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 끝에 나온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의미 없이 태운 것이 아니라.

“범인의 변장은 완벽했습니다. 피해자 두 사람이 유리코 님에게 당했다고 말을 남길 정도로 확실하게 유리코 님으로 변장했으니까요. 붉은 셔츠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블라우스,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라면 누구라도 유리코 님을 상상하겠죠. 아, 양 갈래로 땋은 머리는 물론 가발입니다. 또한 최초의 피해자인 마쓰자와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범행 당시에 유리코 님의 이름으로 쓴 편지를 받고 불려나갔을 테니 피해자는 한층 더 착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편지는 범행 당시에 범인이 회수했겠죠.”

유리코 님에게 당했다는 것은 유리코 님의 모습을 한 사람에게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범인은 남자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문제는 그 남자의 정체입니다.”

드디어 범인을 특정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두 번째 사건에서 범인의 목격 증언입니다. 범행 직후 블라우스, 스커트, 붉은 셔츠 차림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인물이 특별동 4층으로 계단을 올라갔다고 3층에 있던 학생이 증언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의문을 느낄 때 미즈키가 그 부분을 지적했다.

“특별동 4층에는 연결 복도가 없고, 계단은 복도 한쪽에만 있습니다. 즉 통로가 계단 하나뿐인 막다른 길입니다. 게다가 위로 가려고 해도 옥상 문은 엄중하게 잠겨 있어 열 수 없습니다. 독 안에 든 쥐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상태죠. 그런데도 어째서 범인은 정원이나 건물 뒤편으로 나갈 수 있는 복도와 계단이 있는 특별동 1층 쪽으로 도망가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막다른 곳인 특별동 4층을 향했을까요? 거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객석에 앉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술렁거리며 각자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저기, 특별동 1층으로 내려가면 다른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위로 도망간 것이 아닌가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현관에 가까워서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객석에서 의견이 나왔다. 그렇구나, 싶었지만 미즈키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피가 묻은 웃옷을 벗으면 아래에는 범행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남성용 옷을 입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범인은 왜 막힌 길인 특별동 4층으로 올라갔나요?”

질문이 날아들었다. 미즈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특별동 3층에서 범인을 목격한 사람은 뒤를 쫓아갔지만 범인을 놓쳤다고 했었죠?”

느닷없이 지목을 받은 여학생은 당황했다. 그녀가 고민에 빠진 사이에 미즈키가 이야기를 이었다.

“특별동 4층으로 가는 통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퇴로가 막힐 것이 분명한데 목격자가 범인을 놓쳤다는 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향한 장소를 좁힐 수 있습니다.”

여학생은 여전히 곤혹스러워했지만 미즈키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설명했다.

“목격자가 범인의 모습을 놓쳤다는 건 4층의 교실 어딘가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안쪽에서 문이 잠겨 있으면 목격자가 교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을 테니까요.”

힘이 들어간 발언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며 잠시 틈이 생겼다.

“저기, 특별동의 각 교실은 문이 잠겨 있어서 애초에 열 수 없었을 텐데요.”

손을 든 여학생이 지적했지만 미즈키는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것이죠.” 미즈키는 숨을 뱉고 이어지는 추리를 펼쳤다. “그러면, 범인은 4층 교실 중 어딘가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쇠가 있으면 도망칠 장소가 있겠죠. 범인은 특별동 4층에 도망칠 장소가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굳이 막힌 길인 특별동 4층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열쇠는 직원실에 있다. 어떻게 교사들의 눈을 피해 열쇠를 가지고 갔을까?

“이 사실을 조합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앞에서 설명한 교복으로 만든 로프를 사용한 탈출에 대한 것입니다. 전혀 생각도 못 하게 옥상에 갇힌 범인은 순간적인 기지로 교복으로 로프를 만들어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탈출 경로로 사용한 화학 준비실의 창문이 닫혀 있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옥상에서 4층의 어느 창문이 열려 있는지는 각도상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아래의 창문이 열려 있길 바라며 로프를 붙잡고 뛰어내리는 일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미즈키가 일기를 읽기 위해 로프로 뛰어내릴 때 분명 바로 아래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

“결론은 이제 한 가지입니다. 범인은 창문이 열려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좀 전에 이야기한 열쇠에 대한 것과 겹쳐지며 전혀 보이지 않았던 범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선명해졌다.

“유리코 미사키 선배, 계십니까?”

갑자기 미즈키가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를 지명했다.

“계신다면 자리에서 일어서주십시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객석이 술렁거린 후에야 앞쪽 3학년 자리에 앉아 있던 유리코가 일어섰다. 기분 탓인지 깡마른 몸은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코 선배, 화학 준비실의 창문이 열려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미즈키가 질문하자 유리코는 몸을 자신의 팔로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흰 백합 모임의 멤버인 저와 유리, 다카미자와 선생님, 그리고 저희 모임을 찾아온 야사카 유리코뿐이에요. 약품 냄새 때문에 열어둬야 한다고 다카미자와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교칙상 창문을 계속 열어두면 안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단속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범인은 창문이 열려 있는 걸 알고 있던 그 네 명 중 누군가가 되겠네요.”

미즈키는 객석을 한 번 둘러보았다. 2학년 자리에 있는 유리, 직원 자리에 있는 다카미자와 쪽으로 시선을 보낸 것 같았다.

“열쇠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범인은 두 번째 범행 후 열쇠를 사용해 화학 준비실로 도망친 것 같은데요.”

“열쇠는 다카미자와 선생님이 관리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와 유리는 직원실에서 자유롭게 가지고 나올 수 있는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세 사람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열쇠를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범인은 유리코 선배, 유리 선배, 다카미자와 선생님 셋 중에 누군가로 좁혀지겠네요.”

체육관에 팽팽한 긴장감이 퍼졌다. 드디어 범인이 밝혀진다는 긴박한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블라우스와 스커트 안에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범인은 남성입니다. 여성인 유리코 선배는 제외되겠죠. 그러면 남은 사람은 유리 선배와 다카미자와 선생님. 이 두 사람 중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 불에 탄 블라우스와 스커트입니다.” 미즈키는 객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교복을 손에 넣는 방법입니다만, 작년 겨울 유리코 님에게 반항했던 여학생의 교복이 체육 수업 중에 사라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명 그 사건은 이번 범인이 훔친 것입니다. 자신이 입을 교복을 갖고 싶어도 남자라서 구입할 수 없는 범인은 여학생 교복을 훔쳐서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사건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살인 사건이 이어지면서 기억이 옅어져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옷 사이즈입니다. 사이즈가 작으면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여학생 교복을 훔친 것도 범인 자신이 입기 위해서였던 이상 사이즈도 확실히 확인했을 것입니다. 체육 수업 중에 교실에 있는 여러 벌의 교복 중에 선택해 훔친 거라서 사이즈는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겠죠. 그렇다면 도둑맞은 교복은 범인에게 딱 맞는 사이즈였을 것입니다.”

교복의 사이즈……. 어쩐지 미궁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

“불에 탄 교복 사이즈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얻은 정보에 따르면 M 사이즈였습니다. 여학생 교복의 사이즈이므로 남학생 사이즈로 생각해보면 상당히 작은 S 사이즈에 가까울 것입니다.”

역시 그렇다. 그러면 범인은 좁혀진다.

“남성 S 사이즈. 상당히 몸집이 작은 사람에게 맞는 사이즈죠. 그러면 여기서 범인 후보인 유리 선배와 다카미자와 선생님을 보시죠. 선생님은 키가 커서 아무래도 S 사이즈는 입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유리 선배는 작은 몸집이라 가능할 것 같네요.”

체육관 안이 시끄러워졌다. 이것으로 범인은 한 명으로 좁혀진 것이다. 미즈키는 그를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도둑맞은 교복을 분명히 입을 수 있는 인물은 유리 코타로 선배뿐입니다.”

객석의 시선이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 난 유리가 있는 쪽으로 모였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할 말을 잃었다.

“내, 내가 범인이라고? 농담하지 마.”

유리는 머리를 긁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미즈키는 가차 없었다.

“아니요, 범인은 유리 선배입니다. 창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열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 작은 사이즈의 옷을 입을 수 있는 남성.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선배뿐입니다.”

빈틈없는 지적에 유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건 분명한 명예 훼손입니다. 애초에 교복 사이즈 같은 건 아무 상관없잖아요.”

“상관없지 않습니다. 큰 것은 작은 것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L 사이즈같이 큰 사이즈라면 다카미자와 선생님도 유리 선배도 입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S 사이즈같이 작은 사이즈는 몸집이 작은 선배는 입을 수 있어도 키가 큰 다카미자와 선생님은 입을 수 없으니까요.”

유리는 입을 딱 벌리고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목격자가 범인은 작은 몸집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시점에서 봐도 범인은 유리 선배밖에 없어요.”

이제 유리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모두가 하게 되었다. 비난이 담긴 날카로운 시선이 무수히 쏟아졌다.

“또한 이건 야사카 유리코의 목격 증언입니다만 첫 번째 사건 후 임시 휴교가 풀린 첫날 화학 준비실에 가보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직후에 유리 선배가 열쇠를 갖고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도 분명 있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미즈키에게 이야기했었지만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그게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죠?”

아니나 다를까 유리는 싸울 기세로 말을 했다. 하지만 미즈키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했다.

“이상하죠. 보통 문이 잠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열쇠로 문을 연 후일 테고, 그 열쇠를 가진 사람은 방 안에 있어야 합니다. 등 뒤, 즉 밖에서 열쇠를 가지고 나타났다는 건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럴까요. 확실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화장실에 가는 사이에 신경 써서 열쇠를 가지고 나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문을 잠그고 갔겠죠.”

유리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나마 변명할 거리가 있었겠지만,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시점에서 본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합니다.”

“그러면 왜 저는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을까요? 설명해보세요.”

유리의 질문은 내 질문이기도 했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제 생각으로 선배는 그때 화학 준비실에 막 도착했을 텐데요. 아닌가요? 막 도착해 안을 들여다봤을 때 먼저 온 유리코가 안에 있었던 겁니다.”

그렇구나, 싶었지만 금세 아니, 다르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제가 그때 도착한 거라면 문은 잠겨 있었을 겁니다. 야사카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었어요.”

유리의 반론은 타당했다. 하지만 미즈키는 냉정하게 되받아쳤다.

“문은 잠기지 않은 채로 열려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이 있었던 저녁부터 말이죠.”

어째서? 의문을 느꼈지만 미즈키가 바로 설명해주었다.

“범인은 예측하지 못한 사태로 옥상에서 교복을 로프로 사용하여 화학 준비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잠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옵니다. 하지만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는 문을 잠그지 못했던 겁니다.”

앗, 하고 놀랐다. 그랬다. 화학 준비실로 탈출하는 건 결코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였기 때문에 범인은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범인이 탈출한 직후에는 사건이 발각되어 많은 선생님들이 옥상에 가까운 4층에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죠. 열쇠를 가지고 문을 잠그러 돌아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범인은 휴교가 풀린 첫날에 문을 잠그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이 잠기지 않은 화학 준비실에 야사카 유리코가 먼저 들어가 있던 것은 범인은 생각도 못 한 일이었겠죠.”

그 순간에 그런 의미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열쇠를 가지고 준비실에 갔을 뿐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죠. 다른 누군가 문을 열어놓은 화학 준비실에 우연히 자신이 열쇠를 가지고 갔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 경우는 문이 열려 있었던 부분을 왜 지적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해주셔야만 합니다.”

미즈키가 퇴로를 완전히 막았다. 유리는 도망칠 곳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두 번째 사건을 저질렀을 때에는 처음부터 화학 준비실로 도망칠 생각으로 열쇠를 가지고 있었겠죠.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있었던 첫 번째 사건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화학 준비실의 열쇠라는 핵심 아이템이 선배의 범행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미즈키의 매서운 추리에 유리는 몸을 떨었다.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말도 안 돼. 저는 범인이 아니에요.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대로 잊어버렸을 뿐이에요.”

유리는 적당히 웃어넘기려는 듯 말했지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그가 범인이 분명했다.

“그렇습니까?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범인은 유리 선배입니다.”

“어째서 그렇죠?”

유리는 달려들 것처럼 말했지만 미즈키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관계자 이외에 보여준 적이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유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없습니다. 그 일기는 관계자 외에는 볼 수 없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유일한 예외가 유리코 님 후보인 야사카 유리코였어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역시 범인은 선배입니다.”

유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되는 거냐고 항의하려는 듯한 동요가 표정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세 건의 사망 사건에서 피해자가 죽은 방식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으십니까? 옥상에서 추락, 계단에서 굴러떨어짐, 머리 위로 물건이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나오는 상해 사건의 피해자가 다치는 방식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체육관이 술렁였다. 유리의 창백한 얼굴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죠? 유리코 님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증명되었을 뿐이잖아요.”

유리가 반항하는 아이처럼 울부짖으며 말했지만 미즈키는 바로 반박했다.

“아니요, 범인은 신봉하는 초대 유리코 님의 방식을 따라 살인해 유리코 님을 숭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사상이 느껴져요.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면 범인이 일기를 읽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일기를 읽은 사람은 선배 말에 따르면 흰 백합 모임의 멤버인 유리 선배, 유리코 선배, 다카미자와 선생님, 그리고 예외적으로 읽은 야사카 유리코뿐입니다. 그중에서 남자이면서 작은 사이즈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유리 선배뿐이에요.”

어떻게 따져봐도 유리가 범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나는 아니야. 나는 하지 않았다고.”

유리는 도움을 청하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모두 떼쓰는 아이를 떼어놓으려는 것처럼 모른 척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유리의 주위가 텅 비었다.

“아냐. 오해야. ……그렇지, 지금 한 이야기는 억측일 뿐 물증은 없잖아.”

번쩍 생각이 들었는지 유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물증이 없다는 건 미즈키도 고민하던 부분이라서 나는 걱정이 되었다. 미즈키는 유리를 추궁할 만한 물증을 찾아냈을까?

“물증 말이죠. 안타깝게도 그건 없습니다.”

하지만 미즈키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뭐? 그러면 체포할 수 없잖아.

“뭐야, 물증도 없이 나를 의심했단 말야? 너무하는군. 여러분, 이것은 중대한 원죄입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만으로 제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어요.”

유리는 승리한 것처럼 가슴을 폈다. 곤란해졌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체육관 안에는 유리의 말을 듣고 원죄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바뀐 사람도 있었다.

“그럼 죄를 뒤집어씌운 것에 대해 이 자리에서 사죄해주시죠.”

이대로라면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미즈키가 틀릴 리 없으니까 범인은 틀림없이 유리일 텐데.

“물증이 없으면 죄를 묻지 못한다, 과연 그럴까요?”

미즈키의 중얼거림에 체육관이 술렁거렸다.

“물증과 비슷한 정도로 죄를 물을 때 중요시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미즈키가 말을 이었다.

“자백입니다. 자백을 하면 우선 체포되고 재판에서도 중요한 증거로 다뤄집니다.”

“내가 자백을? 할 리 없잖아? 내가 한 일이 아니니까.”

예상한 대로 유리가 부정했다. 아, 이대로는 무리다.

“아니요, 선배는 자백할 것입니다. 제 한마디에 마음이 변할 테니까요.”

그리고 다음 미즈키가 한 말 한마디에 유리의 표정은 굳었다.

“유리 선배, 저는 당신의 범행 동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유리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붉은 기운이 되돌아왔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도대체 왜 선배가 범행을 저지를 때 무리해서 여학생 교복을 입었는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려드릴까요?”

“그, 그만둬. 그것만은.”

유리는 휘청거리며 괴로워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미즈키가 알아낸 동기란 무엇일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배는 이번 사망 사건 세 건의 범인이죠? 세 여학생을 일기에 나오는 방법 그대로 죽였잖습니까?” 미즈키가 묵직한 말투로 물었다.

유리는 몸을 아래를 향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 가…….”

쉰 목소리가 나왔다.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으로 유리는 쓸쓸하게 말했다.

“제, 가, 세 여학생을, 죽였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혼란으로 체육관 안이 술렁거렸다. 모두 충격에 눈을 크게 뜨고 옆에 있는 사람들과 소란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한 말, 틀림없죠?”

미즈키가 묻자 유리가 고개를 푹 떨구고 대답했다.

“틀림없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생각도 못 한 형태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중요한 동기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유리의 자백이라는 움직이기 힘든 증거가 생겼다. 게다가 그 말을 체육관에 있는 몇 백 명이 들었다. 유리가 자백을 번복하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증인이 있으면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미즈키는 이것을 노려 축제라는 자리에서 유리를 추궁한 게 아닐까? 물증이 없어 고민하던 중 자백을 유도하고 그 말을 모두가 듣게 하는 대안을 떠올리고 실행했다, 그런 것일까?

자백만 있으면 경찰이 움직일 것이다. 경찰이 움직이면 우리가 찾아낼 수 없는 물증도 분명 찾아낼 것이다. 역시 미즈키는 대단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 유리 선배, 가실까요.”

갑자기 미즈키가 단상에서 뛰어내렸다. 스커트를 휘날리며 착지한 미즈키는 그대로 유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둘이서 이야기하죠.”

미즈키는 유리의 팔을 잡고 웅성거리는 객석 사이를 헤치며 체육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 잠깐만. 동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수많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미즈키는 유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허둥거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지켜봐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미즈키는 유리를 데리고 체육관에서 특별동으로 건너가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나갔다. 미즈키는 이번에도 미리 통자물쇠를 바꾸는 트릭을 사용했는지 미즈키가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렸다.

“여기라면 아무도 듣지 못할 거예요.”

내가 옥상으로 나가자 미즈키가 말을 꺼냈다. 미즈키 앞에 선 유리는 부서진 펜스를 뒤에 두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미즈키가 단호한 말투로 요구했다.

“어째서 얘기해야 하지? 나는 이미 자백했어. 그걸로 이미 충분하잖아. 굳이 동기까지 밝히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미즈키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필요합니다. 오히려 동기를 아는 게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더 이상 유리코 님의 이름을 빌린 인위적인 ‘불행’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망 사건으로 발전한 유리코 님의 ‘불행’은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동기를 밝혀야 범인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해석하고 원인을 따져서 미래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어쩐지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유리 선배, 선배는 학교 내에서 상상으로 부풀어 올라 거대해진 유리코 님이라는 존재에 현혹되었고, 그 이름을 빌린 범행을 저질렀어요. 이제 끝내야 해요. 실체가 없는 유리코 님의 망령에 계속 휘둘리는 건 어리석다고요.”

미즈키는 심혈을 다해 유리 선배를 설득했다. 유리는 그 기세에 눌렸는지 입을 다물었다. 주먹을 꽉 쥐고 옥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직접 동기를 밝혀볼게요.”

유리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미즈키가 말을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와 미즈키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유리 선배, 선배는 초대 유리코 님과 같은 게 아닌가요?”

미즈키가 이 말을 한 순간 문득 바람이 약해졌다. 조용한 무풍 상태에서 유리의 어깨가 순간 떨렸다.

“무슨 의미지?”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유리는 모든 걸 이해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즈키가 전부 꿰뚫어봤음을 알아챈 것이다.

미즈키는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예요. 여자의 마음을 가진 남자였던 초대 유리코 님, 그와 마찬가지로 유리 선배도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요?”

나는 멍해졌다. 유리가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선배가 유리코 님을 신봉한 건 자신이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에요. 일기를 읽고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챈 선배는 초대 유리코 님의 마음을 알고 깊은 동정과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전에 말했던 괴롭히는 학생에게 불행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존경의 이유도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괴롭히는 학생에게 불행을 내린 것이 신봉하기 시작한 이유일지 모르지만 마음에 깊이 두게 된 것은 역시 초대 유리코 님의 본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리는 변함없이 창백한 얼굴이었다. 여드름이 가득한 턱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선배는 유리코 님을 존경하고 신봉했습니다. 우러러 숭상할 정도의 깊은 존경은 결국은 자신도 그 존재와 동화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변해 언젠가부터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겠죠. 자신도 유리코 님이 되고 싶다고.”

유리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던 나는 너무나 놀랐다.

“선배는 유리코 님이 되고 싶었죠. 하지만 유리코 님은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만이 될 수 있습니다. 선배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원래 초대 유리코 님은 남자이고 이름도 유리코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원통한 마음이 분노로 변하고 결국에는 증오로 변모했습니다. 증오의 대상은 유리코 님 후보자들이었죠?”

이제 이야기는 이번 연쇄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유리코 님 후보가 연달아 죽은 이 사건의 동기가 드디어 분명해지고 있었다.

“자기와 같은 사람의 고뇌를 모르면서 그저 이름만으로 유리코 님 후보에 오른 자들. 간절히 원하지만 결코 유리코 님이 될 수 없는 선배에게 그런 후보자들의 모습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자연스레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겁니다.”

유리의 어두워진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추기 힘들 만큼 비틀어진 마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선배 자신이 유리코 님이 되고 싶었지만 후보자들이 방해가 되었을 거예요. 후보자가 있는 한 유리코의 이름을 갖지 못하는 남자인 선배는 절대 유리코 님이 될 수 없습니다. 후보자를 전부 죽여 빈자리가 된 유리코 님 자리에 앉는 것만이 선배의 소망을 성취하는 방법이었겠죠.”

방해가 되니까 죽인다니, 너무나 극단적인 발상이었다. 그런 발상이 떠올랐을 때 유리의 정신은 건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보자가 한 명도 남지 않은 일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의 규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규칙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배는 후보자를 전부 제거하고 그 후 규칙을 독자적으로 바꿔 남자도 유리코 님이 될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유리의 뺨에 땀이 흘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눈에도 그 땀방울이 크게 비쳤다.

“후보자들에 대한 증오와 후보자를 전멸시킬 필요성, 그 두 가지가 선배의 범행 동기입니다. 자연히 떨어져나갈 가능성에 맡겨두지 못한 건 그저 증오 때문이겠죠. 자신의 손으로 벌을 주는 것에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을 꽉 쥔 유리의 주먹이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선배는 마음이 여자라는 특성 때문에 자신이 상당히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전부 마음이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자신의 성정체성이 흔히 말하는 사회의 일반 ‘상식’과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겠죠.”

미즈키는 동정을 보이는 듯 살짝 다정한 말투로 변했지만 곧 다시 눈빛이 엄해졌다.

“그럴 때 만난 구세주가 유리코 님이었습니다. 선배를 향한 이유 없는 괴롭힘, 괴롭히는 학생에게 불행을 내려 자신을 지켜주는 유리코 님. 그 존재에 관심이 생긴 선배는 흰 백합 모임을 알게 되고 방문합니다. 우연히도 이름 덕분에 가입이 허용되어 일기를 읽습니다. 그리고 일기의 문장을 통해 초대 유리코 님이 자신과 같은 여자의 마음을 가진 남자였다는 걸 알고는 순식간에 빠져들었습니다. 유리코 님이 되면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을 전부 불행하게 만들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선배는 살인이라는 허락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원인을 밝히자면 초대 유리코 님이 내린 ‘불행’도 그가 가진 여자의 마음을 무시한 자들에 대한 복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번 사건은 초대 유리코 님이 일으킨 사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떤가요, 여기까지 설명해도 여전히 틀렸다고 하실 건가요?”

미즈키가 유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유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푹 숙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야. 그런 동기 같은 건 없어.”

“아니요, 있어요.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선배의 동기는 그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어요.”

“나는, 나는…….”

유리는 쓰러지듯 옥상 바닥에 주저앉아 거의 기는 자세로 미즈키 앞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나는, 아니야. 여자의 마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 얼마나 싫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유리에게 미즈키는 엄한 말투로 경고했다.

“선배 탓에 초대 유리코 님이 멸시받아도 괜찮아요?”

유리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바닥을 기어가는 자세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초대 유리코 님이 멸시받는다니…… 무슨 말이지?”

어리둥절해진 유리에게 미즈키는 타이르듯 말했다. “초대 유리코 님과 선배는 같은 상황이에요. 하지만 초대 유리코 님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지만 살인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것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걸 초대 유리코 님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균형 감각을 학생들은 모두 내심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전설이 이어져왔을 리 없어요.”

분명히 불행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믿은 면도 있었지만 마음 어딘가 우리는 유리코 님을 영웅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리코 님은 남을 괴롭히는 인간을 따끔하게 혼내줘서 그 행동을 그만두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배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습니다. 생명을 셋이나 빼앗은 거예요. 그 일은 전교 학생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했고, 존경하는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유리코 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건 틀림없겠죠. 선배가 택한 살인이라는 경솔한 행동이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쌓아왔던 유리코 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한순간에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런…….”

유리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상반신만 일으킨 자세에서 그는 다시 쓰러질 것 같았다.

“선배 탓에 사람들은 초대 유리코 님도 선배와 동일하게 생각할 거예요. 극악무도하고 인정사정없는 살인마, 라고요. 모든 것은 선배 탓이에요. 본인 스스로 그토록 존경하던 초대 유리코 님을 사람들이 멸시할 거예요.”

유리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창백해져 민달팽이 같아진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래서는 안 돼. 초대 유리코 님이 멸시받는다니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

유리에게 초대 유리코 님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멸시받는다고 하니 동요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하면 초대 유리코 님의 신뢰를 되돌릴 수 있을까?”

흔들거리면서 일어선 유리가 물었다. 그러자 미즈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세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유리는 깜짝 놀라 얼굴빛이 달라졌다.

“지금 이대로라면 선배는 단지 냉혹한 살인마일 뿐이에요. 초대 유리코 님도 동일하게 보이겠죠. 하지만 선배가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그동안 얼마만큼 괴로운 고민을 안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면 초대 유리코 님을 보는 시각도 달라질 거예요.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뇌하는 한 사람이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초대 유리코 님도 불길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남자이면서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고뇌, 그게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밝히면 선배는 초대 유리코 님을 구할 수 있어요.”

유리의 얼굴에 붉은빛이 살짝 돌았다.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선배는 동기를 말해야만 해요. 초대 유리코 님도 역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한 초대 유리코 님은 영원히 저주스러운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미즈키가 최후통첩을 하듯 말했다.

유리는 할 말을 잃고는 우두커니 서서 팔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나는, 유리코 님과 마찬가지야. 남자이면서 여자의 마음을 갖고 있지. 남자로 태어난 것이 괴로워 어떻게 해서라도 유리코 님이 되고 싶어서 살인을 저질렀어.”

드디어 자백을 이끌어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픈 자백이었다.

“경찰에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러면 유리코 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도 돌아올 거예요.”

가까이 다가온 미즈키가 유리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유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선배도 괴로우셨죠. 단지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 하다못해 옷도 성별에 따라 단추를 다른 방향으로 잠그잖아요. 그런 불행이 쌓이고 쌓여서 선배를 구석으로 몰아넣었겠죠.”

미즈키의 위로에 유리는 어깨를 떨었다. 지금까지 그가 견디며 억눌러왔던 것이 흘러나오는 모양이었다.

“처음 내 마음을 자각한 건 중학생 때였어. 축제에서 반 전체가 여장을 했을 때 굉장히 마음이 편안했던 것이 계기였지. 아, 나는 이런 존재였구나. 그걸 깨닫자 더 이상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어. 남자인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나를 남자로 보는 모든 인간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어. 가족과 반 친구들에게 날이 서기 시작했고, 결국 야단을 맞거나 따돌림을 당했어. 스트레스로 얼굴에는 여드름이 심각하게 나서 이렇게 끔찍한 자신에 대한 혐오가 더욱더 아름다운 여성을 동경하게 만들었지. 고독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여성’인 자신이 점점 커졌으니까. 고등학생이 된 무렵에는 다른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어려워졌어.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기분이었지. 나는 다만 모두가 나를 여자로 봐주길 바랐을 뿐인데…….”

울먹이던 유리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오열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이것으로 끝났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소란스럽게 했던 연쇄 살인 사건. 그 종언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 마지막은 괴롭고 안타까웠다. 적어도 세상을 떠난 세 사람이 편안하게 잠들길, 범인인 유리에게도 구원이 찾아오길, 나는 마음 깊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랬어.”

그때 화난 목소리가 날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계단실 문 앞에 쓰쓰미가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타오르는 듯한 붉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분명 체육관에서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정신을 잃고 들것에 실려 갔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쓰쓰미는 똑바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유리코 님 후보 세 명을 죽인 살인범과 함께 옥상에 갔다는 말은 사실이었구나?”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멱살을 잡혀 당황스러웠다.

“야사카, 네가 이 남자에게 명령해서 유리코 님 후보를 죽인 거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보이는 쓰쓰미를 앞에 두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유리코 님이 되고 싶은 거야? 다음 차례는 나인가? 나를 죽이는 방법을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쓰쓰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날 죽이게 둘 것 같아? 내가 먼저 널 죽일 거야.”

쓰쓰미는 나를 펜스로 밀어붙였다. 바로 옆에는 부서져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었다. 쓰쓰미는 부서진 펜스 쪽으로 내 몸을 틀었다.

“그만둬! 유리코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미즈키가 외쳤지만 쓰쓰미는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내 몸은 점점 구멍 쪽으로 끌려갔다.

“나는 네 죽음을 끝으로 유리코 님이 될 거야. 유리코 님의 자리는 넘기지 않겠어.”

손가락 끝이 부서진 펜스 끝에 닿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며 손가락에 따뜻한 뭔가가 느껴졌다. 피다. 죽은 유리코 님 후보 세 사람이 흘린 피가 떠올랐다. 나도 똑같이 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일기 내용에서 나온 네 번째 불행도 벼랑이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건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옥상이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 걸까?

몸이 펜스에 뚫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움직였다. 쓰쓰미의 무서울 정도로 놀라운 힘에 밀려 내 몸은 펜스 틈으로…….

“유리코!”

그대로 거꾸로 떨어지겠다 싶은 순간에 미즈키가 나를 끌어올렸다. 몸의 절반이 펜스 밖으로 나가 있어서 조금만 늦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다행이다. 이렇게 안도하자마자 바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미즈키가 떨어지려던 나를 끌어올릴 때 밀어뜨릴 대상을 잃은 쓰쓰미가 스스로 뛰어내리는 꼴로 펜스 틈으로 몸을 내밀어버린 것이다.

“아앗.” 미즈키가 하얗게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쓰쓰미는 벽도 없는 옥상 끝에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쓰쓰미 선배!”

당황하여 펜스 너머로 내려다보자 저 멀리 아래에서 쓰쓰미는 사지를 펼치고 위를 바라보며 쓰러져 있었다. 축 늘어진 양다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결국 유리코 님의 ‘불행’은 현실이 되었다. 유리의 범행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 사태에 나는 유리코 님의 무서운 힘을 통렬히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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